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항쟁에 대해 윤한봉선생 강연하다
사회자) 김경주
그 자체로 전설이 되어버린 분입니다. 지금 그 건강상 요양 중이신데 특강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말씀해주신 윤한봉 선생님 약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948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셨구요. 74년 전남대 농과대 4학년 재학 중에 민주청년학생연합 소위 민청학련이라고 기억하실 겁니다. 그 사건으로 투옥 되셨고 재적되셨습니다. 1971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또 투옥 하셨고, 79년 현대문화 연구소를 설립하셨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재투옥 하셨습니다. 1980년 5월 5.18 광주민중항쟁 관련으로 현상수배 되셨고, 1981년 4월 미국으로 밀항 탈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치망명을 신청하셨고, 1981년 1983년 8월까지 미국에서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재미 한국 청년연합, 한겨레 운동 재미동포 연합, 해외 한국 청년 운동 연합을 결성하여 망명투쟁을 계속 하셨습니다. 1993년 8월 수배가 해제되어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완전 귀국하셨습니다. 1995년 민족미래연구소를 개설하고 지금 소장으로 활동 하고 계시고, 1994년 5.18 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들불기념사업회를 설립해서 들불 추모비를 건립을 하셧습니다. 그리고 들불 7열사 산하 재단에서 2006년부터 시상식을 전개해오고 있고, 현재는 목포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중에 계십니다. 일부러 어려운 자리를 부탁드렸습니다. 윤한봉 선생님 따뜻한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이하) 윤한봉
제가 건강이 좀 안 좋아서, 제가 폐기종에 걸려 폐가 파괴 되가지고 기능을 못하고, 거기다 천식에 허리까지 안 좋아가지고, 지금 집에서 산소호홉을 하고 있어요. 정상인의 약 10여 %밖에 호흡을 못해요. 아주 손 다 떼고 목포로 내려가서 요양 중인데, 할 수 없이 무리해서 나왔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5.18이 이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고, 특히 부정적 영향이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지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 부분에 팽배해 있는 권위적 요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분들은 제 이야기에 상당히 거부감이 들 거에요. 저는 거침없이 평소 제가 보고 느낀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참한 도시, 슬픈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 까 합니다. 5.18 민중항쟁이 일어 난지 벌써 27년이 됐습니다. 당시 20세였던 분은 지금 47세가 됬어요. 27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는 심정으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흔히들 5월 18일부터 일어난 항쟁을 5.18항쟁이라고 부르는데 시각에 따라서는 5월 14일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5월 14일부터 16일 사이 3일 동안 전남대생들이 주도한 민주화대성회가 광주 시내에 있었습니다. 전남대생들이 교정을 빠져 나와서 시가지로 진출해가지고 구 전남 도청 광장을 가득 메운 채로 거기서 집회를 했죠. 그걸 ‘민주화대성회’라고 했죠. 거기에 조대, 전문대생, 교대생들도 동참했고 고등학생들도 일부 참여하고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했습니다. 당시 대성회 도청 앞 분수대 주변에 둘러앉아....나이드신 분들이 50대정도 되신 분들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리고 송백회라고 옥바라지 하시던 여성분들이 식수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오랫동안 분수대 쪽에 앉아 있는 분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러 다니고, 그렇게 범시민적 민주화운동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촛불 시위로 시가지 행진으로 마무리 했구요. 그 전에 전남대 교수들이 4.19혁명 이후 전국 최초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학생시위에 동참해서 금남로를 행진한 특이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민주와 대성회에 대해 언론들도 우호적으로 발표를 했구요. 마지막 날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의하여 0000를 결의하기로 했어요. 그래 그걸 지켜보기로 하고 민주화 대성회를 마친다. 이렇게 해서 민주화 대성회를 끝냈는데 박관현 전남대 총 학생회장이 주도를 했죠. 그 때 약속을 했어요. 당시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계엄을 확대해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 그 다음날 10시에 전대 정문으로 집결한다. 그 약속을 했습니다. 근데 그 약속은 전국 모든 대학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17일 날 하루 쉰 거예요. 서울에서는 5월 13일부터 서울의 모든 대학이 참여하는 연합 시위가 시가지에서 이루어졌는데, 5월 15일 서울역 앞에서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전두환 일당 신군부가 쿠테타를 일으킨다더라, 탱크를 가지고 서울을 진입한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니까, 철군이라고 군대용어를 썼는데, 회군이죠. 해산 해버렸어. 서울역 앞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들이 스스로 패퇴한 거죠. 접촉도 하기 전에 소문만 듣고 겁먹고 꺼트려 버렸죠. 그것이 5월 15일인데 광주는 “그래? 우리는 계속 한다.” 그래가지고 16일까지 했던 거예요. 그런데 5월 17일 밤 11시경부터 전국적인 예비 검속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김대중씨를 비롯한 정치인들 재야 원로들 특히 광주지역에서는 학생운동 출신 사회운동자들 전원을 체포해버렸죠. 그리고 학내에 머물고 있는 총학 간부들 전부 체포해버렸죠. 그게 11시 경입니다. 쿠테타가 일어난거죠. 총검을 찬 군인들이 호위하는 사이 국무회의를 해가지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제주도까지 확대가 되면 사법, 행정 모든 권한이 군부로 넘어가게 되는거죠. 그렇게 해서 전두환이가 실권을 장악하는, 79년 12.12 군사쿠테타를 1단계 쿠테타라고 한다면 5월 17일이 제2의 쿠테타로 정권을 휩쓸어 버린거죠. 광주지역에서도 많이 잡혀 들어갔습니다. 저는 광주가 피바다가 될 것을 예견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대비해서 집에서 안 자고 돌아다니면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갈등을 했기 때문에, 목욕하고 속옷 갈아입고 언제 죽어도 부끄럽지 않게 죽는다고 해가지고 그날 저는 잡히지 않았죠. 그리고 5월 14일과 5월 16일 사이에 있었던 3일간의 민주화 대성회는 5.18항쟁의 예행연습이었습니다. 실질적인 고립화의 시작이었습니다. 3일간의 대성회를 했기 때문에, 5월 18일 날 전국 각 대학이 약속을 지키지 못 했어요. 교문 앞에서 모이자. 숙대, 고대, 계명대 등등에서 일부학생들이 교정앞에 모이긴 했지만 시위로 연결을 시키지 못 했는데, 전남대만 10시경에 약 500명이 모여서 착검하고 있는 계엄군들하고 충돌을 했죠. 거기서 무자비하게 대검으로 쑤시고 쇠곤봉으로 때리고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시가지로 진출을 하죠. 일부 청년학생들 시민들이 가세해서 시위대가 형성 된 거죠. 꼭 5월 14일과 16일 사이에 있었던 민주화 대성회 때의 과정과 똑 같아요. 피만 흘린거 뿐이지.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오후 2~3시부터 유혈 진압이 시작됩니다. 저는 5월 18일을 공포와 비명의 하루라고 봅니다. 그날 저녁 밤 9시부터 통금이 진행되는데, 시위대 뿐만 아니라 현장을 구경하고 있는 주변 인도의 시민들까지에게도 곤봉을 휘두르고 대검을 휘둘렀습니다.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상상도 못 할 살육작전이 펼쳐지니까 시민들이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를 모르고 집에 들어와서 문 잠그고 저녁에 불 끄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숨고 비명을 지르고 당한 걸 보고 눈물을 쏟고 전신주 붙들고 머리를 흔들고 박고 주저앉아 버리고 졸도 하고 난리가 났죠.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이 전화선을 타고 입으로 입으로 소문이 퍼져갔죠. 언론이 보도를 않하니까. 그래서 공포와 비명의 하루, 일방적으로 당한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5월 19일이 되자 오후부터 도망만 다닌 것이 아니라 대항을 시작했습니다. 분노와 함성의 하루라고 하는데요. 오전까지만 해도 시위대들이 도망만 다니다가 그렇게 당했는데도 그 참담한 소식들을 듣고 분노에 치밀어서 다시들 시가지로 나온 거죠. 그래서 오후부터는 계엄군들이 쫓아오면 각목을 들고 돌멩이를 들고 전화박스를 무너뜨려서 방어선을 만들고 화분을 굴리고 해서 싸움을 시작한거죠. 광주 천변에 있는 철물점 공사장엔 각목, 파이프 그리고 철근이 많았어요. 내가 19일 날 저녁에 본 것으로는 아주머니들은이 연탄집게까지, 손에 하나 들고 나오지 않으면 무서워서 구경도 못 할 판이니까.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서 오후부터 계엄군이 쫓아오면 맞대결을 하는거죠. 대표적인 충돌이 공용 터미널에서 5시경에 있었는데, 그 날도 시가지에는 피가 많이 뿌려지고 부상자들을 싣고 가는 택시운전수들까지 대검으로 쑤시고 그랬으니까. 밤 7시부터 비가 내리고 10시경에 시민들이 전부 귀가 했으니까, 분노와 함성의 하루가 그렇게 갔습니다. 이미 민중 봉기, 항쟁의 양상을 띄기 시작했습니다. 5월 20일을 영웅적 대공세의 하루라고 그럽니다. 5월 20일은 계엄군들이 시위대들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위대들이 계엄군들을 공격을 하고 추격을 하는 그래서 계엄군들이 도망다니는 상황으로까지 갑니다. 5월 19일부터 군인들 중에서 무슨 또 충성이라고 자기가 마라톤 선수라고 끝까지 쫓은 놈들은 시민들에 의해서 맞아 죽었습니다. 5.18항쟁 기간동안에 그 놈들이 한 23명 죽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잘 못 알고 쏴서 죽은 사람들 빼고, 시민들에 의해서 맞아 죽은 사람도 한 7명 됩니다. 시민들이 격동을 한 거죠. 분노가 폭발해버린 거죠. 20일 부터는 시민들이 계엄군들을 공격하고 쫓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공수 특전단을 포함한 계엄군들이 오후 5시부터는 시내 주요 도로에서 철수해요. 감당을 못 하게되니까. 전남대, 조선대 그리고 신역이 자기들 주둔지니까. 여기는 군인들이 추가 파병되면 군인들을 싣고 군수물자를 싣고 오니까. 그리고 시청하고 전남 도청 이런 정도만 방어를 하고 나머지는 전부 포기를 해버립니다. 시가지는 전부 시민들에 의해서 장악됩니다. 5월 20일 날은 신문 자체가 배달도 안되구요. 제대로 쓰지도 않은 신문이지만 중단되고 19일 날 중고교생들이 시위대에 가담하는 것을 알고 임시 휴교조치를 내립니다. 그리고 들불야학 윤상원 열사를 중심으로 투사회보가 제작되기 시작됩니다. 8호까지 제작을 하고 5월 26일부터는 제목을 민주시민회보로 바꿔서 9호부터 13호를 발행합니다.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할 때, 개인적으로 두 세명이서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은 도처에서 있었습니다. 체계적으로 그리고 내용이 알차게 꾸며져서 나온 자생적 언론은 투사회보가 유일했습니다. 투사회보 제작, 배포 또한 전남대생들의 민주화 대성회와 마찬가지로 5.18 항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다. 그 다음 오후 7시경 5.18 항쟁 기간에 놓쳐서는 안 될 중요 것이 차량시위대입니다. 도청공격을 위한 차량시위대가 금남로에 출현했습니다. 첫 날은 두드려 맞기만 했고, 다음날 오후부터는 맞싸웠지만 지쳐 있는 시민들에게 전의를 불태워주고 사기를 복돋아 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차량 시위대가 경적을 울리고 상향등을 비추고 대형 트럭 12톤짜리 한 대를 앞세워서 버스 11대 택시 200대가 도청을 향해서 돌격 앞으로를 했습니다. 물론 트럭이나 버스 안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타고 있었지만, 무자비하게 피를 흘리면서 끌려내려갑니다. 이 차량시위대가 금남로에 출현함으로써 시민들의 사기, 전의를 일정하게 되살려냈습니다. 수 만명이 초 저녁부터 광주 시청을 공격을 해가지고 9시에 계엄군이 도망을 가게 됩니다. 밤 9시에 시청을 장악을 합니다. 수 만명이 광주역을 공격해서 초저녁부터 21일 새벽 4시에 신역을 장악을 합니다. 신역을 포기했다는 것은 패퇴를 확실히 했다는 것입니다. 약 10만여명이 초저녁부터 도청을 철야 공격 합니다. 밤새 공격을 해도 여기는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거점인 사령부가 있었기 때문에, 이 놈들이 끝까지 버틴 겁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전경들이 방패들고 백 명이 서 있는데 이쪽 시위대가 천 명이면 쉽게 몸 싸움도 제대로 못해요. 우선 심리적으로 위축되요. 밀어붙이죠, 계속 돌맹이 던지고 벽돌 던지고 휘발유병 던집니다. 계엄군들은 교체가 잘 안 돼요. 곳곳에서 공격을 당하고 있으니까. 함성을 지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실어주는 거거든, 그 함성 소리에 일선에 있는 경찰, 계엄군, 공수단의 사기가 떨어질 수 밖에 없죠. 공포에 떨게 되있죠. 말이 십 만명이 넘는다고 하지 상상을 못 하는 숫자입니다. 그 숫자가 캄캄한 밤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가지고 공격합니다. 자기들은 교체가 안되는데 여기는 한 없이 교체가 되요. 아주머니 할머니 들은 물가져와 치약 가져와 수건 가져와. 아저씨들 돌멩이 실어 날라. 온갖 군수물자가 신속하게 들어오는 거죠 이 쪽으로. 약 삼 천명이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조선대 정문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조선대 운동장에 끌려가서 수용되 있는, 경찰서가 좁아서 안 되니까, 지킬 수 도 없고, 그니깐 거기다가 수용해 놨는데 그 사람들 구해낸다고 공격을 했어요. 내가 요때 여기를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조대 정문에 뭐가 서가지고 정문 냄새가 나는데, 그 때만 해도 철길 그대로고 밤이 되면 정문인지 시골 농장인지 구별이 안 되는 그런 곳인데, 거기 언덕이 있잖아요. 길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이 벌어진 거죠. 거기도 새벽 4시까지 공격을 했는데 계엄군들이 위협 수류탄 까지 투척해 가면서 끝까지 방어를 했죠. 밤 10시에 광주 MBC가 방화되고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가까이 갈 수가 없죠 인산인해니까, 새벽 5시에 KBC가 불타죠. 시내 파출소는 진즉 불타버렸구요. 이러는 영웅적인 철야 대공세 앞에서 밤 11시 경에 신역과 광주 세무사 앞과 조대 부근에서 계엄군들이 위협사격을 해요. 집단 사격이 아니라 개별적 차원의 발포를 하게 되죠. 이제 21일은 무장투쟁의 하루이고, 승리의 날이죠. 광주 시가지를 완전 장악했으니까. 새벽부터 시외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각 지역 동네 아주머니들과 시장 상인들에 의해서 시위대들에게 음식물이 제공이 됩니다. 이 시위대들은 이동수단으로 아시아 자동차를 탈취해가지고 타서 돌아다녔으니까, 이제 동네마다 자기들 길가에다가 통반별로 김밥이라던가 갔다 놓고, 시장 상인들 리어카에 음식 싣고 나오고, 동아일보가 그 때 처음으로 광주사태 대책강구라느 표지하에 보도를 그것도 최초로 시작합니다. 제대로된 보도도 아니지만 광주가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보도했다는 것이 중요하죠. 시위대들이 타던 버스, 트럭, 장갑차, 아시아 자동차라는게 군용 수송차량들을 주로 생산 분담하는 곳인데, 시위대 수송용, 외각지역에 있는 시위대들 실어 날리고 하는 수송용, 선전용으로 쓰기 위해 탈취를 시작했는데, 아시아 자동차에서만 360여대를 탈취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부 시위대가 11시 경에 광주 검찰청과 법원 청사에 들어가서 책상 엎어버리고 기물을 파괴 합니다. 그리고 전남대 정문과 후문을 공격합니다. 30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도청 주변을 포위하고 공격해서 오후 1시경에 도청앞 공수부대들이 약 10분 간 조준사격을 하게 됩니다. 최후의 발악을 하는거죠, 애국가를 틀어놓고 사격을 합니다. 비슷한 시간에 제봉로하고 천변에서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기총소사를 했습니다. 그 도청앞 공수 부대원들의 조준사격에 의해서 그 당시에 사망자들만 해도 50명 이상이 됩니다. 이렇게 되자 오후 2시경부터 시위대들이 “야 이제 우리도 무장을 하자” 총을 갖자 해가지고, 시위대가 무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시내 예비군 무기고하고 지방경찰서, 예비군 무기고, 화순 탄광 등지에서 소총 약 4200정, 기관총 10정, 권총 29정, 수류탄 141발, 공기총 151정 그리고 화순탄광에서 나온 화약 58톤하고 뇌관 그리고 다량의 실탄을 확보를 했죠. 근데 여기는 통계가 안 나오는데 제가 그 때 나주에 있었는데, 수류탄같이 생긴 예쁘장하게 생긴 가스탄을 많이 탈취했어요. 지방경찰들은 시위 진압을 위해서 착출을 해버렸기 때문에, 정년을 앞둔 50대 등등 늙으신 연로하신 경찰들만 남아 있었어요. 그러니까 시위대들이 자동차로 몰고와서 무기고를 트럭으로 박아서 문을 부수고 탈취하죠. 경찰서도 다 도망가버리고 없었고, 지방 지서들도 다 도망가서 보리밭에 숨어버리고 없었어요. 이미 군인들도 못해 본 놈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봐야하는 식이 되는 거죠. 무기고 탈취할 때 쉬었습니다. 현지 저항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현지로 내려가서 현지 주민들하고도 현지에서 또 시위대를 만들어가지고 같이 시위를 했는데, 나주, 영산포, 함평, 무안, 목포, 영암, 강진, 해남, 완도, 장흥, 화순 이런 지역을 주로 갔습니다. 동남부지요. 구례, 곡성, 여수, 순천 지역은 못 진출했고, 담양, 장성도 진출을 못 했습니다. 전남의 군인들이 그리 옮겨가면서 교도소를 지켰기 때문에 그리 못나갔죠. 계엄군들 쪽에서는 교도소 까지 시민군이 점령을 해버리면. 거기에 있는 재소자들까지 쏟아져 나오면 상황이 복잡해지니까 완강하니 지켰죠. 오후 3시경부터 무장한 시위군들이 도청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기관총을 전남대 의대 옥상하고 유동 사거리 쪽 옥상에다가 설치를 해가지고 도청을 바로 보고 사격을 시작했는데, 전남대 옥상은 너무 가깝기 때문에 바로 보고 쏘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퇴각을 하게 되죠. 오후 5시 30분경에 광주시 외각으로 퇴각을 합니다. 전대에 주둔한 계엄군들은 교도소 쪽으로 퇴각하고, 도청과 조대에 주둔했던 계엄군들은 주남마을 쪽으로 퇴각해요. 그런데 시민군 입장에서는 도청을 접수해야하는데, 아무런 대책이 서있지 않으니까, 어떻게 할 지를 모른거죠. 그래서 바로 못 들어가고, 이겼다고만 생각하고, 승리의 환호성만 지르고 있다가, 밤 8시경에나 도청에 들어갑니다. 도청에 들어가서도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고 있을 때, 여기에 중대한 고비가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었던 송기숙 교수, 명노근 교수가 봉쇄된 광주를 충효동 쪽으로 들어와, 도청으로 들어옵니다. 도청을 장악하고 지도부를 꾸려야 하는데, 경험이 없는 학생, 청년들이 어떻게 할 지를 모르는거에요. 운동권 지도부들은 다 예비검속되어 버리고, 박관현 열사를 비롯해서 학생회 간부들은 이미 도피를 해버렸고, 저도 5월 21일 새벽에 나주로 나가버렸는데, 그래서 못 들어오고 말았는데, 그래서 항쟁지도부를 꾸릴 수 있는 명민한 사람이 없었던 거죠. 뭔가는 해야하겠는데, 도청이 비워졌으니까. 이제 경찰도 없고 행정기관도 기능이 마비되었고, 그니까 자치 기구를 꾸려야하는데 어떻게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송기숙 교수하고 명노근 교수가 도청 앞에 이른 거예요. 그러니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갑갑한 거예요. 송교수님이 작가지만 작품 속에서 빨치산도 보고, 그런 경험이 있어나서 가닥을 잡아준거예요. 그 양반이 감옥살이하고 아셔나서 교통정리를 하신 거예요. ‘진짜배기 지도부가 나올 때까지 너희는 임시로 하는 거야’ 도청에서 일종의 수습대책위가 만들어지는 거죠. ‘시민학생 투쟁위원회’라고 해서 이름을 만들었죠. 송교수님하고 명교수님이 뒤에서 배후조종했다고 해서 아주 혼나셨는데, 어쨌든 5월 21일 밤에 도청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5월 22일 부시장과 목사님, 변호사님, 기업인들 흔히 말하는 지역 유지들이 모여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구성됩니다. 이 사람들이 계엄사 측과 협상을 해가지고 아주 비굴한 협상을 하죠.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는 사태로 마무리 하려고 한거죠. 진정한 의미에서 수습하려고 하는 거죠. 무기를 회수하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저 쪽에서 미끼를 던진거죠. 무기회수를 시작합니다. 또 한 편에서는 아까 말했던 젊은이들 청년 학생들로 해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이 되어서 주로 대민업무를 맡아 합니다. 장내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질서 회복반, 수리 보수반, 무기수거반, 무기수거반,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죠. 이 과정에서 5.18 민주항쟁을 완성한 가장 중요한 항쟁지도부가 구성되요. 그것이 5월 25일 밤 10시에 만들어져요. 송기숙 교수님이 미리 말씀하셨던 ‘진짜배기 지도부가 나올 때까지 너희는 임시로 하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던 그 진짜배기가 5월 25일 10시, 계엄군이 광주 탈환을 위해서 탱크를 앞 세우고 진격해 들어오기 28시간 전에 만들어진 거예요. 왜 그렇게 늦게 만들어졌는냐? 그게 살펴봐야 할 부분이죠. 이미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은 예비검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고, 예비검속을 피한 사람들은 도피를 하고 지하로 잠수를 해버린 상황이어서 항쟁을 주도해 나갈 세력이 약화되어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광주에서 예비 검속을 안 당한 세력이 있었어요. 그것이 극단 광대요. 지금 극단 토박이 단장을 하다가 돌아가신 박효선씨가 그 때 단장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 극단 광대가 감옥에 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저 쪽에서 예비검속 대상으로 빼놓은 거죠. 위험하게 안 본 거죠. 극단 광대가 다치지 않았고, 그리고 들불 야학이 다치지 않고 있었어요. 그 쪽에 봤을 때는 들불 야학을 하는 강사들을 강학이라고 불렀는데 위험하게 안 본거죠. 그래거 거기도 예비 검속 대상에서 빠졌어요. 들불야학 강학과 들불야학에 다니는 노동자들 학생들은 안 다치고 있었어요. 그리고 ‘전남민주청년협의회’라고 있었는데, 거기는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들어가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구속자들 모임이예요. 감옥에는 안 갔지만 학교에서 공부는 하고 싶지만 교수님의 기름낀 얼굴을 보면 구역질이 나와서 학교를 그만둔 청년들, 구속자와 비구속자가 함께 만든 운동체가 ‘전남민주청년협의회’인데 거기에 예비검속을 피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광주에서 유일하게 운동권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 거죠. 근데 이 사람들이 봤을 때 도청 안의 수습대책위원회는 순 사기꾼들 모임이고,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보니 아무것도 몰라요. 어쩔지를 모르는 거야. 그래가지고 일부는 무기를 수거해서 가져다 주고 연행해 간 사람들을 석방시키도록 하고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선에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청년학생들이 있구요. “아니다, 끝까지 싸워야한다. 학살 만행한 이 전두환 일당하고 학살 군부하고 끝까지 싸워야한다. 그래야 흘린 피가 욕되지 않는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나뉘어서 티격티격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이미 다 무기를 들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들불야학이었던 윤상원 열사, 들불야학에서 문화강좌를 했던 박효선씨(광대의 회장) 그리고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원인 정상용, 이양현씨, 또 들불 야학에 관련하고 있는 김영철씨 이런 분들이 이제 도청안에 들어가서 항쟁 지도부를 꾸려서 조직적으로 항쟁을 끌어가요. 그 사람들이 틀을 잡고 총 들고 방마다 보초를 서고 상황실을 운영하고 그러고. 걸핏하면 말 하다가 말이 좀 안 통하면 권총 빼들고 서로 위협하는 불안한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내가 대장놀이 할테니까 너희 따라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거고, 느그 다 나가 우리가 맡을 테니까 할 수 있는 힘도 없고, 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진 거죠. 이때 윤상원 열사가 가장 큰 공로를 세운거예요. 계속 도청 안에 들어가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어요. 간첩으로 몰리기도 하고 그럴 때니까, 들어가면서 얼굴을 익힌 거죠. 도청 안에 들어가서 학생 대책위원이나 5.18시민대책위원회의 상황을 파악하는 거에요. 어떻게 돌아가는가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여기를 장악할 수 있겠는가 연구를 하는 거죠. 그때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가 이루어지자 고향 함평으로 몸을 피했던 전남민주청년연합회에 몸담고 있었던 정상용과 이양현 이 두 친구가 함평에서 시민들이 무장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걸어서 광주 까지 온 거죠. 와 가지고 윤상원 열사하고 합류를 한 거요. 윤상원 열사가 외롭다가 큰 힘이 된 거죠. 효선이 영철이 다 모여가지고 역할 분담을 해요. 도청 앞 광장에서 민주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서 시민들에게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가를 선동하고, 그 다음에 시민들의 참여 속에서 토론을 개최하면서 항쟁의 동력을 유지시켜 나간다. 이런 범시민궐기대회를 극단 광대가 맡아서 진행을 합니다. 5월 23일 1회, 24일 1회, 25일 1회, 26일은 오전, 오후로 궐귀 대회를 해서 5회의 범시민 궐기대회를 엽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는 것에 대해서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죠. “이래서는 안 된다 가신 님들 피를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 절대로 전두환의 학살 만행을 용서할 수 없다.” 등 강경한 입장에 서서 압력을 넣는 이 궐기대회를 진행하면서 한편 정상용, 윤상원 등등이 옛날 민주화 운동 할 때 재야 원로들을 찾아가서 만나는 거죠. 그래서 “도청에서 지도부가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래가지고는 계엄군이 광주로 들어오기전에 대열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항쟁이 끝날 수도 있다. 어르신들이 힘을 실어주셔야 한다. ” 이렇게 설득을 하고 다닌 거죠. 목사님, 신부님 등등 예비검속을 안 당하신 분들이죠. 그렇게 해서 그분들이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가담하시면서, 주도권을 쥐게 되는 거죠.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재야 원로들이 그것도 5월 25일이 돼서야 가능했습니다. 그 과정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 대학생들을 한 명씩 두 명씩 도청으로 데려가면서 총 들고 보초 서고 있는 시민군들에게 담배도 권하고 그러면서 잠들을 못자가지고 정신이 없으니까 들어가서 쉬시라고 하면서 보초 교대해주는 것처럼 슬그머니 총을 들고 대학생들이 무장을 하게 된 거죠.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윤상원 열사는 정상용 등등의 눈에 봤을 때 이 분들하고는 뜻이 맞다 같이 갈수 있겠다고 생각한 분들을 서서히 파악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격려하고, 맞습니다! 그 입장이, 그래가면서 강경하니 투쟁하면서 피를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했을 때, 맞장구를 쳐주고 안에서 호응을 해준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조선대 출신 김종배씨 그리고 시민군 출신 나중에 상황실장이 되는 박남선씨 그 분들이 강경한 입장에 서 있었어요. 그래서 김종배씨하고 박남선씨의 호응이 엄청난 힘이 됐죠. 그 사람들이 안에서 동조를 않해 줬으면 항쟁지도부를 못 만들고 끝났습니다 5.18 항쟁은 그 사람들이 나서 줘서 큰 힘이 됐던 거죠. 김종배씨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는 사람이고 박남선씨 또한 그런 경력이 없는 분이예요. 그런데 난세에는 꼭 영웅이 나와요. 이런 분들이 강경하게 무기회수를 반대하면서 끝까지 최후의 1인까지 싸워야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항쟁지도부를 만들 수 있던거죠. 5월 22일부터 5월 24일 사이가 해방과 대동의 3일입니다. 정말 “아 이런세상도 있구나.” 5.18을 직접 겪으신 분들은 그런 말을 하세요. 옛날을 회상하시면서 그 때가 가장 좋은 세상이었다고 자기 일생에서, 경찰도 없고 군인도 없고.. 생면 부지의 젊은이들이 총들고 수류탄들고 자동차 타고 다니고 몽둥이 들고 다니고 복면하고 다니고 그럴 때인데, 외곽을 봉쇄해가지고 생필품을 막아버리고 적십자의 피까지 막아버린 그런 무지막지한 상황 속에서도 부잣집도 안 털리고 은행도 안 털리고 금은방, 전당포 하나도 손 안 대고, 강간, 윤간도 없고 스스로들 그 전쟁터 같은 시내를 쓸어서 정리하고 그리고 광주 도청, 시청 공무원들은 나와서 가난한 양로원이라던가 고아원 이런 데에 식량을 공급하고 전기, 수도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술공무원들이 나와서 협조하고, 이제 그런 생필품 공급이 금지된 상태에서 서로 나누어 먹고 가격 안 올리고 매점매석 절대 안 하고, 그러니까 범죄가 없는 그리고 서로 한 가족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걸 대동세상이라고 하는데, 해방과 대동의 3일이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면 수 많은 반란, 봉기, 혁명 이런 것들이 있었지만, 5.18민중항쟁과 같이 높은 도덕성이 발휘된 항쟁, 봉기는 없었습니다. 저도 역사공부를 많이해서 아는데 어디가서도 자랑스럽게 얘기를 해요. 국제적 차원에서의 평화운동,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도 5.18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자기들이 놀랍니다 항시 믿어지지 않는다는 거요. “사실인 것은 인정하나 지금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러니까 서양 같은 데서는 축구 월드컵 해서 자기나라가 이겨서 우승만 해도, 신이 나가지고 시가지로 쏟아져 나오면서 남의 차 엎어블고, 햄버거 가게 엎어블고,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먹어버리고 하는 폭동 같은 것이 뒤 따르는데, 어떻게 치안질서가 무너진 속에서 무장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질서를 지킬 수 있었느냐 하고 믿지를 못하는 거죠. 이 해방과 대동의 3일, 조대의 김수란 교수는 자기가 사는 앞골목에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담배가 공급이 안 되니까 불안해서 몇 갑을 미리 사놓으려고 가서, 담배 몇 갑만 주십쇼 그러니까 딱 쳐다보드만은 “나눠 피셔야죠”하고 두 까치 밖에 안 파시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부끄러웠던 이야기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도청같은 경우나 상무관 같은 데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서 시체 염한 거 보고 젊은이들이 할아버지 손자세요? 하니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생각하니까 이런 일이라도 해야겠다. 내가 이 일은 할 수 있겠다고 해서 내가 나섰다 라는 식으로. 또 자발적으로 가서 시민군들 밥해주고 YWCA에서 가가지고 도청 뒤에서 솥 꺼내놓고 밥하지 또 시민군들 밥 필요하다는 것 알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밥 해가지고 김밥 싸고 해가지고 국 까지 해가지고 리어카 몰고 도청으로 오고요. 지방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21일 저녁에 광주가 봉쇄되니까 지방으로 진출했던 시위대들이 차량으로 나갔던 시위대들이 못 들어고 말았어요. 저도 못들어오고 말았는데 영암에서 21일 밤에 잤어요. 영암읍 식당에 들어가서 잤는데, 다음날 아침에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주민들이 총까지 들었겠다. 눈에다 핏발을 세운 젊은이들이 술 먹고 저녁에 난동 피워블까봐 잠을 못 이뤘다고. 근데 놀랍게도 술 먹은 사람들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수건 하나 안 뺏어갔다는 거예요. 옛날 6.25 겪고 험한 세상 다 살아본 분들이라 충격을 받으신 거예요. 대단하구나, 그런 그 당시의 항쟁의 모습인데 하여튼 5월 22일에서 24일 까지는 해방과 대동의 3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모두들 시민들이 만나면 반갑고 미소 짓던 이 때에 그 승리의 희망, 기대, 기쁨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이 뭐냐면 타지역에서 어딘가 한 곳이라도 터져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광주말고 대구, 부산, 대전, 서울 어디선가 터져줄 것이다. 광주처럼 한 곳에서만 터져주면 전두환 이 백정것들을 타도할 수 있다. 우리가 이긴다. 민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거죠. 기대가 컸어요. 이 기대에 맞춰줄 소문도 많이 돌았어요. 아줌마들이 흥분해가지고 그러면 됐다! 해가지고 저도 들었는데, 고대생 500명이 찻길이 끊겼으니까 걸어서 내려오고 있다. 심지어는 극단 광대 후신인 토박이에서 일하는 분이 있는데 극단 광대의 어떤 단원은 부산에 미 핵함모가 들어왔다고 하니까 우리 도와주러 들어왔다고 해가지고 대자보에 써가지고 붙이고 다닙니다. 어떻게 다 그런 기대였어요. 어디선가 한 군데에서만 터져주면 민주정부 수립할 수 있다. 그것이 5월 22일에서 24일까지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어디서 터졌다는 소리는 안 들리고, 20사단 병력이 추가 배치됐다느니 미국이 전두환 편을 들었다느니 전방에서 탱크가 내려온다느니, 광주를 공격하기 위해서 미국인들 광주시내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들이 다 빠져나가버렸다느니, 군인가족들을 통해서 소문들이 사돈에 팔촌까지 퍼져 나갈꺼 아니예요. 빨리 광주 빠져나와라 광주에 탱크가 들어간다더라 비행기로 폭격을 해븐다더라. 5월 25일부터 불안과 공포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립무원이라고 하죠. 불안과 절망과 공포가 광주를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오후 5시에 아까 말씀드렸던 재야인사들이 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하고 주도권을 장악해서 수습대책위원회 총 25명의 이름으로 최규하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을 했어요. 최규하 당시에 불쌍하죠. 전두환이한테 얻어 안맞으려고.....밤 10시에 아까 말했던 윤상원 열사, 정상용씨, 윤강옥씨 등등 노력에 의해서 그리고 김종배씨, 박남선씨 등등의 협조에 의해서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됩니다. 그래서 위원장을 김종배씨 그리고 윤상원 씨가 대변인 정상용씨가 외교부장 등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최후의 항쟁을 준비합니다. 최후의 항쟁을 준비하는 것이 오후 2시에 외곽에 나가서 계엄군들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바리케이트 쳐놓고 총 겨누고 순찰 시민군하고 여기저기 음식 실어 날려주고 돌아다니는 순찰대를 개편을 해서 기동타격대를 조직합니다. 이미 이 때는 패색이 짙어져가지고 불안과 공포 때문에 우리는 이길 수 없다. 이제 광주는 다시 계엄군들에게 다시 짓 밟힌다. 그래가지고 전의를 상실한 시민들이 한 두사람 집으로 들어가고 광주를 빠져나가기 시작해서 슬프게도 오후 2시에 기동순찰대를 개편해서 기동 타격대를 조직했는데 기동타격대 숫자가 70명이 안 된 거죠. 그래도 항쟁 지도부의 무장력이 있죠. 오후 2시 기동타격대를 조직함과 동시에 항쟁 지도부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이름으로 80만 광주 시민의 결의를 발표합니다. 80만 광주시민의 결의가 달렸죠.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 처단하라. 구속 중인 민주인사들을 즉각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과도 정부를 수립하라.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피해보상과 연행과 석방많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한다. 그리고 인제 만약 이런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내용인데, 흔히 말하는 김대중씨 석방하라 같은 내용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공식적인 80만 광주시민의 비장한 결의를 담은 내용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기동타격대의 직업별 구성을 보면요. 영세 사업장 취업자가 50%, 불안전 고용 및 무직이 32% 흔히 말하는 사회적 찬 밥들이 82%를 차지합니다. 5월 27일 새벽에 광주, 전남의 모든 전화가 끊깁니다. 새벽 4시에 계엄군들이 광주로 들어오는데 직전에 모든 전화를 끊고 광주 시내전화도 끊깁니다. 새벽 4시 계엄군 광주 공격을 시작합니다. 5시 20분에 도청이 함락되고 광주공원 등지에서는 헬리콥터 기총소사를 하고 모든 걸 다 피해버리죠. 당시에 최후에 항전에 나섰던 사람들 숫자를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 드렸듯이 도청앞 궐기대회에 5월 26일 2회를 했다고 했는데 오전, 오후에 오후에 했을 때는 집회를 마치고 시가지를 행진하고 돌아왔을 때, 500명도 안 남았습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 23일 경 같은 경우에는 수 만, 또는 어떤 사람들은 10만명 이상이라고 그랬는데, 그런 식으로 시민 참여율이 높았는데, 아까 말했듯이 패색이 짙어가면서 ...........
... 1871년 프랑스의 파리꼬뮌 당시 자치정부를 세우고 자치 규약을 만들고 해가지고 파리를 지켜내는데 이제 피의 일주일이라고 그래가지고 마지막 일주일동안 정부군의 진압이 시작이 됐는데 약 2만에서 3만 명의 피가 흐르고 정부군도 약 1천 명 정도가 피살되고 3만 8천명이 체포되는 엄청난 유혈극이 일어났습니다. 그걸 피의 일주일이라고 하는데 이런 규모나 강도로 봤을 때 우리가 파리꼬뮌과 비교가 안 됩니다. 비교가 안 되는데 그러나 파리꼬뮌 당시에는 국민군이 있어가지고 무기가 대포까지 있었어요. 다시 말해서 프러시아에 항복한 정부에 저항한 일부 국민 분들이 이 파리꼬뮌에 가담을 해가지고 시 외곽방어를 대포를 놓고 저항했죠. 그래서 정규군의 최정예 정규군에 맞서서 맨 몸으로 연탄 치켜들고 망치 들고 철검 들고 뛰어 맞싸웠던 광주시민들하고는 항쟁양상이 완전히 질적으로 달랐지만, 일단은 항쟁으로 보면은 분명히 이것도 정부군과의, 정규군과의 항쟁이었기 때문에 이 파리꼬뮌의 규모나 그것은 우리보다는 컸죠. 그래서 5•18민중항쟁은 동양에서는 가장 위대한 항쟁이었다. 이렇게 서양하고는 비교해서 이야기돼요. 파리꼬뮌 때문에.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지만 파리꼬뮌은 자체 무장력이 있었단 거죠. 그런데 광주는 처음부터 맨손으로 시작해서 정규군, 그것도 최정예 공수부대원들을 맨손으로 몰아내고 그것도 자연발생적인 민중항쟁, 비조직적인 민중항쟁이 이런 성공을 했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거죠. 그래서 저는 세계사적으로 드문 위대한 항쟁이었다. 그리고 세계사의 유래가 없는 도덕적인 항쟁이었다고 해요. 이 부분은 서양인 친구들은 이해를 못하고 느그 혹시 바보 아니냐는 식으로 이상한 표정을 짓고 물어봐요. 왜 은행도 털고, 금방 털고, 부잣집 거 털어서 걸 자금으로 쓰고 어따 감춰 놨다 자금으로 쓰고 그러지 그걸 놔두냐 이거지. 그 사람들 사고로는 생각이 안 되지. 이를테면 월드컵에서 이겼다고 난동피우는 놈들인데. 그 경찰도 없고 군도 없는데 무기까지 있는데 왜 부자들을 그대로 놔두고, 은행을 놔두고 금방을 놔두냐.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해. 근데 그 사람들은 이해 못할게 많죠. 예를 들면 이한열열사 돌아가실 때 약 100만 명이 모였다. 세계사적 유래가 없는 거죠. 그 사람이 무슨 위대한 지도자냐. 아니다. 그럼 학생 지도자냐. 아니다. 그럼 왜 그렇게 많이 모였냐. 그런 식이에요. 이해를 못하는 거지. 그래서 위대한 항쟁이었다는 거. 그리고 도덕적 항쟁이었다는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그걸 좀 강조하고 이 자랑스러운, 이 감동적인 5•18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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