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광주민중항쟁과 윤한봉
윤한봉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어떤 존재였는가? 이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시기 윤한봉은 수배자였고, 도피하였다. 따라서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윤한봉이 수행한 의미 있는 실천은 기대할 수 없다. 1992년 내가 윤한봉의 귀국 추진 운동을 하던 무렵 한 후배 동료가 나에게 이렇게 투덜거린 적이 있다. ‘그날 현장을 도피한 사람인데, 뭐가 대단하다고 귀국 운동을 추진하는지 모르겠다.’ 맞는 말인가.
1980년 5월 나는 서울대의 학생회에 몸담고 있었다. 그때 서울대 학생회는 만일 계엄령이 확대, 실시될 경우 캠퍼스에 결집하여 투쟁하자고 선언했다. 그런데 나는 그 결의를 지키지 못하였다. 이후 수배자의 신분이 되어 이 집 저 집, 동가숙 서가식 떠돌았다. 나중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유포하였지만, 조만간 다시 은거 생활로 돌아섰다. 일상의 시기에 공개적으로 활동한 운동가들은 비상의 시기가 오면, 체포되고, 수배되기 때문에 감옥에 가거나 도피 생활에 들어가는 것이 운동의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5월 18일 이후 피신할 할 수밖에 없었던 윤한봉의 선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운동의 ABC를 모른 소치이며, 온갖 고난을 뚫고 실천한 선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역사는 윤한봉으로 하여금 무대에서 내려오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시골의 농부들은 볏짚을 꼬아 새끼줄을 만든다. 볏짚의 길이는 1미터가 넘지 않는다. 그런데 볏짚들이 꼬이고 꼬여 수 십 미터에 이르는 긴 새끼줄로 변환된다. 우리의 투쟁도 새끼줄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 개인, 특정 집단이 수행할 수 있는 실천의 몫은 제약되어 있다. 하지만 서로의 실천이 꼬이고 꼬여 해방 투쟁의 긴 새끼줄을 엮어나가는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다수의 운동가들이 피검되었다. 사전 검속을 피하고 ‘투사회보’를 작성할 수 있었던 팀은 들불 야학의 강학과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노출되지 않았다. 또 한 팀이 있었다. 박효선이 이끈 극단 광대였다. 그만큼 그들은 주목받지 않았다. 역사는 윤한봉을 무대에서 내려오도록 하고, 대신 윤상원을 호출하였다.
“광주시민이 없는 광주민중항쟁은 생각할 수 없고, 항쟁지도부 없는 광주민중항쟁도 생각할 수 없다.”
광주민중항쟁의 불씨는 5월 18일 전남대학생들의 교문 진출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각자의 캠퍼스에 집결하여 투쟁을 전개하자는 학생회의 결의를 말 그대로 이행한 대학은 유일하게 전남대학교뿐이었다. 하지만 만일 학생들만이었다면, 이후 공수대원들의 잔혹한 몽둥이질과 총격을 결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정상용은 고교 시절부터 혁명의 꿈을 꾼 청년이었다. 전남대에 들어가 써클 민사련을 결성하였고, 이후 전남대 학생운동의 밑돌을 놓은 대표적인 학생운동가였다. 민중이 무장을 하고 혁명을 일으키는 그날을 수없이 꿈꾸고 기다려온 그였다. 하지만 19일 시위대에 섞여 투석전을 하면서 절망한다. ‘내가 이런 역할밖에 못하는가? 돌 던지는 거 말고 다른 역할은 없는가?’ 그는 광주 시민들이 이렇게 총을 들지 상상을 못했고, 이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시민들이 무기고를 탈취해서 총을 들자, 정상용과 그의 동료들이 선택한 것은 ‘피신’이었다.
5월 20일부터 공수부대를 몰아내는 일을 떠맡은 것은 오직 저 ‘이름 없는 민중’이었다. 70여 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30만 명이 이 투쟁을 수행했으니 어린애들과 할아버지들 빼고는 광주시민들이 다 나온 거다. 밤새 공격하였다. 몇 만 명의 시민들이 밤새워 도청을 공격했다. 한편은 시청에서, 한편은 광주역에서 도청을 공격하였고, 일부는 조선대에 집결 중인 군인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군인들의 무차별 조준사격과 헬리콥터 기총소사에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진압군을 격퇴시키고 광주 시민들은 맨주먹으로 해방 광주를 쟁취하였다. 정해직은 구술한다. “지산동 조대후문 앞에 있는 집으로 갔어요. 겁이 나서 사회과학서적을 다 박스에 숨겼어요. 기관단총 소리가 무지허게 나드만요. 잠이 안 와요. 헬리콥터 소리가 끊이지 않고...아침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조선대로 가보라는 거야. 군인들이 다 도망갔대. 어떤 군인은 권총도 내버리고 도망갔대. 참 희한했어. 희한하드만. 완전한 반전이었지. 우리는 해산했는데, 시민들이 도청을 점령한 거야.”
계엄 하의 최정예 진압군과 맞서 싸워서 그들을 퇴각시키고 해방 도시를 지킨 사실은 동서고금에 없다. 도대체 그 무엇이 30만 명의 시민으로 하여금 밤새워 진압군을 공격하게 만들었던가? 역시 광주민중 항쟁의 주체는 오로지 광주 시민이었다. 광주시민이 없는 광주민중항쟁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을 사수한 항쟁 지도부의 존재 의의를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해방 광주를 쟁취한 시민들은 애타게 고대했다. 전주에서, 대전에서, 서울에서 어디에선가 광주의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투쟁이 일어나길 기대했다.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시민들은 고립감에 떨었다. 수습위원회는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였다. 일종의 투항이었다. 이때 만일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하겠다’는 항쟁지도부가 없었다면 광주민중항쟁은 반쪽짜리 항쟁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아마도 항쟁이 아닌 사태로 폄하하는 저들의 의도가 쉽게 관철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항쟁지도부 없는 광주민중항쟁도 생각할 수 없다.’
항쟁지도부의 중심에 윤상원이 있었다. 그리고 이양현, 정상용, 윤강옥, 김영철, 박효선, 정해직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윤한봉과 함께 1970년대 광주 운동을 이끌어오던 분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출할 수 있다. “윤한봉과 그의 동료들이 전개한 70년대의 광주 운동 없이 광주민중항쟁은 생각할 수 없다. “
개인은 새끼줄을 이루는 한 올의 볏짚이다. 특정 개인이 내가 역사의 새끼줄이었노라 말하는 것은 영웅주의의 덫에 걸린 과대망상이다. 우리는 다 역사의 새끼줄을 이루는 한 올의 볏짚이다. 이기홍이 없는 일제하 광주 독립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김시현이 없는 4.19의 광주 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정동년과 박석무와 전홍준이 없는 한일협정반대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이강과 김남주의 함성지를 거론하지 않고 유신반대투쟁을 말할 수 있는가? 김상윤을 빼놓고 광주 운동권의 이론 학습을 말할 수 있는가? 정상용과 김정길을 제외하고, 1970년대 전대 학생 운동을 거론할 수 있는가? 이양현과 정향자를 제외하고 광주 노동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1978년 함평고구마 투쟁과 교육지표선언, 이어지는 광주 청년 운동에 있어서 윤한봉을 제외하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윤한봉 혼자 지역청년운동을 이끌었던 게 아니다. 윤한봉에게는 분신처럼 그를 보좌한 박형선과 윤강옥, 최철과 정용화, 김희택과 최연석, 김은경과 임영희, 윤상원과 박효선이 있었다. 이 좁은 지면에 다 거명할 수 없는 수백 명의 동료들과 동조자들이 있었기에, 1970년대 후반 윤한봉과 그의 동료들은 전국 어느 지역에 비교되지 않는 운동의 활기를 보여주었다. 문승훈은 증언한다. 1978년 ‘교육지표선언’ 사건으로, 송기숙 교수님은 구속·해임되셨으며, 이홍길(사학과), 김현곤(불문과), 김정수(영문과), 이석연(사학과)· 안진오(철학과), 홍승기(국사교육과), 김두진(국사교육과), 이방기(법학과), 명노근(영문과), 배영남(영문과) 10명의 서명교수도 해임되셨다. 전남대생으로는 김선출,김윤기,노준현,문승훈,안길정,박병기,박몽구,박현옥,신일섭,이영송,이택,정용화,최동열, 한동철등 14명이 구속·제적되었다. 그리고, 박기순, 신영일, 양강섭, 허민숙, 이종록, 최혁, 등 10명이 무기정학 등 중징계조치를 당했다. 한편 조선대생으로는 양희승, 유제도, 박형중, 김용출 등 4명이 구속·제적되었다. 아울러 ‘민주교육지표운동’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치면서 지원해주신 재야인사로는, 조아라(YWCA회장), 이성학(양림교회 장로), , 이애신(YWCA총무), 강신석(무진교회 목사), 홍남순(변호사), 이기홍(변호사), 윤한봉(민청 관련), 김상윤(민청 관련), 이강(함성 관련), 김남주(함성 관련), 나상기(민청 관련), 이양현(교련반대), 정상용 (민청 관련), 이학영(민청 관련), 최철(민청 관련), 박형선(민청 관련), 이기승(민청 관련), 최연석(민청 관련), 임추섭(교사), 정규철(교사), 문병란(교사), 정현애(교사), 임영희(송백회), 조봉훈(참여 후 도피), 박석삼(참여 후 도피),박석률(도피 지원), 김은경(한신대 2년), 윤상원(도피 지원), 고홍(도피 지원)·, 김광한(도피 지원), 김규선(도피 지원), 김하봉(도피 지원), 이길동(도피 지원) 등이 있다.
1980년 5월 16일 횃불성회를 거쳐 마침내 위대한 항쟁의 바다에 이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