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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7-민족학교2019-01-0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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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학교’의 설립


그렇게 해외운동 10년 계획을 세운 후,나는 나를 해외운동의 거점으로 삼아 나부터 청년운동체를 만들어 가기로 했다. 방도를 궁리한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서두르자. 시간이 아깝다. 청년운동체가 만들어지면 어차피 만들 마당집을 무리해서라도 먼저 만들어 그 마당집을 활용해 청년들과 접촉하고 대화하고 학습하여 의식화시키자. 그렇게 해서 의식화된 청년들을 모아 운동체를 만들자. 그 마당집 이름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민족학교로 하자.”


12월 초에 기완이를 비롯해 가까운 몇 분에게 민족학교 설립 계획을 밝히며 함께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랬더니 모두 다 찬성해서 곧바로 설립 준비에 들어갔다. 기완이와 함께 민족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거나 도와줄 수 있는 동포들을 찾아 갔다. 나는 동포들에게 망명 신청 서류 사본까지 보여 주며 나의 신분을 밝힌 후,재미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미국 사회에서 긍지를 갖고 살아가게 하고 조국과 만족의 발전에 이 바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설립취지와 민족사 교육,민족문화 보급,동포사회 봉사라는 목적사업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협조를 호소했다.

동포들은 우리들의 호소를 듣고 처음에는 모두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한 분 두 분 등을 돌리거나 우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못된 통일운동가들이 방해공작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이를 악물고 일을 추진해 나갔다.

꽁초를 주워 피우며 독심으로 안 쓰고 보관해 온 비상금(조국을 떠나 올 때 광주 동지들이 모아 준 비상금)과 기완이가 저축해 둔 돈을 털어 코리아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40평짜리 사무실을 얻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의자 책상 따위만 샀다. 광주수난자돕기회 회원들과 이길주씨,전진호 형,문성철씨 , 정선모씨 등이 여러 가지 비품들을 구해 날랐고 김석만씨(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박무영씨,장사한씨 등이 페인트칠을 했었다.

여러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땀을 흘린 덕분에 미주 동포사회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자 미주운동권 최초의 마당집이 될 민족 학교 설립식을 83년 2월 5일에 갖게 되었다.

일제하의 만주에서 시작된 민족학교 운동,민족교육 운동이 일본과 서울에 이어 마침내 미국 땅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서 민족학교 운동은 70년대 초에 장준하 선생님,백기완 선생님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오래 가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우리들은 즉시 민족학교를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주정부와 연방정부로부터 면세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교훈을 정했다.


“바르게 살자,뿌리를 알자,굳세게 살자”


교훈을 정하고 강당의 한쪽 벽 위에 녹두장군 영정을 가운데 모시고 좌우에는 김구 선생님과 장준하 선생님을 모셨다. 나는 민족학교 설립일부터 심부름꾼을 자청해서 맡았다. 그리고 귀국하는 그날까지 그 직분에 충실했다. 민족학교 교훈은 그 뒤로 ‘더불어 살자’가 추가되었다.

 

 

사면팔방의 중상모략


82년 말,LA로 온 후 나는 가끔 김상돈 장로님을 모시고 운동권 모임에 나가 보았다. 그때마다 김상돈 장로의 친척으로 유학 왔다가 학교가 마땅찮아 쉬고 있는,그리고 운동 경력은 없으나 운동하는 친구들을 잘 아는 나 ‘김상원’은 참관인 자격으로 한쪽에 앉아서 운동권 현황 파악 차원에서 열심히 지켜보 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운동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일부 통일운동가들의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내가 그런 모임 자리에서 가끔 비판적 발언을 했고 그 발언 내용 이 그분들을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비판은 주로 잘못된 통일운동의 자세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통일을 위해 일 하는 분들이 헌신적인 자세로 진지하게 하지 않고 우월감을 가지고 즐기듯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했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나의 신분을 알게 된 82년 말부터는 눈에 띄게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러다가 막상 내가 민족학교 설립을 추진해 나가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 대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중상을 해오기 시작했다.


“안기부 앞잡이다.”

“미주운동을 파괴 분열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보낸 프락치다.”

“운동 경력이 있는 놈인데 고문을 받고 변절한 것 같다’

“배를 타고 왔다는데 타고 내리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대한 권력기관의 뒷받침 없이 태평양을 건너오는 밀항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들은 나의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주도권과 영향력이 약화될까 봐 나를 안기부 앞잡이로 몰아친 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다 그들의 중상에 넘어갔다. 나를 잘 알고 또 호의적으로 대했던 사람들마저도 그 소동을 LA지역 운동권의 세력 싸움으로 보고 그 싸움에서 민족학교 쪽이 질 것으로 판단하여 그들 편에 서거나 중간에서 화해,용서,타협 운운하며 위선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일을 당하게 되자,그것도 안기부 앞잡이로 몰리게 되자 제대로 잠을 못잘 정도로 격분하고 말았다. 그들 때문에 우리들은 민족학교 설립식도 연기해야 했고 설립 후에도 2〜3년 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관심 있는 동포들이 나에게나 민족학교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86년까지도 계속해서 나에 대해 수상한 놈이 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내가 운동권 한쪽으로부터 안기부 앞잡이로 몰려 길길이 뛰고 있을 때 나의 신분을 파악한 영사관 쪽에서도 역시 중상을 해오기 시작했다. 조국의 독재정권은 재미 동포사회의 운동에 대해서는 조국에서처럼 협박,체포,고문,투옥 등의 직접적인 정치적 물리적 탄압을 할 수 없으니까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통해 운동가에 대해 조국방문을 금지시키거나 음해를 가하는 등의 간접적 사회적 탄압을 해서 동포사회로부터 운동을 고립 차단시키는 방법을 썼다.

운동권 쪽의 모함은 일반 동포사회에는 거의 영항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영사관의 동포사회 영향력은 대단해서 한인회, 노인회를 비롯한 각종 동포단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자행하는 모함은 위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민족학교 뒤에는 북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온 놈이 있다.”

“민족학교에는 인공기가 휘날린다.”

“민족학교에는 김일성 사진이 걸려 있다.”

“민족학교에서는 가끔 사람이 증발한다.”


일반 동포들은 그런 황당무계한 말들을 확인도 안 해보고 그 대로 믿어버렸다. 솔잎 뿌려지듯 동포사회에 그런 소문이 쫙 퍼지자 동포들은 민족학교에 얼씬도 안했다.

전두환 일당의 음해 때문에 민족학교는 설립 후 6개월이 지날 때까지 찾아오는 동포들이 소수의 후원자들을 제외하고는 한 달에 두세 명 정도밖에 안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중상은 그때부터 시작해서 권력을 내놓은 92년까지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나와 민족학교는 통일운동세력들로부터는 안기부 앞잡이로, 영사관으로부터는 빨갱이로 몰렸다. 운동권이나 동포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고립되어 궁지에 몰려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교화 쪽과 DJ 지지 세력들,그리고 친미반공 성향의 민주화운동 세력들까지도 중상을 해오기 시작했다. 교회 쪽은 내가 상업화한 교회에 대해 비판하고,교회에 나가던 청년들이 하나 둘 교회를 안 나가고 민족학교 활동에 참여하자 나를 무시무시하게도 적그리스도나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DJ 지지 세력들도 내가 이에 대해 비판하자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니 빨갱이니 하며 몰아쳤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 또한 내가 친미반공논리에 대해 비판하고 조국의 미군철수와 핵무기철거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주장하고 이산가족들 의 고향방문,혈육상봉을 적극 찬성하고 나서자 대뜸 조국의 운동에 피해를 주는 빨갱이로 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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