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저 사람은 누구인가? (이길주)2018-12-2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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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누구인가?

이 길 주/

 

저 사람은 누구인가?

허름한 웃옷을 입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구부정히 앉아 있는 사람.

몇 주째인가 교회에서 헌금 쏠로를 하며 교회안을 둘러보면 오른쪽 뒷 좌석 김상돈 장로님의 옆자리에 마냥 어색해 하며 앉아있던 그 사람.

몇 주가 지난 후에야 김상원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받았다.

 

나는 1981년경 LA굿사마리탄교회라는 조그만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라고 있었으며 김상돈 장로님 댁에 드나들며 조금씩 민주화 운동이라든가 하는 주제에 눈을 떠가고 있을 때였다. 김상돈 장로님은 예배 중인데도 나의 독창이 끝나면 무조건 박수를 쳐주시는 나의 홴 이셨고 마침 그 교회에는 문성철이라는 UCLA에 다니던 청년이 성가대 대원으로 있었는데 ‘4.19 혁명정신 선양회라는 청년모임의 회장으로 있었다. 나는 그의 부탁으로 그 모임에서 노래를 한 연유로 가끔 이런저런 소위 반정부모임이라는 데서 노래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모임은 <광주수난자돕기회>가 발족되기 전까지는 3.1절이라든지 남북통일이라든지 뭐 이런 제목을 갖은 모임이었는데 왜 반정부 모임이라는 딱지를 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루는 문성철이가 내게 합수씨가 나를 가리켜 저 여자 어떠냐고 물어서 별로 의식화 된 것 같지는 않으나 그냥 괜찮은 여자인 것 같다고 했다고 했다. 그 후 나는 그와 민족학교를 설립하는데 동참했고, 오늘날까지 가히 26년간이나 되는 내 인생에 참으로 살맛나는 하루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그가 주최한 많은 강연회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광주학살의 진상을 폭로하는 사진전시회에 동참하며 내가 설 자리를 찾았다.

 

나는 그를 공식모임에서는 윤한봉 선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기에는 그가 너무나 멀리에 느껴진다. 나는 그를 합수라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를 합수씨라고 불렀고 그가 나를 무어라 불렀는지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생각이 나질 않을까? 그 많은 세월을 함께 보냈는데

길주씨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이선생? 그것도 아니다. 그는 그냥 나를 보면 희죽이 웃었고 호칭을 생략한 채 대화를 이어갔던 것 같다.

그는 늘 걸레를 한 손에 들고 두 무릎으로 민족학교 구석구석을 기어 다니며 훔치고 닦았다. 드디어 셋방이지만 단독주택으로 옮기었을 땐 집주위에 빈자리만 보면 쭈그리고 앉아 무엇이고 심고 가꾸었다. 나는 그때 그의 모습을 가장 아름다운 그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곤 어디엔가 쭈그리고 앉아 담배꽁초를 피다간 내게 잔소리를 듣고는 했다. 어떻게 저 사람에게서 그토록 커다란 의지와 용기가 나오는 걸까?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아주 철없는 여자였던 것 같다. 언젠가 ~이구, 전생에 그냥 나무에 앉아 노래만 했던 새 였을꺼야.” 하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 후 1993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는 그를 보내는 나의 마음은 철없는 나를 바라보아 왔던 그의 마음보다 더 애틋하였다. 그가 없을 이곳의 일들이 걱정이 되었지만 더 큰일을 품에 안고 돌아가는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으나 마치 발가벗은 어린아이를 자동차 쌩쌩 달려대는 큰 거리로 내보내는 두려움을 씻지 못하였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를 보내는 남아있던 우리 모두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한심한 한 가정주부를 이판저판으로 끌고 다니며 이제는 이곳 동포사회에서 꽤나 간이 큰 여자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어떤 분야건 이론에 너무 무식하다. 그건 나의 천성이기도 하지만 나의 선택에 의해서 인 것도 같다. 그가 LA 동포사회에서 조직의 기반을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화 하자 그를 모함하는 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포섭당한 순진한 이길주에게도 여기저기서 충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분들은 그때 진정 그들의 판단이 옳다고 단정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좋게 생각한다. “분명히 안기부의 앞잡이다.” “북한에서 온 간첩이니 상대하지 말라는 등, 정 반대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나를 설득하려하였다. 나는 머리로 결정을 하기보다는 마음으로 판단을 내리는 편이다. 무슨 일이든 별로 어렵지 않게 결정을 내리는 단순한 사람이나 10여 년 그와 함께 한 운동역사에 여러 번의 조직문제가 있었을 때도 그의 본심을 환하게 볼 수 있었던 나는 한 번도 그를 떠난 적이 없고, 한 번도 그의 사업이나 그의 의도를 의심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지금도 그가 이곳 미주 땅에 뿌린 씨앗으로부터 자라 가지 무성히 성장하고 있는 그 아름다운 나무의 그늘 밑을 맴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무식한 듯한 내 식의 결정이 전혀 잘못이었다고는 생각 안 한다.

 

그는 나를 세속적인 종교관에서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사회정의 길을 확실히 보여준 사람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많은 청년들로 인해 그는 교회로 부터도 많은 모함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가 제의한 모든 일을 군소리 없이 받아 들였다. “민족학교 이사장 하시오하면 당시의 상황에 나같이 무얼 모르는 것 같은 여자가 민족학교를 대표하면 영사관의 탄압이 줄어들 것으로 판단되어서이겠지 하고 아무소리 안하고 그 직책을 10여년이나 맡았고, “그 한번 해 보시오. 할 수 있을 꺼요.”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LA 동포사회의 라디오에서 북부조국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했으며, 한인타운 한 복판에 있는 극장에서 <남북가곡의 밤>을 열어 동부의 성악가들까지 초청하여 북부조국의 노래를 열창하게 하였다. “- 한번 가보시오.”해서 사상 처음으로 미주여성고음가수로 북에서 열리는 봄축제에 참여하여 갈라진 조국의 아픔을 노래하고 통일의 바람을 노래하는 일생일대의 기회도 가졌고, 돌아온 후 <민족문화예술인협의회>가 설립되면서 19908월 남, , 해외의 작가들의 작품과 이산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을 담은 시로 작곡한 남북공동창작곡을 <통일예술>지에 실어 출판하는 사업 등의 일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범민련>에도 함께하여 성명서를 읽으라면 읽고 했으며 내 지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사건으로 진흙밭 속을 함께 뒹굴었다. 민족학교 설립 10년째 되던 해, 민족학교 이사장을 지내고 있던 중 그는 전국단체의 시급성을 통찰하고 미교협을 설립하여 나는 미교협의 이사장을 맡았고 그때 심인보씨가 책정한 십만 불인가 하는 일년 예산안에 기절을 한 적이 있다. -저 비용을 어찌 또 해 낼꼬?-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한숨을 쉬었던 그 단체가 올 해로 설립 15년이 되었고 지금은 일 년 예산액이 백오십만 불이 넘는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미주 소수민족단체와 이민단체들의 큰 기둥 역할을 해 내고 있다. 뭘 몰라 겁도 없는 내가 별일 아닌 듯 던지던 그의 한 번해 보시오.”를 믿고 겁 없이 뛰어들었던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나는 그가 그토록 가슴에 피나도록 되새기던 조국에 대한 사랑과 통일의 염원을, 내가 뭐 그리 풍부한 지식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는 사회정의와 인권의 존엄성을 내 가슴에도 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나에게 준 내 인생의 찬란한 선물이며 내가 지금껏 살아오고 있는 길이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 이기도 하다.

 

그놈의 담배!”

지금도 어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한손에 연기 나는 담배꽁초를 숨기듯 잡고 있을

그를 만나면 내가 할 소리고

그는 역시 여전히 고개를 이리로 저리로 틀며

비시시 웃기만 할 거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언젠가 내가 살아온 내 인생을 뒤돌아볼 때

부끄럼 없는 미소 지우며 눈감을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다.

 

나는 지금도 자주 그에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해요?”

~ 잘 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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