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를 빛낸 의인들 (1)김남주 시인
광주를 의향이라 한다. 오랫동안 나는 이 말을 실감하지 못했다. ‘광주가 왜 의향이지?’ 느낌이 오지 않았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 했다.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 역사는 없다. 광주를 빛낸 의인들의 이야기를 매월 한 차례씩 남도일보에 연재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빛고을의 자랑스런 역사를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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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비극 그 절정에서 온 몸을 던져 피어난 꽃
첨예한 의식과 헌신적 실천성으로 ‘자유와 해방’ 노래
첫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제작…유신 조종 울려
10년 세월 투옥…치열한 창작으로 정의로운 세상 꿈꿔
1972년 10월 17일 라디오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엄령…국회 해산…헌법 정지…” 박정희의 이 폭거는 국민 알기를 개돼지 취급하는 짓이었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한 청년이 있었다. 전남대 영문과에 다니던 김남주였다. 그 시각 김남주는 해남에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고 있던 중이었다.
그 날 김남주는 곡괭이를 땅에 던지고 그 길로 광주로 올라왔다. 친구 이강을 만나 함께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하였다. 아는 여대생에게 거사 자금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독재자의 무덤을 파러 갑니다.”
사람들은 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시위를 유신독재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라고 알고 있다. 아니다. 유신독재의 조종을 울린 최초의 저항은 김남주의 지하신문 ‘함성’지였다. 72년 12월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광주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이끌어 가는 빛나는 도시가 되었다.
김남주는 이것저것 재고 눈치 보고 살아가는 이가 아니었다. 그냥 저질러버리는, 천성이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1975년 4월에도 빛고을의 하늘은 푸르렀다. 벚꽃과 영산홍이 지천에서 피어났다. 그때도 태양은 무등산 너머에서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인혁당이라는 올가미에 씌워 젊은 목숨 여덟 명을 즉결 처분해 버렸다. 역사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깊은 암흑 속으로 빠져가고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카프카’ 서점에서 김남주를 만났다. 선배는 한 움큼의 유인물을 나에게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여 학우들의 책상 속에 넣었다. 나도 형을 따라 전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시인 김남주는 1979년에 다시 투옥되었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 해방된 세상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형은 알고 있었다. 왜 자신이 먼저 실천하지 않고 남이 대신 죽어주길 바라겠는가? 자기희생 없이 어떻게 남을 돕겠는가?
9년의 세월을, 그 징헌 세월을 시인은 그렇게 교도소에서 다 보냈다. 1평도 되지 않는 독방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한 여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광숙씨이다.
“산이라면 넘어주고, 물이라면 건너주겠다는 심정으로 우리의 이 애틋한 사랑을 키워갑시다”고 시인은 고백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책갈피 속의 그대 숨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 영혼은 얼마나 황량해 있으랴.”
남주의 문학은 시대의 비극, 그 절정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는 노래도 옥중에서 작성되었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라는 시도 옥중에서 작성되었다.
힘들었다. 15년의 징역을 이긴다는 것은 힘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막막한 징역 세월이 주는 이 중압을 이겨야 한다오.”
그도 무쇠가 아니었다. “징역살이 탓도 있겠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런지 몸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아홉 번째 봄을 맞았다. “다시 봄입니다. 아홉 번짼가 맞이하는 감옥의 음산하고 울적하고 불안하고 희망이라고는 겨자씨만도 없는 그런 봄입니다.” 절망의 감옥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삶을 사랑했고 자연을 사랑했다.
“찬 서리/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여”
1988년 12월 마침내 옥문을 나왔다. 여러 곳에서 시인을 불렀다. 이곳저곳 강연을 다녔다. 강연이 끝나고 뒤풀이를 할 즈음, 누군가 말했다. ‘천하의 김남주도 물 건너갔구나.’ 시인이 많이 당했다. 시인을 아끼는 지인이 강연을 다니지 말라고 조언했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겠어요?”
아들의 이름을 김토일(金土日)이라 지었다. 금요일과 토요일과 일요일을 쉬며 사는 세상을 시인은 염원한 것이다. 죽기 한 해 전 시인은 아들 토일의 손을 잡고 시골 길을 걷었다. 돌아가고 싶은 정든 농촌 말이다. 1994년 2월 13일 새벽. 시인은 부인과 토일이를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하기 전 가래를 뱉어내고 그가 토해낸 말은 이렇다.
“… 아름다운 세상, 깨끗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다가 … 내가 이렇게 먼저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