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김정남 (6월 항쟁의 주역)이 본 합수 윤한봉2019-03-2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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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에서 설경구가 연기했던 김정남 수석이 본 윤한봉

(너무 길어서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광주의 전설 윤한봉

 

광주의 윤한봉(1947~2007)은 나에겐 항상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범상치 않았던 삶, 그의 맑고 순정한 영혼, 그리고 칼 같은 결단, 그 모든 것이 그를 외경치 아니할 수 없게 했다. 그는 분명 만나고 싶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생전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만나도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아마도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는 홍남순 변호사의 평전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의 광주 출판기념회 날이 아닌가 싶다. 그때도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올라오느라 그와 그냥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던 듯하다. 몇 년 전부터 그의 매제 되는 박형선이 여름이면 몇몇을 신안으로 초청했는데,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와도 만날 수 있겠지 하고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언제 한번 몇 날 몇 밤을 새우면서라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끝내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보면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곧잘 나오던데, 정말 있을 때 만나 보지 못한 것이 이렇게 한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의 육성이 아니라 글로 남겨진 그의 족적을 좇다 보니, 그는 비할 데 없이 크고, 순정하고, 분명해서, 더욱 그가 그립고 아쉽고, 또한 그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는 이제 우리 모두에게 전설의 사람이 되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윤한봉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자원입대해 최전방 부대에서 근무하다 35개월 만에 제대하고 1971년에 전남대 농과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한 윤한봉은 늦깎이에다가 눈 딱 감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1971년에 전국 대학가가 교련반대 시위로 들끓던 해였다. 서울에는 위수령이 내려지고, 전남대 교정에도 경찰이 진입했다. 그때 전남대에서도 30여명이 제적 또는 무기정학을 당하고 4명이 강제 징집되었다. 윤한봉은 시위에는 더러 참여했지만 큰 동요 없이 공부만 계속했다.

그를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싸우자라며 들고 일어나게 한 계기는 19721017일의 유신쿠데타였다. 유신을 보고 그는 읽고 있던 책을 볼펜으로 찍어버리고 한참동안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학생회 활동에 참여해 본 적도 없고, 동아리 활동마저 해 본 적이 없는 그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당시 전남대의 학내 동아리 교양독서회였다. 교양독서회는 1971년에 전남대에 최초로 만들어진 사회과학 동아리 민족사연구회의 후신이었다.

197212월이 되자 휴교령이 해제되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이강, 김남주가 전남대와 시내 일부 고등학교에 <함성>이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뒤이어 <고발>이라는 유인물의 전국 배포를 추진하다 적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졸업생인 박석무와 재학생 이강, 김남주, 김정길을 포함한 10여 명이 고문당한 뒤 투옥되었다. 이 사건은 윤한봉의 각오를 다져주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 봄, 윤한봉은 첫 번째 사업으로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를 통해 농대학생회를 장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뜻이 맞는 친구 민상홍을 후보로 내세우고 단 돈 700원으로 선거자금을 정한 뒤, 그에 기꺼이 동조한 박형선, 문덕희와 함께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선거 결과는 단독 입후보에 따른 일방적 승리였다. 두 번째 사업은 농과대학의 시험부정행위근절운동을 택했고, 욕은 많이 먹었지만, 그 사업 또한 성공시켰다. 세 번째 사업으로는 학교 당국의 과도한 등록금 인상규탄을 택했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윤한봉과 박형선은 학교 당국과 싸움을 시작했다. 등록금 인하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고 학교 당국과의 싸움 그 자체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학교 방송국 기자들의 예상 밖의 협조까지 받은 그 싸움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전남대 차원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판단한 윤한봉은 9월 하순에 반유신 시위를 결행키로 하고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우연치 않은 계기로 당국에 알려져서, 윤한봉과 박형선이 시위 3일전, 화엄사와 송광사 부근의 여관에 각자 연금되어 버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아마도 이 계획이 성공했다면 유신 이후 최초의 대학가 시위를 선도한 곳은 전남대가 되었을 것이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최초의 반유신 시위를 벌인 날이 102일이었으니까.

그해 127, 102일 이후 구속되거나 징계받은 학생들이 모두 풀려나서, 해빙무드로 접어드는가 싶더니 19741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발표되었다. 이때 윤한봉은 규탄이나 반대만으로는 안 되겠다. 뒤집어엎어 버려야겠다. 엎어 버리기 위해서는 산발적인 바위치기로는 안 되고 4.19처럼 같은 목표를 내걸고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해야겠다. 그러자면 전국 조직이 필요하다. 우선 자금부터 모으자라고 생각했다. 제적당하고 감옥에 갈 것이 뻔하니 학교 등록을 하지 말고 등록금을 자금으로 돌려쓰는 것이 자금 준비의 출발점이었다. 장학금을 수령해 그 돈을 자금으로 돌리기도 했다. 3월 하순경에는 자금이 떨어져서 시집 간 누님한테서 돈을 꾸기도 하고, 심지어 화투를 쳐서 딴 돈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3월에 들어서면서, <함성>지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정길의 소개로 서울에서 온 황인성, 이철, 나병식을 만났다. 그들은 윤한봉에게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동시다발 시위를 해야 승산이 있다. 전국을 서울권, 영남권, 호남권으로 나누어 조직사업을 해나가야 하니 호남권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전북 쪽에 연고가 없어서 자신이 없다고 하니까 이철이 전북대생 한 명을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 응낙했다.

35일에는 대전역 앞의 어느 중국집에서 황인성과 경북대생 임규영을 만나 지역정보를 교환하고, 함께 점검했다. 그때 임규영에게 들은 경북대 상황은 전남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단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다음부터는 비상연락을 맡을 사람을 같이 데리고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윤한봉은 문리대 복학생 김상윤을 만나서 저간의 경과를 설명하고 다음 모임부터는 함께 가자고 제안해서 쾌락을 받았다.

39일에 윤한봉과 김상윤은 속리산 법주사 부근 어느 여관에서 서울대의 황인성, 전홍표 그리고 혼자서 온 경북대의 임규영을 만나‘311, 한신대 시위 예정’,‘경북대가 318일에서 22일 사이 대규모 시위 계획등의 정보를 교환했다. 또 화염병을 만들어 시위 때 활용하자는 이야기와 시청·도청이나 언론기관 같은 공공건물을 점거 농성하는 문제도 논의했다.

전북대와는 좀체 조율이 되지 않았다. 윤한봉은 자신의 능력 부족을 한탄했지만, 전북대에서 나온 사람들을 끝내 젊은 가슴을 열지 않았다. 화염병 실험도 실패했다. 그러나 전남대의 조직은 김상윤을 중심으로 튼튼하게 짜여 갔다. 김상윤은 문리대의 윤강옥을 끌어들였고, 윤강옥은 무서운 집념으로(7번이나 새벽에 찾아가는 등) 상대의 이훈우, 문리대의 이학영과 하태수를 끌어들였다.

313일에는 대전에서 황인성과 임규영을 만나 경북대와 영남대의 시위 계획을 들었고, 그 며칠 뒤에는 조치원에서 임규영 대신 온 경북대 졸업생 이강철과 황인성을 만나 상황을 점검했다. 이때 이강철이 하도 대규모 시위를 장담하기에 그 비결을 물었더니 이강철이 기가 막힌 대답을 했다. 유인물을 뿌리고 선동해도 학생들이 안 나오면 강의실로 돌아다니며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몰아낸다는 것이다. 눈에다 잔뜩 힘을 주고 강한 사투리로 쌔리 패는기라하던 이강철의 그 강렬한 인상이 오랫동안 선명했다고 한다.

322, 윤한봉은 부산시 구포역 앞에서 황인성, 이강철과 만나 21일의 경북대 시위의 실패 경위를 듣고, 전남대가 일단 328일에 시위를 결행해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 다음날 김상윤, 박형선과 의논한 끝에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323, 윤한봉은 광주 지역 시위 때 쓸 선언문 문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이틀간을 끙끙댔다. 326, 박형선,문덕희,최철 등과 초저녁부터 유인물 등사를 시작했지만, 글씨가 또렷하게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최철의 동생 최훈을 깨워 데리고 와서야 자유수호구국 비상광주학생총연맹 이름으로 된자유수호구국선언문’1천 장을 등사할 수 있었다.

326, 회합 장소인 부산 구포에는 김상윤이 대신 갔다. 43일에 일제히 동시다발로 시위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31일에 전해들었다. 김상윤이 전남대의 43일 시위는 준비 부족 때문에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윤한봉은 42, 광주 시내 중국집 아서원에서 김상윤, 박형선, 유선규(사범대), 최철과 만나 의논한 뒤 준비 관계로 43일 시위는 어려우니 49일 오전 10시에 결행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43일에 조치원역 대합실에서 이강철을 만났다. 황인성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강철한테서 321일 시위를 주동한 경북대생들이 전원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한봉은 전남대가 43일에 시위를 못하고 49일에 하기로 했다고 말하고, 48일 오후 1시에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돌아왔다(황인성과는 약속에 차질이 생길 경우 1주일 뒤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날 밤에 긴급조치 4호가 발포되었다. 윤한봉은 직감적으로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자신이 참여해 준비하고 있는 전국적인 연합시위 추진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44일 오전에 윤한봉은 전남대 문리대 교정에서 김상윤에게 329일 부산 구포회합 때 황인성한테 받아 온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공동선언문 1매를 받았다. 그 때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은 조직명이 아니라 선언 주체를 어디로 할까 의논하다가 여러 이름들 중에서 그 이름이 제일 낫다고 의견이 모아져 그렇게 결정된 것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윤한봉과 박형선은 그런데도 49일 보란 듯이 시위를 결행하자고, 죽을 각오로 밀어붙이자고 굳게 다짐했다. 이들은 앞서 만들었던 선언문 1천 여 장을 하숙집 아궁이에서 소각해 버리고, “긴급조치 제 4호를 독재정권의 최후 발악으로 단정하고 전면 부정한다는 내용을 추가한 새 선언문 초안을 만들어 1,700여 장을 등사해 김상윤에게 보관시켰다.

윤한봉은 46일에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가 자신에게 기대가 크셨던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린 뒤 죽을 각오에 대해서는 숨기고 재적당할 각오, 감옥에 갈 각오로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는 뜻을 말씀드렸다. 한참을 눈감고 계시던 아버지는 해라라고 말씀하시고, 조금 있다 눈을 뜨고 윤한봉을 향해 그러나 앞장서지는 마라라고 덧붙이셨다. 윤한봉은 광주로 올라와 박형선, 문덕희에게도 죽을 각오를 하고 부모님께 남길 유서를 써 두라고 당부했다.

터질 듯한 긴장 속에서도 윤한봉은 43일에 이강철과 했던 약속 때문에 48일 오후 1, 조치원역 대합실에서 황인성과 이강철을 1시간가량 기다렸으나 두 사람 모두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리인을 보낼때의 약속이 있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리인을 찾았으나 대리인도 발견할 수 없었다. 광주로 돌아오자마자 다음 날의 시위준비를 최종 점검했다. 7-8시경, 윤한봉은 김상윤, 박형선, 윤강옥, 하태수, 유선규, 정환춘, 이훈우, 최철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윤한봉은 농대의 문덕희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연히 시위를 연기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윤한봉은 연기하자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잡혀가자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시시각각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준비가 덜 되었으면 덜 된 대로 내일 강행해야 한다고 시위 계획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오전 10시에 본관 앞으로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집결시키고, 윤한봉이 선언문을 낭독한 뒤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밀고 나가기로 하고, 다음 날 아침 8시에 사직공원 팔각정 앞에서 학교버스를 타고 함께 들어가기로 약속했다. 헤어지기 직전 문리대의 이학영도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한봉은 박형선, 최철과 함께 최철의 후배 집으로 가 다락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뒤에 안 일이지만, 윤한봉의 아버지가 그날 밤 도경 정보과로 연행되었다. 도경 정보과장 유길종은 전날의 원한 때문에 윤한봉의 아버지에게 악감정이 있었다. 그 다음 날 윤한봉이 연행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그는 윤한봉이 그 새끼 사형당하도록 조서 꾸며!”라고 큰 소리로 명령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19752·15조치로 윤한봉이 석방되기 1주일 전에 간질환으로 돌아가셨다.

49일 아침 8시에 윤한봉과 박형선, 김상윤, 최철, 윤강옥은 사직공원 팔각정앞에서 만났다. 이들은 이미 저들이 비상을 걸었을 테니 버스를 타면서 바로 선언문을 뿌리자고 의견을 모았다. 학교버스에 올라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박형선이 유인물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학교버스가 학교 안으로 못 들어가고 후문 앞에서 정차하자 이들은 학생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박형선이 뛰다시피 농대로 가서 강의실을 돌며 유인물을 뿌리고 시위 참여를 호소하다 교수들에게 쫓겨 왔다. 뒤따라 농대로 가던 윤한봉은 쫓겨 오던 박형선을 만나 함께 온실 속으로 피하려다 교수들에게 붙잡혀 곧바로 형사들에게 넘겨졌다. 김상윤, 윤강옥도 선언문 한번 제대로 뿌려 보지도 못하고 붙잡혔다.

윤한봉과 박형선은 전남도경 공안분실로 끌려가 도경국장 손달용과 공작분실장한테 어금니가 깨지도록 두들겨 맞았다. 이어 4일간 계속해서 몽둥이로 얻어맞으며 , 잠 한숨 못자고 집중적으로 수사를 받았다. 5일 째 되는 날, 윤한봉은 머릿속에서도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다행히 물고문이나 전기고문은 받지 않았다.

수사를 받을 때나 감옥살이를 할 때 가장 괴로웠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데 따른 부끄러움이었다. 전북대와 광주일고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고, 전남대 시위도 타 지역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49일의 시위마저 실패했다. 도무지 어느 쪽으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또 하나는 제대로 한 일 없이 여러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죄책감이었다. 등사 장소를 제공하고 도와줬던 김윤봉과 이현택을 비롯해, 문리대의 성찬성, 전영천, 박진 등 선의의 사람들이 모두 끌려와 징역을 살게 된 것이 가슴 아팠다.

공안분실의 수사가 끝나자 윤한봉은 광주 동부경찰서 유치장으로 넘겨졌고, 거기서 불려나가 도경수사과의 신문을 받았다.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나요?”윤한봉은 오기가 치밀어 올라 그렇소. 엎어버리려고 했소라고 툭 쏘듯 대답해 버렸다. 이 답변이 내란예비음모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윤한봉은 모르고 있었다. 뒤에 이 대목을 우려한 친구들이 그것을 부인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검찰관의 직접신문을 받을 때 윤한봉은 눈 딱 감고 아니오라고 부인해 버렸다. 당황한 검찰이 다시 따져 물을 때 그는 또 눈 딱 감고 때려서 시인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윤한봉은 동부경찰서 유치장에 50일 정도 갇혀 있다가 6월 초순, 이강, 김정길과 함께 서울 종로경찰서를 거쳐 서대문구치소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615일부터 군사재판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윤한봉은 긴급조치 1·4호 위반 등의 죄목으로 징역 15, 자격정지 15년을을 병과받았다. 항소는 했지만 상고는 포기했다. 윤한봉은 안양교도소, 대전교도소를 거쳐 1975215일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재판정에서 전남대생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 등 모두는 하얀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변호사들 사이에서 전남대생을 찾으려면 까마귀를 찾으면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얼마 뒤 윤한봉에게 전혀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한복 한 벌이 들어왔다. 윤한봉은 그 한복을 입고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가 한복을 입고 가면 다른 전남대생들이 더 외로울 것이다생각하고 그냥 나갔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도 다 같은 날 한복을 차입받았지만, 같은 이유로 모두 한복을 안 입고 나왔다고 한다. 그 한복은 방청석에서 이들을 보고 안타ᄁᆞᆸ게 여긴 서중석의 형님이 넣어 준 옷이었다.

 

타도 박정희맹세

 

197549일은 1년 전 윤한봉이 전남대 교정에서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간 날이었다. 그날 인혁당 관련 8명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들었다.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악을 썼다. “이 악랄한 박정희 군사정권을 반드시 타도해 버리고 말겠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엎어 버릴 것을 맹세한다.”

이러한 용서할 수 없는 분심의 연장선 위에서 윤한봉은 정상용, 박형선, 조계선 등과 더불어 조금 황당하기는 하지만 박정희 암살계획을 세운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정밀한 방법은 그만두고, 수류탄이나 다이너마이트를 구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자폭 형식으로 안고 뛰어드는 방식,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폭탄을 안고 뛰어드는 방식을 채택하기로 하고 수류탄을 세 개, 다이너마이트를 뇌관까지 두 박스를 준비하고, 더 모으는 작업을 계속하던 중에 윤한봉이 두 번째로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

윤한봉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9764월 두 번째 투옥된 것은 3·1 민주구국선언 때문이었다. 윤한봉이 가까스로 3·1 민주구국선언문을 구해서 후배들 앞에서 읽어 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을 후배들이 또 친구들에게 읽어 준 일이 문제가 되어, 거슬러 올라와 윤한봉이 구속된 것이다. 이 일로 윤한봉은 16개월을 선고받아 20개월을 복역했다. 대구에서 복역 중 28년을 독방생활을 하는 장기수를 보고, 윤한봉은 저렇게 28,30,40년 내내 변함없이 자신을 지켜 낼 수 있을 만큼 확고한 신념체계가 서지 않는 한, 함부로 자신이 무슨 주의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197712, 두 번째 징역에서 풀려난 윤한봉은 19784월의 함평 고구마 사건 피해보상투쟁에 참여한다. 함평 고구마 사건 피해 농민들이 북동성당 교육관에서 단식농성을 하는데, 하다못해 치약, 칫솔, 침구조차 없이 시작해 버렸다. 농민들의 수도 늘어나고, 전국에서 지원팀은 내려오는데, 아무 준비조차 없이 단식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윤한봉은 이강, 박형선, 조계선과 함께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해 11월 계림동성당에서 추곡수매가 인상 등 다양한 요구들을 내걸고 전국농민쌀생산자대회를 열었을 때는 23일 동안 800여 명의 8끼 식사를 식장에 맡기는 대신 윤한봉 등 청년들이 맡아 하기로 했다. 딱히 자신이 있거나 준비가 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지식인운동, 민중운동, 여성운동, 청년·학생운동의 연대와 연합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해 자청해서 떠맡았고, 여성과 후배 등 모든 역량을 동원해 마침내 성공적으로 그 일을 수행해냈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여성들을 중심으로 송백회가 결성되어 양심수들의 옥바라지와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 이때 윤한봉은 여성들에게 털양말 짜기를 권유했다. 두 번의 징역을 경험해보니, 감옥안은 밖보다 훨씬 추워 동상에 잘 걸렸다. 동상을 막는 길은 털양말을 신는 것이었다. 이 경험을 되살려 여성 운동가들에게 털양말 짜기를 권고한 것이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정치범이 40명 있었는데, 여성들이 짠 양말은 147켤레나 됐다. 그 양말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직접 넣게 했다. 그것이 1단계 작업이었고, 그 일들이 쌓이고 모여 마침내 송백회를 결성하는 데까지 이른다.

또한 19786월 송기숙 교수가 추동하고 있던 <우리의 교육지표>사건에도 참여했다. 전남대 교수들한테 서명을 받을 때 윤한봉은 누구누구가 서명을 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교수들을 만났을 때, 뭔가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는 표정과 그 정도를 가지고 윤한봉이 판단한 결과일 뿐 정보를 들어서 안 것은 아니었다. 교수들이 구속되고 난 뒤에는 학내에서 기도회부터 시작해서 교내에서는 물론 더 나아가 시가지까지 진출해서 시위를 벌였다.

1979년에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현대문화연구소를 냈다. 옥바라지용 책들을 왕창 모아 놓고, 가족들이 와서 그 책들을 감옥에 넣어 주기도 하고, 다시 찾아 갖다 놓기도 하는 등 다목적 연구소였다. 초대 소장은 문덕희가 맡았고, 김희택, 정용화가 그 뒤를 이었다. 서울에 있는 출판사들을 돌아다니며 책을 모아 2천여 권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그곳은 극단 광대가 출범하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고, 구속자협의회(뒤에 민주청년협의회)도 이 연구소를 회의실 겸 사무실로 썼다. 그러나 이 연구소는 5·18을 겪으면서 작살이 났다.

197910월 초에 전남대 본관 화재 사건이 벌어졌다. 본관 안에 정보부 직원과 경찰서 정보형사들의 휴게소 비슷한 게 있었는데, 그 곳을 겨냥한 방화였다. 그러나 피해액 15천원의 경미한 방화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빌미로 1023일 당국은 윤한봉을 연행한 뒤, 오금에다 장대 끼우고 물 먹이는 물고문을 3일 동안 계속했다. 이는 부마항쟁이 광주로 옮겨 붙을 것을 예견하고, 사전에 위험을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벌인 작전이었다. 윤한봉은 이 고문으로 벽을 잡고 일어서고, 벽을 잡고 미끄러지듯이 간신히 앉을 만큼 몸이 심하게 상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죽고 나서야 풀려났는데, 박정희 사망 소식을 듣고 윤한봉은 온몸이 간질간질한 쾌감과 희열을 느꼈다.

 

잡히면 죽는다

 

윤한봉은 부마항쟁 소식을 듣고, 부산을 찾아가 직접 돌아본다. 그곳에서 자신이 그동안 운동하면서 민중이 어떻다고 떠들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민중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즉 생활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그들 민중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당초 들를 예정이었던 마산을 빼놓고 광주로 돌아왔다. 돌아와 검증해야겠다고 생각한 대로 광주·전남 지역 시장 상인들을 만나 갑남을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운동하는 자신들이 앞서가면 언젠가는 따라오겠지 하는 식으로 교만방자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지금 지진이나 화산 같은 변화를 갈망하고, 정치적이고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갈망하는 마음이 엄청나게 뜨겁게 솟구쳐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윤한봉은 광주가 터진다는 결론을 내린다. 즉 광주항쟁을 예감한 것이다. 이때가 19803월 말경이었다. 12·12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 일당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민주화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절망하게 되고, 절망하면 분노하게 되고, 마침내 분노가 쌓이면 폭발하게 된다. 특히 전남과 광주가 가장 열망이 크고, 또 차별과 소외, 빈곤으로 대표되는 곳이기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광주와 전남은 피바다가 될 것이다. 이것이 그의 정세 전망이었다.

윤한봉은 이 같은 자신의 전망을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다. 그때 만들어진 각 지역 간의 정보교환의 틀에서도 이야기했고, 55일 식영정 민주가족야유회에 가서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무도 윤한봉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느니, 회의 분위기를 깬다느니, 다른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느니 하며 무시했다. 나중에는 윤한봉이 신들렸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안 믿었다.

윤한봉은 자기 혼자라도 준비해야 한다면서 15,000분의 1 지도를 사서 연구도 했다. 광주는 어차피 깨지는데,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성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청을 장악해야 한다. 저놈들이 무기를 발포할 것이 뻔한데, 그에 대항하려면 이쪽에서도 무장할 수밖에 없다. , 다이너마이트 등이 있는 곳을 체크하고, 도청 주변의 도로도 새삼스럽게 살폈다. 그리고 국민에게 또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내용의 성명서도 구상했다. 515일에는 의사 전홍준의 아기 돌인지 백일 때 8인모임(정상용, 정용화, 이양현, 윤강옥, 김영철, 박용준, 윤상원, 윤한봉)에서도 이야기했다.

윤한봉은 당시 520일에 국회 소집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21일 이후에 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나리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이에 대비한 준비를 일찌감치 했다. 목욕도 하고 문건들과 사진 같은 자료도 모두 치웠다. 그리고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며 숙식을 했다. 17일에는 19일에 있을 농민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가, 서울에서 신군부가 총학생회 회장들 회의를 급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박관현은 피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친구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어왔다. 박형선도, 김상윤도 잡혀갔다고 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정용화와 헤어져 서울 가는 열차를 탔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대전서 내렸더니 군인들이 명단들고 검문하는 등 살벌하기 짝이 없어 되짚어 내려오는데, 자칫 형사한테 잡힐 뻔했다. 가까스로 장성역에서 뛰어내려 택시를 타고 광주로 돌아왔다. 문병란 선생 댁에 가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의대 앞에 있는 동생(경자) 집에 갔다. 동생은 오늘 두 번이나 경찰이 다녀갔는데 개죽음당하려고 여기 왔느냐고 하며, 윤한봉을 벽장에 숨겨 주고 밖에서 열쇠로 잠가 버리고 나갔다.

얼마 뒤 작은형이 와서, “지금 잡히면 무조건 죽음이다. 개죽음이다.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빠져나가라고 등을 떠밀어 우선 택시를 타고 남평을 거쳐 나주로 갔다. 나주에서 강진을 오락가락하면서 며칠을 보내고, 527일 도청이 함락됐다는 뉴스를 듣고 성전, 강진을 거쳐서 순천으로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우선은 이철용의 집에 몸을 풀었다.

이때부터 그의 긴 도피생활이 시작되었다. 도피하면서도 짐에다 칼을 넣고 다녔다. 언제 어떻게 갑자기 들이닥쳐 체포당할지 몰라, 그럴 때에는 자살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오른손이건 왼손이건 언제라도 칼을 잡고 정확하게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연습도 했다. 양말을 벗지 않고 자면서 그 속에 항상 칼을 꽂고 있었다. 그것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경동맥을 자를 수 있는 면도날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목욕하는데 급습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입에 칼을 물고 목욕을 했다.

윤한봉은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11개월 동안을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도피생활을 했다. 화가 홍정경 씨 부모님 댁, 소설가 윤정모 씨 댁, 오송회 사건의 이광웅 시인 매제 신옥재 씨 댁, 성염 교수 댁 등 7~8군데를 옮겨 다녔다. 11개월간의 도피생활 내내 윤한봉은 5월 영령들과 고문당하고 투옥된 분들과 병상에 누워 있거나 불구가 된 분들에게 죄송하고, 한 목숨 바치자고 앞장서 떠들었던 놈이 제 몫도 못하고 죽지도 않은 채 도망쳐 나와 숨어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정세 전망을 잘못해서 제대로 대책도 못 세우고 기습을 당한 자신이 혐오스럽고, 악화일로에 있는 정세마저 절망스러워 그 괴로움 때문에 수도 없이 몸부림쳤다.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처박고 끝없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각오를 했다. “어떻게든 적들에게 체포되지 않겠다.”

527일 이후 윤한봉은 즉각 현상수배가 되었다. 수천만 원의 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린 수배였다. 저들은 윤한봉을 폭동의 수괴로 만들려 했다가 잡히지 않자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수괴로 만들고, 김대중의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폭동으로 조작했다. 19808월에는 독일에 망명할 뻔한 일도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광주에서 전해진 소식은 절대 잡히면 안 된다.’,‘잡히면 죽는다는 말이었다. 광주 운동권이 윤한봉의 신변 안전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이유 중의 하나는 광주가 터진다는 예언, 무장투쟁론 등을 적은자유노트가 저들에게 압수되어 그걸 빌미로 사건을 재조작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자유노트사건은 늦게 잡힌 송선태가 자기 혼자만의 구상이었다고 버텼기 때문에 일단은 봉합되었다.

윤한봉은 광주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 결심했다. 아무런 활동도 못 하면서 주위 사람들 신세만 지고, 여러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광주 운동권에 걱정만 끼치는 기약 없는 도피생활을 벗어나 해외로 나가 망명투쟁을 하자는 결심이었다. 탈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윤한봉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탈출의 길이 열렸다. 무역선을 타고 북미 대륙까지 가는 길이 갑작스럽게 열린 것이다.

 

12년 동안의 망명생활:[운동화와 똥가방]

 

경남 거창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정찬용(전 청와대 인사 수석)에게 외항선에서 2등 기관사로 일하는 정찬대라는 동생이 있는데, 그 사람이 윤한봉의 밀항을 돕겠다고 나섰다. 매우 공교롭게도 같은 배에서 3등 항해사로 일하는 최동현이 이미 박형선한테 그런 부탁을 몇 차례 받고 있었다. 최동현이 가세하면서 밀항 계획은 급진전했다. 윤한봉은 이들을 동생들이라 불렀다.

1981429일 밤 9, 윤한봉은 정찬대, 최동현과 함께 35천톤급 무역선 표범호에 승선하는 데 성공했다. 윤한봉이 숨어 있는 공간은 표범호의 병실에 딸린 한 평 반 정도의 환자용 화장실이었다. 이 병실은 원래 무역선의 항해 도중 발생하는 환자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외항선원들은 아프면 그냥 자기 방에 누워 있기 때문에 병실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윤한봉은 화장실문을 안에서 잠그고 그 속에서 생활했다. 무려 35일을. 35일간의 밀항 기간 동안 식사라고 한 것은 여덟 차례뿐이었다. 그것도 동생들이 남몰래 밥이나 라면에 김치를 섞어 비닐봉지에 담아 넣어 준 것들이었다. 그 밖의 먹을 거라고는 배에 오를 때 비상식량으로 마련한 두 주먹 정도의 잣, 마른 멸치, 마른 새우와 항해 12일째 호주에 상륙했을 때 정찬대와 최동현이 가져온 꿀뿐이었다. 꿀은 하루에 두 숟갈 정도를 먹었다.

굶주림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더위였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으며, 사방이 철판이었다. 게다가 철판 벽 옆으로 나 있는 연통은 엄청난 열기를 뿜어 댔다. 특히 배가 적도를 통과하는 2-3일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윤한봉은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마침내 63, 미국 워싱턴 주 벨링햄에 도착했다. 35일 만에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이다. 망명지에 무사히 안착한 뒤, 윤한봉은 지니고 있던 칼들을 어두운 밤바다에 던져버렸다.

망명 이후의 이야기는 윤한봉이 쓴 책 <운동화와 똥가방>(한마당,1996)에 씌어 있다. 소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썼는데, 그 소제목 아래에 적힌 내용은 이렇다.

나의 생활은 민족학교초기에는 좀 어려웠지만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해결되어 1985년부터는 별 걱정이 없게 되었다. 내 생활이라 해 봤자 가족도 없고 집도 절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통장이나 수표도 없는 데다 술도 체질이 특이해 전혀 못 마시기 때문에 먹고 자고 입는 것이 해결되고 담배만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조국에서 운동할 때처럼 손톱깎이, , 이쑤시개, 칫솔, 치약, 양말, 속옷과 필기도구, 자료철, 책 한두 권이 들어있는 가방(그 가방을 모두들 똥가방이라 불렀다) 하나 달랑 어깨에 메고 운동화나 고무신을 신은 채 드넓은 미국 땅을 누비고 다녔다. 각 지역 마당집이나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집에서 자고 먹었다. 옷은 주위로부터 얻어 입거나 중고품 옷 중에서 골라 입었으며, 신발과 담배 또한 주위의 도움으로 해결했다(전남대 송기숙 교수님이 오셨을 때 나는 고무신을 신은 채로 라스베이거스 관광을 시켜 드렸는데, 세계적인 환락의 도시와 내 고무신이 영 안 어울리게 보였는지 송 교수님은 돌아오는 길에 무조선 나를 신발가게로 끌고 들어가셔서 운동을 하려면 운동화나 신고 해라고 하시며 반강제적으로 운동화 한 켤레를 사 주셨다).

활동비 문제 또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도움이 늘어 서서히 해결되어 갔다. 철따라 옷을 선물해 주신 분들, 자동차로 나를 태우고 다니느라 수고해 주신 분들, 정성으로 대접해 주고 재워 주신 분들, 그리고 활동비에 보태 쓰라고, 용돈으로 쓰라고, 보약을 사 먹으라고 하면서 쓸 데 안 쓰고 절약한 돈을 내놓은 전진호 형과 같은 분들, 땀 흘려 번 돈, 특히 사업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시간을 낼 수 없어 행사나 학습이나 회의에도 잘 나오지 못하고 가끔 나왔다 하면 피곤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 정도로 잠 안자고 번 돈을 내 놓은 강병호 씨 같은 회원들과 후원자들, 그리고 이름을 숨기고 몰래 내 똥가방에 돈을 넣어 놓곤 하는 고마운 분들 덕분에 나는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분들 덕분에 나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직 관리도 하고 사업활동 지도도 하고 학습 지도도 하고 수련회도 하고 후원자 관리나 상근자들 격려도 하고 대중강연도 하는 등의 활동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탄압속에서 고생한 조국의 운동가들이 손님으로 오면 관광도 시켜드리고, 조국의 옥중에 있는 친지들에게 영치금도 보내 주고, 건강이 안 좋은 조국의 운동가들에게 가끔 보약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윤한봉이 망명생활을 어떻게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그의 고백이다. 망명생활 동안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다. 미국에 도착해서 윤한봉은 마음속으로 망명생활을 위해 다음과 같이 각오와 다짐을 했다.

 

내가 미국에 있을 기간이 5년일지 10년일지 모르지만 그 세월을 하루같이 광주의 원혼들과 고난 속에서 싸우고 있는 조국 동포들과 동지들, 그리고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을 생각하면서 전라도 촌놈 합수로 변함없이 살아가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자. 절대로 그들을 배신하지 말자. 몸은 비록 이역만리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항시 그들 곁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자. 절대로 그들의 원망과 지탄을 받는 생활은 하지 말자. 절대로 편안한 생활을 하지 말자. 조국에 돌아갈 때는 떳떳하게 갈 수 있도록 살아남은 죄와 도망친 죄를 깨끗이 씻고 갈 수 있도록 성실하고 철저하게 운동을 하자. ”

 

그리고 생활 수칙을 이렇게 정했다.

이승만처럼 미국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말아야 한다. 영어를 안 쓰고 운전을 안하고 샤워를 안 한다.

영어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쓰고, 샤워는 조국에서처럼 한 달에 두어 차례 목욕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분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조국에서처럼 절대로 내 것을 갖지 않는다.

활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도망자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조국에서 도피생활 할 때처럼 잠 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

 

광주항쟁과 미국의 역할

 

윤한봉은 미국이 전략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남하를 막으려고 한국에 말뚝을 박아 놓고 있다고 본다. 그가 볼 때 그러한 말뚝은 곳곳에 박혀 있었지만, 터키와 베트남에서 그 말뚝이 빠져나갔고, 이란과 한국에서만 그 말뚝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1979114,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 시의 미국대사관을 점거해, 직원 60여 명을 인질로 1981120일까지 장기 농성을 벌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대사관에 있는 비밀문서의 내용을 근거로 그동안 미국이 어떤 짓을 했는지를 폭로해 미국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윤한봉은 바로 이 시점에서 카터 정부의 대한정책은 온건한 친미·반공·반북적인 군사정권 수립으로 급선회했다고 생각한다. 미국대사관이 이란에서 점거된 바로 그다음 날 카터 정부는 극비리에 백악관 내에 체로키라는 비상한국대책반을 만든다. 이 대책반은 대통령을 비롯해 국방장관, 국무장관, 중앙정보국장, 백악관 안보보좌관, 국가안보회의 아세아담당 책임자, CIA 한국지부장, 주한 미국대사, 국무부 차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등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체로키 팀은 특별암호를 사용해 서울의 미국대사관 측과 비밀전문을 주고받는데,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유일하게 그 전문을 접할 수 있는 사람은 클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요컨대 이란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전보다 엄청 더 경계하고 살피게 되었으며, 한국을 대하는 정책을 변경하는 등 그러한 배경 속에서 12·12 사태가 가능했다는 이야기이다. 윤한봉은 그 내용을 입증할 수 있는 실증적인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5·18은 한미연합작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57일에 보낸 클라이스틴의 비밀전문은 한국 군부가 우발적 상황과 학생들의 시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2개 공수여단을 서울과 김포공항 지역으로 이동시킨다는 사실을 주한미군 지휘관들에게 알려 왔다라고 되어 있다.

58일의 비밀전문은 김대중, 김영삼 및 기타 인사들이 학생들에게 전두환은 물론 신현확 국무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등 위험스러운 행동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현재의 충돌상황을 고조시킬 것이다.···· 이런 상황을 조성한 많은 책임이 성숙하지 못한 정치인과 급진적인 학생 지도자들한테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514,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이 미국 정부 당국자들과 한반도 주변 정세와 한국 사태를 협의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출국한다. 윤한봉이 보기에 이는 517일 밤의 쿠데타(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대대적인 민주인사 검속) 당시 자신이 한국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쇼였다. 더구나 513,14일은 한국에서 코프제이드80라는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합동군사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이 미국으로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517, 공포 분위기 속에서 모인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방장관이 일방적으로 계엄확대를 선언해버린다. 그리고 민주화투쟁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법적 근거도 없이 잡혀 들어갔다. 김대중은 잡혀 들어가고, 김영삼은 가택에 억류되었다. 광주에서도 학생운동 출신으로 잡혀가지 않은 사람은 윤한봉과 또 한 사람뿐이었다. 윤한봉은 가방을 메고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을 돌아다니면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비 검속을 피할 수 있었다.

514~163일 동안에 광주에서는 민주화대성회라고 해서 광주의 모든 대학, 전문대, 그리고 대동고등학교, 전남고등학교 등의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서울에서는 15일에 서울역 회군으로 시위가 끝났지만, 광주에서는 16일까지 계속되었다. 17일은 쉬었다.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은 만일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 날 10시에 모두 자기 대학교 정문에 모여서 싸우기로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킨 것은 몇 개 대학에 지나지 않았다.

전남대에서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0여 명이 준비를 하고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계엄군들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모조리 잡아다 작살나게 두들겨 패고 난 뒤였다. 이들은 착검한 총 끝으로 학생들을 쑤셔 댔다. 피를 흘리며 시내로 도망쳐 나온 학생들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공수부대원들은 구경하는 시민들까지 내려찍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5·18이 학생 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에 시민들은 분노가 지나쳐서 공포에 떨지 않고 공수부대에 도망 다니다가 맞서서 대항하기를 반복했다. 처음 18,19일에는 계엄군들이 시민을 쫓아다녔고, 시민들은 도망갔다가 다시 모여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20일부터는 시민들이 계엄군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공격하는 상황으로 바뀐다. 발포하면 도망가다가 피를 흘리면서 다시 돌아와 싸웠다. <아리랑>,<봉선화>,<애국가>를 부르며 울면서 싸웠다. 이렇게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항쟁이 벌어졌다. 21일 오후 4시경에는 계엄군이 도저히 못 견디고 시내에서 빠져나갔다. 전남대, 조선대, 도청에서도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521일부터 도청을 시민들이 장악했다. 그리고 우리도 무장을 하자면서 지방으로 내려가 나주부터 경찰서 무기고를 깨부수고 무장을 했다.

21일 클라이스틴은 의심할 여지 없이 대규모 폭도가 광주시를 일시적으로 장악했다. 정부 당국은 매우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라는 전문을 보낸다. 22, 최전방에 있었던 20사단의 광주 파견을 요청받고 백악관은 이 요청을 받아들인다.

524,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이 사형을 당했다. 522~24일까지 광주는 해방세상, 대동세상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그동안에 어디선가 민주항쟁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24일까지 외부에서는 그 어떤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25일부터 광주 시민들은 불안에 빠지기 시작했다. 전화는 끊겼고, 광주는 완전히 포위 봉쇄되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 최후항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도청항쟁 지도부를 만들었다. 최후의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527, 20사단이 내려오고 공수특전단은 탱크를 앞세워 광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527일은 미국의 항공모함 하나가 부산항에 들어오는 날이기도 했다. 북의 오판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527일의 광주진압작전은 사실상 한미연합작전이었다. 이렇게 해서 5·18광주민주항쟁은 527일에 끝났다.

827,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은 <LA 타임스>와 한 회견에서 전두환이 부자연스럽지만 지도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고, 한국인은 맹목적으로 우두머리를 따르는 들쥐들처럼 그의 주위로 몰려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다음 날 그는 AP통신 서울 특파원과 한 회견에서 전두환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고 한국 국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리고 한국의 안보를 해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지지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한국인이 원하는 바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827,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대회에서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국내에 돌아와서

 

윤한봉은 19935, 꿈만 같은 2주동안의 조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두 달 반 동안 미국 각 지역과 캐나다, 호주를 방문해 후원자들과 개인적으로 도와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한청련-재미한국청년연합’.‘한겨레-한겨레운동재미동포연합회원들과 마지막 수련회를 열었다. 그는 회원들에게 운동의 생활화’,‘꾸준한 학습’,‘동포사회에 뿌리 내리기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통일단결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마지막 환송식장에서 해외운동이 나를 조국운동권에 파견한 것으로 생각하고 항시 여러분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겠다는 내용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편으로 미국 국무성에 영주권 카드를 반납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한청련한겨레에 지도위원 사퇴서와 회원 탈퇴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렇게 12년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1993818일이었다.

그가 고국에 돌아왔을 때,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에게 말했다. “광주에는 3대 파워가 있는데, 첫째는 DJ지지 세력이요, 둘째는 5·18관련 세력, 셋째는 통일운동 세력이다. 이들과는 절대 부딪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는 DJ지지 세력은 유신시대의 총리 김종필과 김종필과 손을 잡아도 이를 끝까지 지지하는 맹종세력이었고 5· 18 관련 세력은 ‘5이 마치 자기 개인의 명예와 이권과 생업인 양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으며통일운동 세력은 거의 맹목적으로 북한을 옹호지지하는 이들일 뿐이었다.

윤한봉은 5월 항쟁과 관련해 그 어떠한 명예도 보상금도 원치 않았다. 그에게 광주는 그가 살아 있는 한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거대한 짐이요, 형벌일 뿐이었다. 윤한봉은 5 18기념재단을 창립하는 데 매달린다. 5 18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사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윤한봉은 귀국 후 망월동 묘지에 찾아가 저는 앞으로 5.18과 관련된 일체의 명예와 대표성을 가진 지위를 거부하고 5.18 정신의 계승과 도망자의 빚을 갚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다짐한 대로그 정신으로 그 일에 뛰어들었다. 그가 쓴 창립선언문에는 그의 뜻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도 이권도 아니고 채무이고 희생이고 봉사입니다. 5월은 광주의 것도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의 것도 아니고 조국의 것이고 전체 시민과 민족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또한 5월이 광주의 5월로 올바로 서야 전국화,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5월이 다시 섰습니다.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 님들을 욕되게 하고 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1980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 님들과 7천만 겨레앞에 옷깃을 여미고 싶습니다. 시만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 님들이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윤한봉은 처음에 선언했던 대로 재단의 어떤 지위나 직책도 맡지 않았다. 그러나 재단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협박전화와 폭언, 그리고 모함과 중상을 많이 받았다. 윤한봉은 또한 DJ 지지세력과도 불화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1995년의 6.27 지자제 선거와 1996년의 4·11 총선을 보면서 DJ의 지역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DJ가 지역등권론을 주장하며 지역주의를 조장하자 윤한봉은 이에 분노해 지역둥권론을 규탄하는 공개질의서를 작성하고 서명 작업까지 벌였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DJ정서에 위압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귀국 후의 생활은 고독했다. 미국에 있을 때보다 더 외롭고 더 고통스러운 제 2의 망명생활이 바로 그의 고향인 광주에서 계속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로웠지만 의연했다.

윤한봉은 만년에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만드는 데 온 힘을 다 기울였다. 그것은 광주민주항쟁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들불야학출신 일곱 열사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일곱 열사란 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 박효선을 말한다. 윤한봉은 이 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2006년에 들불열사추모비를 광주5·18자유공원에 세웠다. 이 추모비는 지금 광주의 명물이다. 윤한봉은 이에 그치지 않고 들불상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들불상이란 타계한 순서대로 들불 박기순상(모범적인 여성운동가)윤상원상(모범적인 남성 노동운동가)박용준상(모범적인 소년소녀 가장)박관현상(모범적인 일반 인권운동가)신영일상(소수자 인권운동가)김영철상(모범적인 빈민운동가), 박효선상(모범적인 문화운동가)을 말한다. 모금을 해서 목돈을 만들고그 이자만으로 매년 하나는 국내하나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운동가에게 준다는 계획이다.

윤한봉은 19953월에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고그 소장으로일하며글쓰기자료수집강연 등으로 바쁘게 살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의 몸은 그 연구소가 있는 3층까지 올라 다니기도 힘들어했다. 1994년에 윤한봉의 몸에서는 폐기종이 발견됐는데발견 당시 이미 병세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폐기종은 폐가 천천히 파괴되는 병으로 윤한봉은 정상의 5분의 1밖에 호흡하지 못했다. 계단이나 육교 같은 데 올라가면 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한참 숨을 고르고 나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래서 하루 15시간씩 산소호흡기를 끼고 살아야 했다. 게다가 이 병은 대기오염이 심한 도시생활을 피해야 하는 고약한 병으로, 그의 의욕과 열정까지도 앗아 갔다. 그를 괴롭힌 것은 병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귀국해서 한참 동안 조국 생활에 적응을 못해 고통을 겪었다. 조국 생활에 적응하기가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보다 훨씬 힘들었다. 적응이 힘든 까닭은 사회가 너무 야박해졌고정치풍토가치관사고방식생활방식 등이 그동안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순정하고도 뜨거운 열정은 이들 속에서 그를 외롭게 했고 더욱 힘들게 했다. 그는 광주의 섬이었다. 귀국 후의 조국이광주가 그를 더 빨리 죽음으로 몰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명예가 아니라 멍에를 지고 살다가 갔다. 19954,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하소연으로47살의 늙은 총각으로 결혼한 윤한봉은 34(결혼 당시)의 부인 신경희 씨를 남겨놓고 그의 굵은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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