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과 진보정당 노 회 찬/진보신당 대표 윤한봉은 광주다. 광주의 과거는 윤한봉의 역정이었고, 광주의 현재는 윤한봉의 고뇌였으며 광주의 미래는 윤한봉의 꿈이었다. 윤한봉이 다 끝난 5·18에 집착한 것은 과거를 바로 세워야 현실을 올바르게 개척해 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5·18정신에 올바르게 뿌리내릴 때만이 현실의 나무도 미래를 향해 제대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보낸 12년간의 망명기간 중 전반부 6년 동안 윤한봉은 5·18을 알리고, 5·18의 뿌리를 내리고, 5·18을 짓밟은 세력들과 싸우는데 그의 혼과 땀을 바쳤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파업투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 군사독재세력이 후퇴하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고,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지만 이러한 한국의 민주화도 윤한봉의 망명생활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였다. 윤한봉의 미국망명 기간 중 후반부 6년은 조국에서 민주주의가 새롭게 시작한 초기 6년에 해당한다. 민주화의 내용과 방향, 주체와 전략에 대한 고민과 논란과 갈등과 대립은 조국이나 망명지나 마찬가지였다. 윤한봉에게 광주의 현재는 광주시의 현재가 아니었다. 5·18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것은 과거의 회상을 굳혀나가는 것과 무관한 일이었다.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방향과 전략에 관한 문제였다. 윤한봉에게 진보정당은 바로 1987년 6월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은 광주의 현실과 미래이며 5·18의 현재와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1993년 5월, 12년 만에 윤한봉이 조국 땅을 밟았을 때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갓 지은 판잣집마저 무너져 버린 폐허 그 자체였다. 1987년 민주화와 진보정당운동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역사는 한국 민주주의가 겪은 억압과 왜곡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창당된 진보당은 1959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의 사법살인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진보당 역시 붕괴하였다. 4.19혁명 이후 잠깐 찾아온 민주화의 시기에 다양한 혁신정당들이 출몰하였지만 이 역시 6.15군사 쿠데타 세력에 의해 해산 당하거나 감옥으로 보내졌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5·18을 진압하고 전두환 독재체제로 전환된 이후에도 진보정당운동은 긴 겨울잠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다시 시작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진보정당운동에도 새로운 봄을 꽃피게 하였다.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있고 폭압적인 국가기구에 의한 탄압 역시 지속되고 있었지만 누구도 거슬릴 수 없는 민주화의 대세와 함께 진보정당운동은 새롭게 모색되고 있었다.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노력은 직선제개헌 이후 실시된 1987년 12월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독자후보를 출마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중 정치세력화의 대의와 정강정책을 알리면서 창당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독자후보로 출마한 백기완은 선거 막판에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하였지만 독자후보 운동세력은 1988년 총선을 앞두고 민중의 당을 창당하였다. 민중의 당은 창당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하고 해산되면서 진보정당운동은 진보정치의 척박한 조건에서 당 건설이라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민주화와 더불어 진보정당운동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갓 출발한 진보정당운동이 처한 주객관적 어려움은 거의 전면적이었다. 국가보안법은 물론 신생 정치세력에게 불리한 선거제도와 정당제도도 어려움을 가중시켰고 진보정당은 곧 친북세력 혹은 운동권 정도로 인식하는 국민의식 역시 갓 출발한 진보정당운동에 힘든 장애물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어려움은 객관적 조건에 있기보다 주체적 조건의 문제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끌어온 세력은 물론 민중운동 내부에서조차 진보정당운동은 광범위한 세력의 동의를 얻지 못한 상태였다. 합법정당 건설을 통한 정치세력화는 필연적으로 개량화 되고 종국에는 청산주의로 귀결될 것이라는 좌파적 반대로부터 민주정부 수립조차 불확실한 상태에서 진보정당운동은 군사독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적전분열에 다름 아니므로 우선 민주정부를 수립한 후에 진보정당 문제를 논의하자는 우파적 반대에 이르기까지 논란은 증폭되고 있었다. 1990년 민중당의 창당은 그간 여러 갈래로 추진되어 온 진보정당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당 창당은 1987년 이래 진보정당운동이 부닥쳐온 장애물들을 모두 해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중당의 창당을 계기로 창당문제를 둘러싼 민중운동진영 내부의 대립은 보다 격화되었다. 1992년 3월 제13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한 석의 의석도 얻지 못하고 전국 득표율 2%의 벽도 넘지 못하였다. 당은 등록취소 되었고 이우재, 장기표, 김문수, 이재오는 민중당 재건에 반대하며 진보정당운동 자체로부터 떠날 것을 선언하였다. 진보정당 재건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결성하고 기나긴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였다. 귀국과 한국의 진보정치 1993년 5월 윤한봉이 12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할 때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귀국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김포국제공항으로 나갔다. 진정추 광주시 지부는 윤한봉의 귀국을 촉구하는 광주시민 수만명의 서명을 받는 운동을 전개한 바 있었다. 물론 진정추에는 5·18 이전부터 윤한봉과 함께 반독재운동, 민중운동을 함께 한 동지들도 있었다. 그러나 윤한봉과 진보정당은 이러한 인간관계나 개인적 배경을 뛰어넘는 역사관과 철학,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과 운동전략에 바탕을 둔 그의 이념이자 정치노선이었다. “12년 동안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구나. 아니 못된 방향으로만 더 세련되어 버렸구나”는 그의 탄식처럼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윤한봉의 눈에 비친 한국정치의 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는 외쳤다. “부패하고 타락한 저질 정치, 권위주의 정치, 지역주의 정치, 금권정치, 붕당정치의 개혁은 가장 절박한 시대적 요구이다. 살벌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다른 모든 냉전 잔재의 청산을 위해서도 갈 데까지 간 지역주의 문제와 악독하고 타락한 사회 문제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최우선적으로 정치개혁을 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정부와 여야 각 당과 정치인들은 냉전잔재의 청산과 정치개혁 추진에는 별 관심도 갖지 않은 채 원칙도 명분도 없는 이합집산과 이전투구로 세월을 보내고 있어 충격을 받았다.” 윤한봉은 그가 꿈꾸는 민중세상, 대동세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정치변혁이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선 강력한 진보정당의 육성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윤한봉이 양 김씨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면서도 독자후보로 나선 백기완을 지지한 것은 바로 독자후보운동을 통해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분단냉전 특수상황 때문에 우주에 유일하게 진보정당이 없는 나라이다. 대중들은 진보정당을 갈망하는데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해줄 진보정당이 없으니까 한민당 이래 한국의 야당들은 의사(擬似) 진보 특수를 누렸다.”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몫까지 챙겨온 보수야당은 진보정당의 출현과 성장과정에서 넘어서야 할 현실의 장벽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윤한봉은 스스로 정치인의 길을 피했다. 한평생 사회운동가, 변혁가로서의 삶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에 대한 그의 신념과 애정은 늘 강하고 따뜻했다. 그리하여 윤한봉이 귀국한 1993년 이래 진보정당운동이 오랜 기간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는 동안 윤한봉은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불굴의 확신을 심어주는 정신적 지도자였으며 진보정치의 방향을 함께 논의하는 정치적 동지였고 강력한 후원자였다. 윤한봉의 꿈, 진보정당 2000년 1월 오랫동안 윤한봉이 바라던 진보정당은 창당의 기치를 올리며 출발하였다. 그리고 2004년 10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며 43년만에 원내진출을 이뤄냈다. 살아생전에 이런 기쁜 일도 겪는구나라며 누구보다 기뻐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오랜 기간 진보정당운동을 지켜보고 지원해온 윤한봉은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현실의 대중에게 깊이 뿌리 내리려면 운동의 노선과 활동 방식에 있어서 일대 혁신이 요구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하였다. 누구보다 원칙적이면서 누구보다 유연하고 현실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윤한봉은 진보정당운동에 있어서도 노선의 원칙과 실천의 유연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오늘날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직면한 현실 역시 진보정당 스스로의 끊임없는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오랫동안 윤한봉이 꿈꾸어 왔던 진보정당의 꿈은 이제 살아남은 자들의 현실 과제가 되고 있다. “확고한 정책정당, 투명한 민주정당, 분명한 책임정당, 진실한 도덕정당, 기본적인 운영비를 당원들의 당비로 해결하는 튼튼한 자립정당, 지역주의를 배격하고 20-30대와 여성 노동자 농민이 절반씩을 차지하고 장애인들이 10%를 차지하는 각계각층의 국민정당,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창조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며 노동조합, 공무원, 언론인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고 평화 군축을 추진하는 진보정당, 모든 국민들이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 문화적 안정과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하는 녹색 문화 정당, 민족의 위대한 미래상을 마련하고 진로를 제시하며 냉전 잔재 청산을 위해 적대적인 대북관계를 협력과 공존의 관계로 바꿔 평화통일을 준비해 나가고 불평등한 대미관계를 대등한 우방관계로 정상화시켜 민족의 존엄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치열한 국제경쟁과 동북아 주도권을 둘러싼 미, 중, 일의 대결에서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 민족정당,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고 세계 각지의 울부짖음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국제정당이 이 땅에 창립되어 꿈과 감동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 나라, 이 겨레와 국제사회에 은하수 같은 꿈과 아지랑이 같은 감동을 21세기 맞이 선물로 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이런가?”(윤한봉 회고록 ‘망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