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산의 영원한 등불, 합수 윤한봉
김 남 표/
뜨는 개별과 지는 똥별을 합쳐 개똥벌레가 아닌 개똥별네라고 명명한다.
때는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국내는 물론 세계가 요란을 떨던 1980년 초봄이었다. 잔혹한 유신시대의 일기를 가슴에 담고 살았던 전청협 회원과 양심세력의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었던 송백회 회원의 청옥동 광주호 나들이 뒷끝이었다. 해가 짧아 가슴에다 할 말을 묻기로 하고 돌아오는 시내버스 바닥에 앉아 열변을 토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합수 형이었다.
모든 국민들 아니 어지간한 민주의사들도 유신본당과 잔당들이 무대 뒤로 사라졌으니 이제는 우리가 바라는 참세상이 오리라고 희망하며 또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합수 형은 이러한 낙관론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다가올 개똥별네들의 치욕시대를 예견이라도 하듯 고함치며 흥분했다. 너무 낙관론에 빠져 있고 안일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합수 형과 그렇게 긴긴 세월을 함께 하진 못했지만 술 마신 합수 형의 모습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어쨌거나 어두운 유신을 넘어 별 헤는 밤을 고대했던 우리 전청협 회원이나 송백회 식구들도 합수 형의 그런 외침을 잠시라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댓가를 바라고서도 아니요 또 어떤 영화를 기대하면서는 더욱더 아닌 그저 도리에 어긋나고 상식에 어긋난 정치와 사회에 무조건 항거했던 당시 상황이었지만 어쩌면 그 암흑의 냉방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도 인지상정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평소 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합수 형이 꽤나 취하도록 마셨던 기억이 있다. 어설픈 기억으로는 무사도로서의 순수군인이 아니라 권력과 오만에 물든 정치 군인들이 절대로 순수하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합수 형의 당시 상황 분석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어쩌면 불가항력적 상황이었지만 정확한 시대 상황의 진단이었으며 판단이었던 것도 역사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어떻게 해서든 낙관론을 경계하고 싶은 합수 형의 모닥불을 끝까지 지피지 못한 채 나는 당시 출판사를 운영하던 목포로 발길을 옮겼다.
목포에는 당시 전청협 회원으로는 동아약국을 운영하던 안철 선배와 목포 전문대학의 윤석두 교수와 또 합수 형의 동생 영배 형 등 모두 네 명의 회원이 있었다. 내가 막내로 연락 간사를 맡고 있었다. 모임이 정례화 되지는 못했으나 간간히 모여 암울하여 미로를 헤매는 시국이야기를 가끔씩 나누는 형편 정도였다.
5월 중순쯤으로 기억되던 어느 날이었다.
합수 형이 목포에 왔다. 하루 저녁을 같이 지내며 목포의 또 다른 지인 등을 소개하신 합수 형은 답답해하며 침이 타들어가는 심정을 토로했다. 형은 다음날 목포 떠나시며 틈나는 대로 광주현대문화연구소를 들려줄 것을 주문하였다. 며칠 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80년 5월 17일 나는 광주에서 현대문화연구소와 양서조합 등을 옮겨 다니며 합수 형 특유의 감각적 시대진단을 들었다. 형은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는 당시 광주에 들를 때면 중고교 은사님이시던 박행삼 선생님 댁에 머무르곤 했었다. 합수 형과의 인연도 박 선생님을 통해서 처음 시작되었다.
계엄소식에 밤늦도록 잠 못 이루던 5·18의 아침이었다. 누구의 지시도 누구의 외침도 없이 도청으로 도청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최루탄 연기로 자욱한 금남로 충장로를 헤매고 다니다 양서조합을 들렸다. 스쳐지나간 시민 모두 아연실색 그 자체였다. 도무지 방향도 이정표도 없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먹만 불끈 불끈 쥐었다. 무사히 헤어졌을 뿐 종적을 알 수 없는 친구, 선배들. 뿌연 가슴만 안고 나는 광주를 빠져 나가기로 했다.
맨주먹으로는 또 힘으로는 무기력하기 만한 18일과 19일 이틀을 보내면서 예비검속을 당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활동 공간인 목포 소식도 궁금하여 광주를 나가 나주 선배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차편도 차편이지만 광주와 목포 중간 지점에서 양쪽의 근황을 살펴볼 요량으로 나주에서 식당을 하는 선배 집에 하루를 지냈다. 21일 아침이었다.
어린 여학생이 절규하고 있었다.
“나주 시민 여러분, 지금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총칼에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오전 나주 중앙로 사거리에서다. 돌아보면 당시의 상황이 하루는 고사하고 시계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가가 의심되는 때가 때인지라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눈만 끔벅거리고 있을 것인가… 세상을 종잡을 수도 없었고 앞을 내다 볼 줄도 모르는 청맹과니 그 자체였다.
식당을 하는 선배 집에서 아침을 때우고 나니 선배는 내 양복과 구두를 어디에 감추고 바깥출입을 못하게 막고 있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조금은 지켜보는 것도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없이 츄리닝에 고무신으로 식당 문에 기대어 절규하는 여학생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내 눈을 의심했다. 누군가가 앞을 스쳐가면서 보자기인지 수건인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절규하는 여학생 차로 돌진하듯 뛰어가고 있었다. 합수 형이었다!
나는 말없이 형의 팔을 낚아채 식당 안으로 끌어 들였다. 형도 생각지도 못한 만남인지라 깜작 놀라 왠일이냐고 물었다. 나 또한 어찌된 일이냐고 되물었다. 식당 뒷방에서 형과 나는 서로 묻고 대답하며 자초지종을 확인하고 상황을 감지했다. 결론은 광주가 처참하게 짓밟혀 가는데도 사람이 없을 것이니 우리라도 다시 광주로 가자는 것이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우리 둘은 광주로 향해 걸었다.
차편이 끊겨서 광주에서 내려오는 차는 보였으나 광주로 올라가는 차는 없었다. 모든 차량과 사람이 광주와 반대 방향으로, 남쪽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형과 나 두 남자만 아마도 유일하게 광주를 향해 걷고 있었는지 모른다.
걸어서 가기는 처음이었다. 한참을 걸어서 남평 다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석물 공장 옆의 작은 가게에서 음료수 한잔씩 마시며 목을 축였다. 다시 걸어서 다리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놀라 발걸음을 멈춰 섰다. 다리 맞은편 산과 들에서 군인들이 검문소와 초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온 사람들 모두가 우리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한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지켜볼 수도 없었다.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 형이나 나나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더 이상 광주로 갈 수가 없으니 무작정 남쪽으로, 광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같은 남도 땅이라지만 나주와 남평을 차량으로만 지나다녔기에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방향 감각이 전혀 없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지금의 봉황면에서 세지면 일대를 농로와 산길을 가리지 못하고 달빛 아래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꽤나 많은 시간을 긴장한 채로 걸었다. 자연 말수도 적어질 수밖에 없었고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온 산천은 말없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달빛이 아련하게 들길을 비추고 있었다. 적막함을 달래기라도 하듯 형이 갑자기 어깨를 툭 쳤다.
“야! 니가 여자라면 얼매나 좋겠냐! 허허.”
나도 질세라 한 마디 응수했다.
“형이 나이는 많아도 여자라면 나도 시 한수 나오것소.”
평소 같으면 여자 이야기는 입 밖에도 없던 형도 분위기에 따라 바뀌는 걸 처음 알았다. 형과 나는 웃지도 못하고 돌부리만 걷어차면서 걷고 또 걸었다. 저녁도 굶은 상태에다 지쳐서 어디 잠시라도 쉬여볼 민가를 찾아 봤다. 하지만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정말 으슥한 야밤중이 되어서야 불빛을 찾아 어느 집을 발견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보내고 주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형과 나는 헛간을 빌려 덕석 위에서 잠시 기대여 밤이슬을 피해 하룻밤을 달랬다. 아침에 밥을 한 공기씩 얻어먹었다. 주인에게 주변 약도를 대충 설명을 듣고 출발했다.
영암읍을 지나 성전과 작천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주막집에서였다. 목도 축이고 정확한 약도도 물어볼 겸 주막에 들어섰다. 마을 어른들로 보이는 몇 분이서 약주에 세상사를 갑론을박하며 소란스럽게 주막거리를 달구고 있었다.
작천으로 가는 길과 소요 시간 등을 물으며 음료수 잔을 비우고 있을 때였다. 어른 한분께서 우리 쪽 가까이 오셨다. 집이 어디냐고 물으시기에 합수 형이 고향 주소를 말씀드리자 그 어른은 더 자세하게 반문하시며 고향 어른들의 함자를 물어오셨다. 형이 자세하게 말씀드리자 그 어른은 정색을 하시며 “이 사람아 내가 자네 고숙이네!” 하시는 것이었다.
형이 깜작 놀라며 자주 뵙지 못해 몰라 봤다면서 그 특유의 미안한 표정에 뒷머리를 긁어대며 연신 죄송하다고 인사를 올렸다. 그 고숙 어른은 조카 중에서 누군가가 고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네라는걸 몰랐노라시며 당신 댁에서 묶어 갈 것을 권유하셨다. 그러나 형은 갈 데가 있다며 정중하게 사양하고 작천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어디선가 듣기를 강진군 작천 뜰 어디엔가 신선이 노니다 간 집이 있는데 이름하여 용근파의 김용근 선생님 댁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집 주변에 대나무 숲이나 정원이 잘 가꾸어진 집이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 혹시나 김 선생님 댁이냐고 물으면서 오후 한나절을 헤매었다. 그러던 끝에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때쯤 겨우 선생님 댁을 찾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마침 논에 물을 대러나오시던 참이었다. 선생님은 집안에 정용화와 은우근도 와있노라며 집으로 들라하셨다.
이렇게 하여 예정에도 없던 작천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세상사가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겠지만 암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지혜로운 자의 선택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렇게 고민하며 뒹굴어 보았지만 똑별난 묘안은 없었다.
어느 날 합수 형은 아침을 먹고 작천을 빠져 나가자고 했다. 숨 막히는 좌절감, 상상이 되지 않는 내일, 언제까지 작천에서만 안주해 있을 수도 없었다. 걸어서 돌아섰던 성전 삼거리!
운명이란 본디 야속하다는 것이 속설이지만 특히 자신의 운명은 유독 더 야속하고 남다르게 색감을 더 칠하며 살아간다고 치부하지 않던가…
합수 형과 불현듯 이렇게 만나서 이정표도 없이 서둘러 보냈던 시간들을 뒤로 한 채 성전삼거리에서 악수가 그렇게 긴 세월의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산이 모질게 부대끼고 부평초처럼 살아온 숨 막히고 절실한 세월의 아픔은 작게 포장돼서 그가 돌아왔다. 광주 고향으로!
무엇이든 철저하고 열심히 살다간 합수 형. 불러서 다시 올수 있다면 물이라도 건너주고 산이라도 넘어 줄 것이다. 역사라고 하는 모든 것이 회한의 역사로 묶을 수밖에 없는 오늘 그가 더욱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늘진 역사의 뒤안길에서 비도 눈도 마다하지 않고 똥물까지 뒤집어쓰며 합수로 살다간 인간 윤한봉. 이제는 형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망월산의 흙으로 갔다. 다시 볼 수 없는, 가고 없는 분들의 넋을 모아 남은 자들이 두 손 합장하여 그대를 부르리라! 망월동산의 영원한 들불 윤한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