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함, 그리고 깊은 혜안
조 진 태/5․18기념재단 사무처장
“얼른 나와서 물을 퍼내야 겠네” 1993년 7월 언저리로 기억된다. 홍성담 형으로부터 거두절미한 전화 한 통화로부터 윤한봉 선배님과의 일상적 관계 맺음은 시작되었다. 나중에 민족미래연구소로 명명된 사무실을 막 임차하여 청소하던 도중, 장맛비에 그만 배수구가 넘쳐 3층 사무공간에 물이 들어 차버린 것이었다. 부랴부랴 물을 퍼내고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치우면서 수창 초등학교 옆, 육교 골목에 있는 3층 건물, 민족미래연구소이자 윤한봉 선배님의 일상적 활동 공간이 된 그곳과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2년 4월 국회의원 총선 이후 진정추라는 이름으로 ‘윤한봉 선생 귀국서명운동’을 전개한 뒤 10만여 명의 서명용지를 싣고 국회에 청원한 일들이 순간적으로 스쳐가기도 하였다.
사실 그때는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진로에 대한 모색이 정신없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비합법의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준)을 해체하고 합법의 한국노동당(준)을 거친 다음 통합민중당으로 국회의원 총선거에 나섰다가 당이 해체되는 결과를 통절하게 느끼고 있던 차였다. 개인적으로는 80년 5월이 지나고 계엄 포고령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한 이후 노동야학과 노동운동에 투신한 10여년의 운동기간을 송두리째 점검하고 전환해야 할 상황이었다.
선배님께서 완전 귀국 하시고, 진정추 식구들과 광천동 파출소 건너편 삼겹살 식당에서 첫 만남을 가졌을 때였다. 그때 선배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다. 농약 한 방울은 물 한말과 섞여서 병충해를 잡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 석여있지 않고서 무슨 일을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로 기억난다.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선배님은 광주 수창초등학교 뒤, 골목에 위치해있는 3층짜리 건물의 맨 위쪽 공간을 얻어서 서서히 자신의 귀국 생활과 활동을 구상하기 시작하셨다. 그때 나는 그 사무실로 1주일에 한차례 이상씩 찾아뵙고 지역의 상황과 정세에 대해서 선배님께 말씀드리거나 선배님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민족미래연구소라는 간판은 선배님이 사무실을 얻어 단장을 시작하신 뒤에 거의 1년여가 지나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상의하여 결정한 이름이었다.
민족미래연구소는 선배님의 민족적 관점과 민중적 자세와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명칭이었다. 변화한 정세와 상황을 분석하고 연구하여 민족의 미래와 민중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활동을 펼치겠다는 선배님의 뜻과 의지가 담긴 명칭이었다. 민족미래연구소의 개소식에는 70년대 민주화운동의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오셔서 축하하였다. 그때가 95년 3월로 기억된다. 2007년 선배님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문을 닫기 전까지 민족미래연구소와 위 사무실은 혼돈의 시대를 가름하는 나침반이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처였으며 극렬한 상품 세상의 타성에 젖은 사람들에게 회초리의 상징이었다. 그곳엔 항상 따뜻한 차와 정갈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포근한 촌사람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낡고도 낡은 건물의 3층은 아늑하여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마 그곳은 70년대 한국민주화운동의 광주적 상징이었으며 90년대 한국 진보운동의 엄격한 도덕적 잣대였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선배님의 사무실과 선배님을 방문하였으며 당대의 노동자와 대학생 청년들은 변화하는 정세를 묻고 나아갈 길을 찾고자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곳에서 이부영, 장기표, 김근태를 만났고 주대환, 노회찬, 황광우를 다시 만났으며 권영길을 안내하여 진보정당의 어떤 그림을 다시 그리기도 하였다. 노동자 아무개와 대학생 청년 거시기를 수도 없이 만났다. 때로는 형형한 눈빛으로, 때로는 한없이 촌스러운 합수로 변함없었던 선배님과 민족미래연구소였다.
5·18기념재단
선배님께서 94년에 영구 귀국하신 뒤 맨 먼저 앞장서서 하신 일이 5·18기념재단의 설립이었다. 5·18기념재단은 8월에 창립하고 그 해 11월에 당시 내무부로부터 재단 설립인가증을 받았다. 어찌보면 가장 복잡하고 골치아팠으며 견디기 힘든 변화한 '조국' 정세와 사람들을 목격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5·18로 인해 자신의 삶의 큰 궤적을 다시 시작하기도 하셨지만 5·18 때문에 가장 큰 내면의 고통을 감당해야 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5·18이 그랬다. 1980년 5월로부터 14년이 지났고 반독재 투쟁을 전개했던 야당 정치인 김영삼이 대통령이었으며 민주화운동가들이 청와대와 국회에서 잘 나가는 시절이었다. 그런 반면 끔찍하게도 이미 5·18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받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서 소위 광주의 '운동권'은 적잖이 통속화되어 있었다. 정치인의 못된 술수와 시정잡배의 이햇속을 골고루 뒤섞어 놓은 형국이 과거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면면에서 상식화하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그 핵심에 5월이 있었다. 뼈아픈 반성이 있지 않는 한 정말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민주화운동권의 도덕성과 순수성은 차치하고라도 5·18의 훼손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셨다.
조국의 변화와 함께 옛 민주화운동 동료들의 변화에 대해서는 가끔 낙담을 하시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지만 5월 기념행사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에 대해서는매우 통탄해 하셨다.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도 변했지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서 전개되고 있던 정치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특히 518과 관련한 정세는 명예회복을 넘어서서 책임자 처벌을 원하는 전국민의 요구가 거의 87년 6월 항쟁 때의 상황과 비슷한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한편, 5․18 해결의 5원칙 중 하나였던 기념사업에 대해서는 국가기념식을 치르는 것과 예산을 편성하는 일 외에는 국가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상황이어서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단위의 ‘5월운동체’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미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보상을 받기 시작한 유족회와 부상자회 일부 회원들이 재단 설립을 추진하기도 한 터였지만 보상금 중 일부를 출연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재단 설립이 좌초되었었다. 그러다가 전두환이 모은 국민성금이 광주시에 보관중이라는 사실이 몇몇 5월 관련 인사들에게 알려지면서 일부 인사들 중심으로 재단 설립이 재추진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구속자회가 조직적으로 나서서 재단을 설립해야 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그러면서 선배님은 재단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선배님의 재단 설립에 대한 마음가짐은 고스란히 재단 설립 선언문에 담겨있다. 지금 읽어보아도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고 비장했는지 짐작된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도 이권도 아니고 채무이고, 희생이고 봉사입니다. 5월은 광주의 것도,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의 것도 아니고 조국의 것이고 전체 시민과 민족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또한 5월이 광주의 5월로 올바로 서야 진정한 전국화,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각계의 시민들과 5월 민중항쟁 관련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함께 힘을 모아 ……『(재)5·18기념재단』을 마침내 창립하였습니다. 광주가 다시 섰습니다.
5월이 다시 섰습니다.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 임들을 욕되게 하고 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시민들을 분노케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 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 임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하여튼 선배님은 날마다 바쁘게 움직이셨다. 가끔 괴전화와 협박전화가 밤늦게 집으로 걸려온다는 얘기를 하실 때는 어이없고도 허탈한 웃음을 웃기도 하셨다. 물론,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들과 동료들에 대한 실망은 옆에서 뵙기가 민망할 정도로 컸다. 자신의 이해에 따라 후배들을 줄 세우려는 모습과 아무런 원칙과 명분도 없이 ‘내’가 하니까 따라야 한다는 식의 태도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면서도 감정에 이성을 내맡기지는 않으셨다. 냉철하고 치밀하게 일의 전개과정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대책을 강구해나갔다.
온갖 협박과 마타도어를 뚫고 8월 30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12월에 518기념재단 설립허가증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던 날, 그렇게 천진난만하면서도 해맑은 웃음은 처음 봤다.
민들레소극장 이전추진위원회
윤한봉 선배님께서 귀국하신 93년 이래 세상을 뜨기 전까지 선배님의 주요활동과정에 대한 일상적 기억들은 참 많다.
재단 설립 이후 바로 뛰어든 일이 극단 토박이의 민들레 소극장을 살리는 일이었다. 극단 토박이는 잘 알다시피 박효선 선배가 주도해서 설립한 연극 단체이면서 오월극을 무대에 올려 많은 이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었고 미국 LA 민족학교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하기도 한 광주의 대표적인 극단이었다. 그러나 연극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떨어지면서 극장 운영이 어려워졌고 급기야는 사무실 임대료 조차 해결하기 힘들어졌던 것인데 선배님이 나서서 사람들을 조직하고 기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민들레소극장이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모금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이듬해인 95년, 현 예술의 거리에 아담한 소극장을 다시 꾸리게 된 것이다.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우회로, 해맞이 모임
선배님의 미국 망명 도중에 국내에서는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영향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었다. 이때 야당후보인 김대중과 김영삼은 분열하였고 노동자 민중을 대변할 후보로 백기완 선생이 출마하였었다. 선배님은 백기완 선생을 지지하셨고 후원금도 보내셨다. 진보정당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한 운동적 실천을 누구보다 강조하셨다. 그러나 91년에 창당한 민중당은 92년 선거에서 원내 진입은 물론, 정당 존립 유효투표 3%에 미치지 못하여 해산되고 말았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민중당에 합류한 노동운동세력을 중심으로 진보정당을 재창당하기위한 정치운동 단체였다. 진보정당 건설에 대해 절망한 전국의 활동가들은 하나 둘 정치운동의 현장을 떠났다. 광주전남 진정추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채 새로운 정치운동의 모색과 전환을 꾀하였지만 활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였다.
이때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해맞이 모임이 결성되었다. 정성헌 선생이 주축이면서 성유보, 임재경, 최정명 선생 등이 함께 하시고 있었는데 정치인 중에는 이부영 선생이 참여하고 계셨다. 사회의 각계각층이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갖는 진보정당 건설을 염두에 두셨던 선배님은 즉각적인 진보정당 창당의 역량이 미약하다고 보고 상당히 긴 시간과 꾸준한 노력만이 정당 건설의 바람직한 길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계셨다. 해맞이 모임에 대한 선배님의 관심은 이러한 판단의 반증인 셈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수용해서 생활과 운동과 정치의 벽을 허물고(“생운정”통일) 장기적 전망 하에서 민족의 미래상과 진로를 정하고 분야별, 지역별, 단계별 추진 계획을 세우기 위해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계획을 추진해 나아갈 주체세력과 생명과 평화와 자치와 협동을 최고 가치로 하는 새로운 문명운동 추진 세력을 생명정치학교를 통해서 꾸준히 육성해 나가기로 하였다. 장기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한 실로 크고 힘든 과제를 택한 것이다." (98년1월 해맞이 통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정치에서 다소 진보적인 인사들이 원내에 진입하기를 소망하셨다. 그러나 1996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굉장히 실망스런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선배님은 진보정당 건설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우리들은 모든 문제해결의 첫걸음인 정치정상화를 위해, 정치정상화를 위한 첫 작업인 대안의 정치세력 육성을 위해. 정치세력 육성을 위한 정치학교 운영을 위해.
다시는 쓰러지거나 시들지 않고 나날이 성장·발전하고 강화되는 진보정당을 만드는 데 이바지 하기위해 “바보”, “미친놈”, “몽상가” 소리를 들을 각오, 왕따가 될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습니다."(99년 1월 해맞이 소식 제9호)
진보정당 건설의 주체형성의 한 형태로서 영국노동당의 모태역이었던 페이비언 협회를 염두에 두고 진행했던 광주전남 해맞이모임은 진보정당 건설의 우회로였던 것이다. 광주전남진정추가 해체된 이후로 나는 선배님의 이 활동을 전면적으로 보좌하였다. 광주전남 해맞이 모임은 1999년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진보정당추진위원회가 발족되자 자연스럽게 해산하였다. 그리고 선배님은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의 후원회장을 맡으셨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와 김대중 정부에 대한 분노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99년에는 대통령이 주도해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재야 원로를 비롯하여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는 분노하였다. 2000년 9월에 서울의 향린교회에서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를 결성하고 김대중 정부에 맞서 싸울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였고 그해 10월에는 광주전남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기념관 건립이 무산될 때까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선배님은 건강이 안좋으시면서도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서울을 오가며 열정적으로 반대투쟁에 나섰다. 대표단 회의는 물론, 서울시청 앞 1인시위와 당시 고건 서울시장 면담까지 참석하셨고 활동을 위한 분담금도 빠짐없이 납부하셨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전일빌딩 앞에서 1인 시위를 전개하였고 마침내 2005년 4월 노무현 정부가 100억원이 넘는 정부 출연기금을 반환토록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사실 민주정부가 들어섰다는 기대감과 함께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각급 정부조직 참여로 인해 서로 같은 사람들끼리 적이 되어서 싸운다는 국민 일각의 시선도 있었던 터라 대정부 투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까 박정희 기념관 반대 투쟁은 주로 독립운동과 4·19혁명에 참여하신 원로 분들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젊은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다소 어색하게나마 김남주 시인의 장례식장에서 선배님과 김대중 대통령(당시 정계은퇴 선언 중이었다)이 서로 맞절로 인사를 나눈 것을 본 주변 분들에게 선배님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의아했을 수도 있겠는데 어찌보면 박정희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던 행동에 더 분개하셨을 수도 있었겠다.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상임대표 명의로 김대중 대통령께 드리는 글에 선배님의 분노가 고스란히 배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안은 박정희나 박정희 추종자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고 김대통령의 정략의 산물인 만큼 역사왜곡의 오류를 끝내 범하지 않도록 이쯤에서 멈추시고 그동안 방황에서 정도로 귀환해주시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본 국민연대는 우리들의 애국 애족 동지적 충정을 김대통령께서 끝내 외면하신다면 이제까지의 반대 방식을 바구어 3·1정신으로 사생결단의 투쟁을 감행하여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분쇄하고야 말겠습니다. "(2001년 10월 5일 박정희기념관반대국국민연대 상임대표 곽태영, 윤한봉, 이관복, 이필우, 이해학, 주종환, 함세웅, 홍근수)
그런 뒤에 박정희기념관건립운동은 유야무야 되기에 이른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서 국고지원금 환수조치를 취하면서 결국 정부가 주도하려던 박정희기념관 건립은 중단되었다.
"우리들이 승리했습니다. 5년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99년 당시 대통령 DJ가 앞장서고 국회가 만장일치로 동의해 국고까지 지원해 주었으며 서울시장이던 고건씨가 서울-월드컵 경기장 부근의 기막히게 좋은 부지까지 제공해서 추진한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을 우리가 완벽하게 박살냈습니다. ---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는 승리를 자축하며 백서 발간을 끝으로 지난 4월 8일 해산하였습니다. --- 적극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과 박정희 기념관 건립계획을 백지화시키는데 협조해준 참여정부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05. 6.14 윤한봉)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 광주전남대책위원회 활동을 정리하며 대책위원회에 참여하신분들게 보내신 편지의 일부이다.
김남주 시비건립과 들불열사 추모탑 건립
2000년 들어서서는 건강이 갈수록 더 나빠지시는 것을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당대에 살고 있는 사람은 물론,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민주화운동의 동료들을 기리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셨다.
2000년 5월에 광주 비엔날레 공원에 세우게 될 김남주 시비 '청송녹죽'비는 그런 일환으로 선배님이 앞장서서 뛰어다닌 추모사업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직책을 맡아서 일을 직접 추스르지는 않았지만 선배님이 나서서 하는 일이면 많은 이들이 선뜻 선뜻 함께 마음과 몸을 보태는 일은 참 경이로웠다.
홍성담 화가와 그 그룹이 기획 제작한 김남주 시비는 거의 유래가 없는 창작품의 형태로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나무 형국의 푸르스름한 오석과 가만히 뒷전에 서있는 소나무, 그리고 거기에 귀기울이고 있는 시인의 흉상. 시비 건립 장소로 설왕설래 하였지만, 민중 속에서 물봉처럼 살기를 좋아한 시인의 삶의 자세처럼, 시민이 자유스럽게 왔다갔다 할 수 있으며 가족이 쉽게 소풍나오듯 시비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것이 선배님의 뜻이었다.
2000년 5월 시비 건립을 마치고서는 시비건립 추진에 함께 하신 분들과 상의하여 민족시인김남주기념사업회를 해남 기념사업회와 통합한 뒤 해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도록 모든 역할과 과제를 넘겨주셨다.
그 다음에 추켜든 추모사업이 들불열사기념사업이었다. 선배님께 들불야학 출신인 일곱 열사들은 각별했다.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박효선, 김영철.
귀국하시자마자 선배님은 김영철 선생의 정신병치료를 돕는 일을 시작하셨었다. 김영철 열사와 관련이 있는 분들에게 연락을 취하여서는 병원 치료비를 마련하여 전달하는 한편, 정기적으로 빠짐없이 김영철 열사를 병문안하셨다.
박효선 선배마저 암으로 세상을 뜨자 굉장히 안타까워 하셨고 그러다가 2001년에 들불 7열사를 함께 추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 따라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자신이 스스로 회장을 맡아서 추모 조형물 건립과 추모문집 발간 작업에 돌입하셨다.
"취약했던 광주전남 지역 노동운동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최초로 시도되었던 들불노동야학운동에 대한 합당한 운동사적 자리매김이 필요합니다. 야학운동 뿐만 아니라 주민운동, 학생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 5월 항쟁 등 다양한 분야와 국면에 걸쳐 제각기 선국적, 핵심적, 지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광주전남지역 민족민주운동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들불 관련 열사에 대한 개별적, 분산적이 아닌 종합적인 기념사업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짧게는 21세에서 길게는 50세를 일기로 일찍 떠나가신 일곱분의 삶의 자세 또한 하나같이 순수하고 성실했으며 헌신적이었기에 오래오래 기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 발족 취지문, 2001년 6월 28일)
이때에도 조형물 건립의 총감독은 홍성담화가가 맡았다. 그리고는 2002년 5월에 1년여의 홍보, 모금활동을 통해서 지금의 5·18 자유공원 입구 왼쪽에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우면서 의미가 깊은 들불 추모비를 세우게 된다. 그 시기에 맞춰 '들불의 역사' 라는 제목의 문집도 발간하셨다.
이 기간에는 다소 색다른 이유로 마음 고생을 겪으신다. 우선 총감독을 맡은 홍성담 화가에 대한 비방과 헐뜯기가 선배님 주변의 옛 민주화운동 동료로부터 시작되어 광주 저자거리에 근거없이 떠돌았다. 김남주 시비 건립 추진 때에는 시비에 새길 글씨에 대해서 딴지를 걸며 흠집을 내려 하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노골적으로 봉사와 헌신으로 추모비 제막에 나선 홍성담 화가를 그림이나 그려라느니 부적격하다느니 등으로 매도하면서 들불열사 기념사업회의 활동에 훼방을 놓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인터넷 매체에 모 인사가 유형의 추모사업을 혐오하며 무형의 정신계승 사업 만이 전부인양 선동하면서 연일 들불기념사업회의 활동을 비방하는 것이었다. 선배님은 아예 거들 떠 보지도 않으셨지만 썩어가고있는 '광주'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다. 이 와중에 또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는데, 모 스님이 본인 스스로 뭔가 기여할 바를 찾겠다고 하면서 음악 공연을 통해 들불기념사업을 돕겠다고 나섰다가 사전에 아무런 설명이나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공연을 취소하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발족 당시의 약속에 따라 추모 조형물의 건립과 문집발간을 완수하고 나서 2003년에 자진 해산하였다.
2004년 6월에는 "지속적인 기념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한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사단법인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만들자고 뜻을 모았" 고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계승 발전시켜 다수 대중이 참여하는 지속적이고 생산적인 기념사업, 추모성 기념사업이 아닌 계승성 기념사업, 과거지향적이 아닌 미래지향적인 기념사업, "들불상" 시상을 주된 목적사업으로 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해나가기 위해" 사단법인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다시 발족시키게 된다.
역시 선배님은 초대 이사장을 스스로 맡으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바대로 전국 각지의 각계각층 모금을 통해서 박기순(여성노동자), 윤상원(남성노동자), 박용준(모범 소년소녀가장), 박관현(인권), 신영일(지역청년운동), 김영철(빈민), 박효선(문화) 열사 상을 제정하여 시상식을 전개하셨다.
선배님의 인간적 풍모와 일상
민족시인 김남주 시비 건립을 위한 일, 박정희 기념관건립 반대 운동에 전력을 다한 일들, 들불추모비 건립을 위한 일들은 선배님의 인간적 품격과 운동가로서 일을 대하는 태도, 아주 사소하게라도 일에 보탬을 주신 분들에 대한 일처리 과정의 성실한 마무리는 도저히 쉽지 않은 일들이었고 그것은 뭇 후배 활동가들에게 귀감이기도 하였다.
쉬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철두철미, 솔선수범이었다. 사무실에 들여다 놓은 난과 화초는 하나도 말라죽지 않았다. 사무실 바닥 청소는 손수 하셨다. 1년에 한 차례 미국에 다녀오실 때에는 각각의 화초와 나무에 물을 줄 날짜와 양을 메모해주셨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어른들을 챙기셨다. 백기완 선생께는 1년에 한 차례 씩은 찾아뵙고 선생이 좋아하시는 개고기를 몇 근씩 꼭 사다드린 얘기를 들었다.
선배님의 인간관계는 도무지 상상할 수 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 분 중 아낌없는 후원자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미국에서 알게 된 노부부이신데 노부부에게는 천안의 어디쯤에 매우 넓은 땅이 있었다. 그 땅을 선배님이 하시는 일에 내놓겠다고 하였다. 자식들도 노부부의 뜻에 동의하였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게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서 노부부가 나이가 더 들자 자식들 간에 재산 다툼이 일고 그 기증하려던 땅도 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선배님은 얼른 포기하셨다.
선배님의 인간관계 폭은 헤아리기가 힘들다. 정치인들 중에는 후농 김상현 선생과의 관계가 이채로웠다. 어느 날 갑자기 김상현 의원 출판 기념회에 가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 김상현 선생과의 인연을 소개하시는 거다. 그리고 미국 망명 시절 대놓고 만나기가 어려웠던 시절에도 김상현 선생은 꼭 자신에게 연락을 하시거나 만나셨다는 얘기까지.
회의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연락을 제대로 취하는 것은 기본. 회비를 걷은 내역은 물론, 사용처 까지도 10원짜리 하나 틀려서는 안되는 것. 한번은 해맞이 모임 때 소식지에 컬럼 형식의 글을 허락도 맡지 않고 회원들에게 발송하였다가 단단히 혼난 적이 있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셨다. 한동안 먹먹해서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어서 핑계를 대고 따로 밖으로 돌면서 해결한 기억이 난다.
사안이 민감한 회의일수록 회의의 성원과 상정할 안건, 그리고 안건의 처리 등에 대해서 치밀하게 따지고 따져서 준비하셨다. 제2, 제3의 대안을 미리 점검하여서 대처하던 모습은 단지 입으로만 원칙을 주장하고서는 자신은 아무런 실천을 하지 않는 말만 앞세우는 운동가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강연도 치밀했다. 객관적으로 발표된 통계자료나 공신력있는 자료를 모두 스크랩하여서 분류보관 하였다가는 그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정세판단과 일의 전망을 설파하셨다. 사람살이의 일상 속에서 비유를 찾아내어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는 데 탁월하셨던 것 같다. 듣는 이들을 자신의 주장과 이야기 세계로 끌어들이는 설득력이 대단하였다.
자신이 한 약속은 끝까지 책임을 다하셨다. 들불 추모비 건립을 전개할 때 기금마련을 위한 공연준비를 하면서였다. 포스터도 만들고 티켓도 만들어서 회원들에게 배포하고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그런데 돌연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공연하겠다는 분이 취소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고심 끝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니 공연은 취소하자하셨고 티켓을 발송한 분은 물론, 이미 구두로라도 연락이 되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화와 편지를 통해서 공연 취소 내용을 알렸다. 그리고는 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예산 모금에서부터 뜻에 동의하여 참여하신 분들까지 빈틈없이 연락을 취하고 일을 마무리 하셨다. 일의 마무리에 있어서도 결코 흐지부지 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건강이 많이 나빠져서 치료에 전념하여야 해서 민족미래연구소의 문을 닫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선배님은 스스로 편지를 써서 그동안 관계하시던 단체와 개인들에게 모두 편지를 내셨다.
선배님이 영구귀국하신 이래 국내에서 전개하신 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선배님 자신의 건강악화에 대한 대처 방식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주 재밌는 옛날 얘기를 하듯이 천의선도와 중국 조선족 할머니 얘기를 하시면서 자신의 지병을 지극히 객관화시키고 생물시간에 뭔가를 관찰하는 학생처럼 구구절절 묘사하시던 기억이 난다. 선배님의 인도에 따라 천의선도의 기를 뚫는 행사에 참여한 기억도 새롭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선배님의 건강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창초등학교의 육교 계단을 오르시는 것을 매우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고서야 깜짝 놀랐었다. 자신의 지병에 대해서 얘기하실 때 마치 농부가 일하다보면 손발이 갈라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지극히 평온하고 즐겁게 말씀을 하셨던 까닭도 있었겠다. 항상 낙관적이고 사람 대하시기를 편안하게 하시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렵고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깊은 관심과 함께 거리낌 없이 소탈하게 자신이 할 일을 하시는 모습에 익숙해진 것도 선배님의 건강에 대해서 크게 여기지 않았던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아아, 마음속 한편으로는 이 양반이 자기 정리를 하고 계시는구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민족미래연구소를 정리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가 그러했다.
사사로이는 세상을 뜨시기 전 미국에 가셨다가 휠체어를 타고 광주공항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체력이 다 소진되어서 마치 가까스로 헌 육신이 맑은 영혼을 붙들고 있는 형상이셨다. (선배님이 세상을 뜨신 뒤 나는 뉴욕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뉴욕청년학교의 한 후배로부터 윤한봉 선배님과 헤어질 무렵의 얘기 한 토막을 들었다. 귀국하기 전 마지막 날 밤, 숙소의 엘리베이터를 혼자 기다리면서 통곡하시던 선배님의 모습에 관한 얘기였다)
그리고 또 한 번. 광주의 여동생 댁에서였다. 그날은 선배님께서 새로운 당부를 하셨다.
“각기 살고 있고 활동하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무엇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 물을 때는 신뢰할 만한 사람을 소개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슨무슨 얘기는 누구에게 물어보면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는 식으로 정확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 좋은 사람들끼리 특별한 일 없이도 만나서 상호의 신뢰를 쌓아가는 일을 해야 한다. 어른들께 인사부터 다니자. 그래야 어른들도 제대로 된 정보를 듣고 처신을 제대로 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은근히 힘이 솟는 것도 느꼈지만 돌아 나오는 길이 아득하여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었다.
선배님이 세상을 뜨시기 전, 더 나빠지시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진행한 일이 선배님의 생애사 구술 채록이었다. 민청학련 관련되시는 분들 중 광주전남 활동가 대상으로 진행한다는 설명을 전제로 진행하였었다. 그리고 그 뒤 한차례 더 5․18기념재단 설립의 전후 배경과 초기 진행과정에 대해서 구술 채록하였었다. 눈물나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다.
사람관계의 변화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잘 살피면서 앞일을 내다보시던 윤한봉 선배님의 통찰과 혜안이 나날이 절실하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