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광주항쟁에 대한 예감과 준비
내 입장에선 광주가 피가 보이는데 쓰잘데 없는 소리만 하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한가롭게. 그래서 내가 회의 말미에 이대로 회의를 끝내선 안되겠다 그래서 잠깐, 잠깐, 결론 내리기 전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광주전남은, 그때만 해도 광주라는 말은 없지, 전남이지. 전남은 지금 이러이러한 상황이다. 터진다. 그러고 어차피 신군부하고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부산마산에서처럼 피가 흐른다. 근데 엄청나게 흐른다. 대책을 세워라. 광주만 터지면 작살 나분다. 적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타 지역에서도 같이 쳐 줘야한다. 인제 그 논리지. 그런데 뭐 4월 10일인데 아무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뭔 쓸데없는 소리 한다느니 회의 분위기 깬다느니 여 다른 나라 이야기 하고 앉았다느니 그런 식으로 우스워 보인거지. 내가 잔뜩 다급해가지고 그래도 지방에서는 부산은 부마항쟁으로 피해를 많이 봤으니까 대구가 그래도 가장 강하지 않냐. 광주 이쪽 빼면은. 대구 운동 쪽에서 맞받아쳐줘라. 광주만, 전남만 터져가지고는 박살나분다. 그러니까 백영욱씨 아~우리도 어쩌고 저쩌고 함시롱 먼 말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인제 우물우물하고 넘어가 버리죠. 그래서 하여간에 고민들이 해란 말이야.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근데, 아무도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돌아와 가지고 아예 4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 개똥이를 만나면 이 이야기, 또 두 셋이 만나면 이 이야기.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를 안 기울이고. 아 쓸데없는 소리 왜 자꾸 해싸요, 아이고 그런 날이 좀 왔으면 좋겠조 내가 봤을 때는 어림 반푼어치도 인자 어림없다 이거지, 민중들이 무슨 들고 일어나야 그거지. 우리가 뭐 부마항쟁은 예측이라도 했었냐. 아 그건 어떤 특수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거지, 아이고, 여기는 어렵다고. 인제 그런 사고 특히 부마항쟁을 이야기할 때 어떤 입장이 있었냐면 일부 운동권에서. 그때 당시 인제 이란 혁명을 계기로 한 석유 오일 쇼크라고 그러지? 석유파동이 나니까 세계무역이 엄청 위축이 됐지. 그래서 이제 수출로 먹고 사는 이 나라에 정면으로 타격이 와 불고 그래가지고 부산지역에 수출물량이 떨어져버려. 또, 마산수출자유무역지대도 마찬가지고. 가동률이 떨어지고. 인제 부산의 항만 노동자들이 일감이 없는 거지 인제. 부산 경제가 휘청 휘청하고 마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서 실업, 그 다음에 수입 감소 이런데 허덕이고 있는데 인제 김영삼이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을 했잖아, 그때 국회의원이었는데. 그것이 인제 계기가 되어가지고 화가 나서 인자 확 일어났던 거다 이런 식의, 어쨌든 부마항쟁도 주역은 학생들이 뛰니까 거기에 생활 속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부두 노동자들 등등 실업자들이 참여해서 그렇게 된 거다. 그런 정도로 분석을 하고 있을 때지. 거기도 마찬가지, 생활 속의 수많은 대중들은 빠져버린거지. 거기도 항만 노동자 전위적인 학생 이런 식으로. 광주는 그것도 없다. 광주는 뭐 공장다운 공장도 없으니까 노동자도 없고 뭐 수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그런 산업구조도 아니고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래 인제 그러다가 5월 5일 날 그때 내가 이야기했던 민주가족야유회라는 걸 인제 하게 된 거죠. 그래가지고 그때 식영정으로 갔어요. 광주호 위에 있는. 거기가서 한 오십명 갔어요. 가족들이 많으니까. 인제 그 자리에서 모두들 인자 진달래는 피지 그러니까 인자 기분들 좋아가지고 모처럼 그러고 있는데 내가 인자 또, 나는 인자 어두운거지. 이게 맨 피만 보이는데.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노래 부르고 있을 때가, 휘파람 불 때가 아니다. 광주 터진다. 그러고 인자 내가 거기서 피바다, 피바다라는 말을 썼거든요. 2천명 이야기를 했는데 광주가 피바다가 된다. 한 2천명 죽는다.
면담자: 아 숫자까지? 구술자: 숫자까지 그때 나도 모르게 이야기 나와버렸는데, 신들렸다고 그러는데 (*웃음) 면담자: 그러니까, 돗자리 까셔도 될 거 같은데요 (*웃음) 구술자: 틀림없이 터진단 말이야. 그러니깐 다들 또, 지금도 안 잊어버렸죠. 정상용이 그 친구도 그렇고. 아이고 형님, 야유회까지 나와 가지고 피 이야기를 하요. 아이고 형님 징하요, 왜 그러요? 안 받아줘, 안 따라줘요. 인자 그라고 돌아왔어요. 근데 이제 안 되겠어. 나라도 생각해야지.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인자, 요즘은 지도가 아주 세밀한 지도까지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가지려면 신분이 확실한 사람 외에는 그걸 못 사게 되어 있었어. 살 때. 단파 라디오 사는 것하고 비슷해가지고. 그 지도를 인제 박화강씨, 그때 광주매일인가 있었는데 지금 한겨례 지국장 하다가 그만 뒀는데. 그 화강이 형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내가 만오천분지일 광주 지역 지도를 구해가지고. 나는 간단했어 아주. 아주 간단한 논린데 상징적으로 어차피 깨진다. 깨지기는 깨지는데 피바다에 잠기는데, 부산마산처럼 막 왁 일어났다가 그냥 갑자기 꺼져버리는 식으로는 피해만 크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그걸 성공을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제 도청을 장악을 해야 한다. 최후까지 싸우다가 깨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부마항쟁처럼, 들불처럼 번졌다가 갑자기 꺼져부렀거든. 응? 그러니깐 그게 이젠 역사적으로 어떤 후속 항쟁이 이어지지 못한 거예요. 정치적으로 실패를 해 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뭘 주장했는지 명확하게 안 나와불고. 그래서 이제 도청을 장악을 하고 끝까지 항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내 지론이고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차피 저놈들이 군분데, 무기를 발포를 할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이쪽에서도 무장을 할 수 밖에 없다.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 총, 다이너마이트 이런 무기들이 필요하지 않냐. 그러니까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가 있고 이,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구나 이런 것들 좀 파악하고 도청을 어떻게 점거하기 위해서 도정 주변의 도로를 어떻게 어디 쪽으로 몰려들고 포위를 해야 하고 등등 고런 작전도 세우고 좀 그래야겠는데. 그래서 이제 지도를 구한 거예요. 지도를 구해가지고 이를테면 지원도, 지금은 소태동 쪽인데 거기 나가다보면 거가 채석장이 있었어요. 다이너마이트 창고도 있고. 현장 답사도 하고. 양림동 파출소 뒤에 있는 무기고부터.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다니면서 내 나름대로 성명서를 대 국민용, 그 다음에 국제사회를 상대로 해서 아 우리는 처절하게 싸우다 깨진다. 한국인들 민주화를 위한 몸부림을 너희는 잊지 말아달아. 인제 이런 내용으로 해서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내용 또 크게는 두 가지로 성명서 초안을 구상을 하고. 그러니까 뭐냐면 조직이 비극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막을 수도 없고. 지금 하지 맙시다, 한 일 이년 기다렸다가 합시다 할 수도 없는 거고. 또 터지더라도 조직적으로 이걸 지도해낼 힘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여하튼 피해를 줄일 수는 없지만 피해에 따른 정치적인 성공은 거둬야 할 것 아니냐. 피 값으로라도. 근데 그런 입장이었지. 그래서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혼자서 준비하고 다녀요. 그러다가 5월 1일 날 지금은 그 양반이 아바타 쪽...
면담자: 전홍준 선생님이요? 구술자: 응, 전홍준 선배지. 그때만 해도 의사였고. 근데 전홍준 선배는 광주에서 그 양반이 월남 파병 반대 운동 전개하다 감옥에 갔던 분인데, 선구자적인 분이지. 60년대에 그랬으니까. 그 양반이 인제 아버지가 월북 가셨기 때문에 그 사실 알고부터 운동일선에서 조금 빠진 거예요. 왜냐면 자기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까지 죽이게 되니까. 그런 선구자였는데. 그 양반이 애기 돌인가 백일인가, 나는 애기 돌 하고 백일하고 헷갈려가지고. 하여간에 식사나 하게 오라고. 그래서 거기에 간 사람들이 인제 8명이 갔어요. 8명이 갔는데 그걸 8인 모임이라고 그러는데. 나하고 정상용, 정용화, 이양현, 윤강옥, 김영철이 박용준이하고 윤상원이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8명이었어요. 인제 윤상원이는 항쟁 지도부 하다가 죽었고. 용준이도 시민군으로 27일날 YWCA앞에서 죽었고 영철이는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18년간 정신과 치료받다가 죽었고 정상용은 항쟁 지도부 외무위원장 맡았고. 윤강옥이는 기획의원했고 이양현이도 기획위원이었고. 정용화는 인제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저, 했는데 정용화하고 나만 그날 광주를 빠져나왔던 거죠. 6명이 참여하고 그 중에서 결국 3명이 죽은 셈이 됐는데. 어쨌든 간에 그라고 앉았을 때 인제 그 자리에서 내가, 그때 막 민주화 성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요. 14 15 16일까지. 내가 그 이야기를 또 꺼냈어요. 지금 이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광주 터진다. 대책 세우자. 또 이야기를 꺼냈는데 처음으로, 그 이야기 자세히 좀 해주쇼 이런 반응이 터져 나온 거예요. 처음으로. 그전에 나오자마자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핀잔주고 그런 놈들이. 그래서 인제 쭉 설명을 했죠. 인제 월요일날, 그때가 5월 20일 국회가 소집이 되어 있었어요. 임시 국회가 하튼 21일인가 소집이, 21일. 임시국회가, 그 임시국회에서 김종필 공화당까지 포함해서 개헌해제 결의안응ㄹ 제출한다고 신문에까지 났어요. 합의가 됐어. 정당들 사이에. 근게 모든 정당이 합의한거지. 신군부 빼고는. 그러면 인자 국회에서 결의를 하게 되면 해제를 해야 하거든. 계암해제를. 계엄해제하게 되면 신군부가 물러나게 되는 거죠. 그럼 신군부가 물러난다는 것은 곧 죽는 일이여. 왜냐면 12.12때 이미 그 사람들은 너무 많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상관살해부터 시작해서 명령 불복중부터 완전히 반란이었으니까. 군사반란. 그럼 어느 놈이 죽을 짓을 하겠냐 이거죠. 안 물러난다. 고로 21일날 아니면 25일 그 정도로 내다 봤어요. 21일에서 25일 사이에 전면적인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래서 완전히 군사독재로 체제를 갖춘다. 전두환 일당이 완전히 잡는다. 그러면은 인제 광주는 터진다. 제일 먼저. 그러면 박살난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러이러 해야한다. 이 이야기를 죽 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래도 내 말이 감이 안 잽히냐. 난 인제 안타까와서 그래서 아, 진지하게 인제 형님이 왜 그런 이야기를 그 동안에 했는지 조금씩 감이 좀 잡힌다. 그래서 나는 인제 신이 났지. 그래서 그러면, 인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또 해야 하니까, 한 번 더 모이자. 내가 연락하겠다. (왜냐하면) 남의 집이고 어떤 계획된 모임 자리가 아니니까. 홍준이형이 들락날락 하면서 음식 가져다 나르고. 그 대신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우리는 조심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죽더라도 깨끗이 죽어야 하니까 목욕하고 속옷 갈아입고 쓰잘데 없는 문건 같은 것들 사진 같은 것들 전부 치우고 죽을 준비 하라고.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자지 마라. 먼 일이 터질지 모른다, 지금. 내가 봤을 때는 하루하루 상황이 우리는 살얼음판에서 살고 있다. 언제 얼음 꺼질지 모른다. 집에 들어가서 자지 마라. 신신당부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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