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평화행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며!
김 경 지/한겨레운동 미주연합 필라 지역
조국의 통일 염원에 한 조각의 벽돌이라도 나르겠다는 신념으로 통일운동에 접어든 지 어언 30여 년, 나의 미국생활 33년 중 가장 잊어지지 않는 사건이 바로 미주평화대행진이었다.
조국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염원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전제가 되어야 하는 주한미군 철수와 조국에 배치되어 있는 미 핵무기 철거라는 대명제 하에, 1989년 7월 19일부터 7월27일까지 조국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 평화 대행진"이 있었다. 이에 앞서,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두고 필리핀 마닐라와 미국 Washington D.C에 연락처를 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 국제준비위원회"에서는 7월6일 런던과 Washington D.C에서 동시에 기자 회견을 갖고 구체적 행진 계획을 밝혔다.
미주 동포사회에서는 한겨레운동미주연합과 재미한국청년연합이 주체적으로 동 위원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애초에 이 행진은 한라산과 백두산으로부터 동시에 27일 판문점에서 만날 계획이었으나, 행진일이 임박해 오자 남한 정부에서는 해외 참가자들의 비자 발급을 거부하고 행진 자체를 불온시 하여 삼엄한 경비를 펼쳤으므로 남한에서의 행진은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행진의 참가자 수는 당초 국제준비위원회가 예상했던 100여 명을 훨씬 웃도는 4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 구성을 보면, 미국, 영국, 서독, 오스트리아, 필리핀 등 한국전에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했던 16개국의 60여 명의 평화운동단체 대표 80여 명(미국인 32명)과 재미동포 30여 명, 평양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재일동포 청년학생 60여 명, 그밖에 캐나다, 독일 등지에서 온 동포들 그리고 재소 재중 동포와 북부조국 청년학생 대표들 다수였다.
국제평화대행진의 목적은 남북 동포의 화해와 세계평화 애호가들의 연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라는 주장, 그리고 주한 미군과 핵무기를 철거하여 조국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국제평화대행진의 사례는 세계평화운동 사상 일찍이 그 유례가 없었던 독특한 방법이라 세계의 유수한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군사 긴장이 가장 첨예한 지역에서의 민간 주도의 (그것도 40여 년 전에는 북부 조국과 적국으로 싸웠던 서방 자본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참여한)평화행진이라는 것과 분단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이며, 유엔의 관할지역인 판문점을 통과한다는 의미 때문에 모두가 주목했지만 미국과 남부 조국 당국만은 이에 대한 언론의 취재 및 보도를 철저히 봉쇄하고 정보를 차단했었다.
그러나 남부 조국 천주교 정의평화사제단의 대표 문규현 신부와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대표 임수경 학생이 죽음을 무릅쓰고 판문점을 통과해 남쪽으로 내려감으로써, 이제는 국내 언론들과 민중들에게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의 의의와 조국통일에의 기여도는 높이 평가 받기 시작하였다.
조국은 하나다
반만년의 핏줄을 이어온 우리는 하나의 민족
백두산의 줄기가 내리어 이 땅은 하나의 강토
통일이냐 분열이냐 엄숙한 이 시각에
겨레여 나서라 통일의 한길로 조국은 하나다.
이 노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 기간 동안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함께 가장 많이 불렸던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이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진행되는 동안 이곳 미국에서도 같은 목적의 평화행진이 거행되었다.
미국 내의 양심적인 평화운동가들과 애국애족 동포들 약 40여 명으로 구성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평화대행진"은 1989년 7월19일 뉴욕 유엔광장에서의 발대식을 필두로 필라델피아까지는 차량으로, 필라에서 Washington D.C.(160miles)까지는 도보로 행진하였다.
행진대는 지나는 지역마다 그 곳의 평화운동단체 및 진보적 종교단체와의 모임을 갖고 우리 조국의 반전반핵 평화문제를 비롯하여, 민족민주운동에 대해 교육홍보 선전을 벌였다.
종종, 지나치는 미국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등의 야유를 보냈지만 이 행진의 숭고한 목적과 이 행진의 파장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원제 도중 우리가 다짐했던 것처럼 우리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통일을 앞당기는 초석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찌는 듯한 무더위를 견디고 때로는 장대 같은 폭우를 온 몸으로 견디면서도 행진을 강행했다.
행진중 대원 모두가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걷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초지일관 동참해온 한 미국인 할아버지의 행동하는 양심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고령에도 불구하시고 우리 행진 대열의 선봉에 서서 자기 나라의 문제도 아닌 한국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을 보면서 새삼 느낀 것은 우리도 제3세계 형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휴전협정이 조인된 7월27일 Washington D.C에 도착한 행진대는 "한국지원망(Korea Support Network)"이 주최한 미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의 한반도 전쟁종식을 위한 평화대회 집회에서 핵무기 철거를 위한 10만 명의 서명용지를 전달하고 한국대사관 앞에서 있었던 "노태우 정권의 국내외 활동하는 민족민주운동 탄압 규탄시위"에 참가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또한, 국제평화대행진대의 판문점 통과 시도가 좌절되고 임수경씨를 비롯한 30여 명이 통일각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 미주평화 행진대원 중 자원한 10여 명이 남아 7월31일부터 4일간 뉴욕청년 봉사 교육원(현 뉴욕인권센터)에서 연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바야흐로 민족의 숙원이요 우리 세대의 최대 과제인 "조국통일"의 길에 국내외 동포들의 단결된 힘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어 힘차게 전진하게 되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