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두 번째 징역살이와 공부 구술자: 그래가지고 졸지에 인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해가지고 1년6월 선고받았죠. 그래가지고 통산해서 손해 본 것 합치면 20달 살고 나왔는데. 두달 더 살아서. 20개월 살았는데 광주교도소에서 2심 끝날 때까지 징벌방에 독방에 있었고. 그 다음에 대구교도소에 가가지고 나머지 기간 채우고 79년 12월 7일인가 8인가 석방 됐을 거야. 근데 인제 그렇게 해서 내가 들어와 있는데 영종이 그놈도 들어오고 영종이 그 친구는 1심에서 집행유예로 나가고 그럴 때 인제 이를테면 아까도 말했지만 계기가 된 거죠. 구국선언이. 그래서 그 교회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전국 도치에서 인자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는데, 광주에서도 8월달에 목사님들이 모여서 구국기도회니 뭐니 해가지고 그때 윤기성 목사, 강진에 계신 윤기성 목사. 무안에 조홍회 목사 강신석 목사 이런 분들이 교도소로 9호 위반으로 들어오고 왜냐하면 3․1 구국선언에 문익환 목사랑 교회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기장 청년회, 구국 기도회 하고 뭐 하고 그래가지고 이 사람 구속, 저 사람 구속 그래가지고 교회운동이 확산이 됐죠. 하여튼 민주 구국 선언사건은 원로들이 제 값을 한 거예요. 어떤 계기를 만들어줬으니까. 어떻든 그렇게 되고 나는 이제 독방생활 하면서 충전을 하자 해서 죽어라고 책만 봤죠. 내가 면회 온 후배한테, 내가 하루가 24시간밖에 안된다는 것을 그렇게 아쉬워할 수가 없다. 48시간 내지 72시간으로 늘었으며 좋겠다, 매일. 책보는데 미치것다, 시간이 짧아서. 그러니까 아주 오래오래 잘 사쇼 공부만 많이 하쇼. 나보다 성질 내더라고. 내가 어느정도 책을 봤냐면 여가 부어버렸다고, 눈이 부을 정도로 공부를 했어요. 눈두덩이. 인자 백열등 희미한 걸 높이 달려노니깐 눈이 시럽고 난리야. 화장실 뒤에가, 창도 닫아불고. 자살 못하게 하려고. 밑에가 환기통 요만한 것이 있는데 고 밑에서 인제 그 자연 햇살 좀 받아볼라고 한디 직접 들어오진 않지. 반사광이긴 하지만 거기다 놓고 보고. 운동시간 빼놓고 죽어라고 책을 보니까 돌아다니던 간수가 무슨 고시준비할라고 들어온 것 같다고 맨날 그랬는데. 그때 인제 역사 공부를 한번 체계적으로 하는데 내가 언제 체계있게 공부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인문사회쪽이 구멍이 많았는데 또 내 스타일로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그래가지고 좋았어! 하루종일 내 역사공부를 어디서부터 시작해냐 하가지고, 우주 역사부터 시작하자. 우주의 역사에서부터 좁혀오자. 세계사, 동양사, 국사, 국사에서 고대사부터 해가지고 현대사까지. 그래가지고 책을 넣어주면 별들의 역사부터 책을 넣었지 역사를 하다보니까 또 고대사를 하다보니까 고고학분야의 용어가 너무 모른 것이 많아요. 고고학 책을 넣어라 해가지고 고고학을 하고, 종교부분도 내가 스님들하고 목사님들하고 신부님들하고 이야기하고, 내가 뭐를 모른 채로 몇 마디 들은 것으로 해가지고 기독교에 대해 뭐라고 떠들고 불교에 대해서 떠들어봤자 그 사람들이 척 하면 알죠, 내공을. 경전 하나를 안 읽고 무슨 소리를 하나. 비웃어버리면 내가 말이 먹혀들 수가 있나. 또 그 전문가들한테 들은 이야기하고 내가 한 이야기하고 비교했을 때 아무래도 신도들이 내말에 끌려올 리도 없고, 의식화의 절대적으로 무장이 필요하다. 전부 경계를 해가지고 교회, 기독교 경전, 그래가지고 내가 신구약을 8번까지 읽었는데 거 신학서적도 보다보니까 어려운 말이 많아요. 무슨 신학사가 불교부터 시작해서 야튼 우리 천도교까지 고루고루 인제 죽어라고 봐가지고 머 나는 누구 지도받은 적도 없고 혼자 내 나름대로 읽으니까. 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갖게 된 거지. 근데 그게 나중에 나와서 이야기를 해보고 그러면 고게 좀 신묘하더만, 효력이. 왜 그냐면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를 맨날 빵빵하니깐, 그랬는데 하여튼 지도받지 않은 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그런 내 나름대로의 견해나 관점이 상당히 효력이 있더라고. 근데 어떻게 밖에 나가서 다시 운동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보자 그렇게 해가지고. 공부를 체계 있게 많이 했죠 두 번째로. 내가 그 출소한 이후를 생각, 대비해서 두 번째 공부를 했던 이야기여. 그러다보니까 어제 이야기 중에 바진 것 중에 첫 징역살면서 출소한 이후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준비할 과정에 뭐가 있었냐면 우리 큰형님이 듣고는 에끼, 징한 놈이라고 그랬는데 이제 75년 초가 되니까 교도관들이 와서 귀뜸도 해주고 면회갔다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곧 석방이 될 거 같애. 나가서 바로 활동을 시작해야 할것 같다. 근데 그럴라고 보면 뭐가 제일 필요하냐. 나는 이제 민청학련 사건 준비과정에서도 뼈저리게 느꼈지만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맨날 운동가들을 자동차에 비유하는데 휘발유, 가스 없이 자동차는 굴러갈 수 없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나가서 학교 다니니까 부모님이 뼈빠지게 학교보내노니까 딴짓거리 하고 징역이나 살고 나오니 자식들한테 부모님들이 용돈 줄 일도 없고, 쉽게 돈 벌 수 있는 기회도 없고, 당장 운동을 할려면 비상 자금이라도 필요하지 않는가 해가지고 영치금 엠네스티에서 넣어준 놈, 윤보선씨가 넣어준 놈 이런 것들이 넣어준 놈 별 먹고 싶은 찐빵 뭐 통닭 짜장면 죽어라고 안 먹고 그 돈을 모았어요. 출소하고 나가서 활동할려고. 돈을 상당히 모아 갖고 나오니까 이 먼 돈이냐 그런게 모았다고 하니까, 예끼, 징한놈. 두 번째는 돈보담도 운동하는데 필요한 이론 무장이죠. 그런 준비를 했죠. 나는 사상무장이라는 차원에서는 별로 노력을 해본적이 없어요. 이론무장을 했지. 그러다가 내가 대구로 이감을 갔는데, 대구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했던게 거가 좌익수들 비전향장기수들 전용사동인데 거기가 인제 긴급조치 위반 정치범들을 같이 섞어 놓은 거죠. 그때당시 환경운동 개척했던 최열이라든가 있었는데 이제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이제 나한테 가르쳐준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어느날 이제 독방에 앉아있는데 또을 푸는 친구들이 이제 출력하는 친구들 중에 그걸 하는 친구들이 옆방, 옆방 장기수 할아버지한테 묻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할아버지, 여그 독방생활 얼마나 하셨어요? 그니까 고독하니까 꼭 똥 풀때 내다본다고, 나가서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러니까. 거기도 뒤가 막혀있고 밑에 구멍 있고. 그니까 그 안에서 한소리는 안들리지. 그 물었던 일반수가 충격 받아가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28년이요? 그러더라고. 28년간 독방생활 했다니까. 인제 그말을 듣고 내가 막 상당한 충격을 나도 받았어요. 그니까 내가 민청학련사건 때도 15년 받을 때도 시발 다 살야 정치적인 것이니까 언제라도 나갈 것, 또 쉽게 나왔고. 받아봤자 이번에 1년6월, 77년 말이면 나가고. 28년이라! 그게 전향한 사람은 독방에 안 있거든요? 일반수 방에 함께 있으면서 출력하는데. 자기 신념,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28년간 적지에서 북에서 넘어온 사람인데, 이렇게 지킬 수 있는가. 이미 인제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가가지고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에 폭력적인 살인적인 전향공작이 진행된 직후였어요. 우리가 민청학련 들어갔을 때, 그걸 들었거든. 그 소리를. 대전에서도 듣고. 얼마나 혹독한 고문들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거나 죽거나 자살을 했는지. 적지에서 그 모든 전향공작에 고문부터 회유가 엄청 났을 거고. 특히 인제 그 당시 70년만해도 조금 먹기가 나았는데 전행 전후 이런 시기, 특히 50년 때 그런 때는 밥도 형편없이 적었다는 것을 다 아는 이야기고 일반 사람들도 다 아는데. 인간 이하의 어떻게 보면 대접을 받으면서 극도의 그 영양결핍 속에서 철저하니 고립된 적지에서 모진 고통고문을 이겨내면서 적지에서 28년을 살아낼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봤어요. 그리고 28년으로 끝난 것도 아니여. 앞으로도 계속 될 거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이 저렇게 28년 30년 40년 저렇게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읆나한 확고한 내 나름대로의 신념의 체계가 서지 않는 한, 사상 이념적으로 서지 않는 한 함부로 내가 무슨 주의자니, 마니 하는 그런 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자신이 확실히 섰을 때만이 내 사상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하겠다. 그러한 다짐을 했어요. 그래서 함부로 그 사삿ㅇ 이념에 대해 뭐라 뭐라 이야기 하는 것을 철저히 조심하고 있어요. 그 다음부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더란 거여. 그때 혼자 독방에서 종일 그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니 거기서도 죽어라고 이제 공부만 했는데 교도소가 좋은 학교라고. 최열이는 죽어라고 그때 공해문제에 대해서 공부했어요. 다른 거 안하고 그것만. 그래가지고 나와서 공해문제연구소 차려가지고 한국 운동사에서 환경운동에 개척자가 된 거에요. 그쪽으로. 나는 인자, 어느 한 부문 운동하는 것이 체질에 맞는 성격이 아니라 온갖 것을 다 손을 댔는데 일종의 조직운동가 스타일이죠, 내가. 그래서 나는 뭘 하다가 요분야가 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파는 이런식으로 공부나, 그래서 나는 주로 상정을 했어요.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났을때, 내가 그 사람을 과연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전도사들 연습하는 식이지. 그런 입장이었어요. 하여튼 거기서 장기수 할아버지한테 받은 충격이 상당히 컸어요. 그때 이제, 우리 어머님이 건강이 어쩌냐고 면회를 오고, 와서도 이해를 하고 부모님에 대한 그 효도, 효도 문제를 가지고도 이것도 정리를 확실히 하자. 대전 교도소 있을 때 교도관들이 효도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그래서 어머니의 얼굴 부끄럽게 하는게 불효고 떳떳하게 하는 것이 효도라고 그런 식으로 하고 넘어갔는데 이 효도 문제도 내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래가지고 이제 고부분에 의해서도 이제 낑낑거리면서도 정리를 한 것이 이제 아주 내가 어머니라는 시를 쓴 것이 있는데. 「나의 어미니」를. 면담자: 봤습니다. 구술자: 봤어요? 그런 식으로, 어머니도 그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제일 뒷부분은 518이후의 것을 덧붙였죠. 거기에. 모든 어머니들, 이땅의 역사 속 어머니들은 모든 이따으이 고난받고 수탈당했던 어머니들은 나의 어머니다 이렇게 정리를 했어요. 그런, 그 당시에 진짜 그렇게 알차게 했는데, 이 요놈들이 나보고 전향을 하라는 거에요. 내가 무슨 전향이냐고 그랬더니 국가보안법이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있으니까 그때 당시에 전향 안ㅎ고 나왔다 그거에요. 그러니까 전향을 하라 이거죠. 미쳤다고 쏘아 부렀는데, 보안과에 가서 악쓰고 그랬는데. 나와 부렀는데. 근데 그게 어떻게 되었냐면 당시 상황이 에,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가 가지고 받은 형 집행을 정지해가지고 나왔거든요? 구속집행정지로? 형이, 그니까 형 집행정지지. 그러지 형이 종료된 것이 아니거든. 근데 지금 장영달 열린 우리당 의원이 긴급조치, 민청학련 사건으로 우리랑 같이 들어갔었는데 석방됐다가 2․15조치로 석방됐다가 긴급조치 9호로 들어가 가지고 수사과정에서 대들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형 집행정지가 취소되어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장영달이가 졸지에 7년인가 더 살아버렸어. 남은 외상 값을 갚은 거지. 그런 선례가 있었어. 내가 알고 들어갔거든 이제. 장영달이가 목포에가 있었는데. 이놈들이 위협을 하는 거에요, 이게 당신 전향 안하면 형 집행정지가 취소된다 그거여. 그러면 남은 14년 외상까지 살아야 하니까 당신은 앞으로 16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한다. 와 이새끼들 아조 신경질나게 하데. 근데 말은 맘대로 하라고. 50년이 아니라 100년 뭐시 어쩌고 뻥을 쳐놓고 이제 들어오긴 했는데, 찜찜하제. 하도 단호하니 전향이라고 해서 대체 내가 어디서 어디로 전향을 해야, 내가 자유민주주의잔데. 그러면 저쪽은 사회주의로 전향을 해야. 전체주의로 전향을 해야. 뭐 어쩌것냐 그런 식으로 하고 인제 오고 끝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제 엉뚱한 일들이 터져서 난리가 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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