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며
발기인 대표 김희택(현 이사장)
합수 윤한봉 선생은 참으로 올곧은 정신을 우리에게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선생은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마무리를 철저하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였고, 그리하여 선생이 시작하는 일은 반드시 마무리가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선생은 차별과 소외를 거부하였고, 모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가슴에 조국과 민족을 품고 살았으며, 제3세계의 민중을 ‘타민족 형제’라고 부르면서 동지적 연대를 실천하였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되던 날, 선생은 결의했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저 독재정권과 싸운다.” 이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이래 항상 운동의 원칙을 앞세웠습니다. 여러 차례의 고문과 투옥에도 불구하고, 청년학생운동에 헌신하였고, 농민운동과 연대하였습니다. 차디찬 옥중에서 고생하는 동료들에게 털양말을 짜서 넣어주는 등 앞장서서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80년 5월 계엄포고령으로 수배가 되었고, 광주 항쟁의 수괴로 지목되면서 힘든 잠행 생활을 하던 중, 1981년 4월 마침내 미국 밀항을 결행했습니다. 그는 여느 망명 정치가가 누리는 그 어떤 대우도 거부하였습니다. 도리어 광주 항쟁에서 먼저 간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1983년 L.A.에서 민족학교를 열었고, 1985년엔 미국 전역에서 해외동포운동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하였습니다. 마침내 10여개 도시에 지부조직을 둔 ‘재미 한청련’을 창립하였고, 이어 캐나다와 호주 그리고 유럽에까지 한청련 지부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988년에는 한국에서 미군의 핵무기를 철거하라는 서명운동을 열정적으로 전개하였고, 1989년에는 전 세계의 진보적 인사 300여명이 동참한 ‘국제평화대행진단’을 조직하여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도보로 행진하였습니다. 망명 생활을 한 지 십 삼년 되던 1994년 조국에 돌아왔으나 선생의 건강은 이미 많이 상한 상태였습니다.
귀국 후 선생은 민족미래연구소를 열었고, 5.18 광주 민중항쟁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기 위해 ‘5.18기념재단’ 설립에 나섰습니다. 건강은 말할 나위 없이 악화되었습니다만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기념관 반대운동에 앞장서서 뛰어다녔습니다. 동지였던 김남주 시인의 시비 건립사업을 완수하였고, ‘들불열사 기념사업회’를 꾸렸습니다.
2005년 육교를 오르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면서 민족미래연구소의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목포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투병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2007년 6월, 마치 동네 앞 병원에 예방주사 맞으러 가는 것처럼 가볍게 수술대 위에 올랐는데, 그 길이 영원한 이별이 될 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금방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며 맑고 환한 웃음으로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선생을 추모하면서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자 합니다. 우리는 선생의 뜻을 기리면서 차별과 소외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가겠습니다. 민족의 분단을 해소하고 세계민중이 형제처럼 살 수 있는 대동 세상을 위해 뛰겠습니다. 여기 벽돌 하나 놓는 심정으로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를 시작합니다.
“나는 도망자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살겠다.” 1994년 김포 공항의 기자들 앞에서 합수가 밝힌 소회였습니다. 합수의 선언 그대로 퇴비처럼 짐꾼처럼 살고자 하는 여러분의 뜻을 모으고자 합니다.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는 차별과 소외가 없는 사회를 만들고, 민족의 분단을 해소하며, 세계민중이 형제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활동을 하겠습니다.
- 합수 윤한봉 선생의 정신 계승과 추모 사업
- 합수 윤한봉 선생의 삶에 관한 자료의 수집, 보존, 전시, 홍보 및 연구
- 인권 신장을 위한 사회 문제에 대한 조사, 연구 및 교육 사업
- 회원 간 소통과 협력 증진 사업
- 출판, 문화 사업
2008년 4월 29일 발기인 대표 김희택
“2009년 2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천안삼거리를 지나면서”
문규현 드림
작년에 이어 2년째 오체투지를 시작하였습니다. 2009년 순례를 시작하여 20일이 지나 천안삼거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기도 순례단은 오직 기도를 할 뿐입니다만, 순례가 대도시를 통과할 때는 매우 어렵습니다. 교차로도 많고, 차량도 많기 때문입니다. 순례단은 처음처럼 기도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순례의 길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기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작년에 <합수 윤한봉 기념 사업회>를 발족하였고, 합수의 지인들이 쓴 추모 문집의 발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올 해의 주요 사업으로 ‘합수 윤한봉 심포지움’, ‘기념관 건립’ ‘어린이도서관 사업’, ‘소수자 권익운동’ 등의 사업을 전개할 것입니다. 올 안에 전국에서 500분 이상의 회원님들을 모실 계획입니다. 한 분당 10명 이상의 회원을 조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5월 정신은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이다.” 2005년 윤한봉 선생은 5월 광주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혁과 진보가 항쟁정신의 한 축이라면, 통합과 통일이 대동정신이다.”고 했습니다. 광주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항쟁과 대동의 정신으로 광주의 정신을 되살려 나가야한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시절이 수상하고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윤한봉 선생이 그리워집니다. 소처럼 우직하였던 분, 소걸음으로 천리를 갔던 분이었습니다. 저도 소걸음으로 순례의 길을 걸어갑니다.
2009년 4월 천안삼거리를 지나면서 문규현 드림.
1980년 5월 17일 새벽, 학살의 총알이 윤상원의 복부를 관통한 지 30년이 흘렀습니다. 지난 30년 우리에겐 빛나는 때도 많았지만, 그 때의 고귀했던 빛의 색깔도 많이 변질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하여 오월 영령들에게 죄스럽기만 합니다.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합수 윤한봉 선생! 자신의 살조각을 바쳐서 해외민주화운동을 건설했고, 그리고 다시 조국 광주에 돌아와서 올바른 5월 운동을 세우고자 마지막 한 가닥의 숨결마저 바쳤습니다.
지난 광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980년 광주항쟁에서 1987년 6월 시민항쟁까지 광주는 한반도의 광주였습니다.
주제넘은 말씀일지 모르겠습니다만, 87년 이후 광주의 역사는 어쩌면 광주만의 역사로 전락하지 않았는가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 합수 윤한봉 선생이 미국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조국 광주에 돌아오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합수 윤한봉 선생의 결심은 간단명료했습니다. “한국의 운동이 거듭나야 한다, 광주 5월이 건강해져야 한다.” 이것이었습니다.
합수 윤한봉 정신을 기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윤한봉 선생이 운명하면서 남긴 유산은 똥가방 한 개와 약병 몇 개 그리고 헌 운동화 한 켤레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셈하는 파렴치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돈의 귀신에 홀린 이 땅에서 윤한봉 같은 바른 인격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합수를 따르는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요?
저는 우리 모두가 합수 윤한봉 선생의 정신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합수 윤한봉기념사업회는 합수 개인을 기리는 사업회에 머물지 않고, 광주 5월 정신을 살리고, 끝내는 대동정신을 살려내는 사업회가 되길 희망합니다.
전 이사장 오수성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