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식 민족운동의 성과와 갈등
은 호 기/미국시사평론
2009년의 민족학교
2009년 5월 16일, 로스앤젤레스 민족학교에서 광주항쟁 19주년 기념세미나가 있었다. 나는 ‘백범정신과 광주항쟁’이라는 주제를 발표하였다. 소수민족권익문제 가운데 끼워진 주제였다. 한결같이 백범 선생과 장준하 선생의 뜻을 기리고, 민족학교 설립과 운영에 줄곧 참여해온 최진환 박사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나는 백범 선생의 뜻과 5월 광주항쟁 정신이 민족학교의 설립정신과 어떻게 닿고 있는 지를 설명하였다.
지난 100년의 한국역사를 살펴보면 네 개의 큰 역사적 사건이 있다. 곧 동학농민전쟁(1894), 31민족운동(1919), 419학생혁명(1960), 그리고 518광주항쟁(1980)이다. 이들 역사적 사건들은 통치체제와 사회여건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인민대중이 폭압체제로부터 벗어나 사람답게, 고르게, 잘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이 인민대중의 욕구가 밖의 억압체제에 맞서면 민족주의의 내용을 담게 되며, 안의 억압체제에 맞설 때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갖게 된다. 즉 민중적 요구와 민족적 요구이다. 백범 선생은 31민족운동의 결실을 위해서 망명지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통해 투쟁했으며, 윤한봉은 518광주항쟁정신을 망명지 미국에서 이어가기 위하여 민족학교를 세웠다. 민족학교에 백범 선생과 장준하 선생의 영정을 모신 까닭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알아들으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이었다. 세월 때문인가? 세상이 이토록 변했다는 말인가? 민족학교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고, 사랑방이었다. 뜨거움이 있었다. 분노가 있었다. 새로운 논리가 있었고 희망을 담보해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물론, 이민 1세대가 주축인 동포사회의 권익운동도 필요하다. 민족학교의 설립목적에도 분명 동포사회의 권익옹호 및 신장문제도 들어있다. 권익운동에 전념함으로써 동포사회에서 비중도 커지고 많은 후원과 관심을 받게 된 것, 참 다행이다. 온갖 모함과 핍박을 받았던 설립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허전한 마음 가눌 길 없다. 현관에 들어서면 마주 뵈던 백범 선생, 장준하 선생의 영정이 사라진 것과 결코 무관치 않을 터였다. 눈길마저 허전해진다.
그해 5월과 윤한봉의 등장
1980년 5월. 지금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가지만 그때는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다급한 현실이었다. 한국은 캄캄했다지만 미국의 언론은 생생한 기사와 사진을 실어 날랐다. 동포사회의 분노가 들끓었다. 그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1980년 6월 8일, 로스앤젤레스 동포들이 모였다. 일천 여명. 당시로서는 큰 규모였다. 이 집회에 참여한 단체가 서른이 넘었다. 운동단체만이 아니었다. 이들 단체를 엮어 민주화운동단체협의회를 만들었다. 늘 싸움질로 이어지는 장(長)자리는 아예 없애고 간사제로 하였다.
협의회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메주 냄새가 가득한, 올림픽가의 김방앗간에 모여 정세를 분석하고 운동의 내용과 방향을 토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김상원(윤한봉의 가명)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말이 되는 이야기야? 한국에서 수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 ‘밀선’을 타고 미국엘 와? 어림없는 소리지. 부정적인 말들이 오갔다. 늦가을의 낙엽만큼이나 말이 많았고 스산했다. 그럴 만도 했다. 광주사건의 주모자로서 현상수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 밀항을 해서 미국으로 왔다는 사실, 당연히 의문을 제기할 만 한 일이었다. 미국에서도 한국정부의 정보공작이 극성을 부릴 때였다. 게다가 일본의 월간지 <세까이(世界)>의 TK통신이 윤한봉 밀항에 대하여 의심쩍게 보도했던 터였다. 그러나 이미 그를 만나본 적이 있는 최진환 박사는 단호했다. 밀선이 아니고 ‘밀항’입니다.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투사입니다. 확실합니다, 라고. 그토록 싸늘했던 운동권에서 최 박사와 내가 ‘무모하게’ 윤한봉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만, 최 박사는 당연 케이스로 심사 없이 인정을 받았던 셈이었고 나는 심사 케이스였다. 간신이 합격선을 넘었던 것 같다.
1981년 11월, 윤한봉은 김상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곳저곳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왔다. 김상돈 선생님 댁에 머물렀다. 김상돈, 6척 거구의 노정치인. 최다득표로 당선된 서울시 초대 민선시장.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一毫之差)가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天壤之差)가 된다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 원칙주의 정치가. 동지에게는 한없이 인자하면서도 적에게는 서슬 퍼런 맹장. 한국타운 한복판에서 대통령 박정희의 화형식을 서슴없이 거행하는 우리들의 큰 어른이었다.
그런 어른께도 윤한봉의 칼날은 여지를 두지 않았다. 허허, 은 선생, 아 글쎄, 김 군(윤한봉)이 (5월 16일)그날 새벽 시청 앞에서 박정희 그놈들과 싸우다 죽었어야 한다는 거야, 허허, 말이야 옳지. 나는 짐짓 웃고 말았다. 왼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여 바짝 펴고, 바른 손바닥으로 칼날을 만들어 직각으로 내려치면서, 선생님 들어 보십시오 하는, 그의 서슬을 진즉 겪은 터였다.
윤한봉은 김상돈 선생님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선생님 댁을 찾는 운동권 인사들과의 대화에서, 때로는 선생님을 모시고 운동권모임에 참석하면서 이곳 운동권의 실상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결론은 기존의 운동의 내용과 틀을 벗어나야한다는 것이었다. 판을 새로 짜야한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탐색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운동권에 도움을 요청하기는커녕 운동권의 지도급 인사도 ‘찾아뵙지’를 않았다. 오히려 기성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가혹하게 해댔다. 운동권의 입장에서는 수상쩍은 일일 수밖에.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별의별 소문과 황당한 추측이 운동권을 어둡게 하였다. 한국운동권을 통해 그의 정체가 확인된 후에도 그 소문과 추측은 가시질 않았고 운동과정에서 내내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윤한봉식 운동의 출발과 성과
윤한봉은 새 판을 짜기 위하여 저항이 적은 일부터 시작하였다. 1982년, 광주수난자돕기회를 결성하였다. 광주항쟁을 누구보다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그의 이력과 언술은 동포사회의 분노를 어렵지 않게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피 묻은 정권이 굳어져가자 이내 그쪽으로 향하는 ‘들쥐’들이 들끓었지만 세상에는 순하고 옳게 사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는 광주수난자돕기운동 과정에서 체계적인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단순한 분노를 민족운동의 동력으로 끌어올리는 일. 다음해인 1983년 2월에 대민봉사와 민족교육을 목적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민족학교를 세웠다. 뒤이어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등지에 같은 목적의 봉사교육센터를 마련했다. 이들 각 지역의 센터를 중심으로 운동조직인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 1984), 한겨레운동재미동포연합(한겨레운동, 1987), 한겨레미주홍보원, 비나리문화패 등을 차례로 세워 통합적인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윤한봉식 운동의 출발은 미주운동권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종래와는 전혀 다른 내용과 틀을 가짐으로써 터울림적 변화를 가져왔으니,
우선, 그는 그때까지 멀리했던 북조선의 역사를 끌어들여 민족사의 내용을 새롭게 제시하였으며, 민중해방과 민족해방(통일)을 동일한 논리로 묶어냈다. 명쾌한 논리로 풀어내는 운동의 방향과 내용은 두려움과 설레임이기도 했다.
둘째, 운동권의 평균연령이 대폭 낮아졌다. 한청의 회원자격을 40세 미만으로 제한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청년운동이 절실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 자신을 가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1.5세 및 2세까지 끌어들였으며, 명문대학 학생들까지 참여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셋째, 전국적인 운동조직이 이루어졌다. 처음이다. 지리적인 조건도 조건이지만 미국은 연방국가인데다가 지방분권주의가 원체 강한 곳이어서 전국조직이 쉽지 않은 곳이다.
넷째, 운동의 직업화, 생활화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각 지역에 마련된 생활공간(마당집)에 봉사요원을 상주시키면서 대민봉사와 운동의 대중화를 꾀하였다. 윤한봉이 솔선수범하였다.
다섯째, 운동의 연대성을 강조하였다. 한국의 운동권과는 물론, 캐나다, 유럽, 일본, 호주 등지의, 윤한봉의 노선을 따르는 새로운 동포운동권과 연대하여 지구적(地球的)인 민족운동을 펼쳐나갔다.
여섯째, 국제연대가 강화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인권단체, 제3세계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우리의 문제에 그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문제에 우리가 힘을 보탰다. 그들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를 하나로 본 것이다.
일곱째,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홍보활동을 들 수 있다. 도서실을 운영하면서 각종 한글자료는 물론 영문자료를 발간, 배포하였다. 특히 격월간지 <KOREA REPORT>는 미국사회의 관심과 힘을 끌어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끝으로, 미주운동권에 처음으로 사물과 조선전통의 깃발을 등장시켰다. 피켓이나 플래카드가 어찌 조선의 전통깃발을, 꽹과리, 징 등의 사물을 서양의 나팔이 어떻게 당해내겠는가?
이러한 운동의 내용과 형식을 지금의 눈으로 봐서는 안 될 터. 30년 전의 미국이라는 데에 절대 주목하여야 한다. 진보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미국운동은 원로명망가 중심으로 한국원로들의 뜻에 따라 성명서를 발표하고, 달력에 표시된 기념일을 독자적으로 거행하면서 한국정부를 성토하고, 영사관 앞에서 민주화구호를 외치는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반공민주화의 내용을 고집하면서.
미국운동권의 갈등과 상처
윤한봉은 새로운 사람을 모아 새로운 내용과 틀을 만들어 새로운 방식으로 운동을 시작하였다. 윤한봉식 운동은 무서울 정도로 치열했으며, 그 성과는 도저히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 동력을 한국운동권에서 많이 보탰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운동은 힘들게 버텨온 미국운동의 계승, 발전이기를 거부하였다. 성과를 인정하는 데도 인색하였다. 처음부터 선을 확연히 긋고 독자운동을 고집하였다. 그랬기에 조직은 단단해지고 성과도 컸겠지만 기존운동권과의 갈등도 그만큼 컸다. 미국 입국 당시의 의혹은 이미 밝혀졌지만 의혹의 그림자는 여전히 힘을 썼다. 갈등의 폭과 깊이를 부추겼다. 서로 주고받았던 그때의 상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가 귀국하고, 그가 이끌었던 민족운동 부문이 소멸되어가는 지금에 와서는 그 상처가 그의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꼭 윤한봉의 경우뿐 아니라 미국운동권 모두가 당한 일이지만, 운동권의 구성에서 오는 갈등도 컸다. 아니, 갈등이라기보다는 모함이라야 옳다. 미국의 운동권은 한국과는 다른 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운동권과 정치권이 그런대로 구분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정치가를 따르는 정치집단이나 개인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으며, 행동영역과 양식도 다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정치인을 따르는 이들도 운동가임을 자처하였다. 이를테면, 김영삼, 김대중 선생을 따르는 부류들이다. 이들은 민족운동보다는 오로지 선생님만을 위하면서 나중에 한몫보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때가 되자 이들은 한국에 우르르 몰려가 이런저런 몫을 챙겼다. 때문에 이들은 운동권과 행동을 같이 하기보다는 한국정부(영사관)의 눈치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들은 선생님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들은 ‘다른 민주인사’임을 차별 짓기 위하여 빨갱이모함을 일삼았다. 윤한봉은 좋은 표적이 되었다. 물론, 두 분 선생님들께서도 우리들과는 생각과 시각을 달리했다. 진보적이라는 김대중 선생마저도 미군철수불가론, 선민주후통일론을 내세워 운동권과는 선을 그었으며, 북한방문자들과도 야속하리만큼 거리를 두었다. 당연히 기독교운동세력도 빨갱이놀음에 앞장서거나 거들었다.
다음으로, 통일운동단체와의 갈등을 지적해야겠다. 이 갈등은 특이한 조건과 내용을 가진다. 미국운동권에는 이북출신과 호남출신이 많다. 이북사람들은 어차피 고향을 떠난 터여서 일찍 미국으로 눈을 돌렸고, 호남사람들 역시 변방적 생활에 지쳐 미국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운동이 구체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북을 ‘느끼는’ 정서적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북에서 자랐고 그곳에 가족이 있는 그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아가서 북조선의 논리와 요구를 거역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탈북의 변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쪽으로 기우는 만큼 남쪽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도 식어갔다. (이북월남인들은 남한에 내려와 여러 분야에서 반공논리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면서 독재정권을 지지하여 왔고 통일운동을 방해해왔다. 아직도 대부분은 반북을 지독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입장을 바꾸어 북한의 논리를 따르는 부류도 해외에는 적지 않다. 통일운동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이들을 통틀어 ‘탈북자’로 부르며, 제1기 탈북자(1945-1950), 제2기 탈북자(1950-1953), 제3기 탈북자(1953년 휴전이후)로 구분한다.) 범민련운동이 분열되고, 이후 두 흐름의 통일운동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1988년 7월, 노태우 정권은 유화적인 북방정책을 담은 77선언을 내놓았다. 이때라 싶어 한국의 운동권은 범민족대회 개최를 북에 제의함으로써 통일운동의 목소리를 냈다. 해외에도 연락이 왔다. 윤한봉의 주도로 미국과 캐나다의 운동단체 대표들이 뉴욕에 모여 범민족대회 북미주추진본부를 결성하였다(1989. 3.). 윤한봉으로서는 처음이며 마지막 연합체운동이다. 그러나 범민족대회의 성사가 눈앞에 다가오자 금방 삐걱대기 시작하였다. 남쪽운동권과 행보를 같이 해야 한다는 윤한봉의 한청측과 북쪽과 이해관계가 많은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측과의 갈등이었다.
조국통일북미주협회는 북에 고향을 둔 사람, 북을 다녀온 사람, 북조선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 즉 북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로 1987년 2월에 결성되었다. 통협은 이산가족 방문, 문화학술교류 등의 사업을 북과 정식으로 체결한 단체이며, 특히 이산가족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통협은 이후 정세발전에 따라 1996년, 북의 지도 아래 재미동포전국연합회(동포연합)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재캐나다동포연합회, 재오스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재도이치란트동포협력회(유럽)와 더불어 세계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의 범민족대회는 남과 북, 해외동포가 분단 이래 처음으로 갖게 된 민족공동행사였다. 이 역사적인 대회준비에는 당시 군사정부의 억압적인 상황이 치밀하게 고려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통협측은 태생적 한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른바 종북주의, 숭북(崇北)주의다. 먼저 깃발 문제부터 불거졌다. 누가 깃발을 들 것인가? 대표단 단장 문제다.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 평양에서 열리는 대회에서는 늘 싸움거리가 된다. 당연히 통협측은 자기네가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의 서열주의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운동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북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통협측이 한발 물러서주길 바랐다. 이러한 생각의 충돌은 북에 가서도 계속되었으며 범민련 결성에도 그대로 작용하였다. 북의 뜻대로 평양에서 범민련을 결성하자는 주장과 아니다, 미국에 돌아가서 운동권과 협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북미주만은 평양에서 범민련을 결성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주장은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접점을 찾지 못한 채 급기야 따로따로 결성, 두 개의 범민련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992년, 범민련운동의 자체평가를 거쳐 한청측 범민련을 해산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총련의 입김이 작용하는 범민련 해외사무국(동경)의 치사한 장난도 해체 결심을 굳히게 했다. 남쪽에서 초창기 범민련결성 문제로 감옥살이를 한 분들이 범민련운동에서 손을 뗀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
이 조직적인 갈등을 통협측은 윤한봉의 독선과 비타협적인 자세에 돌리곤 했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의 귀국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갈등과 충돌은 지금도 미국(해외)운동권에서 여전하여 615공동선언실천운동 과정에서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조적 갈등은 운동권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해외동포사회가 남쪽 지향적인 한인회와 북쪽 지향적인 동포연합, 남한정부의 통일논리를 따르는 평통위원회와 북조선의 통일논리를 따르려는 범민련의 대칭구도가 굳어가는 터여서 동포사회의 문제로 발전되어가고 있다. 지혜를 짜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귀국
1993년 5월 12일, 김영삼 정부는 윤한봉의 귀국허용을 결정하였다. 망명 12년만이었다. 당연한 조치였지만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좀더 미국에 머물면서 민족운동을 이끌어주길 바라기도 했지만 그는 각 지역을 돌면서 귀국마무리작업을 서둘렀다.
각 지역에서 그때마다 환송회를 가졌다. 끝으로, 출발지인 로스앤젤레스에서 ‘윤한봉선생귀국환송회’를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불현듯 나타났던 12년 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나는 나이를 무릅쓰고 환송회의 사회를 맡았다. 새삼 10년 전의 일, 그의 첫 강연회에서 사회를 봤던 일이 생각났다.
그랬었다. 1983년 10월, 518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윤한봉의 강연회를 ‘우여곡절’ 끝에 로스앤젤레스 컨벤션센터에서 가졌었다. 그가 미국사회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강연회였다. 운동권의 외면과는 달리 동포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갈증에다 현상수배자라는 점이 동포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진솔하고 사실적인 증언에 청중들은 금방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그때 사회를 보는 것으로 그의 투쟁에 그나마 보답하려 했다.
앞서 운을 뗀 우여곡절이란 이렇다. 안기부 앞잡이에서부터 북괴의 공작원이라는 설에 이르기까지 윤한봉에 대한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을 때였다.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주위 사람들도 골치가 지끈거렸다. 험한 다툼이 일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문제를 풀어야 했다.
마침 워싱턴에서 연락이 왔다. 광주항쟁기념대회에 관해서였다. 나는 ‘광주항쟁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윤한봉을 연사로 추천하였다. 미국의 수도이며 정치의 본고장인 워싱턴의 공식행사에서 신원을 확실하게 밝히고, 그 바람을 몰아오자는 계산이었다. 다행히 그쪽에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영령들 대하기에 면목이 없다면서 한사코 싫다는 그를 겨우 설득하여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워싱턴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초청을 그만 두겠단다. 이유를 물었다. 대답을 못한다. 캐물었다. 김대중 선생이 윤한봉과는 한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선생이? 그 역시 광주항쟁으로 곤욕을 치렀고 망명자라는 같은 처지에 있는데도 같이 설 수가 없다? 의아심은 후에 밝혀졌다.
1989년 8월, 당시 평민당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김대중 총재의 증언에서다. 김 총재는 문동환 부총재와는 달리 윤한봉을 위험한 친북인사로 몰아세우고 있다. 북한을 다녀왔다는 것도 사실과는 전혀 다른 증언이다. 정치적인 계산에서 비롯된 증언이라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글을 마칠 때가 되었다. 한마디로, 윤한봉은 이국땅에서 민족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 옷자락을 펼쳐 보이며 다같이 힘을 모아 붙잡자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동지를 버리고 도망쳐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더 뛰었다. 그는 분명 미국민족운동사에 누구보다 큰 획을 그었으며 그 획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민족의 옷자락이 펄렁거려 간혹 밤잠을 설치는 나는, 이제 윤한봉을 떠나보내고자 한다. 하는 수 없어 전경을 걷어찬 사람은 금방 세상에 뚜렷이 드러나는데, 백 명, 천 명의 국민을 죽인 놈들은 시치미를 떼고 살아도 끄떡없는 역사. 하지만, 윤한봉 선생, 이제, 그냥, 편히, 잠드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