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보고 싶어지는 소박한 그 모습
김 수 복/일과놀이 출판사 대표
몇 년 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 ‘아름다운 사람들’ 난에 고 윤한봉 선생을 소개한 글에다가 두어 가지 일화를 곁들여 본다. 매월 연재한 열두 명 가운데 고 윤한봉씨만 유명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름 없는 바닥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윤한봉씨도 바닥사람으로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5월 광주민중항쟁의 최후 수배자 합수 윤한봉’.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은 유명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통령,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 등 이른바 지도자도 그다지 존경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낫다고 여길 수 없고, 다른 인간을 지도할 자격이 없다는 확신에서다. 사실 유명하다는 자와 지도자라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해서다. 나로서는 주님만이 만물의 창조주・주인・유일한 지도자라는 믿음에서다. 그것도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신 목숨을 바쳐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못난 사람들을 섬기는 방식으로 지도하고 다스리신다는 믿음에서다. 그래서 주님만이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다는 믿음에서다. 그런 내가 이미 언론과 방송에 여러 차례 소개된 윤한봉씨를 새삼 소개하려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십년 쯤 전 최권행(실력도 물론 있었겠지만 사람이 좋아서 몇 년 전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교수가 되었지 싶은 후배)이 나를 끌고 광주 변두리에 있는 보건전문대학교에 올라가 오징어 땅콩에다 소주를 먹이면서 한 시간 넘게 윤한봉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나는 윤한봉씨가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하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었다. 그의 형 윤광장씨에게는 한봉씨 오면 대통령으로 만들어보자고 진지하게 제안한 적도 있다. 마침내 허름한 잠바 차림에 가방 하나 달랑 매고 귀국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비칠 때 아, 바로 저거구나 싶었다.
어렵사리 귀국한 한봉씨에게 숱한 사람들이 커다란 기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늙은 총각 한봉씨가 미국에서 함께 일하던 여성 동지 신소화씨와 결혼할 때에는 온 나라에서 하객이 몰려와 그 큰 학교 운동장에 그득 들어찼다.
그 뒤 한봉씨의 행보는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그는 실패할 것이 뻔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출세나 성공하고는 거리가 먼 처신을 하고 있었다. 광주에서부터, 가장 친한 사람들부터 하나 둘 그를 떠나가고 있었다. 스스로 별칭을 합수(*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전라도 말로 ‘똥, 거름’을 뜻한다.)로 지은 한봉씨는 옛날 시골에서 농사짓는 데 소중하게 쓰이던 똥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한 것일까?
79년 10월에 일어난 부마항쟁은 윤한봉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그 정도로까지 폭발적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달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고,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윤한봉은 광주가 피바다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5월 15일에는 한 선배의 아기 돌잔치에서도 또 피바다 이야기를 했다. “전두환 일당은 결국 구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나는 그 시기를 21일에서 25일 사이로 본다. 항쟁은 막을 수 없다. 피해는 줄이되 최대한 정치적 성과는 남겨야 한다. 상징적으로 도청을 점거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그 자리에는 여덟 명이 있었는데, 훗날 그들 중 여섯 명이 항쟁지도부에 합류했다. 윤상원(항쟁지도부 대변인), 박용준(시민군), 김영철(항쟁지도부 기획실장), 정상용(항쟁지도부 외무위원장), 윤강옥(항생지도부 기획위원), 이양현(항쟁지도부 기획위원)이 그들이다. 드디어 5・18 광주시민 살육 작전이 펼쳐졌다. 한봉씨 여동생 윤경자씨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으니 빨리 피하라. 광주를 떠나라”고 기를 쓰며 들볶았다. 윤한봉은 결국 21일 광주를 빠져나왔다. 나주에서 서성거리며 생각해보니 그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잘못했다. 다시 광주로 돌아가 싸우다 죽자”고 결심하고 버스정류소로 가는 데 광주에서 차량을 타고 내려온 시민들이 나주경찰서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태는 이제 무장항쟁으로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윤한봉은 끝내 광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저들이 이미 광주 외곽을 철통같이 봉쇄했기 때문이었다. 27일 도청이 함락되어 광주항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절망감, 무력감, 죄책감 속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마침내 순천에서 기차를 타고 은신처를 찾아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전두환 일당은 윤한봉씨를 5월 광주민중항쟁을 배후 조종한 수괴로 전국에 지명수배를 하고 있었다. 잡히면 당장 사형 당할 참이었다. 서울에서 도피 생활은 정말 지옥과 같았다. 가을이 되어 군사재판이 열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윤한봉은 잡히면 반드시 죽는다.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군검찰관이 귀띔해 주었다고 한다. 자기가 잡히면 숱한 후배들이 당할 게 뻔하다고 생각한 윤한봉은 망명을 결심했다. 정찬용, 최권행, 성찬성 등 동지들이 백방으로 뛰어서 그를 미국으로 밀항을 시켰다. 성찬성이 가톨릭 성서학자 정양모 신부에게서 당시로서는 큰돈인 200만원을 받아 왔다. 정찬용 동생 정찬대씨와 최동현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배 화장실에 숨겼다. 35일 동안 화장실에서 여덟 끼니밖에 먹을 수 없었다. 굶주림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연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였다. 특히 배가 적도를 통과할 때의 2∼3일 간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윤한봉은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마침내 6월 3일 미국 워싱턴주 밸링햄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윤한봉은 미국 시민권을 거부한 채 불안한 망명자의 신분으로 남아 8년 여 세월 동안 한국인 청년들의 민주역량을 모아 ‘재미한인청년연합’을 결성하고 로스앤젤레스에 ‘민족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그리고 제3세계의 여러 민족해방운동단체를 비롯한 정치적 억압과 폭력에 반대하는 미국인 및 세계 자유민들과 한국민주운동 세력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교포들에게는 5월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알리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면서 그들의 애국심을 조국의 민주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실천으로 끌어올리는 일에 몸 바쳤다.
늘 가슴 속에 불을 품고 살던 윤한봉, 그래서 폐가 타버린 윤한봉, 그는 5월 민중항쟁에서 어쩌다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것이 못내 부끄럽기만 했다( 5월 27일 자정 무렵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제발 나와서 도와달라고 애타게 외치는 아가씨의 호소를 집안에서 숨죽이며 듣고만 있던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더 부끄러워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윤한봉씨는 돈・명성・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아주 해탈한 듯 보였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묵묵히 열심히 해냈다.
귀국하여 광주로 온 윤한봉씨는 작심하고 철저한 가난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기 입으로 사회주의자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양복을 제대로 차려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늘 허름한 점퍼 차림이었다. 한참 지난 뒤에야 겨우 여동생의 강권에 못 이겨 12평 쯤 되는 자그마한 서민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음식도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주변 친구들이 거의 다 승용차가 있어도 정신없이 바쁜 그에게는 승용차가 없었다.
성찬성과 나는 그런 윤한봉씨를 유동 아세아다방 등에서 줄곧 뻔질나게 만나곤 했다. 타고난 재담꾼인 그와 함께 앉아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타계하기 전까지 성찬성과 나는 짝사랑하듯 그와 단짝처럼 지냈고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다정하게 지냈다. 그가 세운 민족미래연구소에도 참여했다. 그가 5․18기념사업후원회를 결성해낸 과정의 고충과 우여곡절도 옆에 있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동지들과 더불어 들불기념사업회를 만들어내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윤한봉씨는 김대중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를 김대중씨 팬이라고 놀려댔다. 한 번은 김대중씨가 재기하려고 광주공원에서 연설회를 연다고 했다. 그때 나더러 둘이서 김대중씨를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소갈머리 없는 내가 진지하게 그러자고, 연락하라고 했다.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별무성과라고 생각했었던 듯하다. 윤한봉씨가 김대중씨를 인정하지 않은 데는 그가 쓴 망명기 ‘운동화와 똥가방’를 읽고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나도, 비판적 지지자들과 달리, 우리 민중이 피터지게 싸워서 얻어낸 6․29 항복선언의 결실을 가로채려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아울러서 민족반역자로 제껴놓고 있었다. 뒷날 김대중씨는 민주주의를 지연시킨 한참 뒤에 가서야 비판적 지지자들 판단대로 김영삼과 차별성을 드러냈다는 정도가 내 생각이었다.
또 한 번은, 2000년에든가 윤한봉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노무현씨가 왔으니 함께 아침을 먹자고 했다. 금남로 3가에 있는 무등산이라는 식당에서 예닐곱 명이 추어탕을 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노무현은 여지없는 촌놈 모습에 순한 눈빛이 좋았다. 헤어져 오는 길에 한봉씨가 나더러 “형님, 노무현이가 대통령이 되면 혁명이겠지요?” 라고 말했다. 그의 직감과 바람 덕이었으리라. 2002년 대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였다. 노무현이 제주도에서 2등인가 하고 나서 광주에서 경선을 할 차례였다. 광주사람들은 노무현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 광주 선후배들이 줄곧 모여서 고민을 거듭했다. 노무현을 적극 띄우기로 했다. 박화강, 안관옥, 서대석, 조양훈, 조계선, 성찬성, 김수복 등 십여 명이 뜻을 모아 정보를 교환하고 새벽부터 설치고 다니고 한겨레신문에 “아름다운 바보, 그를 믿습니다” 라는 8단통 광고를 내고서 김광창, 내 아들 김종완 등 스무 명 남짓 후배들이 숨 가쁘게 뛴 결과 그 광고를 선거인단이 읽어볼 수 있었다.
이제 우리 후배요 친구요 선생인 고 윤한봉씨가 가고 없다. 허전하다. 그 마음들이 엊그제 6월 27일 그가 별세한 지 2주기 기념행사에 많이들 모였다. 5․18단체들은 5․18 민중항쟁의 주역인 광주시민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영령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친구들더러 차라리 그 단체들은 해체하고 친목모임으로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솔직한 심경을 내뱉은 적이 있다. 5․18 정신을 잇는 것은 그 단체들이 아니라 깨어 있는 광주시민들의 공동체 삶, 사단법인 들불기념사업회와 사단법인 합수 윤한봉기념사업회의 활동 내용에 달려 있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