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광주과학고 2학년 최O은
시린 겨울을 맞이해도 끝끝내 돌아오는 봄의 새로운 꽃들은 저들이 얼마나 많은 이의 희생으로 피어났는지 알까? 얼마나 많은 거름이 그들을 위해 한 몸 바쳐 아름답게 무너져 내렸는지 알까? 우리는 수많은 이의 아픔 속에 피어난 꽃이다. 그들이 일구어낸 민주주의란 봄에 피어난.
그가 걸어온 세월이 얼마나 닳았을까.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했고 누구보다 많은 것을 내어 주었지만, 단 몇 번의 회춘에 잊혀지는 퇴비가 되길 자처한 이가 있었다. 자신은 변변치 못한 생활에 낡은 가방과 운동화 하나만 달랑 가지고 다니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이들에게 잘 챙겨먹고 다니라고 밥 한 그릇씩 사주며 용돈을 쥐어주던 그가 바로 윤한봉이다.
책을 펴보기 전까진 알지 못했던 윤한봉이란 사람은 단지 이 책 한 권만으로 내게 친숙한사람이 되기에 충분했다. 거침없는 전라도 사투리도, 자신의 의견을 숨김없이 내보이는 그 모습도, 허름하고 초라했다는 외관도, 따뜻한 마음씨도. 모두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여일인지라 감히 살아 숨 쉬는 윤한봉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사랑과 열정으로 불타던 그의 생애는 책을 덮은 지금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한 평생을 후대에게 길이 알려지리란 보장 없이, 돈도 명예도 얻지 못한 채 헌신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또 널리 알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공부하는 나로서는 윤한봉의 행동이 절대 쉬운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행동들이 더 의아했다. 더 많은 이의 행복을, 약자를 위한 투쟁을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은 것, 자신의 명예보다 언제나 ‘운동’의 의의를 먼저 생각했던 것, 임수경 학생의 방북을 성공시킨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이 자신임을 모르는 이들이 그가 미국에서 추진하는 행진과 같은 일들에 대해 낮게 평가함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끝까지 해외 독립운동을 몸 바쳐 추진한 것. 그가 추구한 것은 분명 그 자신만의 행복이 아니었고, 남들을 위해 살아간다는 바로 그 점이, 수많은 운동가들을 매료시켰던 것처럼 나 또한 그를 존경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끔 하였다. 윤한봉이 연못에 뗏목을 띄우는 정약용의 마음에서 받은 깊은 감명을, 나는 그가 추구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발견한 것이다.
윤한봉의 뛰어난 지략도, 마음먹은 일에 대한 열정도 그가 훌륭한 운동가라 평가받는데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들이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약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마음 없이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마음이, 적어도 나에게는 그를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세상에 뛰어난 재능이나 남다른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들이 각자의 노력으로 갖은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웠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들이 옳은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행동이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일수록 더더욱, 그 영향이 모두에게 좋은 쪽이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누군가가 추구하는 이상향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으로써 비춰질 수 있고, 또 누군가의 ‘악’은 다른 이의 ‘선’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과 상황의 사람들이 모인 이 사회에서, 진정한 선이란 존재하는 것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지만, 최대한의 선이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은,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책을 통해 서술된 그의 평소 행실과 군부독재에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운동 속에서 윤한봉이 추구한 신념은 약자에 대한 배려와,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실천이 바탕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헌신은, 모순되게도 우리가 살아가는 냉담한 현실과는 멀게만 느껴졌다. 5.18 민주화 운동의 1980년으로부터 흐른 단 몇십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지금의 사람들은 전보다 더 좁은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며 남들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언제나 제 갈 길을 가기에 바쁘다. 그리고 나 또한 ‘우리’라는 존재보다 ‘나’라는 개인이 더 익숙해져 있었고, 사랑보단 미움이 더 당연했다. 5.18 당시와는 판이하게 달라져버린 것만 같은 사람들의 태도는, 지금의 우리가 힘들었던 과거의 투쟁을 묻어두고 우리 마음대로 새로운 시작을 해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윤한봉을 기억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있을까, 5.18 희생자를 진심으로 애도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이들은 또 얼마나 될까. 그들의 행적을 잊는 일, 그들이 이루어낸 결과에 새로운 흙을 덮어버리는 일, 그들이 살았던 그 시절이 무색하게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일, 이 모든게 그들의 노력을 왜곡시키는 일은 아닐까.
죄의식과 무소유의 삶, 나누는 삶,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헌신. 윤한봉의 삶을 찬찬히 되짚어볼수록 그 때로부터 지금은 잊혀진 가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성과 지식으로 세상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남지만, 감정으로 감동을 주는 이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기억된다.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다. 더 많은 이들이 윤한봉의 생애를 기억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행동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는 5.18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얻어내고자 애썼던 가치를 잃지 않도록, 우리가 지켜야 할 권리를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그 첫 걸음은,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개개인에게 윤한봉과 같은 상당한 희생을 바라기란 어렵지만, 우리의 조그마한 노력이, 그만큼의 불편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노력을 이어가는 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누군가의 희생과 피땀으로 얻어진, 결코 쉽지 않았던 항쟁의 결과물임을 잊어선 안 된다. 5.18은 ‘나’만을 위한 싸움이 아닌 ‘우리’를 위한 항쟁이었다. 윤한봉을 비롯해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국민들을 위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 그들이 일궈낸 봄에 부끄럽지 않을 꽃이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