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70년대 세계사는 몇 명의 독재자들을 기억한다. 이란의 팔레비, 필리핀의 마르코스, 칠레의 피노체트가 그 예들이다. 그들은 모두 미국의 후원을 받는 제3세계의 독재자들이었다. 이들 무리에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도 낀다. 박정희는 1961년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한 후 18년이나 장기 집권을 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것은 박대통령 일인의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이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대통령의 장기 독재를 보장하기 위한, 일인에 의한, 일인을 위한, 일인의 헌법이었다. 박정희와 그의 군부집단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구실 삼아 대한민국을 거대한 병영으로 바꾸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았고, 교사들은 독재자의 지침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독재의 충직한 하인이 되었으며, 어린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우리 대통령, 일 잘하는 대통령’ 하며 독재자를 찬양했다. 일-일하시는 대통령 이-이 나라의 지도자 삼-3․1 정신 받들어 사-사랑하는 겨레 위해 오-5․16 이룩하니 육-6대주에 빛나고 칠-70년대 번영은 팔-팔도강산 뻗쳤네 구-구국의 새 역사는 십-10월 유신 정신으로
경찰들은 가위를 들고 청년들의 긴 머리를 잘랐고, 자를 들고 다니며 여대생들의 짧은 치마를 단속했다. 하오 다섯 시가 되면 국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국기를 바라보며 경례를 하도록 강요받았다.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볼 때도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영상이 나오면 자리에서 모두 기립했다.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했다. 이어 4월 3일 박정희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 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했다. 박정희와 그의 졸개들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1,000여 명의 대학생들을 검거했고,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180명의 학생들을 서대문교도소에 투옥시켰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조직 명칭은 박정희와 그의 졸개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대학가 술집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일단의 대학생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반체제 조직에 연루되어 대부분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교도소의 마룻바닥에서 찬 겨울을 보냈다. 박정희의 하수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조직의 배후에는 대학생들의 체제 변혁활동을 지도한 인민혁명당이 암약하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도예종, 여정남 등 8명의 청년들로부터 인민혁명당을 결성했다는 거짓 자백을 강요한 뒤 사형을 선고했다. 물론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 선고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박정희는 이들 젊은이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도록 지시했다.
가족들은 너무나 어이없는 현실 앞에 반 미친 사람처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여덟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고 24시간도 채 되기도 전에 가족도 모르는 사이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은 오전 10시부터 목요기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사형당한 분들의 가족들이 함세웅 신부가 계시는 응암동 성당에서 합동장례식을 가지려 했으나 경찰들이 시체를 탈취해서 빼돌려버렸다. 시체를 인수받지 못한 한 부인이 죽은 시체지만 하룻밤이라도 집에서 지내고 화장지로 가도록 그 시체를 반환해달라고 피를 토하는 호소를 했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한 어린 학생이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게 해달라며 경찰을 향해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 1975년 4월 9일, 땅도 울고 하늘도 울었다. 서울대학생 김상진은 불의한 권력에 항의해 자신의 배를 갈랐다. 독재자는 또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1975년 5월 13일의 일이었다. 세 사람이 모여 정치 이야기를 해도 경찰은 영장 없이 국민을 체포했다. 거대한 병영 대한민국이 거대한 감옥으로 바뀌었다. 물론 헌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다. 법률에 의하면 노동자는 단결할 수 있었고, 단체로 교섭할 수 있었으며, 단체행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리는 책 속에서 잠자는 권리였다. 1970년 어느 가난한 청년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세상’을 외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부어야 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2년 이후 대한민국의 노동 현장은 단테도 묘사할 수 없는 끔찍한 지옥이 되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 먼저 달려오는 자들은 경찰이었다. 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은 이 힘없는 노동자들을 연행해 온갖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너희들이 만나고 있는 지식인, 누구야?’ 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지식인들은 또 ‘제3자 개입’이라는 죄목으로 엮여 투옥되었다. 그 시절 노동자들은 숨도 쉬기 힘들었다. 공장 입구엔 분명 ‘노동자를 가족처럼’ 대우하자는 팻말이 걸려 있었으나, 들어가보면 공장은 ‘노동자를 가축처럼’ 부려먹는 착취의 현장이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학생들은 줄기차게 저항했다. 그들은 시위를 감행하고, 감옥에 가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간주했다. 1979년엔 투옥된 민주 인사의 수가 1,000명을 넘었다. 전국 서른 개의 교도소는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투옥된 청년학생들로 넘쳐났다. 독재정권을 후원하던 미국마저 박정희의 야수 같은 압제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제39대 미 대통령 지미 카터는 1979년 7월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로 하여금 투옥된 대학생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무너졌다. 1979년 10월 26일, 그의 충직한 부하 김재규가 미모의 여성들과 함께 벌인 파티에서 총을 뽑았다. 일단의 권력자들이 향락을 즐기던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는 부하가 쏜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가 1980년 5월 한국을 휩쓸었다. 역사는 이때의 민주주의 축제를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불행히도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군부세력이 정국을 장악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밤 12시였다. 전두환 군부집단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것은 사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모든 민주인사들을 체포하고 구속하겠음을 선포한 전쟁이었다. 국민을 적으로 규정한 전쟁 말이다. 광주는 한국에서 매우 특이한 도시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 하에서도 가장 강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한 곳이 광주였으며, 박정희의 철권통치 하에서도 가장 꿋꿋이 저항을 계속한 곳이 광주였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민주주의를 향해 요동치던 한국이 순식간 암흑 속으로 잠겼다. 모두가 침묵하던 그때, 남도의 한 도시에서 ‘전두환 물러나라’는 외침이 울려퍼졌다. 역시 광주였다. 지금부터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 윤한봉은 저항의 도시 광주가 만들어낸 인물이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자신의 장기 집권을 보장하기 위해 유신헌법을 선포하던 날, 공부만 하던 모범생이 돌연 투사로 변신했던 것은 광주라는 정치적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0년 5월 18일 저항의 도시 광주는 항쟁의 도시로 진화했다. 광주민중항쟁 이면에는 윤한봉과 그의 동료들이 지속적으로 벌여온 1970년대의 저항투쟁이 있었음을 잊을 수 없다. 1970년대 윤한봉과 그의 동료들은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을 이끌어온 저항의 구심이었다.
전두환 군부집단의 공격은 잔혹했다. 시위하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발포하는 것은 물론이요, 퇴근 후 집에 돌아가는 시민들까지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젖가슴을 난자당한 채, 온몸에 총상을 입고 죽은 여인의 시체를 우리는 목격해야 했다. 윤한봉은 피신했다. 좁은 한국 땅에서 대부분의 수배자들은 이내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윤한봉의 동료들은 윤한봉의 밀항을 위해 수개월 동안 주도면밀하게 밀항을 준비했다. 일이 잘못되어 선원들에게 붙들렸을 경우 ‘돼지몰이’라 하여 선원들이 밀항자를 바다에 던져 죽여버리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독재자와 끝까지 투쟁하리라 결의한 윤한봉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밀항이었다.
러시아의 레닌도 망명자였고, 베트남의 호치민도 망명자였다. 많은 정치적 망명자가 있었지만, 윤한봉처럼 고국의 동지들을 버리고 왔다는 자책감에 빠져 벌 받듯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들은 존경받는 망명생활을 살았다. 레닌은 스위스에서,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정치적 망명자에 걸맞은 예우를 누리며 살았다.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서재필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현지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가질 수 있었다.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기독교도들의 조직적 후원을 받으며, 프린스턴대학의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 윤한봉은 망명 정치가로서 그 어떤 예우도 받지 못했다. 시애틀에 도착한 1981년부터 마지막 귀국했던 1993년까지 윤한봉은 단 한 번도 ‘망명 정치 지도자’라는 영예를 누리지 않았다. 그는 똥가방 하나 메고 헌 운동화를 신고 미국의 주요 도시를 뛰어다녔지만, 그의 손엔 자신을 알리는 명함 한 장 없었다. 한국에서도 ‘촌놈’이었고, 미국에서도 ‘촌놈’이었다. 그런데 이름 없는 한 사나이가 낯선 땅 미국에 도착해 주요 대도시 10여 군데에서 한청련(한국청년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도 조국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한국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서명을 11만 명 받아낸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윤한봉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캐나다와 호주와 유럽에도 한청련이 결성되었다. 그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윤한봉과 한청련은 서명 용지를 미 의회에 전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그들은 또 해냈다.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300여 명의 대원들이 1989년 7월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감행한 것이다. 윤한봉은 이 모든 일을 뒤에서 묵묵히 수행했다. 죽는 그날까지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윤한봉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망명한 지 12년이 지난 1993년이었다. 김포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은 윤한봉에게 성명서를 읽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가 뱉은 한마디는 이러했다. “나는 도망자다. 5월 광주는 명예가 아닌 멍에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살아가겠다.” 그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