4. 세 차례 결의
윤한봉이 김정길의 제안을 물마시듯 쉽게 받아들인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윤한봉은 예감의 청년이었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그에 따라 실천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누구의 연설에 감복되어 그에 따라 실천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에 매우 솔직하였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예감대로 행동하였다.
최초의 결의는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온 그날 저녁이었다. 전남대 의대 부근 금동의 어느 골목집에서 여동생 윤경자와 함께 자취를 하던 시절이었다. 옆방에는 일단의 대학생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밥을 먹고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것이다. 북괴의 남침야욕 운운...총력안보 운운...한국적 민주주의 운운...국회 해산 운운...1968년 삼선개헌을 하고,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정 선거를 동원하여 김대중을 힘들게 누른 박정희. 이제 거추장스런 선거도 없애고, 국회도 없앤다. 독재의 노골적 선포인 유신헌법 앞에서 양심이 있는 자,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에 있어야 할 것인가? 윤한봉은 공부하던 전공서적을 찢어버리고, 보던 영어사전을 볼펜으로 찍어버렸다. 분노한 청년 윤한봉은 선언한다. “오늘부터 공부는 끝이다. 국민을 버러지 취급하는 저 독재자, 나는 싸운다.”
다른 학생들은 투쟁의 결의를 부모님께 감춘다. 반대할 것이 뻔한데 알려드려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청년 윤한봉은 또 이상한 짓을 한다. 맨 먼저 아버님께 자신의 결의를 밝힌다. ‘아버님, 나는 이제 독재정권과 싸우렵니다.’ 아버지 윤옥현도 대단하다. 공부 그만하고, 투쟁에 나서겠다는 아들의 결의를 말리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믿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이였다. 이후 아들은 투옥되고, 아버지는 아들의 투옥에 절망하여, 그 길로 세상을 하직한다.
최초의 깨달음은 옥중에서 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윤한봉은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중생활을 하였다. 창비에서 출간한 다산의 <시문선>이 윤한봉의 손에 들어왔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온 것이 1801년이고, 합수가 칠량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시기가 1960년이므로 둘 사이엔 160년이라고 하는 적지 않은 세월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강진의 다산초당이 자리한 율동 마을은 윤한봉의 칠량 마을 건너편 동네였다.
강진 칠량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구강포의 정자를 다산이 좋아하였는데, 이 사실을 안 유홍준은 구강포에서 내려다 본 칠량 앞 바다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 청중들에게 슬라이드로 보여주곤 하였다. 1988년 즈음이었다. 미국의 한청련 회원들에게 유홍준은 습관처럼 또 구강포 앞 바다 풍경을 상영하였다. 유홍준은 그 바다를 보고 윤한봉이 훌쩍훌쩍 울게 될 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단다. 그 바다가 윤한봉이 어렸을 적 대화를 나누었던 그 바다였다. 역사는 새끼줄처럼 꼬여서 이어지는 것인가? 다산도 가고, 조선 왕조도 갔지만, 다산의 숨결은 새끼줄처럼 꼬여 강진의 한 청년에게 이어졌으니, 그 새끼줄은 바로 다산의 <시문선>이었다.
윤한봉은 다산의 ‘애절양’을 읽었다. 탐관오리들의 늑탈에 신음하는 백성의 원성을 들었다. 윤한봉은 다산의 시에 묘사된 백성들의 궁핍을 보면서 자신의 나태한 생각을 반성한다. 그 깨우침은 죽비처럼 매서웠다. 윤한봉은 어려서부터 꿈이 있었다. 칠량의 들과 밭을 매입하여 자신만의 전원을 꾸린다는 것이다. 호수엔 나무로 이은 뗏목을 띄우고, 뗏목에서 꽃도 키우고 채소도 키우고, 보름달이 뜨면 달을 노래하며 산다는 꿈이었다. 물론 해조음의 벗들과 함께 이 전원 생활을 누리는 것이었다. 고관대작 정약용은 유배에 와서도 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하였는데, 나는 대체 어떤 놈이냐? 윤한봉은 결의한다. ‘민중과 함께 살자.’
세 번째 결의도 느닷없이 왔다. 사형 선고는 선고만 하고 집행을 차일피일 유예하는 것이 사형의 관례이다. 그런데 사형선고 하루 만에 사형을 집행해버린 사법사상 최악의 야만이 이곳 한국에서 벌어졌다. 박정희가 시킨 짓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체제에 반대한 대학생들을 감옥에 쳐 집어넣고 그것도 모자라, 여정남을 위시한 30대의 청년 여덟 명을 처형하였다. 1975년 4월 9일의 일이었다. 하늘이 울고 땅도 울던 날이었다. 서울대 학생 김상진은 자신의 배를 칼로 갈라 불의의 독재에 항거하였다.
그때 윤한봉은 비록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지만 매일같이 학교에 나가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남대엔 흰 건물의 도서관이 있는데, 이 건물을 줄여 백도(白圖)라 한다. 소식을 들은 윤한봉은 백도 계단 앞에서 선언한다. “이 한 목숨 역사의 제단에 바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