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말에 대한 책임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해 윤한봉도 꽤 마음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효도는 삶의 제1 준칙이었다. 뒤늦게 전남대 농대에 진학한 윤한봉, 눈에 불을 켜고 공부에 몰입한다. 어렸을 때의 향학열이 뒤늦게 피어오른 것이다. 빨간색과 파란색과 검정색 볼펜으로 최소 세 번 이상 윤한봉은 전문서적을 밑줄 그어 가며 꼼꼼히 탐독했다. 하숙집에서 후배들이 윤한봉에게 접근하여, 시국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씨잘데기 없는 소리 그만하고 들어가 공부나 하라’고 권유하던, 지극히 모범적인 복학생이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갈 때엔 어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시위를 선도하고, 경찰서에 끌려가 매를 맞고, 수사기관원들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교도소에 투옥되는 것이 운동권 학생이 가게 되어 있는 명확한 미래였다. 젊은이가 그런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경우,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십중팔구 운동권 학생에게는 영향을 준 선배가 있다. 선배로부터 물들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윤한봉에게는 물들임의 영향을 준 선배가 없다. 이게 이상하다. 뿐만이 아니다. 운동에 뛰어들기까지 몇 권의 책을 탐독한다. 1960년대 광주일고의 광랑이나 피닉스와 같은 독서 써클에선 이미 밀스(Mills)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다 읽었다. 카스트로의 혁명운동을 예찬하는 붉은 책 말이다. 광주일고의 일부 학생들은 고교시절에 이미 카(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대학원생들도 해독하기 어려운 수준 높은 역사철학서인데 말이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브라이덴시타인이 한국에 와 집필한 <학생과 사회정의>도 널리 애독된 운동권 서적이었다. 윤한봉은 민청학련의 호남 총책을 맡기까지 이 기본서적들도 읽지 않은 것 같다.
민청학련의 전국조직을 주도한 서울대의 나병식과 황인성이 전남대의 김정길에게 윤한봉을 만나게 해달라 요구했다. 김정길은 책임을 맡을 의향이 있는지 윤한봉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형님 어째 공부만 모범생으로 하실라요?’ 답은 간단하였다. ‘아니여 인자 나도 싸울 거여.’ 하지만 아무리 신념이 확고하더라도, 제일 걸리는 게 부모님이다. 부모님을 떠올리면 감옥행을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그런데 윤한봉에겐 이런 망설임이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윤한봉에겐 남다른 정신적 특질이 있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윤한봉은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감이 유달랐다. 중학 시절의 일이다. 방학이라 고향에 내려왔는데, 예기치않게 친구와 언쟁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광주로 유학을 가지 못한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공부해 보았자 필요 없다, 한문만 공부하면 된다.’고 주장하였고, 윤한봉은 ‘지금은 한글 시대이다. 케케묵은 한문은 어서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반론을 폈다. 둘의 언쟁은 서로의 자존심을 긁는 지경으로 비화되었는데, 순간 윤한봉은 선언한다. ‘내가 한자를 쓰면 000이다.’
대개의 경우 순간의 감정에서 나온 과도한 발언의 경우 시간과 함께 유야무야가 되는데, 윤한봉은 달랐다. 윤한봉의 말은 하늘을 두고 한 맹세였다. 이후 한자 쓰기를 거부하는 이상한 고집 때문에 엉뚱하게 경찰들에게 호된 매질을 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말 혹은 약속 혹은 맹세에 대한 윤한봉의 병적 집착이다. 이후에도 형 윤광장과 말다툼 과정에서 ‘도시락은 죽어도 싸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형이 반찬 투정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을 상한 나머지 뱉은 말인 듯하다. 중요한 것은 고교시절 내내 도시락을 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조그만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는 윤한봉의 정신적 특질을 간파할 수 있다. 윤한봉은 어려서부터 매우 강한 자존심을 가졌다. 윤한봉은 다른 사람과 비교되지 않는 긍지를 지닌 소년이었다. 자존과 긍지를 말하니,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떠오른다.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벗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의 손에 죽자, 복수에 나선다. 그런데 헥토르를 죽이면 이어 자신도 죽게 되어 있는 신들의 각본을 어머니 테티스로부터 듣는다. 하지만, 아들아킬레우스는 한사코 고집한다. ‘절 붙들지 마세요, 어머니. 짧은 삶을 살지라도 영원히 남게 될 명성을 택할래요’ 아킬레우스의 말은 이후 영웅의 특질을 압축한 명언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윤한봉에겐 그 명성의 욕망도 없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오직 헌신만 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