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준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최영준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5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네 그럼 지금부터, 지금 최영준 선생님을 모시고 5·18, 해외에서, 해외의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구술 채록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5일이구요. 장소는 LA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이 구술 녹음은 5·18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5·18 기록물 조사 및 수집 사업의 결과물로 제출될 예정입니다. 너무 이렇게 부담 갖지 마시구요, 그냥 옛날 선생님 살아오셨던 좀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준다라고 좀 생각을 하시고, 편안하게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그 선생님 언제 태어나셨나요. 어디에서? 구술자 : 1962년 12월 달에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대구에서 계속 군대 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대구에서 자랐고 이사는 뭐 많이 다녔지마는 거의 대구 토박이라고 할 수 있죠. 면담자 :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가족관계는 아버지, 어머니 계시고 그 다음, 지금도 삼형제 중에 차남.. 면담자 : 둘째시고. 형제분들은 다 이곳에, 미국에 다 구술자 : 아니아니, 형님은 한국에 계시고동생은 시카고에 있고 저는 시카고에 집이 있지만 지금 현재 제가 트럭을 운전하고 있기 때문에, 마이애미, LA에서 마이애미까지 왔다갔다 노숙 생활을 하고 있죠. 면담자 : 부모님도 다 지금 그러면 시카고에 계시구요. 구술자 : 네 시카고에 계세요. 면담자 : 뒤에 쫌 있다 다시 좀 여쭤보긴 하겠지만 미국 이민 들어오신 것은 언제 구술자 : 예, 1989년도에 오게 됐고 제가 그, 그때 제가 대학 마치고 졸업하던 당시핸데. 아버지 어머니가 2년 전에 먼저 오시고, 동생하고, 그 다음에 아버지 어머니가 저를 초청하게 되가지고 그렇게 오게 된 케이스죠. 면담자 : 그, 3형제가, 3형제라고 하셨는데 나이 터울이 좀 어느 정도 나시나요. 구술자 : 위로 형하곤 두살차이나고 동생하고는 여섯살 차이 나요. 면담자 : 어, 동생하고 좀 차이가 있으시네요. 어렸을 때 좀 형제들만 있는집은... 구술자 : 많이 싸우죠. 많이 맞고 자랐어요. 내가 (웃음) 면담자 : 어렸을 때 그러면 아버지는 부모님은 뭘 직업 하셨나요. 구술자 : 뭐 다양한 직업, 직업을 하셨죠. 좀 아버지같은 경우는 열심히 살아오셨던건 같은데 경제적으로 뭐 여유롭진 않았어요, 않았고. 사실 첨에 제가 알기로는 어릴때 유년시절에 보며는 지금 코롱의 전신 한국 나이롱이라고 대구에 공장이 있는데 거기서 근무를 하셨고 근무 하시다가 뭐 좀 나오셔가지고 사진관을 하신걸로 알고 있는데 그 사진 계통으로 쭉 하셨는데 경제적으로 뭐 어렵, 아주 풍족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뭐 그냥 늘 가족들 바램이 뭐 없이 살아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항상 즐겁게 살아가자 그런, 뭐 그렇게 살아왔었어요. 면담자 : 69년 초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가 대부분 60년대를 보내오셨던 부분인것 같은데요. 특별히 뭐,이때는 다들 한국의 경제 상황이라는게 좀 어려웠었고, 아직까지 이때까지만 해도 좀 그런 부분이 있었는데... 구술자 : 그나마 그래도 뭐 아버지 어머니가 좀 문화적인 면에서 좀 음.. 다른 분들보다 좀 해박하셨던 것 같애요. 뭐 영화라던가 뭐 이런거 팝이라던가 그런거. 집에 음반 있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데 접하면서 살아왔거든요. 예. 면담자 : 어머니는 그러면 가정주부셨나요, 아니면 따로 일을 하셨나요 구술자 : 같이 사진관했으니까 같이 일하시고 그렇게... 면담자 : 형제들, 형님이나 좀 동생은 어땠습니까. 어렸을 때 같이 이렇게 많이 어차피 형제간들이니까 싸우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은데 구술자 : 그거뭐 그렇죠. 장난, 항상 장난으로 시작해가지고 싸우고 결국은 끝은 내가 우는 걸로 끝나고 그랬는데 동생하고는 뭐 원래 뭐 부모님이 그 계획을 해서 낳아야겠다 그래서 난 게 아니고 뭐 어쩌다 보니까 딸인줄 알고 났는데 또 아들이고 그렇게 된 케이스고. 근데 삼형제간에 뭐 자라면서 참 우애는 참 있었고 그렇죠. 면담자 : 근데 지금 형님만 한국에 좀 남아계신 건가요? 구술자 : 그니까 저같은 경우에는 대학교 졸업한 다음에 나의 선택이었고 그러니까 원래 미성년자들은 이민갈 때 따라갈 수 있고 그런데 20세가 지나면 미국에서 이게 안 받아줘요. 그 다음에 초청한 사람 혹은, 부모가 다시 초청을 해야되기 때문에 형님같은 경우는 뭐 서울에서 좋은 직장 다니고 있었으니까 굳이 미국에 올, 그 당시 가정도 있었고. 그러니까 올 뭐 그런, 그게 없었죠. 이유가 없었죠. 면담자 : 그, 초등학교 좀 들어가기 전까지 유년시절 동안 특별하게 좀 기억에 남는 뭐 그런 사건 사고 같은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어...뭐 사건이랄게. 어렸을 때 성향같은 약간 남이 피해를 본다던가 이런 경우 좀 작은 애가 뭘 알겠어요. 그렇지만은 남이 피해를 본다던가 좀 불이익이다 그러면 그거를 좀 대들고 항의하고 그런 성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 면담자 : 어렸을때부터 외향적이셨나요, 동네 친구들하고 좀 같이 이렇게... 구술자 : 어...외향, 그렇게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건 좋아해는데 성격은 좀 내성적이고 그랬었죠. 면담자 : 불의에는 못참고 좀 그런... 구술자 : 좀 그러니까 남들 가만있을 때 가만 있으면 되는데 대든다든가 뭐 그런게.. 면담자 : 그럼 선생님 계속 대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초등학교는 어디에서 나오셨나요? 어디 초등학교. 구술자 : 초등학교는 일학년 때는 어...동성국민학교라고 뭐 그때 수성동이라는데 있었는데 거기 새로 생긴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일학년까지 다녔었고 그다음에 또 이사하는 바람에 동도 국민학교라고 거기에서 한 십, 한 오키로 정도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거기서 다녔죠. 면담자 : 동성국민학교로 처음에는 수성동에 있는 동성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셨는데 일학년까지 마치시고 동도국민학교로 이렇게 옮기고. 그 때가 70년인가요? 구술자 : 80, 아니 69년도, 69년도 정도, 내가 아마 내 기억으로 68년도에 초등학교 들어갔을 것 같은데 68년, 69년도에 예 그랬던 것 같아요. 면담자 : 7살에 학교를 들어가셨나요. 구술자 : 7살, 8살, 기억이 안 나네. 하여튼 뭐. 면담자 : 7살이면 구술자 : 7살, 8살, 8살 면담자 : 8살에 들어가셨으면 69년도에 입학을 하셨네요. 구술자 : 예, 예 그런 것 같다. 면담자 : 학교다닐 때는 좀 어땠나요, 국민학교. 구술자 : 어, 국민학교 같은 경우에는 그때는 뭐 정부 시책 이런데 잘 따르는 그런 아주 얌전한 학생, 어...그랬었죠. 2학년때 전학 갔는데 그때가 사실 저희 어머니가 절 생각해서 원래 옮기거나 전학하고 나면 왕따같은거나, 옛날에도 그런게 있었을찌도 모르니까 원래는 이사를 겨울방학때 갔었어요. 겨울방학때 갔었는데 봄방학 동안에 전에 있던 학교를 다녀라. 다시고 2학년 딱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전학을 2학년으로 그냥 편입해버리면 다들 모르는 사이니까 그게 괜찮을거라고 그래 생각해서 그렇게 다녔는데 그것때문에 생긴 하나 트라우마가 있어요. 나같은 경우에 그때가 아주 추웠거든, 겨울, 겨울에. 그러니까 봄방학 때 전에 다니던 학교를 다녔는데 한 아홉, 여덟살 아홉살짜리 꼬마가 혼자서 한 사오키로 정도 이렇게 왔다 갔다 다니는게 쉽지가 않았거든요. 추위에 많이 떨기도 했었고 뭐 유괴 비슷한 경험도 당하기도 했었고 면담자 : 유괴 비슷한 경험이요? 누가... 구술자 : 뭐 누가 귀엽다고 데려가가지고...그게 유괴였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땐 꼬마였으니까 굉장히 공포감, 공포고 공포감같은게 있었죠. 그런 경우도 있었고 뭐 2학년때 전학가서 그냥 진짜 아무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같이 어울리면서 2학년때 사귄 친구 중에 한명이 아직도 제일 친한 친구로 남아 있는... 면담자 : 아, 국민학교 2학년때 사겼던 친구가... 구술자 : 아직도 친한 친구가 있고 그렇죠. 근데 내가 일학년땐가 2학년땐가 장기자랑이라고 했는데 뭐 노래잘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잘하는게 없어요, 나는. 근데 그 당시 기억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앞에 나가서 외웠던 기억이 있어요. 면담자 : 그때 어렸을 때 다 그걸 외우고, 외워야됐었죠? 구술자 : 외워야됐었는데 그 이전에 발표나고 난 담에 그냥 이렇게 외워가지고 머리가 또 나쁜데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는데 뭐 하여튼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던 그런... 면담자 : 초등학교 다닐때는 특별한 어떤 기억나시는 부분들이 있나요, 구술자 : 전학가고 그런거 외에 외에는 그냥 얌전한 학생이었어요. 그냥 보통 평범한 학생. 면담자 : 그 아까 아버지께서 코롱, 코롱 전신이었던 구술자 : 네 면담자 : 한국 나일론 하고 사진관을 이렇게 하셨다고 하셨는데 초등학교 다닐때는 사진관을 하고 계셨나요. 구술자 : 초등학교때 사진관 하고 계셨죠. 면담자 : 사진관은 어디에서 하셨나요, 수성동이, 동성국민학교가 수성동에 있고 동도 국민학교가 어디에 있었나요. 구술자 : 범어동이라고 있어요. 면담자 : 그러면 사진관도 범어동 쪽에 있었나요? 구술자 : 사진관은 아마 수성, 어렸, 아주 어렸을 땐 수성동에서 했었고 그 다음에...아마 쫌 시내 다운타운에서 했을거에요. 면담자 : 그렇게 뭐, 초등학교 다닐때는 그냥 얌전한 말 잘 듣는 그런... 구술자 : 그렇죠. 뭐 있는듯 없는듯. 면담자 : 말썽을 피우셨다거나 그런 부분들은 없으셨습니까. 구술자 : 뭐 그런건 없었고 주로 뭐 공부도 그만그만, 뭐 중, 중간정도, 그 다음에 뭐 눈에 안 띄고 그냥, 대신 하루에 한, 한번씩 만화가게는 계속 가서. 책읽는거 아주 싫어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때 만화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어렸을 때 인생공부는 만화로 했다고. 면담자 : 중학교는 어디 중학교를 다니셨나요 구술자 : 중학교, 대구 중학교 나왔어요. 면담자 : 그때는 중학교를 시험 봐서 들어갔나요? 아니면... 구술자 : 추첨이죠 추첨이었고. 아, 한가지 내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평범한 삶이었는데, 한가지 꿈은 있었어요. 그 꿈이 뭐냐 그러면 아주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그런 꿈이었었는데 우주 비행사가 되겠다는. 면담자 : 그냥 막연한 생각,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마지막, 막연한 생각 구술자 : 그렇죠, 쪼, 쪼끔 막연하기도 했지마는 그때 아버지가 뭐 형보라 이고 뭐 위인전집하고 과학, 뭐 잡, 전집 이런걸 해서 갖고 오셨는데 또 아버지가 공군출신이고. 예. 그때 그런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겠는데 어렸을때부터 우주비행, 초등학교 국민학교 가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 내 꿈은 과학자다, 우주 비행사다. 면담자 : TV에서 뭔가를 봤나요. 그때 어디 뭐 우주선이 올라갔었는지 싶은데 구술자 : 그 당시 내가 봐도 그, 과학 잡지 같은 게, 그때 1969년도에 아폴로 그게 때였죠. 그 이전부터 이렇게, 글씨를 모를 때부터 전집을 보면서 사진을 보고 그랬, 그랬었거든요. 책을 보면서. 근데 그 지식들이 뭐, 여러가지 우주 과학적인 항공기라던가 엔진에 관한 이런 것들을 그때서부터 알았어요. 내, 나는 내 갈길은 저기다, 그런 한가지 목표는, 초등학교 평범하게 자랐지만 하고 싶은 그런 목표는 있었죠. 면담자 : 중학교는 그럼 아까 대구 중학교에... 구술자 : 예, 대구 중학교에 입학했었고. 면담자 : 그때가 그러면 천구백. 칠십년 초반이죠? 구술자 : 오년, 육년쯤 됐을 것 같은데요. 면담자 : 예, 공일이삼사, 칠십오년도에. 구술자 : 음..,그정도에, 예. 왜냐면 내가 고등학교를 81년도에 졸업했거든요. 면담자 : 예. 칠십오년도에 입학을 하셨고, 대구중학교, 계속 삼년간 대구중학교를 다니셨나요. 구술자 : 예, 그렇죠. 예 면담자 : 대구중학교는 어디에 있었나요. 구술자 : 대구중학교가 대봉동인가. 뭐, 모르겠어요. 면담자 : 지금도 있는 학교죠. 구술자 : 지금도 있는, 대구에서는 명문 중학교죠. 뭐 추첨해서 갔지마는. 면담자 : 이때가 어찌보면 좀 박정희 정권 말기 였었고 또 유신... 구술자 : 그 유신, 그 유신이 뭐 초등학교에서도 그랬었고 뭐 한국적 민주주의의 뭐 톡착, 토착화니 이런 거 표어 붙여가 오라 그러먼 뭐 그럼 그런가 보다 그러면서 정부 시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그런 학생이었으니까. 그게, 그게 올바른 건줄 알았고. 근데 중학교때도 거의 마찬가지였고. 대구, 대구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면담자 : 대구라는 지역이 정치적으로 좀 인제 박정희 정권하고는 친했던, 쫌 이제 그런 좀 구술자 : 뭐 그렇죠. 면담자 : 당시에는 시국 상황에 대해서 중고등학생들의 시위도 많았던 시기인데, 선생님 사시던 지역이나 학교에서는...특별한 어떤...그런 시위는 없었습니까. 긴급 조치에 반대하는 중고등학생 시위랄지. 구술자 : 그런 건 듣도 보도. 그런 게 있는 건지도 몰랐죠. 면담자 : 그러면 중학교도 그냥 평범하게 이렇게, 사고 없이 사춘기때였던 것 같은데 다른 뭐가 없었습니까. 가출이나 (웃음) 구술자 : 그런 것도 없었고. 그 당시 아, 자란 배경에서 아마 중학교 때부턴가 아버지가 사진관 하시고 다운타운에 계시고 그러니까 가끔, 저 할머니하고 저하고 따로 떨어져 살았었어요. 면담자 : 할머, 할머니요? 구술자 : 할머니하고, 예. 예.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그런 적이 있었고. 중학교 시절 그냥 평범했어요. 그냥 내 갈길은 그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한가지 참. 내 인, 인생에서 가장 어떻게, 하튼 전환점이랄까 그런게 저 초등학교때 과학관을 자, 자주 갔거든요. 면담자 : 과학관이요? 구술자 : 예. 도, 도립 뭐 과학관 이런 데가 있는데 뭐 여러가지 뭐 전시하고 그러는데 뭐 어떤 애들은 단체로 갈때 한번 갈까 그러는데 거는 몇 번을 갔었어요. 혼자서, 요러케 가고 그러는데 그럴때마다 과학관 큰 뭐, 운동장에 보며는 뭐 전투기들 있었고. 비행기도 뭐 전시되 있었고. 내 기억에는 그랬는것 같아요. 경비행기에 뭐라고 붙여있었냐면 대구공고라고 적혀 있었어요. 비행기 날개에다가. 초등학교 때 내 갈길은 저거다. 우주 비행사니나 우주 항공쪽으로 하고 싶었으니까. 면담자 : 전투기 전투 구술자 : 경비행기였던가 면담자 : 근데 왜 경비행기에 대구공고라는 말이... 구술자 : 모르죠. 면담자 : 대구공고에서 기증을 했을까요. 구술자 : 날개, 적혀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난 거기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거기 가면 비행기 만드는 줄 알고. 면담자 : 그러셨구나. 구술자 : 그래서 뭐 대학교, 대학교란다, 중학교 때 뭐 대구공고가 그래도 공고 중에서는 경북 지방에 제일 좋은 학교였기 때문에 커트라인이 꽤 높았어요. 높았는데 뭐, 면담자 : 고등학교는 시험봐서... 구술자 : 고등학교 시험봐서, 원서 잘 안써줄라 그러드라구요 선생이, 왜냐 삼학년때 공부를 아주 잘하진 않앴지만 중상적으로 더더 들어갔는데 한번은 모의고사를 칠때 누가 시험지를 답안 채점 잘 못해가지고 점수가 좀 한번 낮게 나온 적이 있었서 안 해줄라 그러는데 그냥 어떻게 하다 됐어요. 그럼 원서 쓰고 대구공고 시험 쳐서 합격은 했는데 학교에서 딱 들어가보니 그게 아니드라구요. 비행기는 없고 (웃음) 저 건축과로 들어가가게 된거에요. 면담자 : 건축가로. 구술자 : 예, 성적순으로 뭐 그렇게 나눠, 예. 근데 뭐 기계과 있고 건축과있고, 뭐 토목과, 죽 자동차과 이렇게 있었는데, 뭐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뭐 그때만 해도 뭐 그 학교가 전두환이 나왔던 학굔지, 그런지는 전혀, 그건 나오지도 않았었고 난 내인생 최대 시련이었죠. 면담자 : 생각했던 것과는 아예 다른 어떤 과정때문에 그런건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예. 그래서 한번 적응을 할라구 한 일년 이년 정돈, 일년동안 적응할라고 그랬는데 그게 안되드라구요. 자기 꿈이 있고 꿈이 있는데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이게 건축이라는데. 적응할라 그래도 원래 글씨를, 보시면 알지, 글씨 잘 못쓰고 그림도 잘 못그리고 재능도 없는데 할래니까 안 되드라구요. 그래서 어...2학년까지는 그래도 뭐 그냥 착하게 그냥 다녔어요. 다니고 건축 기능사 시험, 2학년때 시험을 치거든요. 그래 2학년 시험칠 땐 아, 이론은 알죠. 이론은 합격했는데 실기가 안 되는거야. 그래서 참 어려움을 많이 겪었죠. 고3 때는 그래서 방황도 많이 했었고 심적으로 많이 방황하고 하...죽었으믄 좋겠다, 꿈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한숨) 고3때부터 삐어, 삐뚤어지기 시작했었죠. 그때 뭐 아니, 삐뚤어진다고 해가지고 남들처럼 가출하고 그런 건 아니고. 공부에 대해서는 완전히 손을 놔버린 케이스. 면담자 : 그래도 대학을 입학을 하셨,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대학은 고등학교랑 상관 없는 어떤 다른 과로 갔나요? 구술자 : 그렇죠. 고등학교 시절에, 고2때 그때 광주에, 광주 일어나고 (한숨) 내 인생이 너무 고달펐으니까, 고등학교때 자취해 사는게 너무, 견디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그래서 그런 것도 있엇지만. 광주가 일어나고, 그런가보다. 면담자 : 고등학교 2학년때인가요. 구술자 : 아마 2학년때일거에요. 면담자 : 3학년때... 구술자 : 2학년때, 3학년때, 예. 아니다, 전두환이 대통령됐을 때가 3학년때였어요. 그러니까 구술자 : 그러니까 3학년. 그때가 3학년이었는가? 면담자 : 80년 9월에 정식으로 취임을 했기 때문에. 80년 5월, 3월, 예, 3학년때... 구술자 : 아 그렇지, 3학년때, 3학년때. 81년 3월달에 졸업했으니까. 면담자 : 그전까지는 그 대구 공고에 전두환씨가 졸업한지 모르고 있었나요? 구술자 : 몰랐죠, 광주 일어나기 전까지는. 광주일 일어나고 그 다음에 국보위 어쩌고 저쩌고 전두환 소장 이러는데, 저 새끼가 뭐 대구공고 나왔다더라 그런 이야기가 차츰 들리기 시작하드라고. 고3때. 그러나다 어느날 대, 대통령 딱 되니까 동창회에서 가급, 그...뭐 산업 (?) 141106_최영준 00:25:20 의 기수 이러면서 박정희가 그렇게 많이 해서 공고에 많은 혜택 같은게 있었어요. 빵 같은 것도 주고 그러는데, 하튼 동창회에서 기념빵 같은게 나오드라고요. 그럼 뭐 별 생각 없이 맛있게 먹었고. 그러다가 이, 이따가 보니까 없던, 전두환이 다닐때 축구부가 있었는데 축구부가 없어졌어요. 없어졌는데 갑자기 축구부가 생기더라구. (웃음) 생기고 그 다음에 또 뭐, 또 강당이 없었는데 강당도 지어지고. 그, 그런걸 보면서 대구공고 인물 났네. 솔직히 나 대구공고 이런거에 대해서 내 인생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부분인데 그렇게 전두환하고 나하고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죠. 면담자 : 80년 5월 광주 소식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보통 뭐 TV죠. TV라디오에서, 언론 매체가 그게 다였으니까 그게 전부다고 생각했었고 그 다음에 뭐 80년 지나고 난 다음에 잊혀졌잖아요. 면담자 : 뭐 당시에 언론보도라는게 폭동, 폭도, 뭐 이렇게. 구술자 : 북에서 내려온 사주를 받아서 뭐 했다, 폭동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래 생각했었고. 나도 뭐 그렇게 생각했었죠. 면담자 : 크게 뭐 이렇게 관심을 가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던 것이죠? 구술자 : 아니죠. 면담자 : 그냥 지나가는 사건 사고 중에,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지나간... 구술자 : 뭐 안타까운 사건 중에 하나다. 아직은 사회에 대해서 그렇게 눈을 뜰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살면서 나혼자도 사는게 너무 힘들었던 그런 시기였으니까. 예. 면담자 : 그럼 대학은 선생님, 어디로 가셨나요? 구술자 : 예, 그니까 고3때 뭐 막연히 말썽은 아니었지만 그런 애들이 몇명이, 반에서 몇 명이 있었어요. 그니까 그 부적응자들이. (웃음) 그래서 끼리 내기를 했어요. 누가 꼴찌하나, 꼴등하나. 그렇게 해서 했는데 62명 중에서 58등으로 졸업했어요. 꼴등은 뭐 안되드라구. 아는 거는 틀리게 썼는데 모르는 건 찍었으니까. 그러, 그보다 시험 안 쳐버리는 친구가 나오고 그러니까. 내신은 그때 15등급이었는데 14등급으로 졸업했어요. 면담자 : 일부러 공부를 안하시고 시험 점수를 못 받으려고... 구술자 : 하나의 객기나 반항이죠.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 생각해요, 그거는. 그렇게 해서 하고, 사실 뭐 부모님도 어...쫌 안타까워 하셨죠. 그런 그런 대학교 진학은 그래서, 그 중에서도 좀 가깝게 쫌 하고 싶어서 대학교 전자과로 바꿨어요. 전자과로 해서 일년 재수하고 재수하고 난 다음에 영남대학교 전자과에 입학하게 됐죠. 면담자 : 영남대학교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영남대학교면 꽤, 당시 지역 학교에서는 좀 좋은 학교, 명문 구술자 : 명문 학교죠, 간신히. 면담자 : 공부를 고등학교때 그렇게 안하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시험봐서 들어가시 구술자 : 간신히 갔어요. 면담자 : 일년 재수해서 그럼 82년도에 구술자 : 예, 82학번이에요. 면담자 : 입학을 하신거네요. 전자, 전자공학과였죠. 대학생활, 대학 분위기는 쫌 어땠나요? 구술자 : 뭐 대학 분위기, 뭐 그, 그 당시에는 대구에는 뭐 데모같은게 별로 없었어요. 없었고 그러고 한가지, 대학교때 옛날에는 우리 써클이라 그랬던 동아리 활동을 했거든요. 뭘 했냐 그러면 아마추어 무선 했었어요. 면담자 : 햄? 햄이라고... 구술자 : 예, 그 당시엔 완전 최첨단이고 요즘엔 구닥다리였지마는. 그 아마추어 무선 하며는 아무래도 다른 지역 학교하고 교류가 있으니까. 다른 지역, 일학년인가 이학년때 다른 서울에서 대학 학생이 와가지고 써클 룸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데모가 뭐...그 사회 문제에 대해 잠시 비쳤던 것 같애요. 그때 생각, 그런 거 왜 해? 이런 생각 했었죠. 했었고 그때... 면담자 : 정치적인 학교 분위기는 쫌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었나요? 영남대학교가 구술자 : 전혀 무관심하고 데모하고는 거의... 내가 일이 학년때는 그런 거 없었어요.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냥 일이 학년때는 많이 놀아, 햄 동아리 써클 애들하고 생긴지 딱, 그 전해에 동아리 생겼더라고. 속아서 들어갔는데 난 뭐, 개인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인줄 알고 들어갔는데 생긴 지 얼마 안 됐고 무전기도 없고. 면담자 : 그럼 뭐 이론을 공부하셨나요, 여기서? 구술자 : 어 거기서 이론 공부했죠. 왜냐하면, 햄 자격증 딸라하면 이론 공부 하고 그래서야 됐거든요. 이론 공부, 말이 이론 공부지 그냥 이렇게 모여 가지고 내가 일년 재수 했기 때문에 재수하고 써클을 들어가다보니까 일학년 친구하고는, 내가 이학년하고 어떻게 말을 놓게 되고 일학년 아이, 애들이 형이라고 그러는 쫌 이상한 관계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거기서 쫌 재밌게 지냈는데 일학년 말쯤 되가지고 같은 일학년 애들이 이렇게 쫌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친구 먹자. 그렇게 해서 일학년하고 친하고 이학년하고도 이렇게 친하고 뭐 그런 상황 이었는데. 그때 그 친구들이 아직도 이렇게 친하게 지내고 그러죠. 면담자 : 일학년 이학년하고 다 말을 놓고 편하게 지내셨으면, 모이면 어떻게 하셨습니까? 구술자 : 뭐 그렇게 됐어요. 일년동안 그렇게 지냈으니까 어떻게 해 (웃음) 이학년하고도 말 놓고 일학년하고도, 일학년 말 되가지고 여학생이 먼저 이렇게 말을 놓기 시작하더니 일학년들하고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진짜 제가 그니까 3대, 1대, 2대 있었고 3대였는데 3대 간의 그, 결속력, 단합력 이런 것들이 다른 기수, 다른 대수 불허할 정도로 아직두 잘 지내고 있죠. 그러면서 하,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다들 공부 못하고 이학년때 군대, 이학년 마치고 군대 갈때 학사 경고 맞고 갔거든요. 나만 맞고 간줄 알았는데 다 이학년 거의 한 칠십퍼센트가 학사경고 맞았더라고. 면담자 : 이학년을 마치시고 군대를, 그럼 84년도에... 구술자 : 예, 그렇죠. 면담자 : 입대를 하신거네요? 구술자 : 입대하게 된 동기가 84년대, 도쯤에 미국갈줄 알았어요. 그니까 면담자 : 아 그 전부터 이게 이민을 좀 생각을 하고... 구술자 : 그렇죠, 오래전부터 가족들은. 외삼촌 먼저 오게 됐었고 외삼촌 초청하게 됐는, 이민간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이민간다는 생각 항상 갖고 있었어요. 근데 이 서류가 어떻게 잘못되고 그래가지고 어...그렇게 항상 이민간다, 간다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교서도 뭐 난 가겠지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래서 공부도 좀 약간 등한시 한 그런 경우도, 어차피 미국 가면 다시 공부할꺼니까. 그때 진짜 내가 하고 싶은거 하자 그런 생각도 있었구. 그렇게 했는데 어떻게 뭐 좀 잘못 되가지고 결국 그때까지 못가게 된거죠. 난 군대 가리라고는 생각 못했거든. 근데 형이 군대 제대하고 난 다음에 복학하게 되고. 그니까 한 집에 대학생이 둘이면 등록비가 장난이 아니잖아요. 그 당시는 넉넉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군대 가게 되게 생겼죠, 잠깐만 (전화 통화로 중단) 구술자 : 그렇게 군대를 갈수, 그니까 갈 수 밖에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어...공군도 지원해, 이왕 뭐 맞는거 빨리 가서 공군도 지원했구 육군도 지원했었어요. 뭐냐며는 저가 뭐 아마추어 무선 했으니까 통신병으로 지원하게 된 거죠. 지원하게 되 시험 쳤는데 시험치고 합격발표 난 다음에 한달 보름 만에 군대 가게 생겼, 됐어요. 면담자 : 어디로 가신건가요? 구술자 : 논산으로 가가지고 면담자 : 아니, 그, 공, 육군으로. 구술자 : 육군으로. 육군이 먼저 나왔더라고요. 공군도 시험 합격됐는데. 면담자 : 84년 언제쯤에... 구술자 : 84년 2월달이었을꺼에요. 2월달인가 1월달인가. 면담자 : 예. 그냥 초에 바로 시험 보고... 구술자 : 예, 보름 만에 그냥 얼떨결에 가게 된 거죠.가게 됐고 논산에서 그 추울 때, 하 추운거 굉장히 싫어하는데 추울 때 훈련 받고 면담자 : 2월이면 그러셨겠네요. 구술자 : 자대 배치 됐는데 자대 배치 될 때 보며는 논산에서 훈련받고 의정부로 보충들어갔거든요. 그래 의정부 거기서 전방으로 가느냐 후방으로 가느냐 그게 갈라지거든요. 군용트럭타고 가면 전방이고 버스 타고 가면 후방이고. 운 좋게 후, 버스 타게 된 거에요. 버스타고 딱 가는데 그때 인솔하던 사람이 쭉, 이렇게 인솔자들 병들 쭉쭉 보더니 나 딱 보고, 군번이 틀리거든요, 일반병들하고 지원병들하고. 군번이 틀리는데 딱 보더니, 이 새끼 누구야, 내 이름 최영준 부르니까 딱 하더니, 이 새끼 너 지원했어? 지원했지 너 특공대야. 그러드라구. 농담으로 얘기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특공대 가게 된 거에요. 그때 그 당시 주특기가 특공대 필요한 주특기였고 내가 개겨서 진짜 못간다고 그랬으며는 안 갈수도 있던 상황이었든거 같은데 또 자존심은 그, 그런거 싫드라구.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특공대 끌려가게 됐어요. 끌려갔고 논산에서 훈련받고 나니까 또 그러니까 수특공훈련이라고 또 4주간 받아야되는 상황. 그 훈련 받으면서 보니까 그때 알게 됐어요. 그때 훈련 교관들이라든가 그, 그 전부 하사관이니 이런 사람들이 광주 때 투입됐던 공수부대 출신이란걸. 면담자 : 맷, 몇 공수에서... 구술자 : 뭐 여러, 칠공수 뭐 쭉 있잖아요. 그 공수, 내 생각에는... 면담자 : 공수, 교육은 같이 받습니까? 구술자 : 아니 그게 아니고, 광주 때 진압했던 공수부대 사원, 공수부대 병력들을 그대로 놔두는거 보다는 특공대를 만들어, 그때 한창 북한에 김보병 사단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대치하는 남한의 공수 특전단 말고 특공여단을, 특공대를, 만들어라, 만든다 이러면서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저 대학교 다닐때, 군대 가기 전에 그런 특공대 만든, 만든다는 이야기 들었었고, 에이 씨, 기왕 가는거 특공대 가자 이라믄서 그런 얘기를 친구들끼리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근데 내 생각에는 아마 광주 때 투입됐던 공부 부대 병력들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또 아마 특공대를 만든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거던요. 그래서 공수 부대에서 특공대로 교환, 그...그렇게 된 거죠. 공수부대가 별도로 있고, 예전에 있던 공수부대는 그대로 있는거고, 또 다른 어떤... 특공대라는 부대를 창설하게 된 거죠. 경, 예. 면담자 : 그 부분은 아마 확인을 한번 해봐야될 것 같네요. 구술자 : 81년, 82년 뭐 이럴 때 창, 쭉 창설이 됐어요. 특공대가. 그래서 수, 거기 수도군단으로, 수도군단으로 갔는데 수도군단 산하 708 특공대라는 특공대를 가게 된 거죠. 특공대를 가게 되서 거기서 특굥, 특공 훈련을 받고 그러는데 이 사람들 밑에서 훈련을 받으니까 아...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그 사람들이 면담자 : 이 분들이, 교관들이 특별히 광주 부분에 대해서 뭐 언급을 했다거나 그런 부분들이 있었습니까? 구술자 : 그러니까 지내오면서 정당한거죠, 자기들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거는 구체적으로 뭐 내가 사람 죽이고 뭐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폭동들, 거 뭐 그럴 수 밖에 없다 합리화 그런 걸 한 걸... 면담자 : 교관들이 직접 내가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 출신이었다. 뭐 이렇게 이야기를 구술자 : 밧데리가... 면담자 : 쪼금만... 면담자 : 군대 이야기, 그, 수도 군단 산하의 708 특공대로 들어갔다가 교관이 공수부대 출신이었는데, 광주에 됐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 부분까지 이야기를 했는데요. 구술자 : 그리고 부대 생활에서 어...뭐야, 내 위에, 위에 고참, 내가 일,이병으로 갔을 때 한 상병 정도 되는 고참이 내 직속, 주특기의 직속 고참이 전라도 출신이었어요. 예. 근데 뭐 지금도 외모가 그렇지만 그 당시에 아주 어렸고 그러니 앳되 보이고 어...그랬으니까 그 고참이 나를 참 귀엽게 잘 해줬어요. 봐주고 그러면서, 그랬는데. 경상도 사람들 다 죽여야된다, 나쁜 것들이라고 얘기를 하드라고요. 내가 경상도 출신이지만 나한테는 어떤 해꼬지는 안 했는데 경상도에 대한 그런 증오감 같은 게 그때 그냥 느꼈죠. 면담자 : 어디 출신... 구술자 :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면담자 : 여기 아까 수도군단 산하 708 특공대라고 하시는데 이건 어디에 있는건가요? 구술자 : 수원에 있어요. 수원에 있었고, 젤 첨에 부대, 부대가, 군단 자체는 수원에 있었지마는 우리 부대는 김포공항 바로 뒤쪽에 있었어요. 김, 김포 공항 뒤에, 보자, 공병대가 있었는데 창설된지 내가 한달도, 아니 일년도 안 되가지고 갔거든요. 수도군단이라는 군대가 창설된지 일년도 안 되가 갔기 때문에 그때 부대도 없었고 그냥 공병대, 공병대 안에 얹혀서 사는, 예. 있었고. 철책 너머 바로 오면 비행기,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떴는거 보고 그렇게 한 일년, 일년 가까이 거기서 생활을 했었어요. 면담자 : 통신주특기를 가지고 가셨는데 그러면 거기에서 주로 맡았던 임무 같은게 뭐였나요? 구술자 : 특공대 연, 특공연대였는데 연대 본부 통신을 맡았죠. 면담자 : 무선, 무전병... 구술자 : 예, 무선, 무전병이었죠. 면담자 : 등에, 제가 그거, 그건 잘 모르겠는데 등에 메고 다니는 거였나요? 구술자 : 아니요, 그런게 아니고. 연대 본부기 때문에 상황실에서... 면담자 : 아, 상황실 무전 담당을 하셨나요. 아까 그 고참 이야기를 좀 계속 해보면, 특별히 따로 해꼬지를 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는데 인제 그런 이야기들을... 구술자 : 그니까 아 이 사람, 내가 알고 있던 광주하고 뭔가 틀린게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그때 어렴풋하게 하게, 하게 된게 면담자 : 광주 이야기도 쫌 이야기를 하던가요? 구술자 : 안 해봤죠, 안 했고 뭐. 상병하고 이병하고 차이니까 그런 이야기, 군대에서 그런 얘기 안 하잖아요. 면담자 : 이때는 군생활이 몇 년 몇 개월이었죠? 구술자 : 그때가 30개월이었어요. 군대 30개월이었는데 2년, 그때 교련이 있어가지고... 면담자 : 대학에서 교련을 받고 가면... 구술자 : 3개월 혜택이 있거든요. 그래서 27개월이기 땜에, 저 군생활 진짜 힘들었어요. 왜냐하며는 내 바로 위에 고참 나보다 제대 늦게 했거든. 면담자 : 아... 딱 가니까 교련 혜택받은 이 새끼, 나보다 먼저 제대하네, 이러면서 갈구드라고요. 그러니까 왕고 노릇 한번 못 해보고 제대했죠. 구술자 : 그러면 이게 대학에서 교육을 일정정도, 교련이라는 과목을 받는 거였죠. 1,2학년 때 그걸 필수적으로 다 필수였고 면담자 : 해야되는거였나요? 구술자 : 네 면담자 : 그럼 교련 수업은 몇 시간? 주... 구술자 : 일주일에 두시간 그랬던 것 생각되요. 그걸 받으면 일년에, 일년 받으면 일년, 한달 반 정도 그렇게 혜택 주고. 이년 받으면 삼개월 혜택, 그렇게 됐으니까요. 면담자 : 그럼 그걸 다 받고, 4학년때까지 받고 가면 그만큼 또... 구술자 : 아니, 2학년, 내 때에는 2학년 까지 받았었고 우리 형 또래는, 형은 3, 3학년까지 받았어요. 교련을 그래서 45일 혜택받았죠. 면담자 : 쫌 이제 그런 것 때문에 대학에서 교련 그런 걸 쫌 못 받고, 대학 안 나온 고참들이 있으면 또 그걸로 갈군다. 구술자 : 그래, 대학교때, 군대가서 느꼈던게, 또 전부다 대학생들이니까. 군대가니까 대학교 안 나온 사람들이 많구나, 그런 생각이 첨으로 하게 됐죠. 면담자 : 그러면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을 바로 하셨나요? 구술자 : 어...그니까 오월달인가 육월달에 제대를 했어요. 제대하고 난 다음에 복학을 할라그러면 한 학기가 있어야되니까 한학기 그냥 빈둥빈둥 놀았죠. 놀면서 제가 군대에서 그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워낙 그냥 심성이 내성적이고 여리다 보니까 진짜 뭐 의지할 데, 의지할 데가 없더라고. 의지할 데가 없고 그래서. 절에 다녀볼까, 성당에 다녀볼까 이래 기웃기웃 거리다가 성당에, 성당에 갔는데 뭐앉아 있으라 그러고 서가 있고, 잠시 졸다 보니까 혼자 서가 있고, 이건 이건 내가 쫌 성당은 다니고 싶은데 적응이 쫌 쉽지 않더라구. 그때 논산 때 다음에 교회를 갔는데 분위기 착, 있잖아요. 뭐 올간반주 쭉 하고 가는데 딱 앉아 눈물이 팍 나는게 막, 진짜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눈물이, 끝날때까지 계속 눈물이 흐드, 흐르드라고. 그래서 그때서부터 이렇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거던요. 이렇게. 어...자대에 가서도 참 많이 은혜받았다 그러나? 뭐 하튼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힘든 군대 군 생활에. 그리고 뭐 항상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그런 위안, 그런 걸 받아가지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했었죠. 열심히 하고 그랬는데 그것도 참 그게 우연인가, 제대할 때쯤 되가지고 군종하사관이 있는데 나한테 이야기를, 두 손 꼭 잡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 최병장, 사회 나가서도 신앙생활 하실꺼죠? 예, 그럼요 해야죠 그러니까. 자기가 부탁이 딱 두개가 있대요.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다른 건 좋은데 어...이 교회는 가지 마라 그러더라고요. 그 교단을 가지 마라그래. 하나는 도시산업선교고, 하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가지 말라 그러더라구. 면담자 : 기독교 장로회요? 기장... 왜 그 이유가 뭐였나요? 구술자 : 모르죠, 나 교회에 대해서 뭐 그때 군대에서 처음 이렇게 가게 됐는데 그게 뭔지 어떻게 알아요. 뭐 부탁이니까 알겠다고. 대구 제대하고 난 다음에 5월달인가 제대하고 한 학기 놀아야되니까 뭐 신앙생활은 해야되겠고. 진짜 어느 교회 다닐지 막막했어요. 교회 다닐까 말까 뭐 그러다가 뭔가 큰 교회 같은데 쫌 안 맞는것 같애. 나한테. 그래서 어...옛날에 형이 다니던 교회가 있었는데 형은 인제 서울에 직장생활하고 있었을 때니까 그 교회한번 가볼까 싶어서 그래서 그 교회를 가게 됐는데. 그 교회가 대구 중심가에 있었는데,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데에. 근데 그 교회가 YMCA가 있고, YMCA에서 한 이삼십메타, 골목길에 있었어요. 골목길 딱 드가면 판자집 교회였거던요. 그 교회 쫌 만만해 보이기도 하고, 교회도 뭐 대형교회도 아니고 그래서, 형 다니던 교회고 그러니까 아뭇소리 안하고 그냥 갔죠. 다니기 시작했는데 웬걸, 목사가 설교하는데 전두환이가 어떻고 뭐 (웃음) 그런 이야기 하고, 목사 설교하면 뭐 뒤에서 사찰 형사들이 뭐 있고 뭐 그런 교회였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다니고 보니까 괜찮은 느낌이 들어가지고 계속 다녔어요. 한달 두달 다니다가, 그때가 5월달인가, 뭐하여튼 그렇게 YMCA 교회당을 지나갔는데 그 광주 5·18 사진전을 하는데 면담자 : 그때가 86년 구술자 : 86년도였죠. 86년도. 그때 이게 충격을 받았죠. 충격을 받았는데 그게 뭐냐 그러면, 어...뭐야 내가 역사 속에서 역사 공부는, 공고 다니고 이랬기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마는 뭐, 우리 민족의 아픔이 6.25라든가 양민 학살사건, 제주도 4.3 이런 거 있었던 그 가슴 아펐던 그런 사건들은 하나의 역사구 그냥 옛날 가슴 아픈 사건 있었다, 그걸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대학, 아니 고등학교 3학년때, 어느정도 사리 판단할 수 있었던 그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매스컴에서 그냥 폭동으로 기억하고 있던 그 사건이 광주 민주화 항쟁이고 그때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 고난을 당했다는거, 그걸 그때 알고 난 다음에는 진짜 (울음) 면담자 : 선생님 그 사진전을 보신게 팔십, 그 제대하고 팔십육년인가요? 그게 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했던... 구술자 : 공개적으로 전시했었어요. 면담자 : 86년에요? 구술자 : YMCA 그것도 실내가 아니고, YMCA 본관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 다 보게 그렇게 전시했었어요. 면담자 : 혹시 89년도가 아니라요. 구술자 : 86년도요. 그때 사진을 처음 보게 됐죠. 면담자 : 아직까지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데요. 구술자 : 그렇죠. 예. 그때 진짜 그...난 죄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드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모르고 있었다는거 하고 (한숨)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거. 면담자 : 혼자 사진을, 그 사진을 보셨나요? 구술자 : 그렇죠, 교회 가다가 뭐 보게됐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대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진을 봤어요. 중심가에 있기 때문에, YMCA가 중심가에 있었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었고. 면담자 : 이때가 정확히, 기억이 쫌 안 나실 수도 있겠지만 제대하고 86년, 한 언제쯤, 전시, 사진 전시를 대구 YMCA... 구술자 : 그니까 5월경이었을거에요. 면담자 : 그럼 제대하고 얼마 안 되서. 구술자 : 얼마 안 됐어요. 면담자 : 그...사진을 쫌 봤던 다른 대구 좀 시민들의 반응이랄까 그런 건. 구술자 : 놀람과 분노와 그랬던 것 같애요. 나만 그랬겠어요. 그 봤던, 봤던 사람들이... 그 분노와 죄책감, 뭐. 그러면서 이렇게 교회다니는데 솔직히 교회 간판도 모르고 이렇게 다녔었어요. 다녔는데 내가 이 교회를 다녀야되겠다 결정하고 난 다음에 나중에 보니까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라고 그렇게 있드라구. 면담자 : 수성교회요? 구술자 : 수석교회, 머릿돌. 면담자 : 수석교회요. 구술자 : 네. 면담자 : 혹시 지금 있는지 없는지는... 구술자 : 지금 있어요. 있어요. 있는데 그 장소가 아니고 다른 장소로 이렇게... 그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민주화 운동하는 중심지였죠. 그 목, 목사님이. 거기에서 신앙적인 거라든가 쫌 알게 되고 그러면서 어...사, 내가 몰랐던 부조리 이런 것들, 그런 것들을 좀 알게 됐죠. 뭐 청년회 활동하고 그러면서 그러면서 87년도에 복학해가지고 진짜 공부 열심히 할려고 그랬는데 그게 안 되드라구요. 바깥에서 이렇게 북소리 들리고 그런데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드라구 .3월달, 4월달 그렇게 있었는데 그렇다구 뭐 그 당시 뭐 NL, PD, PD 난 몰랐는데 조직체 그런게 한참 있었는데 내가 조직적으로 참가하진 않았어요. 참가하진 않고 수많은 학생, 그때는 복학하고 초기에 가니까 자기 밭에 이렇게 모여서 데모하고 그러면 한 삼십명에서 오십명 정도 그렇게 앉아 있던, 그 중에 한, 한 학생으로 앉아있고 그랬는데 한 오월 정도 되니까 그때 뭐 앉아있던, 집회하고 난 다음에 가두나가서 뭐, 돌을 뭐, 떤지는 걸 원래 못해가지고, 바로 앞에 떨어지거든. 돌도 못 던지고 뭐 돌 좀 날라주고 그런 일 쫌 하다가 한 오월달 유월달 됐을까? 이렇게 당연히 집회에 앉아있던, 한 삼사십명 앉아 있다가 집회 가두 투쟁 나간다고 갔는데 보니까 뒤를 딱 돌아봤는데 오십명 육십명이 아니고 수백, 한 천여명 정도가 뒤에 있는 거에요. 그때 진짜 그 감동, 감동같은 거는 그때서부터 하여튼 87년 6월 항쟁까지 예... 면담자 : 대구에서도 그 열기가 다른 지역 못지 않게 좀... 구술자 : 아, 그쵸, 그러면서 국내 안에, 학내에서 일어나다가 그 다음에 대구 중심가로 가서 가두 투쟁 대학생 학생들하고 다 해서 가두투쟁하고 그렇게... 면담자 : 시민들도 많이 참여를... 구술자 : 많이 참가 했고 그때 학생들 하며는 뭐 빵도 사주고 물도 사주고 뭐 그렇게, 예. 그때 그 당시 어떤 해방 세상에 대한... 면담자 : 복학을 하시고 바로 맞이하셨네요. 87항쟁을, 그때 같이 인제 하고. 구술자 : 그렇게 하면서 뭐 그때 혁명이 어떻고, 혁명을 해야된다든가, 여러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던 때 난 87년 6월 항쟁을 어느 정도 마모되는 단계에 들면서 이런 생각이 들드라고. 야 이거 씨, 평생 해야되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평생 해야되는 생각, 일인거 같다 그런 생각이 들든데. 그러면서 4학년때, 4학년 초 들어가지구 취업도 준비해야되고 아니면 뭐 미국 와야되는 그런, 서류 너놓고 언제 될지 모르는데 와야되는 그런 상황, 언제, 였고 그래서 공부 열심, 공부 할라고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 공부만 잘 안 되죠. 그때 또 아...분신자살하시는 학우들도 있었고 투신자살하는 학우, 뭐 있을 때마다 진짜 가슴이 아팠어요. 어떻게 함께 그렇게 죽어가는 모습 보고. 그러면서 하여튼 졸업하고 졸업하고 육월달에 그 당시 뭐 졸업하자마자 이렇게 이민 서류가 진척이 되 간다, 언제쯤이면 간다 그럴 때니까 아 인자 가는갑다, 이민. 뭐 큰 데서 공부도 쫌더 하고 싶었고 그랬었어요. 공부 뭐. 미국이란 데가 대체 어떤 덴지 어릴 때부터 가슴설레게 했고 그런 데니까 결국은 한번 가보자. 그런 생각에 직장 생활하는거 보다는. 그래서 시카고로 오게 된 거에요. 면담자 : 그러면 지금 88년도에 4학년이셨구요, 89년 2월에 구술자 : 졸업하고... 면담자 : 졸업을 하셨는데 미국은 언제... 구술자 : 육월달에 오게 된 거에요. 면담자 : 89년 6월달에. 결정이 언제난건가요? 이민이... 구술자 : 계속 뭐 서류 프로세스됐다 그러고 89년 초에 결정되서 언제쯤 올거다 구체적으로 이게, 건강검진 받고 이런게 나오드라구요. 면담자 : 그 이민이 부모님께서 이민을 결정하시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뭐 있으신가요? 뭐 어떤 연고가... 연고가 있었고. 외삼촌이 먼저 왔었고. 외삼촌 초청으로 오게 됐는데 아무래도 뭐 어려운 경제 사정이죠. 잘 먹고 잘살았으면 왜 왔겠어요. 면담자 : 아니 그래도 외삼촌이 여기 계시긴 했어도 이민을 결정한다는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구술자 : 그 당시만 해도 기회였으니까. 면담자 : 거기 미국을 간다는 부분에 대해서, 이민을 간다는 부분에 대해서 선생님 크게 걱정이라든지, 가기 싫다거나, 뭐 그런 두려움이나 그런건 없었습니까? 구술자 : 뭐 두려움 같은 건 별로 없었고, 한번 가보자, 뭐 기회니까 그렇게 생각했죠. 면담자 : 89년 6월에 인제 이곳에 시카고로 들어오게 됐는데 그때가 처음이었죠, 미국은 구술자 : 예. 면담자 : 그러면 시카고로 처음 들어오셔서 부모님이 하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신일은 구술자 : 먼저 아버님 오셔가지고 아버지는 건물 청소 하셨어요 제니터(janitor: 경비원) 면담자 : 아, 그게 지금. 구술자 : 아버지는 87년도에 오셨죠. 면담자 : 아, 아버지, 부모님은 구술자 : 아버지하고 동생하고 먼저 와갖고 면담자 : 87년도에 먼저. 예. 그럼 선생님만 서류가 좀 준비가 늦고 그래가지고 89년도. 그러면 그 한 2년간 어디서 사셨나요? 구술자 : 2년 동안 학교 다녔으니까 학교에서 자취했죠. 면담자 : 아버지가 인제 뭐 건물 청소하는 뭐 그런 청소 일을 하시고, 구술자 : 어머니 세탁소에서 바느질 하시고. 동생은 면담자 : 동생은, 그 학교 다니면서 주유소 알바하고 뭐 그런 상황이었어요. 구술자 : 대학, 대학은. 구술자 : 그때 대학교. 면담자 : 시카고에 있는 대학이었나요? 구술자 : 예,예. 면담자 : 선생님은 들어가서 뭐 어떤, 졸업, 취업을 생각을 하셨겠네요. 구술자 : 그러니까 공부는 더 하고 싶지만, 실력이 있든 없든 공부는 더, 전자학하는, 그냥 꿈이 그거였으니까. 공부를 더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어서. 잘 하지 못하지만 그래 생각했었는데, 또 나이 스물일곱에 갔었으니까 부모에게 손벌리기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러면 누가 직업을 소개시켜줘가지고 첨에 잡었던 직업이 카 스테레오 같은거, 카 스테레오나 엠프 뭐 무전지 이런 것 수리하는데 한인 업체에 들어갔어요. 그니까 원래 제품을 미국서 사서 맘에 안 들어가 고장나거나 그러면 반환하거든요. 반환하면 그걸 모아가지고, 회사에서 모아서 그걸 또 수리해서 또 B급으로 파는 게 있어요. 여기서는 리퍼비쉬(refurbish)라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일하게 된 거죠. 한 이년 정도. 예. 면담자 : 어제 말씀 하실 때 처음 87년, 89년 6월에 들어오셨을 때 임수경씨가... 구술자 : 그니까 일을 하면서 뭐, 쫌 은젠간 하게 되겠지만 사회에 대해서 쫌, 일단 앞가림을 해야되니까, 언젠간 하게 되겠지만 좀 접어두자,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한청련의 존재는 알았어요. 면담자 : 아, 그 한청련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알고 계셨구나. 구술자 : 언젠간 조인하겠지마는 그냥 좀 앞가림부터 먼저 하고 그런 생각들을 했었거든요. 왜냐하면 그것도 우연인지 모르겠는데 미국오기 전에 바로 공항에서 심심해서 비행기타면 심심하니 책을 두 권 샀는데 하나는 영어 회화책이고, 하나는 문병란 시인이 쓴 그, 문병란 시인이 광주 와서 어...합수 형님 만나고 뭐 하면서, 하고 난 다음에 후기로 시집을 발간했드라고요. 그 시집을 샀거든요. 그걸 사서 이렇게 비행기에서 이렇게 보면서 죽 이렇게 한청련에 대해서 알게 되구 언젠간 조인해, 해야지, 그런 마음을 먹고 왔엇어요. 그래 되서 왔었고, 왔는데 그때 보니까 국제평화대행진하고 보고대회한다 이러면서 포스터가 이렇게 붙어있드라고요. 그래서 가까마까 가까마까 망설이다가... 면담자 : 그게 시카고에서 했었습니까? 구술자 : 왜냐면 시카고에도 있었으니까. 여기 마당집이, 마당집이라는게 LA에만 있는게 아니고. 그때 당시만 했어도 여기 LA에 있었고, 뭐 북가주에도 있었고, 시애틀, 뭐 필라델피아, 뉴욕, 시카고, 뭐 뉴잉글랜드 이렇게 죽 많이, 합수형님이 조직하고 다녔으니까. 그때 그렇게 있었거든요. 그렇게 있어서 시카고에 그렇게 직접 갔다 오신 분들, 뭐 보고 대회 한다고 그러니까 그때서부터 조인하게 된 거죠. 마당집 같은 데 조인하게 되고 어... 그 계, 계기로 인해가지고 여태까지 오게 된거죠. 면담자 : 그게, 그게 몇 년도 인가요? 구술자 : 89년. 면담자 : 9년. 구술자 : 89년. 그러니까 이민 오자마자 한달만에 뭐 활동 조인하게... 면담자 : 그럼 들어와서 그, 카 스테레오, 엠프 수리하는 한인업체는 바로 들어가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 예, 그것도 한 한 달만에 이렇게 들어가게 됐어요. 면담자 : 그럼 그것도 거의 동시에 뭐 이런... 구술자 : 일하고 일하고 그래서 동시에, 낮에는 거기서 일하고, 일도 마치고 나면 마당집 와서 같이 있었고. 면담자 : 이 앰프 수리점에서는 어느 정도 버셨나요, 벌이는? 구술자 : 그때 한달에 처음에 5불 받았어요. 면담자 : 한달에? 구술자 : 시간당. 면담자 : 시간당 오불이요? 구술자 : 초보니까, 초보, 초본데, 초보가 아니니까. 그때만 해도 전자 지식이 있고 바로 이렇게 고치고 일을 하니까 쪼금 올려주더라고요. 그렇게 했는데 그 당시에 경기가 팔십구년도, 구십년도에 미국 경기가 안 좋을 때였어요. 안 좋을때라가지고 한 이년 일하고 나니까 그...일거리가 떨어지고 그래서 더이상 그 오너가 유지하기 힘들게 됐거든요. 그러...한 일년인가 이년하다가 그렇게 되서 얼핏 누가 복사기가 괜찮다고 그래가지고 복사기 사업 하는 한인 업체에 취직하게 됐죠. 그래서 아마 시카고에서 그 이후에 한, 한 삼년 정도 미국회사, 사년 정도 미국회사 일하다가 삼, 내 개인 사업 하게 됐어요. 복사기. 그래서 생계는 뭐 복사기 고치는 걸로 생계(?)141106_최영준_02 00:36:06 이어지고. 면담자 : 엠프 수리점에서 한 이년 정도 일 하시고. 구술자 : 그 나머지는 전부다 시카고에서 복사기 관련 일을... 면담자 : 개인 사업으로 본인이 직접 이렇게 사업으로 시작한건 언제셨나요? 구술자 : 미국 가서 한 시카고에서 한, 사, 사오년 정도. 면담자 : 그 복사기를 고치는 그런. 오너셨나요 구술자 : 예, 복사기 출장 수리. 주로 출장 수리. 면담자 : 사시는 데 크게 뭐 지장이 있다거나 그런 구술자 : 그런 건 그런건, 없었고 하튼 뭐 어... 첨에 일년 동안에 그렇게 뭐 그냥 왔다 갔다 했지마는 중심, 그냥...관여안하고 있으니까 일년동안 한 만불정도 모았아요. 그래서 나중에 집살때 이렇게 좀 보태기로 했는데 그 다음 일년부터는 광주 5·18이고 본격적으로 한청련에 가입하고 이렇게 하다보니까 한청련 회비가 그 당시에 한 백불 정도 했어요. 오십 불 정도 하고 이것 저것 내다보면 백 불정도. 면담자 : 한 달에요? 구술자 : 한달에 천불도 못 버는데 이야, 이건 너무 쎄다.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조직 그거였으니까. 조직원으로서 회비 정도는 내고 뭐 이것저것 활동 하다보니까 난 나중에 보니까 첨에 분명히 나 미국 일년 동안 직장 생활했을 때 한 만불 모았는데 그 다음부턴 돈이 없더라구. 모아진 돈이 없드라구. 분명히 나 딴데 술마시고 그런 짓도 별로 안 하고 그랬는데. 면담자 : 그 재미 한청련이, 이게 그 도시 별로 어떤 지부 형식에 그렇게 있엇습니까?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시카고, 한청련 시카고 지부였던 거에요? 구술자 : 예. 그니까 여기에 그, 여기에 이제, 이제는 제가 한청련이 없어졌지만 마당집이라는, 여기 민족 학교가 있고 그 다음에 별개로, 정치 조직으로 그 다음에 한청련이란 게 있었죠. 면담자 : 그러면 거기, 시카고에 계셨던 거에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시카고에 한청련 소속되어 있는, 쫌 소속원들이 한 몇 분정도 계셨습니까, 활동하실때? 구술자 : 한 열명 미만이었던거 같애요. 그렇고 뭐, 내가 갔을 때 보니까, 아시죠, 뭐 조직 사건이 일어나고 그런 것들이 있어가지고 초창기에,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도 그렇고 다른 데도 그렇고 초창기에는 좀 나름 이렇게 인재들이 있었어요. 공부, 가방 끈도 길고 머리가 좋고 그런 사람들이, 일단 광주에 대한 이게 아니다 싶어서 이렇게 많이 활동하셨던거 같아요. 에리뜨들 있었고 그 다음에 호남 향우회나 이런 데, 쫌 의식있는 외국의 매체를 통해가지고 광주의 실상을 보고 이렇게 있던, 있었던 사람들 반면에 한청련 같은 경우에는 아주 똑똑한 에리뜨들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합수형님의 카리스마나 이런거에 의해서 쫌...글쎄 그...자기 살아온 습관이라든가 그런게 쫌 안맞는 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나가신 분도 꽤 되고. 뭐 서재정 교수라든가. 이런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한두차례 그러게 나가고 난 다음에 89년도에 난, 나가고 어느 정도 정리되고 뭐 쫌 어떻게 보면 우직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남아있었고. 그 다음에 시카고 같은 경우에는 특히 뭐, 중학교, 고등학교, 학, 고등학교 애들이 몇명 남아가지구 쫌 있었고 고등학교 성장해서 지금 대학교 다니고 그러고. 어른들 몇 명하고 한 열명 내외 그렇게... 면담자 : 그러면 전체적으로는 몇분 정도나 있었을까요? 구술자 : 전체적으로 LA는, LA는 상당했었고 뉴욕도 그렇고. 한번 대회 하며는 마 그때 80, 2년마다 한번씩 이렇게 같이 모였거든요. 뉴욕이나 LA이렇게 모였을 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 이, 이백여명은 모이고 그랬어요. 그때만해도 일본에서도 오고, 호주에서도 오고, 유럽에서도 대회할때 90년대 같이 와가지고 해외 한청련 대회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만, 단순히 어...광주를 잊, 그냥 잊지 말자, 그런게 아니고. 물론 해마다 광주에 대한 주도적으로 시위에 나갓었고 뭐 호남향우회하고 같이 그렇게 했었지만 어...타민, 미국과 관련된 평화적인 시위라든가 그런 것도 같이 참여했었고 특히 한반도 평화문제, 통일문제에 대해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해외 동포 역할로 꽤 많이 활동해왔었죠. 면담자 : 그럼 선생님이 시카고 한청련 회장을, 회장을 맡으셨... 구술자 : 어...그때가 함 보자, 80, 91년돈가, 아 90년도 저 되서 일년 활동하다 일년 후에 한청련 회장을 하게 됐었어요. 면담자 : 91년이었던가요? 구술자 : 90년돈가 91년이었던가 그럴거에요. 제가 한청련 활동을 2년 했었어요. 2년 했던, 활동했는데 에, 1년은 그냥 했었고 2년째 접어들면서 아마 한청련 회장을... 면담자 : 가입 기준이 있었습니까? 가입 기준은 없었고 서로 간, 한 몇 개월동안, 서로 간보면서 이렇게. 그것도 가입하려면 좀 구술자 : 까다로웠죠. 이렇게 학습하게 되고, 여러 사람이 이렇게 주위 추천하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어...간보는 기간만 해도 한 육개월 정도 됐나, 그렇게 됐을 거에요. 면담자 : 자격 조건이라든지 그런게 구술자 : 뭐 학력이나 그런 건 없지마는 조직원으로서의 그런게 면담자 : 나이는? 구술자 : 나이는 없었고, 품성이죠. 면담자 : 2년 활동을 하시고 그만 두신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 그러니까, 시카고라는 조직이 좀 특이하드라고요. 이렇게 다른 타, 대회하고 다른 지역에 이렇게 보니까 뭐 괜찮은 것 같은데 시카고란 조직이 보니까, 어...전에 조직을 이끌어왔던 사람이 신상 문제로 그만두고 타주로 가게 되, LA로 오게됐나?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 뉴잉, 뉴잉글랜드에서 있던 조직원들이, 뉴잉글랜드의 학교, 좋은 학교 다니시던 분들 많으니까. 의사분, LA있던 분들이 또 갈라져가지고 각 지역으로 뉴욕이라든가, 오게 되고. 시카고 같은 경우에는 의, 최관호라고 의사 하시던 분이 오게 된 거에요, 지역 담당으로.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필라아니라 뉴욕에선가, 그때 제가 시카고 가면 장광민이라고 만나게 될텐데 그 친구가 상근으로 오게 되고. 그 다음에 뭐 한익수란 친구가 있고, 신문기자 하던 친구 있고. 그래서 열명 내외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고, 모여가지고 이렇게 조직 활동을 하게 됐는데 어...회비, 회비는, 경제적으로 좀 그렇다 치더라고 이게 뭔가 인간관계가 이게 좋은 일을 하자고 모였는데 하, 쫌 강압적인 분위기 이런거라든가 그런 걸 느꼈어요. 답답함, 예. 하, 이것 나는 이렇게 조직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마는 친구들끼리 대학때 동아리에서 술마시고 그래도, 그 친구들하고 관계도 그렇게 좋았는데. 이런 좋은 일 하는 조직 안에서 이게 너무, 숨쉴 틈이 없다.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조직 안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도 없어지는 것 같고. 근데 나, 내가 조직, 그 당시에 한청련 회장은 맡고 있었지만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껴가지고 그걸 회장으로 타지역의 그걸 못하겠드라고요. 그냥, 예. 좀 지도부의 좀 문제가 난 느끼는데,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회장 딱 그만 두는 날, 안 한다, 활동 그만 둔다 그렇게 하고 탈퇴하고 연락하지 마라 그러고 나와버렸어요. 나오고 난 다음에 한 몇 달 정도는 아, 신경 끄고, 너무 힘들어, 나도 힘들어가지고 그때 정신과 상담도 받고 그랬거든요. 희사한테 상담받고 그러니까 그 의사가 이런 말을 하드라구. 어떻게 내가 그랬을까, 한국에서도 이렇게 까지 친구 사이도 참 잘 지냈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힘, 하드 타임을 주는지 모르겠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한테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 보니까 내가 못 견디겠더라구. 그래서 그런 얘기 하니까 정신과 의사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거라구. 그 이야길 하는데 이게 이해가 되드라구.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가. 그러구 있었는데. (DV TAPE 교체로 잠시 중단) 면담자 : 혹시 그때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 구술자 : 시카고 가면 만날 장광민, 또 그 다음에 김남훈이라고 그, 아마 시카고에서 만날 수 있을 거에요. 아마 그 친구가 고등학생일때부터 봤으니까. 그리구 면담자 : 김남훈인가요? 구술자 : 네, 그리고 나카섹(NAKASEC: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 사무국장으로 있는 윤대중, 이 친구도 고등학생때였었고. 면담자 : 이 시카고에서 같이 활동을... 구술자 : 했었어요. 면담자 : 선생님을 좀 힘들게 하셨던 분은 없나요? 구술자 : (웃음) 의사, 의사 최관호란 사람하고. 면담자 : 지금 말씀하셔도 됩니다. 구술자 : 아니, 괜찮아요. 최관호란 사람하고 그 다음에 신문기자였던 한익수란 사람하고. 면담자 : 한익수 선생님하고, 최? 구술자 : 최관호. 면담자 : 최관호라는 분. 지금 이분들은 지금 구술자 : 지금 최관호씨는 뉴욕에 있을 것 같고 한익수씨도 뉴욕에 있는데 아마 생사가, 지금, 아프다는 소릴 들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참 안타까운 친군데 능력, 다 능력 있는 사람, 사람이고 그런데 음...그래서 이 사람, 조직, 이렇게 조직한테서는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만 조용히 사라지면 뭐 괜찮겠다 싶어서. 면담자 : 활동하는 데 있어서 각자의 생각들이 쫌 다를 수도 있고 욕심, 방향성 문제일 수도 있고 그런... 구술자 : 그게 아니고 은근히 사람을 쫌 하드타임주는 그런 스타일. 못 견디게 하는 그런. 그래서 그만 두고 한 몇 달 정도, 한 서너달 정도 있었는데, 소식 연락 끊고 있었거든. 그때 가까운 지인한테서부터 연락이 왔는거에요. 그때 어, 시카고 마당집이, 마당집 이름이 어...청년교육문화원이었어요, 그 당시에 청년교육문화원이었는데 어...청년교육문화원이 해체됐다는 거에요. 아 그때 번듯하게 뭐 여기처럼 큰데는 아니었지만 사무실 공간도 있었고 그랬거든요. 근데 야, 그거 해체됐는거 아냐? 그러드라구요. 그것도 시간 한달 정도, 시간 한 한달정도 지나고 난 다음에 일았어요. 연락 끊고 있었으니까.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싶어가지고. 그때서부터, 저는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이게 젊은 친구하고 어른들하고 싸워서 나갔다, 떨어졌다 이러게 됐는거에요. 아,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건가 싶어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 떨어진, 다 젊은 애들하고 최관호하고 한익수, 최관호 한익수 이 사람들이 그때만해도 어른, 어르신들이 꽤 있었거든요. 어른들 모임만 해도 한 열명 정도 됐을 거에요. 하튼 그 어른들하고 따로 나가, 따로 나간게 아니고 젊은 애들을 쪼까(쫓아)보낸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뜻에 안 따르니까 쫓아버리고, 그 다음에 마당집 폐쇄시키고 그런 상황이었었고. 그래서 이게, 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거의, 근 한달 동안에 이 사람들 저 사람들, 양쪽 사람들 다 만나게 됐죠. 만나면서 이게 하나의, 그러니까 조직 사건이었는데 타, 그 시기에 뭐, 뭐 정기열 어제 나왔던, 박사학위 받았던 정기열이란 사람하고 뭐 이런 사람들이 시카, LA도 그렇고 하튼 조직의 중, 중견, 중견이, 아니 리더그룹들, 리더그룹 중에서 일부가 그렇게 떨어져나가게 된 거죠. 떨어져 나가게 된 그 시기가 아마 합수 형님이 한국에, 한국에 가던, 가시던 그런 시기였나? 아, 그렇지. 형님 한국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그때 났던 조직 사건이었죠. 면담자 : 윤한봉 선생님께서 귀국하신게 김대중 정권때였나요? 구술자 : 아니요, 김영삼 정권 때요. 면담자 : 김영삼 정권때, 그럼 구십사년 오년 그쯤이었던것 같은데요. 구술자 : 구십사년 오년 때였으면 아니다, 뭐 합수 형님 있을 때였든 것 같애요. 아, 있을, 있었을 때. 차 그렇게 나가서 이사람들은 다른 단체 꾸려서 활동하게 됐구, 그러고 그러고 나니까 난 후배들한테 참 미안하게 된 거죠. 난 내 혼자 나가면 모든 게 잘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 뭐, 마당집도 뺏겼고 그 많은 자료들도 다 뺏겼고. 그냥 그 사람, 자기 지금 장광민이란 친구가 그...그때 상근하면서 마당집에서 자고 그랬는데 아파트 하나 얻어가지고 그냥, 작은 스튜디오 하나 얻어서 생활하고 젊은 친구들 거기에 모여가 있더라구요. 그래 이야기 죽 들어보고 내가 정리하고 니들하고 같이 하겠다, 그때 한청련, 그게 한청련이었고 이게 (? 141106_최영준02 00:53:53) 그때서부터 다시 같이 활동하게 되죠, 하면서 어떤 후배가 그러드라고요. 형이 같이 있었음 마당집은 안 뺏겼을텐데 그런 이야길 하드라구요. 아...그게 참 미안한, 나한텐 또 하나의 멍에고 그렇게 했는데. 거기에서 젊은 친구들 한 일년 정도 모여가지고 같이 활동하다가 그...다시 마당집활동, 마당집을 임대하게 됐죠. 임대해서 다시 활동하게 됐는데 그게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라고 지금 아직도 시카고에 있는.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고. 진짜 젊은 친구들이 열심히 희생적으로 해가지고 그렇게 만들게 됐죠. 그렇게 만들게 되고 그 다음, 어...이사장 조직을 만들고 꾸려나가야되니까 이사장 누가 할까, 처음에는 이렇게 이 사람 저사람 좀 명망갈 할라 그래도, 이미 한청련, 뭐 마당집이라면 찍힌 단체니까. 그 누가 빨갱이 단체로 찍혔는데, 누가 뭐 이렇게 대표성을 해줄 사람도 없고. 우리 자체 내에서 하자 그렇게 해서 첨에 제안은 여성 회원중에서 하자 그렇게 해서 뭐 변호사하고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하기로 했었어요. 하기로 했는데 딱 마당집 설립 기념식 하고 딱 띄우기 일주일전인가 이주일 전에 못하겠다 이렇게 된 거에요. 못하게 됐다 되서가지고 한참 얘기하다가 나중에 형, 나보다, 형밖에 없다 그렇게 되가지고 제가 뭐 30대 초반에 능력도 없고 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고 그런데 거절을 못하겠드라구요. 왜냐면 나때문에 그렇게, 내가 없었으면 마당집이 그 당시에 어떻게 됐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지켜낼 수 있었는데 싶은 생각이 들어가지고 그때 최초에 한인교육문화마당집 생기고 난 다음에 이상장 맡게 됐죠. 한 육년 동안 이사장 했었어요. 면담자 : 몇 년도에 이게 다시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라는 이름으로 구술자 : 구십, 그..그러니까 93년도 94년 정도 됐을 거에요. 아마 자세한건 시카고에서... 면담자 : 94년도...주로 이러, 이곳에서 했던 일이 뭔가요? 주로 이게,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에서. 구술자 : 그 당시 그렇게 타이밍이, 항상 이게 마당집이란 단체가 우리가 시카고에만 있는게 아니고 뉴욕, 그 담에 LA에, 북가주에 있었으니까 그 당시에 딱 흔히 이렇게 하는 얘기로, 딱 고기로 딱 우리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 뭐 이런것만 생각했었는데 그 당시 고개를 딱 돌려보니까 이민자들의 삶이 척박하드라는 것. 삶 자체도 척박하고, 그 다음에 경기가 안 좋을 때에 무조건 타겟이 어떤 이민자들한테, 미국 정부나 모든 시스템이 오는데. 찍소리도 못하고 있고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이민자 개혁, 이런거에 쫌더 마당집같은 경우에서는 쫌 힘을 쓰게 되고. 첨에 각 지역마다 접근 방식이 좀 대동포 아우르는 층에 활동을 해야된다. 해마다 우리가 뭐 이렇게 2년마다 대회 할때마다 하나의 표어를, 두 개의 표를 이러게 정했어요. 뭐 어떤 날은 ‘한손에는 뭐, 아니지 꾸준한 학습을 하자, 운동의 생활화, 이런 것도 있었고 그 표어 중에서 한 손에는 동포 사회를, 한 손에는 조국을, 이런 표현도 있었고. 그 당시에 나왔던 표어들, 90년대에 이렇게 나왔던 때에요. 그러면서 우리가 이민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당집이 처음 하게 된 게 무료 세금 보고, 여기는 연말 정산, 한국에서처럼 하잖아요. 초에 무료 세금보고를 하게 됐죠. 그렇게 하면서 아, 마당집이라는데 한번 빨갱이 단체 뿐만 아니고 동포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도 하는 구나, 그런 인식을 좀 바꿔나가는 계기. 그렇게 하면서 거...이민자들, 그 당시만 해도 당하고 만 있었지 이민자들의 권리를 대변해하는 단체들이 한인, 거의 없었거든요. 한인 뿐만이 아니고 뭐 있다, 타민족 같은 경우에도 있다손 치드래도 쫌 부족한 상태였었고. 90년대초에는 경기도 나빠지고 그런거, 그런때에다가 자포자기, 뭐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어...마당집들이 이래선 안된다,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좀 적극적인 이민자 권리에 대처해야되겠다 해서 만든게 나카섹이 그 시기에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나카섹이 만들어지고 어, 타민족하고 연대해가지고 워싱턴 포스트지나 뭐 이런 데에 우리가 광고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 광고 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서 뭐 꽃도 팔기도 하고, 그 다음에 심, 뭐, 모금함들고 마켓이 가서 모금도 하고, 각지역에서. 그런 일을 활동 하면서 점차 이민자들 권리 옹호를 위해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죠. 면담자 : 그, 다시 쫌 한청련하고 한겨레 쫌 그쪽 이야기로 약간 다시 돌아와서요. 한청련 활동을 하실 때는 인제 주로 조국의 통일, 민주화, 인제 그런 것에 중점을 인제 활동들을 해오셨던 부분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뭐, 아직까지는 전두환, 노태우, 노태우 정권 하에 있었던 것 같고. 5월 문제가 완,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던 그런 부분도 있는데 인제 꼭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5월 문제 해결을 교민사회에서만, 특히 한국 교민사회에서만 관심을 가져주고 열심히 활동들을 외국에서도 이렇게 진행을 해오셨어요. 주로 인제 한청련에서 선생님 아는 범위 안에서 5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 안에서, 쫌 이렇게, 동포 사회 안에서 그때 당시 활동을 했던 내용들을 쫌 말씀 해주신다면요. 구술자 : 아마 해마다 틀려졌는데, 그때까지, 저저저 90년대 저 기억하기로는 5월 한, 몇 년동안은 계속 그렇게 했던 것 같애요. 광주 비디오, 그 상영회하고 그 다음에 연사를 모시고 뭐, 연설을 듣기도 하고. 특히 시카고에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교수가 있었고 그랬거등요.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모셔가지고 강연회 한 적도 있었고, 그 행사는 빠지지 않고 호남향우회하고 같이 보통 했었죠, 했는데. 구체적으로 뭐 제가기억이 안 나요. 시카고 활동은 장광민이 잘 알고 있으니까 좀 그렇게...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그럼 한겨레, 저도 한겨레라는 조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조직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한청련과는 또 어떤 다른 점이 있는 건지 저는 그것 까지는 모르고 있는 상황이라... 구술자 : 그러니까 합수형님이 오셔가지고 영향받았던 사람들이 젊은 친구들 뿐만이 아니고 그 당시 형님 오기 전에도 미국서 각 지역에서 민주화 5월 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꽤 있었어요. 뭐 은호기, 은호기 선생님도 계시고, 각 지역에서 계셨는데, 이 분들은 뭐, 극소수죠. 소수의 모임에서 이렇게 그건, 나이 드신 분 전담 붙이고 뭐 열심히 활동 하셨는데. 그 영향력은 쫌 미비하셨던 것 같아요. 그랬는데 합수형님 오시고 난 다음에 젊은 단체 모임, 뭐 마당집이 갑자기 있고 그 다음에 한청련 조직이 결성되고 그러면서 어...그 어른들 중에서 합수형님하고 연대하셨던 분들이, 뭐 지금 돌아가신 최...까먹었는데, 저기 사진 계시는데, 최진한 박사님 하고 뭐 은호기 선생님도 도와주셨고 그랬지마는. 여러 어른들이 있었으니까 그 어른들을 어...쫌 모아보자, 그래가지고 젊은 사람들은, 원래는 40세 이하 연령제한이 있어요, 한청련은. 40세. 첨에 40세 이하 그렇게 됐을 거에요. 그렇게 연령제한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한 청련이었고. 그거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같은 활동 하지만 그, 쫌, 나이 드신 분들 하고 같이 이렇게 해서 한겨레라는 조직을 만들게 됐죠. 면담자 : 어떻게 보면 한청련 활동을 하셨던 분들이나 쫌 아니면 쫌, 그 연령이 있으신 분들이... 구술자 : 그 전에 활동하시던 분들이요. 예. 면담자 : 주로 그 내용은, 활동하신 내용은, 크게 뭐 한청련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어떤 그런 내용들이셨나요? 구술자 : 네, 일부 지역에서는 활발하게 움직였던 지역도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쪼끔 뭐, 아닌 지역도 있었고 지역마다 이렇게 편차는 좀 있었지만 한겨레 조직이 있었는데 그게 뭐 계속, 한청련에서 계속 지속되다 어느덧 보니까 우리도 청년이었던데 20대 초중반, 뭐 후반 이렇게 시작했던 사람들이 십년이 이렇게 지나가니까 나이가 묵고 30대 40대 되서 자연적으로 어, 35세, 40세였다가 35세로 연령이 한청련이 줄어들면서 그래 또 자연적으로 한겨레로 옮겨나가는 그런 상황이었죠. 면담자 : 선생님 그러면 그런 활동들을 해오셨던 분들을 전국적으로, LA뿐만 아니라 시카고, 뭐 샌프란시스코, 뭐 시애틀, 뉴욕도 있고 워싱턴도 있고 여러지역으로 미국도 나뉘어져 있는데, 이게 하나로 쫌 조직, 물론 이제 그 윤한봉 선생님 오셔서 꾸려진 부분도 있고 기존에 그쪽에서 활동하고 계셨더너 분들을 조직으로 인제 엮어서 하나 되게 했던 부분들도 있는데, 지금 이제 그분들 모임을 제가 90년도까지는 계속 있었더너 걸로 알고 있거든요, 90년도 까지는요. 구술자 : 네, 예. 그렇죠. 90년대 후반까지 있었죠. 면담자 : 지금도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없죠. 한청련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한겨레도 없어졌고. 면담자 : 그럼 인제 지역 거점 이런 단체별로 따로따로 인제 움직이고 있다라고 보면 되는건가요? 구술자 : 아마 따로따로 개인개인이 그렇게 움직이는데, 지금 참 아쉽고 아쉽지마는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고 또 아시겠, 아시죠. LA하고 뉴욕하고 사이가 안 좋은 것도. 내가 그래서 선배로서 바램이 그것만이라도 좀 다시 관계 복원했으믄 하는게 바램인데. 바램이고, 나는 기다린,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가끔 LA하고도 연락하고 있는, 있는데. 왜냐, 우리가 통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겨우 뭐 개인적인 문제로 쫌 상처받고 상처 주고, 상처받고 그런 교우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해야되나. 그러, 그리고 한가지 더, 이 문제를 해결 못하며는 한국이 진보그룹내에서의 통합진보당사태라든가 그런거에서도 함께하지 못한다. 우리 작은 갈등, 이런 것도 해결 못하고, 진보는 (141106_최영준02 01:08:17) o o 의 정치에 의해서 뭐 없어지고, 보수 저 나쁜 놈들은 이익을 위해서 서로 뭉치고 있는데. 면담자 : 그런 뭐, 선배님으로써 그런 아쉬움은 있으실 것 같애요. 저는 자세한 상황까지는 모르고 약간 저 표면적으로 그런 이야기만 전해들었고 내부 상황까지는 저는 잘 모르는 편인데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주변에 좀 많으신 것 같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구술자 : 나는 뭐 주변이 아니고, 있으니까 그냥 (한숨) 늘 바램이죠. 바램으로 있고. 조만간 힘들더라도 그게 내 역할, 지금 현재 조직의, 여기 남아 있는 조직한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면담자 : 뭐 특별히 함께, 당시에 뭐 9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 인제 이민 오셔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 좀 활발하게 좀 활동을 하실 때 뭐 가장 좀 기억에 남으신 일이라든지 사건이라든지, 그런 분들, 혹시라도 사람들이라든지 그런... 말씀해주십시오. 구술자 : 뭐, 글쎄...그니까 시카고에서는 쪼금 그랬지만 타 지역 갈때마다 아 이게, 조직원들이 다들 괜찮았어요. 물론 그 지역에서도 다들 쫌 문제가 있었겠찌만 괜찮았고. 야, 어떤 해방 세상 그런 것들을 같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울려가지고 어떻게 미국, 이 넓은 미국에서, 미국 온지 얼마 안 되가지고 뭐, 어떻게 뉴욕도 가보고 뭐 DC, 워싱턴 DC도 가보고 LA도 가보고. 뭐 그렇게 하면서 여러 사람들 사귀고 이런 것들이 내 인생에서 아주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죠. 어떻게 내가 아무 연고도 없는 LA여기까지 와가지고 이렇게 있겠어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도 그렇고 많은 분을 알게 되고 뭐 또, 쫌 전체적, 세계나 역사를 좀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같은게 생겼는게 인상깊고, 특히 또 시대적으로 봤을 때는 어...그... 남북 동시 유엔가입했을 때 그때 물론 나...그때도 뭐 유엔앞, 유엔청사 앞에서 백악관 이런데 시위에 같이 한 적도 있고 그런 것들도 기억에 남고. 동시가입 했을 때 물론, 어, 전 직전 유엔에 가진 않았지만 같은 조직원으로써 이렇게 뿌듯. 합수형님 그때 그런 얘길 하드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역사 속에서 어, 공식적으로 이렇게 분단이, 분단이 확고하게 된 나라인데 그걸 한민족, 그 안에서 그, 아무도 반대를 안 한다며는 진짜 부끄러운 일일수가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 가는 상황이지만 거기서 많은 조직원들이 그, 그 양국 국기가 올라가는 상황 속에서 반대하고 그랬든게 참 기억에 남고 그러네요. 면담자 : 그, 미대사, 뉴욕에 있는 미국대사관? 구술자 : 유엔 유엔본부. 면담자 : 아 유엔본부 앞에서였나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그 5월 진상규명운동할때 피켓들고 시위는 뉴욕에서 할 때는 대사관 앞에서 하셨나요? 구술자 : 같은, 각 지역마다 틀렸죠. 뭐 여기서 했으면 영사, 영사, 영사관에서 했을꺼고. LA에서는, LA에서는 영사관 앞에서 했을 꺼고, 그리고 시카, 뉴욕같은 경우에는 대사관 앞에서 그렇게 했을 꺼고. 뭐 DC 같은 경우에는 그런데. 또 시카고 같은 경우에는 하, 시카고는 어ᄄᅠᇂ게 그렇게 된지 모르겠어요. 영사관이 다운타운에 있어요. 면담자 : 예, 한국영사관이요? 구술자 : 예, 한국영사관이 다운타운에 있는데 다운타운 또, 다운타운의 외곽에 있어요. 인적이, 해변가에, 아주 NBC타워라고 채널 파이브 NBC 방송국이 있는 건물에 들어가 있는데, 미국 주류 사람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미국 주류 사람도 잘 안가는 그런 아주 외곽에 있어가지고 뭐 우리가 데모를 한들 영사관에서 아무런 그게 없었거든요. 효과가 없고 그러니까. 대신 우리는 그 당시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80년대까지만 해도 로렌스(Lawrence) 라는 길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았었어요. 그래서 노라, 로렌스길로 이렇게 진상규명이나 항의하는 시위를 해마다 그렇게 했었죠. 영정사진 들고 가기도 했었고, 뭐 모의 관 들고 시위하기도 했었고. 면담자 : 시카고에 당시에 한인들이 한 몇 분정도 거주를 하고 계셨나요? 구술자 : 그때 뭐 당시 한 십만 정도로 이야기 했었어요. 면담자 : 이민 처음 오셨을 때 88년도, 90년대 초반에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상당히 많은... 구술자 : 그렇죠 제 3의 도시였으니까. 지금도 뭐 규모로 봤을 때 제 3의 도시지마는 한인사회로 봤을 때는 그니까, LA, 뉴욕, 다음 시카고였는데, 그 다음부터 이렇게 변화 추이가 쭉 있어가지고 아트란타가 부흥이 좀, 붐이 일어나고 아틀란타로 많이 움직였다가 지금은 워싱턴 DC, 미국 경기에 따라가지고 워싱턴 DC, 저 버지니아 쪽으로 많이 가고. 그 다음에 또 텍사스가 경기가 좋다 그러니까 텍사스 쪽으로 또 많이 움직였던 것 같애요. 그래서 나놔지고 이렇게, LA, 아니 미주 사회 안에서도 이렇게 왔다갔다 유동인구가 많아져가지고, 아마도 이제는 시카고가 제 3의 도시 아닌 것 같애요, 동포 사회 안에서는. 면담자 : 그 활동 하시면서 쫌 아쉽, 아쉬운 점이나 이런, 한청련 한겨레 활동, 뭐 물론 지금 없어졌지만. 또 인제 시카고 마당집, 어찌보면 설립하는데 가장 큰, 좀 이렇게 공을 세우셨던... 구술자 : 공은 아니고 뭐... 면담자 : 많이 가장 큰 도움을 이렇게 주셨던 분인데, 그런 인제 어...이민 이후에 그런 활동을 좀 하시면서 가장 좀 아쉬웠던 점이나 기억이 남는 뭐 그런 구술자 : (한숨) 정세, 한국도 그렇지만 하나의 정세 파악에서 합수 형님도 그러고 다들 그렇게 실수했던 점. 뭐냐하면, 내 개인적으로 아쉬웠던게, 민주정부, 뭐 김영삼 들어서고 김대중, 노무현 이렇게 들어서면서 한국에서도 이러게 가끔씩 해외 출장 오시고 그러면 만나시고 그런데 그 중에서 한분이 그러드라고. 이제는 뭐 민주 사회가 다 되가지고 앞으로는 뭐 이런, 안 올꺼다, 그런 이명박, 박근혜 같은 건 안 올꺼다. 그런이야기를 하드라고요. 나도 그럴 때는 그런 줄 알고. 그 다음에는 민주 사회가, 아니 어느 정도 동포사회가 되고 그러면, 원래 시카고도 이사장이 2년 임기제거든요. 2년 임기젠데 할 사람이 없어가지고 제가 6년 동안 하다가 마침 하다 좀 좋은 분이 나타나가지고, 같이 활동하던 분인데 계속 몇 년동안 고사하다가 좋은 분 그때 하시겠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나도 개인적으로는 인제 뭐 한국도 민주화되고 그리구 뭐 통일의, 합수 형님이 가시면서 이렇게 미, 미국에 있는 사람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제는 더이상 뭐 한국 일에 관여하지 말고, 통일이나 이런데 관여하지 말고 이 동포 사회 활동에 쫌 열심, 열심히 해라, 중점적으로 하시라고 그랬거든요. 그게 그것 때문에 반발이 있어, 통일 문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그래 조직도 사건이 일어 나가게 되고 그렇게 됐는데. 그게 뭐냐 그러면 합수 형님은, 이제는 남북관계는, 민주정부 들어서고 통일관계 이렇게 하면 정부 차원에서도 어, 정부, 움직이고 그러니까 해외 동포의 역량이, 동포로서의 역할이 쭐어, 쭐어드는 것도 있지만 이제는 이제서 나오는 것은 민주화 되고 난 다음에 우리 조직원 하는 거는 어느 정도의 영광이라는 거죠. 그, 뭐냐하며는, 자기 이름 쫌 내세우고 전에보다 통일활동 했으니까 남북관계에서 통일에 끼어들고 그러면 뭔가 거기서 이익을 얻는다든가, 그런게 있잖아요. 뭐 쫌 자기 이름도 날리고. 그런, 그런 일 하지 마라. 우리가 언제 뭐 그런거 생각해가지고 활동했나. 이젠 그냥 놔뚜면 잘 될거기 때문에 그냥 하지 마라, 그러셨던, 그래서 영광이라 이런건 아예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셨던, 이야기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언제 뭐 많은 사람들, 남아 있는 조직원들이 자기 이름 알리고 영광, 그런거 해서 뭐 활동했나 그러면서. 동포사회 활동 좀 치중했고 그런데. 그러면서 한국 단체들하고의 그, 어, 관계라든가 그런거에서도 쫌 소원했죠. 그런 부분, 그런게 좀 아쉽기도 하고. 그러면서 조직력이, 여기서도 한청련 조직력이 약화돼 가고. 약화돼가고 좀 새로운 인원들이 충원은 안 되고. 그러면서 점점 쇠퇴의 길을 쫌 걸었던 게 쫌 아쉽기도 하고 그렇죠. 면담자 : 지금까지 그게 인제 쫌 이어져온 것 같은데 그래도 각 지역별로 뭐 LA나 시카고나 뉴욕이나 지역별로. 구술자 : 나름대로 역할을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위안이고. 그 다음에 이제는 운동의 패러다임이 바꼈다고 생각을 해요. 굳이 이제 미씨 USA(club.missyusa.com) 아시죠? 그, 그냥 일반 미국 사는 주부 내지는 여자들의 모임이거든요, 미씨 USA가. 인터넷에서 그냥 오늘 드라마가 어떻다든가, 뭐 미국에 사는 애들 키우는거 주고받고 그런 사이튼데, 거기에서 뭐 정치방이 있고 뭐 그런가보드라구요. 여자들만 들어가니까. 거, 그, 거, 거기에서 박근혜 뭐, 부정선거가 됐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서 뭐 유권소(유권자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라든가 그렇게 활동하게 되고. 그 다음에 이번 세월호 관련해서도 진상규명을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시분들이 모여가지고 인디고고라는 펀드회사에다가 광고 냈는데 뭐 아이디어를 내가지고 하니까 인터넷에서 원래 광고비 한 오만불인가 하는데 십만불 걷혔다든가, 그 이상 걸려, 걷혀가지고 광고 한 삼천 확보를 했어요. 세번씩이나 그렇게 광고 내고 팟빵(Podbbang) 같은데 도와주고 그런게, 그게 옛날에 우리가 조직활동 했던 것보다 그분들이 더 잘하니까. 그냥 박수쳐주고 그 일원으로써 나도 그런데 가,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 부분에 세월호 진상 규명이라든지 활동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옛날에 뭐 어떤 조직이 했지만 요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이렇게 온/오프 모여가지고 활동하게 되고 그렇게 관심 있음 같이 활동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바뀌는 것 같애요. 면담자 : 지금 선생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을, 트럭을 하셨나요? 구술자 : 트럭은, 보자. 저, 한 오년 전부터 활동하게 됐는데, 저 이사장 그만 두고. 면담자 : 이사장 하실 때는 전임으로 그 마당집 일에만 전념을 하신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예. 마당집. 뭐, 제가 뭐 이사장으로 특별히 큰 역할을 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걱정해주고 뭐 동포사회 얼굴 마담으로 그냥 있었던 거고. 실무 스탭들은 다 열심히 거기서 활동했던 거고. 그렇지만 뭐 어, 6년동안 활동하면서 다 진짜 민주화가 다 됐는 줄 알았어요. 앞으론 이런 옛날, 그런 독재 정권이 들어서리란 생각도 진짜, 과연 그럴까, 아니겠지. 안 들어서겠지 그런 생각 했어요. 그럼 내가 할일은 뭔가 그런 생각 했을 때. 음...환경운동에 관심이 있었어요. 결국 이렇게 죽 생각하다 보니까 결국 운동의 기착진 환경운동이 아닐까. 그게, 그게 왜 그렇게 생각했나 보면, 제가 우주에 관심이 많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초등학교때 이렇게 학교에서 도서관에서 우주 관련된 책을 딱 보다가 느꼈던게, 우리나라, 아니 이 지구가 있고 달이 있고 크기 있고 그런데 목성 토성 이런 데 보니까, 거기 위성에 보니까 그 위성이 아주 이상하게 생기고 달처럼, 달만큼 크지도 않고 그러드라고요. 그러면서 얼핏 들으니까 내가 우주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우주 비행사가 되고 그런데 과연 그 다음은 뭐지? 거기 가서 우주에 간들 그 다음은 뭐지? 그런 생각이 들드라고요. 가서 뭐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러다가 나중에 어째 커서 보니까 이게 하나밖에 없는 지구, 이 지구에서, 가 있는데 1900년대 초부, 초창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계속해서 이렇게 인간에 의해, 의해서 훼손되어 가는 이 지구, 인간들만 위해서 사는 게 아닌데. 모든 생물, 무생물이 다 같이 사는데.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파괴되는 지구한테 미안한 생각, 다른 생물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고 그럼서 남은게 야, 광주뿐만이 아니고 인간, 인간은 인간으로서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죄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드라구요. 자연을 훼손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고 그러면, 그때 합수 형님 오셨을 때 그때 몇번 오셔서, 저 이제 환경운동쪽으로 할려고 그럽니다. 그런 생각 해가지고 뭐, 그린피스 쪽으로도 좀 후원하, 그때 후원하기 시작하고 그랬었거든요. 그러면서 또개인적으로는 시카고가 너무 추워서 이사장 그만 두면서 이렇게 바로 LA 옮기, 옮긴게, 옮기며는 쫌 그 당시 뭐 훈련에 처음 오신 분도 많은, 많은, 많았지마는 또 형 가면 어떡해요, 뭐 이렇게 되니까. 그래서 한, 나름 저는 한 2,3년 시간 공백기를 가지면서 차츰 마당집하고도 쪼끔 덜 했어요, 관계를. 그때 행사하고 이러면 나가고 그러면서 추운게 너무 싫어서 LA 왔었어요. LA 와서 부동산 하면서 그때, 그때 부동산 첨에 딱 시작했을때 LA 서브 프라임 터지기, 터졌어요 그래서 뭐 한 몇 년 동안 있는, 뭐 저축해논 돈 다 날리면서 파리만 날리고. 그렇게 하다가 여기 자바 시장이라고 있거든요. 동포 사회 젖줄이나 마찬가진데. 동대문 의류상가하고 비슷한 그런 게 있어가지고 거기에서 뭐, 뭐 딜리버리, 밴 큰 차로 딜리버리 하는 일을, 배달하는 일을 하다가 이왕 하는거 큰, 큰 걸로 해보자 싶어서, 생각 가지고 있다가 어떻게 또 시카고로 다시 가게 됐어요. 시카고로 다시 갔다가 거기서 라이센스 따고 뭐 어떻게 하다보니까 트럭 운전 계속 하게 됐는데. 일단 추운, 추운, 나는 날씨 춥고 흐리며는 좀 우울증이 좀 있어가지고 너무 싫어서 그래서 시카고에 아직 집이 있지마는 마이애미하고 LA 왔다갔다해요. 면담자 : 따뜻한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결혼은, 실례지만 결혼은 하셨어요? 구술자 : 결혼 안 했어요. 면담자 : 그러면 시카고에 지금 집은 부모님이 살고 계신가요? 구술자 : 시카고에 집은 지금 세 주고 있죠. 면담자 : 부모님께서는? 구술자 : 노인 아파트 사니니까. 면담자 : 어디 계신가요? 도시가? 구술자 : 시카고요. 면담자 : 시카고. 구술자 : 집은 시카고 바로 근처에 있고. 면담자 : 예. 구술자 : 아, 뭐활동에 관한 것도 시카고에서 뭐 광민이나 아니믄, 광민이가 소개시켜주는 사람하고 이야기하며는 그 89년도 이전에 그때 여러 활동하셨던 분들, 광주에... 있으니까. 면담자 : 어느 정도 지금 질문이 좀 끝난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좀 이제 정리하는 의미에서 5·18 민주화 운동과 운동을 포함해서 선생님이 지금 어...미국에 오셔서 관련 활동들을 계속 전개해오면서 느끼셨던 그것까지 같이 아울러서, 그 5·18 항쟁에 대하 선생님의 소회라든지, 앞으로 이 부분이 한국 사회에서 좀 어떻게 좀 안 풀리는 부분들도 아직 많이 있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좀 그런 것을 다 포함해서 한 말씀을 좀 해주신다면 그걸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구술자 : 그니까 5·18에 대해 다들 뭐 느끼겠지만 뭐 대동정신이고, 해방 세상, 진짜 그런 것들을 경험했었, 했는, 그런 정신들을 계속해서 이어갔으면 싶은 거고. 그 다음, 지금하고 마찬가지로 진상규명이 어느 정도 됐지만 진실을 알고 싶은거에요. 요번에 다른 의문사같은 것들도 그렇지만 그러고 세월호 사건도 그렇고. 진실을 알아야된다는 거. 그 다음에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또 당하게 되니까 가만히 있지 않아야된다는 것. 그거죠. 어떻게 좀 더 힘을 합했으면 좋겠는데 운동의 패러다임도 바뀌고 그랬으니까 어떤 다른 형식으로 쉽게 말해 팟캐스트나 이런 사람들 하는 사람들, 나 개인적으로 좀 후원도 좀 해주고 싶고. 그 사람들이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 같애요. 교육의 진실 교육 같은 것들을. 그니까 여기 동포 사회 일반 어른들 같은 경우에는 여기에서 뭐야, 라디오 방송이 LA만 해도 3개가 되고 24시간 방송하고 그러니까 이 라디오 방송들이 어떤 편에 서냐면 종편과 같은 역할을, 한국의 종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에요. 한국의 보수 언론 인사, 이 사람들이 나와가지고 정신무장을 시켜주고 있으니까. 그런 거를 좀 팟캐스트 이런 것들을 좀더 많이 듣게끔 해가지고 좀 바꿔나갔으면 싶은게 내 개인적인 바램이에요. 면담자 : 예, 뭐 동포, 한국의 동포 사회가 지금 거의 뭐 인제 나이를 이미 일세대 분들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되고. 구술자 : 거 이민 1세라기보다 이민 1세가 모시고 온 분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죠. 면담자 : 아,예. 구술자 : 따,따지고보며는. 예. 그, 그니까 이민 1세대들이, 그랬던 분들이 인제 많이 돌아가시고 저희 할머니도 또 돌아가셨지마는. 이민 1세대 분들이 인제는 장년 60대, 70대를 바라보는 이르는, 그런 이민 1세대지만 그 이전에 그렇게 또 이민 1세대가 70대 되고. 60, 70을 바라보시는 분들이, 그분들이 흔히들 그래요. 이렇게 이민 첨에 오니까 그 사람의 사고방식은 그 당시 왔던 한국에 대한 인식이나 그런 것들은 그 시기에서 고정이 된다고. 만약에 대학교때 왔다 그러면 대학교때 그 시기의 인식이 고정되고 그렇다고 그러드라고요. 그러니까 쫌 70년대, 80년대 깨어서 오신 분들은 그렇게 극소수지만 그렇게 민주화 운동 하셨지마는, 박정희를 찬양하던 시대에 멋모르고 그냥 했던 분들은 계속 그렇게 미국 와서도 그런 식으로. 우리 아버지도 그랬지마는 그렇게 활동하시는 뭐. 흔히 말하는 까스통 할배 같이. 그렇게 활동하고 계시거든요. 근데 요즘은 이제는, 옛날은 그랬,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신문 한번 볼래도 한달 정도 뭐, 운좋아가지고 비행기에서 오는거 신문 보거나 그렇게 했었는데 요즘은 인터넷에다 다 되니까 그나마, 그, 그런 격차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없어졌지마는. 면담자 : 이건, 뭐 여담으로 한가지 여쭤보겠는데, 선생님께서 그런 활동들을 하실때 어머니나 아버지께서 다른 말씀 안 하셨나요? 정치적 성향이 좀 같진 않았을 것 같은데. 구술자 : 완전 반대죠. 아버지하고는 집에서 많이 뭐 싸우기도 하구. 울 아부지는 또 재향군인회 활동하시거든요, 시카고에서. 재향군인회 하는 짓들을 보면 때로는 뭐 맞서기도 하고. 내가 워낙 안 물러서니까 그거는 뭐... 면담자 : 그래도 지금은 다 이해해주시고 그러지 않으신가요? 아직도 뭐, 아직도 뭐 그런 활동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만 뭐... 구술자 : 이제는 아니, 그 뭐 시카고에도 마당집 활동이 그렇게 o o (141106_최영준02 01:35:24)활동하고 그렇게 됐잖아요. 그러고 난 다음에 동포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거에요. 더 이상 빨갱이 단체가 아니고, 동포 사회에서 이민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꼭 필요한 단체라는거. 그게 인식이 되가지구,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제가 이사장 활동하고 있는 동안 나중에는 자랑스러워하셨죠. 이것도 또 동포사회에서 인정받는 단체니까. 면담자 : 알겠습니다. 그러면 뭐 제가 준비한 질문은 뭐 다 끝났는데요. 혹시나 선생님께서, 제가 질문 안 한 부분 중에서 뭐 특별히 하시고 싶으신, 꼭 이것과 관련이 없더래도, 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면 쫌... 구술자 : 예, 단순히 이 기록들이, 그러니까 광주에서 어떻게 해서 활동했다는 그런, 그런 기록 뿐만이 아니고, 의미가 앞으로 활동해나가는, 앞으로 사람들한테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 그리고 보니까, 여기 나와서 보니까, 비단 광주의 아픔 뿐만이 아니고 남미에도 남미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고, 그 다음에 뭐 동구에서 뭐 인종청소하고 지금도 그렇게 각지역마다 같은 민족끼리 그런 아픔들이 많잖아요. 그런, 그런 것들을 좀 이해하게 되고. 좀 그런 아픔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거를 글쎄, 서로, 서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야 그런 좀 갈등이 좀더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면담자 : 뭐 우리 뿐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이나 그런 부분까지 같이 연대하고 같이 고민해가면서 더불어... 구술자 : 그럴라 그러면 알아야된다는 거죠. 서로 셰어(share)하고, 같이 공유해 나가는거, 다민족들 공유해 나가고. 그 다음에 모른 사람들 한테 이런게 있었다, 그런거 알아야되는데. 요즘 참 생각 드는게. 그렇게 하면서 지금, 쫌 알기 쉽게 만화 같은거나 이런 걸로, 한국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세월호 관련이라든가, 이명박의 나쁜 짓거리들, 이런 것들, 박근혜의 나쁜 짓거리들 이런 것들을 쫌 만화나 이런, 북한에 삐라 뿌리잖아요. 왜 우리는 삐라 못 뿌려요. 그런 걸 했으면 좋겠어. 면담자 : 예, 그 오랜 시간 이렇게 소중한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으로 최영준 선생님의 구술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구술자 : 고맙습니다. 김상일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김상일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6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에 관한 김상일 박사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희가 이제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오신 삶, 삶을 쫌 인제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중에서 특히 이 미국 LA, 미국 지역에서 선생님께서 80년 당시부터 5·18과 관련해서 활동하셨던 내용들, 그 이후에 또 그, 뭐 오월 진상규명 운동이라든지 5월 정신 계승 운동 부분들에 대해서 그, 박사님의 그런 활동사항들을 저희가 구술로 쫌 담아서요, 이걸 나중에 저희가 해외에서 있었던 5·18 기록물, 꼭 이제 지금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독일에서도 이런 유사한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일어났었던 5·18 관련 운동들을 다 종합을 집대성해서 이 부분을 따로 인제 자료집으로 인제 저희가 낼 예정에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 일환이라고 생각해주시고 그냥 편안하게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선생님 그, 출생연도를 쫌 말씀을 해주시면... 구술자 : 1941년 3월 28일 면담자 :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선생님. 구술자 : 만주 길림성. 휘남이요. 면담자 : 휘남현이요, 구술자 : 휘남성. 항일 유격 활동이 굉장히 활발하게 전개되던 데죠. 면담자 : 네. 그, 일제시대 때 태어나신 거네요? 구술자 : 여기 이길주 선생님하고 같은. 이길주 선생님이 길림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길주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면담자 : 예. 아...그럼 부모님은 계속 만주 쪽에서 사셨었나요, 아니면 따른 데서... 구술자 : 할아버지 때 아마 만주에 가서 아버지 어머님들이 다 만주에서 났고. 그 다음에 나도 나고 그 다음에 1945년 해방되고 내려온 거죠. 면담자 : 그럼 해방되고 어디로 오셨습니까? 구술자 : 서울로 왔죠. 면담자 : 서울로 내려오셨습니까? 그러면 그, 아주 어렸을 땐데, 해방되었을 때가 아주 어렸을 때인데 그때 해방됐던 때가 기억에 남으신가요? 구술자 : 남는 게 있죠. 남는게 있는 건 그, 일단은 이, 우리 그때 네 살 반이잖아요. 제가. 이 기차를 타고 철교를 지나온 그게 압록강 철교잖아요. 철교를 타고서 여름이진데, 기차 타고 이렇게 넘어오는 길, 그리고 나는 그게 임진강인줄 알았는데 부모님들한테 물어보니까 예성강이라 그러더라구요. 그 예성강, 강을 건널 때 벌써 그땐 소련군들이 경계를 설 때니까. 막 부모님들이 이불을 막 찢어가지고서 수레바퀴에 감는 거예요, 소리 안 나게 하려고. 그리고 인제 나하고 여동생 있는데 이불을 덮어 씌워서, 인제 울면 안 되니까. 예, 그런, 참 참혹한 기억. 몰랐는데 지금 나중에 지나고 나니까 그런 경험들... 면담자 : 삼팔도, 아니 삼십팔도선 밑으로는 못 내려오게 막았었습니까? 그렇지, 벌써 러시아군들이 그때 다, 그렇지만 그렇게 경계가 삼엄하지는 않았죠. 그러니깐 구르마를 타고, 마차를 타고 내려온 거죠. 면담자 :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형제 관계가요. 구술자 : 내가 그러니까 4남 1녀 가운데 내가 장남이구요. 네. 면담자 : 장남이시고요. 밑으로 남동생 세 명과 여동생 한 명 그렇게 있겠네요. 부모님은 당시에 어떤 활동을 쫌 하고 하시고 계셨나요? 구술자 : 그때 그니깐 만주 건너간 사람들이 대부분들이 그 보면, 조선조 때 우리,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세조 때 사육신들, 인제 거기에 변절하지 않는 김종서, 그쪽 후예들인데요. 자기 본성을 바꾸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시골 산골에 들어가서 자기 본적도 없이 살은 거예요. 왜냐면 그 당시 그 사육신 관계된 사람들은 다 구족을 멸족하니까. 그렇게 살다가 내가 보니까 그쪽 북만주 쪽으로 길이 트이니까 그래서 대거 이주를 해갔든 것 같애요, 보니까. 면담자 : 그러면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계속 그... 구술자 : 아니에요. 할아버지의 아버님 때로 간 거죠, 그러니까. 가서 그러니까 결국은 그, 이, 아버님, 어버님을 그 쪽 만주에서 났죠. 아주 어릴 때 결혼한 거예요. 면담자 : 만주에서 부모님은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셨나요? 구술자 : 거의 농사죠, 뭐. 면담자 : 농사를 짓고 계셨네요. 선생님께서 어렸을 때 뭐 만주 생활을 쫌 기억나는 부분이 쫌, 어렸을 때이긴 한데, 기억나는 부분들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나중에 그, 이, 김일성 그, 회고록, ????세계와 더불어????, 그걸 읽다보니까 그, 그분이 그쪽 회남, 휘남성, 통화성, 그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많이 했어요. 늘 우리 아버님이 자기는 김일성 항일 유격대들이 이, 마당에 이렇게, 동네에 내려왔을 때 직접 봤다는 거예요. 직접 봤다는. 나는 만날 그거 가짜라고 배워왔잖아요. 그니깐 아버지는 자기가 본 바로는 그게 가짜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그런 추억이 있는데. 그게 어릴 때, 막 네 살 반이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살던 주변에 이 성터들이 있고 호수가 있고 고 담에 막 피난을 내려와야 되니까 전부 추럭을 타고서, 추럭 위에 내려오는 길, 예, 그리고는 집안을 통해가지고 기차를 타고 강계를 해서 예성강까지 와가지고 아마 거기서 인제 걸어서 이렇게 서울까지 내려온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뭐 전부 흐려, 어떤 건 또렷한 게 몇 개 있지만, 뭐 할머니 등에 업혀가지고 이렇게 밤에 가는데, 만주니까 들이 넓잖아요, 밤에 이렇게 불빛이 이렇게 멀리서 보이는 거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 뭐 이런 경험들 외에는 자세한건 뭐 없죠. 서울로 와서 6.25사변 날 때까지 살았거든요. 그니깐 10살까지 살았단 말이야, 9살까지. 그니까 서울에 와서부터 6.25 전쟁이 날 때까지 고때 기억은 뭐 저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사 선생님들까지 그게 뭐, 인민군이 넘어오니까 3일 만에, 학교에 불려가가지고서는 거기 공부하던 얘기, 그런 것들은 기억이 뭐 또렷하죠, 전부다. 그건 열 살 때 일이니까. 면담자 : 박사님 아버지 할아버지 대대로 어찌 보면 만주에서 쭉 거주를 하신 건데 해방 이후로 특히, 특별히 서울로 내려오게 된 계기가 쫌 있으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그 당시에 내가 뭐 어릴 때니까 확실하게는 모르는데 그 당시에 아마, 아마 혁명이, 모택동 군인들이 막 넘어온다고 하니까 가가지고 꽤 오래 살다보니까 농토가 생겼을 거 아니에요. 그 휘남현이라는 게 가장 뭐냐 하면 쌀이 많이 생산되는 데에요. 쌀이. 쌀이 생산되는. 그, 인제 가서 땅을 소유하게 된 거예요. 일단은. 농사를 짓다보니까. 그렇게 일단은 그 이, 만약에 혁명이 일어나며는 가가지고서 자기 농토가 있던 사람들은 다 뺏기게 되잖아요. 아마 그러니까 그때 그 지주는 있을 수가 없죠. 그니까. 농사짓던 사람들이 아마 그러니까 땅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땅이 몰수당할 것 같으니까 대부분이 아마 그래가지고 대부분이 많이 내려왔죠.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께서 서울로 내려오신 게 한 네 살 다섯 살 정도 그때쯤인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 열 살 정도까지는 구술자 : 아홉 살이죠 면담자 : 아홉 살에 학교는, 학교는, 초등학교는 8살에 그냥 그러게 들어가신 건가요, 초등학교는? 구술자 : 그렇죠, 그렇죠. 제때 들어갔어. 면담자 : 어디 국민 학교였나요? 구술자 : 안산초등학교라고 안산. 그니까 바로 뭐냐하며는 거기, 거기가 그, 이, 저기 인제 중부전선으로 인민군이 내려오면 그기에 바로 무학재라고 재가 있잖아요. 글로 통로로 인민군들이 내려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올라갈 때도 글로 올라가고 그러니까 중부전선의 제일 핵심 통로 아니에요. 그니깐 막 인제 전쟁이 나가지고 대포소리가 들려서 그 다음날 점점점점 인민군이 내려오는 거 다 목격했고 고 다음에 후퇴할 때, 후퇴할 때 또 다 그쪽으로 통로로 해서 또 물러가는 거 다 봤고 고 다음 그쪽에 안산이니까, 인천에서 들어온 유엔군하고 이쪽 인왕산 쪽에서 마주 붙어가지고 전쟁하는 것도 어릴 때 다 봤죠. 뭐 눈으로 그냥 사이에 서로 총격전을 하면서 바위에 기어 올라가다가 이 군인들이 그대로 굴러 떨어지는 이런 것을 다 목격했죠. 면담자 : 그 안산국민학교라는 곳이 서울에 있습니까? 구술자 : 서울에 있죠, 서울에. 안산, 연대 뒷산 있잖아요. 그게 바로 안산이에요. 그게 바로, 서울은 그것, 그 산 뺏기면 서울이 함락돼요, 아주 중요한 산이에요. 그쪽으로는 인제 그러니깐 소위 인천 상륙한 미군 부대가 올라오고 그 맞은 편 인왕산이잖아요, 거기는 인제 인민군이 주둔하고. 그니까 서로 불과 간격이 5백 메다(meter)도 안 되잖아요, 서로 막 서로 마주보며 총격전을 하고. 면담자 : 그, 국민 학교일학년 때 그러면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건가요? 구술자 : 아니요, 4학년 때죠. 면담자 : 4학년 때까진가요? 50년...학교를 몇 살에 들어가셨나요, 선생님? 구술자 : 그때가 뭐 일곱 살인가,, 뭐 그때 들어가니 일곱 살이죠. 면담자 : 아, 일곱 살 그때 학교를 들어가셨구나. 구술자 : 모르겠어요, 시골에 내려가서 다시 학교를 들어간 거는 4학년으로 들어가죠, 5학년으로 바로 들어간 것 같애요. 그때 뭐 학교 체제가 뭐 있나요, 가서 내가 몇 학년 다녔다 그러면 그대로 입학 시켜주는 때죠. 면담자 : 그 국민 학교 다녔을 때 좀 기억나시는 게 있나요? 뭐 그때 인제 해방 이후에 물론 인제 일제식 교육이 좀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그래도 해방 이후, 해방 전 교육과 이후 교육은 굉장히 좀 다를 것 같은데, 그, 주로 뭐 4학년 때까지 학교 생활, 국민 학교 때 주로 어떤 걸 좀 이렇게 배우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지금 그때는 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 할어버지가, 뭐냐면 외사촌하고 한문을, 천자문을 가르쳤어요. 그걸 가리키다가 들어가니깐 인제 부모들은 천자문만 떼면 다 공부, 학교 들어가도 공부 저절로 될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를 않았어요. 거길 들어가니깐 거기 뭐 벌써 새로운 교육 체계랑이 다르잖아요, 음악도 해야 되고 미술도 해요, 체육도 해야되고 뭐 구구단도 외우잖아요. 아주 난 지금도 악몽인 게, 아주 천자문을 달달 외웠는데 막상 학교에 들어가니까 그 신식 교육이라 그러잖아요, 그게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생, 생각나요. 그래가지고 그냥 공부, 공부도 못했거니와 그 다음에 학교 간다고 하면 아침에 설사부터 나오고 그랬어요. 근데 6.25라 하는 것이, 전쟁이라 하는 것이, 나에게 아주 굉장히 큰 충격을 줬어요. 그래가지고 시골에 내려가니깐, 시골에 내려가니깐 아무래도 환경이 시골학교가 서울하고 떨어져요. 서울에선 꼴찌했는데 거기 가니깐 1등, 2등을 하더라구요. 어떤 면에선 거기 가서 1, 2등을 한게, 내가 뭐냐면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고, 그건 확실해요. 그러니까 도리어 공부를 좀 더 못하는 친구들 하고 하니까 더 자신감이 생겨가지고 그 다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지금까지 학문 해오는데 한번도 자신감은 내가 생각할 때는, 전쟁이라는 게 없었으면 아마 생기지 못했을 거예요. 네. 큰 충격이죠. 그때 뭐 그, 피난 내려갈 때 전부 기차 위에, 우리가 12월 10일에 서울을 떠났는데, 12월 10일에 그때 벌써 눈비가 막 내리는 거예요. 눈비가 내리는데 생각해보세요, 밑에는 기차, 그, 열차 안에 전부 탄약을 다 실었다고요, 대포알, 탄약. 싣고 사람은 그 꼭대기에 타는 거예요. 꼭대기 타고, 12월 엄동설한에 눈비가 내리는데 이불을 뒤집어쓰는데 이불이 다 젖잖아요.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데 9일이 걸렸어요. 9일, 아흐레가.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정말 누가 상상도 못할 모진 경험들이죠. 그래서 아흘 동안 밥을 못먹으니, 기차 우에서 어떻게 밥을 해먹어요? 가족들이 내려가서, 대전 같은 데는 오래 머무니까 밥하다가는 기차가 떠나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가족들이 그대로 생이별하는 거죠. 예. 면담자 : 그, 한국전쟁이, 6.25가 일어나고 한 12월까지는 일단 서울에 있었던 거죠? 구술자 : 서울에 있었죠, 네. 면담자 : 뭐 인민군도 내려와서 서울을... 구술자 : 같이 있었죠, 3개월간 꼬박 같이 있었죠. 면담자 : 뭐 또 그렇게 좀 했는데 그때 좀 기억 남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구술자 : 기억나는 거 그거야 많죠. 일단은 동네, 동네 사람들이 딱 좌우로 갈라지는 것. 그건 뭐 그냥 목사들, 목사가 있었는데 목사가, 목사 부인은 인제 좌익이 되고 목사는 그대로 우익이 되고 이렇게 갈라지드라고요. 동네가 완전히 좌우익으로 갈라져요. 고 다음에 학교에 가니까, 6월 28일에 가니깐 교감선생은, 교감선생님은 완전히 좌익이에요. 우리 불러모아놓고는 “아침은 빛나라”는 인민국 국가하고 그 다음에 김일성 장군 노래하고 그걸 가리키는 거죠. 지금도 머리 속에 가사하고 곡조가 완전히 다 남아 있는 건 그 두곡뿐이에요. 예. 그리고 인제 나중에, 나중에 인제 최근에 와서 우리 담임선생님을 찾았어요. 몰랐죠, 어떻게 지냈는가. 벌써 그때 인제 그, 국방군이죠 그때, 군대에 입대해가지고 뭐 대령 까지 되었다가 양양에 가가지고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드라고요. 그만큼 그니까 그 당시에 학교고 어디고 간에 다 이렇게 갈라졌고요. 그 다음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바로 고 안산 넘어 가면 서대문 형무소잖아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문이 열렸단 말이에요, 문이 열리니까 그 죄수들이 옷을 입고는 그 산 위로 하얗게 기어 올라가는 걸 봤어요. 죄인들이 탈출해갖고 말이죠. 정치범들이겠죠, 주로 그러니깐. 그러니깐 그 감옥 문이 열리니깐 죄수들이 막 산 위로 이렇게 도망쳐 올라가는 건지, 탈출하는 건지 그런 게 눈에 너무 선하구요. 그리고 또 우리 인민군하고 뭐 같이 3개월을 같이 살았으니까. 역시 뭐냐며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면 결국은, 우리가 바깥에서 뭐 공산당, 인민군 얘기하면 뿔 달린 것 같지만 그렇게 같이 지나고 나면 그 사람들도 밤에 그냥 밀, 밀 같은 호밀이죠, 그걸 한가마 갖다 우리 먹으라고 주면서 그럼 우리는 인민군들 옷 같은 거 우리가 빨아주고 뭐 그렇게 상당히 서로, 서로 협조하면서 살았던 기억이 나고요. 면담자 : 부모님은 좀 어떤, 사상적으로 이념적으로 뭐 이렇게 좀 어디 쪽에 속하셨나요? 구술자 : 우리 부모들 같은 경우는 일단은 뭐냐면, 그렇게 만주에 올라가놓으면 정식, 제도적인 교육을 받을 기관이 없어요. 혼자 전부 뭐 자기들이 자습을 해가지고 그렇게 글을 터득하는 거 외에는 공부를 그렇게 교육적으로 제도적으로 할 수는 없어요. 근데 우리 아버님이 언어 재능이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애요. 예, 그래서 중국말을 그렇게 잘했어요. 나중에 뭐 중국 대사관에서 중국말, 우리말 다 할 수 있는 사람 그때 드물었으니까, 중국 대사관에서 와서 일하라고. 우리는 다 가라고 얼마나 좋냐고. 자기는 이런 이 일제시대 겪으면서, 6.25 겪으면서 전부 이게, 이게 어떤 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우리 부모세대들은 관, 관에 대한 불신이 있어요. 관에 들어갔다가는 불행해진다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런, 그런 관성이 있었던 것 같애요. 그런 일체 뭐 우리 아버님은 그 당시에 저기 호남에 가서 우리 고모부와 같이, 호남에서 쌀을 수백 가마 해가지고 열차로 싣고 올라와서 인제 서울에서 그거 팔고. 근데 행인지 불행인지 6.25사변 인제 호남에 내려갔다가, 쌀사러 내려갔다가 전쟁이 터진 거예요. 올라오질 못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죽은 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아마 집에 있었더라면 아마 국군에 끌려갔던지 인민군에 끌려갔던지 아마 죽었겠죠. 그니까 쌀 사러 그 김제 그쪽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지 못하고 6.25가 다 끝난 다음에 서로 만났다고요. 면담자 : 아, 그래요, 그러면 피난을 갔을 때도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만... 구술자 : 그렇죠, 우리 어머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만 살았죠. 그러고 우리 할머니는 외동아들이란 말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그니깐 뭐 폭격이 떨어지고 대포가 비행기가 왔다갔다하고 그러니까 백 퍼센트 아들이 죽은 줄 알았죠. 전부다. 그, 그 외지에 나와 있는 아들이 어디에 끌려가든지 끌려갔을거라 생각할 꺼 아니에요 그러니깐. 다 죽은 줄 알았다고요. 근데 희한하게 나중에 알고 들으니깐 인민군이 그쪽 지역엔 들어가지 못했어요. 전라도엔 많이 못 들어갔어요, 호남은. 그쪽 지역에 살아계셨던 거였다고, 보니깐. 우린 죽은지도 모르고, 우리도 인제 만주 들어가기 전에 그 고향이 울진이라는데, 강원도 울진이라는 데에 거길 가니깐 아버지도 거기 와 있고 우리도 글로 가서 만난 거예요. 도대체 이런, 이런 우연이...간발. 우리가 도착하니까 그 다음날 아버님이 서울에 우리 집을 찾아올라고 떠날, 떠날라고 할 참이었어요. 하루 전날 우리가 도착했기 때문에 만난 거예요. 그것도 웬만했으면 길이 또 어긋나가지구선 아버지는 서울, 우리 찾아 올라가고 그럼 또 우리가 어떻게 만나요? 올라가는 도중에 아마 그때 전쟁이 한창중이니까 어디든지 끌려가서 죽었겠죠. 면담자 : 그럼 그때 피난을 가셨던 곳이 대구입니까? 대구로 가셨나요? 구술자 : 아니요, 우리는 만주 들어가기 전에 살던 울진이라고, 울진. 면담자 : 그 피난을 북으로 가신 건가요? 남으로 내려오신 게 아니고요? 구술자 : 강원도 울진이라는 데가 어디냐면 삼척 밑에. 그니까 인제 울진, 울진. 포항 가면 영덕 하고 울진, 울진이라는 데 있어요, 삼척 밑에. 거기가 원래 우리 할아버지가 살던 고향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사륙신 난 때 피해가지고 우리 선조의 선조들이 피난을 가서 살던 곳이에요. 왕피리라는 데 거기도 지금 전기가 안 들어가요. 버스도 없고. 거길 가서 만난 거예요. 6.25때. 서로 그렇게 헤어졌는데 아버님은 거기서 만난 거예요. 면담자 : 그럼 울진에 계속 계셨나요? 아님 다른 쪽으로 또 옮기셔서 피난 하셨나요? 구술자 : 아니에요, 그러니까 거기 살다가 나는 인제 울진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오고 그 다음에 서울로 대학 올라오면서부터 그 다음부터는 그만 나는 울진 그 고향하고는 완전히 하직한거죠. 하직하고 서울 살다가 그 다음에 미국 오게 되고. 이렇게 왔다갔다하니까 결국은 나 같은 경우는 특별히 어디가 딱 꼬집어가지고 고향이 어디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요. 면담자 : 그럼 울진에서 초등학교 5학년부터 다시 다니시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울진에서 다 다니신 건가요? 구술자 : 다 다니고, 예. 면담자 : 거기는 뭐 한국 6.25 당시 그렇게 크게 피해를 입거나 하진 않았나요? 구술자 : 아니요, 피해를 입은 게 아니라 거기 울진, 울진 삼척 공비사태라고 해가지고 그쪽이 그냥 아주 오지고 외진 데에요. 태백산맥 있고 바로 바다잖아요. 간첩들이 와서 숨기가 쉬운 거예요. 나도 울진 내려가니깐 거기 가니깐 우리 외가 집들은, 외가 집들은, 외삼촌뻘 되는 분들은 거의가 다가 이, 좌익으로,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가니까 그만 국군이 다시 들어오니 우리 외숙모들만 살아남았고, 살고 있고 그러니 남편이 없이 혼자들 살고 있는 과부들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대부분이 그니깐 지금으로 말하면 부역이죠, 부역. 부역하다가 다들 그, 인민군이 후퇴하니깐 따라서 어딜 갔는데 그동안 영원히 집으로 못 돌아오고 생사를 모르죠. 다 죽었죠, 뭐 어떻게 살아있겠어요. 그리 나간 사람들이. 면담자 : 그럼 선생님 중학교는 그럼 어디 다니셨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그,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 라는데 매화 중학교. 매화. 여기 쭉, 그러니까 7번 국도타고 올라가다 보면 그게, 인제 동해안에는 국도가 하나뿐이에요, 7번. 거기 올라가다보면 영해, 그 다음에 후포, 기승, 평회, 그리 나와 보니까 매화리라는 데가 나와요. 매화, 우리꽃 매화꽃 있잖아요. 바로 그기가 뭐냐면 그, 그 요번에 내가 일본 가서 알았는데 축구 선수 정대세 있잖아요, 정대세가 우리하고, 우리 마을하고 같은 마을에서 그, 일본 갔더라고 보니깐. 내가 인제 그, 나고야에서 강연을 하니까 정대세 이모가 거길 온 거예요. 날보고 자기 고향 말씨하고 같다고 그래? 아, 그래 어디냐니깐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웃음) 아 그래서 나중에 그러드라고요. 자기가 정대세 이모라고. 면담자 : 그, 피난을 울진으로 가셔서 바로 또 거기에서 학교로 바로 그냥 오학년으로 들어가셨나요, 아니면 몇 년 지난 후에 가셨나요? 구술자 : 바로 갔죠. 면담자 : 그럼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에 입학했던 시기가 53년 정도겠네요. 구술자 : 55년도가 되나? 어떻게 되나? 54, 54년에 중학교. 고등학교 얘기하는 거예요? 면접자: 중학교요. 구술자: 중학교는 54년에서, 55년에서 58년까지 다녔는가보다, 가만 있어봐. 내가 60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60년도. 그리고 대학교 바로 들어갔으니까. 그니까 어떻게 되요, 3년씩 거슬러 올라가보세요. 그럼 58년에 중학교 면접자: 54년에 중학교에 구술자: 들어가게 되는 거죠. 면접자: 입학을 하셨구요. 구술자: 그다음에 이제 하여튼 대학교에 들어간 게 1960년도니깐. 고게 거기서부터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제대로 갔거든요. 3년씩 빼 들어가면 뭐 어떻게 될 거야. 면접자: 54년도에 중학교 입학하셨고 57년도에 고등학교를 입학하신 거네요. 구술자: 57, 58, 59 그래 되겠네요, 맞아요, 맞아요. 그래 되겠어. 그래야 60년도에 대학을 가죠. 면접자: 고등학교는 이름이 어떻게 됐나요? 구술자 : 후포. 면담자 : 후포 고등학교요? 이것도 울진에 있는? 구술자 : 울진이죠, 울진 젤 남단에 있죠. 면담자 : 혹시 이 중 고등학교 시절에 쫌 기억이 좀 기억에 남으시는 것이 있나요? 정치적으로 봤을 때는 인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반공 교육들이 쫌 강화되는 시점이었었고 쫌 약간 정치적으로도 불안하기도 하고 좀 그런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 그건 일단은 뭐냐하며는 그, 그 당시에는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시골에서 전무한 상태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깐 이 중앙정부에서 솔직히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때는요. 더군다나 뭐 중 고등학생, 중 고등학교 때, 이 어른들도. 이 뭐 라디오라는 게 한 집에 하나, 한 마을에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말까 했잖아요. 그러고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안 들어왔어요. 그러니깐 일단 이런 사회의식이라든지 이런 게 가질 여유가 없었고 그러니까는 그 당시 맨손으로 이, 한 몇 십 년 만에 고향이라고 찾아가니깐 생각해보세요, 춥고 배고프다는 것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어요. 너무 춥고 너무 배고팠어요, 그 당시. 면담자 : 대학교는 서울로 다시 오라가신건가요? 구술자 : 서울로 온 거죠. 면담자 : 어디로 입학을 하셨나요? 구술자 : 서울 연대. 면담자 : 과는 혹시 구술자 : 신학과 그때 시골에서 뭐 나오고 그때 연변 들어갈 때 내가 그, 이, 그 전교에서 이거 5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 입학시험 쳐가지고 5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 등록금 다 면제해주고 고 다음에 뭐 삼성 물산에서 교복까지 줬어요, 그것도 그렇게 내가 그 시험, 뭐 그 촌놈이 들어가서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기 때문에 등록금도 면제당하고 교복도 입은 거지. 아마 내가 그렇게 못 됐더라면 입학도, 학교도 들어가지도 못할거예요. 그때 시골에서 대학에 보낸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고 다음에 아버지 어머니들은 날 보고 강릉사범학교 가가지고 빨리, 고땐 고등학교 졸업해도 초등학교 선생 하니까. 전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범학교 가는 게 제일 부모들의 꿈이었어요. 사범학교 가면 금방 경제 문제가 해결이 되잖아요, 일단. 예. 지금 생각해도 그게 우리 부모님들이나 형제들한테 상당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내가 만약에 그때 초등학교 선생이 됐더라면 부모님이나 형제들은 고생을 좀 덜 했을텐데. 면담자 : 예. 공부를 꽤, 중 고등학교 다닐 때 잘 하셨던 것 같습니다. 연대 신학과. 구술자 : 그때 5등 안에 들었어요, 그때 뭐 신문에도 나고 그랬죠. 근데 뭐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들어갈 때 등록금 다 면제당하고 뭐 일 년 동안은 면제당하지만 그 다음부터 고달픈 생활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시골에서 돈 한 푼 안보내주니 계속 그냥, 계속 가정교사죠. 가정교사 그때 얼마 준지 아세요? 만 오천 원 줬어요, 한 달에. 만 오천 원 근데 삼십 원 가지고, 하루에 삼십 원씩, 한 끼 삼십 원씩 배당해. 그때 그 식빵 한줄 사다놓고 그거 아침에 두, 빵 두조각 씩 먹고 이렇게 나눠 먹어가면서 공부 한 거예요. 그거 그건 춥고 배고픈 거 그거 지금 그건 지나간 얘기니까 말로 이렇게 표현하지. 면담자 : 60년대 당시에 만 오천 원이면 지금 화폐가치로는 어느 정도나 되나요? 구술자 : 지금 어우 글쎄요, 그때 뭐 연탄 한 장에 15원, 15월 할 때니까. 연탄 한 장에. 지금 백 오십 만원 될까? 면담자 : 그렇게 넉넉하거나 많은 건 아니었겠네요. 구술자 : 넉넉한 건 뭐, 이상하게 그거, 그 입주한, 입주해서 가정교사 하는 데도 그게 애들 꼴찌, 그냥 60명 가운데 56명, 56번째 되는 애들도 내가 가르쳐 가지구서 뭐 서울에 명문 고등학교 다 입학 시켰거든요. 그때 부모들이 그렇게 인색하더라구요. 그래가지고는 먹는 거 외에는 저한테 돈을 더 안 준 것 같애요. 그러고는 그냥, 입주해 있으니까, 내가 공부를 못하니까 나와서 있으니까 가서 결국은 고 정도 돈 받아가지고서 식빵 사가지고 나눠먹기 바쁘죠. 그니까 뭐 겨울에 방에 추울 때는 연탄불을 뗄 수가 있나 뭐 제일 그냥 막 힘든 게 그때는 뭐 이부자리가 뭐가 있어요, 그냥 방바닥이 완전히 그냥 얼음 덩어리죠.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물, 그 떠논 물이 꽁꽁 얼 때 아니에요. 그때 뭐 난방 시설도 안 되어 있고 이러니까 말이야, 막 춥고 배고픈 거. 면담자 : 그때 근데 선생님 신학과를 들어가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지금 어찌 보면 선생님 사상, 철학 관련된 그런 연구를 계속적으로 하고 계신데... 구술자 :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요, 중요한 건데, 내가 만약 지금 같이 경제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렇게 이 사회가 풍요하고 그랬더라면 안 그랬을 거예요. 희한한 것은, 보세요. 어릴 때 인제, 이게 일제시대, 고 다음에 6.25, 고 다음에 와가지고 춥고 배고픈 것, 이런 것이 도리어 역설적으로 말이에요,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인간이 자기 인간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고민하게 만들고 신이라는 게 뭔가, 이런 거에, 철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실존에 대해 이런 걸 고민하게 되요, 희한하게. 만약에 지금 같으면 차라리 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는 이런 전공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깐. 뭐 의사가 되던지 뭐 선생이 되든지, 뭐 상대를 가던지, 이런 거 해야 되, 법대를 가든지 해야 되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깐 부모님들은 너가 충분히 왜 그런 학과를 갈 수가 있는데 집안도 지금 이렇고 너 형이, 장남이 어떻게 이렇게 돈도 안 되는데 과를 택하냐, 이거예요. 그니깐 집안 문중에서는 난리가 난 거죠. 문중에서 이제 일체 재정적으로 도와주지 못하고 다 끊어버리고. 그렇지만 난 지금 생각해도 이게 제일 내가 잘 했다고 선택 되는 거야, 결론적으로 생각할 때. 지금에서 생각할 때 인문과학이죠, 인문과학 가운데서도 그때는 내가 그때 절실하게 그, 고민하는 그기에 기준하여 난 전공을 선택한 거예요. 물론 들어가 가지고 거기서 내가 만족한 건 아니지만 뭐 철학이나 뭐 이런 신학이나 역사나 문학이나 했지. 부모님, 부모님들이 아무리 강요한다고 해도 난 의사나 상대나 이런, 또 심지어는 선생이나 이런 거는 안 되었을 거예요. 그건 그러니깐 어, 이, 예. 하튼 끝내는 내가 내 이, 적성에 맞는 것, 내가 지금 아주 내 속에서 진정으로 뭘 갈구하고 있는가, 그 기준에 의해서 전공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그니깐 그 이후에 형제들이나 부모님들한테 얼마나 많은 가족적인 피해를 줬겠어요. 지금, 지금 같으면 우리 부모님들 살아계실 때 용돈이라도 많이 드리고 생활비도 보태 쓸 텐데 이, 지금 내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거는요, 부모님들 다 돌아가신 후에야 겨우 가능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예, 좀 그게 늘, 늘 그냥 그게 아쉬움으로 남고 예. 참 후회되는 것도 있고. 부모님에게 늘 그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 정도. 뭐 나는 전공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을 바꿔본 적이 없어요. 바꿔본 건, 바꿔보고, 바꿨다면 인제, 신학을 인제, 그 하다보니까 이런 사대주의, 외서 의존적 사대주의 이게 인제 이게 인제, 그걸 내가 기독교가 반민족적 행위하고 반문화적 행동하고, 불상 때려 부수고 뭐 지금 와가지구는 솔직히 말해서 기독교는 거의 포기한 상태죠, 교회도 안 다니죠. 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처음에 갈구하던 그게 없어진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이러한 그런 제도적인 뭐 기독교 교회는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보면 되겠구요. 지금은 나는 나의, 나의 종교와 이념은 민족이에요, 민족. 그거 민족 그거 밖에 남은 게 없어요. 그게 나의 종교에요. 그게 인제 5·18까지 연결되는 거라고 볼 수 있겠죠. 면담자 : 그 60년이면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이 하나 좀 일어나지 않습니까? 구술자 : 들어가자마자 바로 4.19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면담자 : 네 4.19가 일어났는데 그때 뭐 학내 분위기라는 게 있었나요? 4.19 혁명 당시에 뭐 같이 이렇게 움직임이라든지, 뭐 학생 운동 뭐 그런 거라든지요? 구술자 : 그러니까 4.19 일어나던 해가 일학년이잖아요. 일학년인데. 연대가 채플이 있다구요, 채플. 예배 시간이 있다구요. 11시에 예배를 봐요. 그러니까 4.19, 4.19 날 딴 대학들은 벌써 시내 벌써 다 나왔을 때 연대는 아직도 그 시간에 예배가 안 끝났기 때문에 채플을 보고 있은 거예요, 예배는. 11시에 예배를 끝나고 나오니까 벌써 시가지는 온통 그냥 발 틈, 딛을 데가 없을 정도로 학생들이, 고등학생들 막 대학생들 쫙 다 깔린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제 연대가 뭐냐면 서대문 고개를 넘어서 아현고가를 지나가지고서 어디까지 갔느냐면은 지금 그 경복궁있죠, 경복궁 들어가는 입구에 내가 앉아있었어요. 바로 거기서 분수대 있는 데까지 한 몇 메다 될까요? 한 500메다 될까? 그게, 여기 지금, 여기 지금, 여기 경복궁이 있으면 경복궁 앞으로 길이 이렇게 나와 있잖아요, 서대문 쪽으로. 바로 고 옆으로 인제 청와대로, 그땐 경무대라 그랬죠, 들어가는 길이 있잖아요. 바로 고 코너에 내가 앉아있었어요, 그러니까. 벌써 그 시간에 벌써 총 맞아 가지고는 부상당한 사람들 죽은 사람들이 막 실어 나르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우리는 그, 그 앞에 더 이상은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게 아마 그러니까 채플 예배 때문에 일찍 나온 고대나 대성고등학교 이런 출신들은 그 앞에까지 간 거죠. 그 앞에까지 간 사람들이 희생들을 많이 당했어요. 연대가 그때 비교적, 한 사람 밖에, 채정, 최정훈 사학과 출신 한 사람밖에 안 죽었잖아요. 그 이유가 채플 때문에 늦게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면담자 : 선생님은 끝까지 4.19 혁명 당시에 4.19 관련 운동을 좀 참여를 하셨었나요? 구술자 : 아니죠, 우리는 다 선배들이 다 주동했지, 우리는 일학년이니까 피동적으로 따라가면서 했고. 그 다음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 이승만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한지는 몰랐어요, 솔직히. 그러니까 역사라는 게 알고 의거에 참가할 수도 있지만, 거의 피동적으로 참가를 했지만 나중에 지나고 나니깐 인제 그 참가했다는 것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러니깐.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의식을 가지고 참가할 수도 있지만 그 이후에 의식을 갖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깐. 나 같은 경우는 일단은 시골에서 올라와서 올라오기 전까지는 정보의 매체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이승만의 그 건국에 5.4 선거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서 단독 정부, 단독 정부 세우면서 결국은 6.25 사변, 6.25전쟁까지 오게 한 이런 것들에 대한 이런 잘못은 지금 와가지고 우리가 공부를 해가지고 이 놈이 진짜 나쁜 놈이구나. 예, 점점점 그 이승만 정권의 그런 악랄한 나쁜 짓 한 거 이게 나중에 와서 반추해서 알게 됐지 솔직히 말해서 4.19 나던 해에 내가 4.19 현장에 참여했지만 내가 그때 뭘 다 알고 했다고는 절대 볼 수 없어요. 그리고는 인제 그 다음, 그 다음 해 바로 인제 5. 16 쿠테타가 났잖아요, 5.16 쿠테타가 나고 고 다음에 진짜로 인제 저항감, 이 저항의식이 생긴 거는요, 이 군대에 들어가서 생겼어요, 군대. 면담자 : 군 입대는 언제 하셨나요? 구술자 : 군대는 내가 68년에 들어갔죠, 스물여덟에 들어갔지. 면담자 : 아 대학을 졸업하시고 구술자 :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면담자 : 아, 대학원까지 졸업하시고. 구술자 : 졸업하고 스물여덟 살에 사병으로 간 거야. 면담자 : 어디서 근무 하셨나요? 구술자 : 그, 철원이라고 최전방에 있죠, 제일 최전방. 면담자 : 군대에서 그런 생각을 좀 갖게 된 어떤... 구술자 : 우선 뭐냐 하면 그 군대에 들어가니깐 이 군대 안에 이 군 사회와 군 장교들이, 내가 공병대에 있었는데 말이야, 공병대. 한 마디로 해서 물자가 막 나오잖아요, 자재들이 나오면 공사는 설렁설렁 하는 척 하면서 그거를 기름이고 피복이고 양복이고 다 빼돌리는 거예요. 다 해먹는 거예요, 군인 놈, 장교들이. 군인, 야, 이 군인 사회가 정말 이렇게 썩었구나. 그러니까 결국은 이 군인이, 군인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예. 그게 인제 내가 인제 그게 군대, 내가 71년도에 제대를 했으니까 삼선개헌이 그때 있었잖아요. 그때, 그때. 삼선 개헌 있을 때 그때 뭐냐면 그, 이, 군 안에서 내가 삼선 개헌 반대했어요, 반대 운동을 했어요. 면담자 : 군 안에서요? 구술자 : 구술자 : 군 안에서요. 그래가지고 뭐 내가 공병단이었는데 공병단 단장이 그냥 나까지, 나한테까지 찾아와가지고는 반대하는 이유가 뭐냐고, 한번 얘기를 해보자고. 내가 대학원까지 나왔으니깐 뭐 예를 들어서 그런 거 하며는 그대로 잡아넣었을 거예요. 근데 아무래도 내가 대학원까지 나오고 나이가 들고 이러니까 그 예우는 해주더라구요.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 좀 해보자고. (웃음) 면담자 : 혼자 그것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동료들하고... 동료들이 당연히 있죠, 그게 면담자 : 이걸, 이게 군대 안에서 그런, 반정부, 어찌보면 반정부 활동인데 그걸 한다는게 그리 쉬운 결정은, 마음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요. 구술자 : 그거는 인제 주로 뭐냐믄 교회라는 데에 다른 부대에 있는 부대원들끼리 모일 수 있는 장소잖아요. 그니깐 그, 이, 주로 그런 비공식적인 모임을, 그렇다해도 그것도 이거 내, 엄격한 의미에서 내 개인적으로 군대에 있으면서 이 군사 정부에 대한 저항의식이 생긴 거 이외에 군 부대 안에서 무슨 조직적으로 그렇게 활동한다는 거는 불가능해요. 그치마는 아주 확고하게, 철저하게 그때부터 이, 무장이 됐던 거 같애요. 면담자 : 그런 활동들로 인해서 좀 피해를 받으신 거는 없었나요? 무슨 영창을 간다거나 아니면 군기교육대에 보내졌거나 그런 뭐는 없었습니까? 구술자 : 어, 그때 최전방이 되노니까 북에서 말이죠, 삐리가 막 날아와요. 삐리가 마당에 하얗게 떨어진다구요. 그럼 김일성 장군노래가 인제, 악보 가사 까지 다 있는 게 날아온다고요. 그걸 인제 가지고 교회에 가니까 오르간, 품금이라고 그렇죠. 거기다 이제 오르간을 치다, 풍금을 치다가 그게 밑에 보안대에서 소리가 들린 거예요. 그래가지고 끌려가가지고 한번 조사를 받은 적이 있죠. 그, 인제 친구가 그때 군목이었는데 나를 변호해가지고 풀려났고 안 그랬으면 그때 아마 영창 한 번 갈 뻔 했던 기억이, 일은 거예요. 면담자 : 삼선개헌 반대 뭐 그걸로 인해서 뭐 그런 것은 없었나요? 공병단장하고 얘기하고 그냥 끝내... 무슨 얘기를 나누셨어요? 구술자 :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게 되죠. 요주의 인물이 되요, 요주의 인물이, 그, 이, 이, 되는데 인제 그게, 그게 뭐 군 안에서, 군 안에서 그걸 그렇게 내놓고 에, 뭐 조직적으로 할 필요가 없어요. 그 안에서 내가 활동해가지고 뭘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이 군 조직 사회에 이, 군대가 절대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안 된다고 하는, 그리고 이게 군은, 한국 군대라는 썩을 대로 썩은 조직이라는 게 말이죠, 그게 인제 그게 사회에 나오니까 이 박정희가 정북, 경북 고속도로 닦는다고 하면서 돈 해쳐먹는 거, 그 뭐야, 그 김형욱 회고록 보면 나오잖아요, 그게. 그게 장기영이랑 한국일보 사장 놈, 캐비넷을 여니까 그 속에 그냥 돈다발이 이렇게 나온다는. 그 돈이 뭔지 아세요? 경부 고속도로 닦는. 그 돈 갖다가 전부다 해쳐먹은 거예요. 지금 뭐 박정희가 무슨 국가 건설을 하고, 애국자? 천만의 말씀이에요. 만약 그놈들이 그때 외자들이 막 투자가 들어올 때 아니에요? 그걸 다 갖다가 전부 정말 국가를 위해 썼더라면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우리가 더 발전했을 거예요. 그때는 다 해먹어요, 군인 놈들이. 이후락부터 시작해서, 김종필부터 시작해서. 아 김종필 같은 놈은 그거 갖다가 전부 제주도 가가지고 귤 밭까지 사고 그랬잖아요. 박정희도 지금 그 당시 돈 빼돌린 거 예? 지금 스위스 은행에 얼마가 있는지도 몰라요, 지금.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박정희의 지금 그 당시에 외화 빼돌린 액수는 그, 뭐 영원히 그게 뭐 감춰,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니깐. 제일, 제일 독재를 하면서, 독재를 하면서, 그 당시 그 차관이 젤 많이 들어올 때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놈들이 그걸 갖다가 국가를 위해 쓴 놈들이에요? 그놈들이? 썼냐고요, 그놈들이. 전부 자기 부정 축재, 부정축재가 제일 많을 때가 유신 박정희 시대 때잖아요. 차라리 그 이후는 우리가 감시 기구도 생겨가지고 없은 거예요. 제일 많이 해먹은 놈들이에요, 박정희, 김종필, 이후락 그놈 군사정부 세력들. 구술자 : 면담자 : 71년도에 제대를 하시고 이때 그 이후는 어떤 활동들을 주로 하셨나요? 학교... 71년도에 제대를 하고는 이대로 간 거예요, 이화여대를. 예. 면담자 : 뭐 강사로 가셨나요? 구술자 : 그때는 전임강사로 들어간 거죠. 네. 그 들어가 가지구서 미국 올 때까지 이제 그 75년도까지 4년 반인가 있었죠, 거기서. 이 기간이 이제 이 기간이 나에게 있어서 아주 정말 중요한 기간이에요. 그 75년도에 나는 그냥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에 그냥, 그냥 벌써 전임강사로 들어갔으니까 그냥 있으면 그냥 그대로 그만 편하게 살 수 있고 교수로 올라갈 줄 알았는데 벌써 생각해보세요, 71년, 75년 사회라는 게 뭐냐 민청련 사건 난리고, 동아특위 사건 그때 그 다음에 인혁당 사태, 전부 이때 났잖아요. 그러니까 그, 그 당시에는 뭐냐, 그 당시에는 학생운동이 아카데미라고 하는 그룹 중심으로 됐어요,. 여러분들은 잘 모를 거야, 아카데미. 이 아카데미가 뭐냐, 흥사단 단체에요, 흥사단. 이 아카데미 학생들이 지금으로 말하면 NL의 원조에요. NL. 나도, 나도 지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때 인제 그 미군 철수, 미군 철수 주장하고 이, 남북 회담 주장하고 외세 반대, 이 투쟁하던 세력들이죠. 이게 여기에 내가 이대에 있을 때 아카데미 이 단체 지도 교수였어요. 바로 여기에 누가 있었냐면 고광순이라고 모르죠? 고광순이, 사회학과. 이형랑이, 그 다음에 유인태 국회의원 있잖아요. 이혜경이, 그 부인됐죠, 전부다. 이런 학생들이 결국은 뭐냐면 그, 75년도에 내가 그, 미국 올 때가 바로 월남전이 무너지면서 인혁당 사건이 막 있든 그 무렵이잖아요. 결국 뭐 이, 내가 그, 이대 총장 김옥길 총장한테 가가지고서, 내가 여기 좀 학교에 있으면서 여기 국내에서 좀 박사 학위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학교 있으면서. 그렇게 하니까. 딱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나는 김옥길이, 김동길 누나잖아요. 그래가지고 이 사람이 나하고 같은 편에 있는 줄 알았어요. 정 반대였어요. 그니까 내가 그 당시 이대 안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미운 오리새끼들, 미운 오리새끼였어요. 내놓고 학생들이 워낙 그냥 데모를 하니까 얘기를 못해도 이 뒤에서 조종하는 게 이게 다 나라고 지목을 해놓고 학생처장, 교무처장, 겉으로는 전부다 나를 위하는 줄 알았죠. 벌써 그러니까 에, 벌써, 그 당시에 기무사. 서대문 형무소, 그 다음에 중앙정보위 세 군데서 사찰을 해요, 그러니까.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요, 이 세 기관에서 다 나와서 문 앞에 기다리고 있어요, 내 방 문 앞에서. 그러다, 그러다간 뭐 그, 그 당시 학과장이 날 보고, 도저히 자기도 인제 보호해주지 못하겠다고 그리고 뭐 벌써 학교 당국에다 나를 짜르라고, 나를 짜르라고 그러고 안 그러면 자기들이 체포해버리겠다고 그렇게 압력을 넣으니 어떡해요. 그래가지고 내가 뭐 진퇴양난이죠. 그때 월드 카운슬러 처치라고 왕복 비행기 표, 다 해결해주고 그 다음에 등록금 다 주고, 그 다음에 포켓머니까지 주는, 아주 그러니까 외국으로 나올 수 있는 장학금 가운데는 제일 좋은 장학금이죠, 그 당시에는. 이렇게 좋은 장학금이 없어요. 왕복 비행기 표, 그 다음에 용돈까지 줬어요. 생활비 다 주고. 그거 인제 시험을 친 거예요. 그거 시험을 치니 오죽이나 많이 그거 응시했겠어요. 그때 인제 독일 쪽으로 최종고라고 하는, 최종고라고 하는, 지금 서울 법대교수죠. 그 사람이 되고 미국은 내가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미국을 온 거죠. 면담자 : 이민, 이민을 오신 게 아니고, 선생님 처음에는 인제... 구술자 : 나 유학을, 면담자 : 네 유학을 구술자 : 재원비자로 유학을 온 거예요. 그때 재원비자라 하면 미 국무성에서 초청하는 비자거던요. 이거는 그러니까 신원조회, 이거는 뭐냐 무조건 제일 그, 미 대사관에서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도 안 내줄 수 없는 비자에요, 이거는. 미, 미 국무성 초청으로 되어 있으니까, 미, 그러니까 나오게 된 거죠. 그리되니까 뭐 신원조회도 무사히 잘 걸리게 되고. 쪼끔 기다리고 있어요. 면담자 : 예 (잠시 중단) 그럼 그때 유학을 떠나오실 때가 몇 년도셨나요? 구술자 : 1975년이죠. 7월 10일에 왔나? 면담자 : 그때 오신 학교가 어디... 구술자 : 필립스, 필립스 유니버시티(Phillip's University)라고 오클라호마(Oklahoma)에 있는... 거기 와서 2년 공부하고 면담자 : 과, 전공은 어차피 철학? 신학? 구술자 : 철학으로 했죠. 종교 철학이죠. 면담자 : 필립스 유니버시티 구술자 : 그러다가, 그러다가 여기 1977년에 바로 클레몬트(Claremont)로 왔죠. 면담자 : 그러면 총 지금, 처음에 필립스 유니버시티에서 2년 공부를 하셨고 77년에 구술자 : 2년 공부했죠, 필립스에서 면담자 : 예. 77년도에 클레몬트로 구술자 : 클레몬트로 왔죠. 면담자 : 거기서는 뭘... 구술자 : 똑같은 전공이죠, 필로소피. 면담자 : 거기서도 2년 계셨나요? 몇 년? 구술자 : 아니죠, 박사과정이니까. 그거는 그래도 빨리 마친 폭이야. 바로 이 박사과정 논문 쓸 때 저가 인제 5·18을 맞이한 거예요. 80년도. 그때 내가 한창 박사학위 논문 쓰고 있을 때. 그래가지고 81년도에 졸업은 81년 1월에 했는 것 같애요. 77년 가을에 와가지고. 빨리 한 폭이에요, 그니까. 면담자 : 그때 선생님이 이렇게 오셨을 때는 뭐 지금처럼 한인 사회가 LA지역에서 많이 발달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유학생들이 또 많이, 요즘처럼 많지도... 구술자 : 많지도 않았고 그저 뭐, 그저 뭐 한 대학에 열 명 열댓 명 있을 때구요. 면담자 : 생활은 주로 어떻게 하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뭐, 우리, 거, 면담자 : 장학금이니까 구술자 : 아니에요. 지난번 내가 학부 다니는 동안 내가 그냥 뭐 가정교사 한 것도 있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어가지고 학점이 엉망진창이에요, 학점. 근데 박사과정 들어오니까 그게 성적이 나빠놓으니 장학금 하나도 받을 수 없어요. 무슨 말인 줄 알겠죠.(웃음) 그래서,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고생을 예, 정말 고생을 많이 했죠. 그 사람이 번 거 가지고 공부했죠. 면담자 : 아, 저는 아직 결혼을 안 하신 줄 알고 안 여쭤봤는데 결혼을 언제 하셨나요? 구술자 : 73년에 했죠, 73년 면담자 : 군... 73년에 서른... 구술자 : 세 살이죠, 서른 둘, 서른 세 살이죠. 73년에 했죠. 한국 나이로는 33살이죠, 그때가. 면담자 : 뭐 공부하다가 아는, 알게 된 분을 만난 건가요? 아니면 선? 구술자 : 그니까 내가 학교 가 있을 때니까 그때 학교에 있을 때 아니에요? 면담자 : 예, 이화여대. 구술자 : 그니까 뭐 거기서 만난 거죠. 면담자 : 연애결혼 하셨습니까? 구술자 : 뭐 그건 내가 아는, 또 위에 교수가 뭐 그 사모님이 소개도 하고 또 그분도 아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뭐 서로 그렇게 된 거죠. 면담자 : 그, 사모님께서 쫌 이렇게 고생을... 구술자 : 많이 했죠. 많이, 그때 우리 해외에 나올 때 돈을 160불 가지고 나왔어요. 정부에서 허용 하는 게 160불이었어요. 지금은 만 불 넘잖아요. 면담자 : 그러면 여기 와서도 한국사회에 대한 정치적 문제나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관심을 계속 가지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인제 이, 내가 공부한 대는 여기서 동쪽으로 한 45마일정도 떨어진 데이에요. 그니까 이게 LA 코리아 타운 하고는 약간 좀 멀리 떨어져 있죠. 떨어져 있으니까 비교적 공부하기에는 아주 좋은 분위기에요. 근데 UCLA는, UCLA나 USC 같은 경우는 이 코리아 타운하고 너무 가까워가지고 학생들이 정말 공부하는데 여러 가지 지장이 많아요. 거의 박사과정을 거의 못 끝내요. 인제 나는 그, 약간 저쪽으로 떨어진 데에 있어노니까 공부는 했는데, 요는 중요한건 뭐냐면 그게 내가 한국에서 벌써 박정희 유신시대 다 겪으면서 왔잖아요. 삼선 개헌, 유신시대 다 겪고. 그러다가 거의 뭐 쫓겨나다시피 해서 그땐 뭐, 내가 여기 오기 직전에는요, 거의가 피해 다니느라고 시간 다 보냈어요. 뭐 일산 송추, 이런 대로 교외선 타고, 잡으러 왔다 그러면 피해 다니는 거죠. 그래 하다가 그렇게 하다가 왔으니까 아무래도 여기 이제 반정부 운동하는 사람들하고, 제일 그 사람들하고 만나야 내가 얘기도 할 수 있고 서로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내가 참 이게 아주, 이 와이프는 죽도록 이 막노동하면서 일을 하는데 나는 박사학위 공부 하랴, 그것도 한 50마일 떨어진 LA까지 나와 가지고 운동 단체들하고 이, 바로 후, 데모죠, 활동대 하랴, 이게 그러니까 이게 그러니까 바로 인제 이 두 가지를 다, 두 가지를 다 해내는데 이게 어려움이 있었고요. 그 이제 정기열이나 한호석 같은 사람들, 다 나 같이 공부하러 왔다가 고만 이 운동권에 글로 그만 편중되는 바람에. 정기열이는 끝냈어요. 그만 대부분이 그만 이때, 두 개를 다 못하고 하나만, 하나만 한다는 건 고만 이 운동에 고만 빠져가지고 공부를 다 못 끝낸 사람들이 너무 많죠. 예. 우리는 지금 여기 통일 운동한다는 나이 든 사람들 가운데서 이 두 가지를 다 해내기가 여간 어려움이 말할 수 없어요. 면담자 : 당시에 LA에 그런 단체들이 좀 몇 개가 있었나요? 구술자 : 그게 인제 지금부터 중요한데 그 당시가 그 서울시장을 했던 김상돈씨가 있던 조국민주회복국민회의가 있어요. 김상돈. 조국 민주회복 국민회의. 김상돈이야, 서울 시장하던. 그 다음에 차상달. 그 다음에 인제 그 당시 신문으로는 신한민보라고 하는. 김운하가 발행하는 신한민보가 있었구요. 예, 일단은 뭐냐며는 나 같은 경우는 이, 이런 운동 단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어요. 속하진 않았는데 중요한건 뭔가 하면 인제 내가 여기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여기 지금 그, 그 당시 막, 막 이렇게 유학 온 대학생들이 있었어요. 그 대학생들이 한국 대학생 연합회, 미주 한국 대학생 연합회. 그게 바로 뭐냐면 학생들이 얼마나, 전부다 나이가 뭐 20대 말 뭐, 여기 인제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왔거나 고 다음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왔거나 그니까 그때는 1.5세대라던지 2세란 건 거의 찾아보기 없었어요. 거의가 다 그냥 한국에서 바로 온 친구들이죠. 이런 친구들이 그때 이, 내가 뭐냐하며는 그, 이, 이 학생들이 역사공부를 했어요. 그때 읽은 책이 뭐냐며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이 역사 공부하는 이 모임이 그땐 순수하게 뭐냐, 이 역사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었어요. 여기 인제 학생 가운데 대표적인 애가 인제 한광호, 그 다음 장태완이, 그 다음에 인제 박무영, 박대영. 이렇게 되는데 한 2년을 아마 순수하게 역사공부만 했을 거예요. 거의 뭐 거의 매주 모였죠. 나로서도 박사 공부하면서 그게 50마일 운전해 와서 학생들 지도하는 게 여간 출혈이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뭐냐면 바로 5·18을 맞은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5·18을, 5·18을 맞아 그때는 우리 역사 공부를 하면서 상당히 학생들이 인제 의식화 된 거예요, 그러니깐.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에서는 이게 인제 전두환 군인 놈들이 학생들이 갖다가 그렇게 학살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11가하고 벌몬(Vermont) 코너에 있는 그 적십자 병원을, 아마 이, 이 시간쯤 됐을 거다, 세시 반쯤, 네 시에 우리가 글로 다 몰려간 거예요. 왜 갔냐면 인제 헌혈하러 간다고. 그게 중요, 아주 중요해요. 면담자 : 선생님 그, 한국에서 광주에서 5월 18일 날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그런 것을 그런 사실을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셨나요? 구술자 : 한국일보죠, 아무래도. 그 당시 한국일보가 호외를 막 뿌렸어요. 그때는, 그 당시에는 한국일보하고 한국 일보하고, 신한민보하고 그 다음 미국언론들이 막 보도를 막 한 거죠. ABC, NBC, CBS. 미국 언론들이 그 당시 뭐 자기들이 촬영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보내줬죠, 그러니까. 뭐 군인들이 학생들이 학살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줬으니까. 면담자 : 주로 그, 약간 언론의 논조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 것들이 어떤 식이었나요?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쫌 이렇게 구술자 : 아니죠. 미국 언론들은 전혀 그렇게 보도하지 않았죠. 미국 언론들은. 근데 인제 한국에서 나온 주류 언론들은 그런 식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처음에는 그렇게 못했어요. 아직 전두환이가 아직 정권을 잡을지 안 잡을지도 모르고. 처음에는 이게 이, 이쪽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군인들이,, 이게 이 무모한 학살을 한다, 이런 식으로 나왔고 고 다음에 이런 종이에다가 막 그, 학살하는 장면들, 고 다음에 가장 충격적인 건 뭐냐면 죽은 시체를 싣고 막 시내를 돌아다니는 사진들이 막 나왔어요. 그게, 굉장히 그게 충격이 많이 됐죠. 호외가 발행됐어요, 호외가, 그 당시. 한국일보 호외가 막 나와 가지고서 코리아 타운에 나오면 수도 없이 뿌려지고 미국 주류 언론에서 이 보도를, 그 생생하게 보도를 해주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내가 겪은 광주항쟁이에요, 바로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예, 이 적십자 병원을 간 거예요. 적십자 병원을 가가지고 거기서 우리가 헌혈을 한다고 막 방송을 하니까 저기, 적십자 병원이 그래, 자기들 적십자 병원이 생긴 이래로 단위 시간에 이렇게 많은 헌혈을 한꺼번에 한 적이 없었다는 거야. 한 5백명이 한꺼번에 했어요. 하루 이틀 사이에. 막 줄을 서가지고 와서 헌혈을 했으니까 면담자 : 주로 한국인들 구술자 : 한국인들이죠, 물론. 한국인들. 그렇죠. 한국인이죠. 면담자 : 동포사회의 반응은 쫌 어땠나요? 구술자 : 그때는 굉장히 뭐 정말 이럴 수가 있는가? 누구를 막론하고 그러니깐 우리가 광주에 피가 모자란다, 그렇게 뉴스가 나가니깐 너도나도 막 주 와가지고 그때 뭐 그 당시 그, 왔다가서 적십자 병원만은 꼭 촬영을 해야 되요. 예, 그 줄, 복도, 저기 사람들이 행길가에까지 쭉 늘어서서 헌혈을 했죠. 그때 현혈이라는 게 굉장했어요, 굉장했어요. 그러고 인제 우리는 고만 거기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거기서 농성에 들어간 거죠. 적십자 병원이 거기가 공공기관인데, 공공기관인데 적십자 병원에서 우리한테 그냥 내줬어요. 자기들이 뭐 업무를 거의 마비되가 안 될 정도로 우리한테 모든 방을 다 비워줬어요. 그기 있으라고 말이죠. 자기들은, 자기들은 실적으로 볼 때 한꺼번에 많은 피를 모은 적이 없으니까. 요거는 인제 중요한 게 28일까지 우리가 거기 있었거든요. 면담자 : 몇일날 선생님은 그걸 항의 시위를 시작을 하셨습니까? 그렇지, 학생들하고 나는 학생들하고 같이 들어 가가지고 28일까지 거기에 면담자 : 그러니까 들어가신 날이 구술자 : 구술자 : 18일날 들어갔어요. 18일날 들어 가가지고서는 28일 날 까지 거기 있었던 거예요.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합니다. (tape 교체) 구술자 : 마침, 인제 뉴스에 막 나오기를, 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냐면 지금 그니깐 뭐 여기 시간으로, Dp. 바로 인제 공수부대가, 공수부대가 도청을 향해서 진격에 들어가고 있다, 막 뉴스가, 미국 뉴스가 나오는 거예요. 그니깐. 그니깐 광주나 그 다음에 서울에선 미처 몰랐겠죠. 그치만 미국 언론들이 공수부대가 지금 광주 도청을 향해가는 것을 텔레비로 막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28일날. 그러니 우리는 뭐 전부다 자다 일어나가지고는 미국 대통령, 뭐 상하의원들, 하원들 전부 인제 붙들고 전화를 하는 거예요. 좀 도와달라고. 만약에 미국에 여기서 만약에 스톱을 시키면 이 공수부대가 절대 못 들어갈꺼다. 도청에는 시민하고 학생들이 있는데 가면 무자비하게 학살, 다 죽지 않느냐, 좀 도와 달라 한 거죠. 나는 그때 누구한테 전화를 했냐 하면 그때 상원의원인 하야까와한테 전화를, 하야까와. 그 유명한 의미론이라 하는 책도 쓴 학자죠, 이 사람은. 일본인 상원의원. 이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이에요. 내가 전화한 대상은 바로 그 사람이었어요. 면담자 : 그 전부터 좀 알고 계셨나요? 구술자 : 아니죠, 뭐 무작정, 무작위로 막 전화한 거예요. 인제 이게 중요한 거예요. 뭐라 한줄 아세요? “We are still watching.” 무슨 말인 줄 알겠죠? “We are still watching”이에요, 뭐 우리는 그냥 정말 다급해가지고 도와 달라 너희들이 전화한통만 하면, 이 전두환 정부에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지금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죽지 않는다. “We are still watching이에요. 그런 사이에, 그런 사이에 공수부대는 쳐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이게, 이게 광주 항쟁을 경험한 사람하고 안 한 사람하고 달라지는 게 있어요. 우리가 광주 항쟁 이전까지는 우리가 민주 항쟁이라고 붙여야 되나요? 지금 공식 명칭이 어떻게 되요? 면담자 : 그 저희 5·18 민주 항쟁이라고 이렇게 표기는 하고요. 국가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합니다. 구술자 : 민주화운동이라고 하구요? 아 그때 우리가 적십자 병원에서 이 인제, 5월 28일 아침에 말이죠, 전화통을 붙들고. 그땐 휴대전화도 업었죠. 전화통을 붙들고 이렇게 막 미국 정부의 관료 각계에다 호소를 할 때, 호소할 때, 모든 반응은 한마디로 냉담인거예요, 미국 정부가. 그 이후부터 적어도 유신에서부터 광주 5·18까지 계속 지속적으로 투쟁해오다가 바로 이, 이런 걸 경험한 사람들은 그 다음부터는요, 그 다음부터는 머리를 꽝 치면서 깨달은 것이 있어요. 절대로 우리가 이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거, 절대로 외세는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이건 그러니까 체험해봐야 알아요. 나 같은, 내 개인 경험은요. 그 이전까지는 우리가 대통령에도 편지도 쓰고, 상원 의원들한테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뭐 이런 짓들을 했죠. 나 같은 경우는 그 이후부터는 절대 이것은 할 필요도 없고 백해무익한 거고. 지금 오늘 이때까지고 이런 걸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도 무슨 통일 문제, 뭐하면 미국 대통령 오바마 한테 편지 쓰고 가서 뭐 국회 상원 분과위원, 외교 분과 위원장 만나고 미국이 뭐 호소하면 미국 사람, 미국이 우리말 들어주고 해결할 것으로. 이게 아직도 5·18 이전의 의식구조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런, 인제 통일 운동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경험한 바로는,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이, 예, 반미라면 반미를 할까 고 다음에 미국에 대한, 미국에 대한 확실한 체험적인 확신이 생겼어요. 절대 그 다음부터는 미국에 뭐 전화하고, 미국정부에 전화하고 미국에 편지해가지고 하는 이런 것이 그걸로 끝났어요. 5월 28일날 아침으로 끝난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그런 짓 안 해요. 지금도 그런 거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뭔가 이 5·18 같은 경험을 체험으로 해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 적십자병원 그 안에서 한 10일 가까이 항의 시위를... 구술자 : 그렇죠, 열흘간은 꼬빡 거기서, 뭐 물 한 모금 안 먹고 계속 항의, 항의를 했죠. 면담자 : 주로 그때 선생님께서 좀 모임 지도를 했던 미주 한국 대학생 연합... 구술자 : 그렇죠, 저가 지도교수였으니깐요. 면담자 : 그쪽 분들하고 같이 하셨나요, 아니면 다른 데서도 또 동참을 해주셨나요? 구술자 : 아니에요, 그때는 들어간 사람들은 전부다 우리 대학생들 뿐이었구요. 국민회의, 조국민주회의 국민회의 멤버 가운데 누가 들어가 있었냐며는 그 김운하 사장이 그때 들어가 있었어요. 학생이 아닌 대도 인제 이게 중요한 건데, 이게 중요해요. 그 당시에 지금, 지금, 이거 LA오시면 양현성이라는 목사하고 인터뷰하도록 되어 있나요? 지금? 면담자 : 아니요, 지금 그분은 안 들어가 있습니다. 아마 그, 그게 구술자 : 그 사람이 안 들어가 있는 게 이상하네요. 하튼 지금 한국 국내외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연성이라는 목사가, 감리교 목사인데 하튼 LA에서 5·18은 자기가 다 주도했다, 자기가 주동자다 이런 얘기를 해요. 아마 양현성 목사란 사람이, 에, 이게 뭐 접촉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제일 뭐 그래가지고 뭐 한국 가서 노무현 정부때 뭐 상도 받고 그런 줄로 알아요., 우리가 인제 대학생들이 들어갔잖아요. 들어갔는데 국민회의 사람들 가운데 신한민보 김운하 사장이 들어오드라구요. 이 양현성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남동생 하나하고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들어오더라구요. 들어오더니 침대를 갖다 딱 깔더니 모포를 뒤집어쓰는 거예요. 열흘 동안을 딱 뒤집어쓰고는 물도 안 먹고 밥도 안 먹고 그냥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래서 우리는 보지도 못한, 듣지도 못한 사람이 들어 와가지구는. 그 여동생은 지금 덕성여대 교수고요, 그 다음에 남자 동생은 UCLA를 졸업하고 지금 건국대학교 교수가 됐어요. 중국사 공부해가지고서. 양현성 목사란 사람은 클레몬트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된 거죠. 근데 문제가 뭐가 생겼냐면 28일날 인제 적십자 병원을 나가야 되겠는데 또 적십자 병원 측에서도 나가라고 그러고. 뒤집어쓰고 안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깐. 이게, 이게 문제가 된 거야. 행동 통일을 전혀 같이 해주지 않으면서 그러더니 결국은 뭐 끌려나오다시피 나왔죠. 나와 가지고는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그냥 5·18 운동의 주도자였다, LA 바닥에, 이런 말을 하고 돌아다녀요. 아마 그 기록물에도 그렇게, 그 사람이 여러 군데 활동하니까 그렇게 쓰여져 있을 거예요. 내가 아는 양현성 목서라는 사람 형제는, 바로 그거예요. 여동생은 양옥성이에요, 양옥성. 덕성여대 교육과 교수거던요. 그 다음에 인제, 인제 언론에 미국 주류 언론에 알려지니까 막 주류 언론에서 인터뷰 하러 온 거예요, ABC, NBC, CBS에서. 그 인터뷰도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 주류 언론에 그냥 우리가 농성하는 장면까지, 적십자 병원까지. 그때는 하여튼 5·18 그러면 미국에서는, 뭐 지금은 뭐냐며는, 통일운동 이런 게 동부가 중심이 돼있지만 그 당시에는 동부는 거의가 미미했어요, 이 서부 중심이었죠. 아무래도 김상돈이라고 하는 거물급이 있는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그런데 인제 다, 그런데 국민회의라 하는 단체들은 거의가 다 노인들이고 이 조직적으로 움직여가지고서 4, 50명이 적십자 병원에 몰려갈 수 있는 그런 인적 자원도 없었고 그런 동력도 없었어요. 근데 유일하게 인제 내가 인제 그 역사공부반이, 대학생들이 들어가게 된 거죠. 들어가 가지고 피를 받았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서 우리가 이 피를 광주에 보내겠다고 그때 적십자 총재가 누구냐면 이호였어요, 이호. 예. 그래가지고 적십자하고 우리하고 콘택(contact)을 했을거 아니에요. 우리가 피를 보내겠다. 피를 받아달라니까 그 이호 적십자 총재가 답이 온 게 뭔 줄 아세요? 우리는 피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이렇게 답이 온 거예요. 우리는 피가 충분히 있어서 받을 필요가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그렇게 많은 피를 수혈을 하고 하나도 못 보냈어요. 하나도 보내지 못했어요. 그, 전두환 정부가 그거 받아주겠어요? 생각해보세요. 하나도 못 보냈어요. 결국은. 결국은. 그러니까 어디, 여기, 그 미국에서 다 쓰여졌겠죠. 피가 그러니까 하나도 못 갔어요, 그때. 이호 였어요. 이호. 적십자 총재가. 내가 그때, 그때 안에 있으면서 그 큰 사건은 우리가 피를 모은 걸 보낼라고 그러는데 적십자 총재 이호가 우리는 피가 충분히 있으니까 필요 없다고 답이 온 거 하고 고 다음에 5월 28일날 아침에 카, 그때 카터 대통령이에요. 주류 정치인들한테 우리가 전화, 전화래봤자 15분, 20분밖에 안 했을꺼 아니에요,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그, 그 짧은 시간에 그 당시 전화료로 얼마가 나온 줄 아세요? 800불이 나왔어요. 800불이. 그 당시 전화 요금으로. 그런데도 병원 측에서 우리가 헌혈을 워낙 많이 해놓으니까 그 전화료를 차지(charge: 청구)를, 받지 않더라구요. 그니까,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이, 그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그냥 이, 전화를 도와달라고 말이죠,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완전 냉담. 인권대통령이라는 카터 대통령한테 받은, 우리가 대접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에, 우리가, 예. 절대 우리가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절대 외세는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이, 이거는 내가 광주에서 얻은 내 자신의 삶의 산 교훈이에요. 면담자 : 그때 선생님이 지도했던 학생들 뭐 그렇게 들어갔던, 같이 항의시위에 참여했던 인원은 대략몇 명 정도 됐었나요? 구술자 : 그때 그, 내가 아까 얘기한대로 3, 40명. 3, 40명 되고 면담자 : 그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인력까지요? 구술자 :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은 학생들 외에는 아까 김운하 사장이란 사람하고 면담자 : 두 세명. 구술자 : 근데 이제 그 학생 가운데서, 학생 가운데서 내가 아까 얘기한대로 한마디로 말해서 변절해가지고 완전히 우익으로 돈 놈도 있어요. 바로 이갑산이라는 놈이에요. 적으세요, 거기 이갑산. 이갑산. 이게 이기택이 조카인가 그래요. 이놈은 뭐냐면 한국 들어가 가지고 완전 깡보수가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깡보수가, 깡보수가 되어가지고 상지대 사건 났을 때 상지대 사건 났을 때 그기 가서 앞장서가지고 강만길 총장 막 퇴진운동 한 놈이 바로 이거예요. 그렇게, 이게 인제 내가 데리고 간 대학생놈, 그놈은 대학생도 아니고서, 그냥 여기와가지고 자기 와이프하고 같이 청소하고 돌아다니면서 대학생 그룹에 섞여있던 놈인데 이게 그러니깐 인제 거기 들어갔던 멤버 가운데 이 김운하라는 신한민보 사장이 이갑산이가 변절한 걸 가지고. 그걸 가지고 나한테 막 매도를 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이런, 극보수, 이런 프락치 같은 놈들을 내가 데리고 들어갔다, 그 책임을 나한테 돌리고 너도 인제 그럼 프락치다, 이런 식으로 몰고 들어간 거예요. 바로 이갑산이가 그런 역할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그러니깐 학생들 가운데서 바로 인제 그러니깐 완전 우익으로 돈 녀석 가운데 하나가 이갑산이고 고 다음에 문제가 거기서 사실은 그 대학생 그룹의 회장과 주모자 노릇을 한 게 누구냐, 한광호에요, 한광호. 한광혼데. 한광호는 지금 말이죠, 그 당시 그 한국 나와 가지고서 결혼을 해가지고 여기와서 송이라는 딸까지 낳았어요. 딸까지 났는데 그 장인이 그 자기 사위가 여기서 반정부 활동을 한다는 걸 알고 그 장인이 육군사관학교 교관이었어요. 막 그대로 이혼을 시켜버렸어요. 완전히 이혼이 되어, 가정이 완전히 파탄된 거예요. 파탄되고는 지금 이 한광호는 완전히 그 이후에 그만 충격을 받아가지고 완전 장님이 됐어요. 내가 꼭 인터뷰를 시키고 싶은 친구가 한광호에요,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적십자 병원에 인제 자기 동료들을 다 끌고, 내가 물론 광호한테 다 모으라 해가지고 했지만 그 학생들 동원한 거는 한광호가 다 동원했거든요. 그래가지고 완전 가정이 파탄이 되었어요. 완전히 파탄되고. 그 딸 하나가 인제 뭐 공부를 잘했다고 해서 명문대학은 들어갔다고 그러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광호는 비참하게 되었어요. 아주. 고 다음에 이제 그게 장태완이라는 친구는 그 당시 LA CC에 다녔는데, 이 친구가 뭐냐면 리버사이드(UC Riverside) 교수가 됐어요. 교수 되가지고 지금은 무슨 뭐, 인종문제, 흑인문제 연구해가지구 뭐 미국 대학 교수가 됐거든요. 이 친구가 또 한국 나와서 돌아다니면서 이게 광주 팔아먹고 돌아다니는 놈이에요, 장태완이. 아마 그거 쪼금 여러분 보다 쪼금 위에 세대들은 다 알아요. 한국 나나가지고 자기가 무슨 LA 5·18은 전부 자기가 주도한 것처럼 떠들어 대는 친구가 이 장태완이라는 친구하고 바로 양형승이 두 친구에요. 진짜 그때 고생하고 주동자들은 전면에 전혀 안 나타나고 있어요. 이름도 안 내고 이어요, 그러니까 장태완이가 그때 무슨 역할 했냐면 그 외국 언론들이 오면 언론들 상대로 이게 인제 영어를 하니, 잘 하니까 인터뷰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뭐냐며는 통일이나 인권운동에 전혀 나타나지도 않고 지금 여기 가까운 리버사이드라는 데서 인종학 전공으로 교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 인제 또 박무영이라고 있어요, 박대영이 이 친구 그 당시에 총무를 했잖아요, 총무를 했는데 이거 참 전부다 정말 이게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사이비들이었어요. 그때 우리가 돈을 전부다 우리가 막 가가호호 다니면서 상가마다 다니면서 모금을 했단 말이에요. 광주를 위해서요. 면담자 : 80년 당시에요? 구술자 : 그 당시에 한 6천불 모았어요, 6천불. 그 당시에 6천불이라면 꽤 많은 돈이에요. 그걸 우리가 몽땅 광주로 보내라, 하나도 안 보냈어요. 전부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뭐 기름 값으로, 돌아다니면서 자기들 식사대로 다 써버렸어요, 이 박대영이라는 인간이. 이 친구가, 그 당시 후회되는 게 그 모금 운동 한 걸 내가 그걸 돈을 관리를 했어야 되는데 그게 지금 지나고 나서 정말 후회 돼요. 지금 그 당시 5,6천불이면 지금 뭐 환율로 따지면 5,6만 불 되는 돈이잖아요. 한 푼도 못 보냈어요. 한 푼도 못 보내고 운동한다는 놈들이 돌아다니면서 그 돈 다 써버렸어요. 예. 면담자 : 광주 수난자 기금 조성이라는 그걸로 구술자 : 한푼도 못 보냈어요. 면담자 : 했던 게 80년도였던가요? 81년? 구술자 : 우리가 그때 모은 돈은 81년. 한푼도 안 갔어요. 나중에 회계보고 하라고 하니까 지들이 돈을 다 써버렸어요. 그, 그래도, 그래도 그냥 운동 하면서 너희들이 모은 돈 다 너희들이 하라고 믿고 맡겨놨더니 운동, 자기들이 여기서 뭐 저기, 자기들이 돌아다니며 기름값들고 밥 사먹는 건 지돈 가지고 사먹어야지, 이제 어떻게 모금한 돈 가지고 다 써버리느냔 말이야. 그러니깐. 그게 지금 정말 참 아쉬움이 남는 것 가운데 하나에요. 고 다음에 거기에 오늘 같이 나오려고 했는데 김영희 라고 하는, 이대 불문과를 나오고, 예. 그 아파트라고 하는 아름다운 그 이름은 사람이어라 이런 드라마 작곡, 작, 드라마를 작곡가라고 그러나 작사자라 그러나? 면담자 : 작가 구술자 : 작가. 드라마 작가죠. 그걸 직접 써가지고서 무대에 올렸는데 대학생들이 그게 전부 무대 배우로 올라가서요, 굉장한 영향력을 주고 큰 감동을 줬죠. 그런 분들은 아직도 여기 살아있고. 지금은 인제 가정주부로서 민족 통신 거기, 노길남이 하는 기자 노릇하고 있고 그러죠. 이건 그 그룹 안에서, 대학생들 그룹 안에서 이갑산이 이런 친구들은 완전히 정말 극구 우익으로 돌아가지고 뭐 일부에서는 프락치로 들어왔다, 이렇게 얘기하고요. 프락치를 그러니까 프락치를 받아들인 것도 나 잘못이라고 나를 갖다가 이, 예. 비난하고 그러니깐 그, 이제 5·18, 5·18을 겪고 나서 그 안에서 내부 안에 있던 군상이에요. 양현성, 그 그룹들은 밑도 끝도 없이 들어와 가지고는 뒤집어쓰고 완전히 그냥, 어떻게 보면 최악으로 극단적으로 싸운 것 같죠. 도대체가 우리가 들어가 있는데 대화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자기는 그냥 자기들은 목침대도 자기들이 들고 들어와 가지고 세 형제가 그대로 이불 뒤집어쓰고는 열흘 동안 꼼짝도 안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러면 들어갔으면 그런데서 행동을 같이 하지 않고는. 나중에 그 적십자 측하고 우리가 다 편의를 봐줬으니까 서로 사이좋게 헤어졌어야 했는데 그 사건 때문에 그만 적십자 측하고도 우리하고도 불미스럽게 헤어지게 된 거죠, 걔들 때문에. 면담자 : 안에 들어가 계실 때 뭐 이야기를 안 나눠봤습니까. 구술자 : 아, 그냥 이야기. 그 안에서 아침마다 모여가지구서 밤새도록 잠을 안 자니까 나중에는 눈이 시뻘게져가지고는 그것도 좋지 않더라구요. 서로들 감정도 격해지고. 이제는 그러니까 김운하라는 신문사 사장이죠,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다 죽어야 돼. 광주 도청 폭파해가지고 다 죽어야 역사가 바뀌어. 이러는 거야. 그런 말해서 되냐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시냐, 함부로 하시냐고? 그랬더니 아니 그냥, 사람들 앞에서 ‘당신 말이야 의식이 모자라서 그런 거야’ 이게 투쟁을 해도 지금 세월호, 그 다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투쟁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런 거나 똑같은 거 아니야. 그럼 뭐 막 열흘 동안 막 먹지 않고 막 긴장 속에 있다 보니까 그 안에서 열흘 동안 서로 또, 광주 같이 도청에서 적을 앞에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이 안에서 그냥 맹숭맹숭하면서 그냥 이념적가지고 말만 가지고만 싸우다 보니까 들어가 잇는 사람들 안에서도 결국 헤어질 때는 꼭 그렇게 사이좋게 헤어지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게 그러니까 어떤 면으로는 내부에 있었던 진상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절대로 뭐 광주를 훼손되는 건 아니고요, 내가 본 바로서는, 나는 김운하의 말에 찬성 안 했어요. 광주 폭파, 도청 폭파해가지고서 다 죽어야 역사가 바뀐다는. 그 말을 나는 도저히, 도저히 할 수었었어요. 양현성이 형제들 들어와 가지고 그 짓 하는 것도. 그 할 수 없었어요. 그 다음에 나와 가지고 장태완이 같이 이런 친구들. 자기 언론에 얼굴 내미니까 자기가 마치 하는 행세주의자들, 그 다음에 이때다 하고 모여들어가지고 그 돈 가지구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술집 여자하고 결혼해가지고서 살고 그랬어요, 박대영이라는 친구는. 그 돈 가지고 전부 그렇게 써버리고. 이건 그러니깐 참, 이 운동권이 가지고 있는 단면이고 어떤 면에선 앞에 적이 없으니까 이런 정말, 그, 참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도 이렇게 인제 이, 남아있었지만 일단 그 광주라는 그 큰 임팩트, 충격이 어쩌면 호외, 한국일보에 돌리는 호외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막 사람이 그대로 죽어가는 장면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을 했고 그건 국내 신문인 게 사실이에요. 그 다음 미국 언론을 통해서 직접 우리가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 막, 격정 격렬했던 것은 뭐 이, 굉장했어요. 굉장했는데 아무래도 호남향우회가 인적 동원은 굉장히 많았겠죠. 근데 중요한 거는 그분들이, 그렇게 나온 사람들은요, 결코 오래가지 못했어요. 결코 오래 가지 못하고 고 다음에 거기다 1983년도에 김대중 대통령이 나타나니깐 광주 그때하고는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김대중 후원, 뭐 황길선이다, 최상구다, 이런 친구들. 광주 때는 얼굴도 나타내지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김대중 근처를 뺑 그냥 둘러싸버리니까 진짜 그 김대중 내란 음모로 그, 이 투쟁하던 홍동원 목사 같은 사람들은 김대중하고 얼굴 한번 마주치지도 못했어요, 결국은 그러니까. 이, 이건 그러니까 호남향우회 사람들이 자기들이 광주와 김대중 대통령들을 둘러싸고는 현장에서 그런 걸 전혀 느끼질 못하면서 정치적으로 어떤 출세의 발판을 삼으려고 하는 이런 무리 군상들. 뭐 그러다가 결국은 국회의원 할려고 돈 갖다가 바쳤지만 뭐 되지는 않고. 황재성 같은 사람이 가장 대표적인 예잖아요. 그러다가 인제 노무현 정부 들어서고는 5·18 인제 기념상 준다 하니 (웃음) 이런 일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물론 인제 그, 참가하기는 했지만 내가 볼 때는 뭐 한, 중간 이하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상 준다니깐 떼거지로 나타나가지고 상 받으러 나타나는 사람들. 그리고 진짜로 그, 이 광주 항쟁 때 여기서 예, 그렇게 그 한 인물들은 그 이후에 전부 자기들 본업으로 돌아가서 자기 일이 충실했지 뭐 명함내고 상 받으려고 기웃거리지도 않고 상 받으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는 그 당시에 뭐냐면 박사학위 논문을 그 열흘 동안, 그 논문 지도 교수 퀄리파잉(qualifying: 논문 제출 요건) 오럴 디펜스(oral defence: 구술시험) 다 있는데 열흘 동안 그, 논문을 여기 가져와서 썼어요. 적십자 병원 안에서. 적십자 병원 안에서 단 하루가 나한테 말이죠, 이게 박사학위 논문 쓸 때 시간이 촉박한데 제 시간 내에 박사학위 논문을 내야 하잖아요. 근데 시간은 쫓기고 여기 광주는 나와 있어야겠고. 적십자 병원에서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썼어요. 그래도 결국은 여기, 공부한 누구보다도 박사를 제일 먼저 마쳤어요. 미국박사 한, 뭐 3년 만에 다 마쳤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거예요 . 면담자 : 그럼 선생님 28일날 나오, 어찌됐건 적십자 병원에서 나오셔야 돼서 구술자 : 나왔죠, 네네 면담자 : 나와서 어떤 활동들이 하셨나요? 구술자 : 그 다음부터 여기 아드모어 공원(Ardmore Park)이라고 거기에, 거기는 이제 학생들이 주도는 했지만 인제 일반 시민들이 일반 여기 주민들이 거기에 모여가지고서는 거의 그냥 하루건너 한 번씩 거기 시위 피켓 들고 시위를 하면서 결국은 코리아 타운 내에서 다운타운까지 경찰 허락 하에서 인제 시위를 하고 고 다음에 모금운동을 한 거죠, 그러니까. 그게 굉장히 강하게 아주 매일 이어졌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미국 주류 언론에서 계속 보도를 해줬고요. 그러니깐 전두환 반대, 전두환 반대, 전두환 찢어죽이라는 게 그 당시 인제 구호였죠. 전두환 반대와 함께 그 다음에 모금운동이고. 그러자마자 김대중 대통령이 바로 인제 내란 음모죄로 구속되니깐 김대중 석방하라는 거. 사실은 그러니깐 김대중 석방이, 김대중 구명운동이 그 당시에는 5·18 이후의 핵심주제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가지고 81년도에, 81년도에 전두환이가 1월 24일에 여기 나타났잖아요. 1월 24일에. LA 공항에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대학생 그룹들이 공항으로 몰려간 거예요. 공항으로 몰려가니깐 이 전두환이가 인제 영빈 치레로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뒤차 카고(cargo), 인제 그 저기 화물로 글로 빠져나와가지고서는 빠져나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깐 정보가 우리한테 들어왔잖아요, 이게 전두환이 벌써 빠져나갔다, 그러면 전두환이 빠져나갔으면 여기 국우장이라는 식당이 있었어요. 국우장에 와가지구서 교포들하고 점심식사를 하도록 이렇게 계획이 돼있는데 그러니깐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이렇게 쭉 오는데 바로 요 다음 길이 뭐냐면 여기가 쭉 내려가면 노르만디(Normandie)라는 길이 나와요, 노르망디길. 웨스턴 다음에 큰 길이 노르만디라는 길이 나오는데 그게 10번 프리에서 내려가지고 노르망디 가에서, 올림픽가에서 인제 이렇게 좌회전을 꺾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우리가 그 소리를 듣고 그냥 막 속도위반을 하면서, 전두환을 막아야 하니까, 전두환이를 막아야되니깐 오는데, 인제 그 여기 바로 여기 올림픽까지 내려오면 김방앗간이라고 아직 푯말이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옛날 그대로 있어요. 그 앞에다가 인제 관을 갖다가 인제 노르만디에서 꺾어지는데 우리가 정말 이거는 간발의 차이에요. 거 와가지고는 관을 갖다가 인제 또 갖다가 열다섯 개를 깔아놓고 거기다 관에다가 시뻘건 피를 묻혀가지고 해놓으니까 그 전두환 차가 오다가, 그 전두환이하고 이순자가 타고 그 다음에 인제 그 이, 저기, 이석, 그 저저기 아웅산 가서 죽은 패거리들, 그 다음부터 외무장관, 뭐, 비서실장 쭉. 우리가 성공적으로 그걸 막았죠. 그걸 완전 차단했죠, 그러니깐. 해가지고 심지어는 전두환 차 위에 올라가가지고 피켓 가지고 막 차를 찍어 내릴 정도였으니깐. 면담자 : 그, 경호 같은 게 없었나요, 당시에? 구술자 : 한 800명을 깔어 놨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그게 계속 뭐 어떻게 신문에 보도가 되느냐면, 800명을 구석구석 깔아 놨다. 나오면 어떻게 총격을 받을지 모르니깐 나오지 말라, 이렇게 신문에 보도가 막 나왔어요. 그런대도 불구하고 그때 40명 정도가 나왔어요. 많이 못 나오죠, 그러니까 그 무릅쓰고. 그때 인제 그때 그 젊은 청년들 이름이 있어요. 김형준이, 고 다음에 예정웅, 예정웅이라고 지금도 계속 글 쓰는 친구 있잖아요. 예정웅, 김형준이는 김상돈 아들이에요. 예정웅, 홍, 그다음에 홍정웅, 그 다음 문성철, 예. 고 때가 내가 볼 때 한 30대 뭐 쪼끔 중반쯤 되는 나이들이었을 거예요. 고 친구들은 대학생들은 아니었어요. 직장인들이었죠 그때 전부다 여기다 권총 차고 나왔어요, 권총. 예다. 권총을 이렇게 양말에다 넣고 나왔죠, 그니까. 인제 전두환 차가,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이 막혔, 그 당시 우리가 볼 때는 요, 미국 정부 미국 경찰이 한번 이놈 혼내노라고 우리한테 내 맡겨논 거 같애요. 원래는 이 대통령 정도 되면 보통 한 20미터 안에 절대 들어가지 못하거든요. 안 해논 거예요. 5메타 고 앞에까지 그냥 차가 지나가는데도 데모하게 내버려뒀다니까요, 우리를. 그러니까 그냥 우리가, 4,50명이 완전히 그냥 차를 완전히 포위를 해가지고 그기 차 우에까지 올라가지고는 그냥 밟아대면서 데모를 해대니까 드디어 미국 경찰들이 권총을 빼들고는 막 공포사격을 놓더라구요. 예. 비키지 않으면 총 쏘겠다고. 그러는데 그 그, 김방앗간 맞은편 공목에서 한 4,50명의 백인 젊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백인 젊은 아이들. 우리도 깜짝 놀랐죠. 그 백인들이 누군줄 아세요? 그게 통일교 교인들이에요. 통일교인들. 그니깐 이제 어떻게 됐냐면은 그니깐 백인들하고 백인들하고 우리하고만 달라붙어 싸우는 꼴이 돼버렸다고. 그럼 미국 언론에 보도가 막 됐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백인 놈들 발길로 막 차고. 주먹질 하고 막 때려 부수는 장면들이 막 나오니까 이 여론이 악화된 게, 코리안들이 백인들을 때렸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게 인종 차별이, 감히 어떻게 코리안들이 백인을 때리느냐, 이렇게 여론이 바꿔진 거예요. 근데 그게 통일교 교인들 아무도 몰랐어요. 예. 그래가지고서 그 당시 통일교 교인들한테 발길 차이고서 지금도 허리를 다친 사람이 있어요. 국영길이라고 하는 변호사가 있는데 그 사모님은, 사모님은 지금도 허리를 아퍼서, 그때 다쳐가지고 그, 이, 지금 불편하다 이러더라구요. 그니까 막 통일교 교인하고 막 우리가 뒤범벅이 되가지고서 육박전이 막 벌어졌잖아요. 그러는 사이에 길이 틀려져가지고 전두환이 차가 지나간 거예요. 지나갔으니까 결국은 국우장에서 무슨 놈의 점심식사를 해요, 아무것도 못해요. 그 다음부터는 고만 한국 정부에서 전두환 행사를 할 엄두도 못 냈어요. 그 센츄리 프라자(Century Plaza)라고 해서 피코(Pico)하고 거기 호텔에 거기 머무는데 거기 뭐 그냥 우리가 그냥 뭐 꼬리를 따라다니면서 전두환을 추격을 해대니까 결국은 센츄리 프라자 앞에서, 뭐 계속 그 뭐, 전두환이 거기 있는 동안 24시간 밀착 데모를 한 거예요. 여기 와서는 그러니까 하나도, 하나도 행사를 치루지 못했어요. 결국은 전부 호텔 갔은거 갔다가는 정문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밑에 그냥 지하로 내려가서 차타고 도망치고 그 다음에 교포들 모여가지고 리셉션 하는 것도 그것도 하나도 못하고. 그, 그때, 그때 그 여기 LA에서의 전두환 저지는 아주, 아주 그냥 완벽한 성공이었어요. 그때. 그때 주동한 것이 바로 인제 그, 그때도 대학생들이죠. 대학생들하고 그 다음에 그 여기 젊은 청년들은 직장인들인데 나도 몰랐는데 그때 집집마다 권총들이 다 있더라구요. 다 보여주죠. 차고 나온 게. 뭐 그러니까 뭐 죽기 살기로 싸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인제 그, 그거 한거는 적십자 병원에서 우리가 헌혈한 거하고 이런 것들은 전부 미국 주류 언론에 그 당시 필름 찾으면 다 나올 거예요. 그땐 주류 언론들이 매 시간마다 이걸 톱뉴스로 보도했으니까. 이거 우리 데모한 거, 요걸. 그 이건 국내에서는 전혀 그 당시 알려지지 못했겠죠. 면담자 : 당시 여기에서 계셨던 한국분들이, 뭐 유학생이건 직장생활을 하건, 하셨던 분들이 그렇게 5·18과 관련되서 그런 분노들을 느끼고 이렇게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구술자 : 어...학살이죠, 아무래도. 백주 대낮에 그것도 적군이 아닌 아군 군인이 자기 국민들을 갖다가 저렇게. 말만 듣는 게 아니라, 우리는 눈으로 현장에 목격할 때 정말 이래선 안 된다, 이거는 아니다, 이러게 생각한 거죠. 그러니까 정호영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인제 완전히 저짝에 전두환 쪽으로 완전히 붙었고 가든 그로브(Garden Grove) 시장까지 한 녀석들이에요. 그런 인간들 마저도 이 정도 해놓고 전두환이가 절대 대통령이 될거라고 없다고 생각한거죠. 예. 보고서들마저도. 정호영은 심지어 경상도 사람이거든요. 그런데도 이거는 인간으로서 인륜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때 너도나도 쏟아져 나온 게 사실이에요. 그 사, 그리고 이, 예. 뭐 3.1운동 때 일본 놈들이 그렇게 양민을 학살했다 이러지만 그건 우리가 부모들한테 말로 들은 거구요. 우리는 이거는 정말 눈으로 보도를 통해서 눈으로 목격하는 거잖아요. 여기에 대한 그거 이제 분노죠. 그땐 뭐 처음 이 초창기에는 뭐 이런 걸 느끼고는 너도나도 뛰쳐나왔고 그럼 그 가운데 개중에 뭐 이런 경우에 결국 전두환 반대하면 전두환이 오래 못 갈테니까 반드시 민주화가 될거다, 그러면 그때가면 자기도 뭐좀 뭐 한자리는 하겠다 이렇게 하고 나온 놈들도 있어요, 사실은. 없는 게 아니에요. 그러다가 점점 전두환이가 자리를 굳혀지니깐 다 슬슬 꼬리 빼고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다 사라져버렸죠. 그래서 처음에는 적십자 병원에 그때 모일 때는 하튼 헌혈하는 인구들이 5백 명이 단위 시간에 그 적십자 병원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니까요, 그렇게 많이 모인 게. 면담자 : 80년 당시 5·18 당시에 선생님이 직접 적십자 병원에서 헌혈, 뭐 그런 활동도 하시고 항의시위도 하시고 81년도에 인제 전두환 방미 때 또 그런 일들도 있었고. 그 이후에 또 다른 5월 진상 규명활동 이라든지 오월 관련 투쟁을 전개했던 부분들이 뭐 어떤 것이 있으실까요? 구술자 : 그러니까 그 이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에서 석방 되가지고 나왔어요.. 83년인가, 84년인가 한번 조사해보세요. 그 나오셨단 말이에요. 그럼 그분이 이제 여기 미국에 오시니까 바로 그 다음부터 5·18은 김대중과 함께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거는 중요한게 아까 내가 이야기한 대로 그 광주 항쟁 때 그렇게 정말 그냥 애절하게 애타게 투쟁하던 사람들이 어느덧 다들 좌파 빨갱이로 몰리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김대중 자신이 여기 와가지고 5·18에 진짜 눈물 흘리는 사람은 외면했어요. 만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서신 그거 영어로 번역을 해야 되는데 그 번역이며 김대중 대통령을 가까이 하면서 여기 정치인도 만나고 교수도 만나고 학자들을 만나고 출판사 사람들도 만나야 하는데 누굴 인제 거기에 붙여 줄거냐, 김대중한테. 붙여줄꺼냐. 이래되니까 아주 완전 좌파 빨갱이도 안 되고 고 다음에 또 또 호남이니까 또 호남을 널려고 하면 또 이상하게 안돼. 이래 저래 안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때 김대중 대통령 옆에 완전히 출판이며 번역이며 담당을 그때 내가 뽑힌거예요. 그래 김대중 대통령 여기 엘에이 와있는 동안은 하루, 매일 김대중 대통령하고 같이 다녔죠. 그 여기 UCLA 출판 관계 사람들, 그 다음에 그 책을 내가 번역했잖아요. 번역하다가 인제 1985년 2월 5일에 들어가고 나는 2월 8일에 들어가고, 한국에. 번역하다가 최선일 이라는 그 분이 맡아서 노벨상 받은 그 책을, 첨에 내가 번역을 한거예요. 그렇게 인제 그 하다보니까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그 내란 음모에서 연루가 된 그 원인으로 해서 여기에 이, 광주, 내가 80년 광주 항쟁 날 당시에 인적 상황들은 고만 이렇게 고만 이렇게 마음들이 막 갈라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해, 충분히 우리가 이해해요 뭐 그 당시 뭐 여기 양은식이다, 뭐 벌써, 그러니까 광주 나고 81년도에 헬싱키 회담이라고 해서 헬싱키에서 북과 해외 동포간의 대화라고 해서 해외 동포 간에. 그래서 이쪽에 엘에이에서 양은식 박사, 고 다음에 김기양 박사 뭐 이런 분들이 ????분단을 뛰어넘어????라는 이 책을 썼잖아요. 그 책을 그것도 그 당시로서는 이런 ????뿌리????지라는 데서 냈는데 그것도 정말 어려운 작업을 한 거죠. 그러다보니까 북쪽 사람들 하고 헬싱키에서 만나고 온 거예요. 그럼 만나고 와서는 그 다음부터 다 빨갱이지 뭐에요.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여기 와가지고 그러한 사람들하고는 전혀 만나주지를 않았어요. 그래가지고 그때는 아직도 여전히 우리가 차 뒤에 'save 김대중' 스티커를 붙이고 다닐 땐데도 뭐 김대중 대통령 전화 한 통 안 하고 그분들은 만나주질 않고 느닷없이 뭐 황재선이다, 뭐 나중에 알고 보니까 김대중 대통령을 뒤에서 물적으로 많이, 돈 벌어가지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거든요. 돈을 많이 번 도와주는 사람들이더라구요. 뭐 그리되니까 결국은 김대중 대통령 여기 오면서부터 광주의 그 어떤 그건, 광주에, 광주에 직접적인 분이 나타나니까 이쪽에서는 그런 양상들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나타난 게 윤한봉이잖아요, 바로. 윤한봉이. 그게 뭐 나는 윤한봉이를 광주에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몰라가지고 뭐 그걸 뭐 내가 말 하나마나 하겠지만, 내가. 한봉이에 대해서 얘기할게 너무 많아요, 실지 말해서. 이 민족 학교 설립자. 면담자 : 뭐 간략하게 이야기를 쫌 해주시죠. 구술자 : 이건 뭐 역사에 관한 얘기니까. 그러니까 한봉이가 롱비치항, 씨애틀항인가 어디 입항을 했잖아요. 면담자 : 롱비치 구술자 : 롱비치항으로 들어온 걸로 알아요, 내가. 그때 이제 상원의원 애드워드 케네디가 그 한봉이를 가서 배안에서 데리고 나와야 할거 아니에요. 그때 그때 김상돈 선생, 차상달 선생이 나도 같이 가자고 그렇게 제의가 왔어요. 근데 나는 그때 여기서 50마일 떨어진데다가 그때 막 오랄 디펜스가 그날 말 걸려서 그때 오질 못했어요. 그래가지고 인제 데리고 왔단말이에요. 데리고 올라왔는데 그러니까 뭐 그때는, 그때는 사람들이 다니면서 전부다 눈물을 줄줄줄줄 흘리면서 다녔어요, 광주만 생각을 하면. 뭐 차타고 운전하다가도 울고 막 그럴 때거든요. 근데 막 현장에 있던 친구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그게 한봉이에 대해서 그 애절한 마음이 간절했겠냐고요. 생각하시겠, 짐작하시겠죠. 그러기 때문에 인제 그 당, 그 광주 현장의 인물이 직접 나타났으니까요. 그 형이 윤광장이라고 광주 시장이 된 건 알죠? 지금 광주 시장된 윤장현, 그 형님이에요, 형님. 예. 하, 그 참, 참 그 악몽 가운데 악몽인데 그 좀, 이 한봉이가 여기 나타나가지고 그 카리스마를, 카리스마를 이용해가지고 다 여기에 있는 찢어진 마음, 산산된 마음 이런 걸 다 자기 그 산하에서 좀 묶어줬으면, 묶을 수 있었고요, 그때. 뭐 한봉이 말이라면 다 그것이 다 가능할 때구요. 가능할 때에요. 인제 딱 한봉이가 그, 여기 육지로 올라와서 LA에서 나타나서 얼마 안 되고서부터 이제 한봉이 입에서 막 말이 나오기 시작 한 거야 아마 그 당시 이동철이라는 사람이 먹물들, 먹물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예요. 글 배우고 공부한 사람들 먹물이라 해가지고. 이동철이 알죠, 꽃동네 그쪽에서 국회의원 나온 친구 있잖아요? 그러면서 여기 와서 뭐 학교 다니고 공부한 사람들, 이걸 전부다 먹물이다 이래하면서 매도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깐 내가 타겟 1호가 될 수밖에 없어. 난 여기서 박사까지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인제 내 밑에서 그 모여 있던 대학생 그룹 있잖아요, 그걸 산산조각을 낸 거예요. 산산조각을 내면서 제일 먼저 친 게 누구냐면 한광호를 친 거예요. 한광호, 아까 내가 얘기한, 장님이 됐다 하는. 바로 이 장소, 이, 그때이 건물이 아니죠. 이 밑에 건물에 있을 때 홀이 쪼끔 컸어요. 쭉 인제 그냥 한광호, 그 다음에 한광호 와이프, 그 다음에 박대형, 박명호 우리 대학생들이 저를 쭉 둘러싸가지고 있는데 윤한봉이가 딱 서더니 바로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이, 인제 그, 지금 우리가 여기에 와서 대학 다니고 공부하고 뭐 나같이 박사과정 하고 이런 건 다 먹물로서, 먹물로 매도를 하면서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써클을 조직 하는 거야, 거기서 그게 바로 한청으로 발전한 거예, 한청으로. 그래서 거기에 제일, 그 인제 대결을 한 게 누구냐면 한광호예요, 한광호에요. 그 지금 이혼한 바로 그 한광호 부인이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죠, 그 자기 남편이 그래도 뭐냐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가지고서 광주 항쟁때 적십자 병원에 주동자 노릇을 했는데 한봉이가 그냥 광호를 치고 나오니깐 그, 그 생각해보세요. 광호 와이프가 그냥 담배를 딱 빼더니 사람들 앞에서 담배를 쫙 피우더라구요, 그러니깐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겠어요. 예를 들어서. 그 다음부터 그러니깐 그러니깐 이, 이 LA에 학생운동은 한봉이가 나타나고 나서 내가 말하는 대학생 운동은 다 와해됐어요. 다 깨져버렸어요. 없어져버렸어요. 없어져버리고 그 가운데 인제 그 한봉이의 거기에 따르는 그룹과 고만 그렇지 않은 그룹들이 딱 갈라지면서 내가 하던 그 대학생 그룹은 한봉이부터 사라졌다고 보면 되요. 한봉이가 결국은 그 다음에 와서 치는 게 김상돈이라는. 그분 치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인제, 그 다음에 인제 김영삼하고 김대중이가 앞으로 대통령이 누가 될거냐, 하는 이런 문제가 생길게 아니에요. 이런 문제가 생기니깐 그 당시 김상돈 선생과 나하고 두 사람만 김대중을 지지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리고는 거의가 아까 그 이야기한 김운하로부터 시작 해서 김영삼을 지지했다고요. 그건 전부다 그러니까 앞을 내다보는 거죠. 다음에 대통령이 되면 누구한테 줄을 설꺼냐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나는 줄을 서고 그런 걸 떠나가지고서는 김상돈하고 나하고만 둘이서 그, 이, 김대중 지지고. 고 다음에 여기서는 윤한봉이가 인제 김대중하고 김영삼 둘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는지 관건이 되잖아요. 당연히 김영삼 지지하고 나왔죠. 한봉이가. 무슨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국내에 들어가서도 계속됐어요, 한봉이가. 그래야되니까 광주에서 윤한봉이 설 땅이 있겠어요? 그 사람이. 예? 윤한봉이가 그 김영삼 지지하고 김대중이라고 하면 이를 갈고 비판, 비난했다고요, 윤한봉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만약 한봉이가 그때 김대중 라인에서 김대중 지지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리고는 이 이 민족학교가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며는 말은 민족학교라고 해놓고는 보시다시피 전부 시민권, 영주권, 소셜 웰페어 하는 그런 사람 상담해주는 단체로 변해버린거죠. 처음에는 설립할 때는 그렇게 설립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 조국의 민주화, 통일, 거기에 인재 양성, 그래서 이 민족학교 설립 멤버에요, 내가. 그리고 책, 내가 책 나왔을 때 그 출판 기념회를 여기에서 했어요. 그때 한봉이가 그때 뭐 출판 기념회 할 때 뭐 그냥 밥그릇들고 다니고 그런게 요새 동영상 보면 다 나오죠, 그러니깐. 예. 그게 그러더니 이 한봉이의 조직력이 굉장했던 것 같애요. 나는 몰랐는데 뭐 그 다음부터 버클리, 뉴욕, 시카고, 다니면서 이 조직을 엄청나게 했잖요. 이 한청이라는 조직을. 그니깐 그 당시 버클리에 있던 성낙영이라고 하는, 전부 우리 대학생 멤버였거든요. 고 그 다음부터 나를 배신하고 나와가지고 한봉이 밑에 한청으로 들어가버리고 그러게 된거예요, 그러니까는. 그니깐 그, 뭐, 그때는 우리는 그, 이 발전적으로, 발전적으로 좋게 생각했어요. 이제 우리가 이제는 한봉이, 한봉이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져 가지고 좀더 세게 좀 이렇게 나아가길 바라고 발전적인 차원에서 그만 인제 우리 사명이 끝났다 생각을 하고 그 다음부터 한봉이 하는 일에 대해서 진짜로 잘 되기만을 바랬죠. 바라고 나는 그리고 85년도에 인제 김대중 대통령이 2월 5일날 들어가고 내가 같은 날 들어가겠다니까 내가 들어갈 때 공항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자기가 일단은 한국에 들어가 있고 내가 만약 공항에서 잡히면 자기가 그때는 국내 언론을 통해서 내가, 자기가 말해줄 수 있으니까 한 3,4일 늦게 들어오라고. 그래서 내가 2월 8일에 들어가고 김대중씨는 2월 5일에 들어갔죠. 들어가가지고는 이게 그냥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예요. 내가 인제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로 갔잖아요, 감리교 신학대학. 종교 철학과 교수로 갔는데 내가 딱 일년간 하고 재임용에 탈락된 거예요. 재임용 탈락될 때 이 학교에서, 그 당시 문교부죠, 문교부에다가 내가 인제 광주에서 활동한게 있잖아요. 아니요, 저기 LA, LA에서 인제 광주항쟁 활동. 그 자료를 갖다 정부에다 다 갖다 줬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CBS, ABC 그냥 내가 그때 뭐뭐 미쳤죠, 그냥 몽,몽둥이 들고 치고 돌아가니는 장면 찍힌 거를 갖다가 정부에 다 갖다 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정부에서 여지없이 일년만에 쳐버린 거예요. 학교에서, 학교에서 친걸, 반정부하다 들어온 놈 이래가면서 쳐버린거죠. 딱 그러니까 내가 그, 한국에 들어가가지고는 딱 일년 딱 가르치고는, 실제 가리킨 거는 한 학기밖에 못 가르켰죠. 딱 가르키고는 거기서 완전히 재임용에서 탈락된거죠. 자리 어떻게 되가지고는 딱 3년만에 한신대학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 바로 참 기구한 거는 그 당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우리 그 광주, 못포 친구들이 있었어요. 정태기 목사라고, 고재식이라고 한신대 총장까지 됐지. 이런 분들이 결국은 내가 여기서 광주 항쟁때 투쟁한 그걸 인정해가지고 3년 만에 한신대학을 다시 들어간거야. (웃음) 참, 역사. 그거 지금 그 당시에는 재임용에 탈락된 사람들은 학교에 그, 명노근 이런 분들은 결국에 민주화 다시 될 때까지 전혀 학교에 못들어갔잖아요. 3년만에 다시 들어간가는 그 당시에 나뿐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그러니까 한신대 자체가 전부다 반골들 모인데고 그 당시 친구가 마침 총장이 됐다구요. 그래가지고 인제 또 광주, 광주, 광주 항쟁 때문에 또 내가 모가지가 또 살아났다고요, 그게. 면담자 : 그 한신대는 그 이후로 어느정도까지 계셨나요? 그때 나가, 나가셨을 때가 구십... 구술자 : 그러니까 내가 은퇴할 때까지 이제 22년을 잘 있은 거죠. 1988년에 가가지고 2006년에 나왔으니까 20년 됐나? 그 정도 겨우 간다, 20년 정도 겨우 될까 말까. 면담자 : 그 이후로도 계속 한국에 계시면서도 이 5·18과 관련돼서, 물론 잊지 않고 여기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셨을거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특별하게 한국에서 이런 관련 활동들, 아니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하셨는지요. 구술자 : 인제 그건, 그게 중요한데요. 그 다음에 내가 인제 한신대학으로 갔잖아요. 한신대학을 가니깐 아마 여러분들은 모를거예요. 그 당시만해도 PD와 NL이라는게 갈라져가지고요, 이 한신대학에 경제학부를 중심으로 해서 윤소영이라든지, 고 다음에 경기 교육감 하던 김상곤이, 김상곤이는 바로 내 옆방에 있었거든요. 이친구들이 뭐냐하면 PD골수들이에요, PD. PD는 뭔 말인지 알죠. PD 골수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뭐냐면 민족 해방 통일에 관심이 없어요. 계급 투쟁에만 관심이 있는거예요. 나는 한국 들어가서 제일 놀란 게 이 두 노선이 갈라져 있는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게 어떻게 갈라질 수 있느냐는 거예요, 나는. 예? 갈라질 수 없어요. 그게 어떻게 갈라져. 근데 한국에는 엄연히 자기들 조직 확장을 위해 노선을 그렇게 정해놓고 싸우잖아요. 저렇게 노선을 쌓아놓고 하는 한 보수한테 이길 수 없어요, 우리가. 한마디로 말해 김상곤 그, 경기 교육감 하던 이 녀석이 주동이 되가지고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이, 아주 자기들 타겟 1호에요, 타겟 1호. 내가 굽히나요? 절대 그놈들하고 타협 안 하죠. 그 친구들은 문익환 목사님, 문익환 목사는 알죠? 문익환 목사는 방문행사 못해요, 우리 한신대학에서는. 그 친구들이 와가지고는 상 차려놓으면 발로 차서 뒤집어 엎어버리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니깐 한국에 들어가니깐, 한신대에 들어가니까 이, 이 노선이 분열되고 대부분의 학생, 교수들이 PD 노선이고 학생들이 PD 노선이에요. 그리고 나하고 같은 NL 가까운 PD, 이거는 신학과 교수 몇 사람, 신학과 학생 몇 사람뿐이었지. 학교 전체는 PD 였어요. 그러니깐 내가 속한 철학과로부터 애들이 내가 강의를 하며는 강의를 할 때마다 반발을 하고 이 감신대에 있을 때보다 더 어려웠어요, 한마디로 해서. 이, 내가 거기서 겪은, 강의하고 나면 강의 평가를 말이죠, 전부 내가 강의 내 반대하는 애들만 모아놓고는 강의 평가서 써 가지고 말이죠. 교수님, 강의 평가 이렇게 잘 못 나왔습니다. 그땐 뭐 학생들이 완전히 학교의 뭐 그냥 모든 주도권을 다 잡고 교수 위에 앉을 때 아니에요m 그러니깐. 그러다가 89년도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그 세력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부터 겨우 숨통 돌리고 은퇴할 때까지 무사히 교수 생활하고 나온 것 같애요. 한신대 가서 사실 더 어려웠어요, 더 어려웠어요. 그러니깐. 그, 이, 이이 이게 지금 엄격한 의미에서 PD노선 아이들은 광주, 뭐 별로 관심 없어요. 이, 이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민자도 내놓지 못하게 하는 애들 아니에요. 면담자 : 학교가 좀 진보적 성향이 있어서 오히려 더 편하게 학교생활을 하신 줄 알았는데요. 구술자 : 아니요, 더 어려웠어요. 예, 아주 그건 은퇴하는 날까지 이거는 막 PD, NL노선, 김상곤 노선하고. 예, 이, 그, 그러니까 김상곤 그 노선들이 교수들을 다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요. 감히 뭐냐면 그것들하고 대항해 싸울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LA에서 싸우던, 전두환이 그놈 앞에서도 내가 관 메고 싸웠는데 우리가 이제 지금 운동을 하다보면 운동권에 있다보면 베짱이 커지고 겁을 안 먹는 게 특징이에요. 내가 그놈들한테 내가 기죽게 생겼어요? 하튼 그 20여년 동안 그 아이들하고 마음고생은, 뭐 이건 조희연이다, 전부 그 노선들이죠. PD노선들이죠, 전부. 예. 그, 그거, 그거 정말 PD, NL노선은 그 내부에 들어가보면 말이죠, 이거 보세요.지금 뭐 이정희 저렇게 해놓고 뭐 심상정이다 이런 것들 그거 전부다 PD 노선들이잖아요. 심상정, 노회찬이. 아이 그게 다 합치지 못하면서 어떻게 정권 교체하고 이명박 노무, 박근혜를 꺾는다고 그래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정희 그쪽 아이들 지지하는 거 아니에요. 느들 정말 정당 활동 하지 말라는 거. 왜 선거철만 되면 되지도 않을 거 후보를 내노냐, 내말은. 할라믄 시민운동 하라는 거예요, 시민운동. NGO, NGO 활동하면서 통일운동 하라는 거예요, 이정희 보고. 예? 여기 지금 LA 바닥도, LA 바닥도 여기 무슨 하용진이다 뭐다 이게이게 꼴뚜기 같은 놈들, 여기서 무슨 놈의 진보당을 하냐고, 여기 무슨 진보당을 해요, 여기서. 예? 분명해요. 이정희 노선 똑같아요. 이쪽의 주장 똑같애요. 정당 활동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정당활동 해가지고 무슨 동, 동작구 구청 같은 데 출마해가지고 표 한 백표 얻을 거, 백표 차이 때문에 다 졌잖아요, 우리가. 인천 시장하고 그 다음에 저 짝에 경기 도지사 선거는 진보당만 후보 안 냈어도 다 우리가 이길 선거 아니에요, 동작 을도 마찬가지고. 이, 이보세요, 난 노희찬이가 당선만 되면 찬성이에요. 그 진보당이 김경태라는 놈이 나가가지고 뭡니까, 그 백표, 백표 차이로 표 갉아 먹는 바람에 결국은 동작을 거기도 노회찬이가 떨어졌잖아요. 내가 이렇게 생각, 이렇게 하면 PD, NL나 가리지 않는 단걸 알 수 있어요. 누구든지 진보가 당선되면 되요. 근데 왜 그기 당선 안 될 걸 알면서 뻔히 알면서 나가가지고는 그렇게 야권을 분열 시키고 결국은 뭐냐면 이게 우리가 이 정권 교체를 못하게 만드느냔 말이에요. 정말 이런 진보당 내부 안에서의 이런 심리 싸이컬러지 가지고는요, 이런 대국적인 견지를 보지 못해요. 예. 내가 안타까운 것은 한봉이한테도 그런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참, 그, 정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절대 그게 우리가 그런 짓 하는 거는 진짜 광주 정신을 훼손하는 거예요. 예, 광주 정신을 훼손하는 거예요. 그 광주가 정말 그렇게 어떤 파당 정신을 가지고 했다면 그건 정말 우리가 비난 받아야 되겠죠. 우리는 뭐 광주의 을이라 그러면 궁극적으로는 우리, 우리, 우리 조국 통일, 거기 있었다고 보고요, 최정상은 저는 그거라고 봐요. 그때 뭐 저가 그, 이, 적십자 병월에 있으면서 ‘광주 열흘’이라는, 시가 저절로 나오드라구요. 시도 쓸 줄 모르는 게. ‘광주 열흘’, ‘광주 열흘’이라고 하는 시를 써가지고 그때 신한 민보에서 그때 발표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그때 뭐 아직도 병원에 있을 때죠. 그 뭐, 그 시를 읽고 사람들이 그렇게 울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게 그, 한번 신한민보 고 열흘 동안에 신문을 찾을 수 있으면 한번 찾아보세요. 거기 광주 그 당시 사태 기록을 신한 민보가, 김운하 자기 입장에서 쓰기는 했지만 그 현장 기록들이거든요. 매주 일어났던 일들을 고대로 보도한 거니까. 그 전두환 왔을 때까지. 그러나 그 신문이 언제 그냥 폐간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주간지는 딱 그거 하나뿐이었어요. 배달도 없어요. 나오면 그냥 가판대에 그냥 이렇게 되어 있고, 뭐 인제 구독자들에게는 보내는 거 외의 그거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뭐 그거 하나 외에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할 수 있는 매체라는 전혀 전무했으니까, 완전히. 면담자 : 그 2006년에 인제, 신한, 한신대에서 퇴직을 하시고 그럼 다시, 다시 미국으로는 언제 돌아오신건가요? 구술자 : 그러니깐 2006년에 인제 은퇴를 하고 내가 졸업한 클레몬트, 그 학교에서 인제 코리아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그 코리아 프로젝트 디렉터를 하라고 그래가지고 내가 여기 왔어요. 왔는데, 봉급은 무슨 한의과 대학에서, 내가 공부하는 동안에 한의학에 그때 미쳐가지고서는 한의학 이론들을 새롭게 개발하는 그런 작업을 하라고. 그래가지고 내가 여기 2006년도에 왔다고요. 2006년에 와가지고 그동안 책을 쓰는 일을 주로 했죠. 하는데, 이게 또 광주하고 관계돼요. 금년 3월 달에, 금년 3월 달에 인제 일본에서, 일본에서 나를 초청해 가지고 열흘 동안 강연을 시켰어요. 동경에서, 나고야에서, 오사카로 해서 고꾸라까지 쭉 내려가면서 한번에서 두 번 세 번 강연을 했다고. 아무래도 인제 일본은 가니까, 일본 놈들은 말이야, 남한, 남한하고 북한을 똑같이 잡아가지고 한국, 조선을 다 비판, 죽이라고 해요. 고늠들은. 그게 그러니까 어떤 한쪽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되요. 그러니까 자연히 거기서 뭉치게 되요, 거기는. 남북이. 인제 일본은 가보며는요, 그 민단하고 조총련이 이제는 거의 거의가 행사 할 때 보면 같이 모이더라구요, 그러니깐. 그러니까,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많이 모이는 건 조총련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죠. 총련이에요, 아무튼. 민단 사람들은 어떤, 이런 통일이나 이런 거에 관심 자체가 없어요. 없다고요, 이름 바꾸고 뭐 귀화하는데 바쁘고. 그러니까. 그게 그 강연한 걸 그걸 갖다가 어떤 놈이 막 전부 갖다가 내가 있는 학교 그 총장한테 일러바쳤어요. 예? 일러바쳐가지고 총장이 날 부르더니 뭐 학교를 그만두라고. 9월 말까지 고만두고 이제 지금. 그믄 내가 그런데 지금 내가 지금 은퇴하고 있는 마당에 뭐 덤으로 여기 와서 있는, 봉급은 뭐 받긴 하지만 그까짓 꺼 뭐 받으나 안 받으나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거든요. 문제는 아닌데 아무튼 이러게 시리즈로 이어져요. 한국에 와서는 결국은 또 이, 재임용 탈락당하고 고 다음에 미국까지 와 있더니 또 역시 그런 문제로 이 보수들한테 또, 이, 쫓기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누가 이걸 이게 하라는 사람이 있어 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했다고 무슨 돈이 생기는 거 있습니까? 그러고는 이게 하면 할수록 이, 보다시피 뭐, 한봉이다 이런 운동하는 동료들끼리 이게 또 그냥 서로 간에 막 사소한 걸로 치고받으면서 마음 고생시키고 그러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이거는, 이건 기질이라면 기질인데 못 버릴 거예요. 왜 못 버리는 줄 아세요? 이건 뭐냐며는 귀신이 씌어있기 때문이에요, 귀신에. (웃음) 귀신 쓰여서 무당이 신들려 안하고는 못 배기듯이 이 운동하는 사람 누가 돈을 주고 안주고는 상관없어요. 돈은 안줘도 상관 업고 누가 봐주고 안봐주고는 상관없어요. 그러나 안 하며는, 그냥 막 저절로 속에서 못 견디기 때문에 이렇게 인제 우리가 운동에 뛰어드는 거죠. (TAPE 교체로 중단) 면담자 : 용어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한국 전체를 아우르는 사상, 한국을 아우르는 사상. 선생님께서 그것을 ‘한 사상’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잖아요? 현재도 계속 이와 관련한 연구를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구술자 : 그게 바로 이 광주 80년도 박사학위 논문 쓸 때라고 했잖아요 28일 지나고 나니까 미국에 대한 정이 떨어지는 거예요. 영어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말 자체를 영어로 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광주 항쟁 이후로 민속 운동 이 일어났어요. 무언중에 우리 것을 찾아야 한다는 운동이 중국에는 도가 있고 인도에는 무라든지 범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한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랬더니 한 18판이 찍혔어요. 그게 내가 보니까 광주 이후에 우리 것을 찾아야 되겠다고 하는 갈구하다가 예술적으로 풍물로 나가고 사상적으로는 글로 찾았던 것 같아요. 조총련계 학교에서는 복사를 해서 돌려가며 읽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인제 그게, 그, 그 작업을 한국에 있을 때도 계속했고 지금 여기 와서도 궁극적으로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그거죠.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우리의 뭐냐면, 단순히 반미, 고 다음에 뭐, 미국에 대한 적대감, 우리가 우리 걸 무슨 정립을 해놓고 해야지, 그렇게 감정적으로 해가지고는 오래가지를 못한단 말이에요. 나름대로의 이제, 그럴 때 우리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걸 갖다가 정의 해주고 거기에 대한 실체를 만들어놓아 야된다 하는, 이게 인제 내가 지금. 우리 집에 인제 한번 가보면 뭐 그냥 집에 전부 책만 갖다 놓고. 지금 학교도 인제 고만 뒀으니까. 스물 네 시간, 그냥 뭐, 거의가, 아침에 잠깐 나와서 산책하는 거 외에는. LA는 그저 여기 뭐 이따금씩 이렇게 나오고. 이 사상적으로 우리꺼 정립하는 거. 그러다가 내가 통일 뉴스에다가 김일성 회고록을, 그걸 연재를 한 90회 정도 했잖아요. 그걸 한 걸 인제 북에서, 북에서 평양출판사에서, 그걸 책으로 엮어냈어요. 책으로 만들어냈어요. ????세계와 더불어???? 그걸. 그래가지구 지금 북에서는 지금 뭐, 해외 교포 학생들, 일본에서 총련계 학생들 오면 몇 백 권씩 그걸 사다가 애들한테 필독으로 읽히고 이러는가봐요. 여기 있는 친구들도 막상 내가 미국에서 있으면서 쓴지도 모르고 북한에 갔다가는 그 책을 받아가지고 오고 이래요, 보니까. 뭐 이, 앞으로는 아무래도 통일이 될려며는에, 북한의 주체사상하고 우리가 사상적으로, 사상적으로 우리가 정말 이게 서로 조화될 수 있는 그걸 만들어야 돼요. 그게 안 만들고 통일을 해놨다가는 나중에 조직만, 제도만 가지고 해놨다가는 예맨 보세요. 얼마 못 가죠, 삐끄덕 하면서. 그게 통일 안 하기보다 더 못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그 지금 인제 토요일마다 이, 여기 민족학교에서 계속 우리가 모임을 가지면서 가지면서 이런 사상 이, 자꾸 정립하고 터득해내 가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 회원들이 상당히 확, 아주 확고하게 단단해요. 토요일에 시간 있으면 나중에 한번 맞춰 취재를 해도 좋으실텐데. 이분들이 뭐 이런 철학 사상 공부도 물론 하지만 이, 행동으로 통일 운동에서도 LA 바닥에서 하는 대마다 이 사람들이 앞장서서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면담자 : 뭐 이것과 관련해서 지금, 어떤 저서 활동도 계속 지금 하고 계시는 거죠? 구술자 : 그렇죠, 지금 이제 지금, 그 2000년 초반부에는 우리 그, 동학 , 동학 사상 그걸 예, 중심으로 해서 책 내고 그 다음에 2000년대 말에 와서는 한의학, 논리학 관계 개발하는 책을 내고 그 다음에 이제 최근에 하고 있는 건 이, 그, 맑시즘을, 맑시즘을 어떻게 한철학과 관계시켜서 관계시킨 것이 어떻게 주체사상으로 발전 했는가 뭐, 이런 것들이 다루어질 중요한 과제들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면담자 : 그, 쫌 5·18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약간 마무리 지으면서 제가 좀, 선생님이 쫌 바라보시기에 그, 한국 현대사에서 5·18이 가지는 그런 의미나 그런 위치랄까 그런 부분들이 뭐가 있을까요? 구술자 : 뭐 두말할 것 없이 내가 뭐 경험한 동시에 한국 사회 전체가 우리가 집단적으로 경험한 건데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 외세에 대한, 외세에 대한, 외세에 대한 확고한 입장정리라고 나는 봐요. 아마 5·18이 없었더라면 뭐, 뭐, 뭐 보기에 따라서는 김대중의 정권, 고 다음에 그, 뭐 지역 뭐, 호남이라는 지역감정 그런 게 변수로서 어떤 거든지 변수가 없는 건 없어요. 그치마는 확고하게 달라진 거는 5·18 이후에 우리가 민족적 자각이, 민족적 자각이 어떻게 하든 전방위적으로 일어난 것이 사실이에요. 이건 내가 문화나 사상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 5·18, 이 계기가 확고하게 그걸 만들어주는 게 사실이에요. 이건 그러니까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인정을 안 할 수도 있지만 나타난 이 현상으로는 그게 확실해 지고 고 다음에 그 다음부터 어떤 통일 운동, 통일 운동, 아무튼 해외에서는, 해외에서는 지금과 같은 막 강하고 줄기찬 이런 통일운동이 전개된 것은 당연히 뭐냐며는 이 5·18 요 이후에 헬싱키 회담이에요, 그러니까. 헬싱키 회담과 함께 ????분단을 뛰어넘어서???? 그 책이 나오면서부터 여기서는 뭐 그 다음부턴 과감하게 북한하고 이, 자유로운 왕래가 막 활발해졌죠. 그때부터 책도 막 가지고 들어오고. 뭐, 북한에 있는 그 여러 가지 무슨 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또, 북에 대해서 뭐 터부 없이 가봐야 되겠다, 가 보고 싶다, 갈 수 있다, 하는 그것도 전부다 이 광주 때문에 만들어졌어요. 예. 그건 활실해요, 그러니까. 그게 가장 큰 정말 역사의 선물이었다고 봐요. 그런데 이 정치권에서 이거를 제대로 받아내 가지고서 이걸 추진시켜야 되는데 이, 바로 이게 지금 이 호남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제 1야당이라고 하는 민주당이란 것 자체가 이걸 의식을 못하고 있고, 이 광주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있잖아요, 이 사람들이. 지금 도리어 뭐냐면 이석기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뭐 이런 통일 이런 문제를 갖다가 얘기했다가는 보수층으로부터 지지를 못받는다. 그래서 약간 우편향해야 한다, 이런 논리까지 전개하고 있잖아요, 야당이란 친구가. 이건 완전히 이건 광주 정신에 대한 완전 훼손이에요, 이거는. 전, 제가 볼 때는 그렇게 봐요. 그렇게 보는 동시에 이게 또 이게 그냥 민족 해방 노선으로 강하게 나가다보니까 그 반대 이, PD라는 이런 그룹들이 형성이 되면서 우리가 진보 그룹 안에서의 노선 상의 확실한 그만,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70년대에 순수한 민족운동만 하던 김동길이다, 뭐 한완상이다, 뭐 이화여대 서광선이다, 이런 사람들. 다들 이건 기독교를 주로 배경으로 하면서 외세 의존적으로. 그 미국이 우리한테 영향을 미쳐서 우리가 인제 우리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북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반공이다, 하는 이런 사람들이 이 5·18 지난 후 부터는 설 땅이 없어져버렸어요. 설 땅이 없어져가지고 그니깐 70년대 운동권 운동하던 사람들이 이 광주 이후에 나온 이 세대들 하고 연계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연결이. 그건 뭐 고리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끊어졌다고 봐야겠죠. 면담자 : 선생님 그 80년 당시나 그 이후의 지금 오월 운동에서 선생님께서 굉장히 주도적으로 활동을 하셨는데... 구술자 : 뭐 주도적이라기 보다는 경험한 거죠. 면담자 :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셨는데 선생님이 바라보기에 당시에 5·18이 여기 지금 현재 동포사회에 미쳤던 영향이랄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쫌 평가를 하십니까? 구술자 : 인제 그 당시는 그러니깐, 그, 이, 예 전두환이가 예, 일단은 이 하극상, 하극상이라는. 그러니깐 밑에 부하가 상급자 정성화를 갖다가 치고는 자기가 권력을 잡는 일에 대한 그거는 누가 보더라도 이,천인공노할 짓이다. 예, 한마디로 말해 인정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등장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 양민들을 사람, 양민들을 죽이고까지 했다는 것, 거기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그때 다, 그땐 정말 보수 진보 할 것없이 전두환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초기에는. 그건 확실해. 그 당시 데모할 때 보면, 그 멀쩡한 그냥, 목사들, 이런 사람들도 그냥 분노해서 피켓 들고 막 다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 이렇게 그 데모해가지고 행진 지나가면 한 7,80명은 모여가지고 다녔다구요. 그러다가 점점 전두환이가 그걸 권력을 잡으면서, 광주를 악마화 시키면서, 한마디로 색깔을 칠하기 시작하니까 그럼 너도 나도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을 했고 그 다음에 지금 뭐 이명박, 박근혜 정부 거쳐오면서부터 이제는 그냥 뭐, 광주를 갖다가 완전히 북한에서 간첩들이 침투해서 선동해가지고 한 것처럼 공공연하게, 뭐 조갑제 같은 이런 인간들을 내놓고 이렇게 얘기 하잖아요, 지금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광주가 처음 여기, 막 발생했을 때, 이건 상상도 못할 일인데. 지금 이게 지금 모르겠어요, 한국 역사에서 언제 이게 뒤집혀가지고서 이게 지금 광주가 바로 이해되고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가 심판을 받을지는 모르겠어요, 지금. 예. 그건, 그건 내가 볼 때는 우리 진보 진영들이 뭐, 두말 할 것 없어요. 반 박근혜 반 이명박이라 그러면 좀, 정말 진보진영들이 대동단결하라 이거에요. 대동단결하라. 이, 요번에 조국 교수 같은 경우도 보세요. 조국이 말이야. 그걸 갖다가 살인교사, 어떤 예를 들어 얘기한 걸 갖다가 조국이가 살인교사를 했다고 해서 지금 고소를 해놨잖아요, 보수 단체들이. 왜 이런 경우가 당하냐며는 조국만 하더라도 좀 그 서울대학교 교수고 법대교수고 그러면 좀 그, 좀 통을 크게 잡고 생각해야 되는데 선거만 되면 그 정의장 심상정, 노회찬 지지잖아요. 근데 이정희도 또 아니에요, 그 사람은 또. 뭐 아세요 그거?(웃음) 그 이도흠이라 하는 한양대학 교수. 그 조희연이 이번에 선거본부장 하던 친구 있잖아요. 그 죽도록 고생하고는 고작 보면 결국은 그 심상정, 노회찬 그거 지지하는 거예요, 그니깐. 나는 나는, 반대해요, 나는 반대해요. 민주당, 진보당 예...할 것 없이 반 박근혜, 반 이명박, 이 친일 매국노, 이 세력 기득권자들, 그리고 철저하게 일본의 우익 보수로부터 돈 받고 사주를 받는 이 세력을, 그걸 주 타겟으로 하고는 크게, 뭐 무조건 단결해야되잖아요. 내 입장은 그래요. 여기 LA 바닥에도, 내 생각하고 같이 하고. 나는 뭐 심상정파다 나는 뭐, 뭐 저기 뭐 이정희 파다, 나는 민주당이다. 이, 뿔뿔이 나누어져가 있어요. 모르겠어요,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나는 그러니까 뭐, 뭐 정치할 생각도 없고 내가 한국 들어갔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자기집에 불러가지고는, 뭐 그냥 아마 그때는 내가 뭐 미국에서 공부하고 그러니까, 영어도 좀 하고 그러니깐, 이 정치적으로 나가 뭐 좀 이렇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겠죠. 어...나를 굉장히 정치로 끌고 들어가려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내가, 어디까지나 나는 학자고 나는 한시라도 책을 놓고 있으면 불안해서 못사는 사람이에요. 차 타고 오면서도 책을 읽어야 되는. 그런 사람인데 내가 그런 정치판에 들어가버리면 그건 완전히 뭐 책하고는 뭐 그냥 멀어지는 거죠. 그럼 내가 공부를 못해요, 내가 한국 들어가서 전혀 정치에 기웃거리지 않고, 한신대학에 있는 동안도, 그 뭐 김성재라고 해가지고 문광부 장관도 하고 그 기독교 교욱가 친구, 김대중 대통령이 부른다고 거기 들어가서 뭐 장관도 하고 뭐 한신대 교수들 그때 뭐, 그때 뭐 전부다 노무현정부 때까지 신났잖아요, 부르면 다 한신대 교수였잖아요, 그러니까. 예. 그니깐 지금까지 나는 절대로 정치에 기웃거리지도 않고 고 다음에 그, 내가 한때, 내가 해야될 때 하고는 고만 싹 자취도 없이 내가 사라져버렸다가 또 언젠간 내가 글을 써야 되고 뭐 내가 행동할 때가 있다그러면 그때만 딱 나타나서 나는 하고는, 난 일체 뭐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뭐 역사에 기록으로 남고 싶지도 않고 지금 난 역사에, 여기 한국의 미주 민주, 뭐 미주 뭐 민족운동사라고 해서 이, 적어놓은 거 보면 전부 글 쓴 자기들 위주로. 이 역사라는게 얼마나 진짜 역사가 남는지 정말 의심스러워요. 그 예를 들어 양현성이. 그런 뭐 감리 이 바닥에 한인 타운에 일하고 이러니까 아까 이불 뒤집어쓰고 있던 그런 애들. 뭐 장, 장태완이는 또 미국 대학 교수니깐, 뭐 아무래도 미국 교수라 그러면 말빨 있을 거 아니에요? 뭐 장태완이 같은 경우는 뭐 영어 잘 모를 때, 얼마 전에만 하더라도 뭐 5·18만 되면 한국에 불려나가서 강연하고 막 이랬어요. 그 장태완이가 아니에요, 절대로 한광호지 장태완이가 아니에요. 그 가운데 가장 그, 정말 나쁜 친구는 박대영이란 친구죠 돈 받아가지고는 전부 술집에서 가서는 술 받아 먹고 그 돈 다 탕진해버리고, 면담자 : 그, 제가 대부분 지금 선생님 2시간 30분 가까이 말씀을 드렸는데 선생님 활동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그, 짧게나마,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짧게나마 활동상황들을 좀 다 이야기는 해주신 것 같아요. 네. 아까 말씀하신 도중에 미처 그, 말씀 못하신 부분이라든지 쪼끔 더 보완이나 추가적으로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면... 구술자 : 뭐, 그, 인제 그 한국에 제가 85년에 들어갔잖아요. 뭐 당연히 가보고 싶은 데는 광주죠. 광주. 그래서 인제 한국에 인제 그, 이 그러니까 내가 3월달에 들어가가지고 5월 14일이구나, 5월 14일에 감신대 교수회가 열린 거예요. 교수회의를 했는데 이 교수들이 5·18이 내일 모레, 내일 모레인데 글쎄 학교 안에서 그 총장 쫓아내는데 이, 몰두를 하면서 한마디로 무슨 5·18 모여가지고는 그 목사놈들이란 게 기도 하나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정말 이거 너무 하잖냐, 내가 처음 들어온 교수가 교수회의 석상에서 말하는 건 뭐하지만 어ᄄᅠᇂ게 이게 지금, 그 광주를 위해서 우리가 참, 묵념 하나 안 하고 교수회의를 시작하느냐. 이랬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그 홍종수라는 교수가 뒤에 앉았다가,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자기들은 총장쫓아내는게 관심사인데 내가 관심을 딴 방향으로 돌렸다 이기죠. 그랬더니 막 뒤에서 그냥 막 “이 개 새끼야” 하면서 고함을 치고 달려들더라구요, 나하고, 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놈이. 그러니까 나도 기가 죽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야 이새끼야, 뭐!” 하고 고함을 친 거예요. 그랬더니 재임용 인제 나중에 탈락할 때 바로 이거를 갖다가, 그때 첫째는 뭐냐면 교수회의 발언에서 그, 뭐 5·18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다, 고 다음에 소리치면서 개 새끼라 했다 뭐 그래가지고는 결국은 인제 그런런 게 이제 재임용 탈락할 때 그게 이슈가 된 거예요. 문교부에는 그만 내가 여기서 관 메고 대만 갔다고 해놓고는. 그러고는 그때 하도 마음이 적적해서 그때 광주를 간 거예요. 광주가 그때 신문에 계속 나는게 금남로,, 충장로,.,뭐 이렇게 뉴스가 나오잖아요. 금남로가 어딘지, 고 다음에 충장로가 어디 있는지, 그 다음에 도청이 어디 있는지, 인제 아마 딱 시간이 이때쯤 될거에요. 그래서 맨 처음에 간 게 전남대, 전남대 교정을 갔다고요. 전남대 교정을 갔더니 이, 여학생이, 여학생이 여기 첼로를, 첼로를 매고 이제 그, 이 교정을 이렇게 걸어가더라구요, 후, 이게 그냥. 이제 이렇게 조용한 캠퍼스에. 이게 광주의 아픔도 있지만 역시 그 또 학생들은 저렇게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구나. 그 장면을 이제 보고 인제 광주 시내로 인제 들어와서 금산사로 이렇게 해서 인제, 인제 이틀 동안 왔거든요. 왔더니 바로 총장이 부르더니 재임용에서 탈락됐다고. 그게 그때는 뭐 저뿐만 아니라, 제가 이 얘길 왜하냐면 말이죠, 그때는 광주가 전부가 정말, 정말 애인이상의 애인이었어요. 정말 진짜 사랑이었어요, 그때는. 그냥 막 말하면 그냥 시가 그대로 나오고 그 김대중 대통령이 여기 왔을 때 자기 책을 출판 기념회를 여기 VIP, 여기서 했거든, 식당에서. 그때 또 그걸 인제 김대중 대통령 그 책 서평을 나보고 하라고 해서 내가 또 그걸, 내가 해줬죠.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굉장히 내가 서평을 해준 것을 좋아했어요. 그래가지고는 그, 인제 그땐 막 그냥 광주에서 누가 왔다 그러면 막 얼싸안고 뭐 그등그등, 그등그등 눈물부터 막 이제 그, 쏟아지고 그런 세월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사실은 이 한봉이가 나타난 이후부터 우리가 현장에서부터 온 친구가 와가지고 그냥 오자말자 막 그렇게 나가버리니깐. 그게 그냥 하. 그 다음부터 광주에 대한 이게 막, 연민의 정이 이 마음속에서 막 흔들리기 시작한 게 사실이에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 광, 그때 윤한봉이는 상당히 좀 상징적으로 이렇게 남아가지고 뭔가 이걸 좀, 광주 그걸 전체 어우러서 이걸 크게 좀 감싸며 나갔으면. 참 아쉬워요. 그분이 그렇게 했드라면 그 내 생각에는 그 당시 모여있던 학생 운동이 지금은 벌써 5, 60대가 다 되었잖아요. 그게 그대로 또 그 다음에 싹을 피고 인제 만들어져 나갔을 텐데 고게 좀 못 만들어진게 그게 참 아쉬움이다 하는 생각이 인제 들어요. 뭐 여러 가지 그냥 아주 뭐, 그 그, 그 그런 것들이 전부 통일이라는 이걸로 이게 글로 마음이 확 쏠려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고. 그건 인제 내가 한국에서 단군학회 회장 하면, 단군학회 회장 하면서 북은 그러니까, 금강산 두 번 갔다 오고 뭐 이, 단군릉 개천절 행사 하느라고 또 네댓 번. 그러니까 이명박 들어서기 전에는 내가 매년 갔댔죠. 거기 북이라는 사회는요, 가보면 아무리 가도 또 가고 싶은 데가 북이에요. 뭐 그랜드 캐년에 아무리 좋다 그래도 한 두 번 가면 싫증나잖아요. 북은 그렇질 않아요. 열 번 가면 또 가고 싶고 열 번 가면 또 가고 싶은 데가 북이에요. 왜 가냐, 왜 그러냐며는 거기 사람들이 주는 그, 인간미 때문에 그래요. 이 북쪽 사람들을 막상 만나가지고서 이렇게 대해보면요, 마치 그게 우리가 사람이 사람보다는 동물에 대해서 정이 더 가잖아요. 왜냐며는 동물들은 진실하기 때문에 그래요. 동물들은 자기 먹기 싫으면 안 먹고. 사람은 자기 먹기 싫어도 체면상 먹을 때도 있잖아요. 동물 속에 그런 진실이 있기 땜에 그러거든요. 북녘사람들을 한번 만나보세요. 그 마음 속에는 인간미가 그대로 살아있어요, 그 사람들은. 그게 매력이래요. 그래서 가도 또 가고. 와서 여기 와서 있으면 북쪽사람들 하나하나 얼굴이 이렇게 떠오르고. 그러거든요. 이게 그, 이, 아무도 지금도 많은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은요, 이 광주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많아요. 여기 인제 뭐, 사실 그런 분들을 만나서 얘기하는 게 필요해요. 누구, 어떤 분을 또 누구 지금 만나실 분이 누구누구 또 되어있죠? 면담자 : 저희가 그, 시간이 좀 많지 않아가지구요, 한정된 시간에 만나다 보니까 많은 분들은... 지금 누가 추천되어 있어요, 지금 만나야 될 사람들 가운데? 면담자 : 지금 은호기 선생님도 있구요. 그분은 그분대로 또 딴 스토리가 있을 거예요. 그분은 주로 아마 뭐 정치적으로 여기 조직 판도가 어떻게 돌아갔다, 뭐 인제 그런 얘기를 할 거예요. 뭐 이런 대학생 이거와는 또 아무 상관없던 사람이거든요. 그 분은 또 뭐 노무현 정부 때 아마 상도 받았을 거예요, 거기. 그, 이, 이 민주화 그런 공로로 해가지고서. 그분은 그분대로 또 뭐, 여기 김상돈 선생님 주변으로 돌어가던 여러 가지 그, 어떤 큰 정치적인 틀에서 얘기를 많이 해주실 거예요. 그분은 저쪽에 정읍이 고향이거든, 정읍. 면담자 : 그 여기 이사장님이신 이길주 이사장님. 구술자 : 아, 이길주 선생님. 음...인제 이길주 선생님은 인제, 이분도 그러니까 정말 이분이야말로 광주가 계기가 돼서 운동권에 나오신 분이죠. 그리고 인제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라고 해서 홍동근 목사님, 그 교회 계속 다니셨고. 여기서 광주, 광주 행사 있을 때마다 나와서 인제 노래, 서울대 음대출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노래로, 노래 불러주시던 분이죠. 예...그다음에 그 사실 아까 얘기한 한광호라고 하는, 그 당시 대학생 그룹을 이끌어주는 인제 이런 친구들, 고 다음에 아까 드라마 작가라고 했던 김영희는 여기 바로 전화만 해도 바로 올 사람이거든요. 이런 김영희같은 여사도 있고. 노길남은 추천 안 하죠? 노길남. 노길남이는 그 당시 신문, 신한민보 기자도 했었고 그 다음에 코리아 스트릿 저널이라고 거기 기자도 있었어요. 면담자 : 코리아 스트릴 대표였던 조재길 선생님, 내일 모레 만나기로 구술자 : 예, 그분도, 그분도 뭐냐면, 광주로 계기로 해서 그, 아주 초창기에 인제 그 아까 얘기하는 정호영이라는 친구 있잖아요. 그 친구는 완전히 돌아서가지고서는 그 친구는 뭐 앞장서서 데모했던 뭐 프랑카드 제일 앞에 들고 나가던 친구에요. 전두환이가 등장하자마자 변절을 해버린 친구에요. 완전히 그냥 극보수로 그냥. 조재길 같은분은, 조재길 같은 분은 그분이 뭐냐하면 그, 광주 때, 그렇다고 현장에 피켓들고 데모하는 데 까지는 나오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니었지만 계속 인제 코리아 스트릿 저널 가지구서 그, 이 광주 진상을 알리고 언론 홍보를 하던 분인데 인제 이분은 뭐냐하면, 출판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다음에 그만 어느 날 갑자기 코리아 타운에서 사라져버렸다고요. 오랫동안 이제 그, 사라졌다가 여기 새리토스(Cerritos) 시장을, 새리토스 시장이 돼서 정치활동을 했죠. 그러다가 그게 인제, 금년으로 끝나요. 끝나면서 그 사이에 인제 연변대학에 가가지고서 북한 핵으로 주제로 해서 박사학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도 5·18에 나온 이후에 지금까지 그렇게 지속적으로 이걸 해간 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양반은 변절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거 하다가 고만 전두환이가 등장하고 이러니까 고만 맥이 풀리고 고만 자기 본업으로 돌아간 사람들이죠. 본업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또 나이가 한 70넘고 하니까 다시 인제 이런 운동권에 와야 옛날 사귀던 친구도 만나고 하니까 이렇게 나온 분이고. 그 다음에 황갑주라고 있어요, 황갑주. 여기 그러니깐 인제 참 정말 재빠르게 이 LA에서 움직인 게 말이죠, 그 광주 항쟁 나고 한두 달도 안 되가지고 시집이 나온 거 아시죠. 시집이 ????빛의 고을????이라고 해서. 시집이 나왔어요. 어느새, 어느새 시를 썼는지 시집이, 시집이 헌정이 됐다니까. 그때 김준태, 「아 무등산이여, 십자가여」 김준태 시 있잖아요. 그게 그 얼마나 여기서 읽혀진지 못해요(몰라요). 뭐 김준태가 요새 뭘해요? 뭐 어디 고등학교 선생인가? 면담자 : 아니요,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강사, 뭐 그, 그런 외래 강사로 쫌 활동하고 계시구요. 구술자 : 어, 김준태씨가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그게 엄청난 영향을 많이 줬구요. 그 ????빛의 고을????이라는 시가, 시집이 나왔어요. 까만 표지에 하얀. 그걸 내가 85년에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가고서 그때 내가 84, 5년돈가 6년도에 광주에서 삼일절 행사할 때 그때 인제 그 광주 5·18 그쪽 단체에서 나를 초청해가지고 삼일절 강연을 했다고요. 그때 누구냐면 돌아가신 명노근, 그때 살아계셨죠. 그 부인 안순례라고 면담자 : 안성례 구술자 : 안성례요, 성례. 지금 도의원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면담자 : 아, 지금 그냥 활동을 안 하시구요. 여성 단체 뭐 시민 사회 단체 원로로서 이렇게.. 구술자 : 그 딸이 있었는데. 딸이 한신대 신학과 나오고. 그 딸도 있다고. 면담자 : 딸은 잘 모르겠습니다. 구술자 : 딸이 그래가지고 그, 인제 그 쪽에서 할 때 그때 내가 그 시집을 갖다가 줬어요. 안순, 안성례 선생한테. 깜짝 놀라더라고요. 어떻게 이 사이에 벌써 이렇게 광주 그, 광주 항쟁을 주제로 한 시집이 이렇게 나왔냐고. 그게 참 좋은 시가 많이 실려 있었어요. 그 시집을 그때 나도 딱 한 개 가지고 광주 들어가서 그걸 전했거든요.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나온 것이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그게 두 번째 나온 시집이죠. 거기에 인제 시인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살아계시면서 바로 인제 그, 이세방, 이세방, 고 다음에 황갑주라고 있어요. 황갑주. 뭐 이런 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순수하게 이 광주항쟁을 이, 증언해주실 분이에요. 그분들은 뭐 정치적 맥락 없이 누가 진짜로 진심어린 마음으로 했고 사심 없이 활동했는가를 알 사람이에요. 특히 그 황갑주 선생 같은 분은요. 무슨 행사 있을 때마다 꼼꼼하게 돌아다니면서 누가 무슨 행동하고 누가 무슨 한 걸 다 적어 놓은 사람이에요, 그런 분이 있어요. 나이가 지금, 살아계시긴 한데 연세가 너무 지금 많으긴 한데 저가 볼 때는 고 황갑주 선생 같은 분, 이런 분은 꼭 인터뷰를 해야 할 분이에요. 제, 지금 살아계신 가운데는 제일 나이가 많고. 고 다음에 인제 여기 인제 작년, 금년에 돌아가셨구나. 이선주, 이선주라고. 이선주. 뭐 은호기하고 전고 지금 동창들인데 뭐 이런 분들. 이선주도 비교적 어떤 그, 객관적인 증언을 해주실 수 있는데 돌아가셨어요. 근데 그 누구보다도 황갑주 선생이 제일 좋고 고 다음에 이세방도 이게 인제 좋고. 그 다음에 이게 전두환이가 오기 전 1월 24일 날 오기 전에 여기 저 그 당시에 여기서 벌어졌던 또 정말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요. 그 전두환 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저걸 박살을 내 버릴껀가, 그 전야제에가 굉장히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요. 재미있다기보다도 좀 아슬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때 인제 김방앗간에 다 모여 가지고는 전두환이 오는 걸 갖다가 어떻게 저놈을 요번에 LA에서 혼따귀 내놀까 하는. 고 다음에 아유, 여기 지금 사진을 꼭 찍어야 되는데, 아까 적십자 병원... 면담자 : 네, 가시죠. 구술자 : 내가 6시까지는 어딜 가야되는데, 괜찮아요. 그니까 지금 가서 우리 지금 적십자 병원에 가지 않을래요? 차가 없죠? 면담자 : 예, 차가 별도로 없습니다. 구술자 : 그럼 내차 타고 가자고요. 면담자 : 예예, 아무튼 선생님, 오늘 구술자 : 아 근데 이거 지금 어두운데 찍어도 될까 모르겠네. 면담자 : 아 이 정도는 충분히 나옵니다. 구술자 : 아 가자고요. 거기 가서 그거하고 김방앗간 하고는 거기는 꼭 찍으세요, 사진을. 김준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김준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6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접자: 이 구술 녹음은 그,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과 관련한 김준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면접 장소는 L,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10시 15분입니다. 이 구술 녹음은 5·18 기념재단이 주관하는 국외 5·18 기록물 조사 및 수집 사업의 결과물로 제출될 것입니다. 면접자: 그럼 지금부터 구술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건데요. 일단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저는 너무 기쁘구요. 구술자: 반갑습니다. 면접자: 7년 만에 만나 뵙는 거라서. 그,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그 생년월일을 쪼끔 말씀을 해주세요. 구술자: 서류상으로는 66년 5월 13일이구요, 근데 일 년 늦게 호적이 돼서. 6, 어...띠는 뱀띠에요. 그니까 그렇게 65년생이라고 할 수 있죠. 근데 서류상으로는 66년으로 돼있어요. 면접자: 5월 13일은 같, 같은 건가요? 구술자: 에 서류상이니까. 66년이 맞겠죠, 서류상으로. 한국나이로 하면 딱 오십. 구술자: 딱 오십, 여기 나이로 하면 이제 마흔 아홉. 면접자: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구술자: 광주에서 태어났지요. 면접자: 부모님들도 처음부터 광주에서 계속 사셨나요? 구술자: 네 네 광주에서 한 가족이 있었죠. 면접자: 광주 어디에서 사셨어요? 구술자: 본적이 광주시 임동 60번지. 기억이 나네요. 하도 그걸 많이 써서. 광주 임동에서 주로 살았고 그쪽 그쪽주변에서 살았죠. 지금은 없어진 것 같은데 옛날 그, 북성중학교 자리가 있어요. 그쪽 근방에 살았죠. 그 성당, 임동 성당인가, 주변에 있었고. 지금은 다 없어졌더라고요. 자리가 흔적이 없어졌더라고요. 거기서 자고 자라고 거기서 서림 국민 학교, 진흥중학교 대동고등학교, 전남대학교까지 다니다가 미국에 오게 됐지요. 면접자: 학창시절 얘기는 좀 뒤에 쫌 다시 여쭤보기로 하고요. 그, 가족 관계는, 형제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가족 관계, 쫌 그런데. 그, 3남 3녀 중에 하나, 둘 셋, 네 번째네요, 네 번째. 위로 인제 그니까 누님이 둘, 형님이 한 분 이렇게 계시죠. 면접자: 넷째고 밑으로는 구술자: 둘이 있죠. 면접자: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한명 이렇게 인가요? 어렸을 때 가족이 많으셨네요. 구술자: 네네 면접자: 다투기도 많이 다투셨을 것 같은데. 구술자: 쫌 그렇죠. 면접자: 이렇게 가족들이 어렸을 때 좀 많았었는데, 이렇게 부모님이.. 구술자: 구술자: 힘드셨죠. 어렵게 살았죠. 어렵게 살고 또,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저가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올라갈 땐가?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그래서 되도록 가족, 가족사는 얘기를 잘 안하고 싶어요. 면접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그러면, 집안 분위기는 그때 쫌 어땠나요, 어렸을 때? 구술자: 그니까 집안 분위기는, 어렵게 사니까 서로 관심이 힘들잖아요. 먹고 살기 힘드니까. 그래서 인제 어머님은 우리 인제 여섯 식구 먹여 살릴라고 열심히 노력하시는 거고 저 이민 오게 된 배경이 깔리게 되겠는데, 저희 누님이 독일에 간호원으로 가셨어요. 그 당시 경제가 어렵고 막 이러니까 광부도 하고, 간호도 하고 했잖아요. 누님도 뭐 꿈이 많았었겠지만 가족 형편이 그러니까 또 가족을 위해서 어떤 그런 길을 갔죠. 독일로 간호원으로 가셨다가 인제 그분이 ㄱ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이민의 고리가, 미국에 오게 된 과정이 그렇게 저하고는 관련이 되어 있죠. 면접자: 어렸을 때는 주로 어떻게 생활, 동네에서 친구들과 좀 어울리셨나요? 구술자: 동네 친구들과 잘 놀았죠. 산에 가서 칡 캐러 다니고. 개울가 가서 고기 잡으러 다니고 많이 돌아다니고 잘 놀고 돌아다녔어요. 그 당시에 애들하고 축구도 차고 잘 돌아다니니까. 면접자: 어렸을 때부터 외향적이고 활발하셨네요. 구술자: 그렇다기보다 성격이 쪼금은 내성적이었고 별로 잘 나서지 않는 그런 편이었어요. 그런 편이었는데, 이제 성격이, 지금은, 지금 나이가 들어가니까 옛날 그 성격들이 쪼금 이렇게 소극적이고 하는 것들이 다시 나올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내 의지적으로 많이 극복할라고 노력을 했죠. 대학교 가서 특히 노력을 했고. 그러다보니까 대학교 생활도 쫌 외향적이 되고. 뭔가 학생회 활동도 하고 그렇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스스로 극복할라고 했어요. 성격은 좀 내성적이었고. 속이 없었을 때는 잘 놀았고 그랬죠. 면접자: 초등학교 들어가셨을 때는요? 구술자: 모범생, 범생이? 범생이? 모범생? 조용하고 말 잘 듣고 하는 그런 타입이죠. 근데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회에 대한 이런 것들은, 뭐 광주 자체가 분위기가 그러니까. 잘은 모르지만 뭔가 좀 사회에 만족하지 않는 그런 생각들은 있었던 것 같애요. 또 가정 생활이 그랬으니까. 가정, 자랐을, 제 기억으로 자랐을 때 동사무소 같은 데서 밀가루도 나눠주고 받아서 이렇게 먹고 사는, 이런, 그런 생활을 좀 했었지요. 그 당시 그니까 70년대? 그죠. 면접자: 어렸을 때 특별히 쫌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든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큰, 기억에 남는 큰 일 같은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그런 거는 별로 없죠. 면접자: 초등학교는 아까 말씀하실 때 서림초등학교가 현재도 있나요? 구술자: 그거는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여기 떠나온 지가 오래 돼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요. 면접자: 서림 초등학교 입학하신 게 72년 됐던 것 같은데 구술자: 구술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오래 되서. 면접자: 주로 학교 다닐 때, 초등학교 다닐 때는 어떻게 쫌 학교를 다니셨나요? 그때 좀, 조용하고 모범생, 아니 조용히 학교를... 구술자: 그쵸 그쵸, 이런 얘기도 해야 되나 근데? 학교 다닐 때 육성회비란 걸 내잖아요. 육성회비 내라 그랬는데 우리가 형편이 그래가지고 육성회비를 못 내요. 육성회비를 못 내니깐 받아오라고, 학교에 가면 돌려보내요. 선생이. 면접자: 초등학교 때요? 구술자: 초등학교 때. 집으로 육성회비 가져오라고. 그러면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는데 뭐. 그러면 그 주변에 비슷한 또래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학교 선생이 학교 육성회비를 받아올 때까지는 집에 오지 말라, 아니 학교에 오지 말라고 돌려보낸다고요. 그럼 또래들이 몇몇 있으니까.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들 많이 있었으니까. 그럼 가가지고 놀러가요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고 돈 못 받아 올 것도 뻔하니까. 그래서 내 놀다가 학교 끝날 때쯤 가갖고 인사하고 다시 집으로 오고. 그런 기억은 좀 있어요. 면접자: 그, 아까 말씀하실 때 초등학교 5학년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구술자: 5학년 말, 저희 아버님이 1월 12일인가가 아마 기일인데 6학년 올라갈 때, 5학년 마치고 방학 때, 그때쯤 돌아가셨죠. 면접자: 편찮으셔서... 구술자: 예, 그, 폐, 지금 봐서 폐병이죠. 그 당시에 많이 생겼었던데. 저희 아버지, 제가 알기로는 일제 시대 때 저기, 일본 그, 목수하는 분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우시고. 그래서 인제 그 일을 하셨던 분이신데, 목수 일을 하셨던 분이신데 쫌 그 당시 기술자들이 필요하고 있을 때니까 좀 잘, 좀 건설 현장에 많이 돌아다니시는 그런 분이셨는데 제가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 아파 누우셨어요. 그래서 한 몇 년 투병 생활 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면접자: 그 이후로는 어머님께서 생계를 이렇게 다 꾸리셨겠네요.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구술자: 우리 어머니 고생 많이 했죠. 이런 저런 장사 다 했죠. 뭐, 노가대, 노가대 판이라고 하죠, 건설 현장에 가가지고. 그때는 지금 생각해서 보니까 그때는 인제 막 자재, 원자재가 없으니까 재활용들을 많이 헌, 했던 것 같아요. 건물 뿌수면 거기 있는 못 다 뽑아내고, 나무 따로 좋게 편성해가지고 그걸로 또. 쓸 만한 건 다시 집짓는 데에 사용하고. 그, 그런 일을 하는, 어. 일꾼, 노동자들이죠. 노동자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런 쪽에 가서 하셨고. 뭐 인제, 보따리 장사, 과일 장사, 뭐 이런 것도 하셨고. 또 힘들게 많은 일들을 하셨던 것 같아요. 면접자: 중학교는, 초등학교 때 그러면 다른 어떤 좀, 말씀해주고 싶은 그런 건... 구술자: 그런 건 없어요. 근데 난 이런 얘기 안 하고 싶은데 면접자: 그, 그 때가 뭐 사회적으로 보면, 사회, 초등학교 때라 관심이 없을 때였던 것 같은데요. 구술자: 관심이 없죠, 그런 건 관심이 없죠. 면접자: 뭐, 정치적인 그런 부분이나 그런 거에 전혀 이렇게... 구술자: 관심 없죠. 그때 뭐 알겠어요. 학교에서 또 교육을 그렇게 시키진 않았을까요? 지금 보면 학교에서 뭘 받았는지 그런 건 별로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뭐 국어 산수 그런 거 배웠겠죠. 지금, 지금 한 40년전 일이니까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는 것 같은데. 면접자: 국민 교육헌장을 강제적으로 외우라고 했달지... 구술자: 있었죠. 외우라고 했었죠. 근데 전 못 외웠어요. 내가, 우리, 나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막 외워라고 이런 것들이. 우리 전 정도는 막 외워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 때 정도부터는 강압적으로 심하게 한다던가, 그런 것들은 없었던 것 같아요. 면접자: 중학교는 진흥중 구술자: 예. 면접자: 몇 년도에 입학하셨는지는 기억나시나요, 중학교는? 79년? 구술자: 그니까 중학교 2학년 때 박정희가 돌아가셨죠. 돌아가셨,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죠. 아, 저 그때 슬프더라구요. 면접자: 칠십 그럼 팔년도에,,, 구술자: 79년도죠. 79년도가 중2였으니까 78년에 입학했네요. 면접자: 78년도에 입학을 하신거네요. 구술자: 그니까 아마 내가 기억나는 거는 수학여행을, 2학년 수학여행을 갔다오고 등교하는데 갑자기 그때 즈음 해가지고 학교로 가는데 이렇게 돌아가셨다고. 박정희 죽음, 돌아가셨다고. 그때도 참 슬펐죠. 눈물을 흘렸던가, 안 흘렸던가, 모르겠는데 하튼 슬픈 기억이 나요. 면접자: 그때는 뭐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약간 쫌 그런 제왕적 권력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그랬는지 몰라도 국부가 죽었다는 그런 생각을 가졌던 어르신들도 굉장히 많이 있었고 또 방송에서도 그렇게... 구술자: 그쵸그쵸. 면접자: 해가지고 전 국민이 좀 추모를 하는 좀 이런... 구술자: 그때 그래가지고 우표, 그 당시 유행이고 그랬으니까, 우표, 우표도 모으고 그럴 때 많았거든요. 취미 생활로, 그래가지고 밤새 우체국 앞에서 아침 일찍 가가지고 새로운 우표 나왔나 사고 그랬는데 그때 인제, 지금 생각나는 건 박정희 돌아가셨다고 기념우표 나오고 그렇잖아요. 가서 사고 막, 기념으로 한다고 사고.. 아마 집에 있을 거예요. 우표도. 면접자: 그, 진흥중이. 좀 그 때 당시, 뭐 70년도 말까지만 해도 중고등학교... 구술자: 함께, 함께 있었죠. 면접자: 중고등학생들 사회 참여가 현재보다도 많았다라고 판단이 되는데. 구술자: 나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고, 인제. 중 3때 인제, 중 3때 5·18이 터지잖아요. 중3때, 중3때 인제 5·18 경험 얘기가 나오는 거죠, 그때. 뭐 아무, 뭐 모르잖아요. 5월 10, 19일인가 아마 학교를 갔을 거예요. 18일인가?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데 중 3일 때죠. 학교를 갔는데 학교가 웅성웅성 거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오면서, 이제 자기 차타고 학교를 오는데, 그 당시 다 버스타고 학교 오니까, 오는데 뭐, 공수부대들이 올라와가지고 버스에서 이렇게 대학생 같은 사람들을 막 쥐어 패고 끌고 내려갔다, 뭐 이런 얘기들이 학교 오니까 나오는 거예요. 나오고, 인제 학교가 웅성웅성 거리니까 그때 담임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했던 거 같애. 너희들 이렇게 함부로 쏘다니지, 돌아다니지 말아라고. 그냥, 어째 부화뇌동하지 말라고 그런거죠. 그러지 말고, 그리고 무등산 인제 무등산 보이잖아요. 어디서나 무등산 보이잖아요. 그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기억이 나. 무등산은 알고 있으니까 다 보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섣불리 행동하지 말아라. 걱정스러워서 그랬겠죠. 걱정해서. 우리들이 뭘 잘 모르고 느닷없이 휩쓸려가지고 돌아다니고, 걱정스러워서 그랬겠죠. 그 얘기를 했어요, 그 얘기를 하고 아마 그 다음날부턴가, 20일인가 21일부터 학교 휴교 내리잖아요. 그래서 학교를 못 갔죠. 면접자: 그 전부터 좀 광주가 굉장히 좀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편이었을 텐데요. 구술자: 근데 학교가, 난 집이 그때 그 바로 중학, 진흥중학교 바로 밑에, 그때는 운암아파트가 있었어요. 얼마 전에 쫌 몇 년 전에 한국 갔을 때 그것도 엄청 달라, 없더라구, 없어졌드라구요. 커지고, 옛날 살던 데가 아니던데. 거기 살았었어요. 운암아파트 살았어서, 그냥 거기서 학교가고 왔다 갔다 하니까, 뭐 걸어서 얼마 안 되고 그러니까 도시 상황을 잘 모르죠, 몰랐는데 인제 18일 날인가, 19일 날인가 아마 그랬을 거에요. 학교 운동장에 그때는 고등학교가 같이 있으니까 그때 인제 고등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가지고 스크럼 짜고, 스크럼이라 그러죠? 막 운동장 돌고 그랬어요. 운동장, 그래서 인제 뭔가가 있구나, 그런 정도만 인제 경험을 한거죠. 그리고 뭐 그 당시에 특별히 뭐 사회에, 사회에 대해서 그런 건 별로 없었죠, 당시에. 그런 건 인제 보고 듣는 그런 정도죠. 그래서 근데 궁금하잖아요. 궁금하니까 19일인가, 20일인가 그 다음 날엔가 학교가, 학교는 휴교하고 인제 그러니까 도청을 나갔죠, 저도. 버스 타고 그때 버스가 운행됐었으니까. 어, 도청, 금남로를 나갔죠. 면접자: 20일 이나 구술자: 19일이나 그 다음날인가, 19일인가 20일 쯤에 나갔을거라고요. 그니까 인제 18일 날 완전히 막 그, 진압한 다음에 시민들이 인제 이러나 저러나 다 죽는다. 이럴 수 있느냐 이런 분위기? 뭐하느냐, 계엄군? 이런 분위기로 같이 집결하자 그런 분위기로 사람들이 모일 때에요. 관심도 많을 때고. 저도 인제 궁금하니까 그때 버스 다녔을 때에요. 버스타고 금남로에를 나갔어요. 금남로에를 나가갖고 보는데 쪼끔 있으니까 통제가 되면서 대학생들 나와 가지고 데모를 하는 거에요. 계엄군들은 있고. 이래서 인제 시민들이 계엄군들한테 막 항의를 해요, 기억나는 거에요 그냥. 항의를 막 해. 니네들이 왜 우리를 때려 잡냐고. 우리가 세금을, 이렇게 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 분위기이에요. 그러니까 하의를 막 하는데 어떻게 나라 지키라고 보낸 놈들인데 선량한 시민들을 이렇게 하느냐, 그래갖고 그런 식으로 항의를 하는 거죠, 정확한 건 아니에요. 하니까 공수부대 리더 되는 사람이, 우리는 그런 거 없다 안했다 그럼 실랑이를 막 해요. 뒤에 역사적으로 보면 5·18때 진압했던 군인들하고 그 당시 변경된 군, 계엄군들하고 그런 과정이 있었다고 얘길 하는데 아마 교체 투입된, 교체된 군인들이었던 것 같은데. 계엄군 아니고. 인제 그렇게, 그런데 계속 시민들은 항의를 했어요. 항의를 하니까 자기는 안 했다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 때리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쪼끔 지나가서 누가 맞았어요. 시민이 맞아가지고 피가 막 흘렀어요,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이제 그 시민이 그 사람 데리고 와가지고 이것 봐라고, 지금 니네들이 이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니까 그 계엄군이 느닷없이 항의한 사람한테 이 자식아, 욕같은 걸 하면서 무릎 꿇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가지고 그 사람을 무릎을 꿇렸어요. 그 광경을 인제 봤죠. 겁이 나더라구요. 겁이 나서 그 길로 도망을 왔어요, 나는. 면접자: 혼자 나가셨습니까? 구술자: 실제로 혼자 나갔죠. 궁금하기도 하니까. 그게 저는 5. 18에 대한 첫 경험이고 인제 운암동이 집이 있으니까 운암동에서 거기 보면 바로 또 집 앞에가, 뭐라 그러지 톨게이트라 그런가, 고속도로랑 중외공원. 광주 박물관 있었던 자리, 체육고등학굔가? 그 쪽에 있잖아요. 광주 야외 공원인가? 공원 있잖아요. 그때 옛날에는 거기가, 지금도 아마 있나? 고속도로로 해서? 면접자: 예, 그쪽 고속도로 빠져나가는 길 있어요. 구술자: 그 쪽 근방에 운암아파트가 있어서 그쪽에 살았었으니까. 그니까 그쪽 상황. 그때 5층, 아파트가 5층이었으니까 5층위에 올라가면 광주 시내가 쫌 보이잖아요. 그러면 저쪽에 불나가지고 연기 나는 것도 보이고. 그리고 , 그러고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때 어디 방송국인가, MBC 방송국인가가 불타잖아요. 그 현장도 갔었던 것 같애. 어렴풋이 기억에. 거기에 간 건지 아, 오래 되가지고 가물가물하는데 아마 그 현장도 봤었는 거 같애. 불나고 이런 거. 그리고 이제 시민군들이 인제 도청을 장악을 하고 이렇게 막 돌아다니잖아요. 돌아다니면 우리 아파트에서도 쌀을 모았어요. 쌀을 모아가지고 주먹밥 만든다고. 나와 가지고 밥해 갖고 나눠주기도 하고. 시민군들이 인제 차타고 돌아다니면 아파트까지 와요. 오며는 거기에서 돌아다니면 슈퍼 같은 데서 그냥 그 차에다가 무조건 음료수든지 빵이든지 무조건 막 실어주고. 근데 거기 가만히 있으면 줘요, 먹으라고. 그러면 그런 거 먹기도 하고 그랬었어요. 그때. 그리고 학교는 계엄군들이 있어가지고 뭐 저기 그, 학교 옥상에서가 계엄군이 총 들고 뭐 그랬던 것 같아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오래 되서 긴가민가하긴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겪은 경험을 했죠. 면접자: 학교 그럼 휴교령은 6월 초에 풀렸나요? 구술자: 그건 정확한 건 모르겠어요. 모르겠지만, 근데 5월 27일날엔가 저기 도청이 다시 계엄군한테 들어가잖아요. 그렇겠네요, 한 그 정도 되겠네요, 그죠? 다시 뭐 학교 가니까.,, 면접자: 학교에 갔는데 반응, 친구들은... 구술자: 어수선하죠, 어수선하고. 어...한명인가 정확히 모르겠어요. 어...다 왔는지, 한 명인지 안 나온 친구도 있긴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한 건 모르겠어요. 근데 그때 지금 보며는 면접자: 같은 반 안에요? 구술자: 지금 보면 오래도 됐고 면접자: 네에 구술자: 아 그런가 보다 그런 생각으로 저는 5. 18을 접한 거죠. 막연한 그런 것이 있죠. 어리고 뭘 몰랐으니까 그때는 그냥 아, 그런가보다. 계엄군이 뭐 그런가보다 그런, 그런 생각으로 5·18을 처음 접한 거죠. 의식적으로 접한게 아니라. 그런 막연한 그런 것이 있죠. 면접자: 아직 중학생이면 아직 어렸을 땐데 그런,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조금 왜 지금 이 일이 일다는 걸 이해는 하셨나요? 구술자: 그 당시에는 몰랐죠. 그 당시에는 몰랐죠. 그 당시에는 몰랐고, 그 다음에 인제 저희 형님이 그때도 전남대 다녔었어요. 저희 형님은, 막 대학생들 때려잡고 이러니까 형님은 도망갔어요. 그 당시 대학생들 대부분 그랬어요. 그니까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많은 그, 학생들은 뭐 피했겠죠, 다. 도시에 있지 않고 피했어요. 형님도 그 분 중에 하나고. 그리고 인제 계속 이어가자면 고등학교 때로 가잖아요. 고등학교는 대동고를 나왔어요. 대동고를 나왔는데 대동고가 그 당시 때는 쪼끔 그, 사회, 사회 참여의식이 좀 강했던 때에요. 그리고 선생님들도 그런 분들이 계시고. 전교조 활동이라던가 대학교 때 그, 선생, 선생님 한분도 대학교때 강사로 오셔가지고 보고 그랬는데 어떤 어, 고등학교 가가지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대동고 선배들이 짱짱했나봐요, 맨날 데모하고. 학교다닐 때도 운동장에서 막 스크럼 짜고 돌고 그랬어요. 1학년, 2학년, 이렇게 보고. 근데 우리 2학년 때만, 저저, 저때, 저 학년 때만 데모를 안 했다는 걸로. 저 위 학년만 해도 데모를 했다 그러드라구요. 학교에서 막 데모하고. 학교 운동장 돌고. 근데 인제 고등학교 때 기억나는 거는, 인제 제가 연극을 잠깐 했었어요. 연극을 잠깐 했는데 연극을 지도하시는 분이 내 친구 중에 쪼끔 사회 또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하는 친구도 있고 그러니까. 근데 연극을 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이 아마 82년, 81년, 81년 되겠죠? 81년도에 박관현 열사가 그때 돌아가시고 그랬잖아요, 그쵸? 그래가지고 학교에서 연극연습을 하고 있는데 막, 메케한 거막 이러는 거죠. 그때 연극 지도했던 분이, 오늘 박관현이라는 사람이 옥중 단식투쟁하다가 돌아가셨다고 그러면서 우리 묵념하자고 그러드라고요. 묵념하고 상록수 노래 부르자고 해서 상록수 노래를 불렀고. 그런 것이 있었고 그 다음에 인제 친구 중에 또 자기 형님이 전, 전남대학교 사회학, 사회대 거기 다니는 분이 계셔서 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앴어요. 그 친구도 거기 영향을 받아서 그런 관심이 좀 있었고. 그래서 그 친구랑 같이 5·18 쯤 되면 광주에서 시위를 많이 하잖아요. 그믄 같이 나가서 따라다니고 최루가스 마시면서 도망 다니고. 고등학교 때는 쫌 그런 활동을 그냥 뭐, 의식이 있어서한다기보다 그냥, 그 당시 광주 사람들 다 그렇게 하니까. 때만 되면 그렇게 하고. 또 대학생들이 그렇게 하면 시민들이 박수쳐주고, 힘내라고 적극적으로 함께하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전체가 그러니까. 저도 인제 밤에 학교 끝나고 가서 같이 참여하고. 고등학교 때 그랬죠. 면접자: 어떤 특별하게 어떤 의식화 돼 있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차츰 학교, 그런 분위기들도 있고 그런 것도 있고 해서 선생님도. 구술자: 많은 사람들이 사회 의식화되면서 사회문제에 눈뜨게 되고 이런 과정들 거치잖아요.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냥, 그냥 뭐 자라나는 게 그런 환경, 대부분 저와 같은, 저 또래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다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 들어요. 비슷한 과정 이렇게, 저 그 당시 그때 중 고등학교를 거쳐 갔던 그런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주위도 다 그러고 그 당시 광주 전체 분위기가 뭐 집으로 말하면, 전두환 물러가라, 그런 게 절대적으로 강한 상황이었으니까. 크게 저는 어려움은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생활이 뭐 그랬으니까. 그리고 인제 대학을 가야되는데 저희 집 형편이 대학갈 형편은 아니고. 그러면서 인제 했는데 제가, 저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대학을 한번 가보자.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애요. 이런 사회 현상들을 이런 것들이 있는데 누구 가르켜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뭔가 체계적으로, 사회 의식적으로 뭔가. 아, 이래서 이런가보다 그런 것들을 좀 알아야 되는데 누가 가르켜줘요? 그냥 멋모르고 따라다니기만 했었지. 아, 대학을 가가지고 졸업을 하지 않더라고 한 1,2 년이라도 그런 걸 접해보고 좀 뭔가 사회를 알아보자, 그런 생각은 있었던 것 같애요. 대학을, 그래서 대학을 한번 가자.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취업이나, 자기 어떤 앞날 비전은 한 발짝 더 성장할 수 있는, 과도기적으로 대학을 생각한 게 아니라, 저는 그런 생각이 좀 있었던 것 같애요. 가서 뭔가 좀 배워보자. 왜냐면 제가 대학을 다니자면 우리 집 형편이 대학 다닐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리고 고등학교 때 집안 형편이 그러니까 대학 간다는 걸 쫌 포기를 좀 했었어요. 공부를 좀 등한히 하고. 그런 것이었는데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인제 시험도 대충 봤는데 뭐, 원서내서 떨어지고. 근데 떨어지고 나니깐 많은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그래도 한번 대학은 가보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재수도 했죠. 면접자: 그때 처음, 인제 떨어지셨다고 그랬는데 구술자: 그것도 전남대, 전남대, 그것도 전남대. 성적이 안 돼서 원하는 데는 아니었지만 써보자 했는데 떨어졌어요. 2지망에는 붙었는데 그 당시에 장학금을 좀 받아야 되니까. 근데 2지망으로 붙으면 장학금을 안 줬어요, 그때. 1지망만 장학금을 줬다고요. 그래서 포기를 했어요. 포기를 하고 재수를 했죠. 뭐 또 한 번 더, 좀, 이왕 갈 거면 생각이 있는 데를 가보자, 그래서 했는데, 그렇게 됐어요. 일 년 재수했어요, 재수하고... 면접자: 재수를 하고 85년도에... 구술자: 85년도에 인제 학교를 들어가. 들어갔는데, 인제 그때는 농생물학과를 들어갔어요. 면접자: 농생물학과요? 구술자: 네, 농생물학과. 아마 장학금을 좀 줬을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들어갔어. 장학금을 받고. 면접자: 특별하게 농생물학과 하고 적성, 뭐나 관심보다도... 구술자: 그것 좀 강했죠. 그게 쫌 대학을 좀 가보자. 그것도 컸고 성적도 그랬고. 성적도 그 정도 갈 수 있는 성적이었고. 그렇죠. 면접자: 점수에 뭐 그런... 구술자: 장학금은 다는 안 받았지만 그래도 쫌 장학금 혜택도 좀 있고 아마, 잘 모르겠어요. 장학금 혜택이 있었나, 어쨌나. 잘 모르겠어요. 여튼, 어떤, 그 당시 저희 집안 경제도 쪼끔 인제 등록금은 낼 수 있는 정도가 됐고. 그래서 인제 집안 형편도 쪼끔 경제적으로 나아지고 그래서 대학도 갈 수 있었겠죠. 뭐 지금은 뭐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때 대학 가는 것도 참 힘들잖아요. 소 팔고 막, 그렇게 대학 다니고 그런 상황이니까. 그렇게 됐지요. 면접자: 80년대 중반이면 아, 물론 전두환정권이긴 하지만 80년대 초반보다도 쪼끔 더 유화정책을 펴면서 대학 내 학생회 활동들이 더 활발해지기도 하고 좀 그랬는데. 구술자: 인제 막 꽃이 필 때죠, 84학년. 84학번 뭐, 그때 학원 자율화? 그때 학원 자율화가 그 전 해엔가? 그 전 핸가 됐을 거예요. 그래가지고 점차 학원이 활기가 띄어지는, 그리고 그 당시 학교의, 대학교에 있었던 사복 경찰들, 경찰들이 인제 밖으로 나가는, 그런 시기에 학교를 들어간 거죠. 학교를. 상주해 있지 않는 시기에. 얘기 들어보며는 그 전에는 상주해 있어가지고 몇 사람 모이기만 하면 막 학교에서도 최루탄 터치고 흩어지라 하고 그랬다는데 그때 84학년 때까진가 아마 그랬을 거라고 그랬던 것 같애요. 83학년 때 까진가? 정확하게 정리가 안 돼서 그러는데. 면접자: 학교 분위기는 좀 어땠나요? 그런 것에 쫌... 구술자: 많이 자유로워졌죠. 면접자: 아니 인제 선생님께서는 이런 어떤 좀 운동적 성향? 뭐 꼭 그걸 일학년때부터 실천하기 위해서 가신 것은 아니었죠? 구술자: 그쵸그쵸그쵸, 근데 그쪽에 관심이 많이 있었죠, 근데. 관심은 있었고. 꼭 그 할려고 간건 아니지만 관심은 있었고, 그랬었어요. 이 뭔가, 지적 욕구, 이런게 있었겠죠? 지금 돌이켜보면 면접자: 과 생활 외에 특별하게 뭐 동아리 활동 같은 거나 그런거 하신게 있으셨나요? 구술자: 동아리 활동 했죠.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들어가자 마자 먼저 들어간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들어간 친구가 거기를 소개를 시켜줬죠. 소개를 시켜줘서 거, 소개를 받아서 동아리 활동을 했죠. 면접자: 어떤 동아리였습니까? 학습 동아리였습니까? 아님 문예, 문예... 구술자: 학습동아리죠. 내가 이런 얘기 다 해야 되나? 면접자: 어, 이제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말씀하셔도 됩니다.(웃음) 구술자: 아, 나참. 그니까 그 당시 학교 동아리는 인제 그 비합, 뭐 합법 이러잖아요. 맞는지 모르겠는데. 하튼 잘 모르지만 하튼 간에 언더 써클이 있고 뭐 그러잖아요. 그런 부류의 동아리 활동을 한 거죠. 이제 이름이...이름을 얘기해도 되나? 나 이름이 확실한지 어쩐지는 모르겠는데 하튼, 그룹을 황토라고 그랬나? 아마 그럴 거예요. 그, 이런 얘기도 해도 되나? 기봉이 형하고...선배니까, 바로. 같이 학습하고 그랬으니까. 그쪽으로 활동을 시작했죠. 근데 거기 활동을 하고 어...일 년을 보내고 2학년 2, 1학기까지 보내고 군대에 오라고 인제 신체검사, 신체검사를 받고 그러지 않나요? 2학년 2학기 때까진가 다니고 휴학을 했어요. 이제. 예. 면접자: 그,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을 하신건가요? 구술자: 그쵸. <off the record> 구술자: 아니, 근데 이거는 철환이를 만나서 얘기를 해도 되고. 그 종화형을, 종화형은 다 모르지. 종화형은 87년돈가 저기, 뭐냐 오월, 오월 특위라고 나오잖아, 오월투쟁위원회라고 항상 해만 되면 나오니까. 87년엔가 아마 종화형이 투쟁위원장을 했을 거라고, 그때. 확인해봐야돼, 잘 몰라. 종화형하고도 얘기하고 그런가? 면접자: 아니, 저희, 뭐 관련해서 가끔 저희 연락도 드리고 하니까요. 구술자: 그니까 그때 같이 투쟁위원장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 복학생 복지위원회 그거 만들어가지고 하고 그랬었고. 그때 종화 형이 복학해갖고, 군대 제대 복학해가지고 막 활동하고 그랬을 때거든. 그런 관계는 종화 형이 더 잘 알 테니까. 면접자: 질문을 좀 바꿔서요, 그러면 군대를... 구술자: 그래갖고, 그래갖고, 그래서 내가 녹음한거요? 네, 녹음 괜찮습니다. (웃음) 어떡하죠, 하지마, 하지마봐. 어떤 걸 녹음... (잠시 중단) 구술자: 이 과정에서 물어볼 것 물어봐, 이거 빼고, 인제 얘기 안 하고 이거는. 면접자: 그, 80년대, 85년도에 입학을 하셨다고 했는데 계속 어찌됐건 동아리 활동이나 학생회, 학생 운동 성향의 그런 활동을 계속 해오셨는데, 당시 오월, 매년 오월이 되면 이제 그런 기념식이랄지 추모식을 진행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한 정부 탄압도 분명 있었을텐데 주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학교에서는 좀 그런 걸 좀 진행을 하셨나요? 구술자: 그니까 이제 학교에 들어가니까 뭔가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뭔가 인제 사회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 알아가잖아요. 사회적 모순, 우리 정권의 모순, 뭐 예를 들자면 김남주 시인의,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학살자라면, 그러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감옥이고 어쩌고 막 이런 얘기, 그런 시들이 있잖아요. 그런 거죠.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학살자라면, 그런 부분이 가슴이 뛰고 그러잖아요. 그럼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없다, 이런 식이 되잖아요. 그니까, 그러고 그 당시는 4.19가 되면 4.19 집회를 해가지고 끝나고 데모하고, 5·18이 되면 5·18 집회하고 일주일 내내, 인제 5,18 같은 경우는 일주일 내내 하죠, 그 전부터 하든지. 시위하고 학교에서 시위하고 저녁에 시내 나가서 또 하고. 이런 과정. 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냥, 그냥 했죠. 근데 인제 가장 기억에 남는 거는, 지금이야 망월동을, 제가 얼마 전에 한국 방문했을 때, 버스타고 택시타고 가고 그러잖아요? 차, 차 있는 사람 다 택시타고 간다든가. 그 당시 때는 막잖아요 망월동을 못 가게, 망월동을 못 가게. 집회를 본부 앞에서 하고 후문으로, 후문을 통해서 걸어가려고 하면 후문 막고 못 가게 한다고. 그러면 어찌되든 간에 걸어서, 산을 몇 개 넘고 비, 비오면 비 맞고 그리고 망월동 가서 참배하고 막 그랬거든요. 그런 기억들이 참 어려운 기억들이지만 그런 것에 비해서 지금은 얼마나 좋아졌는가. 그 당시 어려운 싸움이면 싸움, 투쟁 속에서 오늘을 만들어냈잖아요? 그니까 뭐, 저에게 있어서 5·18이 어떤 의미냐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그런 과정들을 볼 때, 그게 5·18이 그렇게 탄압 속에서, 힘들게, 그 당시는 힘들었지만 끝내는 이기고 말았다는 거. 85년, 86년, 87년, 88년 이때는 망월동을 갈려면, 5·18 때 망월동을 갈려면 그렇게 최루가스를 맞아가면서 갔다만 지금은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거. 그거는 단순히 얻어진 게 아니라 그, 비 맞으면서, 최루탄 가스 맞아가면서, 산을 막 넘어가면서 망월동을 갔던 그 사람들의 힘 때문에 이런 결과물이 났다는 걸 봤을 때는 5·18이 어떤 5·18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어떻게 우리가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는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런 걸 봤을 때. 해외에서도 어떤 어려움들이 많잖아요. 해외에서도 엊그제 선거가 끝났지만, 다시 공화당이 상하원 장악을 하고 이민 문제 이런 것들이 참 시련이 앞으로 더 인제 생길 것 같은데. 그런 것들도 더 열심히, 어렵지만 해 나가면 또 좋은 일이 되지 않을까? 어...그런 역사적인 경험이 어찌 보면 현대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있기 때문에 어렵지만 분명히 옳은 길이라면, 정의롭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라면 분명히 저는 된다고 믿어요. 해외에서도 그런 정신, 5·18 이 가지고 있는 그런 정신.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이 저항하고 투쟁하고 나눠먹고 이런 것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어떻게 보면 그게 승리라면 승리, 뭐 명예회복이라면 명예회복. 이런 과정들이 투쟁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결과물이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그런 5·18 에 대한 것들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어떠한, 동포들이 살아갈 때 이겨낼 수 있는, 우리 현대사적인, 역사적인 산물, 그런 면에서 참 좋아요. 그런 것을, 그래서 여기서도 그런 얘기를 좀 많이 하고 싶고 5·18 이 되면 앞으로도 그런 쪽으로 얘기들을 많이 하고 싶어, 하고 싶어요. 5·18 정신을 뭐 기리고 그날을 기념 하고 그런 거지만 5·18이 지금 어떤 모습인가, 라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이쪽에서 살아갈 때, 미국에서 살아갈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역사적인 모습으로 분명히 우리에게 있다는 거. 뭐 쩌기 합수형님이 우리 역사적 거울이라고 이렇게 뭐 얘기도 하고 그랬지만. 그런 면에서 5·18은 지금 우리한테 살아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말이, 나는 이런 표현이 참 그런데 (웃음) 내 언어 같지가 않아가지고 (웃음) 면접자: 마무리 발언을 해주셔가지고 구술자: 연결 되가지고 (웃음) 면접자: 다시 옛날걸 물어보기가 (웃음) 좀 애매한데요. 구술자: 앞뒤로 편집하세요. 면접자: 80, 뭐 88년에 그러면 농대 회장 88년에 하신 거죠? 구술자: 네 88년. 면접자: 어, 그때 당시 87항쟁 상황을 쫌 이야기, 학교에서 87항쟁 상황을 좀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그때 쫌 어수선할 때 였을 것 같은데, 87년이면. 구술자: 아...근데 뭐, 그때 그 활동했던 사람들이 분명히 많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만나서 얘기하면 그 당시 87년도가 아마 김승남? 그때 총학생회장이 뭐, 김승남 회장인가 아마 그럴걸요? 지금 보면 오병윤, 제가 기억나는 거는, 지금 국회의원 하고 있죠. 그다음에 황일봉, 제가 황일봉, 오병윤, 김승남, 그 다음에 이게 우리 선배들 총학생회장 있을 때고. 나하고 같이 했던 사람이, 기억이 잘 안 나. 하튼 최 뭐시긴가 그랬을거야. 최완욱이구나. 최완욱. 그니까 나 있었을 때, 저가 활동했을 때 총학생회장이 최완욱이예요. 면접자: 이분도 지금 광주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지 않나요? 구술자: 어, 최완욱. 면접자: 성함을 좀 들어본 것 같은데. 구술자: 그 다음이 김지순가, 김... 하튼 그 다음이 송갑석. 그니까 그래요. 그런, 그런 텀에 제가 학교에 존재를 좀 했었죠. 87학년 87항쟁 같은 경우는 아, 또 그런 것이 있구나. 제가 저기 교생실습을 나가요, 87년도에. 87년도 여름방학에 교생실습을 나가요. 참 어수선할 때잖아요. 근데 교생 실습을...미안한 부분 중에 하난데요. 근데 이제 아침에 총학생회, 1학생회관 총학생회실에서 모여가지고 87, 60항쟁이고 그랬으니까, 하루하루 이렇게 막 점검하고 그러는데 그걸 뒤로 하고 저기 뭐냐, 아닌가? 88년도인가? 나 헷갈리는데... 모르겠네요, 헷갈리는데. 아무튼 간에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어, 88년돈가보네.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대동고로 갔지요. 대동고를 갔는데. 아, 88년도 같네요. 학생회장 했을 때니까. 87하고 좀 틀려지네? 교생실습을 갔는데 막 그때는 통일,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88년도가 그게 좀 심했었어요. 60 그거 해가지고. 근데 대동고, 얘기가 나왔으니까, 대동고 후배들이 운동장에서 스크럼 짜고 데모를 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 생각이 들드라고. 내가 무슨 선생님을 할라고 교생실습을 나와서 이러고 있는가, 생각이 들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땐가란 생각이 들고 그러드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뒀어요. 교생실습을 그만 뒀어요. 다시 인제 학교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그랬는데 그때 그 학교 선생님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그랬거든요. 그분들한테 미처 말도 못하고 실습을 그냥 나 혼자 그만 둬버려 가지고 그분들한테 지금 쫌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지금 생각난 김에. 87년도는 그랬던 것 같아요. 거의 학교에서 살았죠. 학교에서 살고 항상 어떤, 학교가 지휘본부가 되고 그러잖아요. 그때 사회 연대적으로 하고 그럴 때니까. 그러면 어, 학교에, 그 당시 학교에 경찰병력들이 안, 못 들어올 때였니까 근데 경찰병력이 들어온다고 한다고 만다고 막 그랬었어요. 그러면 막 도망갈 준비 하면서 학생회에서 잠을 자고 그면 그 다음 날 정신 차려 시내 나가서 투쟁을 하고 다시 들어오면 또 내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당시 우리 용어로는 택, 택 짠다고 그랬어. 요만한 칠판에 광주 시 도시 다 이름 적어놓고 어느 조는 이쪽으로 가고, 어느 조는 이쪽으로 가고, 몇 시에 뭘 만나고 막 이런 거 하고 그러거든요. 인제 그런 거 기획하고 그러면서 87년도는 60항쟁, 그때는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거의 학교에서 살았죠. 그러니까 많이 다쳤고, 뭐 구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했을 때고 책으로도 나왔을 테고 그랬겠지만. 면접자: 그때는 경찰병력이 학교로는 안 들어왔었나요? 구술자: 아마 그때 못 들어왔을 거예요. 86년도까지는 들어왔던 것 같아요. 시위하고 그러면 경찰, 학교 안으로 들와요. 중앙도서관까지 도망가고 막 그랬거든요, 중앙도서관까지 최루가스 뿌리고 그랬거든요. 근데 87년도에는 아마 안 들어왔던, 못 들어왔나? 시위하고 그러면 들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녁에 어, 무단으로 들어와 가지고 잡아가고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니까 학교에서 잤으니까. 그리고 만약에 들어올 것 같다 그러면 도망가고 그랬는데, 아마 근데 정확한건 모르겠어요. 긴가민가해 모르겠어요. 기억으로 학교 다닐 때 기억으로는 들어왔었어요. 86년도까지는, 뭐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근데 87년도는 아마 안 들어왔을 것 같기도 해요. 면접자: 6.10항쟁이 어찌됐건 노태우 항복 선언을 받아낸 걸로 어떻게 보면 일단락이 되잖아요. 보통 5·18 에서도 5,18의 연장선상으로 87항쟁으로 이렇게 하기 때문에 5·18 에 대하 완성, 마무리를 87년으로 보는 것도 일부 계시기도 하는데. 어찌됐건 승리라고 표현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항복 선언을 하고 직선제 되고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서 그때 당시 그, 직접 그 현장에서 그걸 뭐 이렇게 하신 분으로서, 참여했고 기획하고 했던 분으로서, 이게, 앞으로 이게 어떻게 변할 것이다, 라는 게 좀, 뭐 그런 게 앞으로까지의 뭔가가 있었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이제 그 6.10항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박종철 저기 고문해갖고, 박종철 열사. 그게 1월 13일인가 아마 1월 몇일날 그랬을 거라고. 87년도는 어찌 보면 그때부터 시작이 된 거죠. 그 먼저 동력은 5·18 이죠. 당연히 5·18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또 이런 얘기 돌아가지만, 저도 여기서 가끔 그런 얘길 하지만. 5·18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 않아요? 근데 저는 이제, 광주 5월 27이었더라면. 5월 27일 날 그 새벽에 그 도청을 사수해서 산화하신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광주는 엄청난 힘을 잃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이 들거든요.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 공수부대들이 들어오면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 역사의 증인으로서 마지막 도청을 사수하는 그 사람들의 결의에 목숨을 건 그 날 밤, 그 날 밤이 저는 지금까지의 5·18을 싸워왔던 힘이 지탱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많은 힘든 일들이 있었겠지만 저는 그걸 크게 생각하거든요.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저도 그때 5월 27일 날 헬리콥터가 막 떠가는 소리 때문에 깼거든요. 그때는 잘 몰랐죠. 그치만 자라고, 대학가서, 나는 그때 도청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갈 때 자고 있었구나. 그걸 참 먹먹하다고 해야 하나 막막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잖아요. 그니까 그 당시 5·18을 정확히 몰랐던 사람들도 그런 과정들 나중에 접했을 때, 아, 광주는 그렇게 죽어가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죽어가면서 그렇게 희생해서 싸워가고 있을 때 나는 뭐 했던가, 라는 그런 마음. 5월 27일날 죽음을,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했던 사람들의 그런 마음. 나는 뭐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걸 보면서 내가 이래선 안 되겠다, 쪼금이라도 더 해야지. 그런 것들이 쌓여서 5·18 어떤, 싸워왔던 투쟁의 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글고 가끔 생활하면서도 어렵고 힘들 때라도 그분, 그때 그 심정, 5월 26일 새벽에 공수부대를 맞이했던 그 도청의 산화해 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이 달라질 것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는데, 최루탄 맞고, 공수 부대들한테 뭐, 전경들한테, 전투경찰들, 전경들한테 곤봉 몇 대 맞고 최루가스 마시고, 무슨 대수에요, 감당할 수 있죠 그걸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나는, 저는 거기서 나왔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 후로부터 5·18 이나 그런 모습을 기억하고 나는 그때 뭐 했던가, 내가 이래선 안 되지, 그분들을 위해서 쪼금이라도 따라가야지, 그런 마음들이 81년, 82년 분신하고, 뭐 미문화관 점거하고. 계속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이뤄내야지. 이런 생각에서 그 힘들이 모아져서. 그러니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니까 많은 사람들도 죽음을 또, 그래 내가 이렇게 죽지 뭐. 그런 마음도 생겼을 거고. 이미 죽은, 죽은, 산화하신, 산화해 가신 분들이 있으니까 고문을 당하더라도, 죽더라도 얘기를 안 하고 그랬을 것 아니에요. 박종철 그 분도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겠지만 산화하신 거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걸 계기로 87년 새해 일월 달부터 뭐, 시작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 기억해보면 금남로 충장로 나가갖고 박종철 살려내라고, 이러면서. 그때부터 계속 1월, 2월, 3월, 신입생 환영회 하고, 4.19 하고, 5·18 하고 이러면서 6.10 항쟁이. 이런 과정들이 계속 전국적으로 그 무슨, 조직들도 결성이 되고 뭐 그래서 6.10 항쟁이, 힘이 그 순간 모아져서 팍 터졌지 않았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인제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우리가 생각한 만큼의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어땠든 간에 노태우 뭐, 말하자면 항복 선언, 직선제로 했고. 인제 그때 많이 얘기가 된 게, 왜 5·18이 생겨났는가. 인제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근본 원인이 뭔가 했을 때, 군부의 어떤 그런 문제 이런 것도 있지만 5·18에 의해 그 속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보습이 미국 문제잖아요. 정말 은인으로만 알았던, 우리 편인 줄로만 알았던 미국이 우리 편이 아니고 군부 편이었구나, 독재자 편이었구나, 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 5·18이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독재자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을 바라보니까 미국이 분단한, 우리 조국을 분단하는 것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미쳤구나, 이렇게 또 하게 되고. 그런 속에서 아, 이런 문제들이 좀 본질적으로 해결이 되려면 그니까, 5·18문제가 본질적으로 문제 해결이 되려면 단순히 직선제를 개현하고 뭐 정권이 OOO 141106_김준_02_00:20:45 이런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의 문제가 해결되고 분단 문제가 해결되는 게 이렇게 올바른 방향이지 않는가란, 그런 것이 막 학생운동 사이에서는, 그래서 NL도 생기고 PD도 생기고. 노선이 생기잖아요, 86년도에 NL, PD 생기고, 전남대 같은 경우에 NL의 뭐 어쩌고 다음 얘기 다 아실 거예요. 인제 그런 속에서 미국의 문제와 분단의 문제가 생기면서 그 다음부터 이제 분단 통일의 문제가, 6.10항쟁 이후로 최대의 학생 운동 속에서의 화두면 화두랄까 이게 부각이 되죠. 그래서 그 다음해에 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88년도. 89년에 평축을 계기로 해서. 그쵸? 평축을 계기로 해서 국제 평화 대행진. 미국에서 주도적으로 합수형님, 윤한봉 선생님께서 많이 참여, 관련이 돼있으신 국제평화대행진이라고 부르지만, 그런 문제. 그래서 그 이후로 학생운동의 보며는 통일 운동 쪽으로 많이 변화를 하잖아요. 1차적인 5·18 의 문제가 노태우 정권의 그, 항복 선언으로 직선제로 개편이 됐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하기 위해서는 미국 문제와 분단 문제를 이렇게 해결해야 되겠다. 그 문제로. 변화하죠, 그쵸. 그니까 이제 궁극적인 5·18 문제의 해결은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 뭐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자주적인, 정말 민족 자주적인 정권 그리고 분단의 해결. 어,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 5·18은 나름대로 또 역할을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어요. 질문에 대충 연계가 됐나 모르겠네. 면접자: 그 88년도에 선생님께 농대 학생회장으로, 그때 과정이 글쎄 뭐 선생님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그런 구술자: 사회적 분위기가 있죠, 학생 내에 분위기가 있죠. 87항쟁이 끝났잖아요. 87항쟁이 되가지고 많은 학교 내 분위기가 인제 그, 운동 성향이 있는, 그니까 모르겠어요. 학생, 이런 평가를 제가 감히 할 수 있나, 그 분위기를 얘기할 수 있나 모르겠지만. 87년도까지의 학생회의 구조하고 88년부터의 학생회의 구조는 쪼끔 달라요 쪼끔. 어, 그니까 87년까지의 학생회는 어떻게 보면 이렇게 그, 특별히 나대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학생 운동 그룹이 있고 그런 공개단위의 학생 운동 그룹이 있고. 그럴 거 아니에요. 비합, 표현이 좀 어색하고 그래하지만 쫌 이해를 해, 잘 해서 들었으면 좋겠네요. 말이 좀 조심스럽긴 한데 하튼 그런 87년까지는 그런 게 있었어요. 왜냐면 많이 잡혀가기도 하고 그, 조직을 보호해야 되기도 하고 이러니까. 그래서 이게 87년까지는 그랬는데 88년 학생회부터는 조직에서 나름대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대거 학생회장 후보로 다 출마를 해요. 그중의, 그중의 한 사람이죠, 저도. 근데 그때 분위기가 87항쟁 이후, 선거가 11월 달 되잖아요, 12월 달인가? 선거가 되잖아요? 그니까 그, 87항쟁 이후로 사회가 엄청 인제 많이 민주화라면 민주화랄까? 아니면 쫌 개방적이라면 개방적이랄까? 아니면 쫌 더 진보적이면 진보적이랄까? 그런 분위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또 학생 전반적으로, 물론 우리 전남대학 같은 경우는 뭐 다른 데보다는 쪼끔 더 사회진보적인 그런 쪽에 있긴 했지만 어떤 전체 분위기가 그랬어요. 거의 대다수가 학생회로 나가서 그게 거의 다 당선이 됐죠. 저도 뭐 어렵다고 보긴 했지만 무난히 당선이 됐죠. 제가 잘나서 당선이 됐다기보다는 그 당시 사회 분위기, 그리고 내 활동 경력, 뭐 있을 거 아니에요. 어느 활동했고 그걸 선거에 나가서 다 보이는 거니까. 그런 경력. 뭐 이런 것들이. 제가 잘나서 했다기보다 그런 분위기가 돼서 당선이 됐을 걸로 생각이 들어요. 면접자: 그때 88년도에 선생님께서 농대 학생회장 했을 때 총학생회장이 최완욱씨? 구술자: 아마 그랬을 거예요. 면접자: 다른 단대회장들은 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확실히 다 기억은 못하겠어요. 오래돼서. 근데 하튼 그때 법대, 사회대, 공대, 농대, 자연, 자연대? 하튼 거의 대다수가 함께 활동했던, 활동했거나 자주 얼굴을 봤던 그런 사람들이 많이 됐었어요. 면접자: 아까 말씀하신 이제, 89년 상황으로 쫌 넘어가서요. 인제 제가 기억이, 제가 쫌 기억이 틀릴 수도 있는데, 다를 수도 있는 것 같은데,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어찌 됐건 그런 과정에서 5공 특위, 청문회 개최가 되고 그런 게 만들어지면서 뭐 이제 5공 광주문제와 관련된 청문회들이 어찌됐건, 이게 정치적으로 금기시 됐던... 테잎 잠깐 갈고 가겠습니다. (DV TAPE 교체로 잠시 중단) 내용 상당부분 누락 구술자: 그러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그럼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나 후배들이나 선배들이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특히 또 제가 또 문화 쪽에 그 쪽에 잠깐 몸 담이 활동 했을 때도 다들 어렵게, 지금은 얼마나 받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뭐 만원, 만 오천 원, 이만 원 이런, 이런 거 가지고 생활하고 그랬던 시기라, 정말 열정 하나로 버텼던 시기라. 근데 그렇게 함께 했던 사람들을 그냥 놔두고 딸랑 미국에 와가지고 산다는 거 자체가 너무 그분들한테 미안하잖아요. 여기 살면서 그런 미안함들이 많이 있었죠. 난 여기서, 그래도 그 사람들 보다는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 그믄 괜히 지금 현장에서 열심히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뭐 조국이 뭐간디, 조국의 자주 민주 얘기하면서 통일 얘기하면서 막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그런 생각하면. 똑같이 해봤기 때문에 알잖아요. 그니까 그런 생각을 뻔히, 나는, 나는 거기에 떨어져 나와서 여기 미국 생활 한다는 게 미안하고. 항상 그런 죄스런 마음, 이런 것들이 존재했었죠. 그래서 대충 좀 여건이 된다면 다시 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라는 그런 마음들이 많이 있었죠. 면접자: 근데 미국에 도착했던 날짜는 기억하시나요? 구술자: 기억하죠. 면접자: 90년... 구술자: 90년 3월 달이요. 3월 24일입니다. 면접자: 집을 어디, 뭐하셨나요? 구술자: 그때는 누님이 토렌스(Torrance)에 계셨는데, 토렌스에 계셨는데 저희 인제 매형 되는 분이 인제 컨트랙터(Contractor), 목수죠, 목수죠. 여기서 말하면. 건설업자죠, 건축, 건축 하시는 분, 그분이 인제 생업을 그걸로 하시는 분이라 저는 그쪽으로 와가지고 일단은. 그분들은 사회 참여라던지 뭐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는 모르죠. 근데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시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 그...일상적으로 생활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저도 여기에 합류를 해서 오자마자 매형이 그런 건축일을 하기 때문에 따라다니면서 인제 목수일도 배우고 일도 도와드리고 뭐 그런 시작을, 생활을, 이민 생활을 했죠. 도와드리고 그런 시작을 했죠 면접자: 오면 가장 불편한 게 아무래도 언어일텐데, 그, 매형 되시는 분은 한국어 말을? 구술자: 한국분이셨어요. 면접자: 주독? 구술자: 아, 인제, 그... 여기 주한미군에서도 우리 있지만, 주한미군에서도 한국 사람들 많이 있어요. 그니까 주독미군도 한국사람 많이 있어요. 인제 근데 또 여기는 이혼이 자유롭잖아요. 아, 이런 얘기 쫌 그런데. 그니까 또, 또 다른 분이세요.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니까 여기 와서 어머님 초청해서 어머님이 또 우리 초청하고 이 기간이 몇 년 걸린다고요. 몇 년 사이에 누님의 생활환경도 많이 변했죠. 그래서 그때는 좀 다른 첨에 주독 미군이었던 분이 아닌 다른 분이 함께 살고 계셨죠. 면접자: 와서 제일 좀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점이 뭐였나요? 구술자: 그니까 제일 불편한 점은 말이 안 통하잖아요. 그리고 여기 미국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중교통이 많이 발전이, 한국처럼 몇 번 몇 번 있어가지고 버스만 타고 돌아다니는 시스템이 아니고, 차가 있어야 돼요. 운전면허 있어야 되고. 운전면허도 당장 나오는 게 아니라 몇 달 걸려요. 그것이 있고 그 다음에 인제 어찌 보면 광주라는 곳에서 활동하다가 이렇게 왔는데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근데 인제 어찌 보면 시간은 흘러가지고 4월도 지나고 5월이 다가오니까 어, 마음이 좀 이상해지죠. 5월하면 뭔가 가슴이 뛰고. 이렇게 두근거리고. 내가 뭐하나,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내가 뭔가 해야 하는데, 뭐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이 초창기에 많이 힘들었죠. 어떤 육체적인 힘든 것 보다 국, 국내에서 이렇게 연장선상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거 이런 것들이 많이 힘들었었죠. 내가 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이런 것들. 그게 한 몇 개원 된 것 같아요. 몇 개월 된 것 같고 그 다음에 우연찮게 신문에서 여기에서 5·18 행사를 한다는 광고를 봤어요. 광고를 봐서 저희 누님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인제 쫌 태워달라고 해서 지금 토렌스라고 하는 데서 LA하고 시간이 차로 30분에서 한 시간? 교통 체증이 있으면 이런 거린데 뭐, 제가 지리도 모르고 차도 없고 뭐 어딘지 모르니까 부탁을 해서 이러이런 장소로 같이 가달라 부탁을 해서 그때 처음으로 90년 5·18을 여기서 맞이를 했죠. 여기 그때 이 동포사회에서 나름대로 5·18행사를 하는 단체들이 있었더라구요, 있어서 5·18 행사를 하는데 거기서 인제 참석, 참석 했고 또 거기에 인제 5·18 망월동 사진 영정 놓고 분향한다고 그런가요? 촛불피우고 이렇게 향 피우고 하는데 절하고 그런 무대도 설치되 있고 누구 강연도 했는 것 같고 그래요. 면접자: 그때 당시 기억 안 나실, 기억나시는 부분만, 행사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됐나요? 어떤 내용의 어떤 행사라고 이렇게? 구술자: 그러니까 대충 식 하기 전에 그냥 분향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놓고 그믄 오는 대로 와서 분향하고 자리에 앉으면 뭐, 식 하고, 강연 같은 거 하고, 합창 같은 거 하고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그런 식으로 뭔가 되지 않았나. 면접자: 그때 90년 기념식은 어디에서 진행을 했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윌셔(Wilshire) 연합 감리교회라고 지금 민족학교에서 쪼끔만 떨어져 있는데, 여기서 뭐 한 200m나 떨어질라나? 여기 윌셔 윗 거리라고 감리교 교회에, 교회에서 했었어요. 면접자: 그때 참석 인원 같은 것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근데 어떤, 많이, 의자에 많이 좀 찬 걸로 알고 있어요. 면접자: 대부분이 한인... 구술자: 대부분이 한인들이죠. 면접자: 그때 뭐 누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가 간게 아니라 광고 하나만을 보고 가시게 된 게 이게 계기가 돼서... 구술자: 거기서 이제 지금에서야 알게 됐지만 그때 인제 재미 한, 한청련. 한청련이죠. 그 한청련 그, 저기, 젊은 활동가들이 거기에서 준비하고 또 그 외에서 그 당시에 활동했던, 단체는 잘 모르지만 하튼 뭐. 한겨레, 재미 한겨레. 기억나는 건 그 정도네요. 왜냐면 제가 또 관련되었던 조직이 그런 조직이었기 때문에, 단체였기 때문에. 그러네요. 가물가물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했을 때는 아, 그분들이 그런 거였구나. 또 그 후에 그 분들을 만났기 때문에 기억을 하죠. 면접자: 그럼 그, 그걸 참석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한청련이라든지 한겨례 라든지 그런 활동들을, 사회 활동들을 하고 있는 단체가 있구나, 라는 건 모르고 계셨나요? 구술자: 근데 인제 제가 학교에서 제가 활동할 당시에 선배가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그, 미국에 우리가 존경할만한 분, 아주 훌륭한 분이 운동가가 계시는데 윤한봉 선생님이라고 계신다, 저가 또 농대 다녔기 때문에. 그분이 또 축산, 축산과 아마 다니셨을 거래요. 전남대, 그 농대 선배 중에 그런 좀, 우리가, 그런 분이 계신다, 그런 얘기를 들었었어요. 그래서 인제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된 후에 인제 그분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근데 그때 좀 87학년도 이후에 분위기가 좋아졌기 때문에 그때 그분을 소개하는 그 잡지, ????말????진가 ????길????지인가가 있었어요. 그, 그분의 미국생활을 잠깐 소개하는. 거기서 정보를 접해서 민족학교 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미국가면 여기를 찾아가봐야겠다 생각을 했었었어요. 마음을 가지고 있었었어요. 여기에 와가지고 거기를 찾아봤었고 5·18 행사도 갔을 때 그분하고 관련된 거구나, 근데 저 아직 당장 자리도 잡히지 않고 뭘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서 뭐 어떻게, 어떻게 한다고 그러기는 없었어요. 그날은 그냥 5·18 행사만 하고 돌아왔었지요. 돌아와서 인제 시간이 좀 지나니까 운전면허증이 나오고 운전면허증이 나오면서 아주 좀, 중고차지만 제가 운전할 수 있는 차도 하나 생기고 그래서 아마 7월경이 됐을 거예요, 3월 달에 왔으니까. 3,4 개월 지났는데 7월경에 제가 차를 직접 몰고 인제 찾아왔죠. 찾아왔는데 제가 문화 쪽을 잠깐 몸담아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그런 쪽에 뭔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런 활동 단체를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그쪽하고 이렇게 만나지를 못했어요. 그 다음으로 민족학교라는 곳을 좀 찾아봐서. 지금 여기 민족 학교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저 밑에, 아래쪽에 거기 민족학교가 있었을 때 그 쪽으로 찾아갔었죠. 찾아가서 거기에 계신 분을 만나고 제 소개를 잠깐 하고 그리고 이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보고 싶다 인제 미국에 와가지고 어려움이 많다, 뭐, 제가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움 주셨으면 좋겠다. 왜냐면 왠지 국내에서 활동했을 때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끼리 있는 그런 막연한 유대감, 연대감 이런 것들이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그런 활동하시는 분들,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내가 좀 서로 동지라고 할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얘길 했는지 모르겠지만 얘기를 했었었어요. 그러니까 그분들도 저를 반겨주셨어요. 반겨주셔서 인제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고 인제 윤한봉 선생님도 뵙게 되고 거기 활동하는 분들도 만나게 되고 민족 학교하고 90년도에 인제 만남이 이루어졌죠. 만남이 이루어져서 그 인제 그 당시 민족학교 재미 한청련 이런 것들 보면 2년에 한 번씩 대회라는 걸 해서 전국에 있는 조직들이 모여서 큰 행사들을 해요. 그때 인제 제 기억으로는 뉴욕에서 그 행사를 했었는데 저한테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면접자: 90년도에요? 구술자: 90년도에. 그때 비행기 값 내고. 먹고 자고는 할 수 있대요 큰 돈 안 들이고. 그냥 비행기 표 값 정도 내고 그쪽 가서 한 며칠 있다가 같이 활동하는 것 보고, 또, 너무너무 좋았어요. 몇 백 명 모인 자리에, 여기 그렇게 큰 규모의 활동가들이 있고 또 전국 각지에서 모여서 하는 이조직력도 보고 참 기뻤었어요. 반가웠고. 그래서 뭐 자연스럽게 민족학교하고도 관련 맺어지게 되고 재미 한청련 하고도 인제 관련 맺어지게 되고 인제 재미 한청련 회원으로, 나성 회원으로 활동도 하게 되고 뭐 그랬죠. 면접자: 주 활동내용이 어떤 거였나요? 구술자: 주 활동 내용은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는데 주로 저는 문화 활동을 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뭐 여러 가지 분야들이 있잖아요, 교육도 있고, 조직도 있고 뭐, 학술 모임도 있고 봉사 모임도 있고 뭐 그렇겠지만, 독서 모임도 있고 그러지만 저는 문화 쪽에서 좀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다,라고. 또 단순히 그냥 쪼끔 하다마는 그런 게 아니라 저도 여기서 꾸준히 하고 싶고 그래서, 그래서 그 당시 재미 한청련에 문화분과 준비위원회인가 그런 게 있었을 거예요 거기에 인제 활동을 하게 되고 그, 그걸 토대로 인제 거기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연습하고 그래서지고 92년 말에 저기 뭐냐, 문화패 한누리 라고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화패를 만들어요. 문화패를 만드는데 그 전에 뉴욕에는 뉴욕 문화패 비나리라고 있었었어요. 뭐 저기, 좀 오래된 문화패 조직은데 LA 조직이 인제 문화패가 하나 생기는 거죠. 거기에 인제 그 동안에 여기서 준비를 하면서 함께 했던 사람들하고 저랑, 또 저랑 비슷하게 한국에서 좀 문화 활동을 했던 친구들이 오고 같이 좀 힘을 합쳐가지고 문화패 한누리 라고 해서 만들었죠. 만들어서 그 다음해 일월달인가, 안치환씨를 초대했죠. 안치환씨가 이렇게, 하나 있는데 가져와볼까요? (포스터 자료를 보며) 안치환씨는 기억날지 모르겠네요. 안치환씨는 기억 날거에요, 아마. 이게 뭐냐, 미주 순회공연을 했어요, 안치환씨가. 92년 12월 달에 한누리가 생기고 인제 93년, 93년 1월에, 1월에. 안치환씨가 겨울엔가 와가지고 인제 했죠. 그때 미주 민족문화예술협의회가 있었고, 그 다음에 인제 나성 한인문화패 한누리 라고 해가지고 같이 두출, 두출해가지고 처음으로 이걸 하나를 했죠. 문화 행사로. 그래서 이런 활동을 인제 저는 이렇게 뭐랄까, 문화 행사를 하게 되면 거기에 쪼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획하고, 활동 진행하고, 그런 쪽에 쫌 더 활동하게 된 거죠. 면접자: 이때 그럼 이런 활동들을 같이 하셨던 분들이 몇 분정도 구술자: 그때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나둘, 셋넷 다섯, 여섯, 일곱, 한 일곱 명 정도 되나 아마 그럴 것 같네요. 면접자: 한누리 구술자: 멤버 면접자: 멤버가요? 주로 이제 어떤 분들이 하셨나요? 구술자: 어, 그때 부부가 하나 있었는데요 그때, 저보다 나이가 한두 살 더 어린 친구였는데, 국내에서 문화 활동을 하다가 풍물패 활동을 하다가 온 친구가 있었구요. 그 다음에 한 친구는 독일에서 이렇게 살다가 온 친구인데 우리 문화를 좋아해서 이렇게 함께 했던 친구가 있고. 그, 유성씨, 문유성씨 부인되시는 김희숙씨도 그때 잠깐 같이 활동을 했었구요. 그리고 여기 윤희주씨도 잠깐 같이 활동을 했었고 그래 그때 그 멤버들이죠. 지금은 지금 한누리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얼마 없구요, 이제 무슨 행사가 있고 그랬을 때, 그 유명, 거의 뭐랄까, 주축 멤버라기보다는. 지금은 다른 분야로. 그니까 인제 2세들. 2세들 문화 팀하고 장년 문화 팀을 아울러서 인제 뭐랄까 활동해나가는, 강습 위주, 공연 위주 그리고 인제 5·18행사라던가 무슨 문화행사가 생기면 함께 기획하고 함께 하는 그런 정도의 명맥을 문화패 한누리는 유지하고 있죠. 면접자: 이게 한청련 산하, 어떤 단체인가요? 한누리 라는 게, 산하 조직이었나요? 구술자: 어 딱히 조직적으로 산하조직이라기보다 하나의 문화패로서 존재를 하죠. 근데 거기 그, 구성원들을 보면 거의 한청련 회원들이죠. 면접자: 대부분 한청련에서 뭐 그런 분이 있으면 같이 참여를 그랬었겠네요. 구술자: 예예예예. 이른바 산하단체에요. 이런 이런, 딱 한청련 산하 문화패 한누리입니다, 이런 표현은 안 했었어요. 안 하고 그냥 문화 패, 문화 단체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거기 활동 한 사람들이 거의 한청련 회원, 그렇지만 비회원도 있고요. 왜냐면 문화 활동이니까. 강습활동도 하고 그러면 인제 그 다음, 그 해에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프로그램들을 하면 그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해야하잖아요. 그러니깐 많을 때는 열, 열명씩 가입하고 그러는데 그분들은 다 한청련 회원이 아니고. 뭐 그렇죠. 그러니까 그 문화패 한누리 내에는 한청련 회원도 있고 한청련이 아닌 사람들도 있고. 활동은 주로 문화 활동을 하고. 뭐 산하 단체로 뭐 굳이 뭐 얘기한다면 할 수도 있지만 또 아니라고 해도 또 굳이 왜 아니냐?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조직이죠. 근데 대충 나름대로 그걸 운영하고 기획하고 하는 사람들은 한청련 회원이었고. 면접자: 제가 예전에 한청련 뭐 민족학교 관련해서 사진 정리를 7년 전에 와서 좀 하다보면 그, 뭐 야외 집회나 그런 거 있을 때 풍물 공연 있고 같이 이렇게 시위할 때. 그분들이 다 지금 한누리 멤버들이었다는거죠? 구술자: 그쵸. 한누리 멤버들이었고 예예예예. 그리고 한누리 멤버가 아니더라 할지라도 쪼끔 인제 그날 시위하고 그러면 다 올 수 없잖아요 근데 대충 북치고 꽹과리 치고 징치고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또 있었으니까. 멤버가 아니라도 그런 쪼끔 능력이 있으면 그때 와서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데 주로 집회나 시위 때 나가면 주로 이제 주축...핵심이라고 새야 하나요? 이런 사람들은 문화패 한누리 활동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됐었죠. 면접자: 주로 인제 활동들을 보면 꼭 오월 문제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시위들도 많이 있었지 않습니까? 구술자: 네네네 면접자: 주로 인제 어떤 부분을 많이 이렇게 구술자: 문화 면접자: 한청련 활동이 꼭 오월뿐만이 아니라 이 지역운동 하고도 연계를 하고 뭔가를 진행하거나 그런 부분이 있었나요? 구술자: 네. 그러니까 한청련이 주요 활동, 뭐라 그럴까요? 강령이 있지요 있는데, 그 중에 우리 조국이라고 표현을 많이 했었어요. 조국 연대하는 거. 조국에 힘이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다음에 크게는 세 가지겠죠. 동포사회에 어떤 그, 권익,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활동. 그 다음에 제 3세계, 타민족과의 연대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리고 그 속에서 자유, 평등, 인권, 이런 것들이 나오는 거죠. 좀 분단된 또 조국에 대한 통일의 문제 뭐 이런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활동들을 했었죠. 한청련에서 뭐 한청련에도 활동 했었고 또 문화패 한누리도 그런 속에서 만약에 뭐, 영사관 앞에서 시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뭐 예를 들면 뭐, 양심수 석방하라는 문제, 국가보안법 철폐하는 문제, 또 뭐 5·18에 대한 그 진상규명의 문제 이런 등등이 나왔을 때 영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또 인제 제 3세계 연대할 때가 있어서 이라크 전쟁이 났을 때 전쟁반대 시위도 하고 또 뭐, 또 어디 만약에, 지금 생각하는 거 피코 노동잔가 아마 그때 있었을 거에요. 그때 와서 본사가 여기에 있으니까. 본사 앞에서 시위하고 그러면 같이 가서 시위도 하고 도와드리고 뭐 이런 거. 그러니까 국내 연대 운동. 우리가 도와주기도 하고 그쪽에서 무슨 문제가 생겨서 미국을 오면 저희가 여기서 통역 문제라든가 차량 문제라든가 같이 도와주면서 같이 시위할 수 있으면 시위하고 뭐 그런 다양한 문제. 그런 속에서 문화가필요하다 시위할 때 소리가 필요하면 참여하고. 또 음향? 뭐 등등이 필요하다면 합주하고 그랬죠. 면접자: 그런, 한청련 한누리 그런 지금 현재, 당시 활동들에 대해서 좀 주변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이게 아무래도 집회 시위가 당시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보단 자유스럽고 뭐 이렇게 했겠지만 어찌됐건 그, 그때 당시 정부에서 보면 반국가적인 뭐가 좀 있지 않을까 구술자: 뭐 며칠 전에 봤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렇잖아요. 여기 뭐 (신문을 펼쳐 보이며) 이런 게 있잖아요. 엊그제 선거 했잖아요. 선거 했는데 ‘북, 직접 조정 한인 종북단체 수두룩‘ 해가지고 여기 미국 내에 종북 단체가 이러이러한 단체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했는데. 그 당시는 이것보다 더 심했죠. 그 당시에는. 그니까 빨갱이죠. 빨갱이. 민족학교 빨갱이. 민족학교 저기, 저기 뭐냐 민족학교 앞에는 김일성 사진이 있고 인공기가 붙여져 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지금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당시 그런 것들 인제 그 진실 아닌 유언비어? 그런 것들을 듣는 사람들. 또 한청련이 민족학교, 또 같이 공간을 쓰고 그러니까 한청련 활동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 친북, 그때는 용공 세력이라고 그랬을 걸요? 일수, 일부 몰지각한 폭, 불순세력, 용공 세력. 지금이야 종북 세력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표현을 했던 것 같아요. 일부 소수 극렬 과격세력, 뭐 용공 세력, 그리고 여기에 그런 동포 사회에서도 아, 뭐 김일성의 지령을 받는 뭐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그렇게 해서 그 당시, 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활동, 그 국내 민주화를 위해서 하는 뭐 시위를 이런 것들을 그렇게 보는 시각들이 많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뭐, 제가 역사적 평가자는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뭐라고는 못하지만 그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고 지금도, 지금도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민족학교가 많이 알려지고 동포 사회의 권익을 위해서 많이 활동도 하고 있지만 지금도 민족 학교다 그러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를 하니까. 그렇게 많이 세월이 흘렀어도, 근데 그 당시에는 더 힘들었겠죠, 그런 것들이. 그리고 제가 여기서 93년도부턴가 4년도부턴가? 지신밟기를 했어요, 지신밟기. 한국에서 지신밟기를 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여기 와서도 우리 문화 차원에서 한번 해보자 해서 한 적이 있었는데, 쫓겨났어요. 미신 굿 한다고. 가게에 가가지고 지신밟기 하러 왔다고 그러면 무슨 미신 굿거리 하냐고 쫓겨나고 그랬어요. 근데 지금은 그러신 분들은 거의 많이 인제 없어지셨는데 그때 90년대 초? 중반만 하더라고 그런 시각들이 동포 사회에는 존재를 하고 있었죠. 면접자: 아, 한국인 가게를 찾아가도 쫓겨나고 그랬나요? 구술자: 예, 한국인 가게, 한국인 가게를 찾아가죠. 인제 반겨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쫓, 쫓아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미신 푸닥거리 하지 말라고. 무슨 지신밟기냐고. 면접자: 그, 쫌 제가 인제 모든 활동들을 다 모르기 때문에. 그 쫌 말씀을 이렇게 드려볼게요. 어...그 주로 활동했던 게 사회 참여, 그게 인제 한국 정치상황의 문제든 아니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인권의 문제, 그 세계 아니면 전쟁 반대, 핵 반대 비핵, 그런 문제라든지 그런 사회참여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민주주의 관련 문제들을 다 같이 폭넓게 쫌, 이 한겨례 하고, 좀 한겨레, 아니 한청련에서 이런 활동들을 쫌 해오셨는데 주로 좀 이렇게 가장 쫌 기억에, 90년도에 좀 가장 기억이 남았던 좀 그런 부분들이 있으셨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그 89년도에 저는 여기에 없었는데 89년도에 국제평화대행진이라고 해가지고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가잖아요, 임수경씨도 그때 인제합류를 했었고. 인제 그거를 하면서 2년에 한번씩 2년에 한번씩 이 국제평화대행진을 하겠노라고 이렇게 얘기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89년에 했으니까 91년도에 또 할때가 됐잖아요, 그래서 91년도에 다시 추진을 하려고 했었는데 그게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정리된 게 있을 껀데 그때 그게 국제평화대행진이 열리지를 못했어요. 열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게 이, 우리의 조국의 분단 상황, 그리고 민주화의 상황 이런 것들을 전 세계의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알리고. 우리 조국이 좀더 민주화되고 자주화 되고 이렇게 분단이 좀 극복되는 그런 것에 활동을 전개해보자. 그냥 못한다고 있을게 아니라, 그런 논의가 있어가지고 그... 그것도 어떤 정리된 책자가 나온 걸로 지금 기억이 되는데. 그 해외 문화선전대라고 해가지고 활동을 해요. 그래서 한 팀은 호주 쪽으로 가게하고, 한 팀은 유럽 쪽으로 가게하고. 그게 91년도죠. 91년도 9월 달엔가 하고 하는데 거기 제가 합류를 합니다. 7월 달에 뉴욕으로 모여가지고, 활동가들이 뉴욕에서 세 명인가, 그리고 엘에이에서 한명, 북가주에서 한명, 이렇게 해가지고 다섯 명인가가 이렇게 제 팀은, 유럽 팀은 꾸려지고. 유럽에서 세분이 합류해가지고 유럽을 몇 개 지역인가 지금 가물가물 한데요, 한 달 정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우리 조국의 어떤 문제, 민주화 문제, 이런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홍보하고 제 3세계 사람들하고 연대하는 그런 활동들을 그때 한 적이 있어요. 그게 아마 최용탁씨가, 아마, 그때 최용탁 지금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죠, 한국에서. 얼마 전에 최용탁씨가 그거에 대해서 아마 정리를 한 글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쫌 더 구체적으로 아마 나와 있을 거에요. 저도 기록물이 있는데 아직 정리를 못했어요. 그런데 거기 참여를 한 게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그 정도 90년대 초반에는 그런 것이 있죠. 그리고 좀 뛰어올라가자면 94년도에는 5·18 관련돼서 극단 토박이가 ????모란꽃????을 가지고 와요. 94년돈가? 아마 그럴 거에요. 기억은 뭐 확실히는 모르는데 제가 이런 자리가 되면 다 자료를 준비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웃음) 면접자: 아, 아닙니다. 구술자: 하튼 기회 되는대로 저도 여기서 인제 쫌 더 구체화시켜서 저도 정리를 하도록 노력을 할게요. 근데 그때 그 모란꽃으로 저기, 극단 토박이가 미주 순회공연을 와서 여기서 공연을 하지요. 공연을 하면 하는데 오월과 관련된, 오월에 관련된 행사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또 같이 참여를 하고 행사 진행도 하게 되고. 그리고 저는 오랜만에 그,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도 만나게 되는 거잖아요. 그 당시, 지금도 하고 있는 혜정씨인가? 혜정씨? 현정씨. 현정씨를 그 후에 만났나? 또 수근씨 뭐, 그때 만나서 그때 참 가슴이 쫌 복받치더라구요. 이렇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 만나고. 돌아가셨지만, 누구죠, 단장님? 아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이렇게 기억 안 나면 안 되는데, 그분들은. 들불 열사 한분, 한분이신데. 하튼 좀 있다 기억하도록 하구요. 그분도 뵙고 그래서 눈물나도록 반가웠어요. 그런 기억이 있고. 또 그 후에도 ????금이의 오월????로 또 오시죠, 토박이가. 근데 ????금이의 오월???? 때는 인제, 모란꽃때는 첨 오셨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못 잡았는데 ????금이의 오월???? 때는 이왕 온 김에 여기도 문화적 역량을 쪼끔 도와주자 이런 기획을 하신 것 같애. 그래가지고 그때 ????금이의 오월???? 올때는 여기서 문화 활동가가 배우로 또 합류를 해요. 배우로 합류를 했는데 거기에 저도 합류를 하죠. 저도 인제 같이 공연을 다녔어요, 배우로. 단역이죠, 단역, 단역으로 인제 합류를 해서 하고 그 다음에 그때 또 다른 분이, 미주에서 활동하시는 또 다른 분이 이렇게 같이 해서 같이 미국 7개 지역인가 다니고 캐나다까지 가서 이렇게 공연도 하고. 아마 ????금이의 오월????은 저기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 그 미국 극장가, 극장가 거기에서 한 군데 무대에서 올라서서 좀 많이 각광도 받았던 그런 기억이 나네요. 면접자: 선생님께서는 90년도부터 미국에 들어오셔서 어찌됐든 오월운동과 관련해서 그 문화 활동으로 계속 활동을 해오셨는데 어찌됐건 그때는 청년기, 청년, 가장 왕성한, 활발하게 활동할 때 들어오셔서 이제는 거의 인제 25년이,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때의 역할과 지금의 선생님의 역할은 쪼끔 이제 지금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라고 판단이 되는데 선생님 개인적으로 생각하시기에 어, 선생님의 지금의 역할, 이런 문화 예술 활동 이런 운동, 오월운동에 관련해서 선생님의 역할, 이런 역할을 이제 좀 해보고 싶다 이런 게 있으신가요? 지금까지 좀 아쉬웠던 거라든지, 이런 걸 꼭 하고 싶었는데 쫌 못했다든지, 아니면 앞으로 이런 걸 좀 해보고 싶다, 아니면 쫌 이렇게 내가 뭔가 역할을 주고 싶다, 라는 그런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지금 이렇게 인제 어떻게 우여곡절 속에 제가 인터뷰를, 감히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돼가지고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아, 이곳에서도, 이곳에서도 뭔가 민족학교라던가, 민족학교가 30, 31년째 되고 있는데 민족학교도 정리 기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조금 들고요. 그 다음에 5월 관련해서도, 저는 이제 90년에 왔기 때문에 90년 이후 작년까지, 올해까지의 오월 관련 행사 이런 것들은 많이 참여도 하고 기획도 하고 옆에 있었기 때문에 기록, 기억을 점검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하면 정리가 되겠지만 그 이전은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 5월에 관련된 것도 인제 이렇게 국내에서 정리를 하러 오셨는데 자체 내에서 뭔가 기록을 정리하고 수집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이 펼쳐져 있을 거예요. 민족 학교도 낼 모레 곧 이사를 가게 되는데 이사 가 는 속에서 많이 자료들이 인제 어, 우려스럽게 잊어버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데 오늘은 인제 딱, 어제 딱 보면서 이런 것들도 나오더라구요. 이런 것도 자료가 될는지 모르겠어요. 그니까 제가 그리피스 팍(Griffith Park) 갔잖아요. 그래서 더, 더럽죠, 근데 96년도에요. 96년도에 천문대에서 인제 5·18 정신 계승 걷기 대회를 한다고 이렇게 했거든요? 근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니까 어...이때만 한 줄 알았어요. 근데 딱 보니까 이게 또 꾸질꾸질 해가지고 있더라고. 근데 이게 보니까 94년도야. 94년도치가 있더라고. 그러니까, 그니까 역사는 기억하는, 기억하는 자의 것, 몫이라고 했는데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이 더 들어요. 역사는 역시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란. 그래서, 몰라요, 그찮아요? 저도 맘대로 기획하고 같이 가자고 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도 이게 첫 번짼지 두 번짼지 가물가물한데 이게 보니까 지금은 이건 안 하고 있지만 이걸 보면서 아, 또 이것도 기회 대는 대로 또 내년부터라도, 나 혼자라도 해볼까 라는 생각들이. 뭔가 상징적인 활동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 내년에는 그럼 나 혼자라도, 주위 사람들이라도 있으면 같이 하지만 혼자라도 이런 것도 다시 한 번 시작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어, 어, 이거는 오늘 아침에 갖고 나오는데 이거 보여주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지금 나도 가져가면 달라고 할지 모른다고. 근데 어떤, 여기서 저도 이제 찾아볼게요, 찾아봐서, 분명히 더 있을 거라고요. 되는 대로 드리고 저도 인제 이런 일들을 하게 돼서 기록물들이 생기면 서로 이렇게 전달해 드리고 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조사를 이렇게 많이 하시니까 그중에서 저희들한테 또 미주에서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으면 또 도움도 주시고 그랬으면 좋을 것 같구요. 그 다음에 인제 좀 이렇게 얘기를 드렸지만 가끔 저희들이 토박이도 오고 국내 관련된 인사 분들이 오고 이래가지고 강연도 오고 뭐 이랬는데 요즘 국내하고 관련돼서 연대하는 행사들이 거의 인제 얼마 안 돼요, 없어요. 특히 오월 부분에 있어서는 다시 그런 것들이 함께 시작해보면 어떻겠는가 생각이 들고. 내년이 35주년이니까 뭐 좀, 서로 이렇게 국내 단체와 미주 단체가 좀 연대해서 뭔가 문화행사를 함께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니까 저는 이런 것들을 쪼금씩 고민해보니까 지금부터 생각이 든다 이거죠.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기에 어쩔 수 없이 저는, 어차피 광주, 5월을 경험한 사람이고 또 거기를 활동했던 사람이고 또 여기 와서 그런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어떻게 사람이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활동들을 해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5·18로 다양한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꼭 이 5·18 이 부분도 함께 꾸준히 이 미주에서도 알리고 오월 정신을 항상 살아있는 오월 정신으로 이렇게 하는 내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근데 저는 이제 5·18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한 장면이고 5·18만 정신 계승하고 막 이런 차원이 아니라 5·18이 가지고 있는 그 상황에서의 정신,뭐 예를 들면 주먹밥 정신이라고 우리가 그러잖아요. 서로 나눠먹고 이렇게, 그런 것들. 그런 정신은 광주에서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분명히 있어야 할 거잖아요. 그런 어떤 그런 정신은 분명 이 땅에서도 필요한 거고, 얘기해주고 싶고. 그 다음에 아까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그렇게 피흘려가면서 죽어있었지만 7년이란 세월, 10년이란 세월, 세월이 지나고 나서 명예가 회복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오늘날까지 오는 과정들이 하나의 승리의 과정들이 보이잖아요. 근데 미국 생활을 하면서 뭐 다양한 보이지 않는 인종의 문제, 계급의 문제,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도 계속해서 꾸준히 활동을 해나가고 그러면 분명히 개선될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을 우리 코리안은 역사 속에서 갖고 있고, 분명히 자랑스러운 한 역사로 가지고 있으니까 5·18을 바라볼 때 그런 속에서 힘을 얻고 여기서 활동하면서도 힘을 얻어가는 그런 5·18로서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민족학교가 그런 정신으로 활동을 한다고 저는 믿고 있고요. 앞으로도 민족학교, 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그걸 잃지 않고 꾸준히 이렇게 갈 수 있는 그런 단체로 갔으면 하는, 제 개인의 바램이죠. 근데 시대와 상황과 조건이 바뀌면 뭐 바뀔 수도 있는 문제지만 제 바램은 그중의 하나가 있어요. 면접자: 그, 인제 선생님께서 25년간 이곳에서 5·18 관련 기념식, 이곳에서 매년 이렇게 5·18 관련 기념식을 진행하고 그러니까. 광주는 광주 나름대로 진행을 하고 있고. 광주에서 늘 나오는 얘기가 인제 세월이 지나가면서 의미가 점점, 5·18에 대한 의미가 퇴색되기도 하고 또 인제 기념행사나 그런 것들이 너무 그런 인제 관행화, 박제화 되는 듯 한 느낌도 받고. 그런 비판적 시선도 조금 많이 저희들도 가지고 있어서 그거에 대한 고민들도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어, 이곳에서의 오월 기념식, 오월 운동은 선생님 쫌 평가하시기에, 25년간 쫌 평가하시기에 어떻다고 보십니까? 좀 변해야 할 부분이라든지 좀 더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든지. 구술자: 근데 참 그, 어... 뭐 질문을 하시면서도 이렇게 답이 쉽지 않을 거란거 아시면서 이렇게 생각이 드는데. 참 어려운 얘기에요, 어려운 얘기고. 35년 전, 어림잡아 그러잖아요. 34년. 이렇게 흘러갔고. 제가 지금 제 나이에 4.19를 생각하면 무슨 방송, 때가 되면 책이나 신문이나 그런 얘기 나오지만, 역사속의 한 장면이잖아요. 그니까 저야 그런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고 계속해서 이렇게 왔던 사람이지만 그런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의 30대, 40대들은 그냥 책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진의 몇 장면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미국에서 그쵸, 어떻게 하냐? 이거죠. 그러면 이제 여기서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5·18 행사를 하게 되면 대부분 저 또래에 약간 미치거나 약간 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지 그 밑으로 20대 30대가 거의 안 모이죠. 그 어려움이 좀 있는데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도 해봐요, 인제 우리 기념 재단이 함께 고민을 해봤으면 하는 바램이긴 한데. 저희들이 자녀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중 고등학생들이 있는데 어, 그런 생각들을 해봤었어요. 역사 탐방. 일정 부분 여기서도 비용 좀 하고 재단에서 비용 조금 해서 역사탐방 할 수 있는 그 어떤 기획 프로그램을 해서 여름방학 때 뭐 보름이나 한달동안 한국에 나가서 우리 한국의 현대사를 좀 배울 수 있는 그런 장소, 그런 경험? 5·18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경험?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 후대들에게 좀 현실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5·18이 이런 거구나, 우리 부모님들이 이렇게 또 알고 지내왔구나 하는 그런 계기의 프로그램들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드라구요. 왜냐면 여기서는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여기서 인제, 5·18 기념하고 그러면 저 같은 경우는 5·18 영상을 꼭 틀어주거든요. 우리가 세월호를 겪으면서 잊지 말자 세월호, 잊지 않겠습니다, 얘기를 하고 있지만 저부터도 잊어가고 있으니까. 그니까 잊어불지 맙시다. 80년 5월을 항상, 아 그거 뭐 몇 번이나 봤어, 수십 번 봤잖아 이것이 아니라 5·18이라는 날짜를 통해서 한 번 더 보는, 그런 기회를 삼자고. 그래서 꼭 한번 씩 더 틀어주고 그러는데, 같이 온, 참석하신 분들에게 다 틀어주는데 그런 것들을 보는 우리 인제 십대, 십대들이죠. 십대들은 핸드폰으로 이렇게 게임하고 그래요, 보든지 말든지. 좀 보고, 좀 봤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그런 것을 보면서 그런 고민을 해봤었어요. 혹시 그런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내고 싶고 지금 뭐 범동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제 나이 또래에 있는 분들의 고민, 자녀가 있는 분들의 고민이 그런 거 있을 거예요. 아마도 그런 기획의 프로그램들이 나오면 또 함께 하면 그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봐요. (TAPE 교체) 구술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이쪽은 이쪽이고. 그거는 뭐 내가 상관하고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5·18 가지고 있는 정신을 이렇게 우리가 잘 모아서 그걸 잘 알릴 수 있는 방식의 활동으로 할 수밖에 없다, 라고 저는 생각을 한다고요. 단순히 그냥 5·18 기념식 한번 하고 끝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니까 저기 앞에도 민족학교 들어오면 딱 윤한봉 선생님 사진 있고 거기에 5·18이 우리 역사에 의미가 뭐가 되는지, 하나, 더 놓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최근 들어서 우리 재단 저기 설립 추진위원회, 합수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5·18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라고. 그런 말씀을 재단을 설립하시면서 그 생각을 피력을 하셨는데 나는 분명히 나는 그런 입장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5월, 그걸 하나 추가 하고 싶어요. 5·18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라고. 그런 것들을 감내해가면서 할 수 있는 행사들을, 이거는 우리가 이번에 하면서 만든, 만들어 놓은 거고. 이것도 우리가 거의, 거의 유명무실 해졌지. 이름만 있는 상탠데. 그니까 내년에는 35주년이고 그래서 뭔가 쪼끔은 더 역량을 해서 앞으로 5·18을 이 땅에서 어떻게 더 잘 해낼 건가, 어떤 사업들을 벌일껀가에 대해서 한번 의견들을 모으는 자리? 또 그걸 되돌아보는 자리? 그런 자리를 내년에는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앞으로 그런 속에서 여기서 10년이 가도, 20년이 가도, 30년이 가도 5·18을 내가 얘기해주고 싶은 거. 아까 주먹밥에 대한 거, 5월 26일날, 27일날 산화해 갔던 사람들의 정신, 그리고 그걸 딛고 일어선 승리의 정신. 뭐 그런, 그런거는 시대를 떠나서나 지역을 떠나서나 다 관통할 수 있는 정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서 어떻게 풀어내든지 간에 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거를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또 단순히 5·18을 정신 계승한다, 이게 아니라 그거를 담아내는 활동들이 우리 민족학교가 하면 된다, 그거죠. 단순히 뭐 5·18 정신을 계승하는 활동입네 이게 아니라, 그거는 다 포함되는 활동으로 민족학교가. 그리고 어차피 민족학교는, 이 민족학교를 세우신 결정적으로 세우신 분 중에 한분이, 막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인제 하셨지만, 결정적으로 하신 분이 윤한봉 선생님이시니까. 또 민족 학교, 그러면 윤한봉 선생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차피 민족학교는 5·18 정신을 안고가야 된다고. 그래서 민족학교 생활 속에서 공간 속에서 항상 5·18이 보여줄 수 있는, 인제 공간으로서 뭔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있고. 인제 얼마 전에 그런 얘기도 했었었어요. 그, 이게 민족학교를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잖아요. 그러며는 민족학교, 그 어떤 건물 외벽이라든가 한 부분 중에 5·18 조형물 같은거, 합수형님을, 윤한봉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는 거라든가 5·18을 좀 정신을 어떻게 딱 보면 알 수 있는 조형물, 그림이면 그림, 이런 것들을 딱 세워놓자, 라는 의견들이 나왔었어요. 그래서, 그게 일 년 반, 2년 뒤의 얘기지만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고민하고, 또 우리, 홍성담 선배님이, 예술가도 있으니까 자문도 얻을 수 있으면 얻어서 민족학교 건물에 그런 것들이 세워졌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봐요. 단순히 행사 속에서가 아니라 건물 자체 내에서나 활동 속에서 5·18이 가끔 생각날 수 있는 그런, 생활 속에서의 5·18 정신 이런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일을 하는데 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off the record) 구술자: 한인회 같은 광고 문구가 있나 (자료 )다른 쪽에서 했던 건데 아무튼 그래요 여기에 이제 실질적으로는 안 나왔지 함께 했던 단체가 좀 진보적인 단체 빼버리고 이 사람이 그런 걸 한거지 다른 사람들은 빼버리고 같이 추진을 공동으로 면접자: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신 적이 구술자: 끝나고 같이 밥을 한번 먹은 적이 있었어. 그 단체에서 성명서를 이런 식으로 발표를 했다고 (자료) 여기서 이렇게 안 맞잖아. 이 내용의 행사고 이 내용의 행사로 할 수가 없잖아 면접자: 뭐 질문은 거의 지금, 제가 드리고자 했던 질문들은 대부분 좀 말씀을 많이 드렸던 것 같은데요. 마지막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 다른 또, 앞에 선생님께서 얘기를 포괄적으로, 아울러서 해주셔가지고 내용이 좀 중복이 될 수도 있겠다, 라는 판단이 쫌 드는데요. 지금 선생님께서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서 관련, 그런 운동들을 진행해 오신 게 25년. 앞으로도 이걸 계속 꾸준히 선생님께서는 진행을 하시고자. 구술자: 바램이죠, 사람의 앞날은 모르니까. 녹음하고 저기 뭐냐 녹화되고 있는데 나 장담 못해요. 사람 일은 몰라요. 그니까 아, 저 사람 이렇게 얘기해놓고 일년 뒤에 달라졌다, 이러면 할 말이 없잖아요. 전 장담은 못하고요, 하튼간에 어...하는 데까지, 하는 데 까지, 하는 데 까지는 하고 싶고 그런 입장이에요. 이게 일년 정도 더 갈지, 10년이 더 갈지, 내가 죽을 때까지 갈지 그건 인제 장담은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어차피 제가 이렇게 미국생활을 살아가면서 참 힘들었을 때 많이 힘이 됐던 거는 5·18 그런 부분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게 견디는 힘으로 작용을 했었고, 또 대학교 생활할 때, 지금에 와서야 회복하고 그랬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맨날 최루탄 가스 맞아가면서 도망 다니고 이랬는데. 근데 그런 일을 한 경험이 있는데 극복하고 이렇게 오늘날까지 살아가고 있는데 여기서 그런 어려움이 또 닥치면 그런 걸 떠올려요. 떠올려서 힘을 내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인제 힘을 내고 사는 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런 정신이 다른 사람에게도 좀 잘 이야기, 이야기가 되고 설명을 하면 그런 사람들도 피부로 와, 와 닿는 것이 저와는 틀리겠지만, 뭔가 견디는데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현재 이 민족학교 역사가 그렇게 가고 있는 거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거니까. 자꾸 저기 윤한봉 선생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는데 저는 어떻게 보며는 미국에 와가지고 윤한봉 선생님을 만난 게 어떻게 보면 행운이라고 생각을 해요. 어떤 현대사 속에서 그런 분들하고 잠깐이나마 같이 활동을 했고 또 왜 그렇게 행동 하냐고, 활동 하냐고 얘기도 들어봤고 힘도 내라고 얘기도 들어왔기 때문에 어, 그런 속에서 같이 기억이 많이 나요. 그리고 오늘 이렇게 한다고 그래서도 합수형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기도 하고, 뭐 그런 얘기를 생각도 해보기도 해요, 뭐 막 그랬을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편한 대로 해라, 그랬을 것 같애. 뭐 그래서 저도 그냥 그런 맘으로 지금 이렇게 하고 있어요. 하고 있고, 지금 이렇게 하면서 제가 반성되는 게 인제 이런 게 있는데 이게 올해 저희가 34주년 기념행사라고 하긴 했는데, 인제 이런 걸 하면서 그동안의 했던 기록들, 보니까 2008년부터 쭉 기록이 되어있네요, 2003년까지. 2013년까지. 그럼 이전에 2006년부터 어 그것들이 빠져 있어요. 2006년에 토박이도 뭐, 왔었고 또 아까 걷기 대회도 하고 막 이랬었는데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보면서, 이게 인제 한줄 두 줄로 행사들이 적어져 있는데 이런 것들을 좀 더 구체화시키는 것들을 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고 앞으로 행사를 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구체화할 수 있는 행사를 좀 해야지 않는가, 생각을 해야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네요. 반성입니다. 다음에 이렇게 또 뵀으면 좋을 것 같고 또 그때는 저가 조금 더 자료를 구비를 해서 도움을 드렸으면 하네요. 지금은 제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이렇게 말이 좀 길어지기도 한 것 같고 이렇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긴 하네요.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뭐 저희가 이번 조사가 이게 마지막은 아니니까요. 저희가 좀 이번 조사에서 좀 미진한 부분이나 부족한 부분은 인제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같이 좀 찾아서 계속 진행을 할 예정이라서요. 좀 그러한 부분들은 선생님께서 아까 말씀하셨지만, 어찌됐건 그 5·18과 관련된 미국 LA 지역, 특히 아니면 미국 미주지역에 행해졌던 5·18 관련 기록들의 대부분은 민족학교에서 대부분 가지고 있다, 라고 지금 하시는데 그런 기록들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이게 좀 잘 되어 있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들이 있구요. 그리고 이제 동포사회에서도 5·18 기념행사들이 꼭 우리 민족학교만 이렇게 중심으로 된 게 아니고 다른 단체, 또 한인회 또 다른 단체에서도 5·18 기념행사 같은 걸 하거든요. 그리고 또 거의 민족학교가 중심적 역할로, 민족학교가 빠진 행사는 5·18 행사는 뭔가 빠진 듯한 그런 기념행사로 인식이 되고 동포, 동포 사회 내에서, 그래서 인제 무슨 민족, 5·18 기념행사를 하게 되면 꼭 민족학교란 이름으로 같이 들어가는 그런 걸 많이 하는데. 최근 들어서 인제 따로 하는 진행하는 경우도 생기고 그래요. 그래서 이걸 굳이 제 개인적으로는 옳지 못하다, 잘못된 방향이다, 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 제가 잘 모르는, 국내 상황은 잘 모르지만 국내에서도 다양한 5·18 행사들을 하잖아요. 다, 다양한 계층에서, 다양한 지역에서 하잖아요. 그리고 원할 거 아니에요 경상도에서도 하고 서울에서도 하고, 제주도에서 하고. 이상한 단체들이 하든지 간에 하튼 간에 5·18정신이 우리 현실 생활 속에서 도움이 되는, 방향의 5·18 행사들이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 같지 않나요. 그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니까 꼭 민족학교가 꼭 끼어야만 5·18이 아니라 민족학교는 민족학교대로 꾸준히 5·18에 관계된 행사나 정신을 계승하는 사업들이나 이런 것들을 꾸준히 해나가지만 다른 단체에서도 그런 것들이 또 꾸준히 하고 싶고 한다면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이 들고 또 그런 것들을 함에 있어서 민족학교의 어떤 조언이랄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함께 할 수도 있고. 앞으로의 어떤 동포 사회나 미주에서의 5·18의 다양한 활동들은 그럴 수 있지 않겠느냐란 생각을 좀 해봐요. 글고 인제 저희들이 갖지 못하는 소중한 자료들도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곳에 활동했던 곳에서 분명히 또 소중한 자료들이 또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점차적으로 같이, 멀리서 오셨는데 그런 분들도 시간 되는 대로 모아질 수 있는 그런 것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면접자: 향후 오월 운동은, 특히 이쪽 지역 사회, LA 지역 사회에서 향후 오월운동은 좀 어떤 방향으로 좀 갔으면 하는 그런 좀 바람이나 생각들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그러니까 인제 그 오월이 뭐 그, 민주화 과정에 독재정권에 있어서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서 오월이 하는 어떤 결정적 사건의 진실의 문제를 보며는 그게 딱 보이잖아요. 이게, 이게 나쁜 정권이라는 것, 나쁜 사람이라는 것 딱 대비가 되잖아요. 근데 그런 것들도 확실히 하기 위해서 5·18 그런 부분이 함께 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있었죠. 미주에서도 분명하게 그런 역할도 5·18이라는 것들이 하나의 그런 형태로 치러지기도 했던 때가 있었구요.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것들이 희석화 되었다고 저는 쫌 생각을 하고요. 그래서 5·18이 가지고 있는 어떤, 우리가 꼭 계승해야 할 정신, 그런 것들을 좀 정리를 해서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그런 것들을 이렇게 알려줄 수 있는 역사적인 고리를 만들어서 연결해서 삶에 도움이 되는 그런 활동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들이 좀 들어요. 그래서 특히 2세 3세들로 넘어갔을 때 저희 1세대들이 알고 있는 것도 2세 3세들이 보고 느껴야 할 과정들이 분명 다르기 때문에. 그렇지만 거기에서 흘러가야할 중심적인 정신 문제, 오월의 정신 문제는 1세나 2세나, 3세나 그대로 흘러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꾸준히 흘러나갈 수 있도록 여기 미국에서의 3세가 됐든 4세가 됐든 5세가 됐든, 백년후가 되었든 간에 아, 5·18하면 이것이었지, 아, 우리 엄마 아빠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지, 아, 민족학교가 그랬었지 하는 그런 것들이 연결될 수 있는 그런 행사나 사업들이 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그런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의 뭐 어떤 시기가 닥쳤을 때 아, 5·18이 이랬고 이게 지금 이랬으니까 이렇게 연결해가지고 막 뭐 울분을 토해내고 필요하긴 하겠지만, 필요는 하겠지만 어떤 그런 것들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면접자: 오랜 시간 그래도 잘, 말씀을 해주신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질문을 했거나 선생님 말씀하신 부분 중에서 아, 이건 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잘못한 게 아닌가, 내지는 좀 보완해서, 지금까지 했던 것 중 보완해서 말씀해주실 부분들이 있거나 하면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하시고 인터뷰를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술자: 저도 지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제가 얘기하고 기억을 통해서 얘기했던 게 정말 정확할까? 이런 우려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제가 전적으로 제 기억이 옳고 정확하다가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애요. 제 기억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혹시 제가 말한 부분에 있어서 다른 분의 시각과 다른 분의 입장과 이렇게, 얘기들이 있자면 그런 부분들은 제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전제 아래 비교하셔가지고 정리하셨으면 좋을 것 같애요. 그리고 나중에 저도 그걸 보면서 아, 내 말이 옳았구나, 내가 쭉 잘못 생각했구나, 그것도 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또 있었으면 저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또 제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웃음) 면접자: 말씀 잘 하시네요. 말씀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장시간 한 세 시간 가까이 지금 인터뷰 진행한 것 같은데요.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길주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이길주(LA민족학교 이사장)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6일 20시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과 관련한 이길주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 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6일 오후 8시 입니다. 면담자: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구술자: 안녕하세요. 면담자: 편안하게 그냥 말씀 해주시면 될 거 같구요. 일단 선생님 그 태어나신 연도랑 출생지를 좀 말씀해 주시면.. 구술자: 나이는 물어보지 않는 건데(웃음) 저 1945년생이구요. 면담자: 네 해방 될 때 태어나셨네요. 구술자: 제가 11월이기 때문에 저희 아버님이 저, 내가 태어난 곳은 중국 만주에요, 만주, 네. 길림성에서 났었어요. 그래서 인제 그때 못나오고 11월에 났기 때문에 해방하고 못 나오고 그 다음해에 서울로 왔어요. 면담자: 혹시 11월 몇 일.. 구술자: 3일이요. 면담자: 11월 3일 구술자: 쯤 지났어요(웃음) 면담자: 엊그저께 생신이셨네요. 부모님이 계속 만주에서 사셨나요, 아니면 있다가, 조선에 사시다가 올라가셨나요. 구술자: 사실은 저희 아버님이 항일운동을 많이 하셨다고 그래요. 근데 이거는 제가 그냥 어머니한테 듣고 사람들한테 들은 거지 아버진, 저희 아버지는 전연 식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안 하셨어요. 어머니한테도 얘기 안 하고. 무슨 일 하셨는지. 하튼 굉장히 많이 인발브(involve)가 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본인이, 그니까 동경에서 동경의대를 졸업하시고 한국, 인제 그때 항상 말하자면 일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그때 지하 운동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인제, 한국을, 이제 졸업을 하시고 인제 한국을 나오셔서 서울 대학 병원에 인제 취직을 해서 인턴으로 다니고 그러시는데 그 형사들이, 그니깐 이 사람들의 리스트에 아버님이 올라와 있었던 거예요. 근데 이제 잡을 수는 없고 내 아버님이 굉장히 잡히지 않게 하셨다고 그래요. 그러니깐 이제 잡을 수는 없는데 인제 항일을 하기는 했는데 증거가 없고 그러니까 한국에, 서울에 와서 일은, 그 대학병원에서 일을 하시는데 계속 거기서 따라 댕기는 거예요. 경찰들이, 일본 경찰들이. 그래서 인제 아버지가 그 다음에 결혼을 하시고 내가 인제 여기서는 자식들을 키우고 그럴 수 없겠다. 경찰들이 뭐 계속 따라다니고 이러니까. 그래서 결혼을 하시고 만주로 망명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오빠가 둘이고 저가 셋째고 딸, 그다음에 남자 동생이 있어요. 남자 동생만 한국에 와서 낳았고 저희 셋은 만주에서, 길림에서 났어요. 그래서 길림에서 거기서 병원을 개업하시고 계셨죠. 그러면서 이제 거기서 중국을 통한 항일운동을 많이 하시구 인제 거기서 병원을 하셨으니까 이제 길림 병원이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하시면서 어 자금을 대셨던 것 같애요. 그래가지고 인제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뭐 밤중에 사람들이 왔다 가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절대로 얘기를 안 하시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아녀자가 알면 어렵, 힘들어진다고 그래 가지구 이제. 근데 이렇게 누가 왔다가 새벽에 가고. 손님이 그러니까. 인제 그게 나중에 인제 친구들이 얘기하고 이런 거 보면 그게 인제 자금을 댄 거예요. 그래서 뭐 그때 독립하고 해방되고 굉장히 많은 무슨 이런 대장, 장군들, 뭐 이러셨던 분들이 집에 많이 찾아 오셨었어요. 이제 설날이나 그때 되면 뭐 사가지구 오시니까. 이제 우리는 이렇게 연관 시키는 거죠. 김한림 장군인가 뭐 그런 분들. 저도 잘. 아버님이 그런 말을 잘 안하시니까 인제 그런 걸로 볼 때 아마 그때 자금을, 독립운동, 항일 운동 자금을 대실 때 관계되는 여러 사람들이 인제, 인제 그런걸로 우리가 인제 아는 거죠. 아버님이 직접 말씀 안하시니까. 면담자: 선생님 말씀하실 때 형제들이 오빠 둘 있고, 선생님 있고 밑으로 남동생. 4남 1녀 시네요? 외동딸이.. 구술자: 3남 1녀 면담자: 남동생이 한명이었습니까 구술자: 오빠 둘 있고. 동생은 저보다 세살이 어리니까. 걔는 서울에서 났어요. 근데 저는 인제 거기서 나서 고담 해에 나왔죠. 면담자: 그럼 만주에 대한 기억은 거의 뭐., 구술자: 저는 전연 없죠 몇 달 때 왔으니까 면담자: 그럼 서울로 내려오셔서 서울에서 아버님 또 병원하신건가요 구술자: 네. 면담자: 그럼 서울에 언제까지 선생님은..그.. 구술자: 저는 69년까지 있었어요. 69년하고 70년에 왔죠. 면담자: 대학, 대학까지를 다 서울에서 마치신거네요. 구술자: 네 대학 졸업하고, 대학 졸업하고 왔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 아버지 스토리가 재미있어요 저는 스토리가 없구요. 면담자: 아버지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선생님이 기억하시기에.. 구술자: 아버지는 의사이셨는데 사회사업가이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굉장히 정의감이 저기 하신분이고 친구 분들이 하신 말씀은, 저도 그건 들었는데 자네는 너무 물이 맑아서 고기가 끼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아버지가 너무 청렴결백하시니까 인제 뭐 그런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그렇게 좀 말하시는 친구들이 있었고. 어, 근데 아버지가 굉장히 재미있어요.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동승으로 해인사에 들어가셨어요. 아버지 (웃음) 아버지 어렸을 때 인제 그 해인사 지주 스님이, 큰 스님이 탁발을 나오셨다가, 저희 가야에요, 거지 아버지 생가가. 그래서 거기 나와 보니까 어린 애, 아버지가 뛰어 댕기시니까, 뛰어댕기니까. 그 스님이 보시고 아 이놈이 가야의 정기를 다, 가야산의 정기를 다 받았다. 내가 저 애를 데리고 가겠다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그래서 인제 아버지가 셋,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셨어요. 그런데 이제 첫째는 아니니까. 그때만 해도 아마 스님이 아기를 달라고 하면 가문의 굉장히 영광 같이. 그런데 이제 내주셨나봐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내주셨나봐요. 그래서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동승으로 해인사에서 자라셨어요. 그러니까 국민 학교 같은 것도 안 다니셨죠. 거기서 한문을 공부하셨죠. 그래서 한문을 공부하시고 인제 그 어느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 인제 결심을 하시고 나는 의술을 배워서 사람들을 돕겠다. 그래서 인제 일본으로 그냥 가셨던 거예요. 이제 거기서 고학을 하셔서 동경 의대를 졸업하시고 그러면 인제 그동안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오셔서 거주가 불편하시니까 만주로 인제 가신 거예요. 면담자: 공부를 굉장히 잘 하셨나봐요, 동경대를.. 구술자: 아 아버지가 머리가 굉장히 좋으세요. 학교도 안 다니셨는데 가셔가지고 인제 면담자: 어렸을 때 그럼 그 서울에 내려오셔서는 쪼끔 기억이, 어렸을 때 기억이 나실 것 같은데요. 구술자: 그거는 전쟁서부터 조금 기억이 나죠 6.25, 6.25부터.. 면담자: 그때 뭐 따로 어디 피난을 가시거나. 구술자: 피난을 갔었죠. 맨날 뭐 들어갔다 나갔다가 했었죠. 그러다가 인제 아주 인제 가야겠다고 그래가지고 마산, 부산으로 갔다가 마산으로 갔어요. 그래서 인제 마산에서 아버지가 또 인제 개업을 하셨죠. 그래서 인제 하셨는데 어.. 그러구 나서 인제 한국 서울로 들어오고 저 국민 학교 때 서울로 도로 왔죠. 수복이 되서 인제 와가지구 거기서 인제 국민 학교를 들어갔죠, 그래서. 면담자: 국민학교 구술자: 마산에서 국민학교 1학년 2학년을 댕겼든거 같아요. 면담자: 아아 마산에서 국민학교 2학년 다니시다가.. 구술자: 그래서 방산 국민 학교로 왔어요. 저희 집이, 저희 집이 을지로였었거든요. 우리집이 어디였나 (웃음) 퇴계로 있는 데에. 방산 국민 학교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그 시장 안이었어요. 학교가 그래서 인제 거기서 인제 학교를 졸업을 했죠, 국민 학교를. 면담자: 방산 고등학교, 아니 국민 학교를 서울로 올라와서 2학년으로 구술자: 아마 모르겠어요. 2학년인지 1학년인지 뭐 하여튼, 하여튼 학교를 마산에서 댕긴 거가 기억이 나요. 산에서 이렇게 텐트를 치고 학교 당겼었어요. 1학년이었나, 근데 재수하고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2학년으로 들어갔나? 잘 모르겠네. 면담자: 중학교는 어디? 구술자: 중학교는 서울 사대부고 면담자: 사대부고. 구술자: 네 사대부중. 면담자: 아, 사대부중, 사대부고 이렇게.. 구술자: 지금은 중고라고 그러나 옛날에는 캠퍼스도 다녔었거든요. 을지로에 있었고. 면담자: 그 사대부중 들어가셨던 연도가 그럼 오십 한, 57년? 구술자: 그거는 제가 64년에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으니까 빼면 57,8년? 면담자: 64년에 대학을.. 구술자: 입학했어요. 면담자: 사대부중은 58년에 입학을 구술자: 네 모르겠어. (웃음) 면담자: 61년도에 고등학교를 들어가셨으니... 어렸을 때, 중고등학교 때, 국민학교 때도 그랬겠지만 아버지가, 아버님께서 의사생활을 하셔서 가정환경은 그렇게... 구술자: 그렇지도 않아요, 왜냐하면은 저희 아버지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제 절에서 자라셨잖아요. 그니까 그때까지 큰 스님이 살아계셨대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데리고 가서 지주스님이죠. 불교에 대해서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이미 병원을 하고 있는데 부르셨어요. 제가 국민 학교 때요. 해방되고 얼마 안 되가지고 내가 한 일곱살 여섯살? 학교 들어가고 금방 아버지를 부르셨어요. 스님이 그래서 대처승 무슨승 뭐뭐뭐 해가지고 싸우고 야단이 났었어요 그때. 아버지는 병원을 하고 계신대 큰 스님이, 그 다음에 팔만 대장각 있잖아요. 대장경을 저기 두는 각이 있잖아요? 집이 있잖아요? 그게 다 비가 세고 이게 뭐 물이 세고 그러니까 근데 또 스님들이 그때만 해도 이거를 어떻게 돈을 구해서 이거를 보수사업을 해야 하는지 전연 모르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절들이 없었던 시대에. 다 산에 있고 그래가지고. 그러니까 스님이 아버지를 부르셔가지고 니가 도로 와서 니가 이걸 맡아야되겠다. 그래서 인제 일이 많으니까 기와도 세고 니가 이걸 맡아서 니가 사회에 나가서 공부를 했으니까 페이업(pay up: 보답)을 해라. 그래갖고 인제 부르셔서 그때 들어가셨어요. 그러니까는 개업하시다가 말고. 그 해인사로 들어가셔가지구 거기서 해인사 주지스님이 되셨어요. 큰 스님이 넘기셨어요. 그래갖고 아버지가 졸지에 대처승이 되셨죠. (웃음) 면담자: 언제 들어가신지 기억이.. 구술자: 글쎄 그게 국민 학교 2학년, 3학년 때? 오자마자? 그래서 인제 거기서 주지스님을 하시면서 그러니까 집에 잘 없으셨어요. 집에 계속 없으셨고 가끔 집에 오시고 인제 저하고 동생은 국민 학교 였죠. 인제 그런 게 기억이 나고 그래서 어머니가 굉장히 힘드셨죠. 뭐 살기도 굉장히 힘들고 지금은 크고 그랬지만 병원 하고 쌍임동에 살았어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병원을 하시고 하시다 하셨기 때문에 집이 굉장히 컸어요. 방이 뭐 한 열 개 쯤. 열 몇 개쯤 되고 그랬어요. 병원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 그런 데에 세 놓고 샆았죠, 저희가, 엄마가. 그래서 내 생각에 어머니가 그때는 전쟁 끝났으니까 다 다들 가난했죠. 돈이 어디, 없죠. 거기 가난했거나 천막 같은 데서 살았거나 아니면 그래도 굉장히 힘들었죠 다들. 그럴 때 인제 어머니가 방 세 놓고, 굉장히 다세대로 살았었어요, 저 어렸을 때. 방이 큰 게 많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인제 그런 걸로 사셨겠죠. 아버지가 돈을, 절에서 뭐 돈을 갖다 주셨겠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렇게 남이 뭐, 동네에서도 의사집 딸이다 그러고 뭐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 차이가 많이 났죠. 집이 있었던 사람하고 집 다 부셔진 사람하고. 근데 저희 집은 하나도 다치지, 우리집 우에까지 다 부셔졌어요. 근데 저희 집은 괜찮아요. 가도집이었거든요, 쌍임동에? 근데 거기에 무슨 뭐 굉장히 조금 부자들이 많이 살았던 것 같애요. 무슨 극장 단성사? 그런 극장집 주인도 살았고. 무슨 사이다, 칠성 사이다 주인도 그쪽에 살았고 그래서 인제 다 쪼끔 괜찮은데 그런데 내 생각에 그래도 굉장히 가난했던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요. 집이 다 부숴져 가지고 저는 또 가는 거를 좋아해갖구, 그런 집에. 가서 잘 살구, 잘 놀구 밥도 얻어 먹구 그러면 너는 의사집 딸인데 이런 데 와서 밥을 먹냐, 나는 우리 집보다 그 집, 그런 집, 친구 집 밥이 더 맛있어. 그런 코멘트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요. 지금 생각하면.. 면담자: 그 제가 알기로 선생님께서는 성악을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보통, 그런 꿈을 가지고 계셨으면 중고등학교 때부터 요즘 같으면 준비를 하거나 학원을 다닌다거나 그런 준비를 하잖아요. 구술자: 예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는 춤을 좋아했었어요. 여기서 저기를 가더라도 춤을 추고 댕기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국민학교 때부터. 그리고 이제 노래도 하구. 그런데 이렇게 제가 말씀드렸듯이 전세를 많이 놨다 그랬잖아요. 그니까 거기 응접실 같이 큰 게 몇 개 인데, 왜냐면 진단, 진료실 이런 게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컸어요. 그런 방을 인제 렌트를 줬는데 나 국민 학교 때. 어. 거기 성악간데 피아노를 치시는 분이 렌트를 들어오셨어요. 내가 막 노래를 하고 댕기니까, 아니 그러고 피아노를 배웠죠. 그 사람한테. 인제 피아노 선생님이래. 근데 사대 부중 음악 선생님이 그분의 친구였어요. 그분은 성악 선생님, 성악가가 친구였는데, 인제 다 음악 하시는 분들이니까. 인제 그분이 인제 와서 인제 내가 막 노래를 그냥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질르구 댕기니까 어 쟤가 소리가 참 좋다, 하면서 성악을 해라 그래가지구 그래서 인제 사대 부중을 들어갔어요. 그 선생님이 거기 학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그때 딴 데 있는데 그때 사대부중이 특차라구 그래가지구 딴 학교가 시험을 보기 전에 시험을 봤어요. 그러니까 뭐 누구든지 다 와서 시험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인제 그때 40대 1 이었어요. 저희가 들어갈 때. 오로지 국민, 뭐지, 공립이었잖아요. 공립이고 남여공학이고. 근데 거기를 인제 와 거기가 좋다구 그 음악 선생님이 좋다고 걔 여기 보내야 된다고 그래서 인제 거기 시험을 본 거예요. 딴 데 다 지원을 했다가. 거기를 인제 특차니까는 시험을 보고, 근데 그때 그게 어떻게 됐냐며는 인터뷰, 그거 뭐지 면접, 면접시험만 겹쳐요, 딴 학교 하고. 그니까 이제 고걸 두개는 할 수 없는 거예요. 그치만 이제 실기 시험은 떨어졌는지 붙었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니깐 인제 아유 비싼, (141107_ 이길주 18:17) 인제 그래서 인제 붙었어요. 그러니까 애를 아유 고생시킨다면서 그냥 보내자 인제 그래가지구 제가 그 학교를 가게 됐어요. 그 전에는 그 학교가 있었는지도 몰랐어 (웃음) 그래서 아주 재밌어요 아주, 그죠? 어떻게 이게 이렇게 되는지. 그래서 인제 거기 고등학교 까지 나왔죠. 면담자: 그러면 계속 그, 그꿈을 가지고 그때부터 준비를 하신건가요? 중학교 때부터? 구술자: 그렇죠. 인제 피아노 레슨 하면서. 국민학교 때부터 피아노 치면서. 근데 제가 손이 작아요. 그래가지고 제가 어느 정도 피아노 레벨이 올라가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이게 화음이 많이 짚고 이게 되야 되는데 손이 굉장히 작아요. 그래서 그냥 맨마다 이거를 내가 늘리고 그랬는데 그래서 인제 피아노과는 못가는 거예요. 피아노 전공은 못해요. 그러구 인제 저는 춤을 좋아해서 어, 저기 무용을 하고 싶은데 그때만 해도 무용과는 아니, 못가는 거예요. (웃음) 그때 좀 그런 게 있었어요. 무용과는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인제 그다음에 인제 성악과를 간 거죠. 선생님이 인제 성악 하라고 그래서 레슨 받고 인제 고등학교 때부터 인제 개인 레슨 받고 그래서 서울 음대를 들어갔죠. 64년 면담자: 공부를 선생님도 꽤 잘하셨.. 구술자: 아니요 그런데요, 저 공부 못했었거든요 학교 댕길 때. 그런데 저희 학교가 굉장히 실력이 있는 학교였어요. 우선 너무너무 공부 잘하는 애들이 왔었고 왜냐면 학비가 굉장히 쌌어요. 공립이라. 뭐 만약에 하여튼 삼만 원이래면 우리는 삼천 원 뭐 이랬어요. 근데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뭐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다 우리 학교로 온 거예요. 그래가지구 인제 학교가, 고등학교가 그니까 사범대학, 사범대학 있잖아요. 거기서 그 뭐지, 선생님 하러 온 거 있어요, 면담자: 교생실습 구술자: 교생실습, 그런 거를 하러 오고 그랬거든요. 그니까 인제 거기 모범된 학교였어요. 그 실험하는, 그러구, 그 다음에 근방 제일 좋은 사람들이 왔어요.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영어선,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믄 영어 선생님두 미국에서 직접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다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를 거쳐서 다들 가든지 그러니까. 영어도 지금 생각하니까 나 영어에 아무런 프라블럼(problem)이 없거든요. 지금도. 그거보면은 발음이래든지 뭐 그런 게 굉장히 실력이 있었어요. 저희 학교가. 그러니까 대학은 뭐 그냥 뭐 공부 못 했는 축이었는데도.. 면담자: 학교가 워낙 중고등학교가.. 구술자: 그게 교육이 참 좋았던 것 같애요. 그리고 굉장히 실력 있는 애들이 많고 선생님들이 참 훌륭하신 분들이 많았었어요. 면담자: 선생님 중고등학교 다닐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라든지 일화라든지 그런 게 좀.. 구술자: 고등학교 때 4.19 나고 그랬잖아요. 그니까 그때만 해도, 아 아니다 대학교 때 났다. 면담자: 4.19가 중학교 3학년 때. 구술자: 아니다 중학교 때죠? 네 중학교 3학년 때 났죠? 참 그랬어.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같이 학생회장 했던 애가 음대를 같이 가가지고 그 생각을 하네. 그 인제 학생 회장 하고 그때 내가 인제 음대를 갔기 때문에 내가 지금 콘퓨즈드(confused: 혼란) 되가지고 있는데. 예. 그래서 인제 그런 거 할 때 그때만 해도 그런 거 몰랐죠. 전연 인제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고 그랬는데 어, 그냥 4.19 났다 그래가지고 어디로, 어디로 다 막혀 버린 거예요. 저희 학교가 그때 용산 같은데 있었거든요. 그러니까는 아닌데? 그때가 중학굔가? 면담자: 60년 구술자: 60년이며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네 면담자: 중학교 3학년.. 구술자: 중학교 3학년 아닌 것 같은데? 면담자: 음대를 64년도에 들어가셨다고. 61년 62년 63년을 고등학교를 다니셨구요. 61년 62년 63년. 구술자: 이상하다. 왜 그랬냐믄, 내가 지금 생각에 그때 그게 우리 학교가, 그때 중학교가 글루 왔었나? 아 을지로 있다가 이게 옮겨갔는 거 같아요. 그래서 아마 3학년은 거기서 나왔을 꺼야, 저기 용산. 아니 용산이 아니고 이건 어디지? 용두동. 아우 저쪽에 어디였어요. 중학교는 을지로에 있었거든요. 근데 그게 딴 데 있었어요. 고등학교는. 근데 거기서부터 집에를 오는데 다 막혀버려 가지구 겨우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산넘어, 산넘어서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왔 던 생각이 나요. 그때가 4.19였어요. 면담자: 그때는 뭐 중고등학생들도 참 많이 참여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학교 쫌 그런 분위기 있었나요? 구술자: 그렇죠 그러니까는. 근데 나는 지금 고등학교 때는 그런 거 생각 안 나구요. 4.19났을 때 집에 온 거가 너무너무 힘들게 막 하루 종일 걸어서 막 헤매고 헤매면서 집에를 온 생각이 나고. 그 다음에 그때는 우리가 삼선교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그 온 생각이 나고. 대학교 때는 데모를 많이 했죠. 대학교 때 데모를 했어요, 저희가. 면담자: 선생님도 직접 참여를 하신건가요? 구술자: 그럼요, 그거는 왜 그러냐며는 다 같이 가야되는 거야. 그래가지구 우리, 제가 얘기한 고등학교 친구가 학생회장을 하고 그래갖구, 음. 그 사람들까지는 뭘 알았지마는 우리는 전연 지금 생각하면 그런 거 없었던 것 같아요. 의식이 이제 우리가 뭐 해야되겠다 그런거 없었고 그냥 어.. 해야 되니까 다 같이 간 거예요. 수업 안하고 다 가믄 가야되는 거예요. 그러니까는 그렇게 해서 데모 하고 그랬던 생각이 나는데 제가 이제 정치적인 거는 제가 뭘 알았겠어요, 어렸을 때. 근데 이제 아버님이 굉장히 정치 좀, 아버지가 정치가 좋아서 정치를 하신 게 아니구 그래서 제가 스님으로 들어가셨다고, 스님이 아니고 주지스님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거를 펀드래이징(fund-raising)을 하다 보니까 어 인제 아 이게 도대체가 이 불교의 불교인이 정치적인 뭐가 있어야지 이게 어떤 발전이 오겠구나 그런 생각이 완전히 불교 스님들은 그냥 산에 그냥 있구 그렇기 때문에 인제 그래서 아버님이 그 펀드레이징 해가지구 그 저기를 하셨어요. 팔만대장경 대장각 수리를 다 하시구, 그리고 제가 이제 그런 생각나요. 금뺏지 같은거 이렇게 해서 그걸로 펀드래이징을 하시더라구요. 그거 달고 댕기면서 불교인들이 돈 낸 것을 인제 달고 댕기면서 했어요. 그러고는 인제 그걸 하시면서 아버지가 아 이게 어.. 정치적으로 인제 어떻게 좀 해봐야지 도저히 안 되겠다 그래서 인제 뭘 시작하셨냐믄 해인 대학이라는 걸 세우셨어요. 마산에. 부산인가 마산인가. 부산인가? 해인, 지금 마산대, 마산대학이 어딨어요? 아 마산이다. 그래서 저희가 거기서 마산 대학을 세우시면서 내가 이게 정치적인 뭐가 있어야되겠다 그러셔가지구 어 국회의원 출마를 하셨어요. 그 저기에서, 가야에서. 그니까 무소속으로 (웃음) 그러니까는. 면담자: 언제인지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그럼요 그거 생각나죠 그니깐 내가 고등학교 한 2,3학년 때, 3학년 땐가 그때 그랬어요. 왜 그랬냐믄 그래서. 제가 아버지를 많이 못 보고 자랐어요. 인제 많이 면담자: 그럼 서울에 계시고 아버지는.. 구술자: 예, 그래 가끔 오시면 가장 같이 오래 있었던 적이, 우리 마산에 피난 갔을 때. 아버지가 그때 개업을 하시면서 그 먹구 살아야 되니까 아버지가 집에 계셨어요. 고때 피난 생활 때. 그래가지구 그때 인제 아부지가 인제 눞혀 놓고 불교 얘기를 다 하셨어요. 뭐 달마 대사래든지 뭐 그런 거를 얘기로. 그래서 인제 그런, 그런거 다 그때 이제 제일 아버지를 가까이하고 한문 공부도 시키시구, 반야바라불, 반야바라밀, 심경 같은 거 다 외우게 하시구 이게 저 자선하는 거 자선하라구 어린 애를 갖고 그러셨어요. 그때 아버지 생각이 그르고 그 다음에는 별로 아버지를 못 보고 자랐어요. 다 그런 거 하느라고 댕기시니까. 그래서 이제 뭐 또 글쎄 안 되셨죠. 두 번 나가셨는데 안 되셨죠. 그때 뭐 다 그때만 해도 부정선거 굉장히 했었다고 해요. 그러니까는 뭐 인제 일가 친척인대두 고무신 받고 쌀 받고 그러고 안 찍는 거예요, 아버지를. 일가 친척인데두. 그래가지구 인제 하여튼. 그래서 아버지가 인제 만나시면은 굉장히 사회나 정치적으로 말씀을 인제 친구들인데, 아버지가 바둑을 참, 바둑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뭐 하여튼 바둑 친구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동네 친구들이. 그러니깐 이제 얘기하잖아요. 저는 이제 애니깐 옆에서 인제 그런 걸 줏어 들었죠. 그럴 때 인제 그래서 그때가 이승만 저기 대통령때. 그때 저 국민 학교 때였어요. 그래서 인제 그때 국민 학교 때 생각나는 거는 제가 좀 반항심이 많았던 것 같애요. 그래서 어, 학교에서 그거 모르실거예요. 어르신이 넘으신? 141107_ 이길주 28:22 이승만 대통령 생일 때는 편지를 쓰게 했어요. 국민 학교 애들 한테. 그 대통령이 오래 사십시오 뭐 어쩌구 뭐. 아주 뭐 어쩌고 그렇게 해서 써서 그거를 보냈어요. 굉장히 ?141107_ 이길주 28:36 (웃음) 그때 그랬어요. 그래가지구 근데 그때만 해도 제가 좀 이렇게 뭘 그런 걸 듣고 그러면서 이게 이건 아니다 해갖구 마악 엉터리로 막 비웃으면서 썼어요. 대통령에 대해서 뭐 막 비웃는 걸로 썼어요. 되갖구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겨갖구 그 저기 학생, 선생님 교무실에 불려 가가지구 벌스구. 제가 그랬던, 국민 학교 때 그런 생각이 나요. 그런데 고담에 뭐 중고등학교때는 그렇게 정치 뭐 그런 얘긴 들었지만 제가 뭐 데모에 선두 스고 내가 리딩을 하고 뭐 그런 거는 전혀 없었던 것 같애요 그때는. 대학교 때 데모 좀 했고. 그러고. 면담자: 그, 대학을 졸업하시구 바로 미국으로 또 가셨네요? 구술자: 졸업하구 졸업 4월 달에 3월 달에 하죠? 그러구는 제가 고 다음 해에 고 다음해 일월에 왔죠. 69년에 졸업하구.. 면담자: 69년에 졸업을 하셨었나요? 구술자: 64년에서 64,65,66, 아니다 64년에 들어가서 1,2,3,4 8년에 졸업했다. 면담자: 네 68년에 졸업하신 거죠? 구술자: 그래가지구 내가 70년 1월에 왔어요. 면담자: 70년 1월에요? 그 여기에 유학을 오신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69년에 제가 학교 댕길 때 2학년 때부터, 2학년 때 선배 언니들이 영어 배우고 인제 용돈도 쓰고 그런다면서 미군 부대에 그 저기, 그 성가대가 있었어, 콰이어(choir: 성가대)가 있었어요. 미국 사람들 위한 처치가 있잖아요. 거기를 가자구 그래가지구 인제 따라갔어요. 2학년 땐 거 같어요. 그래서 거기를 다녔죠. 거기에 인제 거기가 어디냐믄 카이저, 캠프 카이저라 그래가지구 동두천 있는데 거기였어요. 근데 거기를 아침에 버스를 타구 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노래를 하구 저녁을 먹구 집에 오는 거예요. 버스루. 우리들이 다 그랬어요. 선배들도 있구. 가서 거기서 성가대를 했어요. 성가대를 했는데 어 내가 3학년 때, 내가 4학년 때, 그러니까 2년, 4학년때, 아니다 3학년 때 그 부대에서 그때 인제 그 저기 뭐야 각 고아원을 써포트(support), 후원을 했었어요. 그래서 고아원을 후원을 했었는데 어.. 그 고아원 애들이 한달에 한번씩 와서 노래를 했어요. 어린이 성가대죠. 그래서 인제 걔네들이 와서 노래 했었는데 그니까 인제 군인들이 인제 그렇게 된 거예요. 채플린(Chaplain: 목사)이랑. 왜 우리가 얘네들을 돈을 많이 주구, 그 월급을 다 받았으니까 돈이 꽤 되잖아요. 성가대를 다 돈을 주니까. 그러니까는 왜 우리가 뭐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을 데려다 ? 돈을 주고 그럴 필요가 뭐 있느냐. 우리가 고아원을 써포트를 하는데 걔네들이 노래를 참 잘했어요. 왜냐믄 뭐 얼마나 연습을 시켰겠어요. 자기 이거 해주는 데서 해야되니까. 그니까 얘네들만 해두 천사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사람들 할 필요 없이 얘네들을 성가대로 하자. 그리고 얘네들을 더 도와주자. 그렇게 됐대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다 파이어(fire:해고)가 됐잖아요, 이제 우리 어른들은. 그때 음대 댕기는 사람들이 다 가서 했어요. 그러니까는 파이어가 됐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이 저를 픽업(pick up: 채용)을 했어요. 미스 리, 와서 애들 지휘를 해달라구. 자기들이 다 시키니까 그 음악적인 것만 해서 성가대 지휘를 좀 해달라. 그래서 전 지금두 왜 그 사람들이 저를 그때 뭐 다 잘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래서 인제 제가 인제 그거 잡을 맡게 됐죠. 그래서 제가 그거를 이제 3학년 4학년을 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 남편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인제 우리 남편이 하고 이제 뭐 나는 인제 남편을 얘기하자면 얘기가 길어지니까. 졸업을 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야지 생각을 했는데 우리 남편이 뭐 어쩌구 그러니까 나는 일본 사람하고 결혼을 안 한다. 일본사람하고 했어요 제가요, 그래서 난 그 때 뭐 일본 일본놈이죠 우리가 뭐 일본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때 뭐 한일 그런 게 저도 반일 그런 게 굉장해. 저도 좀. 제가 저도 좀 이렇게 반항기가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도 또 그러시고.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인제 뭐 집에서는 뭐 나는 국제결혼을 할 생각도 안 했고 가라 그랬어. (웃음) 왜냐면 내가 저기 갈테니까 가서 어떻게 살겠냐 하면 나는 애국심이 너무 강해갖구 우리 남편을 이제 어, 자기를 좀 한국을 서울을 구경 시켜달래는 거예요. 그니까 나는 이거는 애국심이 너무 강해 가지구 내가 얘를 해줘야 되는 거야. 그래갖구 어떻게 되냐믄 내가 일요일 날 아침에 가서 집에 올 때 같이 나와요 버스를 타고. 그러믄 미 8군에서 자구. 용산에 있는 거 있잖아요. 거기서 자구 토요일, 월요일 날, 아 아니다, 토요일 날 나와서 거기서 나를 만나가지고 내가 인제 뭐 덕수궁 뭐 이런데 다 데리고 댕겼어요. 하며는 일요일 날 아침에 나랑 같이 버스를 타고 부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예배를 보고 일요일날은 일을 안 하드라구. 집에 올 때 또 버스를 타고 같이 오는거야 그리고 혼자 또 집에 가는거야 (웃음) 아니 이제 집에 같이 오고는 자기는 도로 부대로 들어가야 되니까. 그러니까는 나는 아무, 하나도 그런 생각이, 제가 좀 그런게 없어요. 남자 오빠들 사이에서만 자라서 뭐 이렇게 여자들 같이 남자를 보면 이상하고 그런게 없었어요. 그러니까는 이제 학교, 중고등학교때도 친구들은 쟤는 호박씨까는 애다 그러죠. 그러면서 시치미 딱 떼고. 남여공학이었으니까. 전혀 그런게 없어요. 남자니까 뭐 이런게 없는거예요 제가. 그냥 남자면 남자고 뭐 그냥 그런대다가 계속 계속 남녀공학을 다녔잖아요. 근데 지금도 그제가 그래요. 남자라고 부끄러워하는게 없어요. 그래서 인제 전연 그런걸 몰랐죠. 나보고 미국을 오라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그렇게 얘기는 안 하고 인제 학비 같은 것도 뭐 해주겠다, 이런 식으루. 후원자를 자기가 찾아주겠다 이런식으로. 그래서 이제 내가 뭐 그런거 받아갖고 가냐, 이제 가구 글구 난 집에서 반대하는 결혼 같은 건 안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랬드니 우리 남편이 미국을 오자마자 월남전이 그 전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월남을 발룬티어(volunteer)를 했어요. 지원을 하니까 인제 저희 남편이 덴티스트(dentist)에요. 의사가 월남에 가겠다는 일이 없대요. 다 빠지지 거기를 왜 가요 전쟁하는데. 근데 우리남편이 가겠다고 그러니까 뭐 완전히. 근데 가는데 조건을 서울로 도로 가는 걸로. 그걸 하고 일년을 하고 그래서 이제 일년 동안 월남을 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인제 졸업. 우리 어머니는 인제 내가 편지를 보내고 그러니까 남의 아들이, 남의 귀한 아들이 우리 딸 때문에, 내 딸때문에 전쟁터로 나가고 그러는데 1월 1일인데 어.. 밥이라도 먹이자. 그렇게 된 거예요. 우리집에서 처음에는 말도 않고.(웃음) 그렇게 점수를 따가지고 결혼을 하게 됐죠. 면담자: 결혼을 하시고 들어가신 건가요? 구술자: 구술자: 네 69년에 결혼을 했죠. 그리고 인제 70년에, 8월 달에 결혼을 하고 1월에 인제 미국으로 온 거죠. 그니까 그 무슨 비잔가 그런 걸로 온 거죠. 배우자. 면담자: 유학을, 유학을 공부를 계속하시려고 여길 먼저 들어오신 건 아니었었고. 아니에요. 그럴려고 그러고 있는데 인제 그렇게 돼갖구 들어와 갖고 내가 지금도 그러지 너 땜에 내가 공부도 못하구. 그때 혼자 와서 공부를 했으면 뭐 조금 더 잘 잘할 저기가 됐을텐데, 그냥 와가지고 뭐 살림 살았죠. 면담자: 그럼 70년 1월에 미국으로 좀 들어오셨는데 혼자 들어오신 거죠. 가족들 다.. 구술자: 아니요. 나는 그냥. 우리오빠는 먼저. 우리오빠가 굉장히 나이가 여섯 살씩 많아요. 작은 오빠는 서울 의대 졸업하고 뭐 그런 게 있었어요 그때 뭐 그런 게 있었어요. 의사 해갖구 인턴 이런 게 미국에 오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오빠는 왔고 그 다음 해엔가 내가 왔죠. 면담자: 아아, 오빠되시는 분이 먼저 미국을 들어오셨네요. 구술자: 졸업하자마자 왔어요. 면담자: 그럼 가족이 다 들어오신 건가요? 구술자: 아니죠. 나만 온 거죠. 우리 오빠는 센트리스라고 글루 병원으로 갔고 고 다음에 나는 나 혼자 온 거죠. 식구들이, 식구들은 아무도 안 왔어요. 그리고 내 동생은 와서 공부를 했죠. 걔네는 UCLA에서 박사를 받고 그랬죠. 면담자: 처음에 미국을 들어오셨을 때 좀 분위기라든지, LA로 오셨나요? LA에 거주하셨나요? 구술자: 바루스? 일년 있었어요, 군대이니까 군인이니까. LA에 저희 시부모님들이 사셨어요. 그래서 이제 LA로 왔죠. 졸업, 졸업이래, 제대하고 LA로 왔죠. 무슨 얘기를 할려고. 그때 왔을 때는 그러니까 언제 온 거야. 70년대. 70년대에는 올림픽 이런 데가 한국 음식점의 냄새 맡고 찾아갔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길거리에도 한국 사람도 없고. 또 혹시 지나가면 쳐다볼 정도였고 그랬었죠. 면담자: 그때만 해도 여기가 한인들이 구술자: 없었죠,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 한국 뭐 음식점이 한 개 있었어요. 근데 우리 남편이 이제 나 한국 음식 먹고 싶어 한다고 이렇게 냄새 맡고 찾아갔더라구. (웃음) 난 또 한국사람이니까, 미국 사람보다 냄새가 좀 덜 저기 하는데 외국 사람들이 더 한국 냄새가 더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땐 그랬었어요. 뭐 굉장히 한국 사람들 없었죠. 그래서 인제 그랬엇는데 지금은 완전히 네.. 면담자: 지금 그때 LA 오셔서 거주했던 곳이 이 인근이셨나요 아니면? 구술자: 그렇죠, 여기 저기 그 우리 친구가 우리 남편 어떻게 된 친구가 아파트를 갖고 있었어요. 놀망디(Normandy)라고 있어요. 여기 윌셔(Wilshire)에서 저 북쪽으루. 놀망디라고 인제 이렇게 가는 길인데 고기에 아파트가 있어서 거기서 살았죠. 얼마동안 면담자: 그, 그 민족학교 초반부터 선생님 좀 활동을 꾸준히 해오신 걸로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때 오셔서 이런 그, 이런 활동들을 쫌 할 수 있었던 계기 같은게 좀 과정 같은게 있으시면 구술자: 제가 미국에 70년도에 와가지구 71년에 애기 낳고 74년에 애기 낳구 그래갖구 십년 동안은 제가 살림만 살았어요. 시댁도 있고 그러니까. 이제 시부모 식구들 뭐 이런 것두 저기 하고 그래가지구. 10년 딱 살림을 살았어요. 그러니까 80년대부터 제가 노래를 하기 시작했어요. 교회 그 다니구 그러면서 그 교회 음악 같은 거 하고 그래서 인제 80년부터 그래서 인제 교회가 산타모니카(Santa Monica)에 있었어요. 선한 사마리아 교회라구. 이제 그 교회는 그 홍동근 목사님이라고 그 통일문제에 대해 관계하시고 이러시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이 LA에 유일한 그런 정치적인 그런 거를 갖고 있는 그런 교회였어요. 그래서 인제 거기를 어떻게 하다가 가게 됐죠. 뭐 어떻게 이상하게 해소 거기를 갔었어요. 그래서 거기를 가서 인제 목사님 설교가 참 좋으시드라구요. 그때부터 목사님이 뭐 그때 저기 독일에서 있었던 뭐 저기 무슨 남북 회담 뭐 이런 것도 가시고 그래서 그때부터 그런 거를 듣기 시작을 했고 그래서 인제 갔을 때 거기 김상돈 장로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그 서울 시장하시다가 쫒겨 오신 분인데 그분이 거기 장로님이셨어요. 그니깐 인제 그분의 댁에 윤한봉 선생님이 오신 거죠. 거기서 거두어주셨죠. 그러니까는 인제 일요일 날 윤한봉 선생이 선한사마리아인 교회 내가 나가고 있는 교회에 오셨어요. 면담자: 그때 처음 뵌 건가요? 구술자: 그렇죠 그때, 그때 책 보셨는지 몰라, 왜 기념집 윤한봉 기념집. 저기 나온 거에 내가 몇자 쓴 게 있는데. 면담자: 아 그러셨나요? 구술자: 그래서 인제 맨 처음에는 『운동화와 똥가방』이라고 나왔었고 몇 년 전에 기념 생각, 추모집, 그런 게 나왔어요. 저거를 좀 써달라고 그래서 제가 그때 인제 어떻게 만났으며 어떻게 해서 인볼브 됐으며 하는 걸 쓴 게 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그래서 그 윤한봉 선생님 와서 교회에 인제 나온 거예요. 그 댁에 계시니까. 이분이 굉장히 진실하신 기독교인이니까 거기서 집에서 있으니까는 이제 일요일 날은 또 따라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인제 거기 김성철이라구 그때 인제 뭐 저 4.19 민주 학생 4.19 혁명 학생 위원회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에 그분이 거기 성가대 대원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제 그래서 거기 내가 지휘를 하게 됐어요. 그래서 내가 십 몇 년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거기 성가대에 있으면서 그분은 인제 그런 민주화운동동 뭐 이런 거, 예를 들어서 반정부 뭐 그런 거 하고 그랬으니까. 그때만 해도 그 조직적인, 조직이 없었어요. 이 사람들이 그냥 무슨 회의 하고는 그냥 4.19 기념하고는 끝나는 거예요. 3.1 절하고 끝나고 그게 연속되는 게 없고 그때 그 사람이 회장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보고 여기를 소개를 해준 거죠. 윤한봉씨를. 그리고 이제 제가 그 장로님 댁에서 모임이 많이 있었어요. 윤한봉선생이 있는 김상돈 댁에서. 윤한봉 선생님이 뭐 강의라고 그럴까 좌담회 같은 거. 그럴 때 인제 초대를 받아가지고 갔어요. 그래서 인제 그때부터 이런거에 눈을 뜨게 됐죠. 그 이전에는 정치적인 거에 제가 뭐 할 시간도 없었고 오자마자 애기들 십년 길르구. 그때부터 제가 노래를 하면서 교회를 나가면서 인제 그때부터 이제 그게 제가 사회활동이 시작된 거예요. 면담자: 그럼 80년 5월에 광주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소식은 전해 들으셧나요? 구술자: 구술자: 그럼요. 왜 그랬냐며는 고때 금방은 아니지마는 그때 인제 소식은 들었고 그래서 인제 윤한봉 선생님 오시자 마자 그 뭐야 그 신부님이 그걸 복권하셨다던가 사진을? 5·18 그 현장 사진을? 면담자: 네 독일에 있던 것을 이렇게 옮겨서. 구술자: 그래가지구 그거를 우리가 거기다 한번, 유니테리안 처치(Wilshire Unitarian Church)래는게 있어요. 윌셔하고 번몬에서 저쪽으로 가면 유니테리안 처치라는게 있는데 유니테리안 처치에 대해서 좀 아세요? 그거는 뭐가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가 없는, 그 장로교가 없는, 그 뭐라 그러나 그거를? 뭐 원불교같은 크리스천들 저기고. 참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그 사람들은 목사 뭐 이런 것도 없고 그냥 모여서 참선하고 얘기하고, 그러고 북한에도 많이 도움을 주고 그런 데 거기에서, 거기를 그러니까 오픈된 거예요. 그러니까 5·18 전시회도 거기서 했고 면담자: 그 전시회는 언제 했던 건가요? 구술자: 그러니까 그게 언젠가 5·18 나고 윤한봉선생 오시고 난 다음이니까 금방 면담자: 81년, 2년 그 정도 구술자: 그런게 이제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민족학교가 83년에 세워졌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때 그런 게 생긴거죠. 나는 순전히 노래하느라고 그 전서부터 윤한봉 선생 오시기 전부터 뭐 3.1절, 4.19 그럼 이제 노래 해달라 그러믄 가서 해주고. 그러니까 그런데 가서 강연 듣고 내가 그래서 그런 거에 대해서, 한국에 대해서 저기를 갖게 된 거죠. 관심을 갖게 된 거죠. 면담자: 그 80년 당시 상황은 좀 기억나시는 대로, 뭐 특별하게 활동은 하지 않으셨더라도요, 그걸루 들었거나 동포 사회 분위기나 뭐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좀 구술자: 그때만 해도 내가 처음으로 인볼브하기 시작한데가 동포 사회에 관여가 많이 되지는 않았었어요. 그 다음에 제가 노래하면서부터 동포사회에 연계가 됐는데 어 그때 인제 저희가 이렇게 보며는 무슨 어려움이 있을 때 사람들이 더 일을 많이 하잖아요. 그러구 이제 더 뭉치구. 그래서 그 5·18이 났을 때는 특히 그 저기 그 전라도, 그거 뭐지, 뭐라 그러죠, 향우회. 면담자: 호남 향우회 구술자: 호남향우회, 그 호남향우회가 그때 굉장히 흥분을 하고, 자기네들 저기니까. 그리구 그때부터 인제 오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때그거를 봤던 사람들이, 대학생들도 오고. 그래가지고 이제 아주 생생하게 그때 누구보다도 그거는 내가 많이 봤죠. 그르구 윤한봉선생님이 그거에 대해서 5·18 그 광주 혁명에 대해서 강연도 여러 번 했어요. 그때 마다 이제 난 노래해야하니까 가서 들으니까, 들으니까 귀가 뚫리잖아요. 그래서 이제 순전히 노래 때문에 제가 관계가 됐어요. 그러다 원체 제가 조금 또 기질이 좀 그런 기질이 있어가지구. 면담자: 예. 그 이건 뭐 민족 학교를 그때 인제 LA에 83년도에 이렇게 만들때 왜 민족학교를 세우게 된 계기라고 해야 되나요, 이런 걸 만들고자 했던 그런.. 구술자: 내가 맨들고자 했던 건 아니죠. 저는 그런 건 없었죠. 근데 이제 윤한봉 선생이 이제 일요일날 와서 이제 나를 봤을 거 아니에요. 저 여자는 어떤 여자냐, 그러니까 이제 그 문성철이라는 학생한테 저 여자는 어떤 여자냐. 그러니까 문성철씨 얘기가 뭐 그렇게 뭐 뭐지? 뭐라고 하나 다 잊어버렸다. 어, 깨어있는 거 뭐라고 그러죠. 면담자: 의식화 구술자: 의식화 되진 것 같지는 않은데 굉장히 좋은 사람인거 같다. 그래서 내가 리크룻(recruit)을 당했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한봉씨가 합수 형님이 이제 해서 그때 인제 이사로 인제, 그러면서 그런 거 연설하고 이럴 때 내가 인제 계속 인볼브가 됐죠. 그러니까 직접 주도하지는 않으셨지만 과정들을 죽 지켜보셨잖아요. 만들어지고 했던. 그 민족학교를 처음 설립하고자 했던 그런 목표라든지 뭐 목적이라든지 그거는 뭐 우리가 들고 나온 게 대외적으로는 우리의 뿌리를 알아야 된다, 우리 민족적인 뿌리를 알아야 된다. 왜그러냐며는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뿌리를 알아야 된다. 우리가 그냥 미국사람이다 그러구 댕기는 게 아니라, 그리구 그때는 무슨 일이 시작했었냐면 라치키(latch key), 저기 그 애들이, 차일드라는게 있었어요. 애들은 목에다가 열쇠를 달고 댕겼어요. 그 저기 뭐냐, 아파트 열쇠를. 왜냐면 부모들이 와가지구 사실 그것이 법적으로 큰일나는, 엄마 아빠들 다 잡혀가거든요. 그게 알려지믄. 근데 뭐 그때만 해도, 그니깐 얘들이 목에다가 열쇠를 달고 댕기면서 엄마 아버지 없는 집에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애들끼리 있는 거예요. 굉장히 위험한 일인데 그때 그런 사람들 많았어요. 그래가지구 그러면 그런 애들로 우리가 민족적인 이런 거를 가르켜야 된다, 그래서 인제 그게 취지였어요. 그니까 뭐 너무 좋은 취지지. 그 다음에 인제 그때 인제 내가 통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인제 우리가 우리나라가 인제 그 하나가 되야된대는거, 그리고 평등한 사회가 되야된대는 거. 저는 조금 정의, 뭔가 뱃장이 뭘 몰라가지고 배짱이 많아요. 깡이 많아가지구. 뭘 몰라갖구 깡이 많아. 근데 그래서 인제 그런 거 뭐 흥분하는 거죠. 제가. 그래가지구 뭐 시작을 한 거죠 그때. 그래서 6명 이사가 선택이 인제 되서 하는데 그때 어떻게 제가 끼게 된 거죠. 그래서 인제 그때부터는 정식으루 인제 역사강의래든지 뭐 정치적인 그런 거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거, 교육을 받게 된 거죠. 면담자: 그, 민족학교가 해년마다 5월이 되면 그 5월 관련 기념사업, 정신 계승, 관련 어떤 활동들을 꾸준히, 평상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꾸준히 진행해온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주로 인제 그 문화 관련된 쪽으로 이걸 이렇게. 구술자: 네 문화가, 제가 그때 인제 합수 선생이 계셨을 때 68년, 아니 90, 아니다 88년이었는 것 같애. 88년에 그때 인제 여러 군데에서 지부가 있었어요. 시카고래든지 뉴욕이래든지 필라래든지. 많이 있는데 한봉선생이 계신 관계로 인제 그 모든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깨우쳐졌잖아요. 이렇게 이런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러구 미국과의 관계, 그런 게 그때부터 인제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인제 저기를 하면서 인제 광주 혁명에 관계됐던 사람들, 있었던 분들이 계속 오시는 분들이 계시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뭐라 그럴까, 흥분을 한 상태라 그럴까. 썸씽 이즈 해프닝(Something is happening: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매일매일이 신나는 날들이었어요. 저한테는요. 뭐 정말 아무것도 모르다가. 너무너무 그냥 이게 정말 정의롭고 내가 너무 내가 맘에 드는 거야. 그래가지구 그때부터 인제 인권운동을 하기 시작한거죠. 광주 혁명 같은것도 인권운동 아니에요. 그래서 인제 저는 정치는 전연 물라요. 정치는 지금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정치인들도 모르는데 어.. 제가 저를 캐태고리(category), 구분을 한다면 휴머니스트(humanist)에요. 저는 인간 관계가 정의로워야 된대는거. 그거로 저는 구분하고 싶어요. 제가 전 정치가도 아니고 액티비스트(activist)도, 그걸 또 액티비스트라고 할 수 있겠죠, 그죠, 운동가라고 할 수 있겠죠. 그걸 보고 행동을 해야지 되면. 그래서 이제 그런게 저는 굉장히 저하고 이게 제가 저기, 정말 투헌드레드 퍼센트 어그리(200 percent agree: 완전히 동의) 되는 그런거 였고 어.. (웃음) 면담자: 그, 주로 선생님께서 이렇게 5월 관련활동이라든지 꼭 5월 뿐만이 아니라 민족 학교에서 하셨던 그런 활동들이 있으면 좀 소개를 해주세요 구술자: 아. 얘기하려다 말았다. 그래서 이제 그때 한창 이렇게 고조되어가고 있을 때에요, 통일이래든지. 그리고 그때는 우리가 합수, 윤한봉 선생이 나라가 하나가 되야지 된다는 거 그런 거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통일, 통일 했지만 구체적인 뭐가 없었던 거죠. 근데 그때 더 이론적으로 정리가 되는 거죠. 우리들이.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어요. 근데 그래가지고 어.. 저기 뭐. 나는 아직도 합수씨가 나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안나요. 그냥 보면 씩 웃고 그러지 면담자: 나이는 더 어리셨죠. 구술자: 한두 살 어려요. 저는 근데 나이를 별루 그렇게 관계 아까도 얘기 했지만 좀 맞 먹으려구 그러는데. 모르겠어요. 난 나이 관계가 없는데. 굉장히 그것도 다 따지더라구요. 그때도 몰랐어요. 나보다 나이가 어린지도 몰랐어요, 저는요. 그냥 다 어른이라고 생각했죠. 나보다 많이 아시고 그러니까 어른이라고 생각했죠. 한참 후에 알았어요. 제가 어리, 밑이라는 걸 근데 저기 그 남북 가곡의 밤을 한번 해보시오? 그래요. 그래서 그러면 뭐 저기 뭐 좀 도와줄테니까 그거를 해보래요. 나보고 면담자: 남북 가곡의 밤을요? 구술자: 남북 가곡의 밤을. 그래서 88년에 했던 것 같아요. 왜 그냐면 88년에 남북 가곡의 밤을 굉장히 성대히 했어요. 면담자: 어디, 남북 가곡의 밤이라는 이름에서만 보면 남쪽 뭐 이렇게.. 구술자: 그래서 사람들이 다 북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때 그럴 수가 없었죠. 그치만 이제 그게 아니구 그 우리가 그거를 구입을 했어요. 북한 노래를. 북한의 노래를 구입을 해가지구 여기서 그때 인제 합수 저기저기 윤한봉 선생이 다니면서 우리가 브랜치가 많았다 그랬잖아요. 그런데서 이런 통일운동이래든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민주화 운동이래든지. 그게 일어나니까 거기서 젊은 사람들 많이 리크룻이 됐잖아요. 그러니까는 거기에서 음악하는 사람들도 있구 그런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소개를 해주고 이름을 우선 줬고 그래서 인제 제가 그때 맡아가지구 LA에서 저기 했죠. 그래갖구 뭐 자리가 없어가지고 사람들 다 돌아가고 막 그 정도로 성황리에 했어요. 다 음대 나온 사람들이고 그래서 이제 내 친구들, 내가 아는 친구들이며 또 소개소개로 이렇게 해가지고 뉴욕 쪽에서도, 동부에서도 여러 명이 왔고 여기서도 여러 명이 참석했고. 그래서 노래로만 했죠 면담자: 북한에서 불리는 그런 노래를요? 구술자: 그 노래 하나 하고, 남한 노래 하나 하고, 북한 노래 하고, 이렇게 같이 해서 처음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래디오 코리아(Radio Korea) 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처음으로 북한 노래가 나갔어요. 굉장히 역사적인 일이죠. 그때는 북한 노래 이러면 뭐 말도 안 되는 소린데 그 때 이 사람들이 이걸 브로드캐스트(broadcast)를 했어. 그래가지고 사람들도 많이 왔고 선전도 많이 됐고 북한 노래가 어떤 건가 인제 궁금한 거죠. 근데 이제 그 노래하신 사람들은 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굉장히 수준 있게 음악회를 했어요 .이제 그거를 하고 나서 내가 89년에 4월에 북한을 방문을 했죠. 뭐로 갔었냐 하면 4월 축제, 봄축제에. 김일성 장군 생일 그걸 4월 축제래는게 있어요. 4월 10월 16일 해서 축제가 열려요. 그걸 동남아시아, 유럽, 뭐 다 그런 데서 예술인들이 한 4백명 이렇게 와요. 그래가지고 모든 문화 행사가 있는 거예요. 무슨 합창도 하고 노래도 하고 뭐 하여튼 굉장히 그게 저기 ? 141107_이길주 59:35 그때 내가 여섯명이, 여섯 명쯤, 근데 그거가 어떻게 해서 주선이 됐냐하면 내가 다니던 교회에 홍동문 목사님이 이제 부인되시는 분이 홍정자씨라고 그걸 맡았어요. 단장을 맡았어요. 그래서 이제 그분들은 북한을 왔다갔다가 하셨던 분이라 이제 해서, 내가 리크룻이 된 거죠 이제. 면담자: 북한에서 초청을 해서요? 구술자: 초청을 했는지 뭔지 모르겠어요. 그분이 인제 모으는 거죠. 예술인들을 모아가지구. 음악, 음악인들을 모아가지고 그 사람이 단장이 되어가지고 가는 거죠. 근데 그분도 굉장히 첫번이에요. 그게. 그리고 저도 미국, 해외 동포 중에서 간 사람이 제가 첫 케이스에요. 여섯 명이 가기로 했어요. 뭐 하는 사람도 가고 피아노 치는 사람도. 근데 이게 영사관에서 막 압박이 들어오구 어쩌구 해가지고 다 못간 대는 거예요. 나 하나 남은 거예요. 다 못가고. 면담자: 선생님에게는 뭐 영사관에서 뭐 압력이나 그런 게 없었나요 구술자: 제가 그 다음에는, 아니 저한테는 저는 뭐 그때는 한국 사회에 제가 인볼브가 안 돼 있었고 한국사람하고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도움이 됐던 것 같애요. 스크린이 많이 됐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 저기가 없었고 또 한 가지 고마운 거는 저희, 제가 뭘 몰라서 깡이 쎄다고 그랬잖아요. 뭘 몰라 가지구 뭐 무서운게 없어요 제가요. 그러고 그러니까 혼자 갔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놀래는거야. 어떻게 거기를 혼자 가느냐 이러는 거예요. 북한을 어떻게 혼자 가느냐. 근데 저는 또 사명, 아니 뭐랄까. 약속한게 있으면 그게 뭐 내가 뭐 다리가 부러지거나 어떻게 되서 못가면 내 양심에. 사람들이 뭐라 그러니까 영사관에서 뭐라 그러니까 안 간대는 것은 있을 수가 없거든요, 제 양심에는요. 그거 하나 때문에 깡이 세요. 제가. 그래갖고는 다 안 간대니까 혼자래도 가야죠 어떡해요. 미국에서 예술단이 온다 그랬는데 저가 안 가면 그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는 가는 거죠. 혼자서. 그니까 우리 남편한테도 혼자라는 소리 못하고, 남편이 비행장에 데려다주는데 딴 사람들은 다 어디갔녜 (웃음) 뭐 몰라 뭐 따로 오나봐 그러고는 면담자: 혼자 가신건가요? 구술자: 혼자 그 홍정자씨랑 간 거예요. 홍정자씨도 처음으로 그런 걸 맡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간 거예요. 가서 4월제에 가서 제가 오로지 그때에는, 그때는 인제. 면담자: 아아, 아닙니다. 말씀 그냥 편하게 하십시오. 저희 시간이 뭐 저녁 시간이라. 혹시 뭐 다른 일정이 이후에 ? 구술자: 아니요, 아니요. 면담자: 그, 그래서 그 일본, 아니 북한을 들어가셔서 선생님이 하셨던 뭐 공연, 공연인가요 그런게 구술자: 그게 4월 봄 축제라고 그래가지구 각 나라에서 와가지구 음악회를 한 거예요. 근데 그게 본 거기는 뭐냐하면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축하하는 그거가, 여기도 백악관에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있는데 그게 점점점점 커져가지고 이게 그냥 그렇게 몇백 명 뭐 사오백명씩 막 모이는 음악회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인제 제가 간 게 아마 7횐가 그랬어요. 제 7찬가 뭐. 제가 이래요. 그런 게 전부, 전연, 7차 아니면 9찰 거예요. 그때 인제 처음 외국 해외동포로서 간 것도 처음이고, 하튼 남한에서도 간 적이 처음, 남한 사람이, 남한 사람이 간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갔을 때 제가 동창을 하나 데리고 갔죠. 얘는 왔어요. 왜냐면 자기 어.. 부인의 누가 어 저기 북한에 있다 그랬어요. 그래서 장인이 그걸 꼭 찾아봐달라고 그래갖구 그런 또 이 사람은 그게 있었어요. 가야금하는 음대 친군데 김동선이라고 활약을 많이 했죠. 지금 그래서 걔를 제가 지금 간 거는 그때 김영선씨라고 작곡하고 그러는 분이 있었는데 교회에 나오면서 알게 되가지고 그 통일에 그 사람이 통일 노래를 많이 지었어요. 민주 운동 같은 이런, 민주 운동 같은 그런 노래도 짓고. 그래서 그 노래를 제가 불렀죠. 그때 기회가 있었으니 그런 걸 부르고 그랬죠. 그래서 제가 꽤 재산이잖아요. 아무도 그런 걸 부르지 않는데 나는 그 통일에 관한 곡을 갖고 있으니까 성악가는 곡이 있어야 되잖아요. 곡이 있어야지. 그러니까 그래서 그때 인제 저는 처음으로 그니까는 그 통일에 관한 노래를 가지고 갔어요. 제가 그래서 그때 가보니까 다들 뭐 일본에 재일교포들이 예술인이 또 많이 와요. 많이 왔는데 다 뭐 무슨 뭐 저기 러시아 뭐 이런 데서도 오고 뭐, 그런 사람들이 노래를 뭐, 무슨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도 하고 뭐, 근데 뭐 전연 그 의식이 없는 그런 노래만 부르더라구요. 근데 다행히도 저는 가게 된 이유가 제가 가서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첫 번째 내려서 한 얘기가 난 노래 잘해서 온 거 아니다. 나는 통일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그 통일에 대한 염원을 북조선 사람들하고 하기 위해서 내가 온거지 난 뭐 내가 노래를 잘해서 내가 대표로 온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알아 달라, 인제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게 저의 생각이었어요. 내가 뭐 노래를 잘해서 가서 노래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 통일에 대해 그때 내가 그런 운동을 하고 있었으니까.그런 거에 대한 노래를 하겠다 그래가지고. 그래서 인제 거기서 인제 제가 처음으로 통일에 대한 그런 그거를 가진 노래를 부른 거예요. 사람들이 좀 생각이 달라졌겠죠. 그때부터 제 노래를 갖고 또 다들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거를 제가 참 뭐라 그럴까. 에브리씽 퍼스트(Everything First) 뭐든 게 첫 번이었어요. 그리고 그게 참 보람이 있구 그랬어요. 그래서 이제 그때 갔다 와서 그 다음에 인제 8월에 저기 그 평화 대행진이 있었죠. 민족 학교 그거에. 글쎄 그때 이제 면담자: 이건 어떻게 계획을 하게 된 건가요, 평화 구술자: 평화대행진이요 면담자: 예 대행진 구술자: 그거는 제가 저는 전혀 관계를, 안 껴줬어요. 저는요. 저는 뭐 왜였냐면 그건 한총련 주류로 된거예요. 저는 그때 한청련의 멤버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한청에 대해서 잘 알거예요. 한청련 했던 사람들이 잘 알거예요. 심인보씨라든지 그런 분들이 또 저기 홍, 홍기완이래는 분 스케줄이 됐나요? 면담자: 아니요 그분도 안 되있습니다. 구술자: 왜 안 되있어요? 그분이 그때 아주 롸잇 핸드(right hand: 오른팔)이었는데. 5·18에 대한. 근데 굉장히 먼데 살아요. 여기서 두 시간? 두 시간 반? 그분을 좀 얘기를 하면. 근데 왜 연락이 안 됐어요. 면담자: 저희가 LA에서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이 5일밖에 안 주어져가지고 구술자: 그런 분을 미리미리 했었어야 되는데. 그래가지구 그분들이 다 해가지구 8월달에 갔죠. 가서 인제 대행진을 하고 왔죠. 면담자: 어디 어디를 돌아다니신 거예요? 구술자: 저는 안 갔어요. 저는 못 갔어요. 저는 한청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 그 기밀이 굉장했어요. 그때 임수경 가고 그랬을 때. 그래가지구 인제 그 다음에 고 다음 해에 4월에 제가 또 갔었죠. 그때 여러 명을 데리고 갔어요. 중창단 같은 걸 해가지고 가고. 제가 인제 89년에 갔다오니까 90년에 미주 민족문화예술인 협의회래는 게 생겼어요. 인제 제가 인제 그 통로를 뚫어놓으니까 그런 게 있어야 되겠다 그래 가지구 글쓰는, 문학하는 사람들, 뭐 또 음악 하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민족문화 예술인 협의회가 그때 발족이 됐죠. 그래서 이제 그 민족문화 그 예술인 협의회가 음.. 일을 많이 했죠. 뭐 여러 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협찬을 하고 면담자: 그럼 그렇게 혹시 그 협회에 모이신 분들이 규모가 어느 정도 몇 명 정도 됐나요. 구술자: 그게. 한 열댓 명됐었죠. 글 쓰시는 분들이 많았고 황지강씨라고, 황석영씨하고 같은 저기 친구들이에요. 그래서 그분이 인제 해서 그때 그 청산이 부르거든 그거 아까 얘기한 게 우리 민족학교 생기고 금방 했던 것 같애요. 청산이 부거든 그분이 각 저기 연출 해갖고 그때 제가 인제 거기서 인제 주인공 맡았죠. (웃음) 졸지에 그냥 음식해가지고 먹이러 갔다가 (웃음) 면담자: 이게 그 어떤 극 구술자: 그게 몇 년이었나 연극이었어요. 면담자: 연극이었나요 연극하고 노래를 같이 아우르시는 그런 거? 구술자: 아니요, 노래는 아니고 연극만 아무튼 됐던 거예요. 그러구 그 다음에 그 다음에는 미문예협 멤버가 되셨죠. 그분이. 그분이 다 해가지고 되가지고 뭐 많이 일을 했어요. 면담자: 그런 문화 공연으로 사회 참여를 하신 거네요. 구술자: 그래서 우리가 처음으로, 처음으로 통일예술이라는 책을 세권 발간, 3집까지 냈어요. 4집 째는 압수가 되가지고 못 냈어요. 그게 한국에 가서 프린트를, 인쇄를 해가지고 와야되는데 뺏겼어요. 원고를. 그래서 제가 북한을 한 네 번쯤 갔어요. 가가지구 노래하러 간 게 아니고 가서 노래 하러는 두 번 갔고 그 다음엔 인비트윈(in-between: 사이)에 가가지고 그게 어떻게 됐냐면 뭐 민족문화, 민족 예술인 협의회가 생겼으니까 이제 우리가 조직이 생긴 거죠. 그래서 그 이름으로 북한을 방문했죠. 가서 음.. 재료를 구해가지고 온 거죠. 거기에 인제 남쪽에 발표가 안 된 그런, 남쪽에 발표가 됐다가 금지된 것, 이런 것들은 가서 허락을 받아오고, 우리가 책을 낸 대는, 그러구 인제 또 발표되지 않은 것들 있잖아요. 그래서 갔을 때 그 사람들이 한 얘기가 첫 번째 요구가 정치나 이념에 관계없는 재료로써 교류를 하자 이렇게 됐어요. 아, 그거는 우리도 원하는 바다. 순수한 그 염원과 통일의 염원과 이산의 아픔 이산가족의 아픔으로만 그거를 교류를 그게 조건이었어요. 그쪽에서 내건 조건이었고 우리도 그거가 조건이었고. 왜냐면 우리는 예술인 협의회였고 정치적인 것뭐 이런 거 이념적인 뭐 이런 것 그런 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순수한 문학, 그러니까는 이산가족의 아픔이라든지 또 통일에 대한 염원 이걸로만 하자 그래가지구 그때 가서 재료를 가져왔죠 제가. 그때도 혼자. 그래서 인제 책이 인제 거기서 가져온 걸로 인제 책을 맨들었죠 저희가. 그걸 저기 인쇄를 해서 책이 세 권째 나왔고 그래서 제가 그것 때문에 왔다 갔다 많이 했고 그 다음에 예술인 협의회가 생기면서 음악적으로 인제 제가 인제 음악을 맡아가지고 가서 보니까 노래를 하면서 보니까 노래할 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한국에서 한국, 남한 가곡 같은 거는 노. 우리가 북한곡은 알지도 못하고. 우리가 같이 부를래면 북한 노래를 남한에서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우리가 아이디어를 냈냐하며는 북한에 그러니까 이념이 없이, 정치적인거 아닌 거 그런 거로 된 시, 그런 시로 가져와서. 그때는 남한에서 그런 걸 할 수 없을 때니까. 재미 해외 인제 작곡가들이 작곡을 하고 그니까는 공동 저기가 되는 거예요. 또 여기 있는 시, 그걸로 북한에 음악가들이 작곡을 하고 그렇게 되며는 하자가 없잖아요 이거 니네꺼다, 내꺼다 이런게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곡을 여러 곡 맨들었어요. 저희가. 그래서 그거를 가져가서 그 다음 해에는 인제 그 다음 해에는 중창으루 제가 데리구 갔죠. 남자하구. 여자는 간다는 사람이 없어가지고 거기서 하고. 그래가지고 참 정말 뜻깊었어요. 첨으로 통일이 됐었어요. 음악인들이. 면담자: 89년 90년 91년 구술자: 89년에는 저 혼자 갔다 왔어요. 면담자: 이렇게 세 번 그 이후로도 계속 이 활동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그 다음에는 계속 활동을 했는데 어, 저는 인제 개인적으로는 인제 그거 뭐죠 나 왜 이렇게 이름이 생각이 안 나가지구 뭐 남북이 같이 하는 그런 거 있었잖아요 그런 거 있었잖아요. 그 뭔가. 지금도 있긴 있는데 우리는 안 왔지. 아 여기 누가 있어야 되는데 내가 그런 거 몰라가지구. 이름이 그게 .. 아 그런 게 있었어요. 그게 있는데 면담자: 남북이 같이 하는 회담 같은 건가요? 구술자: 회담 같은 것두 있고 8.15에 했었어요. 그 저기 해외 여기도 있었구 한국에도 있었구. 아직두 있는 걸루 알고 있어요. 그냥 종북으로 좀 치우친 사람들이 하는 거. 아. 내가 그런 거를 말이 기억이 안 나요. 그래가지구 8.15 저기 광복 기념으로도 모이고 그랬죠. 그때 처음으루 그때 황석영씨 북한에 있을 때. 그래가지구 그거 처음으로 그때 8.15음악제가 있었어요. 그게 처음으로 남한의 음악가들이 갔었어요. 황병선이라고 가야금하시는 분 면담자: 이게 언제였었나요? 구술자: 그니까 그게 80, 아니 93년? 내가 그거 확실하지가 앉네요. 92년 아니면 93년이에요. 그래서 그때 인제 남한에서 처음으로 성악가들이, 그니까 성악가들이 아니야. 남한에서 처음으로 그 고전음악, 뭐지 우리나라 그거, 그 국악. 국안인들이 가서 황병기씨라고 가야금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단장으로 해가지고 그때 와서 우리가 만났죠. 우린 해외 저기로 가고 그 사람들은 이제 남, 남쪽에서 오고 그래서. 그래서 뭐 저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요. 그래가지고 휴전선에서 우리가 넘어가겠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걸어서 내려가겠다고 데모도 하고 그래서 미국에서 간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야단이 났었지. 그런 좋은, 하여튼 참 정말 신나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던 해였어요. 80년, 90년도가. 그리고 아까 뭐 이야기 하라고, 뭐 이야기 하라고 그런 게 "청산이 부르거든"이죠? 말 못했다고. 면담자: 뭐 낮에 김준 선생님이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야기 못한 게 구술자: "청산이 부르거든" 그거를 못했다고 그랬죠? 그거 미문예협 우리가 한 거 민족문화예술인협회하고 그리고 저는 뭐 5·18에 관계되는 건 위원장도 했었고 그때 다 돌아가면서 하니까. 위원장도 했다가 제가 저기 그 뭐죠? 아유 나 이렇게 말이 생각이 안 나요. 지금도 있는 거 우리나라 그거 무슨 법 있잖아요. 면담자: 국가보안법 구술자: 국가보안법. 그거가 시정을, 폐지하라는 소리도 못하고 시정해야 한다고 인제 그랬다가 인제 조금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그때 그 해에, 내가 인제 위원장 했던 해에 그 주민 토론회라는 게 처음으로 있었어요. 그 때 하규완씨라고 회장이 되가지고 처음으로 친정부, 친남한정부적이 아닌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이 회장이 됐어요. 그래가지구 그때 그거를 했었어요. 토론회를 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저보고 그걸 좀, 그때 제가 맡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이 뭐 그런 반공적인 것 그런 거에 대해서 저기 얘길 해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때 가서 그거 없애야 된다는 소리는 못하고 그건 재정비를 재, 거기가 되야한다. 거기 안 좋은 것도 많고. 예를 들면서 내가 인제 뭐 그냥 덤블론드(dumb blonde: 멍청한 미녀) 노릇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인제 뭐 여기 그냥 얘기하자는 건데 시리어스(serious)하게 그러지 않고 그렇게 얘기 했는데 거기 무슨 재향군인회 사람들이 와가지구 나를 그냥 때릴라구 지팡이를 들고 덤비고. 그것도 굉장히 획기적인 사건이었어요. LA에서. 근데 그게 또 라디오 코리아로 생중계가 되서 나갔어요. 그래 가지구 참 사람들이 그냥 막 몰려들어가지고 막 흥분하는 사람들, 빨갱이를 두둔하는 그니까는 뭐 이런 내가 뭐 누구도 죽고 누구도 죽고 내 아버지도 참형을 당하고 어찌고 그때 한번 발칵 뒤집혔었어요. 그래 가지구 그때부터 한 저기, 우리 사회에서 저기, 한국 그 저기 사회에서 거론이 처음으로 된 거죠 정식으로 퍼블릭하게. 그 우리가 이런 게 있어야지 되고 그 화해를 해야 한다고. 근데 그 사람들이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진을 치고 와가지고 인제, 인제 그 빨갱이가 하나 나와서 인제 민족학교가 그때는 그렇게 오해를 받고 있었을 때니까. 그래가지구 야단법석이 났지만 그것도 참 좋은 전환점이었어요. 인제 그래서 뭐 이 얘기는 인제 그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주는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된다, 한국 커뮤니티도. 왜냐면 무조건 빨갱이 그러고 죽여야 된다. 뭐 이러니까. 그래서 그것도 아마 좋은, 좋은 깨달음이 됐었어요. 우리 모두들한테. 그래서 뭐 면담자: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됐나요? 그냥 그렇게. 구술자: 그건 인제 뭐, 주최 측에서는 야단이 났잖아요. 이거 내가 한대 얻어맞으면 어떻게 해요. 지팡이를 휘둘르면서 노인들이 나와 가지고 그러니까. 그래서 인제 다 짜가지고 온 거죠 자기네들이. 그게 굉장히 내가 나도 놀란 게, 내가 그냥 웃었어요, 웃으면서 자꾸 내려오라는 거예요. 나보고 피하라는 거예요. 그 정도로 막 살벌했어요. 그러니까 또 이제는 래디오로 다 됐으니까 또 인제 그 다른 인제 이런 사람들도 막 와가지고 인제 나를 보호해야 된다고 또 그러는데 다 내려가라고 했어요. 제가. 다 내려가라 그러구 내가 이거는 뭐 어쩌자는 게 아니니까, 나의 의견을 얘기하는 거니까 쪼금 남았으니까 마저 들어달라고 그르고 내가 그냥 끝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놀래가지고 (웃음) 여자가 그래서 나는, 저는 그렇잖아요. 그거 한 대 맞으면 그거보다 좋은 효과가 어디 있어요. 그러면 그거는 정말 이슈화가 되는 거예요. 여론화가 되는 거 라구요. 강연, 그거 연설자가 나가서 말을 하는데 자기네들 의견이 틀리다고 테러를 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그때만 해도 그런 분위기였어. 내가 하도 태연하게 웃으니까 이 할아버지들이 놀래가지고 진짜 때리지는 못한 것 같아요. 뭐 그랬으믄 놀래가지고 내가 막 뛰어 도망갈 줄 알았지. 그래서 하여튼 그 다음에 만나요. 그 여기 그 사람들 있어요 몇명이. 그래서 그 사람들 뭐 하는데 인제 무슨 공식석상에서 만나잖아요. 내가 안녕하세요 그러고 인사하고 많이 잡수세요 하면 이 사람들이 피식 웃어요. 그래서 인제 그런 관계가 그때부터 많이 흐려, 흐트러졌어요, 많이. 그래서 라디오 코리아가 큰 역할을 많이 했고요. 그 다음에 북한에 다녀온 것도 라디오 코리아가 굉장히 많이 저기를 팔로우업(follow up: 후속보도)을 해줬어요. 그래서 인제 거기두 인제 사람 사는 데고 거기 예술은 어떻게 되고 있었나 거기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했고. 면담자: 라디오 코리아라는 게 그 라디오 방송 구술자: 지금은 그게 라디오 서울이 됐던가? 라디오 코리아가 그전에는 오로지 저기였어요. 한국 방송. 면담자: 예 이제 지금은 이름이 라디오 서울 구술자: 라디오 서울? 면담자: 없어진 건 아니죠? 구술자: 라디오 코리아 있는지 물어보세요. 저는. 방송이 두갠가 그렇게 되는데 하나는 라디오 서울이구. 라디오 코리아가 라디오 서울이 됐다고 그러든가? 뭐. 하여튼 그래서 그때 미디어, 그리고 그게 있었잖아요. 그다음에서부터 신문들도 북한에 대한 그런 걸 다루어 주셨어요. 오픈하고. 그전에 뭐 그건 타부였었죠. 말도, 말하면 다 빨갱이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그게 깨졌죠. 그런게 쫌. 그래서 인제 언론도 저기를 해주고 라디오 인제 그 뉴스 미디어도 저기를 하고 그게 굉장히 제가 당한 일중에서 저한테 굉장히 저기 기억에 남는 일들이에요. 그런 일들이 면담자: 주로 선생님께서는 그, 문화 예술 활동으로 주로 인제 통일운동이라든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그런 운동들을 꾸준히 전개해 오신 것 같은데요 구술자: 김대중씨, 김대중 선생님 오셨을 때 시국 강연을 했었죠. 정치 강연을 처음으로 했었죠. 풀려나서 쫌 있다가. 그때 저희가 민족 학교에서 강연회를 준비를 했거든요 합수씨가 그걸 해줘야 된다, 그래가지고. 그래서 뭐 다 우리가 해줬죠. 그리고 제가 그때 통일 노래 부르고. 그래서 인제 굉장히 좋았어요. 왜냐면 그때는 민주화 운동 그러면 이렇게 했었는데 인제 거기에 음악이 들어가고 시 낭독이 들어가고 음악이 들어가고 그러니까 좀더 다른 견지에서의 시국강연회가 됐었죠. 면담자: 그 예전에, 예전과 좀 비교를 해보신다면 선생님께서 비교를 해보신다면 그래도 80년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인제 이런 활동들을 준비하고 시작해서 쫌 어느 정도 성장해 가는, 문화예술가협이 활동하고 성장해 가는. 이 이후에 뭐 좀 흔히 얘기하는 민주정부가 쫌 들어서서요. 구술자: 들어서면서 직접 북한하고 대화를 했고 예술가들도 갔고 그랬어요. 면담자: 그런 교류들이 활발했잖아요. 구술자: 그래서 민족문화예술회, 민조문화예술인협의회가 잠재적인 해산을 했죠. 그때 면담자: 아 해산을? 구술자: 잠재적으로 해산을 했어요. 그때 경제적인 문제도 컸었구 그래서 우리가 그걸 뭐 정부에서 하니까 쫌 그게 좀 열망이 조금 식었죠. 우리가. 그때 못하게 할 때는 기를 쓰고 하다가 면담자: 근데 현재는 또 그런 게 또 사그라든 상태였잖아요. 구술자: 십년동안. 그래도 인제는 그렇게 절망적이지가, 잇츠 낫 데스퍼럿(It's not desperate), 그게 뭐지 아주 그냥, 그걸 뭐라 그러나 데스퍼럿, 아주 그냥 절박하지가 않으니까 그찮아요. 민주화래도 그게 그거지마는. 말은 민주화 된거 아니에요. 그리고 많이 나아졌죠. 그런 저기도 할 수 있고. 무슨 내가 깜짝 놀란게 뭐를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더라구요. 그래서 인제 많이 달라졌잖아요, 저희 때하고는. 저희때 민족학교가 생겼으면 10년 동안 저도 한국 못나갔어요. 그동안에 민족학교 관계 됐던 사람들 나갔다가 비행장에서 돌아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뭐 그런 식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그리고 또 이해하는 사람들도 좀 더 넓어졌고요 생각이 방송인들도 좀 더 넓어졌고요. 뭐 깡이 생겼다 그럴까? 뭐 좀 저기가 됐고. 어. 아마 그때에 진전하던 것에 비하며는 굉장히 슬로우한 거죠. 이명박씨에 들어서고 그러면서 굉장히 거꾸로 가고 있죠, 지금. 근데 박근혜씨, 박근혜 대통령은 할라고 말라고, 할동 말동하고 그러니까 (웃음) 면담자: 앞으로의 쫌 선생님이 생각하는 방향, 그 문화 예술과 관련한 예술 활동, 이런 관련한 운동들에 대한 방향을 선생님이 앞으로 방향을 제시해본다면? 구술자: 저는 뭐 이렇게 계획을 안 해요. 저는 그냥 그때에 내가 그 때 그 자리에 있어서 하는 거지. 그냥 하는 거지. 난 이게 너무 하고 싶어 나 북한에 가서 너무 노래하고 싶어 난 이게 없구요. 지금은 민족학교가 주로 하고 있는 게 커뮤니티 서비스잖아요. 왜냐면 그거는 인제 그 정세 판단으로 봤을 때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대는 거죠. 지금 해도, 할 수 있는 그게 굉장히 폭이 없대는 거죠. 왜냐면 국가가, 정부가 한다고 나서고 있으니까. 그게 그거를 제치고 우리가 가서 북에서도 저희를, 그래서 내가 갔을 때 민족문화예술인 협의회가 결성이 되가지고 그 이름으로 갔잖아요. 그게 갔을 때는 처음으로 그 북한에 그 예술인 단체, 거긴 그게 굉장하더라구요. 그게. 그게 그 저기 자매결연? 이렇게 된 거 그거 뭐라고 그래요? 같이 이렇게 서로 이거를 교류를 하기로 하는 협의 있잖아요. 그게 뭐지? 처음으로 그거를 맺었어요.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거죠 면담자: 협약? 구술자: 협정은 아니고 어우 나 말이 생각이 안나. 그니까는 같이 인정을 한 거죠. 해외에 문화협의회를 하나의 단체로 인정을 해준 거죠. 거기서 그래서 너희들이 하는 거는 우리가 협조를 하고. 이렇게 하겠다는 게 정식으로 그게 됐죠. 그래서 우리가 그때 그게 굉장히 그게 처음이에요. 지금도 없을 거예요 그런 걸 맺은 저기는요. 그런데 아깝게도 그게 인제 그래서 이게 챙피한 얘기지만 아쉬운 얘긴데 제가 그때 그만둘 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죠. 그, 우선 첫째로 경제적인 부담도 많았고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고. 그런 것이 필요한, 우리가 나서야 될. 정말 뭐 우리가 서울에도 못갈 정도까지 나서야될 그런 절박한이 없었고. 그다음에 저 개인적인 이유로는요. 제가 뭐 노래를 세계적인 조수미 같은 사람이 되어가지고, 조수미 누군지 알죠? 그런 사람이 되가지고 간 내가 할 수 있으면 내가 혼자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그리고 인정을 받는 가수래며는, 성악가라면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죠. 제가 혼자 간다 그러면 되죠. 그게. 그치마는 그게 그렇지가 못해요. 제가요. 그렇기 떄문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백만장자가 되가지고 돈을 몇 백만불씩 쓸 수 있는 재력이 있다면 아이 쿠드 두댓(I could do that) 아이 쿠드 헤브(I could have) 왜냐면 나는 따른 사람들을 다 해가지고 할 수 있으니까. 서포트를 하고. 그런 것도 안 되죠. 예술가적인 실력으로도 내가 안 되죠. 그래서 저는 개인 그거는 그거예요. 그치만 누가 알아요? 내가 필요하다며는, 내가 해야된다며는 뭐 사람들 많은, 아 또 그 때 왜 우리가 고만 뒀냐면 모든 단체들이, 기독교 단체들이 또 들구 나오는거예요. 지네들이 북한 저기 한다고, 선교 한다고 그리고 뭐 막 나서고 가고 뭐 이러니까 우리가 거기 낄 수가 없더라구요. 그러니까 하겠대니까 잘 하시오 이거지. 거기에 치고 받으면서 그거를 할 수가 없드라구요. 그리고 북한에서는 볼때 보세요. 그런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들을 하죠. 우리같이 정말 마음만 갖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환영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래서 그런 자책적인 결론, 그런 것도 우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잠재적 해산을 하고 그러고 끝났거든요. 면담자: 앞으로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게 다시 쫌 뭐. 구술자: 그게 통일에 관한 거라면요, 제가 가서 절실히 느낀 거는 같이 부를 노래가 있어야 되요. 그래서 지금 그렇지 않아도 그때 작곡했던 그런 거 그런 걸 다시 좀더 해가지고 그거를 출판을 해서. 그때 우리가 한건 통일 자장가라든지 뭐 이런 거였거든요. 그니까는 남북의 전연 관계, 뭐 트집 잡을 게 없는 그런 가사로 된 곡이었거든요. 그리고 합작이니까, 합작 작품이니까. 뭐 여기서나 거기서나 그때 가서 참 저기했던 게 보급을 해야 되, 그러니까 북한은 그냥 보면 그거 하나만 보여주잖아요. 그러니까는 그때 뭐 하루 종일 그거를 보여주는 것에요, 예술단을 한 거를요. 그러니까 그 노래를 이 사람들이 다 외우는 거예요. 제가 가서 한 노래들도 뭐 직녀에게, 문병란씨, 그거 그런 것도 뭐 다 외워요. 그리구 그때 세 명이 같이 나갔는데 인제 한 명은 못 구했어요. 앨토를 못 구해서 거기서 인제 거기서 서플라이(supply: 조달) 해서 앨토가 해가지구 했는데 사람들이 그냥 길에 댕기면서 아무 집에나 들어가고 그랬어요. 그러구 그냥 막 노래해주고, 그리고 막 노래 해주고 우리가 가져온 통일 노래. 그리구 우리가 프린트를 많이 해가갖구 많이 돌렸어요. 그 노래를요. 그래서 이제 그게 쭉 계속이 됐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저희가 힘이 모자랐던 거죠. 그래서 그냥 그거는 합창, 중창단 가고 그런 건 한 번에 끝났죠. 고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못 갔을 거야. 사람들을, 사람 구하기도 참 힘들어요. 그랬는데 이제 앞으로는 제일 절실한 게, 예술인들이 해야 되는 게, 어.. 서로들 익숙해져야 되요. 왜냐면 벌써 말도 다르잖아요. 말도 다른 데 말도 다른 말을 써요. 완전히. 그것도 굉장히 문제고 그다음에 문학, 예술 그러니까 예술 음악예술이나 무용, 그런 거가 전연 다른, 그러니까 북한에서 한 거는 북한의 그거는 볼 때 뭐 중국적인 그런 쪽으로 많이 흘러가고 있죠. 의상이라든지 그런 것도. 근데 인제 몇 번 남한에 왔었잖아요, 북한 사람들이. 그래서 인제 그거를 많이 배워갔드라구요. 그래서 옷도 인제 그렇게 입구. 그러니까 제가 갔을 때요, 할머니들이 울어요. 제가 처음 갔을 때 한복을 가져갔거든요. 그래서 한복을 입으니까. 거기서는 음악 예술이래는 게 뭐에요. 모든 예술이 다 생산을 위한 산업 예술이었어요. 그러니까는 그림도 풍경화는 고전적인 산수화는 있는데 현대 그런 거는 전연 없는 거 추상화 같은 거는. 상상도 안 되고. 그 순수 예술이 없는 거예요. 그 인제 다 뭐 포스타 같은 거. 그런 거는 잘 되 있죠. 그래서 그런 거였었고. 음악도 속도가 무지 빨라요. 생산을 하는데 힘을 주는 그런 음악예술이었어요. 그르고 인제 무용도 우리나라의 선이래든지 한국적인 게 없구 그냥 이렇게 저고리도 그냥 중국, 이렇게 해갖구 그냥 마악 이런 거. 그 우리나라의 우아한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한국은 너무 발전을 했어요. 이 음악 예술이, 무용이 의상이나 이런 게. 그게 요새 그러니까 뭐야 완전히 사치화 됐잖아요. 그르고 생각을 해보세요. 내가 한국의 드라마를 많이 봐요. 근데 거기에 나오는 거 보면 그게 몇백년 전 일인데 옛날에 그런 옷, 분명히 없었어요. 뭐 여기 막 수놓고 뭐 이거는 말 도 안 되는 한복이 옛날 한복이 아닌 거야. 그렇게 발전을 했잖아요. 그래서 이거는 무슨 파티복으로 발전을 한 거예요. 북한은 또 너무 그런 거는 박물관에다 너 놓고 전연 거기에 대한 발전이 없었어. 그래서 이게 양극화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술 하는 사람들이 한복을 입지를 않은 거예요, 노래하는 사람들이. 그래갖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리가 옛날에는 저런 옷을 입었다. 한복에 그 짧은 치마, 유관순 언니 입든 이런 꺼먼 짧은 치마에 흰 저고리, 이런 것만 있지. 뭐 이런 우아한, 그런 게 없어졌어요. 그때. 그러니까 할머니들이 앞에 우셔요. 그 나중에 하는 사람들이 이 선생, 저 사람, 저 할머니들이 우시면서 저 할머니들이 옛날엔 우리가 저런 옷을 입었었다구 그랬더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정말 너무나 다른 나라가 되고 있는 거,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 가고 있잖아요? 근데 요새는 뭐 운동, 인제 스포츠 계통으로 인제 되니까 저희가 좀 이게 옷도 쫌 더, 그거는 일본에서. 일본에서 그게 가는 거예요. 그 이런 디자인들이요. 치마도 이렇게 막 속에다 해갖고 패티 코트 입고 그러는 게. 그렇고 우선 음악적으로는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어야 되요, 거기서 하는 게 고작 우리의 소원은 통일하고 봄의 고향하고 그거밖에 없는 거예요. 딴 거는 다 안 되요. 그리구 이렇게 보니까 저도 그때까지 의식이 없었어요. 그런 데에 대한. 왜냐면 그리운 금강산을 같은 걸 가서 막 부른 거예요. 근데 거기 가사를 보면 짓밟여진 지가 몇 년인가 백두산이 완전히 반공이에요. 가사를 다 바꾼 거예요. 남한에서. 근데 그래서 내가 이걸 갖다줬드니 가사 바뀐 게 말도 못하게 많아. 완전히 반공으로 가사를 바꿔놨어. 내가 노래를 부르고 한다면서 그거를 캐치를 못한 거예요. 근데 한국 사람들이, 아니 남한 사람들이 가서 그런 노래를 부른다 그러니까 북한에서 그걸 부르게 하겠어요. 못 부르게 하죠. 근데 이 사람들은 왜 못 부르게 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부를 노래가 없어요. 가며는요. 그래서 특히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이게 남한 노래다, 북한 노래다가 아닌 노래. 그죠? 우리가 같은 감정을 노래할 수 있는 노래. 그거는 굉장히 시급해요. 그러구 제가 항상 얘기하는 게 그래서 대중화적인, 대중적인 노래를 만드는데 북한에서는 작곡자들이 한사람이 작곡해갖고 이건 누구 작곡 이렇게 안 해요. 그기 그룹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자기네들 그룹이 다 뭐 가사도 첵업(check up: 확인)하고 하면서 같이 맨들어요. 그래서 그런 게 제가 참 남한하고 남한하구 틀린거라고 그르구, 그러면 이 노래는 부를 수 있는 음역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보통 사람들이 불러야 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이 나라는 한국 노래를 보며는, 제가 좀 여기서 노래하고 그랬으니까 뭐 좀 부를라고 새로 사가지고 오며는 이사람들이 도대체 이 노래를 어렵게 하려고 작정을 하고 뭐 괴상 망칙하게 일부러 지어 논 노래들이야 다. 그것이 멜로디가 이렇게 흘러가지고 우리 감정이 이렇게 되는 노래가 참 드물어요. 특히 요새 노래를 보면은 어떻게 이렇게 거지같이 작곡이 그런 식이야. 전연 다른 거예요. 거기는. 그래서 완전히 노래의 음역이 어떻게 되냐면 동요를 만들면 이거는 애들이 부르는 노래니까 이거는 어떻게 되야 되구 말은 어떻게 쉽게 해야 되구 그거는 굉장히 제가 샤킹(shocking)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지금부터래두 그런 생각을, 만약에 우리가 할일이, 음악 하는 사람들로써 의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다면 문화의 그거를, 교류를 해야 회는 거예요. 그래갖고 이거는 우리 꺼 그런 게 아닌 거, 그래서 통일이 되며는 제가 항상 느끼는 게 정치가들 내일부터 통일, 그러믄 정치적으로는 통일이 되지, 되겠지요. 그러지만 사람들은 통일이 아니죠. 그러니까는 그것이 되기 전에 민족적인, 사람들의 통일, 마음의 통일, 그게 뭐 이론이 아닌, 아, 우리 동포네, 같은 민족이네. 이게 너무 틀리잖아요, 지금. 이제 통일이 되보세요. 이거는 완전히 뭐 요새 그런 얘기 좀 나오대요? 실업자가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 와서 할것이 그게 없다는 거지. 그거밖에는 없다는 거죠. 그러며는 어떻게 되느냐 이거지, 종살이하러, 다 종살이 해야된대는거지. 오죽해요. 또 남한은, 그런 경제적인 경쟁이. 거 살아남지 못해요 이 사람들은. 왜냐면 여지까지 다 해줬잖아요. 다 수령님 아버지가 해주고 다 좋은데 재밌는게 술을 한잔, 운동하를 하나 줘도 우리는 부모님들께 감사하잖아요. 이거는 수령님 아버지가 주신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는 너는 수령님께 감사해라 이렇게 된다구. 그러니 그 사람들이 커가지구 수령님을 뭐 괜히 그러는게 아니에요. 얘네들이 뭐 어쩌고 그러는데 정말 감사한 거예요. 그게 뭐 이렇게 안 그러믄 다 어떻게 되서 그러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김일성 수령, 거 저기 일단 그랬어요. 그거는 직접 내가 느꼈어요. 하루빨리 그거를 교류를 해야지 되는 거예요. 통일이 되기 전에 우리 마음이 왔다갔다 하고 그러고 제일 중요한 거는 뭐지 그거, 북한을 대접을 대접을 해야되지. 이퀄로 대접을 해줘야지 된대는 거예요. 왜냐믄 그게 한가지 있었는데 북한에 많이 갔다 온 사람들이 앉아있기가 미안할 정도의 발언을 많이 해요. 하 그지같이 살더래는 둥 뭐 어쩧대더래는둥. 근데 알잖아요. 우리가 알면되지 그거를 그런 공식석상에서 그런 예기를 할 필요가 없잖아요 왜냐면 ? 하고 같애요. 예의를 지켜야되는 거예요. 그러구 이렇게 보면은 남한한사람들이 할씬 잘 살고 그러잖아요. 북한 사람들보다, 그거는 뭐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러면 가진 사람이 베풀어이죠, 그게 꼭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이 관대해야죠. 그거를 업신여기고 그러믄. 굉장히 그런 말언을 많이 해요. 그거는 정말 우리가 말을 해야될말 안해야될말을 정말 우리가 몇번 생각을 하고 해야지되는데 사람들이 와서 그냥 뭐 하니까 북한에서 그러니까 자꾸 규제하는거예요. 못 받게 하고 그럼 그거를 너는 왜 이렇게 그지같이 사냐? 가서 그러믄 그게 그 사람들. 그게 도움이 되요, 통일에? 그게 도움이 되요? 우리가 통일이 되면 다 같이 돕고 다 같이 잘살자 이렇게 되야지 이게 대화가 되는 거지. 너네 그지들 말이지, 뭐 할튼 그게 참. 예의가 없어요 사람들이. 그리구 통일을 하자는 마음이 말이죠. 그래선 안 되죠. 우리 밑으로 들어와라, 적화 통일 하겠다. 그거 굉장히 제일 큰 걸림돌이 될거예요. 면담자: 저희 지금 동포 사회도 약간 그런 이념적인 게 많이 있죠 구술자: 그렇죠. 네. 그르구 무조건.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흑인 질시하는 거 그죠? 중국 사람들 뭐 그러는 거. 그런 게 많잖아요 우린. 다 우리나라는 미국 놈 무슨 뭐 중국 놈, 일본 놈. 나부터도 그랬으니까 (웃음) 뭐 우리 민족만. 지금 한국이 다민족이 이렇게 하면 안 되죠. 굉장히 큰 적화통일이 될 거예요. 우리 민족만 한국이 지금 다민족이, 다민족 저기가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학교에서 애들한테 가르쳐야 할 것이 뭐에요. 인간, 평등, 그게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 그러구 그거 있어야 되요. 그거 없으면 통일이 안 돼요. 통일이 되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거예요. 면담자: 선생님 지금 70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 구술자: 30년 면담자: 40년 가까이 구술자: 아니 70년부터는 아니지 내가. 면담자: 80년부터 시작은 하셨는데 인제 예 구술자: 사회 생활을 면담자: 80년부터라고 한다고 해도 인제 34년 됐는데 그런 활동들을 쫌 해보면서 나름대로 보람도 물론 있으셨을 거고 힘든 부분도 제일 좀 많이 있을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래도 가장 좀 기억에 좀 남는 사건이나 일 같은 게 있으면 소개를 좀 해주십시오. 구술자: 어떤 사건, 어떤 사건을 (웃음) 제가 아까 말씀드린 거 처음으로 우리가 국민, 아니 저기 뭐야 저기 커뮤니티, 동포 사회 저기 그 토론회, 동포 사회 토론회, 그런 거 없었던 건데 그런 거 함으로써 그런 반공 사상이나 그니까 친북 뭐 이렇게 해가지고 적대시 이런 게 드러나고 그런데 이것이 인제 지금 많이 순화가 됐대는 거. 그게 굉장히 큰 사건이었죠. 큰 사건이었고 그리고 인제 우리가 남북 가요의 밤 했던 거, 그것도 사건이었고. 볼 때 그 전환점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북한의 노래, 어, 북한도 노래는 노래네? 다 무슨 뭐 수령님 뭐 아니구. 뭐 그렇지 않은 노래도 있네, 휘파람 같은 거 있고. (웃음) 그래서 인제 그런 거가 전환점이 됐고. 그거가 제 인생, 제가 지금, 제가 해온, 제가 사회생활은 민족 학교를 통해서죠, 다. 민족학교를 통해서 민족학교의 그런 또 저기 후원을 받아서 한 거고 그렇고. 그러니까는 그런 거는 전환점이 됐다고 저는 정말 흐뭇하게 생각하는 거죠. 면담자: 그, 뭐 재단도 비슷한 생각을, 5·18 기념재단도 가지고 있고 아마 민족학교도 뭐 좀 그런 동지애적, 서로 상호 동지애적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해요. 구술자: 물론이죠, 그게 근본이 된 거니까요. 면담자: 인제 현재 민족학교 이사장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는데 지금 민족학교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활동해온, 오면서 활동들에 대한 이러한 변화 과정들을 겪게 되고, 방금 아까도 말씀했지만 요즘은 동포 사회의.. 구술자: 이제는 동포사회의 인권, 인권 향상을 위한 권리, 권익 향상, 그런 거에 많이 초점을 두고 있죠. 면담자: 그 지금 뭐 이사도 하게 되고 앞으로, 여기에 또 들어설 시설 같은 거 또 대충 이야기는 좀 들었는데 앞으로 좀 이런 모습으로 민족학교가 좀 이렇게 발전해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부분들이 있으시면.. 구술자: 글쎄요, 이렇게 뭐 저희들은 그냥 기본적인 거요. 저기 있잖아요, 바르게 살자. 뭐 저기 굳세게 살자, 그 다음에 또 뭐지 또 인제 그 다음에 더불어 살고. 더불어 산대는 것은 인종차별 같은 거, 인종차별...같은 민족 중에서도 빈부의 차이. 그것도 차별을 하잖아요. 그니까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슨 소리에요. 모든 사람이 다 정의로운, 보다 나은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그거예요. 제 목적은. 그리고 인간적인 그런 관계를 갖는 사회. 그래서 그것이 그거지. 그 이상 뭐 그게 인제, 그전에는 우리가 힘이 부족하니까 한인 동포 사회만 이웃했지만 벌써 시카고나 이런 데는 그 논(non), 그 저기 비 한국인들이 많이 동조를 하고 있고. 여기도 그래요. 왜냐면 여기 청소년들이 친구들이 있으니까 좀 많이 봐요. 한국 사람 아닌 청소년들을 많이봐요. 인제 그르니깐 음.. 우리는 인제 그것이 한국사람이고 뭐를 떠나서 그 비, 그 민족적인 것을 떠나서 전 세계에 어느 레이셜(racial) 어떤 그거를 가진 사람, 인종이라도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것 그게 목적이죠. 그르고 그런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서 우리는 봉사를 하는 거죠. 그니깐 이게 인제 한 어느덧 한 2, 30년 그렇게도 갈까? 이제 이거는 뭐 한인 코리아 리소스 센서, 코리아 리소스 센터(Korea Resource Center)지만 서비스는 범, 저기적인 그렇게 된거예요. 그리구 그렇게 되는 게 옳구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되고, 우리가. 면담자: 그런 방향.. 구술자: 한국 사람 아니니까 넌 안 돼.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면담자: 그런 방향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쫌 있지 않나요? 구술자: 그런 사람이 있지요. 이사 중에서도 얼마 전에 그 1.5세, 저기, 그러니까 입양 되 온 사람, 애들, 사람에 대한 일을 많이 하셨어요, 윤한봉 선생이. 그래서 찾아주기도 하고 우리가 인제 네트워크가 전국적, 전 세계적으로 있게 됐을 때, 그러니까는. 그니까는 인제 그런거 지금도 입양 아동들, 그게 그 그룹이 굉장히 쎄요. 그래서 인제 그래서 우리 이사 중에도 한국말이 이렇게 잘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치만 너무너무 추라이(try)해요. 한국말을 할라고. 그리고 한국에 대한 거 일고 싶어하고. 그런 사람들이 몇 분 있어요. 그 입양아들, 특히. 그러며는 그런 사람들, 그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다 있는 데서 그 사람들도 다 앉아있는 데서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은 이사 자격이 없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니깐 아직도 그 민족, 보수적인 말이죠, 그래서 그거는 그거는 인정할 순 없는 일이에요. 인제 우리는 한국사람을 떠나서 어느 사람이래도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관계가 그렇지 않은, 정의롭지 않은 그런거는 있을 수 없는 거죠. 그치만 그게 되겠어요? 그런 세상이 오겠어요? 난 요새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요. 그 사극 같은거 있잖아요. 그 옛날부터도 그렇게 짓밟고, 그렇게. 면담자: 네..권력암투가.. 구술자: 화딱지가 나서 못보겠는거야. 그래서 아 이게 몇 천년 전 인류가 있으면서부터 지금 된건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그게 고쳐지겠냐? 응? 그건 안 된다, 안되는건 하지 마라. 그치만 저번에도 제가 한번 우리식구들한테 말했는데 그것이 안 된다 하더래도, 또 내일 세상이 망한다 하더래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거잖아요. 분명히 내일 망해도. 오케이. 분명히 내일 망해도. 근데 많이 발전을 해왔잖아요? 몇 백년씩 걸리고 그래두. 미국도 노예제도가 없어졌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는 죽을 때까지 하는거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거를 하는 거죠. 인권 문제두. 되구 안 되고를 떠나서 말이죠. 면담자: 그,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좀 일대기라고 얘기를 해야겠죠. 일대기를.. 구술자: 내가 너무 나이가 많이 먹었어요. (웃음) 면담자: 두 시간 가까이 선생님께 얘기를 좀 들었는데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좀 하셨던 얘기 중에서 마지막으로 좀 이렇게 나 이 얘기 꼭 할려고 했는데 못하고 넘어갔어 하는 그런 부분이라든지, 아니면 말을 조금 잘 못 했던 것 같은거 보완하셔야 될 부분이 있으면 ? 구술자: 아니요 그냥 제가 그냥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은 거는 제가 항상 그래. 뭘 그런거에 대해서 그게 없어요. 그래서 사실은 어르신들하고 그게 확실하신 분하고 끼어서 인터뷰를 할려고 그랬는데 인제 그게 안 되가지고 저 혼자 이렇게 엉기고 있는데. 미안하고요, 그런 거로는. 면담자: 아 아닙니다. 구술자: 그냥 제가 지나온 것을 보면 저는 참 행복했어요. 그러고 정말 신나게 살아왔어요. 지난 30년. 정말 그 윤한봉 선생님과 5·18. 그런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거에 대한 각성을 하는 거잖아요. 만약에 5·18이 없었으믄 또 얼마나 몇 십년을 그냥 뭉개고 민주화래든지 뭐 그런 게 그렇게 됐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런게 이러나주잖아요? 그게 그때그때에. 쌓여가지구 일어나죠? 그게 지금은 또 흐려지고 있는거 같지 않아요? 그게 강도가 어떤 면으로 저기 한지 모르지마는. 저는 정말 합수, 윤한봉 선생님 만나서 정말 어떻하다가 정말 운 좋게 내 인생에, 일생에 처음 되는 일을 많이 해봤잖아요. 제가 북한에도 제일 먼저 가봤고 뭐 이런 것도 해봤고. 처음으로 책도 출간해봤고, 그죠? 우리 미문예협. 여러 이런 것들이 민족학교를 통해서 된 거고 저는 참 합수씨 아니, 윤한봉 선생님 계셨을 동안에 참 행복했어요. 정말 사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여기 지금 가시고 없으시지만. 인제 그, 그 방향으로 가는 거죠, 뭐. 그리고 5·18 재단에 대해서는 참 고맙고 제가 한번 5·18 그때도 갔었어요. 뭐지 그거 하는 거. 초청해주셔서 가서 정말 좋은 거 많이 봤고. 음.. 근데 인제 합수, 한봉씨 계셨을 때는 저희가 5·18 재단에 많이 참여를 많이 했었죠. 무슨 모금 활동도 많이 했구, 그 묘지 할 때 저희가 많이 성의를 보였고 그랬었는데 인제 가시고 없으시까 인제 또 뜸해지고. 재단이 또. 여기 일이 바쁘니까 여기가 또 허리가 휘니까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못 되고. 그치만 정신은 그 정신이 이 학교의 뿌리죠. 5·18 정신이요. 그래서 그게 뭐가 되던. 그르구 인제, 아마 한청련도 해체가 되었지마는 다 같은 이유일거예요. 우리 미문예협이랑. 아우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만, 우리가 또 나서지 않아도 되는게 좋은 거지마는 만약에 시대가 그런 걸 원한다며는 여기서 또 나설 사람들이 많죠? 또 때가 되면 하죠. 해야되며는. 그리고 지금은 인제 우선 그, 꼭 이제 제금 한국 커뮤니티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그죠? 애니바디 후 니즈(Anybody who needs: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르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그런게 지금 잘 되가고, 열심히 하고 있고. 열심히들 하고 있어요. 그니깐 저희가 제일 중요한거, 민족학교의 앞날의 기로는 뭐냐하며는 후배들을 양성하는거. 지금까지는 아직도 윤한봉 선생의 가르침, 그분이 기어댕기면서 청소하고 그랬으니까. 정말 사심없는 사명감을 가진. 그리고 여기서 일하시는 스태프 멤버들이, 직원들이라고 그럴까 그런 사람들이 돈 받을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이제는 먹고는 살아야되지만 아주 그냥 정말 최저대우를 하고 있거든요, 저희가. 그런데 뭐 이 사람들이 딱 다른 데 같이 이 다른 이런 저기 이거 논 저기 그거 논 프로핏 올거니제이션(non-profit organization)은 시간 딱 되면 가잖아요, 이건 직업이잖아.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은 그게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은 대며는 돈 안 줘도 와서 일하실 사람들이에요. 그러고 또 그렇게 해왔고요, 한 십년은. 자기 돈 이렇게 내면서 이렇게 해왔고. 그래서 참 그런 분들은 고맙고 그런데, 걱정은 인제 윤한봉 선생님 가시고 나니까 그다음에 뭐가 인제 더 변하냐하며는, 그때 동참했던 사람들, 5·18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 뭐 저기 호남 향우회 그런 분들도 굉장히 이렇게 보며는 좀, 그 옛날의 그 알찬 마음들이 없어지는 것 같애요. 흐려지는 거죠, 정신이, 그죠? 그래서 근데 저희 민족 학교도 그래요. 인제 요 다음 제너레이션은 어떻게, 이 사람들이 정말 봉사 정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왜냐면 저번에도 우리가 그 나카섹(NAKASEC: The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이라고 그걸 또 우리가 십년 됐을 때 했었거든요. 그게 인제 20주년 됐어요. 그래서 했는데 딱 십년 후에 인제 그게 생겼어요. 그거는 인제 로비단체죠. 그래서 DC에 있어요. 거기서 정치적인 그런 걸 많이 해요. 거기 인제 일을, 그 저기 뭐라 그러지, 총무? 총무를, 나는 무슨 직책 이름도 잘 몰라요. 그거를 총책임자를 뽑는데 아, 놀랬어요. 정말 돈을 뭐 하튼 뭐 헌드레드 따운전드 이상씩 그 돈을 내고 어떻게 봉사활동을 해요? 그러믄 사람들 월급 주다가 다 끝나요. 그거를 그렇게 그게 지금 현실이에요. LA 안에서두 봉사단체라고 하는 논프라핏, 논 프로핏이 뭔가, 돈 아니고, 영업이 아니고 봉사하는 단체들이요. 비영리 단체, 그 비영리 단체가 많아요. 정말 많아. 근데 대, 뭐 굉장히 대부분의 비영리 단체들이 다 그냥 자기네들 월급 타가구 그래갖구 그걸로 다 쓰는 거예요. 정말 그것이 사람들한테도 돌아가는게 없는 거예요. 그러구 북한을 돕는대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래서 교회도 많고 하는데 그 사람들두 다 자기네들 쓰고 남은거 갖다줘요. 그러니까 우리는 윤한봉 선생님 계실때두 절대로 그런 기관을 통해 우리가 하지 않았어요. 여기에 큰 단체들이 있어요. 미국에. 재단이 있잖아아요. 거기는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고 자기네 재단에서 돈을 써요. 예를 들어서 비행기값이 있어야 되잖아요. 가서 뭐 일하는거, 그런 거를 다 자기 재단의 돈을 쓰지 그, 그걸 도와주라고 들어오는 돈은 안 써요. 그런 단체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단체를 이용을 했죠. 그러니 우리가 뭐 왜그러냐면, 다른 사람들은 뭐냐믄, 무슨 교회에서 이걸 해줬다, 그걸 더 많이 하는 거예요. 요만큼 주면서. 그러고 자기네들이 도우러 갔다. 근데 저희는 누가 도왔다는게 문제가 아니니까 그거는 윤한봉 선생이 그렇게 저희를 그런 정신을 줬어요. 우리한테요. 누가 이걸 줬대는게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니까 그 사람들 다 이렇게 들어가면 그냥 가는 거죠, 그 단체 이름으로. 저희가 뭐 그런 거 없어요. 과연 그 정신을 이어갈 사람들을 우리가 키울 수 있는지. 저번에 참 힘들었어요. 대중씨알죠? 대중씨가 갔잖아요. 그걸 찾다가 뭐 몇년을 찾다가. 그때 제가 이사장 하고 있을 때.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이 있을 때만 이런 거를 맡는지 모르겠어 (웃음) 그래서 그게 그게 제일 큰 일이고 특히 우리 단체는 정신이 그게 아니니까. 다른 단체야 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고. 우리는 그 정신이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또 5·18 정신이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근데 인제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남한에서 통일 안해도 된다, 통일 왜하냐 많대잖아요? 그럼 그런게 인제 되는 거죠. 여기서도 . 그러니까 그거를 어떻게 우리가 줄기를 잡고 있고, 그거를 이어나갈 사람들을, 인제 그런 사람들 다들 리타이어(retire:은퇴)했잖아요. 그때 뭐 일했던 사람들. 저만 해도 제가 중학교때, 고등학교 때, 중학교때 그런 4.19가 났었는데 지금 벌써 70이잖아요, 제가. 그러니까는 이제 뭐 낫 투매니오브 어스 레프트(Not too many of us left: 남은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그게 인제 아마 광주도 그럴 거예요, 그죠? 한국두. 그 직접 겪은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잖아요. 또 남북한 통일도 그렇잖아요. 부모의 그 애절한 것 그게 점점 없어지잖아요. 점점 돌아가시니까. 그러니까는 통일의 염원도 우리가 경제적인 거, 이런 걸로만 어프로치(approach: 접근)을 해야 더 알아듣고 그게 우리가 인제 합쳐야 된다는 그런 걸 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냥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그거잖아요. 그니깐. 한국도 뭐 마찬가지겠죠? 그런 정신이 자꾸 흐려지겠죠. 그리고 재단 같은 게 생기면 그게 이제 우리는 비영리 단체인데 영리단체가 되는거겠죠.그래서 그거 정말 조심해야 되고. 민족학교도. 자꾸 커지니까. 그 걱정이에요. 부자가 되는거죠. 건물이 생기니까. 그러면 또 오죽들 또 달려들겠어요, 서로들 하겠다고. 아까 그 얘기 한거예요. 야 어떻게 그런 사람들 상대를 우리가 저기를 해야될까. 이게 참 마음만 갖고는 안 되는거고 근데 마찬가지 일거예요 어느 다른 단체든지. 5·18도 인제 벌써 오래됐으니까. 구술자: 말이 너무 길었다, 그죠? 내가 이 말을 시작하면 내가 끝이 없어요. 구술을 시작하면 보통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난 이게 뭐 이렇게 긴 게 (웃음) 할 말이 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랬드니 또 말이 많아졌네. 면담자: 아무튼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아우 정말 고마워요, 여기까지 오셔갖구. 돌아가시면 5·18재단 거기 모든 여러분들한테.. 지금은 이사장은 누가 하시나요? 면담자: 지금은 전남대 구술자: 윤한봉 선생님 형님이 하실 때 제가 한번 ... 면담자: 네 윤광장 이사장님이 하실 때가 전전번이고요. 이번에는 전남대학교 교수 활동을 하고 계시는 오재일 씨라고.. 구술자: 하튼 가서 안부좀 전해주시고. 저희가 이렇게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그전에 그런 얘기가 있었잖아요. 그거를 우리가 인제, 광주, 그걸 해야되니까 어떻게 하겠냐고 우리가 얘기가 되고 있거든요. 아마, 하튼 윤한봉 선생님 기념사업회도 그렇고. 아 그것도 여기서 어떻게 해야될텐데. 참 힘들어요. (웃음) 면담자: 네. 감사합니다. 구술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면담자: 이상으로 이길주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차철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차철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7일 ○ 구술장소 : □ 녹취록 면담자 : 찾아뵌다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연기가 되는 바람에 이제서야 들어왔습니다. 그 먼저 선생님, 저희가 간략한 신상을 저희가 알아야 되서요, 아까 써주시긴 하셨지만 선생님 태어나셨던 곳... 구술자 : 태어난거는 거기 써드렸습니다만, 실제 태어나기는 1942년 음력으로 2월 22일, 2월 22일 생이에요. 양력으로 하면 4월 7일 된다는 것 같애요. 그러나 2월 22일이라는 날짜도 숫자도 좋지만 그, 미국의 조지 와싱턴이 2월 22일날 태어났습니다. 몇 년돈지는 모르겠는데. 그 다음에 링컨이 1월, 2월 16일날 태어났어요. 그래서 미국의 그 둘짼가? 몇째 주일을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 day), 대통령의 날이라 그래서 공휴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생일이 좋아서 저는 우리 자녀들이 가족에서 2월 22일, 무조건 2월 22일을 음력으로 쉬고 있습니다. 면담자 : 그 선생님.. 구술자 : 태어나기는 전라남도 여수, 당시 여천군, 지금은 여수시죠? 율촌면 신풍리, 여수 비행장 바로 밑입니다. 여수 애양원이라는, 손양권 목사님이 순교하신 그 교회, 바로 입구에가 제 마을이 있어요. 거기서 태어났어요. 면담자 : 그럼 선생님은 언제 미국으로 좀 건너오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 제가 1970년 10월 15일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습니다. 면담자 : 그러면 그때 연세가 스물 한 일곱여덜정도 구술자 : 맞습니다. 제가 42년생이니까 70년이면 만으로 28세 되죠. 면담자 : 예예, 그때 그러면 그 전까지는 한국에서 계속 거주를 하셨나요? 구술자 : 한국에 있으면서 여수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 서울서 다니다가 군대 갔다 왔죠. 그래서 백마부대로 66년에 월남 가서 만 1년 근무하고 67년에 와서 제대하구요. 그 다음에 대학 복역, 복학해서 1년 더 다니구요. 그담에 한 2년 회사 다녔어요. 근데 그 회사가 공교롭게도 어.. 당시 이름은 금광 개발 주식회사였는데 그게 그, 그 회사가 나중에 저가 미국 와서 보니까 명성그룹으로 바꼈드라구요. 거기 창설자가 김철호씨라고. 예, 저 상관이었죠. 그러고 인제 미국에 학생비자를 받아서 69년에 미국에 올려고 인제 여권 신청을 하니까 당시 그 이수근 미국 위장간첩, 가짜 여권으로 도망가다가 홍콩인가 어디서 걸렸잖아요. 그 사람 때문에 올 여권이 스탑됐어요. 69년에. 그때 69년에 미국을 못 오고 일 년 더 쉬었다가 인제 여권이 해제된 바람에 70년에 미국에 들어왔죠. 면담자 : 학교는, 초등학교는 어디를 나오셨나요. 구술자 : 바로 우리, 내가 태어난 그 옆에 신풍초등학교라고 있어요. 거기 1횝니다. 제가 손으로 손수 교실을 만들고 지어서. 면담자 : 그 초등학교 들어가실 때쯤이 아무래도 한국전쟁 6.25가 일어났었던 구술자 : 아, 전입니다. 면담자 : 6.25 전인가요? 구술자 : 제가 42년생이니까 50년. 제 생각에는 6.25전에 들어간 그런 것 같애요. 왜냐면 6.25도 이북 뭐라고 그래, 그. 빨갱이라 그럼, 그 용어를 안 쓰드라구. 공산당인가 면담자 : 인민군 구술자 : 인민군, 인민군이 들어와서 우리 동네 사람들 모여놓고 총질을 하고, 그 다음에 그 전에 여순 반란 사건 있었잖아요. 저희 집안에 한 육촌 되는 형님이 순천 농곤가? 순천고등학교 학생회장 하시면서 돌아가시구요, 그 다음에 이제 2년 후에 6.25가 터졌잖아요. 50년에. 손양원 목사님이 여수로 끌켜, 끌려가셨어요. 당시에 저희 작은 아버지는 차자 진자 국잔데, 차자 진자 국자, 최연소 전라남도 도의회 의원이 되셨어요. 천재였어요. 학교를 수재로 졸업하셨는데. 그 손양원 목사님하고 같이 끌려갔어요. 그때 한 150명인가 120명인가 여수 미평 그게 끌려가셔서 거기서 다 총살당했죠.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그 미평 수원, 과수원 하는 데서 지금 가면 푯말 있어요. 손양원목사 순교지라 해서. 여수 시내 가면 그 푯말 있습니다. 작은 아버지도 거기서 같이 총살 당했어요. 그래서 이제 여수 애양원에서는 추럭을 타고 손목사님 시체를 모시러 갔고, 추럭이 하나 있었어요. 저희들은 이제 시골에 왜, 그 저기, 뭐라 그러지, 왜 새들이 같은 거 있잖아요, 관 이렇게 만들고, 그거 메고 시골 사람들이 내려갔죠. 시체를 모시러. 근데 밤늦게 되니까 손양원 목사님 차는 하얀 천을, 손 목사님 이렇게 덮어서 차가 들어오더라구요. 해가 지기 전에. 근데 저희 작은아버지 모시러 갔던 동네 어르신들은 밤늦게 들어오니까 술이 좀 취해가지고 들어오셔요. 왜 빈손으로 오냐 그러니까 쉬, 그래요. 조용히 하래요. 알고 봤더니 거기서 150명인가 120명이 총살당했는데 저기 두 사람이 살아났어요. 그 중에 저희 작은 아버님이 살아나셨어요. 결국은 그 홧병으로 2년만에 돌아가셨죠, 예. 면담자 : 그 6.25가 일어났었을 때도 뭐 어디 다른 데로 피난을 가셨었나요? 구술자 : 아니, 피난이라 해봐야. 저희 집에서 바닷가거든요, 신풍 부암이라고. 우리집에 배도 있었고, 고기 잡는 배 있었어요. 배타고 이제 가면 애양원 이라고 손목사님 그, 교회 뒤에 섬이 세 개가 있는데 삼간도라 해서 있었는데. 저쪽 끝에 섬에가 있었죠. 작은 아버지랑 가서 인제, 가 있는데. 아 인민군들이, 애양원 배가 그때 컸어요. 우리들 배는 두, 돛대 두개짜리 조그마한 밴데, 노젓는 밴데, 애양원 배는 돛대 세개라 그래, 억수로 커요. 우리보다 한 서너배 네배, 다섯배 큰 배를 타고 인민군들이 애양원 배를 타고 우리한테 왔더라구요. 근데 뭐 특별한 이상은 없고 어쩌다 돌아가는 걸 그렇게 봤어요. 그래서 피난 뭐 2,3 일? 면담자 : 중학교 고등학교는 어디로.. 구술자 : 순천 매산중학교를 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면담자 : 중고등학교 같이.. 구술자 : 네. 면담자 : 공부를 근데 꽤 잘 하셨나봐요. 서울로 대학을 가시고 구술자 : 공부땜에 가는게 아니고, 그때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국민학교 다니면서부터도, 국민학교 제가 다섯살, 여섯살, 한문, 우리 바로 집앞에 한문 서당이 있잖아요. 거기를 보내요. 그러면 이제 제가 일곱살때, 한국 나이로 일곱살 때입니다. 일곱 살 때 인제 여덟 살, 나보다 한 살 위에 아이들이 율촌면이라고 4키로 전방, 그 먼 학교, 국민 학교를 보내요. 맨날 보내달라고 그랬죠. 뭘 모르고 보내달라고 그랬어요. 그래, 때리더라구요. 어린애가 뭐, 자동차, 그때는 차도 없어요, 걸어다니거든. 위험하다고 때려서 울고 못 갔는데, 그 다음해가 되니까 우리 동네 회관, 동네 회관에, 회관이라 해야 뭐 사람 5,60명 들어갈까 말까 하는 방 하나에 학교가 생기더라고요. 면담자 : 예. 신풍 초등학교가. 1회.. 구술자 : 그게 1회에요. 그래갖고 학교도 공부도 할까 말까 하고 6.25니까 맨날 우리보다 나보다 한 두살, 세살, 네살 먹은 선배들이 막 데리고 다니면서 쌈질이나 시키고 유격 훈련 받구요. 공부는 안 하죠. 그게 우리 담임 선생님이 같은 동네 사람이에요, 순천 사범학교 나오셔가지구. 1회 니까 이제 학교를 중학교 갈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된다고 밤 10시까지 촛불 켜놓고 했어요. 근데 저 경우는 인제 그때도 교회를 다녔거든요. 교회를 다니고 순천 매산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우리한테 와서 티칭하고 뭐 이렇게 여러가지 가르켜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속으로 그랬어요. 아, 매산 중학교는 그 미션 스쿨이니까, 선교부에서 하니까 이게 월사금이 싼 줄 알았죠. 그래 거기다 제가 원서를 넣은 거에요. 집에서는 몰라요. 그러고 아버지 도장도 가짜로 내가 만들어서 파서 원서 다 찍고 내가 했어요. 누가 시킨 거 없어요. 가고 싶어 간 거에요. 근데 어디서 들통이 났냐하면 인제 어머니가 마실을 갔는데 아, 뭐 철이가 사진을 찍어 우리반에서 제일 잘 나왔어요. 무슨 사진 찍었는데? 아 중학교 가는 입학 원서 찍을려고, 붙일려고. 사진을. 걔가 무슨 중학교를 간대? 거기서 들통이 났죠. 근데 마침 작은 아버지가 그때 살아계셔서 와서 발표날 보니까 떨어져서 우는 애들도 있더라구요. 입학 시험에. 근데 나는 당당히 붙으니까 인제 그게 조금 좋으셨나봐요. 그래 보내줘서 겨우 다녔어요. 다니다가 말다 다니다 말다, 가정 형편때문에 그랬어요. 그게 공부는 어렵게 고학으로 대학까지 졸업한거에요. 면담자 : 서울은 어디에 있는 학교에 다니셨나요. 구술자 : 처음엔 제가 인제 뭐 수도의과대학을 어떻게 갔는데 그 막, 여러분이 아시는, 농촌에서 그게 됩니까. 도저히 안 되서 인제 결국은 쫌 쉬다가 챙피해서 말을 못 할 정도로, 정부에서 공짜로 시키는 학교가 있었어요. 글로 갔어요. 거기가 농업협동대학, 협동조합대학이에요. 국비에서 전 장학금으로, 장학금이 아니고 무료로 공부해서, 거기서 하다가 이제 건국대학으로 3학년때 이전을 했죠. 그러다 군대 갔다 오고. 면담자 : 군대를 그럼 몇 년도에.. 구술자 : 65년도에 들어갔죠. 면담자 : 예. 65년도에 갔다가 아까 월남에도 파병을 하셨다고.. 구술자 : 65년도에 군대를 갔는데 내가 배치받은 부대가 백마부대라요. 9사단. 그러니 자동으로 백마부대는 오로매릭(automatic: 자동으로) 그냥 가게 되는거에요. 월남을. 면담자 : 몇, 그, 월남으로 간 연도가 그때 90 구술자 : 96년. 6년 8월인거 같애 면담자 : 60, 60 구술자 : 아 66, 65년에 군대 가서 66년 8월에 월남. 백마부대가 부산에서 선발대가 떠나고 그 담에 본진이 떠나고 후발대가 떠나는데 우리는 사단 사령부랑 같이가니까 본진으로 따라간거지. 이것 좀 드시고.. 면담자 : 아니요, 저는.. 구술자 : 예 면담자 : 그럼 군대를 제대를 하시고 서울에 좀 2년, 구술자 : 복학을 다시 했죠. 면담자 : 2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구술자 : 1년은 학교 졸업하고 인제 그 금성 개발이라는데, 아니 금성개발이 아니고 금광 개발 주식회사를 다니다가 인제 69년에 인제 미국.. 면담자 : 미국은 들어오신 계기가 있으셨나요? 구술자 : 그때 학생 비자를 받으며는 미국서 학생비자가 아니고 미국서 I-20폼이라고 미국서 학생, 그 뭐라 그러지, 허가증. 대학에서 그걸 받으면 비자 신청을 하면 일단 한국서 내줬어요. 두 가지, 미국 유학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유삼인가 어디에서 하고, 정부에서 이렇게 선택해서 보내주는 케이스가 있고, 또 정식으로 뭐 요새 같음 토플(TOEFL), 토플 시험인가 봐서 들어오는 케이스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미국에 대학에, 당신 대학을 내가 가고 싶으니까 입학 허가서, I-20 폼이라 했는데 그거 받아가지고 저는 들어왔죠. 급신청을 했죠. 면담자 : 공부를 더 하실려고 구술자 : 그렇죠. 아, 물론이죠, 물론이죠. 저는 그때 제, 우리 사회에 개념이라고 그러나, 그걸 뭐라 그러나, 사회상이, 뭐 실력 이게 없었어요. 실력이 필요, 실력이란 말은 우리가 자랄 때 없었고, 물론 실력이 있으면 뭐 사법고시도 했겠죠. 근데 저는 그런 개념이 없었어요. 부모나 누가 그런걸 가르켜 주질 않았기 땜에. 그러고 다만 그때는 두 가지, 우리 자랄 때는 그 얘기가 이었는데 하나는 빽이에요 빽. 뒤에 빽, 내가 누가 있냐, 빽이 있었고. 또 하나는 학벌, 학벌을 중시했어요. 그때는 뭐 실력 이걸 따지지 않고. 그러니까 나는 학벌 목적으로 (웃음) 미국가서 유학하면.. 면담자 : 혼자 들어오신건가요? 구술자 : 혼자, 혼자, 혼자. 면담자 : 결혼은 하시고 들어오셨나요? 구술자 : 그때만 해도 집사람이 나보다 한 4년 후밴데, 순천여고 인제 2학년때 인제, 난 대학다닐때 인제 만나서 교제를 했는데 그러다 군대 갔다 대학 졸업하고 그러니까 이제 이 여자도 이제, 우리 집사람도 이제 대학 졸업하고 그때 지금 세종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과를 인제 졸업을 했죠. 그런데 이제 내가 미국을 오게 되니까 아, 결혼을 해야되지 않겠어요? 근데 들어오기 전에 결혼안하고 오면 피차 좀 불안하잖아요. 뭐 그런 건 아니지마는 부모님들이.. 그래서 저 생각에는 내가 10월에 들어오고 8월엔가 결혼식을 올리고 들어왔죠. 그래가지고 면담자 : 아, 같이 들어오신.. 구술자 : 아니 아니야, 집사람은 10개월인가 후에 그때 유학생 와이프 초청이 가능했어요. 당시에는. 유학생 와이프는 초청이, 여기서 우리가 유학생 와이프가 그래가지고, 뭐라 그래, 인비테이션(invitation)을 보내면 초청서를 보내면 그게 들어오는 케이스가 있었어요. 그래서 들어왔죠, 집사람. 면담자 : 70년도에 들어오셔가지고 학교를 그럼 다니 구술자 : 제가 털사 오클라호마(Tulsa, Oklahoma)에 오클라호마 유니버시티에 인제 I-20폼을 가져 왔는데 거기까지 갈 경비도 없고 거기 누군가 잘 모르고. LA에 도착을 했죠. 친구가 USC라고 남가주 대학교 어, 유니버시티 오브 서든 캘리포니아(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라는 LA에서 유명한 대학, UCLA 다음가는 유명한 대학인데 그 대학에 친구가 있었어요. 여기 와가지고 여기서 그냥 일단 학교를 등록을 시키라 그래서 아주 이름없는 학교 있어요. 우드볼리 유니버시티(Woodbury University)라는 쪼그만게 하나 있더라고. 일단 등록을 안 시키면 비자가 캔슬되니까 등록을 해서 거기서 적을 두고 살았죠. 그 인제 낮에는 일하고 밤에 가 공부하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졸업은 여기서 못하고 졸업은 동부에 가서 했어요. 면담자 : 루이지에나 뱁티스트 유니버시티(Louisiana Baptist University)라고 거기서 비지니스로, 경영, 저저기 상업과 면담자 : 80년 당시에는 LA에 계셨.. 구술자 : 그때 LA에 있었죠. 면담자 : 면담자 : 그때는 어떤 걸 하고 계셨었나요. 구술자 : 그때는 제가 인제 학생 비자로는 영주권이 안 되니까, 사업체를 운영하며는 비자를, 영주권을 내주는 케이스가 있어가지고 사업, 그 영주권 목적으로 가발점을 냈어요. 가발점을. 인제 그때 제가 롱 비치(Long Beach)에다 가발점을 하나 사서 인제 거기서 집사람이 운영을 했죠. 저는 또 저대로 다른 사업을 좀 하고. 그렇게 해서 살고 그때 5·18이 날 때는 제가 롱비치 살 땝니다. 면담자 : 그럼 그 당시에도 뭐 호남 향우회, 뭐 이런 활동들, 한인 활동들을 그 전부터 하고 계셨던 건가요? 구술자 : 아주 좋은 질문 하셨는데요. 제가 미국에 와가지고, 오며, 오니까, 미국에 와서 보니까 교포 사회가 그때만 해도 LA 교포라 해봐야 7천명, 3천명 이런달정도라요 면담자 : 70년대 초에 구술자 : 그러고 뭐 한국 식당도 있을까 말까고. 식품점도 없다시피 한 케이슨데. 근데 보니까 친구들, 사회가 완전히 그, 이 뭐라고 그래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안 되요. 서로 대화하는게 안 되요. 서로 이렇게 벽을 갖고 살아요, 보니까. 뭐 예를 들믄 군대 비슷하더라고요. 군대가며는 너 어느 대학 나왔다 어디 나왔다 뭐가 상관이 없잖아요. 계급이 최고잖아요. 여기 오니까 뭐 먼저 온 사람이 최고로 치고 뭐 무슨 비자로 왔냐, 뭐 뭘 했느냐, 묻지 말라고, 몇 가지를 가리키더라구요, 삭막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70년 10월 15일날 들어와갖고 그 담에 3,4 개월 후가 3.1절 아닙니까. 3.1절 기념회를 하더라구. 여기 안 가져왔을거에요. 그때 앙케이트를 만들었어요. 당신은 왜 미국에 왔고, 당신 영어 실력은 어떻고, 왜 무슨 비자로 왔고, 사람을 만나기를 싫어합니까, 좋아합니까? 앙케이트를 열댓개를 내가 만들어서 이렇게 해서 조사를 해본 일이 있어요. 그게 제가 미국에 와서 교포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계기에요.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암만 해도 인제 한인회도 인볼브(involve)가 되고 무슨 단체, 예를 들어 제가 여기 와서 만든 단체가 기독교 실업인협회, 세계적인 기구거든요. SBMC라고 세계적인 기구고. 그러다 보니까 와이즈맨클럽이라는게 있어요. 와이즈맨 클럽도 인터내셔널 국제 기구에요. Wise, YMCA를 써포팅하는 비지니스맨 그룹인데 신실한 기독교 크리스찬 신자들이 모여서 만든 인터내셔날 로타리 클럽, 라이온즈 클럽, 똑같은 기구에요. 아주 잘 되요. 둘다, 지금 내가 얘기했던 둘다 기구가 기독교 기구로서 아주 훌륭하게 잘 운영되고 있어요. 지금도 잘 되고 면담자 : 지금도 구술자 : 크죠. 인터내셔널 아주 빅 오가니제이션(Organization), 빅 그룹이에요. 그런데 이제 크로쳐가 설립자죠. 인제 롱비치 살다가 가든 그로브(Garden Grove), 오렌지카운티(Orange County)로 이사가갖고 거기서 한인회 만들었죠. 내가 만든건 아니고 세 사람이 만들었는데 내가 거기 한사람 인볼브 한거죠. 그거 만들었죠. 차터(charter), 영어로는 설립 멤버를 차터 멤버라고 그럽니다. 비지니스 기독 실업인 협회, 윌셔(Wilshire) 와이즈맨, 아니 와이즈 맨 클럽 차터, 오렌지 카운티 한인회 차터 멤버, 그 다음에 많이 만들었어요. 한인회 단체를. 운동을 많이 했죠. 인제 그러다가 아.. 아까 향우회 얘기도 했는데 그 향우회 얘기가 여기 저 기사에 다 나와요. 제가 썼던 그 책에 다 나오는데 그때 한인회가 없었어요. 이게 인제 호남 향우회에서 만든 호남지에 내가 쓴 글이고 요건 내가 호남 향우회도 내 손으로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5·18이 여기 보면 내용이 뭐냐면요, 취임서에 가며는 그런데 막상 데모를 하려고 하니 어떤 단체명으로 해야되겠는데 적당한 이름이 없어서 호남향우회라는 이름으로 데모를 했습니다. 근데 그 때 당시 이 단체가 없었어요. 내가 뭐라고 그러죠. 면담자 : 가칭그냥 구술자 : 예. 그냥 만들어서 내 스스로 그냥, 예를 들면 페이퍼 컴퍼니 같이. 만들어가지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당년 6월 1일 일요일날 오후 한시에 외환은행에서 했고 30, 3백명 모여 했고. 그 다음 일주일 후에 6월 8일에는 30여개 범교포단체가 주차장에 장장 5시간의 긴 데모를 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이제 제가 11대 회장에 취임하는 거에요. 10댄가 11대. 11차 정기 총회에 저가 취임을 하면서 에, 그 인제 그래서 동월 12일, 그러니까 8월 12일이요. 백범 기념사업회에서 가칭 재미 한인민주화협의회가 탄생 했고 두 번째 단체가 바로, 오늘 이 자리가 있게까지 한 대 남가주 호남향우회가 발족을 보게 됐습니다. 5·18땜에 호남 향우회를 내가 만든 거에요. 없었으니까. 두번째 단체가 호남향우회가 준비모임을, 8월 12일 마지막 준비위원회에서 차종완 한인회부회장을 초대회장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야유회를 겸한 창립 총회를 1980년 8월 26일 오후 1시 30분에 센츄리 씨티에 있는 렌초파크 농구장 뒤에서 향우 5백 여명이 모인 가운데 본인의 사회로, 내 사회로. 내가 다 기초 한 거거든요. 뭐 이렇게 얘기하며는요, 뭐 좀 교만하고 뭐 이런게 있잖아요. 근데 역사적 사실이니까. 5·18도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기안했고 또 자 서류 다 가져왔잖아요, 기안했고. 또 향우회라는 걸 내가 내 손으로 기안하고 초안 만들고 회칙 만들고 해서 만든 거에요. 내가. 그래서 5·18땜에 이게 만들어지고 2년 후에 제가 골프를 79부터 골프를 쳤는데요, 미국 와가지고. 어, 2년 후에 82년이죠. 8을, 5·18을 기념해가지고. 왜냐면 그때 4.19 뭐 자전거 전국 경주대회라든가 4.19 기념 자전거 우리나라에 있었어요. 우리 어려서. 그럼 5·18 기념으로 해가지고 뭐를 하나 상기를 해야되겠다. 그래서 제가 골프 대회를, 호남 골프 클럽을 만들었죠. 또 내손으로. 그래서 5월, 그 골프 클럽 명단도 이 안에 있어요. 지금도 이 두 단체는 아주 꾸준하게 잘 운영되고 있죠. 요게 여기였고. 미주 호남향우회를 또 만들었거든요, 내가 10년 후에, 내가 회장 하면서. 내가 호남향우회를 만들어놓고 10년만에 회장하는 거에요. 80년에 만들었으니까 서른 여덟이지? 그러죠? 서른 여덟이죠? 그러면 서른 여덟에 호남 향우회 회장 나이가 너무 어리잖아요. 서른 여덟살 밖에 안 되니까. 그러니까 안하고 기다린거죠. 어르신들이 다 하고 11대 되니까 뭐 어중이 떠중이 다 사람들이 회장할려고 그러고 막 향우회가 영 이상하게 돌아가기에 내가 총대를 맸죠. 그래서 인제 이때 하면서 바로 그 해에, 그 다음 핸가 미주 호남 향우회를 제 손으로 만들었죠. 그게 여기 있어요. 가져왔어요. 가져온걸로 아는데. 미주 호남향우회를 제 손으로 만들었어. 미주 호남향우회 책자가 있거든요. 근데 그 책자를 안 가져 왔나봐요. 그 책자 속에, 거기 인제 골프 클럽 명단이 들어있거든요. 그때 나는 회장은 아니고 인제 후임이 하지마는. 그 책을 안가져왔나봐요. 면담자 : 그, 그럼 선생님은 80년 5월에 광주 소식을 어떻게 듣게되셨습니까? 구술자 : 오케이. 그때는 제가 세탁소를 할 때에요. 그러니까 집사람은 롱비치에서 가발점을 하고 나는 오렌지카운티 플러톤(Fullerton, Orange County)이라는 우리집 옆에다가 세탁소를 크게 내서 세탁소를 운영할 때에요. 근데 손님이 아침에 인제 7시에 와요. 7시에 문 여니까. 7시에 많이 와요 출근하면서 옷 맡겨놓고 가는데. 너 코리안 뉴스 봤냐? 이래요. 나는 못 보고 오잖아요. 뭐냐 이랬더니 한국에 난리 났다 이거야. 군인들이 막 민간인을 죽이고. 난린데. 육안으로 봐도 너무한다 이거야. 그래 당장 집에 가서 봤죠. 집에 가서 뉴스를 틀어서 봤죠. 봤더니 개머리판으로 치고 대검으로 찌르고 질질 시체를 끌고 다니고. 이게 선명하게 총천연색으로, 아침 라이브 뉴스로 쫘악 나오는 거에요 면담자 : 그때가 며칠이었는지 기억 나시나요. 구술자 : 5월 18일이면 한 5월 19일이나 여기 날 5월 똑같이 가거든요? 5월 18일이면 여기도 5월 18일이라고. 거 5월 18일인가 19일 그쯤 될거에요. 내 생각에는 뭐 하루 이틀 차이 날까말까? 내 생각에는 당일인거 같은데? 당일인거 같은데? 그 정도로 지금 기억이 나거든요. 생생하게 나오는 거에요. 매일 막 방송에 나오는 거에요. 생생하게. 현장에서 보는 듯이. 그러고 그 신부, 미국 신부나 미국 기자들이 들어갈려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들어가고 . 한국에, 그때 한국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나오고, 나왔거든요. 그때 LA에. 근데 거기에는 일체 뭐 단 한마디도 없는 거야. 한 일주일 지나니까. 동아일본가 어딘가 밑에 한 오단 밑에 가니까 쪼그마한, 다섯 줄 정도로, 광주에서 약간의 소요 사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알죠. 지금 내가 지금 광주에 전화 하죠. 한번 통화를 했죠. 누구 한테 전화를 했냐면, 아까내가 얘기했던 YMCA 라는 국제 프로그램에 한국 총, 총재라는 분이 정화영일거에요, 존함이 정자 화자 영자, 정화영씨일거에요. 지금은 고인 되셨겠죠, 돌아가셨을거라고. 그 분이 미국에 대회, 세계대회 때문에 LA에서 우리가 만난 분이거든요. 그분한테 안부전화를 했죠. 따님이 받더라고. 따님이 어린 음성으로 받는데 아버님 통화좀 하자 그랬더니 아버지 안 계십니다. 아주, 아주 떠는 음성으로. 전화를, 대화를 못하고 끊없죠. 그랬을 때 내가 정말 심각하구나. 우리는 기사를 외국, 그때 외국에는요, 광주 사람은 현장에서 보니까 알지만 외국사람은 모르잖아, 한국 내에 있는 교포들은 모르잖아요. 아니, 저 한국 내에 있는 (웨이트리스와 대화로 잠시 중단) 여기 과일이 남네요. 먹으라고 그래요. 저희들은, 이따 천천히 합시다. 그래서 그 텔레비로 칼라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중계해준 그 모습은 광주 현장에서 보는 그 모습보다 더 비참할 수도 있을꺼에요. 왜냐면 현장에서는 자기자 직접 찔르고 때리는 걸 보지 않는 한은 모를 꺼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텔레비가 가서 관이 대학병원인가, 전남대학병원인가 수십개가 관이 쫙 늘어서 있고 그 어린애가 사진 들고 이렇게 관 앞에서 한 서너살 난 꼬마가 이렇게 울고 있고. 그 비참한 건 말로 형용이 안 되요. 미국 사람도 그러고. 어떻게 같은 동족이 전쟁도 아닌데. 어떻게 자기 자국민을 저렇게 총칼로 무자비하게 학살시킬 수 있느냐고. 미개인들이라고. 야만인들이라고. 말로 형용이 안 되죠, 그때 그 상황은. 여러분이 현장에서 봤던 그 상황과 내가 봤던 그 상황의, 글쎄, 현장에서는 모르겠어요. 그런. 우리는 텔레비전이 완전 관은 관대로. 또 뉴스위크(Newsweek)지에서, 타임즈(Times)지에서. 상생한 사진들을. 여기 타임즈지 카피도 내가 몇개 가져왔는데요. 면담자 : 그럼 선생님, 당시에 항의 시위를 6월 1일에 시작하셨습니까? 구술자 : 6일날 처음에 시작을 했죠. 면담자 : 6월 6일이요? 구술자 : 1일, 1일. 면담자 : 6월 1일이요. 구술자 : 그 이유는 여기 보면 내가 살던 그, 오렌지 카운티는, 우리는, 나는 뭐 울고만 있는 거에요. 울고만 있고, 아 이걸 어떻게 해야되느냐 이러고 있는데 오렌지 카운티에 그, 내 아는 친구들이, 그 친구들이 데모를 오렌지 카운티에서 하더라고, 나, 나도 없이. 그때 내가 한인회를 내 손으로 만들고 한인회, 내가 그때 수석 부회장 겸 사무 총장을 볼 때거든? 그런데 그때 나를 빼고 자기들끼리 그 데모를 한 기사가 크게, 오렌지 카운티 레지스트(Orange County Register)라는 미국 신문에 크게 났어요. 그게 그걸 보니까 이건 더, 내가 비참해진게, 아니 지금 저 친구들은 전라도 사람도 아니거든요, 그 친구들이. 근데 저렇게 데모를 하는데 왜 LA는 나가면 지가 전라도 최고 뭐, 뭐 유지라고 그러고 어깨재고 다니는 친구들은 왜 조용한가 싶어가지고 내가 LA 전화를 했어요. 선배하고 친구들한테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와아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그래 의기투합해가지고 하다보니까 5월 그게 20 한 5일이나, 4일 이래 된거죠. 그믄 당장은 데모 안 되잖아요. 일주일 준비를 했지. 그 일주일 준비기간이, 그리고 주말에 해야되잖아요. 그러니까 6월 1일이 된 거에요, 인제 날짜가. 근데 그때도 뭐 광주는 사태가 6월 1일까지도 광주 사태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고. 면담자 : 주로 어디에서 어떤 활동들을 좀 이렇게 하셨나요? 구술자 : 그래, 인제 처음에 그 기사가 났던가, 인제 광고를 일단 내가지고 호남 향우회 이름으로, 호남 향우회 이름으로. 요건 범교포 141108차철32:50 (?) 을 한 광고고 요것도 물론 범교포 광고고. 이것도, 이것도 범교포 광고죠. 이게. 예, 여기 준비위원 들어가 있고 뭐 다 들어가 있고 날짜 장소 다 들어가 있고. 이건 이제 포스터잖아요. 이건 포스터로 썼고. 지금 그건, 요건, 이게 동아인지 무슨 신문사에, 여기 스토리가 다 있어요. 내가 그 기록을 해놨죠. 근데... 근데 이제 오렌지카운티에서 데모를 하더라고. 그래서 인제 LA 친구들한테 전화를 해가지고, 그렇지 않아도 전화 기달렸다고 그러면서 이제 해서 6월 1일날 호남 향우회 이름으로 인제 아드모어 공원(Ardmore Park)이라고 한인타운 내에 조그만 팍, 공원이 있어요. 거기서 할라고 그랬는데 정부에서, 시에서 허락을 안받았기 때문에 못하게 하기에 영빈관이라는 그, 그.. 뭐라 그러죠 음식점? 그걸 뭐라 그러죠? 식당, 식당에서 팔킹랏(parking lot)이 컸어요. 주차장이. 그래서 인제 사정해서 거기서 빌려가지고 거기서 했는데 그때 삼백, 한 삼백명 이상 왔어요. 그 뭐 그냥 바로 했는데. 그래 인제 그때 그 결의문 141108차철3:06 (?) 뒤에다가 내가 뭐라고 썼냐며는, 이건 하나부터 열까지 제손으로 다 만들었어요. 뭐라고 썼냐면 “다음주에는 범교포 궐기대회를 갖겠습니다.” 이렇게 했다고. 내 생각에는 내가 호남 향우회 썼잖아요. 호남 향우회, 요거 인제 6월 1일날 한 거야. 근데 요 밑에 “오는 6월 8일 오후 3시는 아드모어 공원 올림픽과 노르만디에서 각 단체와 공동 주최로 범교포 궐기대회를 갖겠습니다.” 이걸 썼다고. 그냥 전혀 누구와 상의 없이. 딱 이, 그날 데모가 끝나고 나니까 단체장들이 모이자 그러더라고, 자기들이. 그렇잖아도 기다린거야. 이 글을 읽고 모이자 그래가지고 백범 김구 선생 그, 그 사무실에서 모여가지고 이제 일사천리로 그 다음주께 진행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 포스터도 만들고 어.. 포스터도 만들고. 이것은, 지금 그 뒤에 무슨 신문이라고 안 나와 있어요? 제가 신문사 3개 신문을 그때 냈을거에요. 한국일보, 면담자 : 신문 이름은 안 나와있습니다. 구술자 : 중앙, 동아, 그렇네. 근데 내용이 다 틀린게, 신문사마다 자기들이 그, 내용을 과격한 내용을 못 쓰게 하는 거야. 어? 그러니까 그때도 중앙정부,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아서 못 쓰게 하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3개 신문사.. 여기 또 하나 있네? 신문사 이름을 내가 안 쓴 모양이네. 아, 이거는, 요건 내가 향우회 회장할 때 5·18기념, 내가 후원 했던, 내가 주최해서 했던 거고. 그런데 그 LA 타임스나 ABC, NBC, CBS 같은 미국 3대 텔레비존에서 와서 취재하는 거는 나는 몰랐죠. 근데 인제 내가 그날 그 유족 대표로 인사를 했어요. 왜냐면 그, 그때 여기 제목을 보면 위령제이지않습니까? 뭐라고 되어 있어요? 구국 그.. 아니 여기여기여기 보며는 위령제 뭐라고 했죠? 면담자 : 순국영령 위령제.. 구술자 : 어, 영령 위령제로 되어 있죠? 면담자 : 네 구술자 : 그러니까 이제 제사를 지내면 상주가 있어야되잖아요? 일종에 제가 상주죠, 유족 대표로 내가 인사.. 사실 유족이 없으면서도 유족 대표가 없잖아요. 그러고 또 누가 시켰더니 유족은 아니지만, 광주에서 막 온 친구를 시켰더니 그, 가족이 와서 데리고, 끌코 가더라고. 누구라고 얘기도 못해요. 다 이름 대면 아는 사람인데. 면담자 : 누구라고 얘기 하셔도 됩니다. 구술자 : 아니, 안 되지. 그건 안 되지. 면담자 : 예, 그래서 끌코 가더라구요. 첨에 와서는 막 제가 그 현장에 있었는데요, 살아있는 우리가 부끄럽고 우리가 같이 죽지 못한 데 대해서 정말 참 비참하게 느끼고, 막 그러면서 울분을 토하고 그래서 유족 대표 인사를 시켰더니, 안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떻게 해요, 순서에는 나와 있는데. 내가 인제 유족대표 인사를 했죠. 그랬더니 LA 타임스 기자가 날 보고 인터뷰를 신청하는 거에요. 요게 LA 타임스 그날 끝나고 나서의 기사 내용이에요. 이게. 이게 지금 전면, 일, 페이지가 얼마나 크게 차지 해요. 이제 요건 타이틀, 내가 LA 타임스 날짜하고 타이틀만 여기다 뽑아놨는데. 요게 인제 메트로 폴리탄(Metro Politan) 지방판 제 1면에 이렇게 크게 난 거에요, 기사가. 한 면에 풀로 나왔으니까. 근데 이거 보세요, 이렇게 보며는 이 글자를 이쪽에서 찍으면 이게 역광이 되서 안 나오니까 프랭카드 뒤에 가서 찍은 거에요. 글자가 꺼꾸로 보이는 거죠. 플랭카드 역광을 그, 그 없애기 위해서. 예, 그래서 여기, 여기서부터 내 이름으로 시작해서.. 내 이름으로 시작, 끝이 여기 하나 더 있는데? 여기 하나 또 있어요. 어디가 피스가 하나 있는데, 여기 연결된다고. 어디 봅시다, 여기 밑에 보며는.. 턴투 페이지 에잇 칼럼 원(Turn to page 8 column 1) 으로 다시 넘어가야 내 스토리가 또 나오는데 그게 있어요. 내가 가져왔어요. 그 칼럼, 그 밑에 또 스토리가 있는 게 있어요. LA.. 여기 있어요. 아, 여기 오렌지 카운티에서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이게 박진관 박남규... (웨이트리스와 대화로 중단, 부인과 대화로 중단) 그래서, 무슨 얘기 하다가... 하튼 자료 속에 있을거에요. 여기 내가 그걸 몇장 가져왔거든요. 여기 요걸거에요. 가만 있어. 여기 있네요. 여기 있네. 내가 끝에 여기 여기 어태치(attach)해놨죠. 그러니까 칼럼 투가 요게요게 그거에요. 요거 두개 가져가시면 그, 그날 그 스토리에요. 그러고 그래서 이 5·18을 두, 두번을 6월 1일날, 6월 8일날 두 번다 백프로 내 손에, 이 결의문 모든거 전부 내손으로 내가 작성하고 아까 얘기했던 그, LA 주소 전화번호 좀 쓰자 그랬더니 이 친구들이 못쓰게한거야. 중앙정보부에 자기들이 걸린다고. 그래서 보면 연락처가 303 파인에빌 롱비치로 되어 있어요. 이게 내 사무실 전화에요, 내 사무실 전화, 이게. LA서 친구들이 못쓰게 해요. 한 일주일 전에 한번 썼어요. 아이, 그냥 누구 여행사 하는 친구 있었어요, 그 친구 좀 쓰자 그랬더니 난리가 났어요. 왜 내 허락 없이 써가지고... 그래가지고, 그래서, 면담자 : 그러면 그때 모이, 모이신 분들이 한 몇 분 정도 됐었나요? 6월 8일날? 구술자 : 아니, 그러니까 데모 군중들은 거기 인제 기사상으로 다 나와있거든요. 우리는 주최상 천명이라고, 말하기 좋게 천명이라고 그랬고 LA 타임스에는 오백명이라고 나왔고. 그때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인제 나하고 쪼금 무슨 알력이 있는 친구가 담당기자가 있는데 고의로 내 이름을 뺐읍디다. 근데 이제 누가 이제, 물어, 차철이가 주관인데 차철이는 빼냐 그랬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재밌어요. 아, 그거 차철이 이름 들어가면 중앙에 걸리면 그 친구 다칠까봐서 고의로 빼줬어요. (웃음) 진짜로. 면담자 : 예... 그럼 이때 5, 6월 8일날, 6월 1일날 1, 1차 항의시위를 하고 이제 총궐기대회를 6월 8일날 하시게 됐고 그 이후, 이후에도 꾸준히 뭔가 진행된 부분들이 있었나요? 구술자 : 저는 그러고나서는 그 다음에 이제 향우회 만들고 골프 협회 만들어서 그 양쪽, 그 단체를 내가 열심히 써포팅하고 그 다음에 이제 10년 후에 하면서 했고. 아까 여기, 지금 요거 아니에요. 요거 11대, 뭐야 내가 아까 광고 하나 거 크게.. 내가 회장할 때 크게 한번 밀어서 인제 발표회, 5·18 기념회를 크게 가졌죠. 면담자 : 그럼 그때 6월, 80년 6월에 선생님하고 같이 6월 8일날 이거 이 시위를... 구술자 : 주도했던 사람 이름들 거기 다 있어요. 그 명단에, 그 밑에... 면담자 : 이분들이신가요? 구술자 : 예예예예예 면담자 : 이분들이 다 호남향우회 소속이신가요? 구술자 : 아, 아니죠, 아니죠, 아니죠. 보편적으로 다 아는데 거기 지금 사회가 정호영으로 나와있나? 여기 보며는 제일 밑에 이 양반은 죽었고 여기여기 이 사람 변호산데 여수 사람인데, 살아계시나 모르겠고. 김운하 이 양반이 아까 얘기했던 조선일보 편집 뭐야 국장하다 오신 분인데 신한민보 하시다가, 완전히 이분은 이북으로 돌아갑디다. 이 노길남이도 이북으로 돌아갔고. 문성철인데 이분 잘 모르겠고. 박완철 우리 선배 광주분이고. 이봉호 이 사람은 미국에 전라도 사람 아니고, 이화수도 아니고. 정호영이는 경상도고, 그래요. 패티장은 미국서 태어난 여자분이고. 예. 왜냐면 이때는 범교포니까. 호남이 아니고. 첫째 호남은 이제, 예. 아주 크게 했어요. 그때 미국에, 내가 인제 그 11대 회장때 날 보고 5·18에 대한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내가 했던게 광주 시민 학살일지, 그 다음에 인자 뉴스위크에 났던, 그때 그 포승줄에 끌고 가고 뭐 시체, 막 하고, 관 있고. 뉴스윅이 있던가? 그 다음에 아까 오렌지 카운티에서 친구들이 데모했던거, 그 다음에 요거는 인제 우리가 광고 냈던거. 그 다음에 인제 우리 기사 났던거, 데모 기사. 2주 동안. 요거 광고, 광고, 광고가, 요건 아까 그게 지금 내가 카피한거고. 그 담에 결의문 거기 내가 만든거고. 결의문 내가 만들었고. 그 다음에 여기 뭐 서명날인에 지미 카터하고 최규하한테 보낸다는거. 요것... 동아일보 기사 난거. 8백 여 교포 구국궐기대회, 여기 8백명만 모여도 많이 모인거 아니요. 한국일보가 공식 광고니까. 많이 모인거야. 교포 사회 가장 큰 데모로, 당시로. 지금도 이렇게 크게 데모하는 단체가 미주에서 없을껄요? 8백여명이, 우리 추산으론 천명이라 그랬고 LA 타임스는 오백명으로 했거든? 여기 한국일보는 8백으로 하고. 요거 인자 LA 타임스 기사 내가 이거. 광주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 이거 내가 그때 내가 부동산 내가 브로커로 있을때, 이제 광주 의견에 대한 내의견이라고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에이고 그렇습니다. 그러고 인제 이건 호남지에 났던 호남지라는, 호남향우회때 그 기사 똑같은 내용이야. 내가 얘기했던 내용이 그 속에 디테일하게 잘 들어 있어요. 그게 이중 삼중으로 든 것도 있고. 이건 전남일보 내가 95년돈가 96년도에 거 전남일보하고 인터뷰한거, 광주건에 대해서. 그때 서류 가지러 갔다가. 무등일보에도 내 기사가 났네. 무등일보란게 있어요? 면담자 : 예, 지금도 있습니다. 구술자 : 근데 이... 99년 5월 18일 이거.. (웃음) 여기 다 있네? 여기 보니까. 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어? 여기 와서 했나? 전혀 기억 없는데? 이야. 요건 내가 보관 하고 싶은데, 요건 팩스로 넣어드릴게, 이메일로 넣어드릴게. 헛, 무등일보하고 언제 내가... 여기 보며는요. 광주에 가서, 여 보세요. 광주만의 교포들이 알려. 요게 94년 전남일본데. 요게 차상렬이라고 장성, 장성 사람인데, 나와 종씬데. 이 친구랑 그때 같이 했어. 그 이름 있어요, 그 속에. 저기 명단에 있다고. 근데 이게 군수로 나왔다 떨어지더라고. 이 친구 형이 그 김영삼이, 그 경호실의 바디가드로 아주 이름 날렸었어요. 이름은 내가 모르겠는데. 자료가 됐음 좋겠어요. 면담자 : 아니 뭐, 선생님 주신 자료는 대부분 저희들이 못 갖고 있는 자료인데 구술자 : 허허허허, 미주 LA, LA, 내 생각에는 그때 다른 데서는 데모를 얼마나 했을까 의문스럽네요. 허허. 면담자 : 그러면 그, 11대 구술자 : 잠깐 죄송합니다. 차가 몇 시죠? 4시 몇분이요? 면담자 : 4시 십분입니다. 구술자 : 나갈 준비 합시다. 면담자 : 마무리를 좀 짓, 짓는다는 의미에서 (웨이트리스와 대화) 면담자 : 91년도에 호남향우회 회장으로 추대되시고 그 이후로도 이게 보면 관련, 5·18 관련 활동들을 쫌 지속적으로... 구술자 : 전혀 안 했어요. 모든 단체를 95년 이후는 일체 면담자 : 95년 이후로는요? 91년도까지는 좀 하셨던 것 같은데요. 구술자 : 91년도에는 한인회장 하고 미주총연만들고 했으니까. 저는요, 마지막으로. 망월, 망월동이에요, 거기가? 국립묘지, 국립묘지라고 그래요? 면담자 : 예, 국립묘지라고 합니다. 구술자 : 아직 못 가봤거든요. 근데 왜 못가봤냐면 내 개인적으로 갈 수 있잖아요, 구경삼아서. 근데 명색이 이렇게 미주서 일을 했는데 참 내 혼자 가서 거기서 쓸쓸히 눈물짓고 거기 구경하고 그러고, 생각하니 참 서글프더라고. 예?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요? 참 비참하더라고. 근데 한번은 그 광주 어떤 분이 나하고 잘 아는 분인데 나를 이용해가지고 신청을 한대요, 돈을. 그래가지고 그 돈을 자기가 먹겠다 그거야. 나한테 그러더라구. 그러면서 어떤 이사장을 소개시켰어요. 식사를 한번 대접을 하면서, 식사를 하더라고. 그 사람 면목에서 나를 팔아서 5·18에 돈을 당신이 먹는다는 건 참 비열하잖아요. 응? 내가 돈을 원하는 그 자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게 참 비애감을 느끼고 그런 일도 있었어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어요? 돈이 나온다더라구. 그래서. 근데 내 경우는 5·18때는 내가 우리 형제가 고생을 했거든요, 서울서. 면담자 : 아, 그렇습니까? 구술자 : 내 동생을 누가 잡아, 경찰이 잡아갔는지 중정이 잡아갔는지. 잡아가지고 형 보고 싶다고. 편지를 간절하게 쓰라 한 거에요. 형이 좀 나오라고. 면담자 : 시간이 쪼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구술자 : 여유가 없길...없기에 다행이에요.(웃음) 면담자 : 아무튼 저희들 만나러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차철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술자 : 네, 감사합니다. 은호기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은호기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8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은호기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8일 오후 4시 5분부터 시작입니다. 예, 선생님. 먼저 이렇게 오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예. 면담자 : 그 선생님 크게 인제 세 가지로 쫌 나눠서 선생님께 좀 질문을 드리려고 해요. 일단 선생님께서 미국에 오시기 전까지 이렇게 선생님의 한국에서의 활동, 뭐 유년시절부터 해서 한국에서의 활동과 이후에 미국에 오셔서의 그런 활동, 그리고 지금 현재적, 현재의 활동, 크게 세 가지로 쫌 구분해서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 너무 부담갖지 마시고 그냥 옛날 이야기,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저에게 해주신다고 그냥 생각하시고 편하게 그냥 말씀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면담자 : 어, 선생님 먼저 언제 태어나셨고 어디에서 쫌 태어나셨는지 그걸 쫌 말씀을 해주시면 합니다. 구술자 : 1939년 10월 30일, 전라북도 고부, 면담자 : 고... 구술자 : 고부, 정읍군 고부, 동학 농민 전쟁 발생된 곳. 면담자 : 그 39년 10월 30일은 호적 나이인가요, 실제 나이와 같으신건가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선생님 그럼 언제까지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으로 이렇게 오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 1970년 꺼정 있었죠. 면담자 : 그러면 구술자 : 1970년 말에 왔으니까 면담자 : 서른 한 두 살, 32, 서른 두살 구술자 : 한국 나이로 뭐 그렇게 됐을거에요. 면담자 : 그 정도 까지는 계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쫌 이렇게 말씀을 드릴게요. 구술자 : 뭐뭐뭐 어렸을 때는 뭐 거기서 국민 학교 다녔구요. 면담자 : 부모님은 뭘... 구술자 : 농업이지, 뭐 농업. 면담자 : 농사 지으셨구요, 형제 관계는, 선생님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우리 8남매죠, 예. 면담자 : 8남매에 선생님이 구술자 : 끝에서 두 번째 면담자 : 아 여섯 번째요, 일곱, 일곱 번째이신가요? 굉장히 형제들이 많으셨는데 뭐 어렸을 때 쫌 이렇게 어... 여덟 식구, 부모님까지 하면 열 식구 같이 생활을 하셔야 되는데 이렇게 뭐 크게 경제적으로나 뭐 그렇게 뭐 힘들거나... 구술자 : 뭐 그런대로 뭐 살았죠. 면담자 : 그럼 국민 학교는 어디를... 구술자 : 뭐 거기서 나왔죠. 면담자 : 무슨 국민 학교, 이름, 혹시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그저 그, 고부국민학교죠, 뭐 그런 거 다 써서 뭘 해요. 대강대강 이야기 합시다. 면담자 :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쫌 이렇게... 구술자 : 그런 건 중요한 거 아니야. 면담자 : 학교만 좀 확인을 하고 쫌 넘어가겠습니다. 중학교는 어디를... 구술자 : 그게 그 저,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나왔고, 면담자 : 고등학교는 전주에서요. 구술자 : 대학은 서울에서 나왔고. 면담자 : 중학교는 혹시 어디에서. 구술자 : 거기 마찬가지고요. 면담자 : 서서, 대학은 어디... 구술자 : 아, 그런 거 알아서 뭘 해. 그런 거 없앨라고 허는 사람이 운동하는 사람인데...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이 지금 뭐,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으로 이렇게 넘어, 이민 아니면 유학이든 오시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구술자 : 그거 뭐 공부하러 왔죠. 68년에 오려가다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오고 왔죠, 공부 끝낼라고 왔죠. 근데 못 했죠. 면담자 : 그 대학을 다니시다가 유학을 오신건가요? 구술자 : 아니 아니죠, 다 마치고 면담자 : 아, 다 마치시구요. 여기 오셨을 때 혼자 들어오셨나요, 결혼을 좀 하시고 들어오신 건가요? 구술자 : 음...같이 오기는 왔는데 결혼은 여기서 했지. 면담자 : LA, 처음 오신 곳이 LA인가요, 아니면 다른... 구술자 : 응 LA로 왔지, 그게 잘못된 거지. 면담자 : 아, LA로 오신 게 잘못된 부분인가요? 구술자 : 바로 학교 쪽으로 갔어야 공부를 하는데 여기 들렀다가 간다는 것이 여기서 그냥 주저앉게 된 거지. 면담자 : 예. 여기 그러면 처음 들어오실 때는 학업을 계속 하시려고 들어오셨는데, 어떤 뭐 유학 결정이 났을 때 어느 학교로 좀 공부를 하실 생각이셨나요? 어느 전공, 어느 대학 어느 전공으로... 구술자 :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치학 하려고 그랬지. 면담자 : 그런데 LA에 이렇게 머무시게 된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가요? 구술자 : 친구들이 여기 있었으니까 면담자 : 아, 친구 분들이요. 그럼 LA 들어오셔서는 어떤 활동들을 선생님, 하셨었나요? 70년도에 들어오셨다고 하셨는데... 구술자 : 그러니까 뭐 뭐야, 뭐 먹고 사는 데 정신이 없었지. 이런 잡다한 일. 그때만 해도 인제 한국이 가난할 때고 미국만 오며는 모든 것이 풀린다는 그런 그 통념을 가지고들 와서 고생들 많이 했지. 면담자 : 그러면 LA에 처음 오셨을 때는 인제 어떤 경제적 그런 이유 때문에 선생님 직업 활동을 여기서 하시기 시작했는데 어, 이렇게 한국 정치 쪽에나 이런 거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런 활동을 하시게 된 이유가 계기라든가 그런 부분들이 있으셨나요? 구술자 : 내가 그, 한국에 있을 적에는 뭐 무슨 학생 운동을 한다던가, 사회 운동을 한다던가 이런 건 없었고 그때는 굉장히 제한되어 있었고 다만 그, 박정희 쿠데타 정권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지. 그러니까 그, 인제 그때만 해도 여기 그, 그러니까는 반 박정희 그, 운동, 반정부 운동이 에...있었는데 그, 그때는 주로 그 원로들, 김상돈 선생님을 중심으로, 어른들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그때 그 젊은 사람들이 낄 자리가 별로 없었지. 또 운동이라는 것도 연줄 연줄이 돼야 조직으로 되고 그러잖아요. 그런 것들이 없었죠. 없었다가 박정희, 인제 김대중 허고 대통령 선거를 71년에 할 적에 김대중 씨가 이슈로 많이 냈지. 4대국 (평화) 보장론이네, 뭐네. 그때 인제 그 김대중씨 정책에 관심을 가졌고 그 뒤에 인제 그 유신 체제가 되면서 김대중씨가 여기로 망명을 왔잖아요. 그래서 그, 유신체제에 대한 아주 그 혐오감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헐 계제가 없었어. 여기 그 무슨 조직도 있었던 게 아니고, 물론 인제 그 있었는데 그 원로들, 김상돈 선생이네, 차상달 선생 원로들, 다 돌아가셨지마는. 말하자면 연줄도 없고 낄 틈도 없고 그러다가 인제 그, 기웃기웃 하던 차에 그, 10.26 사태가 일어났다고. 10.26 사태가 났는데 그때가 점심때야. 그때는 뭐 매체가 발달하고 뭐 그런 때가 아니니까. 여기 뭐 한국 그, 언론 매체도 보잘 것이 없었고. 어...그래가지고 인제 전화로 박정희가 피살됐다고. 어 근데 사람이 죽었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 (웃음) 사람죽고 기분이 좋았던 것은 내가 그때가 처음이야. 그래서 이제 그 내가 그 세상에 이제 좀 달라지겠구나, 했는데 12.12사태가 났잖소. 그런데 그 때만해도 인제 그 한국의 정치 상황이라든가, 유신구조라든가, 이런 것을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군부의 동향은 전부 몰랐고. 그러니까 12.12 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미닝(meaning), 그 파악을 못했다고. 그것이 이제 전두환의 쿠테타고 집권으로 가는 과정인데 그렇게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어. 저, 한국 군부에 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고, 희망적인 것이 없고 물론 한국에서도 그랬지. 그러다가 광주 사건이 일어난 거라고. 그러면서 이제 그 사회 활동에 구체적으로 이제 가담하기 시작했지. 면담자 : 그 5·18이 일어났던 것은 어떻게 접하시게 됐습니까, 선생님이. 구술자 : 그, 그것은 이제 그 미국 테레비도 나오고 또 이제 그, 그때 만해도 주위에서 전화를 하고. 또 이제 우리는 그, 고향이 호남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많을 거 아니야. 호남 사람들이. 그래서 연락을 하고 그래서 그, 알았죠. 근데 그, 그래서 그때 이제 그런 일은 제 3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로 이렇게 그 생각을 했지. 한국 사람들은 상당히 자기네들이 선진적이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그런 일은 제 3 세계. 한국도 제 3세계인데 일어나는 일이 그런 것이 일어나니까 어처구니가 없지. 그리고 에... 그 『뉴스위크』(Newsweek)의 주간지에 사진까지 해서 생생하게 다 봤다고. 그러니까 열불이 나지. 그래서 그, 그래서 여기서 맨 처음에 그것에 대해서 규탄대회를 한 것이 호남 사람들이야. 면담자 : 네. 그때 당시에 뭐 호남 향우회랄까요, 그런 것들이 조직이 되어 있었나요? 구술자 : 없었어. 그 전에 내가 그 호남 향우회를 만들자고 했는데 나한테도 연락이 왔는데 내가 노 했어. 여기까지 와서 그런 것을 맨들 필요가 있느냐. 그, 말하자면 그, 쫌 우리가 그 분단되고 했는데 폭 넓게 살아야지, 그런 지엽적인 뭐라 그래. 난 반대를 했다고 . 그래서 형성이 안 되던 차에 광주 사태가 일어나니까 특히 그 전라남도 사람들은 기가 막힐 거 아니요. 흥분이 더 되지. 그래서 부랴부랴 그렇게 그 몇이서, 차철이네, 장경희네, 박완철씨네, 김수근씨. 이런 사람들이 연락을 해서 그냥 호남향우회라는 그 명칭으로 그, 규탄대회를 6월 1일 날 처음으로 했다고, 일요일날. 그 뒤에 아, 안 되겠다. 이제 그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까 우리라도 뭉쳐서 이 문제를 대처해 나가자 해서 그 뒤에 호남향우회가 만들어졌어, 그 뒤에. 그건 내가 적극적으로 종용하고. 그래서 이제 그 시카고 호남 향우회, 워싱턴, 워싱턴에서 그때 조직돼서 내가 가서 축사도 하고. 이렇게 해서 호남향우회가 결성이 됐지. 그러니까 그 호남향우회는 상당히 역사적이야. 무슨 지방적인 게 아니라. 그 선언문에도 있고 향우회 규약 전문에도 쓰여 있지만 내가 썼지마는, 그 역사성을 강조한 거라고. 지역성보바도. 그래서 그 뒤에 운동권에서 광주 규탄대회하고 기념식 하고 그러면 호남향우회에서 돈을 많이 대고 그랬죠. 그러고 6월 1일날 호남향우회 저거 하고 6월 8일날 인제 대대적으로 규탄대회를 했죠. 영빈관, 영빈관이라고 식당이 있었어. 식당 VIP 식당이라고, 여기 그 주차장에서 했는데 아마 LA, 내가 그 그 뒤에도 집회도 여러번 해봤는데 그 때가 LA 지금까지로 쳐서도 젤로 많을 거야. 면담자 : 규모가요? 구술자 : 규모가. 김대중씨가 왔을 때도 그렇게 없었어. 김대중씨 2차 망명 때 와서 강연할 때 내가 사회를 봤는데 그때도 그, 그렇게는 안 모였어. 그때 굉장히 모였어. 1000명 정도 추정을 했는데 그래가지고 그때는 모두가 흥분을 했어. 모두가, 여기에 있는. 동포들이 그래서 그 궐기대회 그 규모도 상당히 크게, 저저 폭넓게 했지. 그때 주축이 됐던게 국민회의라고 라고 있어. 김상돈 선생이 하던. 내가 자료를 줄테니까 나중에 읽어보라고. 그리고 신한민보라고 그 신한민보가 그, 그 일본 식민지 때 교포 언론으로 그, 되어 있는데 이제 조선일보 김운하씨가 그것을 인수하면서, 굉장히 역사적인 신문이야. 그, 해방, 저 독립운동 사료가 굉장히 많은 신문인데 그 신문을 조선일보 정치부에 있던 김운하 선생이 그, 인수를 하면서 반정부 신문이 됐지. 그래서 신한민보 본 줄기에서는 불편이 많았다고. 국민회의하고 그 신한민보가 주축이 됐다고 봐야지. 그래서 그때만 해도 전부 그, 흥분 상태야 뭣을 조직적으로. 그래가지고 운동권 측면에서는 인제 그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 첫째는 그때 그 영빈관 대회에 모인 단체가30여개 였어. 뭐 백범 뭐 기념사업회니 뭐니뭐니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그 대표들이 모여서 민주화운동 협의회를 맨들었다고. 그러니까 최초의 통합 단체야. 그니까 모든 것을 힘을 합쳐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런 그, 것과 또 하나는 북한이 뭔가, 도대체. 북한이 쳐들어온다고 자꾸 그, 위기, 사건 때마다 이러는데 과연 북한이 뭔가. 근데 동부는 상대적으로 그 진보 세력보다도 진보 인사들이 많이 있었어, 진보 세력도 있었고. 노광욱 선생이니, 지창보 선생이니, 임창명, 그 대사 임창명씨니. 또 그 동아일보에 있던 서정주 선생 문리대 정치과 다닐 때부터 진보운동을 한 사람이야, 해외 한민보라는 그 신문을 맨들어서 그 구심점이 됐다고. 근데 서부는 진보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되. 서부는 반공 민주화. 이 노선이 그랬지. 근데 그것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그 운동 측면에서는 그 두 가지의 그 변화 현상이 일어났어. 그러니까 그래서 인제 운동이 점차 조직적으로 되어가기 시작했지. 조직적으로. 어...그런, 그런, 그런데도 유동기고 또 아까 얘기했던 한국의 군부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그저 그, 말하자면 그, 좀 희망적이었지. 그런데 그것이 안 되겠다고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1981년에 1월달에 전두환이가 여기 왔잖아. 레이건이 그 취임하자마자 초청을 했다고. 그건 왜 초청한지 알죠? 어? 카터 대통령이 인수인계를 할 때 냄겼다고. 이 문제를 해결해라. 김대중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 그 카터 일기에도 나와요. 그게, 내가 있는데.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레이건이 전두환이를 제일 먼저 불른 거라고. 근데 한국에서는 레이건이 취임하자마자 한국 대통령을 불렀다 해가지고 굉장히 그, 그그, 다른 각도로 써먹었지. 근데 거기만, 워싱턴만 갔다가 얼른 갔으면 되는데 여기서부터 바람몰이를 한다고 온 것이 되게 걸렸지. 그때는 굉장히 대대적으로, 그때는 이미 평이 갈렸어. 광주 항쟁 때 흥분했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체제를 그러니까 인정하고 그쪽으로 빠져나가고 이제 그 그, 소위 그 반정부 반 전두환 정권, 군부정권 세력이 조직화되고 힘이 생기기 시작했지. 그걸 계기로. 그때의 그 80년도에, 80년도 그 항쟁 기록을 내가 찾다가 지금 못찾았는데 이거는 (자료 제시하며) 전두환이 왔을 적에 생생한 좌담회야. 그러니까 그 한번 읽어보시라고. 그래서 이제 그 광주 항쟁이 어...일어나자 내가 여기 보냈는데, 여기 있는 시인들이 광주, 인제 그때 광주 항쟁 때 제일로 많이 읽힌 것이 김준태씨의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야. 그 103행인가 그럴 거야. 군데군데 깎여서 여기 들어왔어. 내가 시극, 시극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 그 광주 항쟁의 겪고 여기 있는 시인들이 그, 그 말하자면 그 참상이랄까, 그 저걸 시로 발표를 했다고 여기저기에. 그것이 묶어져나온데 그게 이 ????빛의 바다????야 광주 항쟁의 시집은 이게 세계에서 이제 최초야. 인제 내가 편집을 도와주고 그랬는데 이걸 읽어보면 시라기 보다는 굉장히 흥분되어 있어. 그때만 해도 여기 그 한국 타운의 가장 그, 큰 마켓의 담벼락에 전두환이 찢어죽이라고 어떤 놈이, 어떤 사람이 크게 그 페인트로 써놓기도 하고 그랬어. 이게 그 역사적인 거고 지금 이게 후에 ????다시 쓰는 빛의 바다????라고 해서 이게 광주 탈상할 때 기념으로 해서 나온 거라고. 가지고 가쇼. 면담자 : 그 선생님, 그 6월 1일날 처음으로 규탄대회를 했는데 6월 1일은 어디에서 규탄 대회를 했나요? 구술자 : 아드모어 공원(Ardmore Park)이라고 있어요. 저, 올림픽 한국 타운 면담자 : 그때는 인제 호남 향우회, 호남향우회라는 그런 명칭으로 모인건가요? 구술자 : 호남사람들이 주로 했어 구술자 : 면담자 : 그때는 한 몇 분정도 여기 참여를 하셨나요? 그래도 그 한 그래도 그, 한, 한 이백명은 됐을거야. 여기 호남 사람들만 온 것이 아니고 그 호남사람들이 적극 해서, 해서 그 나도 무슨 발표하고 그랬을 거야. 면담자 : 그때 미국인들의, 현지인들의 반응이라든지 이쪽 언론들의 반응, 뭐 인터뷰를 하거나 그런 반응이 있었나요? 구술자 : 그, 그것은 인제 그때는 없었고 6월 8일 날 영빈관 해되를 할 적에는 『LA타임스』(LA Times)에서 크게 쓰고 그리고 그. 왜냐면 여기 언론은 이,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었어. 그러고 전두환이가 대통령이 돼서 여기서 왔을 적에도 여기 그 일부 텔레비 방송국에서도 항의 데모하는 우리를 더 취급해줬다고. 그래서 우리 대변인도 맨날 했지. 면담자 : 81년 전두환이 LA로 이렇게, 아니 방미해서 LA로 왔을 때도 엄청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술자 : 아 그 때가 더 컸지. 왜냐면 매일 했으니까. 전두환이 따라다니면서. 긍게 경찰들도 여기서 그, 시위하는 법을 다 아르켜줘. 밤 10시 넘으면 소리 지르지 말라고 하고. 호텔 투숙객들이 항의를 하면 불가불 쩌기 하니까. 폴리스 라인을 쳐놓고 그 또 반대 세력과 격리시키고 우리를 많이 보호를 해주더라고. 면담자 : 뭐 통일교 세력 하고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구술자 : 그때 그 통일교 세력이 올림픽에서 통일교 세력이 태권도 하는 애들을 동원해서 데모도 하고 충돌이 있었지. 그 여기 다 나와요. 면담자 : 그, 그것은 반대 충돌이 일어났던 통일교 세력은 외국인이었나요? 구술자 : 그렇지, 주로 백인들 면담자 : 어떤 사주를 받아서 그런건가요? 구술자 : 그렇지, 그렇게 봐야지. 그 통일교가 본래 문선명씨가 북한을 가기 전까지는 그, 반공세력 아닙니까. 승공협회가 있고. 그 통일교의 정치단체가 승공협회야. 그래가지고 그 반공행동을 굉장히 했지. 그러니까 그런데 문선명씨가 북한을 가서 김일성 주석하고 만나서 하면서 그 반공 노선이 없어지고 말하자면 그, 통일지향적인 그런 색채를 띠기 시작했지. 문선명이가 세상을 떠나고는 그것도 좀 희미하지. 그래서 이제 그 전, 전두환 대통령이 그, 방미를 계기로 해서 조직이 인제, 인제 굳어지고, 보다 인제 운동이 조직화되는 계기가 됐지. 그러고, 그래서 운동이 그때 인제 그래서 젊은 층들도 많이 참여를 하게 됐고. 그러다 일 년 후에 인제 우리가 그 민주화 운동 협의회를 열심히 할 적에 인제 윤한봉 선생이 나타났지. 82년 11월 달에 여기를 왔지. 그래서 갈등이 많았었지. 면담자 : 선생님, 기존에 여기에서 그런 관련한 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어느 정도 이렇게 자리를 잡고 계시는 과정이었는데 이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서부는 다소 좀 보수적인 성향이 있고 반공 민주화가 좀 이렇게 강한 이런 성향이 있어서 이런 민주화 운동 협의회 단체를 결성하고 난 뒤에 쫌 어떤 갈등, 교민 사회 내에서 갈등구조 같은 건 없었나요? 현지... 구술자 : 그냥 그, 그때만 해도 진보적인 색채를 뭐 뚜렷이, 말하자면 나타낼 말하자면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반정부 운동세력으로 이렇게 되어 있었지. 그런데 이제 LA가 그, 한국 분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인제 그 달라졌지만 그때 당시의 데모그래픽(demographic), 인구 구성이 이북 사람들과 호남 사람이 많았어. 왜냐면 이북 사람들은 어차피 피난 왔잖소. 그러니까 고향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개척자 정신이 많아서 이쪽으로 많이 왔고 호남 사람들도 찬밥 아니요. 그래 이쪽으로 많이 왔어. 어, 그래, 그래서 로스엔젤레스의 경우는 소위 그 민주화 운동, 반정부 세력 이런 반정부 세력 주축이 이북 사람들하고 호남사람이 많았다고. 그게 특징이야. 저...그래서 여기서 그때 그 용산 고등학교 애들이 많았어. 용산 고등학교가 거기가 피난민 학교거든 (웃음) 이북서는. 그래서 이제 그 북한이 뭔가 하다가 이제 그, 내가 자료를 줄테니까 이제 그, 카터 행정부가 북한 여행 금지를 풀었다고. 그 전까지만 해도 쿠바, 베트남, 월맹, 노스 코리아, 이곳은 여행 금지국이라고 써져 있어, 영주권에. 그것을 카터가 풀었다고. 그러면서 북한이 미국에 있는 관광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그 처음에 갔다 온 것이 여기 그 민족학교 초대 이사장 하던, 지금 돌아가셨는데 최진환 박사가 갔다 왔지. 거기에 대하서 글도 쓰고 그랬는데. 그러자 이제 물론, 이제 70년대에 갔다 오신 분들도 있어 동부가 더 많지. 여기서도 양은식씨가 76년에 갔었나, 아마 갔다 오고 그런데 인제 그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인제 그, 하면서 여기 있는 이산가족들이 북한을 많이 가. 가게 됐지. 그래서 북한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이 일어났다고. 인제 그 그래서 이제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책을 그, 낸 것이 책을 편집 활동을 나는 관여하고 했는데 방북기예요. ????분단을 뛰어 넘어????. 그 책이 나와서 그, 한국 운동권에서 그 지하 책으로서 상당히 저걸 했다고. 그리고 그거를 그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 통협이야, 통협. 조국 그러니까 그, 이게 이 그러면서 친북세력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지. 그래가지고 그 인제 그 구도가 어떻게 되었냐면 일단 빨갱이냐, 안기부 앞잡이냐, 이런 논란이 있고 그랬죠. 내가 자료를 줄 테니까 그걸 쭉 읽어보시고. 면담자 : 그러면 그 6월 8일 날 인제 범동포 그 대회를 좀 크게 연거 같은데 그 이후로는 이런 뭐 다른 모임이나 활동들이 있었나요? 구술자 : 있었죠, 이슈 있을 때마다 모여서 그 데모를 하고 이런 걸 데모하고... 면담자 : 주로 인제 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민주화운동협의회가 중심이었나요, 아니면 호남 향우회가? 구술자 : 호남향우회는 뒤에가 있고 그 호남 향우회가 나서써야 쓰겠습니까? 모양새가 안 좋고. 그래서 돈이나 대고. 그래서 아까 이야기 했던 그 협의회하고 신한민보, 김상돈 선생이 인제 여기서는 제일로 어른이니까. 또 한국에서 민선 시장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아주 그 대단하신 분이야. 그 분이 버티고 있으니까. 그분, 그분이 인제 중심이 돼서. 그분한테는 무서운 사람이 없지. 자기 정치적인 경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그래서 박정희 화형식도 시키고 이렇게 그, 가령 이런 거야. 무슨. 그 전에도 민청학련, 광주 사태 나기 전에도 민청학련사건이 난다던지 인혁당 사건이 난다던지 그러면 인제 데모하고 박정희 화형식도 하고 그랬지. 그 김상돈 선생 중심으로. 그러나 좀 더 조직화되고 그 동포 사회에 그,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광주 항쟁이 계기가 됐지. 광주 항쟁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전두환 세력을 변호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뒤로 인제 말하자면 또 그 이슈, 그러니까 무슨 한국 같이 뭐 조직적으로 뭘 한다기보다는 이슈 중심으로. 뭐 그리고 여기서는 한국같이 직접적으로 투쟁하고 그럴 저기가 뭐 없잖아요. 그렇게 했는데 인제 윤한봉씨가 오면서 윤한봉씨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전략과 새로운 방식으로 운동을 하면서 운동권이 양분되지, 크게. 윤한봉 세력과 기존의 세력. 그런데 이제 기존의 세력은 중심이 된 게 통협을 중심으로 해서 그, 저 그, 이북서 온 사람들이야. 그게 그, 우리는 그 쉽게 얘기하면 한강을 그 보며는, 한강에 가며는 감회를 느끼듯이 그 사람들은 한강보다는 대동강이 더 그런다고. 종류가. 떠나온 지가 오래되고 또 남쪽에는 근거도 없고. 갑자기 그쪽으로 기울지. 그런데다 인제 북한은 정치적으로 그 활용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을. 그래서 북한에서도 여기 있는 남쪽 지향적인 한인회에 대항하는 조직을 만드라고 했어요. 그래가지고 해외 동포 위원회 위원장이 여기 와서 나하고도 단독 면담을 해서 그걸 조직하는 걸 도와달라고 나는 노 했어요. 그런 거 미국서 맨들면 안 된다고. 그랬더니 몇 년 있다가. 여기 사회 대치 구조가 어떻게 되냐면 한인회의 대칭 구도가 동포 연합이고. 평통이 있잖아요. 한국 정부 평통. 김대중 정권이 들어오라고 평통으로 오라고 했는데 난 안 했어요. 안한다고 또 신문에 났더구만. 내가 그, 그, 민족 운동하는 사람이지 정권 옆에 가는 사람이 아니야. 이 평통하고 대칭 구도로 만든 것이 범민련이라고. 이 범민련 창설대회에는 내가 참여을 했어, 직접. 범민련을 만들 적에. 그 평양 가서. 범민족 대회 할 적에, 내가 ㅇㅇ141108_은호기01_00:38:16 범민족 대회 할 적에 그 미국 대표단 단장으로 갔는데. 그래서 그 평양에서 그 범민련을 맨들 적에 난 보류를 해놓고 왔는데 결국은 그것을 그, 범민련을 맨든 것은 두 가지 그 목적이 있었어. 나중에 파악한 거지만 나도. 왜냐면 남쪽에서 옛날에는 지하에서 북을 지지해주고 그랬잖소. 그러니 범민련이라 하는, 말하자면 범민족 대회도 한국 운동권의 전국 연합에서 말하자면 제안하고 북한이 받아들이고 해외가 호응을 해서 이루어진거거든. 그러니까 그, 그때 당시 80년대 그 숨 막히는 운동권의 활로를 거기서 찾았다고, 범민족 대회에서. 좌승우나 이해학 목사네. 또 광주 그, 희태, 김희태니. 그, 그래가지구 내가 그 서울로 그 조직 때문에 몇 번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었는데 북은 생각이 달랐던 거야. 그래서 이제 지금 그 말하자면 해외 통일 기구로 변질 됐어. 그러니까 그 이, 평통회 대칭 구조가 범민련이야. 한인회의 대칭구도가 전국 연합이고, 동포 연합. 그래서 그 동포 연합이 지금 오스트리아, 그리고 유럽. 유럽은 독일이지. 뭐 그, 그 저 뭐 각 지역에 다 돼서 비슷비슷해 이름이. 동포는. 내가 보기에는 그게 미국하고 북이 수교만 되며는 그게 일본 총련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 총련의 기반이 되는 거야. 그 구상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인제 그 미묘한 갈등이 있지. 쉽게 얘기하면 우리는 통일 운동을 하드래도 어...통일 운동을 하면서 북쪽의 가치를 인정을 허지, 하지만 북한의 편에 서지는 않는다고. 그런데 그 이제 그 동포 연합 사람은 완전히 그 해외 동포 북쪽의 어느 해외동포 어느 위원회의 산하조직 같이 되어 있다고. 거기서 의장도 결정하고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한계가 있지. 우리하고 같이 하기는 해도. 그러니까 이제 거기에서 그 흔히 얘기하는 색깔논쟁인데, 색깔 논쟁이란 건 다른 게 아니야. 색깔이 다 똑같을 수는 없잖아? 이북 같이 다 한색일 수 없잖아? 그러면 자기의 색깔을 자기가 인정을 해야 하는거야. 어? 그러고 그 색깔의 한계 내에서 운동을 하고 그래야 한다고. 그런데 자기가 그것을 인정을 않구 남을 그 기준으로 비판하기 때문에 색깔 논쟁이 일어나는 거라고. 그래서 그 말하자면 윤한봉 선생이 북한의 가치를 철저히 인식시키고 그, 북한을 옳게 보는 데에 상당히 기여를 했어. 그렇지만은 종북주의자는 아니야. 쉽게 이야기 하는대로. 그러니까 그 두 줄기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어. 면담자 : 그 윤한봉 선생님 처음 오셨을 때 선생님과 갈등관계가 있지 않았었나요? 그 기존에 운동을 선생님이 여기서 계속적으로 지속해서 진행해오셨던 이렇게... 구술자 : 그런데 나는 인제 성격이 무슨 조직에 들어가서 무슨 장을 하거나 이런 사람이 아니야. 장을 하고. 그래서 유일하게 운동권에 오래 있으면서 장 안 해본 사람은 나일거야. 그저 뭐 한 무슨 공동의장 이런 것은 많이 했지. 그런데 윤한봉씨가 와서 김상돈 선생댁에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 자기 신분도 있고 그러니까 윤한봉씨가 가명을 쓰고 김상원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으니까 누가 오기는 와있는데 수군댈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막 이 얘기가 부풀어 가는 거야. 처음부터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했으믄 모르는데 가명을 쓰지. 저기하지. 그리고 또 밀항했다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 않고. 그래서 그, 그래가지고 말이 많았다고. 그러고는 인제 윤한봉씨가 와서 여기 운동권에 있던 핵심 사람이라든지 원로라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인제 그 사람들로 볼적에는 불쾌하지 왔다는데 어떤 놈이 왔다는데 뒷조사나 하고 다니고. 그런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 윤항봉씨를 한번 불렀어요. 우리집에. 너 살아온 과거를 한번 쭉 얘기를 해보라고. 그니까 그 쭉 하더라고요 그래서 됐어. 그래서 기존 운동권에서는 여기 최진한 선생하고 내가 제일 먼저 윤한봉이를 지지하고 나왔지. 근데 그 최진한 선생은 쫌 성격이 좀 모나. 그래서 갈등을 많이 일으키고. 나는 또 좀 두리뭉실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어떤 조직에 깊이 개입을 않는 사람이니까. 어.. 좀 그렀지. 그래서 최진한 선생이 참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았죠. 한국 정부에서도 고통을 받고. 나 같은 사람은 한국 그 입국 금지를 당해보면 뭐 그런 갑다하고 마는 거지, 뭐 갈 일도 없고. 다만 집사람들 우리 식구들만 귀찮게 안 하면. 불쑥 불쑥 찾아가기도 하고 ㅇㅇㅇㅇㅇㅇㅇㅇㅇ141108_은호기01_00:45:55 그러진 않으니까. 그래서 최진한씨가 그, 고생을 많이 했어요. 윤한봉씨 때문에. 문제는 윤한봉씨가 귀국을 하면서 민족 운동 부분이 다 정리돼버렸다고. 그래서 없어지고. 그러니까 최진한 선생 같으면 설 자리가 없는거야, 그렇지 않겄소? 참 그, 외로웠지.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 할 수가 없고. 그러고 돌아가셨어. 그 저쪽 양은식 노길남파에서는, 양은식이나 노길남이나 다다 오래된 친구들이야. 그사람들이 늘 그랬거든 윤한봉이가 들어가면 다 와해된다고. 뭐 그렇게 된 셈이야. 윤한봉씨가 여기 와서 일을 참 많이 했는데. 참 많이 했어. 그것이 인제 지속이 됐더라면 좋았을텐데 지속이 안 되고 뚝 끊기고 맥이 없어져 버리니까. 그만큼 미국에 있는 저, 역량이 줄었다고 봐야지. 그리고 인제 통일운동으로 넘어가지까 북하고 이해관계가 자꾸 걸리잖소. 장사할라 하는 사람도 있고 이산 가족. 뭐 하는데. 우리야 아무 상관이 없지. 그래도 그, 남북이 잘 나가면 해외에서는 할 일이 없어, 사실상. 그렇지 않소? 근데 남북이 갈등이 있으면 해외의 역할이 커지지. 그래서 그 전두환 정권 때는 북한을 그, 에 대한 해외 동포 역할이 굉장히 컸지. 이 그, (자료 제시) 이런 거 옛날에 이런거 그 한번 읽어보라고. 쭉 나오니까. 윤한봉 추모집에 대해서 내가 쓴 거니까. 책으로 나왔지, 그건. 광주에서. 그 이건 아까 조사장, 방금 한 양반, 책 낸다고 해서 내가 글써달라고 해서 썼, 써준 거라고. 읽어보라고. 나하고는 오래된 사람이고. 면담자 : 뭐 인제 방금 주신 부분에서 제가 좀 질문할 것이 이 안에 다 이제 포함이 되어 있는 내용 같은데요. 간략하게좀, 간략하게만 좀 정리를 해주신다면 80년대 이후 선생님께서 계속 좀 전개해 오신 그런 통일운동이라든지 아니면 민족운동, 뭐 이렇게 그런 운동 활동들에 대해서 선생님이 하셨던, 활동하셨던 거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신다면요. 구술자 : 굳이 그, 그러니까 그, 저, 윤한봉 선생이 여기 오면서부터는 윤한봉 선생의 그.., 같이 했지. 같이 쭉 그 청년 운동을 서포트 해주고 강연해달라면 강연해주고. 강의해달라면 해주고. 내가 두드러지게 한 것은 범민족 대회, 범민련 결성. 이것을 했지. 근데 인제 아까 얘기한 대로 그건 인제 윤한봉 거기에 나와. 그러고 그 뒤에 인제 한 것이, 내가 한 것이 그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 본부. 뭐 잡다하게 했지. 어...그래가지고 나는 또 여기는 운동권이, 한국은 운동, 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도 허고 뭐 그러잖소. 근데 여기는 인제 그런 것 없고 또 정치 추종자들이 있어. 그때만 해도 김영삼파다, 김대중 파다. 그 사람들은 운동권하고 철저히, 에...뭐라고 그럴까, 그 따로 노는 사람들이야. 그래가지고 고 녀석들은 우리를 빨갱이로 모는 놈들이 김영삼 패거리들, 김대중 패거리들이었어. 음...그 사람들이 집권하니까 들어가서 재미도 보고 그랬지 .근데 이제 우리야... 면담자 : 선생님은 이, 이 두 개는 속하지 않고. 구술자 : 이쪽에 속하지. 윤한봉 쪽에. 속하는데 내가 무슨 단체의 장은 그런 것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인제 저쪽하고도 나름 많이 소통을 하고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 일본하고도 그, 또 묶어 볼려고 하는데 일본 세력이 또 이상하더라고. 그리고 내가 이제 아까 이야기했지만 범민족대회 북미주 대표 단장으로 이북을 갔다고 평양을. 도착성명도 하고, 떳떳이. 인제 그 거기는 북한은 서열주의 아니요, 앉아도 서열대로 앉히고 그러잖아. 이런 내가 여러 가지 그 소득들도 있지만 그 소득 중의 하나가, 해외 동포들하고 북한 하고의 긴밀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더라고.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놈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게 그 큰 소득이야. 그래서 해외 운동권 인사들의 북한하고의 그, 유착관계를 그거를 파악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그 말하자면, 그러니까 그것을 모르고 댐비는 것하고 알고 댐비는 것하고는 다르지. 그러잖아? 한계를. 그 사람들 한계를 인정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내가 지켜주니까. 갈등이 일어날 수가 없지. 그런데 인제 구체적으로 부딪치면 이, 말하자면 근데 그 사람들은 자꾸 이쪽, 우리 쪽 조직을 장악을 할라고 그런다고. 범민련 때도 그렇고 6.15실천 위원회도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 그런 그 내가 겉으로는 표현을 않지만 앙금이 남아 있지. 그런게 나 같은 경우는 갈등이 그 사람들하고 갈등, 또 저 김영삼 김대중 똘마니들허고 갈등. 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김대중 추종 세력들이 또 그냥 어느 날 운동세력으로 나타나는 거야. 운동의 그 역사와 맥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게 나는 아깝지. 김대중씨 하고 나하고 논쟁도 많이 했어. 나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니까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나 만나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지. 말하자면 국회의원을 헐라고고 그래야 옳습니다. 그러는데 그,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그게. 김영삼씨 하고도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141108_은호기01_00:54:40 만나면 내가 할 얘기 다 해버리지. 김영, 김대중 선생하고도 나 그랬지. 아 선생님도 빨갱이로 몰려서 죽을 뻔했는데 아 저놈들이 자꾸 우리를 빨갱이라고 하니 그것 좀 막아주쇼. 그러고. 그 민족의 지도자는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민족의 지도자는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일단은 민족의 지도자가 되주십시오. 그, 그랬지. 그래가지고 많이. 첨에 오실 적에는 나하고 내가 인제 정치가를 따라댕기는 애들은 좀 달러, 우리하고. 그래 김대중씨 보고 왜 그렇게 대통령 얘기만 하십니까, 그랬더니 아 이 사람아, 이, 내가 그, 그런 그 암시를 안 하면 나를 따르는 사람이 다 없어져. 운동계야 죽으나 사나 운동하겠지만. 그러더라구.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왜 자꾸 돈 있는 사람들만 그렇게 그 애들만 그러시우. 그러니깐 아 그것은 아, 돈 없이 어떻게 정치를 하겄어. 그러니까 걔네들이 싸고도니까 뭐. 그리고 인제 걔네들이 말하자면 나를 빨갱이로 모는 거야. 그래가지고 요즘엔 그런 것이 저런 것이 많이 없어졌지. 그냥 없어졌지, 거의 없어졌는데. 인제 이것은 있어. 아까도 얘기한 동포 연합이라든가 북허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 철저히 북을 대변한다고. 그러나 거기,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안 해. 다만 자기의 색깔을 인정 하고 그 범위 내에서 행동하라, 그러지. 뭐 그런 사람들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그래야할 거 아닙니까. 글고 북한도 그, 국가야, 정부야.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거야.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는 인제 80년대, 90년대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었고 특히 미주 지역에서는 지금 원로로서, 운동 세력들의 원로로서 계시는 부분, 계시는데 지금 현재에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 건가요? 구술자 : 지금은 인제 그, 관여할 분야가 별로 없지. 그런게 그 6.15 공동선언 실천위원회 거기에 그 고문으로 있고 가끔 가서 얘기해달라면 얘기해주고. 또 뭐 그런 정도지. 그리고 우리가 이제 치열하게 그런대로 조직적이고 치열하게 투쟁했을 때는 그 김영삼 정권 전까지지. 인제 그 삼선 개헌 운동이, 그 아, 저저 직선제 개헌 운동이 6.29선언하고 맞물려 있잖아요. 그때 그, 굉장히 대중 운동을 많이 했고. 그리고 아까 조사장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와도 그 핵문제를 가지고 계속 그, 했어. 핵문제는 그 전문가야. 인제 우리는 그래서 이제 김영삼 정권이 그, 들어서고 그니까는 말하자면 일단은 민주화가 성공한 거 아니요, 말하자면. 절차적 민주주의. 구조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러니까 거기에 맞게 말하자면 운동의 내용과 방향과 조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어... 공동으로 인식을 동부에 있는 이형우 선생, 나, 이승만 목사, 뭐 윤길상 함.. 뭐 해가지고 그때 그 조직을 그, 새로운 조직을 맨들려고 내가 뉴욕도 여러번 가고 했어요. 해서 맨들어진 것이 나카(NAKA)야 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 나카인데 이게 내가 생각했던 것하고는 좀 달리 그, 가더라고. 특히 이승만 목사가. 그래서 그, 그 뒤에 나카 운동에서 나는 빠졌지. 그리고 또 아니, 그래서 이쪽에서도 이제 나카를 조직하려고 했더니 아까 조사장이랑 몇 이랑. 잘 안 돼 이쪽에. 그래서 이쪽에 나카 세력이 없으니까 이쪽은 그러고 동부중심으로는 나카가 있으면서 그것은 주로 그 의회 로비 그런 걸 하는데. 요즘 잘 하고 있어. 거기도 그 한청, 옛날 한청 멤버들이 실무진으로 탄탄히 진을 치고 있지. 서옥균이, 최강현이. 그런 측면에서 그, 윤한봉씨가, 내가 썼지만 윤한봉씨가 우수한 유명 대학의 학생들도 많이 선발을 했어. 그니까 윤한봉씨가 굉장히 또 광주 항쟁의 수배자고 또 실재적인 조직을 하고 운동을 해봐서 조직하고 설득하고 하는 것에 상당히 그, 활동력이 있다고. 그래서 아주 그런 점에서는 특출하게 잘 했어. 그래서 그, 특히 얘기했지만 북한을 인식하는 데에. 말하자면 윤한봉이는 NL은 아니야, PD인데. 여기가 원체 형편이 없으니까. 또 해외에서는 PD보다는 NL쪽 운동을 할 수밖에 없잖어. 여기서는. 그래서 그 NL은 그, 그런 점에서 그 북한을 철저히 인식하고 김일성 체제를 그, 새롭게 인식하는 데에 기여를 많이 했어. 그래서 윤한봉이가 평화 대행진도 많이 했고 또 UN 분리가입 그 단식 투쟁도 많이 했고. 나도 거기 가서 UN 앞에 가서 저기 하고. 그런데 윤한봉 선생 (레코더 비프음)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합니다. 구술자 : 윤한봉 선생이 귀국한다는데 말리리기도 했어. 내가. 여기서 그 민족 운동을 해라. 그러기도 했지. 그런데 인제 윤한봉이 생각할적에는 내 생각에는 그거는 자기 역할이 끝났다 이렇게 판단할 수도 있어. 상황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김영삼 정권이 뭐 입국을 허가했으니까. 그거 김영삼씨로서는 큰 결단이야. 그래서 그 들어간 것이 좀 아쉽게 됐지. 우리, 여기 있는 민족 운동권 입장에서는. 그리고 인제, 말하자면 옛날에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김상돈 선생이 인제 그 한국 민주당의 거물을 하셨으니까. 통로가 그쪽이야 전부. 원로들, 한국에서도. 윤보선이네 함석헌이네. 김대중씨네. 이런. 운동권하고는 연락이 별로 없었어. 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인제 윤한봉씨, 선생이 오면서 한국 운동권하고 관계가 아주 좋아졌지. 철저히 한국 운동권하고 손을 잡고 우리가 운동을 했지. 그 과정에서 이제 그 조성우 역할이 컸고. 그래 이제 나도 한국 운동권하고 인맥이 많이 생기고 연대가 많이 생겼지. 어...그런, 그게 그 단점이 되기도 하고 말하자면 그, 장점이 되기도 하고 그랬어요. 철저히 저쪽에서 얘기하기ㅔ는 한국 운동권에다 의존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 같이 가야할 것 아니야. 그래서 그, 그, 깊이 그 연대를 맺게 된 것은 나로써는 참 좋은 계기였고. 그래서 그... 면담자 : 그 선생님, 인제 미주 지역에서 꾸준히 지금도 현재, 현재 선생님 후배들이 미주지역에서 민족운동을 계속 진행하고, 뭐 어떤 인제, 약간의 방식들, 모습들은 변화됐지만 미주 지역에서 민족운동을 계속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선생님으로써, 먼저 하셨던 선생님으로서 후배들에게 당부해주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으신가요, 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랄지. 구술자 : 역량이 많이 줄었어. 첫째로는. 줄고. 인제 군부정권에 대한 대립각을 세울 적에는 힘도 나고 힘도 나고 그랬는데. 인제 지금은 인제 그런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으로 넘어가고 통일운동도 인제 그 6.15남북정상회담 이후는 상당히 그, 뭐랄까 그, 긴장이 없는 운동이 됐잖소. 그런데 어...그런 점에서 인제 좀 더 공부를 하고 구체적인 이슈를 찾아서 그, 해외에서 독자적으로 해야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어. 지금 전부 새로운 사람이니까 모르지. 예를 들자며는, 지금도 무슨 북한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슈가 되고 있다고. 그건 80년대 황석영이 때부터 하던 짓이야. 그게. 그러고 또 무슨 뭐, 국토 종단 뭐 운동을 구체적으로 한다고 그러는데 그때는 한청이 이미 1989년에 참전 16개국 사람들을 모아서 백두에서 그 대행진을 했다고. 평화 대행진을. 그때 임수경이가 거기 있었지.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이렇게 보면 그 80년대 운동에서 실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별로 나간 게 없어. 그러니 그 그게 왜냐면 미국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해서 뭐를 했냐면, 그 성과도 그렇게 없고. 나는 지금 그 전부터 주장하는 게 그거는 통일 운동은 통일이라는 프로세스 유니피케이션 프로세스(unification process)지, 통일이라는 말을 그렇게 쓰지 말라. 우선 남북이 그, 싸움 않고 왔다갔다 하면 거기서부터 출발하지. 한국 사람들은 통일하면 한국과 한 체제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단박에. 그건 그, 거의 지금으로서는 논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싸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평화 경주 교류 협력, 이걸 착실히 해야 하는데 그걸 가로막는 게 뭐야 그 미국 아니야 미국. 북한하고 평화협정으로 휴전 체제를 끝내야 한다고, 우선. 그래서 이, 평화협정 체결 촉구 서명 운동을 그전부터 내가 그 주장을 했는데 미국 동포들이 주축이 돼서 10만명만 서명을 하면 미국 그래서 의회에 갖다 주면 그런 것은 저 윤한봉 선생이 아주 잘 했다고. 여기 있었으믄 내가 별도로 해서 했을거야, 그 조직을 이용해서. 그걸 안 해. 그러니까 그, 구체적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좀 그, 그런 상태에서 여기서 샌디에고 여기서 한 두 시간 거리에서 사니까. 그, 힘이 안 나지. 그러구 아까 얘기했지만 윤한봉 선생을 중심으로 했던 큰 조직이 없어져버리니까 나로써는 힘이 없는 거야. 또 그렇다고 해서 큰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그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있어요, 지금. 말하자면 그 한국의 운동권도 그렇지 않소. 10년 동안 에...말하자면 그 민주 정부 하에서 남북 관계 개선에 노력하면서 옛날의 세력들이 많이 생각이 그거 관변화가 되어 버렸더라고. 이번에 이창동씨가 왔을 적에도 내가 젊은 애들, 뭐 이 ㅇㅇ이나 창ㅇ 141108_은호기01_01:10:25 이놈들을 좀 키울 준비 좀 해라, 그러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 지금 그, 미국 운동권의 그, 투철한 이론가들이 지금 없고 그, 과감한 행동력을 가진 그, 분도 없고 그저 그런 상태야, 지금. 면담자 : 그런 점이 좀 아쉽다는 말씀이시죠? 구술자 : 그 정도면 됐지? 그리고 무슨 얘기, 얘기 했으믄 (자료 제시) 이거 인제 한번 참고하고. 이게 그 노, 노무현 정권 때 한국 그 통일연구원에서 오럴 히스토리 한 거야, 이게, 이 책이. 거기에 그, 들어있던 그 사람들이야. 이게. 책에. 그러고 첨엔 그러고. 이것은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 있지. 거기서 해외 운동사를 정리허기로 나하고 얘기를 하고 그랬는데 함세웅 신부가 되면서 문국주 파동이 일어나서, 그래가지고 담당하던 양기영이나 이런 사람들이 그래서 거의, 그런대다 이 정권이 이명박이한테 넘어가면서 이 사업이 중단됐다고. 그러니 그때 그 작성한 명단이 안에 있어. 되가지고. 그리고 또 한 번 참고를 하고 그 전에 줬어야 하는데, 말하자면 명단을 작성할 적에. 그 이것저것 참고로 하고. 혹시 그, 혹시 보충할 것이 있거나 뭐가 있으면 서슴지 말고 참고해. 내가 자료를 찾아주고 알려주고 그럴테니까.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구술자 : 애쓰겄다. 이 오랄 히스토리 정리가 쉽지 않애. 면담자 : 선생님 그래도 중요한 자료 이렇게 많이 주셔가지고 제가 이거 꼭 확인해보고 하겠습니다. 구술자 : 이, 이것은 전두환, 광주 사태 때 그것이 없고 이것은 아주 생생할 때 좌담회 한 거니까, 전두환이 왔을 적에. 그때 굉장했어, 나도 그냥. 이게 인제 그 운동 역사가 좀 들어있고 그러니까 윤한봉 추모집 쓴다고 한 거니. 읽어보고. 이렇게 저렇게 하며는 이제 프레임 워크가 생길 거야. 그래서 그, 기왕 돈 들고 오셨으니까 자료를 그 착실히. 할 얘기야 많지. 많은데. 면담자 : 예. 아무튼 이렇게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은호기 선생님의 구술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재길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조재길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8일 ○ 구술장소 : 미국 LA 민족학교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조재길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LA에 있는 민족학교에 있는, 아, 뉴욕, 미국 LA에 있는 민족학교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8일 토요일 오후 한시, 열두시 삼십분입니다.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번에 재단 들어오셨을 때도 저희 그, 저희가 그 기록물 담당 부서다 보니까 분류하고 선생님이 가지고 들어오신 ????코리안 스트릿 저널????(KOREAN STREET JOURNAL) 저희가 다 펼쳐서 분류하고 일자별로 이렇게 정리하고 이렇게 보존하기 위해서 이렇게 등록하고 그러한 작업들을 저희가 좀 했었는데요, 그때 기증해주셨던 자료 저희가 지금도 소중하게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네. 그, 선생님 일단 언제 태어나셨고 어디에서 좀 태어나셨는지를 좀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구술자 : 어 난, 난 우리 일제 말, 2차 대전 종전 직전인 1943년 2월 16일에 일본에서, 일본 규슈에서 조선인 노무자의 에...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러나 어...이 우리 부모님들이 미국이 일본 본토를 본격적으로 그 이게, 공습하던 1944년에, 내가 첫돌이 막 지났을 적에, 나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에 나는 일본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이 고향에, 고향은 이제 충청북도 단양군 어, 단양면, 그 당시는 북산리라는 아주 산골에, 한 30호 정도 되는 조그만한 마을에, 근데 단양이 본래 산세가 험한,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단양 8경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아주 산세가 험하고 특히 우리 고향 복성리는 완전히 산, 산골인데 거기서 이제 성장을 해 자리를 잡고 살다가 잠시 그, 내 유년 시절에 가장 오래된 기억은 단양, 고때 단양에서 살던 기억은 별로 없고 잠시 인제 충북 충주시 주덕면 신양리라는 곳에 가서 거기서 국민 학교를 그 당시는 초등학교, 국민 학교라고. 그때 국민 학교라 했나요, 초등학교라 했나. 거기 입학을 해가지고 거기서 삼년 동안 내가 인제 국민 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있으면서 그때 거기서 6.25 사변을 맞았어. 해서 한국 전쟁을 그 때부터 내 인제 유년기인데 근데 주덕에서는 우리집이 그, 정미소를 했기 때문에 어...아버님이 인제 그 뭐, 참 우리 아버님은 일제 말기에 참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농촌의 아주 어려운 가정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만주로, 일본으로 그냥 온갖 군데 다니시면서 하시다가 인제 한국에 오셔가지고 그 인제 주덕에서 인제 정미소를 하셨는데 정미소를 하실 땐 그래도 우리 생활이 상당히, 내가 살아왔던 어린 시절 중에서 가장 그, 유족했던 그 시절이야. 근데 그 6.25동란 중에, 그 당시 장질부사라고 아주 유행을 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어,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그때 우리 할아버님이 돌아가셨어. 그 아버님이 할아버님 장례식에 그, 다녀오시더니 내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 때인데, 그 우리, 내가 장남인데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까 우리 할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까 고향으로 가야된다. 이래가지고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때 우리 어머님이 그 산골로 들어 가며는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겠다고 그 산골로 들어가느냐 하면서 우리 어머님이 반대를 하셨지만 우리 아버님이 나는 그, 장남이기 때문에 아버님이 안 계신 고향으로 가서 지켜야 된다, 하면서 아버님이 들어가셔. 그때부터 인제 그, 단양에서의 삶이라면 참 어려운 삶이었지. 어... 그, 그 해방직후에, 거기다가 한국 전쟁 중에 한국 전쟁이 인제 내가 우리가 단양에 갔을 때 휴전이 됐는데, 휴전이 되고 나서도 그쪽에 게릴라들이 이렇게 있고, 소백산 쪽에서 끊임없이, 그 저, 인제 전투행은?141108조재길01_00:08:15 아니지마는, 공비 소탕이니 해가지고 어, 하고. 전쟁직후라노니까 참 가난하기 이를 데 없고 특히 우리집은 그니까 이게 가난하니까 이제 정미소판 것으로 가지고 와서 논을 조금 샀지마는, 그러고 또 그, 그때 아 저 우리가 단양으로 이사왔을 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을 때라서 아버님이 아버님이 나이가 인제 쪼끔 있으시니까 군인으로 입대하지는 않으시고보급대라 그래가지고 제2 국민병이라고 그래서 두 번이나 그, 그 다른 어떤, 다른 분들은 한번밖에 안 가는데 두 번씩이나 보급대에 가셔가지고. 내가 국민 학교 인제 3학년때 단양으로 다시 이사를 갔는데, 고향으로 4학년때부터 우리 아버님이 인제 보급대에 가시고 그러니까 어머님이 농사를 지으시고 그러니까 누님하고 나하고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고 또 그 당시에는 화전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야산에 밑밑한 야산에 불을 질러가지고 인제 저 풀들을 제거하고 그걸 인제 뿌리를 캐내고 밭을 만들어 가지고 그니까 국유지라던가 하튼 임자 없는 누가 간섭 안 하는 야산을 개간을 해가지고, 사실 이게 먹고 살구. 그 당시에는 사실 그 우리 단양 촌은 초근목피로 연명한다고 했던 그런 시절이죠. 그러니까 내가 지금 기억이 나는 건 우리 그 동네 느티, 느티나무가 큰 게 있거든. 지금은 느티나무 잎사귀 먹는 사람이 없을 거야. 그 당시에는 느티나무에 봄이 되면은 파랗게 새 잎사귀가 나오지. 그걸 훑어다가 그거를 밀가루, 밀가루는 조금 섞고 그 반죽을 해가지고 이렇게 뭉쳐가지고 느티나무 잎사귀를 우리가 그, 그, 밀가루 반죽을 해가지고 먹던. 그리고 산에 가서 이게, 화전을 할 적에 보면 칡넝쿨에 그 칡이 이렇게 굵직한 게 나와. 그러니까 사실 칡넝쿨 캐서 그거 이제 가루로 만들어가지고 먹고 하던 그 어려운 시절을 단양에서 인제 보내고. 면담자 : 가족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그래서 인제 부모님하고 누님하고 나하고 였다가. 어...우리 어머님이 그, 이, 내 밑에 여럿을 낳자마자 그, 잃었어요. 그러다가 나하고 내 여동생하고 딱 열두 살 차이야, 여럿을 중간에 잃고. 그 여동생 하나에 남동생 둘, 그래서 우리는 그, 3남 2녀인데 나는 사실은 누님하고 둘이만 형제인 것 같고 쟤들은 동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게 우리 막내동생은 사실 내, 나하고 20살 차이가 지니까 아들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그래서 어...그 중에서 인제 우리어머님이 단양으로 이사갈 적에 그 산골로 가면 어떻게 애들 공부를 시키려고 그러느냐고 그러셨는데, 그 아니나다를까 가서 우리 누님이 참 공부를 잘하셨는데 그 중학교 입학을 했는데 보내질 못했어. 합격을 했는데 보내지를 못했다고. 그래서 그거는 우리어머님이 사실은 아들을 학교를 보내야 되기 때문에 나를, 둘을 다 공부를 시키기 어렵다 해서 아마 그, 못 가게 하셨던 것 같애. 그래서 누님은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그냥 인제 결혼을 하고. 우리 집안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 하나지. 면담자 : 그럼 그 단양으로 옮기셔가지고는 국민 학교 이름 기억 나시나요? 구술자 : 어. 단양에서 단양 국민 학교, 그 다음에 단양 중학교.그렇게 단양에서. 우리집은 읍내에서 한 놎재라는 산이 아주 높은 산이 있는데 그걸 넘어서 한 십리쯤 더 들어가서 산골에 사는데 지금 어떻게 다녔는지 몰라. 그 국민 학교 1학년, 저 1학년, 3학년 때 갔으니까 3학년 4학년때 갔으니까 거기 1학년 아이들도 그 놎재를 넘어가지고, 그 칼바람 부는 놎재를 넘어가면은저쪽에 한강에서 그냥 칼바람이 몰아 오는거야 근데 그거를. 지금보다 그땐 굉장히 추웠어. 그 추운 속에 놎재를 넘어가기고 국민 학교 아이들이 그 4킬로 5킬로 넘는걸 걸어가지고 가서 학교를 다니고. 그때는 학교 다니는게 지금 아이들은 도저히 상상을 못할 거야. 그 어려웠을 때. 그 국민 학교를 어.. 그 인제 나는 이제 그 3학년 때 전학을 갔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 인격 형성에 상당히 그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내가 가기 전에 이쪽에, 충주에 살때는 반장을 하고 일등을 했는데, 이쪽으로 갔는데 그...가니까 전학생이지, 전학생이니까 공부는 잘하니까 공부는 일등을 하는데 반장은 못하는거야, 왜냐면 이건 타교에서, 타지에서 온 아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것이 그때 그 국민 학교 3학년에서 6학년 다닐 때에 고것이 내 인격 형성에 굉장히 영향을 미친 것 같애. 어떻게 미쳤냐면은 그러니까 이쪽에서 내가 완전히 리더로서의 역할을 못한 거야, 전학생이라서. 그러나 그 내가 공부를 잘하고 그 하튼 리더의 지위에는 있는 거지. 그래서 나는 그때 그러니까 주류는 못돼. 주류가 못되고. 또 비주류도 아니고. 그래 모든 사람을 함께 이렇게 어울려 사는. 그런데 고때에 삼년 동안에, 내가 지나오면서 내 삶을 보며는 고때의 고것이 내 삶에 굉장한 역할을 미친 것 같애. 그러다가 국민 학교하고 중학교, 인제 중학교 들어가서는 단양 국민 학교 출신들이 인제 주류가 되니까 그 단양 중학교,, 또 촌에 아이들이 인제 왔으니까 촌 아이들 보다는 단양 국민 학교 출신이 제일 이제 주도적이지. 그래서 이제 중학교 들어가서는 인제 내가 다시 반장을 하고 이제 나중에, 그 당시에는 학도호국단이라고 그러는데 학생 회장을 하면서 이제 주류 쪽으로서 활등을 했지만 그러다가 다시, 하여튼 우연한 계기로 해가지고 고등학교를 혹시 아나 모르겠는데, 사범학교라고 있었거든? 사범학교라는 거 모르지? 면담자 : 예. 구술자 : 교육대학은 알지. 면담자 : 예. 구술자 : 교육대학의 전신이 인제 각 도에 두 개씩, 인제 도청 소재지하고 그 나머지 지역에 하나 해서 각 도마다 사범학교들 두 개씩 있었었어. 있는데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마치면 국민 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는 거야. 그러다가 인제 내가 61년에 졸업하는데 63년에 그게 교육대학으로 바뀌었어. 그 고등학교 과정이 아니고 인제 각도에 두 개씩 있던 사범학교를 그, 폐지하고 도청 소재지에다가 교육 대학을 맨들어서 에, 이제 고등학교 마친 사람들이 들어가서 초급대학을 마치면 국민 학교 교사가 되는 거야. 그런데 이 사범학교를 그, 우연하게 해서 갔지. 근데 사범학교를 갔는데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사범학교를 간 거야 면담자 : 어, 충 충청도가 아니라요? 구술자 : 어 충청도 아니, 그러니까 거기 가서도 공부를 잘하고 하니까 이게 리더급에는 속하는데 이게 경상도 아이들 속에서 충청도 학생은 나 하나 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이게 그래서 그러니까 완전히 주류의 리더는 못 되는 거야. 그래서 그것이 내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특별히 한 그룹 하고 저 이렇게 그룹의 리더가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활동하는 그러한 역할을 내가 평생을 해왔거든 그래서 고런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이 상당히 이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이 되지. 면담자 : 고등학교를 충청, 충북이 아닌 경상도 쪽으로 안동 쪽으로 가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술자 : 그건 뭐냐면 우리,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집에서는 어...대학을 보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대학을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중학교 다닐 적에 뭐 입시 공부를 한다거나 그런 건 없어. 그리고 나는 어...학교 다니면서 그 평생을 사실 공부를 별로 안 했어. 그냥 학교 갔다 오며는 그냥 가방은 팽개쳐 놓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지게를 지고 가서 이렇게 풀을 베다가 이게 소를, 소를 먹이고 하는 농사일을 했지. 농사일을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다가는 장작을 만들어서 그 나무 장사를 한 거야. 나무를 지게에 지고 가서 시장에 가서 판 건 아니고. 겨울에는 눈이 쌓이니까 산에 올라가서 큰 나무를 베는거야. 지금 같으면 불법이겠지만 큰 나무를 베서 가지를 다 치고 그걸 쇠로 이렇게 해서 끈으로 해서 비탈지니까 그걸 끌고 내려 오는 거야. 그러면 아침에 가가지고 큰 나무를 하나 베와서 토막을 쳐가지고 장작을 패 놓으면 그게 아주 몇 지게가 나오지, 하루에. 그래서 처마 밑에다가 아주 차곡차곡 재놓는거야, 장작을 갖다가. 중학교 내내. 그러면 인제 그거를 장사꾼한테 부르면 장사꾼이 마차를 가져와서 이게 그걸 장작을 실어가지. 그래서 중학교 다닐 때 사실은 여름에는 농사일을 하고, 겨울에는 나무 장사를 하고. 그리고 나는 촌에서 커봤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그리 안 하는데, 그 당시에 농사꾼들 중에서 제일 상 일꾼이 뭐냐면, 논을 이렇게 갈아엎어가지고, 쟁기질해서 갈아엎어가지고 그 논에다 쟁기질 하기 전에 풀을 쫙 깔고 그거를 갈아엎어가지고 어, 거기다 인제 물을 대는데 물을 대서 그것이 갈아엎은 것을 평안하게 해야하는거야. 왜냐하면 그걸 평안하게 고르지 않으면 물을 넣으면 높은데는 물이 안 가고 낮은 데는 깊고 그러니까 그거를 그거를, 제일 그 최고의 농사 기술자는 그거를 인제 쓰레질이라고 해가지고 쓰레를 가지고 소가 끌면 그걸 가지고 이래 가지고 돌아가지고 그 논바닥을 전체가 평안하게 하는 게 농사꾼 일중에서 가장 기술을 요하는 거야, 내가 그 쓰레질을 하는 농사꾼이었다고. 그게 거 굉장히 어려운데. 그렇게 나는 농사일만 하고 그러면서 어, 이 해방 직후에는 이 아이들에게, 너 앞으로 커서 뭐가 될래 하면 다 대통령이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꿈을 가진 아이들을 전부 다 대통령이 된다고 그래.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인제 군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니까 그 다음에는 인제 장군이 된다고 하는게, 대대통령과 장군이 우리 어린 시절에는 꿈을 그게 어린이들의 꿈이었다고. 그게 나도 마찬가지로 나도 크면 대통령이 된다고 생가하고 그러면서 중학교 가서는 이게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중학교에 가서는, 대학을 갈 형편은 안 되니까, 육군에서 그 당시에는 아주 가장 인기 있는데가 육군 사관학교를 가는거야, 육사를 가가지고 인제 장군이 된다고. 그러니까 농사일을 하면서 공부는 잘 하니까 육사 가는 것이 당연히, 그 길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아버님이 하루는 인제 그 마실 이라고 동네 마실을 갔다 오시더니, 안동사범학교 입학원서를 가지고 오셨어. 근데 이제 그, 내 같은 반에 있는 애가 안동사범학교를 가겠다고 원서를 사다놨는데 걔는 성적이 안 되가지고 쳐봐야 안 되니까 원서만 사다놓고 아이구 저, 소용없다고 그러니까 안 간다고 그러니까 그거를 인제 동네에 나갔다가. 참 우연한 것이, 계기가 인생을 바꾸는 거야. 그래서 그 원서를 가져와서 야, 너 이거 한번 시험이나 쳐봐라. 근데 사범학교는 이게 국, 국립이었어. 국릷이니까 요새 말하면 등록금이 없고 돈을 안 받아. 안 받고 학생들한테 매달 그, 그때 그걸 뭐라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하튼 한 달에 지금 현재 미국 돈으로 하면은 한달에 뭐 한 200불 정도를 돈을 줘. 그러니까 저, 돈을 안 받고,등록금을 안 받고 한 달에 200불씩 학자금을 준다고. 누구나 똑같이. 그러니까 사범학교는 그 당시에는 어, 전, 전국의 수재들, 서울도 마찬가지고 전국에서 각지 지방의 수재들은 전부다 사범학교를 가는 거야. 근데 거기를 가라고. 그러니까 아버님이 그러니까 거기 또 졸업하면 국민 학교 교사로 발령이 100퍼센트 나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 한번 시험이나 한 번 쳐보라고. 그러니까 나는 시험공부도 안 하고 농사짓고 그러다가 거길 쳐서 인제 거길 가게 됐지, 가게 된 게. 그래서 인제... 면담자 : 육사, 육사의 꿈이 있으셨는데 구술자 : 육사의 이제 그거는 막연히 인제 앞으로 육사 가가지고 장군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냥 사범학교 시험 쳐보라니까, 사범학교 들어가기 힘들거든. 사범학교 들어가면 그거는 경사야. 그 학교에서 그, 그러니까 각 중학교에서 뭐 일등 하튼 한명정도야 사범학교를 가지 그, 그렇게 쉬운 덴 아니거든. 그러니까 사범학교는 가는 걸 생각을 안 하고. 교사가 된다는 걸 생각을 안 했으니까. 그런데 우연히 그냥 친구가 사다 놓은 입학 원서를 가지고 시험을 쳐서 들어갔죠. 그런데 나는 국민 학교 때는 항상 일등을 하고 그랬지만은 중학교 들어가면서는 일등을 못했어. 왜 못했냐 하면 시험 치는 과목은 전부다 내가 일등인데, 미술, 음악, 체육, 이거는 시험 치는 것과는 관계가 없거든. 그러니까 이거는 일등을 못하는 거야 그러니ᄁᆞ 이제 항상 그, 국민 학교 때는 담임 선생님 혼자 하니까 공부 잘하는 애는 미술 인제 체육도 그냥 점수를 잘 줘가지고 공부 잘하면 일등을 시키는데. 중학교 가서는 선생님이 다 다르잖아. 그러니까 시험치는 것은 항상 내가 매월 월말 고사니 뭐니 치며는 일등인데 나중에 학기말이 되며는 반에서 한 5등, 6등. 뭐 그래가지고 전교, 전교에서 우리 네 반이었으니까 전교에서 뭐 한 20등 정도밖에 못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사범학교를 들어갔어. 시험을 치는건 잘하니까 합격을 해서 들어갔는데 뭐 입학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들어가서 그니깐 뭐 들어갔으니깐 그냥 뭐 나는 교사가 된다는 걸 생각을 안했으니까 별로 이렇게 익사이팅하지는 않고 그냥 왔다갔다 하는거야. 거기다 경상도 애들 복판에 충청도애 혼자니까. 근데 일 학기 성적이 나왔는데, 근데 인제 그 우리 담임샘이 너희 저, 사범학교는 아주 정원제야, 딱 오십명 씩만. 한반에 오십명씩만 있고, 있는데 정원젠데 선생님이 각자 자기 학교에서 일등한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니까 50명 중에 반이 넘어. 약 30명이 자기 학교에서 일등한 애들이야 그 다음에 한 20명 정도는 2등, 3등. 나는 우리 반에서, 뭐 한 6등, 7등 하다가, 그 다음에 전교에서야 한 20등 정도했으니까. 아이구 얘들 속에서 내가 뭐 공부를 가지고 이케 뭐할 수는 없겠다 생각을 했는데 아, 일 학기 성적이 나왔는데 우리반에서 3등을 한 거야. 그래서 이야, 얘들 봐라, 이거 저희 학교에서 반 이상이 일등을 했다고 그랬는데. 그래가지구서는 일학년 일학기때 내 평생 처음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어. 일학년 일학기때 열심히 했더니 내가 완전히 일학년 일학기 일등이야. 어. 그 수재들만 모인 데서. 그래 저, 이제 열심히 하니, 그렇게 열심히 한 이유는 뭐냐면 우리 사범학교 애들은 공부를 잘 하는 애들이 모였는데 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거든 그러니까 이제 대학을 가기를 원하는데 대학을 못가고 이러니까 우리 이제 경상 북도에서는 사범학생들의 꿈은 대구로 발령을 받아서 야간 대학 다니는 게 꿈이야. 대구 발령이. 그거를, 대구만 발령을 받으면 머리들이 다 좋으니까 대구에 있는 대구대학, 청구대학 뭐 이런 대학이 야간이 있으니까 야간 대학에 가서 야간 대학을 다니고 나서는 이제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할 수 있으니까. 우리 사범학교 학생들의 모든 꿈은 근데. 근데 대구발령 받으려면 이게 성적순으로 받는거야. 근데 성적 순인데 3년간 우등을 하고 그 중에서 일등을 하면 금시계, 졸업할 때 금시계를 받고 대구 발령이 그냥 개런티(guarantee)가 되는 거야. 보장이 되는 거야. 그래서 야, 이거 한번, 일등은 삼년 일등 이 정도라면 내가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이 정도라면 한번 해봐야겠다 하고서 해가지고 단연 일등을 했어. 그런데 나중에 학기말 일 학기하고 이 학기를 다 평균을 하니까 우리반에서 3등이고 전체에서 6등을 한 거야 그러니까 네반이니까 네반에서 일등 한명씩 하고 우리반은 원체 성적이 좋으니까 우리반에서 두 명하고 다섯명만 우등상을 준거야. 근데 나는 6등이라서 그만 짤려버렸어. 3년간 우등을 하고 그 중에서 일등을 하면 인제 금시계를 받고 대구를 가는데 고만 그게 아차상으로 그걸 놓쳐 버린거야. 거기에서 인제 대구 발령받아가지고 야간대학간다는 꿈이 사라진거지. 그니까 나는 좀 성격이 좀 나는 뭘 하면 아주 올인을 해버려, 올인을. 평생 안 하다가. 2학년에 올라가서는 완전히 딴사람이 된 거야. 완전히. 근데 우리 사범학교는 그 당시에 인제 미국에, 전쟁 직후라노니까 미국의 시스템이 들어온거야, 우리 한국에. 교육 분야에서는 인제 피바디 대학(Peabody Institute)이라고, 미국에 피바디 대학이라고 있는데 거기 피바디 대학의 사범학교하고 한국의 문교부하고 해가지고 피바디에서 이게 그, 파견들 나와가지고 미국 교욱을 우리, 그 중에 시범학교로, 이게 전국의 몇 학교가, 한 세 학교가 이렇게 정해져가지고 피바이에서 이게 교수진들이 오고 피바디에서 돈을 보내고 아주 특별한 교육을 시키는거야. 미국식 교육을. 그, 그래서 우리 학교는 인제 다른 학교는 사범학교는 인제 졸업하고 나며는 국민 학교 교사가 되니까, 다 선생님. 학생들을 바로 3년 후면은 선생님 될 사람들이니까 고등학교에서부터, 사범학교에서부터 인격적으로 대우를 해 리스펙트(repect)해. 그런데 특히 우리 학교는 전국에서 세 개밖에 없는 피바디 그 시범학교라보니까 카운슬링 제도가 인제 처음으로 우리 한국에 도입이 되고. 모든 것이 아무튼 미국식으로 해가지고 머리도 기르고, 머리도 그리고 복장도 자기 맘대로 입는 거야. 물론 교복이야 있지. 교복이 있지만. 그리고 학생들한테 체벌이 없고, 그 하여튼 미국의 학교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야. 근데 그러니까 이제 2학년 올라가면서는 교과서를 하나도 안 샀어. 글고 신문배달을 시작했어. 신문 배달을 하구서는, 신문 배달을 일찍 하고 나면은 부지런히 뛰어서 신문 배달을 하면 다 하고 지각 안 할수도 있다고. 신문배달 한다고 하고서는 그, 매일 지각하는거야. 매일 지각하고 교과서를 하나도 안 사고 신문 배달 하고 나면 신문 한 장만 또르르 쥐고 손에 쥐고서 고 다음에 머리를 길러가지구선 모자는 뒷주머니 이게 집어놓고. 다른 애들은, 사범학교에서는 전부 모범생이야. 왜 모범생이냐면 전부다 공부 잘하는 일등하는 애들만 모였으니까 모범생인데다가 학교 성적을 잘 받아야 성적순으로, 대구는 아니라도 좋은 데를 가고, 그 저 성적이 나쁘면 저 산골로 가고, 섬으로 가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성적순이다보니까 전부 다 이렇게 그, 본래 모범생들이 모여가지고 이 성적을 잘 받으려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나는 그냥 2학년 올라가서는 그리고 위에 옷을 저기에 아마 나올거야. 여기 사진에 나오는데, 그...보며는 다른 아이들은 다 교복을 입고 있는데 여기. 나만 군복을 물들여가지고 입고 다녔어 군화를 신고 운동화 척 접어 신고. 다른 아이들하고 일부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 같으지? 그러니까 그렇게 그 매일 하튼 군복 물들여가지고 입구서는 운동화 척 접어 신고 터덜터덜 가는 거야. 앞에서 조회를 하고 교장선생님이 단상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그냥 교문에서 휘적 들어가며는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저기 교문에 들어오는 놈 저놈 학생이냐고. 교장 선생님이 훈화하고 있으면 쫓아가서 뒤에 가서 서야되잖아. 그러니까 처절처절 들어가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저놈이 학생이냐고 뭐냐고 하니까, 그냥 가다말고 탁 꺾어가지고 90도로 꺾어가지고 처절처절 교실로 들어가는거야. 어. 그러니까 교장선생님이 막 이렇게 뿔이나고 그래도 야단은 못치는, 안치는거야, 그 학교는. 그렇게 한 석달을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 너는 가르쳐라. 나는 내가 키가 제일 큰 것도 아닌데 맨 뒷자리에 앉아서, 나 자리 바꿔 이래가히고 다른 애들 뒤쪽 중간 자리로 보내고 나는 맨 뒤에 앉아가지고 신문만 천천히 보고 앉아있는거야 신문만. 그 당시에 신문엔 한자가 많이 있으니까 그 신문에 있는 한자를 가지고 한자를 쓰고 앉아서 수업은 전혀. 만날 선생님이 일교시 시작하고 나면 더러럭 뒷문 열고 들어가서 뒤에 척 가서 앉아가지고. 하루는 그러는데 갑자기 조용해. 가만히 이래 보니까 선생님이 앞에서 그, 가르치던 선생님이 바로 옆에 와있는, 계시는 거야. 그래 일어서라고. 일어섰지. 그러니 선생님이 앞으로나가셔. 근데 그 선생님이 어떤 분이냐면 학생들한테 존댓말을 꼭 쓰시는 선생님이야. 누구한테 야단치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없는 사람이야. 꼭 예대하고. 상주 사람이라가지고 상주 사람들은 끝에 예자를 붙여서 해. 그러니까 이랬어예, 저랬어예, 하면서 그 학생들에게 존댓말쓰고 학생들한테 꼭 인격적으로 대하고 아주 아주 그런 그 양같은 분이신데 이분이 화를 못 참아가지고, 지학 선생인데 화를 못 참아가지고 앞에 가서 화를 억누르고 수업을 하려고 하다가는 책을 팍 찢어가지고는 내동댕이치고서는 수업 안 해도 좋다. 그러면서 인제 나를 한시간 내내 야단치시는거야. 그러니까 애들이, 내가 그럼 그걸 듣고 있어, 그냥 나갈려고 그랬더니 애들이 양쪽에서 콱 바지를 붙들고 쥐고 있어가지고 나가지도 못하고 선생님이 그냥 날 세워놓고 한 시간 내내 야단을 치니까 그냥 멍하니 있었지. 그 선생님 골자는 니가 지난 2학기때 시험을 치며는, 자기 시험에서 80점 넘게 받은 사람은 그, 지금까지 별로 없었다 이거야. 근데 너는 시험만 치면서 맨날 90점이 넘어가지고 너는 특별한 놈으로 내가 봤는데, 지금까지 너처럼 그렇게 하는 애는 없었다, 이거지. 근데 너는 공부를 아무리 잘하면 무슨 소용 있냐? 인간이 돼야지. 너 지금 하는 거 보니까 너는 인간이 되먹지 않았다말이야. 그래서 너같은 놈은, 너 같은 놈은 선생이 되면 안 되니까 너 같은 놈 필요 없으니까 학교에서 나가라고 그러면서 지금 나뿐만 아니라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너 때문에 지금 골치가 아파 죽으려고 그런다고. 그러면서 한 시간 내내 야단을 치시는거야. 아 그러고 나니까 나중에는 등줄기에서 땀이 차더라고. 처음에는 뛰어나갈려고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두 번째, 그담시간부터는 선생님이 들어오자말자, 그리고 내가 그 저 호적이 잘못되가지고 1943년생인데 1944으로 돼 있어. 호적에. 그러니까 우리 출석부를 나이 순서대로 하는데 내가 나이가 제일 작아. 그 우리 반에서. 근데 진짜로 제일 작은 건 아닌데. 그 한 애가 호적이 잘못되가지고 44년생으로, 모든 건 다 서류는 44년생으로. 그래 날 저 선생님들이 맨 끝에 가서 내 이름을 안 부르고 막내, 이래부르고 끝난다고. 그래서 출석을 부르고 그 나를 무슨 막내 일어서, 이 선생님들 매 시간마다 선생님들 들어오시면 일으켜세우니까 내가 너를 야단치려고 했는데 오범식선생님이 그, 내 야단을 쳤다고. 너 그럼 못쓴다고. 아, 이건 그냥 매시간마다 야단을 치는거야, 선생님들마다. 그래가지고 아 이게 풀이 팍죽어가지고 있는데 한 며칠, 한 이삼일 후에 우리 인제 그 나동성선생님이라고 하시는 그 교무 주임선생님이 그, 부르시더라고. 부르시더니 너 오범식 선생님한테 야단맞았지? 너는 그렇지 않아도 교무실에서 지금 너 때문에 이걸 지금 어떻게 해야되느냐고 선생님들 다 그러는데, 너는 대학을 가라. 너는 대, 저, 이게 국민 학교 선생을 할 놈이 아니니까, 너는 대학을 가라. 저는 우리집에서 나를 대학을 보낼 형편이 안 됩니다. 그랬더니 니가 대학을 가면 너희 부모님들이 못 보내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보내줄테니까 가거라. 그러면서 이분이 이북에서 월남을 하셨는데 월남을 하셔가지고 인제 동대문 시장에서 군복 물들여서 파는장사를 하시면서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그리고 인제 우리 학교 와서 일반 사회를 가르치면서. 인제 그 교무즈임까지 되신 분이야. 이분이, 너는 지금부터 공부를 해라, 그러시고 났는데 내가 인제 신문을 배달하는데 그 내가 신문 어느 집 배달 갔더니 그, 그집 아주머니가 매일 이렇게 나와서 이렇게 한 일주일을 날 보시더라고. 신문을 가면 그냥 던져 놓고 오는데 신문 가는 시간 되면 꼭 보고 그러더니 한 일주일 후에는, 너 우리집에 들어와서 가정교사 하라. 국민 학교 저, 5학년짜리 아들을 가르치라고. 면담자 : 선생님이 사범학교에 다닌다는 걸 그 아주머니는 알고 있었나요? 구술자 : 글쎄 모르지 하여튼 그랬는데, 나중에 생각을 하니까 학교의 선생님들이 아마 부모, 그 집이 사장이야, 그 한국 타이어라고, 한국벨트라고, 타이어가 아니고. 안동에서 그 당시에는 안동에서 제일 큰 공장이었는데 뭐 공장이래야 규모가 지금으로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안동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공장인데 그 집에 그 한국벨트 사장 거기 뭐 공장도 있고 집도 있고 그러는데. 그래서 그 집에서 들어오라고. 아마 내 생각에는, 확인이 된 건 아닌데 우리 선생님들이 아마 그, 그렇게 가정교사로 쓰라고 추천을 하셨으니까 나와서 이렇게 보고 그러고서 인제 나를 들어오라고 해서 그리로 들어갔지. 그리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신문 배달을 안 하고. 그 신문배달 하는 동안에는, 그 사범학생은 신문 배달하는 애들 나 하나 밖에 없어. 왜냐면 애들 전부다 공부하고 학교에서 이렇게 학자금도 주고 하니까 그걸 할 필요가 없는데. 그니까 이제 다른 학교 아이들, 뭐 상고 애들, 농고 애들., 농고 그 다음에 중학교 애들 이런 애들하고 하면서, 근데 그 신문 배달하면, 나는 그때 서울 신문을 배달하는데, 서울 신문 배달하는데 그 우리 팀이 있잖아. 그면 그 어떤 다른, 다른 동아일보 하는 애들 하고 인제 서로 신문 배달하며는 다니면서 구독 신청을 받아와야 되요. 근데 서울 신문은 정부 신문이니까 그 지국장이 이 집에 신문 갖다 넣어 하면 우리는 갖다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그 집에서 경향 신문 보던 어떤 집에서는 신문을 막 어거지로 가져다 집어넣으니까 다른 신문을 그만 끊어야 되잖아. 그러면 경향신문이나 뭐 동아일보나 이런 데 돌리는 아이들은 우리가 미워 죽겠는 거야. 우리 서울 신문 돌리는 아이들 때문에 자기 신문이 끊기니까. 그러면 인제 패싸움도 하고 막 강변에 가서 그쪽에 애들 하고 우리가 시비 붙으면 그 인제 이쪽저쪽 패싸움도 하고 말이야. 사범학생들이 인제 그런, 그런 건 인제 없어. 그 인제 농고 애들 뭐 저기 이런 애들이나 경안고등학교 이런 애들이나 인제 그렇게 하면서 패싸움하고 그러고 인제 돌아다녔는데, 그래서 인제 가정교사를 들어가면서 신문 배들을 끝내고 이렇게, 그러니까 나도 한번 대학을 가보자, 해서 우리 선생님이 그, 그 대학을 가도록 그래가지고 그 이후부터는 인제 조용히 141108 조재길01_00:43:58ㅇㅇㅇ하게 가서 그 입학시험 공부만 책을 가지고서 하면서 우리끼리 교무 주임이 전 선생님한테 다 얘기해가지고 ‘얘는 열외다’ 열외니까 전부다 그렇게 얘기해서 ‘우리 얘 대학 보내자,’ 이래가지고 선생님들이 내 주위에 앉아가지고 수업 안 듣고 그냥 하는 거를 전부다 공, 공인을 다 했어. 그래서 그 2학년 때부터 인제 나는 대학 입학시험공부를 했지. 혼자서. 그니까, 근데 우리 사범학교는 대학 가는 공부를 할려면 혼자 해야해. 왜냐면 왜 학교에서 그렇게 열외를 시켜주냐면 사범학교 공부를 해가지고서는 대학을 못가. 왜 못가냐며는 다른 데는 영어 수학 그그그 국어를 일주일에 일곱시간, 여덟시간 가르치고 음악, 미술, 체육은 뭐 한 시간 정도씩 밖에 안 넣잖아. 헌데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은 일주일에 세 시간씩 밖에 안 가르치고 미술, 음악, 체육은 일주일에 일곱 시간씩 가르치는 거야. 학교 국민 학교 선생이 될 사람들이니까. 거기다가 교육과정과정이 교육 과정, 뭐 교육 철학, 뭐 뭐 이런 거, 이런 거 교직 과목이 또 인제 있으니까 이게 영어, 수학, 국어는 절루 가라야, 그러니까 교직 과목하고 미술 음악, 체육을 오히려 위주로 가르치는거야.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얘 대학가야 되니까, 우리 사범학교 교육 받아가지고는 얘 대학 못 간다, 그러니까 선생님들 그냥 얘는 그냥 학교 성적은 그냥 뭘 어떻게 나오던 간에 저, 졸업만 시키고 얘는 대학 가도록 두자. 그래가지고 200명 중에 160등씩 하고 그랬어. 그러면서 학교 공부는 안 하면서 열외를 시켜줘 가지고 혼자 인제 대학 입시 공부를 했지. 그 2년, 2년 동안 그 인제 그 한국 벨트 사장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나중에 3학년 때는 인제 나와서 자취를, 인제 입시공부만 전적으로 하기 위해서 3학년 2학기 때는 입시공부를. 그러니까 그런 사범학교는 교생실습도 나가야 되고 별거를 다 하는데 완전히 다 열외를 시켜줘가지고. 그래서 어...그 당시에 인제 ????향학????이라고 하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고, ????학원????이란 잡지는 일반 인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 잡지고 ????향학????은 입시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그런, 입시 지도하는 잡지인데 거기에 에...인제 음악, 미술, 아니 영어 수학 거기 문제를 내면 내가 그걸 풀어서 보내면 이제 거기 이름에서 점수가 이렇게 나오고 내지 책에서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책을 공짜로 보내주고 그러는데 거기 나중에 나오는거 보면 전부다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뭐 이런 데, 광주 일고 뭐 이런 데만 나오고 나오는데 애들 뭐 80점, 몇 점, 이렇게 그러니까 몇 점 우수한 성적이 나온 애들 그 이름이 나와. 근데 사범학교 출신 내 이름이 거기 만날 나오고 혼자 그렇게 공부를 해가지고 인제 대학을 가게 되지 면담자 : 대학은 어디로 가셨나요. 구술자 : 그니까 인제 이 선생님이 고려대학을 나왔으니까 나는 고려대학이 서울대학이 있는 지도 몰랐어. 나는 그냥 무조건 고려대학을 가는 걸로 생각을 한 거지. 고대 법대를 가가지고 고시공부를 하는 걸로. 그래서 어...그니까 고대 법, 고려대학교 가는 것만, 국어 영어 수학 그 다음에 그, 국사 일반 사회. 이 다섯 과목만 공부를 하는 거야, 고대는 그 당시 그랬어. 그래가지고 나는 다른 거 생각할거 없어, 우리 선생님이 고대 법, 나오셨으니까 고대 법대 가는 걸로. 고대가 최곤 줄 알았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했는데, 3학년 입학 그, 인게 학교를 어디로 갈 것인가 정할 때 그때 인제 우리 아랫동네에 그, 우리 우리 북상리, 북하리가 있는데 우리 북상리는 그, 그 집은 그러니까 옛날에 그, 이 구한말에 에...단양군의 원이 오면 이, 우리 북상리 북하리를 갖다가 뒤뜰이라고 그래. 산너머 뒤에 있는 뜰, 쪼끔 논이 있는, 산골에 논이 좀 있는 데라고 해서 뒷뚤이라고 그러는데 뒤뜰이라고 그러면 북상리 북하리를 얘기해. 뒤뜰에 성씨하고 조씨 댁에 가서 그걸 인사를 하지 않으면 원노릇을 못한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북상리는 우리 조씨, 그 집안의 동네고 북하리는 성씨네 동네였었어. 근데 인제 우리 집하고 성씨네하고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게, 구한말에 인제 우리 고조부대에서 낙향을 해가지고 하시면서 우리 고조부대에서 유언이 뭐냐면 자식들 공부시키지 말아라. 공부시키면 일본놈들 꼬숫가리 노릇한다. 이래가지고 우리집은 학교를, 저 이제, 신학문하는 학교를 보내질 않았어.그러니까 우리 집안이 만석꾼 집안이었는데 학교를 안 보내니까 전부다, 이 뭐해, 술 먹고 그 투전이나 하고 그그그, 그러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우리 할아버지대에 완전히 망했어. 망해가지고 우리 집안 전체가 그 동네에 있던 그 모든 것을 다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전국 각지로 흩어져버렸어 우리집안은 뿔뿔이. 근데 우리 할아버지만 그냥, 우리 할아버지가 집안에서 우리가 종가집이 아니야, 종가집에서 다 팔아가지고 날라가니까 오두막집에, 그러니까 우리 동네에 맨 가운데에 미음자 집에 큰 게 있는데 이 집에 인제 우리 종가집이고 그 주변에 인제 우리 인척들이 살고 그 나머지는 인제 일하는 뭐 하인들 집이고. 이게 우리 원동네야. 다 가고 나서 우리 할아버지 혼자, 우리 아버지 형제 저, 여섯 데리고 그, 다 팔고 가니까 아무것도 없는거야. 그니까 우리집만, 우리 할아버지만 여기 남은 거야. 그래가지고 우리 할아버지하고 할머니는 양반집 그, 막내로서 그러니까 생활능력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이 그 일찍 때 우리 아버님이 처음으로 국민 학교를 나온 사람이야. 우리 아버님이 가만히 숨어가지고 어...저 학교 저저저 갈 때는 산에다가 책가방을 숨겨놓고 학교 갔다 와서는, 학교 갔다 와서는 거기다 놔두고서는 와서 일을 하고. 이러면서 우리 아버님은 국민 학교를 졸업을 했어. 우리 집안 전체에서 국민 학교 나온 사람이 첫 번째야, 우리 아버지가. 이 성씨네는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일본 유학을 보내고 이러게 다 했어. 그런데 해방 이후에 우리 집안은 좌우익에 연루가 안 됐어. 무식꾼들이니까. 그래가지고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도 한사람도 비명횡사한 사람이 없어, 우리 집안은. 그러니까 우리 부모, 조상들이 유언을 남겨가지고 한 사람도 이게, 그러니까 무지랭이로 살았어도 비명 횡사 한 사람이 없는거야. 이 성씨네는 일본 유학보내고 다 해노니까 이 집안의 사위가 소위 말해 가지고 빨갱이 사위가 하나 들어와 가지고 이 집안이 전부다 이게 빨갱이 집안이 되가지고 해방 이후에 이 집은 완전히 풍지박산이 된 거야, 이 집안은. 뭐 완전히 다들 서리를 맞았지. 근데 그 중에 인제 한 분이 일본에 가서 와세다를 졸업한 양반이, 와세다를 나왔으믄 해방 후에 뭐 대단한 거 아니야? 그런데 완전히 집안이 그러니까 겨우 살아남아가지고 대학에서 교수를, 저 지금의 명지대학인데 그 당시엔 이름이 뭐였는지 몰라. 거기에 교수를 하는 분이 계셨어. 근데 그게 우리 아버님하고 국민 학교를 같이 다닌 분이야. 이분이 그, 고등학교 3학년때 인제 입학 인제 원서를 사고 그래야 할땐에 오셔가지구서 너 어디 가냐, 그래서 저 고대 법대 갑니다, 그랬더니 야, 대학을 가면 너 같은 애를 서울대학을 가야지 왜 고대 법대를 가냐, 서울대학을 가라. 서울대학이 어떤 대학인데요? 그러니까 서울 법대란 데가 있는데 고대 법대하고는 천양지차 이거지. 근데 그해 보니까 그해에 그 전해까지는, 그 해에 서울대학교 입학 그, 시험 제도가 서울 대학교 제도가 완전히 바뀌었어. 그래가지고 그 전에는 이 법대는 독어 불어 중에 반드시 하나를 반드시 해야 해. 그런데 그 해는 입시 원서, 입시 요강이 신문에 나고 했는데, 서울 법대도 독일어를 안 해도, 독어 불어를 안 해도 되. 근데 사범학교는 독어 불어를 가르치는게 어딨어, 제 2외국어는 없는 거야. 그래 나는 그니까 서울 법대를 갈라면 독어 불어를 해야되는데, 필수로 해야되는데, 그래서 안 된다고 그랬는데 아, 이번에 입시제도가 바뀌었다고 한번 해보라고. 그래 보니까 신문에 나고 보니까 그래. 그래서 국어 영어 수학에다가 과학에서 두 과목, 그 사회과목에서 두 과목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사회 과목은 역사하고 내가 일반 사회를 했으니까 되고. 그러니까 이 과학 과목만 두 과목을 하면 되는 거야. 어, 서울 법대를 갈 수 있는 거야. 그래가지고 입학 원서를 신청해놓고 한달 동안에 물리하고 생물 참고서를 갖다가 한달 동안에 그냥 그 삼년 내내 공부 안 했던 물리 생물을 그냥 파서 했어, 저저 한달 동안에. 그래가지고 입학원서를 딱 왔는데 신문에 발표된 대로 그대로인데 법대만 독어 불어를 해야했는거야. 법대만. 그래가지고 그래 인제 교수님한테 ‘아 이 법대는 독어 불어를 해야된다’고. ‘야 그러며는 사대 일반사회를 쓰면 거기도 고시 패스를 잘해. 사범 거기는 법대는 아닌데 사범대학교 일반 사회과면 거기 정치, 경제, 사회, 다 가르치니까 거기를 가면 된다고. 그래가지고서는 어...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대 일반사회과를 친거야. 사대 일반사회과. 그래서 아, 그러면 금년에는 사대 일반 사회과를 쳐야지, 연습 삼아 치고 내년에, 일년동안 나는 뭘 하면 그냥 바짝 하면 되니까 일년 동안 독일어 공부를 해가지고 내년에 법대 간다고. 그리고 그해에 사대 들어갈 생각을 한 게 아니고 서울대 연습삼이 시험을 쳐본다고 쳤지. 면담자 : 그 대학에 들어갔을 때 집에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어...우리집에서는 보낼 형편이 안 되니까 그래도 우리 어머니가 여장부야. 우리 어머님이 그, 선생님이 그렇게 얘기한다니까. 우리도 어떻게든지 너 하면 서포트 하겠다고. 그래가지고 우리 어머님이 아주 억척을 떠시면서 어...지금은 아마 한국에서 단양마늘이라고 하면 유명할거야. 단양마늘이 그 아주, 단양은 마늘의 고장이라고 유명하거든, 지금. 근데 그 단양 마늘의 시작이 우리 어머니가 시작을 하신거야. 그 당시에는 우리 인제 고 뒤뜰이라고 논이 조금 있었었어. 아주 뜰이 넓은 건 아니고, 호남지역처럼 뜰이 넓지는 않고 쪼그만 한 뜰이 있는데 거기에서 겨울에는 보리를 하고 인제 여름에는 그, 벼농사를 하고 그랬는데 그 우리 어머님이 거기 처음으로 이 마늘을 씨를 갖다가 논에서, 마늘은 인제 밭에서만 하는 걸로 생각을 했었어. 밭에서 하니까 마늘이 아직 작고 그런데 이 논이면 토질이 좋잖아. 근데 그 마늘을 갖다가 논에서 보리를 안 심고 논에서 심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마늘씨를 뭐 백 접을 한다고 그러면 한 접이라는게 엮어가지고 그걸 백개씩을 마늘씨를 한거야. 우리 있는 논 얼마 안 되는 거를 전부다 마늘 농사를 한 거야, 우리 집에서. 그게 마늘, 논에서 마늘을 시작해서 그래가지고 그것이 보리농사보다 훨씬 순득이 놓은거야. 그래가지고 우리 어머님이 내 대학을 보내려고 마늘 농사를 시작을 하신거야. 그래가지고 그 수입이 굉장히 좋거든 뭐 이건 마늘은 마늘쫑이라는 것도 뽑아서 팔고, 마늘 잎사귀도 뽑아서 팔고, 마늘은 마늘대로. 버릴 게 없는 거야. 그래가지고 단양에서 마늘 농사를 우리 어머님이 시작해가지고 그게 뒤뜰 전체가 마늘밭이 돼버렸어. 어, 우리 어머님이 시작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우리 어머님이 그 마늘을 해가지고 그거를 가지고서는 머리에 이렇게 이고서는 원주로, 영주로 기차를 타고 중앙선 타고 다니시면서 그 하튼 한푼이라도 더 받겠다고 그거를 가지고 해서 우리 어머님이 하튼 니가 간다면 어떻게든지 서포틀 하겠다. 그래가지고 인제 인제 사대 일반 사회과를 시험을 쳤는데 이게 나는 뭐 갈 생각을 안 했어. 그러니까 이 우리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제 4.19가 나고 인제 1961년 5.16 나던 해에 인제 그 사대를 들어갔지. 근데 입학, 안 그저 일반사회과를 안 가고 한해 재수를 해가지고 법대를 가려고 생각을 했는데 법대를 갈려고 생각을 했는데, 신문에 그, 그 당시에는 서울대학교 그, 저, 이렇게 수석 뿐만 아니라 각 과의 수석도 신문에 이름이 났어. 신문에. 신문에 서울대학교 인제 수석 합격자들 인제 각 과별로 전체 수석은 누구, 그 단과대 수석은 누구, 뭐 이렇게 과별 수석은 누구고 이게 신문에 이름이 났어요. 이 이름이 나니까 이게 뭐 완전히 고향이고 사범학교에서 경사가 난 거지. 고게. 면담자 : 과 수석으로 들어가셨나요? 구술자 : 과 수석인데 과수석이고 내가 사대에서는 전체에서 2등이고 그러니까 이게 벼락치기로 물리 생물 한달 두달 만에 그냥 참고서 달달 외워가지고 하고 인제 혼자 독학을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그 사대 전체에서는 2등인데 과 수석으로 하여튼 어떻게 됐든 신문에 이름이 난 거야. 그러니까 그 우리 어머님이 어떻게든지 그 입학, 그 사대는 등록금이 굉장히 싸. 서울대학이 등록금이 싼데다가 그 중에 사대는 거의 몇푼 안 되는 거야. 사범학교는 돈을 주고 했지만 이 사대도 돈을 학생들한테 줬어. 등록금, 등록금이 아마 없고 학생회비만 받았던가, 그래. 그러고 돈이 조금 나오고. 그래서 사범대학이 이제 싸고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써포트 할 수 있고. 등록금을 하튼 마늘 농사를 지어가지고 등록금을 마련해 주셔가지고 서울에 이제 올라갔지. 그래서 신문에 나는 바람이 인제 입학을 한 거야. 입학을 했는데, 서울에 갔는데 인제 그때 아마 대학이 사월 달에 개학을 했을 거야. 지금은 3월달에 개학을 하지. 3월, 9월에 개학을 하는데 그 당시우리 입학을 할 때는 4월달에 개학을 했어. 근데 인제 사범대학에를 들어갔는데 난 완전히 촌놈이지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는데 내 중학교 동창 하나가 서울에 가가지고 버스 회사의 그러니까 사환으로 있었었어. 버스 이게,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거기에 사환으로 있으면서 걔는 에...인제 밤에 사무실에 의자를 이렇게 놓고 자는 거야. 그, 그러면서 야간고등학교, 동대문 상고를, 나는 인제 졸업을 했는데 걔는 그때 아직도 2학년에, 나중에 인제 고등학교를 못가다가 서울 올라가가지고 버스회사에서 이렇게 하면서. 처음엔 인제 걔하고 버스회사에서 의자, 회사에서 잤지, 자면서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했는데 들어가니까 인제 사범대학에서 그 중에서 이게 일반 사회과가 사범대학 운동권의 중심이야. 사범대학 운동권의. 그리고 사실 서울 대학에서 사실 서울 문리대의 정치외교학과 문리대가 운동의 중심이었지만 사범대학이 문리대에 못지않게 운동권의 중심이야. 그런데 인제 그러니까 서울대학교의 운동권의 주류에 상당한 역할을 하는 일반사회과의 수석이 되어노니까 내가 각 운동 단체들의 포섭대상의 1호야. 그래가지구 인제 들어갔더니 뭐 선배들 와서 너 우리 단체 들어라, 우리 단체 들어라. 그런데 그러니까 뭐 그러냐고,. 여기 불려 다리고 저기 불려 다니고. 그러면서 하튼 뭐 선배들 만나서 인사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랬는데 한 달 16일 만에 5.16이 난거야. 그러니까 내가 서울에 그 대학에 들어갔을 적에는 저, 이 4.19는 그 다음 해니까 이 학생 운동이 전 대학가에 이 열풍이 대단 했어. 그래서 인제 학생 운동이 본격적으로 4.19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학생운동 방향이 인제 남북 통일 문제로 가가지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말이야. 그래서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들이 만나서 회담을 하자고, 그것이 막 우리 대학의, 그러니까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면서, 4월달 개학을 하면서 그게 아주 핫이슈가 돼서 하튼 전 대학가가 그냥 들끓는 거야.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그러다가 한달 16일 만에 그냥 전부다 완전 찬서리를 맞은거지. 그러니까 4.16, 5.16이 나니까 너도 숨어라 이거야. 그래서 나는 사실 운동권 모임에도 나가보지도 못했어. 나가보지도 못했는데 이 선배 저선배들하고 불려다니면서 뭐 얘, 어쩌고 이랬는데 거기 가서 이게 1학년 간부, 1학년 간부인 이름으로 이 단체에도 들어가 있고 저 단체에도 들어가 있는거야. 그러니까 이 단체도 수배 대상이고 저 단체도 수배 대상이고. 그러니까 숨어란 말이야. 그래서 숨었지. 숨었는데 한 일주일 지났더니 야, 넌 좀 나가봐. 넌 괜찮을거야. 나오니까 아무도 안 잡더라고. 그래서 난 일주일 만에 숨었다가 난. 그러니까 인제 내가 들어갔던 단체에 ‘민족 주체성 확립’ 뭐 이런 말이 들어가 있으며는 전부다 잡혀 들어가는거야. 근데 나야 뭐 어디 가서 그 단체 활동을 해본적도 없고 뭐 그냥 선배들 만나자 그럼 만날 뿐인데. 그래가지고 나오니까 그러고 나서 한달 두달 후에 선배들도 슬슬 나오더라고. 그러더니 그 뜨거운 열기가 싹 가라앉아. 아무도 민족 얘기를 안 하는 거야. 민족 얘기를. 그래서 대학의 분위기가 완전히 그냥 그, 어두운 큰 저저 돌덩이 밑에 깔려 있는 그 속에서 여름 방학이 가차워 지면서 서울 대학에 (비프음, TAPE 교체) 면담자 : 아까 그 말씀하신 게 5. 16 구술자 : 5.16 혁명이지. 5.16 혁명으로 내가 대학 입학한지 한 달 16일 만에 그 뜨거웠던 4.19혁명의 그 열기는 다 사라지고. 그야말로 대학가가 완전히 그, 그 짓눌린 그런 암흑기로 들어가지. 그 중에서 인제 겨우 학생운동이 할 수 있는 분야가 농촌 계몽운동밖에 없었어. 그래가지고 우리 인제 서울대학교 인제 사범대학에서 그건 시작이 됐어. 그래서 우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향토 개발회라고. 인제 조직이 되고. 그게 시작이 돼서 각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별로 농촌 계몽운동 단체들, 그것만 허락이 된 거야. 군사 정부 아래서. 그래고 그것이 학생 운동의 하나의 돌파구가 돼서 그래서 나중에 서울대학교 전체에, 전체에 향토 개척단이라고 하는게 인제 결성이 되가지고. 우리 대학 1학년에서 1학년때 4.19혁명의 큰 물줄기는 사라지고 인제 농촌계몽운동이 인제 시작이 된거지. 그래서 향토 개발회를 인제 조직하고 하면서 거기에 인제 그 우리 사범대학교가 중심이 되가지고 해서 향토 개척단 단장이 인제 사범대학교 역사학과에 그 당시 3학년이던 홍갑표 형이라고 서울대학교 전체 인제 단장이, 향토개척단의 단장이 되고 우리 서울대학의 향토개발회 회장은 김국태라고. 그 김국태가 누구냐면 김근태 형님이야. 김근태 형님이 내가 일학년때 인제 3학년이었는데 그때 인제 우리 사범대학에 농촌, 서울대학교 전체의 농촌운동의 그 중심은 세 사람이 있었었어. 그게 인제 세 사람이 인제 우리 사범대학교 출신인데 사범대학의 역사학과의 홍갑표, 61년 당시에 3학년이었는데 3학년 역사학과의 홍갑표가 나중에 서울대학교 전체 향토개척단의 단장이 되고 그 다음에 국문과에 김국태가 향토개발회의 단장이, 회장이 되고 그 김국태가 이 김근태의 바로 윗형님이야. 그 다음에 인제 그, 인제 교육, 그 교육학과에 정, 정철기라고. 정철기가 사범대학교 학생회장이 됐어. 이 세사람이 사실상 이 새로 부활한 서울대학교 그, 농촌 계몽운동에 중심적인 인물이야. 이 세사람이 주도적으로 해서 사범대학에서 시작해서 서울대학교 전체를 맨들었는데. 이 세 사람부터 잠깐 설명을 하면 김국태는 김근태의 형님인데 이 집안의 역사를 알아? 이 김근태가 맨 끝이고 국태가 그 형이고. 큰 형님이 월북을 했어. 그래가지고 어...이 집안이 그러니까 항상 월북자 가족 집안이야. 그래서 김국태가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직장생활을 못해. 제대로 직장생활을 못해서 소설가가 됐어. 소설가로서 그렇게 유명한 소설가는 아니었는데 소설가가 되면서 이게 재대로 그 대접을 못 받으니까 술로 해가지고. 나중에 국태는 술러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죽었다고. 그러니까 김근태의 가족의 참 그 아픈 가족사가, 큰 형님은 월북을 했고 둘째 형님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그냥 집에서 소설을 쓰면서 폐인이 돼서 죽고, 그 인제 김근태가 그런 형제들 속에서 그 민주화 운동 속에 들어가서 그 운동을 했어. 김근태에 대해선 더 할 얘기가 없고. 홍갑표는 사실 나한테는 하나의 우상이었어. 어...이, 이 사람은 손가락이 이게 두 손가락이 이렇게 끝 마디가 없던가, 그래. 그 이유는 난 몰라. 근데 1학년때 자기는 자칭 맑스주의자야. 공산주의자고. 그러면서 캐도릭 신자야. 근데 캐도릭 신자면서도 근데 이 사람은 이렇게 향토개발회 단장을 했는데 손가락 매디가 없는 손가락을 들고 이러고 얘기를 하며는 좌중이 이게 완전히 손가락에, 그그 매디 없는 손가락에 여기에서 그냥 압도당하는거야. 그러면서 카리스마적인 운동권이야. 이 양반은 그러면서 3학년 때 단장을 하고 4학년 해서 사범대학을 마치고 이게 의정, 그, 양주군, 양주군에 들어가서 농촌 운동을 시작했어. 농촌 운동을 이화여대 나온 분하고 같이 농촌운동을 하면서 결혼을 해가지고 양주에 가가지고 10년을 이 농촌운동을 했지. 근데 내가 나중에 인제, 나중으로 돌아와서 그 미국에 오기 직전에 보성고등학교의 교사로 잠깐 근무를 했는데. 그때 보성하고 이게 요렇게 골목길 요쪽에가 경신 고등학교라고 있어. 경신고등학교 그러니까 10년 후가 되지. 10년 후가, 내가 74년에 미국 왔으니까 74년이니까, 이 형님이 졸업한 게 나보다 세 해 선배니까 내가 65년도에 졸업했어야 되니까, 그니까 이, 61, 62,, 63, 64, 65에 졸업해야 되는데 내가 66년에 졸업을 했다고. 그러니까 이 형님은 65년에 졸업을, 내가 65, 그러면 64, 63년에 졸업을 하고 10년 동안 갔다가 그 나중에 10년 후에 그 경신고등학교에, 내가 보성에, 74년에 보성교등학교 선생을 할 적에 74년에 경신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왔더라고. 그래서 10년 만에 다시 만났어. 만났는데, 10년 후에 만났을 때 그, 이, 홍갑표는 나의 우상이었는데, 학생 운동의, 우상이었는데, 정말 철저한 운동가지 철저한 운동간데 경신에서 만났을 때 그 모습은 완전히 그 지친 하나의 패배자가 됐더라고. 그러니까 10년 동안 양주군에서 농촌운동, 양주가 나중에는 도시화가 되어버리잖아. 뭐 남양주 시도 되고. 그러니까 이, 거기에 농촌 운동이 안 먹혀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10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서 했는데 결국에는 패배자가 되어 가지고 초라한 교사로, 경신고등학교에, 사립학교에 역사교사로 왔더라고.. 그러다가 내가 74년에 미국에 갔으니까 나중에, 작년에 가서 내가 한번 만났더니 이제 교사로 은퇴를 했는데 지금은 그 이후에 운동권 단체에 주류에는 아니고 하튼 지금도 하튼 그런 글을 쓰고 하는. 참 내가 가슴이 아프더라고. 정철기는 어...나중에 그, 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갔다가 제대를 해가지고서는 김대중 선생 비서를 했어. 저 장교를 전역을 해가지고. 김대중 선생 비서를 하다가는 미국으로, 지금 캐나다로 이민을 가가지고 캐나다에서 나중에 ????민중 신문????이라고, 신문을 발행을 하는데 그건 나중에 내가 다시 기회가 되면. 하다가 김대중 선생 귀국하면서 들어 가가지고 전남 어디, 어딘지, 거기가 함평인가 아마 거 어디쯤, 난 잘 모르는데 거기서 국회의원을 한번 했어. 국회의원을. 정철기. 국회의원을 한 번 하고 그 다음에는 한번 했는데 이게 한화갑이 하고 처남 매부간이야. 한화갑이의, 한화갑이하고 같이 그, 이 김대중 선생 비서를 같이 하면서 그러니까 이제 누구 한화갑이 동생이 정철기하고 결혼했는지 정철기가 한화갑이 동생하고 결혼했는지는 모르지만.그렇게 둘이 김대중 선생 비서를 하면서 서로 그렇게 돼서. 이 정철기는 미국 와서 한 10 몇 년 동안 그, LA에서는 내가 ????코리안스트릿저널????을 하고 이, 김경재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신문????을 하고 정철기는 캐나다에서 ????민중 신문????을 하고 그 세 개 신문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 인제 그 신문들은 그렇게 그, 여기 정기적으로 그, 이게 미국에서 나온 신문들이 주간지들이 이렇게 나처럼, 나는 돈을 벌어가지고 돈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그냥 꾸준히 그렇게 한번도 거르지 않고 신문을 냈는데 거기는 뭐 이따금씩 뭐 한달에 한번도 나오고 뭐 하면서 했지만 하여튼 그렇게 3개 신문이 민주화 운동을. 그 다시 인제 돌아가서 그래서 겨우 인제 농촌 계몽운동으로 학생 운동이 살아았는데 나는 인제 그 향토 개척단하고 향토 개발회를 조직하고 하는데 2학년으로서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 했는데 그, 인제 여름방학이 되면은 농촌 활동을 가야잖아. 근데 그게 나하고 맞지를 않아. 왜 맞질 않냐며는, 나는 농촌 사람인데 서울 출신 도시 아이들은 농촌에 가서 그 여학생 남학생 어울려가지고 가서 하는 것이 대학 시절의 하나의 낭만으로, 뭔일인지 모르는데, 이건 나는 촌 사람인데 얘네들은 농촌 사정도 모르는거야. 근데 마치 나를, 내가 계몽대상이 되는 것 같은. 이게 아주 자존심이 상하고 즈들이 뭘 안다고 농촌계몽 운동을 하느냐, 근데 얘들이 신바람이 난거야. 학생 운동 보다도 이게 MT가고 하는 기분인거지. 그래서 그것이 영, 다 조직하고 하는 데는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를 했는데 계몽운동은 못가겠다고. 그 나는 계몽 운동 어디 경상북도 저 어디 의성 그쪽으로 가는데, 어디 마을로 가는데, 나는 거기가서 계몽 운동하는 것보다 나는 집에 가서 우리 부모님들을 도와야 되는거야. 거기다가 인제 계몽운동하고 나하고 맞지 않았던 것. 두 번째는 어...이게 내가 대학에, 인제 고등학교 때에 우리 사상계, 함석헌 선생의 사상계, 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하는, 그 하튼 사상계에 나오는 함석헌 선생의 글에 내가 인제 그, 빠졌고. 그런데 인제 서울대학에 들어가가지고 그, 우리 단양에서 멀지 않은 경상북도 풍기에 사는 내친구 진영일이라는 친구하고, 내 평생의 친구인데 이 친구가 하도 역시 함석헌 선생의 글에 빠진 친구야. 그래서 나하고 둘이서는 어...이 학생 운동은 완전히 다 없어지고, 그때 인제 그 서울에 묵정동에 묵정동에 세기대학봉사회라는 회관이 있었었어. 거기 2층에 세기대학봉사회 2층에서 함석헌 선생이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날 학생들을 모아가지고 성경공부를 가르쳤어요.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그때 거기를 이 진영일이하고 나하고 둘이 일년을 나갔어. 나가서 거기에 인제 우리, 나는 인제 함선생한테 빠져가지고, 빠졌는데 이 진영일이는 완전히 빠졌고 완전히, 지금도 이게, 씨알 사상 연구회 그 회장을 하다가 금년에 물러났어, 서울에서. 나중에 인제 졸업하고 공주 교대 가서 선생, 교수를 하고서 한 이삼년전에 리타이어(retire) 해가지고 서울에서 씨알 사상 연구회 뭐 함석헌 기념사업회, 인제 거기에 회장도 하고 그러다가 인제 물러났는데. 얘는 함선생한테 빠졌는데 나는 거기에 함석헌 선생, 거기에 빠져들었고 농촌 운동이 인제 체질에 맞지 않고 고 다음에 함선생님한테 인제 나는 일년간 따라다니게 되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이게, 그 당시에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지금도 대학생들 전부다 건강검진 하는지 모르는데 우린 서울대학병원에서 일제히 건강검진을 했어. 근데 건강검진을 하는 것 중에 그 당시에 제일 중요한게 결핵이야. 근데 내가 결핵이 발견이 됐어. 그래가지고 거기 한 2,3년을 그 서울대학 병원에서 약을 타서 먹고 요양을 인제. 하게 됐지. 그래서 이제 운동권에서 그래가지고 발이 빠진거야. 근데 함선생님한테는 일년동안 나가서 공부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거기 빠지는데 나는 함 선생님한테 열심히 나가가지고 같이 일요일날 함선생님 강의도 듣고 하면서 그 당시까지 나는 불교신자였었어. 불교신자였지만 함선생한테, 그게 함선생님한테 간거는 이게 사실은 어떤 철학적인 면이라든가 이런거 보다는 함선생님의 그 투쟁적인 그런 면에 나는 더 매료가 됐던 거지. 그런데 이 함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그 나보고 정치하라면 난 못해. 그러니까 이게 나가가지고 그 투쟁도 하고 이렇게 이렇게 바꾸는 그런걸 해야되는데 말로만 하는거야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그래서 그, 나를 보고 정치하라면 못해, 근데 나는 비판만 한다는거지. 그래서 함선생님을 인제는 따라다니는데 그 따라다니면서 난 좀 삐딱한 인제 그, 편이지. 그 함선생님 따라다니면서 아무튼 여러 가지 내가 지금 인제 카톨릭, 신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그런데 성경을 지금도 해석하는데 함선생님한테 그때 배웠던게 바탕이 되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거야, 지금도. 캐돌릭 신자면서도. 그다음 나중에 내가 캐도릭으로 개종을. 그때 인제 그 일년에 한번씩 그 용문산에 가면 큰, 뭐 백년, 천년 된 은행 나무가 있다고. 가가지고 거기에 같이 우리 함선생님 모시고 우리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함선생님을 따르는 여러 그룹들이 가고. 그러면서 일년동안 그러다가 우리 함선생님이 나중에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그, 오셔가지고 이렇게 그, 이 세계를 돌다가 인도까지 가셨다가는 완전, 하튼 오셨는데 고때 인제 한국에 있지 못하고 다시 오셔가지고, 오셔가지고 얘기하시는게 미국에 갔더니 국무성에 자기를, 함선생님을 초청한 거는 와서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걸, 욕을 하는 걸 원했는데 내가 왜 밖에 나가서, 내가 집안에서는 싸우지마는 왜 밖에 나가서 내가 싸우느냐고. 그래서 내가 욕을 안하니까 당신 그 안에서는 욕을 하더니, 우린 그걸 듣기 위해서 당신을 초청했는데 왜 한국정부를 비판을 안 하느냐, 그래서 아 내가 밖에서, 안에서 우리 집안에서 싸우는거지 내가 왜 여기 와서 그, 정부를 비판을 하느냐고,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러고 인제 와서는 운동권으로 들어가신 거야. 근데 인제 나는 일년을 마치고 어...일학년을 마치고서는 내가 휴학을 했어. 그 결핵 때문에. 결핵 때문에 휴학을 해서 인제 산에 가서 절에,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인제 대학을 일년간 휴학을 하고 다시, 그래서 내가 산에 가서 있고 인제 이러면서 하는 동안에 그 육, 저 한일협정 비준반대 운동이 있었던거야. 그래서 나는 그 운동, 학생 운동에서 한발 물러서있게 된거야. 5.16에 의해가지고 419의 학생 운동도 없어지고 농촌운동은 내 체질에 안맞아서 그러고. 고 다음에 함선생님은 묵정동에서 하던 그것이 한 일년간 하고는 그 다음에는 완전히 그, 이게, 그 미 국무성 초청으로 왔다나가시고 나서는 그 다음엔 거기 그 모임이 없어지고. 그 다음에 나는 휴학을 해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가지고 이게, 절에서 공부하고 하면서, 한일협정 비준반대 운동에서 빠졌지. 그래서 나는 대학 일년 동안에 학생운동에 들어가보지 못한거야. 그러고는 인제 사실은 고시공부를 절에 가서 했는 나는 좀 무모한 면이 있어. 그러니까 시험을,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다 해가지고 해야되는데 뭐 헌법 민법 형법, 이것만 공부하고 행정소송법 민사소송법 이건 공부를 안 하고, 그 당시에 시험치기 시작한 거야. 그러니까 일차에는 딱딱 붙는데 필기시험에서는 떨어지고. 근데 그 당시는 어...이게 인제 사법, 5.16이 나고나서는 사법시험이라고 했어. 사법시험이 1회에서부터 한 6회까진가는 그 전에 인제 그 고등고시라고 했는데 고등고시 때는 일년에 한 열명씩 붙었는데 요거는 인제 고거보다는 많아서 스무명 뽑는데 나는 공부를 안하고 가서 쳤으니까 사법 시험 1회부터 쳤는데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형사소송법 그건 책도 안 산 상태에서 시작을 해가지고 한 두세번 치고, 일년에 두 번씩 시험을 쳤어, 두 세 번 시험을 치는 동안에 할 수가 없지. 시험 치면서, 시험치면서서 공부를 한거야. 그런데 그때 4횐가 3회인가 내가 성적이 제일 좋은, 거의 합격점에서 0.몇 점이 모자랐는데 한 세명, 네명인가 뽑았어. 그 네명인가 뽑을 적에 내가 한 열명만 뽑았어도, 그 전까지 열명 스무명 뽑았어도 합격이 되는데 네명 뽑을, 그때 저 박철헌이가 되 나중에 보니까. 박철헌이가 뽑힐 때 고때 네명이 합격자가 네명인가밖에 안 나왔어, 세명인가, 네명인가. 그때 나는 거의 열명 안에 들어가는 성적인데, 그러고 나서는 그 다음에 한 두 어번을 더 쳤는데 그 성적이 안 나오는거야. 거기서 더 올라가지 않고. 그래서 나는 성격이 뭘 하면 꽉 하고 안 하면 딱 끊고나선 미련없이 돌아서는 사람이야. 그래서 난 고시공부를 할 적에 난 대학 졸업할때까지만 한다. 졸업까지. 고시공부 할 때 보면 십년씩 붙들고 하는 선배들 있는데 나는 그게 아주 보기싫은거야. 그리고 나는 고시공부하는게 내가 법관이 되겠다고 생각을 해가지고 한게 아니거든. 이거는 그러니까 신분상승의 솟컷이야, 지름길, 지름길이기 때문에 그걸 한거지. 그러니까 나처럼 저 못사는 사람이 이게 출세를 하는 하나의 숏컷으로 생각을 하고 한 거지, 내가 법을 공부해가지고, 나는 판사 검사 변호사가 뭐하는지 그거에 대한 그게 있어가지고 이걸 내 천직으로 생각하고 해애되겠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거든.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닐 적에 나중에 대학 갈 수 없으니까 아이고, 어디 국민 학교 선생이나, 2학년때 신문보고 만날 한자연습을 했다는 게, 나중에 어디 시골 소재 국민 학교 가가지고 고시공부나 하겠다고. 그래서 인제 그 인제 선생님 공부는 안 하고 인제 그랬던 건데. 그, 그 식으로 법을 알아가지고 내가 고시 공부를 한게 아니고 그냥 없는 사람이 이게 그,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서 그걸 했기때문에. 그걸 하다보니까 아 이게 처음에는 공부를 안 하고 했기 때문에 시험은 여러번 쳤지만 그건 처음엔 안 되는거고 어느 시에서 점수까지는 올라갔는데 그거는 네명 밖에 안 보니까 그 다음에 한 두세번 더 치니까 이건 뭐 그 성적도 안 나오고.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못한거는 나는 글씨를 쓰지, 그러니까 공부는 안하고 뭘 노트 정리도 안 하고 항상 새 학기 되면 하지만 한 2,3 페이지 쓰고서는 끝이야., 그러면 그 다음에 2,3 페이지 찢어내고 그 다음 학기에 새로 시작하면 한 2,3 페이지. 하튼 글씨를 쓰는 걸 싫어해. 근데 이거는 그 당시 고시 공부는 완전 논술이라니까 잉크로 글씨를 잘 써야되는데. 나중에 내가 선생님 노릇 할 적이 무슨 질문이 있느냐 했더니 애가 손을 들고, 선생님 이제부터는 칠판에 글씨를 손으로 좀 써주세요, 이러더라고. 그러니까 글씨를 발로 썼다는 얘기지. 그래서 아, 나는 이 고시는, 고시는 나하고 잘 안맞는거고. 그래서 딱 끊고 어...인제 졸업하고 일년 더 하고, 일년 더 하고. 65년에 졸업을 해야되는데 일년 늦었으니까 66년에 졸업을 했고 고 다음에 그... 66년에 졸업하고 일년 더 하고서 67년에 오케이 난 군대를 간다, 하고 공군 장교로 입대를 했어. 그런데 인제 대학때 들어가서 대학생활 때에 그, 나는 어...이렇게 하나의 그 발화 시점을 놓친 시한폭탄이라는 것 같은, 농촌의 아주 저저 시골의 사람이 서울에 갔을 때 그 농촌과 서울의 격차, 고 다음에 나는 창신동 꼭대기의 판자촌에서 그, 이렇게 우리 친구하고 같이 버스 회사 사무실에서 자취를 하다가 나주에는 거, 다른 친구 하나하고 판자촌에서 그, 이게 자취를 하면서 나는 가정 교사를, 입주 가정교사를 안하고 그 시간제로 다니는 가정 교사로 했어. 그런데 그, 내가 살고 있는 창신동 판자촌하고 내가 가정교사로 가서 가르치는 그 집의 그, 한국의 상류 가정하고 이게 언밸런스해. 농촌과 서울의 언밸런스, 이, 창신동 판자촌과 그 일류 가정집의 부자집의 그러니까 이 부자짓의 아이들은 나를 선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뭐 지 하인으로 생각을 하는거야. 그러니까 뭐 공부 도우미지. 공부 도우미인데 이게 마치 그 하인과 같은.그런 속에 있는 것. 그리고 그, 이 민주주의를 공부하는데 그 군사 정부 하에서의 그런. 그것이 모든 부조리 속에서 그냥 그, 이 폭탄을 가슴에 안고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 것이 그러면서 이제 함석헌 선생한테서의 그런 영향, 운동에서의 좌절. 그런 것이 하나의 폭탄을 안고 살았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그걸 억누르면서 이렇게 졸업을 하고, 그것이 고시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폭발을 안 한거야, 산에 가서 고시공부를. 그러나 고시공부를 이거는 내가 갈 길이 아니다, 하고 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 하고 미국에 갈려면 군복무를 마쳐야되겠다, 해서 67년에 공군장교 시험을 쳐가지고 공군 장교로 68년 4월달에 인제 임관을 했지. 그래서 임관을 했는데 난 인제 군대생활을 공군 장교로 우리가 4년을 복무를 하는데 한 8,9개월을 인제 그 대전의 병무관리부에서 인제 잠깐 임관하고나서 있다가는 이, 참모 김성, 참모총장이 새로 취임을 하면서, 아니지, 장지량 총장때 입대를 해가지고,김성룡 총장이 취임하면서 자기 스피치 라이터를 구한다는거야. 그래가지고 이게 공군에 있는 이 장교들 중에서, 초급 장교들 중에서 서울대 출신중에서 인제 뽑는다고 해서 뭐 막 여러 사람이 했는데 안 되고 서울에 있던 공군본부에 가 있던 내 친구가 너 한번 거기다 글을 써서 올려보라고 그래가지고 보냈더니 그 내가 서울로 올라가겠됐지. 공군 본부로. 그러니까 소위 시절에. 소위 시절에 임관해가지고 일년이 안 되가지고 서울 공군 본부에 참모총장 비서실에 안에 인제 서한 장교로, 서안 장교실을 갖다가 지휘 관리실이라고 따로 해가지고 비서실 안에 지휘 관리실이라고 있어가지고 거기에 인제 갔는데. 나는 인제 그 자리는 중령보직이야. 중령보직에 소위가 가서 앉은거야, 소위가 가서 앉았는데 어, 공군본부에서는 이 대령도 독방을 쓰는 대령이, 국감실장이나 되야 독방을 쓰지 아니며는 대령도 큰 사무실에 뒤에 앉고 중령들 앉고, 그 다음에 유관 장교 앉고 사병 몇 명 앉고 이렇게, 그때. 나는 소위가 독방을 썼어, 공군 본부에서. 그게 인제 중령이어가지구 연설문쓰는 걸로 특별히. 그래서 나는 만년필 하나 가지고 군대 생활을 다 마친거야. 그래서 3년이 조금 넘게 그, 거기 있으면서. 비서실은 총장이 바뀌면 싸그리 다 바뀌어. 그런데 나는 전문직이라고 총장 바뀌어도 그냥 계속 남아 있는거야. 그래서 3대 총장을 거기서 하면서, 그런데 그때 이제 그, 이 군생활을 난 군대생활 얘기를 하며는 얘기 할게, 우리 한국 남자들은 군대 갔다 온 얘기가 제일 흥미진진하고 많잖아? 근데 나는 만년필 하나 가지고 졸업했기 때문에 할 얘기가 없어. 할 얘기가 없고 술 먹고 사고 친 얘기밖에 없어. 면담자 : 아, 군대 안에서요? 구술자 : 그러니까 항상 사회에 대한 불만과 이게, 그니까. 술 먹으면 이게, 이제 내가 체력이 좋아. 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타고난 체력이 강해 그리고 이때까지 술을 먹으면 같이 먹어가지고 내가 누구보다 먼저 떨어진 적이 없어. 근데 술을 먹으면 엄청나게 먹고 이게 아무리 먹어도 끄떡이 없어. 그런데 그게 사람이라는 게 한계가 있으니 필름이 끊겨. 다른 사람이 보면 멀쩡해, 멀쩡하고 한데 나는 전혀 기억을 못해. 그래가지고 나는 군법회의에 세 번에 회부됐어. 이게 뭐 아주 사고를 쳐도. 그, 이게 경희대 입구에 있는 그 휘경동 파출소 하나를 완전히 때려 뿌시고, 그래서 수도 경비사로 헌병들이 나와서 잡아갔다가 그 다음에 공군 헌병대로 넘겨가지고 영창에도 들어가 있다가 나중에 군법회의를 하고 하튼. 그 다음에 그, 우리 장교들 숙소에서 하룻밤에 그냥 뭐 대위서부터 소령, 중령까지 뚜드려 패가지고 이게, 당직 사령이면 그 사관학교 야간 교장이라고, 교장 대행인데 그 당직 총사령인 중령을 때려 패기도 하고 뭐 하튼 택시 운전수와 시비가 붙어서 택시를 뚜르려 뿌시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울분이 쌓여가지고 밖에서 보면 다른 사람이 보면 멀쩡한데 나는 정신 없이 막 아주 폭력성이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그런데 원체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군법회의에 다른 사람 같으면 붊명예 제대를 해도 벌써 했지, 벌써 했는데 원체 인제 총장 비서실에 있으니까 우리 비서실장이 보고를 안 할 수가 없으니까 했어. 그러니까 참모총장이 아, 우리 젊을 땐 다 그랬어, 알아서 해. 인제 이래가지고 군법 회부되면 견책으로 그냥 끝났지. 군법회의 세 번 회부되가지고 견책을 세 번 받았어. 그것이 나는 군대 생활 한 거의 할 수 있는 얘기의 다 라고. 그러면서 총장 연설문을 인제 쓰고. 근데 연설문을 쓸 게 별 그렇게 별로 없잖아. 별로 없으니까 뭐 한 달에 한건이나 있을까말까 하고. 그러니까 내 일상 업무는 뭐냐, 일상업무는 아침에 출근하며는, 9시에 출근하면 쭈욱 공군 본부를 한 바퀴 돌아. 한바퀴 돌면서 인제 그 국감 실장들 방엘 삐꿈히 들여다 보면서, 소위가 뭐 있어요? 그러면 아, 오늘은 없어없어. 그러고 인제 그 다음에 국감실장 방에 삐꼼 들여다보며 뭐 있어요? 그러면 아, 일로 들어와, 조박사 일로 들어와. 그러니까 나는 이게 상대하는 게 중령 대령들만 상대를 하는 거야. 위관장들 상대. 근데 이 소위가, 나중에 중위가 되지만 이게 중령 대령들이 이, 나를 조소위, 조중위 이렇게 못 불러. 야, 조박사, 일로 들어와, 이래 가지고 들어가면 그 전날 밤에 뭐 있어요? 하는게 뭐 이게 뭐 보고할게 있냐는 얘기야. 그러면 아 들어와라 그러면 자기네들 불러주면 그거 가져와서. 쭉 한바퀴 돌고 한 한시간 정도 돌고 와가지고 그 중에서 인제 정리해가지고 그거를 인제 나는 열한시까지 저 국방부 장관실로 보내는거야. 장관실로 보내면 그건 인제 국방부 장관실에서는 삼군하고 해병대 껄 모아가지고 합참하고 그걸 다 모아가지구서는 인제 그 한시까지 청와대로 보고하지. 그러니까 일일 보고를, 군 일일 보고를 하는 거야. 그게 인제 내 업무고. 그러니까 이게, 뭐 중령, 대령들이 그냥 뭐 조박사 조박사 이러고 그러고 인제 이 연설문보다도 많이 쓰는 게 결혼 저, 주례사를 많이 써. 이게 창, 총장이 주례를, 가을되면 주례를 많이 선다고. 그러면 총장 주례사 쓰고. 그러면 내가 이게 무슨 전문가, 연설문 전문가니까 각 장군들이 뭐 이렇게 국장이나 실장들도 주례 슬 게 있으면 야, 저 비서실에 가서 조박사한테 주례사 부탁해오라고. 그러니까 전부다 장군들이고 뭐고 전부다 나한테 저 서로 그런 관계니까. 그러니까 이게 사고를 치는 거야. 그러다가 이제 제대를 하는데 제대를 하면서 이제 나는 이제 미국을 간다. 제대할 때 되니까, 내가 연설문을 쓰고 하니까 뭐 저, 이렇게 공군 출신 그 장관들 비서실에서 오라고 그러고. 또 공군 출신들로 나가가지고 경인에너지라고 지금은 그게 뭐가 됐나 모르겠는데. 경인에너지의 인사국장을 하는 인사부장을 하던 사람이 거기 오라 그러기도 하고. 뭐 갈 데가 많아. 많은데 아, 나는 안 간다고 난 미국에 간다고 그러고서는 나를 대학에 갈 적에 보내주던, 격려 해주셨던 나동성 선생님이 나중에 인제 우리 그 교무주임을 하다가는 공주 사범학교 교장을 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을 했어. 그러고서는 서울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의 교장을 하고 있었었어. 이 서울에 있는 오산 고등학교 교장을 하시던 분이 보성고등학교, 자기가 먼저 있었던 학교에 추천을 해가지고 보성에서 그, 2년 동안 교편 생활을 하고 미국엘 오게 됐지. 면담자 : 오산고등학교에도 좀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구술자 : 그거는 인제 경기도 화성에 있는 오산고등학교. 공, 군대 가기 직전에, 군데 가기 직전에 아 나는 인제 안 한다, 그러고 미국 간다 그러고 경기도 화성에 있는 오산 고등학교에 있으면서 저 학교 끝나면 서울에 와가지고 그 시사영여학원을 다니고, 미국 간다고. 그렇게 하고. 근데 군대를 가게 되니까 그래서 거기 저, 화성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하면서 시사영어학원 다니면서 그 인제, 저 준비해가지고 인제 그 공군에 들어갔지. 그래서 오산고등학교, 보성고등학교에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냐마는 그게 인제 72년에 내가 제대를 하고서 갔는데 그 72년이 무슨 해냐, 72년 그 10월 유신이 나던 해야. 그래서 이 보성고등학교에 저, 선생을 하는 데 갑자기 유신이 난 거야. 이 유신 하에서 가장 힘들었던 사람들이 누구냐면 고등학교 일반사회 선생이야. 왜냐하면 대학생들은 그래도 교수하고 이렇게 토론이 되고 그러고 이게 얘기가 통하는데 이 고등학생들은 그것도 없어 면담자 : 친굽니까? 구술자 : 친구가 아니라, 이거는 대학생들은 교수하고 토론이 아니라, 이게 하루아침에 유신이 벌어졌는데 애들이 머리를 깎고 삿갓을 쓰고 대나무 지팽이를 지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들어오는 거야. 그거를 야, 맞다, 하고 너희들 나가서 데모하라고 길거리로 내보낼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유신이 옳다고 이게 하루아침에 민주주의를 가르치다가 하루아침에 유신을, 유신 교사가 되어야 되는 거야. 근데 학생들한테만이 아니라 학부형들은 와가지고 학부형들 학교로 불러가지고 유신 강의를 해야 돼. 그것이 참으로 이게이게. 그러니까 내가 인생을 되돌아 볼 적에 가장 힘들었을 때가 보성에서 2년 동안 그 유신 교사를 하던 거야. 그렇다고 하, 난 지금 미국을 가야되는데. 이게 내가 그 못 나와 서 하면 인제 미국도 못가고 지금 미국도 못가고 어떻게든 빨리 여기서 탈출을 해야 되겠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인제 학교 선생님이 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면, 이건 모가지 날라 가는 거지. 근데 나는 상관 안 하고 낮에는 보성에서 하루 종일, 하루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그래서 낮에는 보성에서 선생 노릇하고 밤에는 대일학원, 제일학원 학원 두 군데를 가서 강의를 하고. 고 다음에 또 컴퓨타 배우는 학원에 가서 컴퓨타 배우고. 그러면서 크, 눈 질끈 감고 사회 문제, 그러니까 나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에도 학생 운동권에서 그러니까 운동권 성향이 강한데도 거기에서 한발 물러서 있고 그, 군에, 군에서 그 울분을 토하면서 그냥 혼자 폭탄을 인제, 시한폭탄을 삭히고. 그게 보성에서는 하루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해서 눈 질끈 감고 가서 학원 선생을 하고 그 하면서 이년을 인제 준비를 그 하면서 그때 귀도 막고 눈도 막고 다 막고, 막고 오로지 그때 우리 와이프하고 신혼이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와이프하고의 신혼생활은 결국은 한국 탈출 작전이야. 면담자 : 결혼은 군 제대하시고 바로 하신건가요? 구술자 : 제대 하기 한달 전에. 제대 하기 한달 전에 결혼을 하고. 면담자 : 뭐 연애결혼 하셨습니까, 아니면 중매? 구술자 : 인제 뭐 중매 소개로 해서 결혼을 하고 어..인제 거기 보성에 있으면서 우리 아들을 낳고. 근데 미국에 오는데 우리 집사람하고 둘이 애들 데러올 수가 없으니까 우리 그, 장모님한테 아이를 맡기고 그러고 74년 74년 7월 6일에, 정말 그 우리 친구들한테는 내가 반드시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정말 우리 부모님하고 친구들한테는 반드시 돌아오고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약속을 했지만 결국은 나는 못 돌아올 것이라는 그, 내가 못 돌아올 것이라는 거를 마음 속에는 아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는, 그러면서 그 억눌린 유신 체제 아래서 도망치듯 김포공항을 7월 6일날 떠났지. 7월 6일 떠나서 인제 여기 코리아 타운에 떨어진거야.. 면담자 : LA로 들어오신 건가요? 구술자 : 인제 나는 이제 그 내 화장실 좀 잠깐 갔다 와서 <녹화 재개> 구술자 : 위스콘신 대학원에 경제학과에 대학원과정의 인제 입학 허가서를 받아들고 왔어. 왔는데 그 LA 인제 떨어졌는데, LA에 떨어지면 인제 짐을 부치니까. 배로, 이미 배편으로 오니까 한 한달 걸린다고. 짐이 도착하면 그걸 가지고 인제 그 위스콘신을 갈려고 여기 떨어져서 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 얘기가 그 위스콘신 추운 데를 왜 가느냐고 여기 캘리포니아에 얼마나 좋은 대학이 많은데 거길 왜 가느냐고. 인제 그러고 여기 남으라고 그러는데. 면담자 : 선생님 미국에 어떤 연고가 있으셨습니까? 구술자 : 없었지, 아무도 없었지. 면담자 : 아무도없는 상태에서 그, 사모님하고 같이 두분이서... 구술자 : 물론 인제 여기에 오니 저 내 사촌 처남이 그 일년 전에 와가지고 여기 아파트에 살면서 날 마중을 나와서 그 친구는 노동치고 있었는데 나는 인제 위스콘신을 간다고 해서 여기 일단 그 친구가 있는 아파트에서 방을 빌려가지고 인제 기다리기로 했는데 그, 위스콘신을 안 간 이유는 내가 위스콘신을 가가지고 경제학을 전공을 하며는 학위를 받아가지고 한국에를 들어가면 유신 독재 하에서 저, 봉사를 해야 되는데 그거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근데 인제 그 이, 미국에 오는 때 그 당시 내가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경제학을 할려거든 미국에서는 수리 경제학을 해야 되니까 컴퓨타를 공부 하는 게 좋다, 그 당시 컴퓨타가 처음 막 나올 때야. 그래가지고 광화문에 가가지고 그 컴퓨타를 랭귀지를, 포추런(Fortran)이라는 수리 경제학에 도움이 되는 포추란이라는 컴퓨타 랭귀지를 배우러 갔어. 갔는데 이게 나가 그렇게 재미있는거야, 컴퓨타 랭귀지가. 그래가지고 그 수리 경제, 수리 계산하는 포추런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저기 어플리케이션인 코벌(COBOL)이라는 게 있었는데 코벌하고, 그 다음에 인제 기계, 기계 용어지, 기계 랭귀지, 그게 어셈블리어(Assembler)라고. 크게 그 당시 세 가지 계산하는 포추란, 비즈니스 어플리케이션인 코벌, 그 다음에 컴퓨타 랭귀지인 어셈블리어. 이 세 가지를 한 달씩 배워가지고 온 거야. 한 달씩 배워 가지고 야, 이게 그 당시에 인제 광운 전자 대학에 인제 전산학과가 처음으로 생겼을 때야. 그리고 한국에 컴퓨타라는 건 네 대밖에 없었었어. 근데 인제 나는 컴퓨타 만져보지도 못했어. 그냥 저 강의를 듣고, 컴퓨타 키스트에 가가지고 유리창 너머로 쳐다보면. 내가 미국에 와가지고 컴퓨타를 공부 하며는 한국에 가며는 컴퓨타를 가지고 정치하고는 관계가 없이 빨리 돌아가서 우리 부모님들을 모시고 내가 한국에 기여를 할 수 있겠다, 해가지고 경제학을 위스콘신 대학원에 가지 않고 이 LA에서 컴퓨타로 하튼 잡을 한번 잡아보자. 그래가지고 내가 컴퓨타 쪽으로 전공을 바꿔야겠다 이래가지고 LA타임스에 인제 나오는 광고가 나오면 영어를 못하니까 전화는 못 걸어. 주소가 있는 데를 나오면 우리 와이프하고 둘이서. 그래도 우리 와이프는 한국에서 컴퓨타 배우러 갔는데 거기 키펀치(Key punch)라는 걸 가르치더라고. 그래서 우리 와이프는 키펀치를 배워오고 나는 인제 코벌, 어셈블리, 포추런을 배워가지고 와가지구선 둘이 다 컴퓨타 쪽으로 직장을 찾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인터뷰 가는 날은 지도에다가 표시를 해가지고 아, 인제 우리 와이프가 운전을 해서 가고 와이프가 인터뷰하는 날은 내가 운전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이 LA을 돌아다니면서 6개월 동안에 한 내가 60번은 인터뷰를 했어. 근데 가며는 아, 미국 사람들은 굉장히 친절해. 그러니까 이게 뭐, ‘야, 너 미국에 온지 몇일 됐냐?’ 며칠 됐다, 얼마 됐다 그러믄 ‘너 근데 어찌 그리 영어를 잘하냐?’ 인제 이러면서 금방 써줄 것 같애. 근데 집에서 기다리면 연락이 안 오는 거야. 그러면서 우리 와이프하고 나하고 그냥 있는데 그인제 뭐 다니다가 밤에 청소를 시작하지, 밤 청소 시작하고, 주말에는 저 이게 개스 스테이션에가서 기름 넣어주는 거 그 당시엔 펌프맨이라 그랬는데 그러면서 6개월을 돌아다니는데 근데 한 두어 달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거 안 되겠어. 너 미국에서 경력있느냐? 미국에서 공부했느냐만 찾는 거야. 그래서 안 되겠다. 그래서 우리 와이프 보고 ‘그 내가 청소하고 주유소 다니면서 할 때니까 당신은 우선 키펀치 학원에 등록을 해라. 그래서 키펀치 학원을 여기 윌셔(Wilshire)에 있는 키펀치 학원을 등록을 했더니, 우리 와이프가 등록을 하니까 그 학원에서 해가지고 한 달 만에 우리 와이프는 뱅크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취직이 됐어. 어. 거, 학원에 등록을 해가지고. 학원에서 소개를 해가지고. 우리 와이프는 담에 키펀치를 하고 나는 밤에 청소를 하고 글고 내가 청소 끝나면 우리 와이프 은행 주차장에 가서 자고 있다가 오후에 나오면 같이 집에 오고. 그러면서 낮에는 내가 인제 또 취직하러 다니고. 이렇게 한 6개월을 다녔는데 LA 카운티에 그, 뭐 가서 시험을 쳐 놓으면 시험은 착착 붙어. 그믄 인터뷰에 가서 떨어지는 거야. 뭐 이런 개인회사에는 인터뷰하는 연락도 안 오고. 그런데 여기 카운티에서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거기에 그, 조지 히로카와라는 일본인 3세가,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내가 취직을 못했을 거야. 근데 그 사람이 같은 동양계니까, 아마 그,그래서겠지. 나를 영어도 못하고, 컴퓨타에 대해서도 알지도 못하는데 이 조지 히로카와가 나를 채용을 해준 거야. 그래가지고 6개월 만에, 75년 1월 7일에 LA 카운티 공무원으로 취직을 한 거야. LA 카운티 데이터 프로세싱 디파트먼트(LA County Data Processing Department), 전산국에 컴퓨타 오퍼레이터로 취직을 했어요. 취직을 했는데 뭐 날아갈 것 같지. 정말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난 하도 기뻐가지고 방바닥에 떼굴떼굴 굴러본 것은 그때 뿐이야. 뭐 이게 그, 영어도 못하는데 전화로 이렇게 왔는데 하튼 그러니까 취직이 됐다고 1월 7일부터 나오라는 거야. 거, 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뭐 미친 것처럼 그렇게 기뻤던 적이 없어. 그날 취직해서 갔더니, 컴퓨타 룸이 딱 들어갔더니 이게 인제 통제구역이지, 명찰들을 다 달고 갔더니, 아이구, 흑인 아이가 아주 험상궂게 생긴 흑인 아이가 나를 데리구 다니면서 얼마나 친절하게 가르치는지 몰라. 뭐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막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거야. 그런데 가만히 이래 보니까 걔가 컴퓨타 오퍼레이터 트레이니야(trainee: 견습 직원) 걔는 정식으로 시험을 쳐서 들어온 게 아니라, 그냥 그 이케 뭐 직업센터나 이런 데서 트레이닝 받으라고 보낸 거야. 근데 걔는 거기 트레이니로 한 3년간 근무를 해가지고 아주 도사야, 컴퓨타에. 나는, 걔는 지 똘마니 들어왔다고, 지 밑에 부하 들어왔다고 신나게 가르치는 거야. 근데 가만 보니까 나는 내가 걔 윗사람이야. 나는 컴퓨타 정식으로 시험치고 인터뷰를 해서 들어간 컴퓨타 오퍼레이터야. 그래가지고 얼른 이게, 명찰을 뒤집어 달았어. 그래서 3일 동안을 뭐 열심히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가르쳐주고 뭐 신나가지고 이놈, 인제 지가 제일 말단이었다가 지 밑에 들어왔다고 난리를 친 거지. 근데 얘가 얘기 지 보스라는 것 안거야. 그래가지고 그때부터 나한테 하드츄레이닝을 주고, 하드타임을 주는데 나는 트레이니도 아는데 너는 왜 모르냐는 거야. 근데 그게 내 변명이 되는 게, 컴퓨타는 기계마다 랭귀지가 달라 IBM 랭귀지가 따로 있고 유니백(UNIVAC) 랭귀지가 따로 있고, 하니웰(Honeywell) 랭귀지가 따로 있어. 근데 일반적으로 학원에서 가르치는 거는 IBM 3-60이라는 거를 가르쳐요. 근데 여기는, 내가 간덴 하니웰이야. 나는 IBM 오퍼레이타지 하니웰 오퍼레이타가 아니다, 이러면 익스큐스가 되는 거야. 그런데 아 모른다고 막 난리를 치는 거야. 일주일을 도저히 그걸 못참겠어. 얘가 뭐 나한테 얼마나 대하고. 그러니까 이게 거기 컴퓨타 룸에 들어가는 게 지옥에, 도살장 들어가는 거 같은 거야. 그래가지고 하루는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건 내가 그렇다고 이 잡을 그만 둘 수도 없는 거고. 걔를, 컴퓨타 아마 지금은 아마 상상을 못할 거야. 큰 강당 같은 게 컴퓨타 테잎 드라이브가 캐비넷 만 해, 이렇게. 그런게 쫙 한 40개가 있으면 거기 양쪽에 테잎이 축축축, 이러면서 돌아가는거야. 영화에 같은 데서 봤을거야. 저, 디스크 드라이브는 이게 세탁스 안에 이만한 구멍이 있는데 디스크가 이런 게 이만해. 이걸이렇게 집어넣었다가 이렇게 꺼내. 세탁기 같은 데. 그게 한, 또 2,30개가 쭉 있고. 그러면 양쪽에 돌아가는 거야 디스크 드라이브는 세탁기만한 게 이만해 이걸 이렇게 집어 넣았다가 이렇게 꺼내. 뭐 프린터가 있고 이게. 뭐 강당으로 하나 가뜩이야, 컴퓨타가 뭐. 그게 요샌 요만한 컴퓨타에 다 들어가지. 그 테잎 드라이브 뒤로 얘를 불렀어. ’나는 니가 나를 친절하게 가르쳐줘서 참 널 좋아하는데 너는 날 왜 그리 싫어하냐‘ 그랬더니 ’니가 우리 브라더들의 잡들을 너희 에이시안들이 들어와가지고 우리 브라더들의 잡을 다 가져간다, 느히들은 가란말이야.‘ 내가 영어를 잘 못알아듣지만 그런 뜻이야. 그러면서, 그래서 내가 나는 합법적으로 이 나라에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니가 왜 날 가라고 그러냐. 너도 여기, 여기는 이민자의 나라가 아니냐, 너도. 그러니까 우린 이민 오지 않았대. 우리는 쇠사슬에 묶여서 끌려왔대. 할 말이 없잖아. 거기다 뭐라고 얘기해. 그런데 우리 형제들의 잡을 니들이 다 뺏어가니 우리 형제들이 그래서 못 먹고 못산다 이거야. 할말이 없더라고. 그래서 한참 있다가 그래서 알았다 근데 나는 그래도 니가 좋다. 저기 있는 다른 애들은 너처럼 그렇게 얘길 안하지마는, 말 안하지만 쟤들은 니가 나를 하드타임 주는 것을 아주 인조이, 아주 인조이하는데 너하고 똑같이 생각하지만 얘길 안하는데 너는 솔직히 얘기해주니까 좋다, 애니웨이. 난 그래도 니가 그렇게 생각을 해도 좋다. 그랬더니 이놈이 한참 이러고 보더니 한 5분쯤 이러고 보더니 손을 탁 내밀면서 ’마이 브라더,‘ 그러더라고. 그래가지고 악수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얘가, 얘 때문에 내가 출세 길이 열렸어. 왜 출세 길이 열렸냐면 이놈이 빅마우스야, 이게 입이 뭐 떠벌이야. 그러니까 아무하고나 싸워. 그러니까 우리, 거기 A팀, B팀, A조, B조가 있는데 우린 A존데 이 A조에서 얘하고 같이 아무도 일을 안하려고 해. 그 얘가 하도 싸우고서 B조에 자리나면 다 B조로 가. 그 A조는 새로 들어오는 애들만 들어오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석달만에 시니어가 됐어. 수석 오퍼레이터가 된 거야. 밑에, 밑에 애들이 아무튼 자리 나면 다른 자리로 다 가고, 이 부서, 저 부서로 다 가고 내 밑에는 신참들만 들어오니까. 아 내가 시니어가 되고 6개월이 되가지고, 액팅 수퍼바이저가 됐어. 근데 얘가 완전히 다 알아. 그러니까 얘가 일은 다 하는 거야. 다 하는데 미국 사람들이 아주 철저한게, 상하관계가 철저해. 이게 뭐 높은 사람 앞에 바로 앉고 이래도 위계 질서가 아주 분명하다고. 이게. 얘가 그, 나한테 얘기할 때, 문제가 생기면 꼭 나한테 ’이건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해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됐으니까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결정하겠냐,‘ 그러며는 나는 내가 뭘 알아? ’그러냐? 그러면 우리 그렇게 한번 해보자.‘ ’고맙다, 내 의견을 존중해줘서 고맙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니 얘가 다 하는거야. 그런데 내 결정을 기다려서 하는 거지. 그래가지고 얘가 다 쫓아줘가지고 내가 3개월 만에 시니어가 되고 6개월 만에 액팅 수퍼바이저가 되는거야. 그런데 또 이게 사람의 운명이라는게 이상한게 내가 들어가자 말자 우리가 하니웰 시스템을 가지고 쓰는데 유니백 시스템으로 완전 바꿔버렸어, 바꾼다는 거야. 그러니깐 이게 유니백의 교육을 가야되. 근데 아무도, 거기 미국 아이들이 서로 가려고 하지 않아. 왜냐면 새로 배우는 건 귀찮거든. 그러니까 아무도 안가려 하니까 나는 하니웰도 모르고 사실 IBM도 잘 모르니까. 내가 먼저 가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내 밑에 애들, 새로 들어온 신참들하고 넷이서, 신참들 셋 하고 나하고 넷이서, 일차 교육위원으로 훈련을 간거야. 츄레이닝 받으러. 츄레이닝 받으러 갔는데 그 컨설팅 컴파니에서 나와서 츄레이닝 하는데 얘들이 나한테 안 가르치고 거기 있던 제이노라고 하는 백인 여자애한테 가르쳐. 그 다음에 인제 흑인 두명 하고. 이렇게 해서 넷이 갔는데. 그러면 얘 제이노는 다 하는거야, 지가 다 안다고. 그래놓고 해보라 그럼 못해. 그럼 나는 제이노에게 가르칠 때 이래, 어깨 너머로 보고 있는데 그럼 제이노가 야, 제이, 네가 한번 해보라고. 그럼 이렇게 내가 해. 그러니까 그런게 자꾸 몇 번 되풀이 되니까 컨설팅 캄파니에서 나한테 가르치는거야. 그믄 나한테 가르치면 내가 제이노한테도 가르치고 흑인 아이들한테도 가르치고. 그러니 얘들이 내가,나한테 설명하면 다 알아듣는대, 영어는 못해도. 그거 인제 다 알아듯고서 얘기하는데. 그래가지고 석달마다 인제 석달 교육받고 인제 도로 가고 이쪽에서 다른 아이들이 오고 하는데 석달 되니까 이 컨설팅 캄파니에서 제이는 여기다 남겨뒀으면 좋겠다. 그래서 셋만 보내고 나는 거기 남아서 조교 노릇하하는 거야. 그러니까 일년 반을 거기서 조교 노릇을 해서 여기 있는 애들, 그러니까 컴퓨타를 유니백 컴퓨타를 갖다 설치하는 거에서부터 이거를 모든 걸 다 연결 다 해가지고 컴퓨터 시스템을 하나를 완전 셋업을, 인제 시험용 컴퓨타 셋업을 이렇게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면서 일년 반 동안 하면서 교육 오는 애들을 교육시켜 가지고 보내고 교육시켜 가지고 보내고 그랬어. 컨설팅 캄파니가 인제 우리 전산국에다 컴퓨타를 다 설치하고 떠난거야. 떠나고 나니까 이 컴퓨터를 아는 사람은 카운티에 나 하나밖에 없어. 난 일년 반동안 설치하는거 아주초보서부터 끝까지 이걸 다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이게 승진하는 것도 서열에 따라가지고 차례가 돌아와야 하는거야. 그니까 근데 내가 없으면 컴퓨타 룸이 돌아가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날 고만 방을 이렇게 하나 따로 주면서 나를 계속 승진시키는거야. 어, 명분을 맨들어가지고. 명분을 맨들어가지고 하면서 넌 이방에 들어앉아가지고 지금 이 컴퓨타를 어떻게 작동시켜야 되는지 책을 써라 이거야. 니가 아는 대로 다 적어라 이거야. 그래가 내가 미국에 온지 그, 한 1년 반을 넘어가지고 2년이 되는데 매뉴얼을 두 권을 썼어. 매뉴얼을 두권, 나 들어앉아서. 애들 하다 문제가 생기면 나가서 해결해주고 들어앉아서 쓰고. 그래가지구 이 미국 가이들이 10년, 15년 걸려야 진급하는 오퍼레이터에서부터 그, 이, 그 매니저, 저저 수퍼바이저 급의 그 저,저 데이터 수퍼바이저라고 하는게 어시스턴트 매니저, 매니저 보까지 한 10년, 한 15년 걸린다고. 그거를 한 3년 안에 그냥 올라가버린거야. 3년 안에 올라가는데 아무도 컴플레인을 못해, 그거 그냥 같으면 노조에서 당장 반기들고 일어나가지구 하는데. 왜냐면 전부다 나한테 와서 배웠고 내, 저저 내가 없으면 컴퓨타가 안 돌아가니까. 지들이 어쩔 수가 없는거야. 그건 노조 아니라 할애비라도 그건. 그래가지고 딱 됐는데 그때 우리 그, 내가 인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돼서 인제 컴퓨터룸을 관장하는 프로그래머에서 프로덕션 컨츄롤러라는게 됐는데 여기에서 이...고 위에가 인제 매니저야. 내가 3년 있으면 매니져가 될건데. 가만 보니까 우리가 프로그래머가 한 400명 되고 매니저 1이 한 70명 멍도 되고 매니저 2가 15명 되고 매니저 3는 우리 디파트먼트 치프야. 매니저 1 70명 중에는 유색 인종이 흑인하고 히스패닉이 한 몇 명 섞였어. 매니저2는 완전히 백인이야. 매니저 3는 치프는 당연 백인이고. 가만 보니까 내가 3년 후면 매니저 1까지는 올라가겠는데 그기에 올라가기는 그래스 씰링(Glass ceiling)이야, 유리 천장이야. 그래서 내가 저거 하러 내가 미국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우여곡절 많아서 내가 이런 속에서 있는 거 보다 내가 이것 내가 하기 위해서 내가 미국 오지 않았다, 해가지고 3년 8개월 만에 그 매니저 되는 것을 저...포기하고 내가 인제 카운티를 떠났지. 떠나서 어...그때 인제 마침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자리를 잡아가지고 집을 사기 시작하는 때야, 인제 70년대 인제 후반에. 그래서 인제 나도 집을 그 카운티에서, 카운티는 얘기가 길지만 카운티에서 한 잡을 뛰고 밤에는 또 한 잡을 뛰었어. 그래서 내가 두 잡을 한 2, 3 년 뛰었지. 그래 두 잡을 뛰니까 갑자기 돈이 생기는 거야. 그래서 우리 한국에 있던, 두고 왔던 아들도 데려오고 여기서 애들 둘 낳고. 그, 갑자기 우리가 식구가 둘이 와가지고, 와이프하고 나하고 둘이와서 둘이 벌어서 둘이 먹고 살다가, 인제 그 다음에 인제 내가 인제 대학원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니고 했는데 갑자기 우리 와이프는 애들 셋 봐야되고 내는 혼자 벌고. 이래가지고 그래서 혼자 벌게 되가지고 내가 대학원을 고만두고 한 잡을 더 해가지고 투잡을 뛰었던 거지. 그러니까 아침 새벽 아침, 한 다섯시나 여섯시에 일어나가지고 7시에 출근해서 3시 반까지 카운티에서 일을 하고 고 다음에 5시에 다른 잡에 가가지고 거기서 밤 1시, 2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와서 한 다섯시까지 자고 일어나는 거야. 근데 다향히 세컨 잡은 그것도 풀타임 잡인데도 그, 내 혼자 일을 해. 그러니까 인제 낮에 프로그래머들이 일을 해놓은 것을 밤에 내가 그걸 테스트를 하는거야. 나한테 다 테잎하고 인제 잡을 주며는 내가 혼자 그걸 하는데 거의 매일 그냥 한 몇 시간만 하면 되. 그거 다 하면 나는 그냥 가도 되는게 내 혼자 하니까. 그러나 8시간 페이를 해주지. 그러니까 풀타임 투잡이지만 그렇게 컴퓨타 오퍼레이터를. 그니까 카운티 처음 취직할 때는 힘들었는데 그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잡을 하나 더 구하려고 하니까 서로 오라고 해. 그래가지구 그 때 갔으면 지금 달나라 가는 화성 탐사선 뭐보내는 뭐 JPL이라고 나사 산하에 있는 제JPL, 제트 추진 연구소라고 파사데나(Pasadena)에 있는데 거기에서도 오라 그러고 또 유니백 아이들이 철수하면서 카운티에서 일하는 것의 다섯배를 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그런데 거기 컨설팅 팀에 가면 그 여기 저기 미국을 떠돌아야돼. 그니까 우리가족은 여기다 두고. 그 와이프와 애들은 여기다 두고 나는 시카고가서 6개월하다가 뭐 어디 샌프란시스코 갓다가 미국 전국을 돌아다녀야되는거야. 그니까 이것이 마이너리티로. 카운티 잡은 신분이 보장되는데 그거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거야. 그래서 안 갔다고. 뭐 JPL에서 오라고 그러고 얘들도 가자고 그러고. 아마 얘들 따라서 컨설팅 팀을 갔을면 내가 실리콘 밸리에 가가지고 아마 IT사업의 뭐 부자가 되었을 수 있어. 또 JPL에 갔으면 지금도 이게, 우주선 가는거 추적하면서 저기 이게 과학자로서 지금까지 살았을지도 몰라. 근데 이제 다른 잡을 하나 해가지고 살다가는 아, 인제 그 다 그만두고 나와가지고 나도 인제 집을 사고 그 당시 사람들이 집을 살 때 우리 세리토스(Cerritos)에서 어...이 부동산을 시작을 했어. 왜냐면 부동산을 왜 시작했냐면 집 하나만 팔며는 한달 월급이 나와. 그러니까 공연히 투잡을 뛰면서 밤 새서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가지고 밤 열두시 한시에 들어가는거 할 필요가 없는 거야. 뭐 그냥 주말에 처음에는 인제 이쪽 세컨 잡을 그만 두고 카운티에서만 일하고 주말에 인제 부동산을 하고. 어 그런데 이게 뭐 수입이 공연히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거야. 이제부턴 돈을 버는 거다. 컴퓨타 해서 한국 돌아간다는 생각을 버리고서 이제 돈을 버는거다. 그래가지고는 나와가지고 부동산을 했는데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뭐든지 하면 내가 혼신을 다 해서 하는대신에 하나님이 다 그렇게 다 해주셔, 잘 해주셔. 부동산을 하는데 그 당시에 여기에 주간 신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우리 대학 선배가 편집 부장을 했어. 야 너 부동산 한다니까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동산에 관해서. 그래가지고 나는 뭘 하면 열심히 하거든. 그래가지고 도서관에서 찾고 해가지고서는 글을 ’투자로서의 주택 구매‘ 그러니까 집을 사는게 어떻게 이게 집을 내가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투자로서 이게 어떤 가치가 있으냐. 한국에서는 이게 돈을 다 주고 사잖아. 근데 여기서는 10%만 내면 사는거야. 10퍼센트만 내면 90퍼센트는 은행에 론을 받아가지고 하니까 이 집을 사가지고 10퍼센트가 올라간다, 그러면 내가 투자한 것에 비해서는 100퍼센트가 올라가는게 되는거야. 그렇잖아. 그래서 이게 이게 집을 사가지고 금방 100퍼센트가 올라가는거야. 그 막 올라갈 때 20퍼센트 올라가면 200퍼센트 올라가는 거고. 내 투자한 거에 비해서. 레버리지(leverage)라고 그래가지고. 그런걸 할 일곱 번 썼어.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근데 한국에 가면 조하유라고 저저저, 아니, 아이고, 박, 박 뭐 월터박이라고 나중에 한국에 가서 국회의원까지 했어. 이 친구가 부동산에 대해 글을 쓰는데 이 친구는 용어해설을 하는거야. 용어 해설을 하니까 일반인들은 읽을 필요가 없는거야. 그런데 나는, 내 글은 굉장히 재미있어. 이해하기 쉽고. 그러니까 이게 부동산 시작하자마자 부동산 전문가가 되가지고 손님들이 그냥 막 미어지게들 들어오는거야, 다 핸들을 못해. 그래가지고 토요일 일요일날은 한 사람에 두시간씩 해가지고 10시부터 12시까지 누구, 고 다음에 누구, 누구, 누구 해가지고 하루에 다섯명씩 소화를 하는거야. 그렇게 주말에 열명씩. 이래가지고 한 채만 팔면 월급쟁이보다 나은데 나는 많이 팔때는 그 한달에 열채, 열 다섯채까지 막 파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3년만에 밀레어네어(Millionaire)가 됐어. 어. 그게 거짓말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뭐 한, 한달에 집 한 두어채만 팔면 그 여긴 10퍼센트만 다운하면 되니까 한 두, 두어채만 팔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어. 그러고 내가 꼭 살려고 하는게 아니라 이게 손님들한테 소개했다가 이게 깨지니까 그러면 그걸 알고 저, 내가 레퓨테이션(reputation)이 있어야되니까 아, 이게 캔슬한다고 그런 것 보다 그건 뭐 내가 산다고. 돈이 있으니까. 그거 캔슬되면 나는 캔슬되는건 내가 사는 거야. 내, 또 돈이 있으니까. 이래가지고 한 삼년 하고 나니까 부동산이 한 열 개가 돼. LA에 아파트가 한 20 ㅇㅇ141108 조재길01_02:17:37짜리 아파트가 생기면그래가지고 밀리어네어가 된거야. 밀리어네어가 되고 부동산 회사를 내가 차리고 그래가지고 지금 윌서에 가면 이게 한인 건물들이 많거든. 근데 그 당시에는 여기 윌셔에 한국스토어가 없었어. 내가 이제 윌셔 거리에다 첫 번째 사무실을 낸 사람이야. 부동산 사무실을. 그래가지고 저 윌셔거리에다가 부동산 사무실을 내가지고 한 직원이 한 삼십명 되고 전부다, 이 부동산 하는 사람들을 유니폼을 입혀가지고 명찰을 달고 미국식으로 명찰을 달고. 완전히 사무실을 뭐 그냥 번듯하게. 상담실도 만들고. 그 당시에는 그런 한국 부동산이 없었다고. 완전히 미국부동산하고 맞먹는 정도의 그런 걸 돈을 가지고 그걸 차렸어. 돈을 가지니까 그렇게 채렸는데 그러고 나서 인제 그 윌셔에서 사무실 차렸는데 이게 79년, 어...에 인제 채렸지. 그게 그 12.12 사태인가? 아니아니, 박,박,박,박,박정희 면담자 : 10.26. 구술자 : 박정희가 죽은거야, 이게. 박정희가 죽고 한국에 서울의 봄이 왔지. 서울의봄이 오니까 그때까지 한국의 언론이 억눌렸다가 이제 우리도 눈을 세계로 돌리자, 이래가지고 KBS가 처음으로 시도한 프로그램이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 프로그램을 기획했어..그래가지구 세계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들을 뽑아가지고 그거를 취재를 해가지고 그몇 사람을 8.15 특집 프로그램으로 낸다 그랬서. 지리산 소설을 쓴 이병주라는 그 소설가가 있는데 이 양반이 팀장으로 PD 한명, 카메라맨 한명 해가지고 LA 룰 왔어.. 와가지고. 내가 어떻게 해서 거기 뽑혔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나를, 하고 우리 회사를 두 주를 쫒아 다니면서 인제 취재를 하는 거야. 우리부동산 회사하고 나하고의 그 석쎄스 스토리를. 그러니까 내가 세계 속의 한국이 1호야. 그게 80년 그, 4월 그, 말에 인제 4월 후반부에 두 주 동안은 와서 취재를 했어. 그러고 저, 2호를 취재하기 위해서 뉴욕으로 이 사람들은 갔지, 내 취재는 마치고. 그게 뉴욕으로 가서 2호를 취재하는 동안에 5·18 광주 사태가 벌어졌어. 그래서 이 취재팀들이 그만 철수를 하고 그 프로그램은 방송은 안 됐지. 나만 취재를 하고 그러다 내가 하여튼 성공한, 그 미국 와가지고 74년에 와가지고 79년이면 한 오년만에 카운티에서 글래쓰 실링까지 한 3년 만에 그 올라갔다가. 와서 부동산을 해가지고 76년에 인제 부동산, 76년에 여기서 77, 78, 79, 3년 동안 해가지고 밀리어네어가 됐어. 그래 80년에 내가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되고. 광주 사태가 난거야. 그래서 이게, 돈벌, 그래서 사람들이 ‘저 조재길이는 평생 일 안하고 먹고 살 돈을, 근데 저 그 돈을 다 쏟아 붓고 저렇게 지금 파산단계에까지 갔다하는 정도로. 내 인생을, 이게 아주 잘 나가던 사람이, 그때 아주 프로젝트가, 그것까지 얘기하면 오바되니까. 프로젝트가 내가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고 꿈이 대단했어. 이 뭐, 부자가, 사실 80년에 밀리언(Million)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LA에 몇 명 안 돼, 지금은 뭐 많지만. 어...가장 성공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으니까 KBS에서 나를 세계 속의 한국인 1호라 했지. 그래, 광주사태가 났는데 나는 광주하고는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이야. 광주라는 대를 나, 전라도를 알지도 못해. 충청도 사람으로 안동에서. 대학에 가가지고 우리 과에 일고나온 친구하고 또 한, 전주, 전주 고등학교 나온 친구 두 명이 저 호남 사람이었었어. 그친구들하고 난 그냥 친하게 인제 지냈는데 그게 나하고 광주, 호남사람하고 인연의 전부야. 졸업하고는 미국에 오고. 그랬는데 그 광주 사태가 났으면 나는 어떻게든지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우리 부모님들, 내가 미국 오는 걸 반대했던 부모님들. 그래서 광주 사태가 났을 적에 사실은 나는 이 시국에서 애써 그걸 보지 않으려고 했어. 그러고 특히 이제 이게 이병주씨가 그때 나하고, 내가 큰 포르젝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하는데 한 천만 달러가 필요했었다고. 그 이병주씨가 이게 기자 출신인데 아주 인맥이, 아주 호걸이야. 그래가지고 정주영씨 하고 친해. 정주영씨가 그, 이, 남미 쪽에, 남미쪽에, 그 제철소를 만들겠다고 돈을 해외로 보내논 돈이 있는데 그거를 자기가 이, 내가 하는 프로젝트에 그 투입을 하도록 하겠다고 이래가지고. 아, 광주사태가 나면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꿈은 버리고 미국 시민권을 받고 성조기 앞에 미국시민으로서 선서를 했어. 그 80년 8월에. 8월 1일에. 8월 1일에 내가 미국 시민이 됀다고. 근데 그러면서 이 양반이 나 취재하고 가면서, 제가 인제 내가 시민권을 받으면 그,그 한번 한국에 들어가겠다고. 우리 어머님 회갑이기 때문에 내가 들어오겠다고. 그랬더니 들어오면 자기가 정주영씨하고 연결해줄테니까 이, 프로젝트 이거 대단한 프로젝트니까 우리 같이 한번 해보자고. 그래가지고 나는 인제 그 프로젝트도 해야 되거 한국에도 들어가야 되고 하니까 광주사태가 났을 때 나는 아무, 돌아보지 않고 외면을 했지. 8월 1일날 인제 그 시민권을 받고 8월 그, 후반에 한국엘 들어갔어요. 우리 아이들 셋을 데리고.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한데요, 당시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애써 외면은 하셨지만 당시에 그 한인, LA에서도 한인들을 중심으로 5월부터 뭐 6월까지 5·18과 관련한 뭐 항의 시위들이 구술자 : 항의 시위들 있었고 여기서는 면담자 : 그런 걸 쫌 목격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 어, 여기서는 텔레비, 신문에서는 뭐, 미국신문에도 광주 사태가 보도가 되고 미국 TV에서도 광주 사태가 나오고 그래서 한국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지만 여기서는 그러게 미국 신문과 미국 tv를 통해서 이 사태를 알고 거기에서 인제 이게 이, 거, 운동 얘기니 다음에 할테니까. 하튼 교포들이 광주사태에 대해서 데모를 하고 항의를 하고 하는 그런 움직임이 있었지만 나는 애써 외면을 하고 8월 말에 한국을 들어갔어요. 한국에를 들어갔는데 한국을 가보니까 내 느낌이 서울이 유령의 도시야. 아무도 얘기를 안 해. 글고 친구들도 서로 만나지를 않아. 친구들도. 그래가지고 서로 친구들 한자리에 딱 모아가지고 야, 하고서 한번 하면 좋겠는데 한명씩 밖에 서로 안 만나려고 해. 그럼 얘, 얘, 얘, 나하고 만나자고 하면 만나. 그럼 만나고, 쟤 만나고 그러고 고향에 가도 아무도 안 하고. 그러고,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우리 어머님이 ‘너 미국에 가길 참 잘했다’ 그렇게 반대하시던 분이. 그러면서 나는 애들 뭐 셋, 그 손자 손녀들 셋을 데리고 왔으니까. 우리 어머니 그렇게 미국에 가는 걸 날 불효자로 하더니 그 ‘니가 어디 가서 살던 니 자식들 잘 키우고 잘 살면 괜찮다. 나는 괜찮다. 너 미국 잘 갔다.’ 그러셔. 그래가지고 그 한국 방문을 하는데 내가 떠나왔던 유신 때보다도 이거는 완전히, 뭐 택시를 타도 택시 기사도 뭘 물어봐도 얘기를 안 하고 아무도 얘기를 안해. 버스를 타도 안 하고. 뭐 사람들 전부다 입 다물고들 다들 있는 이게 무언의 도시, 침묵의 도시, 그 유령의 도시더라고. 돌아왔어. 돌아와서 이제 그, 내가 신문을 시작을 했어. 신문을 시작한 게 내가 신문을 시작한건 광주 때문에 그 민주화 운동을 위해 신문을 시작한 건 아니고 내가 인제 부동산 회사를 크게 하니까 부동산 회사의 선전을 위해서. ????주간 광고????라고 그래가지고 우리 회사 선전. 우리가 회사가 크니까 광고비가 많이 나가는 거야. 그 돈을 가지고 신문을 맨들어서 우리 회사의 광고도 하고 다른 사람 광고도 받고. 이래가지고 ????주간 광고????라는 신, 광고지를 만들은 거야. 그러니까 ????주간 광고????라는 게 거기에 기사는 없어. 그냥 뭐 경제 동향 뭐 이런 거, 고 다음에 TV 안내 이런 것만 해서 했는데 그게 신문이니까 한호 두호 만들면서 신문을 좀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니까 세상만사, 뭐 이래가지고 무슨 가십거리를 이렇게 쓴 거야. 근데 다른 신문들이, 한국 신문들이 광주사태에 대해서 보도를 전혀 못하는 거야 근데 그거를 미국 신문이나 미국 방송을 통해서 들었는데. 거기에 세상만사 이런데 전두환 고스돕, 최규하 고스돕 이런 거를 가십거리로 실어. 그러면 그거를 실었다는 자체가 이게 막 센세이셔널 한거 야. 그러니까 어, 이런 신문이 다 있느냐고, 최규하 고스돕, 전두환 고스돕을 이란 걸 쓰는 신문이 있냐고.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점점점점 이게 기사가 늘어나는 거야. 그래가지고 사람들의, 이게 독자들이 원해서, 신문을 ????주간광고????라고 맨들었는데 이게 점점점점 일반신문으로 바뀌어가는 거야. 그래서 이게, 그 당시에 일간지나 이런 대서는 뭐 한 몇 천부 밖에 발행을 못했는데 우린 이만 장씩 뿌리니까, 우리 신문의 광고효과라든지 그 파급력이란건 엄청난 거지. 그래서 어, 이게 저, 26호인가부터, 29혼가에서 ????주간광고????라는 이름을 버리고 ????코리안 스트릿 저널???? 이라는 영문 이름으로 일반 종합 주간지로 바뀌었어. 그래서 그게 그만 내가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신문을 만든 건 아닌데 어느 순간에 시대의 그 요구에 따라가지고 이게 민주화운동을 대변하는 신문으로 이게 바뀌었지. 근데 이제 그 당시, 거기에 인제 미국의 민주화, 미국의 운동은 인제 독립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다가 독립운동 끝나고 한국에들 들어갔다가 거기서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못사는 그 독립투사들이 다시 이게 미국에 와가지고 운동을 했지마는 이게 노인네들이 모여가지고 그냥 하는 우국지사의 그냥. 근데 민주화 운동이 대중운동으로, 반 독재 운동이 대중운동이 되는 데는 몇 가지, 인제 광주사태를 계기로 해서 이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이게 민, 교포 사회와 교포 사회의 민주화 운동 그룹을 사실 그 미미한 몇몇 사람들의 그, 이게 운동이었는데 그거를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이게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한 거야. 그 다음에 인제 83년엔가 윤한봉이 인제 미국으로 오는거. 와가지고 그 전까지는 뭐 그냥 각자들이 각자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모여가지고 선언문 작성해서 선언문 한번 낭독하고 또 이게 전두환 온다 하면 가서 데데, 데모하고 그게 다야. 근데 인제 이게 윤한봉이 와가지고 LA에서, 83년인가 와가지고 그, 이, 민족학교라는 걸 만들었어. 이 민족학교에서 윤한봉이 상주하고 여기서 인제 전준호라고 하는 거기, 교장을두고서 민족학교를, 그 마당집을 만들고 고 다음에 민족학교를 만들어서 청년들을 훈련을 시키고 고 다음에 상주하는 상근자가 있고. 그러니까 직업 운동가들이 시작이 된 거야. 직업 투사들이. 그, 그 인제 ????스트릿 저널????과 윤한봉이의 민족학교, 그 마당집, 민족학교, 한청, 한겨레 운동연합, 이것이 인제 LA에 생기고 뉴욕에 청년학교가 생기고 시카고하고 워싱턴에 이렇게 생기면서 미국이 하나의 그, 저 운동권의 이, 조직화가 되고 또 전문적인 인제 운동가들이 나오고 그러니까 그 당시 여기서 민족학교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은 이게 뭐, 신학 공부를 하던,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도 다 때려치우고 유니온 신학 다니던 친구도 때려치고 여기서 그냥 전업 운동가가 되고.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친구도 때려, 학교를 때려치우고 오고. 이래가지고 이 운동이 되고. 이거를 동포 사회에 알려. 이거를 아무도 보도를 안 하는 거야. 한국일보, 중앙일보, 세계 신문이 있었지만 아무도 보도를 안 하고 그, 이게 이게 주간지들이 있어도 보도를 안하고. 했는데 그거를 우리 ????스트릿 저널????이 그거를 보도를 하고.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 ????코리안 스트릿 저널????을 발행을 하시면서 물론 선생님도 당시의 그런 한국 사회에 대한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은 많이; 가지셨지만 애써 좀 이렇게 외면하고 계셨던 부분들도 분명히 쪼끔 있었던 것 같고 지금까지 이렇게 부동산 활동을 하시고 다른 어떤 직업을 하시고 선생님 개인 어떤 그런 활동들을 쭉 하셨는데 ????코리안 스트릿 저널???? 만들면서 약간 좀 한국 정치 사회에 좀 관심이 많은 분들과 인제 교류를 쪼끔 어찌보면 시작이 된 부분이 있잖습니까. 구술자 : 근데 나는 단체에 가입을 안 했어. 근데 모든 단체가, 이 민족 학교 뿐만이 아니라, 뭐, 그그, 무슨 기도회? 나중엔 통일염원 기도회가 됐는데 목요 기도회, 뭐 고 다음에 뭐 여기에 거, 뭐 통협,. 이렇게 많은 단체들이 있지 그 단체들이 전부다 사실은 ????스트릿 저널????을 통해서 운동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몇몇 사람들이 운동을 해도 그것이 교포 사람들이 알지를 못해. 외면을 당하는 거야. 근데 이 2만장이나 발행을 하는 집집마다 이렇게 배달하는 신문이 그거를 다 보도하니까 이게 영사관이 인제 난리가 난 거지. 면담자 : 그런 부담감은 쫌 없으셨습니까? 이런 기사들, 이러 내용들의 내용을 선생님이 ????코리안 스트릿 저널????에 싣는 다는 게 지금까지 이루어 오신 이런 일정정도의 부분도 있는데 좀 외압이랄까, 뭐 그런 것이... 구술자 : 외압이 엄청났지 면담자 : 걱정스럽진 않으셨습니까? 구술자 : 어, 근데 그 당시에는 젊으니까. 젊고 돈이 있으니까. 이게 돈을 마켓을 해가지고 한푼, 한푼, 페니를 가지고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았으면 그렇게 못써. 나는 어느 순간에 한 3년 사이에 돈을 돈이 귀한 걸 모르는 거야. 그냥, 그냥 쓰는 거야. 그리고 탄압을 하면 그 영사관에서 나를 설득하려고 그 총영사가 자기 총영사 관저에, 그 당시에 처음 만들었을 때 총영사 부인이 사대 선배야. 그러니까 선배로서 후배를 초청하는 형식으로 초청을 해가지고 같이 인제 식사도 하고 그런데. 나는 선배로서 나하고 이렇게 초청하는 건 고마운데 내 신문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아라. 그러고 인제 그러니까 처음에는 설득을 하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이게 인제 ????스트릿 저널????하고 인제 부총영사가 ????코리안 스트릿 저널???? 전담을 하다시피 해가지고 이걸 어떻게든지 조재길이하고 ????코리안 스트릿 저널????은 빨갱이다, 그러고 여기다 광고를 못내게, 광고를 못내게 해서 교포사회로부터 이게 격리를 시키려고 아주 무한히 노력을 했지. 그러니까 나는 그, 내가 3년만에의 밀리언이 이게 84에 내가 뱅크럽시(Bankruptcy)를 할 정도가 된 거야. 그런데 그 84년이 뭐냐하며는 ????스트릿 저널????이 일간지, 그럼 교포들이 일간지 만드라고 한국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서 쓸데없는 신문이니까 이게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일간지를 발행해야 된다고 나한테 어떻게 압력을 가하는지. 시대가 나를 그렇게 몰고 간거야. 그래가지고 나는 일간지 되면 뭐 금방 이게 일간지가 큰 신문이 될 줄 알았어. 그래가지고 어... 1년에 40만 불을 투자를 해가지고 내가 일간지를 발행했어, 84년에. 그니까 그 전에 주간지 한 3년 발행하는 동안에 돈을 많이 썼고 40만부를 그, 투자를 해가지고 하니까 그 밀리언 달러가 순식간에 사라진 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이게 한국 정부의 광고 탄압으로 인해서 이게 운영이 안 되는 거야. 그래가지고 파산단계에까지 들어갔지. 그랬는, 인제 파산단계에 들어가면서 일간지를 9개월 만에 40만 불을 없애고 문을 닫고 나는 돈이 없어서 뱅크럽시를 못했어. 왜냐면 변호사 비용을 캐쉬, 이게 현찰로 가져오라는거야. 현찰로 2만 불을 가져오라 그러는데 현찰 2만불이 없어가지고 내가 파산을 못하고 그러고 나서 인제 그때까지는 내가 운동권에 관련을 안 하다가 그리고 나서는 어느 순간에 내가 민주화 운동의 그냥 한 가운데 선거야. 그래가지고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사실은 운동의 중심이 됐어. 그러니까 시작은 인제 민족학교에서 그게 이제 가장 우리가 본격적으로 인제 정식으로 한 게 광주 위령탑 건립 기금 모음. 그거는 이제 한청에서 민족학교에서 하면 그걸 우리 신문이 누가 얼마 내고 누가 얼마 내고 이걸 하고 그 정말 가슴 아픈 스토리들을 보도 하고. 그러면 그거에 뭣해가지고 또 모급이 들어오고 그러고 그것이 또 나가고. 이걸 해가지고 황석영이를 초청해서 하고 해가지고 그때 뭐 정확한 액수는 저 책에 아마 나올 거야. 그 모금을 해서 보내고. 그러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한 게 한국에서 양심선언운동을 했어. 양심선언 운동을 했는데 뭐 한국의 치과의사도 하고 의사도 하고 학생도 하고 교수도 하고. 그때 인제 내가 이게 미국에서 양심선언운동을 조직을 해가지고 그 때까지는 이게 그때까지는, 이게 친정부 어용이었던 상공회의소 회장 한인회장들을 한 30명을 모아가지고 직선제 개헌 양심선언운동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5일, 저저저, 그 6월 항쟁. 6월 항쟁 때는 그, 내가 누구야, 저 서경석이. 한국에 가 있는 서경석이. 서경석, 서경석 목사. 서경석 목사가 뉴욕에서 평화 대행진을 조직을 하고 내가 여기서 이게 시국선언 대회를 조직을 하고 그래서 양쪽에서 같은 날 우리가 해서 한 5천명이 모여가지고 그때 미국의 그때 tv방송들이 전부다 와서 취재를 하고. 그래서 그 이제 위령탑 건립운동, 양심선언 운동, 그 다음에 6월 항쟁 이거는 완전히 인제 ????코리안 스트릿 저널????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가지고 해서 6월 항쟁으로 해서 민주화 운동으로, 민주화되는 과정으로 들어가지. 근데 민주화 되는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에서 ????한겨레 신문???? 나오고 ????말????지에서 막 보도를 하고 ????새 국민 일보????, ????세계일보???? 나오면서 청와대 비사, 뭐 새마을, 정경환이 뭐 어쩌고 하면서 이게 온갖 스토리가 나오니까, 저쪽에서 다 나오니까 인제 우리 신문에서 볼 게 없는거야. 그리고 광고를 못해가지고 내가 인제 완전 뱅크럽시 단계에 들어가고. 그래서 우리 신문은 민주화가 되면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거지. 그래서 자세한건 저기 책에서 보면 되고. 설 자리를 잃어가지고 결국에는 돌파구가 그, 통일운동, 민족 화해와 통일운동 사이드로 하니까 오히려 이게 빨갱이 이미지가 더 짙어지고 그래서 타운 번영회라는 데서, 타운번영회에서 나를 빨갱이로. 나하고 ????코리안 스트릿 저널????을 빨갱이로 하니까 그래서 소송을 하고. 그리고 그 소송이 끝나고 나서는 내가 인제 북한에 취재를 다녀오고 그러다보니까 이제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 책을 쓰고. 그러면서 통일운동에 깊숙이, 이렇게 민주화 운동에 깊숙이, 그리고 통일 운동에 깊숙이. 이러면서 나는 인제 완전히 빨갱이 딱지가 붙고. 그러다가 인제 90년대 후반에. 아, 내가 뭐, 인제 그니까 신문사를 문을 닫고. 그 다음에 아, 라디오 방송을 한 3년. 그 인제 일주일에 한번씩 칼럼 방송을 했는데. 내가 뭐 제대로,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해 가는거야 하도 빨리 변해가니ᄁᆞ 내가 세상 돌아가는걸 제대로 알고나 떠드냐 말이야. 이래가지고 이...아, 내가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어...70, 이, 그 그러니까 78년인가? 면담자 : 97년입니다.아참, 97년 12월 17일 날 대통령 당선되고 나서 12월 말로 내가 한인 사회에서 떠났어. 한인 사회에서 모든 직책을 버리고 한인 사회를 떠나가지고 그때부터 저 남쪽으로 회사를 옮겨가지고 인쇄소를 옮겨서 그니까 저, 빈털터리가 됐다가 3년 동안 그 인쇄소를 해가지고 또 돈을 벌었어. 그래 나는 전 3년 후 3년이라 그래. 부동산 해서 3년을 해서 밀리언을 벌고 그거를 민주화 운동가에게 다 쏟아 붓고 그 다음에 98, 99, 어, 2000, 2001년, 4년 동안. 98년은 준비하고 그래서 3년 동안 저 남쪽에 가서 인쇄소를 해가지고 돈을 벌고, 그걸 가지고 2002년에 내가 회사를 정리하고 리타이어를 했어. 리타이어를 하면서 아, 내가 지금부터 뭘 할 것이냐. 그래서 민주화운동, 통일 운동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냐. 여기와서 내가 설 자리가 없더라고 그래서 2002년부터 미 주류 사회에 인제 한인 정치력 신장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한인 정치력 신장운동 쪽으로 나가서 거기서 한 인제 지금까지 인제 12년 동안,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당선되가지고 지금 이제 8년 시장, 시의원을 마치고 내년 3월이면 인제 끝나. 면담자 : 그면 계속 이게 끝나시는건가요? 또 하실 수 있는 건가요? 구술자 : 어, 인제 이게 시장, 시의뭔은 4년 임기 두 번밖에 못해. 면담자 : 그러면 다른 뭐, 도전을 하시겠다고? 구술자 : 그거는 인제 지금 고민 중이야. 그래서 뭐를 할 것이냐, 그래서 지난 한 2년 동안은 내가 인제 내년에 3월에 끝나면 뭘 할 것이냐. 그러면 이 시대에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그래가지고 얘기하면 복잡하니까. 나는 한국이 한반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한국전쟁이 60년 동안 끝나지 않은 데에 있다. 이 60년 동안 끝나지 않은 한국 전쟁을 끝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고 이 한국 전쟁은 미국과 북한의 전쟁이다. 그러면 이 한국 전쟁을 끝내는 거는 워싱턴에서 어...주도적으로 끝을 내야 되는데 그러면 이게 한국 전쟁을 끝내는 데에 미주에 살고 있는 이 미주 동포들의 역할이, 워싱턴에다가 한국전쟁을 끝내 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인제 작년에, 작년에 책에 서문에 나오지만 1월 7일 날 워싱턴에 오바마 저...취임 2주년에 갔다가 국회의원 7명하고 얘기하면서 아, 이게 아니다. 한국 전쟁을 끝내기 위한 책을 한 권 써야겠다, 해서 인제 ????평화가 먼저다」. 그 다음에 통일보다도 우선 남북이 총부리를 내려놓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이다. 그래서 인제 금년에 영문판을 준비를 해서 내년부터 인제 한반도 평화운동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인제 고민을 하고 있고 그런데 갑자기 인제 연방 하원을 출마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걸 가지고, 지금 책을 1월 달에 영문판을 내려고 하다가 우선 일단 홀드를 하고. 지금 이러고 있어. 이거 은호기 선생 오셨을텐데. 면담자 : 선생님 그 마지막으로 제가 질문을 한 가지 좀 이렇게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인제 세리토스에서 시장도 하시고 시의원을 지금 계속 지속적으로 하고 계시는데, 그 한국인들이 한국계 미국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한국에, 아니 미국에 한국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정치적 목소리는 굉장히 좀 미비한 것 같아요. 다른 어떤 부분에 비해서. 그래서 선생님이 쫌 생각하시기에 이런 미국사회에서 한국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지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어떤 좀 방안들을 어떤 생각들을 좀 가지고 인제 이걸 더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더 있어야한다고 보십니까? 구술자 : 우리 동포사회가, 어...이제 다른 커뮤니티, 중국 커뮤니티, 이민 역사 200년이 넘은 중국 커뮤니티와 비교는 안 되지만 어...상당히 굉장히 여러 면에서 성장을 하고 어...이게 큰 역할들을 하고 있었요. 근데 가장 뒤떨어진 부분이 정치 부분이야. 정치부분은 내가 이게 정치활동을 시작하던 그 당시는 완전히 거의 없다시피. 물론 그 10년 전에 김창준씨가 연방 하원의원 당선된거 있지만 그거는 특수한 케이스고. 그 이후에, 그 이후에 공백이 생기고 그래서 아, 한인 정치력 신장이 가장 중요하다하는 점에서 내가 인제 뛰어들었고. 근데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 나는 이게 커뮤니티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어...꾸준히 이렇게 힘을 합쳐서 목소리를 내야 된다, 그러니까 정치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해. 첫 번째는 우선 그 후보자가 있어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정치력이 왜 이렇게 약하냐?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커뮤니티는 당선자가 많은데 우리는 왜 없느냐? 걔들은 출마를 했고 우리는 출마를 안 한 거야. 후보자가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떨어지더라도 출마를 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그 후보자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후보자들을 키워야 되고 두 번째는 이게 투표를 해야 되. 근데 이게 지금까지는 한인 후보가, 한국 사람들은 한인 후보가 없으니까 투표하는데 관심이...이게 남의 농, 남의 일이야. 그니까 내가 그 처음에 출마를 했던 거는, 나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었어. 왜 한인 사회에서 신문을 만들고 그러니까 카운티에서 3년 8개월 일한 거 외에는 난 영어를 해보지 않은 거야. 미국을 오래 살았어도. 영어를 전혀 못해. 저기 얘기 나오지만. 그니까 그런 내가 당선돼야 된다고 생각한건 아니고. 한국 사람은 한국 후보가 있어야만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를 하니까. 우리가, 내가 투표용지에다 이름을 올려서 유권자 등록 시키겠다, 해서 시작을 한 거라고. 그 다음에 인제 돈을, 돈이 중요한 것이야. 그래서 돈과 보딩 파워(voting power)와 이 후보자를, 이 세 가지 요건이 맞아야 되는데 이거를 위해서는 커뮤니티가 전체적으로 힘을 합쳐서 꾸준히 지속적으로 노력을 해가야 되는데 내가 나올 당시만 해도 후보자가 없었어. 그러나 이제는, 금년에도 29명이 출마를 해가지 22명이 당선될 정도로 이제는 상당히 정치력이 신장이 됐지마는 아직도 시작에 불과해. 시작에 불과해서 어...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런 점에서 민족학조가 나카섹(NAKASEC)이라고 해서 에...미국에, 미주동포들의 민권 운동, 또 정치력 신정 운동에 앞장 서는 건 참 방향을 잘 잡아서 하고 있다, 인제 그렇게 보지. 너무 내가 장황하게 하다보니까. 요번에 못한 건 책에 보면 다 나와. 면담자 : 알겠습니다. 긴 시간 이렇게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구술자 : 오케이. 육길원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육길원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0일 ○ 구술장소 : 미국 일리노이 글렌뷰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육길원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0일입니다. 네 선생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구술자 : 저도 반갑습니다, 수고 많습니다. 면담자 : 예. 그, 우선 좀 선생님의 살아오신 것을 좀 이렇게 말씀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언제 태어나시고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말씀을 좀 해주시면 합니다. 구술자 : 저는 1940년 2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데는 삼선교, 돈암동, 성북구. 그 다음에 제 본적은 서울특별시 낙원동 92번지입니다. 7남매 중 제가 두 번째 두 번째였고 제 위로 형님이 한분이 계시고 형제간에 상당히 우애가 많고 또 형제지만 친구 같은 형입니다. 면담자 : 그, 그때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에 당시 인제 일본 제국주의, 일제 시대였을텐데 거기에 대한 기억들은 있나요? 구술자 : 일제 시대 때에 그, 저, 뭐야 1945년에 해방이 되었죠. 그러니까 일제시대에는 한 세 살 때 서울에서 형님들이 와서 사진 찍어주고 그러던 기억밖에는 없고, 볼때. 사진이 있었기, 있었고 그 다음에 저희 아버님이 일본에서 공부하시고 할어버님이 경상북도 상주에서 농사를 크게 지으셨어요. 만석 가까이 지으셨다고 그래요. 팔천 석. 땅을 밟지 않으면 못 디딘다고. 박정희 부인 되시는 육영수, 육영수 여사도 먼 친척이죠. 그러니까 저희 아버님이 창수고 그쪽은 영수, 육영수 뭐 이렇게 3,4대 올라가면 다 같은 친척일 정도로. 그래서 인제 동경에서 공부하시고 바이올린을 치시고, 바이올린을 키시고 돈이 많으시니까 뭐 동경하고 돈을 많이 쓰셨죠. 할어버지가 돈을. 제가 낙원동 92번지가 본적인 것도 여기처럼 뭐 집 살 때 모기지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캐쉬를 갖다줘야 집 사잖아요. 종로에 기와집 사시구. 어머님은 신여성으로서 진명여고를 나오셨는데 농구도 하시고 뭐 자전거를 타시고. 여성이 그 당시. 개화된 분이고 그러니까 돈 많은 지주의 아들이 개화된 여성을 만나서 나를 낳은 거예요. 근데 아버님이 그래서 인천 부청에 다시셨어요. 부청이 지금으로 말하면 시청이죠. 그래서 잘, 공무원인데도 잘 살았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친일파는 아니었고. 그러니까 선창에서 배 들어오는 것을 관리하셨다고 해요. 그러니까 참 어려운 땐데 어렸는 대도 제 기억에 우리집에 밤이 막 자루로 왔다가갔다 하고 다섯 살 이전의 기억입니다, 이전에 살 때. 용동이래는데 살았는데 지금 그게 없어졌다고 그러더라교요, 역 앞인데. 동네 이름이 갈렸다 그러더라고요. 얼마 전에 가서 물어봤더니.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은 제가 어렸지만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건 어떻게 기억하냐면, 역 앞에서 살았다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역 앞에서 사람들이 막 스크럼을 짜고 그때 그 당시에 스크럼인지는 몰랐지만 막 어깨 동무를 하고 말이죠, 막 좋아서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백의 민족이, 마악 좋아서 왔다 갔다 이리도 갔다 저리도 갔다 하고, 뭐 태극기 흔들고 어디서 태극기가 났는지 만세 부르고 말이죠. 어렸을 때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8.15를 기억하는 사람이죠. 그리고 그게 해방 지난 다음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래서 서울서 학교 다니고. 그래서 해방의 기억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면담자 : 7남매에 부모님, 하면 아홉 식구인데 구술자 : 아홉 식구가 살았죠. 면담자 : 네. 좀 부모님께서 좀 경제적으로 풍요로우셔서 그렇게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그런 것은... 구술자 : 아니 아니요, 그거는, 그거는 해방 전의 얘기구요, 해방까지. 그 다음에 6.25 겪으면서 어...다 힘들었어요. 지주 자식들이든지 하여간, 모르겠어요. 친일파나 뭐 이런 매판자본으로 이병철이나 이런 사람처럼 성공한 사람들은 이렇게 잘 살고 그랬는지 몰라도 그 당시는 다 가난했고 가난이 또 흉이 아니었어요. 누구나 못 살 때니까. 전쟁으로 다 파괴가 되고 무에서 막 시작하고 그런 때니까. 그래서 저희두 어려웠습니다. 저희두 어려웠고 또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오프더 레코드(off the record)로 발언하는데 저희 아버님이 경마를 했어요. 이건 오프더레코드로 해주세요, 참고로. 그래서 가산을 탕진하셨고 어머니가 속을 많이 쎅였고. 그래서 저는 화토도 안 해요. 노름으로 집안이 망했다고 생각을 해갖고. 그래가지고 6.25 전에 아버님이 6.25 전에 그러셨던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게, 그 가난이 6.25를 겪으면서 더 어려워졌고 고 다음에 인제 박정희, 아니 노노,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정권으로 오면서도 계속 어려웠어요. 아버님이 책방을 하셨는데 9남매를 맥여 살리기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책장을 하기 전엔 체신부 공무원으로써 또 계셨는데 오랫동안. 보험 관리국에. 이 공무원 말단 5급인가 4급 정도 되셔가지고 계장인가 되시고 그랬는데 9남매, 7남매 맥여 살리기 힘들죠. 그래서 어... 부자 삼대를 못 간다고 제 경우는 지주의 자손이라기보다 오히려 참 서민, 그니까 저...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많이 겪었어요. 그래서 그게 내 성장에서도 그게 내가 신문을 제작하는데 그 가난이래는 게 많은 영향을 줬어요. 가난도 편견이래면 가난에 대한 편견을 제가 가지고 있어요.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싸울 수 있고. 그런 정서가 내가 못살았기 때문에, 눈물 젖은 빵을 맛 봤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가끔 들어요. 면담자 : 한국전쟁이 일어나시기 전에 인제 선생님께서는 아마 국민 학교 구술자 : 국민 학교 다녔죠, 3학, 3학년 다녔어요. 면담자 : 47년에 입학 하셨나요? 구술자 : 6.25는 1950년에 6.25가 일어났구요. 45년에 해방이 됐고 고 다음에 47년인가, 8년에 입학했을 거예요. 정확히 기억은 못하는데. 면담자 : 학교 이름이 기억하시나요? 학교 이름. 구술자 : 학교에서 처음 들어간 데는 종암 국민학교라는 데를 들어갔어요. 그리고 졸업은 서대문에 있는 안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러니까 서울서도 가세가 기울면서부터 외갓집에서도 살고 아버지가 집을 잽혔기 때문에 안암동에서도 살고 돈암동에서도 살고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서 학교도 옮겼어요. 군인들이나 은행 가족들이 전전을 하듯이 우리는 아버지 때문에 식구들이 인제 옮겨 다녔죠. 근데 어쨌든 서울에서 국민 학교를 다녔습니다. 면담자 : 방금 말씀하신대로 국민 학교 3학년 때 쯤 6.25 구술자 : 네 6.25가 났어요. 그쯤이 아니라 그때 일어났어요. 그게 1950년이었어요. 면담자 : 그때 다른 데로 피난을 가시거나 하진 않으셨나요? 구술자 : 좀 얘기가 복잡한데요. 어...6.25때는 서울시민이 거의 피난을 못 갔어요. 1950년 6월 25일은. 많이 그냥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앉아서 그 식량이 없어서 많이들 굶고. 호박죽 먹고 뭐 이렇게 연명하는 그런 시대였고. 그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1.4 후퇴, 한 해를 넘기고 1951년 중공군이 6.25 참전 했을 때 그때들 막 피난 간 거예요. 공무원들 막 차를 실어 나르고 열차로 실어날라 가지고 대전, 대구, 부산으로 가고, 그 다음에 이제 저 뭐 군인 가족들은 해군, 해병대 이런 데로, 진해로 가고 그랬는데 우리도 나가다 중간에 돌아섰어요. 7남매를 끌고 도저히 가실 수, 가실 수가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멀리 못 가고 갔다가 다시 또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런대도 공산주의에 대한 그 실체라고 그럴까, 참 허구라고 그럴까? 그런 걸 어려서 부터 느꼈어요. 이건 사기라고 그럴까? 아니면 선전 이런 거를 어린 마음에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공산주의 때문에 무지무지한 고통을 당한, 뭐 거긴 나뿐만 아니고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6.25래는 게 우리 세대, 이상 한때 준 영향이래는 건 이건 뭐 어느 거하고도 비교할 수가 없죠. 6.25라는 그 기점, 전환점에서 인생들이 막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이산가족이 생기고 무슨 더 많은 가난한 사람이 생기고 사람들의 그, 저 인성이 포악해지고 말이지. 그러니까 막 살기 위해서, 적자생존하기 위해서 남한테 이겨야 되고, 거짓말시켜야 되고, 사기 쳐야 되고. 그리고 피난민 잔뜩 왔으니까 남쪽 사람들은 이북치라 그래가지고 평안도 사람, 함경도 사람 싫어했어요. 그래서 지역감정 같은 거도 그런 데서 내재 되있었는지도 모르고. 그 다음에 하여간 6.25가 민족사적인 견지에서 한 민족을 파탄시킨 거예요. 민족을. 그래서 아, 무슨 종북이나 저쪽, 북쪽을 찬양하는 사람은 통일이 되었으면 또 이게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냐, 김일성이가 유독 업적을 생각하고 말이지, 역사의 공을 세우는 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동족상잔을 해도 그것 땜에 아직까지도 아까 내가 장선생하고 얘기했지만 미국에서까지도 이념 논쟁, 무슨 미씨 유에스에이(MissyUSA.com)가 이게 뭐 보안법에 걸린다, 뭐 아니다, 우파 좌파로 갈려가지고 같은 민족끼리들. 남북 분단도 서러운데 남남 갈등을 겪는다는 거 이게 다, 얼마 전에 고은 선생님하고 인터뷰했을 때도 그 얘기해요. 분단 상황이 이렇게 길어지니까 이념, 이념 논쟁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거야. 집권층은 그거를 이용해갖고 빨갱이로 몰아서 자기네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려고 들고. 그래서 하여간 6.25래는 건 난 참 이가 갈리고, 또 한 많은 인간들의 인성을 파괴 했고, 가난에 허덕이게 했고 수많은 이산가족을 냈고. 그 이후에 독재정권을 만들게 했고 그니까 역사상 참 가슴 아프면서도 말이죠, 많이 그 참 처참함을 당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면담자 : 그 국민 학교 시절이 어찌 보면 절반은 한국전쟁을 같이 하신 건데, 그 뭐 특별히 피해를 입으셨다 거나 특별하게 정말 기억에 각인이 남는 그런 건 있으신가요? 구술자 : 우선 못 먹고 자라서 체격이, 체격도 이렇게 작잖아요. 인제 못 먹고 살았고 그 다음에 인제 그 6.25라는 전쟁을 이긴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는 이기질 못하고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했어요. 우리 가족은. 그니까. 내가 장성해서 이민 올 때까지 가난 때문에 고생을 했고, 고 다음에 이민 온 것도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당시 신문 기자로서. 자유를 찾는다는 의미도 있었고 망명이란 뜻으로 얘기할 수 있고. 또 미국에 와서는 자유를 찾자는 거, 또 좀 잘 살아보자, 좀 잘 살아보자. 한국 너무 가난하고 또 부정부패가 심하니까 좀 정직한 나라에서 살아보자. 이런 걸로 이민을 온 건, 이건 나중에 할 얘기지만, 지금 할 얘기가 아니지만. 그런 뜻으로 이제 이민을 온 거죠. 면담자 : 중학교는 어디로 입학을 하셨나요? 구술자 : 나는 중고등학교를 저 특차를 나왔어요, 서울 사대부고를 나왔어요. 면담자 : 공부를 굉장히 잘하셨나봅니다. (웃음) 구술자 : 아, 아니요. 국민 학교 다닐 때 학교를 옮길 적마다 반장을 시키더라구요, 선생님들이. 그래서 6년 동안 늘 반장했습니다. 면담자 : 사대부중, 사대부고 이렇게 나온 겁니까? 그 중학교 들어가신... 중학교 때 내가 잠깐 어디 거쳤는데 그거는 내가 그 이름이 있질 않아요. 왜냐면...예. 면담자 : 그 중학교 입학하신 해, 연도가 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중학교가 56년이고 고등학교가 기억하지 59년, 아니, 아니, 53년이고 3년, 3년이면 어떻게 되요? 53년에 입학해서 59년에 졸업했습니다. 면담자 : 예. 구술자 : 59년에 맞아요. 그니까 50년때 그때만 해도 여기다가는 저걸 안 했네요, 연도를 안 넣었습니다. 59년에. 맞아요, 59년. 왜냐면 63년에 내가 대학을 나왔으니까. 면담자 : 그렇게 하시고 1960년도에... 구술자 : 50년에, 59년에 대학을 갔어요. 졸업하면서 대학에 입학했어요. 면담자 : 서울대 사범대 구술자 : 서울대학교 사범대 교육과 나왔습니다. 면담자 : 전공이 교육학이신가요? 구술자 : 교육학이에요. 사범대학 교육과가 유명하고 노토리어스(notorious) 하고 그렇더라구요, 내가 여기 와서 보니까. 대학 총장이 60명이 나왔대요. 그리고 요새 관피아 하는데 문교부의 장관 차관서 부터 계장까지 전부 서울사대 나왔다 그러드라구요, 교육과. 면담자 : 그,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인제 다니셨네요? 구술자 : 순전히 이승만 정권이죠, 박정희가 나타나기 전이죠. 면담자 : 다니셨는데... 구술자 : 이승만도 독재였습니다. 이승만도 안 좋아해요 면담자 : 그때 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정치적인 상황이나 사회 문제라든지 그런게 구술자 : 조봉암 사형 사건은 제가 평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양반이 인제 평화통일 주장한건데, 지금 같으믄. 그때는 북진통일 하자는 거 아니에요? 지금 북진통일한다하면 미친 놈 아니에요? 이 양반은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사형까지 당한 거예요. 양명산이라고 하는, 소위 말해서 그 당시 그, 그 당시 특무대지. 그 김종필이가 안기부 만들기 이전에. 특무대에서 갖은 고문을 하고 해가지고 양명산이라는 간첩이 조봉암한테 정치자금 대고 해갖고 국가 전복을 하려고, 요즘으로 말하면 진보당을 맨들어서. 그러니까 이승만이가 3선 개헌하기 전에 조봉암한테 혼이 났거든요. 이 잘못하면 정권 뒤집힐 테니까. 대구에서는 뭐 조봉암 표가 훨씬 많고 그랬어요, 그 부정선거를 하는대도. 그러니까 그래가지고 사형을 시켰는데 결국은 지금은 이제 다 아시잖아요, 내용을 .다 판결이, 대법원 판결이 오판이었대는 걸 정부에서 사과를 하고 인제 지금 보상금을 인제 줄 정도가 됐는데. 그 내 어린 마음에 그때, 그때 이 승만 때 내가 중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 같애요. 형무소 앞에서 내가 관 나가는 거를 봤으니까. 그 딸이 지극했어요. 그 딸이 아버지 다 재판도, 이리 따라다니기도 하고. 그때도 내가 이가 갈리더라고요, 이승만 정부가. 하. 어떻게 저렇게 정치범을 저렇게 죽일 수가 있나. 응? 대통령까지 나왔던 사람인데 빨갱이로 몰아가지고. 인제 그 생각이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뭐 여기도 조봉암에 대한 칼럼이 있겠지만 어...정치적인 사건 중에 정확, 제 가슴에 제일 쇼킹했고 지금도 뇌리에 잊혀지지가 않는 건 조봉암 사건, 조봉암 사건. 그 다음에 사사오입 사건도 잊을 수가 없어요. 사사오입. 그러니까 통과가 안 됐는데 영점 해가지고 이렇게 사사오입해서 통과됐다고. 삼선 개헌 때, 그짓을 했고. 그런 건 잊을 수가 없죠, 어린 마음이지만. 면담자 : 중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정치문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네요. 구술자 : 관심이 많았지만 그 당시에 중고등학교에서 뭐 행동으로 옮기고, 그 풍토가 무슨 데모를 한다든지 무슨 조직을 한대든지 그런 활동은 있을 수가 없었고 마음속에만 그런 걸 품고 있었고 다만 제가 그 당시에 웅변을 했어요. 그 당시는 인제 정치가가 되겠다는 그런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선생님들이 무슨 그런 대회 있으면 너 나가라고 해가지고 저희 형님이 원고도 쓰고 뭐 나도 쓰고 해갖고 나가면 무슨 각 학교 대항, 또 학년 별로 대항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거기서 뭐 일이등 하고 늘 그랬어요. 그래서 웅변을 쯔금 했어요. 면담자 : 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신 계기가 교육학 쪽으로 뭐 어떤 꿈이 쫌 어렸을 때부터 있으셨나요? 구술자 : 아니, 이런 거예요. 우리, 우리 저 동창회보에다도 썼지만 아버님은 늘 법대, 서울 법대를 가라고 그랬는데 내가 졸업할 때쯤 몸이 굉장히 약했어요. 그래가지고 등수도 많이 떨어지고 그 3학년 말기에 죽어라고 공부를 했어요. 그 우리 클래스에는 한 70명이 쫌 안되, 65명 쯤 되는데 55명 내지 60명이 서울대학을 들어가던 시절이거든요. 사대부고가 1960년대에. 경기 고등학교하고 뭐 비교가 안 되지. 특채들이, 머리들이 좋으니까. 상당히 학교가 천하부고라고 해서 나도 그 프라이드를 간직하고 있는데 애가 1등 하던 놈이 50등 하고, 50등 하더니 막 1등하더니 그래요, 다 비슷비슷하니까. 쪼금 오르면 뚝 떨어지고 말이죠. 근데 몸도 약하고 그래가지고 내가 자신이 없더라구요, 법대는. 법대는 법을 좀 하고 싶기도 했었는데. 근데 어머니는 맨날 그랬지, 사범대학 가서, 요즘은 사범대학이 좋다 그러대? 교사가 되고 좋고 교수가 될 수도 있고. 제일 안전해요, 편하고. 또 집이 너무 가난했으니까. 동생들도 돌보고. 그래서 어머니 말을 듣기로 했지. 그래서 사범대학을 갔는데 내가 역사도 좋아하고 국어도 좋아하고 영어도 영어 웅변반에 있었고, 이에스에스(ESS)반에 있었고. 잉글리시 스피킹 소사이어티(English Speaking Society)라고. 말이죠. 거기서도 영어 잘하는 애들만 모이던 반이거든요. 그런 거를 했는데도 교육과를 택한 이유를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우리 동창들한테 썼어요. 야, 이 사범대학 갈려면 문교부 장관이라도 해야지. 농담처럼. 그 뭐 선생 하러 가느냐, 하고 교육과를 택했어요. 동창들도 김신일 같은 사람은 뭐 통일부 장관도 하고, 아니아니 교육원장, 그걸 뭐라 그러지? 교육 무슨 장관? 옛날에 문교부 장관이라고 그랬는데. 면담자 : 네, 예전엔 문교부 장관. 구술자 : 교육, 문교, 그거 뭐라 그래요, 요새? 면담자 : 요즘은 교육과학기술부 뭐 그렇게, 뭐 그렇게. 구술자 : 아니야, 하여간 문교부 면담자 : 교육부 구술자 : 교육부! 교육 무슨 부라 그래요, 교육 문화부라 그러나? 교육, 체육 뭐 연예, 체육 그게 다 교육부에 속한 것 같은데 요새, 그건 문화부에 속하나? 면담자 : 예. 구술자 : 애니웨이 하여간. 옛날엔 문교부라 그랬어요. 난 지금도 문교부, 문교부 그러는데. 신문을 늘 다루면서도 말이죠, 물을 좀... 면담자 : 말씀 이어서 서울대 입학을... 구술자 : 딴 목적이 있었냐, 무슨. 그랬어요. 농담처럼 그냥 뭐. 사범대학 갈 바에는 티칭 보다도. 행정 쪽에. 면담자 : 그때 학교 분위기는 좀 어땠나요? 서울대 사범 대학 같은 경우는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좀 제가 듣기로는 민감, 그 당시로도 민감했었다고 하는데요. 구술자 : 8.15때는 솔위 말해서 빨갱이가 제일 많았다고 그래요, 김종필씨 다니고 그럴 때, 김종필씨 전에 이영덕, 총리였던 그 양반 다니고. 정범모씨, 서명훈씨, 윤태림 선생 뭐 이런 사람들 있어요. 그 국보안 반대 이런 걸 가지고 싸우고, 죽창 갖고들 막싸우고 그럴 정도로. 그러니까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 좀 사상이 좀 그렇잖아요. 원래 공산당에 빠질 수가 있잖아요. 사회주의, 공산당이래기보다. 그 사범대학교이 인제 일제 때나 해방 후나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갔거든요. 없는 집. 등록금도 싸고. 아참, 난 서울대 간 이유 중에 하나가 서울대가 원래가 등록금이 사립대학보다, 연대나 고대보다 훨씬 싼데 그중에서도 사범대학은 서울대에서도 제일 싸요. 정말 쪼금만 내고도 다닐 수 있어요. 거의 장학금도 타고. 그래서 이제 서울대학을 택했는데 그랬는데 우리 때는 오히려 문리과 대학, 그 저 동숭동에 있는. 그 종로가에서 올라가면서 혜화동으로 가는데 그, 그때는 문리과대학이 본부였거든요. 지금은 인제 관악산으로 이전했지만. 거기가 이제 문리대하고 법대, 미술대하고 이러게 같이 있었단 말이요. 근데 걔네들이 항상 데모가 제일 심했어요. 무슨 일만 나며는 문리대는 데모로 시작하는거. 한미회담 반대래든지 무슨 한미 협정이래든지 뭐든지 그냥 데모를 했어요, 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 래기 보다 하여간. 이슈화 시켰어요. 근데 사범대학은 쫓아다녔지, 걔들. 앞에 나서서 한 건 아니고. 면담자 : 문리대 정도는 아니어도 문리대 만큼 버금가게 활발한 게 그 사범대 쪽이라고 들었었는데요. 구술자 : 네 활발하죠. 우리 동기 중에는 저 김근태 형님, 김국태라고 소설가, 돌아가셨어요. 나하고 친했지. 우리 같은 학년에 같은 과고. 김국태 있었고. 김신일, 아까 얘기했던 그 친구 있었고, 정철기라고 서울대학 총동창회장 하다가 그 친구는 한 2,3년 전에 죽었어요. 정치적으로 쪽으로 가는 친구들이 좀 있어요, 더러. 사범대학이면서도. 그 다음에 주선식 같은 사람도 사범대학인데 에...조선일보 편집국장하고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가기도 하고 말이죠. 정치과, 정치하는 것도 아니고. 사범대학이 그런 정치적인 부류가 있어요. 면담자 : 제가 LA에 있을 때 김상일 선생님. 구술자 : 누구요? 면담자 : 김상일. 구술자 :잘 모르겠는데. 김상일, 연배가 어떻게 되요? 면담자 : 그 분, 그 분도 서울대 교육학과. 41년생. 구술자 :어, 내 또래 내 후배네요. 난 기억이 안 나는데. 면담자 : 김국태에 대해서 잘 알고 구술자 :아아, 한 학년 차이니까. 면담자 : 혹시 또 아시는 분인지 하고.여쭤봤습니다. 구술자 :우리 동기들이 모여서 정치 애기를 할 때 김근태가 와서 이렇게, 경기 다닐 땐데 관심 있게 그걸 듣고 그랬어요. 근태가. 지금은 부인이 국회의원이죠, 인, 인선생님. 면담자 : 그렇게 2학년 때 그럼 이제 4.19가 구술자 :2학년 때 4.19가 났어요. 그건 참 큰 일이죠. 굉장히 그,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일이죠. 면담자 : 어떻게 활동을, 분명히 하셨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아니아니, 데모는 했지만 내가 무슨 조직하고 그런 건 없었다고. 그 당시두요. 근데 이건 저, 에피소드지만 내가 첫 번째 책 제목이 인제 ????기자는 글로 말한다????는 제목인데 거기에 한 챕터에 뭐가 있냐면, ‘나는 대학 다니면서 공부는 안 하고 연애 허고 데모만 했다,’ 이렇게 썼거든요. 그랬더니 한승원 이사님이 1995년 출판 기념회에 오셔가지고 이 필자 육길원씨는 세상에 좋은 것만 했다고. 데모하고 연애만 하고. 자기 주변에 보면 데모도 못한 사람도 있고 자기 주변에 보면 연애도 못한 사람도 있는데 길원씨는 이거 양쪽을 다 했다고. 그런 농담도 했지만 사실은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되는데 데모도 많이 했고 그 연애도 많이 했는데 그 5, 4월 18일 날이 고대생들이 데모를 했는데 그 동대문 깡패 이정재의 오야봉, 이정재의 이 사람들이 쇠갈퀴로 학생들을 막 긁고 해갖고 동아일보에 그게 피투성이가 되고 이런 게 4월 18일에 일어났거든요. 이 도화선은 고대 애들이 일으킨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니까 우리는 4월 19일날 학교 공부하러 가갖고 예? 누가 뭐 조직하고 데모하자 이런 것도 없이 대열을 짓기 시작한 거예요. 앞에서 나가자, 나가자, 웅성웅성 해갖고. 근데 도서관에 있던 내 걸프랜드가 내 성지을 아니까 막 뛰어나갔어요. 그래가지구 말리는 거야 나가지 말라고, 무슨 소리야 너두 나가야지, 이런 판국에. 근데 내 가방을 뺏드라구요. 가방을 가져갔어. 그리구 난 데모하러 가고. 근데 우리 같이 가던 중에 청와대 가다가 사범대학도 몇 명 죽었거든요. 부상당하고. 그런데 상당히 걱정했다고 그러드라구요. 근데 그 여자 친구도 지금 70세에 돌아가셨으니까, 세상에 없고. 인제 그런 에피소드도 있어요. 면담자 : 그때쯤 4.19 당시에 선생님 참가하시면서 좀 기억나는 일들도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하여간 그, 동대문에서, 우리가 제기동에 있었어요. 동대문 저, 춘천 가는 기차 타는 데가... 면담자 : 청량리 구술자 :제기동, 제기동. 제기동에 있었는데, 거기서 인제 쭉 대오를 짓고 나오는데, 뭐 데오도 뭐 뭐 국문과는 여기서고 이런 것도 아니고 뭐 이렇게 자연발생적인 데모에요. 그러니까 그게 진짜 데모지, 혁명이고. 지고 동대문까지 막 갔는데. 연도에서 박수막 치고 신나가지고 영웅심에 들떠갖고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서 구호 불르고 막 그랬어요 내가. 근데 그중에 하나가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게 ‘깡패 때려잡자’ 깡패들이 그 전날 고대 애들을 그렇게 폭력을 했었기 땜에 깡패들 미워서, 근데 깡패들 얼씬도 못하지. 나서지도 못하고. 우리들이 젊은 애들이 하도 그냥 핏기가 서려가지고 아주 그냥. 독재 타도하자, 이승만 물러가라, 나처럼 깡패 때려잡자, 막 이런 식으로 막 여기에 해갖고 국회의사당 이런 데서 광화문으로 이런 데로 하셔 청와대 쪽으로 막 가고. 뭐 총 쏘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나도 도망가고 내 침구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근데 내가 그날 집에 갔다가 또 나왔어요. 집에 있었어야 내가 효도를 하는 건데 인제 어떻게 되나 보려고 쭈욱 나왔더니 뭐 그때까지도 서울고등학교 앞에, 서울고등학교 뭐 서대문 쪽에 있잖아요. 이기붕 집 있는데. 이렇게 서대문 넘어가는데, 신문로에서. 거기에 뭐 학생들이 차 뺏어가지고 막 운전하는데 서울 경찰서에서 총 쏘고 다치기도 하고. 그런 데를 막 지나가고 했어요. 그래 가지구 안암동, 안암동 고대 다니는 학생들 친구 집에서 잤어요. 그랬더니 집에서는 뜬 눈으로들 세웠지 얘가 또 나가서 데모하다가 죽었나 하고. 근데 그때는 데모하는 게 아니라 그게, 그런 걸 보면서 이렇게 안암동까지 걸어간 거예요. 서대문에서, 서대문에서 광화문, 종로, 동대문, 또 이렇게 다 지나가지고 안암동, 고대 가는 길까지. 해서 그 다음날 집에 돌아갔더니 집에서 깜짝 놀랐다고 그래요. 나가지 말라고. 연락이라도 해주지. 그러고 다녔냐고. 면담자 : 며칠, 선생님은 며칠 정도 그, 같이 시위에 참여하셨나요? 구술자 :이틀이지 이틀. 이틀 동안. 4.19, 4월 19일, 20일. 그 20일에는 벌써 뭐 희생자도 많이 생겼고 시국이 뒤숭숭하고 그 다음에 이어서 교수들, 교수들이 또 데모했어요. 학생 지지한다고 그러자 이화장에 가셨던 이승만씨가 하야,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고 했죠. 지금 같으면 낭만이지, 지금 누가 하야한다고 하겠어요. 이승만을 포함한 독재 하긴 했지만, 나도 쪼끔 전에도 얘기했지만. 정적을 죽이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는 그래도 스스로 물러날줄 알았지. 그 뒤로 박정희는 더 포악했으니까. 전두환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우리가 5·18이야기 하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학살한 사람인데 뭐. 그게 아직도 살아있고 말이지. 면담자 : 그리고나서 63년인가요, 5.16? 구술자 :고 다음해에 일어났어요. 60년에 4.19가 일어나고 61년에 5.16이 일어났는데 나는 지금에는 쿠테타를 지지했다기 보다 박정희는 좋아했어요. 왜냐면 쿠테타는 지지할 수 없죠. 쿠테타는 후진 백성이 하는거고. 장면이 집권한 게 일 년이 채 안 됐어요. 제일 민주적인 헌법에 의해서. 4.19래는 그런 어마어마한 혁명을 치르고도 그래도 일년을 잘 끌어갔어요. 경제 개발 5개 년도 세우고 갈 만 한데 뒤집어엎은 거예요. 그, 이게 4.19를 새치기 친 게 5.16이거든요. 4.19 새치기 친 게. 나는 그래서 결국은 박정희를 싫어해서 여기도 뭐 아주, 내가 이따 드릴게, 이따. 아주 무지무지한 칼럼을 썼지만. 포악한 박정희 독재에 대해서. 그렇지만 처음은 이거 가져가세요, 제가 서울대학, 첨엔 서울대학에서 안 넣어줄려고 한 게 어떻게 이렇게 됐어요. 이거 보면 참고로. 5.16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죠. 나는 개인적으로 지도자 박정희 인기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인기 최고 아니네요.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존경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뭐보다도 그의 18년 동안 너무 많은 국민들이 고통 받았기 때문이다. 보라, 안보와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선량한 국민들이 잡혀가 고문 받고 조작된 빨갱이로 몰려 죽었으며 이민을 갔는가. 언론을 탄압해 거짓 언론을 조성하고 보호해야 할 상아탑을 적극 ㅇㅇㅇ하고 141110육길원01_00:31:38 군을 도구화 했는가. 기억조차 섬뜩한 민비사건, 민청학련 사건, 조작된 숱한 간첩 사건,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 사망 사건, 간첩 누명 오부 사건, 인혁당, 통혁당, 동백림 사건 등등 또한 도덕성, 정당성이 없는 정권은 부도덕의 극치를 보여 정인숙 사건, 김동성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건을 일으켜 국민의 분노를 살까, 샀다. 영구집권의 길을 튼 삼선개헌까지는 참을 수 있다고 티자. 입에 재갈이 물려 비판도 하지도 못하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란,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유신시절에 이르러서 국민의 인권은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국 근세사의 제일 존경을 받는다는 박정희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부마 사태로 위기에 몰린 채 죽을 때도 밀실에서 술과 여자와 간신에 둘러싸여 부끄럽게 끝을 맺었다. 정통성 없는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허구헌날 긴급조치에 계엄령을 발동했다. 국민 무서운 줄 ㅁ르고 탄압을 일삼은 그에 대해 황당함과 분노를 느꼈다. 뭐 이런 얘긴데. 이만큼 강하게 쓴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 한국에서나 바깥에서나. 저렇게 노골적으로 면담자 : 이게 지금... 구술자 :이게 서울대학 미주 학보에 나왔어요. 면담자 : 미주 지역에서 구술자 :다 봐요 발생된, 발행한 동창회보죠. 동창회보죠. 이게 뭐 서울 대학 미주, 여기 6천명인가, 서울대학생이 에 저, 미주에 졸업생이 6천명이 구독한다니까요. 면담자 : 2010년에 글을 5월에 기고해서 실으신 건데요. 구술자 :네, 길지도 않아요, 4년 전. 요즘 박근혜한테 이렇게 썼으면 이건 뭐 이 신문 패간당한다.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면담자 : 그때당시에도 특별하게 더... 구술자 :아 말이 많았대요. 면담자 : 예. 2010년이어도 뭐 이명박 정권 구술자 :이명박 때부터 민주화가 역행하기 시작했어요. 10년이 민주화의 꽃을 피었고 그 다음에 이명박 들어서면서부터 시카고에 안기부 정보원 직원이 두 명 직원이 있고 그때부터 나왔어요. 면담자 : 아. 이명박 정권 때. 구술자 :여기에 왜 두 명씩이나 나와, 뭐 할 일이 없어가지고. 결국 그 덕을 본 건 박근혜고. 그 지경이 돼버렸어요. 그건 가져가세요. 하나밖에 없는 거 같기도 한데. 카피할 수 있으면 카피해서 쓰고. 장 선생님한테 한 두부 줘가지고. 하나 해갖고 날 주고. 면담자 :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술자 :카피할 수 있으면 어디서... 아 뭐 여기도 있을 거야, 어디. 내가 줄 것 또 많아요, 얘기하면서. 허허 면담자 :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3학년... 구술자 :박정희를 좋아했던 이유는요,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에 2학년이에요, 2학년 면담자 : 3학년이 아니구요? 구술자 :내가. 2학년 말일 꺼예요. 면담자 : 59년, 60년, 61년. 구술자 :61년이거든, 내가 63년에 4학년이니까. 그니까 1학년에서 2학년 넘어갈, 고 때에요, 고다음해. 1학년이었다가. 59년에 1학년에서 60년까지 일학년 아니에요. 고다음에 61년, 2학년이 됐구나, 맞아요. 61년에 2학년, 62년에 3학년, 63년에 4학년. 예. 맞았어요. 2학년이 됐어요. 봄이 돼서. 2학년이 된 때에요. (당시 4월에 신학기 시작) 면담자 : 그때는 학내 분위기 뭐 그런 거. 구술자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데모할라 그러고 안 그랬어요. 나만 정치에 대해, 정치에 대해서는 자유당 독재에 대해서는 다들 싫어했지. 왜냐면 신익희 선생님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됐으면 좀 변화가 올텐데 이런 막연한 생각은 했지만 그 당시가 전쟁을 겪고 난 다음에 무슨 뭐 이승만은 나라의 국부였으니까. 뭐 파운딩 파더(the founding father). 정면 대결을 할 그런 용기도 없었고, 힘도 없었고,. 계기도 없었고. 근데 이제 그게 인제 부정선거 때문에 이제 권력누수 현상이 생기고, 데모가 생기고, 대구에서 데모하고 마산에서 데모하다가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최루탄에 이게 머리를 맞아가지고 한 게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게 또 도화선이 돼서 고대, 고대가 또 일어나고 고 다음에 서울대가 해서 다 그때는 뭐 하이스쿨 다니는 애들까지도 대광고등학교, 무슨 뭐 동성 고등학교 애들이 형님, 형님 하고 그래요. 같이 뛰고. 그때 감격은 말이야, 야, 진짜 감격이에요. 아 이런 게 혁명이구나. 난 책으로 러시아 참 그 14년 러시아 41년 14년 러시아 혁명 그런 걸 책으로만 봤는데 내가 체험하니까. 그 표현할 수 없는. 도 고은 선생 얘기허믄 이 양반이 어...여기 6.29선언 때 민주화 직선제 쟁취할 때 그니까 이한열이 박종철, 박종철, 이한열이 죽어가지고 시청 앞 바다에서, 아니 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 지내고 이거 할 때 저, 뭐야 무슨 집회 헐 때 고은 선생이 추모식을 했, 그걸 보잖아요. 근데 이야 이 백만 인파가 금강산보다도 절경인 천하의 그냥 대서사라고 말이지, 그랬대더니. 아 4.19는 진짜 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감동과 말이죠, 그 흥분과 설레임과. 아직도 뭐 신난다 랄까. 목숨 바쳐서라도 옹호할 수 있다는. 그러니까 그렇게 많이 죽은 거예요. 물불 안 가렸으니까. 지금 애들 그렇게 데모 안 해요. 왜냐면 부모 생각하고 마마보이들. 취직해서 잘 살아야 되고 애인 생각해야 되고. 난 애인이 그 앞에 사는데 같이 가자고. 나 혼자 갔다 나왔다고. 첫사랑인데 말이지, 결혼은 못했지만. 면담자 : 근데 인제 채 그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가지고 인제 박정희가 다시 등장을. 쿠테타로, 5.16. 구술자 :그게 묘한 거예요. 그니까 얘기가 딴 데 가지만 장면이 5개 년 계획을 세우고 잘 할 수 있었는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네들이 정권 야욕에 의해서 쿠데타를 한 거예요. 혁명을. 그래가지고 원래 우리가 후진국이었고 가난했으니까 군부가 제일 그래도 앞에, 앞섰잖아요. 군부가 미국의 모든 그 저, 뷰로틱한, 뷰로크래틱(beaurocratic: 관료적) 한 시스템이래든지, 무 슨 뭐 하여간 문명의 이기래든지, 조직에 대한거래든지 다 앞섰잖아요. 그거를 이용해서 혁명을 성공 시킨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도 썼지만 삼선개헌까지도 그래도 뭐 좀 이왕 혁명 했으니까 다져놓기 위해서 참아준다 했는데. 삼선 개혁 이후는 그거는 용서받지 못할 거예요. 유신이 뭐에요. 유신이. 그건 무슨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사람 같으면 도저히 그건 참을 수 없는 거죠. 거기 앞장섰던 놈이 지금 지금 비서실장 하잖아요. 그런 나라에요. 사형당하고 없어졌어야. 4.19 난 다음에 최영균이 이런 사람 사형시켰어야해. 아까 고대 때 때려잡았대는 이정재 이 깡패들 다. 근데 박정희 이후에는 심판 받은 사람이 없어요. 김기춘이 같은 사람이 어떻게 비서실장을 해요. 그건 대통령도 문제지. 유신 앞장서고 말이지,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말이지. 백성을 기만하고 속이고. 그게 지금 복귀하고 있잖아요. 하긴 뭐 진짜 부녀지간인데 배운 게 뭐 있겠어. 그것이 그것 밖에. 그 점을 안 다며는 박근혜가 잘 돼길 바라고 잘 되야 되고 하지만, 잘못했을 때는 언론 철저하고 따복 따복 얘기해야 하는데 그것들을 못하고 있잖아. 특히 언론이 문제야. 조중동이라는 보수언론이 기득층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너무 사실을 날조하고. 면담자 : 그 5.16 당시에 사회적, 뭐 학생들의 분위기는 뭐 특별히 반대시위를 하거나 뭐 반대 움직임 같은 건 없었나요? 그 당시에는. 구술자 :그 당시에도 무슨 좀 이념적으로 깊이 들어가고, 그니까 신홍금씨 알아요? 면담자 : 아니요. 구술자 :조선일보 기자고 신홍금이라고 찾아보세요. 조선일보 나하고 같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깊이 들어갔죠. 성공회 신부였는데. 평생 고생하다가 어디 아프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 그러니까 그 4.19 나고 5.16 고 사이에는 학생들이 굉장히 그 액티브 했어요. 그니까 이북학생들하고 만나서 얘기하자, 통일에 대해서. 학생들이 지금 자기들이 정권을 쟁취했지만 그거를 정권을 지탱할 수는 없잖아요. 조직도 없구. 그럴. 학생의 신분이 있으니까. 근데 이게 5.16에, 박정희에 이용당했어요. 장면이라는 사람을 무능한 사람으로 몰기도 했지만 무능하지 않은 사람을, 민주적이고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해서 민주적으로 뽑은 총리를 갖다가 말이죠. 근데 학생들이 자꾸 북한학생 만나자느니, 무슨 뭐 새마을 운동 하자느니, 뭐 미국 물품 사지 말자느니 뭐 새로 무슨 개혁 하자느니, 막 이제 막 데모를 막 심하게 하고 그러니까 인제 5.16일어나가지고는 학생들이, 좌파세력이 막 범람하고 이렇게 학생들이 그냥 나라 질서를 문란시켜가지고 그냥 이북 학생들을 만나자고, 나라가 이래서야 되겠냐는게 이게 5.16 혁명 이후의 하나로 방향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이후가. 그러니까 그런 움직임은 있었죠. 근데 제 주위의 사범대학은 뭐 개인적으로 문리대 가서 그렇게 그, 유근일이 중앙일보 논설 위원, 조선일보 논설 위원 유근일이가 그 당시에 굉장히 진보 좌파였어요. 그 저, 민비의 전신인 민총, 민비. 민족, 민족, 민족 문화 연구소, 하여간 그래서 형무소 들어가고 그랬어요. 5.16 나자마자. 그래가지고 중앙일보 논설으로 갔던 게 어떤 인연이 있었냐며는, 최인규하고 홍진기는 내무장관, 법무장관 했으니까 서대문 형무소 들어왔고 유근일이는 학생으로서, 문과대학 정치학과 학생으로서, ????새 세대????라는 위클리의 편집장 하고 그랬는데 그때부터 글쓰고 그랬죠. 그랬는데 형무소에서 만났어요. 홍진기하고, 그러니까 이병철의 사돈. 홍진기, 이병철 다 형무소 들어가 있을 때 홍진기하고 유근일이하고 친해졌어요. 바둑도 잘 두고 뭐 젊은 사람이 똑똑하고 그러니까 형무소서 나온 다음에 중앙일보로 데리고 왔어요. 홍진기씨가 중앙일보 회장이 됐으니까. 홍진기의 딸이 이건기, 아 저저저저저, 누구야, 이병철, 이병철이가 홍진기의 딸 홍라희가 이병철의 아들 이건희, 나하고 사대부고 같이 나온, 내 후배에요. 결혼하지나 사돈이 된 거죠. 그래가지고 중앙일보의 논설위원으로 갔는데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이 사람은 우파여도 그렇게 우파일 수가 없어요. 유근일이라고 아세요? 면담자 : 아니요. 구술자 :유근일이라고 조선일보에서 논설을 쓰는 사람이에요. 김대중, 유근일. 면담자 : 중앙일보... 구술자 :중앙일보, 조선일보 두 군데서. 처음에 저 중앙일보에서 시작했어요. 그거는 인제 홍진기라는 사람하고의 인연 때문이야. 형무소에서. 그니까 홍진기와 이병철의 결혼은 그거는 저 정경유착이에요. 자유당때 내무장관과 법무 장관 하던 홍진기가 일제 때 고시 파스해서 친일파하고 그딸이 경기여고, 서울대학 미술대학을 나오고 어...참한 딸이 하나 있었고 이병철이는 이제 소위 그 당시에 우리 학생들이 얘기하는 매판 자본가로 돈을 많이 벌어. 쌀장사부터 시작해서 사카린 밀수 해다가 돈 벌어가지고 삼성이라는 오늘날의 거대한 기업체를 이룬 그, 뭐 그런 나름대로의 공은 있는거죠. 한국 산업화에. 정과 경이 유착이 돼서 사돈을 맺어가지고 오늘날 이건희와 홍라희가 인제 그 부부가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아들이 인제 삼성을 백업하게 된 거예요. 면담자 : 대학, 선생님 그 대학 시절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요 구술자 :정치적인 얘기요? 면담자 : 특별하게 뭐 활동하셨던 서클이라든지 그런 뭐가있었나요, 학교 다니실 때. 구술자 :나는, 사범대학은 얌전했어요. 고려대학은 활발했어요, 그때도. 그니까 4.19나, 4.18 4.19 나고 5.16 돼서 출세한 이세균이, 무슨 뭐 하여간 거 데모 주동 하던 사람들 다 공화당 들어갔어요.. 공화당 당시 박정희 라인이죠. 들어가서 출세하고 국회의원 되고, 국회 상임 의장 되고, 장관되고 많이 그랬어요. 어...우리 주위에서는 그때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나중엔 많았는지 모르지만, 나 이민 온 다음에. 거기 4.19 때 에...4.19 첫돌, 노노, 아 그렇지. 4.19 첫돌을 박정희도 그 식을 해줬어요, 그때는. 그니까 5.16된 다음에. 학생 대표로 김유진이가 그, 저 연설을 하고 박정희가 연설을 하고 그랬어요. 김유진이래는 나하고 베스트 프랜드인데, 사대부고 동창이라. 그 고대 애들하고 몰려다니면서 내가 선언문 써주고 그랬어요. 김유진이가 박정희하고 같이 연설한 문안을 제가 썼어요. 같이 김유진하고 같이 고쳐가면서, 여관방에서. 해가지고 그거를 김유진이가 동아일보 톱으로, 국기가 또 흔들리면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온다 이런 걸 내가 썼던 기억이 있는데 그거를 제목으로 나오고 막 그랬어요. 제목으로 나왔는데 그 친구는 비례대표 마지막으로 한번 하고 출세도 못하고 지금 무슨, 무슨 뭐 어디 4.19 혁명 무슨 기념 사업횐가 전무인가. 그 사업 일하고 있어요. 김유진이라고 그 당시 나는 크게 될 줄 알았어요, 그 친구가. 박정희하고 같이 연설을 하고. 419 1주년에 학생 대표로 연설을 했으니까 스카웃되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 친구가.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 친구의, 그 친구가 정치를 좋아했던 것은 윤길중이래는 사람이 있었어요. 윤길중은 기억하실 거예요. 국회 부의장하고 조봉암 사건 때 저저 진보당 사무총장, 사무총장을 하던 분인데 그분이 자기 누님의 남동생이니까, 누님의 남동생이면뭐에요. 삼촌인가? 자기 엄마의 남동생, 윤길중이가. 삼촌이지? 외삼촌이니까 윤길중한테 정치를 배웠어요. 이 친구가. 그래서 고대 학생회장을 하고 야당을 하고. 그랬기 땜에 저쪽으로 못 갔어요. 면담자 : 선생님은...윤길중씨가 어...공화당, 아니? 민정당인가? 하도 그런데도 당이 많이 바껴서. 민정당 당의장. 당수까지도 했어요. 노태우 때 민정당 대표 했어요, 윤길중씨가. 그래서, 돌아가셨지만 저도 막역해요. 저한테 붓글씨를 굉장히 잘 쓰셔서 주고, 우리집에는 춘추정문이라고, 춘추, 늘 바른 글을 쓰라는 취지의 그런 휘호도 써놓고 가고 그러셨어요. 윤길중씨가. 근데 그런 식으로 활동을 했죠.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전혀 끊은건 아니고 딴 대학생 애들하고 여관방에서 자면서 선언문도 쓰고 뭐 무슨 공작음모 그런 건 없었고. 잡히면 그 사람들을 그걸로 다 몰아대지. 근데 잡혀가지 않았어. 정보부원들이 우리를 따라다닌 건 그 당시 정보, 안기부가 셌으니까. 그때도. 그렇게 무슨, 그게 그 땐 합법적인 저거니까. 박대통령하고 같이 연설하는데 잡아갈리 없잖아. 그니까 그 이후에 험악해졌지. 면담자 : 글을 굉장히 좀 잘 쓰셨었나봅니다. 연설문,선언문 같은거 작성하고.. 구술자 :글쎄, 내가 하이스쿨 때 공보반장하고 그랬거든, 공보 그리고 어 웅변 나가고. 그 다음에 최근에 가을이 돼서 우리 형님이 나한테 편지를 써 보내셨는데 거기 내용에 니가 아버지하고 피난을 갔을 때 아부지하고 나하곤 상주까지 갔어요. 그 다음에 상주까지 피난갔었는데 그 학교를 못다닌다고 그래서 학교를 다니랬드니 내가 편지를 보냈는데 그 동네에 아주 명문이 됐대. 그 고걸 그대로 인용해서, ‘다만 신발이라도 있어야, 신발이래도 있어야지요.’ 어, 맨발로는 인제 학교 못 간다 이거지. 학교가 그렇게 가고 싶은데 못 갑니다. 그니까 동네가 다 울었대는 거야. 피난가서 학교 가고 싶은데 신발도 없고. 짚신하나 못맨들어가지고 하고. 부산에 환도, 그러니까 환도하기 전 임시정부 때 아부지가,.아까 체신부 다니셨다 그랬으니까, 체신부에서 부산에서 근무하신 아버지가 내 고향 경상북도 상주에서 나를 떨구고 부산갔다가 아버님이 날 데리고 다시 서울까지 올라와야 되는데 환도때 그때까진 난 기다리는데 뭐 어린 마음에 환도가 뭔지 알고 아버지가 언제, 오는지를 알아야.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저기 저 읍, 읍쪽,그쪽에가 아버지가 오나 하고 이렇게 봤던 그런 기억이 나고, 피난 가서. 그 뭐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나무 위에 가면 잘 뵐까 해서. 참 눈물 겨운 얘기지. 지금 생각해도, 어린 마음에. 6.25가 그렇게 사람을 맨들었어요. 그래서 가끔 외로움을 겪을 때면 그때 생각이 나요. 내가 그때 그래서 이렇게 외로운가보다, 어떨 때는. 근데 어... 하여간 이런 이념인가 이런게 움직여서 정치도 인제 윤길중씨, 고대 학생회장 김유진, 같이 글 쓰구, 선언문 쓰고. 그러니까 지금도 시카고 바닥에서는 글 잘 쓰는 사람으로는 뭐 여기도 있지만. 별명이 나있습니다. 그거는 자화자찬이 아니라 나는 뭐 아직도 참 다혈질이고 라직(logic: 논리)보다 에모션(emotion: 감정)이 강하고 그런데. 이 나이에도 아직도 인제 이 시카고에서 제일 많이 나가는 신문에 주필 글 쓰고, 뭐 한 일 이년 까지는 한국일보 논설위원 고문으로 또 글 쓰고. 그 다음에 글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 한석원 변호사가 글을 잘 써요. 한석원 변호사는 아세요? 이 양반은 변호사로서 형무소에 들어간 사람이야. 변호해서 변론 잘못 해갖고. 늘 그저 운동권만 변호해갖고 말이죠. 그래가지고 이 양반이 자기 육순 잔치에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글을 쓴 글 모음이 한 변호사의 초상이예요. 그래가지구 출판기념회 했는데 한명숙씨가 그 당시 총리되기 훨씬 전이지, 사회를 보고 나는 미국에서 이걸 축하하기 위해서 일부러 갔어요 갔는데 이 책을 만든 편집위원장이 지금 서울 시장 하시는 면담자 : 박원순 구술자 :박원순씨가 한석원변호사하고 가까우니까. 처음에 나는 글을 못 썼어요. 바쁘니까 마감시간에 못댔는데 박원순 시장님이 그땐 시민운동 할 때 전화가 와가지고 지금도 안 늦었으니까 한변호사가 이 원고가 안 들어가면 책을 못내게 한다. 그러니 빨리 좀 보내달라. 그랬더니 이메일도 쓰기 않을 때니까 팩스로. 박원순님도 팩스로 보냈고 나도 팩스로 보낸 게 미주에서는 유일하게 글을 실른, 실은 사람이 저에요. 그리고 여기 보통 보며는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난 어떤 수준의 사람들인가 했더니, 자랑이 아니라, 아주 훌륭하신 변호사님들, 감사원장 죠. DJ때. 아주 훌륭하신 분이예요. 이런 분이 대법원장 하시고 국회의장하시고 나라가 바로 서는데. 요새는 저저 홍 누구지? 중앙일보 하셨던 홍사덕이가 또 총리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사대부고 나왔어. 여기 보믄 뭐 김중배, 신경림, 고은, 강원룡, 아시는 분 있을거에요. 고 다음에 그 다음에 계훈제, 김금지, 저저 연극인, 일본사람 누군지 잘 모르겠고 김상윤, 김종환,그 다음에 일본 사람들 그 다음에 쭉 일본 사람들이 많이 썼어요. 그리고 송건호 동아일보 편집부장 하시던. 그 다음에 저, 그 다음에 이어령, 이문용이, 이우정이, 이해동 교수, 장을병, 성대총장하던 김관스님, 최일남, 한완산. 저저 한완상, 한 적십자 총재, 서울대학 교수하구. 소설가 한승원, 그 다음에 뭐 이런 사람들 하고 같이 썼어요. 그리고 위원장은 박원순이었고. 이래서 이거는 제 책이니까 참고로 보시고 이 양반은 아주 자상하신 분이라 그 편지도 잘 써요. 편지도 이렇게 핀필로 이렇게 많이 쓰곤 했죠. 서울 가면 제가 만나던 데는 이대 뒷문에 있는 그 저 식당, 이름 잊어버렸네, 거기서 꼭 같이 식사하고. 유명한 식당이 거기 있는데. DJ는 한승호씨를 굉장히 애꼈어요. 그래서 김종필씨를 총리 시키고 DJP 연합 때 한승호씨를 감사원장시켰어요. 감사원장이 당시 총리급이었는데.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대학교를 63 구술자 :63년에 졸업했어요. 제때에 졸업했어요. 면담자 : 졸업하시고 바로... 구술자 :군대에 들어갔어요. 1년 있다가 면담자 : 63년에 군대 들어가셨나요. 구술자 :64년에 들어간 거지 면담자 : 그러면 그, 졸업하시고 군대 제, 군에 입대 하실 때지 어떤 활동들을 하셨나요? 구술자 :그땐 뭐 학교도 쪼금 가르키기도 하고 건달, 건달은 아니다. 떠돌이처럼. 면담자 : 사대, 사범대를 나오면 바로 좀 중 고등학교 교사로 구술자 :안 해도 상관은 없는데요. 쪼끔 가르키기는 했어요. 면담자 : 군은 어디로 입대, 어디서 근무하셨나요? 구술자 :군대는 어떻게 되나, 난 그때. 내가 체격이 안 좋아서 갑종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을종인데 을종도 제2을종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안 가두 되거든, 기피해도. 근데 딱 영장을 달아보고 갔, 갔어요. 논산에 갔더니 무게를 달아보드니 사실 불합격이니까 서울을 보내야 하는데 그때, 그때 만해도 박정희 군대인데도 굉장히 썩었었거든, 군대도 돈 받고 그러면 보내주고. 체중 좀 미달인데 고생 좀 할래, 서울로 갈래 그러드라구. 심판보는, 심사광니. 그래서 급수 나오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더니 웃어. 고생 좀 해봐. 하고 합격시키더라고요 그래서 하도 논산에서 훈련이 되니까, 논산 훈련이 제일 되요. 아, 나 그놈한테 한 몇 천원 쥐어주면 말이지, 그 당시에는 화폐 개념이 없으니까, 할 껄 그랬나 하는 생각도, 유혹을 받기도 했어요. 뭐 돈을 주거나 그러지도 않았지만. 그리구 즐겁게 군대 생활을 했어요. 그니까 순진하고 낭만적이지 지금 같으면 기피를 하는데 말이지. 이회창이 아들은, 이회창총리 아들들은 기피를 해서 대통령도 못 됐는데. 뭐 우리는 기피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 고생을 하고. 그니까 뭐 순진하다고 그럴까, 낭만적이라고 할까. 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하나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거든요. 거기 보믄 걔네들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가서 죽잖아. 이유도 모르구. 그리구 부모들이나 친구들이 보냈던 편지가 강물로 흘러가는데, 맨 마지막 장면, 서부전선은 지금 이상 없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말이지, 뭘 위해서 죽었냐, 근데 많은 사람들이 또 살았거든 또. 나라도 군대간다고 죽으라는 법도 없고 말이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한번 가자. 나이두 그때 가 돼면 나보다 젊은 애들이 와요. 대학 졸업하믄 스물, 스물 서넛 됐잖아요. 그러니까 가도 쫌 대접도 해주고 그랬는데 고생은 무지하게 했어요. 그러다가 어떻게 또 운이 좋아가지고 부평이 카투사 스쿨이라는 게 있어요. 그니까 미군 부대에 갈 한국 부대를 영어 교육를 시키는 학교가 있었어요. 써디 에이츠 바탈리온(38‘s battailon) 대대지, 그러니까. 삼팔 보충 대대에 스쿨이 있었어요. 카투사 스쿨이. 영어 가리키는 거예요. 한국군부대에서 미군에 파견을 할래면 우선 영어 훈련, 그 뭐라 그래요, 훈련을 뭐라 그래요. 제식 훈련 같은 구호라도 알아야될 것 아니에요, 그 모르거든, 걔네들은. 우리는 이제 미군 교관들이 가르켜 줘가지고 가리키라고. 뭐 뒤로 돌아가, 뭐 줄줄이 우향 앞으로 가, 뭐 이런 거 영어로 알아요? 인제 그런 거 가르키고. 그래가지고 2년 반 있었는데, 보통 2년 반, 3년 임기니까 1년 반쯤 있면 교대를 해요. 먼저 있던 카투가사 전방으로 가면 전방에 있던 카투사들이 또 인제 이렇게 오고. 그게 공평한 거지, 페아(fair). 근데 이것도 돈을 쓰면믄 안 가요, 거기서. 카투사에서 저 군복 벗을 때까지 있을 수 있어요. 좀 쓰면. 근데 그것도 내 특유의 성질이. 아니 나 이만큼 편하게 했으믄 딴 놈도 와서 편안하게 해야지. 뭐 돈쓰고, 지금 가난한데 돈 쓰면서까지 뭐 군대생활을 하냐, 난 전방에 그냥 가겠다, 해서 고생을 했어요 워낙 카투사 스쿨 같은 건 8군 부관부 8군 사령부 직속 소속이었기 때문에 대우를 받았거든요, 빽만 쓰면 있어요. 내 친구들이 다 그렇게 있었어요. 나는 갔더니 우선 구로동 보충대에서 똥 푸는 일부터 시키는데. 아우, 이게 이런거구나, 내가 급수 나올 때 나온 대로 하십시오, 했더니 아니 뭐 공평하게 해야죠, 하고 갔는데. 근데 그렇다고 또 그냥 뭐 무턱대로 전방에 간 게 아니라 3보충대 춘천에서 전방에 갔는데 19사단이라고. 우리 형님이 휘문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자기 동기 동창이 사단장의 저거예요, 부관. 육사 나온 18기 육사나온 그양반 별 넷까지 나왔어요, 대장. 육사 18기 나온 편장원 대장이란 양반이 어, 자기 베스트 프랜드의 동생이니까 우리사단으로 보내라, 그래서 본부 사령실에 또 있었어요, 본부 사령실에. 부사단장이 영어 가르켜 달라 그러고, 연대장이 오라고. 이리 저리 불려다니는거지. 근데 아주 간단한 영어들들도 못해요. 그러니까 정찰기가 이리 떠서 이쪽 지역을 공격하고, 막 아무. 뭐 리콘이 사인가 뭐 사인을 보내가지고 말이지, 범빙 에어크래프트(bombing aircraft)가 akr 디스 에어리아 어택트(This area attacked), 이거 아주 뭐 쉬운거 아니에요? 뭐. 그냥 뭐 브로큰잉글리쉬 하더래도. 뭐 별 하나 단 사람 뭐... (비프음)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합니다. (TAPE 교체 구술자 :배우긴 배워야 되는데 이 머리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그런 에피소드도 있고 해가지고. 뭐 유격 훈련도 받고 그랬지만 군대생활은 그래도 비굑적 편하게 한 셈이에요. 교관 했었고, 세시간만 가리키면 뭐 극장에 가도 되고, 도서관에 가도 되고, 집에 나가도 되고. 8번 버스 타고. 그 당시 친구가 이부영이가 아주 베스트 프랜드가 됐고, 이부영씨는 알 거야, 다. 이부영씨 알죠? 이부영씨가 친구고, 그 다음에 권근술이라고 한겨레 신문 회장겸 사장을 했어요. 다 군대에서 생긴 내 일생 일대의 친구들이지. 여담처럼 얘기했어요. 면담자 : 네, 지금 테잎 계속 돌아가고 있고요. 말씀 계속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셔다기 67년에 나오시게 66년에? 구술자 :아...그쯤 됐어요. 67년인가. 그 당시에는 3년이거든요. 그니까 하여간 12월 달인데 눈발이 막 이렇게 나르는데 강원도에서 추럭에 송장 실어 나르듯이 말이야, 담욘지 무슨 판초 둘르게 하고 강원도 화천 저위에 사창리라는데 거기서부터 춘천으로 해서 서울을 나오는데 좋기만 하지도 않고 착찹하더라구요. 이, 내가 뭐할 껀가, 학교 가기도 싫구 갈수도 없고. 금방 뭐 신문사 들어가는 건 견습 기자 시험도 다 끝났어. 근데 그거 뭐 신화일보라고 지금은 없어졌는데 신문 하나가 기자, 견습기자를 모집한다 그러드라구. KBS가 또 하나 있더라구. KBS도 뭐기자 따로가 아니라 KBS PD기자 종합적으로 모집하는거. 두 군데 봤는데 두 군데 다 합격을 했어. 그래서 동아, 동아일보에 내 동기동창 김지자 라고 동아 방송 PD, 동아 방송 그때 괜찮았어요. 동아일보만큼. 그래서 사회부 기자로 있던 지자라고 있어요. 서울 교대 교수하고 저여성 YWCA 인가 뭐 회장도 하고 우리 동기 있어요. 걔한테 가서 야, 이거 방송으로 가야되니, 신문사를 가야되니? 하니까 걔가 보기에는 잘못 봤지, 사실 방송이 앞으로 가망이 더 많은 건데 방송을 갔어야 되는데 니 기질에 신문사가 나을 것 같다고. 그니까 KBS 가지도 않았어. 면접 가지도 않고 그냥 들어갔다가 스트라이크에 연루가 되갖고 노조는 아니고, 한 부가 내가 편집부에 잠깐 있었는데 인제 대우가 너무 박하다 이래가지고 인제 면담자 : 신화일보에서요? 구술자 :예, 그게 정동에 있었거든, 그 건너가 덕수궁 아니야. 맨날 데모하고 인제 사장하고 싸우고 덕수궁 가서들 신세타령하고 또 다음 작전 얘기하고. 인제 그 중에서도 언론사에서 주필이나 논설위원분들도 있고 그런데 하여간 어...그렇게 보내다 조선일보로 내가 신문사를 바꿨죠. 면담자 : 그럼 신화일보에 들어가신 게 67년에 들어가셨구요? 구술자 :그럴거에요. 그리고 바로. 그러니까 데모만 하고 쫒겨다녔으니까. 신문사 데모, (웃음) 아주 유명한 일화에요. 그랬다가 조선일보로 편집부로 들어갔어요, 또. 면담자 : 한, 그때가 68년 한 일년 정도 계셨나요? 신화일보에서. 구술자 :그랬을거에요. 일년 쯤 있었을거에요. 그러고서는 조선일보에서는 인제 6,7,8,9,1,2,3, 맞어, 67년부터 내가 조선일보에 있었든거 같은데요? 7,8,9,10,1,2,3. 73년에 내가 이민 왔으니까 그때까지 내가 조선일보에 있다가 퇴직하고 왔으니까요. 조선일보서는 편집부에 주로 내근만 했어요. 왜냐며는 내가 이민 간다는 걸 3년 전부터 알고 부서를 안 바꿔주더라고요. 내가 정치부나 사회부쪽 뛰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를 못얻고. 그 당시 편집국장이 신동호씨인데 나를 무지무지 허게 사랑했어요. 그래가지고 조선일보의 트리오래면 그 당시에 그, 저 60년, 70년대에 육길원, 임보길, 조병철. 근데 임보길이래는 사람은 조선일보를 어, 두 번이나 편집국장을 했어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아주 한국일보가 조선일보를 비트(beat)하지 못한 이유가 뭐냐고 한국일보 기자들한테 물어보니까 조선일보에는 임보길이가 있다. 뭐 그러더라구요. 이게 신문 만드는데 귀재라고 그래요. 근데 내가 그 삼총사에 끼었었어요. 그래서 시카고에서 신문의 귀재로 (웃음) 이 조그만 동네, 저저, 개울에서, 바다가 아니라. 조그만 개울에서. 뜻을 크게 피지 못하고. 그것도 다 인연과 운과 그런 게 있고. 그래가지고 신동호래는 국장은요, 점심시간이면 맨날 나하고 임보길이 데리고 저 테니스 치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만큼 사랑을 받았어요. 또 내가 첫 번째 출판 기념회 때 축사를 하면서 그 노래 중에 뭐 마음 주고 뭐주고 다 줬는데 도망을 간 놈아, 뭐 그런 노래가 있대요. 마음주고, 뭐주고, 멀어져간 내~ (노래)김추자, 저 놈이 그런 놈이라고 그러고. 참 유능한 기자로 제가 무지허니 사랑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이민을 갔다고. 와서 자기도 뭐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지. 나, 평기자한테. 자기도 국장 했지만 또 그 버릇 못 버리고 시카고가서도 편집국장 하고. 글 보니까 잘 썼다고. 도강파 비도강파로 치며는 어...를 따지듯이 육길원이는 운동권 망명파, 자기는 국내파하고. (웃음) 축사를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한승원씨도 축사하고. 이부영씨가 사회보고. 권글술씨가 또 축사를 하고. 면담자 : 선생님 이때는 결혼을 하신 건가요? 구술자 :이민 갈 때 는 결혼을 했어요. 면담자 : 결혼은 언제... 구술자 :결혼을 어... 70년에 결혼했는데. 70년. 70년에 결혼했네 면담자 : 그때 당시... 구술자 :결혼하고 이민 갔으니까. 면담자 : 그때 당시, 그때 당시로는 결혼이 좀 늦으신 건가요? 구술자 :늦었죠. 30 넘었으니까 벌써. 우리 집사람은 연세대학을 나오고 스물 세 살인가 대학 나오자마자 그해, 그 다음 해에 했구나, 그니까 스물 네 살에 결혼을 했고 나는 아시다시피 대학나오고 군대 갔다 오고 직장도 몇 군데 데모하면서 왔다갔다 하고 이러면서 결혼했으니까 그래도 서른 살이네. 우리 딸이 40인데도 지금 결혼을 안 하는데. 요즘은 더 늦어졌어요. 30이면그땐 늦었어요. 스물 다섯서 부터 스물 여덟까지가 적령기였지, 보통. 면담자 :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연애결혼 하셨습니까? 구술자 :그때 윤길중씨도, 연애결혼이죠. 근데 윤길중씨 땜에 결혼을 했어요. 윤길중씨, 그 윤길중씨 누님, 그니까 내 친구 어머님에게 세배를 갔는데 집안에 그 사진을 굴러다니드라구요.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연세대 간호대학을 나왔는데 세브란스. 그 졸업 때 무슨 사은회 한복들 입고 사진을 찍잖아요. 그 사진이 많이 굴러다니드라구요. 내가 사진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그, 고대학생회장했다는 친구가 나더러 ‘야 맘에 드는 애 있음 하나 찍어. 소개해줄게’ 그러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제 눈에 안경이라고 집사람이, 집사람 본 적 있어요? 육원장. 좀 훤해요. 허옇고 넓적해. 그래가지구 그래 그랬더니, 그, 그 세배하러 온 딴 놈이 ‘걔 애인 있을 걸’ 이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걔네들 성질이 뭐냐하며는, 남자들이거든. 아 임마, 맘에 들면 뺏으면 되는 거지 뭘. 이래가지고 그 다음 다음날인가? 바로 기숙사 찾아갔어요. 그때 이수근이가 넘어왔을 때거든. 그래 지금 와이픈 된 여자한테 내가 아, 여기 이수근이 취재 왔다가 잠깐 들렀다고. 인제 그것 땜에 간건데어. 이수근이 하곤 내 취재 분야가, 내가 가긴 갔어, 그 친구하고 사회부 애들하고. 이수근한테 가긴 갔지만 그거 취재가 내 메인 목적은 아니었거든. 와이프한테, 와이프 될 여자한테 이수근이 땜에 잠깐 왔다가 또 갈테니까 차나 한잔 하자고 나는 건수를 잡은 거지. 그렇게 만났어요. 그래서 일 년 연애하고. 예. 면담자 : 그, 그때 당시에 기자 생활이라고 그러면 그래도 한국에서는 엘리트였었고 좀 안정된 생활이 좀 보장되어 있는 그런... 구술자 :아니에요. 물론 직장이 없을 때니까 어...그 취직만 하는 것도 참 힘들어서 대학 졸업 맞고 광부 아닌 광부들이 수출이 되는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간호사들도 파독 되갖고 독일로 광부 간호사, 박정희 때 보낼 때니까. 겨우 은행 들어간대든지, 뭐 또 사대 나오면 교사가 된대든지 뭐 은행, 이런 거지 직장이 그렇게 지금처럼 삼성이 있고 LG가 있고 막 이럴 때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취직만 하는 것도 괜찮은거야. 그래가지고 신문사 시험이 고시보다도 어떤 땐 힘들때도 있었고. 우리때는. 그래가지구 취직한 거지 거기서 뭐 안정되고... 안정되지 않았대는 것은 지금도 내가 그때 입었던 옷을 기념비처럼 갖고 다니는데 이민, 가다마이라고 했어요, 가다마이. 기억나요, 가다마이? 신사복을 가다마이라고 했어요, 일본말로. 가다마이를 돈을 내고 살수가 없으니까 월부로 하잖아요. 월부도 막 일년 씩. 월부. 집사듯이 말이지. 자동차 사듯이 월부로. 월금이 쪼금이니까. 게다가 그때 한창 나이에 친구들 좋아하고 몰려다닐 나이인데 혈기왕성하고. 거기 거 사직동 가는 데 대머리집이라고 있었어요. 기자들 가는데. 술집에서 외상술 먹어야지. 그러면 월급 받는 날은 또 대머리아저씨가 술값 받으러 와요. 수첩에 적은 이름 적고 엄청나. 월급 뭐 반은 나가야 될 정도로. 이것 띠고 저것 띠고 하면은 집에 가져오는 돈 없어요. 그래도 우리 집사람이 또 세브란스 병원에 다녔기 때문에 둘이 벌어서 둘이 겨우 살았지 그래서 여기도 월부로, 미국을 이민오고. 가난했어요. 그렇게. 그 다음에 나중에 들어보니까 이건 완전히 재벌이더라고요. 신문사 다니는 놈들, 아, 증말 예. 청와대 출입하고 그러면 거기서 보도해 준거 갖다 냄기기만 하면 되요, 비판하지도 않고 필요없고. 대통령 해외 갈 때 쫒아가 뭐, 부시러기 거기서 생기고 촌지 받고 하니까 아주 뭐, 요즘에 삼성 이게 문제가 아닐 정도로 다들 잘 살더라고요. 그니까 좋은 시절 고생하면서 보냈고, 여기 와서 또 여기 신문이 아주 척박합니다, 또. 여기 신문이 뭐 돈이 벌리겠어요? 그러니까 지사장이래든지 신문사 사장. 한국일보라면 김용화씨. 김용화씨는 알죠? 한국일보 먼저 사장했던 분. 그런 분들은 안정되고 돈을 벌었지. 건물도 뭐 삼백만불ᄍᆞ리 이런거 사고. 한국일보 창업주인 그 누구냐, 장기영씨 조카고 그러니까. 그 뒤로는 신문 고생들 해요. 신문이 돈 벌어요? 못 벌지 한국도 지금 조중동 빼놓고는 다 저 흑자? 적자라고 그러나? 그래서 언론사에 있으면서는 고생만 했고 에즈 팔 에즈 머니와이드(As far as Moneywide: 돈에 있어서는) 월급이래든지 재정적인거. 이거 우리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하고 우리 집사람 덕분에 내가 이렇게 소신대로 글쓰고, 글쓰고 또 여행도 다니고 그럴 수 있는 거지. 면담자 : 당시 슬하에 자녀들이 있었나요? 언제? 구술자 :나는, 나는 딸은 이민 올 때 두고 왔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이년 후에 데리고 왔고 여기서 아들 하나 낳고 해서 딸 하나, 아들 하난데 마흔이 다 된 애들이 아직 아들, 딸 결혼을 안 했어요. 딸은 모닝스타라고 여기 다운타운에 컨설팅 파이낸스회사에 다니고 고 다음에 아들은 뉴욕에 CBSTV 기자로 들어가서 지금은 NFL 여기 풋볼이 굉장히 인기잖아요. 미식추구 NFL에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에요. 세 명의 하나에요. 이게 한국애로서는 스포츠 계에 굉장해요. 아는 사람은 알아요. 면담자 : 그, 그럼 다시 이민 오시기 전에 이야기로 돌아가서 언제 그러면 이민이라는 것을 쫌 생각을 하시게 된건가요? 구술자 :그러니까 유신 임박해서. 정보부원들이 기자하고 신문사에 같이 근무하고. 아주 숨막히겠드라구. 그런대다 마침 집사람이 간호사니까 이민의 길이 수월하고. 그래서 신문사에서는 다 유학가는 줄 알았어요. 공부하러. 공부 더 해서 뭐 좀. 면담자 : 한 그럼 준비를 한 3,4년 정도 그럼 하셨나요? 바로는 안됐을텐데. 구술자 :3,4년이 뭐에요, 1,2년이지. 왜냐믄 내가 71년에 결혼하고 72년에 애 낳고 73년에 애 떼어놓고 이민을 왔으니까. 2년. 2년도 채 안돼요. 73년 봄에 왔거든요. 신혼 기분으로 이민왔어요. 면담자 : 오실 때는 어떤 좀 생각을 가지고 오셨나요? 뭘 해야겠다는 그런 뭐... 구술자 :막연했어요. 막연했고 미국이라는 게 기회의 나라니까 그냥 뭐든지 부딪치면 한다 해갖고 왔어요. 와가지고 처음에 첫해는, 첫해가 아니라 한 육 개월은 멤피스 테네스(Memphis, Tennessee)라는 데에 내려갔어요. 시카고로 안 오고. 거기에 일 년 선배가 가발 가게를 무지무지하게 크게 하는데, 도매상도 하고. 거기 뭐 가게 하나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아 이건 장사를 못하겠더라구요. 그때 그걸 또 참고 견뎠으면 내가 또 비즈니스 면에서도 성공했을지 몰라요. 뭐 초창기는 아니지만 뭐 가발이 괜찮을 때거든요. 그거 하다가 나 못하겠대니까 디트로이트에 지금 또 가게가 하나 비었는데 시카고하고 가까우니까 그리 올라가라고 해서 디트로이트도 한 삼 개월 있었나? 뭐 조금 여기저기 다녔어요. 장사 땜에. 그리고 집사람이 저 간호사는 이제 의사가 MD 그 뭘 받듯이 레지던트 너스라고 라이센스를 받아야되거든요. 그래야 인제 병원에서 일할 수 있고. 그게 인제 시카고에서 됐으니까 물론 딴 데도 쓸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에 시카고에 친구들이 몇 명 있으니까 야, 같이 있자 뭐 딴데 가봐야 신통하지 않다, 해서 여기있으면서 신문사는 내가 바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고. 여기까지 와서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무슨 돈을 벌어야지. 신문사는 마음에 없었어요 첨엔 솔직히. 그래서 공장도 쇠 공장을 다녔어요. 이민 초년 우리 일 세대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도 서울대학 총장 아들도 여기서 나하고 공장 같이 다녔어요. 유...윤...윤일선 총장 아들이 나하고 공장 같이 다녔어요. 아주 친했어요. 우리 애낳는 애 낳았을 때 자기가 우리집까지 차로, 난 그때 차도 없어서 라이드 해주고 그랬는데 그 이민 일 세대는 그때 고생 많이 했어요. 면담자 : 쇠 공장이라는게 뭐 제철소를 얘기하나요? 구술자 :스틸컴퍼니(Steal Company), 스틸. 면담자 : 아... 구술자 :그니까 라미네이션(Lamination)이라고 이렇게 쇠, 쇳덩어리를 철판처럼 맨들어가지고 그걸 전자제품과 자동차 제품으로 쓰기 위해서. 잘 모르실거에요. 이렇게. 라미네이션, 철판을 정확하게 잘라요. 고거를 인제 이렇게, 이렇게 모아가지고 상자에 넣고, 뭐 헐래면 이거 비기도 하고 피대끼리 갈 때 영치면?? 141110육길원01_01:18:10 여기 판 하나 떨어지고. 아주 무지무지 위험한 데에요. 그러니까 임금이 무지하게 비싸죠. 비쌌는데 뭐 서울 법대 나온 친구들 뭐 다 같이, 우리 템플 유니버시티(Temple university) 인 시카고 캠퍼스에 알럼나이(alumni)라고 동기생이라고 그러죠. 아...템플 스미스래는 사람이 닉슨 대통령 때 거기 사장이었는데 닉슨 정치 자금 댄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한국 사회에 대해 참 동상 세월 줄 사람이에요. 처음에 이민 온 사람 일 년에 한 3백 명씩 채용했으니까. 독일에서도 광부 들어온 사람들 카나다로 해서 여기 와갖고 영주권 다 받고. 그, 그 회사에 제일 많았고 그건 아주 시카고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회사가 탬플 스미스 스틸 컴퍼니(Temple Smith Steal company). 공화당. 면담자 : 들어오신 연도가 73년... 구술자 :73년 4월 면담자 : 4월 몇일이십니까? 구술자 :4월 7일. 면담자 : 기억하시네요. 4월 7일에 여기 구술자 :시카고 도착했어요. 면담자 : 처음에는 시카고가 아닌 다른 구술자 :아니 여기서, 친구집 아파트에서 한 달인가 일주일 있다가 그 다음에 인제 짐싸달라구, 아, 내가 먼저 한번 내려가 보고 그 다음에 와이프 데리고 내려가서 한 육개월까지 안 있었을 거에요.. 한 여름 있었으니까, 가을에 와서. 멤피스라는 데가 굉장히 아름다워요. 거, 저 미시시피 강이 흐르고 참 흑인들도 순진하고 여기보다. 백인들이나 외국인들 순박하고...포스터(Stephen Foster)의 민요에 켄터키에 집에 뭐 그런 노래처럼 말이죠 목가지고 그랬는데 아 뭐, 답답하고 내가 이거 하러 왔나 생각하고. 내가 다른 길을 찾아야겠구나 하고 그니까 내가 장사하곤 길을 멀었었기 때문에. 인제 그랬고. 그 다음에 어떡하다 또 신문사에 들어갔느냐. 이 76년인가, 석유 파동이 일어났어요, 1차. 아 2찬가? 73년에 석유 파동이 두 번인가? 석유 파동이 일어났는데 여기 98년에 저, 인제 금융위기 있어가지고 1930년대 금융위기처럼 말이죠. 이렇게 곡선을 그리잖아요, 경제가, 바닥을 칠때가 있잖아요. 최근 게 인제 78년, 아니 아니 2008년 소위 그 니먼 막스(니먼 브라더스와 혼동?) 말고 몰게지(Mortgage) 막 깡통 주택 생기고 인제 이것 땜에 그렇게 된 거고, 그게 최근 꺼고. 그때는 석유 파동 때문에 석유 값 뛰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스틸 컴퍼니들도 이 소비자들, 다시 말해서 제품 없자들이 물건을 줄이니까, 소비자들이 이 물건을 안 사가니까 물건을 생산을 줄이고 줄이다 보니까 원재, 원재품을 부품을 허는 사람들도 납품량이 줄어들고. 그러니까 레이업(lay off)이라고 그래서. 레이업, 뭐라 그러나 우리말로. 감원. 감원을 시키는데 나는 늦게 들어갔으니까 감원 대상이죠. 그래서 감원이 됐어요. 그랬는데 인제 주위에서 옛날에 인제 중앙일보에 출판국장도 하고 사회부장도 하고 그런 분도 그렇게 아까운 재주 이렇게 썩히냐고, 같이 신문을 하자 맨날 그랬는데도 거절했었고 그 다음에 장기영씨 이쪽으로는 여기 사장하는 사람이 동서가 또 내 동기동창이고 그래서 너 지사 하나 맡아라, 칼람을 맡던지 해서 편집을 하든지, 그러다가 딴 걸 하드래도. 이래가지고 76년에 한국일보 다시 들어간 게 오늘날까지 또 계속 이, 이거에 그냥. 코가 뀐거에요. 그리고 보람도 있었고 기자로서 보람 증말 있고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았어요. 그거는 뭐 그거는 한국에서 있었으면 누릴 수 없는 여러 가지 특권과 기자로서의 그 기회와 또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던 그, 그런 그 후회 없는 언론인의 생활이었어요. 면담자 : 선생님 이것은 한번 쫌. 그때 당시에 선생님께서 멤피스나 디트로이트, 뭐 그쪽에서 몇 개월간 생활 하셨는데 이곳에 계신 한인... 구술자 :와이프도, 친구허고. 면담자 : 같이 시카고에서 지내자 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당시에 선생님 여기 계실 때 시카고에 한인들이라고 해야 되나요, 한 몇 분 정도나 시카고에 좀 거주하고 있었나요? 구술자 :만 명 안 됐을 거예요, 육천명, 팔천명. 면담자 : 그때 당시의 한인 사회에 어떤 뭐 그런 뭐가 조직이 되어 있었나요? 한인 조직이. 구술자 :조직이 인제 신문사가 그게 인제 오피니언 리더죠. 신문을 통해서 모든 거를, 한국과의 그 네그 네트워킹과 연결은 신문이 다 했어요. 그러니까 그, 고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변화래든지 뭐 이런거. 그 다음에 심지어 위로 기능, 위로 기능. 그니까 신문에 나는 소설 있잖아요, 신문 소설. 그게 유일한 낙이었던 분들도 있으니까. 우리 어머니 같은 분들은 신문을 기다리고 신문 소설 보고. 왜냐믄 텔레비도 없고 비디오도 없던 시절이고 또 뭐 미국 극장은 영어를 모르니까 못가고. 그니까 신문이 오피니언 리더일뿐만 아니라 일종의 광고지였고, 어디에 무슨 그로서리에서 뭐를 세일한다든지 또 어디 식당에 무슨 맛있는 것이 있대든지. 그게 신문의 역할이 컸죠, 그러니까. 왜냐면 미국 사회를 동화시키고 미국 사회를 알리고 광고 선전을 해주고, 위로기능을 하고 인제 호랭이 담배먹던 때 얘기죠. 그때는. 그러니까 신문이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인제 교회. 교회는 뭘 했느냐. 교회는 이제 이민 목회라고 해요. 어떤 사람은 또 공항 목회라고도 그러고. 이민자가 공항에 처음 나타나면 목사님이 직접 차 몰고 가서 이삿짐 날라줘요. 이삿짐 날라주고 아파트 얻어주고 취직 시켜주고, 뭐 취직을 백퍼센트 시키는 건 아니지만 간호사다 하면 병원 끌고 다니고, 무슨 손재주가 있다하면 자전거 회사, 조립하는 데도 데리고 가서 어플라이 시켜주고. 목사님이나 한국 교회가 지금 부패해서 여기 교회도 부패했다고 지금 많이 욕을 먹지만, 그 당시 목사님과 신문사가 역할을 많이 했어요. 정착에. 그러나 그 이후 이민 동화에는 역기능을 했지. 왜냐면 주류 사회로 동화돼야 되는데 신문과 교회래는 건 동화에 역작용을 하잖아요. 교회도 미국 교회를 나가야 영어 ksakel라도 배우고 미국 사람 하나라도 친구 생기고, 미국 신문을 봐야 좀 더 폭넓게 보고 그럴텐데 맨날 박정희 뭐, 광주사태 이런 것만 봐야 되니까. 그 동화에는 조금 지장이 있었죠. 순기능과 역기능을 언론과 교회가 함께 했던 시절이에요. 면담자 : 그 한국일보 시카고 지부라고 불렀었나요? 구술자 :지사 면담자 : 지사라라고 불렀었나요? 거기에서 76년부터 이제... 구술자 :76년부터요, 어...80년 80 광주 사태 지나고, 아니야, 지나기 전에 내가 중앙일보 편집국장으로 옮겼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면담자 : 기자로서 활동하신 건가요, 아니면 논설위원으로... 구술자 :한국일보서는 기자로 활동 하고 기자 편집하고 그 다음에는 저 직책은 편집부장이고 조광동씨가 외신부장인가 뭐 취재부장이었었고. 이윤모라는 저 농과대학 나오고 사회학 Ph. D.를 가진 분이 편집장이었고 그랬고. 그 다음에 기자가 한 두세 명 있었을 거예요. 판 짜고, 취재하고. 어...중앙일보로 가면서는 내가 어...처음에는 그냥 편집국장으로 갔고 나중에 사장이 본사에서 나오고 그러면서 편집인이 됐죠. 그니까 더 승진한 거지. 발행인, 편집인, 주필과 편집국장을 총괄하는 게 편집인이니까. 중앙일보는 편집인으로 갔어요. 면담자 : 그러면 중앙일보에 근무하실 때 80년을 맞으신건가요.? 구술자 :그렇죠. 80년 때는 중앙일보에서 보냈어요. 그리고 80년때 또 후반기에는 또 한국일보로 다시 갔어요. 그런 상황이 벌어졌어요. 왜냐면 한국일보가 데스크감이 없어가지고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중앙일보에서 너무 뉴욕타임스를 많이 번역한다고 뉴욕타임스가 유일한 정부비판 언론이었거든. 따른데 기사를 안 보내는데. 그래가지고 신문 짜른걸 막 지사장이 띠고 이런 정도의 갈등이 한 삼개월 계속되다가 돌파구를 제가 다시 한국일보 쪽으로 찾았어요. 그래가지고 한국일보를 다시 가가지고, 그때는 딴 편집장이 있었고, 내가 한국일보에서 다시 편집국장이 된 거는 90년. 90년에서 2000년까지 또 십년을 편집국장을 했어요. 한국일보에서. 2000년이니까 그것도 벌써 것도 십 몇 년 됐죠. 십사 년, 십오 년 지났죠. 그 뒤로는 이제 내가 편집국장을 2000년에 관두면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생겨가지고 그쪽에 편집국장을 일 년 했어요. 그러고 그 신문이 문 닫는 바람이 한국일보는 바로 안 가고 좀 쉬다가 한 두달, 한국일보에서 나를 논설위원으로 데려갔어요. 파트타임으로 그니까 내가 출근을 안 하고, 아 이삼일 출근을. 파트 타임 직원이지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게 아니라 한 10년 전부터는 제가 반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 세마이(semi). 왜냐면 매일 출퇴근을 안 했으니까, 그때는 논설만 쓰고. 사설만 쓰고. 면담자 : 그 이민을 오셨어도 이제 한국 그런 신문에 대해 신문에, 그런 언론, 언론인으로서 활동을 계속 하고 계셔서 한국의 정치상황, 뭐 사회 상황들을 누구보다도... 구술자 :한국에 계신 사람보다도 더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면담자 : 더 정확하게, 어찌보면 미국의 언론에서 이야기 하는 것도 비교 분석을 또 할 수 잇는 부분이고. 그런 생활을 언론인 활동을 계속 하셨었는데 그 인제 79년 뭐 부마라든지 10.26이라든지 뭐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신군부 전두환의 등장 이러한 부분들을 언론 활동 하시면서 다 지켜보셨을 텐데 이런 부분들을 좀 그때 당시에 어떻게 좀 판단을, 정세 판단을 하고 계셨는지, 선생님께서는. 구술자 :나는 내 기자로서의 사명이 한국 민주화에 있었기 땜에 지면도 아무래도 그쪽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 알정도로. 한국서부터는 그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허게. 왜냐면 신문 제작자가 어떻게 그 정부 비판하는 사람이 데스크에 앉아있을 수 있어요. 근데 여기는 그게 가능했지, 미국이니까. 그리고 한국에서 직접 감시를 한다든지 지시를 할 수 없으니까. 근데 이게 다 청와대도 가고 정보계통에도 가고 본사에도 가고 그러니까 대강은 다들 알지. 어떤 성향인지는 알지요, 그렇지만 내 역할이 그거라고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내일 관두더래도 나는 소신을 관철하겠다는. 면담자 : 직접적인 압력이 들어온 적도 있었습니까? 그런 글, 그런 정부비판에 대한 어떤 신문 보도 내용에 대해서 이런 거 하지 말라라고 직접적으로... 구술자 :그러니까 그거는 지사장을 이쪽을 통해서 은근히 들어오지 자기네들이, 그건 서울도, 한국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저 우직하지는 않거든, 야, 이 사람 관두게 해라. 너 관둬라 이렇게는 못하지. 그러니까 이제 데스크 저 그 책임자들이 알아서 기는, 알아서 기는 거죠. 왜냐면 나중에 말이 인제 안 좋게 나니까. 그래서 찾은 길이 아까 얘기했던 이 화이부동이에요. 화이부동은 인제 아까 서산대사 말이라고 그랬는데 이 홍성민씨도 그렇게 정부 비판적이었는데 동아일보의 김준백씨처럼 광주, 광주 일고 출신이지. 아주 직설적으로 그렇게 그런 비판 칼럼을 쓰지는 않고 이런 사람들은 은근히, 그러니까 조화하고 화합하면서 그 범위 내에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인제 비판했던. 그래서 이 분이 나의 멘토고 내가 존경의 대상인데 그래서 내가 3개사를 옮겨다니면서 데스크를 봤지만, 편집 책임을 봤지만 한국일보, 중앙일보, 뭐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같이 했었으니까. 네 개 한국의 네 개 일류 신문사를 여기서는 다섭렵한 거죠. 그래도 그게 결국 무슨 기회주의자나 이렇게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 안하고 오히려 화이부동과 같은, 화이부동과 같은 그런 그 나름대로의 환경에서 내 그 주장과 정치성을 폈기 때문에 나는 내 일을 아주 충실히 잘 감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면담자 : 그, 선생님 인제 질문을 다시 좀 드리자면 79년 부마사태부터 시작해서 10.26으로 인한 박정희의 죽음, 그 이후에 뭐 전두환 뭐 12.12 쿠데타로 인한 등장, 서울의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80년 봄 상황, 그런 것들을 그런 내용들을 인제 미국에서도 여기에서도 계속 주의주시하고 계셨을 텐데 그때 당시 선생님께서 한국 정부의 정치적 상황들, 이 정세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진행될 거라는 그런 판단이 좀 들으셨나요, 선생님 개인적으로.. 구술자 :굉장히 너무 광범위한 얘기죠. 이게 좀 한마디로 말씀드리기 힘든데 어...내가 편집장 하는 시절에 어...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 초청해서 어...근데 초청한 게 레이간 그 재선, 두 번 텀 때 이제 마이너리티들의 표를 의식하고 그, 미주 마이너리티의; 발행인 편집인을 백악관으로 초청했어요. 그래서 기자회견도 하고 내가 가서 질문도 하고 그랬지만. 그런 일도 있었고 어...전두환 대통령도 초청했어요. 그래서 백악관, 청와대 갔어요, 몇 사람 갔어요. 면담자 : 그때 몇 년인지 기억하십니까? 구술자 :80년 때에요. 대한항공이 떨어지고 그랬을 때에요. 대한항공이 언제 떨어졌지, 83년인가, 그게? 83년 쯤 될거에요. 대한항공. 그래서 아주 독이 났을 땐데, 아웅산에서 말이죠. 대한항공이 아니라 아웅산 사태. 어...버마에서 무슨 사건이야, 그게. 버마사태. 아웅산 사건. 그 저 대한항공 떨어진 게 아니라. 고 다음이지. 그 해. 그 해에 대한항공 떨어졌지 저저 사라 거기서 소련 영공에서. 그러니까 83년일 거예요. 하여간 전두환 대통령하고 한 한 시간 반쯤 몇 사람 앉아서 얘기도 하고. 왜냐면 정체성 없는 정권이 외부에는 잘 보여야 되니까 외국에 언론, 우리처럼 인제 교포 언론에 미국과 창구에 있는 이런 언론인들은 장악해야 되기 때문에, 호텔도 좋은 데로, 대접도 잘해주고 청와대까지 부르고 그런 것도 있었고. 그 다음에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들이 대통령 되기 전에 시카고에 왔을 때마다 뭐 아주 근접거리에서 같이, 신문기자라기보다는 물론 인터뷰도 하고 그랬지만, 같이 무슨 상의도 하고 뭐 한국 정치에 대하서 얘기도 하고 같은 그 참모처럼 말이죠 있었고. 그런 식으로 정치 참여를 했고.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그런 그, 그를 그 줄기를 벗어난 그 그 박정희, 그 다음에 뭐 전두환으로 이어디는 독재정권은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고. 제가 하는 일이 글로 쓰는 거니까 뭐 이정도로. 이 정도까지는 그때 신문에는 안 썼지만 그게 나의 논조였고. 고 다음에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 방대해서 현학적이랄까, 철학적으로 얘기하면요. 아...나는 역사학자 중에 한국에서 김준혁 고려대학 총장을 제일 존경해요. 이분의 ????장정????이래는 책을 보셨는지 모르지만, 보셨겠지만 ????장정????이래는 데 보면 인류역사를 이렇게 쭉 자기가 역사 학자로 되돌아 볼 때, 자기는 역사의 신이 있다고 믿는다, 역사가 말이지 옆으로 비뚜로 가기도 하고 뒤로 후퇴도 하고 그러지만 긴 큰 흐름같은 것으로 봤을 때는 결국은 선과 진과 진선미의 아름다운... 고거 고대로 ㅇㅇㅇㅇㅇㅇ 01:36:22 다시 한 번 보여드릴게요. 나는 그걸 믿기 때문에 반드시. 나는 김영삼,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믿었어요, 그게 순리니까. 외국에서 그만큼 어, 투쟁을 하구 정치 이력을 쌓았으면 대통령 되는 거거든요, 국민이 뽑아주는 거거든요. 됐잖아요. 잠깐 녹음 중단 하셔도 되요, 찾는 동안. <자료를 보면서 계속> 구술자 :이거는 내가 한국 갔다 오면, 갔다 와서 쓴 거구요. 한국의 정치실정을 보고. 그거 다 가져가세요. 다 가져가시고.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 돌아가셨을 때 말이죠. 그게 2009년 6월이에요. 제가 제 칼럼란에다가요, <MB정권의 산물 순교자 노무현>이라는 제목 칼럼을 썼거든요. 그게 아까 내가 얘기하던 마지막 구절이 여기 있어요. “세월이 어수선하다. 북한은 도발의 강도를 높이고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임채진 검찰 총장이 고뇌 끝에 사퇴했다. 지금은 망자가 추구했던 가치, (노무현), 즉 인권과 좌우 지역 세대 갈등 해소, 소외 계층의 보호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민 화합과 통합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한 때이다. 이 대통령의 열린 마음의 리더십이 아쉽다 (MB의) 김준혁 고려대학교 전 총장이 그의 저서 장성, ????장정????에서 기록한 세계사의 긴 전개 과정을 통해 진리와 정의와 선을 마침내 실현해내는 역사의 신이 존재한다는 지론을 나는 이번에 확신하게 되었다. 상록수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 민족 나아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승리하리라.” 이게 인제 노무현 죽었을 때 내가 쓴 칼럼인데 이것도 가져가세요. 참고하시고. 그러니까 그 뭐 12.12고 무슨 저 부마사태고 내가 단편적으로 내가 일일이 코멘트 하기에는 좀 너무 장황하고, 또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한국 정치 변화사를 보면서 내가 논설에서 취했던 거는 이 화이부동의 자세였고 그 다음에 내가 쓴 칼럼은 낙관적이었대는 거, 그리고 희망을 가졌대는 거. 그 근거는 김준형 총장 같은 저런 분이 있었고. 고 다음에 내가 또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하는데요.. 김수환 추기경을 내가 인터뷰를 아주 거창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돌아가셨을 때 쓴 칼럼도 하나 가져가시고. 이건 내가 하나 있나? 그냥 참고만 하시죠. 필요하시다면 드리는데 내가 보관용으로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 그렇게 크게 보도 했어요, 내 신문에. 일종에 편집국장으로서의 횡포죠 2면을 할애해가지고 양쪽에다가. 김대중 선생 왔을 때고. 그 다음에. 이건 편집 국장 당시 이부영에 대해 쓴 거에요. 이부영씨 같은 사람은 참 아까운 사람이에요. 강동에서 자꾸 떨어졌는데, 강동. 서울에서 떨어졌죠. 비교하자면 무슨 김근태나 정동영 이런 사람들보다 큰 인물인데 유엔 사무총장을 했어도 뭐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고 대통령감인데, 때를 못 만난 것 같고. 이것도 뭐, 김영삼 취재했을 때 서울서 만난 것. 이런 건 갖고 가셔도 될 거에요. 그 다음에 내가 장대용씨도 만났어요. 장대용씨는 한국에서 기자가 오면 안 만나요. 나는 여기 시카고살 때 만났는데 있을거에요. 장대용씨가 그때 최고의원이었어요. 그리고 이 사람이 허수아비로 최고의회 의장으로 세워놓고 그 밑에 박정희가 부의장이면서 실권을 건드렸죠. 그리고 이 사람은 육사 오기를 쥐고 있었고 누구냐, 박정희는 8기를 쥐고 있었는데 8기가 더 스마트했어요. 8기가 5기를 이기고 장대용씨가 망명할 수밖에 없었어요. 히스 베리 젠틀(He's very gentle.) 그러나 우유부단하고. 그 다음에 이 책도 제가 드릴게요. 참고가 될만한. 이거는 성기종. 제일 앞에서 다이빙 선수하고 인터뷰, 그 저 누구지. 요세미티, 금메달 딴 사람, 골프 선수, 전설적인 박세리하고 한 거고. 여기 보면 아까 그 사진, 레이건 대통령하고 있을 때. 그리고 여기 동네 이야기고. 인혁당 사건에 죽은 사람 있고, 아까 얘기했던 이부영씨 후원회때 내가 연설하고 있는거, 이 이게 이부영이하고 이부영이 부인이고, 김수환 추기경, 이 저, 어... 면담자 : 박개동 구술자 :박개동씨, 김대중씨. 이게 우리집이에요, 우리집에서. 이건 최은희 신상욱, 이홍구, 이건 주지사, 미국 사람. 이 사람이 한승원 변호사. 아, 성란. 이대 앞에 성란이란 식당인데 항상 여기를 좋아하시더라고. 성란이라고 이대 교수들이 많이 가는 식당인데. 여기는 우리 식구들, 아들 딸 우리 와이프. 이게 권근술, 한겨레 사장했던 베스트 프렌드. 서정주는 고은 선생 지금도 용서 못한다고 그러고. 이거는 언론인 조병희. 그 다음에 여기에도 또 내 얘기가 될 만한 사진들이 좀 있을 거에요. 이것도 드릴게요, 여분 있으니까. 이거 짐되지 않아요? 면담자 : 아, 아닙니다 구술자 :괜찮아요? 이건 우리 집안 형제들이고 이게 인제 조선일보 트리오. 이 사람은 정무하고 이 사람은 편집 국장을 두 번 하고 나하고 집사람, 방호영, 방호영이. 조선일보 회장 방씨. l게 또 이 친구들이 또 친하니까. 안 갈라고 그랬는데 금강산 갔을 때 나하고 친구, 이부영씨 부인 친구. 그때 항상 연설을 했고. 김대중, 김영삼. 김수환, 또 이 사람이 장대영. 김상현씨 알죠? 이 사람이 국회 의원 했던. 그 다음에 이지현 박사라고 여기 대부에요, 민주화 운동에. 군인으로서는 백선엽씨 인터뷰를 했으니까. 여기 있고. 이거는 인제 야구장 취재 내가 할 때 박찬호 한거고. 그 다음에 김우중씨 그분을 또 언론인으로 또 인연 맺었고. 그 다음에 이건 내가 첫 번째 책 출판 기념회 했을 때. 아프리카 가서 취재하면서. 그 다음에 이것도 아프리카. 이건 아까 거기 나와썬 참전용사 기념비. 백선엽 장군하고 같이 같던. 피러 제임스라고 유명한 앵컨대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이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우리 집사람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다녔는데 거기 CEO, 여기 주지사, 유명한 칼럼니스트,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뭐 그런 거고. 일권에는 인제 함석헌 선생하고 있는데 첫 번째 출판한거는. 요것 또 가져가시고. 면담자 : 그 79년 이야기를 쫌 다시 쫌 드리자면 79년 부마사태랑 10.26이 일어났을 당시 보도를 선생님께서 신문에 보도를 여기서 하셨을 텐데, 그 이 지역 한인사회의 반응이라고 해야 되나요, 뭐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서요. 구술자 :고 부분은, 고 부분은 조광동 씨가 자세히 알고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때 그때 데스크에 안 있었던 것 같아요. 무슨 이윤지 그때 79, 80 때 어...내가 편집 책임자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딴 부서에 간 것도 아니지만 그 때 내 기억이 없어요, 신문 제작했던. 면담자 : 한인 사회의 그런 반응 같은거, 한국 정세에 대한 그런 반응같은 것은 좀 어땠나요? 구술자 :광주 사태 때 80년대에는 막 데모하고 그랬죠. 전부 뭐 좌파 우파가 없고. 무슨 좌파 우파 진보 보수 없이 전부 전두환이 죽이자고 그러고 굉장했죠. 왜냐면 사실을 보도 안했기 때문에 폭도들의 난동인지 안 사람들이 많앴거든요, 여기두. 근데 그게 사실이래. 정권을 잡기 위해서 학살을 했다는 게 사실로 확인된 이상은 그거 가만둘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로렌스가 그때 한인 타운인데 거기 애들, 횃불 집회 하듯이, 광화문에서. 그식으로 다 나왔죠. 면담자 : 그때 당시에도 시카고에도 약간 그 친정부적인 성향의 한인들이 있었고 약간 반정부... 구술자 :노노, 거의다 반정부라고도 안 그랬어요. 그땐 정의, 민족으로서 당연한 주장이지. 그리고 친정부래면 영사관 직원하고 그 사람들도 뭐 월급 받고 하는거니까 자기네들 정부에서 시키는대로. 면담자 : 그러니까 80년 전에. 5·18 일어나기 전에도 한인 사회가 약간 그런 이념적인 그런... 구술자 :이념적인 것에서는 그거는 반적인 쪽이 정당성을 인정받았지. 반정부쪽이. 왜냐면 정통성 없는 정부니까. 박정희, 박근혜의 유신서부터 독재가 아주 아주 극악으로 치달렸고 전두환이가 왔고 그러니까 그걸 찬성하면 오히려 욕먹었죠. 이런 데서 어우 전두환이 잘한대면. 뭐 그러니까 영사관 직원이라든지 그쪽, 그쪽 친여쪽, 또는 한국 쪽에서 무슨 전경환이가 온대든지, 전두환 동생. 그 새마을 운동 왔다 그러면 우 몰리는 사람들이 있지, 또. 정부에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뭐 그런 거지. 지금처럼 말이지, 좌우로, 좌우가 지금 51대 49 아니에요, 어쨌든 지금은. 박근혜를 칭찬하는 것도 반이고 반대하는 것도 반이잖아. 근데 그 당시에는 거의 반대하는 걸루 봐야지, 일반은. 그러니까 이승만 독재 때 4.19가 일어났는데 그 4.19가 반반, 반은 찬성하고 반대했던 게 아니라 국민 전체가 찬성한 걸로 인정을 받듯이 포악한 정권은 무너져야 된다고 그때는 다 생각을 했지. 그때만 하더라고. 면담자 : 5·18 당시에 상황을 쪼끔 이렇게 말씀을 여쭈어볼게요. 구술자 :아 내가 5·18때 내가 한 몇 개월인가, 한 일 년 인가 또 공백이 있었어요. 면담자 : 잠깐 신문사에서 구술자 :중앙일보에도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하여간 신화일보 때 무슨 데모, 또 한국 일보 때는또 뭐 그런 이너써클 쪽에 문제가 있었어요. 그건 내가 공개하기 쉽지 않을거고. 인제 그것 때문에 내가 딴데로 밀릴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중앙일보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보도와 관계됐을거야, 아마. 그래가지고 나와 있을때요. 그래서 내가 제작을 안 했어요. 그래서 기억이 없고 내가 쓴 기사가 없어요. 그때 12.12, 고 다음에 광주 그 광주서부터 12.12 사이에 내가 칼럼 쓴 거나 기사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 공백이 있었어요. 면담자 : 기사는 쓰지 않으셨지만 이 지역 내에 한인 사회의 움직임은... 구술자 :움직임은 잘 알죠. 그러니까 80년 때 다 일어나서 애들까지 데려와서 데모하고 그랬고. 면담자 : 선생님은 그 광주의 상황을 어떻게 쫌 처음 접하시게 됐나요? 구술자 :나는 그때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던지, 내가 잠깐 봐주던 가게에서 그 매니저를 하면서 TV를 이렇게 봤는데 막 이가 갈리고 그냥 분개를 했습니다, 제가. 그리고 그 당시만 하드래도 만약 그 애들 죽은 채 끌고 가고 학살하고 뭐 이러는 걸 보고 총 쏘고 뭐 나중엔 다 항복했는데도 도청 그래 공격하고 그런걸 보면 야 저건 공산당이 와도 저렇게까지는 안하겠더라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런 사람들이 공산당이 살려준다고 온다면 만세부를꺼다. 면담자 : 주로 인제 미국 방송 구술자 :미국 방송만 봤지. 한국 방송은 무슨 전부 폭도들의 행동이라고 그러고. 모종의 사태. 그 때만해도 꽉 통제하고 막아놓으면 바깥으로 세지를 못했어요. 지금같으면 뭐 그냥 다 알지, 다 . 사실이 금방 다 알려지면 전두환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었지. 벌써 그게 바깥으로 나갔었으면 이건 있을 수가 없는데 그 당시는 김정일이나 김일성이나 김정은처럼 꽉 가둬놓으니까 이게 뭐 발표, 정부발표만이 진짜인줄 알고 폭도들이라느니 지금도 폭도들이라고 하면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있긴 있죠. 지금두. 면담자 : 당시 그런 미국 방송이 5·18을 바라보는 보도하는 그런 내용의 논조라고 해야되나요? 구술자 :논조는 내가 내 논조, 그러니까 반정부 논조고 소위 말하는 반정부. 정부 비판. 정부는 하여간 전두환이 꺼니까, 그 당시에. 완전히 그렇죠. 뉴욕 타임스가 교과서였잖아요. 그거 베껴다 내면 다 알아들은 것에요. 정권욕에 의한 것, 12.12도 그렇고. 어떻게 하극상이지 그게. 제대로 보도했죠. 미국은. 면담자 : 당시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70년대에 처음에 들어왔을 때 70년대에 들어오셨을 때 시카고에 한인이 뭐 한 6천명에서 만 명 됐을 것 같다 이렇게 말씀 하셨는데 그때 당시 5·18 소식을 듣고 여기 뭐 행동을 했던 어떤 시위나 항의 시위나 했던 조직이 됐었나요. 구술자 :그때는 조직이 돼서 나왔을 거예요. 무슨 조직이 뭐 이렇게 뭐 한국서처럼 이렇게 조심스럽고 치밀하고 이런 게 아니고, 우리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냐, 가만히 있어야 되겠냐 그래가지고 교회라든지 뜻있는 사람 몇사람이든지 어디 광고 내는 거야. 몇월 며칠 로렌스에서 시위하겠다. 하면 몰리는 거야, 모이는 거야. 면담자 : 시위 장소가 로렌스. 구술자 :로렌스. 한인타운이야, 당시. 그리고 상당히 조직적이지는 않고 그냥 그냥 교회, 그 다음에 친지들 이런 통해서 의분한 사람들이 이니셔티브(initiative)지. 면담자 : 오래된 기억이긴 합니다만 혹시 이때 로렌스에서 첫 5·18 관련 항의 시위를 했던 시기가 몇일인지 기억하시나요? 구술자 :날짜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면담자 : 5. 18 이후인가요. 구술자 :이후죠. 면담자 : 훨씬 이훈가요? 구술자 :훨씬까지는 아닐거에요. 면담자 : 아무튼 그 이후. 구술자 :고 얘긴 따른 사람한테 들을 수 있을거예요. 정확하게. 왜냐면 거의 참석한 사람들 다 있고. 나도 가봤지만 그래서. 그 때 한 삼백 명, 꽤 나왔어요. 한 삼백명 그것도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종합해보세요. 딴 사람은 또 얼마로 기억하는지. 면담자 : 하루 딱 있었나요? 그 항의 시위가, 로렌스 한인타운. 구술자 :하루 있었던 것 같애요. 하루 있었고. 교회에서 그 규탄하는 예배를 보는 데도 있었고. 면담자 : 면담자 : 예. 뭐 당시에 그 시카고에 지부를 두고 있었던 한국일보라든지 동아, 중앙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그때 있었나요? 구술자 : 없었어요. 그건 늦게 생겼어요. 면담자 : 어떤 형식으로 좀 보도, 5·18에 관련된 보도... 구술자 :조광동이가 한국일보 편집국장이었고 그 당시엔 한국일보가 중앙일보보다 훨씬 독자도 많고 리딩 뉴스페이퍼(leading newspaper)였는데 심지어 어떤 것까지 보도했냐면 ‘전두환 찢어죽여라,’ 하는 사진을 조광동씨가 개재했어요. 근데 발행인이 빼라고 그랬어요. 근데 못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게 아마 신문에 나간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압력이 들어와서 조광동씨는 그거 신문에 낸 이후로 신문사에서 나갔어요. 쫒겨났어요. 근데 그게 결국은 조광동씨로 하여금, 나중에는 한겨레신문을 조광동씨가 맡았어요. 하튼 그게 계기가 됐지. 조광동씨도 한겨레 맡기 전에는 옷장사도 하고 또 고생 좀 했어요. 소신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고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아무튼 그 당시에 로렌스 한인 타운에 있었던 항의시위는 참석은 하셨는데 이걸 조직적으로 주도하시거나... 구술자 :뭐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왜냐면 꼭 인원수를 많이 동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왜냐면 그 의분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그, 그 자기네들 생각을 미국 사회에 전파하고 알리고 한거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무슨 조직하고 하튼 그런 기억이 전혀 없어요. 많약 조직했으면 조광동씨나 나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게 없이 몇 사람이 이렇게 신문에 광고를 냈는지 안 냈는지 이렇게 구두로 이렇게 이렇게 해갖고 모이고 했던 것 같아요. 면담자 : 그 어찌됐건 그 이후에 5·18이 10.1 항쟁으로 마무리 되고 한국 상황은 마무리가 되고 어...그걸 인제 실패했다라고 얘기는 않지만 어찌됐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지 않습니까. 들어서고 제가 알기로 그 다음 년도에 미국을 방문한 것으로. 81년도에 레이건을 만나러 미국 방문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 당시에 물론 직접 시카고를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당시에 또 뭐 한인 사회 내에서 그런 전두환을 바라보는 시선이랄지 방미와 관련된 어떤 시위라든지, 방미 반대 시위랄지 그런 거 뭐, 워싱턴이나 뉴욕이나 그런 데서는 일어났던 걸로 알고 있거든요. 엘에이도 마찬가지고 그런 움직임도 같이 있었나요, 시카고에요. 면담자 : 전두환 방미반대 시위 같은 건 여기 그렇게 없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요 구술자 :그럼 선생님께선 다시 한국, 아니 다시 신문사로 들어가셨던 해가. 언제였나요? 좀 다시 쉬셨던 공백 기간이 아까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다시 신문사로 복귀한게. 면담자 : 그러니까 86년까지인가 81년서부터 뚝뚝 내가 편집국장을 또 했죠. 중앙일보. 그니까 일단 광주 사태 하고 이게 진정된 다음에. 이 쪽도 지사장이 갈리고 이러면서 내가 다시 들어갔고 면담자 : 그럼 86년? 구술자 :86년까지. 81년인가. 81년서 82년인가? 81년 아니에요, 광주 다음에는 아니에요 고게 정확하지가 않은데 80년때 초에서 80년대 거의 말까지 있다가 다시 한국일보로. 그때는 내가 이 논조가 너무 정부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쫓겨난 거야, 중앙일보. 면담자 : 아니 그러니까 제가 좀 이해가 좀 안 돼서 그러는데 80년... 구술자 :곡절이 많았기 땜에 면담자 : 80년 당시에 좀 쉬셨던, 신문사를 떠나있으셨던 공백기간이 있으셨다고 했는데 그 기간이 정확하지 않지만 1,2년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86년 까지 쉬셨다는 건가요? 구술자 :아니, 86년까지는 아니야. 83년에는 벌써 내가 중앙일보 편집국장으로 전두환을 만났다니까. 83년에는. 대한항공 떨어질 때. 면담자 : 83년에는 중앙일보 구술자 :편집국장.83년에 내가 83년, 82년서부터 86년까지 편집국장이야. 아니 그렇기 길지 않다. 3,4,5,6, 4년 편집국장했을거에요. 83년부터 86년까지 그러고 한국일보로 갔어요. 면담자 : 한국으로 다시 잠깐 들어오셨다구요? 구술자 :아니, 아니요. 면담자 : 아, 한국일보로. 구술자 :한국일보로 다시 또 갔다구요. 어어. 왜냐면 이때는 내가 너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니까 신문사에서 인제 다른 핑계로 내쫒는거죠. 왜냐면 그때는 여기 민통련이니 뭐니 민주 단체들이있었거든요. 그때는 조직이 있었어요. 민통, 민통이라고. 어, 민주주의 통일 연맹인가 무슨. 조광동씨 거기 회장도 했죠 나는 주로 조광동씨가 나보다 더 이, 사이사이가 많아요. 그니까 한겨레 오기 전에 장사했다든지 한국일보 가기 전에 또 뭐 어떤 그 양반은 신문사 근무한 거는 나보다 짧은거에요. 왜냐면 하도 쫓겨나기를 많이 했으니까. 쫓겨나기도 하고 한겨레 같은 경우는 쫒겨난 게 아니라 실패하고. 그러니까 이제 광고가 없고 구독자가 없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나보다도 더. 근데 나도 그런 곡절이 있었는데 83년서 86년까지 있다 왜 또 한국일보로 갔냐 하며는 그거는 논조 때문에. 그때 논조 때문에 그렇게 내보냈다고는 대외적으로는 안 하고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자기네들은 무슨 딴 핑계를 내는 거예요. 어차히 인사할 때가 됐다, 편집국장을 오래했대든지 딴 이유를 대는 거에요. 무슨 이 살마은 게을르대든지 이 사람은 직원들이 싫어한다든지. 뭐 이런 걸로 내쫒으려고 해요. 왜냐하며는 아까 말씀했듯이, 내가 말씀 드렸지만 민통이니 뭐니 민주화 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들고 일어나서 데모하고 자기네들 수(suit: 소송)하고 그럴 까봐. 근데 나만하더라도 사실 그거 수를 해야 했는데 그만큼 미국을 몰랐고 또 경영하고 틀리면 나오는 거지, 이런 정도만 생각했기 때문에 정부 상대 싸움도 아니고 그래서 뭐, 그냥 나왔어요. 면담자 : 선생님 잠시... <레코더 오작동/ 이후 영상 없음> 구술자 :저것만 갖고. 혹시 내가 없으믄 내가 하나도 없는 거니까. 면담자 : 어, 80년 5·18 이후에 이쪽 인제 시카고에서도 그 이후에 인제 교민사회를, 한인 교민사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 세력들이 이곳에 조직이 되기 시작한 부분인데 선생님도 그 관련되서 어떤 활동을... 구술자 :저는 조직 속에는 안 들어갔습니다만. 그 저, 민통에 대해서 좀 알아보시라구요. 그쪽은 내가 직접, 거기에는 또 누가 있냐면 박장렬 박사라고 있어요 박장렬. 광주분이지. 박장렬 박사. 서울 공대 나오신 분인데 여기 원자력 관계 연구소에 다니셨고. 그 양반이 민통 회장도 하고 그랬어요. 자료들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어요. 조광동씨나 그 사람들이. 나는 그쪽은. 그 사람들이 그 운동을 할 때는 나는 신문 제작 쪽에 있었으니까.그러니까 안에 있었고 바깥에 안 있었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은 또 바깥에 있었다구요. 그래서 그 양반들이 더 정확하게 잘 알거에요. 80년대에 여기 동포와 민주화 단체의 움직임. 고거는 내가 지금 그냥 막연한 기억만으로는 정확하고 자신있게 할 수가 없는데. 실무자들이, 직접 일했던 사람들이 있으니까. 고 부분은 그쪽으로 좀 물어보셨으면. 저는 그 안에 이너 써클에는 개입을 안 했어요. 왜냐면 신문 제작 쪽에 있으니까.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언론 활동을 미국쪽, 미국에서 오셔서 하시면서 계속 그쪽으로, 약간 성향이라고 할까요, 논조가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과 그런 것들을 이렇게 날카롭게 쫌 해주셨는데 물론 인제 한국에서보다는 쪼끔 그런 글을 쓰기가 자유스러웠겠지만 그런 부분들에대한 어떤 불이익이나 보이지 않는 다른 뭔가가 압력들이 선생님께 있지 않았나요? 구술자 :그런 건 없었어요. 가령 무슨 뭐, 그 당시는 비자를 받아야하잖아요 여권을 도장을 여기서, 근데 다 주고 그 다음에 뭐 아까 사진에도 보여줬지만 우리 형제들이 다 서민들이거든요. 무슨 요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평범하게 서민으로 사는 사람들한테 그런 건 없었어요. 제 경우에는 그런 건 없었어요 면담자 : 한 가지만 더 여줘볼게요. 70, 80년 당시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 통폐합을 하면서 수많은 한국에 있는 기자들이 해직되고 그 뭐 또 그런 한국에 있는 기자분들이 해고당하면서 운동하기도 하고 전부터 그런 운동들 하고 했었는데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좀 같이 운동을 진행한다거나 뭐 그런 부분들은 좀 없었나요? 구술자 :본국하고 미주와?그런 건 없었어요. 뭐 여기 언론 사회에 있는 사람들이 어...몇 사람 빼놓고는 다 인원이 충당 리크루트(recruit) 됐고 여기서는 의식이 없고, 또 그 몇사람이 또 그 안에서 일하면서 연결해가지고 하는차원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런 건 없었어요. 그리고 기자탄압은 사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사태가 제일 컸던 거지. 김종필이 총리하면서 그, 언론 통폐합 이전 얘기에요. 김종필씨가 그때 광고 탄압이라고 동아일보 자쭈 정부 비판하면 광고 싣지 못하게 압력을 업주들한테. 나중에 이제 백지가 나가게 되니까 국민들이 막 써포터하고. 사실 오늘날 보면 써포트한 국민이 바보지. 동아일보가 배신을 했는데 국민들한테. 그러니까 그런 게 더 컸었고 그때 해직된 그 송일보같은 기자, 얼마 전에 돌아가신 송일보 동아태위원장, 그런 사람들에 제일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에요.수십명 수백명이. 조선일보하고 동아일보가 제일 많았지 언론자유실천선언 이부영, 권근술이. 그런 사람들이 저걸로 피를 많이 봤고 그 다음에 전두환 들어와서는 많이 인제 해외나 국내나 하도 독재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냥 언론인, 신문사 안에서 사람들은 많이 순종하고 뭐 그런. 패기가 줄었지. 그것도 세상이 바뀌면서 젊은 사람들이 또 그렇게 뭐 큰거, 역사와 또 조국 민족 이런 걸 위해서 자기 희생 안 할려고 하고. 요즘은 또 더 심한 것 같아요. 그, 우리 때만 해도 그래두 독립운동 정신이 있고말이지 그랬었는데 요즘은 하거는 KBS, MBC에서 노조들이 쪼끔 활동을 하지만, 비판을 하고 그러지만 말이죠. 저 사주 측이나 정부에 대해서. 근데 옛날 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열기대른가 투지력이. 여기서 보기에, 제가. 면담자 : 그러면 구술자 :학교도 마찬가지고요. 대학교도 지금 옛날 같으면 사대가 심했냐 문리대가 심했다 뭐 이런 얘기 했지만 요즘 사실 학생들도 뛰어나와야 될 그런 상황, 정치적인 상황이 많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뭐 잠잠하드라고. 마마보이들 뭐 취직 잘해서 잘 먹고 잘살려고 이쁜 마누라 얻고 토끼 같은 자식들 키울라고 해서 그런지들. 그런 의식은 없는 것 같애요.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이해하죠. 그것이. 안정된 나라니까. 한국은 나라 자체가 안정되지가 않았잖아요, 특히 정치적으로 후진성을 버리지 못했고.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는 마당에 가만히들 있고 말이죠. 그 젊은 사람들의 혈기가 좀 아쉬워요. 면담자 : 86년까지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하시다가 87년도에 한국일보로 구술자 :갔어요. 그때 편집국장에 누가 있어가지고 직책은 편집국장이 아니지만 일은 편집국장 일을 했어요. 면담자 : 그 당시 또 한국은 6월 항쟁.6월 항쟁이 또 크죠. 면담자 : 6월 항쟁이 일어났던 시기. 어찌됐건 그런 전두환 시절, 독재정권 시기 인제 7년을 보내면서 87항쟁으로 이게 터진 거잖습니까. 그 이게 인제 제 2의 5·18이다, 그런 얘기도 하고 5·18의 연속선상에서 인제 87항쟁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또 있었구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인제 87년 6월 항쟁 뭐 미국에서 바라보시는 입장에서. 이런 또 동포사회의 분위기와 같이 좀 87항쟁 6월 항쟁에 대한 동포사회의 분위기와 해서 선생님께서 좀 하시고 싶었던, 해주시고 싶었던 말씀은요. 구술자 :아쉬웠던게 그때 물론 이제 넥타이 부대들도 다 나오고 해서 항쟁이 굉장히 거셌었는데 거기서 이룩한게 사실 얻은 게 직선제거든요. 직선제 하쟤는 거예요. 근데 직선제 쟁취만으로는 그게 그렇게 큰 거였냐. 하는 생각이 좀 들구요. 뭐 그래서 노태우가 나타나고 김영삼이가 나타나고 그 뒤로는 인제 김대중 선생이래든지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그게 쪼금 좀 미흡했던 것 같아요 좀더, 좀더 큰 변화를 가져왔었으면. 그 항쟁이 너무 평화적이어서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그래서 뭐 그렇다고 다 블란서 식으로 단두대 처리하고 그런 주장은 또 아니지만도 직선제라는게 뭔가 좀 미완성이 아닌가 말이죠. ㅜ직선제 성취했대는게 그렇게도 기쁘냐 말이야. 오늘날 또 이런 게 반복되잖아요. 좀 미진하다고 생각했어요. 면담자 : 어떤 게 좀 더 필요했을까요.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는. 이런, 이정도까지 좀 이루었으면 지금의 현, 우리 나라가 한국이 이 정도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그때 쫌 뭔가 완성시켜놨으면. 쫌 더 이뤄놨으면. 구술자 :그거는 굉장히 힘든 질문이야. 내가 단언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런거 까지는. 그게 우리의 한계였고 인제 그게 어떤 우리의 운명이라고 할까. 뭐 그런거였으니까 뭐 어쨌든 아쉽다는거 만큼은 제가 얘기할 수 있어요. 미진하고 아쉬운 거 같지 않았나. 그래서 어떻게 하면 혁명이 혁명다워 피를 흘려야한다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박정희를 그, 가만 뒀어도 부마 항쟁하고 이런 거로 봐가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제가 볼 때는. 그렇게 되며는 일단 독재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있었으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 과정이 없이 넘어가버렸거든. 그러니까 박정희가 다시 영웅이 되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박정희가 된거고. 그리고 한 측면, 경제적인 거래든지, 이겨야 된다는거래든지, 기득층이 되야 된다든지 이쪽만 강조하고. 그러니까 뭐 또 다시 고은 선생님 얘기하자면 나하고 인터뷰하면서 동의했던 게 그런 박정희를 존경하는 그런 거보다, 교황 프란시스코나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이 나라를 다스렸으면 그 그, 영향력과 그 깊이와 진폭은 달랐을 아니냐 이거야, 나는. 그쪽 측면에서. 그니까 아직 우리가 그런 대통령, 가령 뭐 막연하게 얘기하면 김구 선생이라든지, 아까 이부영 같은 사람, 이런 사람. 근데 지금도 또 있어. 손학규 같은 사람도 대통령, 우리 같은 사람이 원하는 대통령은 손학규 같은 사람이거든요. 양심적이면서도 지식인이고 욕심없고. 자기 희생할 줄 알고. 근데 현장판에 가서는 그런 사람이 못 견디잖아요. 손학규 같은 사람. 김무성. 이건 비교해서 미안한 얘기지만 어떻게 김무성이 같은 사람이 손학규를 밀어냅니까. 우리가 볼 때. NLL 국가 원수가 한 얘기 그걸 없애자 안 없애자를 떠나서 그거 선거 때 막 이용해놓고 말이야. NLL 없애자 그랬다고, 그래놓고 조사하니까 뭐 찌라시 보고 한 얘기라 말이죠. 어떻게 제 1당 여당의 당수지 그러니까, 대표가 되기 전이지만.그런 사람의 수준이 찌라시 갖고, 그런 대통령 발언을 그렇게 할 정도로 그게 얘기가 됩니까? 경남지사하던 김 누구에요? 최고의원. 개헌발언 한 경남지사 누가 했죠? 김태호. 김태호란 사람이 경남지사하고 총리까지 인준 받을 뻔한 사람이에요. 김무성이가 중국에서 개헌 발언을 했는데 우리 박대통령이 싫어하니까 바로 사과, 자기가 뭐 신중치 못해서 이랬다고 사과하고 들어갔다고요. 그랬더니 김태호는 말이죠, 최고의원 사표내고 그랬다고. 충성할려고, 박근혜한데. 그러더니 도로 들어갔어요. 그 사이에 김무성이가 김태호 사무실에 가서 야, 니 요즘 커졌나? 관둘 꺼가? 뭐 이런 식이에요, 자리도 비고 말이죠. 신문에 기사가 났어요. 그랬더니 그냥 뛰어나와서 형님. 아 이게 조폭 수준이지. 이게이게 국민이 바보입니까. 근데 국민이 그걸 모르는 것 같애요, 그 수준들을. 나라가 어떻게 그 수준에서 운영돼야 되요? 진짜 해외에서 이렇게 볼 때는 하, 이게 한참 또 가야겠구나, 아부하고 충성하는 놈이나 그걸 깡패 식으로 다루는 당 대표나 그걸 보도하는 언론이나 그거에 분개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나 일반 지식인들. 나라가 어떻게 될거에요. 여기서 볼 때는 관심 ㅇㅇㅇ141110육길원01_02:16:22 이거 참속상하다, 아예 이거 덮구 말이지 관심을 갖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럼 80년 때하고는 얘기가 다르지만 말이죠. 면담자 : 87년 한국일보에는 당시 87년부터 언제까지 좀 계셨던 건가요. 구술자 :그러니까 편집국장으로 2000년까지 있었구요, 고 다음에 2001년서부터 조선일보,동아일보로 옮겼는데 사주가 같았어요. 일 년 만에 경영란으로 망해서 한국 일보로 다시 들어온 게 아니라 한국일보에서 나를 다시 영입해가지고 논설위원으로, 파트 타임 잡, 그러니까 이제 월급을 많이 줘야되니까 나이도 들고 매일 출근할 수는 없고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나와서 큰 기사, 사설 쓰고 칼럼 써달라고 한 게 그직을 십 몇 년 했어요. 2012년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12년동안 논설위원이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세미 리타이어(semi retire 반 은퇴) 하고서 12년 한 거죠. 면담자 : 그러고 나서. 구술자 :말이 풀타임이지, 뭐 그 뭐, 그 ,아, 파트타임이지 풀타임 한 거와 전연 다른게 없이 신문 열심히 열독하고 공부하고 써베이(survey) 하고 자료 모으고 칼럼 쓰고 그거는 똑같은 노메러 왓풀타임 오아팟타임(No matter what, full time or part time: 전업이든 시간제든 상관없이) 그거는 그냥 언론인으로서 다른 건 안 했으니까 예. 뭐 여행 좀 많이 하고 좀 쉬고 그랬을 뿐이지 하는 일은 신문기자라고 봐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사회에서도 이 커뮤니티에서 n나를 대기자로 생각하고 뭐 좀 큰일이래든지 또 누가 뭐 큰 인물이, 사람이, 손님이 왔고 그럼 꼭 원로 언론인으로 대접해서 만나게 하고 그런 생활은 계속됐죠. 면담자 : 그, 12년이면 인제 한국일보 그만 논설위원을 그만 두신 해가... 구술자 :두고 이거 제가 만든거에요. 제가 이거 시카고 타임스. 이게 다음 주일 11월 15일 토요일날이 창간 일주년이에요. 난 어제 그제 창간 했는 줄 알았는데 벌써 일년이 됐는데요, 어제 그제 조광동씨하고도 점심먹으면서도 얘기했지만 이게 시카고 언론사에 혁명적인 신문이에요. 혁명적이다, 레볼루셔너리(revolutionary)한. 어떤 면에서냐? 인기 면에서요. 이거는 공짜신문인데요, 주관지라 .광고갖고 유지되는 신문이예요. 글로써리, 식당 이런 데 뿌리는데 늦게 가면 신문을 못 볼 정도로 불티나게 들고나가요. 그래서 우리가 주간지를 직배까지 해요. 여기 보면 여기 나오잖아요. 주간지가 직배하는 시스템이 없어요. 미국에서 일간지처럼 받아보는 거에요. 시카고 트리뷴지에다가 배달료만 일년에 삼십불 쯤 내면요, 이게 집앞에까지 일주일에 한번씩 딱딱 들어가요. 그래서 지금 부수가 제일 많고 열명이면 열명이 다 읽을 거 많고 신문이 다 좋다. 그래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혁명적이란 얘기를 해요. 근데 내가 그 얘기를 출판 기념식에서도 했더니 인사말이 있으니까 거기서 헐라고요. 여러분이 성원해주셔서 그렇게 성장했대는거. 그리고 광고도 보통 광고 직원들이 마케팅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마케팅하는 것보다 갖고 오는 사람이 많아요. 내가 보기에 그렇게 특출하게 잘 만든 것도 아닌데 단 시일 내에, 단 시일 내에 굉장히 성장한 신문이에요. 면담자 : 그 12년도에 어찌 보면 인제 한국일보를 그만두시고 선생님이 이제 구술자 :아니 12년이 아니라 면담자 : 2012년까지 논설위원 하셨다고. 구술자 :12년, 12년. 그러니까 작년까지도 계속, 내가 12년이라고 그랬죠? 아니 13년. 지금 14년이죠. 왜냐하면 이게 하기 1년 됐는데 이거 하기 한달 전까지도 한국일보에 나가서 글썼어요. 논설위원으로. 고문, 고문 겸. 논설위원 겸 고문. 면담자 : 인제 한국나이로 하면 선생님 춘추가벌써 일흔 구술자 :다섯. 일흔 다섯 1940년생이에요. 은퇴할 나이죠. 한국은 사오정인데 상상할 수도 없죠 면담자 : 다시 인제 시카고 타임즈라는 곳에 주필... 구술자 :주필이지만 제가 취재도 하고 인터뷰도 이렇게 하고 칼럼도 쓰고 그 다음에 편집, 제목까지 제목도 다 달아줘요. 거의 큰 거 제목은 제가 달아줘요. 제가 제목 다는 장기를 가졌거든요 미다시, 타이틀, 제목을 내가 이렇게 달아요. 이런제목을 달아주고. 이런 거 일간신문에서도 여기서도 모도 안 해요. 못해요. 본사 눈치보느라고. 이런 것. 뉴욕 타임스에 이렇게 나왔다는 거 우리는 하잖아요. 독자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면담자 : 새로운 언론들을 시카고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한국일보 같은 거 말구요.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은 언제부터 쫌 가지고 계셨나요? 구술자 :아니요,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면담자 : 시카고 타임즈 구술자 :나는 한국일보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해픈 투비(happen to be: 어쩌다보니) 이거를 해보겠다는 사람이 내 처남. 우리집사람의 동생이 자기가 신문을 해보겠다고 하는데 매형이 좀 도와줄 수 있냐고. 어, 나는 이제 나이도 들었고 제가 십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했거든요 콜론 캔서(Colon Cancer). 근데 지금 캔서 프리(cancer free: 완치)에요. 캔서 때문에 난 죽진 않아요. 딴거 때문에 죽겠지. 왜냐면 캔서는 나은 거니까. 그러니까 늘 몸이 괜찮냐고 물어보거든요. 근데 몸은 괜찮다 그런데 나이도 그렇게 이게 내가 제작 일선에서는 못 뛸 것 같고 좀 칼럼이나 써주고 뭐 편집에 대해서 쪼금 코칭을 하는 건 해도 내가 못하겠다 그래서 출발했는데 출발하고 보니까 내가 코를 낀 거예요. 내가 그냥 볼 수가 없드라고. 면담자 : 발행인이 구술자 :발행인이 우리 처남. 처남이 아니었으면 내가 조인 안 했어요. 이게 얼마나 고생이 된대는 걸 제가 알기 때문에. 면담자 : 매주만큼의 이만큼의 분량을 신문을 찍어서 만들어 내놓으면, 기사도 지금 보니까 굉장히 좀 많이 들어가 있는데 구술자 :기사 많이 들어가요. 칼럼도 들어가고. 또 한국에서는 가져오는 것도 있고 한국에서는 현대라는 주간지를 갖다가 전제 하죠. 뒷부분을. 우리가 그쪽을 잘 모르니까. 그쪽은 이렇게 많이 할 수가 없으니까. 여기까지. 면담자 : 추구하시는 어떤 상이 있으신가요?시카고 타임즈는 이런 언론이 쫌 되고 싶다는. 구술자 :하여간 재미있고 유익한 거 보도하고, 그 다음에 또 정의, 맨날 얘기하는 거지만. 신문사들이 맨날 불평부당하면서 불평부당 안하거든요. 자기 회사의 인터레스트, 이익을 위해서 별 짓을 다한다고요. 우리는 그것만은 하지 말자. 진짜 불편부당하게 하자. 억울한 사람 편에 많이 들고 그 다음에 나는 또 어두운 것보다 밝은 거 희망적인 것 이런 휴먼 스토리를 좀 많이 다루고 싶구요, 그 시가 있는 신문, 신문 같은 시. 시같은 신문 이런 걸 지향하고. 그런걸 무슨 캐치프레이즈처럼 안 달아도 독자들이 알아요. 느낌으로 해서. 내가 신문 좋아하는 것 중에 또 멘트로 잘 이용하는 얘기는요. 한국일보를 창업한 장기영씨가 한국일보를 상업지로 만들면서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썼거든요. 그건 무슨 말이냐하면 신문은 나쁜 목적으로는 누구도 이용할 수 없지만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신문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신문을 가지고 매니퓰레이션(manipulation: 이용) 하고 히용하고 그 나쁜 목적으로 그러면 이건 이건 공기가 아니거든요. 내가 무슨 공기래는게 사회의 그릇으로서 또 뭐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얘기하듯이 신문 없는 정보, 정보없는n 신문, 어느 걸 택하겠느냐? 이런 정보 없는 신문, 이런 진부한 얘기가 아니라 적어도 페어(fair)하고 정직하자 이거에요. 읽을 거리 많고 그렇게 어려운거 아니에요. 그러고 신문이요 다분이 영감적인 것도 많아요. 밸류 같은 것도 아, 이거가 크다, 하면 신문 전문가들은 비슷한 생각을 해요. 오래 신문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면담자 : 이게 주간진데 한번 발행할 때 어느 정도 발행을 하십니까 구술자 :7천부 발행해요. 면담자 : 7천부 발행이요. 시카고 이 지역에... 구술자 :이 지역에. 여기 인디아나 가까운데 아이오와, 샴페인 대학교 있는 데 스프링필드 이런 데 보네요. 디트로이트도 보내지, 글로써리 몇 군데. 이 우리 처남이라는 친구는 인제 업무 사이드, 광고, 직배 같은 거 이런 거는 내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우리 그 발행인 아이디어에요. 직배 시스템. 이 친구가 세일즈를 했기 때문에 이런 거에 아주. 특징이 이런 거 광고 안하거든요. 집안 가정 것들 이게이게. 주간지는 더군다나 안 주는데. 이게 한미은행에 LA에 있는. 주간지에다 여태 광고한 적 없는데 갖고 왔어요. 뭐 그런 식이에요. 뭐 내가 쓴 칼럼인데 급허게 쓰느라고. 제대로 안 됐거든. 광고도 많은 편이에요. 현집이 깨끗하잖아요. 주간지가 삐라 같은 그런 게 없어요. 이거는 우리 일주년 행사 굉장히 성대하게 하드라고요. 그리고 이 독자투고도 아무나 안 내줘요. 선별해요. 여기는 여기 일간지 신문들이 독자 투고 보며는요, 습작하는 사람들 글 막 실어요, 대가인것처럼.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든. 어느 정도 수준이 있어야 되는데. 신문은 아무렇게나 맨들기에는 너무 귀중하다는 걸 잘 몰라요. 신문 제작자들이. 이렇게 짜깁기 해갖고 면 메꾸고 광고 해서 뭐 수입 올리믄 되는 줄 아는데 다 나오는 게 아닌데 열정도 있어야 되고, 정의감도 있어야 되고, 역사의식도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무슨 아이고, 월급이 작은데 근무시간이 그런데 그러면 신문사에 들어오면 안 되요. 어떠한 조건에서도 신문은 열심히 만들어야되고, 정직하게 만들어야 되고, 재미나게 만들어야 되고 그게 몸에 배어야 되고 그런 열정으로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 미국에 들어오셔서 거의 뭐 40년 정도가 구술자 :40년 이상 신문사에. 인앤아웃은 아까 좀 있었지만. 면담자 : 언론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렇게 해오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좀 있으시다면 앞으로 난 이거... 구술자 :신문은 인제 좀 접고 제가 책이 좀 많아요. 책이 아주 많은데. 두 달 전에 좀 먼데로 이사를, 먼데도 한 옛날 살던 데서 십분, 십오분. 리버티로 이사왔어요. 좀 멀어요. 그래서 인제 농장도 있고 이렇게 숲속인데 집에 한 여섯 채 있고 쪼금 커요. 인제 거기서 음악 듣고 책 쓰고 그 다음에 뭐 그런 거 하고 여행 많이 다니고 그 다음에 인제 그 동안에 여기 저기 잡문도 쓰고 다시 좀 자서전 정리도 하고 이제 좀 슬로우 다운 해야죠. 그니까 다시 무슨 봉사를 하겠달지 신문에 종사하겠다든지 그런건 인제 할 만큼 했어요. 지겹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라 아...나도 쉬어야 되니까. 나도 쉬어야디니까. 오늘 정기 체크업(check up: 검진) 이라 내과 의사 만났는데 딴땐 혈압이 120에 70이었는데 이번에 136에 80이라고 그더라고요. 많이 올랐잖아요. 그래서 역시 신경을 써서 그런가하는 생각도 들고. 요새도 제가 한 한 시간쯤은 옛날엔 뛰었는데 아픈 다음에는 그냥 걸어요, 좀 걷고, 수영 한 30분 하고. 태권도 일주일에 두 번 하고 근데 태권도는 자꾸 쉬고. 이사 갔기 땜에 도장이 멀잖아요. 그럼 그쪽으로 바꾸든지. 쉬든지. 해서 운동 열심히 하고, 책 많이 보고, 글 많이 쓰고 살았으면 해요. 그거 접고 좀 또 내면의, 안의 좀더 충실하고 싶어서 그래서 헨리 쏘로우(Henry Thoreau) 글 같은 거, 법정 글 다 대개 읽었지만 다시 좀더 음미하고. 법정 스님이나 또 왜 그런 거. 또 성경도 좀 가까이 하고. 그러고 살라고 그럽니다. 면담자 : 그 한국 나이로 하면 인제 올해로 선생님께서 춘추가 75 구술자 :아니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도요, 내가 저기 앉아서 저거 치는 아가씨, 한참, 굉장히 젊잖아요. 인제 피는 꽃인데 어제 같아요, 저랬을 때가. 어제 같애. 인생 그냥 지나가더라구요. 인생 지나가. 이거 딴 얘기지만. 나 스스로를 내 나이를 못 믿는 거예요. 나는 아직도 한 4,50대겠지 하고 사는 거예요. 직업 자체가 그렇지만. 어디 취재 갔는데 내가 뒹굴더래요. 나는 몰르고 그랬지. 열사람이 뭐 얘기한걸 받아썼는데 사진이 없어 하나하나 찍으려니까 밑바닥에서 뒹구는 거예요.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고. 나는 몰랐는데 남들이 딱 관찰한 거에요. 저 연배 드신 분을 이렇게 만들고 말이지. 근데 이게 인제 이 나이 더 지나서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마지막 불꽃을 태운 거죠. 면담자 : 미국에서 지내신 게 인제 절반 이상이 선생님 인생에. 구술자 :미국에서 산 시간이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많죠. 면담자 : 절반 이상이 구술자 :여기가 어떤 의미에서 고향이죠. 면담자 : 그래도 끊임없이 이런 언론 활동을 하시면서 한국의 뭐 민주주의나 민주화나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을 그쪽으로 갖고 계시는 부분인데 구술자 :버릴 수 없죠. 면담자 :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우리의 역사, 한국에 대한 소회라든지. 아까 방금 쫌 해주신 말씀과 유사할 수 있는데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선생님의 지나온 삶에 대한 소회를 마지막으로 간단히 해주시고 이 인터뷰를 좀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술자 :그러죠. 내 개인적인 소회 아님 한국 역사에 대한 거? 면담자 : 다 포괄적으로. 나눠서 말씀해주셔도 되고요. 구술자 :하여간 나이가 상당히 많은데도 지금도 현역으로 열심히 뛰었고, 후회가 없고. 또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뭐. 내가 조국을 비판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거고. 조국이 잘 되기를 바라고 내가 사실은 아까 제목 다는 데에 귀재라고 했는데 아...한국 남북통일 이런 신문을 한번 맨들어 보고 싶었는데 그건 우리 세대에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애요. 그거는 우리 세대에 이루지 못했드래도 내 생애에는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게 꿈이고 그 다음에 남은 생애는 정말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즐겁게. 매일 집에서 파티를 하고. 내가 친구가 많아요, 마당발이라. 파티하고 여행 많이 다니고 좋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노래듣고 책 보고 음악 듣고 또 그러고 싶어요. 이러고 뭐 통일을 얘기하니까 딴 얘기가 더 이상 할 게 없네요. (웃음) 면담자 : 뭐 지금 정정하시니까요. 연세에 비해 굉장히 정정하신대요. 구술자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하루가 다르다고 그래서 내일 또 어떻게 될지 모르고. 면담자 : 선생님 방금 하신 말씀 다 선생님 됐으면 좋겠습니다. 긴시간 이렇게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감사합니다. 아무 소득 없이. 면담자 : 아닙니다, 그래도 말씀을 굉장히 잘 해주셔서. 저희가 좋은 조사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여행 중에 건강하시고 좋은 일 하시는데 언제 또 한국에 가면 김영진 의원하고 같이 식사하고 그래요. 아시는지, 모를 수도. 아무튼...어떻게 이번에 원내로 못 들어가셔 가지고...좋은 때가 있겠죠. 면담자 : 오늘 긴 시간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 또 구술일정이 있으시다니까 여기까지 하죠. 면담자 : 이상으로 육길원 선생님의 구술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병헌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이병헌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1일 ○ 구술장소 : 미국 일리노이 글렌뷰 □ 녹취록 면담자 :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이병헌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담자는 김경택이며 구술장, 어,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1일 아침 9시 40분입니다. 예, 선생님 반갑습니다. 구술자 : 반갑습니다. 면담자 : 그 일단 선생님 쫌 태어나셨던 연도하고 고향을 좀 말씀을 좀 해주시면 합니다. 구술자 : 예, 1947년 6월 6일생이구요 전라북도 임실이 고향이에요. 면담자 : 전북 임실...1947년 6월 6일이 호적생일인가요? 구술자 : 예, 그러니까 그래. 면담자 : 실제, 호적나이하고 실제 나이하고 연세하고 구술자 : 다르니까요. 면담자 : 그럼 실제 연세는 뭐 생년월일은 어떻게 되십니까. 구술자 : 실제는 1944년 6월 6일 생이죠. 면담자 : 44년. 3년 정도 늦게 올라갔네요, 호적이. 그러면 해방되기 전 해, 전 해에 태어나셨네요. 44년에 태어나셨으면. 구술자 : 그쵸. 면담자 : 너무 어렸을 때라 뭐 그 구술자 : 거기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요. 면담자 : 해방, 뭐 광복에 대한 기억은 좀 없으실 것 같고. 그 형제분이 어떻게 되십니까. 구술자 : 3남 2녀에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몇째시고요? 구술자 : 장남이요. 면담자 : 혹시 부모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어떤 좀, 선생님 아버님께서는 뭐 농사일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구술자 : 네, 상업을 하셨죠. 면담자 : 그 다섯 식구를 이렇게 좀 키우시는데 뭐 경제적으로 크게, 어렸을 때 좀 어떠셨어요? 구술자 : 아주 어려웠죠, 어려웠죠. 예. 그 어려웠던 시절 호박 따가지고 호박죽 먹었던 기억이 있고 그, 쑥 캐가지고 그 밀가루에 버물려서 그 먹었던 기억이 있고. 아주 힘들게 어렵게 살았죠. 면담자 : 형제간에 어렸을 때는 많이 다투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구술자 : 그런 일, 그런 건 없었고요. 면담자 : 나이차이가 좀 있었습니까? 아니면 뭐 장남으로서 그래도 쫌 이렇게. 구술자 : 3남 2녀 였는데요, 그렇게 뭐 2,3살 차이 쭉, 그렇게 차이가 나죠. 면담자 : 형제들과는 잘 어렸을 때는 잘 지내고 구술자 : 네 잘 지냈죠, 네. 면담자 : 가장 큰 장남 형이고 오빠고 해서 뭐 동생들 군기를 잡는다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구술자 : 그런 건 별로 없었던 것 같애요. 면담자 : 그 선생님 그러면 한, 한국 나이로 따지면 71세 면담자 : 일곱 살 정도에 인제 6.25 한국전쟁이 인제 좀 일어났는데 그때 6.25에 대한 좀 기억은 있으신가요? 구술자 : 기억이 그냥 총 매고 지어 다니던 기억, 그리고 국민 학교 때 북진북진 통일통일 휴전 반대 그 구호를 외치고 행렬했던 그런 기억만 있어요. 면담자 : 국민 학교 들어가서 6.25가 일어났나요, 아니면 6.25 가 일어나고 난 다음에 학교에 들어가셨나요? 구술자 : 그 전일걸요. 6.25가. 그 학교 다니기 전에. 면담자 : 혹시 그 국민 학교는 어디 국민 학교를 다니셨습니까? 구술자 : 성수 국민 학교 면담자 : 임실에 있습니까? 구술자 : 네 임실군 성수 국민 학교. 면담자 : 49년, 50년 한 그 정도에 입학을, 50년 정도에 입학을 하신거네요. 구술자 : 그랬을 거에요. 면담자 : 그,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물론 인제 호남지역은 그렇게 뭐 피해가 많지는 않았다고 저는 좀 들었긴 했지만 이런 전쟁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뭐 피난을 좀 갔다거나 그런 기억은 없으십니까? 구술자 : 예. 그런 기억은 없고 하여튼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거. 그런 기억은 있어요. 면담자 : 예. 뭐 특별히 어렸을 때 뭐 국민 학교 시절에 기억나시는 일화 같은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뭐 그런 건 없구요. 행진했던 것 북진북진 통일통일 휴전반대 그, 그거는 뚜렷이 기억이 나는 것 같애요. 면담자 : 중학교는 어디에 입학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 전라남도 화순중학교. 면담자 : 어, 전북 임실에 계시다가 화순으로 이사를 가신건가요? 구술자 : 네 그랬었어요 면담자 : 이사는 언제 오시게 된 건가요? 구술자 : 중학교 때니까 한 60년대. 정확히는 모르겠는대요. 면담자 : 가족이 전부 화순으로? 구술자 : 예. 그렇죠 면담자 : 화순 중학, 전남에 있는 화순 중학교에 입학하셨고 그럼 고등학교까지 여기서 다니셨나요? 구술자 : 고등학교는 광주로 이사를 해가지고요, 조대 부고. 면담자 : 아 조대 부고. 또 그러면 조대 부고에 입학하신 게 한 1960, 60년인가요, 59, 60? 63년 정도 되신 것 같은데. 구술자 : 네 그 정도. 면담자 : 그 중학교 때 그러면 이제 60년 4.19가 그때 있었던 구술자 : 근데 저는 시골이라 참여를 안 했죠. 면담자 :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뭐 어디에 좀 관심이 많으셨나요? 선생님께서는. 좀 꿈이라든지 그때 당시에 뭐 중고등학교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좀 있던 분들도 계시고 좀 그러는데 선생님은 주로 관심이 어디에 있으셨는지? 구술자 : 정의를 굉장히 제 생활 신조로 삼은 것 같애요. 중학교 때도 그 선생님들이 잘못이 있으면 지적을 해버리고. 그런 정도의 정의감은 좀 투철했던 것 같애요. 면담자 : 주로 그런 에피소드 같은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에...중학교 시절에 그 학생회장 부회장이 도장을 가지고 결제를 해야만이 그 예산 지출이 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그 도장을 학생회장이 가져야 되잖아요. 부회장이 가져야되고. 그런데 그 도장을 선생님이 가지고 있어가지고 맘대로 찍고 그냥 예산 승인을 해버리고 쓰고 그런 일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걸 따졌죠. (웃음) 그런 정도. 면담자 : 그래서 그게 어떻게 좀 잘... 구술자 : 네 시정이 됐죠. 선생님이 잘 못한 거니까. 저한테 잘못된 거라. 면담자 : 그러면 그 고등학교 다니실 때는 뭐 다른 어떤 특별한 기억같은 것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 기억... 면담자 :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다든지 아니면... 구술자 : 어 그건,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어요. 못했고. 저 JYC 활동을 했어요. 면담자 : JYC활동이요? 구술자 :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화순 광업소 광부가 6명이 한뻔에 그 침몰되가지고 죽었거든요. 근데 JYC 단원들과 같이 광주 시내 모금운동을 해가지고 화순 광업소 위문 공연을 그, 했어요. 굉장히 기억에 남고. 면담자 : 그 JYC라는 단체, 동아리,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좀 잠깐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주니어 레드크로스(Junior Red Cross)라고 하는데요, 그 봉사활동이죠. 학생 봉사활동. 면담자 : 그럼 인제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나서는 어떤 일을, 뭐 대학으로 진학을 하셨나요? 구술자 : 대학 진학은 안 했어요. 면담자 : 사회 생활을... 구술자 : 사회 생활을 했죠. 면담자 : 졸업, 고등학교 졸업 연도는 좀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구술자 부인: 68년 구술자 : 68년? 제가 좀 학교를 늦게 다녔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워가지고, 예. 68년 정도. 면담자 : 68년 정도에 졸업을 하시고 바로 직장 생활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 예, 상업, 상업을 했죠. 면담자 : 어떤 일을 하셨나요? 구술자 : 조류, 조류를 제가 취급했어요. 새 면담자 : 아, 새요. 네. 그 일을 쭉 하시다가, 하셨던겁니까? 아니면 주로 뭐 하시는 일이... 구술자 : 예. 그 일을 하다가 인제 이민 왔죠. 면담자 : 이민은 언제 여기 오시게 되셨나요? 구술자 : 76년도 1월 달에 여기 왔거든요 구술자 : 76년 1월이요. 면담자 : 뭐, 그 생활을 하시다가 이민을 이렇게 결, 이민을 가야겠다 그런 계기가 있으셨나요? 이민을 결정하게 된 계기랄까 그런? 구술자 : 별로 형편이 넉넉지 못하니까 좀 잘살아보기 위해서 미국에 온 거죠. 면담자 : 그때 뭐 미국에 어떤 연고가, 아는 분이 계셨나요? 구술자 : 예. 제 여동생이 시민권자여가지고. 면담자 : 여동생이 먼저 미국에 오셨던 거네요. 구술자 : 예. 그렇죠. 면담자 : 그때 당시에는 다들 저희, 우리나라가 못 사는 나라였다보니까 여기저기 많이 해외로 산업, 흔히 그때 박정희 정권 때 산업일꾼이라고 해서 간호사들도 많이 파견하게 되고 독일 같은 경우는 광부들도 이렇게 많이 파견하게 되고 그런 좀 상황이었었는데 여동생분은 뭐 여기에 직업으로, 직업인으로 파견이 되셨나요? 구술자 : 그냥 이민으로 왔어요.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 76년 구술자 : 1월달 면담자 : 이시면 우리 나이로 서른 셋 정도 됐을 땐데 결혼은 그 전에? 구술자 : 그 전에 해가지고 왔죠. 한국에서. 면담자 : 연애, 연애 했죠. 구술자 : 아, 중매결혼 아니고 연애결혼 면담자 : 그때는 연애결혼이 그렇게 흔했었나요? 중매, 저희 아버지 세대들 보면 중매결혼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구술자 구술자 부인: 연애 결혼을 많이 했었어요. 면담자 : 아, 그래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사업하다, 사업하시면서 만나셨나요, 아니면 뭐... 구술자 : 학교 다닐 때부터 같은 집에, 그 제가 자취를 했거든요. 근데 거기서 만나가지고. 나한테 잘해주시더라구요. 그래서 마음에 들어서 결혼을 했죠. 면담자 : 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자취를 하셨나요? 구술자 : 예. 자취 했죠. 면담자 : 집이 광주였는데 구술자 부인: 아니 화순 면담자 : 아 화순이는 집이 오셨고 선생님은 유학, 광주로 유학을 오신건가요? 구술자 : 네, 고등학교 때. 면담자 : 기억이 맞으십니까? 기억이 서로 다르면 매우 곤란한데 (웃음) 구술자 부인: 제가 더 정확할거에요. 구술자 : 정확해. 면담자 :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때 뭐 이민을 오실 때는 사모님하고 두 분만 건너오신건가요? 아니면 슬하에 자녀들이 계셨나요? 구술자 : 둘, 남자 애들 둘 데리고 왔죠. 면담자 : 남자 애 둘. 처음 그, 들어오셨을 때 시카고로 처음 들어오셨나요?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오셨나요? 구술자 : 아이오와, 아이오와에 쪼끔 살다가 시카고로 왔죠. 면담자 : 죄송합니다, 어디? 구술자 : 아이오와 면담자 : 아이오와. 어디에 있는 건간요? 제가 미국 지리를 잘 몰라가지고. 구술자 구술자 부인: 시카고보다 서쪽 미시시피 서쪽에 있어요. 면담자 : 아, 들어오셔서도 그렇게 좀 뭐 인제 그런 경제활동을 하시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셨을텐데요.. 구술자 : 예. 처음 이민을 왔을 때 공장에 심부름꾼으로 일을 했죠. 기술도 없고 영어도 못하니까 면담자 : 어떤 공장이었나요? 구술자 : 그 스크루, 그 비스라고 하나요? 스크류. 나사못 만드는 공장이었죠. 면담자 : 처음에 좀 들어오셔서는 다른 생활 뭐 다른 민족들 언어도 좀 안 통하고 어려움이... 구술자 : 어려움이 많았죠. 왜냐면 기술도 없죠, 경험도 없죠, 간단히 말해서 공장 심부름꾼으로 들어간 거에요. 헬퍼, 헬퍼로 들어가가지고 거기서 한국 분들은 영리하잖아요. 눈여겨봐가지고 기술을 배워서 기술자가 된 거요. 그, 그래가지고 인제 사는 거죠. 면담자 : 지금도 뭐 좀 그런 게 있습니다만, 70년대 당시만 해도 그, 특히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좀 그런 부분들이 보이지 않게 있었을 것 같긴 한데. 좀 그런 차별이나 서러움이나 그런 건. 구술자 : 예 차별이 있었죠, 분명히. 영어를 못하니까, 영어를 못하니까. 근데 저희 공장에서는 굉장히 대우를 받았어요. 왜냐면 한국분들이 열심히 노력을 하고 일을 열심히 하잖아요.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굉장히 크레딧(credit: 신용)이 좋았어요. 한국분이면 누구든지 데리고 가면 그냥 취직 시켜줘 버리고 그런 정도로 참 신임이 두터웠어요. 면담자 : 지금 말씀하신 그 나사못을 만드는 공장은 아이오와에 있었습니까? 구술자 : 아니요, 시카고, 시카고였어요. 면담자 : 처음 아이오와에서는... 구술자 : 거기서는 쪼끔 살다가 그냥 이렇게 잡도 없고 그러니까 큰 도시로, 시카고와 왔거든요. 면담자 : 그 뭐, 누님이, 아니 여동생이 여기 계시, 계셨다고는 하는데 처음 들어왔을 때 뭐 집이라든지, 사는 집이라던지 그런 부분들은 어떻게 해결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 어, 이제 방 얻어서 살기 시작했죠. 아주 싼 방. 얻어가지고 저는 밤일하고 와이프는 낮일하고 그렇게 해서 인제 돈을 쪼끔씩 모아가지고 집을 사고 그 다음에 인제 조금 더 모아서 장사를 시작했죠., 사업을. 면담자 : 그럼 시카고로 오셨을 때도 76년인가요? 아니면 76년 1월에 구술자 부인: 76년 그 아이오와는 시골이기 때문에요.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어요. 그니까 어떤... 구술자: 영어를 못하니까 구술자 부인: 거의 백인들이 사는 시골동네였기 때문에 저희가 76년 7월 달에 시카고로 왔어요. 면담자: 실례인 질문인지 모르지만 사모님은 어떤, 그 밤일을 하시고 낮일을 하셨다고 했는데... 구술자 부인: 76년만 해도 이, 거의가 오며는 처음부터 공장에 가서 일할 생각들을 하거든요. 그러니까는 이, 특수한 널스(nurse) 되시는 분들은 오셔가지고 이제 시험공부, 아예 시험공부를 하셨고. 그러지 않는 경우는 그때는 무슨 한국 사람들의 상관이 많이 그, 되어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하니까 미국 공장에 들어가는 게, 그때는 미국에 오면 그래가지고 인제 돈을 조금 모으시며는 세탁소로 쪽으로 이렇게 진출을 많이 하실 때고 그때는, 76년도만 하더라도 세탁소도 그렇게 많이 하신 분들은 없었고 거의가 다 공장에 가서 생활할 때니까 저희도, 저도 인제 낮에는 공장에 가서 일했고 남편도 밤에는 공장에 가서 일했고 애들이, 어린 애들이 둘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해야 베이비시터 나가는 것도 우리가 절약할 수가 있고, 그래가지고 살았죠. 구술자: 어렵게 살았죠 면담자 : 그때 시카고에, 아이오와에 계시다가 시카고로 옮기신 이유가 물론 인제 아이오와는 워낙 작은 도시고 그런데, 시카고, 굳이 시카고로 오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술자 부인: 시카고가 가장 가까운 큰 도시였어요. 구술자: 잡도 많고 면담자 : 그때 당시 오셨을 때 여기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 좀 있으셨나요, 상당수? 구술자: 있었죠 구술자 부인: 한국인들이 꽤 있었죠 그때 말이 한 2만명 됐으니까 면담자: 그 때 당시만 해도 한인 사이의, 사회, 한인들끼리의 교류가 있었습니까 구술자 부인: 있었어요. 한인 사회, 한인, 한인회도 있었고 구술자: 한인회도 있고 있었죠. 구술자 부인: 한국일보가 있어가지고 한국일보에서 연말이이며는 한 번씩 영화를 상영했던 것 같아요. 네이슨 하이스쿨(Nathan Highschool)이라고 큰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그러며는 그때 시카고에 사시는 한국 분들을 전부 만나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었어요. 면담자: 선생님께서는 76년에 이렇게 시카고로 오셔가지고 인제 그런 공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몇 년 정도 공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개인사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구술자: 한 10년 일을 했죠. 기술자가 되어가지고 돈도 제대로 받고 한 10년 일하다가 비즈니스를 시작했죠. 면담자 : 면담자 : 그러면 공장에서 일을 하시는 사이에 어찌보면 80년 광주를 맞이하시게 된거네요?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 쫌 여쭤보겠는데요, 처음에 광주에, 80년 5월에 광주에 대한 소식이나 그런 것은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구술자 : TV, TV 보고 알았죠. TV에 나왔으니까. 면담자 : 미국 방송이었죠? 구술자 : 그렇죠, 미국 TV죠. 그때는 한국 방송은 없었으니까. 면담자 : 그 미국 그런 뉴스나 방송에서 나왔던 광주 문제에 대한 보도 형태라고 해야 되나요? 어떻게 좀 미국 언론에서는 광주 문제를 좀 보고, 바라보고 있었는지 좀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영어를 잘 이해를 못하니까 뜻을 정확히 모르지만은 그 그냥 막 폭력적인 것, 던지고 뚜드려 패고 그런 게 나왔거든요. 그걸 보고 제일, 정말 분개했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80년 그때가 5월일거야 구술자 부인: 5·18이니까. 이 미국 테레비에서요, 그러니까 광주 시민들을 나쁘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그렇게 무차별 그, 폭행하고 공격하고 그러는데 너무나도 화면이 리얼했어요. 정말 그 광주 시민들을 구타하고 광주 시민들한테 이, 막 잔인하게 하는 모습을 저희는 그대로 다 봤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저는 또 광주사람이고 하면서 굉장히 분노를 느꼈구요. 이, 정말 그렇게 억울하게 광주 시민들이 당하고 있는, 글구 제 친정 식구들도 다 광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 그래서 굉장히 분노를 했고 저희가 그 방송을 보면서 굉장히 광주 시민으로서 그리고 광주가 그때 당시에 많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요. 저는 태어나서 광주에서 태어났고 광주에서 살다가 이렇게 미국으로 와가지고 광주의 그 모습을 보니까 굉장히 많이 아팠는데 그때 인제 저희가 그 뉴스랑을 보면서 5·18이 5월 18일엔가 났잖아요? 한 일주일 후엔가 그 주일날 저희들이 광주 분들한테 연락을 해가지고 그때 당시에 로렌스에 있는 알바니 뱅크(Albany Bank) 파킹랏에서 저희가 시위를 했어요. 저희가 시위를 하면서 막 플랭카드도 쓰고 전두환 찢어 죽여라, 뭐 전두환이 화형시켜라 하면서 저희가 시위하고 데몬스트레이션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구술자: 예. 그때 지금 다 가고 몇 명 남은 사람들만 찍고. 그때만 해도 없이 살기 때문에 카메라 가진 사람들이 없었어요.. 면담자 : 아 이게 80년, 네. 구술자 부인: 그때 그 데모했던, 알바니 뱅크 파킹랏에서 데모했던 사람들 몇 명이에요. 구술자: 다 가고 몇 명 남은 것만 좀 찍은 거예요. (사진제시) 면담자:선생님이 어디계신가요? 구술지: 여기여기 면담자: 가운데 계신 분? 구술자: 파란옷 입고. 와이프도 있고 애들도 있고 면담자: 아아, 예. 구술자 부인: 앞에 있는 쪼그만 남자애들 둘이가 저희 아들. 그리고 그때 그 유모차에 타고 있던 애가 벌써 34살 먹은 청년이구요. 면담자: 그, 당시에 인제 선생님께서는 물론 여기 오셔서 열심히 살아가기, 경제활동을 좀 하고 살아가시기 위해서 공장에서 일도 하시고 그런 인제 활동들을 하셨는데, 한국의 정치 상황 그때 박정희 정권 말기였었고 인제 70년대 후반이면 말기였었고 한국의 정치상황이라든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서도 여전히 좀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관심을 가졌죠. 그 유일하게 시카고 여기 영사관 앞에서 데모한겁니다. (자료사진제시) 구술자 : 없이 살아가지고, 사진을 많이 남겼어야 되는데 사진기 가진 사람, 그때 당시 그렇게 없었어요. 면담자 : 죄송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못찾겠어서 그런데 선생님 어디에? 구술자 : 여기요, 여기. 면담자 : 예. 너무 젋으실 때 사진이어가지고 제가. 구술자 : 영사관 앞에 데모 이거 뒤에 써졌어요. 이것도 내가 한 게 아니라 누가 보내준 거예요. 유일하게 남은 건 그것, 그것밖에 없어요. 데모도 많이 했고 서명도 많이 했고. 면담자 : 이게 보면 4.13 개현, 보류, 개헌 유보 규탄 시위라고 되어 있는데 이때가 그러면 4.13 개헌이면 78년인가요, 9년인가요? 한 그쯤... 구술자 : 그 정도 될 거에요. 면담자 : 5·18전에 좀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선생님 그 TV를 통하여 처음으로 그걸 접하게 되었라고 했는데 이 시카고에서도 제가 그런 대규모 시위가 방금 말씀하신 로렌스 쪽에서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근데 그렇게 조직적으로 시위를, 시위를 개최를 어떤 식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가지고 쫌 그 시위가 일어나게 된 건가요? 구술자 : 그 시위는 주로 그 UIC(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대학생들이 주동이 됐어요. 그 어른들이 아니라 융학생들이, 그 UIC 대학생들이 주동이 되가지고 그 시위를, 민주 단체하고 같이 했죠. 근데 그때는 누가 신문도 나지도 않고 했는데도 그렇게 많이 모였어요. 면담자 : 어느 정도 모였었나요? 대략적으로요. 구술자 부인: 그런 거 안 나왔어. 구술자 : 아, 신문에 그때 6백명 인가 그렇게 모였다고. 그 전두환 화형식도 했었어요, 공원에서. 면담자 : 이때 로렌스에서 첫 시위가 일어났던 때가 언제인지혹시 기억하시나요? 몇 일인지. 구술자 부인: 5·18 나고 일주일, 아무튼 계속 한국 시위가. 한국의 뉴스도 계속 5·18 구술자:그때 5월 달일거에요. 구술자 부인: 광주 사태가 미국에서 보도 되고 있을 때 시위는 5월, 아무튼 5월은 넘기지 않았어요. 5월달에 했어요. 면담자: 주로 그때 시위에서 뭐 이렇게 주로 인제 한국인들이 인제 모여 갔겠지만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이렇게 하셨는지요. 구술자:전두환 찢어죽여라 그런, 이 구호도, 이거 하나 프랜카드가 하나 그걸꺼에요. 근데 지금 오거는 그, 학살하지 말라고 들고 있죠, 또 하나. 그게 그걸꺼에요. 전두환 찢어죽여라고 까지 썼으니까. 플랜카드를 지금 요리 들고, 들고 있잖아요. 요 우게 그렇게 써졌을꺼에요, 아마. 예, 개를 썼는데. 하나는 이렇게 쓰고. 다 가고 나머지 몇몇이만 찍은 거에요. (웃음) 면담자 : 그때 LA 같은 경우도 보면 뭐 그 대규모 시위가 뭐 6월 1일, 8일 해가지고 LA에서도 좀 일어났었는데 그때 보면 공식적으로 그때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었지만, 구술자 : 없었죠. 면담자 :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었지만 호남 사람들이 모여서 그걸 할 때, 그, 그 때 당시는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었지만 호남향우회라는 명칭을 그때부터 썼던 것 같아요. 정식적인 단체는 아니었지만 그 이제, 단체명을 넣기 위해서. 시카고에서 선생님도 인제 호남향우회, 이쪽 지역에서 회장을 구술자 : 창립 멤버죠 면담자 : 네, 그때 당시 뭐, 시카고에 호남향우회라든지 그런 지역 어떤 한인단체가 있었던 건가요? 구술자 : 근데 77년도에 창립했거든요. 면담자 : 아, 호남향우회가요? 구술자 : 호남향우회가 미주에서 제일 먼저 창립했어요. 시카고에서. 면담자 : 아, 77년에 창립을, 초대 회장님이신가요? 구술자 : 아니죠. 그때는 총무, 한 8년간을 총무를 했어요. 나이가 어리니까, 30대니까. 면담자 : 그때 처음 77년도에 창립됐을 때 여기 시카고에 호남향우회, 호남지역의 분들, 향우회에 가입 되신 분들이 한 몇분 정도 되셨나요? 구술자 : 가입이 아니라 그냥 여기는 가입이 없이 전부 호남인이면 누구나 다 회원, 그렇게 개방 됐었거든요. 근데 인제 주로 임원진들이 활동을 하고 했었죠. 초대 회장이 김성곤 회장님. 면담자 : 여기 시카고에 좀 거주했던 호남분들은 한, 수가 어느 정도 됐을까요? 구술자 부인: 연말파티하고 하면 구술자: 영남향우회하고 비슷하죠. 근데 많죠, 다른 타도에 비해 그, 분들보다는 호남이 많아요. 영남 호남이 많아요. 그래가지고. 근데 그 호남 향우회가 있어도 그렇게 그 단체명의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5·18 행사에 참여하거나 그런 게 없었어요. 없었기 때문에 주로 한청련 주최 호남 향우회 후원 이런 식으로 했는데, 영사관하고 연결이 되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아요. 저 혼자, 저 혼자. 그니까 총무 8년을 하다가 뭐 회장, 부회장, 이사장 고문, 안 한 것이 없이 했는데 제가 10주기에 회장을 맡아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게 한청련 주최 호남 향우회 후원, 이게 군사 독재에서 발원한 바지 않아요, 광주 5·18 행사를. 그게 한이 맺혀가지고 10주기 때 범교포적으로, 이 행사를 제가 치렀던 거죠.. 이거, 이건 제가 드렸죠? 구술자 : 예,예. 면담자 : 다른 지역 뭐 이렇게 다. 연합해서 이게 신문에서도 정말 성곡, 성공적 마감이라고 타이틀을 붙였잖아요. 이게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거예요. 왜냐면 평통 회장 겸 한인회장을 내가 참석하게 만들었으니까. 영사관에서 얼마나 부총영사가 전화를 하고 만나자고, 한번만 만나달라고. 우리는 뭐 공무원이지 않습니까. 예? 대단히 정말 영사관 그 자존심 꺾어버린 거죠. 상상도 못할 일을 한 거예요. 전미주역에서 이렇게 그 군사독재시절에 이렇게 행사를 한 데가 없을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참여를 안 해. 영사관하고 평통 회장하고는 완전히. 그거 아시잖아요? 감히 어떻게 상상도 못할 일을 해낸 거예요. 그러지만 사람들이 볼 때 아, 다 참석해서 했네, 한인회도 참석했네, 그런 정도로 알지 깊은 뜻을 몰라요, 제 뜻을 몰라요, 왜 이렇게 했는가를. 이렇게 해, 함으로 해서 5·18이 인제 순수한 민주화정신이 깃든 단, 행사다, 하는 인식도 가지게 되고. 그 전에는 그 몇 명 참석도 않고. 왜냐면 한청련이 그때 당시에는 반국가 단체로 인정받았잖아요. 그래서 나쁘게 말하면 반정부 단체, 지금같이 빨갱이 종북 이런 얘기는 없었으니까. 그 종북, 그 저 반정부 단체 해가지고 사람들이 안 와요. 사람들이 참여를 안 해요. 그 뒤로 인제 내가 하니까 각 도민회 참석하고, 한인회장 평통까지 이렇게 참석하고 하니까 인식이 달라진 거죠. 확 달라진거죠. 그래서 신문에서 그때 당시에, (자료 제시) 10주기 때 신문에 이렇게 낸다는 것은 군사독재정권 시절 아닙니까? 이렇게 크게 신문에 내준, 내준다는 것은 진짜 힘든 일이죠, 그 정도로 썼으니까. 면담자 : 이게 지금 시카고 인가요? 구술자 : 그렇죠. 시카고. 10주기때 행사 이렇게 끝나고 이렇게 해준 거에요. 이거 엄청난 거죠. 군사 독재 시절아닙니까? 노태우때. 면담자 : 다시 쫌 80년 5월 상황으로 좀 돌아가서요, 로렌스 지역, 정확히 그 시위가 일어났었던 지명이 뭔가요? 로렌스, 뭐 어떤 로렌스라는 이 지명이 지역 이름인가요? 구술자 : 네, 그때 당시에는 한국인들이 거기, 그쪽으로 많이 몰려 살았어요. 면담자 : 시위 장소는 그럼... 구술자 : 알바니 뱅크라고 뱅크 파킹랏에서 했거든요. 면담자 : 이게 계속 연속적으로 그 이런 항의 시위가 있었나요? 아니면 일회로... 구술자 : 그때 일회로 끝났죠. 일회로 끝나고 1주기 추모식을 민주 단체가 있었어요, 거기, 거기서 주최를 했죠. 면담자 : 호남향우회는 인제 후원이라... 그때 당시에 호남향우회 후원은 없었고 조선대학 제가 추모사를 읽었거든요. 그런 정도 였지 호남향우회가 있기는 있었어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를 안 했어요. 영사관하고 그냥 굉장히 광고 동창이고 뭐 이런 식이 되니까. 저 혼자만 악쓰는 거죠, 총무가. 힘이 있어야죠, 총무가 힘이 없잖아요. 회장이 힘이 있고 그런 식이었어요. 호남향우회라고 해서 그때 당시 적극적으로 그런 거 없었어요, 조직적으로. 면담자 : 선생님께서 그 호남향우회 회장이 되신 게 언제였었나요?86년 7년 그 정도였나요? 구술자 : 제가 두 번을 했거든요. 10기 11기 두 번을 했어요. 80, 88년부터 92년까지 4년간 했을 거에요. 면담자 : 그러면 이제 10주기 행사를 이렇게 범동포적으로 이렇게 다 같이 진행을 할 때 선생님께서 회장을 하신거네요. 구술자 : 제가 회장이니까. 감히 엄두를 못 내죠. 면담자 : 그 10주기 이 추모제를 범동포적으로 기획하시게 됐던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구술자 : 그 계기는 제가 한이 맺힌 사람이에요. 한청련 주최, 호남향우회 후원. 그러니 한이 맺힌 거죠. 동포들의 인식도 완전히 반정부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 또 군사 독재시절이잖아요. 전부 아부하려는 사람만 있지.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어요. 그래서 한이 맺혀서 제가 그렇게 크게 기획을 했던 거예요. 면담자 : 그 다른 좀 단체들이 이렇게 같이 하자고 이렇게 했을 때 거부반응을 보인다거나 그런 건 없었습니까? 아무래도 그때 당시만 해도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영사관의 압력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구술자 : 분명히 있었죠, 분명히 있었죠. 여기서 지금 평안도민회 한군데만 제가 후원으로 못 넣었어요. 거기는 철저하게 반대를 하더라고요 평안도민회가 빠졌어요. 제가 전화를 했는데 아주 선을 완전히 그어버리더라고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는 다 들어가어요. 설득을 시켰죠. 이 평통 회장을 설득시켰다는 거는, 이거는 대단히 어려운 거에요, 영사관하고 어떤 관곈데. 평통 회장 겸 한인회장이 참석을 했잖아요. 그거는 제가 힘들었어요. 그러지만 해냈어요. 그니까 일반 사람들은 이것보면 그냥 많이 참석을 했네, 이 정도지만 저는 깊은 뜻이 있었어요, 깊은 뜻이. 면담자 : 그럼 이렇게 많은 단체분들이 후원해주시고 하면 이게 규모도, 추모제에 참가하셨던 규모도 구술자 : 2백여명 참석했다고 면담자 : 보통 그럼 이런, 해마다 인제 추모제를 쫌 계속적으로 해오긴 했지만 10주기 이렇게, 그 전까지는 뭐 한청련이 인제 주최로 진행됐었고 10주기 때는 이렇게 그, 다같이 범동포적 화해가. 근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또 이게 계속적으로 지속이 돼었었나요? 구술자 : 제가 회장 할 때는 그렇게 됐지마는 아무래도 숫자가 적어지고 또 활동하는 그 회장단들이 쪼끔 나하고는 쪼끔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쪼끔 축소되고. 그 점점 인제 지금에 와서는 쪼끔 더 잊혀져 가는 그런 행사가 되고 있어요, 사실. 면담자 : 물론 이제 이건 인제 한국사회, 지금 한국사회도 좀 마찬가지겠지만 당시 동포 사회도 그런 좀, 북한 남한 이렇게 따지는 뭐 이렇게 이념, 그런 이념보다도, 약간 그 한국, 남한 안에서도 약간 좀 친정부적인 성향과 조금 인제 반 정부적인, 독재정권에 반,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그 걸로 나눠져있는 성향이었나요, 동포사회도. 그런게 좀 강했었나요? 구술자 : 이 동포 사회는 심하죠. 이 시카고 유독 더 그런 것 같아요. 이제 지금, (자료 제시) 참 시카고 지역이요, 이 전면 광고를 뭐 이것이 한두 번 낸 것이 아니에요. 전면광고를. 이런 식으로. 이, 지난번에 민주연대 만나셨지? 저녁에. 면담자 : 그니까 그 한국도 지금 쫌 비슷한 것같아요. 매년 쫌 그런 사람들의 호응이나 관심이나 열기가 식어가. 구술자 : 쪼끔씩 줄어드는 것 같아요. 5월 17일날 광주 금남로에서 저희는 대대적으로 전야제, 5·18 추모 전야제를 하는데 구술자 부인: 나는 갔다왔어요 30주년. 그래가지고 그 상도 받아가지고 왔거든요 면담자 : 근데 갈수록 전야제를 딱 가보면 금남로에 나와있는 시민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 같애요. 쫌 그런 것이고 요즘 인제 또 정권이 바뀌면서 워낙 이런 민주화 운동을 했던 당시의 이런 것들이 이게 탄압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좀 그래서. 좀 이게 많은 힘든 일이 한국에서도 똑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뭐 LA, 아니 LA에서도 쫌 그런 느낌을 받긴 받았었는데 시카고에서도 좀 그런 동포사회의 문제들로 인한 갈등들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좀 그런 부분들은 좀 그런 행사를 주최하고 했던 관심을 가져주셨던 선생님 입장에서는 좀 아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좀 그랬을 것 같은데. 구술자 : 아쉽죠. 그런, 어디까지나 그 한국 민주화를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이고 그런데 그 뜻을 이해를 못하고 한다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이죠. 슬픈 일이고. 저는 뭐 앞으로도 계속 참여를 할 거고 관심을 갖게 될 건데. 참 아쉬운 점이 많아요. 시카고 지역도 한국 옛날 그 정책이 군사 독재가 뭐 반정부로 몰아붙였는데 지금은 빨갱이로 몰아붙이려고. 신문에 그렇게 흐름이 그렇게 흐르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그 참여를 하거나 뭐 북한을 왔다갔다 하거나 뭐 민주화 단체라고 해서 활동을 하면 빨갱이로 몰아버려요. 그러니 설 자리가 없죠. 참여를 했던 사람들도 빨갱이란 말 듣기 싫잖아요. 참여했다가 빠져버리고. 굉장히 그런 상태에요, 지금. 그런데 인제 그, 친북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가 문제는 문제에요. 왜냐면 그 윤길상씨라고 하는 분이 회장인데, 그 단체가 6.15도 장악을 하고 있어요. 6.15. 또 시카고 지역 같은 경우는 민주연대도 그 사람들이 장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시카고 지역에서는 빨갱이 단체로 알아요. 빨갱이 단체로. 내가 우려되는 것이 지금 그 뭐, 우리 5·18재단이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런 사람들을 혹시라도 쫌 취재를 하거나 그 기록으로 올린다는 거는, 기록으로 올리는 건 좋겠지마는, 이미지가 굉장히 나쁠 거에요. 왜냐면 재향군인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를 했어요. 3명이 북한에 가서 충성서약을 하고 왔다. 그 멤버가 민주연대 멤버에요. 나는 이 사실을 알려만 드리는 거니까 참작하시라고요. 북한을 오고 가는 거는 저는 통일을 원하기 때문에 저는 얼마든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또 그분들이 북한을 갔다와서 정보도 많이 줘요. 제가 알기론 그래요. 그런데 충성 서약을 했다는 것은 이거는 쪼끔 경계를 해야되거든요. 제 자신도 그래요. 그 사람들이 하는 행사나 이런 거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허지만 충성 서약을 하고 와가지고 동포 사회에서 활약을 한다면 이거는 쪼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닝에요? 그게 현실이예요, 사실이예요. 시카고 지역이. 동포 연합이라고 하는 단체가 윤길상씨가 회장인데 시카고가 굉장히 제일 활성화 돼있어요. 친북 단체죠. 시카고 지역이 제일 활성화 있어요. 그래가지고 6.15도 둘로 나눠버리고. 둘이에요. 미국 위원회도 둘이고 이 시카고 지역도 둘이에요. 저도 그 뭐, 초대 공동의장을 했고 했지만 그런 현실이예요. 그러니까 동포 사회에서 인정을 받겠어요? 못 받죠. 그니까 몇몇 사람 때문에 이게 물의를 일으킨 거예요. 이미지를 확 바꿔버린 거에요. 할 말이 없잖아요. 할 말이 없잖아요. 면담자 : 알겠습니다. 선생님, 다시 좀 5·18로 관련된 이야기로 좀 돌아가서 그 이후에 80년 이렇게 당시에 로렌스 그쪽에서 알바니아 뱅크 주차장에서 시위를 하고 그 이후에, 그 이후에는 5·18관련된 어떤 좀 활동들이 시카고 지역에서 있었나요? 예를 들어서 위령탑 뭐 건립 위원회, 추진 위원회 그런 것도 제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 구술자 : 5·18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가 정식으로 있었죠. 면담자 : 그게 언제 생긴건가요? 구술자 : 그게 제 생각에 한 82년도? 5·18, 83년도 정도 조직을 했어요. 면담자 :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뭐 위령탑 건립, 그게 꼭 시카고 뿐만 아니라 미주 전체에 좀 생겼던 건가요? 구술자 : 그게 그런 조직이 아니었고 시카고 지역을 위주로 해서 우리 단독으로. 면담자 : 그걸 어디에 5·18 위령탑을 어디에 세우기 위한 목표, 목표라면 구술자 : 광주 면담자 : 광주에요? 이게 뭐 쫌 어느 정도 모금운동... 구술자 : 모금운동 했죠. 그래가지고 김대환씨가 회장이고 제가 부회장이고. 그 다음에 서재정이라고 지금 교수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이 총무고. 면담자 : 이 모금 운동을 여기에서 좀 하셔가지고 이게 좀 성공적으로 좀 뭐가... 구술자 : 많이는 안 걷혔고요. 제가 알기로는 그때당시 2천불 미만일거에요. 한국으로 홍남순 변호사님한테 보냈어요, 면담자 : 근데 이게 홍남순 변호사님한테 보내시고 어떤 형식으로 이게 사용이 되었는지는 혹시 또 알고 계신가요? 구술자 : 사용 내력은 모르죠. 그리고 그 뭐, 받았다는 고맙다는 얘기도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일단 우리 목적은 위령탑 건립을 추진해달라는 의미로 모금을 해서 보낸 거죠. 면담자 : 쫌 이런 게, 어찌 보면 좋은 어떤 뜻에서 이렇게 모금운동도 하고 했는데 어, 위령탑 건립에 쫌, 목적이 위령탑 건립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실질적으로 위령탑 건립이 광주엔 안 됐단 말이에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 모금 한 것을 어떻게 쫌 사용을 했는지 쫌 이런 궁금증이라든지 그런 뭐 홍남순 변호사가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게 전혀 없나요? 구술자 : 전혀 없죠. 고맙다는 편지 한 장도 없었으니까. 면담자 :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가요? 구술자 : 그렇죠 답이 없었으니까. 근데 보내기는 분명히 보냈죠. 우리 단체 명의로 보냈죠. 근데 10주기 때 그 즉석에서 모금한 돈, 1불, 2불씩 해가지고 566불인가 그거는 명노근씨한테 보냈어요 그랬더니 광주 일보 편집국장님이 참 고맙드라고요. 편지까지 써가지고 영수증까지 해가지고 보냈더라고요. 광주일보 앞으로 보냈었거든요. 공해성씨라고 그분을 제가 30주년에 식사라도 한 끼 하려고 찾았더니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공해성 편집국장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 광주 일보 신문에 내주고 또 영수증 까지 보내주시고 또 편지까지 써가지고 보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정말 그분은. 면담자 : 그 인제 선생님께서는 뭐 시카고 지역의 호남향우회 회장도 하시고 또 제가 듣기로는 시카고 민통연합? 구술자 : 민통연합 부회장. 젊었을 때니까 부회장. 면담자 : 또 하시고 방금 얘기하는 10주기 때 이런 행사도 주도적으로 하시고 하셨는데 제가 민통연합에 대해서는 제가 내용을 좀 잘 몰라서 그 부분에 대해서 좀 한번 좀 여쭤볼려구요. 선생님께서 이런 5·18부터 해서 민통연합 부회장님도 하시고 이런 인제 동포 사회 운동을 열심히 좀 참여를 하게 되었, 되시는데, 지금도 뭐 활동들 쭉 하고 계시고. 이게 선생님이 예전부터 이런 부분들에 대한 관심을 좀 가지고 계셨나요? 아니면 하다보니까 이런 방향이 선생님을 이렇게, 이런 운동을 하게끔 이렇게 이 사회가 만든건가요? 아니면 선생님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좀 있으셨나요? 구술자 : 원래 정의감이 좀 투철한 것 같아요, 제가 판단하기에. 그러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는 못 참는 성격이고 또 바른 말을 제가 분명히 해요.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그렇게 참여를 했던 것 같아요. 면담자 : 민통연합이라는 그 단체는 어떤 단체인가요, 선생님.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요? 구술자 : 어,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그 인제 세미나도 하고 데모도 하고 서명도 받고 그런 일을 주로 했죠. 면담자 :이게 이것도 좀 전국적 미주 지역 전국적 인간요? 구술자 : 네, 전국적인 조직이었죠. 민통연합. 면담자 : 정식 명칭이 뭔가요? 민주화... 구술자 : 한국민주화, 거...민족통일 그냥 줄여서 민통연합이라고 그러는데요 면담자 : 민족 통일 뭐 연합회 그런... 구술자 : 촉진회인가 그랬을 거에요. 면담자 : 여기서 부회장을 하셨다는 거죠? 이게 몇 년도에 설립된 단체인가요? 구술자 : 아마 김대중씨 오시고 난 뒤로 한 84년? 시카고 지역은 그랬을 거에요. 그리고 전국조직은 그 전에 그 조직이 됐을거예요. 미주 지역 전체는. 면담자 : 이 활동들을 하시면서 그, 이런 유사한 쫌 이렇게 민족운동 단체들에 이렇게 그때 80년 후에 생겨나게 되지 않습니까, 한청련이라든지 한겨레라든지. 물론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뭐, 친북단체니 하는 그런 비판도 받기는 했지만 그런 민족 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단체들 간의 관계는 쫌 어땠나요? 상호간에 관계가. 구술자 : 관계들은 뭐 좋았죠, 좋았는데 뭐 그렇게 엄청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단체는 별로 없었고. 그냥 그 활동을 가끔 허고 그러는 단체로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반정부단체가 최고, 최고 나쁜 얘기였어요. 지금같이 빨갱이 종북단체 라는 말은 전혀 없었어요. 반정부단체.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뭐 행사를 하거나 할 때 장소를 빌리잖아요? 영사관이 어떻게 알아서 이걸 방해를 해요. 빌려준다 했다 안 빌려줘요. 장소 빌리기도 어렵고 포스터 같은 거를 그로서리에 붙이잖아요? 금방 떼어버려요. 왜냐면 장사가 안 되니까. 반정부 단체로 인식을 해버리니까. 또 영사관 하는 일이 그런 일이었고 그러기 때문에 참 일하기가 힘들었어요. 예. 그런대도 뭐 지금까지 쭉 나름대로 활약을 했고, 5·18도 유지를 쭉 해왔고. 명맥은 유지해왔어요. 그러나 97년도에는 우리가 5·18 행사를 범동포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냥 뜻이 있는 몇몇 분들만 모아가지고 또 영사관에서 그 연락이 왔어요. 김대중씨가 대통령도 되고 호남분들이 좀 자제하고 자숙하는 분위기가 좋겠다, 그래가지고 몇몇이 모여서 그냥 그날을 기리고 공식적인 행사는 안 했어요. 딱 한번 97년도. 그러고는 계속 연이어 왔죠. 면담자 : 지금도 매년 5·18이 되면. 구술자 : 아 그럼요 호남향우회를 적극 참여를 하게끔 만들었고 인제 마당집하고 같이 하죠. 면담자 : 예전에 비해서 그런 좀 지금 행사는 호응도랄지 그 교민사회의 관심이 좀... 구술자 : 완전히 이미지가 달라졌죠. 10주기 한 뒤로 이미지가 달라진 거예요. 뭐 한인회장도 참석하고 한인회에서 허고 뭐 평통회장도 참석하고 각 도민회 후원이 되니까. 인식이 달라진거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지금까지 한청련 주최 호남향우회 하면 그거는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잖아요. 면담자 : 그, 선생님 좀 개인적인 이야기로 좀 다시 돌아가서요. 아까 공장에서 일하고 일하신 게 한 6년 정도 일하셨다 하셨죠? 구술자 : 한 10년 했죠. 면담자 : 10년정도일하셨나요? 85,6년 그 정도까지 일을 하신거고 그 이후에 인제 선생님은 어떤 좀 일을 하시게 됐나요? 구술자 : 비즈니스 했죠.. 면담자 : 흔히 뭐 부동산 세탁소 뭐 많이들 하시는데 어떤 일을? 구술자 : 고기를 취급했어요. 사우스에서 고기. 고기 흑인들 상대로 고기를 파는 그런 비즈니스를 했죠. 면담자 : 잘 되셨습니까? 이게 구술자 : 몇 년간은 잘 됐었어요. 매상도 뭐 하루에 만불 정도 파는, 그때 당시 만불이면 큰 돈이에요. 전화도 뭐 네 대나 놓고, 좀 무리하게 해서 크게 시작을 했었는데 몇 년동안은 잘 되다가 비즈니스가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였거든요. 근데 인제 정부에서 푸어러 스탬프(poorer stamp)라고 가난한 사람들한테 줘요. 6백불 7백불 이렇게 주며는 그분들이 식구가 많애요. 흑인들은 주로 식구가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고기를 사다가 한 달에 한 번씩 프리저에다 넣어가지고 먹고 또 다음달에 와서 사가고. 그런 시스템이었거든요. 근데 정부에서 인제 예산을 줄이니까 비즈니스가 완전히 슬로우가 되더라고요 쪼끔 고전을 했고. 면담자 : 지금은 혹시 어떤 활동을? 구술자 : 지금은 그 비즈니스 안하고 인제 리타이어 했죠. 면담자 : 그 은퇴하시기 전까지 이 사업, 이 비즈니스를 계속... 구술자 : 계속 하다가 그, 리타이어 했죠. 면담자 : 지금은 선생님께서 쫌 사회활동을 하고 계시는 부분들이 쫌 있으신가요? 관여하는 뭐 단체라든지. 쫌 뭐 어디 고문으로 계신다든지. 구술자 : 호남향우회 고문이고요. 면담자 : 지금 호남향우회분들은 한 몇분 정도 여기서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구술자 : 활동은 임원들이 하고요. 사실은 면담자 : 소속되어 있는 호남향우회 분들이 한... 구술자 : 소속된 이사, 한 오십명, 이사들. 임원 이사회 해가지고 한 오십명 참여 하고 있고 인제 그분들이 주로 활동을 하지요. 면담자 : 지금도 꾸준히 뭐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 추모 행사는 구술자 : 예. 그 행사는 준비룰 하고 있죠. 면담자 : 매년? 구술자 : 매년. 완전히 그 사업으로 매년 하고 있죠. 면담자 : 주로 인제 행사를 하면 어디 뭐 강당이나 어디 걸 빌려서 하시나요? 구술자 : 인제 계속 한인회관에서 해요. 의미 있잖아요, 한인회관에서 하는 것이. 옛날에는 한인회관 어림도 없죠 근데 지금은 한인회관에서 계속 해요. 면담자 : 그, 어...지금 이건 좀 여담인데요. 시카고에 좀 한인들이 얼마나 좀 지금 현재 거주하고 있나요? 선생님 막 첨에 오셨을 때는 뭐 2만, 3만 그렇게 말씀을 하셨었는데요. 구술자 : 지금은 한 20만 정도 된다고 그래요 말이 많이 늘어났죠. 면담자 : 뭐 한인 규모로만 놓고 보면 뭐 시카고가 미국에서 거의 세 번째 정도 차지한다고 그러더라구요. 구술자 : 세 번째죠 면담자 : 상당히 많은 수가 지금 있는데...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그럼 호남 향우회 활동 외에는 지금 다른 뭐 활동들, 지금 현재도 민통연합이라는 단체가 조직 활동을 하고 있나요? 구술자 : 활약을 않고 있어요. 활약을 안 해요. 안 하고 민주연대가 있는데 거기 고문을 하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에 고문 사퇴했어요. 참여는 하고 있죠, 지금도. 면담자 : 그니까 이런 관련 민족운동이라든지 통일운동이라든지 사회 운동에는 지속적으로 쫌 참여는 하고 있지만 쫌 인제 거리를 쪼끔씩 두고 계신다구요. 구술자 : 왜냐면 잘못나가고 있으니까요. 6.15도 제가 참여를 해요. 참석은 해요. 6.15 공동 거기도. 면담자 : 그, 선생님이 쫌 생각하시기에 지금의 우리 시카고 지역에 한정해서, 시카고 지역의 동포사회 운동, 꼭 시카고 지역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렇게 미주 사회의 한인들의 그런 운동들이 쫌 어떤 방향으로 쫌 선생님 입장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좀 나아가야 나갔으면 하는지 그런 바람들이 좀 있습니까? 저는 남북한 통일이 되야된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해요. 대개들 보며는 통일에 대한 관심이없고 오히려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 통일 얘기 하고 북한 얘기를 하면 빨갱이로 몰아부쳐 버리고. 이런게 정말 안타까워요. 그래선 안 되잖아요. 우리 민족, 같은 핏줄, 같은 언어, 우리 통일이 돼야 되요. 통일이 돼서 우리 후손들한테 정말 남북한이 하나가 되는 그런 계기를 만들어야 되요, 우리가. 그 의무가 있어요. 근데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요. 그게 참 안타까워요. 면담자 : 쫌 쪼금 다른 이야기기는 한데 물론 인제 통일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 인제, 인제 강조를 쫌 하신 부분이 있고 그것에 대한 중요성을 아마 대부분의 국민들, 한국에 사는 국민들이 공감을 할 부분이라고 생각, 일부를 제외하고는, 통일을 반대하는 일부 세력이 분명히 존재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생님이 방금 하신 말씀을 동의하고 동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통일운동 쫌 이외에 다른 운동적 측면에서는 좀 어떤 부분을 보완해나가야 한다고 선생님 좀 보시는지요. 지금 그니깐 지금 이념적으로 좀 갈려 있는 좀 한인사회의 분위기도 좀 선생님께는 좀 못내 아쉽다고 이렇게 말씀을 좀 하신 부분도 있고. 또 인제 어떤 분들은 인제 저희 한인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의 역사가 백년이 좀 넘어간다라고 말씀을 하셨고 대부분 인제 저희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가 이민 일세대, 그렇게 형성이 되고 그 안에서 1.5세대, 2세 뭐 3세까지 지금 있는 형국인데 그 이후에 그런 그 한인 2세, 3세에 대한 그런 교육문제의 부분, 그 어떻게 한인 2,3세대에 대한 어떤 그런 교육을 실시할 것인가에 대한 동포사회의 인제 그런 고민들도 좀 있는 것 같아요. 미국인으로는 키우고 싶지만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미국인으로 태어나야되지만, 그 조국에 대한 어떤 그것을 좀 심어주고 싶다, 뭐 인제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 그러는 것 같아요 구술자 : 네. 대단히 중요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글 교육 시켜야되고요. 한글 교육 시켜야 되고뭐 한인회 총연합회에서 뭐 미국 국가를 먼저 부르잖아요, 또 태극기를 미국 국기로 바꿔서 달자, 태극기가 어디로 가고 미국 국기가 어디로 놔야하는지도 몰라요. 그 점에 대해서 청와대에 비서실에 편지도 보내고 그랬는데요, 어ᄄᅠᇂ게 하라는 지시가 없어요. 이 태극기는 항상 앉으면 오른쪽에 놔야되거든요. 근데 두서가 없어요. 오른쪽에 놨다 왼쪽에 놨다,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요. 또 애국가, 당연히 불러야되요. 태극기. 분명히 미국 국기보다. 우리는 미국에서 살기 위해 온거지, 우리는 한국 사람이에요. 한인 행사에 우리 태극기가 먼저예요. 나는 항상 그걸 강조를 해요 영사관에 그 얘기도 했더니 뭐라그러냐면 이 공관에서 한인들 행사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다, 이거에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기본적인 우리나라 애국가나 태극기는 외국에 살수록 더 지켜 나가야되요. 지켜나가야 되요. 면담자 : 그 한글교육 내지는 인제 조국의 어떤 정체성 교육이 2세들에게도 쫌 필요하다 좀 이런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구술자 : 아 그럼요. 한글교육 정부차원에서 지원해줘야 되고 한국말 그, 우리가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되요. 그리고 나는 그, 무궁화를 지금 현재 한 천 육백 그루를 시카고 지역에 나눠줬어요. 우리나라 꽃이에요 면담자 : 아 그 부분에 대해서 쫌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 신문을 통해서 봤는데 예. 무궁활를 기르쳐사지고 그런 운동을 하셨다고요. 구술자 : 우리나라 꽃이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죽을 때까지 보급을 시키려고 생각을 하고 있고 지금 현재까지 한 천육백 그루 나눠줬어요. 네.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요. 8.15 행사에 4백 그루를 가져갔는데 뭐 나는 나와서 보니까 다 나가버리고 없어요. 다 나눠줘버리고 없어요. 그 정도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동포 사회에 있고 굉장히 그 참 기분이 좋더라고요 . 그래서 앞으로 계속 면담자 : 지금도 계속 기르고 계신가요? 구술자 : 지금도, 내년 6.7월달부터 인제 또 분양을 할거에요. 면담자 : 천 몇 백그루를 이렇게 심으시려면 땅이 굉장히 넓으셔야 될 것 같은데 (웃음) 구술자 : 이게 그, 처음에는 3,4년, 5년 막 그렇게 되니까 막 컸는데 씨가 떨어져 갖고 일년 되면 그 못자리 하면 모 있잖아요, 그렇게 하듯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굉장히 많이 나와서. 그래서 그렇게 크게 힘들지도 않고. 우리나라 꽃이니까 또 외국땅이고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우리나라 꽃이라는 것 그 자체만이라도 좀 알려주고 싶고. 면담자 : 지금 슬하에 자녀분들은 그 두분 남... 아들 두분 이게 미국 오셔가지고는 더... 구술자 : 더 없었어요 면담자 : 지금 슬하의 자녀, 아들들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구술자 : 지금 42이고 38이고 나이만 많이 먹었어. 면담자 : 다 미국 오기 전에 이렇게 했는데 아주 그래도 어렸을 때 들어와가지고 한국에 대한 기억은 전혀... 구술자 : 없죠. 면담자 : 없을 것 같은데 방금 이렇게 말씀하신 그런 한국인 2세에 대한 어떤 선생님은 어떻게 교육을 집안에서 시키셨나요? 아들들에 대해서. 구술자 : 교육을 시켜도 저희가 마음 먹은 대로 안 되더라구요. 미국식으로 살려고 하고 또 이해가 잘 안 되고. 또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까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잖아요. 좀 그게 애로점이 있는데 비교적 착실하고 뭐 잘 자랐고 잘 살고 있어요. 구술자 부인: 한국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얘네들이 자기는 한국사람이라는 거 그 뿌리는 확실하게 있는데 근데 그 생활적인 그 사고방식의 차이는 저희 큰 애가 한국을 두 번 갔다 왔거든요, 저희 큰 애가 한국을 두 번 갔다 와가지고 하는 소리가 한국 사람은 쪼끔 엄마 아빠한테 들은 것보다 예의가 없고 그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 이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잘못 같은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인정하고 솔직히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런 것에서 조금 이렇게 안타까움이 있는데 그 근본 자기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에는 구술자 부인을 하지 않아요. 자기가 미국에서 살고 있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도 자기는 한국 사람이고 앞으로 태어날, 둘다 싱글이에요. 아직 결혼을 안 했는데 앞으로 자기들이 결혼을 해서 자기한테 애들도 그 뿌리는 한국 사람이라는 거, 그리고 인제 이 어떤 면으로 보면 주이시(Jewish)들은 몇 년을 살아도 철저하게 주이시화를 시켜가지고 자식들을 시키잖아요. 그런 점을 오히려 좋게 이렇게 하고 그러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좀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런 면도 있더라고요.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도 조리있게 핵심만 짚어서 해주셔가지고 그, 시간이 생각보다 쪼끔 일찍 끝나는 것 같애요. 근데 저희 마지막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어찌 보면 이곳에 이민오셔가지고 지금 생활하신 게 한국에서 생활하신 것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생활을 하신 것 같은데. 지금까지 이렇게 쫌 살아오시면서 선생님이 이 안에서 그 이민 이후의 활동들을 하시면서 좀 지금까지 이런 저런 활동들, 5·18 관련 활동들도 하셨고 뭐 민통 활동들도 하셨고 그 이후에 호남향우회 뭐 6.15 뭐 그런 거 다 참여하시고 꾸준히 이런 그 동포 사회 운동, 민족운동, 통일운동에 관여하고 계시는데 그동안 이렇게 쭉 그런 생활을 하시면서 선생님께서 좀 지나온 인제 일정 정도 은퇴 하시고 그걸 좀 고문의 입장에서 어찌보면 이렇게 쫌 어른의 입장에서 그걸 바라봤을 때 지나온 그런 선생님의 활동에 대한 쫌 소회랄까, 쫌 그 부분들 좀, 이런 점은 쫌 아쉬웠었던 것 같고 이런 점은 쫌 잘 했던 것 같고 이런 점은 쫌 앞으로 더 이렇게 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참 좋을 것 같다, 뭐 인제 그런 생각하시는 삶에 대한 좀 소회가 있으시면 말씀을 해주세요. 구술자 : 제가 그동안에 참 40여년 간을 시카고에 살면서 광주 10주기 추모식을 성대히 참 치렀다는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도 하나는 유학생 박태훈씨 구속. 이분이 저하고 같이 5·18 행사에 많이 협조를 했고 활동을 했고 했던 똑똑한 유학생이었는데 한국에 가자마자 구속을 시켰잖아요. 거기에 대한 그 4개 항의 질의를 해가지고 총영사관으로부터 응답을 받았거든요. 근데 11날 제가 썼는데 12날 써가지고 총영사관에서 이렇게 답을 보내왔어요. 그때 당시에 유학생들이 많이 유학을 왔는데 그거는 너희들, 잘못하면 다 구속시켜 이런 겁주는 그런 케이스거든요. 이게 이 4개 항에 다 나와 있어요. 이렇게 영사관, 제가 질의응답을 해가지고. 이런 것도 깅장히 제가 볼 때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유학생들한테 겁주는 거죠. 그리고 제가 국가보훈처에 그 박근혜 대통령 5·18에 참석해달라고 보낸 거에요. 예. 답이 왔었고. 영호남 화합차원에서 이 광주시립 무용단을 초청해가지고 공연했잖아요. 박금자 그 단장이 우리 호남의 딸, 광주의 딸, 아들들이 해외 공연을 그렇게 원했어요. 근데 LA나 뉴욕, 시카고 한인회 뭐 이런 데 다 컨택을 했어도 그 숫자가 많고 또 발레가 그때 당시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잖아요. 다 노했어요. 내가 비즈니스 시작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이게 광주의 아들딸, 애국 공연을 한번 시켜야되겠다, 와이프 하고 상의를 해가지고 와이프가 또 흔쾌히 승낙을 해가지고 영호남 화합 차원에서 성대히 치러줬어요. 이것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 영호남 화합. 주지사도 오고 성대히 치러줬는데 이런 것도 굉장히 참 중요한 거고. 하여튼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참여하고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을 해요. 앞으로 제가 민주연대도 참여를 하고 대화를 하고 일을 해보지만 세대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저는 태극기 같은 거, 애국가 같은 건 정말 꼭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도 부정해버리는 그런 애들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참 실망도 했고 한명숙 총리가 왔는데 태극기를 세워라, 그거 필요없다, 한국에서는 이런 거 요즘 안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버리고 했을 때 이 1.5세, 2세들이 앞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고 나갈 것인가 염려스럽기도 하고 굉장히 참 걱정스럽기도 해요. 우리가 1세대가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아줘야 되는데 제가 볼때는 참 아쉬움이 있고. 앞으로 쪼끔 신경을 써야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면담자 : 예. 뭐 지금까지 하신 말씀 중에서 쫌 보완하고 싶은 말씀이나 더 추가적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좀 있으시다면요. 구술자 : 5·18 재단에 제가 한 10년 전인가, 제가 전화를 한 번 한 일이 있어요. 해가지고 해외지역에서 이렇게 해년 마다 5·18 행사를 하고 그 하는데 5·18 재단에서 단체나 개인에게 감사장이라도 하나씩 보내주는 것이 어떠냐, 하니까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세요. 그 둘이만 아세요. 그 얘기 허시면 안 되고. 혼자만 하셔도 되 (OFF) 자료를 제가 보내드렸어요. 이런 식으로. 그랬더니 보고 나중에 전화를 했더니 별로 한 일이 없다고 그래버려요. 별로 한 일이 없다고. 같은 말이믄 아 행사라도 치러주시고 그렇게 외국에서 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얘길 했으면 저도 흡족했을건데, 감사장 안 줘도 좋고 그 감사장 바라고 한 사람들 하나도 없어요. 그러지마는 제가 광주 사람으로서 봤을 때 유족회나 5·18 재단에서 너무 한 것 같아요. 이렇게 어렵게 장소도 빌리기 어렵고 포스터도 붙이면 떼어버리고 이 반정부단체로 몰려가면서까지 이렇게 해주면 뭔가 쫌 표시가 있어야할 것 아니에요. 근데 전혀 없었거든요. 지금까지도 없었죠. 예. 그래서 제가 실망을 했어요. 실망을 했고. 제가 정수만 회장님한테 제가 또 전화를 했어요. 어떻게 된 건지 참 유감스럽게 생각을 해요. 5·18 재단에서는 알고 있는데 이렇게 행사를 하고 있는 걸 전혀 몰라요. 외국에서 하고 있는 걸 전혀 몰랐대요. 전혀 몰랐대요. 이거 정말 우리끼리 있으니까 얘기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아이고, 그러십니까? 이거 해외에서도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렇게 자료를 보내주니까 깜짝 놀라면서 정수만 회장님이 정동영씨한테 추천을 해가지고 30주년 5·18 행사 도청 앞에서 상을 주신 거에요. 그리고 광주 가서 여론을 들으니까 웬 단체들이 그렇게 많고 서로 헐뜯고 저 실망을 했어요. 그때 가가지고. 면담자 : 30주년때? 4년 전이네요. 구술자 : 실망을 했어요. 제가 참 여기 시카고 지역에서는 자랑스런 호남인상도 받은 사람이에요. 인정을 해줘요, 호남 향우회, 민주화, 5·18 이런 것들을 전부 종합해가지고 자랑스런 호남인상도 저 후배들한테 받고. 한 사람인데 내가 실망했어요. 그래선 안 되잖아요. 면담자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죄송스럽게 좀 생각을 합니다. 이 부분들 선생님께서 방금 말씀해주신 부분들이 저희가 앞으로 좀 풀어가야 할 과제 부분인 것 같아요 구술자 : 조금 더 신경을 쓰고. 그 종이 한장이라도 좋잖아요 왜 못합니까? 그거를. 그러면 그렇게 함으로 해서 더 활성화되고 할거 아닙니까? 그런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전혀. 위령탑 기금을 보냈어도 잘 받았다는 답장 하나가 없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가... 구술자 : 둘이만 알아요 면담자 : 아니 이런 것들을 늘 고민을 하고 지금 좀 저희들도 이런 것들을 좀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부분들을 고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도 저희 인제 위에 이사장님들이나 상임이사님도. 쫌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희가, 선생님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 것 같아요. 좀 더 이걸 내부적으로 어떻게 좀 할 수 있는가 고민을 좀 더 해서 좀 뭔가를 찾아보기 위한 노력들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술자 : 더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죠. 5·18 재단이. 유족회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뭐 늦게나마 이렇게 찾아주신 거는 참 고맙게 생각하고 참 뜻이 있는 자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면담자 : 아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가지고 소중한 말씀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구술자 :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면담자 : 예. 이상으로 이병헌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철규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조철규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1일 ○ 구술장소 : 미국 일리노이 글렌뷰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에 관한 조철규 선생님의 구술 녹취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일시는 2014년 11월 11일 오후 2시 34분입니다. 선생님, 먼저 반갑습니다. 구술자 : 반갑습니다. 수고하십니다. 면담자 : 먼저 태어나신 해하고 어디에서 좀 태어났는지 좀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고향 면담자 : 예, 언제 태어나셨고, 고향이 어디신지. 구술자 : 태어난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팔상리 820번지 면담자 : 1941년? 구술자 : 1941년 3월 30일 면담자 : 이게 실제 태어나신 날인가요? 구술자 : 실제는 1940년 면담자 : 아, 실제는 1940년. 구술자 : 용띠, 호적에는 41년처럼 되어 있지 면담자 : 예. 40년 3월 30일날 태어나셨구요. 구술자 : 네 면담자 : 예전에는 쪼끔씩 호적하고 실제 나이하고 구술자 : 나도 그 일년은 빨리 한 거라고 그러드라구. 옛날에는 일 년은 지나야 호적 했다고.(웃음) 면담자 : 어렸을 때, 예전에는 많이 그렇게 했다고. 구술자 : 호적에는 원 나이는 40년 용띠인데 호적에는 41년생이야 면담자 : 선생님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형제나 누나나. 구술자 : 가족관계가? 어 9남매에 내가 8번째에요. 면담자 : 형제들이 많으셨네요. 8번째 구술자 : 9남매의 8번째, 그러니까 4남 5녀, 아, 4남 5녀 중에 4남 째. 면담자 : 예. 막내아들 구술자 : 남자로는 막내고 내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죠. 면담자 : 9남매를 다 이렇게 키우셨으면 그 정도라면 아버지께서 좀 경제적으로 좀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어렸을 때 뭐 해남에서 농사를 짓고. 구술자 : 예, 농사, 농사하셨지. 면담자 : 농사를 뭐 크게 지으셨나요? 구술자 : 농사를 그래도 농촌에서는 뭐 밥술이나 먹는다고 그랬으니까. 왜냐며는 그, 그때만 해도 국민 학교는 몰라도 중학교 가기가 어려웠는데 하튼 맨 큰 위에 누님은 두 분은 그런 교육을 못받고 일찍 시집을 갔지만 그리고 그 밑에가 세 번째가 남자 형님인데 그분은 일제 그 징용에 끌려가서, 아버지가 가야되는데, 붙잡혀 가야되는데 아버지는 자식들이 있으니까 그때 큰 형이 조규두인데, 조규두. 스무 살, 스무 살 때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그때 압록강 댐인가 춘천댐에 투입됐다고 노무자로. 그랬는데 그때 거기서 왜 두들겨 맞았냐며는 그 일본 감독관들이 군인들이 그 노무를 시키는데 너무 세게 시키고 그러니까 인제 댐볐나봐, 얻어맞고, 또 대항하니까 얻어맞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발길에 채이고 그래가지고 늑막염이 걸렸어. 늑막염이 걸려가지고 일을 못 시키니까 내보낸 거야. 집에 왔는데 집에서 그때 늑막염 치료를 했는데 내가 그때 4살인가 5살 때입니다. 해방되기 전이니까. 근데 그때, 그때는 페니실린이 없었다고 해요. 페니실린이 없을 때야. 그러니까 늑막염이니까 항생제를 먹으면 좋은데 그게 없으니까 집에서 그, 좋은 뭐 한약재 같은 거, 이런 걸로 먹이고 그랬는데. 근데 결국은 그 늑막염으로 집으로 와서 일 년인가 치료하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내가 5살 땐가 그러는데 그 기억이 나죠, 장례 치르고 근데 그때 갔다 나오면 결혼시킨다고 뭐 이렇게 다 예단도 준비해놓고 그랬는데 큰아들이고, 아들로서는 큰 아들이거든. 그러니까 부모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래서 돌아가시고 그러고 그 밑에 형님서부터는 이제 고등성경학교를 갔지, 목포로. 중학교는 해남서 나오고. 그러고 고등 성경학교로 두 형님 가고 그 후에 누님도 고등성경학교를 갔어. 그때는 신학교가 없었어요. 신학교 서울로 가야되고. 그러니까 그 당시에 신학교 대신에 고등 성경학교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주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성경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까지 나오셨나, 그러고서 고등성경학교 목포 가서 가고. 정명여자중학교, 내 바로 위에 누님은 정명여자중학교를 갔고. 그러니까 정명여자중학교 옆에가 고등 성경학교, 그때 미국 그 힐 선교사가 그때 했고. 근데 그때 나는 국민 학교 1학년 때 해방이 됐어. 기억에. 국민 학교 1학년 때. 그렇게 해서 해방이 되고 그렇게 해서 내가 5학년 때 6.25가 났고. 5학년 때. 그리고 이제 내가 중학교를 그때는 국가고시를 봤어요. 면담자 : 죄송합니다만 국민 학교는 어디 국민 학교를 나오셨나요? 구술자 : 옥천 북 국민 학교 면담자 : 해남에 있는 건가요. 구술자 : 옥천면 북 국민 학교 2회 졸업생이에요. 면담자 : 해남군에 있는 거예요? 구술자 : 해남군 옥천면 옥천 북 국민 학교, 북 국민 학교 2회 졸업생. 면담자 : 중학교는 ? 구술자 : 그래서 인제 이미 형님들이나 내 누님이 목포 가서 인제 전셋집 얻어가지고 목포 가서 학교 다니니까 나는 국민 학교 졸업하고 그때 국가고시 봐가지고 나는 인제 광고나 그리 가려고 집에서 그랬는데 그때 뭐가 왔냐면, 노회에서 아버지가 장로였거든. 그니까 목포 노회에서 그때 인왕규 목사님? 그때 노회장인가 그래요. 교회로 편지가 온 거야. 그 문태, 영흥중학교가 일본 사람들 왜정 때 뺏겼거든 문태고등학굔가한테 넘어갔는데 그걸 다시 찾아가지고 해방 되고 나서 시작을 하는 거야, 영흥중학교를. 그러니까 전부 각 목포 노회에서 교회로 편지를 한 거야 전부들 자녀들 중학교 가려면 인제 꼭 보내야 된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장로니까 나를 당장 못 보내잖아. 그니까 목포 중학교 합격이 됐어. 그때가 나는 광고 간다 그러니까 광고는 또 별도로 집어넣어야 되니까 하숙해야 되니까 목포 형님들한테 가라고 그래서는. 목중에 가서는 합격 됐는데 아버지가 장로고 그러는데 어떡해. 그래서 할 수 없이 영흥중학교, 그래서 영흥중학교 내가 그래서 1회 졸업생이 된 거야. 1회 졸업생. 면담자 : 영흥중 입학 했을 때가 그러면 50? 구술자 : 에고 그때가 19, 1985년 1985년? 그때는 서기 안 썼어. 면담자 : 아 단기로, 그때는. 한국 전쟁 끝나고, 5학년 때 한국전쟁이었으니까 끝나고 구술자 : 동란이 5학년 때였거든? 그니까 나 6학년 하고 졸업하고 갔으니까 면담자 : 예, 한 53,4년 그 정도 됐겠네요. 구술자 : 천구백한, 국민 학교 졸업하고 나면 아홉 살이고, 여섯살에 국민 학교 들어갔으니까. 면담자 : 아, 여섯 살에 들어가셨습니까. 구술자 : 여섯 살에 국민 학교 들어갔어. 여섯 살에 들어가서 여섯 살 육년 하고 12학년, 6년, 여섯 살에 육학년, 열두살, 열두살 맞나, 몇 년도가 되겠나 이러면... 면담자 : 53년 정도 되겠는데요. 구술자 : 몇 년도 되겠지, 서기로 하면 면담자 : 1953년 정도 구술자 : 53년? 면담자 : 예예. 구술자 : 53년이며는 휴전되전 해잖아. 면담자 : 예, 휴전 되던 해. 구술자 : 아니지, 휴전되던 해에는 내가 서울로 갔거든. 휴전 되고 면담자 : 5학년 때가 그럼 52년인데요, 그럼 1952년이고 5학년때 6.25가 일어났으면 5학년 때가 1950년이었구요. 구술자 : 그랬어요? 그러면 1950년? 면담자 : 그럼 6학년때가 1951년, 중학교 1학년 때가 1952년. 예. 구술자 : 하튼 중학교를 목포로 갔으니까, 영흥중. 면담자 : 예. 영흥중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시고 고등학교는 어디로? 구술자 : 인제 그리고 고등학교는 서울 오산, 면담자 : 서울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요? 구술자 : 응, 서울 오산. 이북에서 피난 온 학교 있잖아요 오산, 다섯 오, 묏 산, 오산. 면담자 : 서울로 올라가신 계기가 뭐 공부를 하시기 위해서 구술자 : 왜냐면 그렇지, 왜냐면 형님들이 신학교를 서울로 갔거든 누님들도 그러고. 목포에서 고등 성경학교 마치고. 그러니까 나는 또 서울로 따라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중학교를 3학년, 하튼 그래서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지. 그러니까는 그때 서울로 간 때가 휴전되고 그 다음해인가 그래. 1959년에 내가 졸업했으니까 57년, 8년, 9년, 고등학교 3학년이니까. 서울로 가서 내가 1955년도든가? 오산학교를 1959년에 졸업했거든. 한 학년을 내가 쉬었어. 맞아 중학교 한 학년을 쉬었어. 면담자 : 그러면 맞습니다. 구술자 : 한 학년 쉬고 서울 가서 56년에 고등학교 들어갔나? 56년, 57년, 58년. 어, 59년에 졸업했으니까. 면담자 : 예. 그럼 형님들, 누님들하고 같이 인제 거기 계시니 서울에 계시니까 올라가서 학교를 다니시게 된 거네요. 고등학교는요. 구술자 : 근데 같이 있지는 못했지. 형님들은 신학교 기숙사에 가 있었고, 누님은 또 그 지금 순복음 신학교, 그때 순복음 신학교 서울 서대문 로터리 그 방송국 밑에 순복음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 신학교가 거기 있었어요. 그때 조용기 목사가 동기야, 누님하고. 그 조용기 목사님 사모님 누구, 아이구 차자실(김성혜와 혼동) 목사님인가? 그분도 순복음신학교 계통이고 그리고 에, 성서 신학교라고 서대문구 송월동, 그니까는 영천 독립문 가기 전에 오른쪽에 송월동에 성서 신학교가 있어요. 그리스도의 교회 성서 신학교라고. 인제 그리 갔거든, 두 형님은 그리 가고. 누님은 순복음 신학교로 가고, 누님 두 분은. 그래서 나는 인제 와가지고는 잠깐 몇일동안은 기숙사에 있었지만 고등학교 인제 들어갈 때는 어, 나와서 하숙을 했지. 보광동에서. 보광동 129번지 용산구 보광동 129번지 조남중 씨 집에서 내가 하숙을 했지요. 면담자 : 아직도 그 번지를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구술자 : 아 뭐 그렇지, 거기서 내가 하숙 했고. 면담자 :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그, 서울 고등학교 생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들 쫌 있으신가요, 50년대 후반 그때. 구술자 : 그때 이제 1955년도에 내가 그때 서울에 있었어요. 하여간 서울에 가서 일년을 쉬었던가 그래요. 55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는 해공 신익희 선생님이 한강 한강 노량진 한강 백사장에서 선거 유세가 있었거든. 근데 그때 어ᄄᅠᇂ게 거길 갔어. 갔는데 그때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그러고 그때 그 끝나고 호남선 타고 가다가 서거했다는 거거든. 그때. 그때가 아마 55년도일 거야. 그 기억이 나고, 거기 갔던 기억이 나고. 그러고 인제 4.19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면담자 : 그 다음년 구술자 : 졸업하고 하튼 내가 사회 생활 할 때 4.19가 났어요. 근데 내가 왜 인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를 안 갔냐 하며는, 집에서는 아부지나, 내가 오산학교 간 것도 나를 집에서는 막내고 그러니까 그 신학교 보내가지고 선교사님 통해서 미국 유학 보내서 아주 좋은 목사 만드려고 오산학교 보냈어요. 왜 오산학교를 보냈냐, 오산학교 설립자가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시고 또 거기 조만식 선생님이 오산학교 교장이셨고 또 함석헌 선생님이 오산학교 출신이고, 또 한경직 목사님이 오산 출신이시고 최초의 순교자 되시는 그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 출신이세요. 그러고 그때 주기철 목사님 형님인 주기, 주기용 장로님이 오산학교 교장이었다고. 그러니까는 아버지가 오산학교를 꼭 보낸 거예요, 저를. 그리 가서 공부해야 된다고. 나는 그때만 해도 그런 걸 몰랐죠. 그러고 학교를 졸업했는데 일반 학교를 갔으면 좋은데 신학교 가라고 서울 신학교, 연동 나루터에가 있었어요. 서울 신학교에다가 미리 등록해 버리신 거야. 그니까 나는 인제 고등학교 때, 어렸을 때는 인자 신앙생활을 뭐 뱃속에서 그 뭐 복중세례를 받았다고 그래야하나. 난 몰랐는데 국민 학교 어려서 4학년 때 뭐 주기도문 십계명, 뭐 요한복음 3장 16절 달달달달 외우고 그러고 학습 받고 그러고 자랐거든. 그러니까 나를 그렇게 맨들라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때 내가 좀 2학년 까지는 잘 뭐했는데 고3때 가서 내가 머리 길러버리고 어 이거, 담배도 피고 아이들 따라서, 인제 교회도 안 나가고 그랬어. 그래 나는 서울대학 가려고 그러고 주기용 장로님도, 교장 선생님이 오산에서 서울대학 갈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러니까 꼭 가야된다 그러고. 아, 그랬는데 신학교에 갖다 입혀논것이야. 그니까 내가 인제 고등학교 때려, 졸업장은 받았지. 때려쳐뻐리고 저는 이럴 때는 내가 돈 번다, 죽어도 신학은 안 간다고. 그러고 그때만 해도 내가 그래, 형님들 한테 내 주먹을 믿으라고. 면담자 : 그럼 선생님은 그 신학교가 아닌 무얼 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꿈이. 다른 꿈이 쫌 있었나요? 구술자 : 아니, 나는 신학교가 아니고 뭐 솔직한 얘기로 서울대학교 가서 법대 가가지고 나는 정치인, 정치인 할라고 그랬지. 솔직한 얘기로. 정치 계통으로 나갈려고 했지. 근데 인제 절대 안 된다고 그러니까 뭐 내가 어떡해, 그래서 내가 신학교도 안 가버린 거야. 등록금 다 내놓고. 했는데. 가 봤어. 가서 내가 한 한 달쯤이나 들락날락 했어. 근데 영 뭐 아니야. 꼭 감옥에 들어온 것 같고. 아니라고 나는 이건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형님들처럼 그렇게 안 산다. 난 내 마음대로 산다, 그랬거든. 이러고서 내가 이럴 바에는 돈을 벌어야 되겠다. 그러고 그때만해도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됐거든. 그때가 자유당 인제 말기, 말기 때 아닙니까. 4.19 나기 전이니까. 그래서 내가 인제 학교 때려치우고 그때 내가 뭐했냐면 그 보광동하고 이태원하고 가깝잖아요, 용산에 삼각지, 8군 그거 다 끼었잖아요. 거기서 내가 학교를 댕기고 그랬으니까 삼각지, 이태원, 뭐 보광동 한남동, 용산 쪽으로는 훤하지. 그래서 내가 인제 돈 벌길을 어떻게 찾았냐며는, 아, 그리고 4. 19가 났지. 인제 내가 학교 나와서. 학생으로서는 참가 못했는데 그, 그거는 뭐 학생 신분으로는 참석 못했지마는 참가했지. 왜냐며는 오산고등학교 2학년 후배가 그때 재학중이었어, 고3이었는데. 이성화라고 이성화가 고등학교 그때 고3 그 규율부장인가 그러고 그랬는데 청와대, 경무대 들어가서 학생 대표로 들어가서 이승만 박사하고 담판 지은 사람이야. 하야. 학생 대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거든. 후배였는데 나하고 잘 알아요. 내가 제일 사랑했고. 학교 댕길 때. 그 놈이 앞장 서서 했거든. 청와대, 그 경무대 가서 담판 지은 아이가 있었고, 그러니까 나는 학생 신분은 아니었지만 그 광화문에 그런 걸 전부 다 목격했지. 그러고 4월 19일, 18일 서부터 고대 사건, 서울에 있었으니까. 고대 사건에서부터 18, 19, 26일까지 뭐 계속되었거든. 그런 거를 인제 다 목격했지. 그러고 나는 이제 학생 신분은 아니었으니까. 4.19를 내 눈으로 서울에서 다 본거야. 현장을 그 장면을 어떻게 다 묘사는 못 하지만 그런 걸 다 봤고. 경무대 앞에 지금 그 광화문에가 옛날 그 중앙청 청사가 있었거든요. 광화문이 그때는 없는 것 같앴어. 광화문이 없었을 거야, 아마. 뜯어져버렸나 없었을 거야. 지금은 거기에 그 높은 건물이 있었거든 하얀 청사가 있었어요. 광화문 자리에가. 그리고 이렇게 효자동 돌아서 전차 종점 돌아서 이렇게 올라가면 경무대가 있었거든요. 거기까지 갔었지, 그때. 휩싸여, 휩싸여서 막 갔었지. 거기 경무대 들어간 거는 인제 후배가 들어가고. 그때 오산 학교 아이들하고 고등학교 아이들하고. 나는 학생 모자는 안 썼지만 같이 거기 합류하고 그랬지. 걔하고 같이. 그런 기억이 나고. 근데 걔를 인제 미국에 와서 또 사연이 커요. 평양 가서 걔를, 통일대회 갔는데 만났는데 LA에서 또 LA대표로 왔더라고 그래서는 2007년도에 평양 통일 축전에서 만났어요. 걔를. 면담자 : 2007년도에요? 구술자 : 걔를 거기서 만났어요. 아이구. 그때 4.19를 그렇게 목격했고. 그러고 나는 그때 뭘 했냐. 그때는 한국에 물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자가 이 생활 용품이라든가, 이런 것이 8군 PX에서 흘러나왔어요. 8군 PX에서. 하다못해 뭐 우유 같은 것, 뭐 커피, 뭐 맥주, 뭐 오렌지 주스라든가 이런 것들은 전부 미군을 통해서 그 당시에 이태원에는 외인 주택이 있었고 한남동에 외인 주택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태원은 미국 사람하고 그 결혼해서 사는 분들이 이태원에 많이 살았고. 그러니까 남대문 시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그 미국 상품들이 전부 이태원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거기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 장사가 괜찮았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래서는 내가 그때 인제 그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 거기서 내가 살았기 땜에 그 훤히 알았잖아요. 그러고 그거 시작하면서 뭘 배웠냐며는 이, 택시 운전을 배웠어요. 택시 운전을, 그때는 찌프차를 가지고 운전을 배웠는데 내가 왜 찌프차 운전을 할 줄알았냐며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집에서 학비를 대줘서 했지마는, 2학년, 3학년은 내가 가정교사를 했거든 그때 가정교사를 할 때 삼일제약이라고, 삼영톤 만드는, 원기수하고 삼영톤 만드는 회사가 그 용산 한강로 2가에 있었어요. 그 용산 우체국 그 뒤에. 그 아들이 오산학교 내 동기였다고. 근데 지 동생 때문에 가정교사가 필요한데 내가 또 공부를 잘 했거든. 그래서 가정교사를 들어간 거예요, 그 집에서. 그래서 그 집에서 2,3학년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서 가정교사 했는데 그 집에 차가 있었거든, 찌프차가. 근데 그거 많이 타고 댕기잖아요, 어떤 때는 학교 끝나면 시간 없으면 가서 데려가고 그 후에 인제 집에 세워놓고. 내가 상당히 지앙시러웠거든 그니깐 인제 집에서 그 찝차가 지금은 열쇠 이렇게 꼽고 하지만 그전에는 이 키가 여기 달려있다고, 여기 붙어있다고. 그래서 요렇게 돌리면 키가 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는 발동을 어떻게 거냐면, 지금은 키가 돌리면 발동이 걸리지만 저 발바닥 밑에가 악세레다하고 이렇게 보단을 이렇게 꽉 밟는다고. 보단을 밟고 악세레다 밟으면 발동이 걸린다고, 키를 넣고. 근데 그런걸 봐가지고 내가 운전을 발동을 걸어버린거야, 없을 때. 그러고 인제 시동이 붙어 있으니까 그래가지고 그 운전을 배운 거야. 운전수 인제 밥먹으러 가든가, 차는 못 가지고 가거든. 집에다 세워놓고 가거든. 그럼 나는 어떤 때는 늦게 타고 난 다음에 늦게 끝나고 저녁 먹고 올 때도 있고 놀다 올 때도 있고 그러거든. 그럼 인제 그 차에 가만히 가가지고 발동 걸고 그때는 시프트 식이니까, 이거 다 봤거든. 1단 2단 3단 4단 이렇게 하면 빽업, 해보니까 되더라고. 그런데 그 운전을 배운 거야. 면담자 : 운전을 독학으로 배우셨네요. 구술자 : 그렇지. 그 인제 운전을 배웠어. 그래가지고 하루는 인제 학교 운동장에 가서 나를 태우러 왔는데 사정을 했지, 아저씨, 아저씨 나 이거 다 아니까, 알어, 그 사람이 알어, 내가 그때까지 자동차 건드렸다는 거 알거든. 그니까 이제 나한테 자꾸 툭 치면서, 너 이제 자동차 그만 건드려, 늘 그랬거든. 하루는 학교 운동장 오는데 내가 한번 해볼 수 있다고, 된다고 할 수 있다고 그랬더니 안 된다고 그래. 아 이거 학교 운동장이고 그러니까 한번 해보자고 사정을 해서 아 해보니까 아 진짜 운동장에서 되드라고. 어, 자전거 타듯이 그랬더니 나 등어리 치면서 너는 이 자식이아, 별것이야. (웃음) 그래서 운전을 배웠거든. 그 이제 이태원에서 그 장사를 하는데 택시를 많이 이용하잖아요, 그때는. 그 물건을 예를 들어서 미국 사람들하고 사는 가정에서 그 물건들이 흘러 나온다고. 근데 그거를 인제 또 거기 가게에다가 갖다 팔아요 상점하는 사람이, 저 물건을 수집을 한다고. 그럼 그 상점에서 갖다가 또 남대문 시장에다 냄기고 그런다고. 이런 걸 알았거든. 나는 이걸 어떻게 했냐믄, 직접 집으로 댕기면서 그 미국 사람들하고 사는 그 아주머니들한테 찾아가서, 나 이거 고학생인데 그때만 해도 학교는 졸업했지만 이거, 모 이거 쓰고 다녔거든. 쪼금만 달라고 이러니까 나한테 조금씩 달라고. 어. 그래서 인제 첨에 쪼금씩 시작했어. 근데 그게 괜찮더라고.. 그래서 인제 자동차를 많이 쓰거든. 차에 다가 싣고 남대문에 가야되고. 그래 그때 인제 그 이 찌프차를, 찌프차, 하여튼 찌프차를 어떻게 구입을 했냐하면 그때는 그 군대에서 흘러나오는 그 차들을 이 자동차 공장에서 시발 택시도 안 나왔을 때야, 막 이렇게 두들겨 맞춰가지고 맨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는 어떻게 친구 동업자하고 같이 이렇게 만나가지고 우리가 차를 하나 맨들자, 이거 너무 자동차 비용이 많이 나간다. 하긴 자동차를 하나를 조립을 했어. 조립을 해가지고. 그 때는 넘바도 없어도 그 충무로 공장에 가며는 번호판 하나 찍어달라고 하면 찍어준다고 가짜. 똑같아. 서울 자 몇 번 하고 찍어준다고. 무조건 차량에 그거 붙이고 댕기는거야 밤낮 댕기는 것도 아니고 물건 나갈 때만 저녁에 나가고 들어오고 세워났다 저녁에 나가고. 이런식으로 하니까 자동차비가 완전 절약되잖아. 그래서 인제 좀 돈 좀 벌었어요. 음. 그래가지고 거기서 에, 그러니깐 60년대에 그러고 났는데 혁명이 났어. 60년도던가? 혁명이. 면담자 : 5.16이요? 61년에 구술자 : 61년에 났죠. 4.19 나고서 그 다음해로, 4.19가 1960년에 났고. 그러고 바로 그 다음해에 혁명이 났거든. 그때는 이미 내가 그 자동차 씽씽씽 몰고 댕길 때거든. 그때는 좀 돈도 좀 벌을 때고. 그게 잘 나갔는데 5.16이 나더라고. 그래서 이제 나는 뭐 이태원에서 나쁜 짓 한 것은 없는데 아이들 각출해 합자 조합해가지고 그 장사 한 것 밖에 없는데, 잡으러 댕기는거야. 그게 잡으러 댕기는 이유가 뭐냐 그랬더니 나를 인제, 그 여럿이 우리가 모여가지고 합자 장사를 했잖아요, 자동차도 만들고. 그런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피해야지. 그때는 뭐 막 뭐 어디만 가면 잡아 넣고 뭐 삼청 교육대 가고, 아니 삼청 교육대 아니고 덕수궁. 덕수궁 가서 실컨 두들겨 맞고 나오고 그러고. 하여튼 그런 사람들 청사났더라고.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그래서. 그때 마침 형님들이 나를 어디다가 데려다줬냐면 삼각산 제일 기도원에다 갖다 집어넣더라고, 삼각산 제일 기도원. 너 괜히 뭐 니가 깡패는 아니고 그러지만 니가 자동차 몰고 다니고 또 그런 장사 하고 어, 그랬으니까 잘못 하면 뭐한다고. 그래서는 삼각산 제일 기도원에다가 그리 너버렸어요. 거기가 제일 안전하다고. 그래서는 어디 갈 데도 마땅치 않고 그 난리는 또 피해야 되겠고. 그래서 거기 가서 한 5.16 나고서 그 해에 한 몇 개월 피했어요. 그해 가을에, 겨울 되기 전에 나왔으니까. 겨울이 와서. 그러고 나오니까 뭐 또 조용하고 다 끝났더라고. 그래서 다시 뭐 그 장사 하고. 면담자 : 같은 일을 또 구술자 : 그렇지. 그 장사 했는데 인제 그때 그게, 그때는 그게 상당히 컸어요, 그 장사가. 왜냐며는. 면담자 : 한달 수익이 어느 정도 되셨습니까? 많이 돈 많이 버셨다고 그러시는데. 구술자 : 5.16 나고도 괜찮았는데 한 십년 인제 5.16 나고도 괜찬했어요. 5.16 나고 또 화폐 개혁도 있었거든. 그게 인제 발전되 가지고 어, 돈 무척 벌었어. 근데 그때는 이런 그런 물건만 아니라 전자제품. 그때는 에, 트랜제스타, 래디오, 육석, 칠석 뭐 이런 거 나올 때야. 처음으로. 트랜지스타. 그때만 해도. 휴대용, 그런 거. 하튼 뭐 면도날, 뭐 볼펜, 뭐 전축, 전축. 그때는 한국에서 맨든 게 없었거든, 맥주도 못 맨들었어요. 8군 PX 나오는 거 고관대작들 전부 거기에서 갖가 사먹고 그럴 때라고. 그러니까 뭐 물품도 전부 PX 제품 뭐 불티나지. 남대문 도깨비 시장으로 나가며는. 그게 이런 거 큰 걸로 손 댄 거야. 그게 그거는 인제 어떻게 했냐면 미군들이 사와야 되거든. 근데 이제 그게 미군들도 한계가 있잖아. 사는 게. 일 년에 하나면 하나. 그니까는 그 미국사람들하고 사는 인제 부인들하고 통해가지고 그 미국 사람들을 인제 이용한 거야. 그 사람도 돈 버니까. 그 사람들은 안 걸리고. 그래서 그때는 인제 내 차 있겠다, 동두천 가면 동두천 7사단 PX가 있어요. 또 문산 가면 1 기갑사단 PX가 있어요. 또 춘천 가면 또 쪼끄만 거기도 쪼끄만 게 있어요. 또 왜관을 가면 왜관에 거기가 왜관 거기가 무슨 그, 태평양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송 물자가 왜관으로 들어와. 왜관에서 어디로 가냐며는 부평, 부평 에스캄(ASCOM: Army Support Command)이라고 부평 미군 기지가 있어요. 에스캄이라고. 거기가 보급기지야. 배에서 왜관으로 왔다가 왜관에서 부평 에스캄으로 온다고. 에스캄에서 각 인제 부대, 미군 부대로 물품이 배달이 되지. 그래서 판매가 되는데, 그 장사를 하다보니까 그걸 알게 된 거지. 면담자 : 선생님 왜관이라는 곳이 뭐 지명이름인가요? 구술자 : 지명 이름이지. 면담자 : 뭐 인천 그쪽 근처인가요? 구술자 : 왜관이 경상 면담자 : 동해 쪽인가요? 구술자 : 아니지, 아니지 경상남도 쪽이야. 경상남도쪽. 왜관, 왜관. 면담자 : 왜관이라고, 예, 이거 확인해보겠습니다. 구술자 : 경상남도쪽이라고. 면담자 : 예. 거기에서 왜관에서 들어와서 부평 쪽으로 이렇게 가나요? 구술자 : 그렇지, 왜관이 거기가 태평양 배도 들어오면 왜관에 전부 내리게 되지. 그 왜관에서 인제 부평에스캄 기지로 가고 인제 부평에서 전부 다 각 부대로 배송되는거야. 그 장사하다 보니까. 왜냐며는 나중에는 어떻게 하냐면, 그 개인적으로 부대를 통해서 그 조금씩 빼는게 이게 인제 신통치 않으니까 나중에는 어떻게까지 번졌냐며는 바로 왜관에서 배송되는 거를 인제 어느 정도 받았고 거기까지 이르렀지. 또 부평에서 각 PX로 가는 거, PX 책임자하고, 말하자면 결탁해서 중간에서 어느 정도를 인제 내려주지. 그믄 인제 그게 쉽잖아. 그러니까 인제 돈 버는 액수가 더 많아졌지. 그렇게 해가지고. 면담자 : 그럼 그때부터 주로 상대한 사람들은 미군 이었나요? 구술자 : 미국 사람이지. 면담자 : 영어는 그때부터 고등학교 때부터 잘 하셨나요? 구술자 : 고등학교 때 영어를 뭐 100점은 못 받았어도 99점, 98점은 맞았으니까. 왜냐믄 미국 유학 보내서 그러니까 영어를 잘하라고 해서 영어를 좀 잘 했어요. 그때만 해도. 근데 그래서 하튼 그런 식으로 해서 하는데 그게 인제 대결이 어떻게 되냐며는, 5.16 그 나고 나서 인제 그 십년 사이에 이 군사 주체 사이에서도요, 에, 그거를 그 산하 조직들이 이거를 뺏어가고 했어요. 그 사람들도. 나도 했지만 나 혼자만 한 게 아니거든. 다른 사람들도 했거든. 근데 거기에 누가 끼어들었냐면 5.16이 나고 나서. 이, 내 생각이야. 5.16 그 백그라운드 가진 사람들이 이것도 손 댔다고. 돈줄이 없으니까. 그때는 돈줄이 없었거든요. 한국에 딸라(Dollar)가 없었어요. 그 이태원에서 나오는 딸라가 딸라 수입원이었다고, 그 당시만 해도. 알아요, 그만큼 한국이 그때는 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니까 군사 정부에서도 돈이 없으니까 별짓 다 했잖아요. 그때 그 처음으로 새나라 자동차 들여온 것도 김종필씨가 그렇게 해서 들여온 거고. 돈 몇푼 벌려고. 그니까는 이런 데까지 손 안 댈수가 없죠. 그래서 걔네들이 인제 쎈데 뭐가 나한테 들어오냐면은 자꾸 그 용산 경찰서 정보부에서, 형사과에서 나를 제동을 거는 거야 인제. 자꾸 붙, 말하자면 추적을 해서 못 하게 하는 거. 왜냐면 그때는 이렇게 돈 안 줄 수가 없거든. 정보국과 형사계에. 다 이렇게 일부러 온다고 그럼 이렇게 줘야 돼. 용돈 줘야돼, 용돈 주고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며는 그, 걸리잖아. 특정 외래 판매 금지법이 있고., 그때. 특정외래 판매 금지법이 생기고 외환 관리법이라는 게 있고 아무나 외환을 못 가지고 있어요. 그때는 그런게 5.16 나고 생겼거든. 그니까 우리는 나는 달러도 가지고 댕겨야 되고 외래품을 사고팔고 하는 그거 하잖아. 그니까 안 걸릴 수 없지. 그러니까는 그렇게 돈을 안 쓸 수가 없잖요. 그래서 인제 돈을 좀 벌만큼 벌었어요. 근데 제동이 들어오는 거야 그걸 자꾸 견제를 하는거야. 그래서 아, 내가 눈치 챘어. 이게 어, 인제 어마어마한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들어와서 이걸 다 뻇어가는거야. 그래서는 안 되겠더라고. 잘못하다가. 그래서 뭘했냐며는 그 이태원에다가 브라질 제과점을 내가 냈지. 브라질 제과점. 이태원 산 13번지에 브라질 제과점을 냈어요. 집을 세 얻어 가지고. 예, 그게 인제 제과점을 하면서 그 미국 사람들이나 그 외인 주택에 사는 일반인들도 빵 많이 먹는데 부대에서 나온 빵도먹지만 케익, 제과점 하면서 케익 직접 공장에서, 쪼그만 공장을 가지고 직접 다 맨들어냈거든. 그리고 뒤 홀에서는 맥주도 팔고.. 그러니까는 저녁에는 미군들 나와가지고서, 그때만 해도 이태원에 클럽이 없었어요. 내가 그 후로 클럽이 막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그랬지. 내 가게 뒤에서 쪼끄만 홀 하나, 이거 반만한 홀 하나 이거 두고서는 그럼 저녁에면 와서 부인들하고 와서 술 마시고. 퇴근하고 나와서. 그리고 뭐 전축 이렇게 틀어놓으며는 이만한 여기 반만한 홀이지마는 거기서 춤도 추고. 그래서 돈을 그때 좌우지간에 차로 싣고 댕긴다고 그랬어. 자동차로 싣고 댕겼어. 그때 잊어버리지도 않아. 거북선 그려진 돈 오천원짜리 그게 그때는 가장 큰 돈이었거든. 그러고 그 전축 같은 거, 트랜지스터, 래디오, 또 홈세트라고 있었어요, 홈세트. 커피 세트. 이 박스로 이렇게 나와요. 6인조, 8인조, 12인조 커피 팟, 잔 뭐 이렇게 전부 포함된 거. 박스야. 그때 그거를 구할라고 이 줄서가지고 있었어. 서울에서 있는 사람들이. 그거 뭐 많이 취급을 하니까 그런 데서 돈을 많이 벌었지. 근데 잘 나갔어요, 그때는. 자가용도 정식으로 정식으로 넘버 붙여서 탑차 타고. 그러고 인제 그때만 해도 위장 남바라고 있어요. 뭐 판사는 뭐라든가. 검사 넘버라든가. 이거를 카피를 해가지고 세를 준다고. 그때는 그때만 해도. 한 달에 얼마씩 받고. 원남바가 있는데 그때는 카피를 만들어서 세를 줘. 그럼 자기들은 얼마 안 쓰거든. 출퇴근 하고 그럼 나는 인제 밤에 쓰고. 그러니까 떠블을 붙이고 댕겨도 모르잖아, 그때만 해도. 그러니 그때는 내 넘버가 있지만 그런 번호를 달고 댕기면 걸리지 않잖아. 그러고 또 심지어는 별판짜리, 별판. 찦차 앞에다가, 그땐 탑차거든. 별판을 딱 달고서는 똑같이 커버를 씌우고. 댕기거든, 그때는. 장성이 타면은 커버를 벗기지만 안 탈 때는 씌우거든. 그러믄 그때만 해도 그 운전수들이 후생사업이라 해가지고 그 별판을 빌려준다고. 세를 놨어요, 그때만 해도. 그믄 때로는 또 그 별판 달 때도 있어요. 문상이나 종로 구청 들어갈 때는 별판을 달지. 자가용 번호판을 떼고. 별판을 딱 달고 씌운다고. 그믄 인제 옆에다가 군복 딱 입고 말이지, 썬글라스 딱 끼고 앉혀놓고 들어가서 운전하고 들어가는거야. 그믄 의정부 쩌 미아리 고개 가면은 거기가 검문소가 있었구요 또 의정부 가기 중간에 또 검문소가 있어요. 미군 검문소가. 그믄 인제 별판 달고 군복 입고 그러믄 통과거든. 그럼 들어가서 그런 물건을 싣고 나오는 거야. 짚차, 츄레일러, 트레일러에다가. 싣고 위에다가는 뭐 겨울에는, 봄에는 봄배추 가을에는 가을배추 이런거 당당하게 싣고 갔거든. 그런데 거기서 나오면 이렇게 뭐 보지 않고 통과 시키고. 나중에는 그 인제 또 한국사람들 그럼 눈치가 빠르잖아. 합동근무하거든 한국 헌병하고. 그믄 인제 눈치 채가지고 그러믄 그때 또. 그때는 돈이면 안 통하는게 없으니까. 그러믄 그때 한국 헌병. 미국 사람들도 좋아하거든 다 먹고살자고 하는거다하고. 그러니까 검문소도 인제 다 어, 통과되는거야. 처음에는 그냥 했도 나중에는 뭐. 하튼 돈을 무척 벌었는데. 그시기, 그때 시련을 그렇게 지나갔어요. 그일 후에 무슨 일이 있었냐, 71년에, 71년에 대선이 있었거든 7대 대선아. 7대 대선, 김대중선생하고 박정희하고. 그때 처음으로 대선이 있었는데. 내가 선이 형님들로 해가지고 어떻게 닿았냐면 용산 신민당, 용산 지구당, 청년 조직부장이 된거야. 면담자 : 신민당이요? 구술자 : 용산지구당. 왜냐면 내가 청년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거든. 그 장사를 하니까. 그러고 더군다나 뭐 목포에서 온 아이들 또또 광주에서 왔다고 그러면 찾아오는 애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서울로 와가지고 그믄 그때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이 뭐 솔, 상당히 많았어요. 몇 십명, 내가 정확히는 말 안하지만. 그래서 그 아이들을 내가 쫌 많이 데리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형님들이 와가지고 이러이러하니까 형님들이 그때는 신학 나와서 다 목사였거든. 누님들도 인제 신학 나오고 결혼해가지고 매부들도 목사고. 게 인자 형님들이 그러라고 하니까 그렇게 했지. 그때 내가 너무 돈이 많을 때니까. 그때 내가 부동산 사논 게 지금도 서울에 남아 , 시골에 다 남아있죠, 한 육만평. 지금도 임야 전이 남아있죠, 영암에. 지금도 내 이름으로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그때 주민등록번호가 살아있어요. 그래서 주민 등록, 내 이름으로 토지세가 나오니까, 해마다. 어, 주민등록은 없어도 전철 고속, 인천공항에서 고속버스 탈 때 내가 찍어보니까 주민등록번호 찍어보니까 떨어지더라고요. 왜냐면 세금을 내거든. 내 이름으로 임대를 줬지마는 내 이름으로 있고 주민등록이 살아있잖아요. 번호가. 그러니까 내가 없는데 주민등록이 없지만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그 농지세 토지 그 등기에도 등기부등본이나 확인해 내 주민등록번호가 들어가있거든. 또 농지세가 나온 거 내 주민등록번호, 내 조철규 이름으로 나오거든. 그래서 내가 그 전철 타는 데에 찍어보니까, 내 주민등록번호 찍으니까 떨어지더라고. 어? 근데 근래에 와서는 그거 찍으니까 안 되고 주민등록을 갖다 이렇게 갖다 대라고 되있어요. 주민등록을 갖다 대야지 주민 등록 없으면 안 되, 이거 찍어가지고는 안 돼. 그래서 인제 거기 가가지고서는 나 나라에 세금을 낸, 세금 낸 사람이라고. 그럼 주민등록 번호 대라고 그래. 그믄 주민등록번호 4633016... 바로 대거든, 내꺼니까. 그믄 찍어보면 떨어지거든. 그럼 ○○○○ 141111조철규01_00:47:30 찍어준다고. 지금도. 그게 지금도 살아있어요. 그때 인제 돈 벌 때 쫌 그런 거 해놓고 서울에도 좀 해놓고 그랬는데. 형님들이 그 와서 그러는데 그러고 김대중 선생은 내가 목포에서 중학교 댕길 때 김대중 선생이 목포 계셨어요. 목포 노총? 노동, 어, 노총이라고 있어. 노총. 그러고 그때 그 차병원 딸하고 결혼했다고 그랬던가. 그 형님들하고 그때 알고 지냈거든. 큰 형님하고, 지금 돌아가신 큰 형님하고. 그래 어렸을 때 내가 봤어요, 김대중 선생을. 집에도 오시고 그랬으니까. 그랬는데 형님이 와서 그러니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그래 내가 그때 인제 그걸 가지고 아이들하고 좀 뒤에서, 앞으로 나설 수는 없잖아. 깨놓고. 왜냐면 그 장사도 하니까. 그렇게 했는데 대선이 끝났잖아요. 끝났는데 4월 27일이던가? 29일이던가? 하여튼 내 일기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떨어졌는데 그때 백만 표도 안 돼. 백만 표도 아니고 몇 십만 표였어요, 그때. 그게 그때 떨어졌어요. 여기서는. 그래서 인제 그날 아이들하고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몰라. 아주 아이들하고 밤늦게까지 내 집 뒤에 홀 있으니까 하튼 뭐 맥주고 양주고 있는 대로 먹고 하여튼 그때 백 여명이 왔나봐. 뭐 나하고 같이 있는 아이들도 많지만. 그 외에 뭐 목포에서 와서 용산에 있던 아이들. 다 내가 그때는 돈을 뭐 뿌리고 댕겼으니까. 그리고 인제 집으로 왔지. 가가지고서는 내 일기장을 일기에다 썼어요. 술에 취해가지고. 내 그 내용은 술 취해가지고 인제 너무 분하니까 쓰고서는, 선생이여 뭐 낙심하지 마시오. 우리 다시 칼을 갑시다. 이렇게까지 인제 썼는데, 이 사람들이 이걸 알았어요, 내가 앞에 나서서는 안 했지만. 저놈이. 그때는 정보국이 굉장할 때에요. 그래서 내가 그때 느낀 거는 나도 그때 뒤에서 다 했지마는 선거 운동을 해도요, 딱 저 사람이 전라도 사람이다 하면 그땐 고무신 돌렸다고 말해요, 고무신. 전라도 사람이다 하며는 입 뻥끗도 안 해. 아예 포섭하려고 하지도 않아. 저 사람이 무조건 전라도다 그러면 일절 저 사람 딱, 포섭 밖이야. 다른 데 뭐 충청도라든가 뭐 강원도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인제 포섭을 하지 그 사람들 선거 전략이 그 당시 그랬어요. 그때 그 조직이라는 게 내가 그날 투표를 갔는데 내가 이태원에서 그렇게 오래 살고 보광동에서 오래 살고 이태원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주소가 이태원, 이태원에서 살 때인데 가니까 그 선거인 명부에 이름이 없는 거야. 면담자 : 선생님 이름이요? 구술자 : 그렇지. 내가 거기서 그, 거주하고 증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그때만 해도 젊었을 때니까 거기서 또 가만히 물러날 수 없잖아. 한바탕 소란이 났지. 동회에 가가지고 동회에 투표하러 갔는데. 투표도 못했어. 선거인 명부에 빼버린거야. 그러니깐 인제 완전히 고의적인 거야. 그런 사람들이 나뿐이 없겠냐말이야, 그런 사람들이 나뿐이 없겠냐구요. 어징간해서 저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많았거든. 에, 전라도에서 그때 막 서울로 많이 막 올, 무조건 올 때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살면서 그냥 신고하고 어, 살았다고 그럼 내가 투표 하고자 했는데 이리 가가지고 없어서 투표 못한 사람도 많았다고. 나뿐만 아니라. 나 같은 사람도 그랬는데. 그래서 그날 그 일기 썼는데 나중에 어느 날 얼마 한 달인가, 일기 쓸라고 보니까 일기장이 찢겨졌어. 일기장이 찢쳐졌어, 한 반? 중요한 부분이. 그래서 인제 이상하다 그랬는데 나중에는 어떻게 알았냐며는 중앙 정보부에서 그, 내 방에 들어와 가지고 그 가져간거예요. 찢어간 거예요. 그걸 내가 확실히 확인을 한 거예요. 말하자면은. 그러니까 나는 인제 꼼짝없이. 인제 감출 수가 없게 됐잖아. 그 후로. 얼마 못 가서 71년 그, 71년 10, 그러고 인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러고 내가 인제 이태원을 떠나게 되요. 그 후로. 그 후로 왜 내가 떠났냐면. 제과점을 하며는 빵공장 빵을 구워야 되잖아요. 식빵돟 구워야되거든요. 뭐 생케익도 만들어야 되고 빵을 구워야되거든요. 그래서 인제 진열해야되고 매일 구워야되요. 그러고 이제 그 물품, 음료수랑 맥주 같은 것도 들어왔다 들어오고 또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매일, 매일 주고 한자리 깔아놓고 이렇게 거래가 되거든. 또 빵 하는 재료도 밀가로 같은 거, 설탕 같은 거, 버터 같은 거, 이렇게 들어면 늘 선불 주는 게 아니거든. 쓰고 또 주고 쓰고 주고 하는데 이것도 차단되더라고. 아 뭐 물건이 와야 빵을 굽고 뭐 술이 와야 팔고 그러잖아요, 음료수. 그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는데 나중에는 기술자, 빵 굽는 기술자까지 온다간다 말도 없이 나말도 없이 안 나와 버린 거야. 그 집에 찾아가면 없고. 그 부인한테 물어보면 모르겄어요, 무슨 급한 일 있다고 나갔는데요. 그래서 인제 내가 그때 깨달은 거지. 아하. 이게. 그래서는 일 년 버텼나. 일 년도 채 못 버텼어요. 그 다음해에. 다음 해에. 뭐 비어를 살 수 없게 되더라고. 면담자 : 그런 그게 어찌 보면 그런 활동들을 전면에서 나서서 한건 아니었고 뒤에서 이렇게 조용히 도와주기만 했는대도 이렇게. 구술자 : 그렇지, 그렇지. 면담자 : 누가 뭐 밀고를 했을까요. 뭐 어떻게. 구술자 : 아이들을 하도 많이 데리고 있었으니까. 왜 정보부에서 그걸 모르겠어요. 내가 그때 돈 뿌리고 내 자가용 굴리고 그럴 땐데. 그러고 그것뿐만 한 게 아니라 또 부동산도 손대고 그랬거든. 그래서 현아사업주식회사라고 주식회사 맨들어 가지고 거기 아이들 한 여남은 명 이렇게 담당하게 하고. 부동산, 71년도 그때 문 닫기 전에 내가 부동산에 손댔고 압구정동 그 아파트 질 때, 처음에는 용산에 외인아파트가 생겼고 그 다음에 한강 건너서 반포에가 반포아파트가 생겼어요. 그래서 반포에다가 맨션부동산이라고 내가 하나 오픈했죠. 또. 맨션 부동산이라고 반포에다가. 반포아파트 단지 안에다가. 그러고 거기서 그 위에 압구정동에 인제 또 개발될 때에요. 압구정동에. 압구정동에 그래서 압구정동 분양도 그 반포 맨션 부동산에서 들어가고 그랬죠. 그래서 근데 인제 이 이태원에서의 그 장사는 더 이상 하믄 안 되겠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파악을 한 거지.왜냐며는 물품 그렇게 대주는 사람들이 물품 떨어졌다고 안 대주지, 밀가루 설탕 뭐 그냥 그러지 할 수가 없잖아. 가게 맥주도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없다고, 맥주가 도매상에 없다고 안 대주니까 장사를 못하잖아. 그래서 결국은 내 스스로 그것을 접었죠. 접고 낙향했어요. 내 고향으로. 면담자 : 그래서 이런 이유들이 좀 모아져서 아, 이제 한국에서는 살 수 없겠다 이민 결정을 좀 하셨겠네요. 구술자 : 그래서 낙향을 했는데 면담자 : 선생님 잠시만요, 테잎 좀 갈고...<TAPE 교체> 면담자 : 낙향해서 쫌 고향에서 인제 하셨나요? 구술자 : 서울에서는 아무래도 그, 가게 문을 닫고 거기서 괜히 어정거렸다가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날더러 형님들이 그러더라고. 시골 가서 있어라. 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며는 1969년도엔가 미국에 카더 39대 카더 대통령 때에 이민법이 통과가 됐어요. 이민법이. 그래서 그때 70년 부터선가 인제 그 가족초청 이민이, 미국에서 시민권자가 초청하게 되면 그게 시작하게 됐다고. 미국 법이 통과가 됐다고. 그러믄 그때 누가 썼냐면 내 그 처남이, 내 처가, 방종엽이라고. 내 처갓집이 서울이거든. 연세대학교 2학년 때 하키선수였는데 하키선수로 미국 유학을 와가지고 눌러 앉았어. 안 오고. 그 때만해도 자유당 때에 미국 유학 온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믄 장 차관들, 뭐 국비생. 국비생 아니면 장차관, 빽있고 돈 있는 사람들. 근데 그때 처갓집이 서대문구 서소문동 방장성씨 하면 서대문구 소방서 서장도 하고 어, 서울 시의원도 하고. 그 서대문 갑부였지요. 그게 서대문구 그 중앙일보 가기 전에 지금 삼성빌딩 말고 그, 방장성씨거든 이름이 그니까는 석삼자 이룰 성자, 삼성빌딩이라 7층 빌딩을 가지고 있었어요. 바로 법원 뒷문, 중앙일보 올라가기 전에. 근데 그 둘째 아들이 미국 와가지고 그 연대 2학년때 하키 선수로 미국와가지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때 같이 온 친구들이 한국일보 여기 시카고 여기 지사장 했던 아이고 이름 잊어버렸다. 김 누군데 그 친구. 근데 인제 그 이민 문호가 개방되니까 고향에 가서 이민 갈 준비를 하라 이거야. 형님들이 네 입장으로서는. 그렇게 해서 여길 떠나는 게 좋겠다. 여기있다가서는 뭐 아무래도 니가 가만 있을 거 아니고 활동해야 되고 하는데. 미국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너는 좋다 그래서 고향에 갔는데. 마침 내가 그때 또 그, 그때는 내가 잘 나갈때라 군대를 안 갔어요. 영장 나온 거 다 돈으로 해결하고. 근데 미국 올라면 병역, 병역필이 있어야되잖아, 병역필이. 병역필이 없었잖아. 그러니까 인제 고향에 가서 방위병, 방위병 하면서 인제 병역필을 하고 또 고향에 가서 할 게 없으니까 마을에서 이장하라고 해서 이장하고. 또 새마을 지도자 하라고 해서 새마을 지도자를 했죠. 왜냐며는 새마을은 누가 해도 해야 될 일이거든. 그니까 그거는 내 고향을 위해서 내 동네를 위해서 해야하는 일이니까 열심히 했어요. 새마을 지도자 4년 하고 이장 4년 하면서 군수 표창까지 받았으니까. 해남군수 박관주? 새마을 사업 열심히 하고 이장 새마을 사업 열심히 했다고 표창까지 받았어. 그러고 또 새마을지도자 하려면 그 새마을 학교 가서, 광주 가서 교육 받아야 되거든 한 일주일, 그거 받아야되니까 그거 받고. 그러고 이제 병역문제 해결하고 그러고 인제 이민 초청장 신청을 하니까 초청장 보내줘서 이민 수속을 고향에서 한 거예요. 그래서 인제 75년에 이민 수속이 거의 다 끝나고 여권이 다 나오고 했는데 비자를 인제 다 받았어요. 식구가 여섯 식구가. 2000, 그러니까는 75년 11월 28일 날 아이들하고 와이프는 그때 들어오고. 왜 같이 못왔냐그러면 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은 그 출국 허가를 받아야 되는데 출국 허가가 안 나와. 내가. 비자는 다 나왔는데. 대사관도 비자가 다 나왔거든요. 그래서 인제 여권까지 다 나오고 그러면 출국 신고, 본적지가서 출국신고 해야 되고 또 이주 허가도 받아야 되고, 보사부에 가서. 마지막으로 인제 공항에서 출국 이주 허가 받고 해야 되는데 이주 허가가 안 나와. 고향에 가서 출국한다고 신고 했거든. 그러고 인제 그거 가지고 가서 이주 허가를 이민으로 이주 간다고 해야되는데 그게 안 나와. 그래 얼른 생각했어. 아, 이건 뭐가 있다, 그러고서는 아이들하고 먼저 보냈지. 와이프하고. 11월 28일날 그러고서 나는 한 40일 후에 40일 후에. 내 혼자 해결하는 게 낫잖아. 같이 안 가고 해결하는 것보다. 그래 먼저 보내고. 나 혼자 남아가지고 그 출국 허가 안 나오는 거를 결국은 해결을 했어. 해결을 하고 1월 10일 날 나는 와가지고 합류를 했지. 면담자 : 처음에 오실 때 시카고로 바로 오셨나요? 아니면 다른 지역을, 미국으로 처음 들어오실 때 어디로 먼저 가셨나요? 구술자 : 하와이로 왔지 그때는. 하와이로. 하와이 들려서 입국하고. 입국 수속하고 그러고 LA로 와서 LA서 내가 그때 라스베가스였거든. 라스베가스. 그러고 라스베가스에서 있다, 한 2년 살다가. 면담자 : 처음 정착한 곳이 라스베가스신가요? 구술자 : 그렇지. 면담자 : 그쪽에 그 아까 말씀하신 처남, 처남 분이 구술자 : 조뱅, 방종엽이 조뱅. 방상엽, 그 방씨들이 처갓집 식구들이 전부가 거기 있었거든. 또 우리 장인도 거기 이민 와서 있었고 장모님도 계셨고. 처갓집 식구들이 다 와버렸으니까. 그니까 내가 거리 갈 수밖에 없죠. 그러고 내가 인제 시카고로 온 것은 음, 77년에 내가 시카고로 왔죠. 면담자 : 한 일년 정도 후에 이쪽으로 오셨네요? 구술자 : 그렇지, 한 일년 몇 개월 있었죠. 면담자 : 시카고는, 그 라스베가스에 있을 때는 어떤 일을 좀 하셨습니까? 구술자 : 카지노에서 딜러. 잡이 좋아요. 카지노에서 토니온 블랙 잭 하고 또 키노 딜러도 하고 어 내가 또 그런 거는 소질이 있었잖아요, 그 전에 내가 잘 나갈 때, 이태원에서 잘 나갈 때는 자가용타고 어디를 댕겼냐면 인천가면 올림푸스가 있어요, 올림푸스 호텔이라고. 올핌푸스 호텔도 카지노가 있었고. 또 워커힐 가며는 워커힐에도 카지노가 있었어요. 그때. 워커힐 오픈해가지고. 그래서 그런 데 많이 놀러다녔지. 그건 많이 봤거든. 그니깐 인제 라스베가스는 그 도박도시잖아요. 24시간 오픈을 해요, 24시간. 호텔이고 카지노고 24시간 오픈이니까 일도 3교대로 돌아가요 8시간씩 3교대면면 3,8은 24시간이잖아. 3교대로. 거기서 그 잡이 괜찮아요, 괜찮았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노름을 하게 되잖아. 젊었을 때 그것도 해봤잖아. 한국에 있을 때 그걸 해봤잖아요. 했으니까. 근데 뭐 돈은 리밋(limit)이 있잖아요. 여기서는 월급 탄거, 월급 타는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땅덩어리 들고, 집은 다 두고 왔거든. 형제간들 벌라그러고 집도 주고. 그러고 몸뚱아리만 왔어요. 남들은 뭐 정리해가지고 오는데 그 뭐 내 조상들의 내 조국이잖아 그게 팔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대로 두고. 그딴 것도 없고. 난 미국가서 나이가 있으니까 뭐 새마을 운동한다, 한번 부딪쳐본다. 그러고 내 살던 집도 누님한테 주고. 다 그대로 놓고 왔어. 그래 여기서는 돈이 있어야 노름을 하지 노름을 못하잖아. 그게 인제 노름을 그렇다고 땅 팔아서 할 수도 없는 거고. 안 되겠더라고. 월급 타가지고 그 뭐, 이민 생활이 외롭잖아요. 그러니까 갈 데가 없잖아요. 24시간 오픈인대다 갈 데가 없으니까 거기서 일해가지고 팁도 받고 돈은 많은데 쓸 데가 없어. 그러면 가서 또 끝나면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거 한잔 하거든. 그러는데 안 되겠더다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여기서는 아이들을 내가 넷 데리고 갔잖아. 아, 거기를 떠나야되겠다고. 면담자 : 그때 들어가셨을 때 그 처가, 선생님의 처가 식구들 말고 한국인들이 한 어느 정도 거주를 좀 하고 있었나요, 라스베가스에서? 구술자 : 그때면 몇 천명된다고 했어, 한 삼천명. 라스베가스에. 면담자 : 다 이민자들인가요? 구술자 : 이민자들. 그때 이민자들이 누구, 어떤 사람이었냐며는, 나처럼 형제초청으로 온 사람 케이스는 많이 귀했어요. 솔직한 얘기가. 거의가 미국 사람들하고 결혼해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초청하신 분들이 거의였다고. 그때 한 2,3천명 된다고 들었어요. 면담자 : 그래서 인제 쫌 애들 교육도 있고 선생님 생활도 좀 해야되는데 아무래도 좀 그런 노름, 도박 쪽으로 좀 빠지는 것에 대한 위험성도 있고 쫌 해서 옮기시겠다고 생각을 하시게 됐다라는 거죠? 구술자 : 그렇죠. 거기서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것을 인제 내가 결심을 했어요. 근데 거기에다가 또 아버지나 형님들이 늘 그 편지를 하시는 거야.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산다고 했더니 늘 편지를 하시면서 너는 그게 아니다, 기도한다. 이러니까 그게 인제 그때 되니까 옛날 그 인제 이민 와서 외롭고, 많이 한국에서는 펄펄 나르고 그러다가. 자연히 좀 외롭고 인제 그러더라고 옛날 생각이 나고. 또 아이들은 커가지. 그래서 인제 거기를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그래가지고 인제 시카고로 왔는데. 면담자 : 시카고, 굳이 뭐 인제 가깝게 LA도 있었을테고 이렇게 했을 텐데 시카고로 이렇게 오시게 됬던 계기가 있으신가요, 왜 그때는 당시에 LA에 한인들도 많이 있었고. 구술자 : 아, 왜 또 시카고로 왔느냐? 나를 초청했던 그 조뱅이 여기 한국일보 지사장이었던 김용우?용우야, 친구가. 그때 한국일보 지사장이 김용운데 경기중학교 어, 그, 동창이거든. 김용우가, 한국일보 지사장이. 그래서 또 이 조뱅이 이민 초기에는 아마 여기도 좀 이 시카고를 좀 거쳐갔다고 그랬는데. 왜 조뱅이 나를 이리 보냈냐면 여기 그 자기 친구도 있고 또 자기가 여기다가 뭘 해놨냐면은 쪼그만 그 세탁소. 세탁소를 자기 친구 동생인가 뭐 아쉬운 소리를 해서 돈을 좀 해줬는데 뭐 세탁소가 차려가지고 한다고 하니까 돈을 좀 이민와가지고 빌려줬나봐. 그런데 인제 돈은 안 받고 하니까 회수를 못하니까 내가 인제 상의를 했지. 나는 여기들 떠나고 싶다. 아이들하고. 아이들 장래를 보고 해서도 여기를 떠나고 싶다. 인제 그런 상의를 하니까 그런 관계가 있으니까 여기 가서 그럼 세탁소를 해라. 면담자 : 오셔서 세탁소를 시카고에서 운영하신 거네요? 구술자 : 네. 그리고 이제 77년도부터서는 세탁소하면서 그때만해도 여기와가지고는 교회를 나간 거예요. 여기 와가지고. 아이들하고 인제 신앙생활을. 옛날로 다시 돌아간 거예요. 시카고 와가지고. 그래서 그 때만해도 인제 70년대에 여기 와가지고 인제 교회 댕기면서 세탁소하면서 그거 밖에 없죠, 여기서는. 그러고 인제 세탁소 하니까 먹고 사는 거는 둘이, 둘이 하니까. 이 프레스 하나 사람 쓰고 또 바느질하는 아줌마 파트 타임으로 와서 하고 와이프가 카운터 하고 나는 인제 세탁기 기계돌리고 대리는 사람, 다림질 하고 그럼 좀 고단해도 수입이 괜찮아요. 그래서 다른 거 하는 거 보담. 두 사람 인건비가 나오는데 세탁소 하며는. 남의 일 아니고 내일이니까 또 일요일 날은 쉬고. 인제 그거 좀 하면서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신앙생활 하면서 교회 인제 섬기고. 이민 생활 갈 데가 없으니까. 인제 그러다보니까 여기서 살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은 80년, 아, 79년. 가 있어봐, 박통이 79년 10.26 사태가 난거야. 여기 시카고 와서 살 때. 궁정동 사태가 났다는 것을 그걸 여기서 들었고. 그때 참 기분 묘하대. 여기서 그 소리 들으니까. 그랬는데 바로 이어서 또 12.12 사태. 같은 해. 뭐 그 막, 정승화 막 체포되고 전두환 소, 그 소장? 소장이 육광구? 육광구 뭐 보안사 보안사령관 쳐, 이게 막 나오는데 나오는데 흥분되더라고. 여기서 그런 소식을 들으니까. 이야. 이거 그 그렇게 해서 김재규가 그렇게 한건 좋은데 전두환이가 그렇게 하는 게 이게 인제 좀 걱정이 되더라고. 야, 이거봐라 이렇게 되면 이거. 이게 아닌데. 어, 그랬는데 그 다음 해에 80년 인제 광주사태가 터진 거여. 면담자 : 어떻게 처음 이걸 접하게 되셨습니까 5·18 구술자 : 어떻게 해서 내가 5·18을 알게 됐냐면 여기서 미국, 미국 그 아이들이 아이들이 미국 테레비을 보다가, 나, 아부지, 저기, 학교에서 들었다고 그러든가? 그래서 인제 5·18이 났다는 거를 접하게 됐지. 그래가지고 내가 서울에, 서울로 전화를 했어요. 양경식 목사라고 서울 매분데. 서울 동작동에 있는 누님한테 내가 전화를 했어요. 아니 여기서 들으니까 광주, 광주에서 그 무슨 큰 일이 났다는데 광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데 그러고 전화를 물어봤어, 어떻게 된 거라고 그랬드니 아 알았다, 그것 때문에 매부가 지금 광주 내려간다고 갔는데 장성 가서 장성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 있다고 지금 전화가 왔다. 그러시는 거야. 그러고 뭔 말을 할라니까 전화가 끊어져버렸어. 그때는 왜그랬냐면 전화가 직통이 아니에요. 교환을 여기서 미국에서 전화 걸면 교환해서 바꿔 줘야되요. 이렇게 연결해줘야되요. 그 전화 교환에서 그거를 받고 끊어버린 거예요. 갑자기 전화가 거기까지, 매부가 광주, 급하게 광주 간다고 가셨는데 장성 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서 길이 막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고. 그 얘기하고났는데 전화가 끊어져버리더라고. 그 인제 그 이후로 전화 연결이 안 되는 거야. 인제. 계속 전화를 해도. 그래서 인제 광주 사태가 터진 줄 알았어요. 그러고 그 사태가 인제. 또 그, 그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 마음은 솔직한 얘기가 정말 날개 있으면 날라라도 가겠는데. 뭐 만사를 제쳐놓고 그냥 가서 부딪치고 싶은데 그래서 전화 했는데. 응? 그렇지 않아도 매형이 광주 내려갔는데 장성 가서 못 가고 응, 길 막혀서 못가고 지금 장성 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고. 그러니 뭐 이거 미치지. 이야. 그때 또 참 그 마음은 너무 답답하고 아, 어떻게 그냥 할 길이 없더라고. 5·18 그렇게 광주에 났다는데. 면담자 : 그 당시에 시카고에서도 로렌스(Lawrence) 그쪽 예전에 한인타운 있던 데가 로렌스 지역인가요? 그쪽에서 뭐 항의시위 같은 걸 조직하고 했다고 하는데 혹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좀 알고 계신가요? 구술자 : 그때는 그런 단계가 아니었어요. 왜냐면 내가 시카고를 와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회 계통으로는 늘 그 내가 인제 남선교회도 맡고 그러면서. 내가 감리교 다니거든. 어, 교회 연합회니 뭐니 해서 남선교회 연합회다 늘 미딩(meeting)을 갖거든요, 한달에 한번씩도 있고. 이렇게 해서 쭉 보면 내가 시카고를 인제 파악을 하기에는 그때 80년대 그런 일이 났을 때에 뭐 로렌스에서, 우리는 이제 교회에서, 교회에서 목사님하고 할 길이 없으니까 기도회를 했지. 기도하자 해서 기도회. 장철우 목사. 그땐 아이, 철야기도 했어요. 그때. 철야기도. 몇 일을 철야기도를 했어요. 밤을 새우면서. 낮에는 일을 하니까 일 갔다 오면 모여가지고 밤에는 교회에서 철야 기도, 새벽에까지 기도 하고 새벽에 잠깐 눈 붙이고 나가고 한 며칠을 3일 철야 기도를 하자고 그래가지고. 면담자 : 이게 80년 5월이었었나요? 구술자 : 그러지, 광주 사태 나고 나서. 여기서는, 나로서는 할 길이 그거 밖에 없었어요. 또 교회에서 그랬고 교회에서도 그랬고. 많은 교회들이 그랬어요. 그래도 그러고 인제 거기가 형편이요, 여기 시카고 사정이 어떻게 됐냐면 내가 그때 파악을 했는데요. 시카고 와서 시카고를 인제 파악을 했는데 교회를 댕기니까 남선교회나 여선교회, 와이프는 여선교회를 하고 교회 연합회 여선교회, 남선교회를 통해서 시카고를 이렇게 판단하기를 내가 어떻게 판단을 했냐면 이, 또 내가 다른 정보도 입수를 했고. 군사 박정희 때서부터 시카고에다가 교두보를 내린 거예요. 미주 거점 지역을 시카고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왜냐며는 LA도 호남 사람들이 많고 뉴욕도 그렇고. 호남사람들이 주도를 했어. LA나 뉴욕은. 아마 호남이 우세하고 LA, 뉴욕도 그러고. 근데 이 시카고가 그러지 못해서 5.16 정부에서 시카고에다 교두보를 내렸는데 어느 교회 어느 목사님이 미국 온지 오래됐거든, 50년대 자유당 때 미국에 오신, 미국 선교사를 통해서 그런, 내가 누구라고 지명 안 하는데 그 교회 그 목사님이 거기에 중심, 중심이다. 그 교회가. 그렇게 내가 정보를 입수를 했지. 그래서 시카고에다가 5.16 군사 정부 때서부터 미국을 그, 미국을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 그랬거든. 근데 그 후로 그 광주 사태가 나고 79년 10.26 사태가 나고 12.12 사태가 나고 광주 사태가 나고 이렇게 됐잖아요. 이렇게 됐는데 그런 상황이야. 시카고가. 인제 그 후로도 확인이 됐지만. 그런 것으로 내가 파악을 했다고. 내 정보 수집으로는. 그런데 그때는 인제 그렇게 지나가고 광주 사태 후로 인제 김대중 선생이 이렇게 됐잖아요. 그 사형구형까지 받았잖아요. 그 5.16때 71년 참 그, 뭐야 그 뭐야, 면담자 : 71년이요? 구술자 : 내가 75년 내가 이민 오기, 김대중선생이 그 일본 가서 잡혀가지고 온 게 내 이민 갔다 온 이민 떠난 후죠 아마. 면담자 : 그때가 72 구술자 : 전이었나? 면담자 :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73년 구술자 : 전이었는가? 박통때 그랬으니까. 맞다. 71년 대선 끝나고 일본으로 가 있었거든. 그때 험했거든, 그때. 일본으로 가있었거든. 그래 일본서 그때 이래 해가지고 배타고 이렇게 오는 거를 헤리콥터 미국 FBI에서 알고 헤리콥터 띄워가지고 만류했다. 그때는 그럼 내가 이민 오기 전이야. 71년 대선 아마 끝나골꺼에요. 맞아요. 그러고 여기는 80년 사태 나고 또 그때 시카고에서의, 글쎄 그거는 내가 못 들었어요. LA에서 뭐 로렌스에서 모여가지고, 모여서 했다면 호남사람들이 어디 술집에서, 술집에서 술 한잔 하고 울분을 터뜨렸겠지않았나 하지 않았나. 면담자 : 한국인, 당시 유학생들을 좀 중심으로 좀 그런 활동들을, 항의 집회 같은 것들을 하러 뭐 5월 한 마지막, 어느 날짜는 자세히 모르겠는데 그때 좀 한국, 여기 왔던 한국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술자 : 그때는 유학생들이 없죠. 없어요. 조기유학생이라는게 조뱅, 내 처남, 그 한국일보 사장 김용우, 그 몇몇이지. 그만한 유학생들이 여기가 면담자 : 아무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선생님은 잘 좀 모르시는 부분이네요. 구술자 :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벌써 뭐 뭐 시위를 했다구요? 면담자 : 항의 집회를 뭐, 로렌스 어디 식당, 식당? 식당 주차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은행 주차장. 구술자 : 은행 주차장?그런 일이 있으면 벌써 그때만 해도 한국일보가 있고 조선일보가 있었거든요.여기 일간지가. 한국일보 조선, 조선은 인제 없어졌지만 그때는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도 그때 있었을거야 아마. 중앙일보가 그후로 들어왔나? 하튼 한국일보는 처음부터 있었으니까. 근데 그런 거 나면 신문에 나거든. 그믄 여기서는 그때는 신문이 모든 정보의 그거였는데. 나는 그런 모르는 사실, 있었는 걸 모르는데. 그거는 내는 모르겠어요. 면담자 : 네. 그럼 선생님은 쫌 이렇게 선생님이 다니시던 교회 내에서 그 5월 한 3일정도 철야기도회를 같이 하고. 그때 쫌 기도회를 같이 진행, 좀 기도회에 참석하셨던 분들, 같이 기도회를 하셨던 분들이 좀 많이 되셨나요? 철야기도를 같이 하셨던 분들이 숫자가 좀... 구술자 : 그때 그 장로님들하고 목사님하고 그 교회 임원들 뭐 많아봐야 한 60명? 철야기도니까 그렇게 많이 참석 안 하죠. 60명 내 생각에는 장로님들 권사님들하고. 그때는 내가 장로 아니었으니까. 그때는 내가 집사였으니까. 면담자 : 선생님은 시카고 호남향우회에 참여를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구술자 : 내가 얘기 할께요. 호남 향우회는 그러고 인제 80년대는 그렇고 무슨 일이 있었냐면 81년도에 김대중선생이 미국 망명을 했잖아요 81년도엔가. 뉴욕으로 먼저 왔을 거예요. 그러고 82년도에 에, 시카고에 와서 여기 저녁에 여기 무슨 고등학교? 고등학교 강단에서 강연회가 있다고 그거는 내가 알았지만 나는 그때 이 투잡 뛰었거든. 세탁소하고 또 밤에는 나가서 청소하고. 그런 때고. 근데 나는 그때 그 강연회는 참석 못했어요. 그 얘기는 내가 듣고 그때 김대중 선생님이 오셔가지고 통화는 했어요. 뉴욕에 계실 때 여기 오신다고. 전화를 주셨다거라고 미국 오시면서 그 전화번호 다 형님들한테 미국에 있는 사람들 다 받아갖고 왔겠죠. 근데 그때 내가 나는 그때 시카고가 아니고 부페이지 카운티거든. 시카고 속하지 않고 써버브(suburb: 교외). 거기에 누가 살았냐면 김종운이라고 목포 사람이에요. 김종운이라고. 내 나이 아마 될 거예요. 내가 어, 대성동에서 그때 중학교 다닐 때 걔가 목고 댕겼든가 아마 그랬으니까. 근데 여기서 내가 만났거든. 근데 그때 김대중 선생님이 여기서 이틀인가 아마 계셨을 꺼에요, 내가 알기로는. 이틀, 모르겠어. 내가 확실한 건 몰라. 그때 내가 그 뵐 시간이 없었고. 또 통화하면서 제가 그랬어요. 내가 이거 미안한 얘기지만 뉴욕에 계실 때 여기 온다고 통화하실 때 내가 그랬어요, 선생님 저는 지금 미국 와가지고 애들 내가 넷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넷 데리고 왔는데 내가 지금 낮에도 세탁소 해야 되고 밤에도 또 청소 나가니까 또 애들 데리고 식구들하고 다 나가거든요. 금세 나가고 큰 거 한 두 시간이면 해 치우니까. 사이드 잡이니까. 그러고 그래서 쫌 그러고 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지금 여기 와서 이 아이들하고 먹고 사는 게 나는 이거 해결하는 게 저 지금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내 가장 시급한 문제고 이 아이들 내가 책임지는 것이 내 임무라고. 현재로서는 그것이 내가 애국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랬어요. 이것이 내가 애국이라고. 얘네들이, 이제 나는 애들한테나 기대를 해야지. 뭐 미국 와서 확실히 내가 더 느낍니다. 나는 애들을 위해서 하나의 밑, 썩어주는 밑거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저는. 내가 그랬습니다. 정말 죄송하다고 시간도 없고. 시간이 없다고 그랬어요. 참여 못합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신문을 보니까 김대중 선생님이 그 강연회를 하셨는데 신문 내용에 그러, 김대중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지금은 그분 어록이 됐어요. 여러분들이 미국에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자녀들 교육에 열중하고 하는 것이 애국하고 또 미국 시민권자로서 보답하는 거라고. 그런 말씀을 강연 때 하셨다고 신문 기사에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아, 선생님이 내가 한 얘기를 그래도 받아, 이해해주셨구나.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을 했죠. 그러고 내가 여기서 인제 산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때 신앙심이 많이 깊어져버렸어요. 이민 와가지고. 그전에 잃어버렸던 신앙심을 전부 회복하게 됐어요. 더군다나 시카고 와가지고. 77년도부터 시카고 와가지고 형님들 편지, 아버지 편지, 누님들 편지. 그게 교회 열심히 봉사하고 또 이민 생활에 할 게 없잖아요 교회밖에. 그래서 인제 많은 은혜를 받고. 정말 그렇게 인제 신앙생활을 했는데. 83년돈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시카고에서 한인회장선거가 있었어요. 이거 지금. 기록을 보면 나오겠지만 83년돈가 4년도 아마 그때에요. 내가 이민오가지고 처음으로 그 한인회장 선거가 경상도 하고 전라도하고 맞대결이 됐어요. 면담자 : 아, 83, 4년에요? 구술자 : 4년돈가 그때 그럴 거예요. 근데 그때 당연히 전라도 후보를 밀게 되잖아요. 뭐 이름이 거론돼서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그 경상도하고 전라도 맞대결이 돼서 아주 크게 붙었어요. 근데 내가 그 후보하고 어즈 식당에서 뒤에 그때 뉴코리아 식당이라고 있었어요. 여기 링컨에. 그게 뒤에 별실이 있었어요. 식당에서 거기서 정해림 후보에요. 그게 호남 후보였어. 그 강성호가 뉴코리아식당 사장인데 그분이 오산학교 내 일 년 선배거든. 황해도 사람이야. 근데 이제 정해림이하고 가까워. 그니까 정해림이한테 나를 소개를 하면서 별실에서 이렇게 선거 할 때 야가 많이 도와줄 거라고. 이렇게 해서 인제 딱 처음 이렇게 접촉을 시켰거든. 근데 그거를 인제 쩌기 반대 박중구, 경상도 후보 박중구, 그쪽 그 사람이 인제 그걸 봤어. 그러니까 인제 또 내가 정해림이 뭐 선거 돕는 사람이 되뻐린거지. 그래서 선거에 져뻐렸잖아요. 한 3백표? 280표든가 그때? 3백표라초. 그때 한 5,6천명이 투표자가 할 것이다 했는데 그래서 3천표면 이긴다 했는데 뭐야, 저쪽에서 동원을 너무 많이 해버렸어요. 조직적으로. 아주 조직적으로. 그러니까 정해림이는 인제 개인 돈을, 정해림이도 그때 돈 잘 벌었지만, 개인 돈으로 했지만 내 생각에 저쪽에는 정치적인 자금이 있었어요. 뒤에. 알아요? 이미 그 사람들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 60년대 혁명 나오고서부터 여기가 그 사람들 교두보 내린 데거든, 시카고가. 그러니까 벌써 70년대 지나고 80년대니까 완전히 저 사람들 세상이잖아요. 시카고가. 시카고가 그런 데에요. 그런데 면담자 : 정해림이라는 분은 여자분이신가요? 구술자 : 남자. 면담자 : 해림 구술자 : 해림. 그래서 이게 져버리니까 좀 열받더라고요. 그래, 또 뭔가 그래도 호남사람들이 규합해서 한인회라도 좀 장악을 해야되겠는데. 그래서 내가 그때만 해도 팔팔할 때니까 지금은 70이 넘었지마는 반란을 일으켰어요. 무슨 반란이냐, 써버브에다가 한인회를 맨들었어요. 써버반 한인회. 시카고에서 다 알아요. 써버반 한인회를 조직했어요. 시카고 한인회를 우리는 같이 안 한다. 어차피 이렇게 되면 저 사람들 세상이 되뻐리잖아, 시카고가. 그래서는 써버반 한인회를 조직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래가지고 이, 내가 이사장을 맡고 박문서를 회장으로, 한인회장으로 추대하고. 또 내가 이사장 맡으면서 또 민원봉사실장까지 맡았어요. 그래가지고서는 바로 그 해에 그해 추석에 내가 뭘 해뻐렸냐면, 내가 이걸 아이디어를 낸 거지. 추석맞이 경로대잔치. 그러니까는 이게 미주 이민사회에서 추석맞이 경로대잔치는 미주 이민사에서 처음이야. 이민사에. 이거를 내가 생각을, 왜, 효 사상은 우리 동양사상이고 유교사상이고. 종교 사상보다도, 효 사상은 기독교 사상이기도 하잖아요. 또 내 가훈이 충효미동입니다. 내 지금도 충효미동, 충성 충자, 효도 효자, 아름다울 미자, 아이 동자. 충과효는 아름다운 아이동자 거든 아름다운 어린 아름다움이다, 깨끗한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그걸 했는데 신문에 광고 전면광고 때리고. 추진을 했는데 준비위원장 맡아가지고 추진을 했는데, 시온 장로교회 저 ○○○ ○○던 141111조철규01_01:39:01 시온 장로교회를 빌려가지고 했는데 그때 한 천여명 모였어요. 이, 어르신들. 또 일반인들, 교인들. 그때 노래자랑, 노래자랑하고 또 땐스파티하고 또 어르신들 국악에 맞춰서, 그때 뭐 여기 그런게 있었거든요. 고전무용. 그런 분들 와서 고전무용 춤도 추고. 북, 장구 치면서 그래서 노인들 덩실덩실 춤추고. 그래서 그때 신문에 일면으로, 그 신문 지금도 그런 기록은 다 가지고 있지 다 있지, 내가. 요 다음에 자서전 쓰면. 그러고 인제 뭐 도네이션을 에, 한인 가게에서 한 백 오십 업체? 소소한 가게에서 한 백오십명이 도네이션을 받았지, 기부를. 뭐 가게 하는 사람들 안 하는 사람들. 뭐 직장 가진 사람 뭐 가게 한 사람들은 뭐 물품으로 내놓고. 처음으로 시카고 역사뿐만 아니라 미주한인 역사상 처음으로 그런 잔치를 도네이션 받아가지고 상품으로 주고. 그때 텔레비전이다, 뭐 그릇이라든가. 생필품. 처음한거지 처음. 그래서 성공을 시켰죠. 그니깐 인제 시카고 한인회가 납작하게 되버렸거든. 면담자 : 그때 써버반이라고 아까 말씀하셨죠? 거기에는 한인들이 몇 분정도 계셨나요? 구술자 : 써버반 한인회 면담자 : 계셨나요? 구술자 : 그때는 이미 80년대니까, 70년대 십년은 로렌스에서 살고 뭐 했지만 다 돈벌어가지고 집 사가지고 전부 시외로, 시외거든. 여기는 시카고에 안 속할 거야,아마 여기가. 여기는 그린뷰(Glenview)? 다르지, 다른 실껄 아마. 시카고에 속하나? 여기도 카우니(County)가 아니지. 여기는. 여기도 시카고. 시카고만 이렇게 되어 있고 인제 뭐 스코키(skoki). 에반 스톤(Evanston) 전부 다른 도시잖아요. 그래서 서쪽으로 해서 교외지역을 써버브라 그러거든. 그니까 시카고만 빼놓고 시카고 한인회니까 교외 지역을 통털어서 써버브라고 그러거든, 써버브. 써버브라고 그러거든. 그래서 써버반 한인회를 인제 조직을 했지. 그래서 이사가 한 이십 명 모였어요, 이사로. 이사로 한 20 영입하고. 그래가지고 그 행사를 때려버리니까. 시카고가 한인회가인제 쏙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2년 남짓하고 문을 닫았어요. 우리가 그 빌라 파크에다 한인회 간판까지 다 걸고 사무실 내고 사무실 개소식 할 때 각 교회에서 뭐 다 참여하고 목사님들이, 화분 보내주고. 그런 열기가 없잖아 있잖아요. 그 시기기 그런 험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 속에는 다 이런 게 있다고 더군다나 목사님들. 그래도 목사님들, 신앙생활하는 목사님들은 이 속에 바른 게 있잖아요. 교단을 떠나서. 더군다나 또 감리교가 그런 게 심해요. 감리교가. 그래서 인자 화려하게 이러게 출범을 했는데, 또 그렇게 때려버리고. 왜 문을 닫았냐. 이 박문서라는 사람이 여기 와서 만났어요. 근데 그 학교 디스트릭(District: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인컴도 괜찮했고, 고정인컴이고. 교육공무원이지, 말하자면, 한국으로 말하자면 선생은 아니지만 학교 그 한, 45 스쿨 디스트릭 포디파이브가(45st. School District) 학교가 한 너댓개 되거든. 중학교, 고등학교 뭐 해가지고 이 건물 관리를 하는 책임자였거든. 그니까 거기 일하는 사람들도 몇십 명 되고. 그니까 그라고 또 시간도 있고. 걔를 인제 회장을 시켰는데. 내가 교회에서 만났거든. 왜 그만 뒀느냐. 나중에 털어놓은 거예요. 나중에. 자꾸 못 하겟다고 못하겠다고. 결국은 인제 요점이 뭐냐면 새벽 한 3시 되면 전화가 온대요. 그때는 셀폰 없어, 아마 그때 셀폰 없었어요. 내 생각에는 전부 여 홈폰이지 새벽 한 3시 되면 전화 와가지고. 너 오래 살고 싶어? 너는 철판 깔았어? 쑤시면 안 들어가? 이러니 잠자다 말고 전화 받으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니까 그런 말을 못한거야 처음엔 나한테도. 얼마나 얘가 공갈을 받았는지 뭐 너, 이런 말 발설하며는 더한 공갈도 했겠지. 그니까 얘가 참다 참다 못하니까 그 부인이 나한테 말한 거야. 아무래도. 그걸 실토를 하는거야. 이래서 정말 더 이상 못하겠다고. 어떻게 이러는데 하겠냐고. 알아요, 무슨 얘긴지? 그러니 어떻게 해 못하겠다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 이미 그게 소문이 퍼졌다. 그런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거예요. 자기는 말 안 한다고 했지만 그 소문이 퍼진 거야. 나한테는 말 안 했지마는 옆에 사람들한테는 상의를 했겠지.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이 그러는데 어떡해요 더 이상 버틸 수 없고 다른 사람 할 사람도 없고 또 다른 주위 사람들한테도 그런 짓거리는 안했지만 그 포섭을 했나봐요. 그 주위의 임원들한테. 야, 시카고 한인회가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깨버리면 뭐가 되냐. 인제 그런데다가 나중에는 목사님들도 그러더라고요 이런 상황에서 뭐 더 이상 뭐 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 그니까 시카고 한인회하고 그냥 같이 좋게 지내는 걸로 나가는 게 좋겠다. 이렇게 해서 2년하고 문을 닫고 나는 인제 시카고 한인회로 합류하게 됐죠. 그래서 시카고 한인회에서 내가 이사회 간사장을 맡았어요. 어, 그러니까 86년서부터 90년? 면담자 : 그, 예. 선생님 이야기를 쪼끔 더 집중을 하기 위해서 그 제가 질문을 다르게 쪼끔 드려볼게요. 80년에 선생님께서는 5·18과 관련해서는 이제 그때 당시 기도회에 참석을 하고 그 이후에 김대중 선생님이 여기 인제 미국에 그 오셨을 때도 이렇게 직접 이렇게 만나뵈지는 못했다 말씀하셨는데 그 이후에 인제 선생님께서도 여러 뭐 통일운동에 관여를 하시고 그리고 인제 한인회뿐만이 아니라 통일 운동에도 관여를 하시고 또 5·18이 매년 시카고에서 기념 추모 행사 그런 게 좀 진행된 것으로 좀 알고 있는데요. 좀 그 부분에 좀 포커스를 맞춰주셔서 5·18, 지속적으로 이렇게 5·18 추모 행사를 했던 것에 부분에 대한, 대해서 선생님이 좀 어떤 역할, 담당하신 역할이 있으시면 그 부분하고 그리고 지금 뭐 6.15 공동선언 뭐 그쪽 상임위원장도 맡으셨고 통일운동도 지속적으로 지금 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쫌 역할을 하셨던 그 부분을 좀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구술자 : 그리고 그때는 그 이후로 80년대는, 70년대 그렇게 지나고 80년대에 뭐 완전히 그때는 80년대 암흑이었죠. 80년 그, 그 당시는 뭐 완전히 무슨 활동 할 수도 없었고. 그 사람들 세상이었으니까. 그러고 호남 향우회가 이 90년 들어서면서 사실상 그 저 활동을 못했습니다. 이름만 있었지. 참여를 안 해줬어요. 그러고 김대중 선생 왔다 가시고 나서 83년도부터선가 인권문제연구소하고 연결이 됐어요. 인권문제연구소하고. 그래서 인권문제연구소 시카고에 인권문제 연구소가 그때 내가 시작한 걸로 되고 내가 그때 인권문제연구소 관여한 게 그때서부터에요. 83년서부터 내가 인권문제연구소 관련했나봐요. 음. 그러고 그러고 인제 그 후로는 뭐 궈 그 사람들 세상이었고 한인회고 뭐고 전부 그 사람들 세상이었고. 나도 한인회 한 4년 관여하다가 인제 그냥 나왔고. 그리고 인제 다시 이제 시작하게 된 거는 인권문제연구소가 그대로 계속해서 월례회로 만나고 이렇게 그 통로가 됐고. 그러고 93년도든가? 한국에 그때 대선이 있었어요. 93년도로 넘어가야 되요. 88올림픽, 한국에서 그때 86년, 6.29 선언이 있었고 그러고 노태우로 넘어가서 88올림픽을 치렀죠. 그러고 그때 88 올림픽 치고 전두환 때가 올림픽 되기 전까지 80년대 초반은 전두환 세상이었고 그러고 80년대 후반에서 92년도까지는 노태우 세상이었거든요. 근데 그때 전부 인제 이 향우회고 뭐고 여기 뭐 향우회 회장했다는 사람들 뭐 했던 사람들 그때 뭐 향우회 회장할 때 김대중선생이 80년대 와서 뭐 했다는 분들, 솔직한 얘기로 전부 다 회색돼버렸어요. 전부 회색돼버렸어요. 다 저쪽 편으로 다 가버리고. 이렇게 인권위원이다 남은 사람들은 몇 사람 안 된 걸로 알고 있어요. 별로 활동도 뭐 없었구요. 그래서 다들 그때 뭐 평통들 개입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 가지 참 여기서 짚고 넘어갈 거는, 내가 한인회 이사회 간사장 할 때, 80... 86년도던가? 아까 이사회 간사장 할 때 한 4년 했는데 그때 내가 평통 자동 패스로 평통 위원이 될 수 있어요 한인회 이사장, 부이사장, 간사장, 한인회 회장, 부회장, 사무국장. 이 여섯 명이 자동패스거든. 근데 그때 한인회하고 평통하고 연석회의를 했어요. 총영사가 와가지고. 골프대회, 골프대회를 하고 저녁 디너 먹으면서 총영사, 평통, 한인회. 한인회 주최로 해가지고 한인회 주최니까 내가 그때 준비하고 해야 되잖아요. 그때 신라식당이라고 있었어요. 지금 없어졌지만. 평통위원들하고 한인회 임원들하고하는 자리에서 내가 술 한잔 먹고 평통위원 된 거지, 자동 패스니까 들어가야되는 거지. 그게 내가 그랬어, 총영사님한테. 이승곤 영사, 내가 잊어버리지도 않아, 이승곤 총영사. 그때 그랬어. 평통이라며는 똥통이라고 그런다. 옆에만 가도 냄새 난다고 그러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도 옆에만 가면 냄새날 것 같다고. 어. 나는 한인회 이게 간사장이기 때문에 자동케이스로 평통위원이라고 그러는데 나는 평통위원 안한다고 못한다고. 그런 발언을 해버렸죠. 술 이렇게 먹고. 그러니까 이게 난리가 나 버린 거예요. 그러고 그때 인제 한인회를 내가 나왔죠, 자동으로.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내가 왜 그걸 못 봤냐며는, 남들은 그걸 뭐 호남 향우회장이고 이사장이고 못 들어가서 야단인데, 솔직한 얘기에요. 전두환이가 광주 5·18 사태, 광주 짓밟아놓고 평통 맨들어 버린거 거든. 평통 맨들어가지고 감투 하나씩 준거 아닙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내가 받냐고. 내가 시카고로 와서 76년에 시카고로 와서 내가 신앙생활 한 것도 광주사태가 나서 내가 다시 교회 가고 신앙생활 한 거예요. 어. 예수님이 따로 없더라고.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이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그러는데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이 뭐에요 예수님이지. 내가 그래서 이 광주사태 이후로 신앙생활을 한 겁니다. 내가 어떻게 그 평통을 받아. 그래서 내가 한인회 간사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나 그거 안 한다고. 그게 그래 난리가 나 버린 거죠. 그래 그게 영사관에 그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그러더라고 빨간 딱지가 올라와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고요 시카고에 왔는데 이 조직들이 있어가지고요 내가 그 71년 대선 때에 뭘 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알고 있었어요. 나는 몰랐는데. 네. 그러고 그러고 이제 80년대, 90년대, 93년도엔가 김영삼이하고 김대중 선생하고 대선에 그때 뭐 해가지고 또 떨어졌잖아요. 그러고 정계은퇴하신다고 그러고 유럽으로 떠나시고 그런 사태가 나버리니까 인제 ○○났죠. 141111조철규01_01:55:23 어. 그러니까 여기서는 다 인제 죽은 목숨이 된 거예요. 그니까 이 속에 남는 거는 예, 분한 거 밲에 남은 게 없죠. 어. 내 젊었을 때 나이 30에 어떡하다가 정말 내 마음, 또 내 마음이 있으니까 형님들이 원하고 해서 참여해서 뭐 그 뒷바라지 했는데 그걸로 해서 내가 뭐 좀 뭐도 좀 받았고. 그러니까 이 속에는 그것밖에 없죠. 그러니까 신앙생활 할 수밖에 없어요. 그거를 교회 가서 우는 거예요. 우는 거예요. 새벽 기도할 때 우는 거예요 생각만 하면 우는 거예요. 그러고 아이들하고 그런 얘기 하게 되죠. 아이들이 인제 이런 얘기할 데가 없으니까. 그때 아이들이 커서 인제 중학교, 고등학교 댕기고. 그러다가 뭐, 그러다가 김대중 선생님이 예, 다시 정계에 복귀했어요. 그래서 97년 대선 치었죠. 근데 96년에 아태평화재단 설립한다고 그런 연락을 받고 그때 아태평화재단 후원회 후원이사가 됐죠. 그때 내가 안 할 수가 없죠. 다시 와서 하신다면야, 응? 눈이 번쩍 뜨이잖아요. 그래서 그때 인제 아태 평화, 그때 내가 그 후원이사 위촉장 받은 게 지금도 있죠, 그대로. 그러고는 이제 97년에 대선에 나오신다고 그러니까 인제 그때는 다들 안 된다고, 그때 김영삼씨한테 떨어져 안된다고. 다들 그때는 없었습니다. 솔직한 얘기가. 근데 아니다, 이건 마지막인데 마지막인데 뭐 이판사판이지 떨어져도 그뿐이고 마지막인데 최선을 다해서 한번 이길밖에 없다 인제는. 그래서 그때 대선 후원회를 조직을 했어요. 인권위윈이 그때 주축이 되가지고 했는데 대선후원회장에 이홍미변호사입니다. 이홍미 변호사. 목포 사람이에요. 우리교회 같은 교인이에요. 에즈베리 감리연합교회 교인이에요. 또 그래서 내가 이홍미 변호사를 내가 사정을 했죠.누구 맡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때 인권위원회 배준영이가 있었고, 배준영이가 인권위원회 있었고, 여기 인권문제연구소 배준영이가 그때 소장이었을 때. 그니까 배준영이도 또 내가 얘기하니까 그렇게 했고 삼고초려를 했지 나도 그러고. 내가 또 같은 교인이니까 해서 대선후원회를 맨든거예요. 그니까 이제 후원회로 모였을 때 그때 뭐 호남향우회 회장 했다 뭐했던 사람들 거기 하나도 안 들어왔습니다. 그땐 들어올 사람이 없었어요. 뭐 평통도 부회장까지들 하고 다 감투들 쓰고. 대선후원회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그때 인제 오유광씨가 인제 여기 한번 다녀갔죠. 대선 전에 오유광씨가 한국에 김대중 인제 후원회 회장 맡았었거든요. 그래서 한번 모임 가졌어요. 모임 가지고 사진 찍고 모임 갖고 디너 한번 같이 먹고 그때 인제 오유광씨랑 후원회 조직해가지고 그 후원회 결성 한국 오유광씨가 가서 했죠. 그러고 인제 후원회 대변인을 맡았지. 그래서 이제 하는 일이 뭐였냐면 남들은 몰라요 남들은 모르는데 그 뭐 인쇄물 만들고 그런걸 전부 우리 교회에서 했거든 내가 그런 걸 다 했지. 우리 교회 그 컴퓨터 같은거 다 있잖아요.그때만 해도 컴퓨터 쓸 때니까. 97년도만 해도. 막 인쇄물이고 뭐고 전부 인제 교회에서 카피 맨들고 다. 한거죠. 근데 이제 마침 우리 교회가 이회창 후보의 후원회장 장기남이도 우리교회 교인이에요, 경기 출신인데. 그니까는 우리 교회, 교회가 대선후원회가 이회창 후보 후원회장도 우리 교회에가 있고 비프음 면담자 : 잠시만요, 선생님 <이후 영상 없음> 구술자 : 그리고 인제 대선 후원회가 조직되기 전에 사전조직으로 아태, 아세아, 뭐야 아태평화재단 그게 여기가 조직되어 있죠 시카고에가. 아태평화재단 후원회. 그게 인제 97년 봄에 그게 조직이 되고 거기에 또 내가 그, 내가 조직하고 어, 수석부회장과 대변인을 내가 또 맡았죠. 중요하잖아요 대변인 항상 언론 상대해야되고 그러니까. 그러고 인제 97년 그때 가을에 후원회가 인제 조직이 되고 먼저 아태평화재단 후원회가 먼저, 아태평화재단이 먼저 여기도 조직이 된 거죠. 한국에 함과 동시에 내가 후원 이사 위촉장 받고 그러고 인제 시카고에 와서 조직을 한 거죠. 그러고 인제 후원회가 가을에 조직 되고. 면담자 : 선생님 그 쫌 다른 질문을 좀 드릴게요. 그 5·18이 일어나고나서 인제 81년부터 시카고에서도 5·18 관련된 추모제를 매년 꾸준히, 어찌됐건 한해도 빠지지 않고 진행을 해온 걸로 알고 있거든요. 5·18 민주화운동 기념추모제 뭐 해가지고 시카고에서 진행을 해온 걸로 지금까지는 진행해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알고 계시는 내용들이 있나요? 구술자 : 내가 알기로는 그 전에는 내가 모르고, 이 국민의 정부 들어서고 나서 들어서고 나서 그러니까 그 한인회에서 한인회에서 그 기념식을 했는데 그 전에는 내가 잘 모르겠어요. 면담자 : 그니까 이제 김대중 이게 이제, 5·18 특별법에 의해서 국가 기념일로 인제 재정이 되고 나서부터는 뭐 인제 한인회도 참석을, 한인회 주최로 이걸 하기도 하고 뭐 했었는게 그 이후에는, 그 이전에는 그니까 이게 아직은 어, 그 국가기념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 여전히 폭동, 폭도, 사태로 인식이 됐던 시절에는 어, 한청련 중심으로 관련 행사를 좀 전개를 했던 것 같애요. 구술자 : 한청련? 민통련이 있었죠. 민통련? 한청련이 민통련인가? 면담자 : 미주 한청련. 재미 한청련 중심으로 구술자 : 그때 민통련이 어떻게 생겼냐며는 김대중 선생님이 81년도 망명왔었을 때 뉴욕에 계실 때 아마 그게 조직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고 바로 이어서 인권위원이. 나는 인권위원으로 그 연락을 받았거든요. 그러고, 민통련이라고 뜰거예요, 그때 민통련이라고 했는데. 그때 김대중 선생님이 그때 의장직을 수락 안 했다고 그런 얘기를 내가 들었습니다. 면담자 : 그러니까 민통련까진 아니었었고 그 남한 정부에 의해서 좀 반국가 단체, 이적 단체로 그렇게 좀 낙인이 찍혔던 미주 지역에 있던 한청련 중심으로 5월 관련 그런 추모 행사를 계속적으로 좀 지속을 해왔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구술자 : 글쎄 그 얘기는 내가 잘, 거기는 멤버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면담자 : 그 이후 국민의 정부, 인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나서부터 이게 공식적으로 한인회에서 좀 맡아서 이렇게 진행을 하고 5·18 관련 행사를. 지금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요? 구술자 :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원래 그 영사관에 옛날 또 문화원? 문화원, 교육원? 뭐 이렇게 영사가 나와 있고 아마 문화 교육 마당집이라고 그러죠. 지금은 마당집이라고 그러는데 그 전에는 교육문화원이라고 그랬던가? 그런 명칭이었죠. 그래서 거기서 인제 그 주최를 하고 호남향우회하고 같이 아마 주최를 하는데 그때서부터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한인회에서 하는 거는. 면담자 : 선생님은 호남향우회에 안 들어가 계십니까? 구술자 : 인제 그 다음, 인제 그니까 대선이 그렇게 끝났잖아요. 대선이 인제 생각지 않게 당선이 됐잖아요. 그때, 그때는 호남향우회가 활동이 없었어요. 명예만 있었지. 근데 나는 대선이 끝나고 나서 바로 그 축하광고를 나가야 하는데, 준비를 했는데 이렇게 해서 호남향우회 회장 이름낼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호남향우회가 뭐 이렇게 말하자면 해체되다시피 해뻐린거죠, 한 10여년 동안을. 대선 끝나고 나서 98년에 다시 향우회를 다시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때 처음으로 부이사장을 내가 맡었죠. 호남향우회가 그때 다시 살아난 거예요. 면담자 : 그 전부터 그럼 활동은 호남 향우회가 활동은 거의 미비, 언제 호남 향우회가 처음 시카고에 만들어지게 됐었나요? 구술자 : 그거는, 나는, 내가 조직한 것은 대선 끝나고 나서 해체되었던 한인회를, 활동못하고 있던, 완전 해체돼버렸으니까. 회장이 없었으니까. 대선 끝나고 나서 다시 복원했죠, 호남향우회를. 면담자 : 예전, 예전부터 호남향우회가 한번 설립은 됐었는데 구술자 : 있었지 있었지. 면담자 : 중간에 활동을 해오다가 뭐 활동을 못했던 시기기 십여 년 정도 있었다라는 말씀이시죠? 구술자 : 십여 년 가까이, 내 생각에는 십여 년 가까이 뭐 유야무야 다 이름만 걸어놓고 향우회라 회장이라 했지마는 활동을 안 했어요. 못했어요. 안 했는지 못했는지 전부 뭐 평통 회원들 되버리고. 평통 회장 뭐 부회장, 회장은 다른 사람이고 부회장도 다 공, 부회장은 여럿이니까.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 호남 향우회 이사, 이사장? 그... 구술자 : 다시 복원하고 내가 부이사장. 면담자: 부이사장. 그때가 97년인가요, 그럼? 구술자 : 98년에 했죠. 예. 새로 호남 향우회가 다시 시작한 거예요, 그때서부터. 그러고 이제 뭐 그때는 참 그 뭐야 그 대선 끝나고 인제 대통령 그 취임식 있잖아요, 대통령 취임식, 98년 6월달에 그때 인제 시카고에서 참여 했던 사람들 한 이십여명 갔죠. 참석 했고. 그때 인제 내가 인수위원회에 들어갔죠. 삼청동에. 그때 인제 아태평화재단 두 멤버들하고 들어갔는데. 그때 내가 뭘 해가지고 갔냐면 아태평화재단 계통으로 해서 나한테 연락이 왔어요. 대통령 시카고 방문 청원서 그거를 만들어라는 거를 연락을 받았어요. 대통령 시카고 방문 청원서. 그래 왜 그러냐 했더니 그 전에는 대통령이 이렇게 오며는 이렇게 그냥 가겠다, 이렇게 미국 승인 받아가지고 아마 시카고를 방문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혹이 있었다며는 김영삼 대통령은 왔다 갔어요, 한번. 근데 그때는 그런 방문 청원서가 없이 아마 그런 뭐가 있나봐요. 그래서 그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걸 급하게 맨들었는데 한인회 가서 한인회장, 이사장 또 중요 단체들 그때 중요 단체가 뭐있냐면 재향군인회, 또 상공회의소, 또 내가 상공회의소도 이사로 관여했으니까. 상공회의소, 또 간호사 협회, 또 체육회, 한인회 사회에 또 체육회가 있거든요. 체육회. 예, 각 도민회, 각 도민회, 또 세탁협회, 하여튼 큰 단체들은 전부 끌어 모았는데 그때 한 열댓 단체가 됐어요. 시카고 단체라는 게. 근데 그때 영남향우회만 안 해주더라고. 전부 초청장, 시카고 방문 청원서 이걸 전부 맨들어서 프린트를 해가지고 이렇게 써가지고 서명하잖아요. 한인회장이 하고 한인회장부터 먼저였지, 부회장이 하고 이사장이 하고 부이사장이 하고. 그 한인회 집행부 등재하거든. 그러고 인제 그거 받아가지고 재향 군인회 가서 재향 군인회 송양호, 재향 군인회 송양호. 그걸 직접 댕기며 다 받었지. 근데 영남향우회 가니까, 상공회의소하고 영남향우회가 안 해주는거야. 그래서 내가 왜그러냐 그랬더니 자기맘대로 못한다는거야. 그래서 내가 알지. 자기 맘대로 못한다고 그래서 곽길동씨를 내가 직접 만났지. 면담자 : 그 회장이었습니까? 구술자 : 박길동씨가 말하자며는 대부라고 보면 되요. 이쪽에 경상도 대부라고 보면 되요. 군사 혁명 나 오기 전에 아마 먼저 와있었던가 그럴 거예요. 내가 와서 만나, 한 70년대 초에 시카고 왔을 거예요. 내가 이 한인회 하면서 그 사람이 이사장을 했거든. 이사장하고, 그분 이사장하고 내가 간사장 하고 그럴 때니까. 음...내가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이게 다 끝났고 이회창씨도 이렇게 축하화환을 보내고 그랬는데 왜 이렇게 교민사회가 다 이렇게 하는데 영남향우회만 빠지면 되느냐. 그랬더니 정서상 영남향우회는 할 수 없다. 이거야. 영남 사람 정서상. 아니 정서라니 국가 화합차원에서도 그렇고 이런 예는 없다고. 내가 사정했어요. 그래서 정서상 할 수 없다고. 정서를 이런 영남 정서를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그걸 모르냐, 알죠 얼마나 그 7대 대선때 그 지역감정이 동서로, 동서의 지역감정이 얼마나 심했는가는 앞에도 내가 진술했지만 예, 그것이 역력히 그, 그사람이 맨들어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아니 대통령 축하 광고 나간다 할때도 그거 안 해줬거든. 축하광고 다 그렇게 내보냈거든요. 근데 그것도 안 해서 영남향우회는 빠졌어. 그 내가 원본을 가지고 있어요. 그 내 대변으로 해가지고 내가 다 만들어서 내보냈으니까. 그 신문 그대로 가지고 있지. 글고 청원서. 청원서 그것도 내가 카피그대로 가지고 있고. 지금도. 갖다 제출했지만 가지고 있고. 그것도 못해준다는거야. 아니, 신문에 나가는 거니까 그렇다 그러자. 신문에 나가는 거니까, 다 보니까. 그렇지만 이거는 신문에도 안 나가고 바로 청와대로 들어갈 건데. 청원 방문 해달라고 청원서 요청, 못한다는거예요. 그래서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축하 광고에도 영남 향우회만 빳고 상공회의소하고 빳고. 그러니까 시카고를 완전 잡고 있었죠. 그래서는 빠져있습니다. 그 원본 그대로 있어요 지금 내가 카피를 갖고 있어, 원본은 제출했지만. 그래서 그 청원서를 다 맨들었어요. 컴퓨터로 다 합하니까 이렇게 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인제 그 취임식 한 2주 전에 갔어요. 가서 연락해놓고 인제 인수위원회 삼청동 가니까 아태평화 재단 임원들이 회장하고 둘이 따라붙었는데 공항에 가니까 그 어느 분이 와서 어느 분이 내가 가지고 들어간다 그랬거든요, 그랬드니 나 그냥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해줬어요 12시에 아태재단 사무실, 동교동 동교동에 있었거든요 아태평화 사무소. 동교동에서 12시에 만나자. 그 황용배 사무처장 황용배 처장 나오고 그때 연락해놨으니 그때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죠. 그러고서는 이제 그 원본을 제출했더니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가지고 있다고. 그러자 인제 인수위원회를 들어오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다음날. 그랬더니 인수위원회를 걔네들 따라오더라고, 갔더니 그 박지원씨가 그때 앞에 있더라구요. 앞에. 근데 그 박지원씨는 뭐 좀 그 인척관계가 되요. 저하고 사돈정도 관계가 있어요. 그 조카 사촌동생이 내 장조카, 조카 사위에요. 그니까 그 박지원 의원 그 큰 사촌동생이 지금, 지금도 LA에서 목회하고 있고 또 그 형님이 LA에서 메리야스 공장을 사우스아메리카에다 공장을 두고 그 사업을 했거든. 그래서 조카도 LA도 가고 그랬는데. 박지원씨가 삼촌 들어갔더니 그때 연락해놨으니까 다 통과됐드라구요. 마지막에 다 들어가서 한 30분 들어가서 인제 그 김윤건씨가 그때 있었어요 비서실장으로. 인수위원회 시절에. 다른 사람은 못들어가고 나만 그 안으로 인제 들어가서 제출하고 그 청원서 제출하고 그러고 나왔는데 그때 이제 또. 그러고 나왔는데 두 사람 인제 따라온 사람들이 뭐 이런 말은여기서 안 하는게 좋지. 시카고 가서 뭐 같이 들어갔다고 그래야 된다고 그래, 그래서 같이 가서 뵜다고 그래야 된다는거야.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지. 면담자 : 같이 따라, 같이 가신 분은 소속이 뭐 어디였나요? 구술자 : 그때 여기 아태 평화재단 여기 지회장이지. 지회장하고 그때 여기 총무인가 같이 갔는데 근데 거기서 나만 데리고 들어가고 김윤건 실장이 와서 나만 데리고 들어가고 인제 박지원씨 통해가지고 안에까지 같이 들어갔는데 거기서 안에 한 삼십분 기다리니까 김윤건씨가 나만 데리고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기다리라 그러니까. 내가 가방 들고 나만 들어갔지. 면담자 : 뭐 특별한, 그 안에서 뭐가 있었습니까? 구술자 : 뭐 그거는 인제 말할 수 없고. 그래서 인제 안에 사무실 들어가서 인제 김실장 그 안내 받고 들어가서 청원서 드리구서는 한 이십분 거기서 인제 있다가 나왔어요. 밖으로 나왔는데 그 다음날 얘기가 시카고 가서 같이 들어갔다는, 그렇게 해야된다는거야. 내가 그랬지 나 못뵜다. 안 계셨다고 아무도 없었다고 내가 누구를 봤냐고 아무도 못봤다고 그랬어. 아무도 없었다고. 그런데 뭘 누구를 봤다고 그래? 말하자면 인제 대통령을 독대했다는 거를 같이 했다고 얘기를 하라고. 그것도 들어갔는데 근데 왜 이렇게 오래 있었냐. 나 차 한 잔 마시고 그거 드리고 나왔다고 아무도 못 봤다고. 그러고 그때 이제 마포 그 할러데이인? 거기가 우리 숙소가 있었는데 아유, 그런 말 하면 거기서부터 뭐 그 불량배들 데려와 가지고 어디서 또 서울에 그 사람들 믿을 사람이 없어요. 괜히 그 겁주고 그러더라니까요. 호텔에 들어와가지고. 면담자 : 어디에서 보낸 사람들인가요? 구술자 : 호텔방에를 들와서 내 이런 말. 뭐, 하여튼 그 난장판을 치더라구요 면담자 : 김대중 정권에서 보낸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다른... 구술자 : 아니지 다른 사람들이지. 여기서 같이 간 사람들인데. 그러고 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며는 미국에서도 그 거기에 초청장 못받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도 거기 입장할라고 많이 애썼는데 그 사람들도 없어서 못하고 그랬는데 거기 현지인을, 현지인 친구들을 거기 입장시키게 할라고 그걸 하는 거예요. 그래서 노, 안 된다고 했지. 미국, 혹시 시카고에서 온 사람들도 몇 사람이 거기를 취임식을 못 들어가고 있는데 초대장이 없어서.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면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알아, 그 사람들 두고 여기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내가 거절을 했거든. 초청장 발부를 못한다고. 그랬더니 인제 그런 그 행패를 인제 당하고 그랬죠. 그러고 뭐 뭐, 우리는 뭐 그 한이라는 거 이런 거는 인제 풀어졌죠. 대통령 당선되고 민주정부가 이루어졌으니까. 그러고 나는 그때도 경로를 통해서 정부에다 그랬어요. 평통은 폐지해야 된다고. 이건 폐지해야 될 첫 번째 조건이라고. 내가 그랬어요, 바로 이게 5·18 희생의 피라고. 이걸 팔아먹은 거라고, 전두환이가. 알겠습니까, 무슨 얘긴지. 이걸 알아야되, 우리가. 그런데 내가 나중에 답변 듣기로는 어떻게 들었냐면, 그렇게 해놓은 것을 지금 그걸 뺏어버리면 인제 정치라는 것이 그걸 크게 생각하고 그러는 게 지금 그걸 없애버리면 이게 좀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는데 어떻게 해요. 나는 끝까지 나는 철회했어요. 노, 평통, 김대중 정부에서도 노. 그게 아마 내려왔든가 그래요. 내려왔든가 하는데 내가 노, 거절했어요. 절대 평통은 내가, 내가 못한다고 끝까지. 그래서 그게 거기까지 내려오고. 90, 그러고 인제 뭐 좋은 세상이 지나갔는데 이천, 몇 년입니까? 또 바로 그 끝나고 노무현 또 했잖아요. 그때 노무현 때도 이 2002년도에 대선후원회가 조직되기 전에 연청이 그때는 조직됐어요. 연청, 청년 연합, 연청 있잖아요, 민주당 연청. 연청이 2002년 봄에 여기 조직이 됐죠. 사전조직으로. 그러고 가을에 인제 연총례가 또 그때도 내가 부의장 맡고 대변인 맡고. 회장을 그때 명천애가? 하고 141111조철규01_02:22:50 그때 사전 조직했고 그때 배기선의원이 여기 댕겨가셨고. 어, 그 조직 때문에. 그리고 인제 대선후원회가 할 때, 그때도 호남향우회 뭐 회장단 뭐 어, 별로 뭐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도 인제 잠실 체육관에서 연청이 조직되고 바로 4월 달에 잠실 체육관에서 그 마지막 전당대회, 후보 결정하는 전당대회가 있잖아요. 있었거든요 4월 28일 날, 2000 그때가 2002년 4월 28일 날 장충, 잠실체육관에서 마지막 후보 경선.그게 있었죠. 정동영 후보 하고 노무현 후보하고. 그때 연총 여기 인제 회장하고 나하고 둘이서 시카고 대표로 나갔는데 그때는 무슨 자격으로 거기에 참여했냐면 새천년민주당 대의원 전당대회 대의원 그 그거를 주더라고요, 그 증을. 그때 새천년 선거대책위원장이든가 새천년, 아이고...그래서 그때 대의원으로 그때 몇 차례 그건 참여했죠. 그러고 인제 끝나고 그때 처음으로 노무현 후보 끝나고 만났고. 그러고 대선후원회 무사히 이끌고 또 그때도 성공적으로 정권창출을 했어요. 그러고도 나는 다른 사람 다 평통 들어가는데 나 안 들어갔어요. 그때는 인제 김대중 선생 때는 평통회장을 갈지 뭐, 나는 신경 안 썼으니까, 나는 없애자고 한 사람이니까. 근데 노무현 때는 평통 회장을 우리 쪽에서 넣었죠. 노무현 때는. 우리 쪽에서 넜어요. 그거 없어지지 않은 거니까. 그래서 우리 후원회 같이 했던 황경용씨를 황경용씨를 평통 회장으로 밀어가지고 회장이 됐습니다. 그때 김상곤, 김상금 의원이 평통 회장 하실 땐가, 부회장 했던 때인가? 그게 처음으로 평통을 노무현 대통령 되고 나서 우리 쪽에서 맡은 적이 처음 있지요. 한번. 그러고 여기가 6.15는 2006년? 2006년인가, 6.15롤 그때 인제 또 연락을 받았어요. 해야된다고 그래서는 할수 없이 또 나섰죠. 그래서 내가 그때 준비위원장 맡고 해가지고 신문에 광고, 인제 전면광고를 한 달 앞두고 내보내고. 그때 34명인가 준비의원이 됐는데 준비위원장 맡아가지고 6.15 공동선언 실천 인제 준비위원회. 그거 해가지고 결성하는데 처음에 장소를 예약했는데 그것도 장소를 못 주겠다고 아또 무슨 압력이 들어왔나 안 된다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장소도 이리 옮기다 저리 옮기다가 대북경식당 한쪽에서 결국은 결성, 그날 결성을 하고 내가 인제 초대 위원장이 되고 그때 공동 위원장, 대표위원장이 되고 그러고 그 해에 내가, 그 해에 내가 그 되고 나서 5·18 기념식 때에 가며는 이건 뭐 기념식인지 무엇인지, 말하자면 5·18을 오히려 훼손하는 것 같애, 기념식 하는 게, 한인회에서. 그래서는 내가 그 공동위원장 되고 나서 한인회 5·18 행사때 가서요, 시카고 선언이라고 해서요. 어, 앞에 나가서 ‘광주 의거 만세, 광주 시민 만세, 대한민국 민주주의 만세, 만세 삼창을 부르고 시카고 선언을 내가 발표했죠. 5·18 기념식 행사에서. 면담자 : 그게 몇 년도, 몇 년도 일이실까요? 구술자 : 음...그것이 2000...2007년인가? 2006년에 내가 결성해갖고 2007년인가 그런거 같애요. 그것도 신문에 그게 인제 중앙일보에. 처음이거든 5·18 행사에서, 만세 삼창을 5·18 순국영령만세. 5·18 광주 시민 의거, 의거 시민 만세, 대한민국 민주주의 만세 삼창을 선창했거든. 앞에 나가서. 그러고 시카고 선언을 발표를 했어요.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 5·18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근본이라는 것을. 근원은 시작이 됐다는 걸.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이 5·18정신을 이어나가서 어, 남북 공동, 남북 통일도 이 5·18 정신으로 이뤄져 나가야 된다는 그런 선언을 내가 발표를 했죠. 그래서 그때 신문에 인제, 시카고 신문 일간지에, 더군다나 중앙일보 일간지 그 시카고 판에다가 사진 이렇게 크게 냈더라고. 내가 만세 삼창 부르고 시카고 선언 했다 그러고. 시카고 선언 내용은 입수, 본사가 입수했음, 그러고 발표는 거기다 안 하고. 그거 가져갔으니까. 내 그거를. 그러고 그 5·18 밤낮 기념식이 그러니까, 그러고 또 한번 내가 임을 위한 행진곡 때문에 그것 빠지면 5·18 기념식이 아니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안 부르며는. 2012년에 2012년 5·18 행사 때에. 에, 내가 그랬어요. 가서 이 식순에다가 넣어라. 그랬더니 뭐 못 넌다고 그래. 면담자 : 어디에서 못 넣는다고, 한인회에서 그런가요? 아니면 총영사에서 그런가요? 구술자 : 마당집하고 인제 향우회하고 같이 하잖아요. 이거를 근데 그건 다 마당집에서 이러고저러고 하지. 예나 이렇게가서 참석해서 보면 앞에 자리 몇 개 놔두고 누가 앉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들끼리 이렇게 앉아서 향우회 회장, 이사장, 뭐 저 총영사, 나올 때는 부영사, 이렇게 나와서 나이 먹은 사람들 조금 몇. 그러니까 사람 몇 안 모여 한 열댓 명. 많이 모이면 한 이십명. 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인제 그거 한번 보란 듯이 한번 5·18이란 이런 것이다 했고. 12년, 13년이죠, 금년 지났고 작년, 재작년에 12년, 작년인가? 이걸 했어요. 임을 위한 행진곡.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래, 한국에서도 그렇고. 처음에 이거를 안 된다며는 처음에는 애국가를 부르고. 어, 국가기념일이니까 애국가를 부르고 끝날 때, 끝날 폐회 순서에 임을 위하나 행진곡 합창으로 부르는 것은 이거는 무리가 아니다. 그래거 내가 한인회 가가지고서 향우회 회장한테 내가 그 전날 식순에다가 넣어라. 폐회순에다 넣어라. 폐회순이 전부 일어나서 내가 앞에 나가서 부를 테니까. 따라서 부르는 걸로. 그러고 인터넷 그 테잎 나오게 해서 방송하고. 그랬더니 가서 보니까 순서에 없어. 그래 내가 왜 이러냐 했더니 아, 내 맘대로 못한대. 향우회장이. 내가 그걸 알지. 하루 전에 그래? 손식이 지금 문화마당집 대표, 내가 그랬어. 내가 이거 부탁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내가 이랬더니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그러는 거야. 지금 넣어요, 내가 그랬어. 너라고, 폐회에다가 임을 위한 행진곡 넣으라고 그랬더니 알았습니다. 누가 누군 줄 알거든 손식은. 알았습니다, 하고 넜어. 그랬더니 5·18 그러면 앞에서 리드해야 할텐데 부를 줄 아냐고 그래. 그럼, 내가 부른다. 왜 내가 못 부르냐, 밤낮 내가 부르는 노래다. 그랬더니 또 한번 해보래. 나를 모욕주는 거지 그러면서 해보래. 거기 스태프들하고. 그래 뭐 내가 밤낮 부르는 노래고 내가 교회에서 성가대 하고. 한 사람이 왜 내가 그걸 못불러. 밤낮 내가 혼자 부르는 노랜데. 그래 불렀더니, 어이 잘 부르시네요. 그래서 인제 이걸 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좋다 하고 맨 뒤에 있다가 폐회 순서는 조철규 선생님, 아 조철규 위원장님 임을 위한 행진곡 리더하시겠습니다. 다 같이 일어나서 합창하겠습니다. 그래서 인제 앞에 나가서 마이크 잡고 처음으로, 시카고 5·18 기념이래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 불렀지. 마이크 잡고. 그러니까 나중에 그때 부영산가 누가 와 있었거든. 나중에 행사 끝나고 하는데 부영사가 일어나지도 않고 다 끝나고 뒤에서 뭐 마시고들 그러는데 안 일어나고 아예 앉아있더라고 귓구녕이 맥힌 모양이지. 그래 내가 갔어요, 가서. 나 조철귭니다. 알고 있습니다. 일어나시라고. 내가 그래서 죄송합니다. 이것은 내 생명입니다, 그랬어요. 이걸 5·18에서 이걸 빼면 되냐고. 이건 5·18의 혼이라고. 왜 이거를 한국에서도 빼냐고. 내가 한국에다도 민주당에 건의하고 전화건 사람인데 그런다고. 그래, 국가기념일이니까 애국가 처음에 부르고, 첨에 같이 못부르며는. 무리하지 말고. 응, 전부 참석했던 사람들과또 합창단이면 합창단 같이 일어나서 폐회 때 교회에서도 예배끝나면 목사님이 추도하지 않냐? 폐회도 중요한 거다. 폐회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고. 그것 너야된다는 걸 내가 늘 주장을 했거든요. 그때서부터. 뺄 순없다고. 앞에 못너면 그렇게라도 너라는 거여. 그래서 내가 그거를 실천을 했어요, 시카고 한인회에서. 그런데 그 다음해는 내가 잘 안가거든, 그 껄끄러워들 하니까. 그 다음해는 그러고 2012년 대선에 우리가 패배했잖아요, 문재인. 패배하고 2013년에 작년에 이제 아이들 보내고서는 난 안 갔어. 그랬더니 끝나고 불렀대. 그랬더니 금년에 어떻게 됐냐 했더니 또 안 불렀대. 금년에는. 인제 또 안 불렀대. 그래서요. 저는 그렇습니다. 내 나이 이 나이가 됐어도 광주의 민주 의거의 정신은 이거는 참 귀한거예요. 너무 귀한겁니다. 예. 이거를 체계화 시켜야 되요. 이 민주 광주, 민주 의거를 이 이념적으로 몰아갈 것 아니라 학술적으로 체계화해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이걸 후손에다 물려줘야 되고 광주 5·18 이 정신으로 앞으로 남북통일도 이 정신이 작용해야 남북통일이 됩니다. 왜냐며는 내가 통일 축전에 평양에 유차례 방문하고 많은 분들을 접촉하고 만나고 대화를 하고 했지만 참 그 김대중 선생님 3단계 통일보다 나는 3단계가 아니라 7단계여도 좋다. 그런데 결국은 민주화로 통일이 돼야지, 사회주의 체제고 이게 얼마나 이 어려운 일이냐 이 말입니다. 근데 거기에는 분명히, 희생정신, 광주 5·18정신이 이북에서도 일어나야 이 완전한 통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주장해요. 예. 5·18 민주 항쟁 정신이 북한에서도 일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북한과 거래를 해야 되요. 김대중 선생님 정책처럼 햇볕정책, 소통을 해야 되거든. 소통을 해야 열릴 거 아닙니까. 먼저 이걸 포기해라. 안 되죠, 그 사람들이 살라고 한 거예요. 그게 아니면 죽기 때문에 그걸 맨든 거라고요. 왜, 김대중 선생님이 그렇게 해서 열어노니까 미국에서 어떻게 했어요, 노무현 때,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몰아붙이고 이명박 되고 나서 모든 거를 다 차단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미국에서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북한이 핵을 가진 거는 부시, 책임도 있다 그러는 거예요. 그때 그거를 악의 축으로 몰아붙이고 짤라 버렸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이것이 살길이다 하고 핵을 가진 거란거죠. 그건 사실 그랬거든요. 지금은 더 어려워졌죠. 인제. 면담자 : 그, 오랜 시간동안 선생님 그 지금까지 살아오신 이야기, 또 운동, 5·18 관련된 운동 또는 민족운동, 통일 운동 갖가지 활동들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구술자 : 앞으로도 변함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맡고 있는게 인제는 뭐 나이 먹어서 교회장로로서 열심히 충성하고 그런 일념입니다, 죽을 때까지. 또 현재 이끌고 있는 함석헌 기념사업회 내가 시카고에서 이끌고 있고 에 또, 미국 민주당, 전국 전당대회 대의원이에요. 미국 민주당 대의원, 전국 전당대회 대의원이에요 데모크라딕(Democratic). 그러고 또 이 미국 감리교단 안에 특별히 통일 위원회가 있습니다. 그 통일위원회에도 제가 이사로 관여하고 있고. 그래서 앞으로 이 5·18정신, 그러니까 이 6.15정신도요, 이 5·18정신으로 이 희생정신으로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나가야 하고. 이거는 내 자식들에게도 이거는. 자연히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거 빼노믄 없죠. 5·18이 일어나서 나는 다시 살은 거예요. 내가 다시 신앙생활 하게 됐고요. 5·18이 없었으면 나 아마 신앙생활도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일거양득으로 저는 그렇습니다. 면담자 : 오랜 시간 말씀,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뭐 마지막으로 더 보충하고 싶거나 말씀하지 못한 부분이 혹시. 구술자 : 뭐 할라면 끝도 없지마는.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이상으로 조철규선생님의 구술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철규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조철규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1일 ○ 구술장소 : 미국 일리노이 글렌뷰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에 관한 조철규 선생님의 구술 녹취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일시는 2014년 11월 11일 오후 2시 34분입니다. 선생님, 먼저 반갑습니다. 구술자 : 반갑습니다. 수고하십니다. 면담자 : 먼저 태어나신 해하고 어디에서 좀 태어났는지 좀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고향 면담자 : 예, 언제 태어나셨고, 고향이 어디신지. 구술자 : 태어난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팔상리 820번지 면담자 : 1941년? 구술자 : 1941년 3월 30일 면담자 : 이게 실제 태어나신 날인가요? 구술자 : 실제는 1940년 면담자 : 아, 실제는 1940년. 구술자 : 용띠, 호적에는 41년처럼 되어 있지 면담자 : 예. 40년 3월 30일날 태어나셨구요. 구술자 : 네 면담자 : 예전에는 쪼끔씩 호적하고 실제 나이하고 구술자 : 나도 그 일년은 빨리 한 거라고 그러드라구. 옛날에는 일 년은 지나야 호적 했다고.(웃음) 면담자 : 어렸을 때, 예전에는 많이 그렇게 했다고. 구술자 : 호적에는 원 나이는 40년 용띠인데 호적에는 41년생이야 면담자 : 선생님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형제나 누나나. 구술자 : 가족관계가? 어 9남매에 내가 8번째에요. 면담자 : 형제들이 많으셨네요. 8번째 구술자 : 9남매의 8번째, 그러니까 4남 5녀, 아, 4남 5녀 중에 4남 째. 면담자 : 예. 막내아들 구술자 : 남자로는 막내고 내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죠. 면담자 : 9남매를 다 이렇게 키우셨으면 그 정도라면 아버지께서 좀 경제적으로 좀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어렸을 때 뭐 해남에서 농사를 짓고. 구술자 : 예, 농사, 농사하셨지. 면담자 : 농사를 뭐 크게 지으셨나요? 구술자 : 농사를 그래도 농촌에서는 뭐 밥술이나 먹는다고 그랬으니까. 왜냐며는 그, 그때만 해도 국민 학교는 몰라도 중학교 가기가 어려웠는데 하튼 맨 큰 위에 누님은 두 분은 그런 교육을 못받고 일찍 시집을 갔지만 그리고 그 밑에가 세 번째가 남자 형님인데 그분은 일제 그 징용에 끌려가서, 아버지가 가야되는데, 붙잡혀 가야되는데 아버지는 자식들이 있으니까 그때 큰 형이 조규두인데, 조규두. 스무 살, 스무 살 때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그때 압록강 댐인가 춘천댐에 투입됐다고 노무자로. 그랬는데 그때 거기서 왜 두들겨 맞았냐며는 그 일본 감독관들이 군인들이 그 노무를 시키는데 너무 세게 시키고 그러니까 인제 댐볐나봐, 얻어맞고, 또 대항하니까 얻어맞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발길에 채이고 그래가지고 늑막염이 걸렸어. 늑막염이 걸려가지고 일을 못 시키니까 내보낸 거야. 집에 왔는데 집에서 그때 늑막염 치료를 했는데 내가 그때 4살인가 5살 때입니다. 해방되기 전이니까. 근데 그때, 그때는 페니실린이 없었다고 해요. 페니실린이 없을 때야. 그러니까 늑막염이니까 항생제를 먹으면 좋은데 그게 없으니까 집에서 그, 좋은 뭐 한약재 같은 거, 이런 걸로 먹이고 그랬는데. 근데 결국은 그 늑막염으로 집으로 와서 일 년인가 치료하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내가 5살 땐가 그러는데 그 기억이 나죠, 장례 치르고 근데 그때 갔다 나오면 결혼시킨다고 뭐 이렇게 다 예단도 준비해놓고 그랬는데 큰아들이고, 아들로서는 큰 아들이거든. 그러니까 부모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래서 돌아가시고 그러고 그 밑에 형님서부터는 이제 고등성경학교를 갔지, 목포로. 중학교는 해남서 나오고. 그러고 고등 성경학교로 두 형님 가고 그 후에 누님도 고등성경학교를 갔어. 그때는 신학교가 없었어요. 신학교 서울로 가야되고. 그러니까 그 당시에 신학교 대신에 고등 성경학교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주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성경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까지 나오셨나, 그러고서 고등성경학교 목포 가서 가고. 정명여자중학교, 내 바로 위에 누님은 정명여자중학교를 갔고. 그러니까 정명여자중학교 옆에가 고등 성경학교, 그때 미국 그 힐 선교사가 그때 했고. 근데 그때 나는 국민 학교 1학년 때 해방이 됐어. 기억에. 국민 학교 1학년 때. 그렇게 해서 해방이 되고 그렇게 해서 내가 5학년 때 6.25가 났고. 5학년 때. 그리고 이제 내가 중학교를 그때는 국가고시를 봤어요. 면담자 : 죄송합니다만 국민 학교는 어디 국민 학교를 나오셨나요? 구술자 : 옥천 북 국민 학교 면담자 : 해남에 있는 건가요. 구술자 : 옥천면 북 국민 학교 2회 졸업생이에요. 면담자 : 해남군에 있는 거예요? 구술자 : 해남군 옥천면 옥천 북 국민 학교, 북 국민 학교 2회 졸업생. 면담자 : 중학교는 ? 구술자 : 그래서 인제 이미 형님들이나 내 누님이 목포 가서 인제 전셋집 얻어가지고 목포 가서 학교 다니니까 나는 국민 학교 졸업하고 그때 국가고시 봐가지고 나는 인제 광고나 그리 가려고 집에서 그랬는데 그때 뭐가 왔냐면, 노회에서 아버지가 장로였거든. 그니까 목포 노회에서 그때 인왕규 목사님? 그때 노회장인가 그래요. 교회로 편지가 온 거야. 그 문태, 영흥중학교가 일본 사람들 왜정 때 뺏겼거든 문태고등학굔가한테 넘어갔는데 그걸 다시 찾아가지고 해방 되고 나서 시작을 하는 거야, 영흥중학교를. 그러니까 전부 각 목포 노회에서 교회로 편지를 한 거야 전부들 자녀들 중학교 가려면 인제 꼭 보내야 된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장로니까 나를 당장 못 보내잖아. 그니까 목포 중학교 합격이 됐어. 그때가 나는 광고 간다 그러니까 광고는 또 별도로 집어넣어야 되니까 하숙해야 되니까 목포 형님들한테 가라고 그래서는. 목중에 가서는 합격 됐는데 아버지가 장로고 그러는데 어떡해. 그래서 할 수 없이 영흥중학교, 그래서 영흥중학교 내가 그래서 1회 졸업생이 된 거야. 1회 졸업생. 면담자 : 영흥중 입학 했을 때가 그러면 50? 구술자 : 에고 그때가 19, 1985년 1985년? 그때는 서기 안 썼어. 면담자 : 아 단기로, 그때는. 한국 전쟁 끝나고, 5학년 때 한국전쟁이었으니까 끝나고 구술자 : 동란이 5학년 때였거든? 그니까 나 6학년 하고 졸업하고 갔으니까 면담자 : 예, 한 53,4년 그 정도 됐겠네요. 구술자 : 천구백한, 국민 학교 졸업하고 나면 아홉 살이고, 여섯살에 국민 학교 들어갔으니까. 면담자 : 아, 여섯 살에 들어가셨습니까. 구술자 : 여섯 살에 국민 학교 들어갔어. 여섯 살에 들어가서 여섯 살 육년 하고 12학년, 6년, 여섯 살에 육학년, 열두살, 열두살 맞나, 몇 년도가 되겠나 이러면... 면담자 : 53년 정도 되겠는데요. 구술자 : 몇 년도 되겠지, 서기로 하면 면담자 : 1953년 정도 구술자 : 53년? 면담자 : 예예. 구술자 : 53년이며는 휴전되전 해잖아. 면담자 : 예, 휴전 되던 해. 구술자 : 아니지, 휴전되던 해에는 내가 서울로 갔거든. 휴전 되고 면담자 : 5학년 때가 그럼 52년인데요, 그럼 1952년이고 5학년때 6.25가 일어났으면 5학년 때가 1950년이었구요. 구술자 : 그랬어요? 그러면 1950년? 면담자 : 그럼 6학년때가 1951년, 중학교 1학년 때가 1952년. 예. 구술자 : 하튼 중학교를 목포로 갔으니까, 영흥중. 면담자 : 예. 영흥중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시고 고등학교는 어디로? 구술자 : 인제 그리고 고등학교는 서울 오산, 면담자 : 서울에 있는 오산고등학교요? 구술자 : 응, 서울 오산. 이북에서 피난 온 학교 있잖아요 오산, 다섯 오, 묏 산, 오산. 면담자 : 서울로 올라가신 계기가 뭐 공부를 하시기 위해서 구술자 : 왜냐면 그렇지, 왜냐면 형님들이 신학교를 서울로 갔거든 누님들도 그러고. 목포에서 고등 성경학교 마치고. 그러니까 나는 또 서울로 따라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중학교를 3학년, 하튼 그래서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지. 그러니까는 그때 서울로 간 때가 휴전되고 그 다음해인가 그래. 1959년에 내가 졸업했으니까 57년, 8년, 9년, 고등학교 3학년이니까. 서울로 가서 내가 1955년도든가? 오산학교를 1959년에 졸업했거든. 한 학년을 내가 쉬었어. 맞아 중학교 한 학년을 쉬었어. 면담자 : 그러면 맞습니다. 구술자 : 한 학년 쉬고 서울 가서 56년에 고등학교 들어갔나? 56년, 57년, 58년. 어, 59년에 졸업했으니까. 면담자 : 예. 그럼 형님들, 누님들하고 같이 인제 거기 계시니 서울에 계시니까 올라가서 학교를 다니시게 된 거네요. 고등학교는요. 구술자 : 근데 같이 있지는 못했지. 형님들은 신학교 기숙사에 가 있었고, 누님은 또 그 지금 순복음 신학교, 그때 순복음 신학교 서울 서대문 로터리 그 방송국 밑에 순복음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 신학교가 거기 있었어요. 그때 조용기 목사가 동기야, 누님하고. 그 조용기 목사님 사모님 누구, 아이구 차자실(김성혜와 혼동) 목사님인가? 그분도 순복음신학교 계통이고 그리고 에, 성서 신학교라고 서대문구 송월동, 그니까는 영천 독립문 가기 전에 오른쪽에 송월동에 성서 신학교가 있어요. 그리스도의 교회 성서 신학교라고. 인제 그리 갔거든, 두 형님은 그리 가고. 누님은 순복음 신학교로 가고, 누님 두 분은. 그래서 나는 인제 와가지고는 잠깐 몇일동안은 기숙사에 있었지만 고등학교 인제 들어갈 때는 어, 나와서 하숙을 했지. 보광동에서. 보광동 129번지 용산구 보광동 129번지 조남중 씨 집에서 내가 하숙을 했지요. 면담자 : 아직도 그 번지를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구술자 : 아 뭐 그렇지, 거기서 내가 하숙 했고. 면담자 :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그, 서울 고등학교 생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들 쫌 있으신가요, 50년대 후반 그때. 구술자 : 그때 이제 1955년도에 내가 그때 서울에 있었어요. 하여간 서울에 가서 일년을 쉬었던가 그래요. 55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는 해공 신익희 선생님이 한강 한강 노량진 한강 백사장에서 선거 유세가 있었거든. 근데 그때 어ᄄᅠᇂ게 거길 갔어. 갔는데 그때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그러고 그때 그 끝나고 호남선 타고 가다가 서거했다는 거거든. 그때. 그때가 아마 55년도일 거야. 그 기억이 나고, 거기 갔던 기억이 나고. 그러고 인제 4.19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면담자 : 그 다음년 구술자 : 졸업하고 하튼 내가 사회 생활 할 때 4.19가 났어요. 근데 내가 왜 인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를 안 갔냐 하며는, 집에서는 아부지나, 내가 오산학교 간 것도 나를 집에서는 막내고 그러니까 그 신학교 보내가지고 선교사님 통해서 미국 유학 보내서 아주 좋은 목사 만드려고 오산학교 보냈어요. 왜 오산학교를 보냈냐, 오산학교 설립자가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시고 또 거기 조만식 선생님이 오산학교 교장이셨고 또 함석헌 선생님이 오산학교 출신이고, 또 한경직 목사님이 오산 출신이시고 최초의 순교자 되시는 그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 출신이세요. 그러고 그때 주기철 목사님 형님인 주기, 주기용 장로님이 오산학교 교장이었다고. 그러니까는 아버지가 오산학교를 꼭 보낸 거예요, 저를. 그리 가서 공부해야 된다고. 나는 그때만 해도 그런 걸 몰랐죠. 그러고 학교를 졸업했는데 일반 학교를 갔으면 좋은데 신학교 가라고 서울 신학교, 연동 나루터에가 있었어요. 서울 신학교에다가 미리 등록해 버리신 거야. 그니까 나는 인제 고등학교 때, 어렸을 때는 인자 신앙생활을 뭐 뱃속에서 그 뭐 복중세례를 받았다고 그래야하나. 난 몰랐는데 국민 학교 어려서 4학년 때 뭐 주기도문 십계명, 뭐 요한복음 3장 16절 달달달달 외우고 그러고 학습 받고 그러고 자랐거든. 그러니까 나를 그렇게 맨들라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때 내가 좀 2학년 까지는 잘 뭐했는데 고3때 가서 내가 머리 길러버리고 어 이거, 담배도 피고 아이들 따라서, 인제 교회도 안 나가고 그랬어. 그래 나는 서울대학 가려고 그러고 주기용 장로님도, 교장 선생님이 오산에서 서울대학 갈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러니까 꼭 가야된다 그러고. 아, 그랬는데 신학교에 갖다 입혀논것이야. 그니까 내가 인제 고등학교 때려, 졸업장은 받았지. 때려쳐뻐리고 저는 이럴 때는 내가 돈 번다, 죽어도 신학은 안 간다고. 그러고 그때만 해도 내가 그래, 형님들 한테 내 주먹을 믿으라고. 면담자 : 그럼 선생님은 그 신학교가 아닌 무얼 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꿈이. 다른 꿈이 쫌 있었나요? 구술자 : 아니, 나는 신학교가 아니고 뭐 솔직한 얘기로 서울대학교 가서 법대 가가지고 나는 정치인, 정치인 할라고 그랬지. 솔직한 얘기로. 정치 계통으로 나갈려고 했지. 근데 인제 절대 안 된다고 그러니까 뭐 내가 어떡해, 그래서 내가 신학교도 안 가버린 거야. 등록금 다 내놓고. 했는데. 가 봤어. 가서 내가 한 한 달쯤이나 들락날락 했어. 근데 영 뭐 아니야. 꼭 감옥에 들어온 것 같고. 아니라고 나는 이건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형님들처럼 그렇게 안 산다. 난 내 마음대로 산다, 그랬거든. 이러고서 내가 이럴 바에는 돈을 벌어야 되겠다. 그러고 그때만해도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됐거든. 그때가 자유당 인제 말기, 말기 때 아닙니까. 4.19 나기 전이니까. 그래서 내가 인제 학교 때려치우고 그때 내가 뭐했냐면 그 보광동하고 이태원하고 가깝잖아요, 용산에 삼각지, 8군 그거 다 끼었잖아요. 거기서 내가 학교를 댕기고 그랬으니까 삼각지, 이태원, 뭐 보광동 한남동, 용산 쪽으로는 훤하지. 그래서 내가 인제 돈 벌길을 어떻게 찾았냐며는, 아, 그리고 4. 19가 났지. 인제 내가 학교 나와서. 학생으로서는 참가 못했는데 그, 그거는 뭐 학생 신분으로는 참석 못했지마는 참가했지. 왜냐며는 오산고등학교 2학년 후배가 그때 재학중이었어, 고3이었는데. 이성화라고 이성화가 고등학교 그때 고3 그 규율부장인가 그러고 그랬는데 청와대, 경무대 들어가서 학생 대표로 들어가서 이승만 박사하고 담판 지은 사람이야. 하야. 학생 대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거든. 후배였는데 나하고 잘 알아요. 내가 제일 사랑했고. 학교 댕길 때. 그 놈이 앞장 서서 했거든. 청와대, 그 경무대 가서 담판 지은 아이가 있었고, 그러니까 나는 학생 신분은 아니었지만 그 광화문에 그런 걸 전부 다 목격했지. 그러고 4월 19일, 18일 서부터 고대 사건, 서울에 있었으니까. 고대 사건에서부터 18, 19, 26일까지 뭐 계속되었거든. 그런 거를 인제 다 목격했지. 그러고 나는 이제 학생 신분은 아니었으니까. 4.19를 내 눈으로 서울에서 다 본거야. 현장을 그 장면을 어떻게 다 묘사는 못 하지만 그런 걸 다 봤고. 경무대 앞에 지금 그 광화문에가 옛날 그 중앙청 청사가 있었거든요. 광화문이 그때는 없는 것 같앴어. 광화문이 없었을 거야, 아마. 뜯어져버렸나 없었을 거야. 지금은 거기에 그 높은 건물이 있었거든 하얀 청사가 있었어요. 광화문 자리에가. 그리고 이렇게 효자동 돌아서 전차 종점 돌아서 이렇게 올라가면 경무대가 있었거든요. 거기까지 갔었지, 그때. 휩싸여, 휩싸여서 막 갔었지. 거기 경무대 들어간 거는 인제 후배가 들어가고. 그때 오산 학교 아이들하고 고등학교 아이들하고. 나는 학생 모자는 안 썼지만 같이 거기 합류하고 그랬지. 걔하고 같이. 그런 기억이 나고. 근데 걔를 인제 미국에 와서 또 사연이 커요. 평양 가서 걔를, 통일대회 갔는데 만났는데 LA에서 또 LA대표로 왔더라고 그래서는 2007년도에 평양 통일 축전에서 만났어요. 걔를. 면담자 : 2007년도에요? 구술자 : 걔를 거기서 만났어요. 아이구. 그때 4.19를 그렇게 목격했고. 그러고 나는 그때 뭘 했냐. 그때는 한국에 물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자가 이 생활 용품이라든가, 이런 것이 8군 PX에서 흘러나왔어요. 8군 PX에서. 하다못해 뭐 우유 같은 것, 뭐 커피, 뭐 맥주, 뭐 오렌지 주스라든가 이런 것들은 전부 미군을 통해서 그 당시에 이태원에는 외인 주택이 있었고 한남동에 외인 주택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태원은 미국 사람하고 그 결혼해서 사는 분들이 이태원에 많이 살았고. 그러니까 남대문 시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그 미국 상품들이 전부 이태원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거기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 장사가 괜찮았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래서는 내가 그때 인제 그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 거기서 내가 살았기 땜에 그 훤히 알았잖아요. 그러고 그거 시작하면서 뭘 배웠냐며는 이, 택시 운전을 배웠어요. 택시 운전을, 그때는 찌프차를 가지고 운전을 배웠는데 내가 왜 찌프차 운전을 할 줄알았냐며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집에서 학비를 대줘서 했지마는, 2학년, 3학년은 내가 가정교사를 했거든 그때 가정교사를 할 때 삼일제약이라고, 삼영톤 만드는, 원기수하고 삼영톤 만드는 회사가 그 용산 한강로 2가에 있었어요. 그 용산 우체국 그 뒤에. 그 아들이 오산학교 내 동기였다고. 근데 지 동생 때문에 가정교사가 필요한데 내가 또 공부를 잘 했거든. 그래서 가정교사를 들어간 거예요, 그 집에서. 그래서 그 집에서 2,3학년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서 가정교사 했는데 그 집에 차가 있었거든, 찌프차가. 근데 그거 많이 타고 댕기잖아요, 어떤 때는 학교 끝나면 시간 없으면 가서 데려가고 그 후에 인제 집에 세워놓고. 내가 상당히 지앙시러웠거든 그니깐 인제 집에서 그 찝차가 지금은 열쇠 이렇게 꼽고 하지만 그전에는 이 키가 여기 달려있다고, 여기 붙어있다고. 그래서 요렇게 돌리면 키가 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는 발동을 어떻게 거냐면, 지금은 키가 돌리면 발동이 걸리지만 저 발바닥 밑에가 악세레다하고 이렇게 보단을 이렇게 꽉 밟는다고. 보단을 밟고 악세레다 밟으면 발동이 걸린다고, 키를 넣고. 근데 그런걸 봐가지고 내가 운전을 발동을 걸어버린거야, 없을 때. 그러고 인제 시동이 붙어 있으니까 그래가지고 그 운전을 배운 거야. 운전수 인제 밥먹으러 가든가, 차는 못 가지고 가거든. 집에다 세워놓고 가거든. 그럼 나는 어떤 때는 늦게 타고 난 다음에 늦게 끝나고 저녁 먹고 올 때도 있고 놀다 올 때도 있고 그러거든. 그럼 인제 그 차에 가만히 가가지고 발동 걸고 그때는 시프트 식이니까, 이거 다 봤거든. 1단 2단 3단 4단 이렇게 하면 빽업, 해보니까 되더라고. 그런데 그 운전을 배운 거야. 면담자 : 운전을 독학으로 배우셨네요. 구술자 : 그렇지. 그 인제 운전을 배웠어. 그래가지고 하루는 인제 학교 운동장에 가서 나를 태우러 왔는데 사정을 했지, 아저씨, 아저씨 나 이거 다 아니까, 알어, 그 사람이 알어, 내가 그때까지 자동차 건드렸다는 거 알거든. 그니까 이제 나한테 자꾸 툭 치면서, 너 이제 자동차 그만 건드려, 늘 그랬거든. 하루는 학교 운동장 오는데 내가 한번 해볼 수 있다고, 된다고 할 수 있다고 그랬더니 안 된다고 그래. 아 이거 학교 운동장이고 그러니까 한번 해보자고 사정을 해서 아 해보니까 아 진짜 운동장에서 되드라고. 어, 자전거 타듯이 그랬더니 나 등어리 치면서 너는 이 자식이아, 별것이야. (웃음) 그래서 운전을 배웠거든. 그 이제 이태원에서 그 장사를 하는데 택시를 많이 이용하잖아요, 그때는. 그 물건을 예를 들어서 미국 사람들하고 사는 가정에서 그 물건들이 흘러 나온다고. 근데 그거를 인제 또 거기 가게에다가 갖다 팔아요 상점하는 사람이, 저 물건을 수집을 한다고. 그럼 그 상점에서 갖다가 또 남대문 시장에다 냄기고 그런다고. 이런 걸 알았거든. 나는 이걸 어떻게 했냐믄, 직접 집으로 댕기면서 그 미국 사람들하고 사는 그 아주머니들한테 찾아가서, 나 이거 고학생인데 그때만 해도 학교는 졸업했지만 이거, 모 이거 쓰고 다녔거든. 쪼금만 달라고 이러니까 나한테 조금씩 달라고. 어. 그래서 인제 첨에 쪼금씩 시작했어. 근데 그게 괜찮더라고.. 그래서 인제 자동차를 많이 쓰거든. 차에 다가 싣고 남대문에 가야되고. 그래 그때 인제 그 이 찌프차를, 찌프차, 하여튼 찌프차를 어떻게 구입을 했냐하면 그때는 그 군대에서 흘러나오는 그 차들을 이 자동차 공장에서 시발 택시도 안 나왔을 때야, 막 이렇게 두들겨 맞춰가지고 맨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는 어떻게 친구 동업자하고 같이 이렇게 만나가지고 우리가 차를 하나 맨들자, 이거 너무 자동차 비용이 많이 나간다. 하긴 자동차를 하나를 조립을 했어. 조립을 해가지고. 그 때는 넘바도 없어도 그 충무로 공장에 가며는 번호판 하나 찍어달라고 하면 찍어준다고 가짜. 똑같아. 서울 자 몇 번 하고 찍어준다고. 무조건 차량에 그거 붙이고 댕기는거야 밤낮 댕기는 것도 아니고 물건 나갈 때만 저녁에 나가고 들어오고 세워났다 저녁에 나가고. 이런식으로 하니까 자동차비가 완전 절약되잖아. 그래서 인제 좀 돈 좀 벌었어요. 음. 그래가지고 거기서 에, 그러니깐 60년대에 그러고 났는데 혁명이 났어. 60년도던가? 혁명이. 면담자 : 5.16이요? 61년에 구술자 : 61년에 났죠. 4.19 나고서 그 다음해로, 4.19가 1960년에 났고. 그러고 바로 그 다음해에 혁명이 났거든. 그때는 이미 내가 그 자동차 씽씽씽 몰고 댕길 때거든. 그때는 좀 돈도 좀 벌을 때고. 그게 잘 나갔는데 5.16이 나더라고. 그래서 이제 나는 뭐 이태원에서 나쁜 짓 한 것은 없는데 아이들 각출해 합자 조합해가지고 그 장사 한 것 밖에 없는데, 잡으러 댕기는거야. 그게 잡으러 댕기는 이유가 뭐냐 그랬더니 나를 인제, 그 여럿이 우리가 모여가지고 합자 장사를 했잖아요, 자동차도 만들고. 그런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피해야지. 그때는 뭐 막 뭐 어디만 가면 잡아 넣고 뭐 삼청 교육대 가고, 아니 삼청 교육대 아니고 덕수궁. 덕수궁 가서 실컨 두들겨 맞고 나오고 그러고. 하여튼 그런 사람들 청사났더라고.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그래서. 그때 마침 형님들이 나를 어디다가 데려다줬냐면 삼각산 제일 기도원에다 갖다 집어넣더라고, 삼각산 제일 기도원. 너 괜히 뭐 니가 깡패는 아니고 그러지만 니가 자동차 몰고 다니고 또 그런 장사 하고 어, 그랬으니까 잘못 하면 뭐한다고. 그래서는 삼각산 제일 기도원에다가 그리 너버렸어요. 거기가 제일 안전하다고. 그래서는 어디 갈 데도 마땅치 않고 그 난리는 또 피해야 되겠고. 그래서 거기 가서 한 5.16 나고서 그 해에 한 몇 개월 피했어요. 그해 가을에, 겨울 되기 전에 나왔으니까. 겨울이 와서. 그러고 나오니까 뭐 또 조용하고 다 끝났더라고. 그래서 다시 뭐 그 장사 하고. 면담자 : 같은 일을 또 구술자 : 그렇지. 그 장사 했는데 인제 그때 그게, 그때는 그게 상당히 컸어요, 그 장사가. 왜냐며는. 면담자 : 한달 수익이 어느 정도 되셨습니까? 많이 돈 많이 버셨다고 그러시는데. 구술자 : 5.16 나고도 괜찮았는데 한 십년 인제 5.16 나고도 괜찬했어요. 5.16 나고 또 화폐 개혁도 있었거든. 그게 인제 발전되 가지고 어, 돈 무척 벌었어. 근데 그때는 이런 그런 물건만 아니라 전자제품. 그때는 에, 트랜제스타, 래디오, 육석, 칠석 뭐 이런 거 나올 때야. 처음으로. 트랜지스타. 그때만 해도. 휴대용, 그런 거. 하튼 뭐 면도날, 뭐 볼펜, 뭐 전축, 전축. 그때는 한국에서 맨든 게 없었거든, 맥주도 못 맨들었어요. 8군 PX 나오는 거 고관대작들 전부 거기에서 갖가 사먹고 그럴 때라고. 그러니까 뭐 물품도 전부 PX 제품 뭐 불티나지. 남대문 도깨비 시장으로 나가며는. 그게 이런 거 큰 걸로 손 댄 거야. 그게 그거는 인제 어떻게 했냐면 미군들이 사와야 되거든. 근데 이제 그게 미군들도 한계가 있잖아. 사는 게. 일 년에 하나면 하나. 그니까는 그 미국사람들하고 사는 인제 부인들하고 통해가지고 그 미국 사람들을 인제 이용한 거야. 그 사람도 돈 버니까. 그 사람들은 안 걸리고. 그래서 그때는 인제 내 차 있겠다, 동두천 가면 동두천 7사단 PX가 있어요. 또 문산 가면 1 기갑사단 PX가 있어요. 또 춘천 가면 또 쪼끄만 거기도 쪼끄만 게 있어요. 또 왜관을 가면 왜관에 거기가 왜관 거기가 무슨 그, 태평양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송 물자가 왜관으로 들어와. 왜관에서 어디로 가냐며는 부평, 부평 에스캄(ASCOM: Army Support Command)이라고 부평 미군 기지가 있어요. 에스캄이라고. 거기가 보급기지야. 배에서 왜관으로 왔다가 왜관에서 부평 에스캄으로 온다고. 에스캄에서 각 인제 부대, 미군 부대로 물품이 배달이 되지. 그래서 판매가 되는데, 그 장사를 하다보니까 그걸 알게 된 거지. 면담자 : 선생님 왜관이라는 곳이 뭐 지명이름인가요? 구술자 : 지명 이름이지. 면담자 : 뭐 인천 그쪽 근처인가요? 구술자 : 왜관이 경상 면담자 : 동해 쪽인가요? 구술자 : 아니지, 아니지 경상남도 쪽이야. 경상남도쪽. 왜관, 왜관. 면담자 : 왜관이라고, 예, 이거 확인해보겠습니다. 구술자 : 경상남도쪽이라고. 면담자 : 예. 거기에서 왜관에서 들어와서 부평 쪽으로 이렇게 가나요? 구술자 : 그렇지, 왜관이 거기가 태평양 배도 들어오면 왜관에 전부 내리게 되지. 그 왜관에서 인제 부평에스캄 기지로 가고 인제 부평에서 전부 다 각 부대로 배송되는거야. 그 장사하다 보니까. 왜냐며는 나중에는 어떻게 하냐면, 그 개인적으로 부대를 통해서 그 조금씩 빼는게 이게 인제 신통치 않으니까 나중에는 어떻게까지 번졌냐며는 바로 왜관에서 배송되는 거를 인제 어느 정도 받았고 거기까지 이르렀지. 또 부평에서 각 PX로 가는 거, PX 책임자하고, 말하자면 결탁해서 중간에서 어느 정도를 인제 내려주지. 그믄 인제 그게 쉽잖아. 그러니까 인제 돈 버는 액수가 더 많아졌지. 그렇게 해가지고. 면담자 : 그럼 그때부터 주로 상대한 사람들은 미군 이었나요? 구술자 : 미국 사람이지. 면담자 : 영어는 그때부터 고등학교 때부터 잘 하셨나요? 구술자 : 고등학교 때 영어를 뭐 100점은 못 받았어도 99점, 98점은 맞았으니까. 왜냐믄 미국 유학 보내서 그러니까 영어를 잘하라고 해서 영어를 좀 잘 했어요. 그때만 해도. 근데 그래서 하튼 그런 식으로 해서 하는데 그게 인제 대결이 어떻게 되냐며는, 5.16 그 나고 나서 인제 그 십년 사이에 이 군사 주체 사이에서도요, 에, 그거를 그 산하 조직들이 이거를 뺏어가고 했어요. 그 사람들도. 나도 했지만 나 혼자만 한 게 아니거든. 다른 사람들도 했거든. 근데 거기에 누가 끼어들었냐면 5.16이 나고 나서. 이, 내 생각이야. 5.16 그 백그라운드 가진 사람들이 이것도 손 댔다고. 돈줄이 없으니까. 그때는 돈줄이 없었거든요. 한국에 딸라(Dollar)가 없었어요. 그 이태원에서 나오는 딸라가 딸라 수입원이었다고, 그 당시만 해도. 알아요, 그만큼 한국이 그때는 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니까 군사 정부에서도 돈이 없으니까 별짓 다 했잖아요. 그때 그 처음으로 새나라 자동차 들여온 것도 김종필씨가 그렇게 해서 들여온 거고. 돈 몇푼 벌려고. 그니까는 이런 데까지 손 안 댈수가 없죠. 그래서 걔네들이 인제 쎈데 뭐가 나한테 들어오냐면은 자꾸 그 용산 경찰서 정보부에서, 형사과에서 나를 제동을 거는 거야 인제. 자꾸 붙, 말하자면 추적을 해서 못 하게 하는 거. 왜냐면 그때는 이렇게 돈 안 줄 수가 없거든. 정보국과 형사계에. 다 이렇게 일부러 온다고 그럼 이렇게 줘야 돼. 용돈 줘야돼, 용돈 주고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며는 그, 걸리잖아. 특정 외래 판매 금지법이 있고., 그때. 특정외래 판매 금지법이 생기고 외환 관리법이라는 게 있고 아무나 외환을 못 가지고 있어요. 그때는 그런게 5.16 나고 생겼거든. 그니까 우리는 나는 달러도 가지고 댕겨야 되고 외래품을 사고팔고 하는 그거 하잖아. 그니까 안 걸릴 수 없지. 그러니까는 그렇게 돈을 안 쓸 수가 없잖요. 그래서 인제 돈을 좀 벌만큼 벌었어요. 근데 제동이 들어오는 거야 그걸 자꾸 견제를 하는거야. 그래서 아, 내가 눈치 챘어. 이게 어, 인제 어마어마한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들어와서 이걸 다 뻇어가는거야. 그래서는 안 되겠더라고. 잘못하다가. 그래서 뭘했냐며는 그 이태원에다가 브라질 제과점을 내가 냈지. 브라질 제과점. 이태원 산 13번지에 브라질 제과점을 냈어요. 집을 세 얻어 가지고. 예, 그게 인제 제과점을 하면서 그 미국 사람들이나 그 외인 주택에 사는 일반인들도 빵 많이 먹는데 부대에서 나온 빵도먹지만 케익, 제과점 하면서 케익 직접 공장에서, 쪼그만 공장을 가지고 직접 다 맨들어냈거든. 그리고 뒤 홀에서는 맥주도 팔고.. 그러니까는 저녁에는 미군들 나와가지고서, 그때만 해도 이태원에 클럽이 없었어요. 내가 그 후로 클럽이 막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그랬지. 내 가게 뒤에서 쪼끄만 홀 하나, 이거 반만한 홀 하나 이거 두고서는 그럼 저녁에면 와서 부인들하고 와서 술 마시고. 퇴근하고 나와서. 그리고 뭐 전축 이렇게 틀어놓으며는 이만한 여기 반만한 홀이지마는 거기서 춤도 추고. 그래서 돈을 그때 좌우지간에 차로 싣고 댕긴다고 그랬어. 자동차로 싣고 댕겼어. 그때 잊어버리지도 않아. 거북선 그려진 돈 오천원짜리 그게 그때는 가장 큰 돈이었거든. 그러고 그 전축 같은 거, 트랜지스터, 래디오, 또 홈세트라고 있었어요, 홈세트. 커피 세트. 이 박스로 이렇게 나와요. 6인조, 8인조, 12인조 커피 팟, 잔 뭐 이렇게 전부 포함된 거. 박스야. 그때 그거를 구할라고 이 줄서가지고 있었어. 서울에서 있는 사람들이. 그거 뭐 많이 취급을 하니까 그런 데서 돈을 많이 벌었지. 근데 잘 나갔어요, 그때는. 자가용도 정식으로 정식으로 넘버 붙여서 탑차 타고. 그러고 인제 그때만 해도 위장 남바라고 있어요. 뭐 판사는 뭐라든가. 검사 넘버라든가. 이거를 카피를 해가지고 세를 준다고. 그때는 그때만 해도. 한 달에 얼마씩 받고. 원남바가 있는데 그때는 카피를 만들어서 세를 줘. 그럼 자기들은 얼마 안 쓰거든. 출퇴근 하고 그럼 나는 인제 밤에 쓰고. 그러니까 떠블을 붙이고 댕겨도 모르잖아, 그때만 해도. 그러니 그때는 내 넘버가 있지만 그런 번호를 달고 댕기면 걸리지 않잖아. 그러고 또 심지어는 별판짜리, 별판. 찦차 앞에다가, 그땐 탑차거든. 별판을 딱 달고서는 똑같이 커버를 씌우고. 댕기거든, 그때는. 장성이 타면은 커버를 벗기지만 안 탈 때는 씌우거든. 그러믄 그때만 해도 그 운전수들이 후생사업이라 해가지고 그 별판을 빌려준다고. 세를 놨어요, 그때만 해도. 그믄 때로는 또 그 별판 달 때도 있어요. 문상이나 종로 구청 들어갈 때는 별판을 달지. 자가용 번호판을 떼고. 별판을 딱 달고 씌운다고. 그믄 인제 옆에다가 군복 딱 입고 말이지, 썬글라스 딱 끼고 앉혀놓고 들어가서 운전하고 들어가는거야. 그믄 의정부 쩌 미아리 고개 가면은 거기가 검문소가 있었구요 또 의정부 가기 중간에 또 검문소가 있어요. 미군 검문소가. 그믄 인제 별판 달고 군복 입고 그러믄 통과거든. 그럼 들어가서 그런 물건을 싣고 나오는 거야. 짚차, 츄레일러, 트레일러에다가. 싣고 위에다가는 뭐 겨울에는, 봄에는 봄배추 가을에는 가을배추 이런거 당당하게 싣고 갔거든. 그런데 거기서 나오면 이렇게 뭐 보지 않고 통과 시키고. 나중에는 그 인제 또 한국사람들 그럼 눈치가 빠르잖아. 합동근무하거든 한국 헌병하고. 그믄 인제 눈치 채가지고 그러믄 그때 또. 그때는 돈이면 안 통하는게 없으니까. 그러믄 그때 한국 헌병. 미국 사람들도 좋아하거든 다 먹고살자고 하는거다하고. 그러니까 검문소도 인제 다 어, 통과되는거야. 처음에는 그냥 했도 나중에는 뭐. 하튼 돈을 무척 벌었는데. 그시기, 그때 시련을 그렇게 지나갔어요. 그일 후에 무슨 일이 있었냐, 71년에, 71년에 대선이 있었거든 7대 대선아. 7대 대선, 김대중선생하고 박정희하고. 그때 처음으로 대선이 있었는데. 내가 선이 형님들로 해가지고 어떻게 닿았냐면 용산 신민당, 용산 지구당, 청년 조직부장이 된거야. 면담자 : 신민당이요? 구술자 : 용산지구당. 왜냐면 내가 청년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거든. 그 장사를 하니까. 그러고 더군다나 뭐 목포에서 온 아이들 또또 광주에서 왔다고 그러면 찾아오는 애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서울로 와가지고 그믄 그때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이 뭐 솔, 상당히 많았어요. 몇 십명, 내가 정확히는 말 안하지만. 그래서 그 아이들을 내가 쫌 많이 데리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형님들이 와가지고 이러이러하니까 형님들이 그때는 신학 나와서 다 목사였거든. 누님들도 인제 신학 나오고 결혼해가지고 매부들도 목사고. 게 인자 형님들이 그러라고 하니까 그렇게 했지. 그때 내가 너무 돈이 많을 때니까. 그때 내가 부동산 사논 게 지금도 서울에 남아 , 시골에 다 남아있죠, 한 육만평. 지금도 임야 전이 남아있죠, 영암에. 지금도 내 이름으로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그때 주민등록번호가 살아있어요. 그래서 주민 등록, 내 이름으로 토지세가 나오니까, 해마다. 어, 주민등록은 없어도 전철 고속, 인천공항에서 고속버스 탈 때 내가 찍어보니까 주민등록번호 찍어보니까 떨어지더라고요. 왜냐면 세금을 내거든. 내 이름으로 임대를 줬지마는 내 이름으로 있고 주민등록이 살아있잖아요. 번호가. 그러니까 내가 없는데 주민등록이 없지만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그 농지세 토지 그 등기에도 등기부등본이나 확인해 내 주민등록번호가 들어가있거든. 또 농지세가 나온 거 내 주민등록번호, 내 조철규 이름으로 나오거든. 그래서 내가 그 전철 타는 데에 찍어보니까, 내 주민등록번호 찍으니까 떨어지더라고. 어? 근데 근래에 와서는 그거 찍으니까 안 되고 주민등록을 갖다 이렇게 갖다 대라고 되있어요. 주민등록을 갖다 대야지 주민 등록 없으면 안 되, 이거 찍어가지고는 안 돼. 그래서 인제 거기 가가지고서는 나 나라에 세금을 낸, 세금 낸 사람이라고. 그럼 주민등록 번호 대라고 그래. 그믄 주민등록번호 4633016... 바로 대거든, 내꺼니까. 그믄 찍어보면 떨어지거든. 그럼 ○○○○ 141111조철규01_00:47:30 찍어준다고. 지금도. 그게 지금도 살아있어요. 그때 인제 돈 벌 때 쫌 그런 거 해놓고 서울에도 좀 해놓고 그랬는데. 형님들이 그 와서 그러는데 그러고 김대중 선생은 내가 목포에서 중학교 댕길 때 김대중 선생이 목포 계셨어요. 목포 노총? 노동, 어, 노총이라고 있어. 노총. 그러고 그때 그 차병원 딸하고 결혼했다고 그랬던가. 그 형님들하고 그때 알고 지냈거든. 큰 형님하고, 지금 돌아가신 큰 형님하고. 그래 어렸을 때 내가 봤어요, 김대중 선생을. 집에도 오시고 그랬으니까. 그랬는데 형님이 와서 그러니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그래 내가 그때 인제 그걸 가지고 아이들하고 좀 뒤에서, 앞으로 나설 수는 없잖아. 깨놓고. 왜냐면 그 장사도 하니까. 그렇게 했는데 대선이 끝났잖아요. 끝났는데 4월 27일이던가? 29일이던가? 하여튼 내 일기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떨어졌는데 그때 백만 표도 안 돼. 백만 표도 아니고 몇 십만 표였어요, 그때. 그게 그때 떨어졌어요. 여기서는. 그래서 인제 그날 아이들하고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몰라. 아주 아이들하고 밤늦게까지 내 집 뒤에 홀 있으니까 하튼 뭐 맥주고 양주고 있는 대로 먹고 하여튼 그때 백 여명이 왔나봐. 뭐 나하고 같이 있는 아이들도 많지만. 그 외에 뭐 목포에서 와서 용산에 있던 아이들. 다 내가 그때는 돈을 뭐 뿌리고 댕겼으니까. 그리고 인제 집으로 왔지. 가가지고서는 내 일기장을 일기에다 썼어요. 술에 취해가지고. 내 그 내용은 술 취해가지고 인제 너무 분하니까 쓰고서는, 선생이여 뭐 낙심하지 마시오. 우리 다시 칼을 갑시다. 이렇게까지 인제 썼는데, 이 사람들이 이걸 알았어요, 내가 앞에 나서서는 안 했지만. 저놈이. 그때는 정보국이 굉장할 때에요. 그래서 내가 그때 느낀 거는 나도 그때 뒤에서 다 했지마는 선거 운동을 해도요, 딱 저 사람이 전라도 사람이다 하면 그땐 고무신 돌렸다고 말해요, 고무신. 전라도 사람이다 하며는 입 뻥끗도 안 해. 아예 포섭하려고 하지도 않아. 저 사람이 무조건 전라도다 그러면 일절 저 사람 딱, 포섭 밖이야. 다른 데 뭐 충청도라든가 뭐 강원도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인제 포섭을 하지 그 사람들 선거 전략이 그 당시 그랬어요. 그때 그 조직이라는 게 내가 그날 투표를 갔는데 내가 이태원에서 그렇게 오래 살고 보광동에서 오래 살고 이태원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주소가 이태원, 이태원에서 살 때인데 가니까 그 선거인 명부에 이름이 없는 거야. 면담자 : 선생님 이름이요? 구술자 : 그렇지. 내가 거기서 그, 거주하고 증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그때만 해도 젊었을 때니까 거기서 또 가만히 물러날 수 없잖아. 한바탕 소란이 났지. 동회에 가가지고 동회에 투표하러 갔는데. 투표도 못했어. 선거인 명부에 빼버린거야. 그러니깐 인제 완전히 고의적인 거야. 그런 사람들이 나뿐이 없겠냐말이야, 그런 사람들이 나뿐이 없겠냐구요. 어징간해서 저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많았거든. 에, 전라도에서 그때 막 서울로 많이 막 올, 무조건 올 때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살면서 그냥 신고하고 어, 살았다고 그럼 내가 투표 하고자 했는데 이리 가가지고 없어서 투표 못한 사람도 많았다고. 나뿐만 아니라. 나 같은 사람도 그랬는데. 그래서 그날 그 일기 썼는데 나중에 어느 날 얼마 한 달인가, 일기 쓸라고 보니까 일기장이 찢겨졌어. 일기장이 찢쳐졌어, 한 반? 중요한 부분이. 그래서 인제 이상하다 그랬는데 나중에는 어떻게 알았냐며는 중앙 정보부에서 그, 내 방에 들어와 가지고 그 가져간거예요. 찢어간 거예요. 그걸 내가 확실히 확인을 한 거예요. 말하자면은. 그러니까 나는 인제 꼼짝없이. 인제 감출 수가 없게 됐잖아. 그 후로. 얼마 못 가서 71년 그, 71년 10, 그러고 인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러고 내가 인제 이태원을 떠나게 되요. 그 후로. 그 후로 왜 내가 떠났냐면. 제과점을 하며는 빵공장 빵을 구워야 되잖아요. 식빵돟 구워야되거든요. 뭐 생케익도 만들어야 되고 빵을 구워야되거든요. 그래서 인제 진열해야되고 매일 구워야되요. 그러고 이제 그 물품, 음료수랑 맥주 같은 것도 들어왔다 들어오고 또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매일, 매일 주고 한자리 깔아놓고 이렇게 거래가 되거든. 또 빵 하는 재료도 밀가로 같은 거, 설탕 같은 거, 버터 같은 거, 이렇게 들어면 늘 선불 주는 게 아니거든. 쓰고 또 주고 쓰고 주고 하는데 이것도 차단되더라고. 아 뭐 물건이 와야 빵을 굽고 뭐 술이 와야 팔고 그러잖아요, 음료수. 그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는데 나중에는 기술자, 빵 굽는 기술자까지 온다간다 말도 없이 나말도 없이 안 나와 버린 거야. 그 집에 찾아가면 없고. 그 부인한테 물어보면 모르겄어요, 무슨 급한 일 있다고 나갔는데요. 그래서 인제 내가 그때 깨달은 거지. 아하. 이게. 그래서는 일 년 버텼나. 일 년도 채 못 버텼어요. 그 다음해에. 다음 해에. 뭐 비어를 살 수 없게 되더라고. 면담자 : 그런 그게 어찌 보면 그런 활동들을 전면에서 나서서 한건 아니었고 뒤에서 이렇게 조용히 도와주기만 했는대도 이렇게. 구술자 : 그렇지, 그렇지. 면담자 : 누가 뭐 밀고를 했을까요. 뭐 어떻게. 구술자 : 아이들을 하도 많이 데리고 있었으니까. 왜 정보부에서 그걸 모르겠어요. 내가 그때 돈 뿌리고 내 자가용 굴리고 그럴 땐데. 그러고 그것뿐만 한 게 아니라 또 부동산도 손대고 그랬거든. 그래서 현아사업주식회사라고 주식회사 맨들어 가지고 거기 아이들 한 여남은 명 이렇게 담당하게 하고. 부동산, 71년도 그때 문 닫기 전에 내가 부동산에 손댔고 압구정동 그 아파트 질 때, 처음에는 용산에 외인아파트가 생겼고 그 다음에 한강 건너서 반포에가 반포아파트가 생겼어요. 그래서 반포에다가 맨션부동산이라고 내가 하나 오픈했죠. 또. 맨션 부동산이라고 반포에다가. 반포아파트 단지 안에다가. 그러고 거기서 그 위에 압구정동에 인제 또 개발될 때에요. 압구정동에. 압구정동에 그래서 압구정동 분양도 그 반포 맨션 부동산에서 들어가고 그랬죠. 그래서 근데 인제 이 이태원에서의 그 장사는 더 이상 하믄 안 되겠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파악을 한 거지.왜냐며는 물품 그렇게 대주는 사람들이 물품 떨어졌다고 안 대주지, 밀가루 설탕 뭐 그냥 그러지 할 수가 없잖아. 가게 맥주도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없다고, 맥주가 도매상에 없다고 안 대주니까 장사를 못하잖아. 그래서 결국은 내 스스로 그것을 접었죠. 접고 낙향했어요. 내 고향으로. 면담자 : 그래서 이런 이유들이 좀 모아져서 아, 이제 한국에서는 살 수 없겠다 이민 결정을 좀 하셨겠네요. 구술자 : 그래서 낙향을 했는데 면담자 : 선생님 잠시만요, 테잎 좀 갈고...<TAPE 교체> 면담자 : 낙향해서 쫌 고향에서 인제 하셨나요? 구술자 : 서울에서는 아무래도 그, 가게 문을 닫고 거기서 괜히 어정거렸다가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날더러 형님들이 그러더라고. 시골 가서 있어라. 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며는 1969년도엔가 미국에 카더 39대 카더 대통령 때에 이민법이 통과가 됐어요. 이민법이. 그래서 그때 70년 부터선가 인제 그 가족초청 이민이, 미국에서 시민권자가 초청하게 되면 그게 시작하게 됐다고. 미국 법이 통과가 됐다고. 그러믄 그때 누가 썼냐면 내 그 처남이, 내 처가, 방종엽이라고. 내 처갓집이 서울이거든. 연세대학교 2학년 때 하키선수였는데 하키선수로 미국 유학을 와가지고 눌러 앉았어. 안 오고. 그 때만해도 자유당 때에 미국 유학 온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믄 장 차관들, 뭐 국비생. 국비생 아니면 장차관, 빽있고 돈 있는 사람들. 근데 그때 처갓집이 서대문구 서소문동 방장성씨 하면 서대문구 소방서 서장도 하고 어, 서울 시의원도 하고. 그 서대문 갑부였지요. 그게 서대문구 그 중앙일보 가기 전에 지금 삼성빌딩 말고 그, 방장성씨거든 이름이 그니까는 석삼자 이룰 성자, 삼성빌딩이라 7층 빌딩을 가지고 있었어요. 바로 법원 뒷문, 중앙일보 올라가기 전에. 근데 그 둘째 아들이 미국 와가지고 그 연대 2학년때 하키 선수로 미국와가지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때 같이 온 친구들이 한국일보 여기 시카고 여기 지사장 했던 아이고 이름 잊어버렸다. 김 누군데 그 친구. 근데 인제 그 이민 문호가 개방되니까 고향에 가서 이민 갈 준비를 하라 이거야. 형님들이 네 입장으로서는. 그렇게 해서 여길 떠나는 게 좋겠다. 여기있다가서는 뭐 아무래도 니가 가만 있을 거 아니고 활동해야 되고 하는데. 미국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너는 좋다 그래서 고향에 갔는데. 마침 내가 그때 또 그, 그때는 내가 잘 나갈때라 군대를 안 갔어요. 영장 나온 거 다 돈으로 해결하고. 근데 미국 올라면 병역, 병역필이 있어야되잖아, 병역필이. 병역필이 없었잖아. 그러니까 인제 고향에 가서 방위병, 방위병 하면서 인제 병역필을 하고 또 고향에 가서 할 게 없으니까 마을에서 이장하라고 해서 이장하고. 또 새마을 지도자 하라고 해서 새마을 지도자를 했죠. 왜냐며는 새마을은 누가 해도 해야 될 일이거든. 그니까 그거는 내 고향을 위해서 내 동네를 위해서 해야하는 일이니까 열심히 했어요. 새마을 지도자 4년 하고 이장 4년 하면서 군수 표창까지 받았으니까. 해남군수 박관주? 새마을 사업 열심히 하고 이장 새마을 사업 열심히 했다고 표창까지 받았어. 그러고 또 새마을지도자 하려면 그 새마을 학교 가서, 광주 가서 교육 받아야 되거든 한 일주일, 그거 받아야되니까 그거 받고. 그러고 이제 병역문제 해결하고 그러고 인제 이민 초청장 신청을 하니까 초청장 보내줘서 이민 수속을 고향에서 한 거예요. 그래서 인제 75년에 이민 수속이 거의 다 끝나고 여권이 다 나오고 했는데 비자를 인제 다 받았어요. 식구가 여섯 식구가. 2000, 그러니까는 75년 11월 28일 날 아이들하고 와이프는 그때 들어오고. 왜 같이 못왔냐그러면 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은 그 출국 허가를 받아야 되는데 출국 허가가 안 나와. 내가. 비자는 다 나왔는데. 대사관도 비자가 다 나왔거든요. 그래서 인제 여권까지 다 나오고 그러면 출국 신고, 본적지가서 출국신고 해야 되고 또 이주 허가도 받아야 되고, 보사부에 가서. 마지막으로 인제 공항에서 출국 이주 허가 받고 해야 되는데 이주 허가가 안 나와. 고향에 가서 출국한다고 신고 했거든. 그러고 인제 그거 가지고 가서 이주 허가를 이민으로 이주 간다고 해야되는데 그게 안 나와. 그래 얼른 생각했어. 아, 이건 뭐가 있다, 그러고서는 아이들하고 먼저 보냈지. 와이프하고. 11월 28일날 그러고서 나는 한 40일 후에 40일 후에. 내 혼자 해결하는 게 낫잖아. 같이 안 가고 해결하는 것보다. 그래 먼저 보내고. 나 혼자 남아가지고 그 출국 허가 안 나오는 거를 결국은 해결을 했어. 해결을 하고 1월 10일 날 나는 와가지고 합류를 했지. 면담자 : 처음에 오실 때 시카고로 바로 오셨나요? 아니면 다른 지역을, 미국으로 처음 들어오실 때 어디로 먼저 가셨나요? 구술자 : 하와이로 왔지 그때는. 하와이로. 하와이 들려서 입국하고. 입국 수속하고 그러고 LA로 와서 LA서 내가 그때 라스베가스였거든. 라스베가스. 그러고 라스베가스에서 있다, 한 2년 살다가. 면담자 : 처음 정착한 곳이 라스베가스신가요? 구술자 : 그렇지. 면담자 : 그쪽에 그 아까 말씀하신 처남, 처남 분이 구술자 : 조뱅, 방종엽이 조뱅. 방상엽, 그 방씨들이 처갓집 식구들이 전부가 거기 있었거든. 또 우리 장인도 거기 이민 와서 있었고 장모님도 계셨고. 처갓집 식구들이 다 와버렸으니까. 그니까 내가 거리 갈 수밖에 없죠. 그러고 내가 인제 시카고로 온 것은 음, 77년에 내가 시카고로 왔죠. 면담자 : 한 일년 정도 후에 이쪽으로 오셨네요? 구술자 : 그렇지, 한 일년 몇 개월 있었죠. 면담자 : 시카고는, 그 라스베가스에 있을 때는 어떤 일을 좀 하셨습니까? 구술자 : 카지노에서 딜러. 잡이 좋아요. 카지노에서 토니온 블랙 잭 하고 또 키노 딜러도 하고 어 내가 또 그런 거는 소질이 있었잖아요, 그 전에 내가 잘 나갈 때, 이태원에서 잘 나갈 때는 자가용타고 어디를 댕겼냐면 인천가면 올림푸스가 있어요, 올림푸스 호텔이라고. 올핌푸스 호텔도 카지노가 있었고. 또 워커힐 가며는 워커힐에도 카지노가 있었어요. 그때. 워커힐 오픈해가지고. 그래서 그런 데 많이 놀러다녔지. 그건 많이 봤거든. 그니깐 인제 라스베가스는 그 도박도시잖아요. 24시간 오픈을 해요, 24시간. 호텔이고 카지노고 24시간 오픈이니까 일도 3교대로 돌아가요 8시간씩 3교대면면 3,8은 24시간이잖아. 3교대로. 거기서 그 잡이 괜찮아요, 괜찮았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노름을 하게 되잖아. 젊었을 때 그것도 해봤잖아. 한국에 있을 때 그걸 해봤잖아요. 했으니까. 근데 뭐 돈은 리밋(limit)이 있잖아요. 여기서는 월급 탄거, 월급 타는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땅덩어리 들고, 집은 다 두고 왔거든. 형제간들 벌라그러고 집도 주고. 그러고 몸뚱아리만 왔어요. 남들은 뭐 정리해가지고 오는데 그 뭐 내 조상들의 내 조국이잖아 그게 팔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대로 두고. 그딴 것도 없고. 난 미국가서 나이가 있으니까 뭐 새마을 운동한다, 한번 부딪쳐본다. 그러고 내 살던 집도 누님한테 주고. 다 그대로 놓고 왔어. 그래 여기서는 돈이 있어야 노름을 하지 노름을 못하잖아. 그게 인제 노름을 그렇다고 땅 팔아서 할 수도 없는 거고. 안 되겠더라고. 월급 타가지고 그 뭐, 이민 생활이 외롭잖아요. 그러니까 갈 데가 없잖아요. 24시간 오픈인대다 갈 데가 없으니까 거기서 일해가지고 팁도 받고 돈은 많은데 쓸 데가 없어. 그러면 가서 또 끝나면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거 한잔 하거든. 그러는데 안 되겠더다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여기서는 아이들을 내가 넷 데리고 갔잖아. 아, 거기를 떠나야되겠다고. 면담자 : 그때 들어가셨을 때 그 처가, 선생님의 처가 식구들 말고 한국인들이 한 어느 정도 거주를 좀 하고 있었나요, 라스베가스에서? 구술자 : 그때면 몇 천명된다고 했어, 한 삼천명. 라스베가스에. 면담자 : 다 이민자들인가요? 구술자 : 이민자들. 그때 이민자들이 누구, 어떤 사람이었냐며는, 나처럼 형제초청으로 온 사람 케이스는 많이 귀했어요. 솔직한 얘기가. 거의가 미국 사람들하고 결혼해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초청하신 분들이 거의였다고. 그때 한 2,3천명 된다고 들었어요. 면담자 : 그래서 인제 쫌 애들 교육도 있고 선생님 생활도 좀 해야되는데 아무래도 좀 그런 노름, 도박 쪽으로 좀 빠지는 것에 대한 위험성도 있고 쫌 해서 옮기시겠다고 생각을 하시게 됐다라는 거죠? 구술자 : 그렇죠. 거기서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것을 인제 내가 결심을 했어요. 근데 거기에다가 또 아버지나 형님들이 늘 그 편지를 하시는 거야.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산다고 했더니 늘 편지를 하시면서 너는 그게 아니다, 기도한다. 이러니까 그게 인제 그때 되니까 옛날 그 인제 이민 와서 외롭고, 많이 한국에서는 펄펄 나르고 그러다가. 자연히 좀 외롭고 인제 그러더라고 옛날 생각이 나고. 또 아이들은 커가지. 그래서 인제 거기를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그래가지고 인제 시카고로 왔는데. 면담자 : 시카고, 굳이 뭐 인제 가깝게 LA도 있었을테고 이렇게 했을 텐데 시카고로 이렇게 오시게 됬던 계기가 있으신가요, 왜 그때는 당시에 LA에 한인들도 많이 있었고. 구술자 : 아, 왜 또 시카고로 왔느냐? 나를 초청했던 그 조뱅이 여기 한국일보 지사장이었던 김용우?용우야, 친구가. 그때 한국일보 지사장이 김용운데 경기중학교 어, 그, 동창이거든. 김용우가, 한국일보 지사장이. 그래서 또 이 조뱅이 이민 초기에는 아마 여기도 좀 이 시카고를 좀 거쳐갔다고 그랬는데. 왜 조뱅이 나를 이리 보냈냐면 여기 그 자기 친구도 있고 또 자기가 여기다가 뭘 해놨냐면은 쪼그만 그 세탁소. 세탁소를 자기 친구 동생인가 뭐 아쉬운 소리를 해서 돈을 좀 해줬는데 뭐 세탁소가 차려가지고 한다고 하니까 돈을 좀 이민와가지고 빌려줬나봐. 그런데 인제 돈은 안 받고 하니까 회수를 못하니까 내가 인제 상의를 했지. 나는 여기들 떠나고 싶다. 아이들하고. 아이들 장래를 보고 해서도 여기를 떠나고 싶다. 인제 그런 상의를 하니까 그런 관계가 있으니까 여기 가서 그럼 세탁소를 해라. 면담자 : 오셔서 세탁소를 시카고에서 운영하신 거네요? 구술자 : 네. 그리고 이제 77년도부터서는 세탁소하면서 그때만해도 여기와가지고는 교회를 나간 거예요. 여기 와가지고. 아이들하고 인제 신앙생활을. 옛날로 다시 돌아간 거예요. 시카고 와가지고. 그래서 그 때만해도 인제 70년대에 여기 와가지고 인제 교회 댕기면서 세탁소하면서 그거 밖에 없죠, 여기서는. 그러고 인제 세탁소 하니까 먹고 사는 거는 둘이, 둘이 하니까. 이 프레스 하나 사람 쓰고 또 바느질하는 아줌마 파트 타임으로 와서 하고 와이프가 카운터 하고 나는 인제 세탁기 기계돌리고 대리는 사람, 다림질 하고 그럼 좀 고단해도 수입이 괜찮아요. 그래서 다른 거 하는 거 보담. 두 사람 인건비가 나오는데 세탁소 하며는. 남의 일 아니고 내일이니까 또 일요일 날은 쉬고. 인제 그거 좀 하면서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신앙생활 하면서 교회 인제 섬기고. 이민 생활 갈 데가 없으니까. 인제 그러다보니까 여기서 살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은 80년, 아, 79년. 가 있어봐, 박통이 79년 10.26 사태가 난거야. 여기 시카고 와서 살 때. 궁정동 사태가 났다는 것을 그걸 여기서 들었고. 그때 참 기분 묘하대. 여기서 그 소리 들으니까. 그랬는데 바로 이어서 또 12.12 사태. 같은 해. 뭐 그 막, 정승화 막 체포되고 전두환 소, 그 소장? 소장이 육광구? 육광구 뭐 보안사 보안사령관 쳐, 이게 막 나오는데 나오는데 흥분되더라고. 여기서 그런 소식을 들으니까. 이야. 이거 그 그렇게 해서 김재규가 그렇게 한건 좋은데 전두환이가 그렇게 하는 게 이게 인제 좀 걱정이 되더라고. 야, 이거봐라 이렇게 되면 이거. 이게 아닌데. 어, 그랬는데 그 다음 해에 80년 인제 광주사태가 터진 거여. 면담자 : 어떻게 처음 이걸 접하게 되셨습니까 5·18 구술자 : 어떻게 해서 내가 5·18을 알게 됐냐면 여기서 미국, 미국 그 아이들이 아이들이 미국 테레비을 보다가, 나, 아부지, 저기, 학교에서 들었다고 그러든가? 그래서 인제 5·18이 났다는 거를 접하게 됐지. 그래가지고 내가 서울에, 서울로 전화를 했어요. 양경식 목사라고 서울 매분데. 서울 동작동에 있는 누님한테 내가 전화를 했어요. 아니 여기서 들으니까 광주, 광주에서 그 무슨 큰 일이 났다는데 광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데 그러고 전화를 물어봤어, 어떻게 된 거라고 그랬드니 아 알았다, 그것 때문에 매부가 지금 광주 내려간다고 갔는데 장성 가서 장성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 있다고 지금 전화가 왔다. 그러시는 거야. 그러고 뭔 말을 할라니까 전화가 끊어져버렸어. 그때는 왜그랬냐면 전화가 직통이 아니에요. 교환을 여기서 미국에서 전화 걸면 교환해서 바꿔 줘야되요. 이렇게 연결해줘야되요. 그 전화 교환에서 그거를 받고 끊어버린 거예요. 갑자기 전화가 거기까지, 매부가 광주, 급하게 광주 간다고 가셨는데 장성 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서 길이 막혀서 못 들어가고 장성 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고. 그 얘기하고났는데 전화가 끊어져버리더라고. 그 인제 그 이후로 전화 연결이 안 되는 거야. 인제. 계속 전화를 해도. 그래서 인제 광주 사태가 터진 줄 알았어요. 그러고 그 사태가 인제. 또 그, 그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 마음은 솔직한 얘기가 정말 날개 있으면 날라라도 가겠는데. 뭐 만사를 제쳐놓고 그냥 가서 부딪치고 싶은데 그래서 전화 했는데. 응? 그렇지 않아도 매형이 광주 내려갔는데 장성 가서 못 가고 응, 길 막혀서 못가고 지금 장성 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고. 그러니 뭐 이거 미치지. 이야. 그때 또 참 그 마음은 너무 답답하고 아, 어떻게 그냥 할 길이 없더라고. 5·18 그렇게 광주에 났다는데. 면담자 : 그 당시에 시카고에서도 로렌스(Lawrence) 그쪽 예전에 한인타운 있던 데가 로렌스 지역인가요? 그쪽에서 뭐 항의시위 같은 걸 조직하고 했다고 하는데 혹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좀 알고 계신가요? 구술자 : 그때는 그런 단계가 아니었어요. 왜냐면 내가 시카고를 와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회 계통으로는 늘 그 내가 인제 남선교회도 맡고 그러면서. 내가 감리교 다니거든. 어, 교회 연합회니 뭐니 해서 남선교회 연합회다 늘 미딩(meeting)을 갖거든요, 한달에 한번씩도 있고. 이렇게 해서 쭉 보면 내가 시카고를 인제 파악을 하기에는 그때 80년대 그런 일이 났을 때에 뭐 로렌스에서, 우리는 이제 교회에서, 교회에서 목사님하고 할 길이 없으니까 기도회를 했지. 기도하자 해서 기도회. 장철우 목사. 그땐 아이, 철야기도 했어요. 그때. 철야기도. 몇 일을 철야기도를 했어요. 밤을 새우면서. 낮에는 일을 하니까 일 갔다 오면 모여가지고 밤에는 교회에서 철야 기도, 새벽에까지 기도 하고 새벽에 잠깐 눈 붙이고 나가고 한 며칠을 3일 철야 기도를 하자고 그래가지고. 면담자 : 이게 80년 5월이었었나요? 구술자 : 그러지, 광주 사태 나고 나서. 여기서는, 나로서는 할 길이 그거 밖에 없었어요. 또 교회에서 그랬고 교회에서도 그랬고. 많은 교회들이 그랬어요. 그래도 그러고 인제 거기가 형편이요, 여기 시카고 사정이 어떻게 됐냐면 내가 그때 파악을 했는데요. 시카고 와서 시카고를 인제 파악을 했는데 교회를 댕기니까 남선교회나 여선교회, 와이프는 여선교회를 하고 교회 연합회 여선교회, 남선교회를 통해서 시카고를 이렇게 판단하기를 내가 어떻게 판단을 했냐면 이, 또 내가 다른 정보도 입수를 했고. 군사 박정희 때서부터 시카고에다가 교두보를 내린 거예요. 미주 거점 지역을 시카고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왜냐며는 LA도 호남 사람들이 많고 뉴욕도 그렇고. 호남사람들이 주도를 했어. LA나 뉴욕은. 아마 호남이 우세하고 LA, 뉴욕도 그러고. 근데 이 시카고가 그러지 못해서 5.16 정부에서 시카고에다 교두보를 내렸는데 어느 교회 어느 목사님이 미국 온지 오래됐거든, 50년대 자유당 때 미국에 오신, 미국 선교사를 통해서 그런, 내가 누구라고 지명 안 하는데 그 교회 그 목사님이 거기에 중심, 중심이다. 그 교회가. 그렇게 내가 정보를 입수를 했지. 그래서 시카고에다가 5.16 군사 정부 때서부터 미국을 그, 미국을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 그랬거든. 근데 그 후로 그 광주 사태가 나고 79년 10.26 사태가 나고 12.12 사태가 나고 광주 사태가 나고 이렇게 됐잖아요. 이렇게 됐는데 그런 상황이야. 시카고가. 인제 그 후로도 확인이 됐지만. 그런 것으로 내가 파악을 했다고. 내 정보 수집으로는. 그런데 그때는 인제 그렇게 지나가고 광주 사태 후로 인제 김대중 선생이 이렇게 됐잖아요. 그 사형구형까지 받았잖아요. 그 5.16때 71년 참 그, 뭐야 그 뭐야, 면담자 : 71년이요? 구술자 : 내가 75년 내가 이민 오기, 김대중선생이 그 일본 가서 잡혀가지고 온 게 내 이민 갔다 온 이민 떠난 후죠 아마. 면담자 : 그때가 72 구술자 : 전이었나? 면담자 :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73년 구술자 : 전이었는가? 박통때 그랬으니까. 맞다. 71년 대선 끝나고 일본으로 가 있었거든. 그때 험했거든, 그때. 일본으로 가있었거든. 그래 일본서 그때 이래 해가지고 배타고 이렇게 오는 거를 헤리콥터 미국 FBI에서 알고 헤리콥터 띄워가지고 만류했다. 그때는 그럼 내가 이민 오기 전이야. 71년 대선 아마 끝나골꺼에요. 맞아요. 그러고 여기는 80년 사태 나고 또 그때 시카고에서의, 글쎄 그거는 내가 못 들었어요. LA에서 뭐 로렌스에서 모여가지고, 모여서 했다면 호남사람들이 어디 술집에서, 술집에서 술 한잔 하고 울분을 터뜨렸겠지않았나 하지 않았나. 면담자 : 한국인, 당시 유학생들을 좀 중심으로 좀 그런 활동들을, 항의 집회 같은 것들을 하러 뭐 5월 한 마지막, 어느 날짜는 자세히 모르겠는데 그때 좀 한국, 여기 왔던 한국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술자 : 그때는 유학생들이 없죠. 없어요. 조기유학생이라는게 조뱅, 내 처남, 그 한국일보 사장 김용우, 그 몇몇이지. 그만한 유학생들이 여기가 면담자 : 아무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선생님은 잘 좀 모르시는 부분이네요. 구술자 :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벌써 뭐 뭐 시위를 했다구요? 면담자 : 항의 집회를 뭐, 로렌스 어디 식당, 식당? 식당 주차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은행 주차장. 구술자 : 은행 주차장?그런 일이 있으면 벌써 그때만 해도 한국일보가 있고 조선일보가 있었거든요.여기 일간지가. 한국일보 조선, 조선은 인제 없어졌지만 그때는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도 그때 있었을거야 아마. 중앙일보가 그후로 들어왔나? 하튼 한국일보는 처음부터 있었으니까. 근데 그런 거 나면 신문에 나거든. 그믄 여기서는 그때는 신문이 모든 정보의 그거였는데. 나는 그런 모르는 사실, 있었는 걸 모르는데. 그거는 내는 모르겠어요. 면담자 : 네. 그럼 선생님은 쫌 이렇게 선생님이 다니시던 교회 내에서 그 5월 한 3일정도 철야기도회를 같이 하고. 그때 쫌 기도회를 같이 진행, 좀 기도회에 참석하셨던 분들, 같이 기도회를 하셨던 분들이 좀 많이 되셨나요? 철야기도를 같이 하셨던 분들이 숫자가 좀... 구술자 : 그때 그 장로님들하고 목사님하고 그 교회 임원들 뭐 많아봐야 한 60명? 철야기도니까 그렇게 많이 참석 안 하죠. 60명 내 생각에는 장로님들 권사님들하고. 그때는 내가 장로 아니었으니까. 그때는 내가 집사였으니까. 면담자 : 선생님은 시카고 호남향우회에 참여를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구술자 : 내가 얘기 할께요. 호남 향우회는 그러고 인제 80년대는 그렇고 무슨 일이 있었냐면 81년도에 김대중선생이 미국 망명을 했잖아요 81년도엔가. 뉴욕으로 먼저 왔을 거예요. 그러고 82년도에 에, 시카고에 와서 여기 저녁에 여기 무슨 고등학교? 고등학교 강단에서 강연회가 있다고 그거는 내가 알았지만 나는 그때 이 투잡 뛰었거든. 세탁소하고 또 밤에는 나가서 청소하고. 그런 때고. 근데 나는 그때 그 강연회는 참석 못했어요. 그 얘기는 내가 듣고 그때 김대중 선생님이 오셔가지고 통화는 했어요. 뉴욕에 계실 때 여기 오신다고. 전화를 주셨다거라고 미국 오시면서 그 전화번호 다 형님들한테 미국에 있는 사람들 다 받아갖고 왔겠죠. 근데 그때 내가 나는 그때 시카고가 아니고 부페이지 카운티거든. 시카고 속하지 않고 써버브(suburb: 교외). 거기에 누가 살았냐면 김종운이라고 목포 사람이에요. 김종운이라고. 내 나이 아마 될 거예요. 내가 어, 대성동에서 그때 중학교 다닐 때 걔가 목고 댕겼든가 아마 그랬으니까. 근데 여기서 내가 만났거든. 근데 그때 김대중 선생님이 여기서 이틀인가 아마 계셨을 꺼에요, 내가 알기로는. 이틀, 모르겠어. 내가 확실한 건 몰라. 그때 내가 그 뵐 시간이 없었고. 또 통화하면서 제가 그랬어요. 내가 이거 미안한 얘기지만 뉴욕에 계실 때 여기 온다고 통화하실 때 내가 그랬어요, 선생님 저는 지금 미국 와가지고 애들 내가 넷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넷 데리고 왔는데 내가 지금 낮에도 세탁소 해야 되고 밤에도 또 청소 나가니까 또 애들 데리고 식구들하고 다 나가거든요. 금세 나가고 큰 거 한 두 시간이면 해 치우니까. 사이드 잡이니까. 그러고 그래서 쫌 그러고 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지금 여기 와서 이 아이들하고 먹고 사는 게 나는 이거 해결하는 게 저 지금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내 가장 시급한 문제고 이 아이들 내가 책임지는 것이 내 임무라고. 현재로서는 그것이 내가 애국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랬어요. 이것이 내가 애국이라고. 얘네들이, 이제 나는 애들한테나 기대를 해야지. 뭐 미국 와서 확실히 내가 더 느낍니다. 나는 애들을 위해서 하나의 밑, 썩어주는 밑거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저는. 내가 그랬습니다. 정말 죄송하다고 시간도 없고. 시간이 없다고 그랬어요. 참여 못합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신문을 보니까 김대중 선생님이 그 강연회를 하셨는데 신문 내용에 그러, 김대중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지금은 그분 어록이 됐어요. 여러분들이 미국에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자녀들 교육에 열중하고 하는 것이 애국하고 또 미국 시민권자로서 보답하는 거라고. 그런 말씀을 강연 때 하셨다고 신문 기사에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아, 선생님이 내가 한 얘기를 그래도 받아, 이해해주셨구나.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을 했죠. 그러고 내가 여기서 인제 산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때 신앙심이 많이 깊어져버렸어요. 이민 와가지고. 그전에 잃어버렸던 신앙심을 전부 회복하게 됐어요. 더군다나 시카고 와가지고. 77년도부터 시카고 와가지고 형님들 편지, 아버지 편지, 누님들 편지. 그게 교회 열심히 봉사하고 또 이민 생활에 할 게 없잖아요 교회밖에. 그래서 인제 많은 은혜를 받고. 정말 그렇게 인제 신앙생활을 했는데. 83년돈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시카고에서 한인회장선거가 있었어요. 이거 지금. 기록을 보면 나오겠지만 83년돈가 4년도 아마 그때에요. 내가 이민오가지고 처음으로 그 한인회장 선거가 경상도 하고 전라도하고 맞대결이 됐어요. 면담자 : 아, 83, 4년에요? 구술자 : 4년돈가 그때 그럴 거예요. 근데 그때 당연히 전라도 후보를 밀게 되잖아요. 뭐 이름이 거론돼서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그 경상도하고 전라도 맞대결이 돼서 아주 크게 붙었어요. 근데 내가 그 후보하고 어즈 식당에서 뒤에 그때 뉴코리아 식당이라고 있었어요. 여기 링컨에. 그게 뒤에 별실이 있었어요. 식당에서 거기서 정해림 후보에요. 그게 호남 후보였어. 그 강성호가 뉴코리아식당 사장인데 그분이 오산학교 내 일 년 선배거든. 황해도 사람이야. 근데 이제 정해림이하고 가까워. 그니까 정해림이한테 나를 소개를 하면서 별실에서 이렇게 선거 할 때 야가 많이 도와줄 거라고. 이렇게 해서 인제 딱 처음 이렇게 접촉을 시켰거든. 근데 그거를 인제 쩌기 반대 박중구, 경상도 후보 박중구, 그쪽 그 사람이 인제 그걸 봤어. 그러니까 인제 또 내가 정해림이 뭐 선거 돕는 사람이 되뻐린거지. 그래서 선거에 져뻐렸잖아요. 한 3백표? 280표든가 그때? 3백표라초. 그때 한 5,6천명이 투표자가 할 것이다 했는데 그래서 3천표면 이긴다 했는데 뭐야, 저쪽에서 동원을 너무 많이 해버렸어요. 조직적으로. 아주 조직적으로. 그러니까 정해림이는 인제 개인 돈을, 정해림이도 그때 돈 잘 벌었지만, 개인 돈으로 했지만 내 생각에 저쪽에는 정치적인 자금이 있었어요. 뒤에. 알아요? 이미 그 사람들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 60년대 혁명 나오고서부터 여기가 그 사람들 교두보 내린 데거든, 시카고가. 그러니까 벌써 70년대 지나고 80년대니까 완전히 저 사람들 세상이잖아요. 시카고가. 시카고가 그런 데에요. 그런데 면담자 : 정해림이라는 분은 여자분이신가요? 구술자 : 남자. 면담자 : 해림 구술자 : 해림. 그래서 이게 져버리니까 좀 열받더라고요. 그래, 또 뭔가 그래도 호남사람들이 규합해서 한인회라도 좀 장악을 해야되겠는데. 그래서 내가 그때만 해도 팔팔할 때니까 지금은 70이 넘었지마는 반란을 일으켰어요. 무슨 반란이냐, 써버브에다가 한인회를 맨들었어요. 써버반 한인회. 시카고에서 다 알아요. 써버반 한인회를 조직했어요. 시카고 한인회를 우리는 같이 안 한다. 어차피 이렇게 되면 저 사람들 세상이 되뻐리잖아, 시카고가. 그래서는 써버반 한인회를 조직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래가지고 이, 내가 이사장을 맡고 박문서를 회장으로, 한인회장으로 추대하고. 또 내가 이사장 맡으면서 또 민원봉사실장까지 맡았어요. 그래가지고서는 바로 그 해에 그해 추석에 내가 뭘 해뻐렸냐면, 내가 이걸 아이디어를 낸 거지. 추석맞이 경로대잔치. 그러니까는 이게 미주 이민사회에서 추석맞이 경로대잔치는 미주 이민사에서 처음이야. 이민사에. 이거를 내가 생각을, 왜, 효 사상은 우리 동양사상이고 유교사상이고. 종교 사상보다도, 효 사상은 기독교 사상이기도 하잖아요. 또 내 가훈이 충효미동입니다. 내 지금도 충효미동, 충성 충자, 효도 효자, 아름다울 미자, 아이 동자. 충과효는 아름다운 아이동자 거든 아름다운 어린 아름다움이다, 깨끗한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그걸 했는데 신문에 광고 전면광고 때리고. 추진을 했는데 준비위원장 맡아가지고 추진을 했는데, 시온 장로교회 저 ○○○ ○○던 141111조철규01_01:39:01 시온 장로교회를 빌려가지고 했는데 그때 한 천여명 모였어요. 이, 어르신들. 또 일반인들, 교인들. 그때 노래자랑, 노래자랑하고 또 땐스파티하고 또 어르신들 국악에 맞춰서, 그때 뭐 여기 그런게 있었거든요. 고전무용. 그런 분들 와서 고전무용 춤도 추고. 북, 장구 치면서 그래서 노인들 덩실덩실 춤추고. 그래서 그때 신문에 일면으로, 그 신문 지금도 그런 기록은 다 가지고 있지 다 있지, 내가. 요 다음에 자서전 쓰면. 그러고 인제 뭐 도네이션을 에, 한인 가게에서 한 백 오십 업체? 소소한 가게에서 한 백오십명이 도네이션을 받았지, 기부를. 뭐 가게 하는 사람들 안 하는 사람들. 뭐 직장 가진 사람 뭐 가게 한 사람들은 뭐 물품으로 내놓고. 처음으로 시카고 역사뿐만 아니라 미주한인 역사상 처음으로 그런 잔치를 도네이션 받아가지고 상품으로 주고. 그때 텔레비전이다, 뭐 그릇이라든가. 생필품. 처음한거지 처음. 그래서 성공을 시켰죠. 그니깐 인제 시카고 한인회가 납작하게 되버렸거든. 면담자 : 그때 써버반이라고 아까 말씀하셨죠? 거기에는 한인들이 몇 분정도 계셨나요? 구술자 : 써버반 한인회 면담자 : 계셨나요? 구술자 : 그때는 이미 80년대니까, 70년대 십년은 로렌스에서 살고 뭐 했지만 다 돈벌어가지고 집 사가지고 전부 시외로, 시외거든. 여기는 시카고에 안 속할 거야,아마 여기가. 여기는 그린뷰(Glenview)? 다르지, 다른 실껄 아마. 시카고에 속하나? 여기도 카우니(County)가 아니지. 여기는. 여기도 시카고. 시카고만 이렇게 되어 있고 인제 뭐 스코키(skoki). 에반 스톤(Evanston) 전부 다른 도시잖아요. 그래서 서쪽으로 해서 교외지역을 써버브라 그러거든. 그니까 시카고만 빼놓고 시카고 한인회니까 교외 지역을 통털어서 써버브라고 그러거든, 써버브. 써버브라고 그러거든. 그래서 써버반 한인회를 인제 조직을 했지. 그래서 이사가 한 이십 명 모였어요, 이사로. 이사로 한 20 영입하고. 그래가지고 그 행사를 때려버리니까. 시카고가 한인회가인제 쏙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2년 남짓하고 문을 닫았어요. 우리가 그 빌라 파크에다 한인회 간판까지 다 걸고 사무실 내고 사무실 개소식 할 때 각 교회에서 뭐 다 참여하고 목사님들이, 화분 보내주고. 그런 열기가 없잖아 있잖아요. 그 시기기 그런 험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 속에는 다 이런 게 있다고 더군다나 목사님들. 그래도 목사님들, 신앙생활하는 목사님들은 이 속에 바른 게 있잖아요. 교단을 떠나서. 더군다나 또 감리교가 그런 게 심해요. 감리교가. 그래서 인자 화려하게 이러게 출범을 했는데, 또 그렇게 때려버리고. 왜 문을 닫았냐. 이 박문서라는 사람이 여기 와서 만났어요. 근데 그 학교 디스트릭(District: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인컴도 괜찮했고, 고정인컴이고. 교육공무원이지, 말하자면, 한국으로 말하자면 선생은 아니지만 학교 그 한, 45 스쿨 디스트릭 포디파이브가(45st. School District) 학교가 한 너댓개 되거든. 중학교, 고등학교 뭐 해가지고 이 건물 관리를 하는 책임자였거든. 그니까 거기 일하는 사람들도 몇십 명 되고. 그니까 그라고 또 시간도 있고. 걔를 인제 회장을 시켰는데. 내가 교회에서 만났거든. 왜 그만 뒀느냐. 나중에 털어놓은 거예요. 나중에. 자꾸 못 하겟다고 못하겠다고. 결국은 인제 요점이 뭐냐면 새벽 한 3시 되면 전화가 온대요. 그때는 셀폰 없어, 아마 그때 셀폰 없었어요. 내 생각에는 전부 여 홈폰이지 새벽 한 3시 되면 전화 와가지고. 너 오래 살고 싶어? 너는 철판 깔았어? 쑤시면 안 들어가? 이러니 잠자다 말고 전화 받으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니까 그런 말을 못한거야 처음엔 나한테도. 얼마나 얘가 공갈을 받았는지 뭐 너, 이런 말 발설하며는 더한 공갈도 했겠지. 그니까 얘가 참다 참다 못하니까 그 부인이 나한테 말한 거야. 아무래도. 그걸 실토를 하는거야. 이래서 정말 더 이상 못하겠다고. 어떻게 이러는데 하겠냐고. 알아요, 무슨 얘긴지? 그러니 어떻게 해 못하겠다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 이미 그게 소문이 퍼졌다. 그런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거예요. 자기는 말 안 한다고 했지만 그 소문이 퍼진 거야. 나한테는 말 안 했지마는 옆에 사람들한테는 상의를 했겠지.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이 그러는데 어떡해요 더 이상 버틸 수 없고 다른 사람 할 사람도 없고 또 다른 주위 사람들한테도 그런 짓거리는 안했지만 그 포섭을 했나봐요. 그 주위의 임원들한테. 야, 시카고 한인회가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깨버리면 뭐가 되냐. 인제 그런데다가 나중에는 목사님들도 그러더라고요 이런 상황에서 뭐 더 이상 뭐 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 그니까 시카고 한인회하고 그냥 같이 좋게 지내는 걸로 나가는 게 좋겠다. 이렇게 해서 2년하고 문을 닫고 나는 인제 시카고 한인회로 합류하게 됐죠. 그래서 시카고 한인회에서 내가 이사회 간사장을 맡았어요. 어, 그러니까 86년서부터 90년? 면담자 : 그, 예. 선생님 이야기를 쪼끔 더 집중을 하기 위해서 그 제가 질문을 다르게 쪼끔 드려볼게요. 80년에 선생님께서는 5·18과 관련해서는 이제 그때 당시 기도회에 참석을 하고 그 이후에 김대중 선생님이 여기 인제 미국에 그 오셨을 때도 이렇게 직접 이렇게 만나뵈지는 못했다 말씀하셨는데 그 이후에 인제 선생님께서도 여러 뭐 통일운동에 관여를 하시고 그리고 인제 한인회뿐만이 아니라 통일 운동에도 관여를 하시고 또 5·18이 매년 시카고에서 기념 추모 행사 그런 게 좀 진행된 것으로 좀 알고 있는데요. 좀 그 부분에 좀 포커스를 맞춰주셔서 5·18, 지속적으로 이렇게 5·18 추모 행사를 했던 것에 부분에 대한, 대해서 선생님이 좀 어떤 역할, 담당하신 역할이 있으시면 그 부분하고 그리고 지금 뭐 6.15 공동선언 뭐 그쪽 상임위원장도 맡으셨고 통일운동도 지속적으로 지금 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쫌 역할을 하셨던 그 부분을 좀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구술자 : 그리고 그때는 그 이후로 80년대는, 70년대 그렇게 지나고 80년대에 뭐 완전히 그때는 80년대 암흑이었죠. 80년 그, 그 당시는 뭐 완전히 무슨 활동 할 수도 없었고. 그 사람들 세상이었으니까. 그러고 호남 향우회가 이 90년 들어서면서 사실상 그 저 활동을 못했습니다. 이름만 있었지. 참여를 안 해줬어요. 그러고 김대중 선생 왔다 가시고 나서 83년도부터선가 인권문제연구소하고 연결이 됐어요. 인권문제연구소하고. 그래서 인권문제연구소 시카고에 인권문제 연구소가 그때 내가 시작한 걸로 되고 내가 그때 인권문제연구소 관여한 게 그때서부터에요. 83년서부터 내가 인권문제연구소 관련했나봐요. 음. 그러고 그러고 인제 그 후로는 뭐 궈 그 사람들 세상이었고 한인회고 뭐고 전부 그 사람들 세상이었고. 나도 한인회 한 4년 관여하다가 인제 그냥 나왔고. 그리고 인제 다시 이제 시작하게 된 거는 인권문제연구소가 그대로 계속해서 월례회로 만나고 이렇게 그 통로가 됐고. 그러고 93년도든가? 한국에 그때 대선이 있었어요. 93년도로 넘어가야 되요. 88올림픽, 한국에서 그때 86년, 6.29 선언이 있었고 그러고 노태우로 넘어가서 88올림픽을 치렀죠. 그러고 그때 88 올림픽 치고 전두환 때가 올림픽 되기 전까지 80년대 초반은 전두환 세상이었고 그러고 80년대 후반에서 92년도까지는 노태우 세상이었거든요. 근데 그때 전부 인제 이 향우회고 뭐고 여기 뭐 향우회 회장했다는 사람들 뭐 했던 사람들 그때 뭐 향우회 회장할 때 김대중선생이 80년대 와서 뭐 했다는 분들, 솔직한 얘기로 전부 다 회색돼버렸어요. 전부 회색돼버렸어요. 다 저쪽 편으로 다 가버리고. 이렇게 인권위원이다 남은 사람들은 몇 사람 안 된 걸로 알고 있어요. 별로 활동도 뭐 없었구요. 그래서 다들 그때 뭐 평통들 개입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 가지 참 여기서 짚고 넘어갈 거는, 내가 한인회 이사회 간사장 할 때, 80... 86년도던가? 아까 이사회 간사장 할 때 한 4년 했는데 그때 내가 평통 자동 패스로 평통 위원이 될 수 있어요 한인회 이사장, 부이사장, 간사장, 한인회 회장, 부회장, 사무국장. 이 여섯 명이 자동패스거든. 근데 그때 한인회하고 평통하고 연석회의를 했어요. 총영사가 와가지고. 골프대회, 골프대회를 하고 저녁 디너 먹으면서 총영사, 평통, 한인회. 한인회 주최로 해가지고 한인회 주최니까 내가 그때 준비하고 해야 되잖아요. 그때 신라식당이라고 있었어요. 지금 없어졌지만. 평통위원들하고 한인회 임원들하고하는 자리에서 내가 술 한잔 먹고 평통위원 된 거지, 자동 패스니까 들어가야되는 거지. 그게 내가 그랬어, 총영사님한테. 이승곤 영사, 내가 잊어버리지도 않아, 이승곤 총영사. 그때 그랬어. 평통이라며는 똥통이라고 그런다. 옆에만 가도 냄새 난다고 그러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도 옆에만 가면 냄새날 것 같다고. 어. 나는 한인회 이게 간사장이기 때문에 자동케이스로 평통위원이라고 그러는데 나는 평통위원 안한다고 못한다고. 그런 발언을 해버렸죠. 술 이렇게 먹고. 그러니까 이게 난리가 나 버린 거예요. 그러고 그때 인제 한인회를 내가 나왔죠, 자동으로.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내가 왜 그걸 못 봤냐며는, 남들은 그걸 뭐 호남 향우회장이고 이사장이고 못 들어가서 야단인데, 솔직한 얘기에요. 전두환이가 광주 5·18 사태, 광주 짓밟아놓고 평통 맨들어 버린거 거든. 평통 맨들어가지고 감투 하나씩 준거 아닙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내가 받냐고. 내가 시카고로 와서 76년에 시카고로 와서 내가 신앙생활 한 것도 광주사태가 나서 내가 다시 교회 가고 신앙생활 한 거예요. 어. 예수님이 따로 없더라고.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이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그러는데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이 뭐에요 예수님이지. 내가 그래서 이 광주사태 이후로 신앙생활을 한 겁니다. 내가 어떻게 그 평통을 받아. 그래서 내가 한인회 간사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나 그거 안 한다고. 그게 그래 난리가 나 버린 거죠. 그래 그게 영사관에 그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그러더라고 빨간 딱지가 올라와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고요 시카고에 왔는데 이 조직들이 있어가지고요 내가 그 71년 대선 때에 뭘 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알고 있었어요. 나는 몰랐는데. 네. 그러고 그러고 이제 80년대, 90년대, 93년도엔가 김영삼이하고 김대중 선생하고 대선에 그때 뭐 해가지고 또 떨어졌잖아요. 그러고 정계은퇴하신다고 그러고 유럽으로 떠나시고 그런 사태가 나버리니까 인제 ○○났죠. 141111조철규01_01:55:23 어. 그러니까 여기서는 다 인제 죽은 목숨이 된 거예요. 그니까 이 속에 남는 거는 예, 분한 거 밲에 남은 게 없죠. 어. 내 젊었을 때 나이 30에 어떡하다가 정말 내 마음, 또 내 마음이 있으니까 형님들이 원하고 해서 참여해서 뭐 그 뒷바라지 했는데 그걸로 해서 내가 뭐 좀 뭐도 좀 받았고. 그러니까 이 속에는 그것밖에 없죠. 그러니까 신앙생활 할 수밖에 없어요. 그거를 교회 가서 우는 거예요. 우는 거예요. 새벽 기도할 때 우는 거예요 생각만 하면 우는 거예요. 그러고 아이들하고 그런 얘기 하게 되죠. 아이들이 인제 이런 얘기할 데가 없으니까. 그때 아이들이 커서 인제 중학교, 고등학교 댕기고. 그러다가 뭐, 그러다가 김대중 선생님이 예, 다시 정계에 복귀했어요. 그래서 97년 대선 치었죠. 근데 96년에 아태평화재단 설립한다고 그런 연락을 받고 그때 아태평화재단 후원회 후원이사가 됐죠. 그때 내가 안 할 수가 없죠. 다시 와서 하신다면야, 응? 눈이 번쩍 뜨이잖아요. 그래서 그때 인제 아태 평화, 그때 내가 그 후원이사 위촉장 받은 게 지금도 있죠, 그대로. 그러고는 이제 97년에 대선에 나오신다고 그러니까 인제 그때는 다들 안 된다고, 그때 김영삼씨한테 떨어져 안된다고. 다들 그때는 없었습니다. 솔직한 얘기가. 근데 아니다, 이건 마지막인데 마지막인데 뭐 이판사판이지 떨어져도 그뿐이고 마지막인데 최선을 다해서 한번 이길밖에 없다 인제는. 그래서 그때 대선 후원회를 조직을 했어요. 인권위윈이 그때 주축이 되가지고 했는데 대선후원회장에 이홍미변호사입니다. 이홍미 변호사. 목포 사람이에요. 우리교회 같은 교인이에요. 에즈베리 감리연합교회 교인이에요. 또 그래서 내가 이홍미 변호사를 내가 사정을 했죠.누구 맡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때 인권위원회 배준영이가 있었고, 배준영이가 인권위원회 있었고, 여기 인권문제연구소 배준영이가 그때 소장이었을 때. 그니까 배준영이도 또 내가 얘기하니까 그렇게 했고 삼고초려를 했지 나도 그러고. 내가 또 같은 교인이니까 해서 대선후원회를 맨든거예요. 그니까 이제 후원회로 모였을 때 그때 뭐 호남향우회 회장 했다 뭐했던 사람들 거기 하나도 안 들어왔습니다. 그땐 들어올 사람이 없었어요. 뭐 평통도 부회장까지들 하고 다 감투들 쓰고. 대선후원회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그때 인제 오유광씨가 인제 여기 한번 다녀갔죠. 대선 전에 오유광씨가 한국에 김대중 인제 후원회 회장 맡았었거든요. 그래서 한번 모임 가졌어요. 모임 가지고 사진 찍고 모임 갖고 디너 한번 같이 먹고 그때 인제 오유광씨랑 후원회 조직해가지고 그 후원회 결성 한국 오유광씨가 가서 했죠. 그러고 인제 후원회 대변인을 맡았지. 그래서 이제 하는 일이 뭐였냐면 남들은 몰라요 남들은 모르는데 그 뭐 인쇄물 만들고 그런걸 전부 우리 교회에서 했거든 내가 그런 걸 다 했지. 우리 교회 그 컴퓨터 같은거 다 있잖아요.그때만 해도 컴퓨터 쓸 때니까. 97년도만 해도. 막 인쇄물이고 뭐고 전부 인제 교회에서 카피 맨들고 다. 한거죠. 근데 이제 마침 우리 교회가 이회창 후보의 후원회장 장기남이도 우리교회 교인이에요, 경기 출신인데. 그니까는 우리 교회, 교회가 대선후원회가 이회창 후보 후원회장도 우리 교회에가 있고 비프음 면담자 : 잠시만요, 선생님 <이후 영상 없음> 구술자 : 그리고 인제 대선 후원회가 조직되기 전에 사전조직으로 아태, 아세아, 뭐야 아태평화재단 그게 여기가 조직되어 있죠 시카고에가. 아태평화재단 후원회. 그게 인제 97년 봄에 그게 조직이 되고 거기에 또 내가 그, 내가 조직하고 어, 수석부회장과 대변인을 내가 또 맡았죠. 중요하잖아요 대변인 항상 언론 상대해야되고 그러니까. 그러고 인제 97년 그때 가을에 후원회가 인제 조직이 되고 먼저 아태평화재단 후원회가 먼저, 아태평화재단이 먼저 여기도 조직이 된 거죠. 한국에 함과 동시에 내가 후원 이사 위촉장 받고 그러고 인제 시카고에 와서 조직을 한 거죠. 그러고 인제 후원회가 가을에 조직 되고. 면담자 : 선생님 그 쫌 다른 질문을 좀 드릴게요. 그 5·18이 일어나고나서 인제 81년부터 시카고에서도 5·18 관련된 추모제를 매년 꾸준히, 어찌됐건 한해도 빠지지 않고 진행을 해온 걸로 알고 있거든요. 5·18 민주화운동 기념추모제 뭐 해가지고 시카고에서 진행을 해온 걸로 지금까지는 진행해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알고 계시는 내용들이 있나요? 구술자 : 내가 알기로는 그 전에는 내가 모르고, 이 국민의 정부 들어서고 나서 들어서고 나서 그러니까 그 한인회에서 한인회에서 그 기념식을 했는데 그 전에는 내가 잘 모르겠어요. 면담자 : 그니까 이제 김대중 이게 이제, 5·18 특별법에 의해서 국가 기념일로 인제 재정이 되고 나서부터는 뭐 인제 한인회도 참석을, 한인회 주최로 이걸 하기도 하고 뭐 했었는게 그 이후에는, 그 이전에는 그니까 이게 아직은 어, 그 국가기념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 여전히 폭동, 폭도, 사태로 인식이 됐던 시절에는 어, 한청련 중심으로 관련 행사를 좀 전개를 했던 것 같애요. 구술자 : 한청련? 민통련이 있었죠. 민통련? 한청련이 민통련인가? 면담자 : 미주 한청련. 재미 한청련 중심으로 구술자 : 그때 민통련이 어떻게 생겼냐며는 김대중 선생님이 81년도 망명왔었을 때 뉴욕에 계실 때 아마 그게 조직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고 바로 이어서 인권위원이. 나는 인권위원으로 그 연락을 받았거든요. 그러고, 민통련이라고 뜰거예요, 그때 민통련이라고 했는데. 그때 김대중 선생님이 그때 의장직을 수락 안 했다고 그런 얘기를 내가 들었습니다. 면담자 : 그러니까 민통련까진 아니었었고 그 남한 정부에 의해서 좀 반국가 단체, 이적 단체로 그렇게 좀 낙인이 찍혔던 미주 지역에 있던 한청련 중심으로 5월 관련 그런 추모 행사를 계속적으로 좀 지속을 해왔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구술자 : 글쎄 그 얘기는 내가 잘, 거기는 멤버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면담자 : 그 이후 국민의 정부, 인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나서부터 이게 공식적으로 한인회에서 좀 맡아서 이렇게 진행을 하고 5·18 관련 행사를. 지금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요? 구술자 :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원래 그 영사관에 옛날 또 문화원? 문화원, 교육원? 뭐 이렇게 영사가 나와 있고 아마 문화 교육 마당집이라고 그러죠. 지금은 마당집이라고 그러는데 그 전에는 교육문화원이라고 그랬던가? 그런 명칭이었죠. 그래서 거기서 인제 그 주최를 하고 호남향우회하고 같이 아마 주최를 하는데 그때서부터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한인회에서 하는 거는. 면담자 : 선생님은 호남향우회에 안 들어가 계십니까? 구술자 : 인제 그 다음, 인제 그니까 대선이 그렇게 끝났잖아요. 대선이 인제 생각지 않게 당선이 됐잖아요. 그때, 그때는 호남향우회가 활동이 없었어요. 명예만 있었지. 근데 나는 대선이 끝나고 나서 바로 그 축하광고를 나가야 하는데, 준비를 했는데 이렇게 해서 호남향우회 회장 이름낼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호남향우회가 뭐 이렇게 말하자면 해체되다시피 해뻐린거죠, 한 10여년 동안을. 대선 끝나고 나서 98년에 다시 향우회를 다시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때 처음으로 부이사장을 내가 맡었죠. 호남향우회가 그때 다시 살아난 거예요. 면담자 : 그 전부터 그럼 활동은 호남 향우회가 활동은 거의 미비, 언제 호남 향우회가 처음 시카고에 만들어지게 됐었나요? 구술자 : 그거는, 나는, 내가 조직한 것은 대선 끝나고 나서 해체되었던 한인회를, 활동못하고 있던, 완전 해체돼버렸으니까. 회장이 없었으니까. 대선 끝나고 나서 다시 복원했죠, 호남향우회를. 면담자 : 예전, 예전부터 호남향우회가 한번 설립은 됐었는데 구술자 : 있었지 있었지. 면담자 : 중간에 활동을 해오다가 뭐 활동을 못했던 시기기 십여 년 정도 있었다라는 말씀이시죠? 구술자 : 십여 년 가까이, 내 생각에는 십여 년 가까이 뭐 유야무야 다 이름만 걸어놓고 향우회라 회장이라 했지마는 활동을 안 했어요. 못했어요. 안 했는지 못했는지 전부 뭐 평통 회원들 되버리고. 평통 회장 뭐 부회장, 회장은 다른 사람이고 부회장도 다 공, 부회장은 여럿이니까.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면담자 : 선생님께서 호남 향우회 이사, 이사장? 그... 구술자 : 다시 복원하고 내가 부이사장. 면담자: 부이사장. 그때가 97년인가요, 그럼? 구술자 : 98년에 했죠. 예. 새로 호남 향우회가 다시 시작한 거예요, 그때서부터. 그러고 이제 뭐 그때는 참 그 뭐야 그 대선 끝나고 인제 대통령 그 취임식 있잖아요, 대통령 취임식, 98년 6월달에 그때 인제 시카고에서 참여 했던 사람들 한 이십여명 갔죠. 참석 했고. 그때 인제 내가 인수위원회에 들어갔죠. 삼청동에. 그때 인제 아태평화재단 두 멤버들하고 들어갔는데. 그때 내가 뭘 해가지고 갔냐면 아태평화재단 계통으로 해서 나한테 연락이 왔어요. 대통령 시카고 방문 청원서 그거를 만들어라는 거를 연락을 받았어요. 대통령 시카고 방문 청원서. 그래 왜 그러냐 했더니 그 전에는 대통령이 이렇게 오며는 이렇게 그냥 가겠다, 이렇게 미국 승인 받아가지고 아마 시카고를 방문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혹이 있었다며는 김영삼 대통령은 왔다 갔어요, 한번. 근데 그때는 그런 방문 청원서가 없이 아마 그런 뭐가 있나봐요. 그래서 그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걸 급하게 맨들었는데 한인회 가서 한인회장, 이사장 또 중요 단체들 그때 중요 단체가 뭐있냐면 재향군인회, 또 상공회의소, 또 내가 상공회의소도 이사로 관여했으니까. 상공회의소, 또 간호사 협회, 또 체육회, 한인회 사회에 또 체육회가 있거든요. 체육회. 예, 각 도민회, 각 도민회, 또 세탁협회, 하여튼 큰 단체들은 전부 끌어 모았는데 그때 한 열댓 단체가 됐어요. 시카고 단체라는 게. 근데 그때 영남향우회만 안 해주더라고. 전부 초청장, 시카고 방문 청원서 이걸 전부 맨들어서 프린트를 해가지고 이렇게 써가지고 서명하잖아요. 한인회장이 하고 한인회장부터 먼저였지, 부회장이 하고 이사장이 하고 부이사장이 하고. 그 한인회 집행부 등재하거든. 그러고 인제 그거 받아가지고 재향 군인회 가서 재향 군인회 송양호, 재향 군인회 송양호. 그걸 직접 댕기며 다 받었지. 근데 영남향우회 가니까, 상공회의소하고 영남향우회가 안 해주는거야. 그래서 내가 왜그러냐 그랬더니 자기맘대로 못한다는거야. 그래서 내가 알지. 자기 맘대로 못한다고 그래서 곽길동씨를 내가 직접 만났지. 면담자 : 그 회장이었습니까? 구술자 : 박길동씨가 말하자며는 대부라고 보면 되요. 이쪽에 경상도 대부라고 보면 되요. 군사 혁명 나 오기 전에 아마 먼저 와있었던가 그럴 거예요. 내가 와서 만나, 한 70년대 초에 시카고 왔을 거예요. 내가 이 한인회 하면서 그 사람이 이사장을 했거든. 이사장하고, 그분 이사장하고 내가 간사장 하고 그럴 때니까. 음...내가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이게 다 끝났고 이회창씨도 이렇게 축하화환을 보내고 그랬는데 왜 이렇게 교민사회가 다 이렇게 하는데 영남향우회만 빠지면 되느냐. 그랬더니 정서상 영남향우회는 할 수 없다. 이거야. 영남 사람 정서상. 아니 정서라니 국가 화합차원에서도 그렇고 이런 예는 없다고. 내가 사정했어요. 그래서 정서상 할 수 없다고. 정서를 이런 영남 정서를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그걸 모르냐, 알죠 얼마나 그 7대 대선때 그 지역감정이 동서로, 동서의 지역감정이 얼마나 심했는가는 앞에도 내가 진술했지만 예, 그것이 역력히 그, 그사람이 맨들어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아니 대통령 축하 광고 나간다 할때도 그거 안 해줬거든. 축하광고 다 그렇게 내보냈거든요. 근데 그것도 안 해서 영남향우회는 빠졌어. 그 내가 원본을 가지고 있어요. 그 내 대변으로 해가지고 내가 다 만들어서 내보냈으니까. 그 신문 그대로 가지고 있지. 글고 청원서. 청원서 그것도 내가 카피그대로 가지고 있고. 지금도. 갖다 제출했지만 가지고 있고. 그것도 못해준다는거야. 아니, 신문에 나가는 거니까 그렇다 그러자. 신문에 나가는 거니까, 다 보니까. 그렇지만 이거는 신문에도 안 나가고 바로 청와대로 들어갈 건데. 청원 방문 해달라고 청원서 요청, 못한다는거예요. 그래서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축하 광고에도 영남 향우회만 빳고 상공회의소하고 빳고. 그러니까 시카고를 완전 잡고 있었죠. 그래서는 빠져있습니다. 그 원본 그대로 있어요 지금 내가 카피를 갖고 있어, 원본은 제출했지만. 그래서 그 청원서를 다 맨들었어요. 컴퓨터로 다 합하니까 이렇게 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인제 그 취임식 한 2주 전에 갔어요. 가서 연락해놓고 인제 인수위원회 삼청동 가니까 아태평화 재단 임원들이 회장하고 둘이 따라붙었는데 공항에 가니까 그 어느 분이 와서 어느 분이 내가 가지고 들어간다 그랬거든요, 그랬드니 나 그냥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해줬어요 12시에 아태재단 사무실, 동교동 동교동에 있었거든요 아태평화 사무소. 동교동에서 12시에 만나자. 그 황용배 사무처장 황용배 처장 나오고 그때 연락해놨으니 그때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죠. 그러고서는 이제 그 원본을 제출했더니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가지고 있다고. 그러자 인제 인수위원회를 들어오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다음날. 그랬더니 인수위원회를 걔네들 따라오더라고, 갔더니 그 박지원씨가 그때 앞에 있더라구요. 앞에. 근데 그 박지원씨는 뭐 좀 그 인척관계가 되요. 저하고 사돈정도 관계가 있어요. 그 조카 사촌동생이 내 장조카, 조카 사위에요. 그니까 그 박지원 의원 그 큰 사촌동생이 지금, 지금도 LA에서 목회하고 있고 또 그 형님이 LA에서 메리야스 공장을 사우스아메리카에다 공장을 두고 그 사업을 했거든. 그래서 조카도 LA도 가고 그랬는데. 박지원씨가 삼촌 들어갔더니 그때 연락해놨으니까 다 통과됐드라구요. 마지막에 다 들어가서 한 30분 들어가서 인제 그 김윤건씨가 그때 있었어요 비서실장으로. 인수위원회 시절에. 다른 사람은 못들어가고 나만 그 안으로 인제 들어가서 제출하고 그 청원서 제출하고 그러고 나왔는데 그때 이제 또. 그러고 나왔는데 두 사람 인제 따라온 사람들이 뭐 이런 말은여기서 안 하는게 좋지. 시카고 가서 뭐 같이 들어갔다고 그래야 된다고 그래, 그래서 같이 가서 뵜다고 그래야 된다는거야.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지. 면담자 : 같이 따라, 같이 가신 분은 소속이 뭐 어디였나요? 구술자 : 그때 여기 아태 평화재단 여기 지회장이지. 지회장하고 그때 여기 총무인가 같이 갔는데 근데 거기서 나만 데리고 들어가고 김윤건 실장이 와서 나만 데리고 들어가고 인제 박지원씨 통해가지고 안에까지 같이 들어갔는데 거기서 안에 한 삼십분 기다리니까 김윤건씨가 나만 데리고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기다리라 그러니까. 내가 가방 들고 나만 들어갔지. 면담자 : 뭐 특별한, 그 안에서 뭐가 있었습니까? 구술자 : 뭐 그거는 인제 말할 수 없고. 그래서 인제 안에 사무실 들어가서 인제 김실장 그 안내 받고 들어가서 청원서 드리구서는 한 이십분 거기서 인제 있다가 나왔어요. 밖으로 나왔는데 그 다음날 얘기가 시카고 가서 같이 들어갔다는, 그렇게 해야된다는거야. 내가 그랬지 나 못뵜다. 안 계셨다고 아무도 없었다고 내가 누구를 봤냐고 아무도 못봤다고 그랬어. 아무도 없었다고. 그런데 뭘 누구를 봤다고 그래? 말하자면 인제 대통령을 독대했다는 거를 같이 했다고 얘기를 하라고. 그것도 들어갔는데 근데 왜 이렇게 오래 있었냐. 나 차 한 잔 마시고 그거 드리고 나왔다고 아무도 못 봤다고. 그러고 그때 이제 마포 그 할러데이인? 거기가 우리 숙소가 있었는데 아유, 그런 말 하면 거기서부터 뭐 그 불량배들 데려와 가지고 어디서 또 서울에 그 사람들 믿을 사람이 없어요. 괜히 그 겁주고 그러더라니까요. 호텔에 들어와가지고. 면담자 : 어디에서 보낸 사람들인가요? 구술자 : 호텔방에를 들와서 내 이런 말. 뭐, 하여튼 그 난장판을 치더라구요 면담자 : 김대중 정권에서 보낸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다른... 구술자 : 아니지 다른 사람들이지. 여기서 같이 간 사람들인데. 그러고 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며는 미국에서도 그 거기에 초청장 못받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도 거기 입장할라고 많이 애썼는데 그 사람들도 없어서 못하고 그랬는데 거기 현지인을, 현지인 친구들을 거기 입장시키게 할라고 그걸 하는 거예요. 그래서 노, 안 된다고 했지. 미국, 혹시 시카고에서 온 사람들도 몇 사람이 거기를 취임식을 못 들어가고 있는데 초대장이 없어서.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면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알아, 그 사람들 두고 여기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내가 거절을 했거든. 초청장 발부를 못한다고. 그랬더니 인제 그런 그 행패를 인제 당하고 그랬죠. 그러고 뭐 뭐, 우리는 뭐 그 한이라는 거 이런 거는 인제 풀어졌죠. 대통령 당선되고 민주정부가 이루어졌으니까. 그러고 나는 그때도 경로를 통해서 정부에다 그랬어요. 평통은 폐지해야 된다고. 이건 폐지해야 될 첫 번째 조건이라고. 내가 그랬어요, 바로 이게 5·18 희생의 피라고. 이걸 팔아먹은 거라고, 전두환이가. 알겠습니까, 무슨 얘긴지. 이걸 알아야되, 우리가. 그런데 내가 나중에 답변 듣기로는 어떻게 들었냐면, 그렇게 해놓은 것을 지금 그걸 뺏어버리면 인제 정치라는 것이 그걸 크게 생각하고 그러는 게 지금 그걸 없애버리면 이게 좀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는데 어떻게 해요. 나는 끝까지 나는 철회했어요. 노, 평통, 김대중 정부에서도 노. 그게 아마 내려왔든가 그래요. 내려왔든가 하는데 내가 노, 거절했어요. 절대 평통은 내가, 내가 못한다고 끝까지. 그래서 그게 거기까지 내려오고. 90, 그러고 인제 뭐 좋은 세상이 지나갔는데 이천, 몇 년입니까? 또 바로 그 끝나고 노무현 또 했잖아요. 그때 노무현 때도 이 2002년도에 대선후원회가 조직되기 전에 연청이 그때는 조직됐어요. 연청, 청년 연합, 연청 있잖아요, 민주당 연청. 연청이 2002년 봄에 여기 조직이 됐죠. 사전조직으로. 그러고 가을에 인제 연총례가 또 그때도 내가 부의장 맡고 대변인 맡고. 회장을 그때 명천애가? 하고 141111조철규01_02:22:50 그때 사전 조직했고 그때 배기선의원이 여기 댕겨가셨고. 어, 그 조직 때문에. 그리고 인제 대선후원회가 할 때, 그때도 호남향우회 뭐 회장단 뭐 어, 별로 뭐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도 인제 잠실 체육관에서 연청이 조직되고 바로 4월 달에 잠실 체육관에서 그 마지막 전당대회, 후보 결정하는 전당대회가 있잖아요. 있었거든요 4월 28일 날, 2000 그때가 2002년 4월 28일 날 장충, 잠실체육관에서 마지막 후보 경선.그게 있었죠. 정동영 후보 하고 노무현 후보하고. 그때 연총 여기 인제 회장하고 나하고 둘이서 시카고 대표로 나갔는데 그때는 무슨 자격으로 거기에 참여했냐면 새천년민주당 대의원 전당대회 대의원 그 그거를 주더라고요, 그 증을. 그때 새천년 선거대책위원장이든가 새천년, 아이고...그래서 그때 대의원으로 그때 몇 차례 그건 참여했죠. 그러고 인제 끝나고 그때 처음으로 노무현 후보 끝나고 만났고. 그러고 대선후원회 무사히 이끌고 또 그때도 성공적으로 정권창출을 했어요. 그러고도 나는 다른 사람 다 평통 들어가는데 나 안 들어갔어요. 그때는 인제 김대중 선생 때는 평통회장을 갈지 뭐, 나는 신경 안 썼으니까, 나는 없애자고 한 사람이니까. 근데 노무현 때는 평통 회장을 우리 쪽에서 넣었죠. 노무현 때는. 우리 쪽에서 넜어요. 그거 없어지지 않은 거니까. 그래서 우리 후원회 같이 했던 황경용씨를 황경용씨를 평통 회장으로 밀어가지고 회장이 됐습니다. 그때 김상곤, 김상금 의원이 평통 회장 하실 땐가, 부회장 했던 때인가? 그게 처음으로 평통을 노무현 대통령 되고 나서 우리 쪽에서 맡은 적이 처음 있지요. 한번. 그러고 여기가 6.15는 2006년? 2006년인가, 6.15롤 그때 인제 또 연락을 받았어요. 해야된다고 그래서는 할수 없이 또 나섰죠. 그래서 내가 그때 준비위원장 맡고 해가지고 신문에 광고, 인제 전면광고를 한 달 앞두고 내보내고. 그때 34명인가 준비의원이 됐는데 준비위원장 맡아가지고 6.15 공동선언 실천 인제 준비위원회. 그거 해가지고 결성하는데 처음에 장소를 예약했는데 그것도 장소를 못 주겠다고 아또 무슨 압력이 들어왔나 안 된다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장소도 이리 옮기다 저리 옮기다가 대북경식당 한쪽에서 결국은 결성, 그날 결성을 하고 내가 인제 초대 위원장이 되고 그때 공동 위원장, 대표위원장이 되고 그러고 그 해에 내가, 그 해에 내가 그 되고 나서 5·18 기념식 때에 가며는 이건 뭐 기념식인지 무엇인지, 말하자면 5·18을 오히려 훼손하는 것 같애, 기념식 하는 게, 한인회에서. 그래서는 내가 그 공동위원장 되고 나서 한인회 5·18 행사때 가서요, 시카고 선언이라고 해서요. 어, 앞에 나가서 ‘광주 의거 만세, 광주 시민 만세, 대한민국 민주주의 만세, 만세 삼창을 부르고 시카고 선언을 내가 발표했죠. 5·18 기념식 행사에서. 면담자 : 그게 몇 년도, 몇 년도 일이실까요? 구술자 : 음...그것이 2000...2007년인가? 2006년에 내가 결성해갖고 2007년인가 그런거 같애요. 그것도 신문에 그게 인제 중앙일보에. 처음이거든 5·18 행사에서, 만세 삼창을 5·18 순국영령만세. 5·18 광주 시민 의거, 의거 시민 만세, 대한민국 민주주의 만세 삼창을 선창했거든. 앞에 나가서. 그러고 시카고 선언을 발표를 했어요.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 5·18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근본이라는 것을. 근원은 시작이 됐다는 걸.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이 5·18정신을 이어나가서 어, 남북 공동, 남북 통일도 이 5·18 정신으로 이뤄져 나가야 된다는 그런 선언을 내가 발표를 했죠. 그래서 그때 신문에 인제, 시카고 신문 일간지에, 더군다나 중앙일보 일간지 그 시카고 판에다가 사진 이렇게 크게 냈더라고. 내가 만세 삼창 부르고 시카고 선언 했다 그러고. 시카고 선언 내용은 입수, 본사가 입수했음, 그러고 발표는 거기다 안 하고. 그거 가져갔으니까. 내 그거를. 그러고 그 5·18 밤낮 기념식이 그러니까, 그러고 또 한번 내가 임을 위한 행진곡 때문에 그것 빠지면 5·18 기념식이 아니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안 부르며는. 2012년에 2012년 5·18 행사 때에. 에, 내가 그랬어요. 가서 이 식순에다가 넣어라. 그랬더니 뭐 못 넌다고 그래. 면담자 : 어디에서 못 넣는다고, 한인회에서 그런가요? 아니면 총영사에서 그런가요? 구술자 : 마당집하고 인제 향우회하고 같이 하잖아요. 이거를 근데 그건 다 마당집에서 이러고저러고 하지. 예나 이렇게가서 참석해서 보면 앞에 자리 몇 개 놔두고 누가 앉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들끼리 이렇게 앉아서 향우회 회장, 이사장, 뭐 저 총영사, 나올 때는 부영사, 이렇게 나와서 나이 먹은 사람들 조금 몇. 그러니까 사람 몇 안 모여 한 열댓 명. 많이 모이면 한 이십명. 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인제 그거 한번 보란 듯이 한번 5·18이란 이런 것이다 했고. 12년, 13년이죠, 금년 지났고 작년, 재작년에 12년, 작년인가? 이걸 했어요. 임을 위한 행진곡.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래, 한국에서도 그렇고. 처음에 이거를 안 된다며는 처음에는 애국가를 부르고. 어, 국가기념일이니까 애국가를 부르고 끝날 때, 끝날 폐회 순서에 임을 위하나 행진곡 합창으로 부르는 것은 이거는 무리가 아니다. 그래거 내가 한인회 가가지고서 향우회 회장한테 내가 그 전날 식순에다가 넣어라. 폐회순에다 넣어라. 폐회순이 전부 일어나서 내가 앞에 나가서 부를 테니까. 따라서 부르는 걸로. 그러고 인터넷 그 테잎 나오게 해서 방송하고. 그랬더니 가서 보니까 순서에 없어. 그래 내가 왜 이러냐 했더니 아, 내 맘대로 못한대. 향우회장이. 내가 그걸 알지. 하루 전에 그래? 손식이 지금 문화마당집 대표, 내가 그랬어. 내가 이거 부탁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내가 이랬더니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그러는 거야. 지금 넣어요, 내가 그랬어. 너라고, 폐회에다가 임을 위한 행진곡 넣으라고 그랬더니 알았습니다. 누가 누군 줄 알거든 손식은. 알았습니다, 하고 넜어. 그랬더니 5·18 그러면 앞에서 리드해야 할텐데 부를 줄 아냐고 그래. 그럼, 내가 부른다. 왜 내가 못 부르냐, 밤낮 내가 부르는 노래다. 그랬더니 또 한번 해보래. 나를 모욕주는 거지 그러면서 해보래. 거기 스태프들하고. 그래 뭐 내가 밤낮 부르는 노래고 내가 교회에서 성가대 하고. 한 사람이 왜 내가 그걸 못불러. 밤낮 내가 혼자 부르는 노랜데. 그래 불렀더니, 어이 잘 부르시네요. 그래서 인제 이걸 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좋다 하고 맨 뒤에 있다가 폐회 순서는 조철규 선생님, 아 조철규 위원장님 임을 위한 행진곡 리더하시겠습니다. 다 같이 일어나서 합창하겠습니다. 그래서 인제 앞에 나가서 마이크 잡고 처음으로, 시카고 5·18 기념이래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 불렀지. 마이크 잡고. 그러니까 나중에 그때 부영산가 누가 와 있었거든. 나중에 행사 끝나고 하는데 부영사가 일어나지도 않고 다 끝나고 뒤에서 뭐 마시고들 그러는데 안 일어나고 아예 앉아있더라고 귓구녕이 맥힌 모양이지. 그래 내가 갔어요, 가서. 나 조철귭니다. 알고 있습니다. 일어나시라고. 내가 그래서 죄송합니다. 이것은 내 생명입니다, 그랬어요. 이걸 5·18에서 이걸 빼면 되냐고. 이건 5·18의 혼이라고. 왜 이거를 한국에서도 빼냐고. 내가 한국에다도 민주당에 건의하고 전화건 사람인데 그런다고. 그래, 국가기념일이니까 애국가 처음에 부르고, 첨에 같이 못부르며는. 무리하지 말고. 응, 전부 참석했던 사람들과또 합창단이면 합창단 같이 일어나서 폐회 때 교회에서도 예배끝나면 목사님이 추도하지 않냐? 폐회도 중요한 거다. 폐회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고. 그것 너야된다는 걸 내가 늘 주장을 했거든요. 그때서부터. 뺄 순없다고. 앞에 못너면 그렇게라도 너라는 거여. 그래서 내가 그거를 실천을 했어요, 시카고 한인회에서. 그런데 그 다음해는 내가 잘 안가거든, 그 껄끄러워들 하니까. 그 다음해는 그러고 2012년 대선에 우리가 패배했잖아요, 문재인. 패배하고 2013년에 작년에 이제 아이들 보내고서는 난 안 갔어. 그랬더니 끝나고 불렀대. 그랬더니 금년에 어떻게 됐냐 했더니 또 안 불렀대. 금년에는. 인제 또 안 불렀대. 그래서요. 저는 그렇습니다. 내 나이 이 나이가 됐어도 광주의 민주 의거의 정신은 이거는 참 귀한거예요. 너무 귀한겁니다. 예. 이거를 체계화 시켜야 되요. 이 민주 광주, 민주 의거를 이 이념적으로 몰아갈 것 아니라 학술적으로 체계화해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이걸 후손에다 물려줘야 되고 광주 5·18 이 정신으로 앞으로 남북통일도 이 정신이 작용해야 남북통일이 됩니다. 왜냐며는 내가 통일 축전에 평양에 유차례 방문하고 많은 분들을 접촉하고 만나고 대화를 하고 했지만 참 그 김대중 선생님 3단계 통일보다 나는 3단계가 아니라 7단계여도 좋다. 그런데 결국은 민주화로 통일이 돼야지, 사회주의 체제고 이게 얼마나 이 어려운 일이냐 이 말입니다. 근데 거기에는 분명히, 희생정신, 광주 5·18정신이 이북에서도 일어나야 이 완전한 통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주장해요. 예. 5·18 민주 항쟁 정신이 북한에서도 일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북한과 거래를 해야 되요. 김대중 선생님 정책처럼 햇볕정책, 소통을 해야 되거든. 소통을 해야 열릴 거 아닙니까. 먼저 이걸 포기해라. 안 되죠, 그 사람들이 살라고 한 거예요. 그게 아니면 죽기 때문에 그걸 맨든 거라고요. 왜, 김대중 선생님이 그렇게 해서 열어노니까 미국에서 어떻게 했어요, 노무현 때,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몰아붙이고 이명박 되고 나서 모든 거를 다 차단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미국에서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북한이 핵을 가진 거는 부시, 책임도 있다 그러는 거예요. 그때 그거를 악의 축으로 몰아붙이고 짤라 버렸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이것이 살길이다 하고 핵을 가진 거란거죠. 그건 사실 그랬거든요. 지금은 더 어려워졌죠. 인제. 면담자 : 그, 오랜 시간동안 선생님 그 지금까지 살아오신 이야기, 또 운동, 5·18 관련된 운동 또는 민족운동, 통일 운동 갖가지 활동들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구술자 : 앞으로도 변함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맡고 있는게 인제는 뭐 나이 먹어서 교회장로로서 열심히 충성하고 그런 일념입니다, 죽을 때까지. 또 현재 이끌고 있는 함석헌 기념사업회 내가 시카고에서 이끌고 있고 에 또, 미국 민주당, 전국 전당대회 대의원이에요. 미국 민주당 대의원, 전국 전당대회 대의원이에요 데모크라딕(Democratic). 그러고 또 이 미국 감리교단 안에 특별히 통일 위원회가 있습니다. 그 통일위원회에도 제가 이사로 관여하고 있고. 그래서 앞으로 이 5·18정신, 그러니까 이 6.15정신도요, 이 5·18정신으로 이 희생정신으로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나가야 하고. 이거는 내 자식들에게도 이거는. 자연히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거 빼노믄 없죠. 5·18이 일어나서 나는 다시 살은 거예요. 내가 다시 신앙생활 하게 됐고요. 5·18이 없었으면 나 아마 신앙생활도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일거양득으로 저는 그렇습니다. 면담자 : 오랜 시간 말씀,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뭐 마지막으로 더 보충하고 싶거나 말씀하지 못한 부분이 혹시. 구술자 : 뭐 할라면 끝도 없지마는.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이상으로 조철규선생님의 구술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유일용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유일용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5일 ○ 구술장소 :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 운동 등에 관한 이, 이일용 선생님의 구술 면접입니다. 어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2일 오후 세시 이십분입니다. 예 선생님,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 저희가 선생님께 질문을, 구술 질문을 크게 한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해서 말씀을 드릴 거예요. 첫 번째는 선생님이 미국에 오시기 전까지, 유년 시절부터 한국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이렇게 미국에 오시게 되셨는지 하는 그 부분하고, 미국에 오셔서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 또 그 안에서 특히나 5월 문제 5·18 관련 문제라든지, 한국의 뭐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선생님이 여기서 이곳에서 활동하셨던 그런 부분에 대한 질문을 좀 드리겠구요. 마지막에 선생님이 현재 어떻게 좀 지내시고 있는지,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한국 뭐 지금 정치상황이라든지 사회 상황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끝으로, 그 정도로 질문을 저희가 좀 드릴 거예요. 그래서 그,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그냥 저에게 옛날, 선생님 살아온 이야기 그냥 들려주신다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말씀을 해주시구요. 어, 그러면 선생님께 질문을 인제 드리겠습니다. 언제 태어나셨고 어디에서, 고향은 어디신지 쫌 말씀을 먼저 해주십시오. 구술자 : 어 태어나기는, 태어난 해는 1942년 12월 2일이구요. 어,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고창. 어, 그래서 6살에 광주로 와가지고 어, 광주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예, 전부 광주에서 나왔어요. 면담자 : 그 전북 고창이 고향이신데 어렸을 때, 여섯 살 때 까지 인제 고창에서 거주를 하셨는데 고창에 대한 기억이 좀 남아있으신가요, 고향에 대한 기억이? 구술자 : 하나도 없어요.. 예, 단지 어렸을 때 내가 많이 아팠다는 것. 그래서 폐염도 걸렸었고 그때 폐염은 폐염 걸렸다 하면 그때는 죽는 병으로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아주, 부모들이 고생을 했는가봐요. 근데 인제 학교 때문에 인제 여기 아버님이 인제 광주로 불러들였죠. 면담자 : 그, 가족 전체가 이사를 가신건가요? 아니면 선생님만 광주로 이렇게... 구술자 : 저 혼자만 왔습니다. 면담자 : 6살 때요. 어, 그러면 부모님은 고창에 그대로 거주하시고... 구술자 : 아니, 아버님이 광주에서 혼자 계셨을 때에요. 아버님이 저를 불러들였죠. 면담자 : 네.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하시다 보면 좀 가족사가 좀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쫌 말씀이 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있으시면 이야기를 안 해주셔도 되는데요. 구술자 : 아니요, 껄끄러운 거 없습니다. 이 나이에 뭐. 껄끄러운 것도 없고. 사실 내 어머니는 내가 아, 두 살 때, 내가 난 다음 해에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인제 새 어머니가 고창에 계셨고. 그래서 그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내가 6살 때 아버님이 광주로 불렀는데 그때 또 다른 어머니를 또 인제, 하고 살으셨어요. 그래서 나는 인자 새 어머니가 두 분이죠. 근데 인제 본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면담자 : 형제 관계는 그러면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형제 관계는 내 어머니에게서는 나 혼자만 낳았고. 어, 그 고창에 있는 그 어머님에게는 인제 삼남매. 면담자 : 다 동생들이시죠? 구술자 : 네, 다 동생들이에요. 그리고 광주에 있는 어머니한테는 어, 팔, 팔남매를 낳으셨는데 에, 6남 2녀. 면담자 : 아버님께는 광주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구술자 : 어, 교구 있죠, 블랙, 칠판 같은 거 그런 교구 사업 하셨어요. 직접 만드시고 면담자 : 어렸을 때는 고창에 여섯 살까지 인제 지내시다가 쫌 광주로 오시게 되는데 그 새어머니 슬하에 있던 팔 남매 분들은 같이 생활을 하셨나요? 구술자 : 그랬죠. 내가 온 뒤에도 많이 낳으셨고. 내가 왔을 때는 어, 동생이 하나도 없었고. 내가 광주로 옮긴 뒤로 팔남매를 낳으셨죠. 면담자 : 그, 쫌, 어리셨을 때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좀, 뭐 그런 건 좀 없으셨습니까. 좀, 새 어머니에 대한 어떤 관계라든지요. 구술자 : 그 새 어머니에 대한 그런 거시기는, 인제 고창 어머니는 아주 어렸을 때 같이 보냈기 때문에 하나도 없었고. 인제 광주 어머니는 인제 다 알다시피 사춘기 때 그 어머니가 인제 내 동생과 나와의 그 어떤 다른 대우... 면담자 : 차별 같은 거? 구술자 : 뭐 그렇다고 해서 큰 차별대운 아니었어요. 인제 내가 보기에는 그대로 좋으신 어머닌데 옆에 주위에서 많이 또 부추기드만요. 또 그 새어머니와 의붓자식간의 싸움을. 주위에서 많이 부추겼는데 그래도 어, 의붓어머니는 의붓어머니고 어, 그런 것을 쪼금 느꼈죠, 면담자 : 어렸을 때 그런 걸로 쫌 많이 쫌 우시거나 슬프거나, 그런 갈등 같은 것은 좀... 구술자 : 그런 갈등은 없었던 것 같애요. 그런 갈등은 없었는데 그냥 빨리 내가 그 집에서 나와야겄다. 인제 그런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었죠. 면담자 : 그럼 초등학교는 광주에서 어디로 가셨나요? 구술자 : 서석 초등학교 면담자 : 아, 서석 초등학교로 입학하셨나요. 입학하신 게... 구술자 : 입학은 내가 49년부터 어, 55년까지. 면담자 : 학교 다니실 때 초등학교 들어가서 바로 다음 해에 한국 전쟁이 일어난 거네요. 구술자 : 그렇죠. 2학년때 여그 그, 한국 전쟁이 일어났죠. 면담자 : 그때 쫌 기억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 예, 납니다. 아버지 외가집인 나주로도 피난 가고. 또 거기서 전쟁이 길어지니까 고창으로 피난갔죠. 그 옛날에 내가 살았던 데로. 고창으로 피난 갔어요. 면담자 : 그 피난 가셨을 때는 학교를 못 다니셨나요? 아니면 가서 또 구술자 : 아, 거기 가서 같은 학년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내가 2학년을 그, 2학기 때 여, 우리 한국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한, 그니까 고창에 가가지고 2학년을 다시 다닌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광주로 다시 돌아올 때는 인제 3학년을 뛰는 거죠. 그러니까 여, 그, 나로 봐서는 쪼끔, 어려운, 공부에 좀 어려웠었죠, 바로 처음에는. 면담자 : 그렇게 고창하고 뭐 나주도 피난을 다니시고. 구술자 : 나주에서는 잠깐이니까 뭐 학교 안 다니고. 뭐 그거는 인제 잠깐 들렸다가 전쟁이 좀 오래가니까 그냥 고창으로 인제 가가지고 거그서 국민 학교를 다니고, 일년 좀 못 다니고 인제 쪼금 여그, 여그 사회가 진전되니까 인제 광주로 다시 온 거죠. 면담자 : 연도로 보면 거의 한 5학년 정도에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겠네요. 구술자 : 53년도니까 그렇게 되겄죠, 49년에서 53년. 우리는 뭐 휴전이라는 것도 몰랐고 뭐 우리 어린, 어렸기 때문에 휴전도 몰랐고 그런 거, 거, 어, 내가 보기에는 하나도 몰랐던 것 같아요. 선생들도 우리한테 안 갈쳐주고. 뭐 휴전이라고 특별히 우리가 기억이 없어요. 나는 이제 6학년이 되니까 시험공부만 하느라고 1953년에 휴전을 일어났다는 걸 알았지, 그때 당시에는 우리가 휴전을, 휴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아요 면담자 : 한국 전쟁, 그 6.25로 인한 어떤 주변 분들의 피해는 그런 것들은 광주까지는 없었나요? 구술자 : 광주에는 인제 거, 거의 없었죠. 근데 그 우리 촌 고창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서로 죽이고 하는 것이 있었죠. 같은 친척 중에서도. 면담자 : 네. 그 뭐 한국 전쟁 외에 선생님께서 초등학교 쫌 다니실때 특별하게 기억에 잠깐 좀 남아 있는 일화같은 게 있으신가요? 에피소드? 구술자 : 거, 이런 기억은 있어요. 그 인제 그 한국 전쟁때 아마 비행기에서 총을 쏘며는 우리가 그 탄환주으러 다닌 것. 인제 .비행기가 인제 슬라이딩하면 얼른 가서 탄환, 그 뭐죠, 뭐여, 그 탄피죠, 탄피? 탄피 같은 것도 우리가 주우러 다니고. 그것은 우리가 촌에서도 많이 겪었던 것 같애요. 자기들이 총 쏘고 나며는 그 옆에서 탄피 줍고. 뭐 공부에, 공부로 봐서는 뭐 우리 어렸을 때 그냥 다, 다 같이 인제 공부 다, ㅇㅇ니까. 141112유일용01_00:11:13 면담자 : 그, 선생님이 선생님을 생각하실 때 국민 학교는 난 이런 학생이었다, 어떤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까? 구술자 : 아주 착했죠. 면담자 : 모범생. 구술자 : 아주 거의 거의 모범생이었죠 공부만 하고 아주 모범생이었어요. 면담자 : 그러면 인제 55년도에 그, 구술자 : 졸업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제가 서중을 들어갔어요. 광주 서중을 면담자 : 지금은? 구술자 : 지금은 없어졌죠. 지금은 없어지고 인제 평준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으로 중학교는 없어지고 그냥 인제 그 일고만 남았죠. 그래갖고 내가 서중이 33회고 일고가 내가 6횐데 둘이 통합해가지고는 내가 36회가 됐어요. 그냥 지금은 일고가 36회가 됐어요. 면담자 : 예.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쫌 어떠셨나요? 구술자 : 뭐 명랑했고 공부 아주 잘했고. 그런 것 밖에 없는 것 같애요. 친구 좋아하고 면담자 : 특별히 그때 더 관심을 가지셨던, 공부 외에 쫌 관심을 특별히 쏟으셨던 분야 같은 게 쫌 있으셨나요? 구술자 : 그것은 없었고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내가 이런 기억은 있어요. 그, 저 신익희 선생이 돌아가실 때 거, 저, 기차 안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가 무지무지 슬퍼했고 또 거, 그 분을 추모하는 노래도 어떤 곡을 갖고 개사를 해갖고 불렀던 기억도 나요. 뭐 가련다 떠나련다 아마 그걸꺼에요. 그 당시에. 면담자 : 그, 학교 다니실 때부터 꿈이 그러면 아, 나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꿈을 가지셨나요? 구술자 : 아, 아니에요. 학교 다닐 때 꿈은 우리 뭐, 옛날 우리 큰 꿈은 없었고 단지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은 학교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이, 이만한 성적이 되니까 여기에 가라., 그래서 내가 인제 서울 공대를, 여, 처음에 거기를 지웠했죠. 면담자 : 서울대 공과대학을? 구술자 : 서울 공대를요. 서울 공대를 했는데 제가 인제 거기서 낙방을 했습니다. 낙방을 하고 그 다음해 일년 쉴 때가 인제 그, 그, 5월 혁명 1년 후죠, 인제. 62년도니까. 61년도에 고등학교 3학년, 아니, 고등학교 3학년 때 3학년 졸업하고 5.16이 일어났고, 아 이거 5.16이 났다, 5.16이 났다. 61년 3학년 졸업하고 5월달에 5.16이 일어났고 그래서 그때 인제 61년도에 서울공대를 떨어지고 62년도에 다시 인제 시험을 응시했는데 그때는 공대가 아니라 그때는 인제 의대로 내가 바깠어요. 면담자 : 그때 인제 들어가신게. 구술자 : 62년도요. 면담자 : 그 선생님 그 고등학교 3학년때 3학년때가 4.19가 구술자 : 4.19 일어나가지고 뭐 한참 뭐 우리 그때 변화가 있었죠. 뭐가 변했냐며는, 두발 조금 기르고, 쪼끔 기르고 많이는 못 기르게 하고 쫌 그리고 인제 그 군화 신고 다니게 하고 그때는 워카라고 했죠. 워카 신고 다니고. 어, 그러 이게 교실도 우리 일고, 일고에 새로 건물이 만들어졌는데 그거는 바닥이 마루가 아니고 시멘트바닥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멘트 바닥에 우리가 그냥 군화신고 다니고 쫌 우리한테 거 그런 어떤 변화가 있었고. 그 4.19 때 인제 우리가 데모한 기억이 나요, 3학년 때. 에, 우리 선생님들이 이제 교문을 잠그고 못 나가게 하니까 이제 그 다음날 우리가 인제 그, 그때 아마 호남동일거예요 내가 지금 기억에는 그 호남동에 있는 농업협동조합, 그때 이름도 농협인가는 모르겠는데 그, 그게 그 아마 정구 코트가 있었을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근 한 백명쯤 거기 다 모였어요, 일고 학생들이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모여가지고 밖에 나가서 데모를 했죠. 인제 첫 날은 못 허고. 면담자 : 그때만 해도 광주 일고가 굉장히 좀 정치적으로 그런 정치 사회 문제, 고등학생이지만, 민감한 좀 학생들이 많고 그런 분위기가 쫌 있었던 것으로 쫌 이야기를 전해들었는데요. 구술자 : 그때 그건 아마 그 뒤일껍니다. 우리때만 해도 그때는 광고하고 일고하고 있어서 광고하고 일고하고 약간 라이벌 의식이 있어가지고 어, 거, 사실은 그 우리가 그 이제 학교 학생 성분으로 보면 일고는 대개가 한 90프로가 광주 출신이에요. 근데 인제 광고는 인제 쪼끔 촌에서 올라온 애들이 많고 그리고 어, 또 그러잖아요, 인제 쪼금 광고 출신들이 자기들이 쪼끔 약간 콤플렉스도 있었어요 왜냐면 우리 서중에서 전부다 일고로 가버리니까. 하니까 우리들이 쪼금 잘못하면 자기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거여. 그래서 4.19때도 그 사람들이 우리 대, 정문까지 왔어요 왔는데 선생님이 막으니까 우리 못나가니까 우리를 조롱했던 기억이 있어요. 광고, 광고가 데모하는 사람들이 우리까지 와갖고. 인제 그런 라이벌 의식은 있었죠. 면담자 : 그 다음날 인제 어찌됐건 광주 일고 학생들이 모여서 시내에 진출을 했는데 그때 4.19 당시 광주, 시위 분위기는 어땠나요? 구술자 : 광주 분위기는 딴데에 비해서 조금 조용하다고 봐얄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서울이나 그런 데에 비해서는 좀 조용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쫌 데모를 했죠. 면담자 : 그거를 며칠 간이나 하셨습니까? 구술자 : 저는 이제 하루를 했어요. 근데 인제 하루 했는데 인제 그때 내가 아마 집에 안 들어갔나봐요. 인제 늦게까지 그러니까 아버님이 누구 사람을 시켜서 나를 찾으러, 찾으러 다녔나봐요. 근데 지금도 내가 그 날 무엇을 하느라고 그렇게 늦게까지 내가 여기 다녔는지를 내가 기억은 안 나요. 내가 그 아버님 이야기는 내가 몇 년 이후에 들었어요. 니가 밖에 여서 안 들어와서 데모는 일어나지, 안 들어와서 사람을 보내서 너를 찾으러 다녔다고 옛날 말씀하시드만요. 면담자 : 그렇게 하고 60년에 3학년 때 그런 4.19가 일어나고 그 다음해에 5.16 구술자 : 그렇죠. 5.16. 예. 면담자 : 그때는 인제 선생님께서 한해 인제 대학을 재수할 땐데 재수 생활은 어디서, 공부는 어디서 하셨나요? 구술자 : 재수는 대개는 인제 집에서 했는데요, 제일 처음에는, 지금도 있는가 모르겠어요, 문중 제사 지내면 그 제각이라고 있죠? 그 제각, 그 인제 그 옛날에는 그 산수동에서 올라가는 것을 잡고개라고 했던가요? 그것 아마 잡고개라 했을 거예요. 그 고개를 한참 넘어가서 어, 그 증심사 쪽으로, 아 증심사가 아니라 원효사쪽으로 가는데 제가가 하나 있었어요. 거기서 한 두어달 공부했죠. 그러고 내려와가지고 그 뒤로는 집에서 공부하고. 면담자 : 그렇게 해서 62년도에 인제 의대를 입학하셨네요. 구술자 : 그때도 서울 올라가서 내가 인제 그때 처음으로 체능이 생겼어요. 인제 군사정권이 생기니까 몸이 튼튼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사실 학과 점수가 300점인데 체능이 50점이에요. 그런데 체능 50점 중에서 10점이 기본점수고 그 나머지는 턱걸이, 달리기, 던지기, 넓이 뛰기를 다섯 종목으로 하는데, 인제 던지기도 왼손 던지기, 오른손 던지기. 근데 내가 50점 만점에 18점을 맞았어요. 그러니 뭐 떨어진 것은 아예, 어, 좀 아주 명확하고. 그때는 내가 인제 체능에 자신이 없어가지고 캐톨릭을 응시했어요. 거기서 그 면접관이 이야기하더만요. 니 점수가 타대에서 3번째인데 니 여그 체능 이것때문에 넌 안 된다. 자기가 알기로는 광주에 있는 전남 의대가 열세명 부족하대요. 자기, 그때 부족했어요. 글고 경북 의대가 세명 부족하고 전남의대가 열세명 부족하다고. 그래서 내가 광주로 내려왔어요. 그, 거, 인제 그 나머지 인원 보충할 때 그래서 내가 전남의대 들어왔죠. 면담자 : 체력장 점수가 아니었으면 구술자 : 아, 그러면 서울대 시험봤죠. 근데 체력에 의해서 이렇게 해버리니까., 근데 그 다음해에는 20점 만점이었어요 이게 너무 불평하니까 20점 만점에 만점이, 인제 10점이 기본 점수고 그러니까 많이 잘하고 못하는 사람이 10점밖에 차이가 없는데 우리는 40점 차이였어요. 그러면 이렇게 수능에 300점에, 체능에 50점이니 아주 게임이 안 된거죠. 면담자 : 그래서 육십 인제 이년도에 전대 의대를 입학하시게 된 건데, 선생님 그 들어갔을 때 당시 그 전대 학생, 전남대학교 그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분위기는 좀 어땠었나요, 사회적 인식이라든지. 구술자 : 나는 좀 실망했죠. 왜냐면 인제 두 번, 한번은 재수하고 나서 인제 전남대에 들어오니까. 사실은 내가 일고에서 우등생을 했거든요. 근데 그 우등생은 전교에서 20명 밖에 안 된거예요, 그게. 거그서 우등생을 했는데 전남의대를 들어오니 인제 공부를 아주 포기한 거에요. 그래, 아무리 공부 열심히 해도 운명이, 운명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결국은 전남의대에 내가 여 왔다는 그런 자괴감이 생겨가지고 근 6년 동안 공부를 안 했어요. 않고 인제 뭐 6.3 사태 데모나 인제 그 주동한다든지 예, 우리 땐 6.3 사태 뭐 우리 때 내가 주동을 했죠. 면담자 : 그때 당시에 학생회라는 게 분위기가 좀 학생운동을 활발하게 했던? 구술자 : 아니죠, 왜냐면 활발하지 못했고 어, 근데 그때 우리 학생 중에 중앙정보부, 지금 같으면 안기부죠. 안기부에서 사람을 사서 많이 했어요. 우리가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하면 금방 인제 그 사복 경찰들이 쫙 깔려버려요, 앞에. 그래서 우리가 아마 이게 틀림 없이 이게 우리 안에 약간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건 우리가 느꼈죠. 면담자 : 선배, 예전 선배님 말씀 들어보고 하면 그때 당시에는 학교에 중정,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렇게 사복 입고 학교 안에서 있었다고. 구술자 : 우리는 그건 몰랐는데 아마 서울 같은 데는 그랬을 거예요. 아마 데모 실무 위원단들은. 근데 우리는 알다시피 우리는 의대잖아요. 그러니 지들도 의대가 차마 앞에서 데모를 할랴. 그리고 의대가 그때 학동에 있었잖아요. 그 인제 권력 의식이 있는 쩌그, 저 용봉동 그쪽에 있으니까 우리는 아예 뭐 저, 그 사람들 눈에 여, 그 그렇게 신경을 안 썼죠. 안 썼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어, 6.3 사태, 6.3 사태때 인자 내가 데모를 일으켰고 그때가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아니 본과 2학년땔 거예요. 어, 그러고는 인자 데모가 계속 일어나니까 시험도 안 보고 방학을 시켜부렀어요. 아, 이거 그때 방학, 방학을 아마 6월달에 시켜부렀을꺼에요. 그래서 우리 2학기 시험도 안 보고 방학, 그냥 방학, 인제 방학으로 들어갔죠. 면담자 : 뭐,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공부는 잘 안했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혹시 그러면 공부 외에 이런, 동아리, 뭐 써클 활동이라든지 그런 부분들은 하셨나요? 구술자 : 우리 때는 그 동아리가 없었어요. 이 동아리라는 것이 그 내가 미국을 온 뒤로, 미국 온 뒤로 인제 군사 인제 유신 체제가 이렇게 생기고 하니까 그 뒤로 동아리가 활발했지 우리 때만 해도 내가 올 때가 인제 73년도 왔는데, 72년도 말에 아마 국민 투표를, 유신에 대한 국민 투표가 있었을 거예요. 그거까지 우리가 투표를 허고 내가 73년도에 왔기 때문에 처음 유신, 인제 그, 이 유신 체제가 시작할 때는 그렇게 크게 그런 동아리도 없었고 그래서 우리 그 그런 학생 써클 뭐, 저 데모를 위한 써클이네, 그런 건, 그런 거 없었습니다. 아마 이제 이젠 우리 이제 한, 한 5년, 10년 후배들, 아마 그 사람들이 인제 그렇게 활발했을거예요. 면담자 : 그, 학교를 6년 쭉 이어서 다니신 건가요, 아니면 중간에 뭐 군대를 갔다오셨나요 구술자 : 예. 아니요, 쭉 다녔어요. 면담자 : 학교 졸업을 하시고 군의관으로... 구술자 : 네 군의관. 군의관이었죠. 면담자 : 그럼 졸업하시고 가면 68년도에 가신 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68년에 군의관 가갖고 어, 인제 71년도에 에, 여그 제대를 했는데 또 그, 내가 좀 반항 기질이 있어요. 아주 그 뭐랄까 그, 저 쪼끔 약간, 쫌 그믄 인제 여그 내가 좀 반항을 해요. 군대 그 군의학교 때 인제 그 반찬 갖고, 반찬이야 뭐 두부, 두부 같은 것이 아주 그, 그냥 사회에서 먹는 두부가 아니라 아주 단단해요. 그러고 여그 그, 뭐랄까, 거, 저 콩나물도 이게 뭐 걍 아주 거의 나무처럼 빳빳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거기에 대해 항의를 했죠, 내, 내가. 그래가지고 어, 항명 사건으로 나를 갖다 집어넣었죠. 면담자 : 그때 인제 뭐 군의관이라고 하면 장교료 가신 거죠? 구술자 : 아니에요, 처음에는 인제 군의학교. 면담자 : 아 군의학교요. 구술자 : 군의학교로 가가지고 어, 군의학교가 12주 교육이에요. 인제 거기에서 내가 항명 사건이 일어나가지고 어, 인제 거의 인제 그 저, 여, 내가 영창까지 가고 거의 저그 퇴교를 당할 껀데 저희 아버님이 인제 그 위 인제 그 군 위에 높은 사람한테 인제 가서 인제 얘기를 했죠. 그 사람이 누구냐면 그, 그때 그 2군 사령관을 했던 화순 출신 그 문영태 대장이라고 있어요. 인제 그 사람한테 얘기해자기고 인제 인제 풀려났죠. 면담자 : 예. 군 생활은 그럼 어디서, 군의관 생활을 어디서 하셨나요? 구술자 : 제가 인제 8사단, 저그 전방에서 8사단에서 2년을 했어요. 면담자 : 굉장히 힘든 곳에서 또 근무를 하셨네요, 최전방에서. 구술자 : 예. 면담자 : 뭐 군대 안에서 뭐 그때 군의학교 사건 말고 다른 어떤 일은 없으셨습니까? 구술자 : 인제 그, 저, 큰 사건은 없었교 2년을 8사단에서 있다가 마지막 인제 1년을 이제 후방으로 내려왔죠. 그게 인제, 인제 거 전주에 있는 35사단이에요. 근데 왜 전주로 보냈냐며는 내 본적지가 고창이잖아요? 그니까 자기들은 나를 생각해서 인제 각. 원적지로 보낸 거예요. 근데 나는 솔직히 말해서 전, 전주 그때 처음 가봤어요, 그때. 왜냐면 전라북도에 대해서 일체 모르거든요, 내가. 단지 그 내가 옛날에 있던 그 고창에 대한 그 어렸을 때 쪼그만 기억만 있지. 별 광주에서 서울 가면 재미가 안 들리니까, 그냥 바로 걍 서울가니까. 그래서 인제 전주에서 내가 일년을 했었죠. 면담자 : 그렇게 하시고 71년도에 인제 예편을 하시게 된 거네요. 그럼 예편하시고 나서는 바로... 구술자 : 아니요, 예편 하고 나서는 그 저, 우리한테 1년 동안 저, 그 무의촌에서 근무하는 여, 거, 그 뭐랄까, 어, 요구 조건이 있었어요. 미국 갈려면 적어도 1년 이상 무의촌에서 근무해야한다. 그래서 인제 무의촌에서, 무의촌이 어디로 갔냐면 구례, 그 지금도 있을 거예요. 구례 산동면. 예 그 면에 인제 그 그 쪽 보건지소로 내가 발명받았죠.. 면담자 : 선생님 방금 말씀하실 때 미국에 들어갈려면 일년 간 그 무의촌에서 봉사를 해야된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럼 그 전부터 미국 유학이든 이민이든 그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구술자 : 아, 그랬죠. 내가 아까 그믄 대학교 때를 이야기해야겄는데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을 인제 입후보했어요. 학생 회장 입후보 해가지고 인제 그 부득이 한 사정으로 내가 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인제 이렇게 뭐 여, 거, 내가 학생 회장도 못하고. 그래서 공부를 한번 해야겄다. 그래서 한게 한 9개월을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여, 거, 4학년 올라가기 전부터. 그래가지고 그 미국 오는 의사 시험에, ECF, ECFMG를 그때, 그때 우리는 ECMG가 있었어요. 거, 거, 어, 가 있어봐. 에듀케이셔널 카운셀 포, 포린 메디컬 그레쥬에이트 (Educational Council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 Educational Commission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와 혼동함) ECFMG. 인제 거기서 인제 그게 인제 미국에서 주관하거든요 인제 거기에 시험에 인제 합격했죠. 인제 시험에 합격하고 난 인제 아까 이야기했다시피 내가 집에서 빨리 나와야겄다, 인제 어렸을 때부터. 그래서 인제 이 미국가기로 결심 한 거죠. 면담자 : 선생님 4학년때, 3학년때 학생회장에 입후보하셨다고 하셨는데 이게 뭐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인가요? 구술자 : 아니죠, 단대 면담자 : 의대 회장이요. 그럼 그때부터 미국에 유학이 있던 거죠? 그때 유학이 아니고 이민까지 생각을 하신 건가요? 구술자 : 이민을 온 사람도 있었고 난 이민은 안 오고 그냥 그 그냥 그, 저 학생 비자 같은 형식으로 왔어요 거, 저, 왜냐면 그때 그 미국에 있는 병원에서 그 잡, 그 취업비자를 우리한테 보내줬거든요. 그래서 인제 나는 인제 어, 그것 가지고 오고. 근데 많은 사람들이 거의가 가 이민 비자로 왔죠. 미리 신청을 해갖고 인제 그 인제 그 이민 비자를 얻은 거죠. 면담자 : 그, 미국 이쪽으로 다시 그 들어오겠다고 마음을 먹으셨을 때 이쪽 미국 지역에 뭐 연고가 아시는 분이 있으셨나요? 구술자 : 아무도 없어요. 혼자왔어요. 면담자 : 아, 결혼 안 하시고 들어오셨나요? 구술자 : 아, 결혼을 인제 그냥 식은 했고, 어, 결혼, 인제 그 혼인 신고는 결혼식보다 먼저 하고. 그때 어, 내 전 부인인데 전부인이 미국에서 인제 간호원을 하고 있었어요. 간호원으로 와서 한국에 와갖고 인제 결혼을 하고 싶어서 왔는데 나를 만난 거죠. 그래서 인제 결혼, 여그 결혼을 하고 혼인 신고를 빨리 해불고 자기는 먼저 들어오고 나는 인제 좀 늦게 들어왔죠. 거, 저, 그분은 3월달에 들어오고 나는 인제 8월달에 들어왔죠. 면담자 : 아까 말씀 하실 때 구례 산동면이라고 그러셨나요? 거기에 보건 지소. 구술자 : 보건 지소에요. 면담자 : 에서 근부를 그러면 70 구술자 : 거기서 한 2년 동안 했어요. 면담자 : 1년부터 73년 그 정도까지 하셨네요?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거기서 근무를 하시고 인제 미국에 인제 그 이후에 들어오신 거네요. 그럼 미국 들어오신 날짜 기억하십니까? 구술자 : 예, 알아요. 저그 1973년 8월 14일. 내가 바로 그 우리 해방 기념일, 8.15 전날에 왔어요. 면담자 : 들어오신 곳이 이곳 시카고인가요? 구술자 : 아니 거, 내가 내가 거 그 계약을 맺은 병원이 뉴저지에 있는 그 뉴저지 스테이트에 있는 저지 시티(Jersey City)라고 저그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 크라이스트 하스피탈(Christ Hospital)이었어요. 크라이스트 하스피털. 인제 거기서 내가 인턴을 했죠. 인턴을. 인턴을 허고 인제 레지던트를 구할 때 제가 시카고로 제가 왔죠. 면담자 : 그럼 거기에서 그때 사모님과, 결혼한 사모님과 같이 생활을 하셨나요? 구술자 : 네 그랬죠, 예. 면담자 : 인턴 생활 하시고 인제 레지던트 할 때 시카고에서. 구술자 : 시카고에서 했죠. 면담자 : 시카고 오신 것은 구술자 : 내가 75, 1975년 1월 1일부로 내가 시카고로 왔어요. 면담자 : 처음 막 이렇게 미국에 오셔서 이게 인제 미국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하셨는데, 어...뭐 70년대 그때 당시만 해도 이민자에 대한 어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차별 내지는 쫌 뭐 인종 간의 갈등도 쫌 보이지 않게 또 있었을 것 같고 또 좀 그런 부분들은 없었나요? 구술자 : 그런, 저그 아니 우리가 못느껴도 여기 미국엔 뭐가 있냐면 그라스 씰링(Glass Ceiling)이라는 거 있잖아요? 얼만큼 올라가면 그 이상 여기선 못 오르는 거. 그건 우리가 느꼈어요. 그리고 워낙 걍 그 지금 사람하고 달라가지고 우리는 아무 준비 없이 와서 영어,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거예요. 오자 말은 쪼금씩 하는데, 왜냐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왔기 때문에. 근데 뭐 영어 히어링은 일체 안 들었기 때문에 미국에 와갖고 한 6개월동안은 어디, 거, 뭐 귀머거리 신세를 했어요. 여, 예를 들어서 인제 거, 환자가 좀 열이 있다하며는 인제 그, 내가 인제 그, 저 일직하는 데서 자잖아요, 밤에? 밤에 자면 인제 전화가 와요. 환자가 열있다고 오면, 지금 같으면 뭔 약 주라고 전화를 할 수가 있는데 그 말을 못하니까 그 위에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그냥 타이레놀만 주면 되는 건데 그거 주라고 전화, 전화로 하믄 되는데 그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막 올라가서 보면 그거예요, 그거. 그, 그것도 써놓고 그냥 냅다 와서 자는 거예요. 그게 영어를 모르니까. 우리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면담자 : 옛날 지금도 한국 마찬가지지만 그 옛날에는 더 그랬을 것 같은데 이게 영어 교육이 배우는, 그때 중고등학교 때 배우는 영어하고 여기서 인제 직접 하는 영어하고 달라가지고 어려움이 많으셨겠어요. 구술자 : 완전 다르죠. 그니까 예. 그니까 문법은 아니까, 또 단어도 아니까. 인제 무슨 뭐라고 말은 하죠. 근데 또 발음이 정확하기 않으니까. 그 사람들도 못 알아듣고. 한번은 그 인턴장이 나보고 저녁에 그 커뮤니티 칼리지 그 영어, 그 영어 갈친데 가래요. 나보고. 그래서 갔죠. 갔더니 시험을 주더라고요. 시험을 내가 단어 시험 백점 맞어브렀어요. 그니까 또 뭐땜에 왔녜, 나보고. 우리 인턴장이 가라해서 왔다고 하니까 그냥 가고, 가서 TV만 열심히 보고 있으라고. 면담자 : 그러셨군요. 그때 그 저지시티, 뉴저지에 있을 때는 그 지역은 한인들이 그렇게 사는 동네는 아니었었나요? 구술자 : 아주 드물었어요 아니 여, 거 물론 내가 나는 인제 병원, 병원 생활만 하다보니까 그리고 어디 다른 데에 신경쓸 데가 없어요. 어떤 여, 여가를 시간을 보낼 틈도 없었고 단지 그냥 병원에서 오면 집에 와서 TV보고 걍 계속 책만 보고. 이게 학교 다닐 때 안 봤던 책을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니까 아, 뭐 저 아마 저 내 여가를 즐기는 것은 이 몇 시간 안 될 거예요. 그 일년 동안에. 그래서 계속 거 저 스트레스에 무지하게 빠졌죠. 면담자 : 시카고로 오시고 나서는 좀 어떠셨나요? 구술자 : 시카고도 마찬가지. 그때까지도 마찬가지에요. 이 미국에 오면 3년 전까지는 고생을 해요. 워낙 언어의 문제가 있으니까. 언어만 아니면 괜찮은데. 3년이 되니까 걍 인제 조금씩 조금씩 귀가 트이고 말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래도 누가 전화오면 무서와요. 그때까지도 그 전화소리에 깜짝깜짝 놀래는 것이 아마 한 5년은 갔을거예요, 내가. .여그 여 미국에 와갖고. 면담자 : 지, 지금은 안 그러시죠? (웃음) 구술자 : 지금은 아니고요. (웃음) 면담자 : 예, 그때 당시 이제 시카고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그럼 75년부터 시작을 하시게 되셨는데 그 시카고 레지던트 생활에 대해서 쪼끔 말씀을, 그때 생활에 대해서. 구술자 : 그때도 완전히 그냥 고생했단 말 외에는 그냥, 병원에서 왕따 당하고 뭐 저, 아까 인턴, 인턴 때처럼 병원에서 왕따 당하고 우리 저 거 이, 거 뭐에요, 이 거 의사들한테 왕따 당하고 간호원한테 왕따 당하고. 면담자 : 제가 의대, 의과대학에 거기에 대해서 잘 몰라서 좀 여쭤보는데 보통 인턴을 하던 곳에서 레지던트를 계속 하지 않나요? 구술자 : 그런데, 그런 경우가 많이 있죠. 내가 있던 병원은 인턴밖에 없었어요. 굉장히 쪼그만 병원이었어요. 그런 병원들이 가끔 인제 미국에는 있어요. 인턴만 있고 레지던트는 없는 거. 그래서 그 인턴 레지던트 있으면 배우는 것이 크고 들어가기도 쉽죠. 근데 인제 그때 우리는 레지던트 들어가기가 지독히도 어려웠어요. 왜냐면 인제 73년도 왔기 때문에 그때가 언제냐면 월남전이 끝날 때에요. 그래가지고 미국에, 그 월남에 있는 그 미국 의사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인제. 그러니까 우리 전까지만 해도 의사가 부족했는데 이제 우리 때는 이제 의사가 남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그렇게 좋은 과를 못했어요. 그때 내과면 아주 그냥 우러러보는 과에요. 그때쯤은 그, 기껏해야 우리들 왔을 때는 마취과, 저기 방사선과, 아 그리고 거 저 병, 병리학과 정신학과, 정신의학과 그 네 개 외에는 어디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긍게 우리 동기들 보면 거의가 다 인제 정신의학과, 정신과로 많이 가. 우리 동기나 우리 바로 일년 여그 먼저 온 사람들은 정신과가 그렇게 많아, 정신과 마취과가 그렇게 많아요. 면담자 : 레지던트 생활을 하셨던 병원은 어디신가요, 시카고에요. 구술자 : 저 와이스 하스피털(Weiss Hospital), 더블유 이 아이 에스에스. 와이스 하스피털. 더블유 이 아이 에스에스.. 면담자 : 지금도 있나요? 구술자 : 예, 지금도 있어요. 면담자 : 그래도 시카고는 그 당시에 한인들이 좀 거주하는 그런 도시였죠? 구술자 : 예, 많이 거주했죠. 그때만 해도 시카고가 이, 인제 이런 곳이에요. 우리가 인제 미국에서 거, 도시의 특징을 이야기해라 하믄, LA는 한국에서 돈 갖고 온 사람들이 인제 많애요. 그, 그, 또 돈을 또 여기다가 도피 자금 한 데도 많고. 그 또 뉴욕은, 이런거, 뉴욕은 또 다는 아니지만 뉴욕은 또 공부한 사람이, 약간 거, 저 직장 생활 하다가 온 사람, 안 가고 그냥 남는 사람. 또는 거 여그 공부하러 온 사람, 그 사람들이 많애요. 근데 시카고의 특징이 뭐냐면 아무, 그, 그 대개가 누구들이 오냐면 그냥 빈 몸으로 온 사람들. 왜냐면 공장이 많기 때문에 공장에 와서 그냥 그, 일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거의가 다 그런 사람들이에요, 시카고는. 그래서 시카고, 시카고가 약간 뭐랄까 좀 보수적이고 자기들이 돈 벌기에 보수적이고 쫌 딴 데보다는 돈에 대해서 더 아까워하죠,, 돈 쓰는 데에. 면담자 : 그때 뭐 한인 모임 같은 게 좀 있었나요? 한안사회에? 구술자 : 나는 그런 건 여거 여거 사회 활동을 안 했기 때문에 여거 내가 시카고 몇 년 동안은 우리 동창 예를 들어서 일고 동창회나 전남의대 동창, 그런 동창 모임밖에 내가 그외에는 거의 나가지 않은 것 같아요. 면담자 : 레지던트는 몇 년 동안 하셨나요? 구술자 : 인제 레지던트는 그건 한 일 년 반을 했어요. 근데 인제 내가 레지던트를 뭐를 했냐면 제너럴 프랙티스(General Practice: 일반 진료)를 했어요. 인제 그건 내 친구가 인제 권하드라고요, 제네럴 프랙티스, 이 미국에서 장래가 희망이 있을 거다. 내가 패밀, 패밀리 프랙티스(Family Practice), 가정의하고는 달라요. 근데 딱 들어와서 보니까 아, 전문의가 없는 거예요., 그게 거, 저, 제네럴 프랙티스가. 내가 미국에 뭐 때문에 여기 이렇게 와서 고생을 하는가, 전문의가 없는데. 그래서 그 미국 그, 그때 우리 그 프랙스(FLEX: FSMB's Federation Licensing Examination: 연방 면허 시험), USMLE(The United States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미국 의사 면허 시험) 아니고 프렉스 했어요. 에프, 엘, 이, 엑스, 그거는 인제 미국에서 의사가 된다는 자격증이에요. 거기에 인제 내가 인제 일 년 후에 바로 합격해버렸죠. 레지던트 하면서. 그러니까 병원에 남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왜냐면 어차피 마쳐봤자 전문의도 못 딸거. 내가 이미 의사시험에 합격해버렸는데 내가 언제든지 개업할 수 있는데 뭣 때문에 여, 여가 있는가 하고 그래서 나와버린거예요. 면담자 : 그럼 76년도에 구술자 : 네 76년도에 내가 인제 나왔죠. 면담자 : 나오셔서 구술자 : 개업한 게 아니라 그때 인제 응급실로 왔어요. 여거 응급실에 취직을 했죠, 병원에 응급실에 취직을 했죠. 그때만 해도 여, 미국에 응급의학과가 없, 설립이 안 됐어요, 그때만 해도. 어 안 되고 응급의학과 설립된 것이 80년도 후에 설립이 됐는데 내가 인제 오랫동안 응급실에 근무해 보니까 인제 그 한국 말로 뭐라 그러나, 미국 말로 그랜파드 크로스(Grandfather Cross)인데 그 한국말로 뭐겄어요, 닥터장? 그게 우리한테 인제 기득권을 준거예요. 전문의 시험을 보는,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있는 기득권을 준 거예요. 왜냐면 내가 인제 오랫동안 응급실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 내가 인제 응급 의학 인제 그, 전문의 시험을 보 거죠 면담자 : 응급실로 취직하셨던 그 병원 이름은... 구술자 : 제일 처음에 병원이 어, 프로비던트 하스피털(provident hospital), 피, 알, 오, 브이, 비어 할 때 빅터, 빅토리 할 때요, 아이, 디, 데이빗 할 때 디. 이, 엔, 티, 프로비던트 하스피털. 면담자 : 그 병원 인제 응급실에서 계속 일을 하신 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그래서 인제 그때 내가 인제 5·18이 일어난 거죠. 1980년도에. 면담자 : 그때 그 5,18 얘기 하기 전에 79년 되면 한국의 정치 상황이 굉장히 막 변하기 시작, 박정희가 죽고 10월에 죽고 그 이후에 인제 12.12가 일어나게 되고 뭐 인제 또 불과 몇 개월 후에 인제 5·18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상황들을 선생님도 다 알고는 계셨죠? 구술자 : 아, 그럼요, 다 알고 있었죠. 제일 처음에 에, 김재규가 죽였다 해서 나는 그, 개가 주인을 물었구만, 첨에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어,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이 어떤 경위, 인제 그 목적으로 박정희를 죽인 지는 모르겄어요. 그리고 내가 볼 때는 박정희의 이, 유신 체제에 대해서 그걸 하나도 겪고, 겪지 않고 온 사람이에요. 얼마나 많은 우리 나라 젊은 사람, 저 학생들이나 얼마나 많은 민중 사람들이 얼마나 억압을 받고 억울하게 죽고 그거를 일체 우리는 모른 거예요. 여기에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아, 이 사람이 독재를 하고 있구나, 그 외에는 인제 그, 그렇게 이제 그 관심을 안 가진 거죠. 근데 이제 내가 한, 한국의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때, 전두환이 12.12 사건 때부터 인제 한 거예요. 그래서 인제 내 생각에는, 아, 인제는 한국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겄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12.12를 보니까 이게 또 다시 인제 인제 이게 한국의 인제 암울한 그 정치 상황이 또 되겄구나, 그 전, 그전까지만, 김재규가 박정희씨를 죽일 때까지만 해도 그냥 개가 주인을 문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박정희때 대해서 우리가 큰 반감을 안 가졌죠. 왜냐면 못, 인제 겪어보질 않았으니까. 그니까 나는 현장 감각이 없는 거예요. 우리 미국에서 민주 운동 한 사람이 가장 단점이 뭐냐면 현장 감각이 없어요. 내가 여기서 아무리 민주 운동을 했어도 한국에서 조금 고생한 사람보다 난 못한 거예요. 난 편하게, 내밥, 편한 밥 먹고 그냥 거, 저, 어디 돌아다니면서 이 미국 사회에 돌아다니면서 우리 민, 인제 인제 돌아다니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도 이야기, 설명하고 우리 교포들 모여서 또 이렇게 하고. 근데 어떻게 보면 그게 나는 에, 이게 쪼끔 좀, 좀 그게 겪을지 모르기만 어떻게 보면 영어로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이 있어요. 자위. 내가 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것이라도 안 하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처음에는 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했죠. 면담자 : 그 인제 1980년 쯤 이야기를 선생님께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그런 상황, 12.12 이후부터 인제 선생님께서도 이 부분에 계속 관심을 쫌, 더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데 80년 5월에 인제 광주 그런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디에서 처음 이 소식을 접하게 되셨나요? 구술자 : 그 소식을 내가 아마 그때 TV를 봤을거예요. TV를 보고 바로 집에 전화를 했죠. 전화했더니 계속 오토메이티드 보이스(automated voice: 연결음) 되고 있어. 그저, 그, 전화가 안 통한다, 전화가 안 통한다, 계속 그러드만요. 그래서 내가 그것이 아마 인제 그 5월, 내가 처음 전화를 했던 건 5월 아마 20일 쯤 전화했겄죠이? 그게 인제 5월 26, 27일까지 절대 통화가 안 된 거예요. 인제 광주하고. 그러고 나서 있으니까 인제 광주의 참상이 인제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부터. 인제 그,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신문에서, 뭐 저 확실히는 안 나지만, 나오지 않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어렴풋이, 뭐가 있었구나, 근데 결정적인 순간은 나한테 뭐가 있었냐면 그건 내가 아마, 누구, 나도 지금 누가 생각이 안 나는데 누가 보낸 지를 모르겠어요. 광주에 그 5·18에 있었던 참상, 어린 애가 그 울고, 도청 앞에 상무관에서 그 관앞에서 울고. 그것이 인제 나한테 들어온 거예요. 그래가지고 인제 그때부터 인제 내가 인제 인제 운동을 시작한 거죠. 면담자 : 선생님, 그, 그런 걸 받아보셨다는게 영상인가요, 아니면 사진인가요? 구술자 : 아니요, 사진이에요. 사진인데 아마 이만큼 커가지고 그, 뭐랄까 그, 저 이런 보통 사진이 인화로 된 것이 아니고 그, 저, 쫌 쫌 약간 두껍고, 두껍고 사진은 사진인데 자기들이 그걸 다시 만든 것 같애요. 이제 그, 그걸 한 나한테 한 이십여장 나한테 그걸 보낸 것 같애요. 그래서 그걸 인제 거, 그때부터 인제 내가 그 5·18에 대해서 이거는 아니라, 근데 뭐 LA도 들렀다 그랬죠? 모르겠어요. 내가 알기로는 그래요. 내가 알기로는 어, 미국에서도 아주 조용했어요. 5·18에 대해서. 정말 왜냐면 알면 신문에 나올껀데, 여기에 인제 교포지가 있으니까. 신문에 나올 껀데 신문에 일체 없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여기 신문도 한국 정부에서 콘츠롤 하고 있는가는 모르겠죠. 그건 내가 모르겄는데 아마 그라안했을 꺼에요. 왜냐면 1980년도 그때 중앙일보 사장이 어, 내가 이름을, 그 사람이 처음에 중앙일보를, 중앙일보를 중아일보 본사에서 왔는데 내가 미스터 김만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상당히 우리하고 그 동조적인 입장에 있었다고요. 그러면 우리한테 그믄 적어도 미국에서 어떤, 어떤 운동의 기미를 우리한테, 나한테 말해줄껀데. 일체 내가 듣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나도 80년대때 혼자만 울분했지, 그리고 친구 만나면 친구끼리 서로 울분을 토했지 그거를 어떻게든 공식적인 모임은 일체 없었어요. 공식적인 모임은 1981년도까지. 면담자 : 예. 저희가 조사를 진행 하면서 보니까 대규모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진행은 하지 않았지만 교포 사회 중심으로 해가지고 당시 80년 당시에도 그런 항의 시위... 구술자 : 항의시위는 했지, 항의시위는 했는데 그게 어떤 조직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가지고 한것은 아니었고. 우리도 80년대 항의시위는 했어요. 항의 시위 했지마는 정식으로 신문에다가 우리 입장을 내놓고 여, 5·18 광주 동지회, 아까 말한 기념 사진 같은걸 내가 81년부터 내가 그건 시작을 했어요. 그 전에는 그냥 이 만나서 서로 울분하고 가서 여거, 앞에 가서, 영사관 앞에서 데모를 한다든지. 인제 그믄 혹시 우리 김선생이 누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그게 공식적으로 신문에 나와있, 나왔다든가요? 면담자 : 그 뭐 제가 사진, 사진으로, 시카고는 사진으로 제가 좀 봤구요. 구술자 : 아, 그래요, 몇 년도꺼 봤어요? 면담자 : 80년 5월 예. LA는 그게 신문에 좀 보도가 됐었어요. 구술자 : 아, 그래요. 면담자 : 신문에 보도가 됐었고. 그 뭐 시카고도 5월, 80년 5월 좀 마지막 말 정도에 로렌스 그쪽에, 그쪽에서 항의시위를 했는데 그것은 신문보도로 제가 아직 보지는 못했어요. 구술자 : 그랬죠. 그니까 내가 아까 얘기했다시피 그냥 여그 여, 오거나이즈 안 되가지고 개인적으로 몇명이 모여서 하고. 그게 인제 그렇게 되다가 내가 그 81년도에 정식으로 발족을 시켰으니까. 이건 아니라 하고 내가 발족을 시켰죠. 면담자 : 선생님 그 아까 말씀하신 그 사진, 상무대, 상무관에서 그 영정사진 뭐 울고 있는 사진, 아이 사진을 받으신 건 언제였나요? 누구한테 그걸 받으셨는지요? 구술자 : 내가 그게 지금 기억이 안 나요. 근데 여기 아무리, 인제 이렇게 우리 여, 거, 광주에서 왔던 말 듣고 내가 인제 머릿속에 쪼금 생각했는데 그게 내가 어디에서 받았는가, 어떻게 해서 왜 꼭 나한테 왔는가 그것도 모르겄고. 어, 내가 지금도 그걸 기억 못해요. 근데 내가 인제 나중에 인제 그걸 가지고, 인제 그건 기억하죠. 나중에 인제 시청에 가서 나 혼자, 정말로 어려운 싸움이었어요. 사람들이 밥 먹고 사느라고 나오지를 안해요. 여거 좀 나가서 하자하면. 내가 지금도 기억하자면 이 시청 거, 저 데일리 센터(Daily Center)에서 나 혼자 걸어놓고 혼자 있었고 혼자 멍하니 앉아있으면서 내가 도대체 뭣허고 있는가, 면담자 : 그게 81년도인가요? 구술자 : 네 81년도였죠. 면담자 : 그니까 그 사진 전시회를 하신거 네요. 5월 사진 전시회를. 구술자 : 예, 예. 5월 사진을. 면담자 : 5·18 1주기를 맞아서 하신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 아마 1주기 쫌 뒤에 했을 거예요. 내 여거, 하여간 그, 근, 그쯤해서. 근데 내생각에는 5·18, 5월 18일날 뒤에 했을 거예요. 왜냐면 나도 그때 뭐, 신문사에도 내가 인제 해야허고 사람도 내가 모집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 그 아마 좀 늦었을 거예요. 내가. 면담자 : 선생님 혼자 이걸 다 주도적으로 하신 거예요, 누가 옆에서 도와주신 분이 있으셨나요? 구술자 : 제, 내가 아까 얘기했지만 아까 조광모씨라고 있죠? 거 그, 그분이 상당히 거 나한테 그 동지적 입장으로 많이 도와줬죠. 면담자 : 그런 준비는 인제 선생님께서 조광모 선생님하고 하신 부분이고. 사람들 반응이 좀 어땠나요? 그런 걸 진행을... 구술자 : 한국 사람들은 여, 거 지금 사진전 얘기하는 거예요? 면담자 : 그런 걸 선생님께서 주도적으로 하신다고 했을 때. 구술자 : 그래요. 거기에 대해서 내가 할 말이 없구만. 첫째, 경상도 사람은 하나도 오지를 않애요. 경상도 오지 않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떤 경제적인 면에서도 어...또 그런 모임을 가지려면 또 돈이 있어야 해요. 자기가 돈이 없이는 누구 모여라고 말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니까 그런 경제적인 것 또는 여그 지방적으로 그, 아예 우리 솔직히 전라도 사람만 모여 갖고 아주 이제 그 장구치고 굿하는 거예요. 누가 뭐 그러면서 우리한테 좋은 눈으로 보지 않은 사람, 경상도, 특히 경상도 사람은 우리를 좋은 눈으로 안 봤어요. 지금 지금은 자기들이 뭐라 하는가 모르겄지마는 우리가 그때 운동할 때, 운동할 때는 정말 외로운 운동이면서 또 교포들 눈에는 상당히 좀 그 눈에 거슬리는, 인제 그런 운동으로 거,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어요. 면담자 : 그때 당시 그러면 호남사람들 중심으로 좀 거기에 동의해주시는 좀 그런 교포들 중심으로 이렇게? 구술자 : 거의가 호남사람인데 아까 말한 조광모씨는 호남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아마 강원도 사람이에요.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 가끔 나와서 도와주는 사람 어제 뭐 인터뷰 했다면서요, 어제 육길원씨. 인제 그 사람은 인제 가끔 나와서 인제 여, 우리 모임에 가끔 나왔었고 또 자기는 자기대로 또 인제 그 직장이 있기 때문에 또 직장에 그런 눈치를 보는 직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우리한테 많이 그 협조는 많이 해줬어요. 면담자 : 그 인터뷰 시작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마 미주 최초로 5·18 동지회를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만들었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요. 구술자 : 아까 이게 말한 것이 아까 인제 우리 김선생 딴 데서, LA에서 이미 봤다고 그랬으니까 내가 인제 할 말이 없는데 그때 우리 미국 사회가 너무 조용, 조용했다는 것, 그거 하나는 글쎼요, 1980년도에 참 조용했어요. 어, 미국 사회에서. 그 어떤, 회의, 이렇게 오거나이즈(organize: 조직)가 잘 되지도 않앴었고. 어, 내, 그, 내 생각은 그랬어요. 헌데 내가 LA를 안 살아봤기 때문에. 또 딴데서 한사람들은 모르겄어요. 근데 내가 어, 아까 여기도 적어, 적어놨지마는 워싱턴 DC에 가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하나 있어요. 그 사람이 아까 아, 그, 내가 이름을 잘 기억을 못하는데 박병선씬가 될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이 이 말 하면 알 거예요. 그 사람이 전두환 온, 인제 그 워싱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침 뱉은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아마 조대, 그때 그 사람이 아마 조대 부고 아니면 조대 나왔을 꺼에요, 그 사람이. 이야기 하다 말았는데 사는데 또 이거 있었어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허며는 나중에 무슨 한국에 가서 정치를 한다는 거. 아주 그말 내가 제일 듣기 싫은 것이 그 말이에요. 그 순수한 것도 사람들이 그렇게 하시고. 내가 그래서 나중에 인제 그 우리 김대중 선생님과 광주를 얘기허겄지마는 내가 공언을 한 게 있어요. 사람들한테, 우리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한테. 내가 백프로 지금 말할 수 있다. 난 절대 한국 가서 정치 안 한다. 내가 그렇게, 그런 말까지 하고 다녔어요. 왜냐, 그렇게 아까 말한 것처럼 아주 전라도 사람들은 아주, 인제 그 전라도 외의 사람들은 아예 이제 뭐 무관심허고 우리를 갖다 이상한 눈으로 보고. 또 아까 말한 내 ㅇㅇㅇㅇ도 141112유일용01_01:02:55 내가 이야기혔고 또 같은 전라도사람도 내가 긍께 사람이 안 모이며는 내가 인제 막 또 거, 활동들을 하잖아요, 그믄 또 그런 사람들이 그래요, 나보고 이 난리를, 면담자 : 나중에 정치하려고 그런다고요? 구술자 : 정치인쇼 한다고. 면담자 : 그 선생님께서 워낙 열심히 또 활동을 하셔서, 하셨으니까 인제 그런 말들도 나왔던 게 또 아닌가 또 좀 그런 생각도 듭니다. 구술자 : 그게 한국 사람 병폐에요. 그게 저, 거 아까 아니, 아까 한 게 아니라, 거 아마 쫌 겪었을 꺼에요. 아마 쫌 말들이 많이 있었어요. 물론 시카고는 딴데 보다는 쪼끔 덜했지마는 시카고에도 인제 나중에 인제 우리 저 딱터 장이 있는 한마당(마당집과 혼동) 전신, 이게 그 청년 연합하고도 쪼끔 뭐가 있었고. 그건 뭐냐면 내가 인제 1981년부터 1982년도에 인제 김대중선생이 왔잖아요? 근데 그분이 나보고 이, 그래가지고 82년도에 와갖고 83년도에 예를 들어서 뭐 시국 강연도 하고 그런 걸 내가 주최를 하다보니까, 그 인제 사람들이 더욱 더 고정관념이 있는 거예요. 아, 뭐 저, 거, 잘 보이려고 한다. 근데 솔직히 우리 김선생이 한번 우리집에 왔었어요. 82년도 초에. 여기 북미 그 기독교 뭐 연합회인가 내가 이름은 정확히 기억 못하는데 그때 내가 기억한 것은 내가 몇 가지 있어요. 하나는 카나다에서 한,한완상씨가 왔는데 자기는 민주 운동에 대해서 노타치, 내가 그때 그말을 들었고 아마 우리 김선생이 인제 부탁을 했는 모양이죠. 그 사람은 노타치. 또 하나는 인제 어, 그때 인제 그분이 우리, 나랑 조광모씨랑 아마 육길원씨도 있었었거여요. 몇 사람이 우리 집에서 인제 식사를 하면서 쫌 회의를 했어요. 그 분이 간 뒤로 나한테 시카고를 맡어주래요. 근데 나를 소개했던 사람이 여, 거 누구 있냐면, 내가 여기에는 안 적었는데. 왜냐면 그거는, 그 사람은 고인이 됐기 때문에. 김종웅이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도 쫌 , 김종웅은 목포 사람인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김대중 선생을 잘 아느냐면 자기 집에서, 김선생이 목상을 다닐 때 하숙을 했대요. 긍게 인제 그 사람을 통해서 나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인제 닥터유가 어떠든지 간에 하여간 어, 뭐, 뭐, 어떻게 잘 하겄다는 건지 어쩐지, 그래서 내가 그 사람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이 5·18만 할란다. 내가 민주 운동하는 사람이 선생님하고 같이 일하면 난 정치인이 되어분다. 그래서 나는 빼주고 그 사람을 시카고 이, 저, 지회장을 시켜라. 그러면 나는 뒤에서 돌봐주겄다. 근데 이 양반이 끝, 계속해서 나한테 부탁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여거, 거저, 한국 인권 문제 연구소 내가 시카고 지회장을 한 거예요. 그라안하면 내가 내 성격, 나는 내가 말했듯 나서대질 않고 나는 뒤에서 도와줄려고 했는데 너무 도와주다, 도와주다 보니 할려고 해도 이 사람들이 나보고 나오란 거예요. 그래서 아까 얘기한 것처럼 정치인과 내가 연결되아부니까 쫌 인제 그게 인제 사람들한테 껄끄럽게, 껄끄러웠는가봐요. 근데 그때 인제 내가 인제 윤한봉씨 알아요? 면담자 : 네. 구술자 : 윤한봉씨가 내가 말 듣기로는 내 일고 후배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 그애가 시카고에 왔단 말 들었어요. 근데 시카고 적어도 시카고 왔음 내가 선배니까, 나를 여거 찾지도 않고 젊은 애,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가버렸대요. 그러면서 내가 또 들은 말이에요, 이건 내가 직접 윤한봉씨한테 안 들었으니까. 그 김대중 선생을 다리 짤룩거리면서 헌다고 미국 와, 인제 그 저 민족운동하는 민주인사를 팔아묵었다고. 어 금서 그 김대중 선생을 김선생을 무지무지 비난하더라고요. 비난 말할 때 내가 들었어요, 내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그 막, 84년 여거 3년 쯤 되니까 청년연합에서 거 5·18 하나를 또 만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니, 이게 한 지역에 두 개가 있다는 건 내가 그래, 내가 나중에 여거 나는 이미 인제 우리 여거 아마 김대중선생 그쪽으로 가니까 이 사람들은 내가 여거 이 젊은 사람들은 내가 정치쪽으로 물들지 않았는가, 또는 그 사람들하고 나하고 아마 노선이 또 다를수도 있을 거예요. 나는 쫌 온건이죠. 나이가 먹으니까 그러겄죠. 그 사람들은 쪼끔 약간 좀 과격하고. 그래서 내가 84년도에 내가 정식으로 내가 그래, 광주 민주화 운동 그 인제 그 기념식은, 내가 않고 느그들이 해라. 그래서 그쪽으로 이관한 거예요. 면담자 : 그러면 구십, 팔십일년부터 팔십삼년까지는 선생님이 구술자 : 84년도까지 했죠. 84년도 하고 인제 그 후로 내가 너희들이 이, 인제. 왜냐면 그 사람들하고 다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인제 그 우리보담도 나이가 한 열다섯살 다 어린 사람들인데. 물론 윤한봉이는 내 몇 년 후배밲에 안 되지마는. 그래서 그, 저, 84년 후에 그거는 인제 내가 여 관여 않고. 또 나는 인제 그 한국인권문제 연구소만 내가 직접 관여했어요. 면담자 : 그, 끝에 좀 끊겨졌는데, 제가 질문드리려고 했던 내용인데 그, 5·18 동지회를 만드셨다고 했잖아요. 그 이름이 나중에는 구술자 : 기념사업 동지회로 했어요. 면접자: 5·18 기념사업 동지회로 구술자 :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 아, 처음에 인제 이름을 지을 때 동지회로 할까, 했는데 누구 하나가 이의를 제가한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조광모씨에요. 우리가 참석도 안 했는데 거의 죽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동지회가 됩니까? 그게 말이 맞드라고요, 그게? 그래 맞다, 당신 말이 맞소. 그래서 이름을 기념사업동지회로 한 거예요. 면담자 : 기념사업 동지회를 창립했던 게 81년도인가요? 구술자 : 81년도. 면담자 : 81년도에 창립하고 81년부터 84년까지는 기념사업동지회에서 관련 그 5·18 추모 행사를 하고. 주로 어떤 행사들을 이, 진행을 했었던 거예요? 구술자 : 아니 그러니까 그때 행사라 치면 거, 여, 우리 인제 우리끼리 인제 연사 정허고, 정허고 가끔은 이제 김선생 거시기로 녹음으로 해서도 하고. 가끔은 인제 문동환 목사 아신가 모르겄어요. 문동환 목사. 면담자 : 아, 예. 구술자 : 문익환 목사 동생이고 그, 이 탈렌트 누구 있죠, 문성근? 그 작은 아버지, 작은 아버지. 여, 그 그 사람도 모셔다가 하고. 어...그, 그랬죠. 그러니까 어, 예. 그런, 그런 식으로 여, 하고 81년도에는 인제 사진 전시회 하도 또 인제 또 뭘 했냐며는 내가 중점적으로 나는 인제 우리끼리만 해서는 안 되, 이게 아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우리끼리만 하는 것은 이게 마스터베이션이다. 이건, 이건 정말로 자기를 위로하기 위한 자위행위다. 그래서 인제 뭔 일을 한 것이냐면 정치인들, 미국 정치인들. 어, 그때 상원의원인 그때 폴 사이먼(Paul Simon, 1985-87 미 상원의원)이 처음 나왔어요. 인제 그, 저, 그 사람 그 내가 펀드 레이징을 내가 주도하고, 우리 한인회에서요. 인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달라. 꼭 우리가 뭐 돈을 주며는 해주며는 그 사람이 내가 바라는 것이 뭐 있느냐고 꼭 물어본다고요, 미국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상원, 상원에 가며는, 이 사람은 연방 상원의원이니까 상원에 가며는 거기에 대해서 힘써주라. 이게, 그, 그래서 이게 대, 우리 거, 그 광주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인제 나는 인제 나중에 인제 미국 사람들 상대로 쫌, 쫌 했죠. 면담자 : 주로 인제 그럼 매년 5월이 되면 뭐 어떤 인사를 초청한다든지, 사진 전시회를 한다든지 하는 인제 그런 활동들을 쫌 해오시다가 84년을 마지막으로 청년연합... 구술자 : 아마 그 저 청년연합은 그 전부터 했을 거예요. 그니까 내가 그때 이게 두 개로 나눠서 해서는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믄 느희들이 잘한다며는 느히들이 해라. 그래서 인제 이병헌씨가 거기에 관계된 거예요. 인제 이, 이병헌씨는 거기에 계속 나간 거죠. 면담자 : 그 전에도 이병헌 선생님은... 구술자 : 우리허고 같이 했죠. 내가 적은 것처럼 우리 모임에도 인제 왔었고 인제, 이, 인제 그, 인제 그 인제 한, 거, 이름이 뭐냐 그, 저 청년연합에, 청년 연합에 이 사람이 나가갖고 인제 뭐 인제 다른 일도 좀 봐주고. 면담자 : 그때 쫌 선생님 개인적인 심정은 쫌 어떠셨나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한 4년 정도 열심히 활동 하셨는데. 구술자 : 네, 그게 바로 그거죠, 그게. 그게 우리나라 사람 병폐에요. 뭐냐며는 이렇게 합치지를 못헌거요. 합치지를 못허고 그냥 그냥 거, 저, 끄떡하면 회 하나 더 만든다든지. 근데 나는 그때 일종의 그, 좌절감, 배반감도 있겠지마는 또 한편으로 뭐냐며는 아, 내가 다른 방향으로 내가 민주 운동을 하며는 내가 꼭 그게 그니까, 나는 이미 인제 첨에 이미 만들어놨으니까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면 우리 민주화운동을 똑같은지 않는가. 어느 누가 , 이제 이런 말 하드라고요. 너 왜 거 김대중이를 도와주냐? 그때 거 도와줘봤자 저, 저, 거, 뭣 우리 전라도 말로 말짱 헛것이다 그거여. 그래 내가 한 말이, 전두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제일 누구겄냐? 그건 누가 뭐라해도 이, 이 김대중씨가. 그믄 내가 이분을 도와주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이 제일 싫은 것을 내가 하고 있는 것 아니냐? 그므는 결국은 이게 민주화 운동이 될 수 있지 않냐? 내가 그때 그런 말도 한 게 기억나요. 면담자 : 그렇게 인제 84년까지 하시고 인제 그 이후에는 아예 손을 떼시게 된 건가요? 구술자 : 인제 그 인제 인권문제 연구소만 들어갔죠. 면담자 : 네. 인권문제연구소에서 주로 활동, 이렇게 관심을 갖고 활동을 했던 내용들은 어떤 건가요? 구술자 : 인권문제 연구소는 인제 아주 거, 저, 광범위하게, 인제 한국의 인제 민주화, 민주화 운동, 뭐 여기서 인제 그 뭔 이제 각 국회읜원들한테 편지를 보낸다든지. 아까 말한 것처럼 이 정치인에 대해서 이렇게 한다든지. 또 이제 우리 김대중 선생이 시카고에 오며는 신문사하고 연결시켜준다든지. 그게 어, 이, 그러니까 오히려 거 내가 5·18에 했던 것 보다는 쫌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가지고 어, 쫌 저거 내 마음은 그냥 그, 그 5·18에 대해서 이렇게 어, 끌어안고 싶지만 인제 누가 잘 한 사람이 있다니까. 그러고 내가 전부터 항상 불만은 뭐냐면, 그냥 우리끼리만 노는거. 내가 그, 그거 아주, 이거 밖에다 알려가지고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 이런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고 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쫌 자기들도 좀 관심을 기울, 기울이게 하는데 참 뭐, 우리 동네 사람만 모여놓고 어, 그러니까. 내가 이럴 바에는 아예 인권문제 연구소로 내가 하는 게, 그쪽 운동을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어차피 그 지향점은 같으니까. 면담자 : 그럼 그 이후에 시카고에서 진행된 이 5·18 기념식이라든지... 구술자 : 아, 그건 내가 참석 안 했어요. 면담자 : 팔십 인제 삼년인가요? 김대중 선생님이 망명을 오신게요. 구술자 : 82년 12월달에 왔죠. 그래가지고 가는, 가는 날은 85년 2월 6일날 갔죠. 면담자 : 시카고도 방문하시고 그 부분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많이 도움도 주시고 뭐 이렇게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쫌 그때 있었던 뭐 기억에 남는 일이라든지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구술자 : 인제 가장 문제점이 뭐냐면 거, 저, 그 재정적인 문제에요. 재정적인 문제기 때문에 어떻게 해며는 우리가 그분이 여가 있을 때 재정적으로 도움을 뭐, 다른 우리가 운동도 중요하지만 또 재정적인 것이 또 아주 중요한 하나의 그, 포인트에요, 그게. 뭐 저, 그래서 그것은 이제 내가 뭐 저 딴 사람 보다도 더 열심히 그 사람을 모셨다기보다는 그래도 딴 사람보다는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테니까. 아마 저 그 사람도 나를 원했을테고 또 나는 또 그래, 이 양반이 이렇게 나를 원한다면 그냥 어, 그 후에 들어가자. 그래서 난 나도 힘껏 도와줬지, 도와줬어요. 면담자 : 그렇게 하고 이제 87년,에 이제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어찌됐건 그때 당시 인제 정권이 직선제를 수용했단 말이에요. 그해에 12월에 바로 대선이 이루어지는데 그때도 선생님께서 쫌 김대중 후보를 위해서 좀 그런 활동들을 하셨다고 좀 들었는데요. 구술자 : 예, 그것도 했죠. 면담자 : 결과론적으로 보면 어찌됐건 좀 잘 안 되고, 실패로 끝나버리고, 87년에요. 구술자 : 그때 내가 실망한 것이 있어요 그분한테 가갖고. 여기는 인제 off the record로 할란가 모르겄지마는, 또 인제 그 우리 김대중 선생님 매니아한테는 또 인제 내가 또 어떻게 보일지 모르겄어요, 근데. 내가 실망했던 것은 뭐냐면 나는 그때 동교동에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그때 김경재 알죠? 김경재도 유종근도 알죠? 그 사람들 아예 거 가서 인제 걍 침대 깔아놓고 거 살아브렀고 어...나는 인제 그분 대선을 도운다는 명목으로 여서 인제 12월 초에 갔다가 대선 하기 전에 와부렀어요, 나는. 대선 투표하기 전에. 네, 물론 표도 그렇게 끊어부렀지마는, 내가 그런 데에 있을 데가 못 되구나. 물론 처음부터 거, 내 성격상 그냥 흑과 백인 난 명확하니까. 내 성격상 정치엔 안 되지마는 그때 그 많은 사람들이 이름은 내가 저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와서 아부하고. 이게 근데 가장 큰 거기는 뭐냐면 4자 필승론이라는 말을 듣고 내가 첨에는 내가 그걸, 이분이 나왔을 때 처음에 인제 그러게 생각했죠. 근데 갔더니 4자 필승론을 얘기한 거예요. 거, 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4자 필승론? 네 사람이 나와야 자기가 당선이, 우리 김선생이 당선된다. 그 표는 전라도 표 다 먹고 부산 표 몇 프로 먹고, 한 삼십 프로 먹고, 서울 표 몇 프로 먹고 그니까 김종필도 나와야 하고 김영삼도 나와야 하고. 물론 저 노태우는 노태우 이미 나왔으니까. 그래야 자기 이긴다는 말을 들고 내가, 이게 애기들 장난도 아니고. 나는 순수하게 어떻게 생각했냐믄 자기가 정말 자기 말로 내가 대통령되야해, 그게 말씀으로 나는 이해했어. 당연히 되야 합니다. 난 그런 사람이에요. 근데 4자 필승론을 갖고는 여, 거, 나온, 나온 것을 보고 아주 실망을 많이 했어요, 내가. 면담자 : 그때 당시에 또 인제 민주세력에서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그런 통합 논의, 그런 얘기도 나왔었는데 구술자 : 그것도 있었죠, 통합있는데, 나는 그때만 해도 무조건 김, 우리 여, 우리 김선생이다. 인제 맹목적으로. 왜냐면 적어도 그 사람의 지략이나 민주 운동을 했던 그 경, 과거를 따져도 이 사람이 먼저 하고 저 사람이 나중에 한 것이 결국 정당하지 저 사람이 먼저 한다는 것은 나는 그때만 해도 내가 여거, 여거,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근데 인제 그분이 인제 거, 나온 이유가 4자 필승론 때문에 나왔다는 걸 직접 내가 듣고. 아, 내가 모셨던 분이 이런 분이었던가. 이제 거기에서 실망을 했어요. 그러믄 그게 이제이제 88년으로 넘어가죠. 인제 그때는 인제 총선이에요. 88년도. 그 총선때 내 사람이 동교동에가 있으니까 다 들어와요. 어떤 사람은 나한테 나보고 김선생한테 추천 좀 해주라는 사람도 있고. 그, 거저 돈에 관한 거. 그 냄새가 시카고까지 냄새 내가 맡을 수 있는 거예요. (한숨) 면담자 : 그, 예. 구술자 : 아 하여간 여 거, 그 뒤로 이게 아마 92년돌 거예요, 92년도 12월 달에 그분이 또 오셨어요, 여기 워싱턴에. 그래서 그래도 옛날에 내가 모시던 분이니까 가서 인사는 해야지, 그래서 갔어요. 그랬더니 아주 반가워하는데 내가 올 때는 인사도 않고 나와 버렸어요. 예, 거, 그, 그분한테 내가 편지는 하나 썼죠.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김구 같은 사람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전체 국민들한테 존경받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여간 97년도에 인제, 아니고 92년도 선거에 또 떨어졌잖아요. 그리고는 영국으로 갔잖아요. 영국으로 갔을 때 자기는 정계 은퇴한다 했잖아요. 은퇴한다 하고. 그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사람들이 국민들이 전부다 그, 그 반에 대해 박수쳐줬잖아요. 아마 대통령 된 것보다도 더 박수쳤을 거예요, 그때. 나도 선생님 잘했습니다. 그게 내가, 내가 바랬던 겁니다. 근데 또 나왔잖아요. 그 불쌍한 이기택을 갖다가 쫓아내불고. 그때 나는 인제는 나는 아니다. 나는 내 민주 운동할 때 선생님이 내 선생님이지 인제는 정치인으로서의 선생님은 내가 아니다고 내가. 근데 지금 내 결정에 나는 아주 만족스러워요. 그때 내 결정에. 뭐 여 여기서 미국에서 갔는 사람 김경재도 뭐 한번인가 두 번 했을 거 에요, 아마 김경재. 이병만도 한번인가 해먹고. 어. 유종근은 또 전북 지사 한번 해먹고. 그지만 그 사람들이 나중에 롱런으로 봤을 때는, 장기적인 것으로 봤을 때는, 내 친구들도 이런 민주 운동 않고 여거 국회의원 된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말로가 좋지 않았어. 왜, 그 사람들이 그 폼은 재다가 나오면 할 것이 없는 거예요. 그, 잘못 길로 빠지기도 하고. 나는 거 그때의 나의 결정이, 왜 남자가 그러잖아요. 여, 저, 거 사내대장부가 한번 태어나면 자기 뜻도 한번 펴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도 있잖아요. 근데 나는 미국에 산지 40년, 40년 됐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흑과 백이에요. 당연히 흑이든지 백이든지 하지, 두 중간에 왔다 갔다 하는 회색은 난 싫어. 우리는 그 사람들이 안 맞는 거예요. 그리고 나의 그, 그, 그런 결정은 지금도 내가 후회가 없고. 내 주위 사람들이 다 나보고 잘했다 하고. 정동채는 또 장관까지 하고 국회의원도 했드만. 그거는 김대중씨 비서 가서 했잖아요. 정동채도 있구만. 면담자 : 그때도 선생님께선 그 인권문제 연구소 그 일은 계속적으로 하고 계실 때였나요? 구술자 : 네. 여거, 그니까 그 인권문제 연구소도 내가 여거, 87년 직후에 92년까지를 안 했어요. 인제거, 인제는 내가 인제 왜냐, 한국에 인권이 있는데 내 주위가 그때 그랬어요. 한국에 인제 민주주의가 됐는데 인권 있는데 뭐 때문에 인권 문제 연구소를 만드냐고. 인권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인권 문제에요. 전두환 시대나 군사 독재 시대에 이 인권이란 것이 인제 그 문제가 있는거지 인제는 이 양반도 이미 정치에 액티브허게 여거 거기에 인볼브 되있고. 헌데 인권문제 연구소 이게 뭐 아까 말한, 한면 재정적인 것도 있잖아요? 인제 그 양반은 걍 부자가 됐는데, 돈은 맘대로 쓸 수가 있는데 우리야 인제 거여, 인권문제에 있는 것이 자체가 나는 인제 그게 에 인제 부담스러운거죠. 그 뒤로 인권문제 계속 지속됐어요. 지속됐는데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않고 그 이름만 갖고 돌아다니고, 나는 또 그거 싫은 거예요. 난 또. 옛날 우리 일할 때는, 일할 때는 얼굴 보여주도 않다가 인제 좋은 세상 됐다고 걍 눈도장이나 찍으려고 그 앞에서 나오고 그건, 내 성격에 맞는, 거, 맞지도 않고. 내가 하나씩 다 정리해븐거예요. 내 자의로. 면담자 : 그럼 현재는 어떤 일을 좀 하고 계신가요? 구술자 : 저는 인제 은퇴하고 아무 것도 하고 있는거 없어요. 그냥 친구들 만나서 그저 술먹고 아주 즐기고 있습니다. 면담자 : 그, 여하튼 말씀을 딱 요약해가지고 딱 핵심만 짚어주셔가지고 그 생각보다 좀 일찍 지금 마무리가 좀 될 것 같은데요. 그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좀 살아오시면서 이렇게 인제 어, 이민 이후로 또 여러 정치 활동 뿐만 아니라 그 전에 그런 사회 운동, 5·18 관련된 운동들도 그런 활동들도 좀 하시고 이런, 이 안에서 교민, 그 그때당시 아무도 안하려고 했던 그런 또 일이였잖습니까. 그런 것을 이렇게 진행하시고 뭐 이후에 뭐 그 정치 사회 인권 문제까지도 이렇게 활동들을 폭넓게 이렇게 좀 하셨는데 미국 인제 이민 오신지 한 40년 정도가 되었는데 구술자 : 만 41년이 넘었습니다. 면담자 : 지금까지 선생님이 이민 오셔서 쫌 살아오시면서의 그런 삶들을 좀 회고를 한번 해보신다면, 정리를 좀 해보신다면 좀 아쉬웠던 점이나, 그때 이런 걸 좀 더 할걸, 아니면 뭐 앞으로는 좀 이런 것을 좀 한번 해보고 싶다라거나 하는 그런 뭐가 좀 있으면 마지막으로 좀 말씀을 해주시면서 이 인터뷰를 좀 정리하면, 했으면 좋겠습니다. 구술자 : 예, 글쎄요, 나이가 먹으니까 옛날 말처럼 수구초심 있잖아요. 그게 나이가 먹으니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 간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내가 거, 한국을 좀 많이 갈려하고 또가고 있어요. 근데 또 가며는 이, 나는 30년을 한국에서 살았고 40년 이상을 미국에서 살았단 말이에요. 내가 근데 자신이 한국에 딱 가있을 때 내가 좀 이방인처럼 느껴져요. 모든 것이 아니라, 자주 그 생경한 것에 부딪쳐요. 쫌 낯선 것에. 그러고 그러다보니까 이런 여, 거, 정신쓰고 그런 스트레스가 있다보니까 몸이 빨리 피곤해져요. 한국 가면 그러다가 우리가 인제 미국에 오면 또 릴렉스 되잖아요, 차분해지고 느긋해지고.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나는 미국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니에요. 내가 만일 미국에 안 왔으면 어쨌을까? 인생에 두 번이라면 한번 더, 한번 해볼 만 해요. 인생이 두 번이라면 미국의 그, 그, 뭐랄까, 그 그 문화의 젖지 않고 내가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또 그대로 잘 살았을 거예요. 또 내, 그 뭐 직업도 넘한테 그렇게 밀리지는 않는 직업이고. 나는 가끔 생각해. 내가 안 왔으믄 어땠을까, 안 왔으믄 어땠을까. 생각을 하지만 어때요, 한번, 인생은 한번 뿐이고 내가 이미 와있는데. 여그 와서 난 그래, 이민 1세로써 내가 2세는 잘 키웠다고 생각하고. 여그 와서 열심히 일했고. 어, 의학계통으로도 내가 정말 공부, 공부 많이 했고. 그렇다고 해서 뭐 큰 돈은 안 벌었지마는 노년에 인제 인제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거기는 있으니까. 그래서 미국 생활은 내가 지금 후회가 하나도 없어요. 미국 생활 자체는 후회가 없는데 아까 이야기한것처럼 그 고향 그리운 그 마음. 그니까 그, 난 정말로 한국이 정말로 잘 되기를 바라요. 그래서 우리 고등학교 동기들 카페가 있어요. 그 카페에 내가 고정으로 글을 써요, 거기다가. 또 자기들이 나한테. 왜냐면 자기들로 봐서는 내가 미국에서 이렇게 오래 살았으니까 또 이렇게 그게 또 글쓴 사람이 없으니까 나한테 그래. 니가 보는 한국. 거기에 대해서도 한번 써주라 그래가지고 쓰고. 또 한국이 이랬으면 좋겠다는거. 비록 내가 지금 한국에 여, 살지 않지마는 한국이 정말 잘 되기를 바라고 어, 그런 마음으로 내가 인제 여생은 내 몸은 여가 묻힐거고. 내 바램이 그겁니다. 면담자 : 뭐 매년 동문회라고 해야되나요? 그런 것 때문에 한국에 방문한다고 하신 것 같은데 어, 저희 재단에서도 이런. 이제 광주 오시면 재단도 좀... 구술자 : 내가 젤 첨에 얘기했죠. 광주가 내 고향이에요. 그렇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 대학때까지 광주를 못 떠났다고, 못 떠났는가 안 떠났는가 하여간 못떠났겄죠. 그래서 광주 있는 모든 것이 나는 정말 모든 것이 정다워요. 그 광주라는 것 자체가. 그지만 내가 그 재단에 안 간 이유는 아까 이야기하다시피 내가 가며는 나를 소개해야할 것 아니에요. 나를 소개하다 보면 5·18도 나오고 그래 나오는디 또 뜬금없는 사람이 와갖고 5·18 이야기하고 있는 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또 그런 데는 내가 얼굴이 두껍지 못해요. 면담자 : 이제는 뭐 재단, 만약 이렇게 광주 오실 일이 있으면 재단을 방문 해주셨으면. 혹시나 저희가 기회가 되서 해외에서 활동하신 선생님들을 좀 이제 초청할 수 있는 기회가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꼭 이렇게 저희가... 구술자 : 근데 내가 이거 하나 분명히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국가 돈으로 한국 간 적이 없어요. 그건 내가, 그런 사람을 내가 증오를 해버려요. 여기에 민주인사란 사람들, 민주운동을 했다는 사람들도 평통 못 되가지고 안달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 내가 그 사람들 앞에 뭐라고 한줄 알아요? 국민의 세금을 니들은 먹지 말라고. 난 그건 또 못 참아요 내가. 그 동포의, 그 재단 돈도 초청은 해요. 내가 내 돈으로 갈 테니까. 그, 여거 내가 지금까지 한국을 뭐 수십 번은 아니지만 한국에 그렇게 따른 우리 교민보다 많이 갔지만은 한번도 내가 그런 야비한, 야비라 할까 뭐랄까, 국가 돈으로 쓴 적이 없어요. 그 돈이 있으면 오히려 재단을 위해서 쓰세요. 난 단지 그냥 뭔 일있을 때 초대한다, 그러면 내가 시간이 있으면 방문허고. 절대 나한테는 돈 보낼 생각 말아요. 면담자 : 알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서 정말 좋은 시간이었구요, 선생님께 이렇게 소중한 말씀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술자 : 어떻게 잘 들었는가 모르겠어요. 여거, 그래서 내가 아까 내가 만들었던 것을 주고 우리 그건 닥터장이 가지고 있지 그건 딱터 장이 확인해라고 내가 썼던 거 확인하라고 준거여 이병헌씨한테 확인을 해보고. 면담자 : 감사합니다. 임용천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임용천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4일 ○ 구술장소 : 미국 뉴욕 민권센터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5월 운동 등에 관한 임용천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뉴욕 플러싱에 있는 민권센터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14일 오후 6시 30분입니다. 선생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구술자 : 만나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면담자 : 선생님 아주 오래전 말씀부터 들어볼까 해요. 태어나신 연도하고 고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구술자 : 네, 저는 1957년 3월 9일날 태어났구요. 서울에서. 어...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소격동이라는 종로구 소격동이라던가 태어난 장소는 거길 거예요. 부모님들은 전부 북에서 넘어오셔 가지구 본적이 북으로 되어 있구요. 한국전쟁 이후에 오셨어요. 면담자 :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신가요? 구술자 : 저는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 형제분들 중에는 한국 전쟁을 겪으신 분들도 있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우리 큰누나와 형이 45년, 47년생이니까 한국전쟁은 겪었죠. 근데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면담자 : 누나나 형에게 듣지는 않았어도 어렸을 때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건 있나요? 구술자 : 글쎄요. 잘 기억은 안 나네요. 서너살, 대여섯살 되었을 때니까. 면담자 : 그럼 선생님께서는 서울 소격동이라는 곳에서 계속 사셨나요? 구술자 : 네, 태어난 데는 소격동이라고...그런데 국민학교 다닐 쯤에 몇 번 이사를 해가지고...가회동이라고, 가회동부터가 제가 기억나는 데거든요. 가회동에 제동국민학교라고 거기 다니다가 2학년인가 그때는 경복국민학교에 다녔어요. 구술자 : 음, 거기서 일 년 다니다가 이학년부터는 다른 데 전학 와서 경복국민학교를 다니게 됐어요. 면담자 : 부모님들은 어렸을 때 혹시 어떤 일을 하셨었나요? 구술자 : 어머님은 인제 그냥 주부셨고, 아버님은 민중서관이라고 있었거든요. 민중서관이라고 저기 뭐야, 그, 우리 어렸을 때 그 엣센스 사전, 사전 만들고 이렇게 책 만들고 그런 출판사에서. 제가 알 때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계속해서 민중사관에 다니셨고 어머니는 뭐 집안일 하면서, 어, 오남매 기르는 게 쉽지가 않으니깐 짬짬이 무슨 부업 같은거 쪼끔씩 쪼끔씩 하셨던 것 같습니다. 면담자 : 그 국민 학교는 어디 국민 학교를 다니셨나요? 구술자 : 제동 국민학교를 일학년까지 다니고, 이학년부터 육학년까지는 경복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면담자 : 경복 국민 학교로 전학을 가실 때는 집도 이렇게 이사를 하고 가신 건가요? 구술자 : 거기가 바로 근천데 경복국민학교가. 어...거기서 경복 국민 학교 갈 때는 인제 우리가 아, 맞아 삼청동으로 이사, 삼청동에서 살았어요. 그 다음 제가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겠다, 국민학교 몇 학년때 글루 이사를 갔을 거예요. 내 생각엔. 이사갔나? 네. 그래서 거기서 고등학교 때까지 삼청동에서 제가 살았어요. 예. 거기서 가회동과 삼청동이 그렇게 먼 동네는 아니거든요. 면담자 : 예. 선생님 입학 년도가 혹시 쫌 기억이 나시나요? 64년 정도? 구술자 : 글쎄. 64년이나 65년도, 기억은 못하겠네, 그거는 면담자 : 학교다니셨을 때 좀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으셨나요? 그때 당시만 해도 좀 물론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고. 구술자 : 그렇죠, 예. 면담자 : 또 정권으로 보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지 얼마 안 된 인제 시기였는데요. 구술자 : 그렇게 되겠네요. 그렇죠. 면담자 : 그때 학교에서의 뭐 교육이라든지 뭐 인제 그런, 뭐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지내는 그런 것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으신가요? 구술자 : 국민 학교때요? 글쎄요. 어...특별히 기억에 남는다라. 면담자 : 학교 다닐 때 보면 보통 저희 아버지 세대들, 형들 세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60년대 인제 학교를 처음 들어가면 뭐 이렇게 그때도 국민 교육 헌장이라고 그런 게 있었나요? 구술자 : 그렇죠. 국민 교육 헌장이 언젠가 생겨가지고 그거를 다 저희더러 외우라고. 면담자 : 외우라 하고. 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워낙 그때는 또 모든 교육이 또 반공 교육형식이고 그렇다보니까 뭐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 웅변대회 뭐 그런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그런 반공교육에 젖어 살았다고 그런 말씀들을 구술자 : 그렇죠. 반공교육은 그 당시에는 굉장히 중요한, 그거는 뭐 학교나 사회, 그래서 친구들끼리 우스개로 지나가면서 저 사람 지나가면 좀 이상한 사람이면 간첩 아니냐, 뭐 그런 이야기들 농담조로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기였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저희는, 제가 통학하는 길이, 우리집에서 경복 국민 학교 통학하는 길이 두 군덴데, 하나는 청와대, 그 대통령이 사는 대를 통과해서 그때는 걸어 다녔거든요, 그 앞을. 통과해서 다니든지 아니면 이쪽에 중앙청이라고, 그 지금은 아마 김영삼 정권때 부신, 그 앞을 항상 지나다녔어요. 항상. 그게 뭐, 저한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닌데 항상 그 길 다니면서 뭐 여기 대통령이 살고, 여기가 우리나라 무슨 뭐 운영하는 데랄지 그런 생각을, 그런 생각 이외에는 뭐 국민 학교 때는 어렸기 때문에 그렇기 기억나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인제 제가 다닌 경복 국민 학교를 왜 제가 그쪽으로 인제 전학을 가게 됐냐면 아버지 그 출판사에서 그 국민 학교를 새로 만들었어요. 그게 좀 사립이라. 지금은 별로 그게 그 좋은 기억은 아닌데. 어쨌든. 아버지가 왜 글루 날 전학을 시키셨는지.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제 사립이니까 좋은 데로 나를 보내려고 그쪽으로 보낸 것 같은데 그 국민 학교가 사립, 그 당시 사립이 좀 많지 않은 시기여가지고. 지금 말하면 괜히 좀, 잘 먹고 잘 사는 애들, 그 당시에 자가용도 많이 있었고 그래서 인제 나가 별로 다녔을 때, 내가 원래 제동국민학교 라는 데 있었는데 거기 다녔었으면 했을 정도로. 아버지는 인제 나를 글로 했는데 별로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았어요. 면담자 : 선생님 생각하시기에 선생님은 국민 학교 때 어떤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까? 구술자 : 국민 학교 때...그렇게 별로 튀거나 뭐 그런 전혀 그렇지 않고. 그냥 학교 수업 받고 특별하게 뭐 어, 뛰어난 재능이 있다든지 뭐 그래서 그런 건 아닌데. 인제 몇 가지 좋은, 경제적으로 약간 여유 있는 이 국민 학교였기 때문에 몇 군데 이런, 뭐라 그러나, 뭐라 그러지, 이 현장 학습을 일 년에 한두 번 간 게 지금도 굉장히 머리에 남는 게 참 많이 있어요. 어렸을 때 그 기상천문댄가, 우리나라, 그, 뭐라 그러나? 온도를 재는, 아마 서울에 MBC 방송국 옆으로 갔던 기억이 나거든요. 거기 한번 간 거. 그러니까 어렸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국민 학교 때도 그렇고 중학교 때도 그렇고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이렇게 책상에 앉아서 한 공부보다 한두 번 현장실습이라든지 그런 과학관 같은 데서 실습한 그런 것들은 굉장히 기억에 남는 것 같은데 그 국민 학교가 약간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델 몇 군데 데려간 게 굉장히 기억에 남는 그런 부분들이 있어요. 특히나 그 뭐, 기후? 서울의 기후. 아마 저기 온도를 잴 수 있는, 지금은 아마 중앙 관상대일 거예요. 거기를 들른 기억이 좀 나고 그 외에는 뭐 국민 학교 때 뭐 특별하게 그런 기억에 남는 거라든지 그런 건 별로 제가 가지고 있진 않는 것 같애요. 면담자 : 중학교는 그럼 어디로 다니셨나요? 구술자 : 중학교는 인제 우리, 우리 전부터 무시험이 되가지고. 우리 때는 우리가 두 번째 인제 무시험으로 해서 경성 중학교라는 데를 들어갔어요. 면담자 : 서울에 있는? 구술자 : 네 면담자 : 지금도 혹시 있나요? 구술자 : 지금도 있어요. 면담자 : 경성 중학교. 중학교 입학년도는 혹시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면담자 : 한 70년, 71년, 한 그 정도 구술자 : 가만 있어봐, 제가 칠십, 음...칠십 육년에 중학교를,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든요, 76년에 그러니까 70년도에 중학교를 입학했겠네. 면담자 : 네, 70년에 중학교를 입학하신거네요. 중학교 때는 좀 기억,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중학교 때는 일단은, 내가 이 중학교는 또 완전히 뭐라 그러나, 다른 분위기. 그니까는 아마 서울에 있는 중학교 중에 가장 군대식으로. 이 학교를 운영했다기 보다 분위기 자체가. 어, 그때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경례슨 했을 거예요, 일반적으로. 경례슨 한 것 같은데 이 학교를 만든 사람이 체신부 전 체신부 장관인 김병삼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박정희 정권이랑 박정희 정권때 같이, 뭐라 그러나, 내 생각에, 아니며는 5.16 할 때 했을 때 같이 했던 사람인지 하여간에 그런 군인이었어요, 군인 출신이었거든요, 이 사람이. 군인 출신이었는데 인제 아마 돈을, 우리가 듣기는, 군인 출신이었는데 돈을 모아가지고 이 학교를 세웠어요. 제가 3횐데, 어...하여간에 굉장히 모든 분위기가 군대, 군대식으로 해서 저는 이 중학교가 굉장히 좋은 추억이 아닌, 뭐 추억이, 좋은 추억이라긴. 하여간에 굉장히 이, 살벌하다고 그러나? 나는 항상 이렇게 위압감을 받는. 그리고 하여간에 이, 이 사람이, 그 당시는 교련이라는 게 있어요. 중학교, 중학생은 교련을 안 받고 고등학생만 받지만 이 이, 이 저기 교장은 이 교련에 목숨을 거신, 걸어가지고, 뭐 교련 대회 같은 걸 그 당시에 매년 하는데 거기에 꼭 등수에 들어야되. 거기일뿐더러 교련하고 열병, 군열할 때 찦차까지 가져와가지고 학교에서 군열을 할 정도로. 군인 출신이었는데 할 정도로 하여간에 학생들 자체를 군인처럼. 면담자 : 중학교 때 구술자 : 중학교때, 중고등학교 학생들한테 아주 그냥 군대식으로 그렇게 교육을 할려고 그랬던 좀 분위기가 난 개인적으로 기억이 나요. 면담자 : 고등학교랑 같이 있는... 구술자 : 같이 있죠. 그쵸, 중 고등학교 다 같이. 보통 중고등학교가 그 당시에 같이 있었거든요. 거기는 뭐 건물도 같은 건물이고, 운동장도 한 운동장도 했고 항상 제가 제일 힘들었던 게 학교, 아침마다 학교 정문 통과하는 게 너무 두려웠어. 막, 거기서 막 잡고 선배들 뭐라 그러나, 규율부가 복장이 이상하거나 걸음걸이 이상하거나 막 그러면 저 멀리서부터 내가, 정문을 통과하는 게 너무 두려웠을 정도로 중학교는 그런 좀 분위기였어요, 하여간에. 그런 게 많이 생각나고, 특별하게 거기서...했다기 보다는 거기서부터, 뭐라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국민학교때는 그런 걸 별로 못했는데 어...쪼끔 이 사회 부조리라 그러나? 선생들의 부조리. 하여간에 뭐 그런 거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어요. 이, 왜냐면 뭐, 하여간에 성적표라든지 그러니까는 그런 거가 선생님들이 일부러 잘 못했다든지, 그게 인제 눈에 띄는 부분들이 우리가 생활하면서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런거라든지, 하여간에 선생한테 과외를 받으면 점수도 잘 나오고 좀 이쁨도 받고. 그런 거 하면서 선생님들에 대한 그런 존경심 같은 것들이 많이 없어지고. 없어졌죠. 면담자 : 그때 당시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과외가, 과외를 받는 그런 게 좀 흔했습니까? 구술자 : 어, 학교 선생님한테 과외를 받는 게 흔해...그렇죠. 학교 선생님들이 직접 과외를 하니까. 학교 끝나고 조금씩 해요, 그건. 그때는 과외 하는 것이 무슨 불법이 아니니까. 불법이 아닌데 인제 선생님들이 엑스트라 머니(extra money)로 쫌 하고 하여간에 그때는 그 안 좋은 기억이 어, 중학교 2학년 땐데 수학 선생님인데 과외를 하라고 나보고 그래서... 면담자 : 돈을 별도로 받고 하는 거죠. 구술자 : 그쵸, 별도로 받고 하는 거죠, 학교 끝나고, 완전히 학교 끝나고여서. 갔는데 나는 수학은 잘하고 내가 영어를 못했는데 영어를 교외를, 영어를 과외를 받으면 좋은데 수학을 받는 건 별로 원치도 않고 공부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내가 우리 집이 멀었거든요. 그 학교가. 그래서 과외까지 받고 올 그런 마음도 별로 없어서 과외를 하루 이틀인가 선생님이 와서 하라그러다가 그 다음부터 안 가고 나서 쪼금 불이익을 받았다는 게, 그 선생님한테 불이익을 받았다는 게 굉장히 기분이 나쁘고 굉장히 괘씸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내가 그래, 내가 무슨 여기 점수가 좀 잘 나오면 내가 뭐 어떠랴 해서 내가 컴플레인 안 하고 그냥 나왔다는 거. 면담자 : 그때는 그런 좀 분위기가 있었죠. 구술자 : 맘이 아프죠, 그 당시에는 어렸을 때는 굉장히 내가 이게 불이익을 받은 점수가, 지금도 아직도 기억이 나요. 어, 인제 마지막에서 인제 그래가지고 뭐 수 뭐 그걸 승하하는데 수학을 내가 잘하고 딴 거는 못한다고 그러믄 이 수학 점수에서 내가 많이 얻어야 되는데 인제 뭐 중반에 무슨 학기말 고사니 일년에 서너번 평가 시험을 보면 뭐 80점, 90점, 뭐, 뭐, 또 뭐 85점, 95점 받았으면 평균이 한 85점 쯤 나와야되는데 그렇게 받았는데 평균 점수는 한 50점으로 적혀 있어요. 그거 말이 안 되잖아요. 그걸 가지고 선생님한테 막 애들이 가서 컴플레인을 하더라고요. 컴플레인을 해서 그 점수를 올려줘 봐야 그렇게 내게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옮겨줘도 이미 다 끝난 것 같드라고, 내. 그런 선생님들이 쫌...그런 하여간에 그런 것에 대해서 쫌 굉장히 마음이 아팠죠. 그런 반면에 . 면담자 : 중학교 3학년 선생님들은, 선생님, 담임선생님은 너무 다른 선생님을 만났어. 이 선생님은 자기가 청렴결백해요. 그래가지고 그 결백이 한 거 때문에 숫제 학부모를 절대 자기는 만나지 않는데. 그런, 그 좀 대비되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들 중학교 때 만나고 이렇게 했던 기억이 나요. 맞붙기도 하고 쫌 (웃음) 면담자 : 그때 고등학교는 시험을 봐서 들어갔나요? 구술자 : 제가 마지막,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시험을 보고 들어갔어요. 그니까는 그 당시에 인제 우리가 중학교 공부하는 게 굉장히 중요 했죠, 왜냐면 시험을 보는 거니까. 물론 거기서 시험 떨어지면 인제 그 다음부터는 시험이 없어서 들어가지만 재수를 해야 되는거니까는., 어, 중학교 중학교 3학년 때는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됐어요. 면담자 : 보통 중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학교들은 같은 또 재단이다 보니까 중학, 그 중학교에 있는 학생들을 또 이렇게 그 같은 고등학교로 좀 데려가려고 그러는 게 굉장히 많이 있었는데요. 구술자 : 그렇죠, 그런 것도 있죠. 면담자 : 선생님도 이 경성중학교라는 곳이 고등학교랑 같이 있었잖아요. 구술자 : 같이 있었어요. 면담자 : 좀 그런게 없었습니까. 고3때 구술자 : 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전 절대 안 가려고 했어요. 너무 그 중학교 자체가 너무 그, 내가 내 분위기랑 너무 달라. 완전 군대식. 그런 게 달라서 난 이 학교는 절대 안 갈려고. 이 학교가 2차였어요. 생긴 지가 얼마 안 되가지고. 학교 인지도가 그렇게 좋은 학교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인제 새로 생긴 학교 중에서 좀 좋아져서 2차 애들은 뭐 그래도 많이 간, 동기들이 많이 간 친구들은 있는데 저희는, 저는 글루 가지 않았죠. 면담자 : 그러면 고등학교는 어디로 가셨나요. 구술자 : 고등학교는 인제 동성고등학교라고 있어요. 여기는 저도 우연히 시험을 쳐서, 왜 뭐 내가 동성고등학교는 이 학교는 어떤 학굔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그 당시에 시험을 치면이렇게 내 성격과 이렇게 딱 되는 데를 보게 되거든요. 위에서부터 1,2,3,4,5,6 이렇게 해가지고 딱 내가 맞는 데를 인제 보게 돼서 나는 저 동성고등학교라는 데를 갔는데 여기는 고등학교때는 굉장히 좋았어요, 이 학교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을 합니다.이학교는 꺼꾸루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중에 가장, 중학교가 군대식이었다 그러믄 가장 군대식이 아닌, 딱딱하지 않은 학교였어요. 이 학교가. 그니까는 뭐라 그러나, 서울에서 유일하게 재단이 캐돌릭이에요. 김수환 추기경이 그때 이상장 우리, 있구,학교가 캐돌릭이지마는 이 천주교에 대해서 교리를 가르치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런 분위기로 해서 굉장히 좀 진보적인 성향도 있고 캐돌릭이니까는 뭐더라, 캐돌릭에서 운영하는 캐, 뭐더라, 이 장소가 있는데 까먹었다. 캐톨릭 회관인가? 그런 것들이 꽤 많죠. 서울에두 있고 지방에도 있고 뭐 그런데 그런 데라든지. 하여간 학교 자체가 굉장히 자유스럽고 우리 학교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중에 가장 일찍 끝났어요. 그니까는 보충수업을 내가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안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끝나면 항상 이, 서울이 조용할 때 우리가 끝나고 그래서 학교 다닐 때 그런 분위기가 이 고등학교는 잘 선택해서 내가 다녔다 이렇게 생각해요. 면담자 : 73년도에 입학을 하셨는데 7년이면 72, 대선이 그때 72년도 있었나요? 73년도면 유신... 구술자 : 그렇죠, 유신, 유신은 중학교 3학년 때 유신이 났었죠. 면담자 : 아 72년도 구술자 : 그쵸. 유신은 중학교 3학년 때.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기억나는 게 유신이 중학교 3학년때 우리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사회 뭐 인제 고등학교를 갈려고. 사회과목, 어디 유신이 되는 바람에 헌법이 바뀌었으니까 사회 과목을 다시, 유신 다음에 10월 달에, 10월 달에 유신이었죠? 10월 달에 교과서를 다 팽개치고 새로운 그, 뭐라 그러나, 참고서 가지고 새로 공부를 했었어요, 애들이. 왜냐믄 이 대통령 선거라든지 모든게 유신으로 다 바꼈으니까. 그래서 별로 좋아는 안 했죠, 우리 공부를 다시 했었어야 됐으니까. 그게 중학교 3학년 때에요. 면담자 : 당시에 혹시 좀 그런 것에 대한 반대 시위 라든지 그런 거는 있었나요? 구술자 : 우리가 중학교 때는 저는 전혀 그런 거는 없었고. 고등학교 때는 우리 학교에서 어...저기 시위를 한 적은 내가 몇 번 기억이 나요. 면담자 : 학생들 중심으로요? 구술자 : 학생들 중심으로. 그렇죠. 우리가 고등학교 때 시위한 거는 동아일보 사태라고 있어요. 동아일보가 그 당시에 무슨 뭐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동아일보가 그 당시에 인제 어...신문에 아마 정부랑 그 당시에 박정희 그 정권에 대해서 내 생각으로는 비판의 글 같은 걸 썼을 것 같애요. 그래서 정부가 압력을 넣어가지고 동아일보한테 광고를 너는 기업에 압력을 넣어서,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말아라, 그래가지고 그게 아마 동아일보 사태의 기본일거예요. 그래가지고 동아일보에서 신문을 내면 밑에 광고판이 백지로 나가서 동아일보 사태 해서. 아마 나중에 알기로는 아마 우리가 단독으로 한 게 아니고 우리 선배들 중에 대학생들이 우리 인제 고등학교 간부들한테 얘기를 해서 이런 거를 니네가 저, 하는게, 시위를 한번 해보라. 인제 우리가 있는 그게 혜화동이라는 위치거든요. 지금 인제 강북이죠. 강북에 혜화동이라는 위친데 그 동네에 굉장히 많은 고등학교가 있어요. 거기가 저, 보성, 경신, 혜화여고, 하여간 고 위로 가도 학교가 많고 그 당시에 우리랑 가장 가까이 옆에 있는 데가 서울대학교가 거기 있었어요. 지금 말하면 서울의 혜화동 거리라고 하나? 그 대학로, 대학로 바로 끝에 우리 그 고등학교가 있었거든요. 고 당시에 서울대가 몇 군데 분산이 되어 있었는데 거기 서울대가 거기 있어가지고 어...아무래도 우리가 데모하는 걸 좀 많이 구경도 하고, 그런 학교, 정치적인 분위기가 있는 학교니까는. 면담자 : 선생님도 그 시위에 같이 참여를 하셨습니까? 구술자 : 동아일보 사태에서는 제가, 시위는 그 당시에 같이 다 참여를 했어요. 우리가 같이 다 나가자 그랬는데 저 개인 같은 경우는 뭐 그때 사회성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뭐 그냥 같이 나가자 그러니까 나간거지 제가 특별히 의식이... 면담자 : 나갔던 것은 학교 안에서 그냥 이렇게 했던 게 아니라 학교 밖으로 나간 거죠? 구술자 : 나갔죠, 몇 번 나갔는데 한번 아직도 기억나는 건 하다가 하다가 이제 최루탄을 맞았어요, 처음에. 그 정말 맵더라고. 그래 가지구 최루탄을 맞고 아니, 흩어져서 하여간에 뭐 밖에서 그니까는 그 담엔 여름에 몇 백 명이 나갔는데 막 어디로 다 흩어져가지고 몇 십 명씩 돌아다니다 다 몇 십 명씩 학교로 들어온 기억이 나요, 그때. 면담자 : 그때 당시에 투입됐던 경찰들이 뭐 최루탄을 쏘는 거 외에는 별다른 다른 건 없었나요? 구술자 : 그런 거, 최루탄을 쏘고 우리는 바로, 저 같은 경우는 바로 도망을 갔고 그래가지구 으...흩어져서 그렇게 무슨 구타라든지 그런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근데 하여간에 최루탄 쏘고 아주 정말 맵고. 그날이, 그 날이 그날인 거는 기억이 나요. 한국에 포드 대통령이 미국에, 한국에 왔었어요,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미국에 왔는데 그 날이 포드 대통령이 한국, 저기 미국으로 다시 간 날이에요. 그래서 그 날 데모를 하면 경찰이 그쪽으로 많이 빠지니까 우리가 데모하기가 좋다. 그래서 인제 아마 그 데모하고 나서 우리 학, 우리, 그, 그게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때 일거야. 인제 그 해에 총학생회장이랑 간부, 우리 동기 간부 한두 명이 아마 형사들한테 그거를 받고 그 다음에 아마 한 명은 제적을 당했나. 제적이 아니고 저기 유급을 시켰나? 그러고 나서 좋은 점이 하나 생긴 게 6개월 동안 조회를 안 했어요. 난 아직도... 면담자 : 왜 조회를 안 한 이유는 뭔가요? 구술자 : 모이지 말라고. 모이지 말라, 모이지 말라 그래서 한 6개월 동안 우리 학교 앞에 전경 버스가 항상 있었어요. 6개월 동안 우리 조회를 한 번도 안 해가지고 데모 한 번 하고 조회 안 해가지고 우리는 참 6개월 동안. 조회가 옛날엔 중고등학교 시절 중에 좋은 게 아니야, 밖에 나가서 일요일 날 아침에 막 30분, 한 시간 서 있는 게. 어린애, 지금 생각하면 중학생도 참 어린 애 들인데 거기 가서 여름 가을이나 봄은 몰라도 여름 겨울에는 이렇게 막 30분 한 시간씩 세워놓고 줄 맞추고 뭐 쓰러지는 애들도 있었다고 그 당시에. 그 좋은 추억이 아닌데 조회를 6개월동안 그거 데모를 한번 한 후로 안 해서 좋았다는 생각이,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면담자 : 어, 그런 그때 동아일보 사태로 인한 시위라든지 뭐 그런 활동 외에 고등학교 때쯤 기억이 남았던 다른 일화 같은 것은 혹시 있으신가요? 구술자 : 고등학교때요. 어. 그 당시 그러면서 제 머릿속에는 계속 그런 게 많았던 것 같아요. 이게 이 사회, 이 정치하는 그니까는 좀 보이잖아요. 정치하는 사람, 인제 사회 아, 이거는 뭐라고 그러나. 어...뭔가 사회가 좀 잘못돼있다는 그런 거. 그러고 그런데 이것이 내 머릿속에는 옳은 방향으로 나간 게 아니고. 아, 다 피하자. 이거는, 뭐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고 그냥 나는 가까이 하지 말자는 그런 생각이 있었지. 이런 걸 내가 무슨 뭘 개혁을 한다든지 변형을 하겠다는 그런 생각은 고등학교 때나 한국에 있을 때는 제가 가져본 적은 없어요. 면담자 : 그래도 인제 그런 활동, 그런걸 보고 자라시면서 아, 이게 사회에 대한 부조리야, 이게 쫌 뭔가 좀 잘못되고 되어가는 것 같다는 그런 인식들은 그때부터 있었다는 말씀이시네요? 구술자 : 굉장히 그러죠. 이 사회가 잘못돼 있고 확실히 느끼고. 제가 그니까 제가 인제 이런 활동을 쭉 하는 것 중에 가장 하나가 머릿속에, 하나가 가지고 있는 게, 저는 이제 여러 가지 사람마다 다르겠죠, 자유라든지 무슨 탄압인데. 제 머릿속에는 아직도 항상 있는 게 이 평등, 어렸을 때 이렇게, 이렇게 같이 살면 제가 가회동에 살 때도 그 당시에 가회동에 보면 그냥 몇 블락 사이에 굉장히 못 사는 사람과 잘 사는 사람이 다 내 눈에 보이는데 이게 뭐 굉장히 그 당시에 못 사는 사람은 정말, 집, 먹을 거도 굉장히 먹기 힘들고 이 뭐라 그러나, 사는 거 자체가 이렇게 집을 기웃거려보며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로 형편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이 사람은 굉장히 잘 사나? 이게 아직도 어렸을 때 내가 기억이 나는 게 그냥 그런 게. 그냥 그런 게 참 부조리 같고 참 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가지고 그냥 어머니한테 어, 세상은 이렇게, 이렇게, 굉장히 어렸을 때 세상이 다들 똑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 한번 했는데 엄마가 바로, 난 아직도 기억이 나, 그러면 빨갱이 되는 거야. 빨갱이. 그래서 그런, 그런 뭐 우리는 어렸을 때 항상 뭐 빨갱이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배웠던 거기 때문에 그거는 이야기해면 안 되는 거고. 어렸을 때 이제 아직도. 인제 나중에 그런 생각났는데. 이렇게 의문점 같은 게 좀 살면서 의문점 같은 게 생기는 게 있는데 이거를 누구한테 물어봐야 될 사람이 없는 의문점들이 좀 몇 개 있었던 것 같애요. 내가 그걸 물으면 저 사람이 날 바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 이거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는 그런 의문점들이 이제 미주 와서 내가 운동을 하면서, 아, 그런 게 아직도. 제가 인제 한국에서 산에를 좀 다녔거든요. 산에를 좀 다녀서. 산에를 좀 다니면서 있는데 아직도 내 기억나는 게 그 산에 갔는데 지리산에 인제 노고단을 처음 올라갔어요. 노고단이 이제 1550m. 꽤 높은 그, 그래도 위에 있는 건데. 노고단에 딱 올라가서 그 노고단 산장이라는 게 있는데 산장에 그 당시에 가면 한 백년 가까이 된 사진들, 7,80년 된 사진이. 딱 붙여 있는데 그 노고단이 옛날 선교산들 별장이었다고 써져 있더라고요. 그 선교사와별장이라는 그 두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매치가 되지를 않아요. 선교사와 별장을 같은 라인에서. 그것이 항상 의문이었는데. 그걸 누구한테도 물어보지를 않고 물어봐도 누가 대답을 줄 것 같지도 않은 그런 거였거든요. 선교사라는 건 내가 항상 느끼기에, 이 사람은 뭐라 그러나, 타지에서 선교, 그니까 일단 선교면 고생, 힘든 것, 개척, 그런 거에 단어가 했지, 선교사가 이 별장? 선교사가 별장도 이 높은 곳에? 것도 자세히 읽어보니까 사람이 지게로 선교사를 날라서 올랐다는 그런 단어, 그게 의문이 참 안 가는데 나중에 내가 이런 의식화 공부 하면서 아, 이 선교사들이 이, 뭐야, 식민지 첨병의 역할의 부분을 담당했다는 걸 알면서 아, 이게 선교사들이, 내가 미국 선교사들 다가 내가 생각했던 선교사가 아니구나하는 거를 나중에 여기서 그런 걸 느꼈던 거죠. 그런 의문점들, 한번 살아오면서 북에 대해서도, 하여간에 뭐라 그러나 그런 간첩에 대한 문제, 그런 거에 대한 뭐 좀 이렇게 내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래도 이게 서로 대화, 물어보거나 의견을 나누기 힘든 그런 답답한 것들이 의식화 하면서 많이 풀린 것들이 좀 많이 있었죠. 면담자 : 예전에, 물론 한국에 들어온 모든 선교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일부 뭐 선교사들이 당시 그 지리산 그쪽이 경치가 좋아서 그랬는지 그쪽에다가 별장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저희도 들은 적이 있거든요. 좀, 예. 그런 부분 (웃음) 구술자 : 그런 뭐 그런 하여간에. 면담자 : 그, 아까 말씀하실 때 그런 쫌 의문점, 남들에게 물어보면 쫌 남들이 나를 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생각했던 인제 그런 의문점이 몇 가지 있었다고 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었나요? 구술자 : 뭐 그런 거라든지. 나는 또 우리 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고등학교 다닐 때, 저기 우리, 우리는 이제 신부님이 신부님들이 수업을 가르치는 시간이 있어요. 천주, 천주교 학교인데 그분들은 특별하게 규정과목을 하는 건 아니고. 무슨 도덕 시간인가, 그런 거 일주일에 한번. 신부님이라든지 수사. 신부가 되기 전에 그 공부하시는 분들들이 와서 가끔가다 인제 우리를 가르치시고 했는데 그분들이 와서 했을 때, 그분 중에 한분이 또 그런 간첩에 대한 얘기를 한번 했어요. 자기가 간첩을 만났는데 자기는 어...그 자기가 만난 간첩에 대한 얘기를 한번 해줬거든요. 자기는 자수를 했대요. 간첩이 자수를 했대. 자기를 잡으러 두 사람이 왔는데 그 선교사, 그 수사님의 말씀이 아직도, 그 왔는데 그, 자기는 두 사람을 총 한방으로 죽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대요, 그 간첩이. 한방이면 두 명을 다 죽일 수 있는데, 인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때 그 간첩이 생각해서, 여기서 어차피 저 사람을 죽여도 자기는 여기서 살아남기가 힘들고, 그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수백 명이 자기를 잡으러 왔으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이, 그 둘한테 자수를 했대요, 자수를 했어. 자수해서 밑에 내려왔대. 내려왔는데 그 사람이 와서 수사기관에 와서 잡았다고 그러드래, 자기를. 자기는 자수를 해가지고 살 수 있었는데 자기는 그 두 사람이 내가 죽일 수 있던 두 사람이 자기를 잡았다 그래가지고 사형을, 얼마 있으면 사형을 당하는 걸 이 수사 분이 면담을 한 이야기를 하는데 난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그 수사, 자기는 와서 내가 정말, 내가 정말 저 사람을, 자기는 죽이지 않고 살려준 사람들이 자기를 죽게 만든 그 억울한 심정에 대해서 하면서. 앞으로 간첩은 그 수사가 그래. 앞으로 간첩은 뭐라 그러나, 그 저 자수를 할래도 꼭 방송국에 가서 자수를 해야 된다고 그러더라구. 그 당시에는 그 말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인지를 몰랐죠. 그게 아니라 간첩 얘기가 쫌 되서 그런데. 하튼, 어쨌든 사회에 큰 부조리 중의 하나라 생각을 하고. 굉장히 연민스럽고. 그런 거에 대해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그니까, 그 사람이 내가 좀 안 됐다, 연민스럽다, 그런 거를 내 가까운 친구랑 누구와도 좀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좀 그런 사회 분위기였기 때문에 좀 힘들었다든지 의문점 그런 게 항상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다, 그렇게 그냥 아까 얘기한 게 그런 것 중에 하나고. 그래서 하긴 나중에 제가 그래서 인제 뭐라 그러나, 아 이 세상에서는 이게 그냥 혼자 조용히 살자.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 산이나 여행을 좋아하니까 산이나 여행 다니면서 살면서. 내가 그래도 나라에 대해서 뭐 하나는 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겠냐, 생각한 게 딱 하나가 헌혈. 그때 헌혈을 많이 했어. 헌혈이 막 길에서 헌혈 하고 지하철에서 헌혈해서 내가 한국에 살면서 헌혈을 꼭 기간마다 하면서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면담자 : 선생님 그때 학창시절에는 선생님이 방금 말씀하셨지만 되고 싶은, 그래도 뭔가 되고 싶은 꿈같은 것은 있지 않았을까요, 앞으로 나는 뭘 하면서 살아야겠다, 그런 거는 없었나요? 구술자 : 이런 말씀하기 그런데...요즘은 그런 직업이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런 직업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 건 없었지만 그냥 저는 여행가가 되고 싶었어요. 여행가라기보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런 저런 활동 등을 하고 싶었다고 하는 게 맞겠죠. 아무튼 저는. 저는 여기 미국에 이민의 형식을 빌려서 왔지만 실질적으로 어떻게 미국에 와서 여행이나 다니면서 좀 살까 하고 이민을 왔어요. 면담자 : 그럼 고등학교를 75년에 인제 졸업을 구술자 : 76년도에 면담자 : 76년에 졸업을 하셨는데 졸업을 하고 뭐 대학을 가신 겁니까? 아니면 다른 걸 하셨나요? 구술자 : 76년도에 졸업해서 그 당시에 이제 대학을 가서 떨어져서 재수를 했어요. 재수를 하고 그니까는 인제 제가 사는 데가 뭐, 만약에 전 인제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안 했거든요. 그 당시에 대학생활을 했다든지 혹시 노동자였다든지. 어떤 이런 그런 그룹에 속했으면 내가 어떨까라고 생각은 한번 해봤거든요. 저는 인제 한국에서 의식화라든지 활동을 한 번도 안 했으니까. 그게 그렇다고, 저는 이제, 뭐라 그러나 어쨌든 그 사회에서 그 당시에 살던 데에서는 저는 인제 대학을 가야되는 그런 뭐, 계층이었거든요. 대학을 가려 그러는데 뭐 공부를 안 해서 떨어졌지. 해서 또 그렇다고 대학을 가서 떨어진다고 갑자기 내가 공장에 가서 취직을 한다든지 그런 건 아니고 또 대학 공부를 해야되는 거예요. 재수를, 또 시험봐서 또 떨어졌어요. 그래서 재수를 해서 떨어져서 삼수를 했죠. 삼수를 했는데도 또 떨어졌어. 또 떨어졌어. 그래가지구 그 다음에 인제 그래두 3수를 해서 떨어진다 그래도 내가, 뭐라 그러나, 어, 노동자가 될 그런 계층에 있지 않기 때문에. 삼수에 또 떨어져. 그 특별히 그러면 증말 그래도 또 어쨌든 대학을 가야되는 건데, 3수해서 떨어지고 나서는 인제 뭐 저기, 저 뭐 또 대학 준비 시험 공부를 해야 되지마는 군대 징집이 나왔기 때문에 인제 2년, 76년에 7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8년도에 제가 군대를 갔어요. 78년 6월 달에. 그래서 광주 항쟁 시기를 제가 군에서 보냈어요. 81년 3월에 제대를 했으니까. 면담자 : 그, 말씀 안해주셔도 되는데요, 그, 어떤 대학 어디 과를 그, 보셨습니까? 두 개다 재수할 때도 처음 76년에 원서 쓸 때부터 똑같은 학교 학과였나요? 구술자 : 그때는 제가 공부하고 싶은게 건축을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건축을 공부하고 싶어가지고 이 대학, 저 대학 건축과는 많이 봤을 것 같애요. 면담자 : 건축과를 두 번 이렇게... 구술자 : 두 번이 아니라 네 번 봤죠. 2차도. 1차도 보고 2차도 보고. 아니 첫 번에는 2차를 안 봤나? 별로 좀 이렇게 어... 뭐라 그러나 그래도 대학을 꼭 가긴 가야되는데. 면담자 : 78년도에 군에 6월에 입대를 하셨는데 근무는 어디에서 하셨습니까? 구술자 : 근무는 7사단이라는 덴데요, 저는 7사단 8연대라는 데서 제가 근무를 했는데 거기가 철책에 근무를 쓰는 데에요. 화천이 본부고, 그래서 거기서 3년, 33개월 근무를 하면서 거기서 일년동안 페바(FEBA: Forward Edge of Battle Area, 최전선 전투지역)에 인제 있고 6개월을 철책 근무를 쓰는데 저희는 한 9개월 섰어요. 철책근무를. 면담자 : 그, 군에 있을 때 80년 광주가, 인제 5·18이 일어났는데 군에서 그 내용을 들으셨습니까? 구술자 : 못 들었죠. 우리는 전혀 못들었죠. 우리는 그리고 거기는 특히 철책이라. 철책. 철책에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아요. 78년도에 들어가서 철책이. 철책에 나왔을 때 페바, 뒤쪽에 있었을 땐데 그때 우리는 무슨 텔레비가 한대 있기는 있었다. 그래도, 뭐 그 당시에 테레비로 뭐 광주 야이기는 들을 수는 전혀 없는 거고. 서울에 있는 사람들도 광주의 이야, 소식을 테레비로 전해들을 수 들을 수 없는 입장 아니야? 테레비로는 광주 폭도들이라고 나왔을테니까는. 광주 얘기는 전혀 못들었는데 인제 나중에, 나중에 왜냐면 거기에 경상도 병력도 있고 전라도 병력도 있고 다 모든 도에서 있었을때 전라도 병력은 분위기가 달랐죠, 굉장히. 경상도 병력, 에, 경상도에 사는 내 친구는 굉장히 아 이런, 그러니까는 대놓고 때려죽여야 된다고, 테레비에서 하는 거 보고 하고. 전라도에 있는 애들은 인제, 그 당시 그런 말은 돌았어요. 전라도 사람은 휴가를 보내면 안 된다고. 왜냐며는 휴가갔다가 군복입고 돌아다니면 괜히 맞는다고. 위험하다고. 한동안 그러고 저는 그러고 나서 제대하고 나서 광주 얘길 좀 들었지 군대에서는 거진. 그리고 또 그 당시에는 제가 제대하기 얼마 전에 삼청교육대 라는 게 생겼죠. 삼청교육대를 저는 뭐 직접적으로 본 건 아닌데, 우리 부대에서 그 철책에도 삼청교육대 병력들이 이렇게 텐트를 치고 사는 거는 제가 몇 번 목격을 해서 저는 그때 제대해가지고 말년이었고 밑에 있는, 저기 근무하는 병들이 거기 가서 그 사람들 교육시키고 그랬다는 말은 내가 들었어요, 직접 그들을 내가 뭐 교육시켜보거나 그런 적은 없는데 길에서만 이렇게 좀 봤, 봤 본 적이 있죠. 면담자 : 군 제대하고 광주 소식을 처음 들으셨다고 하셨는데 구술자 : 군 제대하고 나서. 아마, 군 제대하고 나서 광주 소식을 글쎄 들었나? 하여간에 그냥 글쎄 그것도 저도 그냥... 면담자 :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에 구술자 : 기억이 안 나요, 한국에서는 내가 전혀, 그러고 군을 제대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제가 인제 말씀드렸지마는 여행가가 되겠다는 꿈을 찾아서 서울에 이, 뭐라 그러나 우리나라 남한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살았죠. 사회에. 면담자 : 보통은 이제 학교를 꼭 이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 군 제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대학 시험을 한번 치러봤을 법도 한데요. 이렇게 여행가로, 가가 되고 싶어서 여행을 이렇게 전국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셨잖아요, 특별하게 이렇게 좀 돌아다니시는 이유가 그, 일종의 뭐 현실 도피 그런 것도 좀 있었나요? 구술자 : 글쎄, 하여간에, 그니까는 이 사람, 지금 이 정권을 잡은 사람이라든지 이 사회 구조, 이게 너무 싫었어요, 하여간에. 굉장히 좀. 이거는 하여간에 뭐가 그럼 거기에는 내가 접근 할 수 없는 그런 부분들. 그리고 싫었고. 그냥 그 여행은 어렸을 때때부터 생각했던 거고, 좋아했었던 거고 그러고 이제 실상에 제대하고 나서 바로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니까는 구속력이, 집안에서, 구속, 너는 더 공부해서 대학을 가라, 뭐 이런 구속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 그 실상에 혼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죠. 면담자 : 그러면 그때 아버님께서 제대 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이렇게 여행을 전국적으로 좀 다니시려고 했을 때 어머니나 형님 누님들 사이에 반대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 부분들은 좀 없었나요? 구술자 : 글쎄, 우리 엄마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인제 뭐 쪼금 있다가는 반대하기가 좀 쉽지 않은 게 그때 우리 누나가 셋이고 형이 하난 누나 셋이, 큰 누나 작은 누나는 전부다 저랑 나이가, 열 살 넘어 차이니까, 뭐 집안에 안 계셨죠. 그 누나 셋이 하여간에 전부 한국에 없었어요, 전부다, 어, 어, 외국에 나가 있었고. 저를 이렇게 제어할 사람이, 우리, 저는 형이랑 둘이 살았는데 형은 저보다 더 이렇게 여행을 더 다니는 사람이라. 별로 우리 형제 둘이서 그렇게. 면담자 : 그 경제적인 건 어떻게 해결했어요? 여행을 다니면 아무래도 아무래도 아무리 안든다고 해도 돈이 쪼끔 드는데. 구술자 : 아 돈이 들죠. 경제적인 건 인제 형이랑 저랑 등산장비점을 운영했어요, 서울에. 그래서 인제. 처음에는 책방을 했었어요. 책방. 책방을 쪼끄만 하게 했는데 면담자 : 군 제대 하고 나서요? 구술자 : 군 제대 하고 나서. 형이, 형이 책방을 운영하는 거를 내가 같이 가서 했죠. 근데 인제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사요. 안 사가지고 책방이 인제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러가지고. 하여간에 인제 등산장비?등산장비점이랑 겨울에는 스키 팔고, 그리고 인제 개인으로 가이드. 대학생들, 수학여행 가이드 같은 거. 하면서 인제 일정한 수입은 없지만 그냥. 쪼끔쪼끔 들어오는 수입으로 (전화 벨소리) 뭐 일정한 수입은 별로 없었지만 그냥 그런데로 생활을 할 정도의 수입은 생겼거든요. 면담자 : 꾸준히 하신 건 아니고 일정정도 돈이 쫌 모이면 또 여행을 다니시고 했나요? 구술자 : 뭐 쫌 그런 식이었어요. 그 당시에 제 친구들은 다들 대기업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해가지고 그쪽 고등학교, 지금도 제일 친한 제 고등학교 동창들인데 그 친구들을, 별로 못, 그 당시는 고등학교 졸업해서 다 대기업에 들어가면 대기업이 평생 직장인줄 알고 정말 열심히들 일했고 뭐 그 당시에는 근무시간이라는게 5시, 6시에 퇴근하는 게 아니고 9시 8시 하고 뭐, 그러니까 걔네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고 나는 이제 내, 나의 즐거운 새야, 우리는 여행 다니고. 남들이 보면 그 미래가 저 사람은 어떻게 살까,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었죠. 면담자 : 등산장비점은 좀 잘 된 편이었나요? 구술자 : 아니, 그것도 잘 되진 않았어요. 면담자 : 아니 지금, 지금은 물론 인제 많이 생기긴 했는데. 구술자 : 지금, 지금은 많이 다녔지, 그 당시에는 등산하는 사람들이 좀 전문적인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등산, 일반 뭐 일반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고 뭐 아는 사람들만 모여가지고. 그리고 쪼그만 동네였기 때문에 그렇게 썩 좋지 않은 그런 건 아닌데 인제 그 등산장비점이 인제 대학가에 있어서 대학가의 풍경은 내가 항상 데모한다든지 그런거는. 바로 제 또래죠 제 또래보다 조금 어린. 제 또래는 그때 인제 바로 그 뭐라 그러나 직장을 다녔었고. 대학생들은 바로 제, 저보다 몇 살 어린 애들이 데모하는 거라든지 그런 것들은 내가 항상... 면담자 : 어디 근처에 있었나요, 등산 장비점이? 구술자 : 신촌인데, 이화여자대학교 바로 밑에 있었어요. 면담자 : 그럼 80년대 당시에 그런 시위같은 것은 많이 보셨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항상, 뭐 거기 지나가고 최루탄 할 때 가면 인제 거기에 인제 가까운 애들은 우리 저기 가게 많이 들어와있다가 나가거나 뭐 그런 것들은 제가 항상 봤어요. 면담자 : 여행을 이때부터 그러면 제대하시고 이거 운영을 하시면서 좀 돈을 모아다가 가시고 가시고 하셨는데, 어디어디 뭐 아까 말씀하실 때 뭐 지리산도 가보시고 했다는데 어디어디 좀 돌아다니셨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또 여행지라든지 있나요? 구술자 : 가장 기억나는 거라면 그 당시에 마라도 간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왜 마라도를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전혀 인포메이션이이 없으니까, 서울에서. 그래가지고 하여간에 계속 그 다음, 그 여행에 마라도로 한번 가보고 우리나라 최남단이란 데를 밟아보고 싶어서, 그런 욕심이 있어서, 마라도에서 찾아 찾아, 근데 갈 때마다 계속 내가 얻는 인포메이션이, 같은 인포메이션이 하나도 없어. 제주도 도착할 때까지도 인포메이션이 없어서 가서, 아직도 내가 그, 그게 참 기억이 나는데, 그 갈, 갈 때까지가 여정이. 제주도에 인제 시에 도착해서 여행사 처음 가서 마라도에 갈 수 있는 걸 물어봤더니 그 사람들도 별로 그 당시에는 아는 편이 없고. 그래서 모슬포에서 배가 떠난다는 것만 알고 그래서 내가 모슬포를 찾아가서 도착했더니 마라도 가는 배가 없다고 그러더라구요. 어떤 사람이. 근데 내가 어떻게 우연히 찾아서 마라도 가는 배의, 배의 선장 집을 알아가지고 그 사람 집을 갔더니 어, 10일에 한번씩 간대요. 어머 내가 10일 동안 여기 있어야 되? 그랬더니 그날 배가 두 번 간대. 아침 8시에 출발하는 배가 한번 있고 12시에 출발한대. 그니까 8시에 배를 타고 가서 12시. 좀 아쉽지만 어떤 사람인지 전혀 기억 못하는데 12시 배를 타고, 8시 배를 타고 12시에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 아침 8시에 배를 타고, 인제 배를 타러 갔어요. 거기 있다가 한 5일을 기다려가지고, 10일에 한번. 갔는데 분명 저 배인데 배가 한참 가고 있더라구요. 저 배가 왜 가지 그러는데, 마라도 가는 배가 떠났대요. 면담자 : 8시 맞춰가지고... 구술자 : 8시보다 훨씬 전에 먼저 갔는데 떠났대. 아니,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이 내가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가지고 그 배가 다시 와어. 마라도 갔다 왔어요, 한 10시쯤이 오드라구. 아니 어떻게, 저, 거기 ○○○○ 했더니 141114임용천01_00:52:00 거기 마라도, 아니지 마라 분교라는 국민학교가 있는데 제주시에서 교육감이라는 사람이 와가지고 거기를 그날 방문하려고 그랬는데 그 사람이 먼저 가자 그래서 갔대요. 그니깐 저는 얼마나 열이 났겠어요. 그러면서 도대체 이 나라는, 아니, 교육감이라는 사람이 와가지고 지맘대로 공공운항선을 먼저 타고 가면 나머지 사람은 어떡하란 말이야, 그래서 인제 그 10일을 또 기다려야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인제 그 선장이랑 거기서 싸움을 했어요. 내가 이거를 신고를 하겠다, 니가 배 출발하는 시간을 지키질 않았으니까. 신고를 하겠다, 얼르구 뭐 해서 열 해가지고 그 사람이랑 합의를 본 게 12시에 배를 가면 그 마라도 섬을 한바퀴 도는데 45분 걸린대요. 자기가 45분동안 있을 테니까 한바퀴만 돌고 나오래요. 그럼 떠나지 말아라, 떠나면 나 10일 동안 있어야 되니까. 그 약속을 하고 인제 거기, 그 배를 타고 가서 보니까 그 선장 말이 이해가 가는 게 마라도가 배를 닿을 수 있는 그 선착장이 제대로 되지 않아. 지금두 그렇게 좋은 건 아닌데 지금은 되있더라구요. 제가 재작년에 가서 한번 정말 마라도에 가서 30년 전의 추억을 하고 가서 왔는데 거기 저기 뭐야, 어, 가서 45분동안 한바퀴를 딱 돌고 그 배를 타고 다시 왔던 기억에 아직도 제일 많이 남아요. 그리고 뭐 많이 다녔어요. 뭐 산이라든지. 우리나라는 여행을 다닐 때는 산을 안 끼고 다니기가 쉽지 않은게 산이 곳곳에 많이 있거든요. 이사람 저사람 아는 사람 지인을 통해서, 혼자도 다니고 뭐 좀 다니고 MT하는 애들이라든지, 대학생들, 인제 저보다 몇 살 또랜데. 특히 제가 이대 옆에 있어 거기 있어가지고 이화여자대학교는 여자대학교이기 때문에 MT라든지 수학여행을 간다든지 무슨 쪼그만 그룹에, 연극반 연극반이라든지 쪼그만 소무리에서 MT가고 그러면 인제 부탁을 해요. 가이드를 좀 해달라. 그러면 제가 이제 그 사람들 데리고. 적게는 대여섯명 제일 많게는 한 1백 육십명 까지. 이렇게 가이드를 하면서 그런. 뭐 그렇게 여행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그 수입도 어...요런 쪼끄만 가이드는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크게 수학여행 같은 걸 하면 수입이 적은 수입이 아니었어요, 솔직히. 많이 받아요 면담자 : 몇 년동안 이렇게 한국에서 여행을 좀 하셨나요? 구술자 : 81년부터 해서 제가 미국을 84년 6월달 오기 전까지. 면담자 : 그럼 선생님 다시 쫌 여쭤보겠는데요, 84년애 이민 형식을 빌러서 왔다고 했는데 어, 이 계기, 그렇게 미국 가야겠다고 생각하신게 오래전부터였나요, 여행을 하시면서 느끼게 된 건가요? 구술자 : 꼭 그런 거는 아닌데 여기서 인제 좀 대학교도 좀 떨어졌고. 그리고 인제 그 당시에 여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외국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이 좀 있었어요. 이 외국 여행을. 그래서 이제 제가 아는 박경호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처음으로 인제 세계 일주를, 까발로라는 신발 회사로 해서 한바퀴 돌았고. 그 다음에 대우자동차에서, 이 친구 말을 참 잘해. 그래서 잘 대우자동차 꼬셔가지고 대우자동차에서 전액 후원을 수천만원을 받아가지고 대우자동차를 타고 세계여행을 한바퀴 하면서 이런 배낭 여행 전단계의 쪼끄만 사람들이, 그런 여행을 좀 하는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시작하기 시작을 했거든요. 저고 이제 미국 와가지고 인제 이민쪽으로 해서 여길 왔지만 와서 인제 여행이, 그 당시에 외국 나가기가 쉽지가 않았어요. 여권 발급도 쉽지 않았고. 어...제가 그 친구처럼 그런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내가 인제 여기 누나가 살고 있으니까 누나가 인제 초청을 한거니까, 발판 삼아서 누나네 집에서 좀 있다가 미국을 안 다음에 영어를 좀 배워가지고 인제 미국에서 돈 좀 벌면 나도 여행을 좀 열심히 해보겠다, 하는 생각으로 솔직히 이 위주로 왔어요. 오기는. 면담자 : 준비는 언제부터 하신 겁니까, 미국 올 준비는 구술자 : 미국 올 준비는 이, 뭐라 그러나, 한 거니까 이거는 가족 초청이기 때문에 가족이 초청한 거기 때문에 어...그 당시에도 형제 초청으로 하면 오년, 오래 걸린다고 그래가지고 그때 우리 누나가 우리 어머니를 먼저 신청을 해서 어머니가 미국에 입국을 갔고, 그 다음에 어머니가 절 초청해서 간 게 2년 정도 걸렸을 거예요. 그래서 한 그 당시 한 84년쯤에는 제가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면담자 : 그런 결정이 쉬우셨나요? 아니면, 전혀 새로운 세계에서 이제 살아야 되는데. 그런 결정을 한 다는 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험, 일종의 모험이고 쉽지 않은 결정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하거든요. 아예 지금까지 생활했던 한국을 떠나서 전혀 언어도 좀 잘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계속 생활을 해야 될지 모른다는 그런 것이 막연한 두려움일수도 있고 그랬을 텐데. 어, 뭐, 단순하게 여기서 학업을 계속해야 되는 것, 뭐 그런 이유도 아니었고 직장이 이쪽에 있어서도 한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이쪽에서 좀 인제 여행을 한번, 워낙 여행을 좋아하시니까. 이 미국에서 또 여행가로서 여행을 하고 싶다는 포부만으로 오시기에는 너무, 제가 생각할 때는 쫌 두려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 글쎄요, 지금 너무 오래 돼가지고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게 쫌 다른 사람들보다는 뭐 그, 뭐라 그러나 미국 와서도 좀 편하게 살았고. 편하게, 누나 덕분에. 와서 뭐 다른 사람들은, 그 당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유학, 유학생들이 여유가 있으면 집안에서 돈을 부쳐서 열심히 공부를 한다든지, 아니면 또 그 당시에 솔직히 여, 뭐라 그러나, 유학생들이 아직도 그 당시에는 정말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은 경제 활동을 하면서 유학을 해야 되니까 굉장히 힘든, 시기였죠. 그 당시에 정말 그, 집에서 전적으로 돈을 대서 유학을 온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부유했지 않았으면 쉽지 않았을꺼란 말이에요. 그런 것에 비해서, 아니면 이제 여기서 가족이민을 와서 미국에서 돈을 벌겠다, 그런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짭(job)이 많았어요. 오면 어디나 일을 할 수 있는. 왜냐면 경기가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한인들의 비지니스가 잘 됐기 때문에. 뭐 항상 뭐 그 좋은 뭐, 뭐라 그러나 저 저기, 짭이 많았으니까, 일할 수 있는 데가 많았으니깐 와서 돈을 벌거나 그럴 분들은 오시면 열심히 일하고 이런 편인데 그거에 비해서는 저는 쪼금 이렇게 와서 고생들 많이, 미국에 오면 고생을 많이 한 이야기들 하는데 (TAPE 교체로 잠시 중단) 면담자 : 그럼 선생님께는 처음 이렇게 오셔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을 하셨나요? 구술자 : 저는 인제 처음에 와가지고는 인제 이게 누나랑 같이 살았거든요. 누나랑 사는데 누나가 인제 미국분이랑 결혼해서 살았어요. 저는 그 집에, 그 집에서 같이 살게 됐죠. 면담자 : 어머님도 같이 사셨나요? 구술자 : 어머니는 인제 왔다가 나갔다가 다음에 또 들어왔죠, 엄마는. 들어왔는데 일단 누나한테 잘 보여야 되니까, 누나 말 잘 듣구 누나가 그 당시에 한 27살 됐거든요. 27살 돼서 아직도 한참 앳되니까 누나가 와서 따른 거 하지 말고 공부를 해라. 우리 누나가 저를 대학교에 보내줘, 입학을 시켜줬어요. 일단 한번 누나말 잘 들어야 되니까 내가 대학을 좀 열심히 다녔고 뭐 공부가 되나 뭐 또 한 번 또 해보자, 오랜만에 그래서 대학을 일이년 다녔죠. 면담자 : 처음 들어오신 곳이 어디신가요. 누님이 어디 계셨나요? 구술자 : 여기, 인제 필라델피아. 내일 가서 만나보시면 필라델피아, 저기 인제 필라델피아 사람들 거기서 인제 다 만난 거거든요. 필라델피아에서 인제 어...그러니까는 뭐 누나가 뭐라 그러냐며는 경제적으로 쪼끔 여유가 되고. 그 누나랑 둘째누나지만 저랑 한 열 살, 열한 살 차이가 나거든요. 그러니 누나는 자기는 인제 어렸을 때 자기는 혼자와가지고 여기서 인제 살면서 인제 뭐라 그러나, 가족이 좀 이렇게 뭐라 그러나, 그리웠겠죠. 동생이 왔으니까 잘해주고 싶어서.뭐 돈을 대줄테니까 대학을 다니라 그래서. 인제 여기서 딴 일 없이. 면담자 : 대학 이름은 뭐였나요? 구술자 : 대학이 컬리진데 덜라웨어 커뮤니티 컬리지(Delaware Community College)라고 거기에. 예, 델라웨이 커뮤니티의 뭐라 그러나, 여기서 말하면, 음...2년제, 그니까 인제 여기서 4년제 대학 그것만 마쳐도 그냥, 그냥 한다고, 교양과목을 공부하는, 주로. 4년제 대학을 가기 위해서 미국 이 인제 경제적으로, 여기 지금 대학 등록금이 비싼데 거기 커뮤니티 칼리지 다니면 그 같은 타운에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할인을 받아요. 그래서 공부 할 수 있는 컬리지거든요. 영어도 좀 배워야 되고 그러니까. 거기서 이제 쉬운 거 과목을 찾아서 학교를 좀 다녔어요, 거기서. 면담자 : 적응 하실 만하셨어요? 구술자 : 그, 뭐 , 그때 적응이 뭐 그렇게, 이게. 저는 딴 생각이 있었는데 공부하라 그랬지만 누나한테 보여야 되니까 그냥 다니, 다니는 거고. 아니 뭐 적응 못하는 게 뭐 지금 특별히 내가, 내가 뭐 솔직히 여행은 한다 그랬지만 미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좀 뭐, 누나 밑에서 누나 그늘에서 일단 있어야 되니까 거기서 좀 뭐야, 공부는 하자. 그래가지고 공부는 했죠. 면담자 : 그때 당시 필라델피아에 오셨을 때 그 인제 누님, 식구 중에 누님이 계셨지만 필라델피아에 같이 어울리셨던 한인들이랄지, 꼭 한국인이 아니더래도 어울리는 어느 부류들이 있으셨나요? 구술자 : 첨에 왔을 때는 제가 아무도 없었던 게 누나가 한인타운이나 한인들이 있는데서 사신 것이 아니고 또 남편이 미국분이 아니기 때문에 쫌 떨어져서 살아가지고 다른 한인들을 제가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그냥 누나랑 쭉 지내고 면담자 : 학교에서도 구술자 : 그러고 인제 학교에 갔더니 인제 그 학교에 5, 6명 정도 한인들이 있었어요. 저보다 다 나이가 좀 어린데, 걔들 인제 대학을, 고등학교 바로 졸업하고 좀 거기에 온 애들이에요, 와가지고. 인제. 와가지고 그래서 인제 뭐 만나서 첨에 몇 달동안은 그냥 집에서 놀았으니까 걔네들 만나니까 좀 반갑더라고 일단은. 말도 통하고. 그래가지고 걔네들이랑 이제 학교 만나서 이야기 하고 주말에 만나면 걔네들이랑 좀 어울리고 좀 그랬죠. 면담자 : 이제 좀 궁금한 점이, 필라델피아에서 선생님께서 이렇게 한청련 활동을 하시고 하신 게 몇 년 부터인가요? 구술자 : 제가 인제 84년6월달에 왔거든요. 84년 12월 달에 한청련이 필라델피아에 결성돼 있었어요.그때 제가 거기 참석했어요. 6개월 만에 면담자 : 예, 그러니까 그 부분을 제가 인제 좀 여쭤보려고 하는 건데, 뭐 선생님께서 한국에 계실 때부터 뭐 이렇게 조직 활동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에 대한 어떤 생각이 투철하셨던 것도 아니고, 구술자 : 네 전혀 없었죠. 면담자 : 또 생각도, 좀 미국 들어오신 것도 아 좀 여행도 하며 다녀볼까. 뭐 이제 그런 생각으로 좀 이렇게 들어오셨는데 갑자기 제가 볼땐 좀 방향이 좀 많이 바뀌신 것 같아서 이 6개월 동안, 들어오시고 12월에 그 결성됐을 때 처음부터 참여를 하셨다고 했는데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웃음) 구술자 : 6개월 동안 인제 그니까, 아 남들이 하튼 말하면 정말 남들은 다 열심히 미국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랬는데 내가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면담자 : 그런 의도로 여쭤본 건 아니구요. 구술자 : 와서 와가지고 거기 인제 가서 만나보시면 알겠지만 장광선 형님을 만나게 됐어요. 장광선 형님은 참 존경스럽고 만나서. 면담자 : 학교에서 만나신 건가요? 구술자 : 학교에서 만난 건 아니구요. 장광선 형님 동생이 그 학교엘 같이 다녔어요. 그래가지고 자기 오빠를 한번 만나봐라,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뭐 사람 만나는 거 저 좋아하고 그러니까. 만나봤는데 그 광선 형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이 사회에 부조리한 거나 뭐, 북에 대해서도 좀 얘기 하고 면담자 : 처음 만났을 때부터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해서, 근데 뭐 굉장히 궁금했던 부분들을 또 내가 살아오면서 누구랑 이야기는 안 했지만 또 궁금했던 점을 많이 이야기를 하시고 그래요. 아,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때 당시에 모임이 특별히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근데 인제 그런 모임이 인제 준비, 내가 만났을 때 전부터, 전에 인제 좀 무브먼트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한청련을 조직하려는 그런 조직에 대해서 저는 그런 건 전혀 몰랐었고 그러고 나서 인제 그 당시에 뭐냐면 초창기에 그 당시 윤한봉 형님, 형님이 그때 인제 직접 돌아다니면서 우리말로 하면 한사람 한사람 장풍을 날릴 때라 그러거든요. 눈이 팍, 초롱초롱, 카랑카랑 하셔서 인제 저는 인제 그래서 저, 어떠 어떤 분이 LA에서 오시는데 한번 만나보라고 해서 또 사람 만나니까 만난 분이죠. 윤한봉 형님이었어요. 형님이 인제 더 이야기, 이런 사회에 대한 문제를 더 이야기 하고. 면담자 : 그때 만나신게 언제인지 혹시 기억을 하시나요? 구술자 : 구술자 : 글쎄. 근데 12월 달에 창립했으니까 10월달 아니면 그게 미국 온지 얼마 안돼요. 제가 6월달에 왔는데 10월 달, 11월 달에 인제 그분들 다 만나게 됐어요. 어, 그러냐고. 어. 한봉이 형님이 나중에 내가 한청련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며. 뭐 만나는데 내가 거기에 대한 의식이 그렇게 있었던 게 아니니까. 그 사람 생각은 그럴 수 도 있고 난 그렇고. 하여간에 그러고 나서 한청련을 하는 날, 한청련 결성하는 날 나보고 오라고 그랬어요. 그날 한청련 결성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그 당시에 몇 명 한청련 다 되기로 했는데 나는 그 당시에 인제 한청련을 딱 한다고 온 건 아니었어요. 온 건 아니었는데 어, 지금 인제 그런 결성, 그룹이 됐는데 내가 인제 그날 딱 받은 느낌은, 내가 여기 이 그룹에 들어와야지 내가 더 많은 걸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그만큼 그룹에 들어오는데 내가 특별히 문제될 것도 아니고 해서 같이 한청련 합시다. 그저 한청련 될 때까지도 저는 뭐 다른 사람 막 의식의 수준으로 비교한다면 저는 뭐 첫 발짝이나 마찬가지였겠죠. 면담자 : 처음 오셔서 장광선선생님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만나고 나중에 인제 윤한봉 선생님이 필라델피아에 오셨을 때 만나셨다고 하는데, 주로 어떤 말씀을 선생님께서 그렇게 하시던가요, 장광선 선생님이나 윤한봉 선생님이나. 하셨던 말씀이 좀 기억이 남는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근현대사.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쭉 읽, 이야기하면서 근현대사를 쭉 이야기하면서 어...내가 배운 역사가, 나는 대학교 공부를 안 했으니까. 대학교에 있었으면 혹시 내가 이런 사회 과학 쪽, 사회 과학 서적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는 있었겠지만 내가 그런 부분도 없었고 누구한테 무슨 의식화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근현대사를 조금 이야기 하면서 이런, 이런 것이 니가 배운 게 잘못됐고 이 사회구조가 좀 잘못됐다는 그런 것이 전반적인 이야기였어요. 한봉이 형님은 인제 와서 5·18이야기도 하면서 한봉이형이 어떤 분이라는 거는 쫌 들어서 알았죠. 5·18을 해가지고 일루 오셨고 이렇게 해서 돌아다니면서 한다. 그래가지고 이 한청련 조직하기 전에 인제 필라에서 뉴욕 한청련과 뉴잉글랜드도 한청련이 있었거든요. 뉴잉글랜드 한청련까지 해가지고 그 집에 한 40명, 30명 이상, 40명 정도가 다 모여가지고 2박 3일인가, 1박 2일인가 같이 모여서 학습도 하고 노래도 부고 여러 가지 했었어요. 그 당시 뭐 들어서 아시겠지만 그 당시 한청련들의 구성원들은 국내에서 운동하던 유학파와 현지에서 나름대로 자생적으로 이런 한국의 문제를 가지고 했던 모임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두 부류가 인제 거기 있었어요. 처음엔 유학파가 아무래도 한국에서 온 유학하시는 분들이, 한국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이, 뭐라 그러나, 많은 걸 알고 있고 의식화도 잘 돼있고 그래서 인제 많이 역량을 발휘했죠. 그러면 인제 그 나이, 그 유학생들과 그 당시에 모인 사람들이 이제 우연하게 전부 제 나이또래였어요. 그니까 제가 인제 그 사람들하고 친해야 되니까, 저 57년생인데 56년생, 제일 많은 사람이 52년생. 혹은 57년생, 우리가 제가 공포의 57이라 그래가지고 우리가 열두 명 제일 많았어요, 우리 또래가. 그러구 뭐 56년, 58, 59 뭐 하여간에 고 부류가 많아가지고 같이 사람들을 많이 만나니깐 처음에 뭐 저는 한청련을 바로 됐다 그래도 그 사람들과 의식 수준을 비교하면 한참 떨어졌을 거예요. 그러면서 필라델피아 한청련의 특징이었던 게 하나가 정말로 우리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일주일마다 한 번씩 만나서 학습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어요. 정말 꾸준한 학습을 필라델피아가 가장 할 정도로. 단지 인제 필라델피아는 동포 사회가 적어가지고. 동포 상대 활동이 나름 다른 지역보다는 떨어졌는데 우수한 인재. 한청련에 지금 여기서 홍정화라든지 정윤희라든지 전부 필라 출신이거든요. 그 할 정도로 인재들을 많이, 한청련이라든지 의식화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곳 중에 하나죠. 면담자 : 창립이라고 해야 되나요, 결성식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게 아마 84년 12월에 구술자 : 12월에, 어, 아니 창립은 1월 달인가 2월 달에 했을 거예요. 85년. 면담자 : 아, 창립은요? 구술자 : 2월 달이다, 2월 달에 했을 거예요 면담자 : 창립을 할때 그러면 필라 타지역 한청련, 이미 결성된 타 지역 한청련에서도 같이 오고 모이고 그랬었나요? 구술자 : 창립은 우리끼리 했고. 뉴욕에서는 한두 명이 일단 내려왔었어요. 뉴욕에는 한두 명 왔고, 그때 제가 30명, 40명 만났을 게 지금 생각해 보면 필라델피아 한청련, 그 당시에 필라델피아 한청련이 인제 결성하기 위해서 타 지역에서 와서 수련회를, 수련회 비슷하게 하게 부흥회 비슷하게 해서 해준 것 중에 하나죠. 그게, 그 날이 1984년 12월 25일 아마 크리스마스 때쯤에 만났을 거예요. 그래서 2박 3일인가, 1박 2일인가 그 후원자 되시는 분 집에서 다 같이. 면담자 : 그 결성식을 할 때 필라델피아에서는 몇 명 정도가 한청련 그 회원이라고 해야되나요? 아무튼 그걸로 시작을 하게 된 건가요? 구술자 : 그쵸 그 당시 한 7명 됐나? 경재형님 하고 광선이 형님, 동생이 세분 있었어요. 장경단, 장맹단, 장광민. 시카고에서 만났던 그 장광민. 면담자 : 예예예, 다 형제신가요? 구술자 : 예, 형제에요, 장광민, 광선이 형님 형제. 면담자 : 시카고에 있을 때 만나고 이렇게 넘어왔거든요. 구술자 : 광민이요? 그렇게 하고 경재형님 가서 만나고, 그렇게 하고 저란 구범서 형님이라는 분이 또 한분 있었을 거예요, 그 분도 한청련으로 해서 한 6명인가 7명 정도 있었어요. 또 한사람 이재천씨라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이름은 올리고 활동은 한번도 안 하신 분이에요. 면담자 : 주로 어떤 활동을 중심으로 한청련을 활동을 했나요? 구술자 : 그 당시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우리가 왜냐면 LA나 뉴욕 시카고 보다는 인제 숫자라든지 무슨 동포 상대 활동할 것도 적었고 어, 그래서 우리는 솔직히 몇 년동안 계속해서 우리는 역사 학습, 철학 학슴. 그런 학습을 하면서 어...다른 지역에 우리가 가까운 지역이 뉴욕이 제일 가깝고 하니까 인제 뉴욕에서 무슨 행사라든지 하며는 같이 가서 활동한다든지. 뭐 그런 거로 좀 하고. 역사학습을 정말 제일 많이 했던 것 같애요.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고 초창기에 인제 한청련 활동은 어, 우리가 국내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어,어, 동포 상대 활동을 10이라면 국내민주화와 통일 문제에 대해서 한 90을 활동 하지 않았나, 그래서 인제 거기에 대해서 뭐 주변의 동포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여기서 사는 사람들이 국내 관심을 많이 가지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죠. 면담자 : 그, 아까 말씀하실 때 학습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게 제대로 다 필라델피아는... 구술자 : 아, 필라는 한국서, 그러니까 그 정말 꾸준히 일주일에 한번씩 만났다는 거에 대해서는 필라에서 좀, 그거 굉장히 중요한... 면담자 : 그 어떤 그걸 이끌어주는 리더라고 해야되나요. 그 학습을 이끌어주는 리더가 있었나요? 아니면 그냥... 구술자 : 그런 건 아니고 우리는 각자 책을 정해서 부분 부분해서 발제하가지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했죠, 돌아가면서. 면담자 : 집에 모여서 하셨나요? 구술자 : 그렇죠, 집에 모여서. 그 당시에 어떤 장소를 인제 범서 형님이 자기 가게 2층을 빌려줘서 썼고 나중에는 광선이 형님이 자기 사는 집을 저희에게 내주셔가지구 광선이 형님은 다른 데로 이사가시고 그 사는 집을 광민이랑 맹단이가, 광선이 형 동생 두 분이 살면서, 그 집을 센터처럼 사용하면서 썼죠, 거기를. 나중에는 그러다가 나중에 우리가 필라델피아 동포 사회에다가 마당집을 우리가 구했죠. 면담자 : 그건 언제였습니까? 구술자 : 그게 80 필라델피아 동포 상대 마당집을 한 거요? 면담자 : 보자, 글쎄 한 5,6년 있다? 84년, 90년 초쯤이었을거예요,제 생각에는. 면담자 : 지금까지 유지가 되고 있나요? 구술자 : 지금은 없어졌어요. 필라델피아는. 면담자 : 그, 물론 이름이 쪼금씩 바뀌기도 하고 했는데 LA 같은 경우는 민족 학교로 구술자 : 민족학교로 계속 처음부터 끝까지 했었고. 면담자 : 시카고같은 경우는 중간에 좀 바뀌긴 했지만 마당집으로, 청년학교, 민권센터로 이렇게 운영이 되고 있는데 어, 필라델피아도 꽤 활발하게, 제가 인제 듣기로는 그냥 듣기로는 활동을 하셨다라고 들었고, 이런 마당집 같은 게 운영이 됐다,라고 했는데 이게 중간에 인제 이게 멈추게 된 게 아무래도 다른 지역보다 동포사회 좀 그런 것들이 좀 약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구술자 : 글쎄, 이유는 제가 여기서 활동하면서 조직이 계속 운영할 수 없는 거는 조직이 재생산이 안 되는거, 회원, 회원의 재생산. 왜냐면 한청련은 일단 나이로 해서 졸업을 해야되고 재생산이, 새로 할 사람들이 계속 들어와서 뒷받침을 해줘야되는데 그것이 필라델피아 동포사회에서는 인제 끝이 났어요. 우리가 능력도 잃고. 그리구 인제 필라델피아에서 이렇게 조그만 지역의 약점 중에 하나가 필라델피아에서, 조그만 지역에서 하나가, 활동을 인제 거기서 하며는 어떤 사람들이 활동을 한번 해보고 싶어, 필라델피아에서 인제 회원이 되서. 활동을 해보고 싶은데 이 해볼려고 그러면 뭐 특별히 필라에서는 특별히 뭐 이렇게 대외활동을 많이 할 게 없어요, 솔직히. 우리끼리 만나서 학습을 하고 무슨 뭐 국내에서 어떤 분이 오시면 행사 열고. 뭐 그런 거 외에는 특별히 할 게 없고 마당집 이런 센터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운영되거나 동포들이 많이 찾아오거나 그런 게 아직 되질 않기 때문에 활동을 뭐 또 하고 싶은 사람은 떠나요. 큰 지역으로 떠나. 뭐 정화 같은 경우는 초창기 했다가 정화는 필라에서 한청련이 됐는데 워낙 능력이 있고 그러니까 바로 조직적으로 너 워싱턴 DC 가서 한번 활동을 해보지 않겠냐, 그 당시에 워싱턴 DC에 조직을 만들었거든요. 우리가 최초에 인위적으로 만든, 물론 다른 곳도 인위적으로 만들었지만 워싱턴 DC 같은 경우는 워싱턴 DC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회원을 만들었어야 됐는데 그게 한두 번 해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타 지역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거기서 워싱턴 DC 한청련을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정화같은 경우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생각도 있고 그래서 능력도 있고 그러니까 워싱턴 DC로 가라, 승진이 같은 경우는 자기도 활동하다보니까 조금 더 활동하고 싶은데 필라, 이, 좁은 거예요. 뉴욕에 와서 활동을 하게 됐고 광민이도 조직적으로 하다가 그 당시 시카고가 힘들어서 시카고에 가서 난 한번 재건해보겠다고 가버리고 그 다 활동성 있는 사람들은 빠져나가는데 새로 재생산은 안 되고. 그런 거고 그 당시 초창기만 해도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저희한테 좀 찾아오거나 계속 활동은 안 했지만 몇 년씩 활동하고 나간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어, 그런데 한국에서도 인제 그런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이 별로 오지도 않고 여기 재생산도 되지 않고. 그래서 인제 필라델피아는 마당집을 했다가, 활동을 하다가 정리하게 된 거죠. 면담자 : 좀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주로 한청련에서 했던 운동이 동포 사회운동이 10이면 국내, 한국 내에 뭐 정치 문제, 민주화 문제 관련된 활동이 한 90 정도 됐었다 구술자 : 예, 초창기에. 면담자 : 주로 어떤 활동들을 시작을 같이 하시게 된 건가요? 구술자 : 필라에서요? 필라에서 제가 할 때 그니까는 그니까 어, 지금은 매주 인제, 제일 중요한 게 저 같은 경우는 제 자신의 뭐, 역, 기본적인 의식화가 없으니까 학습을 하면서 의식을 하고 어...그리고 우리가 뭐 경제적으로 쪼금 있으면 국내에 저기 그때 뭐 여러 가지 기금 활동을 우리가 했었, 그 당시에는 국내보다 우리가, 우리도 다들 힘들게 사는 사람이었지만 여기가 아무래도 여유가 좀 더 있어서 국내루, 뭐 옥중에 있는 사람들한테 돈도 보내고 무슨 통일 자금 그런 것도 사람들한테 찾아다니면서 동포사회에 모금도 걷어서 보내고, 뭐 북한에 쌀 보내기 같은 것도 우리가 하고. 하여간에 그런 거가 다들 이 사람들 필라델피아 같은 경우는 이 사람들 전문적인 센터에서 상근하거나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학교를 다니거나,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 끝나고 다 만나고. 정말로 요즘은 이 마당집, 이 센터 같은 경우는 주말이면 조용하고 인제 지금은 기구화 돼서 사무실처럼 운영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마당집이 있으면 낮에는 조용해요, 한 사람만 있다가 일이 끝나면 그때 사람들이 모여들고., 주말에 모이구. 뭐 항상 주말에는 항상 마당집에 와서 살면서 뭐, 뭐라고 그러나, 뭐 주변에 아는 사람들한테 전화를 하든지, 뭐, 아니면 조그만 책자를 만들어서 돌려서 우리가 하는 일, 또 동포 사회 의식화라든지, 아니면 뭐 국내에 그런 활동 하는 거에 대해서 우리가 같이 소리를 좀 내줄 수 있는 거. 그런 거 정도였어요. 필라델피아는. 그리고 국내에서 활동가들이 오시면 뭐 황석영씨나 그 당시에 임진택씨, 여러분들, 고은씨. 오시며는 인제 동포 상대로 우리가 강연장 같은 걸 만들어가지고 그분들이 이제 좀 이름 있는 분들이 오면 쫌 모이니까, 어쨌든. 백기완 선생님이라든지, 하며는 뭐 강연회를 만들어서 우리가 직접 할 수 없는 얘기를 그분들이 좀 동포 사회에 해주고.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동포사회 강연회나 간담회 할 때 거기서 우리가 유일하게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좀 있다가 좀 만나서 계속 컨택해서 회원을 만든다든지. 의식화를 한다든지 그런 활동 정도였어요, 필라델피아는. 면담자 : 그때 선생님께서 뭐 말씀을 인제 의식화 교육 학습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학습들을 하시면서 좀 기억에 남는 책들. 그때 당시 읽으셨던 책들은 어떤 종류의 책들이 있었나요? 구술자 : 읽은 책은 많은, 많이 읽은 거 같은데. 면담자 : 딱 그래도 이것은 좀 기억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 같고 좀 영향을 나에게 준 것다, 라는 그런 책이 구술자 : 하여튼 그 당시에는 저는, 저에게는 새로운 책이었으니까. 정말 그러구 남들보다 시간이 많았거든요. 왜냐면 그 학교 다녀봐야 한 일주일에 한 15시간이고 일하는 것도 아니니깐. 굉장히 개인적으로는 그때가 정말 독서, 책을 정말 많이 읽었던 거 같애요. 무지하게, 하여간에 corf이 우리가 읽는 것들은 뭐 근현대사에 대한 책들은 제가 정말 많이 읽은 것 같은데 글쎄 지금은 인제 뭐 다 내 기억 속에 사라지고 면담자 : 알겠습니다. 그러면 쫌 활동 중심으로 다시 쫌 여쭤보겠는데요. 인제 뭐 그 인제 쫌 큰 활동들은 뉴욕, 가까운 뉴욕에 와서 같이 진행을 하기도 하고 하셨다고 했는데 그래서 해년마다 5·18과 관련해서 혹시 필라델피아 안에서도 이렇게 활동하셨던 내용들이 좀 있으신가요? 기념식이, 뭐 추모제라든지 그런 부분들이요. 구술자 : 예. 우리는 5·18 기념식이 우리 필라 한청련 같은 경우는 굉장히 큰 행사 중에 하나였어요. 꼭 거기를 잊지 않고 5·18행사 하는데, 인제 어...이것, 뭐 행사의 내용은 비슷했어요. 주로 인제 초창지 5·18행사 하면 우리가 인제 미리 행사를 강연자가 있기 전에 항상 인제 비디오를 우리가 인제 틀어서... 면담자 : 그 비디오는... 구술자 : 그 당시 우리가 튼 비디오는 캐나다 맥길(McGill University) 대학에서 나온 비디오를 주로, 그 비디오가 제일 잘 됐다고 그랬거든요. 저도 오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나서 얼마 오지 않는 데서 그걸 봤는데 처음에 저도 뭐 그런 생각을 좀 했을 수도 있는데 그, 5·18 행사에 와서 그 비디오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일반 동포들 중에. 한국에서 특히 유학 온 사람들. 한국에서는 볼 수 있는. 그 당, 그 당시까지 80년대니까 한국에서는 그런 비디오를 절대 볼 수 없는, 거였으니까. 뭐 정말로 광주가 어떻게 됐었느냐를 말로 듣고 이걸 들었지만 비디오로 보고 보는 눈이 또 다르잖아요. 막 그런 거예요. 맥길대학이 비디오 말고도 여러 비디오가 있었는데 맥길 대학,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나온 비디오가 제일 좋다고 그래가지고 항상 그 비디오를 우리가 초장에 한 15분에서 30분 정도 이렇게 틀어주고. 그 다음에 인제 한국에서 온 사진이라든지 홍성담씨가 보내준 판화 같은 거. 언제까지 우리가 5·18 기념행사를 했는지 저는 기억은 안 나는데 5·18 기념행사를 필라에서는 빼지 않고,. 뭐 그건 다른 지역에서도 다 똑같이 그랬을 거예요. 다 꾸준히 행사, 행사를 하고 나서 인제 가끔가다가 동포사호에서 우리가 행사를 하면서 5·18 하고 광주에서 사셨던 분이라든지 아니면 뭐 그런 거를 연락이 와가지고 뭐 참석을 한다든지 금일봉을 좀 주신다든지, 우리는 왜 당신들이 왜 5·18 행사를 주최를 해서 하느냐, 그런 거 뭐 해서 물어본다든지 해서 몇 사람씩 좀 더 오고해서 했는데. 아무래도 무슨 그때 뭐 좀 유명한 분이 오셔야 사람들이 좀 모이고. 그리고 나중에 후에는 이제 여기서도 이제 동포 상대로는 안 하고 쪼금씩 하고 그 다음에 인제 완전히 우리나라에서 정부에서 우리나라 정부에서 5·18 하고 나서부터는 5·18 행사를 하진 않았죠. 면담자 : 아까 전에 말씀하신 캐나다 맥길l 대학에서 나온 광주 비디오라는 것은 그, 어디에서 만든 건가요? 구술자 : 맥길대학에서! 면담자 : 맥길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비디오인가요? 아니면 구술자 : 글쎄 저도 그거 자세히 모르겠네. 그냥 맥길대학에서 나온 비디오라 그랬거든요. 광선이 형님한테 물어보면 좀 잘 아실 거예요. 광선이 형님이야. 그런데 이제 그래 인제 그런 그 비디오를 틀었을 때 제일 안 좋은 반응이 우리한테 뭐냐면, 그 비디오를 보면 그러니까는 뭐라 그러나, 아픈 이야기지만 이 흥미 위주로 와서 어? 뭐 와서 봤는데 별거 아니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라든지. 그 솔직히 사진 같은 걸 보면 정말 우리가 정말로 지금 보더래도 정말 가슴 아픈 사진들 많고 그런데. 지금 이거 뭐 이거 뭐 와서 이거였구나, 그러니까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분들을 만날 때는 때려주고 싶기도 하고. 우리 만리에 있는 차원에서는 그렇지만 이제 정말이게 무슨 뭐 몇 사람이 죽었다든지 그런 거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런 일이 같은 나라에서 정말 그래도 현대사회에서 살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바로 옆 동네에서도 잘 모르고. 또 뭐, 하여간에 그 당시에는 그 1년마다 그 광주 하면서 항상 우리가 사진이나 비디오 볼 때마다 우리 현, 현, 우리나라가 어떻게 정말 이거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나라냐, 에 대한 그런 자책감이 들죠. 면담자 : 필라델피아에서 5·18 그 기념행사를 하면 해년마다 똑같은 장소에서 했었나요? 구술자 : 장소는 똑같은 장소는 아니었어요. 면담자 : 그럼 주로 어디에서 했나요? 구술자 : 동포들이 많이 올 수 있는 장소가 있었는데 기억이 지금 잘 나지 않네요. 면담자 : 외부공간이었나요? 아니면 실내? 구술자 : 실내공간이었어요. 면담자 : 교회나 강당이나 구술자 : 강당이나 무슨 쪼그만 장소를 빌려가지고 사람들 모이면 비디오, 비디오 이렇게 틀어놓고. 면담자 : 몇 분 정도가 참석을 하셨나요, 보통은 회원들, 그 한청련 인제 활동하신 분들이 7,8 명, 열명 가까이 되니까 됐을 것이고 나머지 인제 동포들이나 거기 관심 있는 분들이 방문하기도 할텐데. 구술자 :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았어요. 3, 40명 오셨나. 근데 황석영 선생님이 오셨을 때는 쪼끔 많이, 쫌 많이 왔나? 그분이 그래도 그 당시에 좀 인지도가 있었으니까. 있었으니까 뭐 좀 100여명 왔나? 100여명도 안 왔을 거야, 근데 그 당시는 면담자 : 그때 선생님께서 이민을 필라델피아로 오셨을 때 필라델피아에서는 한인들이 한 몇 분정도 거주하고 있었나요? 구술자 : 그때, 난 난, 한 5만명 산다고 그러는데 면담자 : 필라델피아에서요? 구술자 : 5만명, 산다 그랬는데 그거는 조사가 된 것도 아니고 지금 30년 지났는데 아직도 5만염이라고 그러는데 글쎄, 그거는 정확한 숫자는 항상 이 미주 이민의 동포의 숫자는 정확한 건 항상 그러니까 없어요. 근데 뭐 그런데 일단 뉴욕보다는 필라델피아는 또 더 한인사회에 안 들어오고 미국 사회에 들어가서 사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여기는 그래도 한인, 한인 타운이라는 데가 있어 가지구 한국이랑 비슷한 분위기를 많이 느낄 수가 있고 한국 음식도 있고 그렇지만 거기는 뭐 식당 몇 개에다가 좀 조용하고, 그런 이렇게 많이 이 좀 도시 자체가 역동적이지 않고 그래서 그런 분위기가 좀 없어요. 그러니까 하여간에 뭐 관심 있는 사람들로 해서. 그냥 우리가 솔직히 이렇게 우연히 보고 온 사람들은 극히 드물고 우리가 아는 지인들한테 계속 전화걸어가지고 참석해 달라, 참석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오고 새로운 사람이 보기에, 모이기에는, 오는 부분은 그렇게 쉽진 않아요. 면담자 : 그런 행사를 주최하는데 있어서 동포사회에 대한 반응도 좀 굉장히 의식되기도 하고 그런 게 중요했을 텐데 뭐 이렇게 활발하게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참석 해주고 이렇게 해주시지는 않았던 것 같고... 구술자 : 않죠. 면담자 : 오히려 좀 더 이런 활동들에 대해서 좀 싸늘한 시선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구술자 : 지, 여기 지금도 그러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무슨 그런 활동만 하면 다 빨갱이라고, 빨갱이, 일단. 쟤네들 빨갱이야, 빨갱이랑 이야기 하지 마. 그런 분위기 많이 있죠. 지금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그런 우리나라의 그 빨갱이 타령은 뭐 그 당시에는 더 심했죠. 겉으로 또 이야기하지만 뒤에서 저것들 뭐 쟤네들 사무실에 가면 김일성 사진 있다는 둥 하여간에 별, 별별 이야기를 많이 했죠. 면담자 : 그런 활동들 때문에 당시 군사 독재 시절에 반국가단체로 인제 낙인이 찍히기도 하고, 한청련이 그랬지 않습니까? 그런 또 영향 때문에 또 더더군다나 좀 보수적인 한인 쪽에서는 오히려 또 공격의 대상이 되고 했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아직도 그게 꼬리를 물고 아직도 있는데. 지금도 가끔 뭐 어디 뭐 나올려고 그러면뭐 옛날에 그런 분들이 아직도 나올 정도로. 이 동포 사회의 한인, 이, 대한민국은 그 문제가 아직도 해결이 안 됐죠. 사회 문제가. 그 당시에는 뭐 뭐, 뭐 대놓고 뭐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뒤에서 그러는 사람도 있었고. 근데 뭐 뭐 그냥 우리끼리는, 우리끼리는 만나면 우리의 주제가 있고 우리의 이야기가 항상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 어, 지금 인제 얘기 하면 쓸쓸한데 이게 한청련이 인제 옛날에 제가, 제 또래에 했던 사람들이 정말 그 당시에는 굉장히 많았거든요. 지금은 뭐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나갔든지,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나갔든지 다 나가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아마 그 사람들도 지금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말할, 같이 말할 사람들이 없어서 힘들꺼라고. 의식화된 사람들끼리의 대화가 서로 있잖아요, 이런 문제, 사회에 대한 문제라든지 그런 걸 의식할 수 있는 나누, 대화할 사람들이. 우리는 나는 이제 한국에서 산에 다니면 만나면 산에 다니는 사람끼리는 산 이야기 하면 항상 재밌거든요. 다른 이야기 안 해두. 우리는 만나면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면담자 : 필라델피아 한청련이 다른 뭐 LA나 뉴욕이나 뭐 그런 데에 비해서 좀 늦게 결성이 좀 된 편인가요? 구술자 : 어, 뉴욕, 필, LA가 일 년 먼저 돼있고 뉴욕이 한 육 개월인가 먼저, 83년도에 생겼고. 그 다음에 어, 시, 그 다음에 그 중간에 시카고가 생겼었고 그 다음에 뉴잉글랜드라고, 거기는 뭐라 그러나, 뉴잉글랜드는 거기는 좀 동포사회가 없는 댄데 거기 구성원은 완전히 그, 유학생 그룹들이 많아가지고, 또 거기 현지에 있는 좀 그룹이랑 어떻게 같은 학습모임이 되가지고 거기 연결되서 거기가 나중에는 인제 거기는 우리가 자필적으로 동포사회 활동 할 데가 없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흩어져서, 굉장히 다 굉장히 능력 있는 회원들이어서 다른 지역으로 다 흩어져서 활동을 나가고 그 지역은 없앴는데 뉴 잉글랜드가 그 다음에 생기고 네 번, 뉴 잉글랜드가 네 번째로 생겼을 거야. 필라델피아가 다섯 번째. 그리고 시애틀 또 그 전에 생겼나? 시애틀 생겼고 그 다음에 달라스, 덴버, 어 그 중간에 워싱턴 DC 해서 열갠가 아홉 개 지역에 생겨가지고 있었죠, 그때는. 면담자 : 일 년에 한 번씩 뭐 정기 모임 같은 게 있었나요? 일년에 한번, 이년에 한번. 구술자 : 그때는 육 개월에 한 번씩 대표자 회의가. 각 지역에 두명의 대표가 해가지고 이 지역 미국이 워낙 넓었기 때문에 뭐 무슨 , 뭐, 이게, 이게 참 의논을 해가지고 대화해서 토론해서 뭐 새로운 사업 활돋을 할래면 만나야 되는데 이 사람들 다 만나기는 경제적으로 큰 저, 경비가되기 때문에 저, 일 년에 두 번씩 대표자들끼리 만나서, 2박 3일 동안 회의를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전체 회원들이 만나서 해서 항상 타 지역에 모르는 사람들 전화 끝나면 우리가 8월달에 대회를 했거든요, 그래서 8월 대회라고 그 당시에 했는데, 8월에 봅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전화로 하면서 ‘8월에 봅시다,’ 일 년 만에 만나서, 8월에 만나서, 아, 내가 거기서 활동하고 있고, 반갑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인제 한국에서도 좀 오시고, 우리가 초청하고 일본에서도 초청하고 유럽에서도 있던 분도 오시고 그래서. 또 뭐 다른 운동이 아닌 새로운 젊은 사람들이 만나서 결혼도 꼭 8월에 끝나면 한두 쌍씩 생기고, 뭐 그런. 면담자 : 일 년에 한번씩 그럼 정기 모임이 있었나요? 구술자 : 2박 3일 동안 같이요. 면담자 : 전체모임인거죠. 구술자 : 전체, 그거는. 면담자 : 그렇게 하면 한 미국에서 한 몇 분 정도가 이렇게 모였나요? 구술자 : 그때 다 모이면 한 백 명 정도? 왜냐면 한청련이 백명이 있는 게 아니고 한청련 말고 다른 분들도 인제. 그 후원자들이라든지. 그 당시에 또 한겨레가 생겼거든요, 한겨레분들이랑 다 같이 만나서 했으니까. 면담자 : 한겨레 지금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게 한청련 가입 기준, 가입을 한 뭐 나이나 뭐 그런 기준이 좀 있었죠? 구술자 : 있었죠. 면담자 :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졸업이라고? 구술자 : 졸업해가지고 한겨레로 간다. 면담자 : 이게 나이가 어떻게, 나이 제한이 어떻게 되어 있었나요? 구술자 : 그 당시 한청련은 17세 이상부터 그, 해가지구, 그 다음에 마흔 살까지. 40살까지 한청련을 하기로 했는데, 그 다음에는 인제 35로 한청련을 줄이고. 그 다음에 40살. 그 다음에 인제 그 때 당시에 40살. 그, 한겨레는 40살 이후가 아니고 그냥 누구나 나이 제한이 없이, 나이 제한이 없었어요. 그냥 한 겨레는 한청련 나이 또래에도 한청련이 안 되면 자기가 한겨레가 되고 싶으면 한겨레가 됐었죠. 근데 인제 한겨레는 인제 한청련을, 쭉 활동하는 사람은 나이가 되며는 인제 한겨레로 활동을 계속 했죠. 아무래도 한청련 활동과 한겨레 활동은 쪼끔, 한겨레는, 직접적으로 하고 한겨레는 좀 나름대로 이렇게 뒤에서 좀 어르신 분이 해주는 거래서 한청련 활동이 부담되는 사람들은 그냥 직접 한겨레로 활동을 하고. 17살부터 시작, 그렇게 만든 건 아마 필라에서 결성할 때, 장광민, 시카고에서 만났던 광선이 형님 동생, 걔가 열, 그때 한청련 하는데 그때 걔가 열일곱 살이라 그래서 아마 열일곱 살부터 했었다는, 내가 기억이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광민이한테 물어보면 잘 알텐데.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몇, 27살 때 들어가신건가요? 구술자 : 27살 때 아마 들어간 것 같애요. 면담자 : 인제 이게 중간에 이런 활동들을 지속적으로 한국 민주주의 운동, 민주화 운동, 정치 운동, 사회 운동 포함해서 한청련에서 정말 활발하게 활동을 해주셨는데 이게 어느 순간에 인제 없어졌다고 얘기를 해야되나요? 구술자 : 그렇죠, 한청련. 우리가 자체적으로 한청련은 인제 해산을 했죠. 면담자 : 그 과정에 대해서 좀 말씀을 해주실 수 있나요? 구술자 : 한청련이요, 그러니까 인제 그 당시에는 형님이 인제 와서 활동하시면서 한청련을 키워나가는 시대였어요. 그러니까는 달라스나 덴버 같은 경우는 동포사회가 적을 뿐더러 좀 떨어져 있어요. 요, 동부 지역은 제일 좋은 게 뉴욕, 필라, 워싱턴 DC, 여기는 아무, 운전해서 다 갈 수 있는 데에요. 여기는 정말 외롭지가 않아. 서로 교제하고. 달라스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자기네들끼리 정말 달라스에 회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덴버도 5명이 넘으면 회원 조직을 할 수 있게 되있었거든요. 다섯명, 여섯명, 일곱, 여덟명에 단체를 만들어서 그들은 일 년에 한번 만나는 거, 아니면 인제 젊었을 때 인제 대학교 때 방학 때면 막 자기도 뭐 하고 싶은데 아무두 그냥 일주일에 한. 거기도 뭐 뻔할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거 빼고는 없으니까. 뉴욕에 와서 젊었을 때 대학생들 한 달 있다든지, LA 가서 한 달 있고, 회원집에 살면서 같이 활동하고 가고. 그래서 인제 조직적으로 막 그 키웠을 때는 그런 데로 다 만들었는데 그런 조직들이 인제 회원들이 인제 사람이 어떤 조직이나 단체 있어서 열심히 활동할 때도 이게, 첨에 막 활동력이 큰 사람도 있고 점점점 활동력이 커나가는 사람도 있고 좀 꾸준한 활동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데 보통은 이게 어떤 사람을 그게 사람 관계도 그렇고 그룹도 그렇고 이렇게 첨에 만나면 거기에 굉장히 열심히 하게 되는데 그것, 다음에 인제 조금 오래되면 안정적으로 쪼금 이제 자기가 하면서 하는 그런. 그거 제가 조직생활 하면서 보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거 같애. 이게 그 활성화 한참 됐다가, 인제 필라의 경우만 그런 것도 아니구 타 지역도 이게 인제 재생산이 안 되기 시작했어요. 이게 조직이 계속 유지, 조직이나 단체가 유지할려면 계속 새로운 재생산이 되가지고 이게 움직여야 되는데 한청련은 이게 나이가 들면 이게 되고. 새로, 그리고 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 우리 죽을 때까지 활동을 하자고 어, 개인적으로 자기 마음속으로도 그랬을 수도있고. 있었지만, 가다가 보니까는 싫증도 나고. 이게 또 자체 조직이 교회나 뭐 다른 단체도 그렇지만 처음에 꼭 의식화를 해서 들어온 사람도 있지만 사람이 좋아서 왔다가 또 그런 사람이 또 더 이렇게 빠져들었을 수도 있고, 다르거든요. 그러고 이런 자기가 동포 사회랄니 조국의 민주화, 우리나라의 통일, 정말 나는 이게 증말 나는 이게 증말 필요하고 나는 열심히 해야 된다, 그러니까 성격상 같이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조직 활동을 전혀 못하는 사람은 하다가 튕겨져 나가게 되요. 조직이 같이 뭉쳐서 못하는 사람들은 떠나게 되요. 그리고 인제 자기 개인적인 문제에, 어, 경제적으로나 결혼해서 뭐 한다든지 뭐 이런 다른 경제적으로 해서 활동을 소홀히 하다가 그만두시거나 굉장히 뭐 많죠, 그거는. 많은데, 그렇게 나가면서 첨에 초창기에는 나가는 사람에 맞춰서 또 계속 사람이 들어오니깐 이 조직이 재생산이 되니까 되는데. 이제 어느 시기가 되니까 나가는 사람은 있는데 들어오는 사람이 없기 시작했죠. 그것이 우리 나라에서, 저도 해체됐는지 기억을 못하겠는데, 10년 이상 됐나? 근데 우리나라에서도 인제 한참 그, 그 1980년대 이후에 그런 대학생들의 한총련이라든지 그것이 좀 지나고 나서 여기도 비슷하게 내 생각에 그런 게 오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가 재생산이 안 되니까, 계속 인제 우리가 있는 사람들끼리만 하게 되고 나이도 들고. 그래서 인제 이 한청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인제 나머지 사람들이, 저는 그때 한청련 졸업하고 한겨레였었을 땐데 나머지 사람들이 만났어요. 그냥 조직이 너무 활동력이 없고 거기다는 인제 각 지역에, 세 개 지역에 LA, 시카고, 뉴욕 같은 경우는 이 마당집. 이 마당집 활동이 세지기 시작했거든요. 굉장히 활동이 많아지고. 마당집에는 한청련도 있지만 한청련 아닌 사람들도 많이 와 있었고. 그 당시에만 하면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 인제 구호가 그 전에 어떻게 됐냐면, 한 손엔 조국의 민주화, 한손엔 동포 사회. 그 당시만 하면 우리 활동이, 50대 50 정도로 되지 않았을까, 미주에 동포사회의 의식화라든지 이게 한 50프로 되고, 조국의 문제를 의식화해서 조국의 문제가 우리가 인제 좀 많이 줄어들었을 시기라고 봐요, 50퍼센트 정도. 어 그리구 여기 살면, 우리 여기 계속 살 사람들이기 때문에. 갈 사람들이 아니고. 여기에 바탕을 두고 여기에 기본적으로 우리, 우리가 여기서 이민자로서 이민자를 대변할 수 있는 그런 활동을 우리가 계속적으로 복합적으로 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인제 이런 마당집 활동 속에서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들.그러고 여기서의, 여기서, 어차피 우리는 이민 세대니까. 이민세대니까 어차피 우리가 이 사람들이 평등하게 한다 그래도 불평등이 항상 많고 언어라든지 뭐 여러 가지 법률적인 문제로 힘드니까. 인제 그런 활동을 같이 시작을 하면서 한청련 활동 자체가 인제 적어지기 시작을 했고. 물론 이제 한청련이 여기 각 지역 마당집에 기본적으로 지도부로 계속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청련 활동이 인제 줄어들었, 팍 줄어들면서 이 조직을 계속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인제 이야기를 계속해서, LA 나 뉴욕 인제 몇 개 남은 지역에서 계속 했어요. 계속 한 번 또 해보자. 어, 물론 뉴욕이나 LA는 계속 회원 수는 있었고 계속 해보자 했는데 아무래도 어, 이 해체하는 게 좋다. 그냥 유명무실하게 있는 거는 좋지 않다, 그래서 같이 만나서 해체를 다짐을 했죠. 면담자 : 그때가 언제였나요? 구술자 : 연도 수는 지금 생각이 안 나는데 제가 지금 뉴욕에 온지가 11년, 12년 됐으니까 10년 된 것 같애요. 10년은 된 것 같애요, 지금부터. 면담자 : 2000년대 초반? 구술자 : 그 정도가 된 것 같애요. 그래서 공식으로 한청련은 인제 인제는 해체된... 면담자 : 그럼 한겨레 동포연합은, 한겨레는 어떻게 된건가요? 구술자 : 한겨레도 그때 같이, 한겨레는 있었는데 한겨레는 그 전부터 조금, 조직의 구성도라든지 운영이 이렇게 단단하지는 못했거든요, 한청련처럼. 조직이라는 것이 이게 운영되려면 거기에 의무가 있고 거기에 대한 권리를 가지, 가져야되는데. 의무라면 기본적으로 첫 번째는 회비에요. 이 한국의 단체라든지 여기의 단체, 어느 단체가 단체가 건실하냐 안하냐며는 기본적으로 아무리 작은 회비도 이 회원들이 몇 퍼센트를 정말 꾸준하게 회비를 내는가, 그게 의무거든요, 조직에. 의무고 총회를 참석한다든지 사업활동을 같이 하는, 같이 한다는 게 회원의 의무인데. 에, 이런 게 인제 한겨레는 애초 초창기부터 이렇게 좀 후원자 형식으로 했기 때문에 조직이 좀 형성도가 좀 낮았어요. 이렇게. 그래서 한청련과 비슷한 시기에 하지 않았냐. 제가 지금 정확한 건 잘 모르겠네요. 면담자 : 예. 그 한청련 활동에 대해서 다시 쫌 돌아가서 질문을 드리면요, 어, 인제 필라델피아에서도 매년 5월이 되면 5월 관련된 추모식, 기념식 그런 걸 진행을 꾸준히 해오셨는데 이게 국내 상황이 쪼금 변하기 시작한 게 인제 89년 광주 문제, 노태우 정권 들어서고 광주 문제를 가지고 청문회를 개최하면서 그때도 좀 인제 5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야기들이 나오다나 본격적으로 진행된 게 한국에서도 그런 진상규명이 진행된 게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던 92년 부터였는데, 똑같이 이곳 미주 지역에서도 5월 진상규명과 관련된 활동들이 92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좀 활발해지기 시작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인제 사진이나 그런 걸 보면, 뉴욕 뭐 미대사관, 한국 대사관인가요, 그 앞에 가가지고 진상규명 학살자 처벌을 위한 피켓 시위도 하고 인제 그런 사진들도 좀 보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그 이후에 뭐 5월 진상규명 운동과 관련 되서 좀 이렇게 활동을 하신 게 기억나시는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글쎄. 기억이 통 안 나네요. 그냥 우리는 5월 달에 하여간에, 그때 뉴욕에 김수환 선생님이라든지 뉴욕에서, 근데 지금 뉴욕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가지고. 근데 우리는 실상 거기서 영사관도 있는 것도 아니고, 필라델피아가. 그래서 인제 타 지역에서 오면 인제 와서 같이 시위를 해주거나 그러는데. 우리 자체적으로는 실상에 필라에서는 제 생각에는 그냥 기념식, 그거랑 동포 상대. 뭐 기념식 할 때는 우리 한국 사람들끼리 그렇게 알리는 건데. 그 외에 5·18 항쟁을 따루, 그 해서 한 것은 저는 기억 속에 없는데요, 혹시나 필라 내려가시면 물어보시고요. 거기 다 같이 하셨던 분들이 계속 계시니까. 면담자 : 그럼 그 기념식은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뭐 식전에 인제 시작하기 전에 비디오 같은 것도 상영하고, 사진 같은 것도 걸어두기도 하고 또 인제 유명 뭐, 그런 강연자들을 초청해서 강연도 하기도 한다고 하셨는데 그거 외에 어떤 공식적인 식순이라는 게 있었나요? 진행, 행사를 진행하는 어떤... 구술자 : 식순이요? 식순은 제 생각에는 그냥 5·18영령들의 묵념하고, 그 외에는 뭐 우리가 여기서 우리가 하면서는 뭐 특별하게 무슨 뭐 여기 그 애국가라든지 우리 그런 걸 해본, 우리 행사는 그런 걸 안 했거든요, 그런 걸 안하고 그냥 묵념하고 그냥. 면담자 : 강연자가 있으면 강연 구술자 : 강연하고 서로 끝나고 나서 뭐, 사람이 많이 않으니까 좀 가시기 섭섭한 사람들은 강연하시는 분이랑 남아서 서로 간에 좀 대화하고 저희는 인제 또 따로, 우리 한청련 식구들은 또 따로, 며칠 오면 계시니까 이왕 오시는 김에 뭐 필라델피아 시내 한번 구경시키면 그날 저녁에 우리 또 회원끼리 따로 모여서 한국, 우리는 여기서 오면 우리는 한국 소식 듣는 것, 어떻게 돌아가시는지 뭐 그런 이야기 좀 듣는 거 하고. 면담자 : 저, 한국의 운동가요 같은 것을 부른다거나 그런 것도 있나요? 구술자 : 아 그런 건 하죠, 아, 그럼요. 노래, 묵념, 노래는. 그 당시에는 노래 초창기 때는 노래 참 많이 한 것 같아요 면담자 : 그때는 주로 불렀던 건 민중가요가 뭐있었나요? 구술자 : 뭐 임의 행진곡 뭐 오월의 노래, 뭐 노래 참 많이 부른 것 같애요. 그때는 노래, 우리가 노래 도 뭐 몇 백 곡 만들어가지고. 인쇄소 하시는 분들이 만들어서 나눠주기도 하고 보급도 하고. 우리 끼리 뭐 만나면 일단 노래, 노래부터 시작했죠. 면담자 : 행사를 할 때도 이렇게 노래를 같이 부르고 그러셨습니까? 구술자 : 어, 그랬을 것 같애요, 예, 그랬어요. 행사할 때? 그 한두 곡은 불렀을 것 같아요. 우리끼리 모이면 아주 뭐 노래를 그냥 우린 열차게 불렀으니까. 그런 행사도. 그래, 불렀을 것 같애요. 내 생각엔. 왜냐면 거기 5·18 이란 행사에 올 정도면 일반 사람들이 오지는 않거든요, 솔직히. 관심있었던 사람이니까. 님의 침묵, 아니 님의 침묵이 아니고 님을 위한 행진곡 같은 경우는 뭐 우리는 많이 불렀죠. 같이 불렀을 거에요. 면담자 : 그런 것에 대해 혹시 행사에 참여하시는 분들 중에 그런 부분들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신 분은 없었나요? 구술자 : 필라델피아에는 뭐 그렇게 심하게, 뭐 여기 분위기 와가지고 이렇게 할 그거는 없었을 거예요. 면담자 : 네. 그, 선생님 죄송합니다. 잠깐 (TAPE 교체) 면담자 : 2000년, 필라델피아에서 선생님께서는 계속 한청련 활동을 하시다가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오신 건가요? 구술자 : 네, 뉴욕으로 왔어요. 면담자 : 언제 오신 건가요? 구술자 : 2000년 때 왔어요. 면담자 : 그때면 한청련 활동을 계속 하고 계실 때였었나요? 아니면 졸업을 하신 후였나요? 구술자 : 그 당시에는 한청련은 졸업했을 것 같애요. 지금, 가만 있어봐, 한청련은 졸업하고 한겨레. 면담자 : 한겨레 활동. 예. 한겨레는 지역 조직은 아니고 전체, 뭐 한겨레 무슨 지부, 뭐 그렇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었죠? 구술자 : 그렇죠, 있긴 있었죠, 필라델피아 뭐, 면담자 : 아, 한겨레에도 그런 게 있었습니까? 구술자 : 그쵸, 필라델피아 각 지역. 왜냐면 뭐 일년에 만나는 게 한두 번이니까는. 각 지역에서 그냥 각 지역에서 필라델피아, 아니 한겨레, 필라 같은 경우는 뭐 한겨레 같이 만나고 그랬어요.뭐 사람들이 사람이 적고 그랬기 때문에. 면담자 : 그럼 선생님께서 한청련 활동 외에 필라델피아에 계시면서 그때 84년에 들어오셔서 약 16년 그 정도, 예. 필라델피아에 계속적으로 사셨는데 한청련 활동 이외에 뭐 다른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구술자 : 저요? 개인적으로는 이제 거기서 한 2년 정도 학교 다니다가 일단은 먹고 살아야 되니까는 제가 여기서 목수에요, 저는. 지금. 목수. 건축 일을 하고 있어요. 면담자 : 그 관련 일을 지금까지 계속 해 오신 건가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그럼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오시게 된 것도 그런 직업적인 부분도 있나요? 구술자 : 그런 직업적인 건 아니고 이제 음...뭐 하다가 제가 잠시 다른 일을 좀 했거든요. 다른 일 하다가 그냥 여기 와서 좀 이런 건축일 좀 해봐야겠다, 그래가지고 필라델피아 좀 오래, 한 것도 하고 그냥 뭐, 학교 그런 것보다 필라델피아에서 중간에 다른 일 한번 했는데 그 일 별로 좀 안 됐어요. 안 되고, 그러고 또 목수 일 다시 할려니까 좀. 그동안 내가 목수를 안 한다고 사람들한테 그랬는데 그래서 뉴욕에 와서 한번 해보자. 그래서 저는 이런 조직적인 거로 온 건 아니고 그냥 왔죠. 면담자 : 그 들어오실 때는, 하고는 굉장히 많이 인제 삶이 바뀌셨을텐데, 들어올 때 생각하고는요. 구술자 : 뭐, 확 바뀌었죠. 뭐 원래 이렇게 사람이 안하려고 그러다가. 면담자 : 여행은 그럼 언제부터 다시 또 이제 (웃음) 구술자 : 다시 좀 해야 되는데 내가 (웃음) 그래서 여행을, 한번을 못 했죠, 덕분에. 면담자 : 꿈을, 그 꿈을 완전히 버리신 건 아니시죠? 구술자 : 아 버린 건 아닌데 기회 되면 하겠는데 인제 나이도 들구 그래가지고. (웃음) 어떻게 할지 몰라. 대신 인제 우리, 저희 집에 필라델피아 들어가 가지고 인제, 인제 필라델피아 인제 한청련이 되면서 음... 그 바로 인제 활동을 인제 하고 제 또래들 제일 많이 활동 할 때라, 필라델피아에서 저를 대표위, 대표위원으로 뽑아가지고 대표위원 회의를 하면서 각 지역을 많이 대표위원 회의를 하러 다니면서 각 지역을 많이 가봤죠. 덴버 같은 경우도 뭐 내가 저기 여기서 쪼그만 도시인데. 거기서도 가보고 뭐. LA 도. 인제 뭐 LA, 그리고 제가 또 가지고 있는 일이 이, 뭐라 그러나 목수 일을 하니까는. 우리가 이제 가며는 책꽂이가 옛날엔 많이 필요했어요. 책꽂이가. 그쪽이 새로 생기면 제일 중요한 게, 우리가 그 당시에는 각 지역에 책을 모으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중의 하나거든요. 야 우리 지역에 책이 이렇게 많다. 한국 갔다 오면 꼭 책을 사가지고 와요. 그게 제일. 책을 여기서 구하기가 쉽지 않고 여기서 구한다, 그래도 비싸니까. 우리가 우리에 관계되는 운동 서적이라든지 일반 서적이라든지 하여간에 책을 여기서도 여기서서부터 저기까지가 다 책이 있었어요. 지금은 인제 그 책은 워낙 보지 않으니까 다 인제 치웠는데. 그 책, 해서 책꽂이가 많이 필요해가지고 저는 인제, 그런 거를 많이 활동, 내가 활동한 것 중에 하나가 각 지역의 마당집에서 뭐 책꽂이가 필요한다든지 그러면 내가 가서 만들어주고. 뭐 그런 거라든지. LA는 저게 한 20년 됐나. 산지가 15년 됐나, LA그 민족학교는 그 건물 샀거든요. 샀을 때 제가 여기 같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회원들을 한 서너 명 데려가서 한 한 달 정도는 다 같이 가서 그걸 한다든지. 워싱턴 DC에 우리 마당집 생겼을 때 가서. 그때는 필라 지역, LA에 기완이 형님이라고 계신데 그분도 인제 건축일 좀더 크게 하시는 분인데 같이 가서 인제 뭐라 마당집 첨에 하면 우리 딴 건 필요 없어요, 그냥 책꽂이만 만들어 놓고 이렇게 몇 개 있으니까 그런 거 하는 일이 제가 많이 담당해서 활동하는 것 중에 하나였죠. 면담자 : 그, 한청련이 그, 해체되는 인제 그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선배 활동 운동을 했던 좀 입장에서 그 부분을 좀 어떻게 좀 바라봤습니까? 구술자 : 정말 안타까웠고 저는 인제 거기서 토론했을 과정에 저도 참석했었거든요. 과정을 했을 때 어떻게든지 쪼끔 음...더 한번 츄라이를 해봐가지고, 다른 지역은 없앴지마는 세 개 지역, 미주에 상징적으로 큰 곳 뉴욕, 시카고, LA는 어떻게 하면은 조금 더 계속해서 이쪽 한청련을 이끌어, 그 당시에는 뭐 한청련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거였기 때문에 이거를 해체한다는 자체 말이 나왔을 경우에도 굉장히 심하게 안타까워했었죠. 저는 반대 입장이었고, 어떻게 한 번 해봐라. 근데 제 자체가 한청련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지금 인제 그리고 내가 활동하던 시기랑 많이 다르고, 달르고. 그래서 뭐 안타까웠지마는 뭐 현재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고. 그 사람들이 이거를 계속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무리가 있고 의미가 없다. 이 지금 여기서 다. 그렇다고 한청련 활동을 안 한 다고 그래, 안 하는 게 아니고, 이 마당집이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거기서 이런 행사할 때 이름 하나 더 들어간다든지 이런 것이 뭐 어떤 의미가 있느냐. 이런 여러 가지 뭐, 10년 되서 기억이 안 나는데 1박 2일 정도 계속 이야기를,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은 앞으로 새로 우리가 동포 사회에서 한청련을 할 만한 활동가를 찾기에도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꽤 많았어요, 한총련 활동, 회원으로 가입할 때. 요구하는 것보담은 하나, 하는 일이 많았어. 그니까는 어떤 우리가, 인제 예비 학습이라 그러거든요, 금세 회원이 되는 게 아니었어요. 한총련은 와서 야, 너 이거 해서 야 뭐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한번 해볼래? 야, 너 들어와, 이렇게 해서 회원이 되는 게 아니었거든요. 보통 만나면서 6개월 안에 회원이 되기가 쉽지가 않았어요. 우리가 최소한 우리가 역사 학습이랑 철학 학습은 다 거치고, 우리나라의 역사관이 바로 되고. 역사 학습을 다 해서 역사 학습에 대해서 니가 이거를 정말 느끼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의식을 한 그걸 예비학습이라는 걸 통해서 하고, 그 다음에 예비회원이라는 제도가 또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정말 같이 활동을 할 수 있나, 이렇게 같이 활동을 해보고 나서 우리가 회원을 만들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 그렇게 쫌 하자 하자 그래도 안 하는 싸움을, 쪼금 뭐 야, 세상이 이게 좀 잘못 됐구나, 부조리 있구나, 그런 사람 이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해서 한다는 게 그런, 그러니까 한청련 활동할 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 점점 더. 왜냐면 그런 거 많이 한 게 예비학습하고 역사학습하고 철학학습하고 다 해서 얘는 활동을, 한청련 활동을 분명히 할 거라고 우리 한명을 한명을 굉장히 많이 공을 들거든요, 한명한테만. 왜냐면 되기가 쉽지가 않고 해서 한청련이 딱 될 줄 알았는데 자기는 마음은 있지만, 왜냐면 자기가 볼 때 활동, 한청련 활동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여기에만...다른 생활을 할 여유가 없거든요. 근데 점점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까지는 활동하고 싶은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는 그 회원들이 생기지 않으면. 우리, 얘는 야, 쟤는 다 됐어. 얘는 야, 자식, 아주 사람이 다 됐어, 할 거, 근데 다 하고나서 하면, 나는 그냥 후원자로 남을 게요 그럴 때 그 허탈감이라는 거는 또 그, 학습부장이 따로 있거든요, 학습부장, 조직부장이 따로 있어서 아 저 그 사람들한테 정말 허탈감이란 게 야, 정말 이제. 그러면서 재생산이 안 돼. 그런 걸 맛보고. 또 인제 활동을 우리가 한청련은 정말로 조국의 민주화 통일문제가 기반이었어요. 근데 그런 거가 인제 많이 없, 우리가 볼 때 민주화가 조국이 많이 됐다 그러고 사실 된 부분이 많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 당시에도. 그래서 인제 그런 부분이 점점점 없어지면서. 어, 그러고 하여간에 우리한테 항상 자극 준 게, 그 당시에는 계속적으로 이민을 온단 말이에요. 개인이 자기가 원하든 안 하든 이민 대열에 끼어 온단 말이에요. 한 가족이 오면 자식들이 끼어 와요. 그러면 거기에 한국에는 운동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 와가지구 우리 소식을 듣고 우리한테 오면 굉장히 자극도 많이 되요,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그래서 같이 한 사람도 있고. 그러고 인제 그 사람들이 보는, 우리 나라에서 대학교에서 뭐 데모하고 그렇게 치열하게 운동 했던 사람들 우리 보믄 우리는 한심해 보이죠, 뭐 앉아서 일 끝나고 와서 그냥 책상위에서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 뭐 데모한다고 뭐 최루탄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왔다 갔다. 피켓 들구.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인제 쫌 우리 나름대로 여기서 하지만 근데. 그런 사람들이 인제 어느 순간에 보면 그런 학생 운동권도 인젠 안 보이기 시작해. 안 보이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한테 와서 막 일 개월, 이 개월 있다 같이 이렇게 했다 가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러고 간에 자극도 없어지고 우리가 활동할 그런 것도 없고 재, 조직이 재생산이 안 되고 그래서 면담자 : 어찌보면 80년대 뭐 그때 처음에 선생님께서 들어오실 때보다 지금 이제 뭐 90년대 이후. 뭐 2000년대 까지는, 2000년대 까지를 보면 더 많은 인제 그때는 그런 것, 규제들이 풀려서 더 많은 사람들, 유학생이나 이민자들이 한국에서 와서 그런 수요, 그런 부분들은, 인원들은 한국에서 운동을 했건 뭐 그 나잇대에 있건 그런거에 관심이 있건 그런 그 사람들은 더 다양하게 많아졌을 거라고 저는 인제 생각이 드는데. 이제 막상 이렇게 운동 활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줄어들고 없었다라는 그런 말씀이신거죠? 구술자 : 그쵸, 우리는 하여간에 그 사람들을 못 찾아내고 없었던 것 같아요 인젠. 면담자 : 그렇게 해서 인제 새로운 사람들이 인제 쫌 들어오지 않고 하다보니까 인제 조직도 좀 어려움을 겪고 그런 부분이 있네요. 구술자 : 그게 뭐, 완전 사람이 제일 조직에 문젠데 그렇게 안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인제 들어왔어도 한 젊은 사람들은 인제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제 너무 자기 생활이 없는 것에 대한 그런 거라든지. 그런 거가 우리가 이제 왜냐면 그래, 자기가 이게 맨날 모임을 하는데 거기에 참석을 못하면 조직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쳐지게 되거든요. 그러면 스스로 물러나고 빠져나가게 되니까는. 면담자 : 함께 한청련, 필라 뭐 필라델피아에서 활동을 하셨을 때 활동하신 분들, 혹시나 꼭 필라델피아뿐만 아니라, 필라델피아가 아니라 하드래도, 그런 한청련 활동을 하시면서 좀 만나셨던 분들 중에 좀 기억에 남는 분들이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초창기 했던 사람은 다 기억에 남죠. 그 사람들하고 밤을 한두 번 세본 것도 아니고 우리가 대표위원 2박 3일 가면 거진 밤을 새거나 뭐 그랬었죠. 면담자 : 그럼 선생님 결혼은 쫌 인제 다른 질문입니다만 결혼은 언제 하신 겁니까? 구술자 : 저요? 저 결혼한 지 일 년 됐어요, 지금. 면담자 : 작년에. 구술자 : 작년에 했어요. 저 결혼안하고 쭉 살았어요. 그 인제 옛날에, 그 인제 다시 초창기로 가서 여행을 다니면서 여행을 하는데 내가 결혼까지 해가지고 맥여 살리지도 못하는데 결혼하면 안 되겠다, 그래 가지구 혼자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쭉 결혼을 안 하고 살았어요. 면담자 : 제가 이걸 여쭤보고 싶은 경우는, 것은 여기 오셔서 이런 활동하시면서 만나시는 분들도 꽤 있더라구요. 구술자 : 어, 그렇죠. 그래서 결혼 많이 했어요. 면담자 : 혹시나 선생님도 이런 활동을 하면서 또 이렇게 만나신 분과 결혼을 하셨나, 해서 한번 여쭤봤던 겁니다. 구술자 : 그 당시에 저기, 유럽에서도 여기 와서 또 결혼해서 간 사람이, 여기 결혼, 내 생각에는 몇 십 쌍은 했을 거예요, 여기서, 한청련 안에서. 면담자 : 그때 처음 이제 활동을 같이 하셨던 분들이 가장 기억이 그래도 많이 남는다, 라고 하셨는데 특별히 선생님께 어떤 영향을 줬던 회원이나 그런 분들이 있었나요? 선생님이 이런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 구술자 : 어, 그렇죠. 저는 뭐 권민지라는, 지금은 한국에 들어가 있는 친군데 그 친구가 조직부장을 했었거든요. 면담자 : 필라델피아에서 같이 활동을 하셨나요? 구술자 : 아니요 뉴잉글랜드에, 뉴잉글랜드에 있었어요. 음, 그러고 인제 개인적으로는 광선이 형님. 장광선 형님하고. 그 다음에는 뭐 이, 광민, 장광민이 저보다 열 살이 어리지만 정말로 뭐, 헌신, 열심히 활동 했죠. 개인적으로 보며는 정말. 면담자 : 선생님께 드리고자 선생님께 뭐 드리고자 하는 질문은 거의 인제 마무리가 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한청련 활동을 하시면서 그 이제 유학, 이민을 오셔서 지금까지 한 지금 한 삼십년 정도 이곳에서 계신 거잖습니까 어, 뭐 한 십여 년은 뭐 이런, 아니 십여년 넘게, 한 절반 정도는 민족운동 이런 활동을 하셨던 건데. 들어오셔서 지금까지 쫌 하시면서 예전 그런 부분들에 대한 회고라고 해야 되나요, 쫌 아쉬웠던 점, 그때 이랬으면 더 나았을 텐데.하고 좀 아쉬운, 아쉽던 점이나, 아 이것은 내가 정말 잘 한 것 같애, 라고 좀 느끼는 부분들이 있으면 좀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구술자 : 활동하면서요. 글쎄 그, 저는 뭐 이게, 어... 여기서 인제 활동하는 사람도, 왜냐며는 유학생은 좀 그렇지만, 유학생은 또 그렇지만, 여기서 또 같이 이런 집안 구성으로 하는 사람들은, 어... 뭐라 그러냐면, 어, 이 부모들의 반대들이 또 심한 사람들이 또 있었어요. 저는 굉장히 그런 뭐, 내가 이 활동을 하는데 누가 뭐 반대라든지 뭐 그런 거는 뭐, 우리 엄마가 있었지만 우리 엄마는 전혀 한국에서 대학생 때 활동했다면 모르지만 전혀 이런 반대도 없었고 뭐 누나도 잘 모르고. 누나도 활동 잘 모르고, 내가 어떤 활동을 한다는, 어떤 일을 한다는 거를 쪼금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성인이고. 또 뭐,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냥 누나랑 같이 살았어요, 나는. 그 분, 우리 누님, 필라에서 15년을 우리 누나랑 같이 살았는데, 어...하여간에 뭐 그리고 내가 다른 거가 인제 어, 그, 여기서 활동을 하면서 그냥 어, 내가 옛날에 여행을 한, 남들이 보면 좀 아주, 저, 지금 생각하면 편해가지고 놀러 다닌다 할 사람이 갑자기 이 좀 바껴서 이렇게 운동을 했는데. 지금 내가 말하자면 활동을 아쉬운 점은 없는 데 가장 아쉬운 거는 그때 초창기에 한청련 활동을 할 때는 그때 만난 사람들이 내가 죽을 때까지 보고 오랫동안 같이 그러고 인제 나이 들어도 이 사람들하고 같이 지내면서 이렇게 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어요. 뭐 치열했죠, 그 당시에는. 우리는, 했는데. 굉장히 많은 다양한 이유로 뭐 그것도 여러 가지 좋은 이유도 있을 테고 나쁜 이유도 있을 테고. 다양한 이유로 지금 같이 그 사람들이 있지 못하는 거에 나는 가장 아쉬워요. 그러구, 그니깐 그런 면에서 보시면 이렇게 알겠지만 좀 그런 건 좀 외로워요. 솔직히 말해서 제 나이 또래가 인제 다 나가고 없어져버렸으니까는. 후원자, 저도 뭐 솔직히 지금 후원자 이상의 일을, 활동을 하는게 아니거든요, 사업 활동에, 여기서도 그렇고. 어, 행사라든지, 사업 활동에 쪼금 참석하는 정도지만. 그것조차도 그때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렇게 쪼금 아쉽죠. 제일 아쉬운 것 같아요. 사람이 제일. 같이 활동하던.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정말, 필라는 제 또래가 별로 없었거든요. 제 또래가. 다른 지역에는 저희 또래가 참 많고 그래서 항상 저는 뭐 특별히 뭐 제가 가족이 있는 게 아니고, 뭐 가정을 꾸리지 않은 입장, 굉장히 좀, 좀 자유스럽고. 원래도 인제 원래도 인제 내가 한국에서도 뭐 계획 없이 내일 여행하자, 그러면 여행 가고 그랬는데. 여기서도 뭐 조직이 저기 있으면 저기 가서도 좀 있고 저기 가서도 있고 이렇게 좀 자유스럽게 움직여서 다른 지역의 회원들도 제가 이 한 지역에 있는 사람들보다 많이 알고 지내고 이렇게 또래들도 좀 친하게 지내고 그랬었는데. 다 나간 게 좀 아쉽죠. 면담자 : 지금 연락, 그때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 중에 연락, 거의 안 되시나요? 구술자 : 한국으로 간 사람들이 쫌 꽤 되고. 굉장히 쫌 있어요, 꽤 되고. 여기서 이런 저런 거로 나간 사람들이 좀 있고. 연락이. 뭐 그렇게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그런 사람은 좀 별로 없을 것 같애요. 근데 그래도 인제 또 기쁜 거는 정아라들지, 여기 홍정아랄지 정성호 형님 같은 경우는 그냥 이렇게 보기에. 나도 뭐 옛날보다 훨씬 이런 거에 관심이 있고 능력이 개발돼서 인제 뭐 이렇게 내가 내 후배지만 능력이 정말로 이렇게 좋아져서, 현재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정말로 열심히 하고 지금 유성씨라든지, 후배들이랑은 내가 여기서 생활 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그건 참 난 좋아요. 또 지금 남은 여기 한 뉴욕에 한 열 명 정도 한청련에 했던 식구들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 내가 뉴욕에 와서 10년이 됐는데 고대로 있고 뭐 우리가 지금은 다 이 마당집에 이사로 인제 나이도 들고, 이사로써 참석을 와서 하고 활동을 하지만. 아직도 그 친구들 만나면 옛날 생각나고. 우리 또 만나면 술 먹으면서 가끔 가다 옛날, 야, 우리 이거 했지, 저거 했지, 하는 그런 추억이 있고. 왜 아참 옛날에 하는 애들도 가끔가다 연락은, 연락하는 사람 있긴 있네요, 그래도. 연락도 안부도 하고. 또 요즘은 작년에는 아직 소식을 직접 못 들었는데 작년에 인제 한 친구가 얘, 한청련에 있던 한 친구가 페이스북 만들어가지고 우리 한번 모이자 그래가지고 모인 적이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저는 참석을 못했는데. 몇 사람만 모여서. 뭐, 옛날에 좋은 일, 안 좋은 일, 뭐 다 지났지만 또 한번 관계를 또 해서 한번 보자 히거 그런 모임도 또 한두 개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 뭐. 면담자 :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기도 한데, 제가 인제 질문 드리려고 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현재 선생님께서는 이곳 민권 센터의 이사를 제가 맡고 계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근데 이사 분들은 그 민권 센터의 이사분들이 주로 하시는 일이라는 게 어떤 결정, 어떤 사업에 대한 결정권, 예산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주로 인제 임무, 업무라고 해야되나요? 그런 게 어떻게 되어있을까요? 구술자 : 우리가 지금 이제 미주에서 이게 비영리단체거든요, 저희가. 이런 비영리단체가 여기, 사무총장, 이그제큐티스 디렉터(Executive Director)가 굉장히 위주로 움직여요, 이게. 그래서 이게 사무총장이 좀 파워가 세요. 이 파워가 세, 왜냐면 그 사람이 직접 일을 하기 때문에. 이사들은 다 나름 개인적인 자기의 생활을 하고 있고 우리가 일 년에 이사회를 네 번 하는 걸로 해서 그 이 사람들이 일을 어떻게 하고 한다는 거를 뭐 판단하든지 그런 거가 쉽지는 않아요, 솔직히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이 사람들이 계속하고 뭐 우리가 보고는 있죠. 이사회에서 이사회에서 우리가 인제 예산이라든지 뭐 예산이라든지 그 저, 집행권이라든지 그런 건 인제 사무총장이라든지 그 동안 3개월 정도의 일을 우리가 보고받고. 우리가 낼 수 있는 뭐 아이디어라든지, 아니면 뭐 이렇게 뭐 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라든지 뭐 이런데 참석한다든지, 사업 활동에 참석한다든지 그 정도 선에서 지금 움직이는 거지 지금 뭐 직접적으로 이렇게 같이 하는 것은 쉽지는 않죠, 다들. 면담자 : 현재 민권센터에서 가장 크게 활동하고 있는 가장 중심적인 활동 내용은 뭐가 있을까요? 구술자 : 여기가 지금 이민자들의 권익이 제일 크고 면담자 : 그게 꼭 한인 뿐만은 아닌 거죠, 전체... 구술자 : 그렇죠, 그렇죠, 한인 뿐은 아니죠. 한인만 하는 게 아니고 전체적으로 그러고 인제 이런 단체들이 굉장히 많아요. 다른 단체들이. 다른, 다른 그 민족들의, 중국계, 일본계, 콜럼비아니 남미계. 단체에서 연락을 해가지고 우리가 인제 정책상으로 이민자들을 위한 법들이 올바르게 이게 만들 수 있는 거는 우리가 그런 간접적인 활동. 비영리단체니까 직접적인 정계 누구를 지지한다든지 이런 거는 못하지만 그런 거를 활동을 하고. 저와 같은 경우는 이민자, 총 이민자 연맹 사무총장을 십년 가까이 했으니까. 그런 이민자 활동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배출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 이민자 연맹 사무총장을 그 동안은 백인이 했어요, 미국 사람이. 그러니까 이민자 연맹 사무총장을 이민자가 한 거는 저가 처음이거든요. 것두, 그것도 여기에 권력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민자에 관계된 것도 백인이, 어, 이게 걔네들이, 그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니까는. 근데 인제 그런 연합회. 여기서 몇 년 활동을 하면 그런데 그런 데 가서 충분히 일을 할 수,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여기 한 부분의 활동하는 것의 일환이죠. 면담자 : 어제 잠깐 뉴스를 보면서 쫌 봤는데, 오바마가 이민법? 그것을 단독으로라도 처리를 하겠다. 뭐 본인은 처리를 하고 싶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또 공화당 쪽에서는 그러니까 쫌,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구술자 : 그쵸, 지금 의회가 상하원을 다 뺏겨버렸고. 그 와중에 오바마가 정말 처음부터 시작한 게 의료 개혁이랑 이민법을 자기가 자기 임기에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미국은 이 의회정치가 이게 주를 이뤘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굉장히. 하여간에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저 같은 경우는 그래도 제 의지로 미국에 온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 두 살 세 살짜리, 아니면 국민 학교, 중학교는 자기 의지로 여기 미국에 온 게 아닌, 아니란 말이에요. 근데 부모가 여기 서류 미비자, 이민법적으로 불법체류자기 때문에 걔네들도 자연적으로 불법 체류자. 평상시의 삶에서 그렇게 크게 모르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고등학교 딱 졸업하면서부터 자기는 대학교에 가기가 너무 힘든 이 사회 구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할 게 없는 거예요, 정말로. 여기서 만약에 거주자는, 영주권자, 시민권자는 론(loan) 받아서 다 여기 솔직히 등록금이 얼마나 비싸요. 이게 도대체 말이야 일 년에 사오만 불이면 일 년에 한 가족이 살 수 있는 게 일인당 등록금이니까. 웬만하게 돈 벌지 않는 사람이면 그냥 다 자기가 저 론 해가지고, 돈 빌려서 대학교 다니는 건데 그래도 뭐 그런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그것이 자기 의지도 없이. 그러면 여기서 그대로 어차피 사회의 낙오자가 되거나 그건 자기 의지가 없이 그렇게 된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죠.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 최소한 그런 사람들이라든지 뭐 그 외에 닥친 여러 가지 이민자에 대한 불평등, 그런 문제는 뭐 계속 그거 사회 곳곳에 있으니까. 그런 거가 지금 제일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부분 중에 하날거에요. 뭐 정치에서 정선생님같은 경우는 그런 거를 해서 한국도 인제 정치권에 좀 들어가는 것처럼 여기도 정치권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그래서 시의원에도 출마해볼 수 있는 거고. 면담자 : 알겠습니다. 오랜 시간 선생님, 이야기를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마지막으로 선생님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 중이 그때 좀 미비하게 좀 얘기했거나 이런 얘기를 할 걸, 하고 좀 잘못 이야기를 해주신 부분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좀 말씀을 해주시고 끝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구술자 : 글쎄, 필라에서는 정말 그런, 뭐라 그래야 하나, 광선이 형 만나가지고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의, 제가 초창기 어렸을 때부터 얘기를 했었지만 뉴욕에 오기 전까지는 전혀 제가 관심이, 관심이라기보다는 하여간에, 뭐 내가 모르겠어요, 노동자였다든지, 대학생활을 해서 접했으면 내가 한국에서 어떻게 활동을 했으며 어떻게 했을지는 저는 모르겠는데, 여기서 이 부분을 처음에 접하면서 솔직히 그동안에를 접고 이거를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30년이니까는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다 같이 보낸 것에 대해서는, 뭐 광선이 형님한테도 개인적으로 만난 걸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면 세상을 내가 알은 기분이었으니까, 정말로. 몰랐었으면 너무 억울했었던. 내가 모르고 한평생 여행만 하고 그냥 유유자적하게 살았으면 전혀 몰랐었을 거라고, 이,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서. 내가 이 사회 살면서, 글쎄, 변혁적인 것, 좀 진보적인 생각으로 살면서 이 사회에서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뭐 저는, 뭐, 옳다고 내가 생각을 하고 잘 살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후회, 그런 거. 그 정도 외엔 할말이 없는 것 같네.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선생님 말씀 이렇게 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구술자 : 아, 무슨 말씀을... 면담자 : 그리고 밤 늦은 시간에 일정을 이렇게 마치시고 일 끝내고 오셔가지고 지금까지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술자 :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수곤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김수곤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5일 ○ 구술장소 : 미국 뉴욕 민권센터 사무실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항쟁 및 이후 오월운동 등에 관한 김수곤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장소는 뉴욕 플러싱에 위치한 민권센터 사무실입니다. 일시는 2014년 11월 15일 오후 3시 30분입니다. 예, 선생님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구술자 : 반갑습니다. 면담자 : 그 편안하게 그냥 말씀해주시구요, 아주 옛날이야기부터 제가 쫌 처음에 좀 간단하게 질문을 드릴게요. 그 선생님 태어나신 연도하고 고향에 대해서 좀 말씀을 해주십시오. 구술자 : 내가 난 거는 1933년이고 그 호적에는 12월 16일로 되어 있습니다. 근데 음력으로는 내가 음력 생일을 잘 모르는데 어릴 때는 뭐 음력 집에서는 샜겠지만 10월, 10월 하순인 걸로 알고 있어요. 면담자 : 호적으로는 12월 16로 되어 있는데 구술자 : 띠로 얘기하면 계유, 계유년, 계유년생 닭띠에요, 그게. 그러니까 나이가 상당히 많은 거죠. 만으로도 팔십 하나가 넘었으니까. 우리 저 한국에서 하는 나이로 하면 팔십 이세에요. 면담자 : 굉장히 정정해 보이시는데요. 저는 한 칠십대 정도로, 잘 모르고, 칠십대 정도 되 보인다 했는데. 구술자 : 그게 그게 왜 그러냐면 인제 머리가 희지를 않아가지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뭐 얼굴 보며는 뭐 저승꽃 피고 많이 쭈글쭈글하잖아. 면담자 : 어디서 태어나셨습니까, 선생님? 구술자 : 내가 난거는 경북 영일군 청하면 신흥리라 그러는데, 새로 흥한다 그래서 신흥리라 그러는데 거기서 났고 만 세 살 되기 전에 어, 이사를 갔다고 그래요. 이사를 거, 여기 저 청하, 같은 군인데 곡강면이라고 지금은 그게 전부 포항시입니다. 청하도 영일군도 뭐 이게 전부 청하면 포항시로 됐어요. 지금 현재 포항, 옛날 포항시의 북쪽에 영덕, 영덕군이라고 영덕 대게라고 있잖아요. 영덕하고 그 포항 사이에 있는 동네가 아주 시골 아주 촌이에요. 그래가지고 우리, 우리 그 가족 내력을 조금 얘기를 하면 저희 선친이 어, 1980년에 돌아가셨는데, 만 70세 때 돌아가셨어요. 그분이 9남매의 남매, 우리 아버지가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시고. 그 위에 집은, 본관으로 따지면 내가 경주 김간데 내가 경주 김씬데 그런 건 뭐 전연 상관없는 거지만 우린 옛날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거 기억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우리 집안에 아주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 우리 조부님 때는 하도 가난해가지고 증조부님 때지, 그러니까 조부님의 여자 형제 중에 두 분이, 그 큰 기근이 가끔 있었잖아요 그때 아사를 하셨다고 그래요. 굶어서 돌아가신 거야. 우리, 그러니까 아버지의, 우리 아버지의 고모, 고모 두 분이. 그러니까 굉장히 가난한 거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우리 조부님이 결심을 하고, 아 이거 내가 어떻게든지 이렇게 굶어죽는 사람이 나면 안 되겠다, 자기 형제가 그렇게 갔으니까. 뭐 내가 확실히 우리 할아버지의 고모인지 할아버지의 형제인지 구분이 안 가요. 얘기 하다보니까. 그래가지고 우리 어머니가 시집을 오시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아주 그냥 그 구두쇠로 아침에도 죽, 점심에도, 점심은 뭐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지만 그 오후 때부터 굶고, 저녁에도 죽. 그냥 그렇게 했어. 그 소위 그 시래기 죽 있잖아요. 그런 거 해가지고 해서 모았대요. 모아가지고 굶지는 않게 된 거야. 그래서 우리 아버지 때만 되면 우리 조부님이 상당히 그걸 재산을 모아가지고 자식들 다 이게 논밭 점지를 해서 이렇게 분가를 시킬 정도로 그렇게 돈을 모으신 거에요. 그러니까 뭐 거, 어마어마하게 깍쟁이 구두쇠, 뭐 인색하게 하셨던가봐. 우리 어머니가 항상 그랬지. 야 너희 집에, 우리 어머니 쪽은, 우리 어머니는 소위 평상 신씨인데 영덕, 영덕군이거든. 거기는 어머니 항상 그래, 내가 네 집에 감원했다, 감원했다는 게 뭐냐면 지체가 낮은 데로 시집오는 걸 감원이라 그래요. 감원. 너희 집하고 평상 신씨하고는 이렇게 지체가 상당히 높아. 그 내 외가에, 늘 어릴 때 외가에 가고 그랬는데 여기 그 애들 미국에서 보면 학교 방학하면 그 이튿날로 캠프를 보냅니다. 개학하기 전에. 캠프해서 집에 돌아오거든요. 나는 방학하면 그 이튿날 우리 외가로 가요. 그러고 학교 시작하기 전날 집에 돌아왔다고. 그럴 정도로 외가에 자주 갔는데 외가에 가믄 어사터 라고 그래가지고 거기 어사가 나가지고 하마비가 있어. 그래서 옛날에 그 누구든지 말을 타고 오다가 거기 내려, 거기서 내려가지고 걸어야 되요. 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양반이라고 밤낮 자랑하고 그런 집안이에요. 하튼 그래 인자 그, 우리 아버지 위로는 소위 소학교도 아무도 안 나왔어. 근데 집안에 서당 뭐 이런 거는 어떻게 댕기셨는지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어. 근데 머리가 좋으셨던가봐. 그래가지고 자기는 얼마든지 돈만 있으면 학교를 갈 텐데 우리 할아버지가 절대 안 대주는 거에요. 그래가지고는 자기 몫으로 나와 있는, 나중에 자기가 결혼해가지고 분가를 하게 되면 받을 문서를 훔쳐가지고 그걸 잽히고 뜨신 거에요. 도망을 가신 거에요. 그래가지고는 어디를, 어디를 가셔가지고는 자기 공부를 계속 하셔서 나중에 뭘 하셨는가 하면 한재의사가 됐어. 의사가 됐는데 그, 면허가 제한된데 있지. 딴데 아무 대나 가서 개업 못하고. 너희는, 너는 요 지역 안에서 개업해야 한다. 그걸 한지의사라 그래. 지역을 한정하는 의사. 그러니까 그 무의촌 해결 할라고 그거 일본 그 조선 총독부에서 했던 제도에요, 그게. 그렇게 해서 우리 아버지가 이제 그 고향에서, 내가 이제 맏이난 애를 데리고 자기 그 부인하고 그리고 인자 곡강리라고 하는 데로 이사를 가신 거에요. 거기서 개업을 하셨어. 그래서 거기서 내가 나고 자란 거 에요. 면담자 : 그럼 아버지는 곡강면에서 그 의사 생활을. 구술자 : 그렇지, 내가 계산해보니까 삼십, 우리 선친이 한 삼십대 초반에 거기서 개입을 하신거야. 면담자 :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형제, 선생님 형제 구술자 : 내가 이제 장남이거든, 맏이인데 내 아래로 여섯 사람이 있어요. 그 남자, 남동생이 둘 있고 여동생이 넷 있는데, 지금도 전부다 한국에서 살고 있어요. 미국에 온 사람은 나 하나에요. 우리 집안에는 딱 나 하나밖에 없어. 아무도 안 갈라고 그래. 왜, 왜 가냐고, 아무도 안 가요. 그래가지고 인자 우리 형제들은 인제 다 저 대학 고등교육 받고 우리 아부지가 인제 시골에서 한지의사시면 의사믄 괜찮거든. 먹고 살기 괜찮고. 우리는 뭐 구차하게 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나는 의사 되는 게 실은 하나도 안 부러워, 의사 하기가 싫, 싫은거야. 평생 의사 안하려고 내가 발버둥 쳤는데, 그 생각해보세요, 우리 아버지가 한이 됐을 거 아니에요. 자기는 한지 의사가 되어가지고. 정식의사를 돼서, 자식이, 능력만 되면 내가 그건 인제 나중에, 내가 생각한 건데 내가 의사되기 싫다 그랬는데 너는 꼭 의사 되야 한다고 그러시니까 난 이해를 할 수 없어. 그래가지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난 의사 안한다고 하면 올라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학교는 인자 대구가서. 내가 시골에서 인자 공부를 잘했어 잘하니까 인제 소위 TK들 많은 경북, 경북 중학, 옛날에 그걸 이제 대구고보라고 그랬어요. 광주에 광주 고보 있고 대구교포, 평양고보, 서울에 경성고보고 그 네 학교가 인자 일본 사람들이 맹글어논 지방 고등학교 중에서는, 중학교 중에서는 이름 있는 학교들이에요. 그 후신이 인자 경북중학입니다. 면담자 : 그, 어렸을 때, 33년에 선생님 태어나셨으면 거의 한 한국나이로 13살 그 정도까지 일제 치하에 있을텐데. 구술자 : 내가 소학교 6학년 때까지 일본 교육을 받았어. 그러고 우리 이런 소학교 1학년 들어갔을 때는 조선어를 배웠어요. 조선어 배우고, 우리말. 조선어 독본이라고 해가지고 책이 있었다고. 근데 2학년이 되니까 조선어 말살, 말살 교육을 실행해서 국어(일본어)상용만 하라 그래요. 우리말 하면, 하다 잡히면 막 얻어맞고 이렇게 벌서고 이래했지. 면담자 : 어렸을 때 좀 기억나는 부분들이 있으신가요? 고향 그 곡강면, 그 이사 가셨던 곡강면에서 인제 생활을 하시면서 부모님은, 아버지는 의사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는 그냥. 구술자 : 어머니는 물론 집에 계셨고. 근데 재미난 그 에피소드가. 내가 이런 얘기할 계기가 더러 있었다고 그래서 내가 일전에 그 연습한 거 비슷한데. 여기도 청년들이 그 소위 그 나이 많은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 그 이 오랄 히스토리(oral history)를, 구비 역사라 그래가지고 하더라고. 해놓고 하는걸 더러 그래서 해봤는데, 그래서 그 얘기한 그런 게 더러 있긴 있어요. 우리 아이들도 또 그걸 집에서 휴가 갈 때마다 즈그하고 같이 가면 저걸 인제 이렇게 비디오를 한다고 해놓고.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 담에 우리 뭐 역사. 더러 해보긴 해봤어요, 내가. 면담자 : 예. 그 어렸을 때 그 고향 분위기는 좀 어땠나요? 구술자 : 고향 분위기가 이제 그저 조그만한 마을인데 우리 아버지가 이제 그 면에서는 물론 유지지. 의사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 동네 유지가 뭐가 유지가 되냐믄 양조장 주인, 금융 조합 뭐 서기, 학교 교장. 교장은 물론 일본 사람이고. 소위 주재소라고 있어, 지서를, 주재소 소장 그게 지서장이에요.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인자 유지가 되요. 그리고 동네에서 인자 부자. 뭐 이 집에서 인자 유지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그, 어릴 때 기억나는 거는 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선생은 일본 여자 선생인데 여자 선생님이 나 되게 이뻐 하는 거라. 면담자 : 일본인이었습니까? 구술자 : 일본 여자가. 근데 뭐 우리보다 나이가 얼마나 더 많은지는 몰라. 그건. 왜 그거 사범학교 갓 나와 가지고 오잖아요. 20대, 20도 체 못된. 그래가지고 그 여기서는 그 서양말로는 미국 사람들이 영어 표현으로 티쳐스 페뜨(Teacher's pet)라고 그러는데 페뜨(pet)라는 게 강아지, 애완용 동물을 페뜨라고 그러잖아요. 선생의 페뜨 비슷하게 내가, 내가 그래 말도 잘 하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이러니까. 그때는 그 전쟁할 때가 되가지고 군수하는 물자가 적잖아요 배급 나오면 내가 특별히 받는 거야. 그래 나는 그거 싫은데 그거 자꾸 줘가지고 입장 곤란하고. 뭐 이런 기억이 나고. 면담자 : 그, 들어갔던, 그때는 소학교라고 불렀나요? 구술자 : 그때는 정식 이름은 심상소학교라고 그랬어. 심상이라는 게 보통, 심상하다는 게 보통하다, 보통이란 말이거든. 심상소학교라고 그러다가 언제부터는 모르겠는 게 인제 국민 학교로 이름이 바뀐 거에요. 그래서 우리나라 그 소위 해방되고도 한참동안 국민 학교라 그러다가 초등학교라고 그런지 얼마 안 됐죠? 면담자 : 팔십 몇 년, 팔십 육년(구십 육년과 혼동)엔가 칠년엔가, 그때 바뀐 걸로. 구술자 : 내가 67년에 미국을 왔으니까 나는 그건 아주 생소한 거야. 그래서 아직도 그 초등학교라나 말이 잘 안 나와. 우린 소학교라고 그래, 그러다가 국민 학교라 그래. 그래서 그, 그때 다 아시지만 창씨 개명을 했잖아. 김씨인데 어느 날 우리 아부지가 어딜 갔다 오시더니 머리를 박박 깎고 그 일본 그 센토보시라고 그래, 전투모라는 거 이거 일본 군인들이 쓰는 그 모자를 쓰고 이렇게 집에 오신거야. 머리 깎으니까 뵈기 흉하니까 모자를 쓰셨겠지만 난 그땐 몰랐지 왜 모자를 쓰셨는지. 그때 그리고 이자 이름을 바꾸지 않고 이렇게 하면 상당히 그 덕을 보기 힘든 이런 거여. 암암리에 이렇게 압박이 오고 이렇게 해서. 일종의, 그 일본 사람들은 강제는 아니었다 매우 창씨개명 자발적으로 했다 이렇게 하지만 그, 그런 게 어디 있겠어. 그냥 그지만 내 그거 통계는 잘 모르지마는 대부분 사람들은 다 창씨개명을 했잖아요. 뭐 이제 우리도 물론 창씨 개명을 하고. 그 다음에 완전히 일본사람 행세를 하고. 나는 뭐 그런 거 모를 꺼 아니야. 그러니까 야, 이거 그 일본사람들하고 가까이 비슷하게 해야 되는구나, 그대로 어딘지 모르게 그 기억나는 게 아이들하고 이렇게 모여가지고 뒤안에서 이러게 군불을 떼고 뫼 할 때 그 어리지만 또 이런 거 말아가지고 이런 것도 해 보고. 담배도 아니고 그 왜 저, 대마초, 대마초인지 몰랐지만 그 마 있잖아요, 그것 인제 말아가지고 했던 것 같애. 그래가지고 뒤안에서 그런 것도 하고 그러다가. 근데 뭐 허, 김일성 장군이 말이야, 김일성 장군이 백마를 타고 그 아주 여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런 얘기를 이렇게 아이들끼리 모여 이렇게 하고 이런 기억이 나거든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거는 우리 외가에 가면 벽에 손기정, 손기정 마라톤 그 일등 한 그 포스타가 붙어 있어요. 그 확실히는 몰라도 어렴풋하게 이제 그런 게 민족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 그런 기억의 흔적 그런 게 있습니다. 그거는 인제 우리 역사하고 관계된. 면담자 : 그때 그럼 아버지가 머리를 깎기 전에는 상투를 틀고 구술자 : 상투까지는 안 되제. 상투 트신 건 우리 집안에, 우리 백부님도 상투를 안 트시고. 우리 백부님은 우리 아부지하고 연령차이가 부자간 차이 같이 나거든. 그분도 상투는 트시진 않았어. 상투는 누가 트셨냐면 우리 그 저, 그 종조부님. 종조부님이 형제가 두 분인데 내가 났을 때는 우리 조부님은 돌아가셨어. 내가 났을 때는 나 있을 때는 인제 나는 기억에는 없어. 내가 만으로 두 살 쫌 되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해. 육십, 그 양반 연세가 육십 팔센가 뭐 이럴 때 돌아가셨대. 그러고 우리 외가에 가면 더 상투 한 분들이 계셨는데 우리 외조부님도 상투를 안 하셨던 것 같애. 그리고 또 기억나는 거는 그때 일정 때는 일정 때 공부한 기억은 별로 없고 늘 하는 게 뭐냐믄, 일하러 가는 거여. 그 어린 아이들을 말이야. 어린 아이들 들에 뭐 그 보리 밟으러. 보리 밟기. 무기흐미라고, 일본 말로. 무기가 그 보리거든 흐미한다는 건 밟는 거. 무기흐미.고 다음에 솔까, 솔까지 따러 가는 거, 산에 솔꾕이 따러 가는 거. 그러고 또 한 가지 기억에 나는 거는 우리 그, 큰 내가 있는데 북천이라고그랬어. 우리가 살던 데보다 북쪽에 있으니까 북천이라 그랬지. 천방, 제방을 보고 천방이 그러지. 제방을 해놨는데 거기 그 안에서 큰 숲이 있었다고. 아주 그냥 그, 무지무지하게 안개가 끼고. 어릴 때, 그렇게 큰 숲은 아니었을 꺼야, 어릴 때니까 그런 큰 숲은 내가 생각하기에 어마어마하게 큰 깊은 숲이 있었는데 그게 하루 아침에 제재소가 와서, 제재소가 와서 그 짜를 정도니까 조그만 덴 아니야 그걸 싹 짤라가지고 면담자 : 전쟁 물자. 구술자 : 전쟁 물자. 그리고 이 다리, 다리를 보고 공굴 다리라고 있는데 공굴이 뭐냐, 콘크리트를 공굴이라 그래. 공굴 다리에 쇠 난간이 있을 거 아니요, 그것도 다 잘라갔다고. 어느날. 그리고 이른 거이 기억이 나고 또 한 가지 기억 나는 거는 그, 소위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대동아 전쟁을 일으켜가지고 어느날 갑자기 아이들 차는 공을 배급으로 준거에요. 그래가지고 운동장에 막 공이 그냥 한도 없이 그냥 이렇게, 그게 그 남양, 남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사람 이겼다고 전승 기념으로 했든데 나중에 역사에 나오는 거 보믄 사실은 그때는 벌써 그, 그 뭐에요 고무 제품을 갖다 맹글 이런 그것도 없는데 그 사기를 돋구기 위해서 그랬다고 그런 걸 내가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뭐,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런 기억. 그리고 그 우리가 신고 댕긴 신발들은요, 전부 아이들 그냥 짚신, 짚신 신고. 옷이라 그러는 거는 그냥 이, 지금같이 이렇게 뭐 솜옷이라든지 이런 것도 없고 아주 엷은 옷, 그 겨울에도. 경상도 거기도 겨울은 상당히 추워질 수가 있거든. 어릴 때는. 근데 애들이 막 겨울에 추워가지고. 나는 거기 저 병원도 있을 정도니까 상당히 그 마을에 좀 큰대지만 저 시골에서 서쪽을 향해서 이렇게 걸어서 올라오는 데가 있거든, 그런 데는 오믄얼어가지고 그 난로를 피는데, 교실에 난로 하나 있으면 불을 지피믄 가에만 막 뜨겁고 앞에는 뜨겁고 뒤에는 막 추, 차고 이러잖아요. 그런데 와가지고 선생들이 야야야야, 그그 벗어놓고 불알 그 쬐라쬐라, 왜냐믄 불알이 어는 거에요. 올라와가지구, 바람을 안고 와, 자지하고 불알이 얼 정도야. 그 정도로 추웠다고. 그래가지고 애들이 이거 벌벌 그 녹으면 막 아플 꺼 아니여. 막 애들 울고 그러던 기억이 나. 그, 그랬어요. 면담자 : 학교 다니실 때 일본인들도 같이 쫌 다녔나요? 구술자 : 거기는 일본인들은, 일본인들은 쪼금 더 큰데, 자기들만의 학교가 따로 있었어. 우리는 뭐 조센징이들만 다니는. 면담자 : 학교 이름이, 소학교 이름이 뭐였나요? 구술자 : 곡강 국민 학교, 면담자 : 곡강 국민 학교라고 불렀나요? 구술자 : 그렇지, 그때는 곡강 국민 학교. 그 전에는 곡강 심상 소학교. 내가 들어갔을 때는 뭐 들어갔을 때 일학년이니까 뭐 이름이 뭔지도 몰랐지마는 그때는 심상소학교라고 그랬어. 면담자 : 한, 몇, 몇 명 정도 되는 학교였나요? 구술자 : 시골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그렇게 뭐, 몰라. 얼만지, 우리 그 한 반이 우리가 졸업하던 그 반은 6학년 반, 반 하나야. 반 하나에 다 있는 거야. 그래가지고 처음에는 김 무, 무슨 이 무 하던 게 전부 이름이 바뀌어가지고 일본말로 호명을 하고 일본말로 대답을 하고 그랬어. 면담자 : 그럼 어렸을 때는 주로 학교는 다 일본 말로, 일본 말로 이렇게 구술자 : 그렇게 일본말로. 일본말로, 일본말로 해야지 일본말로 안하다가 붙들리면 체벌 받는 거야, 두들겨 맞는 거야. 그냥. 면담자 : 집에서도 일본말을 썼습니까? 구술자 : 그저 나가면 인제 우리말 하는데 선생들한테 붙들리고 훈육, 훈육계 선생한테 붙들릴까봐 되도록이면 하는데 우리끼리 하고 뭐 구슬려서 뭐할 때는 일본말 안 하지. 면담자 : 국민 학교 졸업하실 때 그럼 해방이 되신건가요? 구술자 : 해방이 됐어. 면담자 : 졸업, 6학년때 해방이... 구술자 : 6학년 때 해방이 됐어. 나 6학년때 까지 일본 교육을 받았는데 내가 6학년때 우리가 이사를 갔어. 왜 이사를 갔냐믄 우리아버지가 한지 의사가 싫을 거 아니야. 그래가지고 거기서 벗어나서 나가믄 안 되는 데로 우리 아버지가 이사를 가신거야. 더 큰 데로. 그게 흥해라는 데야. 그래서 졸업은 나는 내가 흥해 국민 학교라고 나왔어. 흥해라고 포항에 그 쪼금, 지금은 곡강이 흥해 일부요. 흥해 일분데 그때는 따로 였어, 학교가. 흥해는 인구도 더 많고 학교 학생도 많고 6학년도 반이 이반, 반이 두 개쯤 됐을 거에요. 거기는 큰 장 있었어. 흥해는. 장, 시장. 그, 그런 난, 난장판에서 시장 있잖아요. 이게. 오픈. 그 큰 장이 있었는데 그니까 그게 대처(大處). 그게 옛날에는 포항보다 더 큰 데요. 포항이 여, 거기에 현이, 현감이 있었어. 원님이 거기 살았다고. 그래서 거기 그 향교도 있고. 뭐 이런 그, 거, 포항은 옛날에 그 현에 속하는 쪼그마한 동네였어. 포항이. 면담자 : 해방, 해방에 대한 좀 기억이 있으십니까? 구술자 : 해방됐을 적에 난 포항이었지만 난 해방되자마자 아버지가 날세게 흥해로 이사를 가신거야. 흥해로 이사를 가니까 면담자 : 해방 되자마자 흥해로 가신 건가요? 구술자 : 되자마자 기다리고 기신 것 같이 같는데 해방때 해방 되고 흥해로 가기 전에 기억이 내가 나는 게 뭔가 하믄 어느 날 저녁에 우리집에 청년들이, 동네 청년들이 말이요. 무슨 삽 같은 거 몽둥이 같은 거 이런 걸 지고 그냥 와 몰려온 거야. 우리 집으로. 그래서 나는 어릴 때나는 뭐, 뭐 모르니까. 이게 습격하러 왔는지 뭐하러 왔는지 아무래도 모를 꺼 아니오. 근데 낮에 보니까 우리집을 해치로 온게 아니고 그래서 나, 그, 우리 우리 선친한테는 내가 한번도 어려워서 그런 거 여쭤본 적이 없는데 내가 우리 어머니가 미국오셨을때게 여쭤봤다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 기억 나십니까 그랬더니, 그래 기억 나고 말고. 그게 뭐냐 그랬더니, 청년들이, 그 동네 청년들이 너희 아버지한테 항상 그런 무슨 자문을, 의견을, 조언을 많이 구했다. 그때 왔던 건 왜 그랬냐믄 친일파들, 어느 놈 제일 먼저 치러갈까요, 그걸 물으러 왔다는 거에요. 우리 아버지한테. 그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도 몰랐는데 그런 그 동네 그, 요즘 말로 하면 의식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럴까,그런 사람들한테 어떤 그, 이게 존경을 받았던 것 같애. 그래서 내가 생각, 그 뒤로 여러번 생각한 건 데 내가 어릴 때 그 그 곡강 국민 학교 교장 선생님이 구이다 라고 있어요. 지금. 옳을 구자하고 밭 정자. 구정. 그, 그런 한문을 쓰고 그래요. 구이다. 다는 이게 밭 천자를 다라 그럽니다. 구이다 교장이란 사람인데 우리 선친보다 훨씬 연세가 많은 사람이야. 근데 그 사람하고 우리 아버지가 술을 잘 잡숫는 거야. 우리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어. 그래가지고 술친구들이 여러분 있는데 구이다 선생하고 술을 잡술 때는 꼭 둘이만 술잡숴요. 그래가지고 구이다 선생이 자주 오셨어. 가끔 내가 기억이 나는데 오시면 처음에는 일본 말로 얘기를 주고 받어. 쪼금 있으면 우리 아버지가 조선말을 그 영감을 보고 막 이놈의 자식, 이런 나쁜 놈들, 뭐 이런, 이런 기억이 나거든. 그래가지고 막 어머니하고 나하고 막 덧문을 막 닫고. 일본말로 일본 사람을 보고 욕을 하니까. 그래가지고 그 구이다 교장선생이 도망을 간 거야, 하다가, 한참 하다가는 그냥 우리 아버지가 못가갈꺼 아니요, 그러믄 그 이거 중절모자지, 나까오리를 놓고 김센세, 김센세, 나 변소만 갔다 올게 하면서 소위 말하면 화장실 간다 그러고 도망을 가요. 도망가요. 그러고는 인자 집에 도망을 가버린 기라. 그러면 우리 선친이 취하셔서 주무시고. 그 이튿날 아침에 내가 항상 학교 갈 적에 그 중절모자를 교장 선생님 교장실에 내 갖다 드린 기억이 나. 그 그게 내 생각에 일본 중에 일본 사람이라고 다 나쁜 거 아니거든. 일본 사람 중에 이 사람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조선 사람들한테 대한 동정이, 그 사람들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든 그런 사람인 거야. 내가 이때 이건 지금 훨씬 뒤에 내가 철이 나고 난 뒤에 생각하기에 그런 분이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나요. 그러고 그러고 또 한가지 재미난 거는 내가 그 저, 흥해 국민 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를 가는데 나야 뭐 어느 학교로 가는지 아나요. 우리 아버지가 인자 이놈은 공부를 잘하면 내가 꼭 제일 좋은 학교를 보내겠다, 이렇게 작정하셨겠지. 그래가지고 경상도에서는 제일 좋은 학교가 인제 경북중학이니까. 거기하고 계성, 계성중학이라는 게 있어요, 대구에. 계성이라는 미션, 미션 계통입니다. 계성이란 계발한다는 계자하고 별 성, 아니 거룩할 성자. 그렇게 해가지고 계성 중학. 그건 미션 스쿨입니다. 대구에 있는 학굔데 거기를 지망해, 거기를 시험 친 거야. 근데 그때 호일자, 콜레라가 창궐해가지고. 그 뭐 전쟁 끝나고 나면 항상 그런, 전쟁하고 그 돌림병하고는 같이 일어나니까. 그래가지고 교통차단을 하고 뭐 이러는데 시험을 치러 대구를 못 가고 시험관이 포항으로 왔어요. 그래서 포항에서 시험을 본 거야. 전부다. 두 학교 다. 그리고 계성학교 시험관은 상당히 유명한 분이 왔는데, 박목월이라고 시인이 있습니다. 시에 대해서 쪼금 아시는 구만. 소위 청록파라고 그러는 박목월 조지훈, 이 조지훈, 어... 누구누구제? 또 그 박, 누구지 그... 아 맞다 하여튼 그 분이 그 시험관으로 왔어. 나도 그게 기억이 나거든. 나도 그때 박목월이라는 사람 알 정도는 그 관심이 있었으니까. 내가 그 문학이나 이런데 관심이 있거든, 그래서 의사가 되기 싫었던 거야. 그리고나서 발표를 했는데 보니까 내가 무시험 입학이야. 계성학교. 발표를 했는데 무시험 입학이 났어요. 나는 시험을 쳤는데. 경북중학은 물론 내가 시험을 쳐가지고 합격을 했고. 계성학교는 내가 무시험 입학으로 된 거야. 그래 난 이상할꺼 아냐, 난 억울하단 말이야. 난 시험다 쳤는데,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시험도 잘 쳤을 것 같고 그런데 무시험 입학.. 무시험 입학 이유가 뭔고 하니 독립유공자 자제, 이렇게 나왔어. 그래서 나는 우리 아버지 독립운동 한 일도 본 일도 없고.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선친이 살아계실 때는 물론 못 물어보고 어머님한테도 못 물어봤는데 내가 이것도, 그 이런 거 하기 시작하고 난 뒤에 내가,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 딴 데서 얼마 전에. 내가 새로 재구성을 한 거에요. 어떻게 이런게 일어 났을까. 왜 내가 무시험 입학이 됐을까, 왜 우리 아버지보고 독립운동가라고. 내가 한 가지 생각해본게 뭔고하니 흥해에 예배당이 있는데 그때는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그랬습니다. 예배당. 용어가 전부다 옛날 꺼요. 예배당에 목사님이, 우리 아버지는 아주 꼴통 그 유교 그 신봉자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뭐 유교, 자기 나름으로 독학으로 공부를 많이 하신 것 같애. 그래 유교를 하니까 예수쟁이라 하면 아 싫어하세요. 우리 아버지는 예수쟁이 치고는 사람 같은 사람이 드물어, 항상 그렇게 얘기하셨다고. 근데 그 박순석이라고 목사님에 그 계셨는데 이 양반이 나중에 출마를 하셨어요. 그래서 국회의원이 됐다고. 박순석 의원. 목사가 그게 재헌 국횐지, 내가 그건 확실히 모르는데 하여튼 재헌 국회겠지 그래서 생각난 게 아, 이 양반이 출마를 할라고 시골의 유지들을 구워삶기 위해가지고 당신 말이야, 표를 날 모아주면 당신 아이는 내가 꼭 책임맡고 입학을 게런티(guarantee: 보장) 할게 뭐 이런 딜(deal: 거래)을 하신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 그럴 듯 하제? 면담자 : 선생님이 그냥 그렇게 그런 게 아닌가, 추정을 하신거죠? 구술자 : 그렇지, 추정을 한 거지. 추정한 거야, 그랬단 게 아니고 내가 그건 훨씬 뒤에 내 생각대로 왜 그런 게 일어났을까. 해서 이자 내가 생각한 거여. 그래가지고는 그것도 한 가지 있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아버지가 내가 어릴 때 기억에 만주로 여행을 잘 가시는거야. 만주를 가끔 갔어요. 일본은 한 번도 가신 적이 없어요. 근데 만주는 가끔 가다 그냥 이 양반이 집에서 개업하신분이 사라지고는 있다가 뭐 오래가계진 않은데 다녀오시고 그래. 그래 이자 그거하고 연계를 해서 이 양반이 돈 좀 모아가지고 그 누구 갖다줬는가 이런 생각도 하고. 이거는 순전히 억측입니다. 사실이 아니고. 그런 건 그건 내 어릴 때 기억에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정치적인 의식이 쪼금 있었던 것은 확실해. 이양반이 출마를 했는데 무슨 출마를 했는고 하니 술이 좋아 조합장 출마를 했어. 그 영일군에. 그래가 표 모으는 선거 운동도 하신 분이에요, 나중에. 그리고 시골에서 이승만 정권 반대하는 데모를 하신거야. 이 양반이. 그런 그런 거 하고, 그런 게 아마 핏속에 유전인자라고 그럼 이상하지만 그게 영향을 주는 거에요. 그게 참 희안한거야. 그런 게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면 신익희 같은 분은, 신익희가 그대, 신익희선생 해공 신익희 선생이 솔직히 극우거든, 뭐 내가 지금 눈으로 보면 극운데 그때는 이승만을 갖다가 대체할 어터너티브(alternative: 대안) 였잖아요. 해공선생이 대통령되야 된다고 생각하시고 내가 아이를, 우리 큰아이가 한국에서 났는데 오기 전에 3살 되기 전에 왔는데 내가 올 적에 그놈 이름을 이자 할아버지가 지니까 익희라고 지었어. 그래 왜 그런고 하니 신익희 선생 그냥 선거 유세 중에 아깝게 돌아가셨다 이거야. 그래가지고 그게 아마 그 한이 맺혔는지 어쨌는지 익희라고 이름 지었는 거야. 그런 거 보면 우리 아버지도 의식이 조금 그런 거이 있어. 내가 그 하는 추측들이 어쩌믄 그 조금 근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면담자 : 그 해방 이후에 물론 인제 선생님이 어리실 나이, 어릴 적이긴 하지만... 구술자 : 미군들 들어오고 해방 정국 그런걸 내가 쪼금 이야기할게요. 그 흥해는 쪼금 큰 데가 되어가지고 금방 생기는게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우리 아버지가 개업하시든 데서 멀지 않은 곳에 건국 준비 위원회, 요런 것도 생기고 얼마 안 있어서 적산집에 아랫층에 애국 동지회, 이런것도 생기고. 서북 청년단도 생기고, 대한, 민족 청년단, 이런 간판이 막 이렇게 내려왔던 기억이 나요. 그래가지고 우리아버지가 관심을 갖고 계시던 그 신문을 보면 좌우 합작, 그 다음에는 이 양반이 생각하던게 좌우합작, 이거 막 항상 하시던 얘기야야. 그, 이거 뭐야 김유식 선생 김구 선생, 뭐 해가지고 여운형하고 여운형 선생님이 이렇게 해가지고, 어떻게든지 이렇게 하고 신탁통치 반대 뭐 하고 있잖아. 그때 이 양반도 신탁통치를 반대했다고. 내가 기억하기에 그러고 좌우 합작은 해야 한다, 뭐 이런. 면담자 : 그런 걸로 인해서 이제 피해를 보시지 않으셨나요. 그때 뭐 서북청년단이나 그런 활동들은... 구술자 : 우리 아버지는 피해 없지, 우리 아버지는 우익으로 중도일진 모르지만 우익, 우리 아버지는 거기에 가담을 안 하셨어. 건국 준비위원회도 가담 안 하시고. 내가 아는 한은. 애국 청년 동지회 이거 하고 물론 가담을 안했죠. 우리 아버지는 아마 상당히 중도. 지금 그 하면, 내 생각에는 중도 우파 정도 되셨는가, 그런 생각을 아직 해요. 그건 뭐 내가 모르는데 몰래 무슨 뭐 건국 준비위원회랄지 인민위원회랄지 이게 했을 가능성이 이게 없어. 그러고 또 한 가지는 미군들 처음으로 진주에 올 때 그 기억. 면담자 :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그럼 기억나지. 8월 15일을 소위 광복절이라 그러잖아요. 근데 일본 사람들 다 도망가고 미군 사람들도 구경을 할 수가 없어, 시골이니까. 근데 한참 지나고 났는데 내 기억에 갑자기 그 미국 사람들 보고 우리가 헬로우들이라고 했어. 헬로우들이 왔다. 헬로우들이 어느날 나타난, 나타난 거에요. 찦차 타고. 찦차 타고 오는데 옛날 국도라는 게 순 먼지거든, 포장도 안 돼 있고 자갈 밭에 말이야. 먼지를 막 일으키면서 찦차하고 뭐 쓰리쿼터하고 이런게, 가장 그게 가장 첨 미군 본게 기억나고. 또 미국 사람을 실제 보니까 야, 진짜 저 사람은 원숭이같이 생겼네. 이런 생각나던거 그리고 직접 우리하고 이렇게 일대일로 대화하는 건 뭔가 하면 우리 소위 우리 그 초등학교에 와가지고 DDT뿌리는 거 있죠. DDT를 동굴에 뿌리듯이. 왜냐면 그때 막 전염병 때문에, 이하고 모기 빈대 이런 것 죽이느라고 분무기를 가져와가지고 막 뿌리는 거에요. 뭐 바짓가랭이 소매 간에 막 뿌리는 거에요, 그때. 그래가지고 애들이 그냥 눈하고 코만 빠꼼하고 뭐 이래가지고 그런 기억. 그게 이자 미군을 처음 본 기억이 그겁니다. 면담자 : 선생님 아까 중학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중학교 시험을 이렇게 콜레라가 창궐해서 지역에서 보셨는데 학교는 결국 두 개다 합격을 하셨는데 경복중으로 가신거죠? 구술자 : 그렇죠. 더 나은 학교니까. 이거는 계성학교는 일종의 빽업으로. 안 되는 경우에 아마. 우리 아버지가 그래 해두신 것 같아. 그래가지고 경북중학교 갔는데 보름 만에 집에 오게 됐어. 왜 그랬을 것 같애? 면담자 : 경북중학교 가셨다 보름만에 다시 오셨다구요? 구술자 : 학교가 그때는 어떻게 됐냐면 봄 학기가, 봄학기 아니여, 가을학기 미국 제도를 해가지고 가을학기 했어. 우리가 6개월 더, 6학년을 6개월 더 있었던 거야. 왜냐면 8월 달에 해방 되서 그 이듬 3월달에 졸업하기는 너무 뭐 한건 아니지만 미국의 학제를 하면서 그 다음에 9월까지 연장이 된 거야. 그래서 9월 달에 중학교를 들어갔어. 중학을 들어갔는데 그것도 9월 중순에 갔어요, 개학을. 9월 뭐 9일인지 10일이지 갔는데 10월 초에 집에 오게 됐어. 왜 그랬겠어? 10.1 항쟁. 10.1 사건이라는게, 모르죠? 10.1사건이라고 했어, 그때는 어 저 5.1, 5·18 민주 항쟁 이렇게 항쟁이라고 얘기 안하고 5·18 사태, 뭐 사건 뭐 이랬잖아요. 그거나 마찬가지로 이것도 10.1 사건이라고 했는데 지금 그 그 소위 수정사관하는 사학자들 하는 거, 진보적인 사학에서는 10.1 사태나 사건이라고 안 그러고 10월 항쟁이라고 그럽니다. 그게 대구에서 났어요. 그게 뭔고 하니 군정에 대한 반대. 처음으로 일어난 항쟁입니다, 우리 나라에. 면담자 : 이것 때문에 지금 구술자 : 46년. 1946년 10월 1일에 우리 내가 댕기던 중학교에서 멀지 않은 데에 연병장이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 연병장. 연병 그 훈련장. 군대 있는 대를. 연병장이라 그러죠. 연병장 있는데 거기서 갑자기 어느날 총소리가 나는 거에요. 콩볶는 소리가 나더니 우리 1학년인데 상급 선생, 학년들이 둘러싸가지고 우리를 못 나가게 하는 거에요. 창문도 지키고 문도 지키고. 저기 저런 데도 사람이 4학년 5학년 선배들이. 그땐 6학년, 6년제거든요. 중학교 6년까지 있었어. 고등학교라는 거 없고. 막아서고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도 내가 이제 재구성한 건데. 상급생들이 학교 당국하고 협상을 해가지고 저급 학년들은 우리가, 저급학년은 못 나간다. 시위하러. 그런데 이제 너희들 못 나간다고 했을 거 아니에요. 그럼 인자 딜 한게 저학년들은 너희들이 보장을 하면, 못 나가는 거를, 너희들은 나가게 해줄게 뭐 이랬던 것 같애. 그래서 상급생들이 저학년들 못 나가게, 일학년들을 거기서 보호하려고 막은 거에요. 그러고 학생들 전부 시위하러 가고. 그때 그게, 지금은 경북이 대구라고 그러면 아주 꼴통 보수들 그 소굴 아니에요. 옛날에는요, 옛날에는 경북이 사회주의자들 소굴이었습니다. 그 야색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군정하고 그 소위 그 이승만정권에 의해서 깡그리 전부 다 다 죽었었요. 학살을 그냥 한없이 학살했어요. 그 사람들 다 죽어뻐린거야. 그래가지고는 그 가족들도 자기 집에 그런 사람 있었단 얘기도 못하고. 그 뭐 아주 잘 아실테지만 제주도에서도 그러고 호남에서도 광주 이런 데서도 다 쉬쉬하고 옛날 역적, 집안 역적 있으면 승진을 못한다 해가지고. 그게 씨가 말라뻐린 거에요. 보도 연맹, 옛날 보도 연맹이라고 알죠? 거기 전부다 등록되어 있었거든 그 전부 잡아 죽였습니다. 포항 앞바다에 줄로 엮어가지고 다 죽인 걸로 되있어요. 그건 뭐 목격한 사람들도 많고. 나는 목격은 못했지마는. 그렇게 해서 학교가 갑자기 휴교가 된거야. 전부다 휴교가. 대구라는 이 시내 모든 그게 기능이 마비되버린거야. 그때는 교통이라는 게 철도밖에 없었거든. 추럭, 석탄으로, 석탄 목탄으로 막 추럭을 하고. 휘발유 없을 때죠. 그레가 이자 해방하고 쪼끔 댕녔지만 추럭 아니면 버스란 것도 없었거든. 추럭 아니믄 이자 철돈데 철도가 총파업 해버렸어. 그게 아마 역사를 잘 보시면 대구 그 부근에서 조합이니. 소위 그 전국 노동, 전평이라 그러나, 인민 위원회 뭐 이런 게 조직이 굉장히 많아. 그래가지고 총 파업을 해가지구 근데 어린 만 열두살 아니에요. 중학교 1학년이면. 만 열두살이거든. 만 열두살이니까 집에 와서 저녁에 밤낮 울고 말이야. 집, 엄마 생각이 나가지고. 만날 그 저녁에 벼게 잡고 그냥 울다가 아, 이게 신난거야, 집에 가려니까. 그 집에 갈라고 보니까 교통편이 없잖아 걸어왔어. 대구에서 사흘 걸려, 이틀, 이틀밤 사흘 낮을 걸어서 집에 왔는 거라. 그때 그 근데 그 우리 동네 그 대구로, 소위 대구 유학을 간 중학교 학생 네 사람있어, 우리 반에서 네 사람 있었어. 상당히 많은 거제, 시골에서는. 경북 중학에 나하고 내 친구 하나하고 둘이 가고 또 다른 대, 대구중학이라는 데하고 대륜이라고 그러는데 하고 해서 네 사람 갔어. 대구 중학이라는 거는 인자 일본 사람들 다니던 학교를 대구 중학이라고 그랬어 그 네 사람이 네 사람중에 한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세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연결이 되가지고, 나는 어떻게 연결된지 그건 기억이 안나는데 세사람이 같이 걸어가지고 집에까지 왔어요. 가면서 인자 본건데 시내를 나가, 겁나서 나가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됐는지, 가면서 보니까 중간중간에 지서에 불을 태워가지고 불이 타고 있는 데고 있고. 타서 재가 된 데도 있고 그랬어요. 그렇게 광범위했어. 소위 폭동이었지. 면담자 : 이런 시위로 인해서 사람이 죽거나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구술자 : 많이 죽었겠지. 우리는 어리니까 죽는 거 본일도 없고 그러는데 두들겨 패는 건 봤어. 순사들도 잘 안 보이고 미군들이 댕기는거야, 미군들이 순사들하고 같이 댕기면서 쓰리 쿼터를 타고. 우리가 거기 가는 동안에 봤을 거 아니에요, 댕기는데 우리는 워낙 어린 아이들이니까 뭐 본체만체 지나갔는데. 이래 지나가면서 보니까 막 잡아 막 두들겨 패는거 이런거 보고, 또 그 우리가 금호라, 하양인가 금호라는 데서 중간에 가다가 해가 져서 자는데 내가 그래가 낯선 집에서 자는데 선잠 들었을 거 아니에요. 자다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무슨 소곤소곤 얘기, 말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요렇게 봤더니 어떤 청년이 왔는데 자기 어머니하고, 청년이 인자 그 폭동 일으켰던 청년 중에, 폭도 중에 한 사람이야, 시위, 시위대원 중에 한 사람이 도망왔다ㄱ 밤에 집에 엄마 보러 왔는지 뭐 가질러 왔는지 모르지만 왔는데, 보니까 어린 아이들이 방에, 자기가 자든 방인지는 모르지만 세 사람이 방에 자고 있거든 엄마엄마 쟈들이 누구야. 뭐 이런 소리를 내가 들었어. 그거는 또 아침에 보니까 흔적도 없이 가고 없고. 그그, 그 이튿날 아침에 어머니가 주먹밥을 이만큼 해가지고 우리 하나씩 줘가지고 보냈던. 그 때 그게 가을이 길가에 벼가 말이에요, 익어가지고 누렇게 이렇게, 이렇게. 풍년이었어, 그러니까 벼이삭이 막 늘어져 있는거에요. 가을에 이거 소위 그 뭐라 그러죠, 황금물결이었던게 기억이 나고. 그 그, 벼 해가지고 이게 까먹으면서 가고 하던거 생각나고. 면담자 : 그러셨구나, 그렇게 한 다음에 쫌 그게 그게 해결이 되고 나서 학교로 다시... 구술자 : 학교를 다시 갔을 거 아니에요 면담자 : 한 몇 일정도 쉬셨다가 구술자 : 그거는 확실히 기억에없어. 그런데 거기 우리집에서 흥해에서 대구를 갈라고 그러면 그 가는게 보통이 아니야. 지금 서울서 뉴욕 오는 것보다 더 힘들어. 어떻게 가니, 차편이 없잖아요. 흥해서 포항까지 가야 되. 포항가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기차를 타고 가요. 기차도 가다가 칙칙칙칙칙 하다가 힘이 없어가 얼마 가다가 뒤로 막 가는거야 서기만 하면 갈지 안 갈지 알 수가 없어. 그런 식으로 교통을 하고 그랬는데 하여간, 하여튼 어쨌든. 도로 복학이 됐는데 공부하는 거는 별로 없고 매일 동맹휴업. 동맹 휴업. 항상 보면. 그래 내가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에 상급생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아직 생각나는데 성주, 성주에서 온 상급생들이 있는데 우리는 일학년이고 밤에 오면 이만한 방에서 풀을 쒀가지고 밤낮 이거 그 벽보 붙이는거야 굉장했어 하여튼. 길에 나가면 전부 벽보야. 한쪽에서는 붙이고 한쪽에서는 뜯고 막 이래. 면담자 : 주로 내용이 뭐 그런 미군 군정 반대 그런 내용이었나요? 구술자 : 미국인 물러가라 매국노 뭐 친일 반역자 죽여라, 뭐 이런 거 뭐 이런 식으로. 전부. 그 나중에는 남북 협상, 뭐 만세, 뭐 성사 비는 거, 뭐 그런 글로 그냥 세월이 다 가버린거에요, 전쟁 날 때까지. 50년대에. 그 전쟁 났죠, 전쟁 나고는 또 뭐 밤낮 독립 전에는 그 전에는 이승만 반대하고 그거 났을 때는, 어, 그게 있었네. 국대안(국립서울종합대학안) 반대. 국립대학안반대, 그 미군, 미군정들이 우리는 국대하면, 그 뭐 국대화하면 뭐가 나쁜가 뭐 이렇게 생각 하지만 뭐가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이유가. 국대안 반대 그것도 밤낮 동맹휴업. 동맹휴업하느라고 공부한 날이 없었어. 그래가지고 밤낮 이렇게 교정에 서 있으면 형사들이 와가지고 그 가담한 사람 잡아가고. 조회, 조회라는 걸 하잖아. 그런 기억, 뭐 겁나던 기억, 전부 그런 거야. 그니까 공부한 날이 없어. 그러고 전쟁나버렸, 전쟁나뻐렸지. 전쟁나고 뭐 이런 군대가고. 나는 그래서 군대를 세 정권아래서. 이승만 정권때 가가지고 박정희 정권때 지나고 어, 민주당 정권때, 박정희 정권때까지 내가 군대 복무를 한거야. 내가 군대 복무를 8년 했어. 면담자 : 뭐 장교로 가신건가요, 아니면... 구술자 : 군의관으로 면담자 : 군의관으로. 구술자 : 내가 의사 되기싫다고 그랬지. 근데 (웃음) 면담자 : 굉장히 파란만장한. 그 어렸을 때부터, 학창시절부터. 정말 한국 현대사의 모든 굴곡을 다 거치면서... 구술자 : 완전히 격동이라 그러면 암것도 아니고 격동 정도가 아니야. 이건 뭐 공부도 아니고. 이건 뭐 공부한 날이 하나도 없었어. 전쟁 났을 때는 우리집도 다 타버렷거든, 폭, 그게 인자 포항 북쪽 아니요, 그 포항에서 그 격전지거든. 몇 번을 밀고 땡기고 밀고 땡기고 했을 거 아니여. 우리집에는 말이요, 소이탄을 쳐 다 타고 탄데다가 또 폭발하는 해가지고 밑에 하얀 재가 하얀 흙이 탄 재 위에 덮여있고. 이거 수도 없어요. 집에 오니까 아무도 없는거야 다 타버리고. 면담자 : 선생님 말씀하실 때 46년에 중학교로 인제 입학을 하시고 그때 중고 6년 이렇게 하고 대학, 대학을 구술자 : 서울대학 의과대학을 갔지. 면담자 : 그 서울대 의대를... 구술자 : 경북, 그때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도 있었거든. 근데 그건 우리 아버지가 서울대학가라 이런게 하신 건 아니고 내가 택했는데 왜냐믄 내가 대구에서 7년 댕겼어요. 내가 일년 묵었어. 그래가지고 7년이 됐다고. 6년, 내가 우리 같이 입학한 사람보다 한해 늦게 졸업을 했어. 내가 일년 휴학을 했어요, 중간에. 전쟁나고. 면담자 : 그럼 의대는 53년에 들어가시고 구술자 : 그래가지고 59년에 나왔지. 53년에 대학들이 어디 있었냐면 부산에 있었습니다. 임시, 그때 또 임시 수도야. 그러니 파란 만장. 수도는 또 임시 수도야. 그래가지고 부산에서 댕겼어. 부산에, 부산 댕길 때 얘길 쪼끔 할까요? 하숙을 그 초량동, 그 산꼭대기에 하숙을 했는데 절에 하숙을 했어. 절이라는게 딴 절이 아니고 절 이름도 백년암이라고 아주 그럴듯한 이름인데 대처승이 하는 데니까 아시겠죠. 고기국도 끓여주고 그랬다고. 거기 내가 얘기할라 그런건 딴 얘기가 아니고 비가 오믄 산에서 판자촌이 저 초량진 그 역까지 갈 꺼 아니에요? 전차역까지. 내려가는데 똥물을 다 퍼요, 퍼요. 하수도라는 게 없고 뭐 아무것도 없잖아. 비만 오면 똥물이 있던 걸 다 퍼내는 거야. 그니까 산꼭대기에서 우리가 차를 타러 내려가면 똥밭으로그냥 내려가는거야. 그런 속에서 살은 거야, 우리가. 그때 뭐 요즘 뭐 옛날부터 잘 살던 것이 자꾸 얘기하고 뭐 그렇게 하는데 굉장히 가난했어요, 정말. 무지무지 가난했어. 그래서 내가 어떤 때는 생각하면 그 박정희가 무슨 우리 잘 살게 해준 것 같이 막 의인같이 생각하는 이유가 그때 하고 지금하고 이렇게 하면서 이 살기가 나아진거, 그걸 그 사람이 한걸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거여. 구술자 : 면담자 : 선생님 아까 말씀 (TAPE 교체) 구술자 : 면담자 : 선생님 아까 말씀하실 때 선생님은 다른 문학 쪽에 더 관심이 많았고 그걸 공부하고 싶었는데 의대, 의대를 이렇게 입학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부모님이 뭐 그렇게 강요하신 것도 아니시라고 그때 말씀을 하셨는데요. 구술자 : 아니, 서울 대학 가는 거는 강요 안 했지만 의과대학 안가면 나는 대학을 못 가게. 면담자 : 아, 부모님이 그렇게, 아버지께서요. 구술자 : 그래서 그 경북 고등학교, 내가 이게 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되어버렸거든. 중학교 6년제 마지막 졸업생이 되야될텐데 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된 거에요. 고등학교가 됐더니 문, 문과반하고 이과반이 있었어요. 그때는. 그래가지고 나는 물론 문과반에 내 이름을 올렸지. 그랬더니 우리 아버지가 대구 올라오셔가지고는 다녀가시고 나면 학교에서 야, 수곤이 너는 문과반은 안 된다, 이과반으로가라, 이러는 거야. 아니 어떻게 된거냐고. 아니, 느이 아버지가 그렇게 옮겨놓고 갔어. 하튼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옮겨놓으면 옮겨놓고. 그래서 내가 그거 그래서 아는 거에요. 그러고 그래서 나는 평생 인자 어떻게 하믄 의사 하는 거를 면할까, 그런 것만 연구를 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고 하니, 신문 기자 하면 면하는가, 신문기자는 막 막강한 세력이 있어가지고. 군대도 안 가고 의사노릇도 면하겠다, 이런 생각을 해가지고 59년도에 내가 졸업을 앞두고 신문기자, 한국일보에서 처음 그 수습기자라고 했나, 견습 기자라고 그랬어. 수습이라는 거는 우리말이고 견습이라는 거는 아마 일본말일 거에요. 그 견습기자 시험을 공채를 하는거야. 그래서 내가 시험을 치러 갔어요. 그래 시험 치는데, 원서를 냈는데 간단해. 자필 이력서하고 사진한장인가 뭐 그것만 내면 되는 거에요. 그 얼마나 간단해. 냈다. 냈더니 시험을 치러 오래. 시험 치러 갔더니 그때 그 안국동에 그 한국일보사가, 장기영씨가 창립했잖아요, 장기영이라고 사장이. 그 사람이 했는데, 교재 시험 치러 온 사람이 나중에 그 알았지만 5,6백명 되는거에요. 5,6 백명이. 그 시험치는데 시험 과목이 뭔고 하니 영어, 영어하고 상식이야. 상식이라는건 뭔고 하니아직도 기억이 나, 나토(NATO)가 뭐냐. 엔에이티오, 그게 뭘 뜻하냐 뭐 이런거여.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거 아니에요. 영어 시험하고 나토야. 그게 그때 이제 우리 머리가 어디에 가 있었는가 알 수 있지. 나는 쉬운거 였으니까 그래서 뭐 합격자 발표가 했어. 봤더니 진짜 내 이름이 있는 거야. 수험번호였겠지 그랬더니 우리 반 친구 중에 아무도 모르는데 그 사람들이 이제 관심은 있었겠지, 야 수곤이 너 기자 시험 봤어? 그러더라고. 그니까 그게 관심 있던 사람이 그때 있었던 거야. 그 사람이 치진 않았는데. 그래서 내가 인자 합격되서 갔을 거 아니에요. 합격되서 갔더니 합격된 사람이 한 스무 명 안팎인데 가니까, 내가 보기에 눈이 조금 말동말똥한 사람들이 온 거야. 뽑혔으니까. 그래가지고는 뭘 한고 하니, 편집국에 가서 문, 인터뷰 하는 거에요. 면접 시험. 그게 쪼금 떨리잖아. 들어갔더니 편집, 그 한국일보 편집국의 이런 방인데 딱 앉아있고 기자들이 몇 사람 배석하고 집, 편집국장이 그때 오정식 선생이라고 아실려나 모르겠어요, 오정식씨라고, 석천 오정식 선생이라고 우리나라에 상당히 이름있는 언론인이죠, 다 작고 하셨지만. 그 양반이 앉아서 인자 그 제일 먼저 묻는 게 뭘 물었는가 내가 기억이 난다고. 이거 학생 자필이야? 하는거여. 그때 내가 인자 우리 선친이 그 글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거든, 그래 내가 중학교 갈 적에 우리 선친이 서도, 일본 사람들 서도라 그럽니다, 우리는 서예라 하고. 중국사람 서법이라고 그래. 서도 책을 우리 아버지가 일본 말로 된거요, 그때는 우리 책이란게 잘 없었, 별로 없었거든. 이걸 고일장이라고 옛날 그 일본 사람들이 그거를 그 묘한 재료로 이렇게 매끈(매어엮은) 그 천 그 비슷한 거 있지, 이렇게 나무 그걸로 이렇게. 고일장에다 그걸 넣어가지고 주셨다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이자 내가 보니까 필적이 있어 보이거든. 그래서 가서 계속 글씨 공부해라 하는 뜻으로 주신거야. 우리 선친이 말이, 나는 지금 말이 많아졌는데 나이가 많아지면서, 나도 이제는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어. 우리 선친이 그래도 말을, 전혀 안하시는 분인데, 너 이거 철저히 해라 이런 거 말 안 하셔. 그, 그래서 내가 그 인자 그 책을 뭐 끄집어내서 본 일도 없고 어디갔는지도 모르긴 하지마는 취미도 있고 뭐 이렇게 글씨를, 우리 레벨의 친구들보다는 쪼끔 잘 썼던 거봐. 그래서 오정식 선생의 인자 그게 눈에 띤거야. 그게 학생 누가 대필해준지 알고. 제가 썼습니다. 그랬더니 이 글씨체가 무슨첸 줄 알아? 이러는거야. 내가 체는 뭐이죠, 그래 나중에 봤더니 일본 사람들이 많이 썼던 체야. 그게. 그러니까 그 책을 가끔 보고 베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어. 그 육조체라고 그래 육조체. 오대 육조 뭐 하는 그, 그런 체라 그래요. 내가 그걸 기억이 나가지고 그래서 제가 썼습니다,그러기까 거기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고. 또 그 다음에 묻는게 시골에서 허나마나 논밭전지 팔고 소 팔고 다 해서 의과대학보냈을 텐데 그래 신문기자 하게 내버려둘 것 같애? 이러는 거에요. 이건 틀림없잖아요. 빤하지 뭐, 뻔하게 할 수 있는 얘기지. 그래 내가 그래 둘러대서 거짓말 한거야. 선생님, 저희 아버지는 이해심이 굉장히 많은 분이 되서 내가 하고 싶은 거는 그렇게 반대 안하실 겁니다. 이래했더니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러더니 아니, 의과대학 나와서 의사 노릇이나 하지 왜 신문사에 들올라고 그래, 이래요. 그래서 제가 그 한국일보 창간한 뒤로 쭉 신문을 보는데, 내 생각에는 과학면이라든지 의료면 이런 걸 보면 부정확한 게 상당히 많다. 그래서 나 같은 내가 그 의과 대학 댕겨서 지식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을 기자로 채용을 하면 여기 이 신문이 다른 신문보다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좋은 점이 있을 겁니다. 그랬더니 그, 오선생님 말씀이 어 이건 학생이 몰라서 그래, 기자라는 거는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게 아니고 전문가의 의견을 잘 전달하는게 그게 기자의, 기자의 역할이다. 뭐 이러더라고요. 그게 아직도 내가 기억이 나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거든. 전문성을 가진 기자들이 그 후에 한 20년 후에 시작을 했을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상당히 앞섰던 거지. 그런 점에서는. 그런 거. 뭐 학생때는 그런 거. 근데 학교 댕기면서 내가 의사가 취미가 없을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의사공부는 나는 일체 안 했어. 그 바로 건너가 의과 대학 바로 건너가 문리과 대학이 있거든. 예과가 문리, 또 문리과 대학에 속해 있었거든요. 예과라는 게. 2년이. 그니까 문리과 대학이 아주 안성맞춤인거라. 그래서 내가 철학과 문학과 뭐 이런 거 소위 문사철, 문사철에 관계되는 학과만 가서 공부를 한 거에요. 도강을 한 거지. 도강을 하고. 의과 대학은 공부를 하나도 안 했어. 그래서 시험을 치면 밤낮 재시험이에요. 그래서 내가 우리 졸업반 중에 재시험을 제일 많이 친 사람이에요. 밤낮 재시험이야. 근데 이자 지금 같으면 퇴학, 전부 퇴학됐을텐데 그때는 들어가면 그냥 밀려 나와, 그때는 그랬어요, 이상하게. 들어간 사람은 전부 밀려 나와. 병이 나가지고 휴학한 사람 외에는 퇴학이나 정학한 사람 하나도 없어. 들어가면 나도게 되있었어. 그렇게 쉼게, 지금말로 하면 도저히 적응을 못했지. 그렇게 해서 내가 의과대학을 나왔어요. 그래서 문학, 영문학, 불문학, 뭐 철학 그런 강의를 내가 그, 그때 영문학과 철학자들 뭐 가르쳐주다왔어. 그래가지고는 심지어 불문학과 학생, 영문학과 학생이 나를 보고 대리시험을 쳐주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 그 학과 학생들 대리 시험을 쳐줬어. 면담자 : 그 한국일보 시험 보신 것은 합격을 하셨습니까? 구술자 : 어, 그거 (이야기) 하다가. 그래가지고 인자 두 번째 구술시험도 합격 했을 거 아니에요. 오정식 보기에 또 그렇게 보이거든. 그리고 이자 신문기자라는게 대응하는 거, 어떻게 맞받아 치냐 이런 것도 많이 보꺼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이자 합격을 했어. 합격해가지고 마지막 세 번째 시험으로 가는데 뭐 뭔고하니 사장 면접 시험입니다. 장기영 사장하고 면접을 해. 그런데 나도 그 인자 무의식적인, 뭐 잠재의식인 그런 게 들어갔는데 내가 심리학 공부를 한 사람이니까 우리 아버지가 절대 용납 안한다는 것을 뭐 왜 몰랐겠어. 그리고 아버지 그 영을 거역하고라도 내가 갈 수는 있는데 군대를, 징집이 연기가 되어 있거든. 의과대학 학생은 연기가 돼 있습니다. 그래서 법을 범하는거야. 안 가면. 기피가 되. 징집 기피가 되요. 그니까 그것도 있고. 그 어른 영을 거역하는 것도 있고. 그래서 그랬을 거에요. 지각을 했어. 시험 치러 가는데. 장기영 사장, 장기영 사장 면접을 치러 조금 늦어가지고 하도 급해가지고 택시를 타고 갔는데 그 시절에, 돈이 뭐 있었겠어. 하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이놈, 버릇없는 놈이 시험 치러 오는 놈이 지각했으니까 넌 싹수가 노랗다 해가지고 볼 것도 없다고 나가라고 그러드라고. 그래서 내가 나, 합격을 못 한 거지. 면담자 : 그래서 바로 군대로. 구술자 : 그래가지고 군대로. 뭐 합격을 했더라도 군대를 안 갈 수 없는 그런 거지만. 그게 이자 내 나름대로 의사를 안 할라고 한 노력이에요. 거기서 끝난 게 아니고 정신과 의사요, 나. 의사 중에 제일 의사같지 않은 게 정신과 의삽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그, 알유어 리얼 닥터?(Are you a real doctor?) 이래요. 진짜 의사냐 이래? 정신과 의사라 하며는. 심리학자하고 싸이칼러지스트(psychologist: 심리학자)하고 싸이키아트리스(psychiatrist:정신과 의사)를 구별을 잘 못해. 여기 사람들도 그래요. 그래 그게 이자 마지막으로 그 아버지 영을 거역하지 않으면서 타협하는 걸로 택한 게 인제 정신과, 정신과를 택했어. 그래서 나 아는 사람들이 그러거든, 우리 집사람, 제 처도 그래요. 당신이 뭐 할 게 없어가지고 그 의사 딴거 했으면 돈도 잘 벌텐데 정신과 의사가 됐냐고 그래요. 면담자 : 그래도 한국보다는 미국이 이 정신과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상당부분 인식이 한국과는 다른게 이런 뭐 그런게 있지 않아요? 구술자 : 그게 비교적 그렇다는 얘기지, 그게 비교지. 어디까지나 비교지. 그 여기서도 정신과 의사라 그러면 돈도 잘 못 벌고 의사 답지 않은 거야. 면담자 : 군대를 그렇게 가셔서 군대는 어디서 근무를 하셨습니까? 구술자 : 군대는 인자 내가 해군을 갔어요. 해군을 간 이유가 육군보다는 쪼끔 편하대. 얘기 듣기에.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냐믄 내가 친구들이 전부 나보다 일년 먼저 나갔잖아요. 그 친구들이 있거든. 그 친구들 얘기가 수곤아 너 해군 간 게 훨씬 나아, 육군 가지 마라.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이 친구들도 거기, 내가 거기 갈 수 있게. 거 아무나 못 갔어. 또. 어떻게 얘기를 해가지고 군대 그 해군 그 해군 진영에 온거야. 가서 인제 군인학교에 갔어요, 해군 군의학교가 따로 있어요 훈련도 따로, 육군하고 같이 안 하고. 그래가지고 훈련을 아마 우리가 한 2,3개월 받았을 꺼에요, 군의관. 그래가지고 임관을 중령, 중령이 아니고 중의 임관을 말합니다. 그 군의관 중의 있죠. 중의를 쳤는데 어, 인턴을 해야되. 그 인턴을 했습니다. 인턴 일년하고 60년도에, 59년도에 들어가서 60년도에 임관이 되어가지고 받고 어디로 갔냐면 해병대로 간거야. 면담자 : 69년도에요? 구술자 : 해군 군의관이 해병대도 가고 그래요. 그래서 포항. 내가 그래서 집이 거기에요. 그때는 저희 선친이 포항까지 이사가신 거에요. 시작해가지고 자꾸 큰 데로 이사가신거야. 그래가지고 이제 누가 보기에는 정식 의사같거던, 우리 아버지가. 이젠 자기가 원을 푼 거에요. 어떻게, 어떻게 해가지고, 그래도 한지 의사긴 한데 어떻게 이 양반이 했는지 정식 의사 그걸 나중에는 그걸 땄어. 늘 수련도 가시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했는데. 그때 아들도 의사가 되고 자기도 원을 푸시고 의사가 되 포항에서 개업을 하시고. 포항에 해병대 36사단이 있거든요. 본부가. 거기 가서 인자 갔는데 내가 가보니까 이야 이거 군대는 정말 있을 데가 아니야. 근데 그 군의관 가는게 인자 해병대 본부, 본부대대 의무중대, 의무중대 의무실장이 된 거야. 근데 그게 해군에서는, 해병대에서는 제일, 해, 그 거기 병원 내놓고는 해병대 병원 내놓고는 내가 이제 제일 좋은, 제일 좋은 자리야 그게 말하자면. 편한 자리야. 그게 내 인자 그 예를 들면 해병대에 그 대대장이 말이야, 나 저 김중위라고 절대 안 그러고 닥터 김이라고 이러게.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쫌 뭐라 그럴까. 이, 덜 군대식인 분위기가 가장 덜 군대. 해병대 답지 않은그런 그런데로 간거야. 그래도 나는 못있겠더라고. 어떻게든지 빠져나갈 길을 보고 있는데. 개인얘기만 많이 나왔나? 그게 뭐가 있는고 하니 미국 유학 가는 게 있는거야. 군대에서 미국 유학을 보냈어. 면담자 : 군대에서요? 구술자 : 군대에서. 뭔고 하니 미국 선진 의학을 가서 공부해오라 그거지. 근데 미국 사람들은 친미, 자기들 지배하는 나라에 피지배 국가에 친미분자를 양성하기 위해 돈을 많이 쏟아붓거든. 그래서 그걸 매프(MAP), 매프에요. 밀리타리 에이드 프로그램(Military Aid Program)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엠에이피. 그걸 이용해서 나가 온 거에요, 미국에를. 그 미국에서 돈을 대 준거에요. 한국 정부에서 돈을 줬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월급을 받고. 여기 와서 내가 일년을 있었어 미국 와서. 그리고 일년 있은 정도가 아니고 이 10주동안 워싱턴 DC에 가서 영어 교육을 하는 거에요. 회화, 그게 뭔고 하니 CIA들이 가서 하는 지는 내가 모르지마는 해군 정보학교 인텔리전 스쿨, 네이벌 인텔리전 스쿨(Navak Intelligence School)이 DC에 있거든요. 거길 간거에요. 거길 보내줘 가지고 그 사람들 하는, 그때 벌써 이거 비, 비디오는 아니지만 오디오로 아주 그 이머쓰(emerce: 몰입) 영어 그 하는 게 있죠, 그거 뭐 철저히 하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영어 회화를 배운 거에요. 원래 영어를 인자 취미로 했을 거 아니에요. 대학 들어갈 때 인자 그 얘긴 빠뜨렸지마는 의과 대학 못 들어가면 영문과 갈라고, 영문, 인문학 한다고. 그때는 문학한다 그러믄 국문학 하는 놈들은 저놈들은 저 실력이 없어서 국문과지 실력이 있는 놈은 영문관데, 이런 아주 못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때거든. 그래 영문과를 이자 지망을 해가지고 고대 영문과를 내가 지망했어요. 고대 갈 수 있을 정도로 영문에 이자, 미국 오기 전에는 내가 책을, 우리 집사람은 그래, 당신은 한국에 살 때는 영어책만 보더니 미국오더니 영어책은 하나도 안 보고 국문 책만 본다고 밤낮 꺼꾸로만 한다고. 면담자 : 그러면 선생님 그 이때 교육을 한 일년 간 나와계시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신거죠? 구술자 : 그렇지. 면담자 : 돌아오셔서... 구술자 : 그때 참 미국에 있을 적에 케네디 대통령이 그때 그거 했어요. 그, 취임했어 내가 그때 DC에 있었다고. 그래서 그 사람 퍼레이드 하는 것도 가서 보고, 가서 구경하고. 그 또 한가지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큐바 그 미사일 그게 있었다고. 그래서 난 아, 전쟁하면 집에도 못 가고 죽겠네. 그게 우리 처하고 연애할 땐데 야, 이거 애인도 못보고 죽겠다 이런 생각도 하고. 면담자 : 그, 선생님 그 군대 가시고 인턴 한 일년 하고 60년에 해병대 인제 군의관으로 인제 가셨다고 했는데 60년이면 인제 한국 정치상황으로 볼 때 4.19가 그때 일어날 땐데요. 구술자 : 내가 그 진해에 있을 적에 그 이승만, 4.19. 면담자 : 그때 군대 내에서 쫌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구술자 : 나는 그런 거 뭐 군인이니까 엄두도 못냈겠지만 별로 의식도 그런 건 의식도 없었어. 그러고 어떻게든지 군대에서 빠져나갈 생각만 하고. 그런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4.19가 이자 터지니까 점점점 번져서 진해도 번져 왔을꺼 아니에요. 그랬더니 우리가 그 독립장교 숙사라고 그러는 해군 장교들만 있는 데가 숙소가 따로 있거든. 그 그 근처, 우리한텐 시위하는 사람들이 오고 뭐 이런 건 없지만. 시위대들, 우리 이제 산 위에 이렇게 있는데 시위대들 막 진압하고 막 그런 거 그냥 방관, 방관하는 입장에서 그런 생각만 하는 거야. 저놈들이 나쁜짓 한다, 좋은 짓 한다 뭐 이런 건 생각도 없고. 뭐 그거 뭐 하는가 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많이 했어요. 군대 안에가 얼마나 부패해있었든가 하는거. 왜냐면 해군은 육군에 비해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고 규모가 적기 때문에 하면 너무 들여다 보이니까 육군만큼 그렇게 내놓고 그렇게 부패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예를 들믄 내가 해군 병원에 오래 있었지마는 나도 인제 미국 가서 배워왔으니까 해군 병원에마 있었을 거 아니오. 나는 배도 탄일 없고 병원에만 있으면서 정신과만 하고. 내가 그때부터 정신과 했으니까. 정신과 병동장 정신과 과장 뭐 나중에 소위 분원, 나를 못 나가가게 할라고 분원장이라는 거까지 시켜가지고. 못나가게 붙잡아서 내가 붙잡혀가지고 8년 있었거든. 잠깐 하고 나올려고 그랬던 사람이 까꾸로 역설적으로 오래 하고 나온 거야, 내가. 약게 굴다가 나갔던 거는 복무로 치질 안해. 미국 가 있었는데 왜 그걸 복무로 치냐 이거요. 가산하는 거야, 자꾸 배를 가산하더라고, 나중에는. 그래가지고 자꾸 늘어지는 거에요. 이게. 그래가지고 친구들 얼른 해가지고 3년 하고 나가는데 나는 8년 해. 어쨌든. 그래가지고 이자 이승만이가 쫒겨났잖아요. 소위 5·18 (5.16을 혼동)군사 반란이 났을 때는 내가 미국에 있었습니다. 미국에. 하루 아침에그 우리 해군 선배, 대학도 선배고 해군도 선밴데 그분 소령인데 난 중령인데, 아 김중령이 큰일났어, 이러는 거에요. 왜요, 그랬더니. 그분이 차를 똥차를 하나 사가지고 몰고 내가 있는 대를 오셨어. 그러면서 들어가더니 왜요, 그랬더니 아, 한국에 혁명났대, 혁명이 일어 났다고. 그 TV 켜봐, TV. 그래 한국에서는 새벽일꺼 아니에요, 우리는 퇴근했으니까. TV겼더니 전차가 타악 나오는 거야. 스틸이, 그때는 이제 움직이는 건 안 나오고 스틸이 나왔는데 전차 다 나오고 뭐 이렇게 나왔는데 장도영이란 사람이 딱 나오고. 미국에서도 CIA 이런데서 다 알았을 거에요. 어떤 사람이 한가. 그러지마는 바깥에 알려진 거는 정체 불명의 사람이 혁명을 주도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거야. 저게 이자 빨갱이 나라가 되 공산화가 됐는지 어쩐지 알 수가 없으니까 내가 그래 출근했더니 해군병원에 내가 있었거든요. 훈련받는데가 어디있었냐면 칼리포니아에 해군 오클랜드에 해군병원에 있습니다. 거기 가서 있는데 그 해군 병원에 정신과 과장님이 이 양반이 어, 닥터김, 걱정하지 마라고 내가 주선해줄 수 있을테니까 공산화 되면 너 여기서 살면 된다고. 안 가도 된다고, 뭐 이러고 그랬다고. 그럴 정도로 일반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고 여기서도. 그런 기억이 나요. 그러고 이자 돌아가서는 돌아가서 그 군대가서 해군 이제 진해병원으로 내가 복귀를 했을 것 아니에요. 복직을 해가지고는 거기서 쪼금 있다 하도있기 싫은 거야, 군대 그래서 또 어딜 갔냐믄 수련받으러 간다고 그래 국립 정신병원으로 갔어.나는 또. 약게 놀다가 뭐 훈련은 받았지마는, 수련은. 대학 병원에 가서 내가 수련을 못받았지만 그런 데 댕기면서 이자 내 나름대로 받은 거에요. 국립 정신병원으로 갔는데 국립 정신병원이라는게 중곡, 서울 중곡동이란 데 생겼는데 거기에 이자 그게 뭔고하니 미국에서 실험하고 다 못쓰게 된 제도, 그걸 한국에서 신식으로 도입하는거야. 모든 게 우리 다 그러지마는 여기에서 다 한물 간 거 꼭 지금 신자유주의 수입해가지고 하는거나 꼭 마찬가지로. 정신과 제도도 여기서는 주립병원이란게 있거든, 여기. 그래가지고 크은 병원 지어가지고 창고같이 사람들을 수용을 해가지고 하다가 미국에 해니까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수십년 하다가 마지막 단계가 되가지고 이걸 전부 다 분산해야겠다, 그 커뮤니티에 다 내보내야된다, 지역사회로 분산시켜야 사람들이 살 수가 있다, 이러는데 거기는 그거를 처음 도입해가지고 하는 거에요. 거기에 이자 내가 가서 또 일년 있은 거야. 그 일년 있은 이유 중에 하나가 내가 신혼을 서울서 생활을 해야되겠는데, 마누라하고. 그걸 하면 편한 거에요. 그래가지고 그 나가 있는 일년 거기다 일년 가산, 그래가지고 또 이년이 또 늘어나. 그래도 육년 만 하면 되는데 배만 하면 되는데, 안, 제대를 안 시켜주는거야. 당시에 후임자가 없어서 제대를 안 시켜 주는거야. 그래 나중에 보니까 뭐 갖다 줘야대, 그걸 몰랐잖아, 그걸. 갖다 줘야돼, 제대라도 할라 그러면, 우에. 의무감하고 의무 단장 뭐 이런 사람들한테 갖다줘야되는데 그걸 난 생각도 못했거든. 그리고 그때 군대서 약이 나오믄요, 소위 그 항생제를 안티라 그랬는데 항생제 나오든가, 미국 사람들 뭐 소화제 뭐 이런거 고가 약들 있거든 나오믄 환자들한테 하나도 안 돌아갑니다. 전부 다, 전부다 깡그리 가지고 약국에 가서 주면 약국에서 돈을 줘요. 군의관들, 하사관. 선임 하사관, 뭐 전부 휴가갈 때는 그걸 가지고 다 쪼그만 의무실에도 다 그렇게. 그렇게 해가지고, 내가 그 이자 실장은 해병대 가서도 처음으로 실장했을 거 아니에요. 이자 처음에 이자 애인 만나러 갈라고 데이트하러 가려고 했더니 내 선임하사관이 장교님, 이거 가져가세요, 이거 뭐여 봉투를 주는거에요. 이거 뭐야 그랬더니 아 이거 가서 여비하시고 용돈 쓰세요. 그래. 아, 이게 어디서 나왔어? 아니 뭐 여기 이렇게 했습니다. 약을 전부다 팔아가지요. 이딴짓 하지 말라고. 이 뭐냐고, 이래가지고. 나중에는 이놈들이 자기들이 그냥 해가지고, 아 저 병 신같은 놈 잘왔다 해가지고 자기들이 해가지고 하는거여. 이렇게 되어 있어. 그래서 주위에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안 하는 사람 없어. 배 있지, 배. 페인트 칠하는 해군. 페인트 칠하면 페인트가 나오거든, 그 뭐 깡통으로 나오겠지. 배. 그거 전부다 갖다 팔고. 병원에 사병들 부식, 환자들 부식 나오면 비곗덩어리 몇 개하고 고기는고기는 전부다 어디로 가고, 쌀 다 어디로 가고 그랬습니다. 그런 놈들을 무슨 혁명을 한다고 말이야, 그게 말이돼요, 그게? 제일 부패한 놈들이. 거기는 부패해도 어떻게 말도 못하고 아무도 말 못해요. 그러고 제대 시켜주고. 가짜 제대. 이거 뭐 그때 그 부패함은요, 근데 해군은 부패 덜했다고 그래. 근데도 볼 수가 없는 그런 부패라고. 그거이 그러지. 그때 지금도 뭐 하나 달라진것 없고. . 면담자 : 그럼 59년도에 인제 제대를 드디어 인제 6년간 군생활하시면서 하신 건데 구술자 : 59년도에 제대했지. 면담자 : 대위 예편 하셨습니까? 구술자 : 어 대위했지. 내 동생들은 아니, 나는 소령. 8년 했으니까. 근데 내 동생들은 중령이야, 다. 나는 성적이 나빠가지고. 군의학교도 성적이 나쁘고 뭐가, 뭐가 불평이 많아. 예를 들믄 뭐냐믄 월급에서 뭘 자꾸 띠잖아, 예를 들면 적십자 회비, 무슨 회비해서 자꾸 띠거든. 그래서 내가 장교 회의 할 적에 항의를 한 거야. 이거 왜 띠느냔 말이야. 우리가 그때 그 소위 월급이 만원이었어요, 만원. 근데 나는 전문의사였거든 전문의 자격증을 갖고 있으믄 만원을 더 줬어요. 뱁니다 그게. 만원 가지고 생활을 할 수가 없어. 이만원가지고도 이만원 가지고 내가 어떻게 했는줄 알아요? 아이를 낳았는데 우리집 엄마가 젖이 안나와. 그래가지고 우유를, 분유를 사서 멕이는데 우유를, 그게 분유가 상해가지고 이렇게 덩어리진 분유 있지, 그게 오스트레일리아산이라 그러는데 그놈을 어떻게 어떻게 구해가지고 사믄 내가 나 월급가지고 사버리면 먹을 양식이 없어. 그래가지고 나중에 미국에 가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내 처가 항상 저녁을 굶은 거에요. 면담자 : 선생님 그러면 그 59년도에 제대를 하시고 나서 미국으로 들어오신 년도가 몇 년도였습니까? 이민을 이쪽으로 들어오신게. 구술자 : 그러니까 내가 60년에, 60도에 미국을 왔잖아요. 그래가지고 14개월 만에 한국을 갔거든 그러니까 62년 초에 귀국한 거에요. 62년에 들어가가지고 67년도 5월 달에 예편을 했습니다. 면담자 : 아, 지금 말씀을 좀 잘못했는데 예, 59년도에 군대에 입대하셔서 인제 67년까지 어찌됐건 교육기간 파견기간까지 다 합치면 한 67년까지 이렇게 계신거고. 구술자 : 67년도에 이자 제대를 하니깐 미국 오게 된 이유가 미국에 왔을 적에 내가 그 야, 미국에 흑백, 그때는 60, 이민이라는게 이게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에요. 68년, 69년. 70년대 되면서 여기 저 이민 많이 왔는데. 그때 왔을 적에 이민을, 우리가 왔을 때는 이민을 온 게 아니거든. 그 67년도에는 내가 제대를 하니까 나는 어디 취직을 했으면 좋겠는데, 개업을 하든가 취직을 하든가, 교육 기관에, 대학 병원에 가든가, 셋, 세 가지거든. 개업을 할라고 하니까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자기가 돈이, 내가 돈이 있든가 그 아니면 처가에 돈이 많아가지고는 뭐 건물하고 차하고 준다 그러대, 요즘은 그렇다 그러더만. 그뒤로. 그런게 있으면 되는데 뭐 우리 처가도 아주 쫄쫄한 가난한 집이고 그러니까. 개업도 못해. 대학 들어갈려고 그러는데 나 성적이 나뻐서 서울대학 같은 데서는 재시험만 보던 놈 받아주지도 않고. 다른 데는 받어줘도 내가 안 하고. 할 수가 없어. 근데 그러면 취직, 아무데나 취직할라 그러니까 아이고 새까만 후배들이 다 위에 있는 거에요. 한국 사고 방식이, 후배 밑에 가서는 이거 하기 힘들잖아요. 뭐 정 급하믄 그것도 할 수 있긴 있는데 세 가지가 다 할 수 없는거야. 그래서 생각한게 그러고 또 우리 처가는 어떻게 되느라고 우리 선친이 아주 싫어하는 꼴통 예수쟁이집입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이거든. 여기는 전부 미국이라고 그러면 이 천사들만 사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데든지 미국 가자는 거에요. 그러고 가만 보니까 우리 처는 충청남도 보령 사람인데 경상도 이거 말이야. 시집가면 큰일나, 장자 시집갔다가는 신세 아주 망친다. 아주 집안에서 난리 난거에요. 거기 시집 보내지 말라고. 면담자 : 미국으로 들어오신 것은 언제셨나요? 미국으로 들어오신. 구술자 : 그러니까 67년에 졸업했, 제대하고 후에 들어온 거에요. 면담자 : 아, 바로 들어오셨어요? 구술자 : 바로 들어온거야. 그러니까 제대하게 되니까 내가 계획을 해가지고 시험도 치고 준비를 했을 거 아니에요. 왜냐면 이 길이 이거밖에 안 남었는데, 내가 지금 설명했지마는. 그래서 미국에 온 거에요. 나는 별로 생각에 없어. 근데 못 이긴체하고 그냥 온거에요. 왔을때는 뭔고 하니, 와서 정신과 공부를 제대로 해가지고 미국에서 스페샬리스트(specialist), 한국에서는 전문의라 그러고. 여기는 보드맨(board man), 보드라 그럽니다. 정신과보드를 따서, 내가 이 명함에 보믄 어메리칸 보드 오브 싸이키아트리(American Board of Psychiatry) 그거를 이제 따야 돼. 그거를 따가지고 미국, 한국 가면 그때는 내가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갈 수 있는 거에요. 아 왜냐면 미국 보드를 땄으니까. 그래서 그거를 목적으로 제 선친한테 가서 아버님 내가 이번에 미국을 가서 보드를 딱 결정하고 공부하고 오겠십니다, 이랬드니 야 이놈아, 그 야만국에 가서 니가 공부하는건 괜찮지만 내 새끼 거기서 교육시키믄 큰일 난다. 꼭 니가 공부를 하겠다니까 뭐 서양기술 배워온다니까 할 수 없지만 배워가지고 꼭 와야된다. 아, 제가 맹세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하직을 하고 왔을 거 아니에요. 왔는데 그게 되요? 아 애 새끼들 크고 또 하나 낳고. 뭐 어찌 해 하튼 가니 가도 없고 이게 붙을 데도 없고 그러니까 똑 같은 거에요. 그 제대할 때하고 비슷한 형편이야. 그래서 이자 여기 눌러앉은거야. 면담자 : 아버지께서 굉장히 민족주의자셨던 것 같애요. 구술자 : 내가요? 면담자 : 아니 선생님의 선친되시는 분께서. 선생님이 공부하러 여기 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마 선생님 자녀들을 이 미국식 교육을 받게 않게 하기 위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거 보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구술자 : 근데 왜냐면 그분은 그 순 교육 받은 게 대학 교육 받으신 것도 없고 신식 교육 받으신 게 없거든. 그냥 유교. 철저한 유교 교육 받으시고 뭐 사서삼경 이런 거나 보시고 뭐 이렇게 그랬었으니까. 면담자 : 그럼 67년도에 미국 들어오셔서 어디로, 어디쪽으로, 미국 어디에서 거주를 하셨습니까? 구술자 : 나는 여기로 왔어. 면담자 : 뉴욕으로 바로 오셨나요? 구술자 : 뉴욕 바로 왔지. 뉴욕을 바로 왔는데 난 칼레포니아, 칼리포니아 갔을 때 내가 결혼을 하기 위해가지고 예수를 믿었을 거래요. 그래서 세례를 받았거든. 근데 칼리포니아에 그 지역에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이 의사야. 미국에서 미국 교육을 받고 미국 의과대학을 받은 의산데 그 분이 의사, 저 목사를 하고 계신거야. 그래가지고 그때는 미국에서는 우리 동포들 만나려며는 교회밖에 없어. 근데 교회갔는데 잘 됐거든. 아이고, 마누라도 기독교 집안. 이 양반도 의사선생님이고 목사고 그러니까 막 나를 어떻게든지 해가지고 그 거기에, 거기 있게 어떻게든지, 처음엔 아마 거 총각이었을 때 알았는데 그 누굴 하나, 그 아가씨를 하나 소개해줄라고 그랬던 가봐. 근데 나는 뭐 정해논 사람이 있으니까 그건 틀렸지만 이양반이 이자 나, 해서 나는 결혼을 해야 되고 하니까 나는 세례를 받은 거에요. 세례를 받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큰일 났을 거 아니야. 장자라는 놈이 어떻게 하더니 사돈 장인, 이건 절대 안 된다 하셨어. 그래도 그런 거 보믄 우리 선친이 상당히 완고하지만 진보적인 데는 있었던 것 같애. 끝까지 뭐 반대하시고 한번 안 된다고 하시는데 내가 말을, 그거는 안되, 그거는 양보를 안 한거에요. 내가 의사된 거는 양보를 했지만 이거는 양보 안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가지고 결혼 하는 걸로 하니까 그 뭐 그냥 묵인 하신 것 같애. 묵인하셨는데 그래가지고는 그 아이들을, 내 개인 역사가 너무 많이 들어가네. 근데 나중에 동생들한테 들으니까. 이 양반이 술을 좋아하신다고 그랬잖아. 술만 하시믄 이 양반이 우시는 거야. 그래서 친구분들이, 술친구들이 많으신거야. 그때 자식이, 아들이 미국 간다 그러니까. 김선생, 자식 버린 줄 아시오. 미국 가서 돌아 안 온다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 분보고 하는 얘기가 내가 몰라도 딴 놈은 다 안와도 내 새끼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다. 이렇게 한거야. 그걸 내가 배반한 거지 면담자 : 그 67년에 인제 들어오셔서 뉴욕에서 학교를 다니시, 그, 학교를. 구술자 : 아니지 67년에 와가지고 오자마자 그건 내가 얘기해야겠네. 오자마자 여긴 인턴, 인턴으로 오거든. 인턴으로 왔는데 인턴 제일 먼저 시키는 데가 어딘지 알아요? 응급실입니다. 응급실인데 그때는 32시간을 계속 근무를 해요. 상상도 하기 힘들제. 32시간이라는게 4시부텁니다. 초번, 저녁번, 밤번, 초번, 아침번. 아침번, 저녁번 밤번, 이렇게 8시간 8시간 8시간 네 개를 하는 것 같어. 세 교대를, 네 교대를 계속 근무하는 거에요. 그게 인턴이야, 인턴. 그게 미국 와가지고 의사들 참 호강하는 것 같지, 이건 완전 지금 저 히스패닉들 와서 일하죠. 한국에 이주노동자들 일하는 게 있죠. 그게 맞먹는 거에요. 내가 한시간에 얼마 받았냐면 68전. 그 시대에. 67년에 내 월급이 식스티에잇 센츠야. 내가 계산을 해봤어. 24시간 곱하기 네 배를 해가지고 한달에 받을 봉급을 나누면 한시간에 얼마 나오는지 알잖아. 그렇게 계산하니까 68전이더라고. 그게 뭔말이냐면 미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교육, 돈 들여가지고 혈세 가지고 교육시켜서 없는 나라들, 제 삼세계 국가, 소위 말하는 제 삼 국가에서 교육시켜논 거를 데려다가 싼 임금으로 부려먹는 거에요. 그게 미국, 그게 미국의 노동 정, 노동 이민 정책이에요, 그게. 그 우리는 막 신난다고 좋다고 와가지고 그게 우쭐해가지고 말이에요. 야, 내가 미국 교육 받으러 간다고. 그래가지고 환자들이 얼마나 죽은줄 알아요? 그냥 해도 스트레스가 보통 스트레스가 아닌데 32시간을 계속. 완전히 이거는 몽유병 환자들이야. 그러니 그게 무슨 환자를 치료하고 그래요. 사람들이 막 죽는거에요, 그냥. 그, 그러고 내가 정신없이댕길 때 누가 죽었냐면, 암살된 게 로버트 케네디 암살, 그 마틴 루터 목사 암살, 그게 전부다 내가 인턴 생활을 32시간 씩 계속 근무할 때 일어난 일. 이게 꿈속에서 일어난 것 같애. 멍한 속에서 뭐 누가 총맞은갑다 TV 중간중간에 졸면서 보면 TV나오고 댐지 클락 그 법무 장관 나와가지고 발표하는 거 내가 꼭 잡는다 뭐 어쩌고. 그래가지고 내가 여기 이자 우리 아버지보다 민족주의자라 그러는데 민족의식이 내가 살기, 뛰기 시작한 거에요. 이게 미국에 교육받으러 왔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내가 중노동만 하고 있고. 그러고 미국 역사에 대해서 친, 이전에는 내가 친미주의자였을거 아니에요, 미국, 미국 숭배하고. 보수주의고. 나는 그래도 우리 웃대야 어떻게 살았든 뭐 편안하게 살고 교육도 최고 교육 받았고. 이르니까 뭐 그런데 의식이 있을 리가 없거든. 근데 내가 친미주의자를 만들려고 생각한 게 반미 주의자를 맹근 거야. 가만히 보니까 한국전쟁 전쟁 간거 까지는 내가 아직 잘 모르, 어쨌는지 모르겠지마는, 그 전쟁 일어났던 얘기까지 하믄 또 그게 나오지만. 중미 정책이니 남미 정책 이런거 보니까 이상한거야. 이 사람들이. 큐바 이것도 이상하고. 큐바에서 내가 미국 역사를 전혀 말해서 미국에서 내가 안 것은 뭔고 하면 서부 활극 보고 미국 역사를 알고 있었거든. 인디언이라는 놈들이 이게 야만인들이 막 사람 가죽 벗기고. 이게 가만 보니까 백인들이 가죽을 벳긴 거여, 그 사람들이 벳긴거. 그러고 그 사람들 조약이라고 맺으면 아무도 지킨 일이 없고.. 조약, 요것만 니그 사인하면 거기 살게 할게, 사인하면 또 나와. 또. 밀고 나와가지고 저기 밀려간게 동부에서 시작해 가지고 남부로 내려가고 서부로 가고 그 다음에 태평양 건너가고 비행기 가고 한국가고 월남가고 이렇게 한 겁니다. 그거를 내가 나중에는 알게 됐어. 어쨌든 한국 전쟁 때 그 일어난 거는 그 우리집이 다 탔고. 내가 폭격을 두 번 맞았어요. 미군 폭격. 왜냐면 포항에서 멀지 않은 후광리에 우리 고향이니까. 그니까는 우리,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 데에서 그피난 갔을 거 아니에요. 청하로. 우리 소위 문중 집성촌으로. 우리 큰댁에 큰댁에 집이 크고 좋거든. 거기 가서 우리 아버지 이자 병원 기구며 뭐 약품이며 뭐 재산 옮길만한 거는 우리 백부님들 종부님들 큰아버지들, 우리 사촌들하고, 우리 사촌들은 전부 농사꾼입니다. 우리 아버지만 나왔으니까. 그분들이 소하고 뭐하고 구르마 하고 해가지고 전부 실어다. 옮겨놨거든 그 집도 타버렸어. 폭격해가지고. 우리 집 탄거 그거는 끝나고 난 뒤에 와서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됐고. 이걸 할 적에 여기 인자 갔을 거 아니에요? 그 처음에는 인자 갖다 놓고 이렇게 했는데 소위 인민군들이 와서 그 사람들 그 해방지구가 됐으니까, 점령지구, 빨갱이들이 점령했는데 나만 가만히 보니까 거기서 잡아가는거야, 짐지는거. 그사람들도 짐지는 사람 있어야되니까. 잡아가니까 숨어야될꺼 아니에요. 내 동생들은 다 어리니까 안 됐는데 나하고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또 반동으로 몰려가지고 해를 당할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러지? 그 의사였으니까. 의사는 무조건 반동이거든. 그 사회에서. 그래가지고 산에 굴을 파 만들어가지고 저희 아버지하고 둘이 있는거아. 낮에는 거 앉아있다가 밤에는 나오고 .한번은 근데 재미난게 우리 문중의 팔촌, 팔촌이면 삼형이제. 팔촌 형이 거기 옛날 그게 빨치산 알지, 빨치산, 거기 태백산 있는 그쪽에, 거기서 뭐 빨치산 뭐 그 무슨 최고 지휘자는 아니었겠지만 그런 간부하고 뭐 이런 거에요. 그리고 또 빨갱이도 있고 집안에. 어디든 다 있었제. 그래가지고 인민군들이 들어갔을 때는 거기 인민군 소위 부역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그 집안을 보호하고. 지나가고된 뒤에는 또 이쪽에 반동들이 보호하고 이렇게 해가지고서 보호해가지고 살아남는 거야. 근데 폭격당하는 장면을 얘기를 할게. 부상을 했어, 기총소사(항공기 기관폭격)에 맞아가지고. 이게 융단폭격이라고 그럽니다. 융단폭격이라는 게 큰 폭탄으로 터뜨린 것도 있지만 기관총가지고 다 해가지고 카페트가 있으면 그 카페트를 말듯이 하는 것도 되지만 이 바닥이 말이죠, 어떤 간격을 두고 밭고랑 갈 듯이 이렇게 갈아버려요. 그러믄 그 사이에 있지 않으면 이건 죽는 거야. 그래서 내 동생이 그, 바로 아래동생은 어디가 있었는지 모르고 우리 그 저, 그 집성촌이니까 전부 집안들이거든. 우리 아버지 형제 집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인제 흘어져 있는데 하루는 여기서도 밥먹고 저기서도 밥먹고 대니다가 그날은 그 산 바로 아래에 큰 아버지댁에 가서 있는데 갑자기 공습이 왔는데 무슨 공습이 오느냐믄 군함 하나 있지, 군함 하나. 함재기. 그 동해안에서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배들이 그 함재기가 있으면서 거기서 배가 떠가지고 와서, 그 사람들은 전투도 하지만 폭격도 하고. 전폭기라 그래요 함재기가 군함 하나 전폭기가 와서 폭탄을 이렇게 달고 옵니다. 두개 양쪽에 날개 밑에 달고 와서 타게뜨(target)에 와서 놓으면 탁 와서 폭탄이 터지거든. 근데 그게 터지면요, 이렇게 웅덩이가, 큼지막한 웅덩이가 파져. 그그그 우리 그 집안 청하 그쪽 동네에 우리 고향 동네 논에 그냥 그게 확 파지는데 내가 기억이 나는 게 막 도망을 가는데 집 뒤에 와서 터뜨리는게 파졌는데 내가 보니까 불기둥이 하늘 위로 치솟아 가는데 소리는 안 들려. 그 내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거든. 소리가 안 들려요. 소리는 안 나는데 이것만 올라가는거야, 확. 근데 그거를 해가지고 그 동네에서 부상자가 뭐가 났냐면 우리 노인 할머니 한분 돌아가시고 소 한마리 죽었어요. 인민군이라고는 구경도 못하고. 근데 산을, 그 시골에 그 동네가 어떻게 되있냐면 산이 이렇게 있으면 이 산을 둘러싸고 여기 동네 하나 있고 여기 동네 있고가면서 여기도 있고 가면서 있거든. 하나씩 하나씩 폭격을 해요. 그 비행기들이 낮에는 그 소위 제트기가 나와가지고 전쟁 도중인데 이북 사람들, 이북 인민군들은 쌕쌕기라고 그러대? 쌕쌕기, 그러면 전부 그냥 병아리 그 솔개, 솔개 오면 병아리 확 흩어지잖아요. 그 식으로 이렇게 흩어져야되. 근데 이 폭탄을 하루는 해서 내 동생 하나하고 둘이 이렇게 서로 안고, 그 어렸을 생각에 말이야, 여기가 이렇게 조금 두텁잖아요. 그래 문을 열고 문지방 위에 둘이 앉았다고 왜냐면 우에서 이렇게 내려오면 저게 좀 두께가 더 있으니까 이렇게 프로텍션(protection), 보호가 더 될거라 해서 방버리고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데 그 떨어지는 순간에 칠흙 같이 깜캄해져요. 그 있는 먼지하고 뭐하고 하야가지고 그래가지고 그게 가라앉으면 겨우 인제 사람이 보인다고. 그래 그래가지고 내가 내 동생하고, 그 동생도 인자 80 다 되가지마는. 그 동생이 나중에 그 극본, 드라마 지금은 유명해졌지만 한 2,30, 25년 30년 전에 드라마 초창기에 그 인기 있던 작가였는데. 그 동생하고 나하고 이렇게 앉아있는데 비행기가 지나가고 폭격이 끝나고 일어나서 나가야될텐데 나갈려고 하니까 내가 발을 못 서겠는 거에요. 아파가지고. 떨어져나간 듯이 아퍼. 그래 난 그래 보니까 피도 안나. 그런데 내 동생이 이렇게 손을 그 내 무릎에 있는데 아 거기서 피가 확 나는 거야. 내 동생 손에서. 걔가 요렇게 있었는데 여렇게 지나갔는지 어쨌는지 걔가 여기가 이렇게. 나는 보니까 이거를 타고 그냥 스치고 지나갔는데 불 기운 때문에 이게 해가지고 올이 보여. 근데 속에는 그냥 조금 빨개지고 다치질 않았어. 내가 그래, 조금 있으니까 그 아픈게 없어지고 그때사보니까 그렇게 된거야. 그게. 그래가지고 내가 그 악몽이, 전쟁 끝나고 난 뒤에 폭격당하는 악몽이 한 6개월 내지 1년 계속해서 있는 거야. 그게 인자 그 요새말로는 인자 포스트트로매틱 스트레스 디스오더(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라고 PTSD라고 이름 붙이는 게 있죠, 그런 거에요, 말하자면. 그게 인제 전쟁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인제 그러고 난 뒤에는 어, 그 전에 그 전에 그 바닷가에 피란했어요. 동해안에. 포항 북편으로 영덕으로 저 가면서 해안가에. 거기 지금은 유명한 해수욕장이지만 거기에 피난민들이 다 뭐 내륙에 있던 피난민들이 전부 왔어. 그 안에 있으면 또 폭격을 안하는데 너희들이 흰 옷을 입고 거기 가서 노출되 있으면 그 미국 그 군사 전략으로 그렇게 한 거에요. 왜냐면 그 인민군들하고 이렇게 분리해 놓을라고. 양민들 보호한다는 것도 있었겠지만 분리를 해서 이 사람들을. 그래가지고 우리가 여기 먹고 자고 물가에서 생활하는 거에요. 여름 내내, 그 땡볕에. 개까지 데꼬 가가지고. 개는 나중에 잡아가지고 다 먹어뻐렸지만. 하고 있는데 저 동해안 동해안 수평선에 배들이 있어요, 미군 배들이 저기 우리 시야 끝까지 이렇게 어떤 간격을 두고. 완전 제압한 거지. 새나갈 틈이 없어. 그래가지고는 (레코더 지칭)또 다된거에요 그게? 면담자 : 쪼끔, 시간 한 오분 정도 있는거, 있는 거 같습니다. 구술자 : 예. 그래가지고는 함포 사격을 해, 밤에. 낮에는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하고 밤에는 소위 함포사격을 합니다. 함포사격을 하는데 그 위력이 어떻게 셌냐면, 저 먼데서 포 쏘잖아요? 포 쏘면 우리가 알아 캄캄하니까. 확 이렇게 하면 개미 지나가는 것까지 다 보여. 그 먼 거리에서. 그렇게 밝아요, 그게. 내가 지금 생각하기에는 아마 소이탄, 조명탄을 쐈던 것 같애. 소이탄이 아니고 조명탄. 그 조명탄을 했는지 써치 라이트를 했는지 그건 모르지만, 번쩍 하면 그 다음에 이렇게 긴장을 해야되. 왜냐면 소리가 나거든. 한참 후에 천둥벼락 치는 소리도요, 그렇게 큰 게 없어. 그 후닥닥 그냥 나가 자빠질 정도로, 어리니까 난 더군다나 난 뭐 그때 틴에이져, 16에서 17세고 우리 친구들은 학교는 또 가고 그랬으니까. 후다닥 놀래. 어린애들 다 울고 개도 짖고 생 야단법썩이 나는 거야, 그 하나 땜에. 그걸 밤새도록 합니다. 근데 거기에서 첨엔 잘 수도 없지. 나중에는 뭐 그걸 해도 자고 안 해도 자고 이러는데. 그렇게 하다가 어느 날 어떻게 된고하니, 봤더니 해안가니까 저기까지 보일거 아니여. 아 저기서부터 폭격을 해가지고 내려오는거여. 해안가에 있는 사람 거 있으면 보장해준다고 그랬는데 폭격을 하는 거야. 그 사람들 얘기는 뭔고 하니 인민군들이 거기다 흰옷을 입고 섞였다, 이거야 근데 우리야 내가 보기엔 인민군 본 일도 없어. 근데 마냥 하는 거에요, 어디 있었겠지. 왜 안없겠어요. 그래가지고 양민들을, 양민들도 폭격하고 그냥 그 개, 돼지취급한 건요, 이거 어디 보호하는 것도 되지만 가축한테 하는거 같이 핸거거든. 그게 하여간 어쨌든 고맙기도 하고 이가 갈리기도 하고. 하여튼 그때 폭격해가지고 척 내려와서 그이상 못있어써 더 산으로 또 들어간 거에요, 그때. 그니깐 나갔다 들어갔다 여름 내내 그 지경 하고 있는거야. 면담자 : 미국은 인제 오셨을 때 인제 선생님 인턴 생활 하시면서 좀 그런 이민자 정책에 대한 그런 미국의 그런 것들에 대해서 환멸같은 것도 좀 느끼고 아, 이게 아니다, 하고 그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께서 약간 친미성향의 그런 걸 가지고 계셨다면 그때부터는 좀 인제 그런 의식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고. 구술자 : 그때 내가 폭격 당하면서, 폭격당하면서. 인민군 왔을 때 보니까 사람 잡아가기도 하고 그러고 하는데 말할 때도 해라(해라체)를 안해, 인민군들이. 그래서 그때 보면 소위 반동이라고 그러는, 우리 동네에도 잡혀가서 총살 당한 사람이 몇 있습니다. 우리 그 마음에서도. 근데 우리 선친도 잡혔어. 근데 잡혔던 그 소위 치안대라 그러는 면담자 : 선생님, 잠시 죄송합니다. (TAPE 교체) 구술자 : 폭격당하면서 생각한 게 그때 내가 경험했던 이북 군인들하고. 이런 게 어떤 내 속에 의심을 가지게 했던 거였어요. 그거를 내가 그냥 애써 기억에서 지워뻐리긴 했지만 그게 씨가 됐던 게 나는 있었다고 생각해. 왜냐면 그 사람들이 못된 짓도 많이 하고 했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런 게 별로 없었던 거에요. 그러고 그 사람들이 완전히 아직 완전히 되기 전에 쫒겨가버렸거든. 그러니까 더 오래있고 그랬으면 어떤 걸 봤을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군대에서 그 부패했던거 본거 이런 거하며 그 다음에 미군한테 폭격을 당하고 그 그것도 한번 두 번 아니고 내가 죽을 뻔 했던 거 생각하면 악몽 꾸던 거 생각하고. 미국에 처음 미국와서 내가 경험했던 거 중에 내가 인종 차별 당한 거 이렇게 해서 그런게 아마 그 내가 애써 내가 의식에서 지울라 했지만 그 밑바닥을 형성하게 됐던 거는 부인 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회의를 가지기 시작해서 아, 그 미국 사람들이 중미 사람들한테 하고 남미사람들한테 하는 거 이걸 보기 시작하면서, 다시 그 월남전에 대한 것도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전쟁 일어났던거 이거에 또 내가 회의를 가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이런 여러 가지. 그 다음에 일어난 뭐 이거 미국의 소위 세뇌정책, 뭐 이렇게 소위 프론티아(frontia) 정책, 프론티아 정신이란 게 좋은 거 있죠, 그건 뭐 언제든 그건 양면이 있으니까. 그렇지마는 그거는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볼때는 좋은 거지만 당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는 거는 이건 침략, 침략 정책이거든, 완전 침략 정책이거든. 자기들 확장해 나가고 침략해나가는게 그게 바로 프론티아 정책이에요. 그래서 그 이제 내가 어떤 그 윤한봉선생이 와가지고 씨를 이렇게 던졌을 적에 그 뭐가 아무것도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애. 그 전에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내가 뭐 우익이고 뭐 친미주의자고 이렇게 이런 사람이었지만 아마 그 생각을 설명하라고 그러면 그런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거에요. 그러고 또 6.25 전쟁 났을 적에 우리 외삼촌이, 큰 외숙이 만주로 가셔거든. 옛날에, 젊을 때. 근데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 그니까 그 인민군 고급장교가 되가지고 죽은 거에요. 그, 나는 만나질 못했어. 근데 시골에서 보니까 우리 외숙부가 세 사람 더 있는데 아 그 사람들이 이제 인민군 고급장교 가족이니까 뭐 해가지고 인민 위원회 뭐, 거기 점령됐었을 적에 감투 씌우고 뭐 이거 허수아비 된 거에요. 이 양반들이 무슨 뭐 의식 있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가지고 소위 수복되고 난 뒤에는 아주 엉망진창이 되버린 거에요. 우리 외가집은. 외삼촌 인자 그분들은 다 돌아가셔버리고, 나보다 2년 위에, 그분이 그러니까 한국 연세로 85세, 그 분만 살아계세요. 우리 어머니 형제 중에서는 그분만 살아있는데 그 외삼촌, 큰 외삼촌, 나중에 얘기 들은거. 뭐 이런 거 그 외삼촌은 이제 돌아가셨어. 면담자 : 선생님, 그 미국 오셨을 때 그 생활하셨던 이야기를 이제 좀 중점적으로 좀 말씀을, 질문을 좀 할까 해요. 그니까 인제 67년에 오셔서 인턴 생활을 이렇게 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이후에는 또 어떻게, 활동, 인턴 생활을 언제까지 하셨고 그 이후... 구술자 : 1년, 1년이차는 인턴이고 3년차는 인자 레지던트, 수련. 면담자 : 레지던트 생활은 좀 어땠습니까? 구술자 : 수련의 정신과 수련의산데, 정신과, 나는 정신과를 원래 정신과를 하던 사람이니까 뭐 쉬운 거죠. 왜냐면 난 한국에서 전문의였으니, 전문의였으니까 지식부터 내가 같이 하는 수련의들보다 훨씬 앞서있고. 그거는 이 뭔가, 인턴같이 그렇게 혹독하지가 않애. 할만 해, 할만 해요, 그거는. 월급도 좀더 많아지고. 그래도 뭐 우리가 사는 데는 소위 여기 웰페어(wellfair), 복지, 그 국가 보조 받고 사는 사람들 사는 그 아파트에서 살으니까 옆집 사람, 그 빈민들 사는데에요, 사니까 사람들이 의사라고 그러니까 나는 일하러 가고 없으믄 부인은 말도 잘 못하는 아가씨가 자기 남편이 의사라고 그러거든. 의사라고 믿기가 힘든거야. 자기들 그 정부 보조받아가지고 사는 사람 집에 살고 있거든. 뭐 그렇게 사는 거여. 그렇게. 그렇게 살면서 그것도 우리가 올적에는 이민으로 온 게 아니거든. 법적 지위가 이민이 아니야. 임시 체제하는 사람으로 왔기 때문에 돌아가게 되있어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칼쳐럴 익스체인지 비지터 비자(Cultural Exchange Visitor Visa)라고 그래가지고 칼쳐럴, 문화, 익스체인지, 교환하는 비티너, 방문자 비자라 그래요. 그거부터 말하자면 뭐냐면 저, 저임금으로 일하다 가게 하는 그런 제돕니다. 지금 그걸 오바마가 행정명령을 해줄라고 그런 것도 공화당이 하는 거는 그거거든. 일하다가, 한 10년 일하다가 법적 지위는 절대 안 되고 투표도 할 수 없고 여기서 못살고 나가라 손님, 게스트(guest), 게스트로 있다 가라, 이거 지금 하려고. 그게 철, 지금도 그게 계속 하고 있어요. 쪼금, 옛날같이 그렇게 내놓고는 할 수 없는게 그래서 이걸 보면요, 이게 환히 그냥 다 보여요, 그래. 그래 지금 여기 이주노동자라는 게 뭡니까. 그게 바로 노예지 노예. 옛날에 흑인들 하고 뭐 노예 하던 거, 몇 세기 후에 그 노예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다 노예제돕니다. 그 사람들 인권도 없죠. 면담자 : 선생님 그 67년도에 인제 들어오시고 68년부터는 레지던트 생활을 이곳에서 계속 하셨다고 했는데 그때 당시 뉴욕에서 좀 한인들이 어느 정도 좀 거주했는지 기억하시나요? 구술자 : 한인들이 길가다 한인들을 만나면, 뉴욕 시내 와서, 어우 반가워가지고 인사를 하고 막 이렇게 어떻게 오셨냐 뭘 그렇게 할 정도에요. 그리고 뭐 음식점 같은 거는 내가 미국 처음 와서 60년대에는 시대에 딱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 있었는데 그건 이내 없어지고 또 그것도 뭔고 하니 나중에 봤더니 여기 그 박람회 할 적에 한국 뭘 하러 와서, 아주 낯선 사람이지. 와서 했던 사람이 하다가 뭐 한 그런거. 그때 왔을 때는 내가 롱아일래드로 왔다고, 바로 롱아일랜드로 간 거에요. 그 나소 카운티(Nassau County) 라고 그러는데 그기 군립병원 인턴으로 갔는데 거기는 인자 국가 공무원, 카운티 자치 단체 공무원으로 온 겁니다. 공무원으로 오니까. 여비도 하나 못 받았어. 미리 딴 사람들은 개인병원이나 이런 데는 대학병원도 그러고 다 미리, 비행기 표도 다 돈을 미리 선불로 줘가지고 나중에 갚게 하고 그랬는데 나는 어떻게 했는고 하면 올적에 그 전혀 돈이라고 없어요. 그리고 내가 미국 와서 그 1년 4, 14개월 있으면서 모은 돈을 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그 피아노를 하나, 허름한 피아노를 하나 사가지고 피아노 교습을 했어. 음악, 음악을 전공했거든. 그래서 우리집사람은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살아간거야. 내 월급 생활한게 아니고 어떻게 생활했냐믄 진해서 피아노 교습을 해가지고 생활한거야. 그러니까 애도 못보고, 볼 수가 없어가지고 우리 큰 아이는 우리 어머니한테 맡겨 놓고, 포항에다가. 진해에서.. 그렇게 살았어. 그, 그래서 여기 와가지고도 이자 음악 뭐 레슨 받아야된다고 무슨 시내 그저 이름 좀 있는 의사 사는데 피아니스트한테 나는 그리고 레지던트 할 때부터 이자 똥차 하나 사가지고 몰고. 그때 2천불 주면 차 샀어. 새차도 이천불 줬어. 그거가지고 그 차도 10년 씩 부서지고 뭐 해고 바꾸고 해가지고 똥차가 됐는데 그, 그것 타고 댕기믄 애들이 챙피해가지고, 밤낮. 동네 사람들이 그 낮에 한국학교라는 걸 우리가 설립했는데 60, 70년대 중반에 애를 났을 거 아니여. 그래 저 정신이 났어, 좀 우리가. 그전에는 먹고 살고 잠자기 바빠가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거야. 근데 어느날 보니까 먹고 살만도 하고 이자 한숨 쉬고 보니까 야 이거 어떻게 된거야. 이렇게 된 거에요. 우리 아이 새끼들 이거 우리 아부지도 야만 교육 하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우리 말도 집에 있을 때는 우리말 배우더니 할머니도 없고 이러니까 학교만 나가면 우리말을 안 하는거야.애들이 그거 딴 사람들은 에이, 부모들이 시원찮아가지고. 중국 사람들하고는 일본사람들은 다 자기 애들 자기말 시킨다는데 조선 놈들 한국 놈들은 꼭 자기 애들 말도 안 알킨다, 이런 얘기도 듣고 챙피하기도 하고. 근데 그건 사실 아니야. 그건 같이, 그 백인 사회로 들어가서 못 살고 자기들끼리만 살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서, 말이라는 건 필요해서 배웁니다. 필요가 없으면 절대 안 배웁니다. 말이란 건. 필요가,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사는 애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말을 못하니까 필요가 있어서 우리말을 배워요. 그걸 깨달았어. 애들 필요가 없는데 억지로 시키는 이것은 말도 안 된다. 그래가지고 하다못해 말을 못배우더라도 영어로라도 우리 과거라든지 문화라던지 전통에 대해서 너무 모르면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뜻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 모여서 롱아일랜드에서 최초로 한국 학교라는 것을 세웠습니다. 뭐 해가지고 그래서 선생도 하고 이사, 이사, 이사 노릇도 하고. 면담자 : 한국 학교를 만드시고 선생님을 따로 초빙한 게 아니고 선생님께서... 구술자 : 선생님 초빙 안 하고, 돈을 줘야되니까 돈 줄 돈도 없고 할 사람도 없고 또 나만큼 거기에 대해서 의식이 있는 선생도 없고, 그때. 그래서 우리끼리, 학교를 설립한 사람들이 선생도 되고 교장도 하고 다 한거야. 돈도 우리가 내고. 나중에 인자 등록비는 조금씩 받고 이렇게 해가지고 뭘 했냐믄 공립학교, 미국 공립학교 시골에 있으면 주말에는 거기 비었잖아요. 그사람들 돈을 주고 우리가 학교를 빌렸다구요. 그래가지구 그걸 했어요. 그래서 토요일날 아침에 했습니다. 면담자 : 그 한국 학교를 만드신 게 언제였나요? 구술자 : 그게 육십, 칠십육년. 면담자 : 학생수가 대략 얼마나 됐나요? 구술자 : 그때 얼마나 됐냐, 하도 오래 돼가지고 기억도 안 나고 그런데 지금 그 학교가 아직 후신이 하고 있어요. 면담자 : 아, 지금도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까? 구술자 : 하고 있어. 나는 관여를 안 하지. 면담자 :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겁니까, 지금까지도요? 구술자 : 한국 아이들. 면담자 : 지금까지도요? 구술자 : 그럼. 지금까지. 그냥 한국. 그니까 그때 낮에 우리가 그래서 그 여기 온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거 설립하는 사람들도 예수 교인들이 대다수에요. 그래서 학교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하는데 한글학교, 뭐 그리고 어디다 세울 거냐. 교회 안에다 하자. 절대 반대한 거에요 우리가. 그래서 한국 학교는 교회 안에 세우면 안 된다. 교회 안에 세우믄 이게 그 부속물이 되요. 그리고 선교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기가 쉽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할라고 그러믄 우리가 재정적으로 힘이 들드라도 한국 학교라고 이름도 한국학교라고 짓고, 한글 학교는 왜냐면 우리가 말만 배우는게 아니다. 말 아리키는 데가 아니고 더 포괄적이기 대문에 한국 학교로, 뭐 이런 토론을 막 하고 해가지고 설립하는 데에 오래 걸렸어요. 이 회의를 여러번 해갖고 싸움도 하고. 의견이 안 맞을 거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나중엔 막 다수결로 막 하고. 치고 받기도 하고 막 이케 했다고. 사람 모이믄 거 꼭 의견이 맞지 않해. 그래가지고 인자 했는데 그거 설립할 때 같이 주동했던 사람들중에 하나 요즘 보니까 신문 보니까 죽었더라고 그게 누구냐면 변영로, 예전에 외무장관 한 놈, 수주 변영로. 그 후손입니다. 아들, 조카. 그 사람도 같이 짓자. 그사람 인제 기독교 이자 이렇게 해가지고. 나는 교회 댕겼지만 그 땐 교회 댕겼으니까. 교회를 내가 한 25년 댕겼어. 나중엔 이거, 이거 안 되겠다 졸업해야겠다, 내 말을 졸업이란 말이야. 예수교 졸업했어.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 참 형편없는 적그리스도라 그러고. 우리집 우리 처갓집안은 전부 기독교인입니다. 목사도 있고 전부 장로고 이러는데 그러니 못마땅하지. 지금은 쪼끔 인제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아요. 왜냐면 한국의 기독교가 극도로 부패한게 누가 봐도 알게 되버렸 거든. 그래서 생각들이 조금 바뀌어. 뭐 기독교인은 내가 싫어하는지 모르지만. 하튼 그렇게 해서 한국 학교를 세워가지고 내가 가르킨 거는 역사. 내가 역사공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이자 관심이 많으니까, 역사. 사회. 카란 이벤뜨(current event) 그 뭐야 현시국에 대한 것, 우리 전통 풍습, 문화 풍습에 이런 것, 그런 걸 내가 아리켰어요. 그리고 영어 뭐. 그러다가 이자 70년대 말에 박승배 교수라고 불교 학자가 있습니다. 그 상당히 알려진, 세계적으로 알려진 학자에요. 지금 스토니브룩에. 그분이 나와 동갑이에요. 80 계유생, 닭띠. 동갑인데, 그 양반이 인제 광고를 냈어요. 신문을 어느 날 봤더니. 스토니브록(Stony Brook University) 뉴욕 주립대학에 한국학과를 설립한다, 창립한다 이런 게 나왔어요. 그러면 내가 귀가 번쩍 뜨였을 거 아니에요. 그이자 그때는 민족주의 자처하고 할 때니까. 민족 교육 한다고 그러니. 그래서 이자 전화를 했어. 그분한테 그 신문에 전화번호가 나왔을 거 아니에요. 뜻있는 사람은 연락해서 우리 도와주길 바란다고. 왜, 우리 롱아일랜드 사는 동포들 중에 뜻 있는 사람이 인제 전화, 전화해서 얼마 기부하겠다는 프레이즈(phrase: 광고)를 한거에요. 내가 그 알고 봤더니 내가 프레지1호야. 닥터 신분이었는데. 어떻게 그때 1호였습니다. 1호였는지 2호였는지는 뭐 알수 없지만 그 양반이 그래. 그래가지고 그때 그 내가 천불 기부하겠다고 인자 프린트 했을 거에요. 그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 모금운동을 하는데 인제 두가지를 합니다. 한국 학교, 관련하고, 모금운동을 해가지고 한국학과를 맹글고. 그 한국학과가 인자 된지가 오래됐지. 거기서 박사학위도, 박사도 배출하고 지금 탄탄하게 인자 되어 있습니다. 그분도 이자 그 학과, 한국학과 디렉따(Director: 학과장)를 그만 두시고 그다음 한분이 후임이 와서 한지가 벌써, 그분도 테뉴어(tenure: 종신교수)로. 영구직을, 영구직이 됐어요. 그거 하는데 우리가 그자 애를 많이 썼죠. 거기 와서 지나가신 교수님들도 있고. 거기 다녀, 이자 하면서 우리가 그 내 뿌리 공부해야 되겠다. 아이들도 하고 학생들도 하고. 고 다음에 우리 이런 거 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전통에 대해 공부 좀 하자. 그걸 또 그때 동시에 시작했어요. 그 70년 중반부터. 그래가 지금 오래 한 거죠. 그래서 여기서 지금 한 달에 한 번씩 넷째 금요일 날, 우리가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하는데 어떻게 공부를 했냐믄 처음에는 2000년도까지는 비정기적으로, 거기 오는 방문학자들이 한국학과니까 한국학과하고 관련 없는 교수들도 오시지만 대부분 관련있는 교수들이 오시거든요. 그믄 그분 전공하는 과목에 대해서 여기 와서 강의 강연, 강의를 하시라고. 그때는 대중강연으로 크게 해서 뭐 공공장소에서도 하고 교회 같은 데서도 하고 뭐 이렇게 음식점에서도 하고 개인 집에서도 모여서도 하고. 이렇게 좀 해오다가 2000년부터 내가 그걸 맡으면서 내가 청년학교에 관여를 하기 시작하면서 여기 빌려가지고 여기 방에서. 그렇게 하믄 어떻게 몇가지가 됐죠? 한국학교하고 요거 세가지하고. 그 인제 80년, 84년에, 어 80년도에 1980년에 그니까 이자 그거 그런 거 쫌 할때죠. 그 정치적인 건 안 했지마는 그 민족적인 의식 이런 거 이자 할 때 한국에서 이자 일이 터진 거에요. 그런데 광주에서 사람을 무진장 학살했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연락이 왔어. 우리 그 같이 하는 한국학교 선생이 한테서 김선생님, 이거 우리 이거 뭐 어떻게 된건지 한번 가서 알아봅시다. 시위를 한답니다,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 했더니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답니다, 이래. 군사 구테타를 일으켜가지고. 그래서 그거 가봐야지, 내가 여기서 이자 그 그런거하고 관계가 없는 그 시위를 나간게 더러 있는데 어쨌든. 그걸 어디서 했냐면 맨하탄에 중앙도서관 층층대가 있습니다. 그 앞에서 했어요. 가서 봤더니 대부분 다 호남사람들이야. 호남, 그때 호남향우회라는게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하튼 호남 사람들이 중심이 되가지고 자기 연고자들도 있고 뭐 당연히 그럴거 아니요. 뭐 경상도 사람이 몇 사람왔는가 이런 건 내가 조사해보지 않았고 뭐 알바도 아니고. 그렇지만 거기 사람들이 주동이 되가지고 광주 분들 출신, 전남 출신 이런분들이 중심이 돼서 아마 했던 것 같애. 그, 나한테 연락 한 분도 광주 분입니다. 여자분인데 지금도 그렇게 가깝게 지내요. 지금은 DC에 가 계셔. 여기 우리 공무원인데 오다가 이사를 간 지가, 금년 초에 갔어요, 이사를. 하튼 그랬는데 한명자씨라고 그분이인데. 거시 가서 얘기를 들어 와, 막 야단 났을 거 아니에요. 누가 이거 가져왔는데 이거 과녁에다가 전두환 그 대머리 벗겨진 얼굴 위에 그 조준 그거 할 때 있잖아요, 내가 군대에서 저거 말하는 우리 해군병은 뒷산에 그 사격장이 있었어, 그래서 쪼끔 알아요. 그게, 그걸 여기에따 그래 전두환 살인마, 이거에요. 그래서 처음 알은 거에요. 면담자 : 그 시위가 맨하탄 중앙도서관에서 계단에서 열어졌다고 그랬는데 그때가 한 언제쯤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구술자 : 내가 확실히 날짜는 모르겠어요. 80년대 그 해야. 면담자 : 그 무렵, 광주 문제가 있었던 때인가요? 구술자 : 무렵이야. 그 아마 옷을 입었던 게 내가 크게 이렇게 반소매나 이런 거 입은 것도 아니고 두터운 것도 입지 않았고 그해 가을이나 됐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확실히 모르겠어. 면담자 : 몇명 쯤이나 그때 몇 명 쯤이나 와서 모였나요? 구술자 : 그때 내가 보기에는 한 백, 백명 내외가 됐을까. 뭐 그렇게 많이 모이기 힘들어요 면담자 : 주로 인제 모여서 구호 외치고 규탄시위하고 그런 거였나요? 구술자 : 뭐 하튼 제일 큰 거가 살인마 전두환 뭐 이, 뭐 죽여라, 이런건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이자 차에 올라가서 막 이렇게 했지. 울분을 토하고,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그랬다고. 그렇게 해, 그때 이자 처음 들은 거야, 듣기는. 그런데 이자 쪼끔씩, 쪼끔씩 이자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중간에 어떻게 들으니까 잭슨하이츠(Jackson Heights)에 청년들이, 젊은 청년들이,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청년들이 모여서 뭘 운동을 한다고 그러더라, 이런 소문이 난 거에요. 면담자 : 쫌 이후죠, 80년에서. 구술자 : 그렇지 84년, 84년일거에요. 그래가지고 이게 인제 윤한봉씨 만나게 전이에요. 그래가지고 이자 갔어. 그 이야기 공부모임 정기적으로 하기 전이죠, 그러니까. 2000년 훨씬 전이니까. 그 공부 모임하는 어 이런 청년들 사람들 만나볼 생각이 없어. 그래가지고 그것도 내가 먼저 안 게 아니고 그 이 모금운동도 하고 하든 사람이 하나 있어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은 내과의산데. 그 사람이 그거 말해가지고 그래 내, 난 기꺼이 이자 가자 이거 갔습니다. 갔드니 청년들이 마당, 마당극을 해요. 마당극을 하는데 낮에 봤더니 그게 황석영씨가 와 가지고 황석영씨가 와서 여기 청년들을, 조직 있었어, 그 전에. 윤한봉씨 가 오기 전에 여기 그 유학온 청년들하고 지식 청년들이 모여가지고 자기들 나름대로 뭘 하나 맹글었 나온 게 있었어요. 그랬는데 거기하고 어떻게 연결되가지고 윤선생이 이자 와서 그 조직을 한 거에요. 이전에 그 느슨하게 문화 활동이나 하고 뭐 이런 거 하든, 거 봉사 활동 하든 정치적인 그걸 뭐 이렇게 조직을 했던가봐. 그래가지고 거기 가서 보니까 청년들이 하는 게 내가 마음에 들어요. 근데 갔든 사람 아무도 거기 갈 사람이 없어. 그래 내 혼자 가는 거에요. 잭슨 하이츠에 가는 거에요. 가서, 그렇게 어느 날 갔더니 황석영씨는 이름을 알아서 알거든. 근데 황석영씨가 앞에 나와서 주로 얘기를 하고 소개를 하는 거야, 누구를 소개를 하는데. 뒤에 보니까 누가 이렇게, 이렇게, 윤한봉씨가 이러고 잘 앉아있거든.(행동묘사) 이러게 안자. 그 뭐 우습게 생긴 사람 하나, 촌놈 같다 늘 사람들이 많이 표현하는 그런 분이 하나 딱 앉아 있는데 그 사람을 얘기하면서 황석영씨가 뭐라고 하니 내가, 나는 알려져 있지만 이분은 누구누구라는 분인데 조직의 천재라. 이런 얘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 내가 딴 건 아무것도 안들리, 못들었는데 조직의 천재라는 그 말만 깊이 남아있어. 그렇게 얘기를 했다고, 소개를 했다고요. 그 다음에 이자 윤한봉씨가 뭐라고 뭐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그 무슨 얘기 한지도 기억도 안 나고. 하튼 이 사람 조직의 천재를 그 얘기만 들려. 그래가지고 거기 이자 그 윤한봉씨 만나기 이전에 내가 그 청년들 그 마당극을 보고 와서 야, 그 청년들 하는 거 보니까 참 그 맘에 든다, 우리 기부 좀 하자. 이렇게 해가지고 거기 갔던 사람들 억지로, 기부를 돈을 모아가지고 내가 간거죠. 갖다, 갖다 이 기부를 이자, 한 거에요. 도네이션 한거에요. 그렇게 해가지고 이자 관계가 생긴거야. 그 윤한봉선생하고 처음 만날 때. 면담자 : 그 이후로 또 만나보셨습니까? 구술자 : 그래가지고는 거기서 무슨 그 양반 올때 마다 만나고 또 안 올때라도 청년들이 뭐 하믄 항상 가는 겁니다. 잭슨 하이츠라고.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거기가 아주 위험한 데야. 아주 가난한. 돈이 없으니까. 자금도 없고. 아시지마는 윤한봉 선생님이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와가지고 사람을 그렇게 포섭하는데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 만나가지고, 만나면 어떻게 해서 사람을 그렇게 맘을 돌려놓는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그 추모, 추모 모임에 내가 그 이자 윤한봉 선생을 만난 얘기를 써논 그게 있지만 하튼 그 마술사 같은, 일종의. 그게 어디서 그게 생길까 생각 되고 하는데. 나중에 그 우리가 공부 모임을 여기서 2000년도에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에 우리꺼를, 공부모임을 하게된 이유중 하나가요 뭐고하면 애들도 우리껄 아르켜야되고 이런 것도 있지만, 학과도 맹글었지만 처음부터 미국에서 내가 숨을 한숨 돌리고 정신을 채려서 제일 난관에 봉착한게 뭔고 하면 요 시체 말로 얘기하는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이 분명하지가 않은 거야. 사람들 물을 때도 항상 “아유 차이니즈?” 차이니즈 아니거등? 차이니즈라 그러면 우리는 중국 사람들이 자기보고 코리안이라고 그러면 아주 모욕으로 생각한다 글드만요. 우리도 어떤지 모르게 차이니즈라 그러면 모욕감이 조금 생기지, 그것, 떼놈들 뭐 이런 것 때문인지 몰라도. 근데 그리고 차이니스 아니라 그러면 아, 제패니즈 이러거든? 그럼 제패니즈라 하면 더 화가 나는 거여.그래 그것도 아니고 소, 왓알유?(So, what are you?) 그런 단 말이야. 코리안 그러면 오, 코리아, 아임 소리(Oh, Korea. I'm sorry) 뭐 이, 코리안이라 하면 흥미가 없거든. 왜냐면 그때 그 여기 사회학과 교수가 그 미국 주류 사회의 미국인들이 그린 느낀 거리감을 측정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통계 내논 게 있는데, 한국 우리 한국사람이요, 흑인 다음에 제일 낮습니다. 제일, 그 시원찮은 사람들로,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왜 그런고 하니 그, 내가 그 저 우리 아이들 학교 댕길 적에 학교에서 학부모들 데려다가 자기 반에 부모들 데려다가 그 얘기하라고 이런 프로그램들이 있거든. 그래서 나도 거기 가고 거기 가서 얘기하는데 내가 거기 얘기하는 것 중 가장 먼저 얘기하는데 뭐냐면 미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국사람이라는 게 이게 얼마나 왜곡된 건지 아느냐, 이 얘기부터 합니다. 너희가 우리를 알고 있는 건 뭘 통해서 알고 있는지 아느냐, 그러면 그 사람들 잘 모르고. 얘기해보라 그래. 그러면 그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째는 뭐냐면 선교사들이 와서 우리, 우리한테 접촉해가지고 그때 보고 가서 보고 간 거. 두 번째는 일본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두 번째가 원래 그거지. 중국사람도 거기 들어가지만. 우리, 우리를 지배하던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이 와서, 조센징에 대한 자기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항상 그래 넌, 피 지배자 고거 하나. 고 다음에 뭐 자기들도 그 부류지만 미국 지아이(G.I)들이 한국 와서 으, 이러고 댕기고 접촉하는 거는 와서 들에 나가면 똥내만 나고 접촉하는 사람은 전부 껌달라고 하는 아이니 뭐 구두닦이 아니면 몸 파는 자기들 그 성노예들. 그런 사람들을 접촉해서 온 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 게 그거다. 그러고 또 한가지는 뭐냐면 TV 프로그램 매쉬(MASH)에 나오는 그 있잖아요, 미육군 야전병. 엠에이에스에이치라 그러는. 아주 인기 좋은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엠이 밀리터리, 엠에스에이치? 매쉬가 무슨, 에이치는 하스피탈(Hospital)이고 뭐였더라, 이거 무슨, 뭐였더라, 매쉬라고 그러는데 거기에 나오는 우리꽝스러운 그 한국인, 그걸로 되어 있다고. 여기에. 그렇게 우리 그 그렇게 되있어요. 그러고 그럼 또 한가지 질문 뭐 한고 하면, 그럼 중국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한국 사람들,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 일본 사람하고 다른 게 뭐냐? 그거야. 어 나도 다른게 뭐냐 딱 대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거야. 이 뭐가 다른 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아니 한국 사람이라는게 뭐냐, 코리안이라는게 뭐냐? 그게 그 윤한봉 선생이 와가지고 이자 한국 사람이라는 말도 입장이 편향된 시각이기 때문에 차라리 코리안이란 말을 쓰자. 코리아라고 쓰자. 이렇게 그런 것도 있고 그런 얘기를 할라고 여러 가지. 교포라는 말도 쓰지 말자. 동포, 미주 동포라 그러는데 미주 동포라고 그러지. 교포라는 말도 쓰지만 이런 말 많이 들으셨으르 거에요. 그래가지고 여기 우리 이 조직에 관여됐던 사람들은 교포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거의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미주 교포이라고 그러면 꼭 이렇게 시정을 꼭 해드리고 그래요. 근데 그 그렇게 해서 그 청년들은 한청련이라는 거를 조직했지요. 와이케이유라고, 영코리안스유나이티드(Yong Koreans' United)라고. 조직하고 고 다음에 얼마 있으니까 나이가 우리가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들어가기가 곤란하거든. 윤한봉 선생이 장년들, 30세, 40세가 되며는, 30세가 되면 장년으로 쳐가지고 영코리안스유나이티드는 30세가 넘으면 조직 하나 더 했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하면서 인제 이게 조직이 여러군데 생겼 그러니까 그걸 한꺼번에 다 해서 그 전국 조직도 생기고. 전국 조직을, 여기 조직을 세우면서 전국 조직을 세우면서 나를 회장을 하라고 그러는거에요. 윤한봉 선생이. 그래 나는 이거 의식도 없고 뭐 이렇게 한 사람으로 못하고 내가 그래서 생각한 게 아, 내가 의사고 그리고 그 뭐 여기서 자영업해가지고 눈코뜰새없이 어,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보담은 조금 여유도 있고 앞에 내세우기도 남들 보기에, 어이구 의사가 하고 있어. 이러면 말하기도 괜찮고 그러기 때문에 날보고 하라 그런다 그래서 아, 극구 사양 안하고 그렇게 해서 이자 하고 이렇게 해서. 그 이년마다 우리가 그 전국 대회라는 걸 해요. 면담자 : 선생님 이 부분 제가 쫌 다시 한번 여쭤볼게요. 한겨레 동포 연합이 처음 만들어진 게 언제였습니까? 구술자 : 그게 내가 그런 그게 뭐 다 30년 전 이야기들이 되어가지고. 면담자 : 84년 정도, 84,5년 그 정도인가요? 구술자 : 84년에 청년학교가 조직이 됐어요. 84년에. 80년, 그 양반이 81년에 여기 왔잖아요. 그래가지고 그거 정지, 터를 닦는게 시간이 걸릴 거 아니에요. LA에서 제일 먼저 민족 학교가, 민족학교는 그게 이자 마당집 얘기고, YKOU이거 하고, 한청련, 그걸 하고 그게 굳어지고 어느 정도 하면서 조직의 천재니까, 그 다음해... 면담자 : 아, 한청련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한겨레 동포 연합이.. 구술자 : 그렇죠 그 후신, 후신이야. 그 이듬해 이듬해 정도가 아닐꺼야. 한 3년, 내 생각엔 3,4년 후 아니까, 90년대까지는 안되지만 87년도나 됐을 꺼야. 왜냐면 88, 88년도에 88년도에 여기서 전국대회를 했는데 그 누구요. 아이구 그분 그 성함이. 무슨 기완선생. 백기완 선생이 왔어. 백기완 선생이 나랑 동갑이거든. 백기완 선생이 왔을 때 내가 회장을 했으니까. 그때는 벌써 그게 그 전국 연합이 생겼어. 면담자 : 그럼 초대 회장이 선생님께서 하신건가요? 구술자 : 그렇지. 날보고 그래 하라고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했지. 면담자 : 한겨레 동포 연합이 주로 활동했던 내용들은 어떤 거였나요? 구술자 : 주로 활동했던 게 독자적인 활동보담도 한청련을 갖다고 서포트를 하고 우리끼리 뭐 학습회를 하고 뭐 이런, 그 청년들 뒷바라지 하고 이렇게 서포트 해주는 거를 했던 그걸 주로 해온 거에요. 왜냐믄 30, 나이가 많으신 사람들, 그 다음에 그, 원래 그 사람들이 정관을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청년, 청년회라고 할 적에 아마 상한 연령을 해놨던가. 뭐 어떻게 하니까 그 사람들이 계속해서 할려고 그러면 조직에 있고 할려면 이게 인게 필요했던 거지. 면담자 : 뭐 당시 구술자 : 35세인지. 35셀거야. 면담자 : 35세라고 하시더라구요. 구술자 : 30세는 너무 젊어. 그래서 17살부터 가입이, 한청련 가입이 가능하고 35세까지 하다가 그 이후에 한겨레로 가는. 구술자 : 열네세살 짜리도 들어오고 그랬다고. 면담자 : 한겨레는 딱히 연령 제한 같은 건 두지 않았다고. 밑으로도 연령제한이 없었다고 구술자 : 아니, 그건 한겨레 동포 연합.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은 거기로 들어가지, 한청련으로 들어갔지 아래쪽에는 나는 연령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면담자 : 아,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그때 당시 초창기에 이렇게 만들어졌을 때 한겨레 동포연합 회원수라고 해야 되나요? 한 몇 명 정도나 이게 결성이 됐나요? 구술자 : 수가, 수가 그 저, 그때 어디었었냐면은 LA에 있었고 뉴욕에 있고 시카고에 있고 필라델피아에 있고 DC에 있고. 그렇게 아마. 아 LA도 북가주에 있었습니다. 산 호세라든지 그런 곳에 도 있었다고. 상당히 여러 군데에 있었어요. 근데 그 합, 한군데 마다 10명 내지 한 20명. 20명 넘기는 힘들었을 거에요. 아마, 내가 인원 세보고 뭐 그런 거 한 것도 아니고. 면담자 : 한 백 여명이 쫌 넘는 그정도요. 구술자 : 대회를 하믄, 전국대회를 하면 다는 오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오거든요. 그렇게 해서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모여요. 그러고 미주에만 이 미국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와이에도 있습니다. 호주에도 있었고. 심지어는 그 구라파에도. 구라파에는 조금 더 느슨하게 있었지만 호주하고 카나다는 상당히 그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가지고 동포 대회 하면 그때 만나, 늘 만났어요. 그러고 특별한 무슨 일이 있으면 만나고. 예를 들믄 여기서 DC까지 행진할 때, 그 미군 철주 퍼티션(Petition: 청원) 그거 낼 때 전부 사람들이 와가지고 그 때 그저 몇 사람이 이자 그 본국으로 가가지고, 반도로 가서 한반도로 가서 평양에서 그 가서 이렇게 내려오는 그때하려다가 그 신수경? 임수경. 면담자 : 임수경 구술자 : 임수경. 문규현 신부님, 이런 사람들. 그거 하고 맞춰서 이렇게 하고. 그럴 때는 인자 많은 데서 오고. 또 우리가 한 거는 그 청년들이 단식 농성. 그 뭐라 그러나. 앉아서 하는 스트라이크. 천막. 앉아서 하는 단식 농성, 천막 쳐놓고 유엔 앞에서 단식 하는 그거를 여러번 했거든요. 그걸 할때 이자 그거 참여도 하고. 또 가서 뒷바라지도 하고. 그 전라도 말이 있던데. 뒷바라지 하는 사람보고 뭐라 그러더라, 따까리란 말이? 면담자 : 따까리라고는 잘 안 쓰는 것 같은데요. 구술자 : 아 그래? 윤한봉선생 항상 따까리라고 그래. (웃음) 면담자 : 그, 그 활동을 그러면, 한겨레 동포 연합을 계속적으로 하셨는데 이 활동이 언제까지 지속이, 지금은 없어진 거죠? 구술자 : 한청련도 없고 한겨레도 없어요. 면담자 : 이게 해산이 된건가요? 아니면 그냥 활동이 뜸해져서 이렇게 멈춰있는 상태인가요? 구술자 : 누가 해산 선언한 일은 없고. 그분이 귀국하면서 한총련도 계속하고 한겨레 전국 회장도 바뀌고. 뭐 나는 언제까지 했는지 그것도 모르겠는데 그러고 이게 쪼금 유야무야된 게 언제됐냐면요. 윤한봉 선생님 귀국하면서 갈라졌잖아요. 조직이 깨졌거든요. 왜 깨졌는지 그런 거 아시죠 면담자 : 내용은 대략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냥 대충만 들었습니다 구술자 : 뭔고 하면 한국에서는 형식적이지만 민주화, 그때 뭐라 그랬죠 국민 정부라고? 문민정부라고 그랬죠. 문민정부가 됐고. 그러니까 이제는 주력을 이민자 문제, 그 다음에 소수민족, 너희들은 여기 이자 살 사람들이고 난 떠날 사람이고 가니까 거기를 주력으로 해라, 이렇게 했을 겅 아니에요. 근데 그게 용납 안 되는 사람들이 많은 거에요. 나이 많은 사람들은. 특히 나하고 같은 연배라든지 내 세대나 그 밑에도 상당히 낮은 세대도 이전부터 윤한봉 선생이 여기 오기 전부터 그런 데 대해서 통일 문제래든지 조국 민주화 문제래든지 애정을 가지고 크게 운동은 못했지만 성명서 발표하는데 이름도 내고 그랬던 사람들이 용납이 안 되는 거에요. 그래가지고 분열이 됐습니다, 갈라졌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요 우리 이렇게 하는데 나하고 몇 사람 밖에 안 되요. 그래가지고 그거, 나는 아주 이해가 되거든요. 근데 갈라질 적에 그냥 이게 뭔고 하니, 뭐에요. 이게 형제간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거든. 말하자면 그때. 아주 그건 막, 나가서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고 밤낮 뭐. 우리 그 전국 대회 할 때요. 그 아시는지 몰라도 우리 한반도 이걸 지도를 이렇게 맹글어놓고 촛불 이렇게 해가지고 다 하고 이런 걸 누가 보면 저 빨갱이들이라고 큰일나거든요. 그럼 뭐 FBI들 와서 우리 조사받고 나도 내 오피스까지 FBI와가지고 조사받고. 그거하고 직접 관련은 없지만 난 시민권을 못 따가지고 88년도에 내가 처음으로 시민권 획득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72년에 신청하자마자 받았는데 나는 안 나오는 거에요. 뭐 이런 거 그거, 그거하고 관계는 뭐 조금 다른 것도 있지만. 그건 이거하고는 관계없고. 어쨌든. 그런 걸 하면서 같이 식구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참 이렇게 지내다가 갈라지려고 하면 그 힘들거든. 꼭 부부간에 이혼하는 것 비슷하게 그냥 잘 못갈라져. 대판 싸우고 원수가 돼야지 갈라질 수가 있지. 그래서 심리적으로 아주 못되게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 가까운 조직 분열 할 때는 기가 막힌 싸움을, 투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 그 심리적인 배경이 그렇습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냥 멀어지, 아주 멀어지는 철천지 원수가 되지 않으면 헤어지기기 힘들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 지금 젙부다 그 통일운동, 조국운동, 뭐 이런거 합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생각하는 거는 내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여기서 살고 있고 미국 시민이 됐고, 그리고 우리 자식들이 여기에 살아야 되고. 그리고 평화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가까운데 내가 있는데 문제가 내가 가까운 거지, 그 조국 문제는 그래도 강 건너 문제다 이런 생각 했단 말이에요. 그래도 그걸 내가 이자 그래도 조직에서 나이 많은 쪽에 속하니까 내가 영향력이 있는 줄 알고 양쪽에서 나한테 와서 막 선생님, 이게 이렇지 않습니까? 막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래도 내가 결국 이 소수 민족 운동, 이민자 문제 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내가 남았거든요. 그렇지마는 내가 그 그 사람들이 합수씨를 욕을 하고 중상을 하고 온갖 해도 그 내용 알 필요도 없고 그 배경은 그렇기 때문에 그건 그쪽에서 내논 구실이고. 진짜 그거는 자기들은 그걸 해야되겠다. 양쪽 다 필요한 거에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 나무라지도 않고 나쁘게 생각 안 하고 나는 그 사람들한테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기도 하고 자기들이. 그 말이 그러고 난 뒤에도 정초가 되면 전화라도 나한테 해서 좀 나한테 인사를 하고 이렇게 하고 기회 있으면 만나고. 그 중에 나를 보고 외면하고 그런 사람들 없지 않지만. 대개는 내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거든요. 내 개인적으로, 민권센터라는 이름 없이. 내가 뭐 이름만 밤낮 무슨 회장이다 이사장이다 걸어놓고 있다가 5년 전에 이자 내가 이거 이사장 이거 젊은 사람이 해야한다, 해가지고 이름이라도 그때는 무슨 명예이사다 그렇게 또 뭐 이렇게 해놨는데. 그런 게 있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스러워요. 왜냐믄 조직의 성원이니까. 그래도 6.15 그 공식위 같은거. 난 그런 거 참여를 하고,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그리고 또 청년 조직이 또 하나 있습니다. 평화 운동 하는 사람들...,‘너른뜰’이라고. 근데 반대쪽에서는 이 단체를 반체제단체라고 낙인이 찍혔거든요. 우리 여기서 그 내가, 저런 건 좀 기록을 안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면담자 : 잠깐 멈출까요? (off the record) 구술자 : 그래서, 여기 녹음이 됐네. 그래서 내가 사람들 듣기 따라서 상당히 말을 과격하게 하는 것 같애. 사실 그게 실상이에요. 그래서 참 이런거 얘기를 계속 하는 것도 난 내부적인 갈등이 상당히 많아요. 면담자 : 지금은 선생님께서 이 민권센터의 명예이사장님을 맡고 계시고 또 다른 활동들, 이렇게 의사로서의 그런 생활 말고 다른 외부활동을 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구술자 : 외부활동은 뭐 그 반전 쪼끔 못되게 계획하는 거 있고 그 다음에 공부 모임, 공부모임은 여기 이 회의실을 빌려서 하는데 이거는 우리가 렌트 내고 그냥 쓰는거에요. 그거는 뭐라 그러면 스토니브룩 한국학교라는 조직에 내가 지금 회장을 하고 있고 그거 하는 분들은 모금운동은 일체 안해요. 내가 이전에도 날보고 모금하라 그러면 난 할 수가 없다. 왜냐믄 여기 빚진 게 너무 많거든. 여기 하는데 이, 그 뭐 아는 사람 친구, 근데 아직도요, 이런거 할 적에 알음알음 하고 사람 관계로 돈을 끌어오지. 그렇기 때문에 빚을 너무 많이 져. 그래서 다른 것까지도 그걸 해가지고 모금을 해야된다면 내가 도저히 할 수가 없는거야. 그래서 그걸 안 하고 있다가 모금이 다 끝나고 그 학과가 궤도에 오른 뒤에 이자 난 하라고 그럼 한다, 해가지고 15년 전에 하면서 그때 나는 딴 건 안하고 순전히 우리 공부하는 것만. 해서 처음 한게 동학공부였습니다. 우리가 3년동안 동학 공부를 했어요. 동학공부를 하면서. 근데 동학이라 그러믄 원래가 그, 그 갑오 농민 전쟁 120주년이 됐잖아요. 그, 그걸로만 알고 있던가, 그렇지 않으면 그거하고 원래 일어났던 그 이, 수은 선생이나 해온 선생의 가르침하고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근데 그 그건 공부를 해보면 그건 순전히 오래고 오핸데 우리가 2000년부터 2003,4년까지 동학 공부를했습니다. 그것만. 그리고 중간중간에 이자 방문학자들 오면 물론 그걸 했지만 주로 하는 것 그랬고. 지금은 뭐 무슨 공부를 하냐면 그, 뭐 유학자 오면 유학공부, 우리 그 전통하고 관련된건 전부 다 해요. 80년대는 뭐 해방신학, 민중신학하는 해직 교수들이 많았죠. 80년대 각 대학에서 해직교수들이 있었거든요. 여기 많이 왔어. 그래가지고 그 중에 민중 신학자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민중 신학도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 뭐 그냥 나는 무슨 교인은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에 내가 세례를 받고 20년 넘게, 뭐 30년까지는 안 되지만 그렇게 내가 교회생활도 했고 또 승산스님이라고 선사 있습니다. 돌아가셨지만 그양반이 70년대 말에 왔는데 저기 그 뉴욕 이 로드 아이랜드(Rhode Island)에 브라운 대학(Brown University) 가까이에서 포교를 했거든요. 그분도 대단한 분이야. 그분은 이념적으로는 상당히 그 우익이, 서북 청년회 회원이기도 했던 그런 분인데 그건 물론 젊을 때 한 거지만. 나중에도 그분은 상당히 이념적으로는 그 무슨 뭐 진보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분한테 가서 내가 참선도 하러 댕기고. 계도받았어요.. 온갖 잡질을 다 한거지. 그리고 거 내 생각은, 그 종교에 대한 생각은, 내 이기심에서 벗어나고 내가 작은 나에서 그걸 깨치고 해방이 되가지고 이렇게 내 둘레가 커지면 커질 수록 커져야 된다 하는게 그게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 말씀이고 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렇게 보면 후회는 안 하지마는. 면담자 : 어, 선생님께 오랜 시간 선생님이 살아오신 얘기들 선생님께 쭉 들어봤는데요. 그 제가 좀 이제 선생님께 드릴 질문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는 것 같애요. 마지막으로 한 질문만 좀 드리고 인터뷰를 마치고 구술자 : 내가 다 끝난 다음에 내 얘기를 듣고 생각나는 거 그걸 솔직하게 기탄없이 나한테 얘기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이런 그런 거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어떻습니까라든지. 왜 그런 거, 나이 많다고 그래가지고 그런 얘기를 안하드라고. 그러니까 내 혼자 뭐가 생각이 이상한데 이렇게 나갈 수도 있고 이런 걸 이렇게 교정을 해주고 그래야되는데. 그런 게 없어요. 근데 이자, 그 합수씨가 있을 때는 내가 뭘 생각을 잘 못하면, 선생님, 그런거 아닙니다. 이러고 기탄없이 얘기해주고 그래도 했거든. 근데 그런 것 참 나는 들어봤으면 좋겠어. 옳고 그른 걸 떠나가지고. 면담자 : 70년대부터 선생님께서 어찌됐건 이제 우리 이곳으로 오셔서 동포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런 활동들을 꾸준히 70년대부터 그런 동포 사회 운동을 해오셨다, 해오셨는데 시기별로 동포사회 운동에 대한 그런 변화들이 기대별로 쪼금씩 있었을 것 같아요. 달라졌, 그 모습들이 그 방향성이라든지 운동하는 모습이라든지 그런 게 시기적으로 좀 이러게 달라졌을 텐데 어, 향후에 그런 동포사회 운동은 또 어떤 방향으로 좀 가야된다고 보시는지, 현재의 미주 지역의 동포 사회 운동들이 이, 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 것들이 선생님 좀 있다면 제시를 해주실 수 있다면, 선생님께서요. 구술자 : 글쎄요. 그런 건 내가 뭐 그런 거는 내가 얘기하기에는 너무 좀 거창한 얘기인데 그 뭐 내가... 면담자 : 그러면 질문을 좀 바꿔서 좀 해드릴까요. 그, 이제 이곳에서 생활하신지도 50여년 가까이 좀 되어가는데요. 이민 이후에 지금까지 선생님 살아오시면서 선생님 삶에 대한 소회라고 해야되나요, 아쉬웠던 점, 아니면 잘 했다고 본인 스스로가 잘 하셨다고 생각하신 점이라든지 아니면 앞으로 이런 걸 더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시는 그런 것들이 있으시면 그 이야기를 좀 듣고 마무리를 할까 하는데요, 선생님 잠시만요 테잎을 한번 더 갈아야될 것 같습니다. (TAPE 교체) 구술자 : 그저 미리 봤으면 좋겠다. 면담자 : 어, 저희가 그 이걸 메일로 좀 보내달라고 하셔가지구 선생님 메일로 한번씩 보내드리긴 했는데요. 뭐 그런 내용들은 지나온 삶에 대한 회고라고 해가지고 저희가 항상 마지막 질문 부분에 하는데요. 구술자 : 글쎄 그 이자 여러가지 가정 이런 것도 들어가고 뭐 이렇게 될텐데. 내 생각에는 그 내가 윤한봉선생을 그때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뭐 또 내가 신문 기자로 나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이런 식으로 가정이. 글쎄요. 그, 하튼 난 그분 만나가지고 내가 그 저 추모문에도 내가 생각하던 걸 썼으니까 그렇지마는. 그 분이 말하자면 그 어떤 정치적으로 얘기하면 잠자고 있는 사람 깨워준거나 마찬가지 역할을 했거든. 나한테는, 왔을 적에. 뭐 그렇지 않아도 뭐 뭘 비슷한 걸 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리고 나는 그 젊은 사람들하고 우리 내 처 보고 밤낮 얘기하는데 날 보고 그 젊어 보인다고 그러는 이유가 청년학교라고. 청년학교에서 청년들하고 어울려다니니까 그런가 모르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데. 내가 제일 많이 느끼는게 뭐냐면 말이죠, 여기 와서. 사람이란 거는 극복해야 될게 열등감이에요. 열등감이 생기는 거는 우리가 뭐 남한테 지배를 받아서, 식민주의자들한테 지배를 받아서 눌려서 살아서 생기는 그런 열등감도 있지만 생리적으로, 우리가 날 때는 완전히 완전히 헬프리스(helpless: 무력한) 상태에요.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에 어른에 대한 열등감이 있거든. 그래가지고 평생 하는게 열등감을 극복하는 거라고 볼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그런데다가 우리는 그게 이중 삼중 사중으로 겹쳐져 있거든 왜 그런 고 하니. 중국이라는 거대 중화문화에 예속돼가지고 살았고, 우리말도 오백년 전까지는 말은 있었지만 글도 없었던 그런 민족이고. 그러다가 일본 사람들...만주족, 뭐 여진족, 무슨 몽고족 하면서 대대로 이렇게 침략받고 억압받고 살다가 일본 사람들한테 억압받고...그리고 동양 사람들한테 낙후된 우리 이런 것 뭐 해가지고 그런 그런 요소가 무지무지 많단 말이야. 그런데 이 미국 처음 왔을 때 우리 앉으면 하는 얘기가 자기 비하하는 거야. 역적들은 할 수 없어 그냥 때려야 되. 검증도 뭐 없고, 나쁜 놈들은 역적들이야. 어디를 가도 그래, 모이는 데 가도. 가족들이 모인 데도, 집안 때문에 교회 모여도 그러고 어디 가서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이 힘들드라고. 이거 뭐 학문도 그렇고 지금도 보세요. 모든 사고하는게 서양 학문 틀에다가 그 무슨 뭐 선진 그 철학자 이름 대가지고 뭐 이렇게 하는 게 그게 지식인이거든. 그러고 종교까지도 그렇고 밤낮. 이거 이자. 그래서 이자 거기서 아무리 잘 해도 거기서 헤어나기가 힘들게 되어 있어. 그래서 요즘은 뭐 무슨 삼성이다 현대다 해가지고 이것도 하고 뭐 이렇게 하고 심지어는 이자 아예 국산이 제일이야. 옛날에는 한국산이라 그러면 이건 천하 제일 못쓰든게, 지금 어 중국산이라고 하면 안 되고 이건 국산이야, 우리나라에서 만들었어, 이걸 이제 할 때가 돼서 자긍심이 상당히 회복됐잖아요, 그죠? 그런데도 밑바닥에는 아직 그게 청산이 안 되었었든. 뿌리 깊은 거야 그게, 훨 강해. 우리 세대는 더 해. 그런데 내가 여기 와서 청년들을 만났더니 그 얘기가 없는 거에요. 참 신기하드라고. 뭐든 동창회를 가든, 교회를 가든, 절에를 가든, 어떤 모임이든지. 친구들을 만나도. 얘기만 나오면 자기 혐오 자기 비하 자기 증오 열등감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여기 왔더니 청년들이 그걸 얘기를 안 하는 거에요. 근데 그러믄 연령때문에 막 그런 것도 있지만 어떤때는 늙은이들은 다 죽어야돼, 그게 다 없어져야 이게 해결 되 뭐 이런 얘기도 하긴 하는데 꼭 연령때문만은 아니거든. 그래 그, 이 합수 선생이 한 일 중에는 정치적인 그런 것도 있지마는 그 자긍심, 왜냐면 아, 우리가 그렇게 못난 사람들이 아니야. 그러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들도 그렇게 잘난 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그냥 사람들은 다 다를 뿐이지. 낫고 뭣한 것보다는 다를 뿐이다. 이런 거가 그,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애요. 그, 그게 정신과에서 하는 일이 바로 그거거든. 정신과에서 제일 큰 문제가 그거거든. 의존, 의존심에서 오는 것, 자만심이라는게 그게 사실은 자기처럼 해야된다든지 그런게 대개 보면 사실은 그 손의 양면이거든요. 그래서 그 요즘 막 무슨 뭐 케이팝이다 뭐 해가지고 한류가 뭐 해가지고 있죠, 이런 거. 이것도 사실은 쪼끔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애. 그런 전체적인 그런 거. 정치적인 이런 거는 그 뭐 내가 얘기하면 무슨 소용 있어.. 그 정치세계에 대한 것은 소위 말하는 의회 정치, 이거는 진짜 그 어떻게 하면 돈이 지배를 하지 않는 거. 그게 민주, 진짜 민주주의가 되는가. 나는 그 여기 그 조직에서도요 이사진이 있잖아요. 그것도 사실 비민주적인 제도라고 생각해요. 이사들이 몇 사람이 해가지고 정해가지고 여기 스텝들하고 우리 임원들 채용해가지고 맘대로 하거든. 그런 것도 사실 문제에요. 모든 조직 다 그래요. 그게 예를 들면 그 자본주의체제거든요. 보드에서. 무슨 저 CEO 해 가지고 고용인들 착취하는거와 같애요. 우리는 뭐 착취체제라고 그러면 어폐가 있지만 소위 그 사회 운동하는 사람들도 그런 거 많이 생각해볼 문제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게 그 언제 그 소위 그 한국 애들 그 진보적인 정당이 정말 그 의회에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거 보면 참 상당히 비관적이에요. 근데 하고 있는거 보면 아까 내가 그 얘기했지. 미국에서 그 여기 하던 거 그거 가보니까. 여기서 쓰레기되가지고 다 버릴라고 거기서 막 벗어날려고 하는 것을 거기는 인제 신기한 걸로 해가지고 그거 하더라, 얘기했지만. 정치도 꼭 그래. 꼭 그렇게 가는 거에요. 면담자 : 예. 그런 게 쫌 있습니다. 구술자 : 그것을 벗어나는 거. 모르겠어요. 그거 면담자 :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오랜 시간 말씀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뭐 운동 활동하셨던 이야기 저희한테 인제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 구술을 해주셔서. 구술자 : 그래서 그 편집을 좀 잘 하세요 면담자 : 저희가 나중에 인제 일단은 텍스트를 먼저 좀 증언집자료로 저희가 먼저 활용을 할꺼구요. 영상은 쫌 차후에 좀 가가듬고 내용들을 더 보완해서 구술 영상은... 구술자 : 완전히 완결되기 전에 내가 한번 볼 수 있나요? 면담자 : 네 당연합니다. 저희가 책으로 내기 전에는 저희가 쫌 이렇게 교열 편집을 거쳐가지고 이렇게 책으로 좀 실으려고 하는데 내용이 뭐 크게 이상 없느냐, 해주신 분들에게 당연히 여쭤보고 진행을 하도록 하니까요. 근데 그게 다른 보통 여기 흔히 있는 그런 이 상업 매체나 뭐 그런데 보면 내가 얘기한 거하고 관계 없는 그런 거 자기들 하는 그런 거, 물론 안하겠지만은 면담자 : 저희는 그런 용도로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구술자 : 그건 내가 알기는 아는데 그게 편집이라는게 언제든 들어가게 되있으니까 면담자 : 저희가 증언집을 만들 때 별도로 크게 편집을 하진 않아요. 말이 반복되는 거, 약간 크게 오류가 생기는 말들, 아니면 사투리라든지 뭐 쫌 교정되야 될 그런 부분을 좀 고쳐서 구술자 : 사투리 같은 것도 내 생각엔 말이여, 구술, 오랄 히스토리 할적에는 그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이해 할 수 없는 그런 사투리는 괄호로 해가지고 안에 표준말 넣는게 오히려 낳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면담자 : 그런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때그때 다르게 편집과정을 거치는데 완전하게 다 사투리 없이 표준어로 가는 방식도 하나 있구요. 또 하나는 일정정도 구술대상자가 했던 사투리를 해주되 그 인제 사람들이 너무 못알아먹을 것 같은 부분은 별도의 각주 처리로써 또 처리를 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고 구술자 : 뭐 쌍말을 막 심하게 한다든지 하면 그런 건... 면담자 : 아무튼 선생님 오랜 시간 구술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김수곤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구술자 : 감사합니다. 면담자 : 감사합니다. 김희숙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김희숙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5일 ○ 구술장소 : 미국 뉴욕 민권센터 사무실 □ 녹취록 구술자 : 한번 알았는데 몰랐으면 모르지만 한번 알았는걸 아는 거를 내팽개치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간다는 건 사회 구성원으로서 너무 무책임하다면 무책임하달까.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이랄까,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디서 뭘 하든지 간에 쪼끔 이렇게 그런 것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죠. 그르고 가서 거기서 학교만 4,5년 다니고 다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오게 됐어요. 그 남자친구하고도 그렇게 하고. 면담자 : 처음에는 완전히 여기서 거주를 해야겠다. 뭐 그런 마음까지는 아니고 공부를 하고 돌아,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셨네요. 구술자 : 여기서 뼈를 묻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기 싫었어요, 진짜로. 그런 애착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면담자 : 어찌됐건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적들의 심장부에 들어오시게 된 건데 들어오셔서 뭘 처음에는 학교를 입학을 하셨나요? 구술자 : 처음에는 학교를 갔죠 거기 로스엔젤레스 커뮤티니 칼리지(Los Angeles Community College)라고 갓 이민 온 학생들이 가는 인제 2년제 대학이에요. 거기서 ESL을, 처음 영어를 시작 하고. 근데 인제 미국에서, 얘기를 다 들어서 뭐 다 아시겠지만 미국에서 살아가는 게 그렇게 쉽지 않잖아요. 그니까 처음에는 일을 했죠, 저두. 학교는 뭐 한두 클래스 한두 시간 정도 듣고 나머지는 햄버거 가게 같은 데서 일하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인제 거기 무슨 가주 마켓이라고 굉장히 큰 마켓이 있었어요. 한인, 한인이 하는. 거기 인제 캐쉬어로 들어가서 풀타임으로 거기서 일했어요. 그래가지구 주말에는 60시간씩. 주말에는 한 열두 시간씩, 열다섯 시간씩 계속 서가지고 막 일하고 했는데 그땐 나이도 어리고 그리구 거기서 친구도 사귀고 이랬기 땜에 돈도 벌면서 인제 친구들이랑, 거기 사귄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고, 놀러 다녔대는 게 끽해야 인제 밤 열두시 한 시에 끝나고 어디 식당가서 밥먹고 얘기하고 바닷가 가서 바다 좀 보고 이런 건데. 그렇게도 좀 보내면서 학교도 좀 다니고 인제 그런 상황에서 마음으로는 항상 그게 있었던 거죠. 그랬는데 학교에서 누가, 어느 누군가가 반핵 서명을 받고 있드라구요.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핵 철거를 위한 서명 운동을 어떤 사람이 받고 있드라구요. 근데 반응들이 안 좋을 거 아니에요. 특히나 한국 학생들은. 이런 걸 여기 와서 왜 하지? 이런 것 때문에 그 사람이 요청하고 할 때 무시하고 막 가는 상황에서 저는 인제 여기에도 이런게 있네? 이렇게 된 거죠. 그래 가지구 반핵, 해야 된다는 건 알구 왔으니까 그래가지고 너무 신기해가지고 그 사람한테 가서 서명을 해주면서, 궁금한 거죠, 어디서 나왔냐? 왜 이렇게 하냐? 이렇게 하다가 인제 한청련을 만나게 된 거죠. 면담자 : 그 여기 이곳에, LA를 처음 들어오셨는데 LA 처음 들어오셔서 학교를 다니셨다고 했는데 집에서 식구들하고 같이 다니셨나요? 구술자 : 예, 그때는 저두 일하고 동생만 어려서, 그땐 걔는 중학생이었으니까 일을 안 하고. 엄마는 바느질 공장 다니시고. 인제 그래서 같이 있으면서 했던 거죠. 면담자 : 그럼 그 대학 내에서 서명, 반핵 서명을 받고 있는 사람을 그때 봤을 때 그때 처음으로 한청련이라는 그런 뭐. 구술자 : 알게 됐죠. 면담자 : 누군지 기억나시나요? 그 서명하던 분. 구술자 : 아, 안동현씨라구요. 면담자 : 그 이야기를 듣고 직접 좀 찾아가셨나요? 구술자 : 그리고나서 인제 한청련 회원 몇 분들이 그때 LACC를 다니고 계셨어요. 그래서 그 LACC 안에 그 풀빛이라는 그런 독서 모임 같은 걸 만들었었어요. 그때 인제 김갑송씨도 계셨고. 김갑송 선배도 지금 뉴욕에 같이 계속 활동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한국에 인제 사랑 찾아 가셨는데, 그런 분도 있고. 그래서 처음에는 한청련이라기보다는 풀빛에 더 가깝게 가서 인제 일하, 일하기 보다 같이 인제 했죠. 풀빛에 가서 책도 같이 보고 토론하고, 독서 모임이었으니까. 이런한청련 활동 같은 거 있으면 같이 좀 해주고 이랬지 제가 한청련에 막 깊이 들어가는 거는 아니었고 그 당시에도 저는 뭐라 그러지 미국 생활 하면서 풀빛 정도로만 만족을 하고 있었어요. 바쁘게 살고 있으니까 풀빛 더 이상 뭐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렇게 있진 않았어요. 해서 풀빛 활동을 통해서 계속 그런 것들을 하고 있었던 거죠. 면담자 : 풀빛이라는 그 써클 모임은 뭐 독서 토론 모임이었나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그때 그 건국대 다니실 때 만들었던 그런 독서모임과는 좀 차별, 어떤 차별점이 좀 있는 건가요? 아니면 비슷한 점이 좀 있었나요? 구술자 : 아니 그러니까 역사 학습을 하는 거는 똑같은데 훨씬 여기는 인제, 거기는 약간 아무래도 시대가 그렇고 사회 분위기가 그러다보니까 굉장히 이렇게 막 딱, 뭐라 그래야 되지 오픈 됐다기 보다는 좀 클로스드(closed)된 상태고 누가 이 모임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얘기 해서두 안 되고. 그런 식이었다면 이거는 인제 오픈되어 있는 상태에서 누구라도 와서 같이 참여하자 좀더 이렇게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왜냐면 이제 미국사회니까 여기서 탄압받거나 이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될 수있으면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 속에서 하는데 풀빛이 딱 공부만 했던 건 아니에요. 왜냐면 한청련에서 계속 무슨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거를 같이 한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반핵 슬라이드 쇼 같은 것들을 학교에 가져와서 한다든지, 뭐 그 다음에 그때 유연복씨라고 판화, 판화 민중 판화 하시는 분을 한청련에서 초청해가지고 전국 순회하면서 판화 팔고 그, 판화라는 게 민중판화니까 그런 것들을 인제 하는데 LA같은 경우는 풀빛이 있으니까 풀빛 주최로 해가지구 LA에 있는 LACC에 있는 커뮤니티 그 LACC에있는 오디토리움(auditorium)을 빌려가지고 거기로 거기서 판화를 전시하고 이렇게 된 거죠. 면담자 : 자연스럽게 그냥 한청련 활동을 병행하게 되었다고 해야겠네요. 구술자 : 그래도 그때는 그냥 뭐라 그러지, 막 깊이 있는 그런 뭐라 그러지 그런건 아니었죠. 내가 멤버, 한청련 회원으로서 막 이런 건 아니었죠. 뭐, 좋은 일이니까 같이 하자 이렇게 된 거죠. 면담자 : 그때 풀빛이라는 그런 독서모임을 같이 했던 분들은 6,7명 정도 된다고, 6,7명 정도 되나요?그 분들 다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예, 그분들 저는 다 기억해요. 근데 인제 그분 안동현 선배하고 김갑송 선배하고 그 두 분은 인제 다니다 학교를 안 다녔으니까 나가고 그 담에 인제 저하고 그때 뭐 황정아라는 친구가 있었고요. 그 다음에 김창, 김상범 김창현 뭐 그 다음에 이희재, 한 일곱 명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분들은 다 활동 안하고. 제가 LA 갈 때 까지만 해도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그런 정도 사이였는데. 면담자 : 그럼 한청련에는 언제 가입을 하시게 된 건가요? 구술자 : 한청련은 제가 90년에 가입을 했어요. 면담자 : 활동은 그런 활동은 풀빛에서나 이렇게 활동했던 것에 비해서 어찌 보면 늦게 가입을 했다고 해야 되나요? 구술자 : 제가 좀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뭐 깊이 하는 걸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한청련은 너무 어마어마하게 느껴졌어요, 저한테는. 내 인생을 확 바꿔놓을 꺼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한청련 회원 가입을 계속 권유를 받았는데 안 한다고 계속 그랬었어요. 그리고 또 미국에서 생활을 하다보니까 모든 게 그렇잖아요. 자기 개인적인 충격이라든지 개인적인 감정에서 시작된 것들은 그거에 대한 것들이 지속되지 않은 한, 그런 경험이 지속되지 않는 한 잊혀지게 마련이잖아요. 한국에 있었으며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의 그런 느낌이라든지 어떤 것들이 지속됐을 텐데 활동을 하면서라든지, 미국에 오니까 인제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아닌 상태에서 옛날에 내가 갖고 있었던 생각만 가지구 온 상태기 때문에 거기서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고 학교 다니고 해야 됐기 때문에 제 생각 자체도 인제도 그런 거에 더 초점이 맞춰지게 되고 이거는 내가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양심상. 쪼금씩만 할 수 있는. 그런 차원에서 풀빛이 적격이었죠. 왜냐면 한청련은 너무너무 더 깊이 해야 되는 건데 나한테 너무 부담이구. 그렇지만 내가 내 양심상 쪼끔이라도 할 수 있는 틀거리는 인제 풀빛이었기 때문에 풀빛 활동을 열심히 하는 차원이었고. 한청련은 가끔가다 자원봉사 하고 이런 식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러다 남자친구하고도 인제 끝나게 됐죠. 왜냐면 롱 디스턴스(long-distance:장거리)니까. 그러다가 제가 89년도에 다시 한국에 들어갔었어요. 방문하러. 면담자 : 잠시, 잠시 구술자 : 그때는 거의 남자친구랑 헤어질 생각을 하고 들어갔는데 그 남자친구는 계속 거기서 활동하면서 운동권 학생이 됐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깐 그 친구랑 다시 만나면서 같이 농활도 따라가고 막 이렇게 되면서 이제 다시 그러를 쪼끔 이렇게 리프레쉬(refresh) 된 게 있다가, 또 뭐냐면은 그 친구가 인제 미국에 오게 됐어요. 한국에서 운동권하다 몸이 조금 안 좋아서 건강의 이유로 계속 그런 활동을 하기가 힘든 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미국에 가서라도 그런 활동을 하겠다, 나도 있으니까 해서 그 친구가 인제 오게 되죠. 그 친구가 마당집에서 있었거든요. 민족학교에 있었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제가 더 자연스럽게 더 여기 많이 갈 수밖에 없게 되는 인제 상황이 되면서 90년에 인제 강하게 권유를 받으니까. 그 친구가 오기 전이었어요. 제가 회원되기, 되고 나서 그 친구는 온 거고. 그때 인제 그러며는 좀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인제 회원을 가입을 한 거죠. 90년도에 면담자 : 혹시 그, 죄송합니다. 남자친구 분, 그때 사귀셨던 남자친구분도 계속 지금... 구술자 : 그 친구가 문유성씨에요 (웃음) 면담자 : 계속 활동을, 아 그러니까 그걸 물어볼려구, 그 분이 그 분이 맞는지 (웃음) 구술자 : 그 분이 그분이에요. 면담자 : 또 다른 분을 또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구술자 : 제가 그렇게 복잡하지가 않아요, 남자가. (웃음) 면담자 : 제가 이야기는 문유성 상임이사님하고 부부 관계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구술자 : 알고 계셨어요? 그 친구가 그 친군가 (웃음) 면담자 : 문유성씨를 얘기하는 건지 다른 남자를 말씀하시는 건지 구술자 : 안타깝게 그 남자가 그 남자에요.(웃음) 면담자 : 선생님 때문에 미국을 들어오신 건가요? 몸을 핑계로 구술자 : 두 개 다죠 (웃음) 저는 나 때문이라고 그러지만 본인은 아니라고 그러죠. 나를 쫓아왔다 그러구 본인은 아니라 그러구. 면담자 : 어찌됐건 이제 선생님들이 처음에 다 LA에서 함께 생활하신 걸로 저는 알고 있어요. 구술자 : 예 맞아요. 면담자 : 그때 먼저 한청련에 좀 가입하셔서 그런 활동을 하고 계셨던 상태였고 그 이후에 인제 문유성 선생님 오시고 그랬던 것 같은데 주로 한청련, 그때 뭐 선생님께서 한청련에 관해 좀 거리를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좀 강했었는데 어찌됐건 90년도에 그게 인제 가입을 하시게 되었던... 구술자 : 89년에 한국 갔다 오면서 이게 이렇게 되살아난 거죠. 그 경험을 통해가지구. 그러면서 인제 다시 생각하게 된 거죠. 면담자 : 그때 주로 활동했던 내용들 좀 기억나시나요? 한청련, 어떤 조직이었는지. 활동 내역이라든지 그 안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들, 그리고 성향들 그런 것이 기억이 나시나요? 구술자 : 기억이 나죠. 면담자 : 주로 어떤, 어떤 활동들을 중심으로 했었습니까, 한청련 활동이. 그때 90년 당시에 구술자 : 90년에 이제 그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러 가지 문화 활동 국내에서 초대해가지구 와가직 거기서 미주 순회 같은거 인제 하고. 기본적으로 대내적인 것은 한청련은 학습을 굉장히 강조하는 그런 단체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꼭 학습을 했어요. 그래서 그 속에서 여러 가지를 인제 배우고 토론하고 인제 굉장히 그러니깐 통일성이 강했고요 그 다음에 단결력이 강햇어요 그리고 이제 그 소위 말하는 어떤 단체마다 풍이라는게 있잖아요, 조직의 풍이라는 게 있는데. 윤선생님은 잘 아시겠지만 윤선생님은 어떤 운동하는 데 있어서의 삶에서의 실천을 강조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마당집 안에서도 한청련 안에서도 그런 풍을 굉장히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어떤 풍이냐하면 내가 바뀌지 않는데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느냐. 남이 예를 들면 설거지 같은 걸 해도 안에만 쓱쓱하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데까지 끝까지 다 이렇게 해야지 운동가지 운동하는 사람이지. 이런 것들은 개판으로 하면서 나가서 사회 바꾼다 그러면 누가 너를 신뢰하겠느냐. 뭐 이런 거라든지. 그 다음에 와서 활동을 할 때 상근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거기서 풀타임으로. 아니면 그냥 학교 끝나고 와서 하시는 분들, 직장 끝나고 하시는 분들도 뭐 여러 가지 분들이 있고.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있고 아니면 시간 내서 쪼끔씩 하시는 분들도 있고. 이럴 거 아니에요. 그러며는 인제 강조됐던 거는 실천이 많이 강조됐죠. 그리고 실천의 책임감이라고 해야 되죠.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회의 때 말만 많이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거 엄청나게 그,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어요. 삔들바우라 그래 가지구 굉장히 싫어했어요. 말만 해가지구 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삔들바우가 발을 붙이질 못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소신껏 발언하고 소신껏 일하고가 굉장히 강조가 되고 그 다음에 그 뭐지, 절약 같은 것도 합수 형님, 그니까는 합수 형님, 그분이 검소하게 생활하는 건 우리가 늘 보기 때문에 마당집에선 항상 검소하게 생활할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미국이란 나라가 모든 물자들이 넘쳐나는 나라잖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크게 놀란 것들이 여기 종이 쓰는 걸 보고 굉장히 많이 놀래요. 휴지라든지 일반 종이 같은 거는 쓰면 막 버리고 이런 게 굉장히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여기서 하드라구요. 먹는 것도 막 이만큼 먹고 버리고 막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인제 마당집은 달랐죠. 꼭 이면지를 쓴다든지 뭐 화장지 휴지도 아껴 쓰고. 그니까 어떤 한청련이라는 것이 어떤 대외적인 한 거 이외에도 내 자신을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햇기 때문에 더 그게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냐 저는 생각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뢰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면담자 : 네, 선생님... (TAPE 교체) 구술자 : 힘들죠? 면담자 : 아,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웃음) 면담자 : 그때 한청련에서 주로 중점을 뒀던 게 한국 사회의 어떤 민족 운동 사회 운동이 중점이 되었었나요? 구술자 : 그 당시에는 인제 어떻게 했냐면 저희 이거를 그니까는 그, 민족 민주 운동이라고 그때 표현을 많이 했잖아요. 민족 민주 운동의 지역운동으로 규정을 했어요. 그니까 보통 그전까지 해외에서 운동이라고 했던 것들이 뭐냐면 많은 분들이 주로 어른들 위주, 그리고 교회 분들이 약간의 관심을 보이고 인제 뭔가를 좀 해볼려고 하는 분들이었지만 많은 경우에 인제, 우리는 대개 보조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고 약간의 써포트를 하는 정도로 규정을, 본인들을 규정을 하셨었는데 합수 형님이 인제 오시고 윤선생님이 오시고 나서 그거를 인제 바꿨죠. 저희한테도 한청련에서 할 수 있게. 우리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예를 들면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경기도에서 하고 전라도에서 하듯이 해외라는 지역에서 똑같은 목적인 민족 민주 운동을 우리가 하는 거기 때문에 우리의 특수성을 살려서 주체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운동이란 것은 언제나 주체적인 것인데 왜 종속적으로 규정을 하느냐. 저희는 그렇게 바라보고 그거에 맞춰서 일을 하고. 그 다음에 특수성을 살려야 한다는 거는 뭐냐면 특히 해외에 있기 때문에 저희 민족 민주 운동이라고 얘기할 땐 미국과의 관계를 떼놀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미국과의 관계를 떠날 수 없단 얘기는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얘기거든요. 그 당시에는 인제 운동이막 할 때 취약, 운동을 한국에선 많이 활성화됬지만 거기 있는 사람을 파견나와서 할 조건이 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그거를 해야 된다, 라고 했기 때문에 외교연대운동이 굉장히 많이 강조가 됐어요. 그래서 제3세계운동과도 많이 연대를 하고 그래서 어, 그런 분들을 같이 조직화해서 활동하는 것들, 그 다음에 저희가 미국에 있기 때문에 UN대상으로 하는 활동이라든지 워싱턴 DC에 가서 백악관 앞에 가서 하는 활동이라든지 뭐 이런 것들이 저희들이 많이 했죠. 그래서 그게 저희 특수성을 살린 그 운동이었고 필요한 운동이었고. 그 다음에 당시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열악한 상태였기 떄문에 지원을 많이 할려고 노력했어요. 여기는 상대적으로 풍족하니까. 물론 미국 생활이 힘들고 여기도 빡빡하기는 마찬가지지만.어쨋든 거기에 있는 분들보다 넉넉한 거는 사실이니까. 그래서 뭐 양심수 지원활동 같은 거라든지, 광주 수난사 돕기회라든지. 뭐 그 다음에 또 저희가 했던 것 중에 황토 기금이라고 해서 하루에 1일 하루에 인제 1불씩 한사람이 해가지고 그걸 갖다 모았어요 그래서 그 기금은 주로. 조국 운동을 지원하는 기금으로 썼어요. 기본적인 회, 회비 이외에 기금을 따로 마련했던 거죠. 그 그게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 바뀌었죠, 운동 내용이. 정세 변화에 따라서. 면담자 : 지금은 이민, 이민자... 구술자 : 저희가 그때 90년대 초반에는 그렇게 해오다가, 아니 80년대부터 쭉 그렇게 해오다가 아마 90년인가 91년인가쯤에 북한이 유엔에 가입을 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그때 그거를 반대하는 단식을 했었어요. UN앞에서 15일간. 근데 가입이 됐죠. 가입을 했죠.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저희의 정세 인식은 북한이 견딜힘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생존을 하려고, 왜냐면 남북이 UN에 동시 가입했단 얘기는 우리는 인제 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서로, 각국의 정부가 인정하는 거기 때문에 통일문제 같은 경우는 좀 달라지게 봐야 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지금 북한이 그렇게 한단 얘기는 결국은 지금 생존 자체가 힘들구나, 북한이. 북한은 항상 통일을 강조해온 나란데, 우리 조국이 반쪽인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인식을 했을때 민주, 저희 민주화 같은 부분들이, 그 민족민주운동에서 인제, 남부조국의 민주화 같은 부분이 그래서 강조가 되고 그 다음에 인제 동시에 90년대, 그러면 80년대부터 쭉 해왔는데 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의 운동이 많이 성장을 했어요. 이 재정적으로도 그렇고. 따로 파견을 보내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재정적 지원이나 이런 것들을 저희는 인제 부담을 많이 덜고 그 다음에 또 하나가 그 당시에 정세가. 미국 정세가 굉장히 안 좋았어요. 그래서 어, 저희가 왜냐면 그때 경제가 미국 경제가 너무 안 좋으니까, 그렇잖아요, 경제가 안 좋으면 항상 희생양을 찾게 마련이잖아요. 그 희생이 되기 쉬운 사람들이 바로 이민자들이니까. 그때 이민자들을 탈겟(target:대상)으로 해가지고 안 좋은 정책들을 많이 펴내기, 반 이민자 정책을 펴내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이러이러한 정세 속에서 이제는 우리가 쪼끔 동포사회의 운동을 좀 해야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때 쪼금 이렇게 바꿨죠. 바꾸면서 윤선생님이 내셨던 구호가 ‘한손은 조국을 위해, 한손은 동포사회를 위해’였어요. 그전까지는 동포 사회 운동보다는 한국 집중을 했었죠. 너무 열악하니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이러니까. 그래서 동포사회 운동을 주로 해오다가 그때는 한 반반 정도씩 해오다가 그때는 더 지나 가지구 국내의 어떤, 한국의 그런 운동권들이 굉장히 많은 양적 질적 성장을 하면서 우리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국내의 운동권이 많이 커버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굳이. 그리고 여기 상황이 점점 더 열악해지기 때문에 이제는 여기에 풀리(fully) 집중을 해야 된다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윤선생님이 항상 강조하시는 거는 운동이라는 것은 항상 정세에 맞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찾아서 하는 것이 운동이기 때문에 저희는 항상 그런 차원에서 강령을 그런 정세 변화에 따라 바꾸고 운동 내용도 바꿨어요. 그치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그거였죠, 정의로운 사회 건설. 그 다음에 그런 정의, 이렇게 자랑스러운 해외 동포 사회를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속에서 쪼금씩 다른 활동들을 했던 거죠. 면담자 : 예. 선생님 그 매년 한청련에서도 5·18에 대한 어떤 기념식이랄까? 추모식을 매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구술자 : 예, 맞아요, 했었어요. 면담자 : 진행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진행 내용이라고 해야 될까요, 뭐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진행됐고 어떤 식으로 그 식이 진행이 됐는지. 그리고 그것을 기획하고 할 때 그 주로 한청련 내에서 그런 계획과 주도를 했겠지만 어떤 논의들을 거쳐 이렇게 매년 그 기념식이 5월 관련 기념식이 진행된 건지 그 부분에 관련해서 좀 말씀해주시겠어요? 구술자 : 제가 가입해을 때가 90년이잖아요. 근데 그 당시 제가 가입했을 90년에 고 당시는 88년, 89년에 이미 5공 비리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고 광주의 그 5·18, 광주 항, 그땐 광주 사태라 부르기도 하고 항쟁이라 했는데 그 당시 진상 규명 같은 것들이 많이 이루어지려고 노력되는 상황이었잖아요, 한국에서. 그니깐 제가 가입하기 전에는 저는 여기 없어서 모르지만 제가 듣기에 그 전에는 주로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춘 강연회를 많이 했어요, 여기서. 그 돌아가신 5·18 영령들에 대해서 묵념하고 추모하고. 그리고 인제 했던 게 이제 진상을 규명하는 것들에 대해서 많이 초점을 맞췄다면 인제 그러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나서부터는 어, 그, 사실 5·18이라는 게 보통 우리가 얘기할 때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을 많이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인제 대동정신에 많이 포커스(focus)가 되는 활동들이었죠. 그리고 동포들에게 좀더 쉽게 다다갈 수 있는, 언제까지나 학살 원흉, 뭐 동포들에게 다가오질 않아요. 그러니까는 인제 영화 상영같은 거라든지 뭐 한국에서 그때 <파업 전야>라든지 <닫힌 교문을 열며>라든지 그런 운동권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 당시의 사회 문제를 다루는. 그니까는 인제 5월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 5월의 진상규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에 입각해서 내가 딛고 있는 사회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운동하는 것이 그것이 5월 정신의 계승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저는 그게 5월 정신의 계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희는 그래서 고 당시에는 간단하게 뭐 추모 행사, 그 모임을, 기념식을 할 때도 있었고 아니면 그냥 이렇게 이름만 5·18기념 뭐 영화 상영회 이런 식으로 할 때도 있었고. 그래서 그때는 영화 상영이나 이런 것들을 많이 하고 그 다음에 때때에 따라서 무슨 그 심포지엄 같은거 많이 했죠. 인제 LA 같은 경우는 물론 말씀 많이 들으셨겠지만. 92년인가에, 아니, 나성 그 4.29 사태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도 5·18기념 4.29 나성사태를 바라보며 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4.29 사태가 본질이 뭔지에 대해서 교육하는 심포지엄을 인제 5·18기념으로 했던 거죠. 그, 그래서 저희가 현재 그리고 뭐 5·18 기념해서 이민자 이슈를 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다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계속 그런 식으로 저희는 기념을 인제 해왔던 거죠. 면담자 : 그런 기념식 같은 것, 아니면 영화 상영이나 그런 것은 어떤 공간을 빌려서 한건가요? 아니면 그걸 할 만한, 이거 치러낼만한 장소가... 구술자 : 영화 상영이라 그래갖고 지금 영화 상영관 같은 걸 생각하시는 건 아닐테구 쪼끄만 무슨 그 강당, 학교 강당이라든지 이런 데를 빌려서 하는 거죠, 교회라든지. 그런 데를 빌려가지고. 면담자 : 기념식도 대부분 그런 데를 실내 장소를 빌려서. 실외에서 한거는 아니었었구요? 구술자 : 실외에서 한 거는 아니었어요. 왜냐면 여기는 5·18, 광주 같은 경우는 5·18 같은 게 묘, 그 뭐지 그 뭐라 그러나요 묘지라고 그러나요, 추모 공원이라고 그러나요? 면담자 : 예, 5·18 묘지 구술자 : 예, 그런 것들이 상징적인 그런 데가 있기 때문에 그런 데 가서 하면 되지만 여기서는 미주에서는 그런 상징적인 장소가 있기 때문에, 장소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저희가 그냥 할 만한 장소를 찾고 그리고 그냥 그거를 했던 거죠 그리고 그걸 항상 5·18을 통해서 정신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거냐 그런 식으로 저희는 어프로치(approach)를, 접근을 했던 거죠. 면담자 : 선생님께서는 90년에 한청련을 가입을 하셨는데 그러면 이렇게 매년, 한해도 빠짐없이 이런 5·18 기념식 추모식이 되어 왔던 건가요? 구술자 : 계속 그렇게 되다가, 거의 그렇죠. 작년 재작년 정도 뉴욕에서는 이렇게 5·18 이름을 걸고 행사를, 대외 행사를 하는 거는 한 1,2년 전부터 쫌 뭐라 그러지, 어, 내부적인 걸로 많이 하게 됐죠. 그리고 그 전까지는 매년 했죠. 면담자 : 그 한국의 그런 정치 변화에 따라서 5·18 에 대한 어떤 인식과 시각도 정치권에 따라서 많이 달라졌을텐데, 달라졌는데요. 뭐 인제 진상 규명은 어찌됐건 90년대 초반, 92년에 들어섰던 또 김영삼 정권에 의해서 일정정도 인제 마무리가 됐었고, 그 이후에 뭐 특별법이 만들어지구 어, 김대중 대통령 와서 국가 기념일 되구 노무현 정권 거치면서 이제 일정정도는 한국도 민주화, 또 사람들이 또 대부분 그래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민주화가 되었다, 라고 생각을 했었고, 그런 약간 그런 운동 세력들이 많이 약해진 것도 좀 사실인데 그, 그럴 때 해외에서의 그런 운동도 이슈가 많이 좀, 어차피 국내를 이슈를 좀 따라가게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동포 사회의 운동이 아니고서야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사회상황에 따라서 그 이제 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인데 그런 부분이 많이 약해져 있지 않았었나요? 그 인제 김대중 정권 들어서고 할 때부터, 쫌 이쪽 운동에도 좀 변화가 많이 생겼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 네, 그것도 그거는 너무 당연스런 일인 것 같애요. 그리고 그거를 부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에 맞게 인제 운동을 해나가야 되는 거기 때문에 국내에서, 그러니까 저희가 민족 민주 운동이라고 했던 부분들이 많이 해소가 됐잖아요, 소위 말씀하신 것처럼 민주화도 많이 되구. 그런 것들이 많이, 그 저희가 더이상 거기에를 주 목적으로 해서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거죠. 그리고 어차피 운동이라는 게, 윤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자기가 서 있는데 곳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게 운동이기 때문에 국내에 문제가 있었을 때는 국내의 문제를 잡고 늘어졌지만 그게 너무나도 심각했기 때문에 그게 어느 정도 해소가 됐다면 지금 여기에서 있는 우리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는 것이 곧 운동이고, 그거를 하다가 아주 잘 되서 여기 있는 문제도 해결이 되면 그 다음에는 자연보호 환경활동도 할 수 있는 거고.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으면 나무 운동도 할 수 있는 거요. 동물들이 죽어 가면 동물들을 위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거고. 지금도 물론 많은 분들이 하고 계시지만. 저희는 주로 그런 활동들을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거든요. 저희는 거기에 충분히, 저희가 그 생각을 같이 하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그런 정치 변화로 인해서 당연히 여기서도 정치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거를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운동을 할 수 , 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저희가 담고 있는 운동이 국내의 어떤 민주화 운동에 대한 부분들은 거의 덜었어요. 거의 덜고 그 다음에 동포 사회에 집중하다시피 했어요. 그 다음에 또 하나 저희가 쫌 더 계속했던 것들은 북한 동포 돕기를 주로 많이 했어요. 그니까 그 당시에는 그, 북한과 남한의 이런, 북한의 그니까 인권적 차원에서 우리의 반쪽인 나라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 되지만 운동적 차원에서 봤을 때 지금 어떤 북한이 망해, 망하거나 해가지고 흡수 통일이 된달지 그런 식으로 됐을 때는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고 저희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인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평화 운동의 차원에서 국내 운동을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가장 급한 거였기 떄문에 북한 동포 어린이, 북한 동포 돕기를 초기부터 많이 했어요. 초기라는 건 북한에서 수해가 나서 굉장 힘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터 그거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거를 집중으로 했었고 조국과의 운동은 대부분이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이었고 그래서 그런 것들 저희가 1년에 10만불 모급해서 이렇게 한다든지. 저희가 근데 그거를 단순히 돈을 모으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운동이라는 게 그렇지만 교육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마켓 같은 데 나가가지구 일인 일불 모금하자구 해가지구 북한의 동포들이 어렵다, 우리가 같이 해야만 한다라는 것들을 나누면서 인제, 그래서 일인 일불이 된 거예요. 무슨 독지가가 십만 불을 내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많은 동포들이 자기 어려움 속에서도 일불씩 내서 그거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 운동이기 때문에 저희가 거기에 집중을 했고. 저희가 그걸 할 때 있어서 유엔하고 같이 했어요. 유엔의 그 세계식량기구라고 WFP(World Food Program), 월드 푸드 프로그램이 있는 거기거 비영리, 유엔의 비영리단첸데 거기가 직접 북한에 가서 지원을 한다고 들었어요. 저희가 알아본 결과에 의하면. 왜냐면 그 당시에는 누가 어떻게 지원할거에 대한 투명성이 요구되는, 그 돈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부터 시작해서 그런 것들이 많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유엔기금이면 믿을 만 한 기구기 때문에. 그 다음에 자기네들이 쓴 익스펜스(expense)는, 경비는 우리가 모급한 돈에서 쓰지 않고 자기네 자체 내 경비로 쓰겠다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모금한 거는 전부다, 도움으로 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돈을 뭐, 그때 한 쌀 한 포대 보내기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쌀 한포대기가 하나에 한 10불이니까 10불씩 해서 한다든지 뭐 일년 안에 뭐 얼마를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해서 해가지고 WFP에 전달을 하고 하는 것들을 인제 해서 동포 사회에 북한 동포 돕기가 많이 확산돼, 저희가 쫌 그런 역할을 했죠, 그 당시에. 그리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인제 식량돕기를 또 많이들 하시니까, 우리는 그러면 쫌 더 필요한 게 뭘까? 이렇게 해서, 아이들의 영양이 너무 부족하다고 WFP에서 그러드라구요. 식량이 그래서. 그러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그랬더니 영양이 첨가된 비스켓을 이렇게 하기로 저희가 얘기가 되가지구 공장을 세우겠다고 그러더라구요, WFP에서. 그러면 우리가 그거 지원을 하겠다, 식량 지원도 중요한데 많이들 하시니까 영양과자 지원을 하겠다 해갖구 캠페인을 따루 만들었죠. 북한 어린이 동포 돕기 영양과자 보내기 캠페인을 따로 해서 그 WFP랑 조인트를 해가지구 그런 활동들을 계속해서 해왔죠. 면담자 : 어, 처음 선생님 말씀하실 때 LA에서 활동 하시다가 필라델피아니 뉴욕 이렇게 거치면서 활동을 하셨다고 그 처음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그럼 LA에서는 언제까지 활동하시다가 필라델피아로 가셨나요? 구술자 : LA에서는 짧게 했어요, 왜냐믄 제가 회원이 90년, 제가 LA는 87년, 88년부터 알았지만 회원은 90년인가 그렇게 됐고 그 담에 제가 92년에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92년, 스물 세 살에., 결혼을 한 거예요. 결혼을 하고 나서 문유성씨랑 같이 인제 필라로 가게 됐죠. 그니까는 거기서 활동은 그냥 그 정도. 그래서 필라델피아에서 98년까지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뉴욕에 98년에 왔어요. 면담자 : 각각 지역마다 한청련 지부가 있었잖아요. 근데 지역별로 분위기도 많이 달랐을 것 같고 또 아무래도 하는 일이라고 해야 되나요, 하는 일도 지역별로 좀 차이가 있었을 것 같애요. 근데 좀 비교를 해주신다면 LA와 필라델피아의 차이, 그리고 이후의 98년 뉴욕에 오셨을 때 활동의 차이 같은 것을 좀 비교를 해 주신다면요 구술자 : 일단 도시마다의 특색이 다 있잖아요. 그니깐 그 한청련의 마당집에 그 도시의 특색이 그대로 살아나요. 그래서 예를 들면 뉴욕 같은 경우는 삶이 너무 바빠요. 정신없이 돌아가거든요. 도시 자체가. 다른 도시하고는 비교할 수 없게 빠른 속도로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회원들의 삶도 그럴 수밖에 없고. 그럼 그게 마당집에 투영될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예를 들면 필라델피아 같은 경우는 굉장히 느슨해요. 이 사회 자체가 돌아가는 게 이렇게 좀 느슨하구 그래서 거기서 뭔가 빠릿빠릿하게 해보고 싶은 살마들은 워싱턴 DC나 뉴욕으로 가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필라델피아에 많이 남아 있어요. 제가 갈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필라는 죽어가고 있단 얘기를 계속 했었어요. 지금도 계속 살고 있지만.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 받는 또 이게 달라요. 마당집 분위기라든지 그런 것들이. LA는 동포사회가 가장 크기 때문에 한국의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많이 받는 동포사회죠. 많은 그 사람들 오고가고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이슈들이 있을 때마다 LA가 가장 그게 센시티브(sensitive:예민)하게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그런 도시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라는 것 하고. 그 다음에 인제 활동 내역에 있어서 같은 경우에는 저희가 재미 한청련이기 때문에 모든 활동은 똑같은 캠페인으로 똑같이 진행하지만 어, 각 지역의 특색을 살린 거라면 인제 뉴욕 같은 경우에는 유엔이 있기 때문에 유엔을 그 이용해서 하는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죠. 시위 같은 걸 해도 유엔 앞에서 한다든지 이런 것들. 그 다음에 인제 워싱턴 DC는 백악관이 있으니 그렇게 한다든지. 그래서 활동의 큰 목적과 주제는 같다 하더라고 그 활동하는 진행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다음에 LA 같은 경우는 동포들 큰, 그것들을 대상으로 해서 하는 것들이 있고 그 다음에 뉴욕에서 있을 때는 동포 사회가 제일 큰 데가 미국 LA하고 뉴욕이잖아요. 그러면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운동은 대중과 함께 해야되기 때문에 이곳이 가장 중요시될 수밖에 없어요, 한청련 내에서도. 그렇다면 다른 도시나 다른 한청련을 보면 찌그러진 밥이냐라는 부분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그믄 그런 분들한테도 역할을 줘야 되니까. 늘 강조했던 것들 중에 하나. 그믄 필라델피아 같은 경우는 역할이 뭐냐, 필라델피아는 어떤, 앞에 나가서 싸우진 않지만 뒤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그것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죠. 필라델피아, 저희가 필라델피아 갔을 때는 저희의 역할 자체를 필라델피아는 보조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그거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생각을 해서, 인적 물적 자원을 많이 지원하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큰 무슨 뭐, 예를 들면 무슨 뭐 그때 저희가 그 무슨 재정 마련을 위해서 여기서 그 US아니, US 테니스 오픈 뭐 이거를 크게 여기서 할 때 거기서 저희가 하나 그 장소를 얻어, 그 비영리단체들한테 주는데 그걸 하나 얻어가지고 비영리사업을 하게 되는데 그거는 완전히 인력 그거였어요. 왜냐면은 그 돈 받는 것에 대한 이익을 분배하는데 인력을 그때 한 사람 앞에 일을 하면 얼마씩이 되가지고 그런 식으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인제 일을 하는 거였는데 그걸 갖다가 다 전국에 있는 회원들한테 공지를 해가지고 받은 거죠. 그래서 와서 2,3주 동안 먹고 자고 여기서 일할 사람 같은 거 하고 그럴 때 필라에서는 책임감을 가지고 많이 인제 보낼려고 노력을 하고 그 다음에 LA나 이런 데서 지금 상근자가 부족하다, 굉장히 힘들잖아요. 풀타임으로 돈 한 푼도 안 받구 먹구 자구 하면서 한다는 게. 그니까는 상근자를 만들어서 보낼려고 많이 노력 하고. 인제 그렇게 역할들을 조정하고 그러기 때문에 큰 도시는 큰 도시대로의 자기의 활동하는 것에 있어서의 자긍심, 우리는 이런 역할을 한다? 작은 도시는 작은 도시대로 우리는 이런 역할을 한다, 라는 자긍심? 이렇게 해서 재미 한청련을 묶어서 활동을 했던 거죠. 면담자 : 그 예전에 사진을 여기 와서 기록물을 인제 정리할 때 사진을 정리하면서 그때 쫌 확인을 해봤더니 93년,4년 정도로 사진이 된 것 같아요. 그 뉴욕에 있는 미 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했던 그 부분이었었는데요. 구술자 : 미 대사관 앞에서요? 면담자 : 뉴욕, 뉴욕에 있는 미 대사관 같은데요, 한국 대사관. 구술자 : 아 한국 대사관 앞에서? 면담자 : 그때 당시 그 그니까 진상규명을 한다고 기소를 한다고 전노 두 사람을 기소를 한다고 했는데 검찰에서 불기소 했다가 이렇게 여론의 뭇매를 맞았을 때가 있어요. 그때 LA에서, 아니 뉴욕에서도 같이 그걸 좀 진행을 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사진이 남아있드라구요. 한청련에서 이런 5월 관련 진상 규명들이 일어날 때 다른 지역에서도, 뭐 필라에서도 이런 유사한 좀 활동들을, 그때는 필라델피아에 계셨을 때 같은데. 그런 활동들을 필라델피아에서도 뭐 하셨나요? 구술자 : 죄송하게 제가 기억이 별로 없는데 아마 그랬으면 뉴욕에 와서 같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렇게 집중해서 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예, 그래서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됐던 것 같애요. 면담자 : 주로 이제 그 좀 가까운 곳으로 인제 뉴욕으로 와 가지고... 구술자 : 왜냐면 필라델피아가 한국대사관이 없으니까. 영사관은 뭐 있을 수 있어도. 그러니깐 인제 같이 모여서. 지역을 되게 많이 다녔어요. 어떨 땐 DC가서 하고 어떨 땐 뉴욕 가서 하고. 그런 식으로. 그 다음에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 내용 자체가 많이 변화가 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러 가지 정세변화로 인해서. 그렇다고 해서 조국에 일어났던 것에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안 했던 것은 아니고 대응 차원에서, 뭐가 있으면 대응차원으로 이렇게 했던 거죠. 그래서 뭐 예를 들어 국가 보안법 철폐 같은 부분도 저희가 그 부분도 장기적인 사업으로 좀 많이 했었구요, 그거는. 어 그 다음에 예를 들면 노태우라든지 전두환이 방미하게 되면 당연히 저희가 환영 나갔죠. 뭐든 샌프란, LA에서도 하고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이런 식으로 다니면 저희가 인제 가서 굉장히 시끄럽게 환영을 해드리거든요. 뭐 풍물도 치고 이러면서. 그러니깐 인제 각 지역마다 회원들이 있으니까 똑같은 포맷으로 똑같이 똑같은 구호로 똑같이 시위를 하니까 잘 모르는 분들은 그랬다 그러드라구요. 이 사람들 기동력이 되게 좋다 그랬대요, 왜냐면 계속 따라다닌다고 생각을 하셨던 거죠. 그래서 따라다닌 적도 쪼끔은, 왜냐면 LA에 있을 때 제가 샌프란시스코로 간 적도 있고 이런 식으로 했었는데 그렇게 활동들을 했어요. 그리고 재미 한청련이 굉장히 뭐라 그러지, 통일성이, 지역 부분들을 많이 살려주긴 하는데 그 소위 말하는 어떤 지도부라고 하는 것이 잘 자리를 잡고 있어서 통일성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아까도 어떻게 뭐 결정해서 5·18 그거를 하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전체적인 것들을 함께 결정을 해요. 이번에는 5·18 관련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해서 연합적으로 결정으로 해서 그 지역 내에 맞게 쪼끔씩 변화시켜서 하는 식으로 하는 거죠. 예를 들면 5·18 같은 경우는 주최할 때 다른 지역은 그냥 한청련 한겨레 주최로 할 때도 있었고 LA같은 경우는 5월제 추진위원회를 따로 만들어가지고 그걸 활용을 해서 한 경우도 있었고 아니면 5·18 기념행사를 하면서 다른 단체를 참여해서 후원 단체로 해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식으로 쪼금씩 차이가 나게 했는데 내용이나 성격은 다 같애요. 왜냐면 저희는 다 똑같은 목소리를 하나의 조직으로서 냈기 때문에. 그래서 회의를 많이 했어요. 돈이 좀 많이 들더라도. 일 년에 두 번 씩은 꼭, 그 저희가 구성 자체가 그때 어떻게 돼었었냐면 중앙위원회라 그래가지구서는 그 임원들이 이렇게 있었구요 사무국장, 조직 부장, 단체들이 했듯이. 각 지역의 사람들로 이렇게 꼭 그 지역에서 뽑아야 되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인제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각 지역에서는 대표위원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의견을 인제 수렴해오는 인제 그런 거기 때문에 일년에 두 번씩 꼭 대표위원회를 소집을 해요. 한 지역에 그래서 거기에 모여서 저희가 1박 2일 동안 회의를 해요. 그 회의는 주로 뭐냐면 국제정세분석에서부터 시작을 해요. 그래서 국제정세분석하구 그 다음에 이제 미국 이런 것들이 중요하기 땜에 미국 정세분석하구 그 다음에 조국 정세 분석하고 동포 사회 현안에 대해서 얘기하구. 그믄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업과 활동을 할 것이냐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거죠. 그래서 그거에 대해서 회의를 하기 전에 각 지역으로 공문이 다 나가요. 공문에 어떤 걸 안건을 가지고 할 테니까 의견을 수렴해서 오세요. 해서 각 지역에서 대표위원회를 하기 전에 회의를 다 하죠 그 의견을 수렴해가지고 대표위원들이 다 오게 되면 인제 그 자리에서 그 논의를 바탕으로 그 다음에 수렴된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해왔던 사업과 성과들에 대해서 평가하고 그 다음에 그것에 맞춰서 새로운 정세에 맞춰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보강할지 바꿀지 강조할지 안 할지 이런 것들을 경정하고 그 자리에서 활동들이 결정되기 때문에 5·18 같은 경우도 우리가 항상 해왔던 연례였기 때문에 거기서 얘기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번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렇게 운영이 조직이 운영이 됐었어요. 그리고 2년에 한 번씩 또 회원들을 만났거든요. 해외동포대회라 그래가지고. 그러니깐 뭐. 되게 식구 같죠. 면담자 : 이게 그 어떤 지도부, 지도부에 있으면 일 년에 두 번 씩 그런 집행부회의라 해야 되나요? 그런 회의가 있었구 일 년에 한 번씩 전체 모임이 있지 않았나요? 구술자 : 그게 해외동포대회라고 해요. 면담자 : 일 년에 한번 아니었던가요? 구술자 : 일 년에 한번이 있는데 초기에는 계속 그렇게 하다가 이게 너무 저기뭐야 돈도 많이 들고 힘들어 갖구 이년에 한 번씩으로 바뀌었었어요. 면담자 : 아 그리고 어제 김용천 선생님 구술 면접을 하면서 제가 좀 들었던 내용인데 어, 혹시 선생님때도 해당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인제 필라델피아에서 그런 5월 관련 추모제를 진행할 때 캐나다 맥길 대학(McGill University)에서 나온 그 광주 비디오가 있는데 그걸 이렇게... 구술자 : 다 같이 상영하고 그랬어요. 면담자 : 상영을 해주기도 했다,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나온 비디오라는게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그걸 만든 비디온가요, 아니면 만들어진 것을 캐나다 맥길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비디오를 얘기를 하는 건가요? 그 비디오의 내용이 어떤 거였죠? 구술자 : 제 기억에는 제가 있을때 상영한 건 아니고 저도 얘기를 들은 건데요. 그 내용 자체는 그때 어떤 그 당시는 그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거에 초점이 맞춰진거죠. 그니까는 막 사람들 맞고부터 시작해가지고 이런 것들 있잖아요. 굉장히 안 좋은 질로 해가지고. 이렇게. 그런거가 많이 들어있었어요. 면담자 : 어디서 만든지 뭐 그런 것은 기억이 없으시구요? 구술자 : 그건 제가 기억이 안 나고 맥길 대학에서 연관이 있을 거예요. 그냥 소장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애요. 그 대학에서... 면담자 : 다른 분한테 좀 확인을 좀 하겠습니다. 구술자 : (웃음) 죄송해요 면담자 : 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이제 뉴욕으로 오셔서, 98년에 인제 오셨잖아요. 98년에 오셨을 때도 한청련 활동을 계속 하고 계셨던 때죠? 구술자 : 네. 그때도. 저희가 필라델피아에 가게 된 것도 필라에 상근자가 없어가지고 유성씨가 상근할려고 저랑 같이 간 거구요. 뉴욕에 올 때도 뉴욕에 상근자가 없어가지구 저희가 인제 와서 유성씨가 상근. 면담자 : 그 예전 한청련 뭐 관련된 사진들 소식들 보면 굉장히 상당히 세도 컸었고 활동 영역도 넓었었고 그런 게 사진으로도 그냥 눈에 훤히 보이거든요. 뭐 전체 모임하면 거의 한 그 앞에 나가서 사진 기념사진 찍으신 분들만 해도 5,60명 되 보이고 백 명 넘을 때도 있는 것 같고 그래 보이는데 이게 정확히 언제 해산이 된 건가요? 한청련이. 구술자 : 참 그것도 되게 유야무야 이런 식으로 좀 되가지고. 한 2000, 한 2004년쯤인 것 같애요. 제가 확실한 기억은 아닌데 한 그 정도. 면담자 : 이때 뭐 전체 뭐 어떤 모임을 가지고 앞으로 이 조직에 대한 방향이랄까, 해산을 해야 되는지 유지를 해야 되는지 뭐 그런 논의들이 있었었나요? 그 내용에 대해서, 그 해산 과정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게 있으면 말씀을 해주세요. 구술자 : 제가 그때 한겨레가, 한청련이 어떻게 됐냐면 35살까지 나이 구성이 되요. 한청련이 있고 그 다음에 한겨레가 있잖아요. 제가 그때가 한겨레 나이였어요. 이제 한청련 자체 내에서 논의를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냥 한청련 자체 내에서 논의를 해가지구 해산하기로 했다고 그렇게 들었어요. 면담자 : 전혀 어떤 관계나 개입이나 그런 것은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못하신 건가요? 구술자 : 같은 식구긴 하지만 어쨌든 한겨레와 한청련이라는 다른 조직이고 제가 그때 또 무슨 뭐 한청련 임원도 아니고 한겨레 임원도 아닌 상태에서 조직의 결정을 본인들이 해야 되니까 무슨 관여를 하거나 뭐. 물론 한청련에 있는 사람들이 상의는 좀 했겠죠. 각 지역에서 쪼끔씩, 어떻게 하면 좋을지 뭐 이런 거. 그냥 자기들끼리 모여서 막 박수치고 끝나진 않았겠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서 상의도 하고 얘기도 좀 들어보고 뭐 이렇게 자기네 총회 내에서 이렇게 해가지고 결정을 한 거겠죠. 면담자 : 근데 왜 그만 이 활동을, 해산이라는 결정을 내려가면서까지 그만 두게 됐었던 그 이유가 있나요? 구술자 :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땐 제가 생각할 때 그, 그 당시 정세가 국내 운동권도 굉장히 어려운 상태였어요. 어, 어떤 사회적인 이슈가 크게 폭발할 때는 운동권이 일어나게 되죠. 왜나면 거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거를 어떻게든지 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이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조직하기가 훨씬 쉬운데요. 인제 그리고 나서 아까 말씀하셨던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나름대로, 나름대로 큰 불편 없이 잘 먹고 잘 살게 됐는데 내가 굳이 뭘 해야 하는가라는 게 크게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도 그건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하려는 사람들을 찾기가 무척 힘들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는 우리가 그런 외부적 조건이 있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고. 어, 그런 상태에서 한청련의 규율은 굉장히 강해요. 그, 것도 얘기 들으면서 쪼끔씩 느끼셨겠지만 저희는 그런 것들을 되게 강조를 했기 때문에 그냥 시간 날 때 와가지고 그냥 자원봉사 하듯이 하고 가고 그런 거는 저희는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이렇게 정세 변화 속에서 그런 규율을 유지 할 수 있는가, 로부터 시작을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없는, 그런 외부적인 정세를 인정, 인정을, 어차피 운동은 정세에 맞게 해야 하는 거잖아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청련을 해체할 수도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마당집을 강화를 많이 시켜놨기 때문에요, 이 민족학교도 그렇고 민권센터도 그렇고 한청련이 만든 단체에요. 그니까 그래서, 동포 사회의 운동이 강화되면서 한청련 회원들이 일을 하긴 했지만 일은 마당집 이름을 많이 걸고 했어요. 민권센터라는. 그러기 때문에 대중들한테는 민권센터가 더 어필하죠. 한청련보다는 훨씬. 그러기 때문에 이게 확확확 커, 이거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확확확 커져갔어요. 왜냐면 그런 사회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포들의 요구도 컸고. 왜냐면 동포들의 그런 요구를 받아서 대응해주고 이걸 갇다 풀어주는 단체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이게 인제 커갔기 때문에 그래서 무슨 한청련이 완전 망했다,라는 그런 차원보다도 인제는 틀거리를 바꿔서 활동을 해야 된다,라는 차원으로 이해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면담자 : 네. 알겠습니다. 그 물론 이제 마당집을 중심으로 이렇게 각 지역별로 LA나 뭐 시카고, 뭐 뉴욕 있는데 그렇지 않은 또 도시들도 있었잖아요. 한청련 조직들은 있지만 마당집이 운영이 되지 않은 뭐 그런 곳들도 있었을 텐데 좀 인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같은 조직 안의, 한청련 안에서도 좀 아쉬움이나 그런 부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 아 당연히 있죠. 그 어쨌든 한청련은 저희 청춘을 같이 한 단체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물론 마당집이라는 형태로 계속 남아있지만 그렇긴 하지만 그래두 어, 마당집은 그, 그런 조직이 아니고 이거는 비영리단체로써 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오는 장단점이 있어요. 대중화라는 부분에서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단점이라고 할 때는 딱 결집된 어떤 조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것을 다 담아낼 수 없어요. 예를 들며는 비영리단체기 때문에 선거 참여는 권유할 수 있지만 선거인은 누구를 찍자라는 것은 못하게 되어있거든요. 그런, 그런 것들이 인제 예. 있는 상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당집이 없는 데서는 아쉽죠. 그리고 마당집이 있는 뉴욕에서도 아쉽고 책임감도 많이 느끼죠. 내가 외부 정세가 그랬다 하더래도 내부적으로 이거를 잘 했으면 그렇지 않지 않았을까 라는 뭐라고 해야 되지, 그런 게 항상 있죠. 면담자 : 현재 그, 지금 민권센터 이사직을 맡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게 예전에 청년학교에서 민권센터로 이름을 바꿨어요. 이게 한 ,4,5년 됐나요? 한 그정도 된 걸로 제가 기억이 나는데 지금 이 민권센터에서 가장 그 중심으로 두고 쫌 하고 있는 어떤 업무라든지, 뭐 그런게 있으면 좀, 민권센터는 이런 곳이다,라는 소개를 좀 해주신다면요. 구술자 : 어, 소개 잘 할 사람 왔는데? (웃음) 맨날 하는 일이 그건데. 민권센터는 이민자, 그러니까 코리안 어메리칸들로 이루어진 코리안 어메리칸 커뮤니티 베이스로, 어, 이민자 권익 옹호 단체에요, 지금.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겠지만 미국 내에서 이민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것은 정의롭지가 않잖아요. 그 이민자의, 코리안으로서뿐만 아니라 코리안 어메리칸이니까. 이민자니까 이민자로서의 우리가 역할을 인제 하는 거죠. 다른 이민자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이런 부당한, 그 다음에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개선해나가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래서 가장 큰 부분은 이민자 권익옹호 운동이에요. 그래서 스테더스(Status:신분) 같은 게 예를 들면, 서류 미비자 친구들이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민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냐면 단순히 이민이라는 게 사람들이 어려워서 힘들어서 오는 그런 부분이 있지만 어찌됐건 간에 전 세계에 있어서 경제적인 그런 흐름에 의해서 미국이 모든 것을 다 경제적으로 쥐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은 힘든 나라들은 그걸 찾아서 올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이민, 그 다음에 미국도 그런 저노동층이 필요해요. 그런 상태에서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인거죠. 미국도 필요에 의해서. 그런데 그것이 어떤 경제적 어려움이나 뭐가 있을 때마다 마치 아닌 것처럼, 우리가 선심 써서 이 사람들이 들어온 것처럼 이렇게 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그리고 그니까는 그런 것들을 다 인제 이민 시스템 자체가 바껴야 된다는 거고 지금 서류 미비 분들이 리걸라이즈(legalize: 합법화) 해가지고 왜냐면 이미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세금도 내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거를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이민자라는 이유로. 어차피 미국이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란데.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인제 하는 거죠. 면담자 : 근데 보면 이 꼭 한인들에만 한정돼있는 활동은 아닌 것 같아요. 뭐 이렇게 중국, 여기에 있는 모든 이민자를 다 대상으로 좀 이렇게 하시는 거죠. 구술자 : 저희의 베이스는 코리안 어메리칸 커뮤니티지만 활동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민자의 모든 다른 그룹들과 힘을 합쳐서 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힘이 나는 거기 때문에 중국 커뮤니티랄지 그 다음에 다른 이민자, 멕시코라든지 많은 그 사람들하고 함께 같이 일을 많이 하죠. 그래서 네. 면담자 : 뭐 그 쪽도 뭐 그런 비슷한 유사한 단체들이 있나요? 뭐 중국이랄지 구술자 : 네. 이민자 관련된 단체들이 다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면담자 : 같이 연대해서 이런 활동들을 하시는 거네요. 구술자 : 네 연대해서. 어떤 부분은 저희가 주도적으로 하기도 하고. 그 .이민자 권익, 저희가 그래서 그런 단체인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세분화시켜서 많이 하죠. 무슨 정치 참여라든지 그리고 무슨 뭐 교육이라든지 그런 것들. 정치 참여 같은 거는 유권자 등록 같은 것들을 인제 계속 하고 그 다음에 인제 선거 관련해서 교육시키고. 선거는 언제 어떤 식으로 하는지. 왜냐면 지금 선거를 많이 인제 잘 하시지만 옛날에는 선거 안 하셨거든요. 관심도 없었구. 그러니까 정치 참여가 있을 수가 없고 그러니까 정치인들이 한국 커뮤니티는 신경을 안 쓰죠. 그래서 그런 분들한테 하나씩 교육을 하는 거죠. 선거는 우리가 꼭 해야 한다. 우리의 힘을 어, 정당하게 그 우리의 권리를 정당하게 보호받기 위해서는 정치 참여 선거를 해야 된다라는 그런 것부터 그럼 어떻게 뭐 이런 것들을 계속 하는 거죠. 면담자 : 네. 그, 인제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런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운동 세력이 많이 날개를 꺾였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정작 인제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이런 운동적 성향이 다시 80년대처럼 필요할 때 그 날개는 다 다 꺾여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그런 상황이라고 한국에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워낙 또 사람들이 예전 같지 않고 그, 다 자기 자기 앞길, 학생들도 자기 앞길 찾아가는데 너무 바쁜 그런 세상이라. 그런 것들이 좀 더 힘든 것 같애요. 그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인제 앞으로 해외동포,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뉴욕, 이 미주 지경에서 한인 사회 운동의 방향이라고 할까요. 구술자 : 호호호호 사람을 잘못. 동포 사회의 운동 방향이요? 면담자 : 너무 뭐 거창하지 않으셔도 선생님 생각을 그냥 말씀주셔도 되구요. 구술자 : 동포사회의 운동 방향이요? 면담자 : 네, 뭐 그 동포 사회 운동 방향도 예전하고 지금하고는 많이 좀 달라졌잖아요. 좀더 보완해 나가야할 거라든지 아니면 이런 것도 좀 생각해볼 수 있다라든지 그런 부분들이 혹시 관련 일을 하시면서 생각에, 염두해놓고 계신 다른 것들이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 그니깐 유성씨가 많이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제가 곁다리로 이렇게 보고 제가 생각하고 하는 거는 일단은 인제 기본적인 거는 말씀하신 것처럼 큰 정세 틀거리 속에서 봐야 되잖아요.지금 이민자 권익 옹호 사업에 초점을 맞춰서 하고 있잖아요. 근데 이 이민시스템이 어떤 식으로든지 이게 바뀌고 나면 그때는 좀 다라지죠. 지금 우리가 이민시스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바로잡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됐을 경우는 그때는, 무엇을 더 초첨을 맞춰서 할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죠. 왜냐면 그 이민 시스템 자체가 어떤 식으로 바뀔지도 또 지켜봐야 되는거고 어, 인제 그것들을 인제 예의주시 하면서 뭐가 나와서 이제 이런 것들 할 수 있고. 이런 것들 함에 있어서 인제 커뮤니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야겠죠. 운동이라는 게 나 혼자 보람 느끼고자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하는 거기 때문에 유성씨와 많은 얘기를 해요. 여기는 지금 노인분들의 어려움을 계속 얘기를 해요. 미주 동포 사회에서 한인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가장 소외받는 사람들이 누구냐, 라고 생각을 했을 때 인제 지금 서류 미비자 이런 분들, 노인 서류 미비자 같은 경우는 굉장히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부분들에서도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도 있고 그 다음에, 그다음에 또 나는 마당집이라는 좋은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 단체에, 그치만 한청련이 할 수 있는 역할은 할 수 없기 떄문에 그러한 단체를 또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지만 챌린지(Challenge)죠, 과제죠. 그걸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그 부분은 계속 염두해 인제 두는 거죠. 우리가 그걸 저희는 C4라고 하는데 정치 그걸 할 수가 있어요. C4로 등록을 하면 라비(lobby)도 가능하고 이런 식으로 할 수 있거든요. C4 단체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 필요한, 그건 인제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같이 논의를 해야겠죠.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하면 어떤 규모로, 어떻게 할 것인지, 우리가 그거에 대한 역량이 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면 뭐 C4 같은 경우가 가장 챌린지 중에 하나고 그 다음에 아쉽고. 왜냐면 한청련이 그렇게 문을 닫았기 때문에 저희두 책임감이 크죠. 그래서 그건 한청련과 같은 단체가 될 수는 없어요. 지금은 그런 정세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만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단체, 우리가 인제 필요하다는 거가 하나고. 그 다음에 인제 커뮤니티에서 필요로 하는게 뭔지에 대해, 따라서 활동 사업이나 활동은 달라지겠죠. 그 다음에 여기에 베이스를 둔, 뭐 커뮤니티 차원에서 예를 들면 하우징이 큰 문제가 너무 심해가지고 렌트 문제가 계속 너무 심하고, 그거 관련해서도 그거를 포커스로 해소 또 할 수 있는 거고. 뭐 그런 것들이 다 있는데 가장 그런 것들의 베이스로 깔리는 건 교육이죠. 왜냐면 윤선생님이 항상 강조하셨거든요. 운동은 곧 교육이고 교육가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이런 활동도 사실은 교육의 일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교육이라고 해서 꼭 앉아서 책을 보는 게 교육이 아니라 학습과 실천은 병행되어야 하는 거지만 학습도 교육의 하나로 볼 수, 실천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사람이 이런 것들 계속하고 큰 자극이 없는 한 나의 개인적이 감정이나 충격이나 경험을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잖아요. 특히 미국 사회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러면 그렇게도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거에 대해서 누가 뭐라 그럴 필요도 없구. 인제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계속 이런 일들을 해나가려면 제가 그 중요한 것중 하나는,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보람과 자긍심이거든요. 그런 것들이, 그리고 희망, 그런 것들을 꾸준히 제공해주는 게 교육가의 역할인데 저희가, 제가 그걸 못한 거죠, 한청련 식구들한테. 그래서 여러 가지 정세 변화로 점점 풀이 좁아지고 있는 상태에서 어느 때보다 중요한건 저는 그래서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청년들에 대한 교육, 그 다음에 커뮤니티에 대한 교육. 그래서 그 청년들을 꿈이죠, 키워서 키워내서 활동가로 만들어서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게 가장 큰 바램이고 꿈이죠. 그래서 그렇게 하도록 지금 할려고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데 챌린지가 많이 이제 있으니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저희 교훈, 그 얘기는 좀 하고. 저희 교훈 아시죠. 바르게 살자. 뿌리를 알자 그거잖아요 많이 들으셨을 거 아니에요. 그거를 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거를, 또 그게 우리 원칙이에요. 글고 그거는 점 5·18하고도 연결되잖아요. 바르게 살자는 항쟁정신하고 더불어 살자는 대동정신하고. 그래서 그거를 계속 유지하면서 죽을 때까지 할거예요, 아마. 무슨 큰 일이 없으면. 그러며는 크게 하는 건 아니드래도 그런 걸 할 수 있도록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면담자 : 그 저 선생님 하실 말씀 없으시다고 말씀해놓고. 구술자 : 너무 많이 했어요? 면담자 : 아니, 아니요. 말씀을 굉장히 잘 해주셨는데 혹시 지금까지 두어 시간 가까이 지금 말씀 하시면서 이 말을 쫌 더 하고 싶은 말씀 혹시 못 하셨다거나 혹시 뭐 더 하실 말씀이 있었는데 제가 질문을 못 드렸다거나, 그런 내용들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말씀을 좀 해주시고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는 걸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구술자 : 그러니까 지금 5·18재단에서 오셨잖아요. 이래서 5·18이 어떻게 영향을 끼쳤고 그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시려는 거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인제 해외에 있는 분들 각 개인들을 다 인터뷰를 하셨고 개인 분들이 뭐 이런 직 간접적인 경험을 하셨을텐데 제가 그냥 거기에 더 그냥 주제넘게 좀 더 얹는다면, 사실 한청련, 한겨레, 마당집은 5·18하고 떼놓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5·18의 파편이라고 할 수 있는 윤선생님이 여기 어떻게 오시게 되서 여기서 씨앗을 뿌린 것이 한청련, 한겨레, 마당집이거든요. 그르기 때문에 5·18이 어떻게 이 해외에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부분은 개인적일 삶 부분도 있겠지만 이 단체가 만들어져서 이 단체가 동포사회나 미주사회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저는 맞는다고, 크게 다르지 않는다고 생각 하고. 저희가 크게 모든 것을 뭐 바꿔 내거나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보람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활동들을 해왔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인제 동포사회, 쫌 눈에 보이는 예를 좀 간단하게 들자며는 저희가 이런 동포사회 활동을 하기 전에는 동포 사회 구성원, 커뮤니티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그 다음에 유권자 등록하시는 분들도 거의 없고. 유권자 등록하시는 분들은 또 다 공화당이시고. 그랬어요. 그리고 참여, 투표하시는 분이 7퍼센트도 안 되고 굉장히 그런 우리 정치가 이거하고 상관이 없는 거였는데 여기 저기 붙어 있는 거 보시면 아시겠지만 웰페어(welfare: 복지)와 같은 것들을 DC에서 아니 그니까는 이민자 그 반 이민정책을 하면서 저희가 들고 일어났었거든요 마켓 나가서 하는 것은 항상 하는 기본이구요 다른 단체들하고 같이 해가지고 뭐 워싱턴 포스트 얘기도 들으셨겠지만, 그런 것들 하구요, 여러 가지 활동들을 굉장 많이 해서 많은 호응들을, 왜냐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기들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호응을 안 해주실 수가 없어요. 그래거 그런 여러 가지 교육과 활동들을 통해서 지금은, 지금 유권자의 참여율이 92년에 7퍼센트 정도였다면 지금은 45, 한인들이 나갔을 때 45퍼센트정도 까지 올라가구요. 유권자라는 숫자 자체도 옛날에는 유권자 등록을 안 했죠, 유권자 등록을. 지금은 유권자 등록을 굉장히 많이 하시구요. 동포사외 내에서 이민 문제와 관련해서는 공화당 쪽 얘기보다 민주당 쪽 얘기로 그게 보편화 되있는, 그렇게 분위기가 많이 바꼈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뭐 그런 거에 대해서는 되게 자긍심을 가져요. 우리가 했던 일이 커뮤니티에 어떤 그런 생각들을 바꿔내는 데에 일조를 했구나 하는. 공헌을 했구나. 면담자 : 우리 재산에서도 처음 이곳에 5월 운동을 기록하러 올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바로 각, LA나 뉴욕이나 시카고에 있는 마당집, 그리고 또 한청련활동, 이게 말씀하셨듯이 5·18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런. 구술자 : 저희 태생이 그런 걸요. 면담자 : 관계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주로 저희 구술 대상자가 되고 거기서 인제 생산됐던 활동들 문건들이 저희가 수집하려고 하는 주요 문건들이 되는데 어찌됐건 이 한겨레, 아니고 한청련이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인제 그런 활동들 때문에 또 동포 사회 내에서 좀 좋지 않은 인식으로 인제 또 그렇게 일부에서는, 그리고 또 군사정권 시절에서 반정부, 반정부 단체로 이제 낙인을 찍히고 뭐 인제 그런 때도 있었거든요. 동포사회에, 선생님이 활동하실 때 동포사회 내에서,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일부 또 그런 시각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뭐, 빨갱이 빨갱이들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뭣도 있었을 거구요. 구술자 : 아주 많았죠 제가 처음에 민족학교 나갈때 저희 엄마가 아주 결사반대 하셨었거든요. 왜냐면 민족학교는 빨갱이라고. 일례로. 그니까는 그게 굉장히 보편화된 시각이었어요. 제가 활동할, 처음 가입해 활동할 때부터. 그래서 뭐 빨갱이 소동은 항상 뭐 있었고. 면담자 : 마당집으로 중심으로 이 민권센터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활동들을 하면서 좀 그런 인식들이 많이 변하지 않아나요? 구술자 : 바뀌었어요, 많이 바뀌어가지구 지금은 민권센터가 인제 자리를 잡아서 우리 이민자 권익을 위해 일하는 단체, 많이 그게 확산되고 중심을 잡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뭐 좀 이렇게 좀 그렇게 그러면 또 이렇게 하구 그런게 계속 있어요. 예를 들면 저희가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노동자 권리 프로젝트라 해가지구요 여기서 많은 분들이 임금을 못 받고 임금 띠이고 쫓겨나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분들은 돈도 없기 때문에 변호사도 살 수가 없어요. 저희가 노동자 권리 프로젝트를 통해서 변호사들을 대여섯 명이 일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의 얘기를 듣고 그분들의 입장에 서가지구 돈을 받아내는 거에 인제 그걸 해드리고 돈을 받아드리는데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그러면 인제 한인 그 소규모 업자 분들 같은 경우는 굉장히 디펜시브(defensive: 방어적)하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쟤네들이 나를 대상으로 해서, 그걸 어떤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의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저 빨갱이들 저거 그래서 그런다고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드라구요. 면담자 : 아직도 그런.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뭐 저희가 선생님께 좀 질문드리려고 하는 내용은 다 마무리가 되었구요, 혹시 뭐 다른 말씀 해주실 뭐가 없으면 여기서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구술자 : 감사합니다. 장광선 구술 녹취문 □ 개요 ○ 구술자 : 장광선 ○ 면담자 : 김경택(5·18기념재단 진실조사팀) ○ 구술일시 : 2014년 11월 16일 ○ 구술장소 : 미국 필라델피아 □ 녹취록 면담자 : 이 구술 녹음은 미국에서의 5·18 항쟁 및 이후 오월운동 등에 관한 장광선 선생님의 구술입니다. 면접자는 김경택이며 구술 일시는 2014년 11월 16일 오후 3시 30분입니다. 예. 선생님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구술자 : 반갑습니다. 면담자 : 그 예전부터 쭉 살아오셨던 얘기를 저한테 이렇게 편안하게 해준다고 생각을 하시구요. 너무 부담 갖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단 선생님 태어나신 해하고요, 고향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십시오. 구술자 : 네. 저는 그 해방 뒷 해 그러니까 46년, 1946년 8월에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서 인제 초등학교까지 나오고 그 다음해에 강진으로 이제 이사를 가가지구 강진 중학교하고 강진 농업 고등학교 까지 인제 다니고 대학은 못 갔습니다. 그리고 인제 면담자 : 선생님 장흥군 용산면에서 태어나셨는데 그때 좀 그 초등학교, 국민 학교, 당시는 국민 학교였는데 국민 학교 입학 후에 인제 강진으로 오신건가요? 구술자 : 아니, 국민 학교 끝난 다음에 좀 인제 집안 형편 변화가 있어서 인제 중학을 진학을 못하고 있다가 그 다음해에 제가 인제 강진으로 중학을 가고 저희 집 전체가 강진으로 이사를 하게 됐어요, 몇 년 후에. 면담자 : 고향에 대한 쫌 생각은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 그니까 저희 고향이 그, 좀 외지죠. 근데 인제 일반적으로 그 산악지대라 하면 임산물 같은 것들도 풍부하고 그러는데 거기는 산악지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야지대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제 노령산맥 끝 부분에서 작은 산들이 빙 둘러싸인 곳에서 분지 같은 곳이 있는데 그게 인제 용산면이거든요. 그 인제 거기에서 넘어가면 관산면인데. 관산면에는 그 천관산이라는 좀 아름다운 산이 있죠. 그래서 우리가 인제 소풍가면 천관산으로 많이 가고 인제. 그니까 저희가 태어난, 그 제가 태어난 용산면은 이 산업 시설 같은 것이 전연 없고 또 그 다음에 어떤 농업지대도, 지대라고 얘기하기도 어렵고. 삼림 같은 그런 자원도 없고 그래가지고 비교적 굉장히 가난한 그 곳이었어요. 면담자 : 부모님은 그럼 거기서 농사를 지으셨나요? 구술자 : 농사 그렇죠, 인제. 다른 어떤 산업이 없으니까. 그 지역 일대에 살고 있는 분들이 다 마찬가지죠. 농업이라 해도 대농은 없고 전부 인제 지금 얘기로 열 마지기 미만, 논 열 마지기 미만, 그 정도를 갖고 먹고 사는 그런 형편들이었죠. 면담자 :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술자 : 저는 이제 6남매 중에 맏이로 태어났었습니다. 면담자 : 그 나이 터울, 나이 차이 터울이라고 할까요? 구술자 : 세살 정도씩 터울이 지죠. 제 밑에 동생이 세 살 어리고 또 그 밑에 동생이 세 살 어리고. 이런 식으로 세 살 터울로 쭉 6남매인데 그니까 이제 막내가 아주 저기 저하고는 나이가 상당히 많은 차이가 나죠. 면담자 : 그 막내 분이 장광민 선생님이신가요? 구술자 : 예. 면담자 : 네, 시카고에서 뵙고 왔는데요. 네. 그, 그러면 장흥에서 용산면에서 거주, 사실 때는 밑에 동생이 막내까지는 아니었겠네요. 구술자 : 아니죠. 제가, 저희가 인제 강진으로 이사 온 후에 밑에 두 동생은 강진에서 태어났어요. 면담자 : 네. 초등학교는 용산면에 있는 용산 구술자 : 용산, 용산 그때는 용산 국민 학교 면담자 : 용산 국민 학교 나오셨구요. 그 선생님 아주 어렸을 때 그 이야기라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겠는데 인제 46년에 태어나셔서 한 다섯 살 정도, 한국 나이로 다섯 살 되던 해에 인제 한국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에 대한 기억이 쫌 있으신가요? 구술자 : 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연 없구요. 또 인제 저희 마을 까지는 전쟁에 대한 어떤 그런 특별한 피해 같은 게 없었어요. 그러니까 무슨 뭐 군인들이 몰려온다든지 몰려간다든지 이런 현상은 전혀 없었고. 제 기억이 인제 유일하게 남는 것은 인제 거기까지도 인민위원회가 전부 결성은 됐었어요. 인민 위원회가. 저희 아버지가 인제 인민 위원장을 맡으시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그 당시의 기억은 거의 없는데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전쟁이 끝날 무렵이었지 않을까 싶은데 한명이 그, 이 죽창인지 하여튼 뭔지 몰라도 맞아서 죽었어요, 논에서. 빨갱이로 몰려가지고. 죽었는데 그 논에서는 그 농사가 안 돼요. 한 몇 년간. 제가 그 일이 있은 후로 한 5,6 년을 농사를 못 지었든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랬거든요. 사람의 피라는 게 정말 독하다 그 후론 농사가 안 된다. 그런 얘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나요. 그 다음에 인제 그러니까 전쟁 후에 그 탄압 상황이 심해가지고. 빨갱이 사냥을 심하게 했었거든요. 그 인제 저희 집안 같은 경우는 인제 저희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시지는 않았지만 저희 인제 고모할머니가 옆 마을에서 사셨는데, 그 할아버지 동생이 옆 마을에 사셨어요. 근데 그 고모할아버지께서 인제 좌익 활동을 많이 하셨고 그 바람에 인제 고모할아버지의 아들, 그니까 저로써는 아저씨 되는 분이 인제 좀 피해를 많이 보셨어요. 그래가지고 걸핏하면 인제 지서에서 잡아가가지고 인제 할머니가 한 밤중에 뛰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오빠, 오빠 뭐 누가 잡혀갔는데 쫌 풀어달라고 사정하면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지서에 내려가셔서 통사정을 해가지고 데리고 나오고. 근데 얼마나 심하게 이 구타를 당하고 막 그러셨는지 한 몇 번 그렇게 왔다 갔다 하신 사이에 완전히 병 신이 되신 그런 분이 한분 계셨고 그런 분하고. 또 인제 그 할아버지 여동생이, 할아버지도 인제 4남맨가 되시는데 아, 육남매, 육남매 되시는데 여동생이 셋, 남자 형님이 한분, 그 다음에 동생이 한분. 이렇게 해서 인제 6남대 되셨어, 할아버지도. 그런데 이제 동생 또 한분 중에서는 아드님이 그냥 월북을 하셨어. 월북을 해가지고 그 고모할머니 집안도 풍지박산이 됐던 그런 기억이 나고. 그런 기억들이 조금 있어요. 면담자 :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는, 피해보다도 이렇게 이념적인 갈등에 의한 좀 이렇게 마을 주민 사이의 그런 게 좀 있었나 봐요. 구술자 : 그 사실은 제가 태어나기 이전 상황의 이야기들이죠, 말하자믄. 해방되기 이전에 독립운동 관계로 인제 왔다갔다하신 분들이 마을 어르신들 중에 한두 분이 계셨는데 그분들 인제, 저희 고모할아버지 같은 경우 그분들이 인제 지목의 대상이 되어가지고 그 다음에 인제 전쟁 와중에 있었던 그 보도연맹 사건 같은. 아버지도 인제 그런 데 연루되셔가지고 하튼 묘한 분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풀려 나오고 인제 이런 경험도 있고 그러는데. 그래서 그 전쟁으로 직접적인 어떤 피해보다는 그렇게 해방 이전부터 있었던 그 이념 갈등 , 이런 것 때문에 그것이 전쟁하고 맞물리면서 지속적으로 어떤 탄압의 대상이 됐지 않은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이제 사람들은 흔히 전쟁만을 가장 큰 피해로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전쟁은 핑계고 그 이전부터 그 조성되어 있었던 그런 어떤 이념 갈등이 민족적 비극을 이렇게 잉태시킨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면담자 : 부모님은 좀 어떤 분이셨나요, 선생님 생각하시기에요. 구술자 : 저희 부모님들은 굉장히, 그 아버님께서, 그러니까 해방 직전에, 해방 직전에 그 결혼을 하셨죠. 그때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셨어요. 근데 이제 이유가 뭐였냐 그러면 바로 인제 어머니가 그 옆 마을에 사셨는데 어머니가 두 살 위에요, 아버지보다. 근데 이제 어머니가 정신대 그것 때문에 차출에 끌려가게 되니까 다급하게 결혼을 시켜버리려고 인제 그러고 있는 차에 외할아버지하고 잘 알고 지내는 사이여가지고 그럼 인제 그렇게 해서 맺어주자 그래가지고 급한 결혼을 하신 거예요, 어렸을 때. 그렇게 해서 그니까 결혼 하신 다음에 한 오년 쯤 후에 저를 낳으셨으니까 결혼을 굉장히 일찍 하신 거죠, 아버지 어머니가. 그런 이유 때문에. 그래서 이제 두 분 다 이제 거의 무학이에요. 아버지는 겨우 그때 소학교 졸업을 하셨고 어머니는 소학교도 못 다니셨고. 그러니까 이제 저희 할아버지가 쪼끔 그 사상 이념이 좀 특이하신 분이었어요. 그래가지고 가르쳐야 된다는 그런 생각은 가지고 계셨지만 일제시대를 쭉 겪으면서 학교 보내면 말하자면 종놈 된다, 그런 생각 때문에 학교 보낼 생각을 안하신 거예요. 그니까 그걸 인제 저희 아버님께는 한 번도 불평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저희 작은 아버지는 그런 불평을 하시더라구요, 한번은. 그래서 배우지도 못하고 또 그 다음에 할아버지가 그 기회가 몇 번 있으셨어요. 뭐냐면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그런데 그런 걸 전부 박찬 거죠. 그때 할아버지하고 아주 가까운 분이 강진 군수를 하셨는데. 원래 할아버지가 이제 강진에서 사시다가 장흥으로 인제 처갓집 부근으로 이사를 오게 되신 분인데 군수를 하고 계셨는데 그 군수 하신 분이 차, 차씨였는데 그분이 할아버지 고향의 고향 바로 옆에다가 종각을, 그 뭐에요, 비각 같은 거? 가족들 저기 모셔놓고 제사지내는 제각, 제각을 지었어요. 큰 제각을. 그래가지고 그 관리를 저희 할아버지 집에서 맡으시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청년끼리 왔다 갔다 하면서 거기에 놀러오면 할아버지하고 같이 얘기를 하고 그러시면서 굉장히 친한 사이가 됐는데. 이분이 인제 군수를 맡으면서 할아버지한테 인제 그 마을 이장을 맡긴 거예요. 그래서 인제 할아버지가 이장을 하시면서 이룬 사업이 저수지를 만든 사업이었죠. 그래서 상당히 큰 저수지를 만드셔가지고 그 일대 농토에 물을 대는 사업을 하셨는데 그걸 인제 상당히 효율적으로 잘 하셨나 봐요. 그런 사업을. 그러니까는 인제 군수가 보고는 어, 좀 쓸 만하다 싶었는지 군청으로 불렀어요. 그래가지고 특채를 하겠다고. 근데 할아버지가 저수지 일을 그 하시면서 느끼셨는 모양이에요. 이게 뭐 순전히 말하자면 논밭 다 빼앗아가지고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이런 걸 하는가, 느끼셨는지 거부를 하신 거예요. 그 군수 제안을. 거부를 하시고 거기를 떠나셔가지고 장흥으로 이사를 와 버리신 거예요. 인제 그런 이야기를 작은 아버지가 하시더라구요. 하시면서 그때 차라리 그 군수 제안을 받아가지고 그 말직이라고 가지고 계셨으면 우리가 이렇게 까지 그, 이 말하자면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라는,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학교라도 다녔을 것 아닌가, 그런 말씀 하셨는데. 그래도 인제 학교는 보낼 수는 있었겠죠. 근데 할아버지가 안 보내신 거예요. 그리고 인제 계속 집에서, 그때는 인제 그 한자를 가르친 거야. 그 훈장이라 그러죠. 그 인제 마을청년들 모으고 주변 청년들 모으고 그래가지고 그 서당을 계속 하셨어요, 할아버지가. 서당을 계속 하셨는데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특히 인제 농번기 때는 못하고 겨울철에 인제 많이 그 서당이 활성화되었거든요. 그래서 인제 겨울 되며는 저희 집 조그만 사랑방에 한 2,30명 청년들이 모여서 공부를 해요. 그 틈에 껴서 인제 저도 같이 하고 그랬는데 그래서 할아버지가 인제 그 질이, 층이 전부 다르잖아요. 천자 할 사람, 뭐 소학할 사람, 대학 할 사람, 질이 전부 다른 사람들을 전부 인제 일일이 책을 거기서 복사를 해가지고 카피를 해서 나눠주시면서 인제 공부를 시킨 거이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인제 그 할아버지 밑에서 배웠던 사람들이, 마을 사람 젊은이들은 다 할아버지 밑에서 배웠잖아요, 공부를 했잖아요. 그분들이 인제 할아버지를 기념하는 그 인제 계를 모은 거예요. 계를 모아가지고 인제 그 해마다 쌀을 모아가지고 그 쌀을 인제, 재력이 많아지면 할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비석을 세우자, 그래가지고 비석계라고 계를 모은 적이 있었어요. 근데 할아버지는 인제 모르게 한거니까 할아버지는 그런 거를 전혀 못하게 하시고 또 그 다음에 이제 강이 인재 끝나면 강바친다, 그러거든요. 학기가 끝나면. 강 바칠 때는 인제 마을 사람들이 뭐 닭도 잡아가지고 죽쒀가지고 오고 그렇게 해가지고 잔치를 벌이고 인제 그런 것 까지는 기억을 하는데. 이런 걸 못하시게, 못하게 하니까. 젊은이들이 인제 몰래 그렇게 계를 모았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아버지가 인제 강진으로 인제 이사를 와버리시는 바람에 그것도 인제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죠. 그걸 인제 작은 아버지들이 불평을 하시더라구요. 그런 것도 있고 그랬는데 왜 그걸 챙기지 않느냐,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건 말하자면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뜻하고는 전연 맞지 않는 것이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무시해버리셨던 그런 기억이 나요. 그렇게 인제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사실은 이 교육에서 배제된 거죠. 그니까 현대식 교육에서 배제되고 농촌에서 밖에 나갈 그 어떤 계기도 못 만나시고. 그렇게 인제 지내시다가 인제 아버지는 이제 해방되기 직전에 빨치산 운동하시는 분들 심부름을 조금 하시다가 인제 어떤 계기로 인제 그 뭐에요, 징용, 그거를 인제 끌려가시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주변에 그 빨치산 운동하시던 분이 귀띔을 해주신 거예요. 가서 신체검사를 받게 되는데 그럼 엑스레이를 찍는다. 엑스레이가 나쁘게 나오면 안 들어가니까 담배를 마셔라. 담배를 물에다 타가지고 담뱃가루를 마시면 엑스레이 찍을 때 시커멓게 나오면 큰 병이 있는 줄 알고 거기서 빼줄 것이다 인제 그런 뒤뜸을 해주셨대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냥 가서 담배가루를 엄청 타가지고 마셔뻐린 거예요. 쪼끔만 마셨으믄 괜찮을지 모르는데. 그래가지고 거기서 안 끌려가고 나왔거든요. 나오고 인제 어머니하고 바로, 어머니는 인제 그 정신대 안 끌려가기 위해서. 그게 한 44년, 42년. 면담자 : 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요? 구술자 : 열여섯, 열일곱 때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인제 그때부터 이제 위장병을 앓게 된 거예요. 그 담뱃가루 때문에. 위장병을 앓고 시름시름하니까 이제 빨치산 운동 하시는 분들이 너는 따라다니면 짐만 되니까 따라오지 말아라, 그러고 심부름만 시키신 거예요. 마을에서 인제 뭔 일이 있으면 가서 뭣 좀 갖고 온나, 그러고 또 가서 이런 이야기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라, 하는 식으로 왔다갔다 심부름만 하시다가 해방을 인제 맞으셨는데 그때 얻은 병 때문에 평생을 위장병으로 그 사셨거든요. 그래서 인제 미국 오신 다음에 제가 인제 한 번은, 제가 그때 인제 여기 그 필라델피아 외곽지역에서 이제 살고 있었는데, 일은 뉴욕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해외한민보라는 곳에서. 그래서 아침마다 이제 여기서 기차를 타고 출근을 했었는데 아침에 일을 나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발목을 잡으면서 나 병원에 좀 데려다주고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언제나 한 번도 아버지가 당신이 아프니까 의사에게 데려다달란 말씀을 안 하신 분이거든요. 그냥 혼자 참고 약도 그냥 혼자 자시고 그 다음에 인제 뭐 풀뿌리 같은 거 캐가지고 담방약이라고 그러는데 담방약만 계속 드시고 평생을 사시듯, 사시듯 하셨는데 그 날 아침에 발목을 붙들고 의사에게 좀 데려다달라고 그러니 제가 너무 놀랐죠. 지금 나가야 일 시간 안 늦게 갈 수 있는데 싶었지만 할 수없이 아버지를 모시고 어, 그때 인제 서재필 의료원 의료봉사센터에 우선 말이 통하니까, 그 전까지는 의사에게 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디로 모시고 갈지를 몰라가지고 거리 모시고 갔어요. 아침에 그랬더니 그 아무도 없고 그냥 간호원 한 분이 안에서 문 열고 나오시더라고요. 나오시드니 아버지 상태를 보시더니 아무래도 여기서는 어떻게 그 의사가 나오신다하더라도 할 도리가 없을 것 같으니까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보십시오, 그러드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할 수 없이 인제 좀 크다는 병원 이쪽에 있는 메모리알 하스피털(Memorial hospital)로 모시고 들어갔죠. 응급실로. 그랬더니 와서 인제 모시고 들어갔는데 한참 후에 의사가 나오드니 아버지 어떻게 들어오시게 됐냐고 물어봐요. 그래서 아니 뭐, 상황을 설명했죠. 그래서 저쪽에 의사한테 갔다가 아무도 없어서 이쪽으로 오게 됐다, 그랬드니 아니 그거 말고 아버지를 업고 왔느냐, 뭘로 싣고 왔느냐 이걸 묻는다고 그래요. 아니, 아버지께서 걸어 들어가셨다고 그랬드니 깜짝 놀라는 거예요. 저 상태에서 걷는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피가 나오지 않아가지고 피 검사를 못한다는 거예요. 못한다고 그러면서 피를 세 봉다리를 수혈을 한 다음에 피를 뽑아가지고 검사를 한 거예요. 그렇게 피가 완전히 마르도록 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버텼냐, 인제 이런 질문을 하실 정도로. 그래서 인제 검사를 하니까 위암이라는 거예요. 그때. 그래서 인제, 그러니까 오랫동안 그 위장병을 앓고 계시던 게 암으로 전이가 됐는데 그거이 언제쯤 그렇게 암으로 전이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그 암에 커가지고 한꺼번에 다 절단을 할 수가 없으니까 한, 쪼끔만 일단 절단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아보자고 그렇게 해서 이제 수술을 일단 하시고 치료를 받으셨는데 그래서 인제 저는 이제 그 후로 아버지 돌보느라고 신문사 그만 두고 집에 내려와 가지고 인제 같이 지내면서 8개월쯤 후에 돌아가셨어요, 아부지가. 그러니까 제 부모님들은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인제 지금까지도 살아계시지만 정말 그 뭐라 할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면 무지랭이들이죠. 전혀 배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회적인 어떤 뭘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재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 분들이셨습니다. 그런 분이셨으니까, 특히 아버지는 그렇게 스스로 아프시니까 활동 같은 것도 거의 못하시고 밖에 그 대외 활동이 전연 없으셨던 분이구요. 그런 영향을 자식들도 많이 받았죠, 사실은 면담자 :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살아 계시다구, 굉장히 그럼 연로하시겠네요. 구술자 : 어머니는 지금 그니까 아흔 셋 되셨구요. 지금 인제 메릴란드에 있는, 매릴란드에서 지내고 계시는데 고쪽에 치매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그 한인 센터가 있어서 그 부근으로 어머님이 가셨어요. 면담자 : 선생님 인제 다시 쫌 예전 얘기로 좀 돌아가서 선생님 국민 학교 시절 얘기로 다시 쫌 돌아가서 말씀을 드리면, 국민 학교는 장흥 용산에 있는 학교를 나오셨다고 하셨잖아요. 그 때가 인제 전쟁 이후죠, 한국 전쟁 이후에 입학을 하신 거죠. 구술자 : 그러죠, 이후죠 전쟁 다 끝난 다음에 면담자 : 끝난 다음에 입학을 하시고 그때 뭐 좀 기억에 남는, 남으신 것들이 있나요? 구술자 : 거의 뭐 기억은 안 나는데 그니까 저희 마을뿐만이 아니라 인제 강진으로 이사 온 후에도 살던 마을에 전기가 안 들어왔었어요. 전기가 안 들어오는 마을이었고. 그 다음에 이제 아시겠지만 기차도 주변에 지나가는 곳이 없었고 기차를, 서울로 기차 타러 갈려면 영산포까지 나가가지고 인제 기차를 타야 되고. 어, 마을에 지나다니는 버스가 아마 그 당시에,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당시에는 일주일에 두 차례 있었든가, 그랬든 거 같애요. 면으로. 그니까 면 소재지로 지나가는 버스가. 저희 마을까지는 전연 없고. 어, 그런 그 오지였고 그 다음에 이제 어렸을 때 생각에는 큰 학교였죠. 인제 학생 수가, 저희 때가 그러니까 가장 많은 수였지 않는가 싶을 정도로. 저희가 인제 두개 반이었으니까. 1반, 2반, 그렇게. 면담자 : 학년마다요. 구술자 : 예, 아니 학년마다요. 우리 이전에는 반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선배 때까지는 일반 밖에 없었는데 우리 때부터 1반, 2반 두 반으로 나눴을 정도니까 우리 때가 해방 후 세대들이 가장 많은 그 수를 했을 때였고. 근데 인제 학교에 이 쪼그마한 풍금이 하나 있었어요. 아주 낡은 풍금인데. 발로 이렇게 밟아가지고 두들겨, 건반을 두드려서 하는 풍금이 하나 있었는데. 노래를 배울 때는 인제 그 풍금을 찾아서 교실마다 돌아다니고 어디가 있는가 봐가지고 애들이 인제 뜸고 와가지고 인제 노래를 부른 기억이 조금 나고요. 한 겨울에는 너무 추웠어요. 그래서 인제 저희 집에서 학교까지 내려가는데 거의 한 2킬로, 2킬로 정도 되는 촌길인데 너무 추워가지고 집에서 못 가게 했거든요, 학교를. 못가고. 근데 인제 갔는데 나온 애들이 없는 거예요. 두 명인가, 세 명 밖에 안 나왔어요, 저기 학교에. 그래가지고 선생님이 애들 기다리다가 아무도 안 나오니까 너희도 돌아가라, 그래가지고 근데 인제 돌아가라 하려고 보니까 날이 너무 추워서 보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리와, 그래가지고 교무실에, 인제 선생님들만 모이는 교무실에 데리고 들어가셔서 톱밥으로 불, 피드라고요, 난로에. 그 옆에 앉혀 놓고 불을 쬐게 하시는 거 그 기억이 쪼끔 나고요. 그런 정도로 학교 자체도 그 당시에는 농촌학교가 혜택을 거의 못 보는, 문화적 혜택이랄지 국가적인 재정 혜택이랄지 이런 걸 거의 못 보는 학교였죠. 면담자 : 그렇게 초등, 국민 학교까지는 장흥에서 이렇게 하시다가 강진으로 이사 가게 좀 가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구술자 : 강진으로 이사를 가게 된 특별한 계기는 아니고 이제 아버지가, 그러니까 인제 할아버지가 갑자기 고향을 떠나가지고 이제 할머니가 인제 장흥 용산 거기 계시던 분이었는데 그 인제, 그러니까 처가 부근으로 가신 거죠. 가셨는데, 할머니 집은 부자여요. 굉장히 부자여요. 그 마을에서 제일 부자였어요. 그래서 인제 그때 당시에 우리 진외가죠, 그러니까, 할머니 친정이니까. 진외가만 논이 구십 마지기 정도 됐어요. 구십 마지기가 되고 나머지는 전부 열 마지가 대서마지기 그 정도 집안들이었고 그 구십 마지기 정도 되는 논을 가지고 계신 진외갓집 만이, 또 진외갓집 하고 그 몇 집만이 기와집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인제 초가집이었는데. 그래서 그 아저씨 댁에서만, 진외가에서 쪼그만한 이 정미소를 마을에서 운영을 하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인제 아버지가 가끔 거기 나가셔서 일도 하시고 그러셨는데, 설움을 많이 받으셨던 것 같아요., 저희 생각에. 인제 그러니까 그 우리 민족처럼 따뜻한 민족도 없지만 우리 민족처럼 배타적인 민족도 없잖아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니까 타관 사람이라고 그러죠, 타관 사람. 그 외지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타관사람이라고 그러면서 굉장히 제외를 시켜요, 배척을 시켜요. 그러니까 어떤 논일을 할 때에도 특히 아버지가 인자 몸이 약해가지고 일을 제대로 못하시니까 그랬겠지마는. 배체 시키는 거예요. 그니까 이제 일할 사람 구하기도 굉장히 어렵고 참 어디 나가서 자유롭게 뭐 하기도 어려웠고 물론 이제 진외가 덕분에 붙어살기는 살았지만. 그렇게 되니까 아버지가 자꾸 옛 고향을 가고 싶어 하신 거예요. 아버지는 인제 거의 인제 결혼하시면서 결혼하시기 직전에 그쪽으로 이사를 할아버지 따라 이사를 오신 거니까, 가시고 싶어 하신 거예요.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바로 그냥 옛날 고향 생각해서 강진으로 다시 와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강진으로 오게 됐죠. 면담자 : 그럼 국민 학교까지 마치시고 중학교 다니실 때 이쪽으로 인제 이사 오신 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그래서 중학교는 강진에 있는 면담자 : 강진 중학교. 강진 중학교를 나오시고. 구술자 : 그때 인제 그 이야기도 참, 제 개인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용산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했어요. 못하고 인자 집안사정으로 일 년간 인제 있다가 그다음 해에 이제 광주. 저는 인제 조금 배우고 싶다 그런 생각 때문에 광주에 가가지고 장학 제도가 있는 학교를 찾아보니까 사리지오,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리지오 중학교가 그때 생긴 지 얼마 아 안 됐었는데 거기에 그 장학제도가 좋다고 선생님들이 그러시드라구요. 그래서 인제 사리지오 그 시험을 봤어요, 사리지오에. 그래서 거기 합격해가지고 들어가게 됐는데 그 인제 입학식하기 전에 교과서를 배부해주고 그러드라고요. 물론 돈 주고 교과서 값을 다 내는데. 책도 다 받아가기고 거기다 내 이름까지 다 쓰고. 그러고 인자 다음날 입학식 날인데 할아버지께서 인제 찾아오셨어요, 광주로. 집에서 인제 회의를 하셨던 모양이에요. 근데 도저히 광주로 보낼 수 없다, 형편상. 이 애 하나 가르치자고 다 굶어죽을 것이냐. 인자 이렇게 작은 아버지들도 인제 반대하시고 그니까 그때 저희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 할아버지 세분, 결혼하신 작은 할아버지 한분, 결혼 안 하신 작은 아버지 두 분, 그 담에 고모가 세분 이렇게 같이 사셨거든요. 같이 사셨기 때문에 그 좁은 집에서 그 땅도 얼마 되지 않은 논 가지고 같이 사시다 보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광주까지 또 제 학교 보낼라믄 하숙비 보내야지, 또 학비 또 보내야지, 너무 벅차다 그래가지고 데리고 내려오기로 결론이 나신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할아버지가 오셨어요, 저를 데리러. 할아버지가 어, 아무래도 광주서는 안 되겠으니까 내려가자, 그러신 거예요. 할아버지가 내려가자는데 제가 어떻게 거부를 해요. 그래가지고 그날 교과서를 다시 학교로 가가지고 반환을 했는데 참 받아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인제 그때 냈던 교과서 값을 다 돌려주시더라고. 뭐 학비는 그때 인제 장학 그거에 해당이 되가지고 학비는 안 냈었는데 교과서 다 돌려보내고 인자 하숙집에서도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인제 그냥 알았다고 그러고 남은 쌀 돌려주더라고요, 또. 그래서 인제 할아버지를 따라서 다시 인제 내려왔는데 할아버지가 정말 처량하셨겠죠. 걸어오시드니 한참 말없이 걸어가시더니 한참 가다가 “쩌이도 나 같은 분 한분 계시다,” 그래요, 그래서 난 무슨 말씀인고 그러고 “어디요?” 그랬더니 “저 앞에 봐라.” 그러더니 거기에 두루마기를 입은 영감님이 한분 걸어가고 계시니까. 그때 보니까 할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계신 거죠, 제가 봤을 때. 아무도 광주서 그때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사람을 못 봤는데 할아버지가 인자 그게 인자 보이신 모양이에요. 그 처량하신 그것을 그렇게 표현을 하시드라고요. 그 인제 따라 내려와 가지고 장흥이니까 장흥 중학교를 들어가려고 가서 인제 장흥중학교에 알아보니까 할아버지가 알아보니까 학교에서 거부를 하는 거예요. 우리 학교에 시험을 보고 떨어진 애들도 많은데 시험도 안 본 학생을 너 줄 수 없다, 그래가지고 거부를 하신 거예요. 그니까 인제 그래서 장흥 중학교 못 들어가고, 그래서 인제 강진으로 와가지고 할아버지 고향이시니까 인제 아는 분들도 그래도 인제 계셨던 거예요. 그래 인제 강진에 인제 중학교에 아는 분이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통사정 얘기를 하니까 알겠다고 그러면서 받아준 거예요. 그래서 인제 중학교 시험도 보지 않고 중학교 시험도 강진서는 보지 않고 들어갔죠. 그래서 인제 강진으로 중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인제 그렇게 되니까 아버지가 부랴부랴 1년 후에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강진으로 아예 이사를 와버리신 거죠. 면담자 : 그러면 처음 강진중학교를 들어가셨을 때는 어디에서 살았나요? 구술자 : 거기 이제 작은 아버지가 강진에 계셨거든요. 그래서 거기서도 한 4키로 됐을 거예요. 면담자 : 학교까지 거리가요? 구술자 : 학교까지. 4키로 통학한 거죠. 근데 그 많았어요, 그 정도 거리를 걸어서 다니는 애들이 많았어요. 면담자 : 한 시간 정도 걸어가지고요. 왔다 갔다 하셨겠네요. 구술자 : 그러죠. 들길을 걷는 거를 제가 그래서 좋아해요 면담자 : 중학교 시절에 좀 다른 어떤 기억에 남으실만한 것들은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제가 참 이게 제가 그 선생님 존함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데 그 후론 한 번도 선생님이라고 불러드리고 싶지 않는 기억이 있는 게 교장선생님이 손방헌 선생님이셨는데 제가 인제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교서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근데 그때 인자 5.16 군사 구테타가 일어난 차해였는데 면담자 : 중3때? 구술자 : 예, 중3 학교 올라가가지고 바로. 문예지를 만들면서 그때 인제 그 저희 학교에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오신 여선생님이 두 분 계셨어요. 인제 남학생 학교였거든요, 남자만 다니는 학교였는데 강진중학교가. 그랬는데 그 남학생 학교에 여선생님이 두분 오셨는데 한분은 인제 영어선생님이고 한분은 국어선생님이셨거든요. 그 국어 선생님이 허숙자 선생님이신데, 자기가 사범학교 졸업하자마자 첫 부임지여서 부풀었겠죠. 꿈에 부풀어가지고 학생들 모아놓고 뭘 했음 좋겠는가 하는 것을 구상을 하고 있었는 모양인데 그때 제가 우리 문예지 한번 만들어봅시다. 인자 그랬드니, 아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그러면서 인제 문예지를 한번 만들자 그래가지고 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애들한테 글을 모집하고 그래가지고 그때는 인제 등사판, 그 손으로 이제 원고지에 글씨를 긁어가지고 이렇게 밀어서 만드는 인제 그것이 학교에 한대 있었는데. 제가 인제 한 몇 일 밤을 인제 세가면서 글을 등사지에다 해가지고 문예지를 하나 만들었어요, 쪼끄만 하게. 만들어서 너무 기쁘잖아요. 인제 각 교실마다 열권씩 그렇게 배부를 해가지고 읽어봐라 배부를 하고 그랬는데 그 다음날 학교 갔더니 교장실에서 부른 대요 저를. 그래서 교장실에 딱 들어갔더니 그 허숙자 선생님이 발발발발 떨고 이라고 계시고, 교장선생님이 아주 그냥 엄청 화가 나 계시는 표정으로 제가 들어가자마자 그 지휘봉 같은 거 있죠, 그 걸로 머리를 막 때리시는 거예요, 제 머리를. 너무 황당하잖아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들어가자마자 얻어맞으니까. 그래가지고 머리를 감싸 안고 왜 그러시냐고 제가 그냥 항의를 하니까는, “이 섀끼 누구 죽일 라고 그러냐”고 막. 그러는 거예요. 갑자기. “이 섀끼 누구 죽일 라고 그러냐”고. 너무 내가 황당해갖고 있는데 선생님이 탁자 욱에서 그 교지를 몇 장을 딱 떠들드니 그걸 마크를 하나 딱 해놨더라고요. 그 마크를 보니까 새벽이라는 그 시에요. 새벽. 누구 죽일 라고 이런 글을 실었냐는 거예요. 그러고 또 한참 돌리니까 동무라는 데다 똥그라미 쳐놓은 거예요. 애들이 말입니다. 그, 그 새벽인가 동문가 이걸 쓰는 애들이 하나는 일학년생이고 하나는 이학년생이었어요. 저는 삼학년이고. 일 학년짜리가 동무라고, 그때 우리는 동무라는 말이 전연 껄끄럽지 않은 말이었잖아요. 그리고 교과서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고. ‘동무 동무 새동무’ 이런 게 교과서에도 나왔었고. 아무 이상이 없는데 그걸 일 학년짜리가 글을 쓰면서 동무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거기가 똥그라미, 빨간 걸로 똥그라미 쳐놓고. 그 다음에 이 학년짜리가 무슨 수필을 쓰면서 새벽이 어짜고 저짜고. 새벽을 또 써놨는데 이걸 쳐놓고 그래갖고 누굴 죽일려고 그러냐고 다짜고짜 막. 면담자 : 새벽은 왜 그랬나요? 구술자 : 모르겠어요. 나 도대체. 왜 그랬는지 난 모르겠는데 다짜고짜 막 머리를 때리니까, 더 이상 무슨 물어볼 수도 없잖아요. 그러고 인제 그 담당 선생님, 국어 선생님은 처녀선생님이 초임 부임을 해가지고 그런 일을 당하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냥 떨고만 계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당장 그 배부한데 교실마다 다 돌아다니면서, 몇 권 만들었어? 그러면서 그놈 전부 걷어 들이라는 거예요. 너무 황당한 거예요. 면담자 : 내용이 쫌 그런 내용이 있었나요? 구술자 : 아니요, 글쎄 있었다 할지라도 있었다 할지라도, 애들이 쓴 건데 일학년 이학년 삼학년 중학교 애들이 쓴 건데. 그게 무슨 의식이 있어가지고 쓴 거겠어요. 아니면 특별히 누구를 모함하기 위해서 쓴 거겠어요. 그런데 선생의 시각이 그렇드라는 거예요. 교장 선생의 시각이. 그래서 인제 제가 울면서 교실마다 다니면서 그 배부했던 문예지를 전부 수거를 했는데 한권이 부족하더라고요. 한권이 걷히지를 않아요.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나도 인제 화가 너무 나가지고 그냥 전교생을 전부 그 운동장에 집합시켜가지고 기합을 준 기억이. 3학년애가. 문예지 한권 안 나온 것 때문에. 그 인제 한 권 안 나온 거는 어쩔 수 없고 나머지를 전부 인제 걷어가지고 교장실로 갔더니 가지고 따라와, 그러더니 소각장으로, 쓰레기 소각장으로 가더니 거기다 쳐놓고 불지르라는 거예요. 그걸, 그걸 내가 다시 태웠잖아요. 내 손으로. 그러면서 내가 그때 느낀 것이, 이게 교육이란 뭐이냐, 그 어린 마음에 말이죠. 교육이란 게 뭐이냐. 이런 게 아주 너무, 너무 뼈저린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날 그, 그 아침에 그걸 태우면서 거기에 앉아서 하루 종일 교실을 안 들어갔어요. 그랬드니 수업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들이 애들을 보내가지고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내가 안 들어갔어요. 그 후로부터는 공부를 안 한 거예요. 인제 사실은. 공부를 거절하고, 공부를 일절 안 해버리고. 그니까 이제 고등학교도 갈 수가 없었는데. 면담자 : 선생님 잠시 만요 중학교를 선생님 들어가신 연도가 기억나시나요? 구술자 : 60년에 들어갔죠. 4.19가 일어난 해에. 그래가지고 그 다음 해에 인제 5.16이 일어났잖아요. 일어나니까 5.16이 일어난 일 년 후에 제가 3학년이 되가지고 그 문예지를 만들었는데 인제 그 사단이 면담자 : 그때 60년 4.19 당시에 좀 학교 학생들 사이에도 좀 어떤 그런 활동들이 있었나요? 구술자 : 촌이었기 때문에 없었어요. 전연 그런 거의 그런 것도 없었고 5.16이 일어나도 거의 뭐 면담자 : 그런 내용들을 듣고는 계셨죠? 구술자 : 그렇죠, 내용은 듣고는 있었죠. 그때 제 기억이 4.19 딱 일어났는데 4.19 일어났을 때 데모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우리 마을에서. 그 말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우리 마을에서 딱 그 우리 그 저기 진외가, 진외가 아저씨가 신문을 보고 있었거든요. 신문을 보고 계셨고. 그 옆에 우리 진외가 집안인데 한분이 외지에 나가서 대학을 다닌 분이 한분 계셨어요. 그분이 인제 라디오를 가지고 계셨어요. 글래서 인제 마을 사람들은 항상 우리 진외가에 모여가지고 그 신문 읽은 소식 듣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라디오 같이 듣고 인제 그러던 때거든요. 근데 할아버지가 굉장히 이상한 거예요. 그 신문에 데모 뭐 4.19 데모 어짜고 나오니까. 그 말을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르시겠다는 거예요. 아무리 한자로 그, 그걸 인제 할아버지는 인제 한학을 하신 분이니까, 해봐도 데모라는 말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그게 무슨 말일까 궁금하신 거예요. 그래가지고 대학 다니는 그 아저씨를 불러가지고 물어보시더라고. 데모란 게 뭔 말인가? 이거 한자로는 도대체 안 나오는 말인데. 그러니까는 예, 맞습니다. 그건 한자말도 아니고 우리말도 아니고 그건 외국 말입니다, 그러고 설명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런 기억이 인제 날 만큼 그, 저희가 살던 지역이나 그런 데서는 거의 그냥 모르는 거죠. 알 수도 없고. 그런 것이 마을마다 홍보되지도 못했고. 면담자 : 인제 중학교 3학년 때 인제 박정희 정권이 인제 5.16으로 들어서게 됐고 구술자 : 2학년 때, 2학년 때 들어서가지고 면담자 : 61년 아닌가요. 구술자 : 예 61년에. 면담자 : 아 예, 그때가 2학년 때 구술자 : 그렇죠, 2학년 때 5.16이 일어났고, 5.16이 일어날 때는 정신없이 거의 뭔지 모르고 그거이 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왜 일어난 건지, 그런 역사적인 그런 것도 전연 거의 느끼지 못하고 선생님들 설명만 들을 수 있는. 촌 학교에서는 다 그랬으니까. 그러고는 인제 3학년 올라가서, 그니까 5,16 일어난 뒤로 일 년 후에 그런 그 교육이란 게 뭔가 하는 것 때문에 내가 회의를 느꼈던. 면담자 : 교육 내용이 좀 바뀌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구술자 : 모르겠어요. 그 어렸을 때고 그러니까 어떤 내용 자체가 바꼈는지 그런 건 모르는데 교육 지침은 많이 바꼈겠죠. 왜냐 그러면 이제 무슨 그 당시에 그 여러 가지 정권에서 지배하고 싶은 방향으로 교육을 시키는 그런 방침은, 교육 방침은 바꼈을 건데. 내용이 어떻게 바꼈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면담자 : 인제 고등학교는 그럼 구술자 : 그래서 이제 중학교를 인제 마쳤는데 마치고 그냥 거의 제가 인제 이 교육 같은 거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기 때문에 학교 갈 생각이 전연 없었죠. 전연 없었고 인제 그냥 방황하고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선생님들이 저를 예뻐하셔 가지고 그래도 아무리, 아무리 건성으로라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된다, 그래야 니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억지로 인제 그 바로 인제 강진중학하고 바로 붙어 있는 강진농업고등학교를 집어 넣어주신 거예요. 그래서 인제 농고를 다니게 됐는데 그니까 고등학교 때... 면담자 : 바로 졸업하시고 들어가신 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졸업 하고 선생님들이 하도 그냥 붙잡고 넣어 주셔 가지고. 그니까 그때도 고등학교 때도 시험도 안 보고 인제 바로 고등학교를 들어가 가지고. 고등학교 때는 인제 농업학교기 때문에 농업 실험 포장들이 많이 있었어요. 인제 거기에 인제 우리 과가 인제 세 개가 있었는데 농과, 임과, 축산과, 이렇게 세 개가 있었어요. 저는 인제 농과에 들어가 가지고 그 농업 포장들이 몇 개 있었어요, 벼농사 포장, 그 다음에 인제 그 약학 포장이라는 게, 약초 포장이라는 게 따로 있었어요. 제가 인제 약초 포장에 가가지고 고걸 맡은다 그러면서 거기 관리하고 담당하는 학생 하나는 거의 수업을 안 받아도 면제를 해줬어요, 학교에서. 그 핑계로 약초 포장 맨날 거기 가서 노느라고 거의 그 학습을 참여를 안 했죠, 교실을. 그래서 한 번도 제가 면담자 : 포장을 해서 이렇게 파는 건가요? 구술자 : 아니, 아니, 아니. 실험용으로, 학습용으로 포장 관리를 하면서 거기서 재배를 하고 보여주고 이런 거죠. 거기서 나온 생산품들은 뭐 선생님들이 가져다 쓰시고. 주로 인제 교장 선생님이 갖다가 쓰고 그러는 거죠. 거기에 우리가 인제 차, 차밭도 있었는데 거기에 해마다 봄이면 차 잎 따가지고 차 만들어서 뭐 교장선생님이 교육청에 보낸다든지 이런 식으로 다 쓴 거죠. 그 이제 제가 그거 관리를 전부 총괄하면서 그 핑계로 공부를 안 한 거죠. 그니까 저는 학교 다닐 때 책가방을 들고 등교해본 적이 없어요, 고등학교 때. 중학교 때 일학년 때 이학년 말고는. 삼 학년 때부터는 책가방을 들고. 그만큼 뭐랄까 미 무식했죠. 제가. 그래서 지금도 무식한 거죠 그 피해로. 면담자 : 그때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내가 앞으로 뭐가 좀 돼야겠다, 뭘 좀 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들은 좀 있지 않으셨나요? 구술자 : 지금 참 이상하게요, 지금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분명히 있었을 건데, 말하자면 꿈이랄지 포부랄지 이런 게 있었을 법도 한데, 어렸을 때니까. 아주 어렸을 때에는 내가 뭘 꿈꿨는지. 그때는, 아주 어렸을 때는 제가 언변이 좋았던 것 같애요. 말을 잘했던 것 같애요. 그래가지고 인제 초등학교 다닐 때는 3학년 때부턴가 웅변을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인제 웅변대회 나가면 상을 타오고. 그러니까 5학년, 6학년 때는 대단히 그 웅변 그런 걸로 해가지고 글 쓰고 뭐 이런 것은 잘 했던 것 같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굉장히 그것 때문에 귀여워해주셨고 또 인제 글 쓰고 이런 것도, 시조하는 거 이런 거 할아버지가 많이 인제 가르쳐주셨거든요. 그랬는데 할아버지가 인제 나중에는 그니까 그거이 할아버지 그 기본적인 의식이 그렇게 형성됐겠지만 교육에 대한 불신이 할아버지 때부터 인제 있었던 거거든요. 일제를 지나면서 그런 게 됐겠지만. 5학년 땐지 4학년 때였는지 모르겠어요. 삼일 그 기념식에 간다고 인제 그때는 인제 용산 국민 학교면 용산면 관내에서 전부 용산 국민 학교 교정으로 모여가지고 기념식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인제 용산에가 분교가 두개가 있었는데 그 분교에서도 인제 학생들, 5학년 6학년 학생들 끌고 오고 면사무소 직원들, 그 다음에 각 관공서, 우체국이 하나 있었는데 우체국 직원들, 지서 직원들 전부 인제 용산 국민 학교 교정에 모여서 삼일절 기념행사를 했었어요. 각 마을 이장들 전부 다 오고. 근데 그때 삼일 기념식을 딱 끝나고 집에를 가니까 할아버지가 부르시더니 물어요. 오늘 누구누구 와서 무슨 얘기 하더냐 그래서 인제 제가 그 기념식 상황을 할아버지께 설명을 드렸죠. 그래서 면장님이 축사를 하시면서 독립운동을 위해서 몸을 바치신 분들을 우리가 기려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런 이야기를 드렸더니 할아버지가요, 한숨을 푹 쉬시면서 그놈의 자식이 독립운동 다 잡아 죽인 앞잡이 노릇 한 놈이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 할아버지 의식은 배우며는 그렇게 된다, 이런 의식이 있어가지고 안 가르치셨는데 그래서 인제 마을 사람들 모아놓고 그냥 한자하고 소학, 대학, 이런 것들, 그러니까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되느냐 이런 것만 가르치시다가 제가 인제 국민 학교 들어가게 되니까는 못 배우게 한 거예요. 한자도 못 배우게 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저도 한자를 몰라요. 그 들어가기 전에 제 생각에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띠었어요. 그래가지고 강을 바쳤거든요. 그니까 강을 바친 담에 책 안보고 하늘천따지부터 해가지고 마지막까지 다 인제 외우는 걸 그걸로 인제 천자문 띤 사람은 그걸로 강을 바치는데 그걸 했거든요. 그래가지고 인제 우리 어머니가 닭죽을 쒀가지고 마을 사람들한테 잔치를 베풀고 했던 이런 기억이 나는데 할아버지가 국민 학교 막 들어가니까 책을 감춰뻐리시고는 못 배우게 한 거예요. 한자도 못 배우게 해. 그러고 왜 그랬을까, 난 늘 그런 생각을 했는데, 5학년 때 그 삼일 기념식 그거 말씀하실 때 제가 그걸 깨달았어요. 아,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예 교육하고 교육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계시구나, 이런 걸 느꼈고. 그 후로 할아버지가 한번 인제 저를 선산에 데려가셔 가지고 강진에 인제 선산이 있었는데 선산에 데려가셔 가지고 선산이 인제 할아버지가 만든 저수지 위에 있어요. 그 저수지를 내려다보시면서 인제 그 너머에가 강진 우두봉이라는, 강진읍에서 읍 뒤에 있는 산이 있거든요. 산 봉오리 이름이 우두봉이데 우두봉을 쳐다보시면서 자 우두봉에서 삼일 운동할 때, 그 뭐라고 그래, 봉홧불, 봉홧불이 올라갔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그때 우리가 사람들이 없어서 만세는 참여를 못하고 그래서 강진서 여덟명 만세 참여를 했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시드라고. 봉화 올린다는 말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아마 그런 어떤 영향 때문에도 교육에 대한 어떤 환멸을 많이 느꼈었는데 그래도 인제 초등학교 다니고 나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제가 글을 쓴다든지 웅변을 잘 했기 때문에 어떤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애. 나도 한번 정치인이 되겠다, 그런 포부를 내가 그때는 꿈꿨던 것 같애요. 그런데 중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생각이 안나요. 뭘 내가 희망했었던가. 그런 것도 생각이 안 나고 아무것도 생각이 나는 것이 없어요. 공부 자체를 거부해버렸기 때문에. 인제 겨우 어떻게 졸업장은 주더라고요. 또 인제 고등학교 3학년 되니까 그 1,2학년은 허비를, 그 이 약초 포장 거기 가서 포장 관리로 인제 허비를 해버리고 3학년 되니까 무슨 프로그램이 있었냐면 그때 새로 생긴 프로그램 중에서 연수프로그램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개발을 했어요. 면담자 : 연수 구술자 : 예, 연수 프로그램. 그것이 인제 뭐냐 그러면 3학년 애들을 실지로 그 실무를 담당할 수 있는 그런, 그런 기관들에 보내가지고 실습을 하게 하는 그런. 그렇게 6개월을 하고 오게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래 옳다꾸나 됐다 그래가지고 제가 인제 그걸 인제 신청을 해가지고 농촌 진흥원으로 인제 연수를 떠나뻐린 거예요. 학교서. 한 6개월은 그렇게 해갖고 하교를 전연 안 갔고. 진흥원에서 인제 그 화학 실험실 거기 들어가서 심부름 해주고 그런 활동을 하면서 학교를 안 가고. 인제 6개월이 넘어가니까 학교로 다시 돌아와서 나머지 6개월은 공부를 해야 되는데 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인제 기냥 안 가버린 거야, 학교를 무조건. 안 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방랑하고 보내버렸는데 졸업 때가 되니까 선생님이 나오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도 나오라고. 아니 내가 뭐 학교를 안 다녔기 때문에 졸업할 수 없잖아요. 그랬더니 그래도 나와 임마, 그래서 학교를 나왔더니 졸업장을 주더라고요. 면담자 : 거의 뭐 학교랑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학교랑은 좀 담 쌓으시고 고등학교 때는 그러셨네요. 구술자 : 제가요, 그러니까 저보고 저희 후배가 지금도 미국에 와있는 후배가 하나 있는데 저 꼴통 저 꼴통, 그런 다고. 하여튼 학교 다닐 때도요. 중학교 1학년 때 교모를 사잖아요, 모자. 교모를 샀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산 그 교모를 쓰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거 하나를 쓰고 살았어요.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머리에 안 맞으니까 꼭대기만 붙은 거예요. 그러고 인제 검정 모자가 색이 누렇게 바래가지고. 그니까 이제 내 후배 하나, 지금 와있다는 후배 하나가 졸업하니깐 그랬어요. 형 그 모자 나한테 물려줘. 그 모자 물려달라는 애가 세 명이 있었어. 근데 누구한테 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인제 학교 갈 때 운동화를 꼭 신어야 돼. 왜 그런 교칙을 만들었는지 난 지금도 이해를 못해요. 운동화를 꼭 신고 가야되는데 나는 항상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갔거든. 그러니까 1학년, 2학년 때는 앞에서 3학년 규율부 학생들이 지키고 있잖아요, 문 앞에서, 교문 앞에서. 그래가지고 교복이 삐뚤어졌다든지 뭐 모자가 삐뚤어졌다든지 뭣을 안 찼다든지 그러믄 잡아가지고 벌주고 막 그랬잖아요. 맨날 걸린 거예요, 나는 날마다 걸리니까 날마다 잡으니까 귀찮으니까, 야야 너 이시끼 저리가, 나중에는 그 규율부 그 형들이 그냥 빼주고. 그러고 인제 규율부에 안 걸리기 위해서 일부러 지각하고 인제 규율부 다 들어간 다음에 학교 들어가고. 면담자 : 고무신 신고 오면 안 되고 무조건 운동화를 신어야했나요? 구술자 : 그래, 그랬어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인제. 머리는 또 인자 특히 고등학교 때는 인제 그 군사정권이 아주 규율이 심했잖아요. 머리를 짧게 짤라야 되는데 머리 짧게 자르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더부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3학년 때는 인제 규율부가 통제를 못하니까, 같은 3학년이고 같은 동물들이 어떻게 잡겠어요. 못 잡으니까 인제 내 맘대로, 더구나 멋대론데. 머리를 이렇게 더부룩하게 길고 인제 들어가고 그러니까는 선생님들도 그걸 제대로 못 한 거예요, 통제를 못 한 거예요. 애들을 어떻게 그냥,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을 으글으글 한 놈들을. 그러니까 선생님들도 냅둬 버리고 있는데 하도, 하도 안 되겠으니까는 어떤 그때는 인제 시험이 월말고사 꼭 있었고 그 다음에 삼 개월 지나면 기말고사 맨날 시험이었거든요. 월말 고사 땐가 한번은 시험 치른다고, 시험은 인자 봐야 되니까 다들 인자 가잖아요. 백지를 내더라도 시험, 시험에 이름은 써야 된다고. 시험 보러 딱 교실에 들어갔는데 교감선생님이 문을 착 열고 가위를 들고 들어오는 거예요, 머리 긴 놈들 짜른다고. 그때 나하고 그 몇 명 그 머리 더부룩한 서너 놈이 뒷자석에 앉아 있었는데 문 열고 교감선생님이 가위 들고 오니까 유리창을 열고 후다닥 도망을 간 게. 그럴 정도로 제가 어떤 규율이랄지 이런 것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컸던 것 같애요. 그러니까 학교생활 같은 거를 전연 못했고 그 다음에 규율, 규율 같은 생활 이런 걸 전혀 못 해요. 제가 상당히 그런. 면담자 : 그때 다시 돌아오셔서 시험은 보셨습니까? 구술자 : 안 봤죠. 그냥 도망가가지고 어떻게 된지도 모르죠. 그날 하루 종일 교실은 안 들어갔으니까. 그래서 저는 졸업을 못한, 못할 껀데 근데 선생님들 중에서 몇 분이 굉장히 저를 예뻐해 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가지고 그분들이 억지로 시험지도 막 조작을.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조작을 하셨는지 어쨌는지는 모릅니다만 합격을 시켜줘 가지고 졸업을, 졸업장을 주더라고요. 그 인제 그분들, 그 선생님들 중에서 지금까지 제가 잊지 않는 분 존함이 저기 이일균 선생님이신데 이분이 그 강진 농업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세요. 저희는 26회고. 26년 선배님이신데 그분이 특히 예뻐하셨어요. 저를. 그래서 맨날 포자에서 얼쩡얼쩡하고 있으면 야, 너 지금 교실에서 뭔, 무슨 과목인데 너 그거 알고나 있냐. 그러면서 다른 애들 공책 갖다 주시면서 여기서라도 읽어봐라 해주시기도 하고. 또 그다음에 인제 학교 안 나간, 가기 싫어 안 나갈 때면 자꾸 집에 인제 오셔가지고 광선이 어딨냐고 물어보셔가지고 학교 나오게 해달라고 인제 이런 말씀도 해주시고. 이일균 선생님이 특히 저를 예뻐해 주셨어요. 면담자 : 예. 그 어찌됐건 어렵게, 어렵게 졸업은 하시게 된 건데 66년에 그럼 졸업을 하신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면담자 : 63년, 64년, 65년 다니시고 66년에 졸업을... 구술자 : 66년 봄에 졸업을 해가지고 면담자 : 선생님 잠시만요, 테잎좀 갈고 (TAPE 교체) 면담자 : 인제 졸업하신 이후에, 이후에 선생님 활동과 이민 오시기 전까지의 활동에 대해 구술자 :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집에서, 그, 인제 지내면서 아버지가 인제 제대로 농사를 못하시니까 제가 인제 어머니를 도와서 많지도 않는 일이지만 농사일을 좀 거들었어요. 면담자 : 벼농사 뭐 그런 거요? 구술자 : 촌에서 논밭일 하는 거 거들면서 한 일 년 있다가 인제 군대에 들어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군대에 들어가게 됐는데 입대하자마자 제가 그 월남 지원을 했어요, 훈련소에서. 그 당시에는 그니까 67년이든가? 67년인데 김신조라는 사건이 있었죠. 1.1 사태. 1.1 사태 때문에 병역 기간이 36개월로 연장이 된 그 시기였거든요. 그 후에 바로 인제 제가... 면담자 : 그 전까지는 몇 개월이었나요? 구술자 : 30개월인가 그랬을 거예요. 30개월로 단축됐던가, 32개월로 단축되었던가. 그랬다가 다시 36개월로 복귀가 되가지고 36개월 인제 근무하는 시대에 들어갔었는데 인제 월남 파병을 했었잖아요. 그 전에 제가 인제 군대 들어가기 전에 파병을 했었는데 처음에는 인제 월남 갈 사람들을 저기 뽑지를 않았어요. 그냥 차출해가지고 보냈거든요. 제일 처음에 해병부대가, 청룡부대가 갔고 그 다음에 인제 맹호부대가, 맹호부대를 하나를 보냈고, 그 다음에 백마부대를 보냈는데 백마부대 보낼 때부터는 아마 차출을 아니고 지원제로 했던 것 같애요. 그 인제 지원이 다 차지 않으면 차출도 했겠죠. 그랬는데 면담자 : 선생님 근무, 그 군 근무를 어디서 하셨나요? 구술자 : 그니깐 논산 훈련소에 들어갔었거든요. 논산 훈련소에 들어가 가지고 인제 훈련을 받는데 그 훈련 기간이 6주에요. 논산 훈련소는 보병들은 4주를 연장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인제 그건 인제 논산이 아니고 전라북도 김젠가, 아니 전라북도 쪽에 있는 거기에 훈련소가 있는데 고쪽으로 옮겨가가지고 4주 연장 훈련을 받아요. 그러니까 인제 저희는 이제 10주병이죠. 10주병으로 제가 보병으로 해가지고 4주 기간 동안에 인제 월남파병 할 수 있는, 월남으로 갈 수 있는 지원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처음 6주 동안에는 못하고, 월남 지원을 못하고. 근데 그때는 왜 그렇게 지원을 훈련소까지 받었냐며는 바로 그 전에 월남 구정공세 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그 베트콩들이 한국군 부대를 한번 공격을 해가지고, 구정 때, 구정을 기해서 공격을 해가지고 막대한 피해를 입힌 그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인제 지원자가 거의 없어져 버린 거예요. 한국 군 내에서 월남에 가고 싶어 하는 지원병이 거의 없어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훈련병까지, 훈련소에까지 지원병을 인제 모집했었어요. 그게 마치 그때 가서 십주 교육을 받던 때기 때문에 지원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때 인제 그 각 내무반에서 가장 선임하사가 있잖아요. 내무반 책임지는. 선임하사가 해남분이셨어요. 저는 인제 강진 사람이고 그 분은 바로 강진 옆에 있는 해남 분이어서 같은 인제 이웃군이라고 해서 신문도 갖다 주고 저한테. 늘 그랬던 분인데 그분이 아주 극구 말리는 거예요. 뭣 때문에 니가 월남을 갈라하느냐, 내가 그거 지원서 찾아가지고 찢어 버릴 테니까 지금이라도 맘 돌려라. 면담자 : 그때 가면, 월남에 가면 파병 가면 혜택이 있었습니까. 구술자 : 그니까 이제 우리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월남을 지원했냐면 전쟁터 한번 구경 한번 해보자, 까짓 꺼. 인제 이런 생각이었거든요. 그니까 인제 뭐 중 고등학교 때 공부도 전연 안 했었기 때문에 그런 데 대한 뭐 희망 같은 거 뭐, 사회적으로 출세한다든지 뭐 어디 하다든지 그런 기대 같은 건 전혀 없는 상태기 때문에 인생사는 거 뭐있냐 전쟁터라도 한번 구경해보자, 그러고 저는 거기서 지원을 했었는데 나중에 인제 동료들 그런 사람들한테 서로 이야기가 나오고 묻고 하잖아요. 그러믄 거의 90퍼센트가 잘 먹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그만큼 그, 그 당시에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엉망이었어요. 정말 배고파서 못 견딜 정도로 엉망이었어요. 그래서 파병하면 잘 먹고 잘 먹을 수 있다. 그니깐 미군 부대가 던져주는 그 부식 이런 것으로 잘 먹을 수 있다, 이 잘 먹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 거의 90퍼센트를, 90퍼센트의 군사들이 그 때문에 지원을 한 거예요. 그니까 두 번째 거의 거의 같은 이유라면 안 맞기 위해서 간다는 것. 한국 부대에서는 너무 맞으니까. 그니까 잠자기 전에 안 맞으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 할 정도로 매일 맞아요, 매일. 매일 맞고 잠을 자니까. 전쟁터에 보내는데 때리겠어요? 안 때리죠. 그러니까 안 맞기 위해 간다. 이 두 가지 이유에요. 단순하게.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다들 지원을 하고 월남 지원을 했는데 그래 나는 이제 훈련병 때 지원을 하니까 10주 끝나고 바로 보내줄 줄 알았거든요. 우린 월남을 보내줄 줄 알았는데 훈련소에서 지원한 사람들은 또 다시 한 삼 개월 교육을 받아야 된대. 그 교육을 어디서 받냐면 화천에서 받았어요, 강원도 화천. 거기에 가니까 이제 나하고 같이 훈련소에서 지원했던 사람 열 명인가 됐는데 열 사람이 거기서 할 일도 없이 심부름만 하면서, 그러니까 심부름이라는 게 뭔가 하며는 거기서 인제 일 개월인가 훈련을 받고 월남으로 가는 거예요. 각 부대에서 차출된 사람들은. 그믄 월남으로 파견할 수 있는 그 계급이 일병 이상이라야 해요. 근데 훈련소에서 막 제대를 하면 훈병에서 이병이 되거든요. 이병을 삼 개월 지나야 일병으로 진급을 해요. 그니까 일병 진급할 때까지 그 화천 교육대에서 보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 할 일이 없으니까 훈련받으러 온 사람들 점심 대접, 식사 그거 심부름 해주는 거. 장교들 뭐 구두 닦아 주고 이런 거 하는 것. 이런 걸로만 한 삼 개월을 그 화천에서 보낸 거죠. 보내고 일병 진급을 받자마자 월남으로 간 거죠. 면담자 : 뭐 부대에, 어떤 부대에 소속돼 가지고 가는 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인제 거기에서 배속을 해줘요 인제. 거기 가며는 각 부대로 배치를 해주는데 그때 제가 인제 배치를 받은 게 29연대, 29연대가 박쥐 부대라 그래요. 29연대 10중대로 배속을 받아가지고, 아니 그때는 여기서 한국서 출발할 대는 연대까지만 배속을 해줘요. 29연대 박쥐부대로 인제 배속 되가지고 면담자 : 29연대면 15사단인가요?아니에요 9사단, 9사단이 백마부대. 9사단이 백마부대고, 9사단일거예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으면. 그 백마부대, 그 다음에 29연대가 박쥐부대라 그랬어요. 그 인자 그 부대 이름은 어떻게 생겼냐며는, 전쟁 때, 그러니까 한국 전쟁 때에 어떤 부대가 공을 세우면 거기에 이름을 붙여줬던가 봐요. 그래서 인제 우리 부대는, 9사단은 백마고지의 전투, 그걸로 인제 백마부대라고, 제가 그렇게 들었어요. 백마부대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 다음에 박쥐부대는 하도 야간활동을 잘해가지고, 야간 전투 같은 걸 잘 해가지고 박쥐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렇게 들었었어요. 그게 정확한지는 몰라도. 그래서 박쥐부대 예속을 받아가지고 월남에 갔었어요. 갔는데 그때가 아마 8월인가 됐을 거예요. 면담자 : 70, 67년 8월이요 구술자 : 예. 67년 예. 예. 67년 8월 일거예요. 갔었는데 하노이에서 인제 공항에서, 아아 그거 그때는, 배타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가지고 거기가 어디였든가 모르겠네. 나트랑, 나트랑 항에서 내려가 가지고 29연대 박쥐부대 본부가 나트랑에서부터 한 세시간정도 운전하고 간 미노아라는 고장이 있어요. 거리 인제 가서 거기서 인제 각 중대 배당을 받아요. 그래서 거기서 10중대라는 곳으로 배당을 받아 갔는데 근데 그 29연대 그 보충대라고 그래요, 일단 받으면, 군 병력을 받으면 보충대라는 곳에서 인제 한 일주일인가, 이주일인가를 기본적인 교육을 시키죠, 부대 교육을. 소양교육을 시키고 각 인제 중대로 배치를 하게 되는데 그 보충대에 딱 들어갔는데 하루는 그 교육 사병이 와가지고 저 중대본부에서, 아니 연대본부에서 사병이 나와 가지고 여기서 영어 잘하는 사람 손들어봐, 그러는 거예요. 아무도 손 안 들죠. 아무도 손 안 들어요. 근데 내 생각에 분명히 무슨 특혜를 주기 위해서 저런 걸 뽑을 것이다 싶어가지고 번쩍 손을 들었어요. 그랬더니 이리 나와, 그래서 딱 나갔어. 제가 나가니까 인제 용기를 얻어가지고 몇 사람이 손을 들어가지고 대여섯 사람이 쭉 섰어요. 스니까 시험을 본다고 보는 거예요. 뭐, 뭐, 뭐 어쩌고 저짜고 영어로 물어보는 거예요. 근데 다들 자신이 없잖아요. 아무리 그 뭐 영문과를 나왔다고 하드라도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머뭇머뭇 하는데 내 앞에 오더니 기묘하게 뭘 물으냐면 밀리터리(military) 하고 아, 저 뭐, 아미(army)하고 솔져(soldier) 하고 그렇게 물어봤던가? 아미하고 솔져하고 어떻게 달라, 그랬더니 그걸 내가 알 수가 있어야죠, 모르는데 얼핏 대답은 해야 되겠어서 뭐 개인과 집단을 얘기하는 게 아니겠어요, 뭐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리와 당장 뽑힌 거예요. 그게 맞었던 모양이여. 하나는 개인을 지칭하는 거고 하나는 집단을 지칭하는 아미는 집단이고 솔져는 개인을 지칭하고. 그래서 뽑혔어요. 그래서 어디로 갔냐면 월남의 교육대를 간 거예요. 그니까 월남에 가자마자 전투부대에 배속되기 이전에 기냥 월남어 교육대에 갔는데 그거이 뭐하는 곳이냐면 월남 민간인들한테 들어가서 심리요원으로서 정보도 수집하고 인제 한국군 홍보도 하고 인제 이런 요원들을 기르는 곳인데 이게 월남 민간인들한테 들어가야 되니까 말을 좀 할 줄 알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월남어 교육을 삼개월동안 시키는 거예요. 그 교육대로 보내는데 그 월남어 교육을 영어로 시켜야 하잖아요. 한국어로는 그때 당시 월남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재도 없고 선생도 없으니까. 영어를 시키기 때문에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을 뽑았던 것 같애요. 그게 월남어 교육대로 보낸 거예요. 그런데 그때 월남어 교육대에 모집할 기간이 넘어갔는데 바로 그 전에 뽑아서 다 보냈어요. 그게 30명인가가 교육을 받아요, 한 기에. 받았는데 보냈는데 그 교육대 내에서 무슨 일이 있어가지고였는지 모르겠는데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를 본대로 보내뻐리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교육생이 비게 됐어요, 자리가. 비게 되어 보충병을 보내라. 그러니까 지금 바로 온 보충병 중에서 하나 뽑아서 보내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가지고 묘하게 제가 거기에 그 빈자리를 매꾸기 위해서 월남어 교육대를 들어가게 된 거예요. 삼개월동안 인제 뭐, 그 월남 여선생이 하나 있었고 한국군 장교가 영어로 인제 통역을 해주고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뭐 삼 개월 베운 게 뭐 뭘 배웠겠어요. 사실은 배운 것도 없지. 나온 게 그 월남 10중대로 배속이 됐는데 10중대가 어떤 부대였냐면 월남군 민병대하고 같이 활동하는 중대였어요. 그래서 월남군 민병대 그 거기에 같이 배속 시켜가지고 그래서 제가 인제 민병대 사이에 통역을 맡으로 그 다음에 애들 마을에 데꼬 가서 정보수집도 하고 인제 홍보활동도 하고 하는 그런 인제 일을 월남 가서 한 거예요. 면담자 : 베트남어, 월남어, 월남말, 베트남어가 어느 정도 됐으니까 삼 개월 하신 거죠 구술자 : 그러니까 인제 삼 개월 해도 못하죠. 못하지만 인사 정도만 겨우 인제 제대로 할 수 있는 정도만 되면 내보낸 거예요. 거기에서 대한민국의 행정이랄지, 군대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이 얼마나 허약하냐 하는 것을 또 뼈저리게 느낀 거예요. 그럼 인제 보고를 해야 되잖아요, 우리가. 날마다 인제 마을에서 내려왔다 하면 마을에서 수집한 정보랄지 인제 뭐 우리가 했던 활동 이런 것들을 상부에 보고를 해야 되잖아요. 전부 소설 쓰는 거죠 앉아서. 앉아서 소설 써서 보고를 한 거예요. 그러면 위에서는 그걸 모르냐 그러면, 모를 리가 없죠, 알죠. 왜냐, 삼 개월 시켜가지고 무슨 그런 세세한 정보를 수집해요, 가당도 없지, 턱도 없지. 알면서도 또 그 보고를 또 상부로 보내는 거예요. 그니까 내가 쓴 소설이 위로 올라가서, 또 위로 올라가서 이것이 정보가 되는 거예요. 군사 정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되겠어요. 그 정보에 의해서 작전을 해야 되는데 그 작전이 뭐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맨날 민간인이나 죽이고 베트공 몇 명 죽였다고 보고하고 그러는 거지. 그 다음에 인제 총도 그러는 거예요, 총. 내가 총을 한 정을 잊어먹었어요, 그 교육 월남어 교육대 생활을 하면서 3개월 생활하면서. 어떻게 잊어먹게 됬냐 그러면 그때는 인자 그 물을 각 부대마다 배달을 해주거든요, 물을. 그래서 그 물을, 배달받은 물을 가지고 목욕도 하고 먹기도 하고 인제 이렇게 하는데. 그 인제 우리는 인제 그런 특수 부대기 때문에, 말하자면 민간 활동을 하는 특수부대기 때문에 쫌 더 많은 양을 그런 그 보급을 받았어요. 상당히 많은 양의 보급을 받고 또 자유로웠어요. 굉장히 자유로워가지고, 왜냐면 맨날 마을에 돌아다니니까. 그래서 우리가 인제 제가 인제 그 소대가 따로 그 민병대하고 같이 생활을 했지만 그 소대 중에서도 분대 하나가, 분대가 아홉 명이잖아요. 분대 하나가 저를 호위하기 위해서 같이 다닌 거예요, 맨날. 마을에 같이 다녀요. 근데 그 분대를 데리고 인제 제가 인제 하루는 인제 야, 우리 심심하고 그러는데 그 물 보급소나 한번 구경 가자. 어디서 도대체 물을 떠갖고 오고 도대체 뭐 어떻게 해서 거 어디로 보내는지 그런 거나 구경하러 가자, 그래가지고 물 보급차를 타고 인제 물 보급소를 가버렸어요, 우리가. 보급소를 가가지고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중학교 동창을 하나 만난 거예요. 그놈이 인제 그 월남에 파병되어 가지고 다른 부대에 묘하게 29연대 같이, 박쥐부대, 그 부대 예속이 되가지고 물 보급을 받으러 온 거예요. 그 보급소에. 거기서 딱 만난 거예요, 그 애를. 그래가지고 너무 반가워가지고 내가 그 타고 있는 우리 부대 물 보급차에서 뛰어내려가지고 이애 차로 올라간 거예요. 그 부대 차로 뛰어올라가 가지고 재밌게 이야기를 하고 어짜고 저짜고 하다가 야, 가야되는데. 그래서 야 가자 그러고 인제 나는 내 부대원들 그냥 보내뻐리고 그 친구 부대 보급차를 타고 그 애부대로 온 거예요. 와가지고 같이 얘기를 하고 있다가 인제 저녁이 되니까 인제 가야되니까 우리 부대 쪽으로 가는 차량이 하나 있다고 그래서 고쪽으로 옮겨가면서 뛰어가 가지고 거리 탔는데 총을 놔둬불고 온 거예요. 제가. 그 친구 보급부대 물 보급하는 그 추럭에다가 제 총을 놔둬뿔고 온 거예요, M16 총을. 그런데 전쟁터에서 총을 잊어부렀다 하면 사형감이잖아요. 이게 정말 난감한 거예요. 엄청난 큰일이죠. 엄청 큰일이죠. 야,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느냐. 뭐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왜 찾을 수가 없냐, 그러며는 걔들은 그 총을 가지고 어디 전투 가가지고 노획품이 도는 거예요. 총 한정이. 그럼 총 한 정 노획하면 베트콩 몇명 죽이고. 이렇게 인자 소설이 된 거예요. 그러니 총을 돌려주지를 않죠. 잊어버렸는데, 분명히 그 차에서 잊어버렸는데. 그래서 총을 못 찾았어요. 나도 인제 돌라야 되잖아요. 누구 차를, 누구 총을. 그래가지고 총을 돌를려고 또 인제 막 저도 인제 그 친구 부대에 가서 일부러 저녁에 자면서 잠을 자면서 총을 한정 돌라갖고 올려고. 거기서 잊어버렸으니까. 그 부대에서 잊어뻐린거니까 싶어가지고. 총을 한정 돌라올려고 가서 이제 잠을 잤어요, 그애 부대 막사에서. 잠을 자며 저녁에 일어나서 총을 돌를라고 하는데 그 다음날 작전을 나간대, 그 부대. 작전을 나간다는데 거기서 도저히 내가 못 돌르겠는 거예요. 다음날 작전 나가야되는데 지총이 없어지면 그 애는 어떻게 되겠냐 이거여. 도저히 못 돌르겠어. 못 돌르고 있다가 내가 생각나는, 생각나는 게 보충부대에서 빼가자. 그 생각이 번뜩 든 거예요. 그 인제 한국서 바로 인제 보충하기 위해서 온 부대들 훈련소가 보충부대가 그 옆에 있었는데 밤에 이제 보충부대 막사로 들어간 거지. 보충부대는 인제 총이 두 정이 딱 배급이 되요. 한 막사에. 그래가지고 두 정이 배급 돼가지고 그놈 메고 둘이 교대 교대로 밤 안 자고 교대를 해서, 해서 깨워가지고 보초를 세우잖아요. 보초를 세우는데 그놈들이 딱 돌고 내가 인제 그 생리를 잘 아니까, 우리도 그랬으니까. 틀림없이 이놈들이 보초를 스는 게 아니가 잔다. 총 옆에 놔두고 잔다. 그래서 인제 그 틈을 노린 거예요. 가서 가만히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한 놈이 야야, 일어나 그래가지고 깨우더니 총을 거기다 딱 놔두고 자러 들어가는 거예요. 자러 들어가니까 인계를 맡아가지고 보초를 서야 할 놈이 알았어, 그라고 총 그대로 딱 놓고 또 자는 거예요. 그래서 그놈 가지고 나온 거예요. 내가 총, 나도 총을 돌른거지. 그래가지고 인제 내총을 마련을 했는데 원래는 지급할 때 전부 일련번호를 적고 주잖아요. 총을. 그러니까 분명히 일련번호가 다르잖아요, 내 총이. 총 번호가 다르고 그래서 이제 내총번호를 다시 인제 부대에 복귀할 때, 교육부대에서 부대로 다시 복귀하믄 틀림없이 이거를 조사할껀데 싶어가지고 겁이 나서 이놈 인자 믹스업(mixup)을 시키기 위해서, 쫌 혼동을 주기 위해서 장교 그때 장교도 몇 명 있었어요, 월남어 교육대에. 장교 총하고 슬쩍 바꿨어요, 내가. 그랬더니 그 다음날 장교 한명은 교육대에서도 따까리 한명씩 딸리드라고요. 그러니까 누가 하나 밥 타다 주고 인자 심부름 해주는 교육생이 붙으게 되는데 그 장교 그 따까리가 나한테 와가지고 야 광선아, 광선아 틀렸다, 틀렸다, 알더라.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제 그 장교가 아침에 총 소지, 청소할려고 딱 일련번호 보니까 틀리거든. 인자 그 따까리 불러가지고 야 이거 내총 아닌데 니가 혹시 바꿨냐, 물어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놈이 나한테 달려와 가지고, 야 틀렸다. 번호 알드라. 할 수없이 내가 도로 인제 내 돌른 총 갖고 오고 장교총 인제 바꿔서 돌려보내고 그래가지고 교육대 끝나고 본대로 왔는데, 본대가 인제 10중대여서 10중대로 왔는데 아무도 문제 제기 하지를 않아 그런 것이, 총 번호를 보고 틀리다 한 사람도 없고, 뭐 부대장뿐만 아니라 아무도. 그런 것이 말하자면 군대, 대한민국 군대에요. 그러니까 우리도 어디 가서 누구 총 하나 돌라다가 말하자면 그 어디 가서 전과, 그런 거 보고하고. 인제 나는 이제 마을에 나가서 하지도 않은 무슨 정보활동을 했다고 탐지를 했다고 소설 써서 보고를 하고. 이런 거지. 그런 활동을 인자 했는데. 월남이 일 년이잖아요. 일 년 후에는 귀국을 해야 되. 근데 일 년을 연장할 수가 있어요. 그래 인자 내가 연장 신청을 했어. 그랬드니 우리는 특수부대 요원이기 때문에 연장이 잘 되더라고, 금방 받아주더라고. 그래가지고 이년간을 인제 월남에서 지내고 귀국을 했죠. 귀국을 하니까 이제 군 근무 기간이 36개월인데 훈련소에서 바로 그 지원을 해가지고 그니까 삼 개월 후에 가고 월남서 이년을 하고 이라고 오니까 근무기간이 좀 남네. 7,8 개월인가 남은 것 같애요, 남았어요. 그러니까 한국 부대에서 또 복무를 해야 되. 해야 되게 되어 있어요, 갔다 오니까. 그니까는 보충대에서 그러더라구요. 와가지고. 너 월남서 돈 좀 모아왔지. 인제 그래서 못 모아왔는데? 그때는 인제 월남 가면은 귀대할 때 한국으로 올 때 사람들이 전부 탄피를 걷어가지고 큰 박스에다가 탄피를 전부 걷어가지고 와요. 그러믄 인제 그 탄피 팔아갖고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그랬다고 많이들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월남 가자마자 시작하는 게 뭐냐면 귀국준비 그래가지고 탄피 모으는 것, 일반 사병들은. 그 다음에 쫌 고급 장교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도둑질 한 거겠죠, 뭐. 인제 보급품들 빼돌려가지고 팔고 그래가지고 돈 마련하고 이런 거잖아요. 인제 일반 사병들은 그런 거 못하니까 탄피 수집만 하는 거예요. 그니까 거기서 훈련을 하면 날마다 총을 쏴야 되잖아요. 그믄 이제 밤에 두 시간 정도를 사격을 해요. 훈련 사격. 훈련 사격하면 일단 사격 시작하면 완전히 밤하늘에 불, 그니까 열발 당 야광탄 하나 들어가거든요. 그 야광탄이 그냥 줄을 잇기 때문에 완전히 불바다로 보이는 거예요. 정말 멋있어요, 그 광경이. 풍경으로만 하면 사격 훈련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어요. 그걸 우리는 인제 저녁마다 이렇게 구경하고 보냈었는데 그 탄피들을 모아가지고, 그니까 후배는 귀국하는 선배들 박스 채워주고 또 인제 그 사람 것은 다음 후배들이 채와주고 그래가지고 탄피박스 하나씩을 갖고 귀국을 하는 거예요. 근데 나는 그런 것에 전연 관심이 없어가지고 탄피 하나를 못 모은 거예요.. 나도 안모으고 후배들이 모아준다는 것도. 야, 느그 갈 때 느그꺼나 채워 임마, 그러고는 이년간 거가 있었으니 병장으로 진급해가지고 어, 그러고 인제 오면서 아무것도 안 갖고 나온 거예요. 텅텅 빈걸로 나왔는데 그런데 딱 인제 본국에 와가지고 일개월인가 휴가 하고 끝나고 인제 본대에 갈라고 하니까 그것이 그걸 인제 묻드라고요. 사람들이 야 이시끼아 탄피도 하나 안 갖고 왔냐 그러드라고. 그 인제 보충대 선임하사가. 면담자 : 월남 파병을 하면 급여가 더 나온다던가, 그런 건 없었습니까? 구술자 : 물론 더 나왔죠. 그 때 당시에 그 파병 하는 병사들에 대한 지급은 두 가지 종류로 지급이 되요. 하나는 통상 월급, 그니까 군인이며는 받아야 하는 월급,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위험수당. 그니까 전쟁터에 갔기 때문에 위험수당, 두 가지 월급을 받아요. 근데 우리는 뭘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뭘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미국에서 지급하는, 그니까 그것이 전쟁위험수당인지 아니면 통상수당인지 그건 모르는데 그걸 받았어요. 그게 얼마가 됐냐 하면 제가 일등병으로 파병했을 때는 38불인가. 한 달에. 이렇게 받았거든요. 근데 실질적으로 미국에서 지급하기는 그보다 꼽절이 됐다고 우리가 알고 있어요. 그니까 절반을 정부에서 띠어가지고 쓰고 절반은 직접 사병들한테 주고 이랬거든요. 그래서 38불 정돈가를, 32불인가 38불을 받다가 병장이 되니까 54불인가로 오르드라고요. 그래서 54불 정도를 받았는데 근데 가가지고 우리는 인제 그 돈 받아가지고 저녁마다 술 먹고 그런 것에다 쓰다가 인제 한 한 달에 54불씩 받으면 3,4 개월 모아가지고 돈 백 불 되면 인제 집으로 보내주고 이런 거죠. 그렇게 했는데. 저는 인제 돈을 모을 수가 없었죠. 모으지를 못하고 그러고 왔는데 그 보충대 선임하사가 오드니, 저녁에 찾아 오드니 너 월남서 돈 좀 모았지. 그러면서 못 모았는데요, 그러니까 탄피하나도 안 갖고 왔어? 못 가져왔는데요. 그러니까 이 섀끼, 탄피하나도 못 갖고 온 섀끼가 있다고 욕을 하더라고.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야 임마 그래도 니가 돈 몇 푼만 쪼금 있어도 너 월남까지 가서 2년 동안 고생하고 왔으니까 더운 데서 고생하고 왔는데 지금 이제 날씨 아주 추워지는데 전방 안가고 후방에서 편하게 있다가 제대할 수 있어. 임마, 돈 좀 내놔. 이러는 거예요. 기가 막힌 거지, 정말. 내가 들으니까 기가 막혀. 왜 내가 돈을 주고 후방에 가야됩니까? 군인이니까 당장에 전방 구경도 해보고. 쌈 구경, 나 쌈 구경하러 월남 갔는데 막상 월남 가가지고는 쌈 구경도 못하고 왔는데. 우리나라에서라도 쌈 구경한데도 좀 보고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라고는 그랬더니 정말 최전방으로 보내뿔더라고. 그래서 어디로 갔냐라믄 그때는 인자 3사단, 거가 철원 부근이었어요. 거기에 인제 배당을 받아, 배치를 받아가지고 딱 갔어. 올라가는데 거기가 인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뭐 원통해서 못살겠네 하는 인제 원통, 원통에 있는 부대로 배속을 받아가지고 간 거예요. 갔는데 그때 인제 나랑 같이 인제 훈련소에서 바로 그 부대 배치 받아가지고 간 헌병들 같이 한 30명이 3사단으로 가는데 애들이 막 울어요. 그 산골짜기 길을 타고 올라가는데. 그래서 중간쯤 가다가 내가 호송 하사한테 좀 내리자고 그랬어요. 좀 쉬자, 어디 술집 가서 좀 쉬자. 술집 가서 쉬면서 그때 인자 이병들, 인제 훈련소에서 막 나와서 찍찍 울고 있는 놈들, 인자 그, 그 산골짜기 들어가서 언제 나오냐 싶으니까 참 기가 막히고 막 눈물이 나온 모양이죠. 야, 월남서 지금 와가지고 너희들하고 같이 너희들 같은 부대 가는데 니 왜 우냐, 사내자식이 되가지고 말이지, 왜 우냐 그러고 인제 내가 술을 사주면서 따독거려 준 일이 있어. 그 이야기를 난중에 인자 내가 거기서 제대할 때 정말 그때 고마웠다고 그러면서 얘기를 하더라고, 거기 있는 애들이. 같이 간 애들이. 그래서 인제 최전방으로 갔는데 가가지고 인제 철책선 바로 앞에서 근무를 했잖아요. 바로 앞에서 근무하는데 가끔가다 철책선이 어긋나고 그러면 우리가 가서 떼울러 주고. 그 다음에 비무장 지대 한 번씩 들어가서 순시하고. 이런 인제 그런 것을 했거든요. 나는 인제 가니까 인제 제대 한 사개월 남겨놓고 거리 들어가 가지고 들어가니까 월남서 인제 그때가 겨울이 되가지고 엄청 춥기까지 하잖아요, 엄청 추와 가지고 면담자 : 선생님 잠시 만요. (TAPE 교체) 구술자 : 제 얘기가 개인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데 면담자 : 쪼금만 더 압축을 하셔서 뒤에 뭐 한청련, 여기 오셔서 한청련 활동하신 그 내용이 좀 더 중심이 돼야 되니까 앞엣 부분을 쪼끔만 압축을 시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구술자 : 그게 인제 왜 제가 이렇게 장황한 얘기를 하냐면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행정, 그 다음에 군정, 모든 그 대한민국의 시스템 자체의 실태더란 거예요. 제가 그 최전방에 가서 보니까 전부 이 말하자면 나라를 지킨다는 개념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는 없는 거예요. 그니까 애들이 들어가면서 우는 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왜 내가 이 골짜기에 들어와야 되느냐고 우는 것부터 시작해가지고 거기서 내일 모레 제대할 사람이 갖는 태도 같은 걸 보면. 한 사람도, 제가 병사 중에서 한 사람도 어떤 사명의식을 가지고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 하는 걸 느껴보지를 못한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그때 내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왜 내가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이렇게 보초를 스고 이래야 되느냐. 거기서 느낀 거예요. 그 철책선을 보면서. 이건 아니지 않는가. 이제 이런 것들을 느꼈고. 그래서 이제 거기서 일월 달에 그 다음해 일월 달에 제대를 했죠. 제대하고 나와서도 인제 집에서 인제 어머니 보살피면서 같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마치 그 다음 해에 대한민국 농촌 진흥원하고 농촌 진흥청하고 미국 4H 클럽 사이에 한국 농업 연수 계획이라는 것을 세웠어요. 코리아 애그리컬춰럴 트레이닝 프로그램, KATP라고 그랬는데 그 연수계획을 꾸며가지고 원래 취지는 뭐였냐 그라믄 농촌에서 4H 지도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미국에 보내가지고 선진 농업을 배워 와서 한국 농업을 발전시킨다, 이게 인제 목적이고 취지였거든요. 그렇게 해서 각 지역 농촌지도소에다가 그 4H 활동 지도자 중에서 좀 대표적인 사람들을 좀 뽑아 보내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 우리 지역은, 인제 강진은 물론 4H라는 것이 다 마을마다 있었죠, 4H클럽이라는 게 다 마을마다 있었고 그랬는데 마땅하게 뽑아 보낼 만한 지도자를 못 찾은 모양이에요. 근데 그게 왜 그랬냐므는 이 사람들이 첨에 겁을 먹어뻐린 거예요. 뭘 겁을 먹었냐 그러면 미국에 보낸다니까 일단 영어 같은 거를 잘해야 될 것이고, 이런 식으로 겁을 먹어 뻐린 거예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4H 지도하는 분들은 안중에도 없고 누구를 보내야 가서 영어 시험도 쫌 통과하고 할 것이냐를, 그거에다 중점을 두고 사람들을 찾은 것 같애. 그니까 우리 바로 이웃집에 그 농촌지도소에 다니는 분이 한분 계셨는데 인제 그러니까 인제 우리 농고 선배지. 그 선배가 하루는 내가 딱 논에 나가는데 야야 너 미국 한번 가볼래. 그러는 거예요. 아 무슨 소리에요? 그러니까는 이러이러해서 사람들을 뽑는데 니가 가면 틀림없이 합격될 것이다, 너 월남까지 갔다 왔지 않냐. 그래서 아 나도 미국 가고 싶지, 굉장히 좋다고 그러고 응시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냥 시험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기냥 통과된 거예요. 그래서 전라남도에서 26명, 그때 제일 많은 숫자가 그때 전남 농업 진흥원장께서, 무조건 보내라. 말하자면 그 뭐 뭐 심사 같은 거 전연 필요 없이 응시하면 무조건 보내라, 무조건 보내야 된다. 이런 주장을 하셨어. 그래가지고 다른 도에서는 막 시험도 봤대. 그랬는데 우리 전남에서는 아무도 시험 같은 것도 안 보고 응모한 사람 26명이 다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전국적으로 80명이 인제 그 KATP 그걸로 해서 농업 그 연수 계획으로 해서 미국에 오게 됐어요. 그것이 인제 70년인가 69년인가. 70년인가? 면담자 : 70년에? 제대는 70년에 하셨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 71년에 그러니까 연수 계획이 있었나보구나. 71년 72년? 72년에 온 것 같애요. 72년에 그래서 그런 연수 계획으로 미국을 왔는데 그 연수 계획을 총괄하는 본부가 저기 미조리주 콜롬비아, 미조리주 정부 청사가 있는 콜롬비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집결을 해가지고 거기서 각 농장으로 배치를 시켰는데 저는 인제 화훼 분야를 지원해가지고 화훼 농장에 가게 됐어요. 그 제가 있던 농장이 캔사스 시티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캔사스 시티로 배당을 받아가지고 캔사스 시티에서 연수 계획이 2년인데 실지 농장에서 연수한건 인제 20개월이고 그 다음에 인제 1개월은 앞뒤 그런 사전 교육 이것이고 그 다음에 3개월은 대학에 가서 마무리 학습하는 그걸 했었는데 그래서 미주리 주립대학에 들어가서 논문도 쓰고 그런 걸 했는데 사실 그때 논문이란 논문 써 본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거 아무도 그걸 쓸라고 생각도 안 하고. 말이 연수 계획이었고 한국 농촌 발전이라고 그랬는데 제가 딱 와서 보니까 그런 것들이 전부, 전부 탁상 행정. 말하자면 뭔가 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과시행정이라는 것을 또 뼈져리게 느낀 거예요. 와서 우리가 보니까 아무리 뒤져봐도, 아무리 봐도 한국 농촌에 가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일단 규모가 엄청나게 크잖아요. 제가 인제 그 딱 배속 받아서 가니까 농장 주인이 내가 화훼를 했기 때문에 꽃 기르는 데로 갔는데 우리 한국서는 우리 농업학교에도 온실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온실이라는 게 겨우 화분 한 20개 노면 꽉 차는 그 규모잖아요, 조그만한 방 같은. 그거이 온실이고. 그 다음에 한국에서는 아무리 큰 온실 농장이라고 하더라고 100평이 넘는 건 없을 거예요.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80년 당시에. 100평을 넘는 온실이 그런 없었는데 내가 딱 와서 보니까는 2에이커, 2에이커믄 2400평이에요. 2400평이 유리로 덮여 있는 거예요. 한 건물로. 이게 상상도 못했죠, 저희들은, 근데 거기 딱 들어가서 이 꽃은 어떻게 기르고 이 꽃은 어떻게 기르고 이건 어떠해서 무슨 생리가 있고 뭐 어떻게 해야 되고 이런 게 아니고 그냥 화분에다 흙담는 거예요. 하루 종일 화분에다 흙 담고. 하루 종일 거기다 모중 꼽고 하루 종일 물주고 이게 다에요. 거기서 무슨 누가 교육을 시켜요 가르치길 해요. 빨리빨리 화분 옮기고. 이것뿐이지 뭐. 이게 뭘 배우고 가서 뭘 가서 하느냐는 거예요. 저는 와가지고 인제 그 분야들이 몇 개 분야가 있으니까. 제가 맡은 것은 여름에는 하이드렌이저라고 그 수국, 수국 꽂아가지고 맨날 물주는 거. 그 다음에 가을 되니까 포인세티아. 그 크리스마스 때 피는 포인세티아. 포인세티아 그 화분에 맨날 물주는 거 요거 밖에 한 게 없어요. 배운 게 없어요. 그렇게 20개월을 허송한 거예요, 말하자면. 배웠다고 그러면서. 그러면 이제 뭐 그니까 이제 미국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흡수하는 거고 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해서 탁상 행정 성과로 과시하는 거고. 이거예요,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고 그때 인제 분야가 여러 개 있었잖아요. 양, 뭐 돼지 기르는 분야도 있었고 소 기르는 분야도 있었고. 인제 그런 칠면조 기르는 데 농장으로 간 분야도 있었고.. 다들 이야기가 그거예요. 하루 종일 소똥 치우고 하루 종일 칠면조 똥치우고. 이거밖에 한 일이 없다는 거예요. 뭘 배우냐는 거예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어요. 그래 20개월 딱 끝난 다음에 대학에 가서 3개월 동안 그때까지 농장에서 했던 것 종합 합습 한다고, 이론 학습 뭐 대학 교수들 하나 불러가지고 강연한다고 그러는데 말을 제대로 알아들어요. 농장에서 일만 했는데 뭐 그렇다고 해서 자료 하나를 찾아볼 능력이 있어요. 도서관은 뭐 기가 막히게 비치 다 돼있고 그러는데 가서 자료 찾아갖고 와서 공부해가지고 논문 한편씩 쓰라는데 누가 논문을 쓸 수 있어요. 아무도 논문을 쓸 수 없지. 나만 겨우, 그 80명 중에서 나만 혼자 논문 제출했을 거예요. 내가 하이드레인자에 대한 것을 자료 찾아가지고 하나 써냈더니 담당 교수가 그러드라구요. 놀래드라구요. 너 혼자냐고 그러면서. 면담자 : 영어로요? 구술자 : 영어로 써야지, 당연히. 그니까 나는 인제 영어를 못하니까 맨날 넘의 책 갖다 이 책 저책 막 사정없이 갖다가 베킨 거지. 이놈에서 베키고 저놈에서 베키고. 그걸 논문이라고 내는 거예요. 그것이 대학민국 행정 실태라는 거예요. 그렇게 나라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 꼴이 됐다, 나는 이리 생각해요. 그렇게 해서 연수가 끝나 가지구, 2년이 끝나가지고 그 8월 달에 귀국을 했는데 8월 16일날 귀국을 했어요. 딱 가니까 김인환씨가 그때 농촌 진흥청장이었는데 우리는 마중을 나왔더라고요. 면담자 : 84년이었나요, 그때 귀국하셨을 때가? 구술자 : 80이 아니고 70 면담자 : 아 74년. 74년도. 구술자 : 73년 인가, 74년인가. 딱 귀국을 했는데 육영수가 그 전날 죽었대. 그랬는데 그 우리를 마중 나온 김인환씨가 딱 연수생들 마중 나와서 환영연설을 하면서 찍찍찍찍 울면서. 어제 국모님께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걸 내가 보며 얼마나 속이 뒤집혔는지 몰라요, 정말로. 정말 속이 뒤집히더라고요. 그 인제 고걸 인제 그 정도로 제가 마무리 짓고요. 제가 여기 연수를 딱 와가지고 캔사스에 있는 농장에 딱 들어갔는데 그 들어간 다음에 바로 7월 달 맞이했잖아요. 7월 달 그래갖고 7월 4일 독립기념일이라고 인제 불꽃놀이, 미국에서는 불꽃놀이를 많이 하죠, 주인이, 농장 주인이 독립기념일 파이어워크하는데 한번 가보자고 저를 데리고 파이워크 하는 데를 구경을 딱 갔다왔어요. 저녁에. 갔다와가지고 다음날 인제 일하러 갔는데 야 느그 나라 통일되겠더라, 그러는 거예요. 그때까지도 저는 우리나라가 분단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이 군사 분계선에서 총부리를 왜 대야하느냐 그 생각을 하면서 통일이 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총부리를 겨눠야 되느냐 이것만 한탄을 했지. 그런데 오히려 그 미국인이 나한테 와가지고 축하한다고 그러면서 느그나라 통일되겠더라.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놀랬었어요. 무슨 이야기냐? 그랬더니 남북 지도자들이 만나가지고 통일하기로 합의를 했다 하드라. 그래서 그때 미국 신문에 나와 있는 기사 쪼가리를 오려가지고 그것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 것이 .그때였어요. 그때부터 아하, 이제 우리도 정말 어떤 통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되고 우리가 총부리 겨눈 것을 걷고 그 총부리 대신 이야기를 나누고 해야 되겠지 않느냐, 그런 일을 좀 해야 되지 않겄냐는 것을 희미하게 그때 느꼈던 것 같애요. 그걸 느끼고 느끼면서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냐 하며는 인제 귀국할 때 인제 육영수가 죽으면서 완전히 74남북 공동성명 이것은 뭐 물 건너 가버리고 아예 그냥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회에서 이거 비준도 안 하고 그러고 넘어가뻐린 거죠. 그랬을 때 이거 어떻게 투쟁해야 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었는데. 난 여기 와서 인제 그 2년 동안 그 연수 생활을 하면서 그 농장 주인하고 상당히 사이가 좋아가지고 계약을 맺었어요. 다시 재취업, 취업을 해주기로. 그거 인제 이민 허가서, 인제 노동 허가서죠. 노동허가서를 내주기로 약속을 받고 노동허가서를 그 이민국에 제출을 했어요. 제출을 해가지고 이민 허가 신청서 이것을 인제 제출을 하고 귀국을 한 상태였어요. 근데 한국 가가지고 귀국해가지고도 그 생각만 인제 한 거예요. 빨리 미국에 다시 들어간다.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거이 상당히 오래 걸려가지고 일 년 반이 걸리더라구요. 그래가지고 74년에 귀국해가지고 76년 4월에사 인제 그 이민 허가가 제대로 나와 가지고 비자 받고 그러고 이제 다시 이민 온 거죠. 면담자 : 그럼 76년 4월에 혼자 오셨어요? 구술자 : 아니 그때는 인제 들어가 가지고 결혼하고. 결혼해가지고 일년 반을 기다리는 사이에 애도 하나 낳고. 그래가지고 애를, 첫애를 낳자마자 8주, 8주 된 애를 띠어놓고 온 거지. 부모님한테 면담자 : 들어오실 때는 그 결혼하신 사모님하고 구술자 : 부인하고 둘이만 해갖고. 그래서 인제 와가지고, 막 와가지고 생활이 답답하니까 애는 같이 못 데리고 들어오고. 인자 아내만 데리고 와서 좀 자리 잡으면 데리러 가겠다, 그러고 부모님한테 놔두고 왔어요. 근데 이때 내가 온다 하니까 어머니도 그러고 우리 작은 아버지들도 그러고 마을 밖에까지 나오면서 붙잡은 거예요. 왜 가야 되냐, 그 먼 나라까지. 왜 가야 되냐. 우리나라도 이제 석유 나온다 하드라 그때 바로 박정희가 울산에서 석유 한 드럼 갖다 국회에다 내보이며 우리나라도 석유 나온다고 자랑하던 때였어요. 그러니까 인제 그것이 알려지니까 모든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우리나라도 부자가 되는데 뭣 때문에 미국까지 갈라 하느냐, 그러고 애걸을 하셨던 그 기억이 지금까지 나는데 그때 내가 그랬어요, 작은 아버지한테. 딱 5년만 내가 고생해서 돈 벌어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러고 나왔는데 그 후로 5년이 아니라 정말 지금 40년인데 아직 못 나가고 있고. 작은 아버지한테 그 약속을 드리고 약속을 못 지키고 우리 작은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면담자 : 그럼 첨에 미국으로 들어오셨을 때는 전에 그 일하셨던 그 캔사스 시티로 오셨나요? 구술자 : 그렇죠. 인제 계약으로, 계약하기 위해서 거리 이민을 왔으니 거리 들어왔었죠. 거기 들어가니까 이제 거기 들어가서 일을 하는 사이에 70, 그때가 몇 년이었는지 모르겠네. 76년에 와가지고 77년, 78년 그 무렵에 78년인가, 79년인가 동일방직 똥물사건이 일어났었어요. 그래서 너무 그, 그, 그 소식을 내가 듣고 너무 기가 막힌 거예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말하자면 그 공직공들은 다 내 동생하고 똑같은 사람들이잖아요, 말하자면. 나도 한국에서 계속 살았으면 나도 그런 공장 생활 아니면 일 할 때가 없는 거고. 내 동생들도 그런 생활 아니면 일 할 데가 없는데 내 동생들 입을 벌리고 똥물을 부었다고 생각하니까 분통이 터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때 생각하기를 내가 이러고 사는 것이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 뭔가 좀 해야 되지 않겄냐, 희미하게 인제 자각을 하게 된 거죠. 그 전까지는 뭐 사회 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뭐 제가 모르고 살았고. 워낙 배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 관계도 없었고. 촌에서 그러고 살았고 그랬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희미한 자각을 느껴가지고 찾아보기 시작한 거예요.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또 누구하고 관계를 맺어야 되겠는가, 이런 걸 찾아보다가 인제 그 당시에 인제 미국에서 가장 그런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것이 인제 뉴욕에 있는 해외 한민보, 그 다음에 인제 로스 엔젤레스에 있던 신한민보. 그 다음에 인제 캐나다에서 전충림 선생이 하시던 코리아 타임즈, 그 다음에 인제 필라델피아 김경재씨가 하던 독립신문. 이런 것들이 인제 조국 민주화 투쟁을 하는 언론으로서 역할을 했거든요. 그래서 인제 이런 신문들을 제가 인제 구독을 해가지고 뭘 할 수 있겠는가 보면서 그런 데다 인제 투고도 하고 그러고 지냈는데 그 다음해에 5·18 소식이 들린 거예요. 면담자 : 그 선생님 잠시만 다시 좀 돌아가서요. 캔자스 시티라는 곳이 좀 한인 사회 같은 게구성이, 선생님 들어가셨을 때 구술자 : 제가 들어갔을 때 거기에 5백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어요. 면담자 : 한인들이요? 구술자 : 예, 한인들이. 5백 명 정도가 있다고 알려졌는데 다른 도시에 비해서 한인, 한인 활동이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됐었는데 그 이유가 뭐였냐 하면 쪼끔 그 선각된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 선각됐다는 게 경제적으로 미국에 정착하는 데에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한인회를 조직하며는 그 한인회의 이름으로 융자 얻기가 쉽다는 거예요. 그 은행 융자나 정부 융자 얻기가 쉽다 그래가지고 한인회를 일찍 조직했어요. 상당히 일찍. 다른 도시보다. 일찍 조직해가지고 한인회장 이름으로 자기 어떤 뭐 사업하는데 그 융자를 빌리고 이런 활동들을 해가지고 거기 상당히 빨리 한인회가 활성화되어 있었어요. 그런 지역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4,5백 명 밖에 안 되니까 만나면 가족 같죠. 만나면 다들. 그래가지고 굉장히 밀접하고 가까운 관계로 지냈었어요. 면담자 : 그럼 선생님께서 뉴욕 한민보에서 일을 시작하신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인제 그곳에서 캔사스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인제 5·18을 만났잖아요. 그것을 인제. 면담자 : 그게 인제 캔자스 시티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5·18이 일어났나요? 구술자 : 그때는 인제 제가 뭘 인제 그 농장에서 나와가지고 어디에서 일했냐 그러면 전화기 만드는 회사에서 웨스턴 유니온(Western union)이라고 거기서 잠깐 일을 하다가 거기서 나와 가지고 여행사에서 취직해가지고 쪼금 일을 했어요. 근데 여행사에 있을 땐데 그니까 제가 이제 거기서 하고 싶었던 일은 조국의 그런 그 독재 상황 같은 것을 우리 동포 사회에 좀 알려가지고 뭘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것들을 좀 찾아보기 위해서 하는데 알 수가 없잖아요, 누가 어디서 사는지. 이거 알 수가 없잖아요.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두 가지 있드라고요. 하나는 교회. 교회가면 교인들 모이면 이제 주소도 받고 서로 하니까, 교회가 있고. 또 하나는 여행사에요. 그 인제 한인회 모이는 것은 몇 사람이 하는 거니까 거기서는 거의 한인들 주소를 모으기가 어렵고. 지금처럼 무슨 뭐 컴퓨터 시설이 있던 것도 아니고 전연 그런 것이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전부 만나면 물어가지고 손으로 적고 해야 되잖아요. 근데 교회만 그런 것들이 갖춰져 있는 거예요. 교인들 명부. 그 다음에 인제 여행사가 한국 여행 다닐라니까 인제 신청하고 그러면 그 사람들 통해서 주소록 받고. 그래서 여행사를 들어갔어요, 주소록 받기 위해서. 그래가지고 교회도 인제 몇 사람씩 그 교회담당자들 아니면 목사들 친분을 가지면서 당신 교회 좀 주소록 얻자 그래가지고. 그래가지고 한 3백명 정도 주소록을 만들어가지고 계속 제가 손으로 뉴스 같은, 뉴스 레타 비슷하게 써가지고 달달이 그런 사람들한테 메일로 인제 보내주고 인제 이렇게 인자 하고 있었어요. 그러고 있는데 광주 소식이 들린 거예요 면담자 : 선생님 그, 광주 5·18이 일어나기 전에 79년 10월에 10.26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박정희가 암살, 총살당한. 79년 10월 26일 불과 몇 개월 전에 5·18이 일어나기 한 7,8개월 전에 일어났는데 그때 이 미주지역에 좀 거주하셨던 한인사회의, 그런 뭐랄까요, 그걸 보면서 어떤 생각, 그 분위기. 어찌됐건 박정희가 거의 한 17년간 이렇게 독재를 해왔던 그 한국의 독재자가 죽은 거지 않습니까. 그걸 보면서 동포 사회의 분위기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 건 어땠나요? 구술자 : 제가 살던 캔사스에는 그런 어떤 것에 대해서 그 관심을 갖는 동포들이 거의 없었어요. 거의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제가 뉴스레터같은 것은 내보내도 반응이 거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인제 열심히 어떤 반응을 기대하기보다도 일단 알리자 그래가지고 열심히 했었는데 거의 그런 반응이 없는 지역이었고. 인제 그런데 대해서 관심을 갖고 하는 것은 인제 언론에서만 주로 많이 떠들고. 대도시에는 그러니까 인제 그 전까지의 동포 사회 운동이라는 게 학자 중심, 아니면 어떤 그 이,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반 동포들을 조국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동포가 거의 없었어요. 그 다음에 그때는 동포 사회라는 게 어떻게 구성이 됐냐 그러면 주로 국제결혼 하신 분들로 구성이 됐었거든요, 동포사회가. 그 다음에 그 다음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게 유학, 옛날에 유학생으로 와가지고 주저앉으신 분들. 이런 분들로 구성이 되 있었고 그 다음에 인제 일반인이라는 것은 그 국제결혼 하신 분들이 초청한 형제자매로 구성이 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그런 계층이라는 것이 학자나 지식인, 또는 그 명망인들 밖에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무슨 회의를 한다 그러면 전부 그런 분들만 모여요. 그런 분들만 모이고 저도 그 전까지는 캔사스에 있으면서 몇 번 그런 걸 시도를 했어요. 모여서 같이 이야기 하자, 이런 것들을 시도를 하고. 인제 오늘 왔던 친구 하나 그분도 그런 그룹에 속하는데 그런 걸 했지마는 만나서 얘기하면 따분한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는 뭔가 따분한 얘기를 가지고 길게 하냐. 고만 끝내고 자, 맥주 갖고 와. 이런 식이에요. 대개 동포 사회 운동이. 제가 살던 그 지역에서는. 그랬어요. 근데 이것을 제가 옮겨와서 보니까 필라 사회도 그렇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거의 조국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못하고 있드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제가 분석해보니까, 왜 그러냐 분석해보니까 구성 요소가 제일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게 국제 결혼한 분들의 분들의 가족 관계가 제일 많은 부류를 차지하고 있더라. 그래서 관심이 없다는 거고 그 다음에 인제 근데 그분들이 떠 제일 또 애국심이 강해요. 그니깐 무슨 국내 사정이 좀 어려워져가지고 성금을 보내자고 그러면 이분들이 제일 많이 보내요. 그런데 어떤 정치 상황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애정이에요. 조국에 대한 애정. 그건 자기가 설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천대를 받은 만큼 더 강하더라고요. 집착이. 그런 걸 제가 느꼈어요. 그러고는 인제 다음 부류가 인제 말하자면 유학 와서 계시던 분들인데 이분들이야말로 그냥 머리로만 하는 거죠. 그래서 인제 민주화, 조국 민주화 되야 된다는 것도 그냥 그 머리로 운동을 하시는 거지 이걸 위해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동포 사회를 변화시켜가지고 힘을 보탤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앴어요, 제가 볼 때. 면담자 : 그럼 선생님께서는 80년 당시 광주에서 5·18 이 일어났을 때요, 어떻게 그거에 대해서 처음 접하게 된 건 언제인가요? 구술자 : 그니까 인제 제가 신문을 통해서 그때 인제 신한 민보, 그 다음에 인제 뉴코리아 타임즈. 그 다음에 인제 독립신문 이 네 개의 신문을 제가 일찍부터 받아봤기 때문에. 독립신문을 가장 늦게 받아봤죠 그런 신문들을 통해서 인제 그 소식을 딱 접했는데 그때는 인제... 면담자 : 그때가 5월 구술자 : 한 20일쯤 됐을 거예요. 5월 20쯤 됐을 거예요. 면담자 : 5·18 이후 쫌 며칠 후에네요? 구술자 : 그렇죠, 며칠 후에사 그 소식을 접했는데 그때는 한국에 전화번호를 팔고 사고 할 때였잖아요. 긍게 우리 마을에서 전화가 없었다니까, 한 대도. 내가 떠나온 마을에는 전화가 한 대도 없었고. 그러니까 한국에 전화 할 수도 없고 그다음에 인제 제가 그걸 안타깝게 생각한 것 중에서는 그거예요. 대도시 지역이는 분명히 있을 거라는 거예요. 연결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일반 동포들이 직접적으로 광주에 있는 친인척이랄지 그런 분들하고 직접적으로 통화를 해가지고 정보를 제공해준 분이 한분도 없었다는 거예요. 신문사 같은 데다 정보를 제공한 분도 없었고. 그러면 신한민보나 뉴코리아타임즈나 코리아 타임즈나 해외한민보인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처음에 입수했겠느냐. 일본을 통해서 입수한 거예요. 그때 당시 일본은 한민통, 일본 한민통 기관지인 민족신보가 있었거든요. 그 민족 신보하고 그 다음에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한양이라는 잡지가 있었어요. 월간 잡지. 그 두 가지를 통해서 거의 절대적인 정보 소스였어요. 정보를 받는 통로였어요. 그래가지고 인제 거리를 통해서 온 것을 여기서 보도를 해주고 그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되고. 그래서 인자 찾아보려고 인제 노력을 한 거죠. 저는 인제 광주에 물론 이제 아는 분들도 있고 친인척도 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편지로밖에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인제 동생들도 그때 강진에 살았는대도 불구하고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발만 동동 구르면서 인제 독촉하는 게 신문사들한테 독촉하는 거죠 좀 어떻게 좀 자세한 정보좀 구해줄 수 없느냐, 알아볼 수 없느냐, 어떻게 됐느냐, 지금 상황은. 계속 독촉만. 면담자 : 당시 선생님께서 보셨다는 신한민보나 뭐 뉴코리아 타임즈 그런 언론에 보도된 광주 상황에 대한 어떤 논조라고 해야 되나요? 주로 어떤 내용이었나요? 구술자 : 거기서는 순전 일반적으로 나오는 게 인제 군부 독재, 말하자면 전두환이 집권을 하기 위해서 정권을 강탈하기 위해서 학살한 그거죠, 인제. 민주화를 중점적으로 두고 말하자면 국내에 민주화가 안 됐기 때문에 독재 타도를 중점적으로 두고 거기에서 해석을 내리는 거죠. 이런 사태가 왜 일어났느냐. 말하자며는 어떤 한 지역을 찍어가지고 본보기로 그냥 짓밟아버리면 다른 지역이 꼼짝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그렇게 해서 뽑힌 게 찍힌 게 광주였고 그래서 이 사람들이 광주에서 막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런 면담자 :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들도 좀 다 나오고 그랬나요? 구술자 : 아이 그것은 인자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제 그때 떠도는 얘기로 2천명이 죽었다, 인제 그렇게 우리가 들었거든요. 2천명이 죽었다. 기가 막힌 거죠. 밥을 먹을 수가 없는, 그런 며칠간을. 그러고 있다가 한 2개월 쯤 후에 그니까 한 7,8월 경에 신한민보사에서 NHK에서 만든 테입을 하나 저한테 보내줬어요. 그다음에 인제 뉴코리아 타임즈에서 맥길대학에서 만든 테입을 또 보내준 거예요. 그래서 그 두 테입을 딱 제가 받아가지고 NHK는 영어를, 아니 일본어를 내가 못해서 뭔 말인지 못 알아먹겄고. 맥길대학에서 나온 것은 화질이 너무 떨어져가지고 잘 보이지도 잘 않고 그러더라고요. 그래 인제 그놈을, 이걸 어떡해야 될것인가 하고 인제 고민을 하다가 이놈을 가지고 선우한 선생을 찾아갔어요. 그때 제가 캔사스에 살았고 선우환 선생은 미주리 그 컬럼비아에서 쪼끔 떨어진 쪼끄만 마을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 거기서 정치학 강의를 하고 계셨, 교수로 계셨거든요. 선우환 선생이 일본어를 잘하시니까, 잘 하시는 줄을 아니까 그 NHK에서 만든 테입을 가지고 선우환 선생을 찾아가가지고 이걸 좀 우리말로 옮겨주십시오, 청탁을 해가지고 그래서 선우환 선생이 그놈을 밤내 그놈 듣고 인제 우리말로 대충 적어줘가지고 그걸 인제 다시 인제 제가 인제 그놈하고 인제 맥길대학에서 나온 거하고 편집을 해가지고 테입을 하나 만들었어요. 질이 아주 엉망이죠, 복사하고 하고 하고 한 놈에서 또 재, 재복사를 했으니까. 그래서 인제 이걸 들고 인제 거기에 있는 캔사스 주립대학에 있는 한국 학생, 그 다음에 제가 연수 생활을 할 때 인제 와가지고 인연을 맺었던 콜롬비아 대학에 있는 인제 한인 학생들. 그때 당시에 거기에 정대철씨도 학생으로 있었거든요. 정대철씨도 있었고. 그래서 인제. 또 권노갑씨 아들이 그때 있었을 거예요. 콜롬비아 대학에. 그래서 거기도 인제 찾아갔고. 또 그 다음에 다른 학생들도 한인 학생들 찾아가서 테잎을 보여주고. 근데 제가 인상에 남는 것은 콜롬비아 대학에 갔을 때가 제일 인상에 남아요. 그 미조리주 콜롬비아 대학인데요, 거가 인제 미조리 주립대학인데 거기 한인 학생이 거가 있었는데 다른 데선 다 반응이 없었는데, 다 기냥 뭐 야 너무 그 징그럽지 않느냐 정도의 반응밖에는 제가 구경을 못했었거든요. 징그럽지 않느냐는 반응 밖에. 콜롬비아 대학을 가니까는 끝나고 나니까 점심합시다, 그러면서 데리고 가더라고요. 어떤 그 학생이 자취방으로 데려가 점심이나 같이 합시다 데리고 가더니 거기서 어떤 분이 그래요. 우리 아버지가 김대중 선생의 오른팔 역할을 한다고.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게 아마 권노갑씨 아들이었지 않는가 싶어요. 그때는 뭐 제가 별로 그렇게 관심이 없어가지고 이름도... 면담자 : 선생님, 잠시 만요. (TAPE 교체) 면접자 : 그 선생님 그러면 당시 80년 5월 당시에 제가 인제 LA하고 시카고 거치면서 이렇게 조사를 지금 하고 있는데요, LA하고 시카고에서는 저희 그 80년 5월 당시에 동포 사회 중심으로 조그맣게나마 뭐 규탄 시위, 항의 시위를 현지에서 전개하고 했다고 그러더라구요. LA도 그렇고 시카고도 그렇고. 선생님 사셨던 뭐 캔사스 시티 거기에서는 그런 활동은 없었나요? 구술자 : 말하자면 규탄 시위 같은 것은 못했죠. 제가 그런 걸 할려고 시도를 많이 해봤었는데 모이지를 않아요, 사람들이 호응해 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거의 없어가지고 저는 인제 못하고, 그런 시위 같은 걸 한 번도 못하고.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게 뭐냐. 이게 뭐냐, 여기서. 이런 무언가를 좀 할 수 있는 대로 가야되지 않겠냐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이제 그 테잎을 들고 막 돌아다니면서 제가 동포 사회 그 의식화, 의식 상태에 대해 실망을 많이 했어요. 근데 실망한 두 번째 더 결정적인 이유는 뭐였냐 그러면 그때 제가 인제 제가 뉴스 레타들을 보냈었다 그랬잖아요. 그 인제 그 뉴스레타 보낼 때, 보내면서 조국 5·18 상황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쓰고 조국을 위해 뭔가 조금 우리가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격문 비슷한 것을 쓰고 그 다음에 거기다가 인자 김대중 선생을 구출해야 된다 인자 이런 이야기들을 인제 썼어요. 써가지고 그런 걸 보내면서는 인제 제 이름을 안 넣죠 인제. 왜냐 그러면 거기서 인제 교회의 인제 주소록 같은 것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제가 늘 인자 접촉하고 여행사에 근무를 하고 그랬었는데 만약에 그 사람들한테 어떤 제 신분이 그런 식으로 폭로가 되며는 뭐 여행사 일도 할 수, 하기 어렵고 그 다음에 여기 새로운 주소록 받기도 어렵고 그렇겠다 싶어가지고, 제 뭐 자괴감인지는 모르지만 제 이름을 안 넣고 인자 무명으로만 계속 그런 것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5·18 상황에 대해서 격문 같은 것 비슷하게, 김대중 선생을 구출해야 된다, 이런 걸 써가지고. 밤새 그걸 인자 우리 집사람하고 같이. 집사람은 항상 인자 봉투에 이름 쓰고 인자 이런 거 도와주고 밤내 인제 해서 붙여가지고 한 삼백 통을 메일로 쓱 보냈는데, 그 다음 한 매칠 후에 그, 저희 제가 살던 그 마을 쪼금 떨어진 대서 인자 누가 살았냐면 김 아무개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이 사람 형이 유도대학인가 체육대학인가 학장이었어요. 그래서 자기 형은 대학 학장이니까 한국에 나가서 지내고 형수가 애들하고 그 캔사스에서 살았어요. 살고 있는데 그 동생이 같이 인제 또 결혼했기 때문에 가족이 있죠, 애들이 있죠 그래가지고 그 동생이 거기서 같이 살았는데 인자 형 집은 저쪽에 있고 동생 집은 요쪽에 있고 그런 식으로 살았는데 그 동생이 초대를 하더라구요. 자기 집에 어떤 그 구역예밴가 뭐 교회의. 구역예배 그런 걸 자기 집에서 하는데 좀 오라고. 그러니까 그때는 그 사람이 만나면 그 당시만 해도 같은 한국인이다 이런 것 때문에 식구처럼 가깝게 지내고 또 인제 특히 교회가면 자기 교회 전도하려고 굉장히 친절하게 하고 가깝게 지내고 그랬기 때문에 자기 집에서 구역예배 하니까 꼭 오라고 사정을 하더라고. 그래서 난 또 인자 옳다 됐다, 거기 가서 또 한 번 이 호소를 해보자 싶어가지고 우리 집사람하고 같이 갔어요, 그날 저녁에. 그랬더니 구역예배 갔더니 한 열댓 명 모였더라고요. 모여가지고 저녁 먹고 내가 인자 이야기를 해야되겠다 싶어가지고 맘을 잡고 있는데, 그 주인이 그니까 그 김 아무개가 이야기를 딱 꺼내는데 “야, 나 엊그저께 참 기가 막히는 편지를 하나 받았다” 그러고 이야기를 꺼내는 거예요. 그래서는 뭔 말이냐 그러믄 “이야, 김일성이가 말이야, 어떻게 알았는지 내 주소를 알아가지고 나한테까지 편지를 보냈드라고. 그라고 야 일루와,” 무슨 소린고, 김일성이가, 북한 김일성이가 보냈다고 그러니까 깜짝 놀래가지고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래 인자 물어봤지, “어떻게 김일성이가 편지를 보냈어요? 거기에 뭐 김일성이라고 써졌어요?” 그랬더니 “아니, 그런 건 안써졌는데 편지지 이라고 딱 보니까 뒤에가 조선 평양이라고 딱 박혀졌다”는 거야. 암각으로. 그러니까 그 그래서 북한에서 보낸 걸로 확인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요? 그런 편지지.... 그러면서 인제 하는 얘기가 뭐냐면 분명히 캔사스에서 이게 그 우체국인이 찍혔으니까. 캔사스에서 보냈는데 야, 우리 캔사스에까지 간첩들이 들어와 가지고 그 김일성 편지를 막 이라고 보내드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제 처음에는 그런 얘기 들을 때는 뭔 말인지를 몰라가지고, 그게 뭔지를 몰라가지고 인제 쪼끔씩 쪼끔씩 물어봤죠. 어떻게 그게 북한 것인지 알았냐 그랬드니 편지를 보니까 암각으로 이렇게 조선 평양이라고 종이에가 박혔더라. 그래 내가 인자 거기서 물어봤어요, 아니 그거이 캔사스에서 부쳤닥하고 우체국 소인이 캔사스라 하고 그 다음에 또 캔사스에까지 간첩이 들어와서 그걸 만들었다고 그러는데 그러믄 종이를 캔사스에서 샀어야 될 것 아니냐. 그걸 평양서 여까지 그 종이를 갖고 와서 그 많은 종이를 가져와서 했을리가 만무하고 그러믄 미국에서 그러믄 평양에서 만든 종이를 미국에서 판다는 이야기네? 내가 그랬더니 그런지도 몰라, 인제 이러는거예요. 그래 내가 인제 그렇게만 알고 기가 막혀가지고 그럼 내용이 뭡디까? 하고 인자 물어봤어. 아, 뭐 광주에서 뭐 사람을 막 몇천명 그냥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그런 황당한 그런 막 거짓말을 써가지구 그 다음에 인자 김대중씨를 그런 것을 조작을 해가지고 지금 갇혀 있는데 김대중씨를 풀어내야 된다고 막 그 푸는 운동을 해야 된다고 그러면서 내용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들어보니까 내가 쓴 편지거든, 그렇잖아요. 너무 황당한 거예요. 거기서. 그거 내가 써가지고 했는데. 그래 그거 내가 쓴 편진데? 이래 인제 그래가지고 인제 무뚜름하게 아주 기냥 어색하게 되뻐린거죠. 그래 나는 이제 한마디 그 뒷말도 못하고 우리 마누라랑 같이 기냥 나오면서 너무 기가 막혀 가지고 이럴 수가 있는가? 그냥 그 내용이 거부를 한다든지, 왜냐면 지그 형이 대학 학장 하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그 정궈너하고 깊은 관계가 있고 그러니까 그런 거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그랬다믄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어떻게 이것을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 김일성 지령에 의해서 김대중을 살리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꾸밀 수가 있느냐. 조작할 수가 있느냐. 이렇게까지 조작할 수가 있는가, 너무 기가 막혀가지고 거기서 지내고 싶은 맘이 없드라고요, 지내고 싶어도. 그 인제 그래서 그거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가지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인자 들어가지고. 그래 나는 인자 어떻게 하면 좀더 동포 사회가 많이 모여있는 지역에 가서 그런 어떤 항의 시위도 좀 같이 하고. 인제 신문 같은데 보도가 됐거든요. 뉴욕지역에서 또 그다음에 인제 LA 지역 같은 데 이런 데서 항의 시위를 같은게 있어, 그런 건 보도 되고 그래. 그런 것도 같이 좀 하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라고 생각을 하다가 그때 인제 여행사 직원이며는 비행기 표를 반값으로 할인을 해줘요. 직원 가족에게는 그래서 그걸 이용해가지고 한번 구경 한번 가자, 그래가지고 인제 집사람 데리고 같이 인제 여행을 왔지. 인제 필라델피아, 뉴욕 돌아봤는데 저는 이제 그 원래 도시 생활을 한번도 못해봤어요. 근데 저희 집사람도 그래요 도시 생활 전혀 못해보고 인제 미국에 온 사람이거든요. 그니까 도시에 대해서 불안하고 어떤 그 뭐랄까, 맘이 편하질 않는 그런 정서가 있어요. 근데 뉴욕, 도저히 못가겠는거예요. 그 다음에 LA 생각하니까 우리는 이제 사계절이 뚜렷한데서 컸잖아요. 근데 LA는 얘기를 들으니까 겨울이 없다고, 맨날 뜨거운 여름이라고 그러니깐 거기는 또 그래서 가고 싶은 맘이 없고. 그래서 인제 아 그러면 보니까 필라는 아주좋더라고요 경치도 아주 좋고. 그래서 필라로 가자, 그렇게 인자, 집사람하고 둘이 인자 그런 이야기로 합의를 본 거지. 게 인자 필라로 오기로 인자 하고 선우환 선생한테 인자 찾아가서 상의를 드렸어요. 제가 아무래도 좀 동포가 많이 모여 있는 데로 큰 도시로 가가지고 뭔가 제가 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러니까 선생이 반대를 하시는 거예요. 잡으신 거예요. 지금 장선생이 아주 젊고 생활 기반이 안 갖춰져있지 않느냐. 애들도 있고 그러는데 그 애들은 어떻게 키울 것이냐. 또 그 다음에 운동이라는게 지금 누가 막 돈을 대주고, 생활비를 대주고 그래도 하기 힘든 건데 장선생은 아무리 그렇게해봐도 아무도 장선생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없는데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이 걱정이니까 장선생 생활부터 안정된 다음에 생각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드라고요. 의외에 뜻밖에었죠. 그래서 인자 그 선생님 말씀듣고 나는 아닌데, 그게아닌데 맨날 이 속으로만 그라고 있는데 그라고 있으니까 인자 선생님 의견을 안 받아들이니까 선생님도 조금 인제 좀 답답해 하셨던 모양이에요. 꼭 가고 싶으면 서정균 선생한테 가라고 그러시드라고요. 면담자 : 누구요? 구술자 : 서정균 선생한테 가라. 서정균 선생이 인자 선우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내가 겪어보고 내가 관찰해본 바에 의하면 제일 정직하고 성실한 분이다. 그러니까 서정균 선생님 옆으로 가서 배워라. 그러시드라고요. 근데 서정균 선생이 뉴욕가 계시잖아요. 해외 한민보를 하고 계셨거든요. 그게 뉴욕은 가기 싫은 건데. 내가 . 그래서 인자 에라 모르겠다 그러고 기냥 필라델피아로 왔어요. 와가지고 인제 그때 김경재씨가 독립신문을 필라델피아에서 하고 있어, 바로 여 옆에서, 여 옆에가 인제 독립신문 사옥이 있었어요. 거기 와가지고 인제 그때 내 생각은 뭐였냐 그라며는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 옆에서 거들어주고 청소만 해줘도. 사무실을 보니까 막 엉망으로 널려져 있고 청소를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지저분하고 그런 상태 속에서 혼자 집필하고 뭐 그걸 그때 당시 전부 손으로 써가지고 복사해서 또 그 다음에 다른 신문도 오려가지고 붙여가지고 복사해서 신문을 만드는 인자, 우리 우리 ○○로 141116장광선01_02:12:40 손식자라고 이렇게 손으로 쓰고 그런 때이기 때문에 뭔가 좀 청소라도 해주면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보다 좀 차분하게 잘 쓸 수 있지 않냐, 이런 생각에서 인제 들어갔어요. 들어가고 인제 우리 집사람 와가지고 인제 누가 소개해줘서 세탁소에서 인제 가서 일을 하고. 그게 거기 가서 같이 인제 그 김경재씨하고 일을 하면서 5·18 제 1회 기념식을 맞이한 거예요. 면담자 : 그때 그 독립신문, 필라델피아로 오신 게 81년인가요? 구술자 : 예, 81년 바로 인제 짐 싸갖고 와가지고. 와가지고 인제 5·18 기념일을 인제 만났잖아요. 일주년 기념. 그래서 그 일주년 기념을 우리가 필라델피아 그 한인회관에서 인제 열었어요. 그니까 그 당시에 한인회관에서 5·18 기념식을 연 것은 필라델피아가 최초고 유일했어요. 다른 지역 어디 유럽에서도 그런 게 없었고 다른 모든 지역에서 그 기념행사를 한인회관에서 한 적은 한 곳은 없어요. 기껏 했다 하면 LA에선가 그 어떤 학굔가 어딘가를 빌려가지고 기념행사를 한번 한 적이 있다는 걸 제가 들었고. 그러고 뉴욕서도 그땐 못했어요. 기념식을 못했어요. 제 1회는. 면담자 : 그때 당시만 해도 아직 5·18이 좀 금기시, 그 한국에서 좀 금기시되고 이게 폭동으로 그렇게 인식이 되어 있던 일이었는데요. 구술자 : 예, 미국서도 마찬가지. 똑같은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일반,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는 그냥 북에서 내려온 간첩들이 준동을 시켜가지고 거기에는 인제 빨갱이 김대중이가 인자 있고 이 간첩들에 의해서 일어난 폭동. 이것이 일반 동포들의 인식이었는데 왜 그랬느냐 그러면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었어요, 아니며는 전화통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어요? 아무것도 못했거든요. 전화도 그때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 자체가 기득권이에요. 그니까 전화번호를 사고팔았으니까. 기득권이니까 그런 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전부다 정부측 의견 쪽에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식으로 그 실상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전화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현장 소리를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전해줘 가지고 언론으로라도 쪼끔 전달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못 찾은 거예요, 우리가. 근데 인제 몇몇 뜻있는 동포 중심으로 이런 그 뭐랄까요, 5·18관련된 기념식 추모제를 진행을 다른 지역에서 하긴 했는데 일주년 기념식을 여기선 한인회관에서 했다구요. 한인회관에서. 최초의 유일하게 한인회관에서 기념식, 기념식을, 제 1회 기념식을 한 도시가 필라델피아에요. 면담자 : 그때당시 한인, 전체 한인 모임이라고 하면 일부는 좀 보수 정권하고 친정권적인 사람이 있을 것이고 구술자 : 물론이죠. 면담자 : 좀 그런. 구술자 : 그게 인제 조금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5·18이 일어나니까 그해 80년 아마 7,8월 쯤 됐을 거예요. 내가 정확한 그 시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필라델피아에 손충무라는 그 기자가 있었어요, 손충무가. 인제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 명망가들, 그니까 한인회장, 의사협회 회장, 이런 사람들을, 그런 사람들을 한 네 명인가를 모아가지고 자기까지 다섯 명이 서울에 가서 전두환 지지선언을 했어요. 지지선언하고 돌아오니까 여기에서 김경재를 비롯한 민주화활동을 하고 있던 분들이 거거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을 일으키며 이 사람들을 필라 오적이라고 지목을 해가지고 규탄을 했었어요. 필라 오적 규탄을 했었어요. 그 중에 오적 중에 한 사람이 김덕수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그 다음에 한인회장이 된 거예요. 그래가지고 인제 오적 그거 막 하니까 이 사람들이 그냥 명예훼손으로 해가지고 김경재씨를 인제 고소하고 그렇게 까지 했는데, 자기가 인제 한인회장이 되니까 쪼금 인제 언론을 부드럽게 자기 이미지를 부드럽게 해줘야 할 필요를 느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마는 김경재씨한테 인제 접근을 한 거예요. 가깝게 그래갖고 인제 우리한테 가끔가다 저녁도 사고 그랬어요. 그래서 인제 그거에 회장이니까 김경재씨가 인제 밀어붙인 거지. 당신 회장인데 한인회관 내놔, 그래가지고 인제 한인회관에서 하게 됐는데 그때 한 모인 동포수가 한 4,50명 밖에 안 됐어요. 1회때니까. 4,50명 밖에 안 됐는데 그때 제가 그 5·18 실상에 대해서 짧게 한 30분 정도 이야기를 했었어요. 최초로 제가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해본 거죠. 면담자 : 실상이라고 한다면 어떤 내용들을 이야기 하셨나요? 구술자 : 그 그, NHK 필림하고 맥길대학 필림 거기에서 본 것들을 소개를 한 거죠. 면담자 : 상영을 하신 겁니까? 구술자 : 아니요 소개. 말로 소개를 하면서 그걸 해주고 그 다음에 그걸 상영할라고 했어요. 그 필림을. 상영할라고 했는데 상영 장비를 못 구했어요, 그때. 상영장비를 못 구해가지고 그걸 못해버렸어요. 못하고는 그냥 필림만 가지고 있고 그 필림을 난중에 인제 여러 부 복사해가지고 쪼금 배부하는 일을 해줬죠, 여기 있는 분들이. 해줬고 그담에 인자 그렇게 해서 김경재씨하고 한참 일을 했는데. 면담자 :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그 일주년 기념식, 그 기념식 추모제, 식순이라고 해야 될까요, 뭐 어떻게 진행이 됐나요? 구술자 : 그게 이제 그니까 이제 첨에 모였을 때 정확한 식순 같은 것은 기억이 제대로 안 나는데 강연이란 그것도 안 붙이고 그냥 현황소개라고 그랬든가? 현장소개라고 그거 하고. 그 다음에 추모사 하고 그 다음에 인제 뭐 추모 참배 이런 거 하고 그 다음에 음악 한곡 듣고, 녹음으로 해서 음악 한곡 듣고. 그러고 헤어졌던 것 같애요. 한 30분 이야기 하고. 면담자 : 추모사를 누가 담당을 하셨나요 구술자 : 추모사를 그때 제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야기 한 것은 제가 했는데 그것 때문에 제가 너무 흥분허고 그래가지고 다른 것도 기억이 안 나고. 추모사를 누가 했든지 모르겠어요, 누가 했는지 모르겠고. 어, 면담자 : 알겠습니다. 구술자 : 그걸 인제 주도하신분은 김경재 씨가 인제 주도를 하셨고. 그 추모 행사를. 그 독립신문이 위주로 되가지고 김경재씨가 하셨는데 그래서 인제 김경재씨하고 같이 인제 몇 개월 일을 제가 했죠, 같이. 일을 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냐 그러면 비엔나에서, 북과 해외 기독학자 동포 회의라는 게 있었어요. 게 인제 그것이 원래는 그 유럽에 있던 이영빈 목사님하고 그 다음이 그 이화? 이화? 이름이 지금 깜박깜박하네요. 이영빈 목사하고 다른 또 이 어떤 목사님하고 두 분이 주도를 하셨어요. 그걸 주도를 해가지고 원래는 기독학자회의를 하기로 했었어요. 그러니까 북쪽에서 기독학자들이 오고 그 다음에 해외에서 기독학자들이 가고 해가지고 같이 협의를, 통일에 대한 협의를 해보자, 이렇게 했었는데 그렇게만 하며는 크게 의의가 없으니까 동포들도 참여시키자 해가지고 인제 이름을 북과 해외 기독 학자 동포를 넣어가지고 기독학자 동포 대화 이렇게 비엔나에서 열었었거든요. 거기에 인자 미국에서 누가 참여할 것인가 어떤 단체가 참여할까 이런 걸 논의를 했는데 단체들은 단체로 참여하는 걸 거부를 했던 것 같애. 그러고 개별적으로 참여하자 그래가지고 개별들이 많이 참여를 했어요. 아무래도 그것은 북과 연계된 회의기 때문에 일정하게 통일 관계에 관심을 많이 가지신 분들, 남북 화해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만 간 거예요. 그 다음에 인제 그런데 관심을 덜 가지신 분들, 그니까 민주화에 중점을 두신 분들은 아무도 참석을 갖지 않고. 그런 통일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동부 쪽에 많이 계신 거예요. 서부 LA쪽에는 그런 분들보다는 민주화 쪽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았고. 그래서 동부 쪽에서 많이 갔어요. 캐나다에서도 가고. 가가지고 와가지고 인제 거기 참여하고 왔는데 인제 그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전순태 선생이 거기 참여를 했었거든요, 같이. 근데 전순태 선생하고 김경재씨하고 굉장히 가까웠어요. 그때. 친했어요. 친하니까는 전화를, 아침에 전화를 딱 한거예요. 거기 비엔나 갔다 왔냐고 그러니까 갔다 왔다고 그러니까 그 사연 좀 이야기 좀 해줘 그러니까 거기에 참석한 얘기를 자세하니 전순태 선생이 해준 거예요. 해주면서 아주 정말 재밌어가지고 야, 끝날 때는 북쪽에서 내려온 그때 여영구 선생이 아마 내려왔을 거예요, 북쪽에서, 대표론가 내려왔는데 여영구 선생하고 나 춤도 췄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김경재씨가 이것을 신문 기사에다 냈는데 어떻게 내뻐렸냐면 ‘평양 기생과 춤바람이 난’ 이렇게 네뻐린 거예요. 춤을 추고 온 그 맛에 내년에도 또 할라고 그런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내뻐린 거예요. 그 평양기생이라고 내뻐렸으니까 어떻게 됐겠어요. 왈칵 뒤집힌 거지. 두 눈이 왈칵 뒤집혔는데. 그 기사가 나가고 나서 바로 뉴욕에서 인제 그 비엔나 회의에 참여했던 사람들 보고회를 하기 위해서 인제 미주 동포회의라는 회의를 소집을 했어요. 그거 인제 그 소집한 단체가 미주민주국민연합이라는 임창영선생이 의장으로 계시던 그 조직에서 인제 조직적으로는 참여를 안 했지만 그 회원 중에서 많은 분들이 거기에 참여를 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보고 겸 해서 동포 회의를 소집해가지고 뉴욕에서 회의를 가졌거든요. 거기에 인제 제가 참여를 했어요. 인제 말하자면독립신문 기자 신분으로 참여를 한 거지. 그때 인제 가지고 있었던, 김경재씨가 편집국장이라는 직함을 줘가지고 있어기 때문에 참여를 했는데 한 이백 명 모였었어요. 다른 그 보고회 같은 얘기들 다 끝나고 나서 한 사람이 굉장히 난처하게, 여기에 독립신문에서 참여한 사람이 있는데 이야기한번 들읍시다. 인제 이렇게 불러 낸 거예요, 저를. 그래가지고 인제 제가 나와서 독립신문이 어떻게 해서 발행되는가, 또 무슨, 주 그 취지는 뭔가, 인자 그런 것에 대해서, 신문 목표와 방향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인제 소개를 하고 그 다음에 우리는 주로 인제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이런 것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국내하고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솔직히 그런 얘기를 했죠. 우리가 제일 지금 안타까운 것은 국내하고 직접적인 연관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근데 그런 사정이 똑같애요, 어디나. 가서보니까 뉴욕도 그렇더라고요.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그런 그 끈이 거의 없고 그냥 일본을 통해서 거의 정보를 얻고 있더라고요. 인제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무난히 끝냈는데. 질문을 한다고 또 한분이 이번에 그 독립신문 나왔는데 보니까 비엔나 회의에 대해서 평양기생이라는 기사를 썼던데, 평양 기생이란 말을 썼던데 편집국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라고 물은 거예요. 너무 내가 기가 막혀가지고,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독립신문 편집국장으로서 독립신문을 대신해서 정중하게 여러분께 사죄합니다 그러고 인제 인사를 드렸어요, 사지한다고. 정말 그것은 그런 말을 써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그런 식으로 그 여론을 왜곡 보도 시킨 것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사죄를 했어요. 그랬드니 그라고 인자 그분들은 인제 기냥 양해 한 걸로 하고 넘어갔었는데 거기에 임경규 변호사가 그 참여를 했었어요, 그 해에. 인제 뉴욕에서 변호사였거든. 그 사람이 인제 또 김경재하고 아주 친한 사람이에요. 가까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쪼르르 김경재한테 전화를 했네? 야, 니 광선이가 와가지구 말이지, 독립신문이 뭐 아주 그냥 나쁜 신문으로 그냥 폄하를 해가지고 그 평양기생 말 나온 것에 대해서 백배사죄한다고 그라드라? 이라고 인자 얘기를 한 거예요. 경재가 뿔이 이만큼 나가지고, 지가 그 기사를 썼는데. 뿔이 이만큼 나갖고 내가 다음날 오니까 나가라고 막 그 소리를 막 지르면서 그러더라고. 그래서 나도 좋아, 나가지 그러고 열쇠 탁 놓고 나갔거든요. 나가가지구 며칠간을 인제 기냥 나는 집에서 인제 코만 씩씩 불고 있었는데 경재는 경재대로 아쉽지. 왜냐믄 그래도 나라도 옆에 붙어가지고 같이 해줬으니까 신문이 매주 나올 수 있었는 건데 내가 안 나오니까 답답하고 한심스러운 거지. 그러니까 또 찾아와서 사정을 하드라고. 야 너 화가 나가지고 한마디 한 것 가지고 그러냐고 그래. 그러면서 나오라고. 나도 인제 가만히 생각하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런 어떤 잘못된 시각을 잡아가면서 민주화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는 그런 틀 속에서 뭐고 이끌어 가야되지 않겠느냐 생각이 있어서 다시 나왔어요. 다시 나오가지고 다시 또 한 몇 주간을 했는데 한두달 같이 또 했어요,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이 터져뿐 게 뭐이냐 그라면 그때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데 경재가 그 필라 동포 사회의 명망가들 이런 사람들하고 그 술좌석에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그 사람들 하고 그 다음에 필라에서 김경재씨가 조직한 반독재 투쟁 위원회라는 게 있었어요. 그때 인제 이흥석 선생이 회장을 맡고 계셨는데 반 독재 투쟁 위원회 이사 이런 사람들 모인 데서 장광선이 그 사람 순 빨갱이 섀낀데 FBI에서 그래서 와가지고 조사를 하고 갔다고 그런 말을 한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서. 그런데 그거이 왜 그런 말이 생겼냐하며는 내가 인제 독립신문 딱 들어와가지고 인제 글을 쓰면서 그 뭔 논문을 하나 신문에다 발표를 했냐면 5·18 배경에 대한 제목을 지금 인자 잘 기억이 안나는데 배경에 대한 글을 제가 쓴 것이 있어요. 그 당시까지만 하면 거의 모든 논조들이 독재에만 관심을 치중시켜가지고, 말하자면 군사독재를 지속하기 위해서 민간 학살까지 저지르면서 정권을 찬탈했다. 그래서 이 독재타도에만 집중적으로 인제 언론들이 다루었거든요. 근데 저는 계속 투고를 하면서 그 밑바닥을 살펴보자. 배경을 살펴보자. 이런 것으로만 계속 투쟁을, 논조를 풀어 나갔는데 그게 뭐이냐 그러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분단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 분단 상황이라는 것이 말하자며는 농촌을 피폐하게 맨들었고 그 다음에 민주화를 갉아먹고 있고 절대 민주화 운동을 할 수 없는 그런 나쁜 토양으로 악화시켰다. 그러니까 이 분단 상황을 해소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다. 인제 이런 논조에 의해서 5·18도 그 선상에서 봐야된다. 그니까 5·18도 그 분단의 책임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단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 그래서 미국이 5·18의 근본적인 책임자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인제 그 주한미군 철수를 비롯해서 진정한 그 민족 화해 운동이 5·18 계승운동이다 하는 식으로 그걸 인제 논문을 써가지고 독립신문을 통해서 발표를 했는데 그걸 발표 하고 나서 한 한주 정돈가 지난 뒤에 어느날 아침에 경재가 사무실에 들어갔드니 아 미스타 장 출세했어, 그러는 거예요, 아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저거 봐, 벽자에 딱 보니까 노동신문을 딱 거기다 걸어논 거예요. 그 노동신문에 그 제가 그 독립신문에 발표했던 글 그대로 거기에 전제가 되어 있는 거예요. 거기에 인제 미주 동포가 5·18을 말하자면 분단에 기인한 것이다, 분단 상황 때문에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총체적인 책임은 미국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반미 자주화 투쟁을 해야만이 이런 상황을 해소할 수 있다는 글을 썼다 하는 그런 소개말과 함께 그걸 딱 붙여 논 거예요. 내가 기가 막히지. 그랬는데 인자 그런 것이 있었는데 김경재씨는 자랑하고 돌아댕긴거예요. 야, 우리 독립신문이 노동신문에까지 소개될 정도다 하는 식으로 자랑하고 돌아댕겼었는데 그 뉴욕가서 그 자기 그렇게 뭐 욕먹였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를 욕먹였다는 그 분풀이로 이걸 역이용을 한거예요. 야, 이 장광선이가 빨갱이기 때문에 장광선이 글을 노동신문에서 내준다. 이렇게 되뻐린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걸 조사하기 위해서 FBI가 우리 조사 나왔다, 이러게 된 거예요. 이말을 누가 나한테 해준거예요. 그 말 듣고 나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잖아요. 참을 수가 없어서 기냥 결별하고 나와버렸어요. 나와가지고 그때 한 11월 쯤인가 12월 쯤인가. 나왔는데, 11월이구나, 11월달에 나와서 면담자 : 81년이요? 구술자 : 그렇죠, 인자 그해에. 같은 해에. 그러니까 몇 개월 일 같이 안 한 거예요. 반년 쪼금 넘겨 같이 일을 했었는데. 면담자 : 아예 그냥 반독재 운동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지금 그 분들은 뭐 통일운동이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쓴 건가요? 구술자 : 그게 인제 쪼금 그 배경 이야기를 좀 길게 해야 되는데 그 전까지는 아까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운동들이란 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명망가를 중심으로 한 운동체였잖아요, 운동이었잖아요. 거기에 뚜렷하게 두 갈래로 구분이 되뻐려요. 그 구분이 언제 생겼냐라면 70, 사실상 72년도에 생긴 거예요. 72년도에 김대중 선생이 71년엔가 그 선거를 해가지고 떨어졌잖아요. 그 후로 미국을 오신 거예요. 미국을 오셨을 때, 김대중선생이 영어를 잘 못하셨대요. 그때 왔을 때 까지도. 그니까 미국에 있는 정치인들을 그 직접적으로 상대하기가 굉장히 겁이 난거예요. 겁이 난 것을 그 미조리대학 콜롬비아에 있는 미조리 대학에 계시든 조승수, 조승수, 조승, 뭐 저 거기 국회의원도 하고 그러셨는데 그 교수님하고 선우환 선생이 도와드린 거예요. 김선생님, 영어 못하는게 전연 부끄러운 일 아닙니다. 우리가, 영어는 우리가 통역을 해주고 해줄테니까 만나십시오. 그래가지고 모시고 다니면서 정치인들 만나게 해주고 정치 그룹들 만나게 해주고 하면서 다 해드린 거예요. 그래서 인제 김대중 선생이 딱 와가지고 느끼신게 뭐이냐면 김대중 선생은 인제 조직 활동가니까, 정당 활동가니까 여기에서 한국의 그 민주화 활동을 써포트할 조직을 만들어야겠다, 이 구상을 하고 계신 거예요. 그래가지고 미주에 있는 그 명망가들 또는 운동 활동가들을 모아가지고 조직을 만들려고 하셨어요. 그거이 뭐이냐면 민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민족 뭐 연합인가, 그래서 약자로민통련. 그걸 인제 결성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그라고 가셨어요. 어디로 가셨냐면 일본으로 인제 가셨어요. 그니까 인제 미국에서 주로 인제 만나서 그런 활동을 조직해야겠다 하는 게 그 이전에 운동체를 가지고 계시던 임창용 선생 같은 인제 국민의 소리라는 인제 그런 걸 가지고 계셨거든요. 국민, 민주주의 국민운동 본분가 뭐, 민주주의 국민 운동 회의인가 그런 조직체를 임선생님이 가지고 계셨고 그 다음에 다른 인제 다른 분들도 각 지역적으로 워싱턴에서는 인제 그 노광국 선생 같은 분들이 또 인제 별도로 인제 또 운동체 조직을 갖고 계셨고 캐나다에서도 마찬가지고 전충림 선생이 신문 하시면서 가지고 계셨고 LA에서는 인제 차상달이랄지 김상돈 선생 같은 분이 그런 활동을 하고 계셨고 뉴욕에서 강대일 선생 같은 분들이, 아니 시카고에서 강대일 선생 같은 분들이 인제 그런 조직체를 가지고 계셨고. 그니까 다 지식인들 중심으로 해서 자잘한 조직체를 가지고 계신 거예요. 그분들의 주요 관심사는 뭐이냐 그러면 인제 민주화하고 통일인데 그 전까지는 구분이 거의 없었어요. 뭐 거 민주화가 통일이고 통일이 민주화고 하는 식으로. 거의 구분이 없었는데 김대중 선생이 와서 조직을 딱 하고 한민통을 조직을 하고 가시면서 주로 남쪽 그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써포트 하는 그런 어떤 그 성격의 조직체를 만들고 싶어하신 거예요. 인제 거기에 방점을 두신 거예요, 거기에. 그니까 인제 거기 그 방점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신 분들이 인제 주로 기독교 계통. 그니까 인제 캐나다에 계시던 김재준 선생, 그 옛날에 한신대 총장 하시다가, 한신대 학장 하시다가 망명 캐나다로 가셨던 김재준 선생. 그분을 중심으로 한 세력, 그 다음에 인자 뉴욕에서, 미국에서도 주로 인자 기독교측 하고 인자 LA에 계시는 김상돈 선생, 서울 시장 하시다가 인제 오신 분. 이런 분들 통해서 그 인제 임창영 선생, 이렇게 해서 묶어가지고 조직체를, 한민통이란 조직체를 사실상 발기를 해놓고 일본으로 가셨어요. 일본에서 똑같은 조직체를 똑같은 형태의, 한국 민주화 운동을 써포트 하는 조직체를 만들기 위해서 똑같은 한민통 조직을 결성을 준비를 하셨는데, 그니까 미국 한민통, 일본 한민통이 된 거죠. 그렇게 결성을 하셨는데 그 마지막 단계에서, 결성을 하루 앞두곤가 이틀 앞두곤가 납치가 되셨잖아요. 납치가 되셨는데 오늘 오시기로 한 선생이 안오시니까 인제 거기서 인제 한민통 결성하고 싶어 하시던 분들이, 결성 그 멤버들이 여기저기 인제 수소문 한 거예요. 김선생이 어떻게 됐냐 그러니까, 아 호텔에서 나가셨다. 그 어디로 갔느냐. 간 곳이 없어요. 그러니까 인제 미국으로 급하게 연락을 한 거예요. 임창용 선생이 인제 미국에서 연락을 받고는 임창용 선생이 민주당 시절에 유엔 대사를 하셨기 때문에 정계에 아주 끈끈한 인맥들이 많이 계시니까 임창영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 예감이 이상한 거예요. 예감이 이상하니까 바로 국무부에따 연락을 해가지고 김대중 선생이 일본에서 사라졌다. 이거 좀 조사해달라고 바로 연락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국무부에서는 아마 사전에 다 알고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러니까, 요청을 하니까 거부할 수 없으니까 바로 연락을 해가지고 헬기를 띄운 거예요. 그래서 그 김대중 선생이 납치, 배에 가다가 이놈 돌댕이에 저기 달아가지고 빠쳐버려, 하는 소리까지 들어셨다고 하잖아요. 그 순간에 탈탈탈 하는 헬기소리가 들리니까 중단하고 한국까지 가가지고 집앞에다 버리고 갔다, 이런 말씀을 김대중 선생님이 하셨잖아요. 그런, 인제 그런 사건이 있었거든요. 그니까 그 김대중 선생이 미국하고 일본을 거쳐가면서 한국 민주화 세력을 써포트 하는 조직체를 구상을 하신 것이 기폭제가 되어가지고 미국에서도 인제 그게 인제 갈라진거예요. 우리가 먼저 한국의 민주화 세력을 써포트해야되지 않느냐, 인제 이렇게 중점적으로 하는 세력하고 그게 무슨 소리냐, 한국이 민주화되지 못한 게 뭣 때문이냐, 그 근본원인을 제거해야되지 않느냐. 이건 분단이다. 그러니까 분단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그 다음에, 미군 주둔, 미군 지배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우리 민주화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신 분들하고 갈등이 생겨버린 거예요. 갈등이 생겨가지고 인제 마지막 회의를 세인트 루이스에서 했는데 저는 인제 그때까지도 그런 데 참여를 안 했기 때문에 인제 내막은 자세히 몰라요. 나중에인제 여기저기 이야기를 듣고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인데 세인트 루이스에서 회의를 했는데 인제 양측 의견이 갈리니까 서로 인제 어떻게 그럼 조직을 꾸릴 것이냐, 양측 의견이 갈리니까. 이 양측 의견을 중재를 하시겠다고 나서는 분이 선우환박사였어요. 선우환 선생이 인제 여쪽가서 인제 저쪽 좋게 이야기하고 저쪽 가서 인제 이쪽 좋게 이야기 하고. 서로 붙여가지고 이게 뭐냐, 의견을 합쳐가지고 하나의 단체로 출범시키자. 그랬는데 이게 안 되가지고 나중에는 여쪽에서는 선우환이가 저쪽 쁘락치로 우리한테 와가지고 이간질한다, 저쪽에서는 선우환이가 저쪽 프락치로 우리한테 이간질한다 이래가지고 선선생님만 중간에서 완전히 쁘락치 취급을 받고 양쪽 다 배격 당한 거예요. 선선생이. 그래서 선선생은 양쪽 다 가입을 안 하셨어요. 끝까지. 그러고 인제 혼자 남아계셔버리고, 학자로써 남아 계셔뻐리고. 여쪽은 인자 미주민주 국민연합을 출범시켜가지고 출범시켜가지고 주로 인자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문제, 그 다음에 미국의 지배를 종식시킬 수 있는 문제를 다루면서 이것이 민주화 운동으로 연결된다, 이런 주장을 하고 계신 분들이었고. 그 다음에 저쪽은 직접적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써포트해야되기 때문에 김대중 선생이 감옥에 갇혀 있는 한계 내에서, 또는 인자 광주 사변 그 불같은 상황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오해를 받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친북으로 오해를 받으면 안 된다 그래가지고 한사코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시는 분들이고. 그래서 그때 생겨난 말이 선민주 후통일, 이 말이 생긴 거예요. 사실은 그거이 아무 의미도 없고 있지도 않는 문젠데 그 말을 붙인 거예요. 그래가지고 선민주 후통일 이렇게 붙였는데 인제 김경재씨는 정치적인 야망이 있었거든요, 여기서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국내에 나가서 정치계에 진출을 해야 된다는 그런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반북적인 입장을 견지한 거예요. 견지하면서 인자 저쪽 그 한민통 쪽에 3대 의장인가 했을 거예요. 김경재씨가. 그랬던 분이었기 때문에 특히 그런 어떤 반북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저는 굉장히 불편했던 거죠. 불편해가지고 결국은 이제 헤어지게됐는데 그것이 말하자면은 방금 그 질문하신 것처럼 그 토대가 된 거죠. 이쪽 이쪽 저쪽 갈라지게 된 토대고 그 다음에 서로 그 민주화 운동 하는 쪽에서는 통일운동 쪽을 배격하고 통일 운동쪽에서는 자동적으로 민주화운동 쪽을 외면하게 하게 된 거고. 이렇게 인자 되뻐린 거예요, 사실은. 면담자 : 그 독립신문 신문사를 나오셔서 어떻게 활동을, 어떤 생활을 하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인자 제가 신문을 막상 나오니까 따분하잖아요. 저는 뭣 때문에 왔냐면 단훈시 순전히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켄사스에서 요리 왔는데 켄사스에 있으면 그래도 쫌 정착이 안정이 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그랬잖아요. 거기를 모든 걸 다 버리고 요쪽으로 와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그때 백삼십 불인가? 주에. 주급을 백삼십 불인가 받고 일을 그걸로 생활을 받으면서 하다가 내가 인제 그 일을 그만 둔다고 생각하니까 따분하잖아, 뭐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고, 낯선 지역에서. 그래서 인자 할 수 없이, 인자 에라 모르겠다, 뉴욕으로 가자 이래 된 거예요. 원래 뉴욕으로 갔어야 되는 건데 뉴욕이라는 그 도시가 싫어서 안 가고. 우리 집사람 인제 그때도 뉴욕까지는 가기 싫다 그래서 필라에서 살고. 나만 인자 필라에서 뉴욕으로 출퇴근 하면서 인제 해외 한민보 서선생한테 사정을 했어요. 제가 같이 일하게 해주십시오, 했더니 서선생이 생각좀 해봅시다. 왜 서선생이 그랬냐면 해외 한민보 입장으로서는 독립신문에서 일한 사람을 빼왔다는 말을 듣기가 싫어서 그러신 거예요, 나중에 들어왔더니.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없지 않느냐.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제가 정말로 헤어졌다, 정말로 헤어졌다고 그러면서 그래서 인자, 인자 해외한민보에 들어가서 일을 계속하게 됐었어요. 면담자 : 해외 한민보 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구술자 : 그러니까 82년 1월부터. 81년 12월부터 제가 한 거, 한 셈이 되죠. 81년 11월까지는 독립신문에서. 면담자 : 바로 그냥. 구술자 : 바로 바로. 저 혼자만 이제 출퇴근하는 식으로 그러고. 인제 너무 인자 멀고 그러니 처음에는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인자 서선생 집서 조금 다녔어요, 처음에는. 서선생님 집서 몇 개월 다니다가 인제 집으로 다시 와가지고 출퇴근하고 그랬었는데 그렇게 해가지고 해외한민보에서 광주 2주년을 맞게 된 거예요. 광주 2주년을 맞었는데 2주년 기념식을 처음으로 인자 뉴욕에서 기념식을 한번 하자 이게 됐는데 이걸 인제 주도한 것이 인자 미주민주국민연합, 그 임창영 선생이 회장으로 계시는 미주민주국민연합이 주최를 해가지고 그때 뭐 어떤 대학 강당을 빌려가지고 이주 추념식을 했는데 그때 이름을 탈상식이라고 붙였어요. 5·18 탈상식. 근데 원래 그 탈상은 3년이잖아요. 3년인데 인제 광고를 하기를 우리는 3년을 기다릴 수 없다. 투쟁을 해야 되니까 빨리 탈상을 해 드리고 투쟁을 하자. 해서 2년이지마는 탈상을 하자 그래가지고 광주 탈상식, 그렇게 붙여가지고 기념식을 했는데 임선생이 저한테 강연을 해달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제가, 그때는 미주민련이라고 하면 전부 회원들의 과반수이상은 박사학위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고 그렇지 않다 하드라도 무슨 그니까 박사학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전부 대학 교수들이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의사들, 뭐 이런 분들이 전부 회원들이고 그 다음에 인자 그런 분들이 아니다 하더라도 최소한 대학원 졸업하고 사업하신 분들이랄지. 이런 분들인데 그분들 앉혀 놓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 저는 절대 못합니다. 거부를 했는데 임선생님이 그때 뭐라고 말씀하시냐 그라면 유명한 사람들, 지식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우리가 들을 만큼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들어야 할 필요한 이야기는 장군같이 못 배운 사람들의 그 민중들의, 민초들의 한 맺힌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좀 들려주라 하기 위해서 부탁한 것이니까 거절하지 말라고 그러시며 몇 번 당부를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또 2주년 차에도 제가 인제 뉴욕에서 인제 강사로 강연을 했었는데 그때는 조금 길게 했어요. 뭐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제가 말이 많잖아요. 한 시간 반 정도를 이야기를 해뻐렸어요. 다 지루했지. 한 시간 반 정도를 이야기를 했는데 모두들 그때 인제 그 이야기 주제가 뭐였냐 그러믄 똑같은 형식이었죠. 이걸 우리가 하나의 독재 세력의 그 정권 탈취로만 해석할 수 없다. 이거는 철저하게 그 분단 상황으로부터 출발해서 봐야 된다로부터 시작해가지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제가 주장한 게 뭐였냐 그러면 광주 5·18은 지식인들은 없었다. 과감하게 지적을 해버렸어요. 그 이전까지 거의 모든 운동들이 학생중심의 운동으로 생각을 했었거든요. 4.19 이후로. 그니까 학생은 지식인층이잖아요. 그니까 학생 중심의 운동에서 노동자의 중심으로 바뀐 게 광주 5·18이다. 이걸 주장을 하면서 왜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 투쟁의 그 일선에 설 수밖에 없었는가, 그 토대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노동계, 노동 말하자면 막노동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그런 형편이었다, 인제 이런 것을 제가 주장을 했었죠. 그니까 봐라, 농촌이 피폐화됐다. 피폐화 되가지고 모든 농촌 사람들이 도시 노동자로 밀려갈 수밖에 없는, 밀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자면 경제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농촌을 피폐화 시키면서 청소년들을 도시로 몰아내가지고 도시에 있는 공장 직공들로 만들었다. 근데 이 사람들이 공장에 가서 보니까 자기 부모 형제들을 돌볼 수 있는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그 인간다운 삶은 고사하고 수입 자체가 그렇게 안 되더라. 이게 화가 나니까 뛰쳐나온 것이 반정부 활동이었고 활동이었다. 그러믄 이런 토대는 누가 만들었냐. 그 다음에 토대를 가지고도 말할 수 없게 하는 그런 토대, 토질을 누가 형성시켰느냐? 이게 바로 분단 상황이다. 그래서 빨갱이 소리만 하면 아무 소리도 못해뻐리는, 빨갱이 지목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해뻐리는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기가 막히지 않느냐. 이런 상황을 해소하지 않으며는 우리 이런 상황은 절대 해결할 수 없다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제가 인자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러니까 또 인자 옆에서 인자 주최하신 분들을 껌벅껌벅 해쌌터라고, 너무 지루하다고. 그래서 인자 급하기 이야기를 끝내고 나왔는데 어떤 분이 다가 와서 아 정말 감동스럽다고 그러면서 저희들이 초청하면 와셔서 말씀 좀 해주시겠냐고. 아 좋습니다, 어디든지 저는 가서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어디십니까 그랬더니 코넬 대학 학생이래요. 학생회장이래요. 코넬 대학 학생회에서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냐고, 아, 좋습니다 아무때라도 불러주십시오. 그랬는데 이분이 딱 묻기를, “어느 대학에서 강의하십니까?” 인자 어느 대학 교수냐는 거예요. “저 대학 교수 아닌데요.” 그랬드니 “아 그러세요, 어느 교회 목사십니까?” 두번째 묻는 거 인자 목사냐고 묻는 거예요. “저 목사 아닌데요.” 그러면 “저기 무슨 단체 회장을 맡고 계시냐”고. 그러니까 그것이 뭘 의미하느냐고 그때까지도 의식상태가 동포 사회의 그 의식상태가 어떤 그 타이틀을 가지지 않으면 지도를 할 수 없는. 그니까 말하자면 그 명문 대학을 나왔다든지. 아니면 어떤 명문대학에서 인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 학박사랄지 교수랄지. 이런 사람이리라는 그런 그걸 꽉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도 못되면 목사라도 되야 된다는 이런 걸 딱 갖고. 그래서 그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아니라 그랬더니 그럼 지금 뭐하세요, 라고 묻더라고. 지금 저 해외한민보 라는 신문사에 심부름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 그러세요, 그럼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 연락이 없어 버린 거예요. 그런 것을 보고 제가 정말 운동이 바껴야겠다. 이래가지고는 우리가 어떤 뭐랄까 국내 민주화는 물론이고 통일 운동에 대해서도 힘을 쓸 수 가 없다,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었어요. 면담자 : 그 인제 이후에 뉴욕에서 인제 한청련 쫌 이야기를 시작을 할까 해요. 뉴욕에서 83년도에 처음 이게 뉴욕은 결성이 되나요? 구술자 : 그렇게 해서 인제 82년도에 인제 뉴욕에서 제가 인제 강의를 하고 83년도에 이제 제 3회 5·18 기념식을 또 필라에서 인자 했는데 그때 제가 82년도에 그 해외한민보를 하면서 윤한봉 선생이 미국에 인제 밀항해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신문 그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그런, 그런 분이 와가지고 그 당시 김상돈 선생 댁에서 거주를 하고 계셨다 그러드라고요. 그래서 아 그런 분이 계시는가 하고 있는데 인자 한국에서 그 출판산데 일, 일지. 일월서각인가 하는 출판사를 하시는 그 선생이 출판사 사장이 미국에 오셨어요. 그분하고 서정균선생하고 가까우니까. 뉴욕에 와서 서정균 선생 댁에서 묵으면서 그때 인제 저희들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죠. 이분이 내가 지금 가서 LA로 가서 윤한봉씨를 만나야 된다. 그래서서 그 애기를 들은 거예요. 아 그래요? 그때까지도 우리는 윤한봉선생이 누군 줄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인제 물어본 거죠. 그분이 어떤 분인데 당신이 여까지 와가지고 만날라고 하느냐 하고 인자 물으니까 인자 광주사태의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한분이신데 밀항해서 와 계신다, 그 분을 꼭 좀 만나고 싶다. 그 LA갈 수 있는 그 인제 준비를 좀 해달라고 청탁을 하시드라고요. 그래서 인제 알게 되가지고 알게 됐는데 그 후로 윤한봉 선생이 LA에서 민족학교를 설립을 하셨어요. 그래서 인제 민족학교 설립을 하신 뒤로는 우리가 민족학교를 통해서 윤한봉선생과 연락을 맺게 됐는데 83년 5월 제3회 기념식을 여기서 하면서 저희가 인제 그 제가 윤한봉선생을 강사로 초청을 했어요, 미국에, 여기 필라로. 면담자 : 3회 3회때요? 구술자 : 예. 3회, 3회 저기 기념식에. 그래 윤한봉 선생이 필라로 인제 오셨잖아요. 강연을 하기 위해서 오셔가지고 그때 인제 필라에서 주로 인제 활동을 하고 있던 조직체는 인제 수난자 가족 돕기회라는 조직이 있었거든요. 수난자 가족돕기회가 주로 인제 여기서 모금을 해가지고 한국에서 민주화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가신 분들의 옥바라지에 보태 쓰도록 그 돈을 보내드리는 그런 작업을, 그런 활동을 했었는데 그 인제 주최는 수난자 가족협의회로 하고 제가 초청을 해가지고 강연을 하시도록 하고 윤선생이 여기 와서 인제 강의를 하시고 나서. 면담자 : 그때, 그때 3주년 때는 필라델피아에서 기념식을 진행을 하셨나요? 뉴욕이 아니고? 구술자 : 네. 뉴욕서는 뉴욕서는 다른 단체에서 따로 했었어요. 따로 했는데 거기는 인제 저희들이 상관이 없어가지고 안 가고. 필라에서 하면서 어 윤선생이 와서 강의를 하고 난 다음에 여기 저희 집서 한 3개월 정도 계시면서 인자 동부 지역을 돌아다니신 거예요. 그래서 뉴욕, 필라델피아에 그 전에 운동하시던 모든 분들 다 찾아다니시고 그 다음에 인제 뉴욕 가서 자기가 조사해가지고 아는 분들 집에 가보시고. 그 다음에 인제 뉴헤이븐(New Haven) 그쪽으로 가시고 인제 하버드 대학 쪽 이런 대할 쪽에서 인제 국내 연계를 통해서 인제 그쪽으로 아는 사람들 찾아가지고 찾아다니시고 이렇게 하시면서 그 학습 활동을 준비를 하셨죠. 청년 학습 활동을. 그니까 인제 LA에는 민족학교가 설립돼 있었고 동부 쪽에 와서도 무언가 만들어야 되겠다는 조직준비를 해가지고 가셔다가 83년에 그거이 결실을 맺어가지고 뉴욕하고 뉴헤이븐에서 청년들 모임이 결성됐어요. 결성 되가지고 83년이든가 84년이든가, 시카고에서 시카고에서 전 미주지역을 끈을 맺자, 같이 연결한 끈을 맺자 그래가지고 시카고에서 협의체를 만들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때 인제 결성된 한청련이 LA하고 샌프란시스코, 그 다음에 뉴욕, 뉴헤이븐. 이 네 군데에요. 이 네 군데는 이미 결성되고 그 다음에 인제 시카고가 그때 결성을 할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다섯 군데는 정식으로 재미, 저기 한청련 이름으로 그러니까 각 지역 한청련 이름으로 참석을 하고 필라델피아는 그때까지는 조직체를 못 만들고 그때는 인자 제 동생 둘하고 광민이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인제 광민이까지 하면 셋 동생 셋하고 나머지 인자 청년들 서너 사람이 있었지만 인자 그래도 적어도 열명 정도는 되야 조직이라고 발기를 할 수 있지 않을 것인가. 그래가지고 우리는 정식 조직은 아니고 옵서버(observer: 참관인) 자격으로 해가지고 필라까지 참석을 해가지고 6개 지역이 거기 필라, 시카고에서 모여가지고 재미한청련을 결성하게 됐어요. 그 후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일반인들에게, 대중들에게 전포하고 활동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그 조직체를 출범시켰다고 볼 수 있어요. 면담자 : 주로 구성원들이 어떤 분들로 이루어졌습니까? 구술자 : 그때는 그러니까 처음으로 이때까지 관심을 갖지 않던 소상인들이랄지, 학생들, 유학생들을 주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했고 그 다음에는 소상인들, 자기 영업을 쪼끔씩 가지고 있던 분들이 동참을 하고. 인제 학습 모임을 통해서 만나게 된 거죠. 그러니까 그때 당시만 해도 왜 이름을, 한청련, 청년연합으로 했잖아요. 그 청년이라는 게 인제 나이 규정을 40세까지로 했는데 40이상 된 분들이, 을 넣을 수가 없었어요. 40 이상 된 분들은 전부다 학박사들인데 이 사람들 머리하고 생각하는 것들하고 우리 청년들이 생각한 거하고 차이가 있잖아요. 이게 융합을 못한 거예요. 융합을 못해가지고 인자 청년들 모임으로만 조직을 시킨 거죠. 그러니깐 완전히 새로운 조직체를 출범시킨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이전 운동으로부터 새로운 운동을 전환시켰던 것이 윤선생이 하신 거예요. 면담자 : 그 필라델피아에서 그때 그 몇 분정도가 청년연합에 필라델피아 지부에 참여를 하셨나요? 구술자 : 처음에 그러니까 처음에 그걸 시작할 때는 학습 모임하고 그럴 때는 열 서너분이 모였어요. 열 서너 분이 모여가지고 그러니까 재미한청련이 조직돼 시카고에서 조직될 때는 대여섯 분이 있었는데 그래서 인제 그때 거기에 간 게 제 동생 세 명하고 다른 분 한분이 최재천이라는 분이 인제 광주 출신인데 전남대 출신이고 그래가지고 윤선생 후배라고 그래가지고 따르던 분이 있었거든요. 이분하고 같이 인제 저랑 다섯이 시카고를 갔었는데 그 후로 우리도, 우리도 적극적으로 한청련을 만들어보자. 그래가지고 한청 조직을 그 후로 조직을 시켜가지고 인자 처음 회장을 제 동생인 경단이가 맡게 됐었어요. 그러고 인제 꾸준히 그 학습 그걸 하자 그래가지고 인제 필라에 있는 청년들 학습 활동을 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하고 한 달에 한번 씩 모여서. 면담자 : 처음 필라델피아에서 한청련이 결성이 됐을 때요 그때 좀 참여를 하셨던 분들을 다 좀 기억을 하시나요? 구술자 : 제가 지금 다들 기억을 제가 못하는데 제일 처음 참여했던 분들은 아까 얘기했든 최재천이라는 분하고 그 다음에 그 성, 이성, 누군가 그 저기 이성 뭐였는데 그, 그분은 인제 흥사단 활동하시던 분이 와계시고 그 다음에 구범서랄지, 인자 이런 분들이 면담자 : 임용, 임용천씨는 처음부터 활동 하셨나요? 구술자 : 인자 그런 분들은 쪼끔 쪼끔 쪼끔 있다가 인자 들어오신 분들이고. 그분들은 인자 첨에 결성을 활동. 그분들이 인제 첨에 결성을 했어요. 필라 한청으로. 결성을 해놓고 인자 그 다음에 인자 임용천씨랄지 또 인자 김향미씨랄지 이런 분들은 인제 그 그때 인제 제 밑에 동생 맹단이가, 제 여동생이 여기에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단이고 하나는 맹단이고 그런데 맹단이가 그때 인제 그 커뮤니티 칼리지에 잠깐 다녔었거든요. 근데 같이 커뮤니티 칼리지 다니던 학생 중에서 임용천이란 학생이 있었고 그 다음에 인제 김향미 학생, 또 그 다음에 이름은 제가 잘 기억을 못하는데 대여섯 명이 같이 학습으로 들어왔었어요. 그 다음에 인자 또 금방 뒤따라서 인자 이종국씨랄지 여기에 인제 모인 사람들이 같이 인자 학습으로 모여가지고 이 그룹은 또 인제 교회 그룹, 교회 청년회 그룹으로 아마 들어온 것 같애요. 그때 인제 그 최종수 목사님이 교회 담임목사님으로 계시던 교회 청년들이 대거 같이 참여를 하고 그래가지고 필라 한청련이. 면담자 : 예. (TAPE 교체) 구술자 : 필라델피아의 한청련이랄지 청년 운동의 토대는 두 그룹을 들 수 있죠. 한 그룹은 수난자 가족돕기회 그룹이 있는데 그 그룹은 주로 인자 그러니까 그 민족 평화 통일 계통, 요쪽에서 이야기하는 선통일 후 민족, 그렇게 분류되는 분들이 주로 인제 거기에서 활동하신 분들이고 또 한 그룹은 김경재씨가 인제 조직 했던 반독재 투쟁위원회라는 그룹이 토대가 됐는데 이쪽은 그니까 철저하게 선민주 후통일. 그니까 말하자면 북과 연계될 수 있는 오해를 사면 안 된다 해가지고 철저하게 통일 운동 세력을 배제했던 그런 그룹인데 그 반독재 투쟁위원회 이게 인제 그 두 조직이 토양이 됐다고 볼 수 있죠. 토양이 됐는데 반독재 투쟁위원은 우리 김경지 선생이 거기서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중심적인 역할을 하셨으니까 김경지 선생을 통해서, 김경지 선생을 통해서 자세하게 들으실 수 있을 거고. 면담자 : 그럼 한청련 첨에 청년 연합이 좀 구성했던 사람들은 필라델피아 어느 쪽인가요? 구술자 : 그러니까 그, 두 토대에 의해서 토대가 있었지만 한청련으로 발굴된 사람들은 거의 두 단체에서부터 말하자면 몰랐던, 발굴을 못했던 그런 세대들이라고 봐야죠. 실질적으로 윤선생이 여기 와서 조직학습들을 결성한 후로. 이제까지 쪼금은, 다 연결들은 다 되어 있죠. 연결들은 다 돼있지만 예를 들어서 제 동생들이랄지 또는 인제 김경재 선생의, 김경지선생의 그 친우들이랄지. 이런 분들 서포트 같은 것들에 의해서 인제 최종수 목사님 같은 분들을 인제 그 수난자 가족 측 분이지만 이런 분들의 교회 청년들, 이런 분들이 오고 인제. 그래가지고 한청련이 결성됐기 때문에 토대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거기에 실질적으로 참여한 청년들은 그 두 단체하고는 거의 연관이. 그냥 김경지 선생 혼자만 한청련에 들오시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위원회의 소속 멤버였던 것 같애요. 면담자 : 예. 그 필라 한청련 활동을 하시면서 필라, 필라델피아 한청련을 주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지역별로 물론 인제 한청련이라는 한 조직 안에 묶여지긴 했지만 지역 별로 운동 상황도 달랐을 것이고 한청련 내에서도 뭐 LA지역이라든지 시카고라든지 뉴욕이라든지 또 그 지역들에 따라서 약간씩의 특성들이 보여 지는 것 같거든요. 그런 특색들이 있는 것 같고. 또 그런 그 LA나 뉴욕이나 시카고는 마당집이라는 게 또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 마당집을 중심으로 그런 활동들을 좀 이렇게 펼쳐 나가는 그런 부분들이 있었는데 필라델피아도 그런 좀 마당집 활동이나 그런 게 저는 잠깐 있었다 라고는 이야기는 들었거든요. 구술자 : 네 그래서 저희들이 필라델피아 한청련 결성할 당시에는 그니까 그냥 제 동생들이 셋이나 거기에 들어가 가지고 했기 때문에 상당히 그 편파적이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그런 통일 운동 쪽으로 편파적인 어떤 시각들을 많이 가지고 계셨고. 그 후로 인제 최종수 목사님의 교회 청년회, 이종국 선생이랄지 이런 분들이 인제 들어와 가지고 그런 것들을 쪼금 무마시켰던 것 같애요. 그 다음에 인제 주로 인제 학습 활동을 할 때는 구범서 선생이라는 분이 하고 있던 그 가게 2층에서 하나 그 근거지를 두고 학습도 하고 조직 활동을 많이 했었죠. 그렇게 한 일 년, 일 년 반 정도 지난 후에 인제 우리도 마당집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제 필라 청년 마당집 이렇게 이름을 붙여가지고 마당집 활동을 했죠. 거기에 인제 상근자들도 있고. 여기서 이제 우리는 필라델피아는 상당히 그 동포 사회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적고 분산이 너무 많이 돼있는 사회기 때문에 동포를 상대로 해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상당히 제약이 돼있었어요. 그니까 여기에 무슨 영사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다음에 인제 동포들이 집중돼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동포촌이 한 두군데 형성이 돼있죠. 주로 동포들이 모여 사는. 80년대만 해도 그렇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그냥 상가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동포 상인들이 몰려 있는 중심만 한군데 있었어요. 그랬을 뿐이었지 동포들이 많이 모여 산다 그런 지역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애요. 그랬기 때문에 그 동포 상대로 하는 활동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필라가 자랑스럽게 담당하는 일은 뭐였냐며는 여기서 청년들을 발굴하고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켜가지고 타 지역 활동가로 보내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필라델피아에서 뉴욕 가서 인제 그 활동 중심 역할을 많이 하고. 그니까 뉴욕에 있는 그 정승진, 지금 인제 그 시의원으로 몇번 출마하신 분. 정승진 그분도 필라에서 시작을 해가지고 필라에서 교육받아가지고 뉴욕으로 갔고. 뉴욕 청년 마당집에서 그 근간을 이루고 활동을 했던 장광민. 또 인자 장광민이 다시 시카고로 옮겨가가지고 시카고 한청 조직을 인제 토대를 마들고 있는데 그거 인자 필라 출신들이고. 그 다음에 인제 나중에 이제 그 LA로 가가지고 LA그 민족학교에서 혼신하고 뼈를 묻어가지고 윤한봉 선생 부인이 됐던 인제 신소아. 본명은 신경희인데 그분도 필라 출신이죠. 필라 출신이었고 이런 식으로 우리 필라는 자체적으로 동포 사회활동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상당히 미약했지만 이렇게 그 인력 확충을 해주는 그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그 인제 거기서 동포 의식이, 의식을 보기 위해 제가 한 가지 그 예화를 들려드릴게요. 4회, 4회, 5회 땐가 광주 기념식을 한청이 조직된 후에는 한처이 이제 계속 주최를 해가지고 5·18 기념행사를 했어요. 해마다. 필라 한처어이 주최를 했는데 그 해에 인제 제 동생이 경단이라고 그 애가 인자 회장을 하고 있을 때 저 그 기념행사를 하기로 해가지고 했는데 마치 그때 저하고 좀 상당히 가깝게 지내던 분이 부인이 같은 장흥출신이에요. 그 부인이. 그래가지고 같은 고향이다 그래갖고 굉장히 가깝고 좀 다감하게 지냈었고 그분 남편도 민주화운동하면서 반독재 투쟁위원회 같이 가입해가지고 활동하고 있었고 그분 또 이, 그니까 남편의 동생, 시동생도 반독재 투쟁 위원회 같이 활동하고 계시고 인제 그런 분인데 이 여자 분이 하루는 나한테 와가지고 자기 동생이 방금 이민을 왔다고 이민 왔는데 장흥 살다 왔으니까 같은 고향이고 그러니까 경단이하고 어떻게 한번 맺어줬으면 좋겠다고 저한테 그러드라고요. 그래서 아, 그러냐고 그러면 마침 잘 됐다. 5·18 기념행사를 하는데 거리 데리고 나오면 자연스럽게 만나가지고 이야기도 나누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면담자 : 전화 받으시죠. (전화 통화로 잠시 중단) 구술자 : 데리고 나오너라 그랬더니 데리고 나왔든 모양이에요. 근데 인제 동생이 그때 인제 사회를, 회장이니까 사회를 봤는데 보고 나서 저는 인자 잊어버렸죠. 서로 인제 젊은 남녀들이니까 만나가지고 어떻게 이야기 나눴는가는 끝난 다음에 그 다음날인가 제가 전화를 해봤죠, 그 누나한테. 동생 데리고 나갔는데 좀 만나봤드냐고 얘기했드니 아이구 학을 떨면서 그냥 손사래를 치더라는 거예요. 왜그러냐니까 그런 빨갱이하고는 사귈 수 없다고 동생이 그러는데 어쩔 수 없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만큼 한국에서 금방 온 사람이니까. 이게 장흥 사람인데. 광주와 멀지도 않잖아요. 그 다음 광주 사건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강진으로 장흥으로 이렇게 다녔다고 제가 들었거든요. 제 동생들도 그렇게 이야기 했고. 그런대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너무 깜짝 놀랬어요. 그런 어떤 것이 일반적인 동포들의 의식 상태였기 때문에 저희가 참 여기에서 그 민주화 운동을 한다든지 통일운동을 한다 하는 것이 얼마나 각박한 토질인가 하는 걸 그때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낀 거죠. 면담자 : 84년도에 그래서 결성이 된 거죠, 필라에서는. 그래서 85년부터는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필라 한청련 중심으로 5·18 관련 그 기념식 추모식, 그런 걸 주도를 했는데 매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걸 진행을, 5월을 하셨는지요. 구술자 : 그때는 그러니까 그 당시만 해도요, 지금처럼 그 홍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잖아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부 일일이 인제 전단지 같은 거 만들면 식당 같은 데 돌아다니면서 뿌리고 그 다음에 식품점 같은 데 놔두고 이런 인제 활동들이 인제 주로 이룬 거죠. 주로 이루고 그 다음에 인제 회보 같은 걸 만들어가지고 그걸 동포 사회에 돌리고 알리고 그런 거를 했는데. 아마 솔직한 말씀드린다면 거기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한 것 같애요. 그 여러 가지고 반성해봐얄 측면도 있겠찌마는 동포사회의 큰 호응은 저희들이 얻지를 못한 것 같고. 만약에 큰 호응을 얻어가지고 그거이 지속됐다면 지금까지도 운동이 이렇게 지리멸렬상태에 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그런 반성들을 많이 하고 있고. 그 다음에 이제 청년 활동 주로 하는 거는 교육, 의식 교육 활동을 주로 인제 한 거였기 때문에 거의 매년 수련회 같은 것은 거르지 않고 해왔고. 면담자 : 당시 필라델피아에 거주를 했던 한인들의 수가 한 몇 정도 됐나요? 구술자 : 그때 당시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게 2만, 2만 정도로 알려지고 있었는데 알려진 것보다는 뭐 적죠, 수들이. 어떤 사람들은 5천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랬었어요. 한 5천정도 될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게 아마 타당할 것 같애요, 5천에서 6천정도. 면담자 : 그 저희가 뉴욕에서 임용천 선생님을 구술 인터뷰를 좀 진행을 했거든요. 임용천 선생님께서 말씀 하실 때, 아까 선생님께서도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게 그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좀 확인을 할려고 그러는데요, 그 매년 5월 기념식을 하게 되면 영상 같은 것도 상영을 해주고, 5월 관련 영상 같은 것도 상영을 해주고 했다고 그러드라구요. 그 영상이 맥길대학에서 나온 영상으로 알고 있다. 임용천씨는,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쫌 더 확인을 해볼려고 맥길, 캐나다 맥길대학에서 만든 영상인지 소장하고 있는 영상인지를 여쭤봤더니 그 부분은 쫌 인제 필라에 가서 선생님들을 만나보면 그 선생님들께 쫌 여쭤봐라 그러더라구요. 구술자 : 예, 맥길 대학, 그때 아마 그게 아마 기독교, 기독교 재단 학교였든 것 같아요. 그래서 거기서 선교사로 파견을 파송을 보냈었는데 그 선교사 한분이 광주 그 민중 봉기 현장에서 목격하고 촬영한 게 몇 개 있었어요. 그걸 인제 그 대학 측에서 수집을 해가지고 그런 영상을 수집해가지고 영상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맥길대학에서 제작을 한 거죠. 제작을 해가지고 이것을 공급을 했는데 배급을 했는데 분량이 얼마 안 돼요 한 30분 정도 짜린 게 밖에 안 돼요. 아주 짧아요. 그리고 NHK, 일본 NHK 방송국에서 방영한 것도 한 40분 정도 분량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고. 그게 둘이 합해봐야 한 시간이 될까 말까한 영상이었거든요. 근데 그것을 복사하고 하고 하고 하다본니까 아주 영상이 희미했어요. 영상물이 희미했지만 그 외에 우리가 실질적으로 그 보여주면서 인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자료가. 그래서 할 수 없이 그걸로 인제 영상 보여주고. 그 다음에 인제 주로 했던 것은 인제 경험, 경험담으로 인제 거기에 말하자면 들었던 이야기들을 와서 전해주고. 그런 식으로. 초기에는 1회 때는 그 참석 수가 한 3,40명 정도 밖에 안 됐는데 한청련이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참석 수가 굉장히 많았어요. 왜냐면 실질적으로 청년들이 들고 돌아다니면서 전단을 배부하고 홍보 활동을 하고 막 한 그 영향으로 많이 모일 때 한 3백 명 정도까지 모였었어요. 강당이 가득차가지고 서서 밖에 까지 서있을 정도로 될 그렇게 인제 모을 수가 잇었는데. 그런 분들이 어떤 그런 영상을 본다든지 정말 울분을 토하고 인제 감정적으로 그런 반응을 보였지만 이게 어떤 자기 확신적인, 그래서 국내 민주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투신을 해야 된다든지 재량을 하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더라구요. 솔직히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고. 거기에서 즉흥적인 모금활동 같은 것도 하고. 그런 활동을 많이 했죠. 그건 인제 필라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한청련 조직있는 단체에서는 다 했기 때문에 필라만의 특성으로 얘기하기는 어렵죠. 면담자 : 그 그 맥길대에서 나온 그 영상은 혹시 지금도 가지고 계신가요? 구술자 : 어디론지 지금 없어 졌죠. 너무 많이 돌려가지고 누가 가져간 지도 지금은 이제 모르고. 그때 인제 제가 그걸 만든 다음에 필라에 와가지고 필라에다가 보급을 하도록 부탁을 내준 게 그 반독재민주화투쟁위원회하고 그 다음에 가족 돕기, 수난자 가족 돕기 협회하고 그 두 단체에 주고 그 다음에 뉴욕으로 갈 때 인제 가져가가지고 뉴욕서 복사를 해가지고 뉴욕에 있는 그 한인단체에다가 인제 배급을 했는데 필라에서는 비교적 많이 보급을 했어요. 근데 뉴욕에서는 실패했어요. 그 실패한 주원인이 인자 거기 뉴욕에서 복사를 했는데 너무 안보이더라. 그래서 복사해달라고 부탁한 분이 그냥 히지부지하니 그냥 그걸 복사를 안 해버렸어요. 안 해가지고 인제 뉴욕에서는 제가 보급을 못했어요. 못하고 그니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다른 데를 못 찾고, 복사 해달란 그걸 못 찾고. 마치 그분이 아, 내가 적극적으로 하겠다, 그 영상을 보고는, 같이 보고는 이런 영상을 보급해야 되지 않겠냐고 지가 해주겠다고 그건, 그때 인제 비데오 대여하던 사업 그런 것을 하던 사람이었거든요. 가지고 가더니 한 열흘 있다가 안 된다고 그러면서. 면담자 : 그럼 주로 인제 그 기념식 추모식은 어떤 방식으로 좀 진행을 했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신대로 이거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영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진전을 할 때도 있었고. 구술자 : 네 사진전도 하구 면담자 :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강연자들이 와서 강연하기도 하고 구술자 : 예. 강연, 강연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제 주로 인제 말하자면 이 독재 상황을 알리는, 그니까 그 당시로는 전두환 그 악행, 악정, 이런 것들을 알리면서 민주화투쟁 열기를 좀 불어넣는 그런 활동들이 많이 있었고 그 다음에 인제 가장 중요한 면담자 : 주로 장소는 어디에서 했나요? 구술자 : 장소는 이제 학교 강당 같은 데를 많이 빌렸어요. 인제 고등학교 강당 이런 데를 많이 빌려가지고. 그 당시에는 인제 남북 화해. 그러니까 북쪽도 우리 조국이다. 그래서 인제 우리는 남부 조국, 북부 조국 이렇게 부르면서 남북 화해 의식화 활동을 많이 했었어요. 그때까지는 그니까 이 북하고 연계된 것을 굉장히 모든 운동 단체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경계를 했거든요. 경계를 했는데 한청이 그걸 나서서 그런 의식을 깨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했죠. 인제 그것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에요. 조사를 저희들이 못해봤기 때문에 그런 활동이 얼마나 전진을 시켰는지는 그건 잘 모르고 다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제 선통일 후민주라고 분류되는 그런 분들이 주로 인제 필라에서는 수난자 가족돕기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던 그런 분들이 어떤 활동을 부차적으로 전개를 했냐그라며는 미주민주국민연합 계통하고 같이 인제 하시면서 가족 방문, 그런 운동들을 많이 추진을 했죠. 그래서 인제 필라에서도 비교적 일찍 그 북쪽에 있는 가족들을 방문하는 그런 예들이 있었어요. 전국적으로 아마 거의 거 상당히 일찍부터, 83년 4년 그 무렵부터 인제 필라에서 가족방문으로 인제... 면담자 : 그게 한청련이 주도했던 운동은 아니죠? 구술자 : 아니죠. 면담자 : 아닌 거죠? 한청련 활동은 아무래도 선통일이 아니라 선민주 쪽에 좀... 구술자 : 그렇죠. 그런데 그것이 인제 의식적으로 우리가 분단의식에 갇혀 있어가지고는, 말하자면 북을 원수로 봐가지고는 절대 민주화 운동 민주화를 달성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일단 이 분단부터 해소해야 된다 하는 것은 인제 동의가 된 거죠. 같이 인제. 그게 윤선생께서 처음에 시도했던 일이기도 하고. 왜냐 그러면 모든 게 분단으로 해가지고 빨갱이, 또는 북은 적. 이래뻐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는 거죠. 왜냐, 그렇게 걸어뻐리니까 말하자면, 정부가, 정권이 지금 정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들이 이렇게 걸어버리니까. 빨갱이로 걸어뻐리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걸어뻐리니까 우리가 그 덫에 걸리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 덫을 먼저 깨야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북쪽을 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서, 갈라진 민족으로서 보기 때문에 거기도 내 조국이기 때문에 북부 조국, 남부 조국, 이렇게 부르면서 한 형제. 이 의식을 깨쳐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인제 결정적으로 그것을 극대화시킨 것이 89년에 있었던 그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하자, 이걸 인제 윤선생이 제안을 하셔가지고 그걸 실질적으로 이행에 옮겼는데 남쪽 정부에서 틀어버린 거예요. 노태우가. 절대 이 북에서 넘어오게 할 수는 없다. 틀어버리니까 할 수 없이 백두산에서부터 내려 와가지고 판문점에서 멈춘 거예요. 그게 인제 7월 27일날 판문점에서 멈췄는데 그때 참 그 우연의 일치로, 정말 우연의 일치에요. 우연의 일치로 북에서 인제 그 세계 대학생 협의횐가 그거 하는 대회에 남쪽 한총련? 그 대표로 한대련인가? 그때는 한총련인가? 대표로 임수경 학생이, 아 전대협, 그때는 전대협이었지.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학생이 간 거죠. 가가지고 우리가 저기 결성한 평화 대행진하고 합류를 한 거예요. 거기서. 그래서 인제 합류를 해가지고 근데 이제 임수경 학생이 가버리니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임수경양이 받아버린 거지. 전대협이 받아 버린 거지. 그래서 사실상 그 그걸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실질적으로 백두산에 판문점까지 내려온 그 대장정을 이끈 것은 재미 한청련 청년들 조직이었는데 이건 완전히 묻혀 뻐리고 임수경만 통일의 꽃으로 지금까지도 빛나고 있는 거죠. 그거이 섭섭하단 건 아니고, 섭섭하단 건 아니고. 그런 것을 있을 수 있게 만든 것은 한청련이었다. 한청련의 그 분단, 말하자면 분단을 종식시키기 위한 일환이었다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제 그 왜 왜 우리가 국제란 이름을 붙였냐, 평화 대행진에다 국제란 이름을 붙였냐 하며는 그걸 위해서 정말 많은 그 외교 노력을 했어요, 청년들이. 그래가지고 유럽 지역이나 다른 지역에서 평화활동을 하시던 그 외국인분들이 다수 참여를 하셨어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국제행진이 된 거예요. 국제행진이 되어가지고 내려왔는데 이런 분들이 거의 그냥 알려지지도 않은 것이 좀 섭섭하다면 섭섭한 일이죠. 그래서 인제 그 대회에 여기 계신 신용민 선생 부부가 그때 갓난아이까지 네명 가족이 가가지고 아마 백두산에 오른 가장 나이어린 사람으로 기록이 된 것이 신용민 선생의 둘째딸. 그분이 이제는 환경운동 하면서 그것 때문에 환경단체 상도 받으시고 그러셨대요, 금년에. 아주 자랑스러운 저희. 면담자 : 한청련 활동이 나이 제한이 있지 않습니까. 그 선생님께서는 언제까지 활동을 하셨나요? 구술자 : 저는 처음부터 한청련 회원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때 인제 나이는 40까지로 제한을 했었거든요. 그때 그 한청련을 조직할 때 제 나이가 39이었어요. 그니까 나이로는 되는데 제 동생이 셋이나 들어가잖아요. 인제 제일 그때 당시에 한청련 전국적으로 제일 막내가 제 동생인데 그니까 인제 다른 사람들 정서상으로 아버지뻘 되는 큰형님하고 막내 동생 하고 같은 조직에서 어떻게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말하자면 이제 막말로 하자면 어떻게 그 앞에서 담배필 수 있겠냐 그래가지고 저를 그냥 제외를 시킨 것인지 아니면 제가 안 들어간 건지 모르지마는 저는 정식 회원은 아니었어요. 한번도. 면담자 : 아 그래요, 창립할 때까지만 쫌 도와주신 역할을 하셨네요. 구술자 : 그렇죠, 아니 그 후 활동도 같이 했지마는 회원은 아니었어요. 회원은 아니었고. 면담자 : 그럼 그 이후에 한참 이후에 뭐 한겨례동포연합이 생기기도 하는데요. 구술자 : 그래서 그게 인제 그 89년 평화 대행진을 거치면서 나이들이 다 올라가잖아요. 40대 가깝게 되거나 곰방 40이 넘어야 되거나 이런 분들이 계셨고. 그 다음에 평화대행진을 준비하는 과정 그 이전부터 인제 많은, 이전에 활동하셨던 분들, 주로는 인제 미주 민련에서 활동하신 분들이나 그런 조직체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좀 조국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 어르신분들이 계시잖아요. 이런 분들이 그 이전에는 후원자 이름으로만 인제 계셨죠. 그니까 한청 후원. 그랬는데 윤선생님께서 인제 이래선 안 되겠다. 한청 40이 넘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후원으로만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이 어른들을 중심으로 한, 장년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체가 필요하다. 그래가지고 국제평화대행진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청년 운동 중심을 벗어난 장년운동 중심체를 조직체를 만들자 그런 논의를 하셨어요.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논의를 하셨는데 근데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이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잖아요. 극소수에 불과해서 저희가 인제 생각한 것은 기존에 있는 운동체를 발전적 해산을 시켜가지고 장년 조직체를 만들자. 이런 발상을 인제 한 거죠. 그래서 제가 미주민주국민연합 임창영 의장선생님님께 인제 찾아갔죠. 저는 그때 인제 총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적으로 책임 있는 그 이야기를 해야 할 위치에 있고 그래서 임선생님께 제가 이 조직을 해산 하시자는 건의를 드렸어요. 발전적 해산을 하시자고. 왜 그러냐면 미주 민련으로 그렇게 그냥 계속 어떤 활동 제한이 제한이 너무 많고 그 다음에 이 미주민련회원들은 대부분이 다 학박사들인데 박사들인데 이런 분들이 그 이 대중 접촉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막혀버린다는 거예요. 그분들이 싫어서 안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타나며는 어렵잖아요.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교수님인데, 또 그러고 박사님인데. 접근하기 어려우니까 자동적으로 분리가 되뻐린 거예요. 괴리가 돼뻐린 거예요. 그러니까 수가 확대해야 되는데 점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대중성을 잃어뻐린 거예요. 우리는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하면서 미주민련이 해마다 동포대회를 열었어요. 그니까 그 동포대회는 유럽지역에서도 몇 분들이 꼭 참석을 하시고 가끔가다 일본에서도 이제 한두분씩 오시고. 인자 미주 전역에서 모이시고 그래가지고 한, 적게는 백여 명 많게는 한 3백명가 해마다 모여가지고 동포회의를 하고 그랬거든요. 미주민련에서. 그런데 이렇게 많은 수가 회의에 모여도 이 분들이 각 지역에 가가지고 대중사업을 하면서 대중조직을 해야 되는데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안 되니까 개별 운동체제, 개별들이 모인 개별운동체가 되버린 거예요, 미주 민련이 결국은. 그래서 그런 것을 우리가 솔직히 반성을 하면서 우리가 대중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때까지 그 고질적인 조직체를 발전적으로 해산을 시키고 새로운 조직체를 만듭시다 이거를 건의를 해가지고. 그러면 임선생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러며는 대안 조직체가 뭐이냐. 그래서 인제 제가 윤선생님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그래서 윤선생님을 모시고 임선생님댁에 찾아 뵈 가지고 같이 인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결국은 임선생님이 동의를 해주셔가지고 우리가 미주 민련을 해체를 시켰어요. 해체를 시키고 미주 민련에 그때 소속 돼있던 대부분의 회원들이 인자 이쪽으로 옮겨 오셔가지고 다시 우리가 한겨레 동포 연합을 결성하게 된 거죠. 면담자 : 그 선생님 지금 필라델피아 한청련에 대해서 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드려볼게요. 지금까지 여러 활동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그밖에 뭐 필라델피아 한청련의 쫌 특색 있는 활동이랄까요, 다른 활동들이 있으면 한 가지 정도 더 소개를 해주시고요. 두 번째로 여쭤보고 싶은 것은 어, 국내 한국 상황에서도, 한국에서도 93년 이후 부터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5월 진상 규명활동들이 활발하게 한국에서 진행이 되거든요. 그런 분위기에 또 맞춰서 해외에서도 미주 지역에서도 뭐 미 대사관 앞에서, 한국 미 대사관, 저기 뉴욕에 있는, 그 앞에서 또 저희 동포들이 항의 시위를 하기도 하고 진상규명 학살자 처벌 진상규명 시위도 하기도 하고 그런 활동들이 좀 같이 연계 되서 일어났는데요. 필라델피아 이 지역 또는 한청련 다른 지역, 선생님이 알고 계시는 그런 5월 진상규명에 대한 활동에 대한 다른 어떤 활동들이 있었으면 쫌 소개를 해주십시오. 구술자 : 그니까 이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필라는 동포 집중적인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좀 동포 상대로 활동이 어려웠다는 점. 그 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는 아까 보수적이고 의식이 그만큼 광주 기념식 행사를 사회한다고 해서 빨갱이니까 만날 수 없다는 그것이 같은 고향 사람 입에서 나올 정도로 의식이 이렇게 구, 구태화 돼 있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동포들의 의식정서 상황이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우리가 필라에서만 독특하게 했다하는 운동은 거의 말씀드리기가 어렵고 또 그런 활동은 실질적으로 회원으로 활동하신 여기 김경지 선생들이랄지 이종국 선생, 이런 분들이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거고. 저희들은,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필라가, 워싱턴에 인제 그 백악관에 미 정치 중심지가 있고 의회가 있고 그 다음에 인제 미국 대사관이 있고 그러니까 정치적인 중심지가 인제 워싱턴이고 그 다음에 뉴욕이 유엔 대표부가, 유엔 본부가 있기 때문에 세계 정치 중심지임과 동시에 경제 중심지가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두 중심지의 중간지역이 필라잖아요. 필라니까 유엔본부 앞에서 어떤 시위를 한다거나 이런 그 단식 투쟁을 한다거나 이런 투쟁을 할 때에 다른 지역에서 올라가야 되잖아요. 그니까 워싱턴 지역에서 뉴욕으로 올라가면 중간지역이 필라이기 때문에 필라에서 모아가지고 간다. 또 인제 워싱턴에서 어떤 시위가 있다든지 무슨 일이 있다 하면 필라에 모여 가지고 간다, 이렇게 중간으로서 집결지적인 역할을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로 인제 전국 회의 같은 거 할 때 모이기가, 가운데기 때문에 좋잖아요. 그니까 필라에서 모이면 뉴욕에서 참여하기도 좋고 워싱턴에서 참여하기도 좋고 시카고에서 오기도 좋고 LA에서 오기는 멀지만 그래도 뉴욕까지 가는 것 보다는 필라에서 내리는 게 좋고. 그래가지고 아마 필라에서 그렇게 전국적인 그 모임이랄지 특히 동부지역의 그 말하자면 연합 학습 대회랄지 이런 것은 필라에서 가장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만 말씀드릴 수 있고. 이제 참고적으로 국제평화 대행진을 인제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하지 해가지고 그 군사 분계선에서 멈췄던 그 대회 행진 기간 동안에 미국에서도 하자. 그니까 못 가는 분들, 본국 행진에 참여 못하는 분들은 미국에서 하자 그래가지고 미국 유엔 본부 앞에서 출발해요. 똑같은 날에 그니끼 백두산에서 출발한 그 똑같은 날에 유엔본부 앞에서 출발해가지고 워싱턴 백악관에 똑같은 날 휴전선에 도착하는 그 똑같은 날 도착하도록 하자. 그래가지고 인자 미주 행진도 같이 동시에 진행을 했어요. 진행을 했는데 그것도 역시 인제 필라에 와서 결집을 해가지고 다시 인제 뭐 여러 가지 재충전을 하고 출발하는 그런 이제. 면담자 : 예전의 활동사진 같은 것들을 보니까 그런 내용들도 다 있더라구요. 미주에서 했던.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갔던 그런 활동사진들도 지금까지 좀 남아있고 그러드라고요. 구술자 : 그때 당시 윤선생은 뒤에서 모든 것을 지도하시고 지휘하셨지만 갈 수가 없잖아요. 갈 수가 없는 그런 인제 신분이기 때문에 인제 미주 행진을 같이 하셨고 끝까지. 인제 저도 인제 미주행진, 저쪽에 못 갔기 때문에 인제 미주 행진했었고 그랬었죠. 면담자 : 그, 아니 선생님과 이 인터뷰 진행하면서 뭐 가장 어찌 보면 궁금한 점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 부분이 처음부터 선생님께서 이런 부분에 대한 어떤 의식이랄지 그런 것이 투철해가지고 소위 얘기하는 그런 뭐 대학교를 나오셔서 대학 때부터 학생운동을 뭐 하셨고 그것을 바탕이 되어서 미주에 오셔서도 활동을 계속 해오신 그런 케이스가 아닌, 어찌 보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거기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물론 그런 인식들이나 의식들은 쪼금 있었지만 크게 관심 갖거나 뭐 인제 그랬던 부분이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라는 포현은 맞지 않겠지만 어찌됐건 이런 민족 민주 운동, 동포 사회의 운동을 난 정말 열심히 한 번 해봐야겠다, 라고 결심을 하게 했던 어떤 계기가 있다면 그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구술자 : 동일방직 똥물사건, 동일방직 똥물사건. 그건 아주 제가 정말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월남 갔다온 다음에 휴전선에서 총부리를 왜 맞대야 하는가, 하는 그때까지도 제 의식은 뭐였냐 하며는 빨리 북괴를 북괴를 타도하고 통일을 해야된다 이런 의식이었잖아요. 그니까 저기 뭐 집안 내력이 어떻게 됐건 그것은 입으로, 입 밖으로 발설할 수 없는 그런 극비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도 뭐 자신이 어떤 활동을 해왔던 한 번도 저한테 말씀하신 적이 없고. 어머니도 어떤 활동을 했는지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고. 우리 집안이 어떻게 탄압을 받았다는 것을 내가 눈으로만 봤지마는 그 왜 그랬단 걸 정확하게 말씀하신 적도 없고. 그렇잖아요. 그 학교에서 맨날 배운 것은 반공, 북진통일, 이것이었고. 제가 국민 학교 아마 4학년 3학년 때부턴가 웅변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웅변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인제 웅변대회가 하며는 두 번이에요 크게, 크게 열린 게. 언제였었냐면 묘하게 6.25때하고 3.1운동 때에요. 웅변대회, 크게 웅변대회를 한 게. 그럼 3.1운동은 맨날 삼일정신 살리자 이거 하고 인제 6.25하면 때려잡자 인제 김일성이랄지 인자 북진통이랄지, 이승만 대통령 사진 걸어놓고 아침마다 절하고 공부시작하고 인자 그런 때였기 때문에 그거였잖아요. 그거였잖아요. 그런, 그런 의식을 아버지도 깨주시지 않고. 두려운 거죠. 그런 의식에서 벗어나면 너는 죽는다는 그 두려움 때문에 깨주시도 않고. 어머니도 깨주시지도 않고. 아무도 그런 의식을 깨주시지 않기 때문에 저는 그런 의식으로만 하고 있다가 인자 그 중학교 때 교지 사건 때문에 뭐 새벽이니 이런 거 줄쳐놓고 한 것 때문에 왜 그래야 되느냐는 반항 때문에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의심이 들기 시작해. 이것이 바탕이었지마는 군대에 제대할 때까지도 저는 철저한 반공 반북, 그런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유지하고 있다가 동일방직 똥물사건 그 소식을 딱 들었을 때 이건 아니다, 이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건 권력이 이래서는 안 된다. 인자 여기서부터 뭔가 깨야 되지 않느냐는 그때 아마 전기가 된 것 같아요. 제 변환점이 된 것 같아요. 면담자 : 예. 그 뭐 5·18과 관련되어서 또는 이제 선생님께서 그동안 활동해 오셨던 특히 5·18과 한청련 5·18과 관련해서 쫌 활동을 해 오셨던 부분들에 관한 질문은 어느 정도 제가 다 드린 것 같은데요. 좀 이제 시간이 많이 흘르기도 하고 좀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한다는 의미로서 제가 질문을 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좀 드릴게요. 현재 선생님께서 좀 활동하고 계신 부분에 대해서 활동내역에 대해서, 활동하고 계신 부분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쫌 해주셨으면 좋겠구요. 그와는 또 더불어서 선생님의 지나온 삶에 대한 회고 아 뭐 좀 아쉬웠던 점, 아니면 뭐 좀 이런 부분은 잘 하고 내가 지내왔던 것 같애라고 느끼시는 좀 그런 생각들 뭐 그런 부분들이 있으면 말씀을 해주시고 인터뷰를 마치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술자 : 그런 부분을 운동 관계하시는 분들이 자주 질문을 해요. 저한테. 그럴 때마다 저는 정말 부끄럽, 부끄러운 것밖에 없어요. 제가 뭐 했다거나 내세울 만한 게 정말 없어요. 제가 뭐 그런 이야기하면 뭐 겸손 떤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는데 겸손해서가 아니고 사실 없어요. 실지로 없어요. 그리고 인제 제가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전부다 옆에서 같이 해주는데 얼쩡얼쩡 같이 끼어들어간 것이지 거 뭐 제가 주도한 것도 아니고 저 때문에 옆에 사람들이 뭐 하나라도 의식 깨쳐가지고 같이 한 것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그리고 이제 주로 아까 드린 말씀처럼 그 이전에 지식인 명망가 중심 운동 할 때는 저는 철저하게 그분들로부터 이제 말하자면 도외시됐던 존재잖아요. 제가 아무리 가서 어떤 모임 동포회의 같은 데 한 2,3백 명 모여 앉은 데 끼어 앉으면 고졸은 저 혼자 밖에 없어요. 그러믄 누가 박사학위 받은 양반들이 고졸한테 의견 묻겠어요? 안 묻잖아요. 그 다음에 뭐뭐 어떤 걸 결정한다 할 때 제가 의견 낸다 할 때 누가 제 의견에 경청하겠어요, 안 하잖아요. 저는 소외돼 온 거죠, 계속. 심지어는 어떤 얘기까지 들었냐면 같은 운동하는 같은 그 조직체 안에 있는 지도자분이 그때 필라 한청련을 그, 오민주 가명인데 오민주라는 분이 회장을 하고 계셨는데 그분이 어떤 지도자분을 찾아가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 과정에서 그 장광선이 그 근본도 없는 놈이 설친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 저한테 전해주는 거예요. 그 한청회장이.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까지 저 학력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고 그러기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에 제가 뭣을 했다 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사실은. 그 다음에 인제 그 후로도 마찬가지로 인제 그걸 이제 토대를 바꾼 거, 토양을 바꾼 것은 윤선생님이 하신 것이지. 다른 분이 그 이전에 시도도 안 해봤고. 그래서 우리가 한청련 결성을 해가지고 여기저기 마당집을 세울 때, 마당집을 세울 때에 선배들이 굉장히 걱정을 하신 거예요. 저한테도 걱정을 하시고. 느들 그 마당집 해가지고 어떻게 운영할라고 그러느냐, 우리가 그 마당집 필요성을 몰라서 안 한줄 아느냐, 한 달에 예를 들어서 렌트비가 이천 불 삼천 불 나가면 누가 감당할라고 그거 여느냐 걱정을 많이들 하셨어요. 그런 것 때문에 사실상 독립된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단체가 없었어요, 그 전까지는. 아무도. 그니까 이제 독립된 사무실이라는 것은, 이라 하며는 인제 각 신문사들, 신문사가 뭐 어떤 조직체의 그 본부 역할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미주민련 본부 역할 한 것은 해외한민보사. 그 다음에 인제 저쪽에 인제 독립적 역할을 한 건 신한민보사. 그러고 신한민보는 옛날에 안창호 선생이 조직했던 그분들이 남겨논 건물을 신한민보가 인연 맡아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거 인제 말하자면 또 인제 뭐 자기 그 연구실이랄지 교실이랄지 이런 것이 인제 그 사무실이었지. 독립된 사무실을 가진 조직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청이 조직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마당집을 세우는 일을 급선무로 해가지고 가장 먼저 했잖아요. 그 다음에 그걸 그 마당집에서 교육활동을 하고 선전 홍보 활동을 하고 조직 활동을 하고 모든 것을 하는 중심체 역할을 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걱정한 것들이 다 그거예요. 그걸 어떻게 유지할려고 그러느냐. 그래서 인제 뉴욕 그 청년 마당집 결성할 때도 막 선배님들이 걱정을 막 하면서 저한테 말리라고 막 그런 거예요. 저도 사실은 속으로 겁나고 걱정이 된 거죠. 이걸 어떻게 운영할까. 이걸 아주 헌신적으로 청년들이 자기 먹어야 할 끼니를 매일 한 끼씩 굶어가면서, 또 인제 자기가 해야할 일들을 뒤로 밀쳐놓고 앞장서서 어떤 크리스마스 때 같으면 출입하는 활동을 거리에 나가서 하고 뭐 꽃 파는 활동을 정말 그 거리에 나가서 하고. 이런 활동들을 해가면서 모금을 해가지고. 또 그 다음에 자기가 일을 하는 사람은 벌이에서 적어도 뭐 한 교회 십일조 이상 십 분의 삼 내가면서 마당집을 훌륭하게 꾸려나가면서 확장해나가는 것을 보면 선배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것을 마련해 줄 수 있었고 이것을 토대를 닦아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윤선생님의 그 지량과 그 다음에 국내활동에서 쌓아 오셨던 조직 활동 경험, 기초. 이론 학습, 이런 것들이거든요. 조직 활동, 조직도 옛날에 우리는 윤선생님 오기 전에 우리는 조직학습 합시다 하면, 마치 뭐 인성이 어째야 되고 조직 그 구조가 어째야 되고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해야 되고 뭐 이런 이론 학습 등을 주로, 그런, 그런 학습조차도 많이 있지 않았지만 한다면 그런 이야기잖아요. 윤선생님 딱 오셔서 하신 말씀이, 제가 제일 감동받은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그러면 조직 학습 따로 없다는 거예요. 따로 없다. 화장실 딱 들어갔는데 화장지가 다 떨어졌다, 그라믄 나오기 전에 새 화장지를 끼워놓고 나오는 거, 이것이 조직이다. 이것이 조직학습이다. 이런 학습을 시켜야 된다는 것이에요. 식사하러 식당에 딱 들어갔다. 접시 하나, 자기 딱 먹고 나며는 접시 하나 요쪽으로 옮겨줘서 그 웨이트리스들이 날라 가기 쉽게 해주는 것. 이걸 훈련시키는 것이 조직학습이고 조직교육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을 제가 딱 듣고는 정말 아, 새로운 것을 깨달은 거야, 그렇다. 바로 그것이 대중 학습이고 대중과 접근할 수 있는 것이고. 이걸 못하고 이걸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이때까지 대중 활동을 못한 거예요. 운동한단 사람들이 와가지고 식당 와가지고 그냥 고개 뻣뻣하게 세우고 밥 맛있게 먹고 모든 뒤치다꺼리는 의당 웨이트리스들이 해야할 것으로 생각하고 나가고. 또 그 사람들은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깔보면서 농담 짓거리 지껄이고. 이런 것을 하는 것들이 운동가들이 명망가들 운동 자세였다면 윤선생은 그걸 활 바꿔놓은 거예요, 느그들이 스스로 치우고 밥먹은 책상 한번 닦아주고. 이것이 운동가고 이것이 조직활동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거예요. 면담자 : 혹시 지금 활동하시고 계신 구술자 : 그래서 인제 제가 이뤄 논 것도 없지만 그 후로 계속된 활동도 사실 없습니, 제가. 조직이 차츰차츰 김영삼 정권 들어서면서부터 인제 어떻게 변질됐냐 하면 기관 활동으로 변질된 거예요. 그니까 이제 우리가 민주화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끝났다 인제 민주화됐는데, 국내 민주화 됐는데 이걸 지원할 수 있는 활동을 거의 끝났다, 그래가지고 그 이, 넘어간게 뭐냐면 동포들의 권익운동 쪽으로, 동포권일운동쪽으로 치중하게 되뻐린 거예요. 지금은 완전히 그것이 기관 활동화 되가지고 펀드 받아서 인제 동포 권익활동, 그러니까 서류 미비한 사람들 불이익을 옹호해주고 서류 갖췄다고 하더라고 법 같은 걸 잘 몰라가지고 당하는 불이익들을 해소시켜주고 이런 활동을 하주로 하게 되뻐리니까 어, 펀드 같은 것에 의존하다보니까 아무래도 인제 조국문제에 대해서는 거리감이 생겨뻐리게 되는 거예요. 이건 정치활동이잖아요, 조극 문제는.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되니까 그니까 조급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거리를 두게 된고. 그래서 조국문제에 관심있던 사람들이 대해서는 거리를 두게 되고 과거 한청활동한사람들한테 섭섭하게 생각하는 분야들이 많이 생겨뻐린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도 인제 김영삼 정권 이후로 인제 김대중 선생이 귀국을 하셨잖아요. 귀국을 하실 때 제가 우려했던 점이 그 점이었어요. 윤선생님이 들어가시게 되면 미주활동이 어떻게 될 것인가? 구심점을 완전히 잃어버리면 미주 활동이 자연적으로 와해되지 않겠느냐. 이걸 저희가 굉장히 우려한 거예요. 저희들이. 그래서 윤선생님 들어가시기 전에 각 지역 한청련한테 의견 수렴을 사셨어요. 그래서 각 지역적으로 의견을 써가지고 팩스로 보내달라, 민족학교로 보내달라 이런 청탁을 하셨었어요. 근데 각 지역적으로 전부다 찬성이죠. 윤선생님 들어가셔야 된다 그래서 국내 운동을 추동시키시고 운동을 이끄셔야한다. 이런 의견들 전부 팩스로 다 보냈는데. 필라델피아만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보냈어요. 윤선생님 들어가시면 안 된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어, 아니 세가진가를 들었는데 첫째, 윤선생님 들어가시면 미주운동이 장담할 수가 없다. 미주 운동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며는 해외 운동으로서 미주 운동이 국내운동과 갖는 관계 이 영향을 볼 때 무시할 수 없는데 미주 운동이 죽어뻐리면 국내운동에서 해외 운동 쪽의 써포트를 받을 수 있는 힘이 약화되뻐린다. 그래서 미주 운동을 계속 지속시켜주셔야 된다. 그게 첫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윤선생이 이때까지 10년 동안 미국에 계셨는데 한국에 갑자기 들어가면 국내에서 그동안 기반 닦고 있었던 운동체와의 마찰을 우리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고 그걸 염려한다. 이거 인자 두 번째 이유. 그 담에 세 번째 이유, 아무리 김영삼 정권이 민주화 정권으로 인정받고 국민들로 선택받은 정권이라 하지만 우리는 아직 김영삼 정권을 민주정권이라고 믿을 수 없다. 그러며는 그 김영삼 정권에 의해서 귀국이 되신다 하면 외부에서 오해를 받을 것이다. 말하자면 기득권층과의 타협에 의해서 귀국할 수 있었고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오해를 받으실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중점적인 것을 이유로 써가지고 팩스로 보냈어요. 그러니까 난중에 보니까는 반대 의견은 필라델피아 한 지역이더라고요, 한 지역 뿐이더라고요. 면담자 : 제가 질문 드린 것은 지금 현재 선생님께서 활동하고 계신 것인데요. 구술자 : 예. 죄송합니다. 그래서 인제 그 후로 그렇게 해서 윤선생님 돌아가신 후로 정말 그렇게 되더라고요. 인자 말하자면 조직체가 와해되고. 그러니까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상당히 빈약해져뻐린 거죠. 빈약해져버리니까 저도 조직적인 활동은 못했어요. 그니까 그 전에는 실질적으로 한청련에는 회원은 아니었지만 한청 활동은 같이 했고 그 다음에 한겨레도 난중에 인제 제가 이제 그 미주 민련을 발전적 해체를 시키고 한겨레를 창립을 했었지만 처음에는 제가 회원 가입을 안했었어요. 한겨레를. 인자 말하자면 밖에서 지탄을 좀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인제 미주 민련 소속된 한겨레에 참여 안 하신 분들은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하길 거 아니에요. 자기 조직을 해체시키고 한청으로, 아니 한겨레로 끌고 갔다 이렇게 섭섭하게 생각하신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일부러 한겨레를 처음에는 회원 가입을 안 했어요. 일 년 후에사 저는한겨레에 합류를 했었어요. 그래서 한겨레 활동은 그런 게 조직 활동을 하사다 윤선생님 떠나시고 조직들이 와해되고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조직 활동을 결성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조직 활동을 못했죠. 그니까 활동하는 게 없죠. 그 다음에 인제 에, 기냥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후원 정도에 머문 거지만 그걸 뭐 운동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거고. 그니까 저는 계속 인자 개별적으로 남어가지고 여기저기 잡다한 글이나 발표한다든지 그런 정도에요. 면담자 : 지금 뭐 특별하게 하시고 있는 것은 없으시고요. 구술자 : 없어요. 지금도. 지금도 특별한 활동은 없구 그냥 어떻게 아쉬운 것만 잔뜩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어떻게 하면 동포사회가 국내 운동을 써포트 할 수 있는 그런 그 조직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것만 지금 애타게, 애타 하고 있고. 사실상 우리가 저는 인자 처음부터 주장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미국 사람이에요. 우리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니까 저는 시민권자고. 시민권자니까. 제가 사람들을 만나서 하는 얘기가 본인 동네 어디여? 그러면 미국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을 말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필라델피아믄 필라델피아 라고 그러고 세인트 루이스라 그러고 로스엔젤스라고 그러고. 당신 살고 있는 도시 어디여? 그러믄 뉴욕이라 그러고 워싱턴이라 그러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이름을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럼 당신 나라는 어디여? 그럼 대한민국이라 그래요. 이거 모순되잖아요. 자기 동네는 미국인데 어떻게 나라는 대한민국에 되요. 모순되잖아요. 그니까 떠 있어요, 의식이 말하자면 방황하고 있는거 예요. 자기 정착지를 못 찾고 방황하고 있는 거예요. 나라는 한국인데 자기 땅은 여기니까. 이래서 어떻게 제대로 되느냐. 그러면 자기 뿌리를 심을 수 있는 내 나라는, 자기가 살고 있고 자기 자식들이 살아나갈 미국이라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미국이라는 생각부터 의식부터 바꾸자. 이거 인자 항상 제 주장인데, 그래서 저한테 누가 당신나라 어디냐 그러면 미국에에요, 우리나라는 미국이에요. 그럼 대한민국 어디냐. 조국이죠. 조국. 그러니까 내가 조국 운동을 하는 것은, 말하자면 조국 평화운동을 하는 건 뭐냐 그러면 내 아들이 미국 시민, 미국에서 나가지고 미국 시민인데 전쟁난다 그러면 총들고 나가야 될 것 아니에요. 지금은 인제 군대 나갈 나이도 넘었지만. 나가야 된다 이거예요. 그럼 누구하고 싸우냐, 한국서 전쟁난다 그러믄 누구하고 싸우겠냐, 지 사촌하고 싸워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비극이냐, 인생적으로, 인간적으로. 그런 비극은 막자.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조국운동을 하는 것이다, 라는 거죠. 내 나라기 때문에 하는 건 아니다. 저는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면담자 : 네 알겠습니다. 어 장시간 뭐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운동하셨던 이야기 저희들에게 들려주셔서 고맙구요. 그 선생님 그런 활동들, 운동하신 그런 부분들이 앞으로 향후 그, 오월운동 특히 저희 5·18 재단 입장에서 봤을 때 오월운동의 어떤 중요한 기록으로서 저희가 잘 보존하고 이걸 잘 어떻게 좀 더 활용하고 영구하게 사용할 수 있을 지를 저희가 고민을 해보고 이렇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술자 : 감사합니다. 면담자 : 장시간 고맙습니다. 구술자 : 제가 뭐 두서없이 막 떠들었지만 이것이 여러분들께 하나의 어떤 참고가 되가지고 정리할 수 있다면 저는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면담자 : 감사합니다. 예. 이상으로 장광선 선생님의 구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