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 구술녹취문 (3차)
■ 개요 구술자 : 윤한봉 면담자 : 박현정 면담주제 :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 2006년 2월 22일 오후 2시-5시 (3시간) 면담장소 :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 3차
■ 상세목록 1. 1-1. 민중에 대한 개념 1-2. 정세분석 1-3. 복직. 복적결정과 토론 1-4. 광주항쟁에 대한 예감과 준비 1-5. 광주항쟁 발발과 피신 2. 2-1. 도피생활 2-2. 김대중 2-3. 귀국후 활동 - 518기념재단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2-4. 정치활동, 정당에 대한 견해 3. 3-1. 요즘 근황 3-2. 518과 재단에 대한 평가
1-1. 민중에 대한 개념
면담자 : (* 그 전에 했던 인터뷰 내용을 되짚어보면서 앞으로 이야기할 것을 정리하고 있는 중) 저번에 박기순 열사이야기까지 해주셨구요. 구술자 : 그건 이제 78년 이야기고. 아, 저, 맞아 78년 12월이지. 면담자 : 예, 그리고 극단 광대이야기, 마지막으로 해주셨던 광대 이야기. 방화사건 주모자로 되가지고 구술자 : 79년 들어가서 면담자 : 예, 그 다음에 박기순 열사. 그렇게 이야기하셨구나. 79년도까지. 예. 거기까지 이야기해주셨어요. 구술자 : 그래서 그러면 오늘이 2006년 2얼 22일 선생님의 마지막 인터뷰구요. 선생님 그래서 제가 518전까지. 79년부터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를 이야기를 들을까 했는데 이 책 (『운동화와 똥가방』)에 나와 있다면. 이게 미국까지, 귀국할 때 까지에요, 선생님? 귀국 다음에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면 그 앞 부분을 간단하게라도 다, 그런데 간단하데 되짚기가 어렵긴 한 대. 면담자 : 하여튼 80년 전. 80년 초 그러니까 내가 긴급조치 9호로 들어갔다가 박정희 죽고. 긴급조치 9호 해제되어 가지고 나온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을 하죠. 그때가 79년 12얼 9일인가 내가 나왔어. 긴급조치 9호 해제로 최규하가 해제해서. 그러니까 나오자 나는 팔이 한쪽이 마비된 채로 고문 후유증으로 나와 가지고 내가 세 번째 구속되기 전에 부마항쟁이 있었다고 그랬잖애? 부마항쟁이 인제 나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왔고. 그래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하튼 나뿐이 아니었지. 다들 충격이었어. 그래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현장을 방문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그때 내가 들어가서 고문당하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석방된 다음에 인제 시골에 가서 선산에 가서 성묘하고 집에서 며칠 있다가 며칠 있고 나니까, 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계속 탁탁탁하고 소리나게 두들김.) 1212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9일 날 석방됐으니까 한 3일 후였죠. 1212 신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거죠. 음...긴가민가들 모두들 했었는데 나는 그때 또 다시 시작이구나. 다 틀렸다. 그런 어떤 민주화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상당히 나는 인제 접었지. 또 시작이다. 그러면서 이제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내가 부산으로 갔어요. 인제 부산 들러서 마산 들러서 이렇게 오려고 했는데. 부산 현장을 이렇게 왔다갔다 시위현장, 항쟁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이야기도 좀 듣고 그리고 부산에 좀 알고 있던 친구들 이야기도 좀 듣고. 그래서 거기서 확연히 깨달은 게, 내가 그 동안에 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민중이 어떻게 뭐가 어떻고 떠들었는데 나는 완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민중에 빠져 있었다. 노동자들 농민이라든지 빈민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역사 속에 항쟁의 주역이었던 농민들. 이를테면 이제 갑오농민운동이라든지 의병항쟁이라든지 이런 차원에서만 이해했지 구체적인 우리 생활 주변에 하루하루를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시는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 우리 주변에서 있는데 이를테면 노동자나 농민으로 분류되지 않은 그 사람들 또한 민중이었는데. 그걸 인제 노동운동, 농민운동 이런 범주 속으로만 하고 생활 속 생활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민중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아! 인제 마산도 갈 필요가 없다, 알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다. 내 인식이 잘못되었던 거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인제 돌아온 거죠. 광주로. 바로 우리 이웃들에 살아 숨 쉬는 민중들이 있었는데 노동자니 농민이니 이런 식의 범주 속에다 넣고 관념적으로만 이해를 했었다는 거죠. 인제 나중에 518로서 확인됐지만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의 갑남을녀 들이 들고 일어난 거죠. 그래서 이제 이걸 검증을 해야겠다. 내가 무얼 어떻게 잘못보고 있었는가. 그래서 어떻게 그걸 잘못보고 있었는가 알아야겠다 그래가지고 그냥 부단히 돌아다녔어요, 광주 전남지역을. 시골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할아버지 할머니들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목표 옛날 철선 다니는 용당 같은데 배타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배 타려고 기다리는 거기 있는 아줌마들하고도 이야기하고. 광주 대인시장 양동시장 막 헤매고 다니면서 사람들하고 부대끼면서 그들의 표정을 읽고 그들과 기회만 있으면 말을 해보고 그러고 다니면서 인제 확인하는 것이 아, 확~실히 내가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인제 운동하는 우리들 스스로를 선각자 내지 선지자, 선구자. 노래에도 나오는. 해란강변에 말달리던 선구자 식의. 그리고 민중들이 안 따라오고. 우리가 앞서가면 언제가는 따라오겠지. 인제 이런 식의 교만방자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거예요. 완전히 그들 앞에 간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엉뚱한 곳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들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 앞에서 섰던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앞에서 선 것처럼 착각을 했고. 심지어는 (민중들이) 하도 안 움직이니까 더 고생을 해야 정신을 차린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는데. 더 당해봐야 할 거라느니 그딴 소리나 하고 있었는데. 아 잘못됐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죠. 그런 시각으로 이제 사람들을 보니까 정세분석에 있어서 예를 들면 현재의 농민운동이 어떻고 운동수준이 어떻고 뭐가 학생운동이 어떻고 기독교가 어떻고 종교계 움직임, 정치권 움직임 등 해가지고 우리 힘이 이 정도니까 어쩌고 저쩌고 이런 식의 정세분석을 하던 관점에서 벗어난 거예요, 내가. 그래가지고 이제 우리들 생활 주변의 민중들이 어떤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것이 신경을 쓰게 될 수 밖에 없었죠. 그러고 보니까 이제 그들이 안 따라온다고 가만히 있다고 무릎 꿇고 있다고 욕하고 그랬었는데 그게 아니여. 그들이 지금 그 엄청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김.) 지진이나 화신을 예고하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그 사회의 정치적인 사회 경제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이 엄청나게 뜨겁게 지금 솟구쳐 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나의 정세분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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