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 선생님을 떠올리다 합수 윤한봉 12주기 추모식 및 나주 역사 기행 소감문 2019. 6. 22. 토 ~ 23. 일 1. 나주기행 이야기 오랜만에 광주 문우인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문우인은 황광우 선생님께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글쓰기 수업의 모임이름이다.) 나주 기행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서울의 궁핍한 대학생인지라 시간과 돈이 부담이 됐는데, 황광우 선생님께서 지원해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오랜만에 갈 마음을 먹었다. 부끄럽지만, 놀러갈 마음만 있었다. 윤한봉 선생님이 누구신지, 윤한봉 기념회가 어떤 건지 전혀 알아보지 않고 누나에게 재밌을 거라 꼬득여 놀다 오자고 했다. 그리고 22일 토요일 당일에 나는 누나와 아침 일찍 출발하여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5·18민주묘지에 누나와 도착하니 이미 추모식은 끝나버렸고 점심시간이 한창이었다. 황광우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인사했다. 점심을 먹고 곧장 떠나야 해서 누나와 발걸음을 떼다가 5·18 영령들에게 잠시 우리 둘이 짧게라도 추모를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눈을 감고 서서 마음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버스에 올라타서 영산강 일대를 탐방했다. 고분을 오르고 박물관을 갔다. 하루가 금방 흘러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을 먹고 공연이 시작됐다. 우아한 선비춤, 가슴 뭉클한 노래, 신기(神技) 들린 장구, 쩌렁쩌렁한 판소리. 전통민중음악과 7080 운동권감성이 어울린 공연을 보며 그 시절과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방에서 사람들과 뒷풀이 시간을 가졌다. 나와 누나, 혜진이는 어른들이 많은 뒷풀이에서 적극적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모두 개성이 뚜렷하게 어떤 이야기들을 하시는 것을 보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잘 몰라서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오정묵 선생님은 전두환 성대모사를 하셔서 사람들을 웃겼다. 서울에서 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어르신들만 보다가 진보적인 발언을 하시는 연세 많으신 선생님을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허경도 선생님은 특유의 입담으로 한국 사찰에 대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시간이 늦어 해산할 분위기가 왔는데, 이무성 선생님은 자리를 정리하려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두고 가라고 말리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려고 보니 이미 이무성 선생님이 모든 정리를 다 마쳐놓으셨다. 특이한 것은 선생님의 이불과 매트가 안 보였는데, 맨바닥에서 주무신 건 아닐까 염려가 됐지만 여쭤보지는 않았다. 아침에 불회사로 가서 대웅전 천장에 있는 흔히 없는 ‘게(crap)’ 모양의 조각을 봤다. 절을 오고 갈 때는 비자나무가 쫙 갈린 숲에서 향긋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정말 산뜻했다. 다음 목적지는 미천서원였다. 그곳에서 이종범 선생님의 거칠면서도 아주 재밌는 설명을 들었다. 사실 설명 중에 약간 졸았지만, 목소리가 우렁차고 힘이 있으셔서 인상이 깊었다. 점심으로 메기탕을 다 같이 먹었는데, 내가 살면서 지금까지 먹어본 온갖 종류의 생선매운탕 중에 가장 맛있었다. 그리고 드들강에 가서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시와 노래를 음미했다. 이후 나주기행 일정이 끝나 민족미래연구소에서 일하셨다는 어느 선생님의 차를 얻어 타서 누나와 광주 복합 터미널로 편히 갈 수 있었다. 누나와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소감을 나눴는데, 나는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들을 위해 베푸시며 의협심과 정이 많으신 어른들을 두루 뵐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2. 윤한봉 선생님 나주기행에서 어른들을 만난 뒤 나는 윤한봉 선생님이 궁금해졌다. 윤한봉 기념회에 소속돼있으신 선생님들이 합수형이라고 친근히 부르시는 모습이 정겨웠다. 왠지 그분들의 모습에서 윤한봉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서 안재성 작가님이 쓰신 책 『윤한봉』을 책장에서 찾아 읽었다. 합수 선생님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내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이 결코 독립운동과 다를 바 없이 많은 고난과 시련들, 그리고 희생을 겪어야 했음을 알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는 꽤 알고 있어도 민주운동가는 잘 알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합수 선생님이 설립한 민족학교(Korean Resource Center)의 벽에는 전봉준, 김구, 그리고 장준하 선생님의 사진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민중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상징했다. 나는 그 셋 중에 어느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민주운동은 촛불 혁명이 가장 최근이었지만, 그마저도 군인 신분이라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내가 살면서 어떤 압제와 싸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민중을 위하고 민족을 생각하고 민주를 위해 싸운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 깊이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합수 선생님은 ‘날 좀 보소’식 운동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어떤 계기를 통해 운동을 하게 되든, “이상을 위해 돈도 포기하고 권력도 내려놓을 수 있지만,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끝내 떨쳐버리기 어렵다.”고 책에서 서술한다. 이 구절을 읽고 내가 얼마나 인정욕구가 많은지 돌아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서도 그리 대단치도 않은 성적을 가지고 자랑한 것이 참 부끄러웠다. 인정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어 하는 알량한 자아의식이 나를 우쭐대게 만들고 바라는 마음을 갖게 한다. 합수 선생님의 무소유 정신도 나를 정말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너무나 많은 물건을 소유하면서 베풀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합수 선생님은 계속해서 후배들, 친구들, 사람들을 위해서 힘들게 일을 하셔서 베푸셨다. 자식도 아니고 혈육도 아닌 사람들을 위해, 오로지 그들을 위해 일을 하신 일화는 눈물이 나도록 감동을 주었다. 인도에서 간디를 알게 되면서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합수 선생님은 진정 한 번도 자신을 앞세우지 않으시면서 그렇게 묵묵히 소사(小事)만 하시며 조용히 가셨던가. 윤한봉 선생님을 알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멀리서 간디나 예수, 붓다를 찾고 싶지 않아졌다. 앞으로 선생님이 사신 모습을 떠올리며 살고 싶어졌다. 비록 예수를 믿는 사람들,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은 윤한봉 선생님을 모르겠지만 예수처럼 살고 싶고 간디나 붓다를 본받고 싶은 사람은 합수 선생님의 삶을 보자. 우리 곁에 살아서 우리와 더불어 살다 가신 합수 선생님을 잊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