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합수 정신, 동지애2018-12-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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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지애


윤한봉의 동지애는 각별하다. 그는 동료 김정길이 심한 고문을 당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동료의 치유를 위해 발 벗고 나선다. 흑염소 한 마리를 구할 자금이 없어 월부 책장사에 나서는 모습은 눈물겹다. 본인이 어렵게 자란 것도 아니었다. 아버님이 시골의 부자였으니, 윤한봉은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것 없이 자라면 궂은일은 못하는 법이다. 윤한봉도 자기 일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책장사였다. 동료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윤한봉은 평생 하지 않은 책장사에 나선다.


1970년대 1천만원이면 큰돈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몫으로 남겨준 땅을 팔아 자금을 만든다. 후배 동료들과 함께 꼬마시장을 벌이는데 얼마 안 가 원금까지 다 말아먹는다. 정상용은 도청을 지키던 마지막 날, 귀청이 찢어질듯 요란한 총알소리 속에서 맨 먼저 떠오른 얼굴은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윤한봉이었다. 내것 네것 없이 가진 것 다 내놓고 필요한 대로 쓰는 동지애. 이 동지애의 모범이 윤한봉이었다.


그것을 동지애라고 해야 할 지 우애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지애가 무엇인지 몰라 윤한봉은 칠량 마을 어른에게 묻는다. 분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도 윤한봉에 대한 애정이 깊은 분이었던 것 같다.


“어르신, 동지애가 뭡니까?”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게 동지애여”

“무슨 말씀입니까?”

“젊어선 의기투합하여 내 것 네 것 없이 나누며 살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모두 다 자기의 앞가림하느라 바쁘지. 그러다보면 누구는 출세하여 부자가 되고, 누구는 이름 없이 빈한한 삶을 살어. 그래갖고는 동지라고 할 수 없어.”


이후 윤한봉은 결의한다. “내게 꼭 필요한 것만을 챙기고, 필요하지 않는 것들은 다 동료들에게 나누어주자.” 이후 윤한봉은 죽는 그 날까지 무소유의 삶을 산다. 이 점이 남다르다. 젊은 날 운동을 위해 투신한 많은 운동가들이 나이가 들어 현실에 타협하면서 예전에 없던 사욕을 부리게 되고, 운동의 대의보다 사익을 챙기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다. 윤한봉에겐 사심이 없다.


그때가 1979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윤한봉은 남민전의 수사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예감한 것이었을까? 신변을 정리하기 위해 자취방을 처분할 필요가 있었나 보다. 하루는 선배가 나에게 따라오라는 것이다. 지산동 법원 근처 골목길을 따라 가니, 윤한봉의 자취방이 나왔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딱 한 평 크기의 꼬딱지만한 골방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비키니 옷장도 없었고, 냄비며 칼이며 도마와 같은 그 흔한 부엌살림 도구도 없었다. 큼직한 짐가방 하나 떡 버티고 있었다. 그것이 윤한봉의 모든 재산이었다. 가방 옆에는 푸른색의 플라스틱 통이 있었고, 그 속에 한 장의 편지 종이가 있었으며, 그 종이엔 가방 속에 담은 사유물의 명세서가 깔끔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면도기, 빤스, 런닝구가 기억난다. 선배는 런닝을 갈아입었는데, 그때 드러난 앙상한 갈비뼈가 지금도 인상적이다.


이후 나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훌륭한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 민청학련 사건 때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자,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멋진 사나이 김병곤 선배도 만나 보았고, ‘전태일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김승호 선배도 만나 보았다. 윤한봉은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윤한봉의 무소유는 법정의 무소유와 차원이 다르다. 윤한봉의 무소유는 소크라테스의 무소유와도 차원이 다르다. 법정이나 소크라테스의 무소유는 본질적으로 ‘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무소유였다. 윤한봉의 무소유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여정에서 동지와 목숨을 함께 하기 위한 무소유였다. 김남주 시인이 그린 전사의 전형은 윤한봉이었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 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있기까지 윤한봉이 행한 실천 중에서 빛나는 실천은 송백회의 결성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남성 운동가들 역시 봉건적 악습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였다. 여성의 힘을 조직할 것을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옥바라지를 조직하면서 송백회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는 점도 매우 특이하다.


옥중 생활을 하면 사람의 손길이 아쉽다. 먼저 출소하는 사람에게 밖의 친척에게 편지를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누구나 전달해주겠노라 다짐한다. 교도소의 문을 나서면 마음이 달라진다. 귀찮다. 없던 약속이 된다. 이게 출소자의 심리이다. 윤한봉은 달랐다. 겨울의 추위를 견디게 해 줄 털양말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윤한봉은 출소하자마자 동생 윤경자에게 털양말을 짜달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에게 털양말을 영치한다. 또 윤한봉은 출소하자마자 책 넣기 옥바라지에 나선다. ‘족보와 일기장만 두고 갖고 있는 책을 다 내놔라’ 악랄한 주문이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호남 일대의 교도소 수감자 모두에게 털양말과 책을 영치하려면,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여동생을 위시해서 사모님들과 형수님들과 제수씨들과 후배의 애인들을 조직한다. 그것이 송백회 결성의 시초였다. 80년 5월 도청의 투사들에게 주먹밥을 날라준 여성들이 송백회 회원들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윤한봉의 무소유와 헌신, 동지애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주목하였다. 가계를 뒤져 보니 윤한봉의 할머니가 나왔다.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재미로 사신 분이었다. 어느 집 부인이 출산을 하면 몰래 미역을 보내주었고, 굶는 이웃이 있으면 쌀을 퍼다 주었다. 그 심부름을 어린 윤한봉이 한 것이다.


전라도의 바닷가 사람들에겐 아주 끈끈한 정이 있다. 이웃의 불우를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맹자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 하였고, 이 마음이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였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전라도 촌놈들은 ‘오매, 짠한그’하는 소리가 입에 튀어 나온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이고 버스에 오르면 그 짐을 들어주는 마음이다. 지난 100년 역사에서 왜 호남이 항일투쟁의 주역을 담당하였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또 주역을 놀게 된 이유를 나는 바로 이 마음에서 찾는다. 좀 과도한 억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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