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된 시골소년
최 권 행/서울대불문과 교수
윤한봉이라는 이름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대학교 2학년인 73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서울로 진학한 우리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오면 중고교 시절을 막역하게 지내던 친구들 중 광주에 남은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중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을 다니던 친구가 자기 대학에 유별난 선배가 한 사람 있다는 말을 했다. 군대를 다녀와 나이가 적잖았던 그 선배를 같은 대학 후배들이 몹시 따른다는 것이었다. 윤한봉이라는 이름의 그 선배가 들려주었다며 그 친구가 전해주는 이야기 중에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울날 남녘 지방의 아이들 모습에 대한 묘사다. 며칠 눈이 그득 내리고 나서 다시 햇빛이 비치면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동네 몇몇 집 처마 아래로 나와 한 줄로 흙벽에 기대선 채 햇살을 즐기는데, 더러 고드름을 따서 누구 것이 더 큰가 겨루기도 하고 더러는 초가지붕 위에 소복히 쌓인 눈이 또옥또옥 녹아내리는 것을 재잘거리며 혹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행복한 풍경 말이다. 그 선배의 구수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 분위기가 그렇게 실감 날 수가 없고 어느덧 행복해진다는 것이었다. 운동가 윤한봉에 대한 나의 기억은 따뜻한 남녘 겨울의 그 해맑은 철부지들의 모습과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로 형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된 서울구치소에서였다. 용산 국방부 건물에서의 군사재판은 윤한봉 형처럼 주모자급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을 따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군검찰에 수사를 받는다고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 나가거나 법정에 오가는 과정에서 더러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듣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형의 거침없고 단호한 법정진술이 변호인들이나 가족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서, 여러 사람들이 ‘전남대생 윤한봉’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저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사람들이야’ 하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중에 포함된 이들이 윤한봉, 나병식, 정찬용 같은 사람이었다.
2심에서 10년 형을 선고 받고도 채 1년이 못된 75년 1월, 형 집행정지로 순천 교도소에서 석방된 나는, 이후 78년 무렵까지 광주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그러면서 비교적 가까이서 형을 보게 되었다. 전남에 연고를 가진 석방자들이 모여 ‘전남 민주회복 구속자 협의회’를 결성하고 ‘구협회보’라는 4면 유인물을 여러 차례 발행하기도 하는 동안, 광주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중요한 기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처음부터 윤한봉이라는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략적 판단이나 정세 파악에 정확하면서도 결연한 투지가 남달랐다. 자신이 말하는 신념과 생활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던 것도 사람들이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만드는 이유였을 것이다. 진실한 인간이라는 느낌, 그러면서도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성균관대 법대를 다니던 이기승 선배는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부터 같이 있었는데, 함께 있던 이해찬이나 다른 학생들로부터, 판단이 정확하고 냉철하다는 평을 두루 듣던 터였다. 광주에서 언젠가 함께 막걸리를 마시면서던가, 말수가 적고 남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던 그 선배가 어느날, “윤한봉이라는 사람하고라면 일생을 걸고 함께 갈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이가 한 두 살인가 위였던 김남주 시인도 사람에 대한 평가를 두루뭉수리하게 하는 법이 없었는데 지도자에게 말을 낮출 수는 없는 법이라며 늘 ‘한봉씨’라고 부르면서 말을 높이는 바람에 두 사람이 서로 존대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구협 안에서는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자주 있었는데 그 열정적이면서도 논리 정연한 어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더러 상처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강한 인간의 내면은 더 없이 부드러운, 저 시골소년의 해맑음이라는 것을 나는 자주 느꼈다. 언젠가 격렬한 회의가 끝나고 비가 내리는 밤길을 우산 하나로 함께 걸었던 적이 있다. 그날 형은 마치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자기의 내밀한 꿈을 고백하듯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남북통일이 되면 자기는 북한의 어여쁜 처녀를 택해 결혼을 하겠노라고… 그리고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겠노라고… 하루 일이 끝나고 들에서 돌아오는 저녁에는 맑은 시냇물에 몸을 씻고 냇가 언덕에 새색시와 함께 앉아 풀피리를 불어주겠노라고… 언제든지 잡혀가고 고문당하던 그 짐승들의 시간 속에서 전심전력 운동에 헌신하면서도 그가 간직한 ‘야심’은 그 정도였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꿈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 나도 잠깐, 나중에 농촌에 들어가 살까 하는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훗날 죽음을 각오한 밀항 끝에 미국에 망명하여 북한 처녀는 아니지만 거기 있던 아리따운 동포처녀를 신부로 맞았으니, 미완의 통일 속에서 그 꿈은 얼추 이루어진 셈이다.
결혼을 하면 좀 어엿한 일상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한 때 가족들이 백방으로 형에게 장가가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선보기로 한 처녀를 광주 다방에 데려다 놓고, 형에게는 가서 얼굴만 보고 오라고 해도 형은 막무가내로 도망을 다녔고, 나중에는 운동 자금을 대 줄 돈 많은 과부라면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단 하나의 조건은 ‘그 과부의 아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다
그 사람 안에는 시인이 있었다. 시적 열정, 그리고 막힘없는 묘사력과 구수한 달변, 유머, 역사에 대한 통찰은 그의 전생이, 과장하여 말하면 아마도 호머 비슷한 음유시인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폐를 상한 뒤에는 좀처럼 노래를 하지 않으셨지만, 70년대 후반 이따금 야유회 같은데서 돌아가며 노래를 하는 자리에서는 마지못해 나서기도 하였다. 음정도 박자도 없이 오직 부르는 사람의 열정으로만 가사가 이어지던 이강 형의 ‘불나비’와 윤강옥 형의 ‘봉선화’도 사람들 기억에 남을 만하였지만 윤한봉 형의 노래는 더 했다. 두 분과 달리 음정이며 박자가 나무랄 데 없는 그가 늘상 부르던 곡은 “예성강 모진 바람, 강물도 흐느낄 때 말없이 사라져 간 여기 이 사람들…” 하는 노래였다. 격정을 모르는 사람, 역사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부르지 못할 그 노래를 형은 온몸을 다 흔들며 가슴을 쥐어짜듯 부르다 2절에, “말하라 산이여, 너는 알리라, 누굴 위해 사라진 젊은 넋들인가”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엎어질락말락 하기까지 했다. 구경하는 우리는 박장대소를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사에 접신하는 무당의 신들린 모습, 진정한 가객의 모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늘 땅에 깃들인, 강으로 흐르는 이 땅의 선열들이나 고통스럽게 살다간 민초들을 마음으로 만나고 있었다.
7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의 면면을 돌아볼 때 그이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이도 드물 것이다. 7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항쟁의 ‘수괴’로 몰려 죽음의 위협에 처해있던 5․18 이후의 도피생활, 목숨을 건 밀항과 망명, 미국 동포 사회에서 새로이 시작하게 된 민족운동… 귀국하여 이미 건강이 일상적인 생활도 어렵게 된 상태인데도, 다시 ‘민족미래연구소’의 문을 열고 ‘들불열사 기념사업회’와 ‘5․18기념재단’을 만드는 등 형은 쉬지 않고 운동에 헌신하였다.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박정희 기념관건립’을 반대하는 일인 시위에 참여하셨을 때는 건강한 후배들이 할 일을 왜 형이 하셔야 하는지 마음이 무거웠다. 성찬성 형은 윤한봉이라는 이를 ‘예수 아니면 미친 사람’이라고 했는데, 부러 아이를 갖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그는 사적인 모든 것을 공적 역사 앞에 바친 사람이면서도 결코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도 비속한 세상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걸림돌이 된다 싶으면 그런 이마저 가만 두려 하지 않는다. 너도 나랑 똑같은 계산속이려니 하면서 말이다.-.이 부분 삭제) 5․18 당시, 과거에 운동 경력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전 검속되다시피 하고, 전면에서 활동하면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던 주도적 인물들만 검속을 피해 ‘잠수함’을 되었다. 이름 없는 고마운 이들의 용기 덕분에 서울의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구석방에 숨어 햇빛도 제대로 못 보면서 그 오랜 시간을 숨어 다닐 때 그는 단 한 순간도 광주를 잊지 않았다. 광주에서 죽었어야 했다는 죄책감이 형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형이야말로 광주가 남긴 불씨를 꺼지지 않게 안고 있다 다시 살려 내야할 운명을 가진 사람이었으리라. 형이 검거될 경우 기왕에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을 포함한 대규모 ‘조직 사건’이 조작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운동권의 우려 때문에 도피처를 제공해준 분들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형은 밀항을 결행하게 되고 정말 기적적으로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일을 놓고, 어떤 이들은 조국의 현장을 등지고 미국 가서 편히 있다 왔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그러나 그 밀항의 과정은 윤한봉이라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결단하지 못할, 사선을 넘는 과정이었고, 그 사람의 운명이 아니라면 결코 감당하지 못할 어떤 비상한 궤적이었다,
그가 아끼던 후배 황광우의 말에 의하면 윤한봉은 ‘혁명적 민족주의자’다. 그러면서도 그이처럼 진정한 의미의 ‘세계시민’을 구현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은 토박이, 그러나 그의 시선은 망명과정을 통해 세계 전역의 진보적 저항세력들과 연대하면서 폭넓은 국제적 전망으로 확산된다. 그의 민족주의는 국제주의와 함께 가는 것이다. 그것은 책에서 배운 이념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고 억눌리고 수탈당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때문에 그리고 그들에 대한 연대감 때문이었다. 그가 후배들에게 중남미 형제들, 흑인 형제들이라는 호칭을 쓰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통일된 민족의 미래에 대한 꿈, 남과 북 모두를 향한 그의 애정과 기대는 모든 종류의 현실 권력에 대한 비판적 거리와 함께 하는 것도 나는 보았다. 그가 싫어한 것은 맹목적인 사람들, 자기 잇속을 대의로 위장한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그런 사람들에겐 윤한봉이라는 존재가 늘 거북했을 것이다. 어디에 있든 그곳을 현장으로 생각하고 넓은 조망 속에서 운동의 텃밭을 일궈온 사람, 그러나 그의 비중이 큰 만큼, 그를 향해 가해지는 온갖 공작과 음해도 여러 곳에서 계속되었다. 여기서는 그가 평양을 다녀왔다고 하고, 저기서는 그가 미국 중앙정보부와 손을 잡았다고 하는 말들이 그 예일 것이다. 미국 망명시절,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 전대통령과 그 사이에 넘기 어려운 골이 생긴 것은 결국 운동가 윤한봉과 정치인 김대중 사이의 거리 때문이었다. 80년 5월 전후까지도 형은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80년 3월이던가 5·17이 있기 얼마 전에 나는 윤강옥 선배의 주선으로 형과 동교동에 가서 일종의 접견을 한 적이 있다.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그이를 만나보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은 시간별로 수십명씩 나뉘어 그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 들은 이이야기의 요지는 우리가 가진 것은 여론의 힘 밖에 없으니,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가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여론을 일으켜야한다는 것이었다. 형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는 당시 상황의 무거움을 그 이야기를 통해 더 깊이 느끼게 되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완벽한 이상형을 그에게서 보려고 했던 형은 이후 미국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정치인으로서의 그이의 행적과 그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처신에 실망한 듯 했다. 무엇보다도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은 다른 세력들이었다. 윤한봉이라는 인물이 북한을 오고간다는 식의 조작된 ‘첩보’를 일부러 제공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평양 다녀왔다고 듣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유도하여 신문방송에 내보내는 식으로 말이다.) 현실 정치세계에 대한 한봉 형의 불신과 거리 두기는 내내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지만, 어쩌면 거기에 윤한봉이라는 이의 특별한 자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미친 사람이거나 예수’ 이니까. 가장 근본적인 자리에 서서 외치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형수의 전화를 받고 간 서울의 병원에서 폐 이식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누워있는 형과 유리창 너머로 인사를 하였다. 나를 알아보는 눈빛에 살풋 얼굴을 끄덕이는 모습을 보았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하고, 이제는 더 이상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하지 않으시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형의 상태가 위급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병원에 와 앉아 있으면서 그 사람이 누군데, 어떤 길을 헤쳐 온 사람인데 싶었다. 그러나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온 의사와 합병증이 위중하여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말. 양 어깨를 드러낸 채 눈을 감고 하얀 시트 속에 가만히 누워있는 형. 숨결 하나 사이인데 저 멀리 가버린 형이 믿기지가 않았다.
늘 형이라고 불렀지만, 그날 반듯이 누운 그 모습은 언뜻 신화 속 영웅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그프리드의 모습이 저랬을까? 체 게바라의 표정이 저랬을까? 그저 믿고 따르며 좋아했던 그 형은 우리들의 장수였던 것이다. 넓은 어깨에 고요한 얼굴, 얼핏 스치는 그의 한 생애 전체는 어디를 돌아 봐도 티끌 한 점 없을 것 같았다. 신념과 생활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현실정치의 계산과는 무관하게 공동체의 미래를 향해 전심전력을 다해 살아온 사람. 온전하게 삶을 대의에 바친 운동가. 햇살받이를 하며 동네아이들과 재잘거리던 해맑은 소년은 그렇게 순결한 혁명가로 누워 있었다.
형을 마지막 보내는 길에 영정 앞에서 절을 올리는 소화 형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형, 잘 가세요. 행복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래도록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형에게 하는 그 고맙다는 말, 행복하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
형, 거기 잘 계세요.
삶이 허망하지 않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도 당신과 함께 해서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