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을 좌우한 시대의 예언가 윤한봉
김 희 택/합수 윤한봉기념사업회 이사장(3대)
1979년 7월 17일, ‘제헌절 특별사면’으로 대구교도소에서 감옥 문을 나설 때 나는 앞으로 노동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4개월 동안 감옥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노동자 농민 등 다수의 일하는 대중이 나서지 않는다면 어떤 힘으로 이 강력한 독재 권력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또한 이들이 지지하는 정당을 만들어야 재벌과 군부가 손잡고서 인간의 기본적 권리마저 짓밟는 저들을 상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인식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로서는 산업화가 이제 시작 단계였고 지금처럼 전국 곳곳에 공장이 들어선 것이 아니었기에 구로동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공업단지가 수도권에서는 거의 유일한 노동운동의 터전이었다.
또한 지금으로서는 아득한 옛날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70년대 말에는 노동조합이 아주 적은 수였다. 그나마 거의가 어용노조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운영하는 실무적 안내서도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대다수 구속학생들은 이미 노동운동에 뛰어든 극소수 선각자들로부터 전해들은 경험담과 탐독한 사회과학서적들에서 얻은 간접지식들에 근거해서 어쨌든 노동운동에 투신하리라 굳게 마음먹으면서 감옥 문을 나서는 것이 큰 흐름이었다.
나는 출소해서 고향 광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가기 전 한신대에 다닐 적엔 수유리 캠퍼스 기숙사에서 생활하거나 누님 댁에서 얹혀살았다. 그러나 구속된 뒤에 학교에서 제적되어 마땅히 거처할 곳도 없었다. 그 무렵 어머님께서 홀로 광주에서 살고 계셨기 때문에 곧장 광주로 가서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얼마간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광주에 와보니 이미 민청학련 사건을 겪은 선후배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때 동창생 정찬용이 있었고 합수 윤한봉 형님을 처음 만났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당시 유신말기의 상황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그는 단호했다. 대다수 운동가들이 노동운동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앞으로 우리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단위의 민주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학생운동에서 배출된 선배그룹은 그 터전을 닦는 일에 투신해야 한다. 그리하여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일리 있는 견해라고 평가했지만 처음엔 그다지 동조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강하게 설득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현대문화연구소를 시작했으니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서 함께 청년운동을 제대로 해보자. 어차피 운동이 땅따먹기로 될 것이다. 종교인(목사, 신부, 스님 등), 문학인(소설가, 시인 등), 교육자(교사, 교수 등) 등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역량을 잘 모아내서 학생운동과 결합하면 큰 힘을 만들 수 있다.
집요한 성격으로 치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가 마음먹고 달려드는데 나는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노동운동해야 하는데…
한동안의 혼란을 겪고 나서 마침내 나는 합수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곧 그가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된 인계인수도 받지 못한 채 현대문화연구소의 2대 소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합수 형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구로동 혹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긴 모르지, 그 험한 판을 견디어내지 못해서 좌절하고 말았을지도. 아무튼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감옥 문을 나섰던 나는 그를 만나서 청년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고 뒤이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를 만난 것은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70년대 그의 눈에서 뿜어 나오던 광채. 그것은 진실 그 자체였다. 거짓이 도저히 발붙일 수 없는 순수의 세계.
그리고 일목요연한 그의 정세분석. 1979년 여름 그를 처음 만난 후 그해 겨울 구속될 때까지 그는 자주 예언했다. ‘민중과 군부독재가 곧 크게 충돌하게 된다!’고.
그는 미국 망명시절을 회고하는 책에서 자신의 정세분석이 크게 부족했다고 썼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붕괴, 또한 남미에서 반미정권들이 대거 등장하는 변화 등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오면서 앞뒤 시원하게 뚫린 그야말로 탁월한 그의 정세분석을 능가하는 수준의 것을 듣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호소력 가득 넘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