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내 짝꿍, 내 친구 윤한봉
최 병 상 /합수 윤한봉기념사업회 이사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성으로 지긋지긋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봇물처럼 터지던 1980년의 봄, 의식교육을 받고 갈등기간을 거쳐 시위에 한 번도 가담하지 못한 새내기 농민 회원이었던 나는 광주에서 모이는 전남기독교농민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조금 늦게 도착한 그 곳에서는 깡마른 청년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지금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다. 전두환이를 몰아내지 못하면 또다시 피바다 세상이 될 것이다.”
전두환이가 누구지? 처음 들어본 낯선 이름을 들먹이며 당시의 엄중한 정세를 얘기하면서 “내 빤스(팬티)라도 벗어줄 테니까 화끈하게 밀어붙이자!”
주먹을 불끈 쥐게 하고 그는 총총히 떠났다. 그런데 그가 윤한봉이란다. 어? 내가 알고 있는 윤한봉이와 지금의 윤한봉이가 같단 말인가?
중학교 1학년 때 4.19혁명을 맞았고 2학년 때 5.16군사쿠데타를 겪은 우리 세대는 허기진 50~60년대를 통과해야만 했다. 당시, 처음으로 장학생을 선발한 조선대 부속중학교에 전남 각지에서 수많은 초등학생들이 응시하여 3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는데 운 좋게 합격한 무안의 나는 강진의 한봉이와 동문이 될 수 있었다.
1학년 때의 한봉이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키가 작아 2번인 나는 1번의 인구와 한 짝이었고 키 크고 순해빠진 화욱이, 병직이, 싸웠던 춘성이, 노래 잘 하던 덕철이, 항상 1등만 하던 호신이. 2학년 때는 장학생만으로 꾸렸던 7반을 골고루 다른 반으로 분산시켰는데 어떻게 나는 한봉이와 함께 5반에 편성되었고 한 책상에 앉게 되었다.
당시에 그는 다혈질이고 급하면서도 똑똑했다. 그러나 으스대거나 나서지 않았다. 글씨는 매우 속필이었고 동글동글한 체였었는데 노트 정리를 똑소리나게 잘했다. 미루는 게 습관이 돼버린 나는 늘 그의 노트를 빌리는 단골이었다. 그의 잘 정리된 노트는 정평이 나있어서 서로 빌리려 했는데 우선순위는 늘 나의 것이었다. 한봉이는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소한 이유로 딱 한번 다툰 기억이 있는데 책상을 절반으로 나눠서 어떤 것도 자신의 영역으로 못 들어오게…. 중학시절의 한봉이와의 추억은 여기 까지다.
그는 광주일고를 거쳐 전남대학에 진학하였고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1980년의 봄 광주에서 극적인 조우가 이뤄졌으나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전두환의 폭압을 피해 미국으로 밀항하여 민족학교를 세워 재미동포들의 애국애족 의식고취와 고국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있었다.
상록수를 꿈꿨던 나는 실패를 반복하면서 사회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일부러 저 농산물 가격 정책을 펴 이농을 촉진시키고 농민들이 지속적인 저임금 노동자 공급원으로 이용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광주 YWCA에서 ‘전남기독교농민회’ 총무로 4년,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전국사무국장으로 5년을 일했다. 1992년 4월에는 『UR반대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이름으로 미국에 항의 방문하는 조직을 구성했다.
방문단은 각 교단 총회장과 총무, 공대위 집행위원장, 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사무국장인 내가 포함되어 구성 되었다. 13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악의 본거지 미국의 뉴욕공항에 도착하였다.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신기해하는 나를 승객들도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기독청년들을 통해 한봉이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물론 중학교 동기라는 신원을 밝혔다. 짧은 4박5일 방문이었기에 워싱턴, 뉴욕에 있는 교계와 농무성을 방문하여 합의서한, 협조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인근의 버지니아 농장을 견학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다 되었다. 뉴욕공항으로 나가 출국 채비를 하고 있는데도 한봉이 한테 연락이 없어서 만남을 포기했다. 졸업 후 18년 만에 광주에서 조우했는데 몰랐고, 다시 12년이 흘러 이곳에서 만나려 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검색대를 통과하려는데 헐렁한 개량한복, 흰 고무신에 똥가방 하나 얻어 메고 한봉이가 달려 왔다. 헤어진 지 꼭 3년만이다. 말똥말똥한 눈망울, 얇은 입술은 그대로고 광대뼈는 더 도드라져 있었다. 나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지만 그는 나를 확실히 떠올리진 못했을 거다. 그래도 그는 뜨겁게 포옹해주었고 애들 과자라도 사다 주라며 호주머니에 300달러를 넣어주었다. 한봉이는 사양하는 내 손을 저지하고 민족학교 청년들과 부리나케 사라졌다. 채 5분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갑고, 부끄럽고, 무서웠다. 5·18 군사 쿠데타시 검거 되었으면 사형을 면치 못했을 터인데 이렇게 살아서 30년만의 해우를 이룬 것이 반가웠고 국내에서 모금이라도 하여 전달할 생각은 못하고 오히려 받았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노태우 정권하에서 여전히 5·18의 수괴로 지목된 그에게서 자금(?)을 받았으니 무서웠다. 그래서 가족에게도, 동료들에게도 정권이 바뀐 뒤에야 사실을 고백했다.
DJ의 미국 망명시 잘못을 비판한 악연(?)으로 뒤늦게 고국에 돌아온 그는 민족학교의 동료 신경희씨와 결혼하였고 광주에 보금자리와 일터를 폈다. 그러나 더 이상 도시에서 지낼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어 바닷가에, 평지의 소나무 밭이 가까운 곳에 지내고 싶다고 하여 3면이 바다인 무안이 좋을 것 같아 몇 곳을 둘러 봤으나 적당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바다는 없지만 공기 좋은 산 밑 동네인 우리 마을로 오라고 강권하여 비어 있는 집을 살펴보게 했는데 주인이 자기네 친척에게 판다고 거절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우선은 무안읍에 아파트를 얻어 지내다 바닷가에 새 집을 짓기도 하고 매제의 도움을 받아 홀통 해수욕장 부근에 밭을 샀다.
금광아파트에 이사 온 그는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바닷가 쪽을 둘러 볼 때도 몇 발자국 걸으면 반드시 앉아서 쉬지 않으면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아파트를 찾을 때 보면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스크랩한 자료를 파일에 꽂기도 하고 꺼내기도 하며 정리하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보였던 노트정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어렵게 지목변경하고 전봇대를 4개나 세우며 전기를 끌어와 집지을 채비를 하였는데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인근의 밭주인이 길을 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동원해 한봉이가 누군가를 설명했고 길을 내주는 땅 값을 많이 주겠다 돈이 필요 없으면 소용되는 땅의 두 배를 떼어 주겠다고 사정해도 거절하였다. 이유인즉 자기들이 사려고 한 땅을 사버렸다는 앙심(?)때문이었다. 군부독재와 맞서 평생을 싸우다 망가진 사람이 건강회복을 위해 집을 짓겠다는데 이럴 수 있느냐 항변해도 마이동풍이었다. 농촌의 미덕과 순박함은 사라진지 오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찌든 모습이었다. 지금도 그 곳에는 전봇대만 덩그러니 서 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 폐기종의 악화는 더 이상의 인내를 허용치 않고 결단케 했나 보다. 팔팔 뛰어도 성에 차지 않을 그가 겨우 최소한의 건강유지만 하면서 손 놓고 있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불확실한 폐 이식을 받기로 작정하였다. 간 이식은 상용화 되어 기증자만 있으면 시술이 가능한데 폐 이식은 보편화 되지 않고 유일하게 서울의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만 가능한데 그것도 대기자가 많아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접수 순서는 네 번째이나 상태가 가장 심해 기증자만 나타나면 1번으로 시술해 주기로 하였단다.
병원에서 연락이 오면 3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바닷바람을 쐴 수 있는 목포 뒷개 쪽에 아파트를 얻어 이사하였다. 그곳은 서해안 고속도로의 끝이니까 언제든 곧바로 상경할 수 있는 곳이다.
이사 가는 날이었다.
“서울 갈 때에는 반드시 나한테 연락을 해주게!”
“그럴 게!”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인사가 되어 버렸다. 2007년 6월 27일 밤에 그는 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아니 그것도 부담이 되었는지 훌훌 털고 갔다. 미완의 민주주의를 남기고 가는 것이 미안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