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 구술녹취문(2차)
■ 개요 구술자: 윤한봉 면담자: 박현정 면담주제: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2006년 1월 24일 오후 2시-5시(3시간) 면담장소: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2차
■ 상세목록 1. 1-1. 신년맞이 등반대회 1-2. 민주구국선언과 구속 1-3. 두 번째 징역살이와 공부 1-4. 박정희 암살계획 1-5. 에피소드-간첩단 사건 2. 2-1. 생계유지를 위한 노력 2-2. 함평고구마사건과 쌀생산자대회 2-3. 황석영과 여성운동가 조직-송백회 2-4. 1978년 민주교육지표사건 3. 3-1. 민주세력결집 3-2. 동지애 3-3. 현대문화연구소 3-4. 문화운동-극단 광대 3-5. 방화사건 주모자로 연행과 물고문 3-6. 박기순의 죽음
1-1. 신년맞이 무등산등반대회 면담자: 오늘이 2006년 1월 24일이죠. 선생님 두 번째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어제 75년도까지 해주셨죠. 구술자: 제가 75년도까지 했는데, 어제 이야기할 때 구속자 협의회를, 전남 구속자 협의회를 75년 봄에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4월 경이에요. 전남 구속자협의회를 만든 것이 4월인데, 잘 알듯이 4월 말일날 베트남전이 끝나고 그 다음에 통일이 되었죠. 그 이후로 이제 얼마 안 있어서 긴급조치 9호가 나오죠. 박정희 죽음 이후에야 해제가 되는데. 긴급조치 9호화해서 전국이 숨을 못 쉬게 된 거예요. 운동부터 모든 게. 그렇지만 구속자회 하나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어려운 시기에 아까, 어제도 말했지만, 독으로 버틴거지. 이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하튼 그런식으로 버티면서 그 외도 그 정보기관의 그 못된 탄압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지속적으로 학교를 들락거렸어요. 헤헤헤. 제일 많이 간 곳이 이제 도서관 앞이지. 그때는 거가 분수 같은 것이 없었는데, 연못이 없었어. 그때, 잔디밭이었어. 그래서 가끔 토끼도 뛰어다니고 쫓고 그랬는데. 면담자: 그럼 그때 용지는 있었나요 구술자: 용이는 있었지. 그렇게 갓을(겉을)꾸미거나 그러지 않고 그냥 흉측하니 못이었어요. 거기 가서 앉아있으면 인제 후배들이 지나가다 보고 하나둘씩 모여들어가지고 꼭 그옆에 둘러앉게 되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노천학습 같은 것이지. 정규조직을 갖추기 보담도 요즘 말로 말하면 동아이라든가 그런거을 따로 안 정해놓고.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저쪽에서는 계속 못하게 방해를 했죠. 내가 계속 나가는데 어떻게 해. 내가 뭐 어쨌냐, 내가 다니던 학교에 왔는데, 아니 그러면 교문에서 못 들어오게 막는다든지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잡상인도 드나드는데 왜 내가 다니던 학교에 못 들어와야 이런식이지. 계속 후배들하고 서클들을 여러 갈래들로 만들어가지고 접촉해서 학습하고. 그런 활동을 계속 했어요. 학교에서 보면 눈엣가시지. 이거 죽이도 살리도 못하고. 예를 들면 어제 이야기했던 아이스케익 판다고 악을 쓰고 다니는 거나 초지에 풀을 벤다든가 다 학생들을 자극하는 거고 교수들 자극하는데 하여튼 계속 그걸 했어요. 그렇게 해나가다가 76년으로 넘어가는데 거기에게, 내가 인자 미국에 있으면서 깜짝 놀란 건데 이, 신년, 1월1일이 되면 광주 시민들이 오일팔 이후에 무등산을 많이 올라간다고, 엄청난 숫자가 올라간다고 신문에도 나고 그러더라고. 씨익 웃었는데. 그 시작이 76년이에요. 76년 1월1일날 두암동이었는데, 그때는 여가 완전히 시내에서 동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는데 윤강옥이라는 회원이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모여서 두암동에서 송년회를 하고 새벽에 걸어서 무등산을 갔어요. 입석대까지 올라가가지고. 해맞이 하고 악을 쓰는거지, 이제. 그리고 거기는 그때만 해도 어느 교회 청년부 같은데 교회 청년들이 한팀이 올라와 가지고 우리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우리가 그때 구시렁거렸던 것이 기억이 확실하게 나는데, 하여튼 모퉁이 돌고 나면 이 친구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올라가고. 젠장 우리는 기도 안 해도 잘만 올라오는데 뭐 기도냐 구시렁 구시렁 하고 올라오는데 그 사람들은 해돋이 보면서 기도하고 우리는 저쪽에 떨어져가지고 박정희 꺼져라 유신철폐, 아 듣는 사람 없으니까. 새해 첫날 새벽에 악을 악을 썼어요. 그렇게라도 울분을 토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그랬었는데 이 76년 새해 첫 아침에 무등산에 올라간 것이 그 뒤로 계속 된 거예요. 그래가지고 80년 초 같은 경우는 아니다, 79년 초 같은 경우는 숫자가 단위가 200으로 올라갔죠. 우리는 민주가족이라고 그랬는데 교수들도 막 올라오고. 그렇게 규모가 계속 커져갔는데. 그것이 이제 이를테면 광주시민들의 무등산 새해 첫 아침 등반의 시작이었어요. 그런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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