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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9-현대문화연구소2018-12-2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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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현대문화 연구소


그렇게 해서 자꾸 내부의 단합  높인것 같고 결정적으로 이제 79년에 신경을 썼던게 이제 수가 이제 불어났는데  모여 앉어서 이제 이를테면, 쉽게 얘기하면은 어디가면은 어떤 사람들을 만날  있다라는 곳이 있어야 하거든. 그래야 약속없이도 수시로 모일  있고, 정보교환   있고 그런데 이게 이를테면은 75년에는 카프카서점이 이제 가면 만날  있다 그래서 인제 모이고 그랬는데 이게 수가  불어나니까 그런 자리가 마땅치 않는 거야. 다방에나 앉아서 그래봤자 만나야 다방에 가는 거고 돈만 들어가고 아깝고 돈도. 눅두서점이라고 있어봤지만 책방에 있는 것도 한계가 있고, 숫자가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옥바라지를 할려면은 인자 책을 계속 넣어야하는데 한두권넣고 끝나면 좋은데   볼때쯤이면은 교체를 해줘야하거든. 그런데 그걸 그때그때 책을 사서 넣을라면은 그러 안해도 가난한 우리 전라도 가정들 부담이 커요. 그래서 옥바라지용 책들을 왕창 모아놓고 파는 곳에다가 그책 이제 가족들이 와서 이제  책들을 갖다 넣어 갖고 다시 찾아오니까 이렇게 돌려서 다시 갖고 오고 새로 갖고 가고 이렇게 하면 서로 부담도 덜어주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서 책들을 고루고루   있지 않을까 해서 책을 한군데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학습할 필요도 있고. 그래서 내가 인제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어요


이름은 그럴듯하니 지어야 하니까 제일 원만한 이름으로 현대문화연구소, 긍게 인제 애매해블지 현대문화연구소 그래블믄. 애매할수록 좋으니까. 현대문화연구소를  장동로타리에 있는  이층건물인가 되는데  이층 끝에 방인데  이십평짜리 됐어요. 고걸 이제  여기저기서 빌리고  어쩌고저쩌고해갖고, 전세금 얼마  얼마 이런 식으로 하고 이제 소장을 아예 그냥 문덕희라고  삼년 사년후배한테 해놓고 얼마 있다가 이제 김희택이 정용하이런 식으로 소장이 바뀌게 됐는데, 나는 인자 전면에  나설라고. 그게 현대문화연구소에다가  가구들 짜서  안들이고 할라다보니까 인제 해갖고 길게 탁자들 놓고 의자 놓고 앉어서 하게 의자는 그때  관광호텔 사장을 황석영씨가  알아가지고 어떻게 어찌어찌해서 인제 호텔이라 조금 낡은 의자 같은 것을 교체하는데 삘건 의자 등받이 의지 갖다놓고 많이들 놓고 돼지저금통 큰놈 탁자위에가 올려놓고는 앞에다가 운영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나중에  사건 터지면 어서  나서 움직이겠냐고 골치 아플  같애서   잔으로 연구소 운영에 동참합시다 그래 갖고 커피한잔, 오백원 그때 가격으로 하면은 시중가격에  열배 가까운 가격을 붙여 브렀어요 거디가가 인자.  한잔에 오백원. 그래가지고 예를 들면 교수님이 한분 오셨다 그러면은  둘러 앉어 있는 사람들이  보믄 일곱명이여 그러믄 여덟잔 여덟곱하기 오백원 그러면 사천원이믄  놓으믄 되는데 대부분  원짜리 놓고 가고. 인자 저금통에다 놓고 완전히 칼만  들었지 강도라고 그라믄 웃고. 차도 안마시고 거기다  넣고 가시는 분들도 있고. 그래서 인제 책장을 짜놓고 인자 구호를 청했어요.  시절에. 일기장과 가계부를 제외한 책은  내와라. 족보, 일기장 가계부 족보를 빼논 책은 전부  내놔라. 그래가지고 인제 서울 출판사들까지 연락해갖고 서울서 돌았어요


출판사들을 돌고,  그냐믄 그때 학생운동출신들이 제적당한 사람들이 올데 갈데 없으니까 배운 재주는 있고 그러니까 번역을 많이 했는데 번역을 하다가 어떻게 출판사하고 연결이 돼가지고, 보니깐 이거 할만하거든 출판사들을 많이 찾은 거예요. 거기서 베스트셀러도 나오고    사람들도 있고. 인제 그런 것들이 토대가  가지고 80년에 출판운동이 활발하니  갖고 좋은 책들이  많이 냈던 거지. 근데 속없는  후배들은 팔팔뛰는 애들은 감방 갔다나온 애들은 선배들한테  외국책이나 번역하고 자빠졌다고 선배들 욕을 욕을 바락바락하고 그랬는데, 긍게 인자 날카로와지면 어차피 좁게 보니까 속내용도 모르고 80년에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어쨌든 간에 서울 이제 돌아다니면서 책좀 보고 책도  모으고 집집마다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쓸만한 책들 뿌리채 뽑아갖고 와서 넣고  이천권을 책장에다 빡빠가니 채워넣고 그리고 옥바라지할  쓰라고 가족들한테. 서울서 와서도 광주들러서 거기 들러서  갖고 가고. 광주에서 자기 가족이 있거나 그러면은 그라고 한참 악질적인 짓을 했지. 족보와 가계부와 일기장만 빼고  내놔라. 인제 그렇게 하고,  사무실에 이제 송백회 자기들 회합장소로 쓰게 되고  다음에 이제 나중에는 거기서 80 초에 80 1월에 극단 광대가 출범을 하는데 극단 광대 후원이 모임처럼 된거예요


거기다가 인제 모든 살림도구들 놔두고 그렇게 했는게  놔두고  다음에 민주청년 협의회 회의실  사무실 구속자협의회를 이름을 바꿨어요.  민주청년협의회로. 그러니까 인제  민주청년협의회 얘기좀 해야겠네요. 어떻게 됐냐믄 아까  인제 조직원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  사건으로 해서 이제 대구쪽에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광주에가 전남 민주 구속자협의회가 있다는 것을안거예요. 인자 그걸 중앙에 보고를 하니까 전국에 유일한 거예요. 거기가. 그러니까 인제 불벼락을 내린거예요. 여기 정보부에다가.  인자 나뒀냐 깨라. 그러니까 이놈들이 불러다가 구속자협의회회원 한사람한사람 놓고 탈퇴각서를 쓰라고 한거예요. 거기서 안쓰면은 인자 두들겨패블고. 지금 서울대 교수로 있는 갑자기 사람이 가끔 이름이 갑자기 생각 안날때가 있다. 굉장히 나하고 가까운 친군데 갑자기 이름이. 아니  조길례교수 남편. , 이런  갑자기. 기다리고  졸도해브렀다고 맞고. 그래가지고 이놈들이  각서를 받고, 해체했다고 이제 발표를 했는데, 보고를 하고 그랬는데 다시 최권혁이 여기 영문과 조길례 교수 남편이지.  졸도까지 하고 그랬다고 그랑께  친구들이 다시 YMCA에서 모임을  갖고, 이거 강제로  각서다. 이렇게 두들겨팼다 졸도까지 했다 이건 무효다 그라고 규탄하고 해가지고 다시 이제 이걸 재결성 해븐 거예요


그렇게 인자 깡으로 버텼지 이지역에서. 그래갖고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서울에 있는 빵잽이들이 민청세대를 중심으로 해서 광주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뭐냐. 그래가지고 이제 자기들도 그동안 인자 거기서는 주로 출판사에서 모인거예요. 인자 번역실 비슷하게 만들어가지고 공동번역실, 번역을 할라는데 집도 그러고 애기들이 뛰다니면서 떠들고 그런께 번역실이 따로 없거든. 공동번역실이라는게 사무실하나 빌려가지고 자기들 번역할 책거리들들고 모으는거제. 거기가 인제 연락처겸 회의실겸해서 쓰였는데,  사람들이 자기반성을 하고 광주를 이렇게 고통 속에서 탄압받으면서도 지켜가고 있는데 우리가 뭐하냐 그래가지고 자기들이 만든 것이 민주청년인권협의횐가 인권이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민주청년협의회로 이름을 바꿨어요 이제. 시대에 맞게. 구속자들뿐만 아니라 구속자 아닌 사람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이 생겼으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민주청년협의회로 바꾸고 감방에 간적이 없는 박효선, 정삼용, 이향연, 이런 친구들이 들어왔어요 이제.  다음에 긴급조치 9 세대들도 들어오고 그래가지고 조직을 확대 강화한건데  내가 졸지에  회장을 맡게 됐었는데.  민주청년협의회실 사무실로도 쓰고, 그래갖고 앞에다가 그러고는 인제  앞에다가 뭐라고 써붙였냐면은 거갖고 정보부 애들하고 싸웠는데, 학생과 정보사찰시관은 출입엄금하고  붙여놨어요. 학생과 정보사찰기관은  그냐믄 학생들 들락거려노믄은 엄한놈들 맨날 잡혀가고 끌려가고 날벼락 맞으니까 사회운동에 매진을 해야하기에 그리고 정보사찰기관은 기분 나쁘고 긍게  들어오게 해블라고. 그러고  붙여놨는데, 정보부애들이 요쪽 우리가 끝방이었는데 요쪽 끝에가 다방이 있었다고요. 연합다방인가 그랬을거예요 연합빌딩이라고 그랬는데 그걸.  일층 아래 밑에가 녹두서점이고 인자 그리 옮겨왔는데, 정보부에 계장이 와갖고 사정을 하는거여. 뭐라고 하면은  알거아니냐  지역 사정을. 대한민국천지에 정보사찰기고나은 출입엄금이라는  무지막지한 놈의 글자를 붙여논데가 여기 말고  있냐. 이건 우리 자존심문제다 광주. 인제 체면  살려주라  들어갈게. 아예 떼어도 우리 안들어갈테니까  우리 체면 살려,  지역에서 알면 웃음거리다 우리는. 정보부 알기를 우습게 진짜로 이건 해도 너무한거 아니냐, 긍게 내가 그랬어. 당신들이 분명히 안들어올  같다는  판단이 슬때까지는  붙여놓을테니까 아예 기다리라고 대신  만약이 뜯어내고 나면 글씨  크게   붙이고 할거니까 나중에 빼인뜨 칠하고 그래블거니까 손대지 마라고. 그래갖고 인자 그걸 버텼다고. 그래갖고 아조 거기서  간사로 일하던 임영희 같은 경우도  일이 있어가지고  사람들이 와서 똑똑  두드려갖고 이렇게 여니까 들어올라오면  쥐어뜯어블고 아조 유명하게 아조 악질적으로 굴어갖고 못들어오게 막고 그랬는데. 아예  들어왔다고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인제 공간 마련한데 서울서 운동권친구들이 내려오면은  문열고 입을  벌려. 너무 넓고 멋지거든 깨끗하고 걸레질을 내가 아주 잘하니까 내가. 어떻게 이렇게 . 자기들 공동번역식이라고 지저분하고 좁고 아조 근디 춥던디 여기는 아주 멋지게  놨다고 부러워가지고 어쩔줄 모르고 그러는데.  현대문화연구소 고게 인제  일년도 못채우고 518 만나가지고 작살나버렸는데, 어쨌든  현대문화연구소를 인제 개설을 했고.  다음에 인자 아까 말씀드렸던 말했던 송백회 기금마련을 위한 미술품 전시회라고 해가지고 인자 황석영씨를 통해서 서울에 있는 화가들을 접촉을 해가지고 주로 항아리,  도자기  전시했다가  팔린것들 요것들을 이제 이를테면 공출을 한거지. 그래서 인제 뜻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내놔가지고 작품을 내놀때마다 특징이 있더만.  예술가들은 얼마 밑으로는 절대 팔지마라. 어떻게 보면은 자존심중의 하나지. 자기 작품이 너무 싸게 팔린다는거 싫은 모양이여. 40만원 이하로는 팔지마라 이런것들. 그래 하여튼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작품들을 모아서 이고걸 용달차에다가 포장해가지고 포장해가지고 광주로 싣고 와서 YMCA 현관 공간에다가 진열해놓고 밤에 거기서 자고 인자 손님들은 미리 맨마다 전남대 총장 그때 사십만원짜리 하나 팔고 그랬는데,  많이 팔았어요, 그때 기금을 삼백만원 마련했죠


그래가지고 그때 인제 우스개, 우스운 일이 있었는데 저녁에 자면서 오줌이 마려운데 에이 사십만원짜리 요강에 오줌   싸봐야지 거기다 싸고 아침에 가서 붓고 씻고 거기 깔깔거리고 웃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송백회 기금을 마련을 하고, 하여튼 그렇게 해서 조직을  추스러가는 그런 과정이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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