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선생을 추억하며

 
 
 
제목보따리 하나가 전부였던 무소유의 실천가 (이기승)2018-12-2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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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 하나가 전부였던 무소유의 실천가

 

이 기 승/보성건설회장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석방된 1975년과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 1980년 사이에 한봉 형을 자주 만났고 이때의 기억이 가장 많다. 개인적으로는 민주화 운동권 학생으로서 제적기간이 장기화되어 가정에서나 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고 당국의 감시도 삼엄하였던 시절이다.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줄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전남대 학생으로서 나와 마찬가지로 민청학련 사건에 연관되어 석방되었던 윤강옥 형과 둘이서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방이 하나 딸린 10평 남짓한 가게에서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한봉 형이 기거하고 있었다. 장사가 끝나고 점포 문을 닫은 후에 들어와서 잠을 잔 형은 아침에 점포 문을 열기 전에 나간다. 가게 운영에 조금이라도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저녁이면 비게 되는 방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세무서에 근무하고 있던 조용식이라는 친구가 납세고지서를 한 묶음 가지고 와 가게에서 조금 있다가 근처 우체통에 넣었다. 한 시간정도 지나서 세무서장이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말단 직원을 찾을 일이 없을 텐데 이상하다고 여겨지면서,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그는 경상북도 영주세무서로 발령이 났다. 그만 두라는 조치와 다름이 없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봤더니, 우리 가게를 서광주 경찰서 정보과 직원 2사람이 24시간 감시하고 있었는데, 조용식이 발송한 서류를 불온 통신문쯤으로 생각하고 우체통을 열어본 것이다. 거기서 납세고지서가 나오자 세무서장에게 직원의 근무지 이탈을 엄중 경고하였고 세무서장은 이에 대한 분풀이로 외지로 발령을 냈다는 것이다.

그 날 나와 윤강옥이 서광주 경찰서장에게 강력히 항의했더니, 윤한봉 형 때문이라는 것이다. 형에게는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미안하다는 메모를 남기고 헌 옷 몇 벌이 전부인 짐을 싸갖고 떠나버렸다.

 

당시 내 눈에 비친 형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정열적인 민주화운동 투사였다. 민주화 운동이 생활의 전부였고, 민주화운동을 일념으로 살았던 형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소유욕을 버린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시 형에게서 내일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아도 먹고 입는 것이 해결 되더라.” 라는 말을 가끔 들었다. 형의 살림살이는 작은 보따리 하나가 전부였다. 어느 수도자보다도 무소유를 실천에 옮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형은 강직하고 결백한 사람이었다. 모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청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자신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며 이를 실천하였다.

무릇 가까이 있는 사람은 존경하고 따르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형은 가까이 있어도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형을 우리의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한봉이 형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 말고는 존경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더니 대개는 동의하였다.

형은 서서히 지도자로서 위치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형의 미국 망명과 불행의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형을 생각하면 항상 미안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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