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꽃피는 봄이 오면 내 무덤에 술잔을 (황광우)2018-12-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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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이 오면 내 무덤에 술잔을

 

황 광 우/작가

 

내가 윤한봉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19752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지산동 법원 옆 어느 재래식 주택에서 살았다. 광주일고 재학 중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아주 충실한 기독교도였는데, 새벽이면 일어나 2층 장광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고, 부엌에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하셨다. 그 날, 부엌에서 밥을 짓던 어머님의 한 맺힌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아침 해가 뜨기 직전, 겨울의 이불 속에서 일어나기 싫어 뒤척이고 있던 때였다.

오따, 오따, 어째야 쓰까 잉. 한봉이 아부지가 돌아가 부렀네.”

 

어머니는 윤한봉의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당시는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로 시국이 뒤숭숭한 시기였다. 1975215일 대통령 특사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고, 윤한봉 선배는 출옥하여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전에 섰다. 이게 일간지에 보도되었고, 아마도 어머님은 그렇게 윤 선배 부친의 부고 소식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날 아침, 어머님의 울부짖음이 환청이 아니었길 바라는 마음에서 난, 전남대 도서관이 있는 백도 건물 그 지하실에서 75년도의 신문기사를 뒤적였다. 어렵게 찾았다. 그 날의 기사가 있었다.

 

꽃 피는 올 봄엔 내 아들 풀려나 나의 무덤에 술잔을 올렸으면”--구속 아들 석방 기다리다 숨진 어느 아버지의 유언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 징역 15년의 형이 확정돼 대전 교도소에 수감 중인 전남대 축산과 4년 윤한봉군(27)- 전남강진군 칠량면 영동리-의 가족들은 음력설인 11일 아침 아버지의 제사상을 차려놓고 슬픔을 참지 못해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가족들은 윤군과 따뜻한 밥 한끼 같이 못한다는 아픔도 그러려니와 아들의 구속으로 끝내는 홧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엿새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윤옥현(59)의 제사가 겹쳤기 때문이다.

윤씨는 지난해 11월 중순 아들이 상고포기로 형이 확정돼 안양교도소에서 대전교도소로 이감되면서부터 병에 몸이 약해지기 시작, 구속된 아들이 보낸 세 번째 편지가 집에 도착하기 2시간 전인, 지난 6일 오후 4꽃 피는 올봄엔 내 아들 풀려나 나의 무덤에 술잔을 올렸으면하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동아일보, 216일자)

 

윤한봉의 이름을 호명하셨던 어머님의 무의식 저 깊이에선, 인공 때 총살당한 좌익 영웅들의 얼굴이 떠올랐을 런지 모른다. 어머니는 해남 북평면 출신이고, 한봉 형은 강진 칠량면 출신이어서, 지척이면 닿는 바닷가 사람들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던 이곳 남도 민중들의 한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형은 여느 운동권 학생들과 달리, 운동권 써클에 소속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배로부터 의식화 학습을 받은 적도 없다. 운동에 뛰어든 내력이 독특하다. 고교 시절 사춘의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한다. 도저히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군대에 입대하여 버렸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골에서 3년 하고도 6개월을 근무하였다. 고생, 많이 했다. 제대 하고, 마음잡아 공부를 시작, 뒤늦게 전남대 농대에 입학한 것이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일념으로 형은 무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형은 소문난 책벌레였다. 그렇게 세상과 담 쌓고 공부에만 몰두하던 형이 어느 날 갑자기 독재자 박정희와 목숨 건 한 판 싸움을 결의하게 된다. 197210월 유신이 형을 건드린 것이다.

 

근디 인자 2학년 10월 달이지. 학교 뒤 하숙방에서 머리 동여매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때 하숙생이 여덟 명인가 됐었는데, 밖에서 웅성웅성하면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나를 자꾸 불러 나오라고. 밤인데. 그래서 인자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나가보니까 유신 쿠테타가 난 거예요. 그래갖고 휴교령부터 시작해서 의회 또 폐쇄해 버리고, 헌법폐지하고 난리가 났지 이제. , 그때 내가 뒤집어졌지. 방에 들어와 가지고 보던 책에 볼펜으로 찍어블고 사전 찍어블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너무 무시당한거지.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어린애 취급하고, 바보취급하고 있구나. ,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나. 너무 분통이 터져가지고

 

한봉 형이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우기로 결의하게 된 것은 아주 소박하다. 무슨 거창한 이념을 위한 것도 아니고, 어느 위인의 삶을 본받고자 투쟁의 길로 들어선 것도 아니다. 독재자 박정희가 우리 국민을 벌레로, 바보로 취급하고 있다는 모욕감,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것이 독재라면, 인간의 존엄을 옹호하는 자는 투쟁의 대열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게 형에겐 민주주의였다. 한봉 형이 두 번째 다짐을 한 것은 인혁당 사형 사건 때였다.

197549일 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민주 인사 여덟 분이 인혁당의 굴레를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15일 서울대에서 김상진 열사가 할복으로 항거하였다. 윤한봉 선배도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의 제단에 한 목숨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49일 날 인혁당 관련 8분이 사형당하셨어. 8분이 그냥 사형당해브렀어. 그때 내가 전남대 도서관 앞에 있었는데, 백도 앞에.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얼마나 화가 나는지 거기서 또 내가 일어나갖고 또한번 맹세를 했는데, 내 한 목숨 다 바쳐 이놈의 독재정권, 학살정권하고 맞서 싸우겠다고 악을 썼는데

이때, 19754월 광주일고 2000여 학우들은 운동장에 모여 박정희 독재정권을 규탄하였고, 교문을 열고 충장로로 진출, 도청 앞까지 시위하였다. 고교생들이 시위를 한, 마지막 사건이다. 광주일고와 교육청의 관료들은 시위 주동자들을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박석면 학우를 제명 조치하고, 김윤창 등 10여명의 학생들을 무기정학 처분하였다. 나는 이 조치에 분노하였고, 2차 시위를 모의하였다.

어머님의 호곡에 실려 들었던 형의 이름, 그 얼굴을 처음 보았던 것은 19756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일고 학생 시위에 연루되어 광주교도소에서 잠깐의 징역을 살고 나온 직후였다. 윤한봉 선배는 YWCA 맞은 편 골목의 어느 한식집으로 우리 일행을 불렀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은 없다. 한 끼 맛있는 점심 식사를 대접받았다는 기억만 또렷이 있다. 형님은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우리들에게 밥을 사준 것이다. 모두가 우리들의 행동을 무모한 짓이라 혀를 차던 외로운 시절, 형은 그렇게 후배들을 다독여 주었다.

 

용봉 축제라고 그러죠, 6월 달인가 5월 달에 전남대 개교기념일 행사. 옥바라지해야 하고 돈이 필요하니까, 버스비 없다고 하면 형님, , 서울에서 오랜 친구가 왔는데 국밥이라도 하나 사먹고 싶은데 하다못해 돈이 필요한 거예요. 돈이 인제. 그래서 용봉축제 때 가서 얼음, 아이스케끼 인제 케키 장사를 하자 그래가지고 전부 모였어요얼음 매고 악을 쓰고 다닌 거예요.”

 

이후 나는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공부하러 떠났다. 때문에 한동안 한봉 형을 보지 못했다. 형은 이듬해 또 징역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부활절 사건이라나.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고작 10개월을 살았는데, 이번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무려 2년의 징역을 살고 나온다. 형이 출옥한 것은 19782.

내가 선배와 최초의 공동행동을 한 것은 19784월 어느 날이었다. 형은 당시 농민들의 함평 고구마 투쟁을 지원하고 있었다. 북동 성당에서 농민들이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전경들은 성당을 포위하였다. 나는 한봉 형이 구해온 이불을 짊어지고, 성당 뒷골목 담장 너머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한 끼 식사라도 거르면 맥을 못 추는 농민들이 하필이면 단식 투쟁을 선택하여 생곤욕을 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투쟁에 소요되는 모든 물품을 한봉 형은 치밀하게 조달하였고, 이 모든 물품을 투쟁의 현장으로 운반하는 것을 내가 맡았다.

어느 날인가, YWCA에 모인 청년 학생들이 북동 성당으로 시위하였다. 데모만 하면 경찰들에게 잡혀가기 일쑤였던 우울한 시절, 우리는 오랜만에 속시원하게 독재 정권 타도를 외쳤다. 광주 민중 항쟁이 발발하기 이전, 최초의 민중 투쟁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위 이후, 농민들의 요구가 수용되었고 투쟁은 종료되었다. 농민들의 투쟁도 인상적이었지만, 투쟁의 배후에서 헌신적으로 지원하였던 선배의 열정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30년 전의 일이라 사건의 전말이 뚜렷하지 않다. 형은 이렇게 술회하였다.

 

이제 4월이 되니까 함평 고구마 사건으로 북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하는데, 전혀 내부에서 준비도 없이 치약 칫솔 하나, 소금 한 줌 준비 안한 채로 친구 하나도 없이 갑자기 준비를 해버린 거에요. 단식농성에 들어가 버리거든요그래 단식농성이 딱 들어가 버리니까 농민들이 또 일하니까 밥은 이만큼씩 많이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제 예비단식 과정도 없이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하니까, 침구도 없지. 세면도구도 없지. 소금도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그 다음에 이제 거기에 누웠다 해서 일이 해결되는 거 아니거든? 이제 증폭을 시켜야 하는데 단식효과를 정치적으로 높이려면. 그러면 재야나 청년 학생들 쪽에서 호응을 해줘야 하는데 인제 그 일을 갑자기 내가 맡게 된 거에요. 근게 침구 구해 날리고 세면도구부터 몰래 솔래솔래 타먹으라고 미숫가루부터, 해가지고 완전히 경찰이 봉쇄를 해버렸기 때문에 북동 성당 뒷골목으로 해가꼬 경찰들이 모르는 골목으로 담 넘어서 인제, 들여보내고 이제 그런 일을 하고나서 인제 바깥에서 모임을 주선해가지고 지지 격려차 북동성당 방문을 해야 한다. 양림동 성당에서 모여가지고 그런 음모 꾸미고. 동원하고. 그래서 진짜로 청년 학생들이 밤에 북동성당 위로 차 간다 그래가지고 경찰이 막고 뛰고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이 번지게 되니까 저쪽에서 항복!”

 

형이 밀항하기 이전 광주에 뿌려놓은 소중한 밀알이 있다. 송백회이다. 투쟁을 하다 보면 겉으로 드러나 화려한 조명을 받는 영웅적 역할도 있지만, 아무 이름 없이 묵묵히 헌신하는 후원자의 역할도 있다. 추운 감옥에서 손발 동상 걸리지 말라고 넣어주는 털장갑, 솜버선. 이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물품인 것 같지만, 투사들은 이런 정성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관례상 이 일은 남성들이 할 수 없었다. 한봉 형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첫 징역생활의 아픈 체험에서, 출옥하면 꼭 여성 투사들을 키우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모임이 송백회인데, 광주항쟁 당시 투사들에게 김밥을 멕여주던 우리 어머니들의 손길, 그 원조가 송백회였다. 한봉 형은 함평고구마 사건을 계기로 두터워진 농민과의 연대 속에서 그 해 전국농민 쌀 생산자 대회를 광주에서 치르게 하고, 이 대회에 참여한 800여 농민들의 밥을 지었고, 이 대동의 과정에서 송백회가 탄생했노라고 술회하였다.

 

“11월에는 인제 계림동 성당에서 전국농민 쌀 생산자 대회를 했는데 추곡수매가인상 등 다양한 요구들을 쌀 생산자 대회를 했는데그라믄 인자 마당에 파같고 솥단지를 인자 솥을 아 솥은 내가 구한다. 국통은 아 구한다. 왜 그냐믄 집에 가믄 다라이다 있지 않느냐. 목욕한다고. 집에 집집마다 있는 솥단지부터 빌려오면 될 거 아니냐. 해보자고. 한사람 두사람 이렇게 끄집어내고 남자들 콱, 여자들 앞장서서 남자들 잔심부름 다해. 그래갖고 괭이로 북동성당 앞에 마당에다 파고 솥단지하고 국단지 하고 걸고, 국솥 걸고, 하여간에 난리를 꾸몃어. 그래가지고 밥을 하는데 밥 국을 하는데 그릇 씻을 때 내가 앉아서 인자 여기서는 대충 붓고, 여기서 대충해갖고 여기서 비누칠 하믄 넘기믄 행구고 이런 식으로 그때 인자 총 동원이 됐어. 43명이 동원해서 인제 빵잽이들부터 대학후배들까지 전부다 동원해갖고 나 근데 인자 국통 들고 날리다가 잘못해서 손이 빠져갖고 엄지발가락 빠져브렀는데 여덟 번 밥을 받았는데, 안에서 밖에서 싸늘했었지 추워가지고 고생한 놈들 악쓴다고 여덟끼 따뜻한 밥주고, 국주고, 남은 쌀 가지고 떡을 만들었어요. 인절미를. 그래갖고 또 인자 마지막 끼니 인절미를 딱 나눠주고. 한푼 안남기고 한거니까. 그전에 인자 도시락 깍두기 담고 여자들 난리 꾸미고 남자들은 인제 씻어 날리고 실어 날리고 잔심부름 다하고 설움까지 당했는데 여자들한테. 인자 그걸 끝내고 나서 자연스럽게 우리 모여서 뭔가를 앞으로 해야 되지 않냐 그래가지고 송백회라고 뜬 거에요.”

 

내가 형의 살림방을 처음 목격한 것은 19799월 어느 날이었다. 경찰의 감시망이 좁혀져 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일까? 형은 자취방을 정리하기 위해 나를 불렀다. 지산동 천주교 성당 옆 골목의 어느 집 골방이었다. 1평 정도, 그야말로 골방 중의 골방. 큰 가방 한 개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살림의 모든 것이었다. 문지방 옆엔 청색 플라스틱 그릇이 있었는데, 그 안에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편지지를 들춰 보았다. 만년필, 손목시계, 팬티, 런닝구, 양말, 면도, 손톱깍이, 고무신 등 총 50여 항목의 살림도구가 적혀 있었다. 형은 입던 옷을 갈아입었다. 갈비뼈가 기타줄처럼 드러났다. 깡마른 몸이었다.

남들은 윤한봉 하면, 거창한 투사의 얼굴을 떠올리고, 가까운 지인들은 합수하면 철두철미 고집스런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형이 이승을 떠나고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적시면서 추억하는 형의 모습은 영어를 쓰지 않고, 침대를 거부하며, 샤워도 않으면서미국 망명생활 13년을 견딘, 무서운 고행의 수도사였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형의 모습은 이 날 자취방에서 본, 가방 하나가 살림살이의 모든 것인 무소유주의자의 속살이었다. 무소유를 지향하지 않고선, 투사의 길,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없겠지만, , 형처럼 일관된 무소유주의자를 아직껏 본 적이 없다. 큰 산은 가까이에서 산의 전모를 볼 수 없다. 하여 윤한봉의 삶을 어떻게 평해야할지 모르겠다. 한국의 간디라고 해야할 지, 한국의 호지명이라고 해야할 지. 형이 무소유의 삶을 살게 된 인연을 들어보자. 형은 고향 어르신으로부터 동지의 덕목으로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사자성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동지는 뜻도 같애야 되는 거지만 서로 어려울 때 있는 놈이 없는 놈에게 주고, 그래서 함께 나눠먹는 근게 유무상통하는 관계가 돼야만 올바른 동지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런 뜻으로 내가 유무상통이라고 쓴 거다. 유무상통하지 않고는 동고동락이니 공생공사니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딱 감이 잡히더라고. 예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여 내가 78년에 이제 재산목록을 작성했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 무엇인가부터 정확하니 파악을 해 놓자. 그래서 유무상통할 수 있는 내 자신의 준비부터 갖추자. 재산목록을 작성했는데, 일번이 만년필, 이번이 내가 가방에 담고 다니는 누가 준 놈 뭣헌건데 자동 면도기, 그래가지고 쭉 삼번 손목시계 그래갖고 고무신 빤스 란닝까지 전부해놓고 인제 두 개 이상 있는 옷은 인제 잠바도 그렇고 상의 옷도 그렇고 후배들 줘브렀어요.”

어느 날, 형은 한떼의 후배들을 데리고, 무등산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산수오거리에서 금곡마을을 지나 식영정 근처에서 내렸다. 영희 누나, 은경이 누나, 연석이 형이 기억난다. 무슨 성격의 모임인지도 모르고 따라갔고, 하여 그 날의 모임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연석 형의 노래가 인상 깊다. “저들의 푸르fms 솔잎을 보라.” 나는 양희은의 노래를 그 때, 처음으로 들었다. 암울한 시기, 암담한 청년들을 위로해주는 노래였음이 분명하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그 모임이 민주구속자협의회였는지, 아니면 송백회 모임이었는지, 나에겐 중요하지 않다. 당시 광주의 운동권은 조직이기 이전에 같은 식구였고, 공동체였다. 서울의 운동권은 학생운동권, 노동운동권, 기독교 운동권, 재야운동권이 각각 분별 정립되어 있었으나, 광주의 운동권은 분화하지 않고, 뭉뚱그려 움직였다. 그 이유는 지리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고, 운동의 규모가 거대화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였으리라. 나는 한때 광주의 이런 사정을 운동의 후진적 양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다 본 적이 있었다. 나이 한 살 차이로 형님, 동생 나누는 전근대적 관계라고 말이다. 이제 돌아와 보니, 1978년에서 1979, 그러니까 광주민중항쟁이 터지기 1년 전, 대한민국에 가장 강고한 저항의 구심이 하나 자라고 있었으니, 그 구심은 윤한봉을 정점으로 구성되었던 광주의 운동 공동체였다.

 

인제, 딱 필요한 것만 가지고 내가 산다. 그래가지고 이제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살아 생전에 시골집을 "요고는 인자 한봉이꺼" 그런 식으로 대충 이야기를 해 놓으셨어. 나중에 내가 장사한다고 거짓말 치고 형님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고 집값이라고 얼마를 주시더라고요. 고놈 갖고 와서 인제 정상용이가 꼬마시장 한다고 빚이 많이 져 있어요. 빚 값는 데 쓰라고 돈 줘블고, 나는 인자 다 털어븐거지. 유무상통 그런 차원에서그라고 인제 정상용이가 결혼식을 못하고 인제 동거하고 있어. 그러니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쑥덕쑥덕하게 결혼도 안하고 동거나 하고 이러면 안되나 결혼식을 시켜야겠다. 나도 그때 돈이 없고, 주변에도 돈이 없고 그래서 박형선이가 시골에서 농사지면서 보성에서 독사, 화사, 능사, 이런 뱀들을 잡아갖고 뱀술을 수십통을 땅에다가 묻어논 거에요. 그게 아주 잘 만들어가지고, 그거 마시면 사람들 되게 좋아해. 또 사주라고 그러는데 그것이 그때 비싸게 팔렸어요. 서울 같은 데로 이러고 팔고, 뱀술 열병을 주라고 그래가지고 인자 고놈 팔아서 결혼식에 쓰라고 인제 뱀술을. 그런 식으로 인제 그 뭐랄까 당시 운동이 그런 식으로 이뤄졌어요, 광주지역운동이. 뱀술 팔기작전에 들어가고 그랬는데

 

그랬다. 지금도 한봉 형을 기억하는 이들이 맨 먼저 하는 말은 인정 많은 형님이었다. 밥을 못 먹는 후배들을 보면, 밥값을 쥐어주고, 고향 갈 차비가 없는 후배를 만나면 차비를 쥐여 주고, 담배 값이 없는 후배들에겐 답배 값을 쥐여 주었다. 고문에 몸을 다친 후배 김정길의 요양을 위해 월부 장사에 나섰던 합수 형. 이웃의 불우를 그냥 보지 못하는 눈물 많은 이가 한봉 형이었다. 전라도 사투리로 말하여 오매, 짠한그!” 하는 그 마음 때문에 내 것을 다 퍼줘 부러야 직성이 풀리는, 남도 민중의 애잔한 마음, 그 현현이 한봉 형이었다.

 

어쨌든 간에 78, 광주운동이 굉장히 활성화된 해였어요. 79년 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운동 한다 뭐한다 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감방에 들락거리고 그래가지고 가족들하고 차분히 바람 쏘이러 야외에 나가보거나 그러지를 못해 가정에서. 삭막하지. 물적 조건이 안되니까.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어떤 친밀도 좀 높이고 그런 문제도 함께 풀 겸해서 55일 날 민주가족야유회라는 것을 가게 됐어요. 가족들을 다 끌고 나오니까 꽤 많은 숫자가 모였다고요. 7955일에는 화순 쪽으로 갔는데 지금 화순 어딘지는 기억이 안나요. 하여튼 그쪽에 가서 하루 쉬었고, 80년에는 여그 광주에 있는 식영정 그쪽으로 갔었고.”

 

내가 형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것은 19797월 어느 날부터였다. 나는 그해 717일 김해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장동에 있는 현대문화연구소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한봉 형은 옥바라지를 위하여 책을 모으던 참이었다. 나 역시 감옥에서 보았던 책 한 보따리를 옮겨 놓았다. 순식간에 2천여 권의 장서를 수집한 것으로 안다. 한봉 형은 동료들의 옥바라지를 그렇게 체계적으로 조직해 나갔다.

 

인제 책장을 짜놓고 인자 구호를 청했어요. 일기장, 가계부, 족보를 빼고 책은 전부 다 내놔라. 어쨌든 간에 서울 돌아다니면서 책도 좀 모으고 집집마다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쓸만한 책들 뿌리채 뽑아갖고 와서 넣고 한 이천 권을 책장에다 빡빠가니 채워 넣고 그리고 옥바라지할 때 쓰라고 가족들한테. 서울서 와서도 광주 들러서 책 갖고 가고. 광주에서 자기 가족이 있거나 그러면은 그라고. 그 사무실에 이제 송백회 회합장소로 쓰게 되고 그 다음에 거기서 801월에 극단 광대가 출범을 해요.”

 

1979년 가을, 나 같은 풋내기 운동가에게는 눈이 핑핑 돌만큼 정국이 급변하였다. Y.H.여공 김경숙씨가 떨어져 죽고, 이어 신민당의 김영삼씨가 의원직 제명을 당하면서 그 해 9월엔 전운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조선 민족해방 준비위원회라는 지하조직 사건이 불거져 나오고, 그러다 부산과 마산에서 민중 항쟁이 터져 나오고, 그러던 어느 날, 한봉 형이 사라졌다. 또 잡혀간 것이다.

 

그때 23일이에요. 무작정 나는 끌려 간 거지. 이 무지한 놈들이 서부경찰서 숙직실로 덱고 들어가요. 들어가서 보니까 이미 의자 두 개 세워놓고 몽둥이 걸어놓고, 빠께스에 물, 걸레, 주전자부터 딱 물고문 준비 해놨더라고. 이런(등치 큰)놈들이 옷 벗기고 수갑 채우고 이렇게 해서 여기다(허벅지에다) 장대 채우고 물 먹이는 물고문을 시작을 했는데, 인제 그것이 어떻게 됐냐면 부마항쟁이 터지자 부산에서 마산으로 번지고 그러니까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긴장을 한 거예요 이놈들이. 정권차원에서. 그라고 광주를 중시한 거예요.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래가지고 내가 3일간을 엄청 심하게 고문을 당해브렀습니다 물고문을. 근데 26일날 아침이 되니까 이놈들이 갑자기 나갔다오더니만 내 수갑을 풀어주면서. 모르는 놈이 하나 들어오더만은 벽에 탁 기대앉더만은 어허 나라가 걱정 돼 나라가 걱정돼, 그런데 실내방송이 들리는데 뭐락뭐락한디 유고 계엄령, 들려오는 거야. 이놈들이 갑자기 이상한 짓거리하고 유고, 계엄령 나라가 걱정, ! 이거 박정희 죽었구나 이것이 순간에 발끝에서부터 간질간질 해갖고, 그 쾌감은 아직 그 이후로는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온 몸이 간질간질하면서 희열이 아 나 살았다 나 더 이상 고문 없다, 박정희 죽었다 세상 바뀐다. 아 그때 참 희한한 경험했어.”

 

19791026일 박정희가 죽던 날, 우리 빵잽이들은 충장로 시위를 모의했다. 그 날 낮에 전남대 식당에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저녁엔 충장로에서 한 판 붙기로 하였다. 형선 형, 강이 형한봉 형의 동지들은 모두 다 잡혀 들어가기로 결의하였다. 그 날 오후 7시 경, 나는 광주천에서 대그박만한 돌들을 정부미포대에 담아, 충장로 거리에 뿌려 놓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문국주 형은 초조한 모습으로 충장로의 1가에서 4가를 반복하여 걸었다. 약속하였던 싸움판은 벌이지 못하였다. 씁쓸했다. 우리는 남광주 시장 인근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1박을 하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라디오에서 조가가 울려 퍼진다며, 시국의 비상함을 누군가 알려왔다. “먼 일이 벌어진 거여.”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날 오후였다. 그 당시 나는 방림동 산 밑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님은 잔치를 벌였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한 여러 빵잽이들이 우리 집에 모여 막걸리에 부침개를 먹었다.

형은 다시 돌아왔다. 엄청 고문당했단다. 오른 팔이 마비되었다. 마비된 팔을 흔들며 열변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신의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던 형, 늘 낙천적 마음으로 살았던 형. 불우한 이웃을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못 했던 형, 불의 앞에선 불같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던 형, 누구보다도 위선을 미워하고,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였던 형. 나는 그 후 오랫동안 형을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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