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合水) 윤한봉!
이 강/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
유신독재의 먹구름이 한반도에 들이치던 1972년 12월 10일 전남대 개학일을 하루 앞두고 김남주(故시인)와 함께 밤에 ‘함성’이라는 제하의 반유신독재 지하신문을 제작하여 전남대 강의실, 광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일고의 운동장에 약 400매를 살포하고 100매를 남긴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73년 4월에 전남도경 공안당국에 내가 검거되면서 어마어마한 죄목을 뒤집어 씌워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박석무를 수괴로 하는 ‘반국가단체구성예비음모’라는 조직사건을 조작하여 9명을 구속시키고 6명을 불구속에 처하는 조작된 공안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사건이 이른바 ‘함성’지 사건이다. 그러나 얼마나 엉성한 조작이었는지 항소심 재판에서 수괴인 박석무는 무죄, 이강, 김남주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소하였다.
석방 후에 서울대생 이철, 나병식으로부터 전남대 재학생중에 신망받는 학생운동가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함성’지 공범인 김정길이 윤한봉(농대생)을 추천하여 엄격하게 심사(활동력, 조직력, 지도력, 비밀유지 등)하여 이철, 나병식에게 윤한봉을 소개하는 것으로 윤한봉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 발동과 함께 이철 수배령이 발표되고, 학생운동 관계자는 4월 8일까지 수사기관에 자진 신고하라는 날벼락의 긴급조치령이 발동되었다.
4월 7일 윤한봉에게서 연락을 받고 전남대에서 단둘이 만났다. 윤한봉은 그간의 활동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했고 우리 둘은 현 시국에 대처하는 투쟁 방법에 대해 깊은 고민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 윤한봉이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내일이 지나면 어차피 활동을 해보지도 않은 채 전원 구속되거나 피신하여야 할 것이니, 차라리 전남대생 전원(30~40명)이 비밀리에 상경하여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내외신 기자회견을 감행하고 농성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
나는 잠시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내 생각을 말했다.
“지금이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하였고, 수배자 이철을 숨기는 자에게도 사형에 준한다고 하는 엄포를 놓고 있다. 또 광주에서 학생들이 한꺼번에 기십 명이 사라져 버스로 상경하는 경우에 터미널이나, 휴게소 아니면 서울 터미널에서 예비검속이 될 위험이 있다. 어차피 다수의 상경투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싸워도 자기의 지역에서 싸우는 것이 나중에 투쟁이 이어지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러한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헤어졌다.
민청학련 사건 혐의로 재판 도중에 제 1팀으로는 전남대생은 윤한봉, 이강, 김정길 3명이었다. 출정하면서 법정에서 보니까, 한복이 아닌 푸른색 관복만을 입은 사람은 오로지 전남대생 3명뿐이었다. 이것을 보고 윤한봉은 나에게 “입고 있는 복장만 보아도 지역 간의 차별성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농담 아닌 오히려 속 깊은 진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대부분 석방되었다. 나는 농민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뜻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윤한봉은 광주에 머물면서 계속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첫째 민주회복 구속자 광주전남협의회를 구성하여 윤한봉은 초대 회장으로서 참여자 각자의 활동 내용, 친목, 투옥 학생 옥바라지 등을 전개하였다. 1975년 12월 31일 민청학련 관련자 및 따르는 학생들과 함께 두암동 윤강옥의 집에서 1년을 평가하고 새해를 예비하는 의미에서 송년의 밤을 보냈다. 그리고 1976년 1월 1일 새벽 무등산 정상에서 새해 해돋이 맞이를 위해 우리는 등반에 나섰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려 눈이 무릎까지 덮였고 계속해서 쉴새 없이 퍼붓고 있었다.
우리들은 새벽 3시경에 무등산 정상에 이르렀다. 무등산 정상, 입석대 서석대 아래는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발과 겨울철 매서운 칼바람에 가만히 서있다가는 모두 다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서로서로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도 하고, 탈춤을 춘다고 4시간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눈발은 그쳤으나 뒤덮인 먹구름에 해돋이를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무등산 정상의 새해 맞이는 각자의 가슴에 민주화운동의 굳은 결의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가톨릭농민회 전남본부의 교육부장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이라는 새로운 투쟁 과제가 농민운동의 중심과제로 떠올랐다. 서경원, 노금노, 조계선, 전국본부 이길재 등 농민운동가들과 상의해 1978년 4월 중순에 광주 북동성당에서 약 1,000명의 전국농민운동가들이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투쟁대회’를 개최하고, 70명이 남아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이 투쟁 과정에서 단식농성중인 우리들은 외부와의 일체의 활동 연결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윤한봉은 밖에서 시민청년학생들을 규합해 북동성당 단식투쟁을 위한 지원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외부 지원투쟁은 시위 가담 숫자나 주장의 강도가 나날이 확대재생산 되어갔다. 종교계에서도 날마다 연쇄운동이 일어나고 단식농성 4일째 날에는 외부인으로는 최초로 광주 YWCA 조아라 회장께서 몸소 단식농성장에 찾아오셔서 감동어린 격려사를 들려주었다. 단식투쟁 5일째 날에 윤공희 대주교, 농협도지부장, 정보부지부장, 경찰국장, 이길재, 서경원, 노금노, 이강 등이 참석하는 합동회의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서경원의 호된 항의에 농협도지부장이 변명을 해대느라 우왕좌왕 하는 바람에 농협도지부장이 허위주장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났다. 정보부지부장이 바로 그 자리에서 농민측 주장이 올바르고 농협도지부장에게 모든 문제의 원천적 책임이 있다고 선언해 버렸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박정희 군사독재 이래 최초로 농민운동이 승리하는 쾌거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투쟁 도중에 다른 농촌지역 단위의 주요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먼저 단식농성을 중단하고 성당을 나갔던 농민운동가들이 3명이나 경찰당국에 연행되어 있었다. 단식 투쟁으로 인해 비록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은 승리하였을지라도 그 투쟁에 동참하였다가 연행당한 3명의 농민운동가들을 구출이 남아 있었다. 연행 당한 동지들의 석방을 위해 단식 투쟁은 이틀 더 계속되었다.
1978년 여름 전남대 송기숙 교수 외 10인의 교수들에 의해 발표된 ‘민주교육지표’ 선언은 박정희 군사독재의 ‘국민교육헌장’이라는 어용성에 대하여 정식으로 반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교육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갑자기 송기숙 교수를 정보부에서 연행하여 구속하면서 권력은 나머지 교수까지도 모두 해직시키는 인권유린 만행을 자행하였다. 전남대, 조선대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교수석방, 해직반대, 민주교육지표 지지선언의 시위로 해가 뜨고 밤을 새는 투쟁을 나날이 계속하였다. 대학생들도 다수의 구속과 연행, 제적 등의 사태가 연속되는 민주 대 반민주 투쟁의 나날이었다. 이 민주교육지표 투쟁 과정에 윤한봉은 하루도 빠짐없이 투쟁을 직간접으로 지도하였다.
1978년 가을 나는 박석률의 지도와 소개로 이재문 선생을 만나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조직 과제의 하나로서 윤한봉을 주요 가입 대상자로 선정하여 나에게 가입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윤한봉에게 단체의 명칭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 조직에 대하여 어떻게 알았는지, 오히려 나에게 서울에서 혹시라도 누가 나타나서 새로운 비밀조직운동 이야기 하면 단호히 거절하고 오히려 외부인이 만나자고 하면 혼자 만나지 말고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만나라는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1979년 초 결핵에 걸린 나는 요양을 위해 공개 활동을 정리하고 위하여 무안군 삼향면에 있는 결핵요양원으로 가명을 사용하여 입원하였다. 오로지 윤한봉만이 나의 입원 장소를 알고 있었다.
2개월 정도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난데없이 “동아건설 최원석 사장집 강도 사건, 이학영 강도 외 도망자 3명” 운운의 기사가 나왔다. 어느 날 병원장이 나를 만나자더니, 김남주가 1년 전에 2개월 살다가 서울로 갔는데, 이번 강도 사건으로 김남주 신원조사를 왔다며 그리고 친구 이강 입원 운운하면서 정보과 형사가 찾아왔었다. 환자 명단에 이강이라는 이름은 없다고 말하였으나, 경찰당국은 이 요양원에 이강이라는 환자가 입원중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바로 다음날 요양원에서 나와 광주 집으로 돌아왔다.
건강관리 겸 은인자중으로 지내고 있던 중 1979년 10월 초에 갑자기 ‘남조선민족해방사건’ 조직 전원 검거 운운의 신문 방송이 쏟아지고, 이재문, 박석률, 김남주 등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연일 나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피신의 길을 선택하였다. 서울로 올라가서 김완기, 조마노, 장의균의 도움으로 피신 생활을 하였다.
11월 30일 구속되어 4일간의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재판이 진행될 때 윤한봉은 매번 방청을 왔었고, 피고인 수송차량 옆에 와서 “힘내라!”고 한마디씩 하고 돌아갔다. 징역 3년을 살고 1983년에 석방되었다. 그사이에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 출현과정에 광주 전남에서 민족민주운동으로서 5·18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공수특전단의 총칼 학살 만행에 맞서서 총칼 무장투쟁으로 기동타격대라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1주일간의 ‘해방광주’를 만들어 나갔다. 한마디로 현대사에서 가장 잔인한 학살만행과 가장 치열한 광주 전남 민중의 무장항쟁이라는 역사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1993년 윤한봉은 미국 밀항 망명생활 12년을 중지하고 귀국하여 광주에 돌아왔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부분적인 승리 이후에는 주로 타도 투쟁이라는 적대진영적 모순 대결 보다는 주민자치의 개념으로 대안 투쟁을 해나가야 한다는 나의 주장과 미국에서 민족학교를 운영하고 조직을 가꾸어 왔던 윤한봉의 운동론과의 의견에는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큰 틀에선 언제나 대동소이하였다.
1994년 시인 김남주가 췌장암으로 3개월 만에 갑자기 고인이 되었다. 벗을 잃은 아픔에 대하여 윤한봉은 곧 바로 ‘김남주 시인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고인의 매년 주기 때마다 묘소 참배 추모식을 거행하고, 고향 그림전시회를 통하여 기금을 마련하여 기념비 건립 등을 수행하였다.
윤한봉은 LA민족학교 동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신소하씨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5·18기념재단을 창립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나는 그 무렵 사고로 인하여 아내, 이소라를 잃고 나 자신도 2개월간이나 혼수상태로 조선대병원에 입원 치료중이었다. 병원에서 퇴원 후에도 5년여 요양이 필요하다고 해서 나는 민주화운동이건, 시민운동이건, 민중운동이건 모든 운동에 대해서거리는 두고 오직 요양생활로 건강관리만을 하고 있었다. 이때 윤한봉은 민족미래연구소를 창립 개소하였다. 그리고 1977년 5·18기념재단에 나를 윤한봉 자신이 이강의 가입비를 지불하여 회원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997년 갑자기 나를 5·18기념재단의 이사로 추천하여 이사가 되었고, 다시 상임이사로 ? 굼撻퓸?1년간 5·18기념재단에서 새로운 차원의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98년 내 막내아들 이창혁이가 서울대 공대에 합격하였다고 합수는 “엄마도 없는 어려운 조건에서 착실하게 성장하고 공부도 잘 했구나, 앞으로 더욱 잘 하여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병마에 시달리면서 등록금에 보태라고 무려 100만원을 주면서 아이의 사기를 살려주기도 하였다.
2005년이었을까? 노무현 대통령의 5·18기념재단 지원이라는 공약 이행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었다. 200억~300억이라는 예산 지원이 가능해지려면 국회의 결의가 필요한 조치라고 한다. 이러한 절차를 수행하기에는 보훈청 산하 여러 단체들로부터 강력한 항의가 일어나거나 아니면 동일한 수준의 지원을 자기단체에도 베풀어줄 것을 요구하리라고 예상되었다. 이러한 조건을 국회라는 절차나 과정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획예산처에서 매년 5·18기념재단에서 30억 원 이내의 사업계획을 올리면 매년 20억~30억 원씩을 10년간 또는 20년간 지원한다는 계획안을 가지고 나 혼자 윤한봉의 집으로 찾아가서 상의하였더니 바로 동의하고 기획예산처로 연락하여 다음날 상무대 신도시에서 기획예산실장 장병완과 윤한봉 외 5·18기념재단 이사장 및 상임이사, 사무처장 등과 회담하였다.
합수(合水)란 윤한봉의 호(號)는 어떤 의미라고 볼 수 있을까? 생물학적으로는 똥과 오줌의 화합물이다. 그러면서 땅을 다시 기름지게 하는 발효성 비료가 된다. 이것은 인체의 폐기물이면서 땅에게는 다시 지력을 높이는 화학적 성질의 퇴비로 된다. 또 하나는 물의 합수(合水)다. 맑은 물, 구정물이 합해진다. 잘잘한 실개천들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강을 이루어 합수(合水)가 된다. 합수(合水)된 물은 흘러가면서 스스로 자기 정화작용을 일으켜 맑은 물로 환원되어 생명의 안식처가 된다. 물은 또한 날씨에 따라서 물, 수증기, 얼음이라는 동질삼상(同質三像)의 모습으로 자유롭다. 형태야 물이건 수증기건 얼음이건 관계없이 본질은 언제나 H2O 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철학적으로는 합수(合水)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이다.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간에 서로 상통하며 상생하는 것을 합수(合水)라는 단어 한마디로 상징할 수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